2월 18일 새벽예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녹취자: 윤은정
이 예수님이 그 하늘보좌에 앉으신 의미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고 어떻게 그렇게 당신 자신이 믿음으로 그렇게 승리하실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 비결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첫째는 하늘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신 생애였다라고 어저께 하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십자가를 참으신 것이고, 또 하나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지막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를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좀 더 연장해서 보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 그리고 율법아래 태어나셔서 금생과 이생의 많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신 것부터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사신 것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주 짧게 보면은 예수님께서 못박혀죽으신 그 고유한 십자가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신 그 생애 전체가 십자가라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시고 살아오신 생애에 그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피하면은 능히 피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고 그래서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게 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해야하는 그런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이 십자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의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당해야했던 그런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피할래야 필할 수 없는 십자가였고 또 원래는 자기의 죄에서 비롯된 고난인데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 때문에 그것이 십자가로 화한 상대적인 십자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당신 생애에서의 모든 고난은 절대적인 의미의 자기 자신의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당하신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의 죄를 위해서 매달리셔야 했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의 극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매달리시고 죽으신 그 극치의 고난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마지막 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못박혀죽지 않으셨다면 그 많은 예수님의 고난어린 생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속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착한생애, 좋은 섬김 그 이상의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하나님의 아들을 재물로 하는 영원하고 단번에 드려지는 제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자신도 당신이 죽기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온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냥 참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피할 수 있는 십자가였다면, 지혜도 필요했을 것이고, 꾀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처럼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나 혹은 성품 안에 깃들여있는 그 죄 때문에 받아야 되는 고난이라고 했다면은 그것을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당하신 모든 고난과 매달리신 그 모든 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너무나 필수적인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당신에게 밀려온 그 고난을 그대로 그냥 참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도 자기의 생명을 처분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자기를 그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아버지를 향해서 울부짖으셨지만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의심했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메시야로서 당해야했던 그 고난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실 때 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믿음의 온전케 되는 역사는 오래 참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이 온전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 인내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인내할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이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고난 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자기 꾀를 의지하고 그래서 그 고난을 피해갈 궁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자신의 지혜와 방책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믿음이 온전케 되어지는 그러한 선한 일들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피할 수 없는 십자가 앞에서 잘 참으셨고 그리고 그 오래 참는 인내는 바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가 되신 이유고 또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해 주실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대상이 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 지금도 그분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의 사명 앞에서 오래도록 끝까지 인내함으로 참으며 하나님을 의뢰했는지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도우셔서 예수님처럼 온전한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그런 생애를 사심으로서 그분이 하늘보좌 우편에 앉게 되신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무슨 부끄러움이었을까요? 이것도 역시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의 수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아무나 형벌하는 그런 사형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만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서 처벌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인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누명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릴만한 일을 하셨습니까? 생명구하기 위해서 내려오셔서 자기를 내어주신 생애를 사셨는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야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실 때에 한번이라도 ‘나는 억울하다. 나를 여기에 이렇게 매달아 죽이는 것은 그 간사한 자들의 모함 때문이다’ 변명하신 적 있습니까?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잠잠히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선한 일을 위해서 죽지 못하고 악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어도 대신 죽을 때에는 마지막에 명예라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 생명을 버리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생애에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밀란을 일으킨 바라바만도 못한 천하의 죄인이라는 누명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지 않을 것임을 다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람이 당신에게 내리는 그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셨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함과 비난과 손가락질 보다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지하고 살아오신 창조주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생애를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생애는 부끄러움을 수없이 맞이해야하는 그러한 때와 상황을 많이 만납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그분을 의뢰하는 마음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모든 인생을 믿음으로 사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아버지를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직 모본이 무엇인지 보시지 못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이 아니니까요.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지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이실 뿐이시죠. 어떻게 모본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해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그 오래 참으시는 인내로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는 믿음으로서 걸어가신 그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인지를 보다 훌륭하게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종으로 낮추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보이는 세상 믿는 것 보다 훨씬 더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실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모든 고단한 삶이 끝나고 왕처럼 좌정해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온 우주를 통치하실 수 있는 권세를 이어받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