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요 1:6-8).
지난시간에 말씀드리려고 계획했던 것에 사실 반밖에 못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간사님이 전부다 타이핑을 해가지고 녹음을 풀어서 실러버스를 갖다가 놨으니까 갈 때 하나씩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편의상 지난시간에 했던 것을 잠깐만 요약을 하고 후속 강의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1:6-7) 지난 시간에는 이 세례요한을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오늘날 설교자들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문제를 말씀을 드리면서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린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요한이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직무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분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인정 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육체 속에 보배가 담겨졌다.”(고후4:7)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그 사람의 영혼 속에 담겨져서 그 담겨진 진리가 그에 의해서 선포되어질 때에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바로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것이 설교자는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사람이다. 첫째는 “증거 하러 온 자다” 그것은 증거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본 바가 있어야지 보지 않고 들은 것 가지고는 우리의 참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말씀드리면서 호랑이 얘기를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증거 하는데 무엇에 대해서 증거 하느냐 하면은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요1:8)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드려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집회를 갔다 왔는데 목이 갔어요.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빛에 대하여, “그는 증거 하되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사람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은 그의 증거의 대상이 ‘빛’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그 빛’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증거 하려고 했던 것은 여러 가지 많은 증거를 세례요한이 평생의 사역을 통해서 했지만은 그러나 그 모든 증거의 내용은 대상은 한 가지에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이 ‘그 빛’이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유의하셔야 됩니다. ‘한 빛’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빛’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설교가의 직무는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말고도 세상에 빛처럼 생각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빛이 아니지만 빛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학생들이 달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달 어린 동심에는 그 달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전달할 뿐이지 그 자신은 빛일 수가 없어요. 오늘날 설교에 보면 무엇이 문제 인고 하니 뭐 수없이 문제이지만은 중요한 문제는 뭐냐면 사람들이 그 빛이 아니라 그 빛 비슷한 것에 대해서 증거 하는 설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설교가 아무리 울려 퍼져도 설교를 다 듣고 난 다음에 설교를 다 듣고 난 이후에 그 빛이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활하면서 반짝하고 깨닫게 된 어떤 깨달음, 사람들 속에서 보게 된 어떤 성공사례들, 사람들 속에서 보게 된 어떤 좋은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런 것들을 택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세례요한이 증거 하러 왔는데 그가 증거 하는 것은 빛 같은 것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그 빛’입니다. 다른 빛이 아니라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세례요한이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참으로 우리의 선포의 제목과 초점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설교자는 빛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온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비군 정신 교육장 가보신 적 있습니까? 민방위 훈련에 가보신 기억이 있지요? 거기서도 강사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 안 믿어도 좋은 얘기만 하다 갑니다. 그죠? 빛 같은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비군이나 민방이 훈련장의 강대상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설교단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 잘 알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서도 빛 같은 것들이 이야기 되고 빛 같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선전될 수 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교회의 설교단은 빛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 빛을 증거 하도록 세움을 받은 설교단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잠시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빠졌을 때 거기는 구원도 없고, 회심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왜 설교에 대해서 취미를 잃어버리고 설교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는가?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어저께 일이었습니다. 주일날 설교를 하고 내려왔는데 대학생입니다. 그러니 뭐라 하냐면 “저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그게 뭡니까?” “저 원래 설교에 취미를 안 갖는데 당신은 꽤 열심히 하는 거 같네요.” “허” 저 칭찬하는 말인지 설교가 확신 있는 거 같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한참 쳐다보면서 오늘 아침에도 그 학생을 생각했어요. 이 친구는 듣는 사람으로선 굉장히 난감한 일이에요. “어 설교가 확신 있어 보이는데?” 그거 가지고 되겠냐는 말이에요. 확신이 듣는 사람 가슴 속에 들어와서 생겨야지 다시 한번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절망을 경험했어요.
(예화) 80년대에 어느 목사님이 서울시내에 있는 중간정도 규모의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어요. 설교가 자기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아, 대학생이 아니라 성도들을 대상으로 다 섞어서 각계각층. 설교가 자기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22%밖에 안됐어요. 나머지 78%는 설교와 자기 신앙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어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신앙이 자랍니까?”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같이 다락방에 모여서 성경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신앙이 자란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잘하든 저렇게 잘하든 잘하면 됐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선포되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나는 그 신앙과 자기네들이 성경을 펼쳐놓고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소위 얘기해서 성경 읽은 걸 나눈다고 하면서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자라는 신앙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요. 전혀 같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피상적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독서에요 독서. 여러분 꽤 깨인 대학생들 그러면은 목회자인 여러분보다 책을 훨씬 더 많이 책을 읽는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되요. 훨씬 많이 읽는 정도가 최소 한 다섯 배 이상은 많을 거예요. 일반적인 목회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래가지고 책에서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들을 다 듣고 그것으로 자기 틀을 다 형성하는 거예요. 설교해도 변화가 안 돼요. 웬만큼 강해에 가서 들부수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다가오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시중에서 범람하는 책들을 여러분 한번 보신 적 있습니까? 쭉 둘러보십시오. 다 이런 거 아닙니까? “제 여자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어떻게 데이트해야 하는가?”, “이 남자입니까” 다 여기 나오는 것들이 뭐냐면 전부다 얍삽한 내용들이에요. 다 읽고 나면은 무릎을 딱 치면서 “아하!” 그러는 책들. 사람의 영혼을 움직여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내용들이에요. 그러한 것들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포됨으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더 강단이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그 빛’에 대한 증언으로 강단이 불타오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하나님께서 19세기에 사용하셨던 위대한 설교가 중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계셨죠. 그 분의 설교를 여러분 읽어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분은 다행이도 굉장히 많은 설교를 남겼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3400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그중에 어느 설교도 중복된 본문이 없어요. 성경 곳곳을 누비고 다닌 거예요. 우리나라 이런 말하면 이상하지만요. 한번 전국에서 설교되는 설교를 다 뽑아가지고 본문을 맞춰보세요. 하는 것만 계속하고 안하는 건 절대 안합니다. 오죽했으면 어떤 목사님이 “레위기도 성경이다” 그랬겠습니까? 레위기는 설교가 안 된다는 얘기죠. 또 한다 그래도 이상하게 신비하게 영해를 해가지고 말하자면 개혁주의적인 그 말씀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대로 흐르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다니는 길들만 부지런히 다닌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그 본문 딱 피면은 머릿속에 대지소지가 다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지를 못해요. 근데 3400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하나도 중복된 본문이 없는데 그가 살아서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영혼의 숫자보다는 죽어서 그 설교를 읽다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설교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두개의 커다란 타원형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스펄전은 무슨 설교를 하든지 마지막에 그리스도 예수로 핵심이 되어져 있고 그리스도 예수로 마치게 되어있어요.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빠져있는 그러한 설교들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될 수 있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은 따라서 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같은 것들을 알리고 또 그 빛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빛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빛에 대해서 사람이 알게 하려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는 내적인 깊은 갈망과 열망이 설교 시작서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그를 사로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의 모든 증언의 핵심은 항상 ‘그 빛’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 빛’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바로 그 빛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강단이라고 하는 증언대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지난시간부터 계속 도전되는 건데 설교자는 ‘그 빛’에 대해서 목격을 한 사람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얘기하는 빛을 본 사람이라는 게 대체 뭐냐?’ 그럴 겁니다.
우리 모두는 주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각오를 했습니다. 때로는 그 결심이 흐려질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한거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조지 휫필드 목사님이 이런 애통을 했습니다. 집사 때, 그땐 집사 때도 설교를 했어요. 지금 집사하고는 물론 틀리죠. 집사 때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설교한거 가지고 대주교가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래서 휫필드가 뭐라고 그러냐면 “대주교는 기독교에 대해서 불신자만큼이나 아는 게 없다.” 무슨 뜻입니까? 불신자보다는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훨씬 많은 내용들을 알고 있지만은 그것들이 자기의 내면세계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돌고 있는 관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서 휫필드는 무슨 얘기를 했냐하면 “느끼지도 못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설교가 될 수 있겠는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증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당신이 하나님을 봤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명백하게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네가 보았느냐”라고 할 때에 우리는 명백하게 양보하지 않고 난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았습니까? 그리스도가 설교에 있어서 초점이 되고 그 빛이 말씀 선포에 있어서 핵심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설교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다 두고 설교를 해야 되겠다’ 결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새 구속사적인 설교니,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니 계속 하잖아요. 노력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왜냐하면 설교를 작성하고 설교를 해 나갈 때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 해야겠다’라고 출발하는 것과 흘러가는 대로 설교를 하자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그거보다 한 단계 높은 단계의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을 해야 되겠다.’ ‘설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어떤 그런 전제 때문에 교리적인 전제 때문에 설교 작성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내적인 깊은 충동이 그의 삶 전체를 계속해서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한 시간에 여유를 주시면 우리가 무얼 하겠습니까? 교회 재산을 정리 할까요? 자녀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할까요? 사랑하는 아내와 작별 인사를 할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 소명 받은 우리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께서 우리들에게 단 한번 인생에 마지막 시간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내적인 소명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설교를 강단 아래 내려와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내용 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뜨거운 증언으로 불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쓰게 했더니 어느 학생이 하는 말이 “교수님 우리 교회에서는 일년에 한번 밖에 십자가 설교 안합니다.” 그것도 한번 설교하는데 설교하는 걸 들어보면 설교자가 서서 “여보슈 십자가 저기 있슈 한번 가보슈” 십자가가 남의 말처럼 설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일이 나옵니까?
설교는 질서 정연하고 논리정연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설교자들에 의해서 뜨겁게 증언되고 그 말씀이 성도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증언으로 와 닿지 않는 것 그래서 그 설교 속에 ‘그 빛에 대해 증언하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라고 확신을 받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설교하는 사람들부터 그 빛에 대한 확신에 불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조지 휫필드도 역시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위대했던 설교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어요. 깊이 체험한 사람들 이었어요. 그리고는 그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위대한 사역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그 날까지 쉼 없이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조지 휫필드 목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되는 일이 없이는 설교하지 않았대요. 그러면서 캘빈도 마찬가지에요. 그 설교를 쭉 읽다 보면 그 책이 설교거든요. 설교를 쭉 읽다 보면 갑자가 설교가 뚝 끊어져서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쉽게 얘기해서 설교를 할 때에 그 심정과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깊이 들어갔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태와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에서 기도로 기도에서 설교로 바꾸어 가고 움직여 가는 것들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다 갑자기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다 그들이 그 빛에 대한 뜨거운 확신 그 빛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리고 그 빛을 자기는 많이 알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 빛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압박감을 느꼈고 부담감을 느꼈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소명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가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설교의 단에서 내려왔을 그때에도 우리가 주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고백하고 정말로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래서 그분의 광대무변한 성품과 그분의 인격을 더 깊이 우리의 영혼으로 깨닫게 해달라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들에게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캘빈주의자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뇌된 캘빈주의자, 두 번째는 경험한 캘빈주의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수주의자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뇌된 보수주의자 두 번째는 경험한 캘빈주의자. 세뇌된 보수주의자, 세뇌된 캘빈주의자는 뭐냐 하면 신학교 다닐 때부터 다른 거는 학교에서 안 가르쳐주고, 가르쳐주면 큰일 나잖아요 그것만 계속 집어넣었기 때문에 자기가 시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것만 받았기 때문에 머리가 세뇌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다른 것이 머리에 들어오면 거부감을 일으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은 참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참 보수주의자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됩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 진정한 캘빈주의자들은 우리 시대처럼 이렇게 냉랭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그들은 뜨거운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 세뇌라는 건 아주 쉽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보십시오.
(예화) 이북으로 끌려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 세뇌교육 시키는 것이 옛날에 남노당 시절 같은 때
서울대학 나온 기가 막힌 지성인들이 하루아침에 바보가 되서 김일성 동지 그러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세뇌입니다. 세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 보수주의자, 그런 캘빈주의자는 이 시대를 바꿔놓을 수 없어요. 정말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보수주의자, 진정한 캘빈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 캘빈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됐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어요. 그 비범한 예 가운데 오늘 두개만 들겠습니다.
(예화) 하나는 마틴 루터 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죠. 우선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교회의 무슨 비리를 개혁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계획 했다기보다는 개혁은 내면 속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그가 에르부르크로 가는 길에 아시다시피 커다란 벼락을 만나죠. 사람들이 옆에서 쓰러지는 걸 보면서 수도승이 되겠노라고 엉겁결에 주님 앞에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요.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마틴 루터의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면 “내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근데 마틴 루터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고 수도원 원장님에게 물어보니까 그 수도원 원장님이 “끊임없이 네가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존재로 만들어 드리는 길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을 시키는데 정말 초인적인 고행과 금식을 했습니다. 침침한 동굴 속에 들어가서 사흘씩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입에 안대고 그 축축한 구석에서 사흘 나흘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그것도 성에 안차니까 나중에는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무릎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그렇게 고행을 할 때 미사를 딱 드리면 내가 다 복종된 거 같고 이제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사가 끝나고 밥을 다시 먹고 나면 마음속에서 죄악에 대한 욕망들이 다시 싹터옵니다. 다시 자기를 쳐서 복종 시키면 수도원에서 그 사람이 항상 그러니까 동료 수도사들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더군다나 계속해서 고행과 금식 끝에 생명의 위험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를 휘텐부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거예요. 유학을 보냈을 때에 마틴 루터는 그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가며 깨닫기 시작하는 거예요.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가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 하박국서 등등을 강의하면서 내면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변화에요? 진리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와 닿음으로 그의 영혼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어요.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뭘 깨닫게 됩니까?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복음에서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1:17)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경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로마서 1장을 읽어가고 있는 동안에 하늘이 열리고 진리의 빛이 환하게 자기 영혼 속에 와서 비춰진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와 죄인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 당시에는 영광의 신학이었는데 영광의 신학을 포기하고 그는 십자가의 신학을 선택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티끌만도 못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에요. 그게 ‘만인 제사장의 교리’에요.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이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굳게 믿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전해주셨던 사도적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 앞에 만인이 동동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에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다시피 여러분 예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19살에 그 학교 교수가 됐어요. 천재였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조상들은 자기에게 뭐라고 알려 주었냐면, 조상들은 퓨리탄들 이었거든요. 그 당시 캘빈주의자들 이었어요. 뭘 가르쳐줬냐 하면은 ‘인간은 죄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쳐줬어요. 이 천재에게 이게 이해가 갑니까? 무슨 소리냐? 인간에겐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인간보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하실 수 있다면 모르지만 인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엽을 감아 놓았을 때 가만히 움직이는 이 꼭두각시 인형 같은 존재냐 있을 수 없다.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알미니안주의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들판을 산책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의 말씀을 그에게 들려주셨어요. “홀로 한분이요, 썩지 아니하실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 권세와 영광이 세세와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들려주시면서 그는 천국의 광채가 그의 영혼에 비치는 그러한 깊은 영적인 체험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때 그가 고백한 말이 뭐냐면 “나는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그러므로 그는 엄격한 캘빈주의자로 신학적인 대 선회를 했어요. 그게 진정한 캘빈주의자입니다.
캘빈주의 보수주의면 뭐합니까? 체험이 없는 캘빈주의는 눈앞에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교리 포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역사를 읽어보십시오. 요새 순교에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죠? 한번 읽어보십시오. 교회 역사, 순교의 역사를 쭉 읽어 보면은 그 순교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에 순교를 했던 사람들은 머리로 알고 입술로 아는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어요.
폴리카베일을 기억하지요? 사도요한의 제자, 그리스도를 한번만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말했어요. “내 이제 86년을 살아서 그분은 86년 동안 한번도 내 이름을 부인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의 이름을 부인하고 죽을 목숨을 위하여 살겠느냐.” 화형 당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세뇌된 보수주의, 세뇌된 교리주의는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노회나 총회에서 싸울 때 목청은 높일 수 있지만은 진리를 위해서 죽겠느냐하는 칼날이 목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보지 못한 것을 위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만지지 못한 것들을 증언하기 위해서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초대교회 순교했던 위대한 순교의 역사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크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란의 날이 혹시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그러면 누가 진짜 보수주의자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빛에 대한 설교자의 경험, 설교자가 그 빛을 만나고 더 높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광대한 인격을 더 깊이 체험하는 이런 일들이 매일 매일의 기도의 골방과 그의 섬김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는 항상 같은 폭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럽지만요. 우리 한번 냉정하게 같이 질문해 봅시다. 분명한거 하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가기 합당한 사람들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성화 되다 성화 되다 끝까지 성화됐는데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러주는데도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치 않아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영화”시킵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마지막 서장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젊은 사람들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재밌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우리 복음에 대해서 같이 공부합시다. 그러면 “복음은 다 띄었습니다.” 띄긴 뭘 띕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그 크기와 넓이가 얼마 납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광대하신 그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큰 태산의 귀퉁이를 잠깐 만지고 있는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설교를 계속 하다보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우리 함께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1년 전 보다 나는 확실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나? 전에는 몰랐던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고 변화를 받게 되었냐는 거예요. “허, 꽤 여러해 전이었어.”
(예화) 지금으로부터 한 7년 전인가 교회에 갔습니다. 나이어린 여선생이 있었어요. 근데 인사를 하는데 “일주일 잘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서로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한테 하는 말이 뭐냐면 “전도사님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 예, 참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잘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질문을 하냐 하면은 “전도사님 지난 일주일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롭게 더 마음으로 깨달은 것 있습니까? 나한테 좀 알려주세요.” 그런데 그게 교역자를 시험하려고 묻는 교만한 질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질문이란 게 마음에 다가와요. 너무 너무 당황했어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으면 우리의 설교는 새로워 질 수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 우린 설교하는 설교자들께서 그런 말씀 서로 주고받죠? “아, 목회는 한 교회에서 딱 3년만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3년마다 로테이션 한다면 날마다 신선하게 목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훌륭한 설교가들은 그리고 주를 위해서 살았던 정말 정직한 참 말씀의 종들은 끊임없는 생수의 샘을 길어냈어요. 끊임없이 흘려보냈어요. 성도들이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말씀의 샘은 마르지 않는구나!” 길어냈습니다. 계속 퍼 줘도 퍼줘도 속에서 끊임없이 고여서 마치 어머니가 그 철철 넘쳐흐르는 젖을 어찌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듯이 이 속에 고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퍼내고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의 샘을 그들의 영혼 속에 지녔던 사람들이었어요.
(예화) 저는 지는 주간에 존 길리스라고 하는 사람이 17세기 영국의 글라스글 교회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이 계세요. 제가 강의 끝나는 날 책을 몇 권 죽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만 그분이 1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일어났던, 물론 그분이 17세기까지만 하고 죽었죠. 그 다음은 후대에 되었는데 일어났던 모든 위대한 영적인 부흥들을 전부다 모아 놨어요.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생애를 이렇게 읽어볼 때 정말 눈물이 나요. 어떻게 학처럼 그렇게 고고하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을까? 한 교회에서 54년을 목회했어요. 그리고 다른 교역자에게 물려주고 그가 성찬 때가 되 면은 와서 성찬을 집례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하는 자기의 교우들과 둘러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사람은 뭘 얘기했냐하면 “여러분 이제 내가 매일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주님 앞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낙원에 여러분보다 먼저 가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가 그곳에서 만납시다. 주께서 곧 나를 부르실 것 같습니다.”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고 성도들은 흐느껴 울었어요.
무엇이 끊임없이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설교자의 인격을 고매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가 별겁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우리 속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과 똑같은 소망, 죄악을 향한 욕망들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그러한 욕망들이 우리 삶을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강단에 오점을 남기는 실패한 설교자들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붙잡아 주실 그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께서 손놓으시면 어마어마한 교회의 당회장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류 신학교의 교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날에 위대한 일을 일으켰던 이력을 가진 설교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금 수많은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 사람도 오늘 주께서 그 손을 놓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그의 설교의 초점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무엇이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본문을 택하든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느냐 그것은 그의 인생과 삶, 영적인 내면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예수를 만나는 것이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최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설교의 중심 자리에 들어 올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한 겁니다. 눈 뜨고 일어나서 신문 보는 사람은 설교 시작 항상 정보사 땅 투기 사건 그러고 항상 설교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펴는 사람은 항상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에 자기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은 무슨 설교를 해도 ‘기도하라’ 그러고는 설교를 끝맺습니다. 제자훈련 좋아하는 사람은 마지막 무슨 설교를 해도 끝날 때 훈련이란 말 한번은 해야지 속이 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저 설교하는 그 사람의 인격이 뜨겁고 열정적이면 설교도 뜨겁습니다. 사람이 냉담하고 흥분하지 않으면 설교도 냉담합니다. 그 사람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처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의 설교도 한 맺힌 듯이 나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무슨 방법과 재료들을 찾으러 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학생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설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변하는 것 밖에 길이 없다. 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자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하나의 소리 나는 관과 같이 때문이에요.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물론 방법이 도움이 됩니다만 그러나 삶의 중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그런 빛과 만나는 사건이 매일 되풀이 되지 않을 때 어떻게 주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에 핵심에 그분이 올 수 있겠느냐 사람마다 설교를 준비를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만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준비한 방법의 예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증언이 그의 모든 삶 한 가운데 오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화) 그는 원고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고설교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나 다른 훌륭했던 목사님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10년 정도내지 능력에 따라 틀리지만 10년 정도까지 설교준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년 정도까지는 죄다 원고로 준비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문장력이 붙고 표현력이 늘어납니다.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그 다음서부터 찰스 피니 같은 사람들 설교한 다음에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그걸 잊어버릴까봐. 성경 본문 말씀을 죽 읽은 다음에 내가 뭐에 대해서 설교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은 평소에 성경 읽은 것은 그냥 읽는 거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쭉 성경을 읽고 그리고 예를 들어서 ---- 그 다음에는 부인이 퇴장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서재에 엎드리는 거예요. 1장 6절에서 뭘 설교해야 될지는 뭘 뒤지고 막 카드를 만들어서 쓰고 그건 논문 작성이죠. 쭉 머릿속에 워낙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많이 만났고 그랬기 때문에 문제는 뭐냐 하면은 전해야할 메시지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그것을 가슴에 불붙이는 작업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깊이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언제 이뤄지느냐 하면은 토요일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토요일 날 저녁때 깊이 기도하면서 그 말씀이 성도들에게 뭐라고 해야지만 깜짝 놀랄까가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해주시길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을 쭉 묵상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시간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간이었어요. 기도하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 깨어질 건 깨어지고 그리고 회개할 건 회개하고 그러면서 기도하고 나면 마음속에 결정체가 되서 살아남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주일날 아침이 되면 아무도 안 만나고 새벽서부터 다시 한번 엎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떤 때는 그게 마음에 이 생각 저 생각 오락가락하고 그것이 가슴에 새겨지질 않는 거예요. 그 당시에 심정을 가지고 자기 부인에게 뭐라고 하냐면 “여보 나는 이 시간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데 도저히 주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덩어리가 되서 새겨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꼭 사냥꾼의 옆 총에 맞은 짐승이 계곡 사이에 쓰러져서 신음하는 거처럼 그 말씀 사이에 얼굴을 묻고 신음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시기를 기다린다. 그는 말씀이 자기의 가슴에 불이 붙은 거예요. 그 다음날 자신 있게 담대하고 능력 있고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랬었기에 그는 성경 속에서 늘 무슨 말씀을 만나던지 거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까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설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빛에 대한 경험으로 나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 그리스도에 대한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 증언의 핵심은 항상 ‘그 빛’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빛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목격한바 그 그리스도라는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지금 증인이 나와서 증언을 하는데 판사와 모든 변호인단과 검사의 관심은 이 사람이 피고가 범죄 하는 것을 봤느냐 못 봤느냐 그것을 말하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열 두 시간씩 변호를 했는데도 그 현장에서 그를 봤다 못 봤다는 말을 안 한다면 그게 무슨 증언이냐는 겁니다. 그 무슨 필요가 있는 겁니까?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인데 이 한편의 설교가 한번의 증언인데 그리스도의 증언이 빠진 설교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가슴을 쳐서 그를 중신케 하고 죄를 책망케 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는 이러한 위대한 역사들이 교회에서 그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지만,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뤄지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뤄져야만 회개도 일어나고 변화도 일어나고 중신도 일어날 것 아닙니까? 아무리 논리정연하고 재치가 넘쳐도 그것이 그 빛에 대해서 아무것도 증거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증언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빛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빛에 대해서 증언하고 그 증언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그들의 가슴을 때릴 때 사람들의 영혼은 변화하는 거예요. 자유주의자가 변하여 보수주의자가 되고 방탕한 사람이 변하여서 절제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한편의 설교를 들은 다음에 우리는 무슨 설교를 들었든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야 됩니다.
판사가 재판을 하는데 그가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까? 그가 뭐 범죄에 전문갑니까? 그렇지 않아요 가본적도 없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안다는 것은 법을 많이 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무엇을 통해서 판결을 내립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판결을 무엇을 통해서 내립니까. 증언을 보는 거예요 증언, 증언을 통해서 그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증인이 증언을 하고가면 판사의 마음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증인이 결정적인 거예요.
설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번 설교를 들었을 때에 성도들이 ‘아! 내가 알던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구나!’ 자기가 잘못 알았던 오류가 뒤집히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았던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깊어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인식에 지평이 점점점 확장 되어져가는 일들이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그들이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운명이 달린 기로에 들어서게 되는 거예요.
보세요.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길이요, 그 빛이요, 그 진리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그리스도가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그리스도가 설교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설교 속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결단하라고 만날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무엇 앞에 결단해야 될지를 잘 모릅니다. 증언을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리스도가 길인 것에 대해서 선포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이제 것까지 걸어왔던 것이 길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두 양자 사이 선택에 서게 됩니다. 한쪽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고 한쪽은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그 길목에 자기가 서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존에 자기 자신이 결단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때에 그때에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대한 증언이 설교 속에서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걸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것은 빛을 본 경험이 희박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빛에 대해서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빛을 목격한 사실이 나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고 있을 때, 목격한 그 빛과 빛을 만난 사건에 대한 경험이 오래도록 남아서 그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뚜렷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까 얘기한데로 빛에 대해서 증거 할 때 그리스도가 저기 있으니 가보라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은 유능한 교회 정치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순 없지 않습니까? 그의 가장 큰 재산은 능수능란함도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설교자로서의 가장 큰 재산은 이 세상에서의 학벌이나 학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요즘 교회가요, 상당히 큰 교회가 강단이 많이 비어 있는 거 여러분 보시지요? 의외로 올 사람은 많은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금 큰, 꽤 규모 있는 교회들이 생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왜? 아주 유능하고 아주 학식이 높은 목사님들을 목회자로 영접할 때에 교회가 크게 부흥할 것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떠가고 있어요. 공부를 했기 때문에 목회를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외부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세웠던 교회들이 많이 실패를 봤기 때문이에요. 진실한 목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진짜 뭐 사람들 얘기할 때 몸 하나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저는 설교자를 가리켜서 ‘영혼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요. 영혼 속에 담겨져 있는 성도들이 깨닫고 느끼지 못하는 놀라운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광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요즘 장로님들이 전도사 혹은 아니면 목사님들을 견제하고 줄다리기를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또 특별히 강권적인 독재 밑에서 숨도 못 쉬었던 그런 교회들은 목사님들이 자리를 뜨신 그 다음에 후임 교역자가 올 때에는 꽉 잡아야 된다는 논리가 유행되고 있어요.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심지어는 교회 운영은 당회 장로들이 하는 거고 목사님은 고용 사장처럼 월급 받고 자기 할일만 하는 그리고 기본적인 대우를 해주는 이런 관계가 되어있는데 이런 관계가 말입니다 강단이 능력 있으면 이런 관계가 지속될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을 그런 식을 생각해주고 마치 자기가 고용주가 되고 고용사장을 고용해서 월급을 주는 거 모든 월급을 주고 뭐 하는 것이 자기 손에 달린 것 같이 심지어는 거취문제까지 자기들의 결정에 달린 것 같이 그런 방자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겠어요?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자기 죄악을 심령을 쓸어 엎어서 통곡하게 만드는데 어떻게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들고 그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위대한 능력들이 사라져감으로 주의 백성들은 방자해져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적인 논리와 인간적인 수단으로 대적할 때에 교회는 쪼개지고 그 속에서는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고 분쟁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 있게 살아서 가슴속에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그 앞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디 그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동역자로서 말합니다. 제 자신이 추어도 무슨 우리들을 교회가 대접 안 해주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대접 못 받으면 더 좋아요. 여기서 다 대접받으면 하늘나라 가서 뭐 받겠습니까?
(예화) 엊그제 집회를 갔었어요. 의대생 수련회를 갔었는데 거 돈 많은 사람들 아니에요? 돈 많은 사람들 한 350명 모였대요. 전국의 의대생들이 강사보고 아침 먹으러 오란 소리도 안 해. 할 수 없이 밖에 나가 사먹고 왔어요. 자기네들은 수박도 사먹고 참외도 먹고 그러면서 내 돈 주고 다 사다가 음료수까지 내 돈 주고 다 사다가 먹었어요. 나중에 슬리퍼 빌려주는데 나중에 그 슬리퍼도 도로 찾으러 왔어. 그런 거 하나도 안 섭섭합니다. 가서 귀빈대접 받고 오세요. 하늘나라 상급 가불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대접도 못 받았으면서 정말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눈물 흘린 것을 내가 안다. 상급 주실 것 아니에요? 이 땅에서 대접 못 받으면 우리 그만큼 상급 받는 것에요. 목돈 타는 거야.
그러나 제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정말 성도들이 선포되는 말씀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 진리의 말씀이 인격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그렇게 대접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서운한 것이 되서 또 설교하러 오라고 할 때 ‘아 그 교회는 뭐 사례금도 조금 주고, 슬리퍼도 뺏어가고 안 간다.’ 그럼 안 되겠죠. 이 문젠 뭐예요.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백성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삿21:25) 사사기의 마지막 결론이에요. 주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일들이 그쳤을 때에 백성들은 고개를 들고 각자 저 잘랐다는 겁니다. 말씀의 권위, 그러는데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가 인정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정말 교회 왕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 안 한지 오래됐습니다. 당회 할 때 장로님들이 핏대 세울 때 목사님들이 말씀을 탁 펴놓고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왜 얘기 못합니까?
(예화) 박윤선 박사님은 총신에 계실 때 교수회의 주제할 때 항상 성경 옆에 놓고 교수회의 주제하셨어요. 문제가 나오면 “성경을 봅시다.”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적인 왕 같아요. 왕관도 씌어져 있고 왕궁도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온통 싸워. 그리스도의 왕 되심 인정치 않아요.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설교가들 속에서 이런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불꽃 튀기지 아니함으로 사람들은 설교자의 증언 속에서 설교자가 삶과 그의 인격과 그의 영혼과 성품과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서 오직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고 부복하고 있다. 라고 하는 엄숙한 삶의 현장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성도들이 우리 앞에 방종한 것은 우리가 증거 하는 말씀 앞에 방종한 것인데 그것은 먼저 우리들이 깊이 돌아봐야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도들이 설교자를 볼 때에 저 사람은 다른 건 내가 모른다. 정말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하나 말할 수 있다. 저 사람은 그 빛에 붙잡힌 사람이다.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죽으라고 하면 정말 죽을 사람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너 이 성도들 사랑하지 말라고 그러면 야속한 얘기지만 우리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갈 사람이다. 그분에게만 묶여있다 라고 하는 것들이 성도들에게 느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그 빛만이 우리의 갈 길이라고 외칠 때 성도들의 가슴이 설득되고 변화되는 거예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성취코자하는 목표에 얼마나 묶여있는지 아십니까?
(예화) 우리나라에서 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뭘 얘기 하냐면 피를 두 사발을 쏟아야 비로소 창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폭포 속에서 노래를 불러서 목소리가 4Km를 가야 된다는 거예요. 피 눈물 나게 자기의 목표에 매어있습니다. 요 앞에 현대 자동차 있잖아요. 이렇게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니까 이따만 하게 현수막을 걸어 붙였어. 그게 뭐냐 “대전시에 수요자를 석권하자! 현대 자동차 만세!” 자동차 파는 일에도 이렇게 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매인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매인 사람들이라 말 할 수 있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큰 유익을 보았던 기도생활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기도를 할 때에 한 15분 정도는 기도를 안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그의 지상에서의 삶도 괜찮습니다. 갯세마네 동산에서 보리떡을 먹이시는 장면 그가 백성들에게 반대를 받으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장면,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십자가가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깊이 생각할 때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는 걸 경험했어요.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사는 날 동안 어찌하든지 나의 인생이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여러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 뜨고 일어나면 세속의 욕망이 제 가슴을 지배합니다. 정말 세속적인 생각이 내 영혼을 지배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옛사람의 소욕이 또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녁때 고요히 눈을 감고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내 생각 할 때에 붙었던 세상에 대한 욕심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때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한 여섯 달 정도, 일곱 달 정도 십자가에 대해서만 쭉 설교를 했습니다. 길거리로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려요. 그 이유는 뭐냐면 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까 왜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그리스도를 전해도 이 그리스도 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는데 사람들이 왜 그 빛에 대해서 알지 않을까. 가슴이 녹아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도 깊은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이 우리 마음을 먼저 녹이시는 일들이 있어야지만 설교 속에서 성도들을 녹일 수 있는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설교한 후에 성도들과 함께 눈물로 얼룩져서 나를 용서해 달라고 고백을 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얼마나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겠습니까?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빛’에 대한 증언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시고 주님 우리는 그 빛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설교하든지 항상 우리의 증언의 핵심 속에서 그 빛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교만하며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교회당을 밟아도 그들은 회심치 아니하였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주를 만나는 놀라는 신앙의 감격이 날마다 기도의 골방 속에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같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자기를 인하여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요 1:6-8).
첫 시간에는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다.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는 사람, 그 다음에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사람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빛이 무엇인 가에 대해서,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서 빛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세 번째로서 그의 증거의 목표는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이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 보고자하는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7절에 보니까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랬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자기를 인하여’라는 말을 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 온 목적은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 목표에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왜냐면 누구든지 그 요한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생각을 좀 많이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쉼 없이 설교 합니다만은 우리의 설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설교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대단히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의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에 대한 목표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생각을 좀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말씀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목표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거죠 목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시는데 설교를 할 때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설교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설교자의 일차적인 직무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어 그들이 구원받게 하는 데에 설교의 목표가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보면은 오히려 설교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목표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신앙을 북돋우어주어야 하겠다는 그러한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이 두 가지는 같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문젠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세상은 구원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약에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설교는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무슨 얘기냐면 365일 설교를 들어도 정말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자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영혼을 어찌하든지 구원해야 되겠다는 이런데 초점이 맞춰진 설교들이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전도 설교가 심히 약화 돼있다는 겁니다. 전도 설교가.
김진홍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대요. 한번 간증을 듣는데 이제 예수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서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 ‘주님 오늘 수요일 저녁인데 내가 교회 갈 텐데 정말 내가 예수 믿기를 원하시면 나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고 예배에 들어갔는데 성전 건축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더래요.
그런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계속 들어오고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교회 나옴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가운데 불신자, 형식적인 신자임으로써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신학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영혼을 염두에 두면서 어찌하든지 이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들이 십자가 앞에 결단함으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염원에 불타는 전도설교가 365일 계속 될 수는 없겠지만은 상당히 자주 교회 속에서 선포되어져야지만 교회가 바로 구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두 갈래의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을 드려서 하나는 전도설교를 안 하는 이유는 새 신자가 나와야 설교를 할꺼 아니냐는 얘기죠?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 설교를 바꾸면 새 신자가 나온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사람이 와서 구원을 받게 되고 그들이 거듭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된다는 소문은 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 시간과 둘째시간에 제가 세례요한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그는 광야에다 개척을 시작한 사람인데 도외지에서 전부다 광야로 나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역시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고 능력 있게 선포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기뻐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에 능한 재능을 가진 설교자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보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구원에 관한, 구원에 관한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구원받게 만드는 그런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를 행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성도들에게서 구원에 필요성, 그리고 뚜렷한 회심의 중요성,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점점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자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는 문제가 적을 수 있습니다 만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구원받고 못 받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운명에 차이가 이뤄질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그 설교를 수없이 들었던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겠느냐..
근데 인제 문제는 좀 심각합니다. 뭐가 심각하냐면 구원에 문제는 우선 차제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설교자들이 설교단 아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심각한 죄인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돌이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긴박감, 이런 것들이 점점 약화되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1900 몇 년도대 얘긴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50년대, 60년대 얘기입니다. 그래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설교를 하셨답니다.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다 끝나고 내려 올 때에 거기 학장 사모님이 계셨답니다. 설교를 끝내고 내려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이 연세 많으신 사모님이 말씀하시는 게 뭐냐 면은 “목사님 제가 이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온 지가 한참 됐는데 매주 채플에 참석했습니다만 여기 앉아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설교하는 목사님은 당신이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설교하라고 초청을 하니까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곳 거기서 내가 꿇리지 않으려면 무슨 설교를 해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들이 차있는 거예요. 그런 곳에서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뭐냐면 사람이 내 설교가 다 실패한 것 같다고 믿더라도 정말 복음이 제시되면 구원은 거기서 일어납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제가 4월 달이었습니다. 이런 간증을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전 하도 인상 깊었어요. 4월 달에 연세대학교에서 설교를 하러 와달라는 초청이 있었어요. 거기가 뭐하는 무슨 모임이냐 그랬더니 선교단첸데 학교 안에 안 믿는 친구들 초청 해다가 예배를 드리는 자리래요. 그 뭘 설교해야 되나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뭐 새 친구들 초청하는 자리라니까 믿지 않는 친구들 예수 믿게 만드는 거.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하다가 정말 저로서는 큰 모험이었지요. 전도를 위한 설교를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뭡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했어요. 하기로 갔어요. 그런데 그 설교를 할 때 제가 몇 번을 했습니다. 한 4번, 3번 한 4번 정도했는데 설교를 갔는데 그 중에서 두 번 정도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 하셨어요. 정말 그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났는데 제 마음 속에 드는 회의가 한 가지 있었어요. 과연 지성인들이 지옥을 이야기를 할 때 믿어주겠는가. 갔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그 예배를 드리는 게 공대 건물이에요. 첨단 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도들이 공부하는 그 공대 건물이에요. 본문을 탁 피니까 사람들이 한 50명 정도 모였어요. 설교를 쭉 지옥에 대해서 하는데 막 일어나서 가요. ‘지금 계명한 천지에 지금 당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무슨 놈의 천지에 지옥에 불이타고 뭐,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와가지고는 뭐라고, 뭐라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거리더니 한 사람씩, 뭐 시간도 없으니까 설교를 하든 말든 자기들끼리 그냥 가요. 하나 둘 한 열명을 빠져나갔어요. 설교를 하는데 너무 너무 힘들어,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아요. 설교를 다 마쳤어요. 한 50분 정도 설교를 했어요. 그 지옥이 있으니까 예수를 믿으라. 그 결론이 그거였어요. 지옥이 캄캄한 곳이고 불길도 있고 마귀도 있고 다 있다. 그래서 지금 부자가 지옥에 가서 지금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지 않으냐 설교를 했어요. 그 받아드리는 사람이 없어요. 설교를 하고나면 자기가 잘 알잖아요? 그래서 ‘아 오늘은 죽 썼구나.’ 이러고 오는데 나를 초청한 자매가 쫓아와서 위로를 하는 거예요. ‘참 사람들이 아이참 거.. 어떠셨어요?’ 그래서 ‘ 아 난 집에 갈 면목이 없다.’그러니까 ‘그래도 일단 여기 와서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신 분은 당신이 최초일 겁니다. 일단 들었으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도 이 사람들은 핑계를 못할 겁니다.’ 저한테 위로를 하는 거죠. 2주일이 지났어요. 그래서 잊어버렸죠. 근데 전화가 왔어요. 아 꼭 만나 뵙고 할 얘기가 있대요.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대요. 다 안 들었는데 두 사람이 그 설교를 듣고 믿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를 영접했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뭐냐면 똑같은 지성인 학생들인데 자매하나가 있었는데 뭐라 그러냐면 자기는 그 설교를 듣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다 웃긴다. 그러고 나갔는데 자기는 그 설교를 듣는 순간 20년 동안 예수를 안 믿으면서 인생에 있어서 궁금했던 모든 모순점들이 한꺼번에 뻥 뚫리는 것 같았대요. 지옥이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열심히 나와서 바이블스터디 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해요? 말씀은 곧 성령의 검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뭐예요? 우리가 말씀의 칼을 계속해서 뽑아 놓으면 성령이 사용하세요. 그래서 필요한 사람의 영혼을 찌르사 그를 거듭나게도 하시고 회개도 하게 하시고 돌이키기도 하신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교인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설교자들은 마땅히 아주 자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설교를 반드시 해야 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비슷한 형편이라고 생각이 되어져요. 전도설교를 해야 되겠다 그러고 마음을 먹고 쫙 전도설교로 뭘 할까 할 때 정말 가슴에 절절히 붙이 치는 설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에 곰곰이 서재에서 눈을 감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앞에 3천명의 불신자들을 쫙 앉혀놓고 일단 그들이 1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준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설교하겠는가. 정말 내 가슴 속에는 가슴에서 끓어올라서 이들에게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 그것을 듣고 저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메시지들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가를 검토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우리끼리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긴데 강단에서부터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찰스피니 목사님은 메나탄 거리를 걸어가다가 주일 아침, 아니 보통날 아침 출근 시간인데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되 뇌였냐면 ‘저 사람들 하나님 어떡합니까?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려서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는 우선 둘째 치고 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강단에서 사무치면 반드시 구령을 위한 설교가 터져 나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지 아시겠죠? 강단에서 구령을 위한 설교가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강단에서 외치고 있는 설교자 개인의 가슴 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들이 자꾸만 말라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뼈아프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거라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주께서 생각하시며 길을 나서는 것이 주님의 심정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약에 구령에 열정에 불탄다면 그러면 반드시 우리들의 눈에는 구원받지 못한 형식적인 신자들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긴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열정들을 정말 회복시켜 주셔야 될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인하여’ 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빛에 대한 증거를 듣고 예수를 믿게끔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주를 찾는 자가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없던 그 시대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말할 때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말할 때, 요한 자기를 인하여 라고 말하는 대신에 왜 오늘 요한복음 1장은 성도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통하여, 혹은 간증을 통하여, 혹은 찬양을 통하여, 혹은 신방을 통하여, 혹은 교육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고 설교자이고 선지자인 세례요한 그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지 우리는 주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믿지 않는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씨앗을 뿌리게 하는 이 가장 중요한 역할들은 찬양이나 신방이나 교육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라는 겁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들을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선포를 듣고 회개할 때 즉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를 믿고 5년 10년이 지나도 전도를 잘 못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전도훈련이라는 것을 시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상당히 배울 만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 아시죠? 전도폭발 쓰신 분, 아시죠? 아세요, 모르세요? 아시죠? 그분의 간증을 들어보면 굉장히 감명 깊어요. 그렇죠? 100명 정도 목회하는 교회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로 부임을 했는데 몇 년 지나니까 다 떨어지고 17명 남았답니다. 어느 날 주일날은 사모님이 여보 “나 다음 주부터 이 교회 안 나올래.”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누구 교회냐?’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나오고 저 옆에 침례교회 나가겠다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러니까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는 내가 아무리 사모라도 답답해서 못 보겠대요. 그래서 사모님이 딴 교회로 가버렸어요. 그런 사모는 또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이를 악물은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 목장에는 양떼가 이렇게 줄어듭니까? 서재에 앉아서 이론서들을 보고 그걸 쓴 게 아니라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면서 가가호호 전도하면서 체험으로 그걸 쓴 거예요. 지금 현재 17000명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대요.
그런 방법도 써 볼만해요. 그러나 여러분 그게 궁극적인 해결은 안 된다는 거죠. 다시 말씀드려서 왜 평신도들을 그렇게 훈련을 시키는데 전도폭발을 하는데 성공하는 교회만 성공합니다. 아무 교회나 다 성공하지 않아요. 그 머릿속에 앉아서 가만히 숫자 계산으로 할 때는 기가 막히거든요. 새끼를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면 와 이거 뭐 오, 육천 명 교인되는 거는 잠깐이거든요. 사실 그렇게 안돼요. 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이 기술이나 훈련으로 되어질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한 겁니다. 내면적으로 큰 변화를 받아서 복음에 열정에 근본적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 방법이 유용한 것이지 그런 것들이 없이 무슨 회사에서 연수교육 시키는 식으로 교육을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전도해서 영혼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떤 순진한 발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전도하고 살아가는 이러한 선교적인 삶은 바로 영적인 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끊임없이 그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끓어오르는 구령의 열정으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일들이 결핍된다면 그것들은 방법으로써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냐면 ‘초대 교회에 그렇게 개인 전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너희 교인들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 개인 전도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까진 맞아요. 그러나 교인들이 그렇게 개인 전도를 해서 많은 영혼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휙휙 움직이지 않습니까? 마치 기차가 움직이듯이 움직일 때 맨 앞에서 기관차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물론 성령이시지만은 그러나 맨 앞에 기관차처럼 움직이고 있는 선두에 선 것은 역시 평신도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의 소문을 내어서 그들이 예수 믿게 만드는 그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였던 거예요. 사도들이 외칠 때 불신자들이 꺾어지고 그리고 지옥의 문들이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일단 사람들이 파송이 되어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할 때 예수 믿게 만드는 역사가 일어난 거죠.
그래서 헬라어 성경에 보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두 가지로 나와요. ‘켈리소’ 그 다음에 ‘유 앙겔리좁나에’ ‘켈리소’는 선포하는 겁니다. 설교로서 선포하는 거고, ‘유앙겔리좁마에’는 소문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수군수군 모여서 복음의 소문을 내는 거죠.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같이 만날 때에 영혼들이 변화되는 거죠. 쉽게 얘기해서 복음을 개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 그들이 데리고 온 사람, 그리고 또 그렇게 전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설교에 큰 권능이 나타났을 때 전도자를 통해서 확실하게 영혼에 와 닿지 않던 말씀의 권능이 모여온 모든 초 신자들 아니면 전도 받아가지고 온 사람들의 가슴을 때릴 때 그럴 때에 정말 편만한 구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평신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 정말 초대교회 때처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곤란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방법이 되는 교회는 되고 안 되는 교회는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걸 통해서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는 교회는 아주 소수에 불과해요. 그러므로 그러한 방법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평신도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훌륭한 방법이지만 그러나 교회 전체를 어거해가고 교회가 말하자면, 쉽게 얘기하면 이거죠. 특공대들이 적진에 투하 되가지고 소총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싸워서 한 두 사람을 쓰러트릴 순 있지만은 그러나 그 다음에 특공대들이 가서 지점을 알려주면 무슨 일들이 있어져야 되요? 집중 포격을 퍼부어가지고 융단포격을 해야죠. 그래서 중요한 말하자면은 건물이라든지 요새들을 폭파하는 일들이 있어져야 하잖아요. 무엇이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질 때 그런 일들을 하는 거예요. 보세요.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다가 벽과 난관에 가끔 탁탁 부딪칩니다. 그렇죠? 사도들이 크게 핍박을 받아가지고 복음 전파가 일단 정지하는 4장의 장면이 나오죠? 그때에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까? 사도들이 외치고, 그 외침을 듣고 사람들이 기도할 그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얘기하는 그런 사제주의 같은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강단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어거해 가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확신을 저버리면 정말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신방을 한다, 병자를 문안한다, 교육을 한다, 등등등등 많은 것들은 행정을 한다, 구역을 편성한다, 년도를 계획을 짠다. 등등, 누구누구 인물을 등용하여서 사람을 세운다. 이런 것들은 소명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훈련을 잘 받고 달란트가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에서 가장 신방을 잘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이 목사님이 가장 능하십니까? 목사님에게 신유의 능력이 없고 평신도에게 신유의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쉽게 얘기해서 병자에게는 목사님이 몇 번 가는 것보다 이 사람이 한번 가서 병 낫게 해주는 것이 더 유용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이 고린도서에서 말씀하기를 은사의 많은 것들을 얘기하면서 지혜의 말씀을 가장 첫 자리에 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나타날 때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들을 볼 수 있어요. 교역자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갖거나 ‘아 우리 목사님은 100번 신방해도 소용없어 내가 가서 안수해야 돼’ 또 교역자의 입장에서는 나는 못 고치는데 저 사람은 고친다. 그런 거 열등의식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뭐예요? 그 충만한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사모해야죠.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것들을 갈망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많은 은사들이 각양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워줄 수 있어야 되요.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거의 훈련이 안 되어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쇼. 그들이 비록 어떠한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들이 선포할 때 그때에 그 말씀이 파도처럼 밀려가서 자기가 깨닫지 못하던 말씀의 뜻을 열어주고 그 말씀 앞에 자기들이 자복하게 되었을 그때에 그 무슨 은사가 하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지혜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고 말씀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외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건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선지자, 혹은 설교자인 요한을 통해서 주를 믿지 않는 세상에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반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교인들에게 믿음을 심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대답하지만 성도들이 과연 그렇게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죠? 80년대에 서울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을 각개각층 조사를 했는데 72%가 설교와 자기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자기 신앙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거는 이단 설교자들이 있는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위 얘기하는 보수라고 하는 교파 안에서 있는 이야기들 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평신도들이 상당히 의식이 컸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쪽으론 뭐예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강단이 아무런 권위가 없구나. 그래서 이런 통계치를 놓고 어떤 목사님은 고로 우리는 제자 훈련으로 가야 된다는 이거예요. 설교를 믿지 않으니까 제자 훈련으로 가야 된다. 그러나 우리는 첫날 제가 말씀을 드렸죠? 이 문제를 판가름 할 때에 판가름 할 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고 어느 것이 어느 정도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원리를 정확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들이 거기에 나타나느냐 거기에 매달릴 건 없어요. 왜 그러냐하면 세상은 시시로 풍조가 변하고 그 풍조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눈에 보이게 성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설교자를 통해서 내게 믿음을 심어준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22%밖에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뭘 말해주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믿는 성도들이 설교가 자기 신앙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때에 그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온다는 얘기거든요. 그렇다면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교회에 참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이 앙케이트를 조사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얼굴을 못들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 말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권위”의 문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설교단의 권위가 지금 높아져있습니까? 자꾸 떨어져 갑니까?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해 봅시다. 어떻습니까? 어때요? 연세 많이 드신 목사님. 옛날에 한 30년 전하고 비교해 볼 때 어떨까요? 교인들이 설교단상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죠? 그러니까 30년 전에 제가 주일학교 학생이었는데 일단 누가 올라가든지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말씀이라고 그렇게 받아드렸어요. 근데 지금은 교인들이 그렇게 대답 안합니다. 몇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토를 달아요. 그러나 와 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단이 자꾸 연단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럼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자꾸 생깁니까? 권위가 자꾸 상실되어져 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어떤 장로님들이 대놓고 그러더래요. 목사님 두고, 당신도 기름부음 받았고 나도 기름부음 받았는데 쌤쌤인데 뭘 그렇게 누를라 그러느냐. 이런 세상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권위가 점점점점 상실되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권위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제일 심각하게 한풀 탁 꺾이면서 상실되어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르네상스에요. 르네상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전적인 권위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참된 권위가 1세기, 2세기 까지는 3세기경 까지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그 말씀에 큰 능력을 소지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의 권위가 유지되었어요. 그런데 뭡니까? 점점점점 가톨릭화 되어져 가면서 말씀이 약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권위를 교회가 확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방책들을 연구했는데 우선 뭐냐면 사제의 복장들을 로마제국의 관료들의 복장을 따오기 시작했어요. 그게 지금 가톨릭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복식의 말하자면 시작이에요. 따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뭐냐면 고딕건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뭐냐면 교회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외소 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외형적으로 심리적으로 권위가 느껴지게끔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엄격한 권징을 가했어요. 그러므로 교회가 권위를 세운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뭐예요. 하나님의, 그건 권위주의에요. 그러니까 권위는 뭐냐 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진리를 주셔서 그 진리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인정해주게 되는 것 이것이 권위고 권위주의는 무엇이냐면 사람이 나는 이러한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는 그렇게 나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지요. 근데 그것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는데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들이 전쟁에서 여지없이 패배했거든요. 교황권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교황청에서는 각양 추문들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근대정신이 깨기 시작하면서 인간성이 심히 억압받고 있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반기를 든 거에요. 그게 르네상스의 출발이에요. 그러면서부터 종교개혁시대를 지나가지고 17세기, 18세기 접어들면서 이런 사상들을 더 크게 싹트게 됐지요. 근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이 발달되고 그다음에 두 번에 세계전쟁을 거치면서부터 사람들은 절대적인 도덕이라든지 선의 개념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극도의 회의를 갖게 되었어요. 허무주의라든지 그런 것들의 출현도 그런 거잖아요? 이러면서 사람들은 굉장히 권위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어요.
지금 보십시오. 국민 학교 애들도 권위 있는 사람이 없어요. 선생도. 국민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얘기가 뭐냐면 요즘은 전에는 선생님이 자기를 불러 주면은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선생님 앞에 찾아갔잖아요. 근데 요즘은 선생님이 “야 너 이거 가서 좀 가져와” 그러면 “선생님 싫어요. 전 지금 너무 바빠요.” 지금 그런 세상이에요. 선생이 쫓아다니면서 애들한테 뭐 좀 해달라고 사정하는 세상이에요. 권위가 없어요. 젊은이들은 대통령을 자기 친구 이름 부르듯이 합니다. 권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들에게 있어서 대통령이 권위가 있습니까? 아니면은 어른들 요즘 텔레비전 보세요. 텔레비전, 그 머리 허연 노인네들을 등장시켜서 우스개꺼리로 만들고 있잖아요. 이게 전부다 세기말적인 현상이에요. 그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것도 벌써 전부다 권위에 대한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그러니까 노인네, 죄송합니다만 노인네 그러면 뭐냐, 머리 회전이 빨리 안 되고 답답하고 엉뚱한 생각하는 이러한 대명사로 사람들이 자꾸 부각을 시키는 거예요. 그건 근절되어야 되요. 이러한 현상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계시니까 알겠죠? 젊은이들이 당회의 권위 인정하는 줄 아십니까? 진정 안 해요. 당회는 이기적이고 보수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이권, 뭐라 그래요? 기득권 확보의 계층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당회를 타도해야 될 대상으로까지 생각한다고요. 권위 있는 것이 없어요. 성경이 당회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장로의 직분, 목사의 직분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그런 거 상관없어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게 권위가 없다 그거에요. 비실비실하고 권위가 없다. 오히려 신앙 정신에 있어서 자기들보다도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위 있는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이 교회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구약은 엄격하게 말해서 ‘권위의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좋았을 때 뚜렷한 특징은 뭐예요? 하나님의 권위가 철저히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신앙이 식어질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어요? 방자히 행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우습게 아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자기의 권위와 같은 유사한 것을 부모에게까지 물려주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오지 않습니까? 자식이 주 앞에 서원을 했는데 부모가 “안 지켜도 돼”그러면은 부모가 그 서원을 취소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어요. 이게 얼마나 막강한 권한입니까? 이러한 권위가 어떠한 역할을 했습니까? 여러 가지 불법과 타락을 보호하는 우산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좋은 면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권위에 대한 회의주의가 교회에까지 밀려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하는 생각이 이겁니다.
한번은 한사람은 성결대 계통이고 한사람은 장신대 계통인데 한분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오셨어요. 조직신학 교수로. 또 한분은 설교학 교순데 앉아서 셋이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공통된 이야기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설교를 가지고 뭘 하려고 그러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냐 하니까 이렇게 개명되고 민주화된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다 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입 다물어” 그래 놓고 한사람이 얘기 한다는 게 이제 지금 얼마나 전근대적인 방법이냐 이거에요. 어떻게 자기 생각만이 다 옳다고 말할 수 있겠냐 이거에요. 사람들 마음속에 다 진리의 요소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런 세상이에요. 이런 세상. 설교학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런 회의주의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 설교를 통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믿음을 심으시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이렇게 정하고 있는 원리들을 받아드리면서 원리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기 보다는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현실상황에 약화된 강단을 그대로 인정하고 차선책을 간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은 몰두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위대한 복음의 능력에 붙잡혔던 위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누가 있습니까? 바울이 누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구였습니까? 베드로 누구였습니까? 크리스토 스톰은 누구였습니까? 오리겐은 누구였습니까? 어거스틴은 누구였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은 누구였습니까? 조지 휘필드는 누구였죠? 찰스 피니, 무디, 그 수많은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들이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만들었습니까? 성경만이 아니라 역사까지도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영혼을 심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과연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생활 속에서 앞집 뒷집에 복음을 전한 것을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의 물결이 확하고 쓸고 지나가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인하여 애통해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세상에 가득해 지는 날들이 정말 올 수 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두란노 서원에서 나온 조지 휫필드의 자서전을 읽어보십시오. 원래는 델리모어라는 사람이 한 전부다 합쳐서 12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원서인데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걸 압축해서 찍어냈습니다. 번역이 됐습니다. 그걸 학생들한테 읽히니까 학생들이 읽은 다음에 독후감으로 얘기하는 게 뭐냐 면은 “교수님 뻥이 심하군요.” ‘뭔 소리야’ “뻥이 너무 심하군요. 어떻게 한번 설교를 하는데 1500명이 회개를 합니까?” 1500명, 얼마나 목소리가 컸는지 1마일 바깥에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대요. 1.65km 사람도 안 보이는 곳이에요. 우렁찬 음성을 주셨겠죠. 야외에서 설교하는데 수천 명이 모여서 설교를 듣는데 어떨 때는 휫필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설교를 잘 듣고 있는데 시간이 점점점점 흘러가는데 의자가 어디 있습니까? 서서 듣는 거죠. 근데 비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빗속에서 설교하는데 울면서 회개하느라고 그 빗속에서 어디로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 이상한 사람들 입니다. 고민해야 되요. 주님이 우리에게 이 어두운 시대에 빛을 증거하고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요한을 보낸 것처럼 우리를 어둔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차적인 직무는 이 설교를 통해서 영혼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실 때 세 가지 사역이 동반되셨습니다. 가운데 자리에 “쾌를소” 선포하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들이 3중 사역이 있어졌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점점점점 멎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분명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분명하게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이것이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고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강하게 와서 붙이치지 않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간단한 것입니다.
1735년인가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휫필드가 북쪽지방에 초청을 받아가지고 설교를 갔어요. 근데 하나 마운틴이라고 하는 광산이었는데 탄광이었습니다. 그 탄광에로 설교를 하러 갔는데 한 1500명 정도 모이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설교를 들었어요. 그들이 전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이었는데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함이라”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막 말씀이 외쳐질 때 처음에야 뭐 수군수군 그랬지만 말씀이 막 외쳐질 때 이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났어요. 말씀 탁 마쳐질 때 탄광에서 나온 새까만 얼굴에 눈물이 흐르니까 이 하얀 줄이 두 줄씩 생겼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
여러분 오스갈도 스미스 목사님 같은 분, 금세기의 목사님이거든요. 그분이 소련 전도 여행 같은 거나 혹은 동부권 전도 여행한 수기를 읽어보세요. 거짓말 같아요. 말씀이 외칠 때 교회당이 쪼개질 것 같은 회개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우리가 섬기고 있는 강단에서는 잘 안 일어나고 있느냐는 거죠. 우린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죄인을 회개 시키고 그래서 주님을 알게 만들고 그래서 구원 받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이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우리 인생을 ‘아 난 참 보람 있게 살았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영혼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신다. 라고 하는 이 원리들이 권위를 점점점점 잃어버리는 세대가 됨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강단의 권위도 격하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힘 있는 강단의 메시지가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믿지 않는 거예요. 그건 뭐예요? 예배 인도하러 가면 “목사님 찬송은 열심히, 기도는 뜨겁게, 설교는 어떻게? 간단히”
몇 년 전에 신촌에 있는 어느 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어요. 올해 일인가, 작년에 일인가. 설교라고 사경회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저보고 강사로 오래요. 갔습니다. 예배시간이 됐는데 전도사도 없고 학생들도 없어요. 고등부였는데 정시가 되니까 한 열명 나왔어요. 하나씩 둘씩 나오기 시작해요. 그다음이 더 가관이에요. 설교를 하러 올라가려고 하는데 강도사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저 강사님, 설교는 몇 시까지 하십니까?” “내가 몇 시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설교는 저희는 시간 별로 문제없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시간은 많이 있지만 9시가 넘으면 애들이 지루해하니까 그 안에 마쳐주십시오.” 막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확 치밀어 올라가지고 말이에요. 우리 후밴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내려가서 기도나 하슈.”하고 올라갔습니다. 열시20분에 끝냈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목양을 합니까? 그러니 강도, 문자 그대로 강도 아닙니까? 강도, 도둑 그 위에 강도, 강도라는 사람이 강도, 도를 강론하기로 라이센스를 받은 사람이 강대에 올라갈 때에 ‘아 설교를 들으면 청중들이 지루해하겠구나.’ 이 생각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열시 20분에 마쳤어요. 7시에 시작해서 이튼 날 갔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없이 회개를 하더라고요. 그러니 이런 신념이 강단에서부터 약화되고 있으니까 이것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너를 들어서 불신앙의 세상에 믿음을 만들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씀의 비수를 꽂아서 그들의 더러운 영혼을 도려내고 말씀의 생수를 그들에게 부어서 구원받게 만들겠다 말했는데 ‘주님.. 세상을 구원할 뭐 좀 좋고 신기한 방법이 어디 없을까요?’ 방법은 없어. 너하고 내가 너를 통해서 그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근데 설교자들이 ‘주님이 나를 도구로 쓰셔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잘 안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총회가 있으니까 일찍 끝내야지. 이런 식으로 강단에 올라가니까 긴박감이 깃들이 않는 것이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한 목소리로 증거 하기를 주님이 믿음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 그 세상에서 빛이 나타날 때에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역할을 누가 했느냐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통해서 그 빛이 날 때 사람들을 믿게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닫혔던 선교의 문이 어떻게 열립니까? 캄캄하게 죄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영혼들이 어떻게 그 석탑을 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까? 어떻게 적막이 감돌고 분쟁만 일삼던 교회가 일제히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850년에 찰스 피니가 로체스터시에서 집회를 계획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우리 조국교회에서 꼭 한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대전 지역에서 이런 일 한번 해보십시오. 무슨 뜻이냐 하면요.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교파를 초월해서 연합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찔끔찔끔 무슨 전도 집회, 부흥회, 요샌 부흥회라 그러면 오지도 않아요. 세미나? 그러고 뭐 사탕발림같이 뭘 해야지만 사람들이 옵니다. 부부초청 위로의 밤. 이런 거나해야지 옵니다. 뷔페식당에 모이는 거죠 이것도.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저 목회자들이 모여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기도하면서 대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해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기도하고 365일 전도 집회를 한 교회에서 여는 거예요. 중앙에 있는 큰 체육관 같은 것들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교회가 연합해서 주일에도 그 집회를 계속했어요. 유능한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말입니다. 목회자들은 전폭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찰스 피니가 보냄을 받았어요. 로체스터시에 세 교회가 있었답니다. 하나는 목사님을 내어 쫓았고 또 하나는 교회가 두 교회가 법정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 중에 한 교회는 목회자를 내쫓을 궁리를 장로들이 하고 있었어요. 갔습니다. 분쟁하고 도무지 하나님께 연합되지 않는 교회였죠. 피니가 말씀을 전할 때 교회가 엄청나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전도 집회에 축복하셨어요. 그 시대에 일년 동안 피니가 그곳에서 집회를 했는데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요. 할렐루야! 이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왜 그런 것들이 안 일어납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해요. 복음에 대한 이 구령에 대한 몸부림치는 애통함 이런 것들이 식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교파가 다 모여가지고 기념탑이나 하나 건립하고 건물이나 하나 건립하면 그게 뭐 그렇게 큰 도움이 됩니까? 십자가만 높이 하나 세우고 학교 안에다가 돌맹이 비석이나 하나 세워 놓으면 그거 보고 후손들이 잘됩니까? 중요한 것은 심각하게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열망들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은 열정을 잃어가고 있는 강단의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확인하고 믿으십시오.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는 최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은 설교입니다. 제가 오늘 최상의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정말 그런 것들이 아니고도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창 타락했을 때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고 노는 그 소리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최상의 수단’ 가장 유능하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선포를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그것이 말입니다. 여러분 기울어져 가는 강단의 권위, 사라져가고 있는 목회자의 권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말씀의 권위가 다시 서는 것 없이는 말씀의 권위가 다시 서는 것 없이는 결코 강단의 권위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3층 4층이 아니라 5층 6층 꼭대기에다 강단을 만들고 그 나무의 재질을 인도에서 수입한 것으로 만들어도 그걸로 권위가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이 썼던 강단 보셨지요? 노트하나 올려놓을 수 있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고 그 권능의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때리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을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강단의 권위는 섰습니다.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다 떨어진 갓을 벗으며 말씀을 폈고 그들의 손에는 나달나달한 성경이 들려져 있었고 그들은 굶주린 몸으로 초췌한 얼굴로 말씀을 들고 나왔을 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올 때에 죄인들의 가슴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오만했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던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던 사람들이 뉘우쳤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로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순교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강단은 회복되었고 그리고 설교자의 권위는 섰고 그래서 목회자의 권위는 섰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의 권위가 섰다는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부딪치지 않는 한 말씀의 권위를 아무리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쇠뇌 된 보수주의자 밖에는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적서부터 교인들을 잘 훈련을 시키면 예배시간에 조용히 있을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지각을 하지 않게끔 훈련은 시킬 수 있습니다. 미리 미리 준비해서 헌금을 하게끔 훈련은 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되 뇌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끼지 못하는데 말씀의 권위를 느끼는 못하는데 어떻게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해 봅시다. 교계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당회장을 초빙합니다. 요즘은 뭐 학위를 받아야지만 어떻게 뭐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명함을 내미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받아 보았습니다. 증명서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뭐예요? 일류대학교의 일류대학원의 수석으로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석사학위를 받고 다 받았습니다. 수많은 책들을 냈습니다. 그거 가지고 교인들이 보지도 않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또 하나 생각해야 될 문제점은 뭐냐 하면 말씀이 외쳐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래서 말씀의 권위가 인정받는 그런 일들이 줄어들게 되자 목회자들은 점점 세상에서 사람들이 권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에 급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에요? 쏟아져 나오는 진리의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성도들이 굴복을 안 해준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전도지와 주보에다가 담임목사님의 얼굴을 싣고 그 밑에다가 학력을 기재하는 이유를 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박사 모자를 쓰고 후드를 쓰고 들른(?) 사람이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어 달라는 겁니까? 아니면 적어도 교회에 와서 박사가 설교를 하니까 적어도 고졸 이하는 오지 말라는 겁니까? 미리 설교의 수준이 높으니까 각오를 하고 오라는 뜻입니까? 그래서 믿음이 잘 안 생겨도 그건 네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거니까 잘 새겨서 들으라는 뜻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에 설교자들이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잘 생겼으면 얼마나 잘 생겼습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와 보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다!”
메트로 폴리탄에서 찰스 스펄전이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보니까 대응 침례교(?) 교회를 그렇게 지었대요. 그게 스펄전 스타일입니다. 이 스펄전은 이 고딕식 건물에 대해서 아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도 좀 고딕식 건물은 좀 좋지 않다고 봐요. 건물이 우선 바리새적인 요소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앞에 짓는데 돈 다 들어갑니다. 근데 그 높은 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 몇에 못 만들어요. 뒤에 가면 홀쭉해. 거 딱 들어올 때 현관에서 사람 기를 질리게 만든 거죠. 들어가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스펄전은 체육관 같은 식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지붕은 반드시 평평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목이 쉽니다. 강단은 항상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해야 됩니다. 그것이 성대를 보호하는데 기가 막힌 효력이 있습니다. 근데 어쨌든 지간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라고 하는 거는 전부다 사람들이 뾰족탑만 보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둥그런 무슨 회교사원 같은 것이 있거든요. 십자가도 잘 안보이고. 그 지나가던 사람들이 물었어요. “여보시오. 저 뭐하는 뎁니까?”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저기 뭐하는 뎁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곳은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스펄전이 목회하는 교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할 때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그럴 때 사람들이 뭘 생각할까요? 혹시 수시로 친목회를 여는 곳이라고 불러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이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상 사람들을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끔 만드시길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내가 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건데 너희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 보낸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는 일입니까? 실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설교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직분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신앙하는 세상에 영원히 죽고 사는 믿음을 심는 도구로써 설교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내가 그 빛을 증거 하기에 유능하지 못하면 나를 인하여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그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누가 이 불신앙하는 이 어두운 시대에 빛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사랑하여 그 빛을 사랑하지 않는 이 어두운 시대에 믿음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요한을 통하여 그 증거로 말미암아 이 일을 행하였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그 빛을 증거 하는 설교자들을 인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신도는 깨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평신도는, 평신도가 뭘 깨겠어요? 평신도가 잠들었다고 칩시다. 누가 잠재웠습니까? 한번 물어봅시다. 평신도를 누가 잠재웠습니까? 이 세대에 조국의 강단이 깨어져야 될 것입니다. 진실로 깨어져야 할 사람들은 평신도가 아니라 강단입니다. 강단이 잠들어 있는 한 평신도를 아무리 깨운다고 할지라도 평신도들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단이 깨어보십시오. “자는 자여 일어나라.” 한마디만 외쳐도 평신도들은 벌떡 잠이 깨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있는 평신도 그 한복판에는 깨어있는 강단이 있었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성 그 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성전 한가운데에는 기도가 멎은 그러한 교회의 모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고 고함소리는 교회당을 울리지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은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찢으며 ‘주님 우리의 소명을 어찌하시렵니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사람들이 되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고 말씀의 놀라운 쇄신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말씀이 능력으로 성도들의 가슴을 쓸어갈 때에 그 때에 교회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깃발이 높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엊그제도 평신도 한 사람을 만났어요. “교수님 요새는요 설교를 듣는 것이 고문입니다. 고문당하는 것 같대요. 물고문, 선고문, 이건 말 고문 이예요.” 저는 그 사람 교만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너무너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내 영혼을 쓸어가 주길 원하는 거예요.
6월 달이 강남에 있는 교회 집회를 갔는데 나 그 장로님 말씀 잊을 수가 없어요. 교회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겠죠. “제가 설교하러 온 강삽니다.” 얘길 했더니 두 손을 꽉 잡으면서 “강사님,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그 얼굴빛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녹이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을 정말 녹여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사랑, 자기의 인격으로 끊을 수 없는 죄의 짐, 자기의 결심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악 된 삶에 묶여있는 자기의 삶, 무기력해져버린 자기의 영적인 생활, 매일 결심해도 개선되지 않는 이 죽은 자와 방불한 생활을 한번 깨워서 자기의 마음을 물같이 녹여주기를 원하는 강단의 선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주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시여, 앞으로 면류관이 씌워질 내 머리와 복음의 신발을 신은 내 신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내 혈관 속에 흐르는 피 중에 주를 위해서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뽑아내어 주십시오. 내 살점 중에서 주를 위해서 찢기기를 거절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옵소서.’ 그래야만 우리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흘러갑니다. 사람의 생각 변하죠. 인간 풍조도 바뀝니다. 그래서 교회의 풍조도 바뀝니다. 성도들의 취향도 달라지죠.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고 역사가 바뀌어도 주님의 십자가는 갈보리 언덕에 우뚝 서서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과 함께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고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그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되는 최상의 방법은 주의 말씀에 사무친 설교자들의 절규하는 부르짖는 설교를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 믿게 하려함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요 1:6-8).
오늘로써 이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8절사이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차례대로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는 ‘빛에 대하여’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빛에 대하여...라는 그 말을 가지고 설교자의 증거의 초점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는가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지난시간과 지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들을 굳이 요약을 한 번 더 한다면 설교자는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사역의 전적인 책임은 오직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아울러 주는 것입니다.
어제도 어느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성도들이 자꾸 목회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그런다고 그러니까, 잘 못한다고 그러니까 너무 너무 심령이 상하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세례요한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이시대의 설교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면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한분 앞에만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을 기쁘시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을 기뻐하시고 나의 복음 선포사역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는 아무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사람이 우리를 인하여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패한 자요. 버림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증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증거하러……. 본 사람이 증거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소리와 강단에서 외치는 목회자들의 선포사이에 미묘한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냉랭한 강단아래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차가와집니다. 냉랭합니다. 자기네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큰 것을 깨달았다고 서로들 이야기를 나눕니다만 거기에는 아무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의 선포가 어떻게 그렇게 냉랭하고 차가울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는 차갑고 냉랭한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증거가 차가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를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나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하나 사람들은 그를 등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냉랭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의 증거가 차가와질 수 있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빛을 보았고 그래서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면 그는 결단코 차가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빛의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포사역의 초점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설교는 한 번의 증언이며 따라서 그 증언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을 우리가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7절에 나와 있는 말씀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함이라’ 이 말씀을 오늘 이 시간에 다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습니다. 설교자의 직무가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진전해 들어가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언의 목표는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지만 목적은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구령이 없는 설교보다는 차라리 설교가 없는 구령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이 번드르르 하고 모든 사람이 찬탄하는 설교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그 설교가 능란하고 기가 막힌 설교라고 할지라도 설교의 최고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 보냄을 받았는데 빛에 대하여 증거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설교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기 전에 믿을 수 없었던 사실, 믿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 믿을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계시, 믿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 이것들을 믿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기가 막힌 머리들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산에 능하고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상품 하나를 사기위해서도 수없이 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설교가 왜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데 실패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도들을 설득하려고 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설득을 하려고 할 때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능수능란한 논리로 저 성도들의 능수능란한 논리를 뒤집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성이 패배할 그 때에 논리에 굴복함으로 믿음이 창조된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설득이 곧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믿음을 창출해 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지식은 이 세상의 많은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지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지난주에 전국의대생 수련회를 인도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전국의 내놓으라고 하는 수재들이 다 모였습니다. 의대생 들쯤 되니까 학교에서는 다 수재소리를 듣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원생도 있었습니다.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아이큐와 그 다음에 공부, 지식, 이성의 판단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기를 서러워하는 수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설교가 흡족하지를 않아서 설교가 끝나고 제 방에 찾아와서 니고데모처럼 상담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상담을 좀 들어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궁금해서 물어보는 내용들이 얼마나 유치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해대는 것입니다. 믿음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역과 이성의 판단, 이성으로 아는 지식의 영역이 얼마나 다른가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아무리 학벌이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주눅이 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공부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뛰어나지 못하고 정말 성도들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학벌을 가졌어도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을 보십시오. 초등학교, 소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들이 평양신학교 다다미방에서 무릎을 꿇고 갓 쓰고, 망건을 쓰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개화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믿음이 심겨지게 될 때에 정말로 사람들은 그 선포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이것은 결코 니고데모도 알 수 없는 지식이었고 서기관도, 바리새인도 인간의 지식의 축적으로는 알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을 다루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설교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에 대하여서 증거하는 목표가 그것이 설교의 목표라면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하는 것입니다. 군사학에서 목표가 잘못 설정되면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목표는 큰 목표를 따내는데 반드시 기여해야 되고 목표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익해야 되는 것이 모든 작전의 기본원칙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먼저 목표와 목적을 나누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목표는 목표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새벽 4시까지 저 고지를 탈환하라.’ 고지를 탈환하는 그것이 목적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대의 목표는 주어졌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지를 탈환해야 합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그 고지에 아무리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승리를 주는 그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희생을 무릅쓰고 고지를 탈환해야하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대는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저 고지를 탈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대 전원의 생명과 바꾸는 목표로 설정을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안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스데반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역사상 그보다 훌륭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설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회심자도 없고 그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돌에 맞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 아니고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참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외치는 사람들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외치는 천둥소리를 낼 뿐이지만 그러나 번개 불을 번쩍이게 하시고 낙뢰를 떨어뜨리어 불신앙인 이 세상의 바벨탑을 부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낙뢰를 보고 믿음을 창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설교가 행해집니다. 성도들 중의 72%가 설교는 자기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강론과 수없이 모일적마다 성경을 피고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누가 말을 해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인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되어졌고 수많은 성경의 강론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기 힘들어진 세대가 된 것은 바로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설교가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만들려고 합니다. 믿음을 창출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들의 노고를 기필코 허사로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노래를 부르는 세대입니다. 찬양집회를 한번 가보셨습니까? 한번 가보세요! 찬양 집회하는 데를 한번 갔습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많이 모입니까? 주제는 무엇이냐? ‘찬양의 물결로 이 도시의 부패를 쓸어내자!’ 얼마나 멋있습니까? 밴드가 울려 퍼지고 찬양을 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찬양을 합니다. 찬양을 하고 찬양이 끝났을 그 때에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에 순서가 모두 마쳐지기 위해서 하얀 양복에 하얀 넥타이에 하얀 구두를 신은 어떤 분이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무슨 나이트클럽의 밴드마스터같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소개하는데 목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하나님께로 기름부음을 받고 말씀을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은 목사를 우리 성경과 그리고 믿음의 위대한 위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시대 앞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켜보고 싶어 합니다. 어떤 때는 뭡니까? 교회에서 큰 사업을 시작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도들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큰 사업을 벌입니다. 헌금도 하고 집회도 하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였을 때는 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흩어져 집에 돌아가서 골방에 고요히 눈을 감으면 왜 다 무너지는 것 같습니까? 진리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주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분깃을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견고하게 만드는 신앙의 터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인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은 말씀의 선포가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로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할 때에 그 믿음은 항상 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예수 믿고 축복이라고 하는 이러한 말에 현혹되어서 자기의 믿음을 지탱해나갑니다. 성가대도 합니다. 주일학교도 합니다. 건축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가지고 그들의 믿음이 제법 잘 믿고 있다는 스스로의 착각에 빠지게끔 우리들이 그들을 인도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단지 빛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빛을 증거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은 죽은 자와 방불하게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그가 선포할 때에 다 나아와서 형식적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싱글싱글 웃으며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죄를 자복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자신들이 못 박히는 표로 세례를 받을 마음까지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말하기를 그의 증거가 참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증거가 참되니 그 참된 증거를 주님이 축복하실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참된 믿음이 불러일으켜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구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드리블은 기가 막히게 하는데 왜 슛은 못 쏩니까? 쐈다하면 노골이에요. 이런 선수들은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창조되는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믿음을 인하여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 목적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지 아니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들을 인하여 먼저 우리는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 설교자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예민하게 살아있고 그리고 사역자로서의 신앙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사람들이 그것을 인하여 믿게 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고 고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흔히 따라오는 유혹은 이런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신실하게 외쳤지만 저들의 심령의 상태가 비뚤므로 저들이 내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가장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복음의 선포를 들으면서도 설교를 향하여 대적하던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선포는 주님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더할 나 위없이 축복해주셨는가? 그리고 나는 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마음껏 축복해주시도록 자신 있게 주 앞에 간구할 수 있도록 나는 이 말씀에 붙들렸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를 비롯한 찰스 휘니 등등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의 사역에 붙들린바 되었던 위대한 종들은 말씀의 선포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굉장히 오랜 날 동안 자기가 증거한 말씀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리고 그 뿌려진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해달라고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설교자 속에 찾아오는 또 하나의 위험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에게는 증거한 말씀을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야 된다고, 기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자기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자기를 붙잡고 주장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칼날과 같은 양심위에 서야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는 후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고 주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나의 설교에 축복해주시기를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교 한편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반대했습니다. 복음의 증거에 배척했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설교도 그러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광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아울러 기억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편만을 보고 우리 스스로 위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고민하며 그 말씀의 결과들과, 그 말씀의 열매가 신통치 않은 것들을 인하여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말입니다. 오늘날 말씀을 증거하는 선포의 사역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선포할 때에 믿음을 불러일으켜야 되겠다고 하는 타오르는 열망이 설교자들이 가슴속에 불타오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외치는 말씀의 내용에 회의를 품고 설교를 한다면 듣는 성도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외칠 때에는 정말로 자기가 확신할 수 없는 내용은 증거하기를 미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증거하기 위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증언해 주시기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자기가 먼저 증언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설교 속에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대로 생각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추레한 말들은 설교 내용 속에 깃들여져 있는 설교자의 회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들에게 증거되어서 마음속에서 외치는 선포의 내용이 될 때에는 요지부동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끊임없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증거가 돼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적인 설교는 반드시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에 서있는 설교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봐야 될 것은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믿음, 즉 증언하는 내용에 대한 믿음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왜 사람들에는 믿으라고 증거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믿지 못하는 내용들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증거하는 것은 처음서부터 직업적으로 볼 때도 잘못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이상구박사가 온 적이 있었지요? 뭐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언젠가 신문에 ‘이상구 신드롬’ 이렇게 났어요.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감자가 좋다’고 얘기를 했더니 시장에 감자가 씨가 말랐대요. ‘고기가 나쁘다’ 했더니 갈비 집에 사람이 안와요. 그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일부러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평범한 건강 특강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푹 빠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가지고 지금 강의를 하는데 그 정도의 강의를 누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다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건강특강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었느냐하면 자기 자신이 몸이 아파본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런 것들을 극복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사람이 무엇보다도 더 자기가 택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만 증명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확고하게 믿고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 흰머리가 변하여 까만 머리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증언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믿음이 있고 확신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고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확신과 믿음을 가질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한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불타는 확신이 나를 계속해서 강하게 주장해 줄 때에 그 때에 우리들은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기본적인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억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전 존재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주신 그 말씀에 위탁하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먼저 주관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세 번째로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보십시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믿음을 불러일으켜야 되는 사람은 도시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장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성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모든 사람……. 나이든 사람이나 어린사람이나 어린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성인이나 무학자나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그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요한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경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목회자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느 부흥회에서 증거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름만 대만 다 아시는 분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의 성장전략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가용은 타고 오는 교인을 붙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자가용 안타고 온 사람 10사람이 낼 헌금을 한사람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붙잡아야지만 교회가 탄탄해진다는 것입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요한을 세상에 보내면서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때로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목회자들에게는 자가용을 타고 오는 교인이 걸어서 버스타고 오는 교인보다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이 느끼시는 영혼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장년부에 사람이 더 모이는 것, 그것을 가지고 교세를 판가름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교회학교는 교회에서 서자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모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고난을 받는 자나, 평화롭게 사는 자나, 모두가 다 주를 떠난 자들이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비천한 영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우리 모든 사람들이 연민하고 불쌍하게 여겨야할 대상이며 끊임없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동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 앞에 불쌍한 영혼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나 촌에 있는 자나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은 실로 설교자들이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는 영혼들입니다.
오늘도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고 행락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개중에 보면 말입니다. 그랜저 같은 훌륭한 자가용에다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아주 예쁜 아가씨를 태우고 어디 행락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 그렇게 상상을 안 하려고 하지만 제 마음이 워낙 죄성이 많아서 그런지 그것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아요. 여러분 그들의 영혼도 사실은 불쌍한 것 아닙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렇게 부러운 것이 없이 이 세상의 향락을 위해서 살아갑니다만 그러나 잠시 잠깐후면 우리의 인생은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홀연히 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입니다.
요즘에 제가 아침마다 타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이 세상은 죄가 많고, 슬픔이 많은 곳입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이 세상에 살면서 기쁨을 누리고 사랑을 줄만한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누가 뭐라고 그래도 세상은 그런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는 영혼을 타이릅니다. ‘내 영혼아 조금만 참자. 잠시 잠깐후면 우리의 인생이 불현듯 끝나고 우리 모두가 주 앞에 서야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이 죽음, 모든 영혼이 회피할 수 없는 이 하나의 심판,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한발, 한발 그 심판 앞으로 다가오고 그 죽음 앞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설교자들이여! 설교자들이여! 이 들의 길을 막아서라고 우리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불린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예민하게 훈련되어져야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영혼으로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으로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일부러 박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좀 낫게 대접을 해줘야 될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일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이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선배들은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민하게 끊임없이 주 앞에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일 수 있도록,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정말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간절히 다가오도록 우리의 심령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함으로 이 빛을 증언할 때에 이 증언을 듣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의 증거를 듣고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이 계신데 아마 칠순을 바라보시는 목사님이 유치부 설교를 하시는 분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을 것입니다. 첫째 주는 고등부, 둘째 주는 중등부 셋째 주는 유년부, 넷째 주는 유치부입니다. 유치부에 내려가서 설교하는데 60이 넘으신 노인네가 유치부 설교하는 시간이면 유치부는 숨소리도 안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쥐 죽은 것같이 조용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조용해지는 것이 다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떠드는 속에서 무슨 설교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에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간에 수많은 성도들의 시선을 한 손에 움켜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모두 다 설교자가 빼앗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그 빼앗은 시선의 줄을 타고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설교의 현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에 수많은 성도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쁜 주보를 만지고 있습니다, 광고를 읽고 있습니다, 성경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믿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시선이 설교자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까지도 휘어잡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누구, 누구의 마음을 잡아야 된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증거될 때에 고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은 그 말씀에 주목할 수 있고,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은 졸아야 한다면 그 설교는 분명히 잘못된 설교인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셨던 방법들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 부요한 자, 많이 배운 자, 무식한 자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씩 그 말씀에 빠져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몰려다녔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다녔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인하여 믿게 하는 일들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설교자들이 먼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린 유치부 어린이로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을만한 나이가 된 아주 연로한 어른들까지 모든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을 수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저는 훈련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깎고 다듬으면서 훈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이 일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사역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확신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이러한 훈련을 감당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째 시간인가에 훈련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또한 훈련으로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동일하게 인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고기를 아무리 기가 막힌 것을 떠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이 이것이었죠? 고기볶음인데 고기볶음이라고 해서 한상을 받았는데 젓가락으로 아무리 휘저어도 한 숟갈 떠먹어보니 맛은 기가 막히게 입에 착착 붙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양념과 야채덩어리지 고기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설교 이해가 쏙쏙 되는 설교인데 그 속에 설교자가 말씀으로 깊이 들어가서 거기서 자기의 영혼이 녹아지고 그래서 거기서 이것이 주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 원래 덩어리를 떼어오지 않은 설교가 바로 그런 설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교자가 아무리 기가 막힌 것을 그렇게 떼어왔다고 하더라도 어린아이에게 생고기를 가져다주며 ‘먹어라’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을 갈고 변화시켜서 죽을 원하는 자에게는 죽을, 구이를 원하는 자에게는 구이를, 국을 원하는 자에게는 국을 줄 수 있는 능수능란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그대신 모방하지 마십시오. 읽으십시오. 읽으시는데 부디 말씀드리는 것은 요즘 설교를 읽지 마시고 적어도 100년이나 200년 혹은 300년 500년 전의 설교를 읽으시기를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역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회심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던 그 때에 했던 조상들의 설교를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속에는 정말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설교의 내용, 그 흐름들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 요한이 보냄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존 번연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 분은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땜장이였습니다. 땜장이……. 땜장이였는데 그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단골로 들으러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영국의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존 오웬 박사였습니다. 국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존경해마지않는 대 석학 존 오웬 박사님이 땜장이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고……. ‘야! 그건 뭐 잘못 들은 얘기한 것 아니냐?’ ‘정말입니다.’ 만났습니다. ‘오웬 박사님 아니 박사님같이 고명하신 분이 어떻게 그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들으러 가십니까?’ 존 오웬은 말했습니다. ‘국왕폐하 저는 말입니다. 땜장이 존 번연과 같이 설교를 해서 그 사람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이 박사학위 같은 것은 100개라도 집어던지겠습니다.’ 그는 땜장이에 불과했지만 자기와 같은 땜장이들에게도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국왕폐하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 석학의 마음속에도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성인이 뭐 별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지성인이면 뭐합니까? 바닷가에 나가보십시오. 모래성을 이렇게 쌓아놓지요? 파도가 찰랑찰랑 치면 모래성을 살짝 건드리죠. 그러나 폭풍이 일어서 파도가 길길이 뛰어서 휘! 하고 나면 이만하게 쌓았던 모래성이 어디로 갔습니까? 지성인? 지성인!……. 그러므로 내가 저 사람들에게 무식하게 보여서는 안 될 텐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텐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파도처럼 밀려가서 그들을 뒤덮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조지 휘필드가 설교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치가들도 그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했습니다. 탄광의 광부들도 그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온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네가 거듭나야 되겠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떻게 엄마뱃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의 수준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내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켜 급기야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세워주며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결국은 구원 받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져야 할 텐데 우리가 훈련받기에 게으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듬어지기를 게을리 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실 때에 어린아이의 영혼을 칠 때에는 명중을 안 하고 큰 사람의 영혼을 칠 때에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충성된 종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증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믿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이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될 필요에 대해서 그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 아주 외국어에도 능수능란한 아주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학자의 길을 안가고 시골에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것도 부목사로서 목회를 했지요. 결국은 나중에 그 지방에서 커다란 신앙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 말입니다. 실화입니다. 우리나이로 한 다섯 살쯤 된 아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이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니까 이 아이가 자기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장 어린아이가 그 많은 어른들이 듣는 그 설교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말씀이 선포되기를 기다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몇 번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에 목사님 설교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럴 때에 세가지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첫째는 목사님 설교는 도무지 맥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어렵다고 말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어! 수준이 높습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왜 말씀이 증거될 때에 활시위를 당겨서 획 쏘면 화살이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면서 갑니까? 공기를 가르면서 과녁을 향해서 쉬지 않고 날아가서 딱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는 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합니까? 그러면 요약을 해서 말할 때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딱 요약해서 목사님이 무엇을 우리 가슴에 딱 찔러주고자하는 그것이 안 들어올 때 성도들은 설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설교가 왜 그렇게 해맵니까? 라는 이야기를 듣기 좋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야 하면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말이 너무 어려운 것이에요. 초등학교 학생들을 데려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인 사역과 중생과 회심과……. 이것을 알아먹겠습니까? 어렵다는 것이죠. 용어를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성도들의 아주 교묘한 회피입니다. 수준이 높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그 설교대로 쫒아가서 살거나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에요. 자기키가 너무 작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죽으러 갑시다.’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설교는 똑바로 알아듣겠는데 자기의 마음이 그것을 용납을 안 해요. 그 때에 성도들은 설교가 어렵다는 교묘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하나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관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지금 니고데모가 거듭난다고 하는 말이 참 나로서는 생소한 용어다, 나로서는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알겠다. 그 뜻이 아니거든요.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거든요. 아주 쉬운 이야기에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지금 막 헤매고 있어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듭나지 못했으니까 그 거듭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예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나?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오셔서 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마음이 녹아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설교를 하는데 십자가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이에요. 그것이 참다운 수준의 문제에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이 한번 탁! 일어나면 그 다음에 그 수준은 탁 뛰어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주 초등학교밖에 안다니는 이런 아이들도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고 설교가 그렇게 주어지게 될 때에 그들은 한 시간, 두 시간 요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어린 학생들이 180분 동안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을 본 일이 있어요. 그게 진정한 수준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할 때에 사람들이 그 빛을 경험하고, 그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러므로 그를 믿게 되는 영혼의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1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눅 1:15上).
지지난 주에 이어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7월하고 8월 두달동안에 세례요한에 대해서 8번을 해가지고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만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구약부터 손을 대야되는데 복음서를 중심으로 손을 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첫 번째로 누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8절부터 보겠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룰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1:8~16)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 중에서 제가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부분은 15절이 되겠습니다. 15절을 3번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을 다시 한번 열어 주십시오. 누가복음 3장.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1~2) 아멘.
이 시간 잠시 한번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사함을 입었고 우리의 사는 인생이 끊임없이 주님을 거역하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사 주의 거룩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하나님의 흩어진 양무리들을 돌볼 수 있는 이 막중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우리들이 강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께서 우리에 앞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가셨던 그 뒤를 쫓기를 결심합니다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육신을 입고 연약함으로 많은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지라도 때때로 우리의 가슴 속에 밀려드는 이 허전함과 그리고 우리의 심령의 나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사오니 주여, 머리 숙인 당신의 충성스런 종들로 하여금 이 시간도 말씀 앞으로 다가오게 하시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깨워 주 앞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지난 시간에는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서부터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왜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텐데 서두를 설교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냐 하면은요, 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많은 면들을 볼 수 있겠지만은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왔으니 이는 요한이라 그랬습니다. 저가 빛에 대해서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세례 요한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우리 설교하는 사람의 모습을 읽어보려고 이 말씀으로 오늘 서두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따금 이 사람을 닮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참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 하는 것은 없었어요. 사실은. 다윗을 좋아했고, 바울을 좋아했지만은, 또 시간이 흐르면서 바나바와 요나단이 훨씬 더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지냈는데 몇 년전에 이 누가복음 1장을 읽으면서 아! 맞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야말로 이 요한과 같은 사람이 정말로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그 생각을 하게 되고 요한에게로부터 깊은 감화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요한으로부터 그 수많은 감화와 은총을 입은 다음서부터 지금도 매일 기도제목이 내가 요한과 같이 살다가 요한과 같이 죽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매일의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요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쭈욱 신약의 복음서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20번 정도 설교를 해야지만 세례요한의 윤곽이 드러나리라고 봅니다. 제게 허락된 것은 8시간 정도인데 어떻게 될른지 모르겠는데 어쨋튼 제가 하는데까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누가 복음 1장 8절서부터 17절까지 읽었습니다만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려고 했던 그 기초가 있었습니다. 그 기초가 되는 기독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귀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는 4권의 복음서를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조국의 교회에서는 복음서가 잘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서신서쪽이 많이 설교되고 있고, 복음서쪽은 오히려 덜 설교되는 것 같고, 가끔 복음서에 대한 설교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은 제가 보기에는 정말 그 복음서 속에 설교자가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를 더 많이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것은 철저하게 그 기사의 초점이 예수님과 그분이 직접 가르치신 진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그리고 그의 구주되심을 선포하고자 기록된 이 4권의 복음서가 한결같이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의 관한 이야기를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입니다. 세례요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주님의 생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만큼 세례요한의 생애는 우리 예수님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예언은 일찍이 이사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렇게 외침으로 메시야의 올 앞길을 예비하는 그러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그런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와 그의 비전과 그의 모든 소망과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을 들어서 조국의 교회를 보십시오. 지금 조국의 교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이론에만 밝은 서기관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의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편만한 영향을 끼칠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악한 자의 칼에 죽었지만 짧은 생애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생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출생을 합니다만은 예수님의 탄생에 못지않은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늙은 제사장 사가리야 그리고 수태의 능력을 잃어버린 엘리사벳, 이들 부부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기적적인 예언을 천사를 통해서 하십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사자를 통하여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셨는데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하난’, 그리고 ‘야훼’라는 말의 합성어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실 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 그런 뜻입니다. 오늘 14절은 그의 태어남이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스러운 기쁨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라 그랬어요. 성경은 오늘 요한의 이름도 여호와의 은혜라고 말하고 또 그의 출생에 대한 예언도 그가 태어날 때에 사가리야와 엘리사벳도 기뻐하고 많은 사람이 그가 태어나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았던 생애는, 돌아보십시오, 부모에게 즐거움을 준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난 지 얼마 안되서 그 아이는 광야 빈들로 보내졌습니다. 또 세례요한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의 생애는 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고독하고 고난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그가 행복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얼마 안되는 인생이 너무나 험난했고 세상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연약한 유년시절을 광야에서 외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어린아이적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부모와 친구가 될만한 이들의 곁을 떠나 있어야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유복했을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그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삼고 약대털을 의복삼아 지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젊음을 광야 속에 묻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침으로써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이후로는 자기의 정치적인 적인 헤롯에게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곧 옥에 갇히는 죄수의 신세로 고통을 받아야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마저 어린아이에게 주는 선물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험난한 생애를 맞게될 그의 태어남이 그의 부모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째서 이토록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계속해서 그의 출생이 기쁨이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는' 헬라어 성경에는 '가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주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앞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시간도 자신들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처음 등장해서 외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렇게 외쳤을 때 그 선포는 이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니? 우리가 무얼 잘못했나? 이처럼 엄숙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리고 있고, 지금도 짐승을 태우는 연기가 오르고 있고, 이렇게 성대하게 절기로 모이고, 대대로 흩어지며 우리가 이처럼 정성껏 율법책을 베껴쓰고, 백성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무얼 회개하라는 말인가? 더 이상한 것은 회개하여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천국이 가까워오는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천국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 속에 사는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국이 가까이 오니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니, 그러면 회개를 안하면 천국이 다가오는데 재앙이 된다는 소리란 말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를 안하면 천국이 다가오는데 그 천국이 재앙이 되어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유대인들의 상식과 신앙의 견해로는 세례요한의 이 메시지가 도무지 이해가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그간에 선포하신 말씀도 똑 같앴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이해를 좀 하기 시작한 것이예요. 이런 일을 위해서 세례요한이 보냄을 받은 것이예요. 주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였죠. 요한의 메시지는 도무지 낯설고 생소할 뿐만 아니라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있는 자로 규정하고 또 회개해야 할 죄악 속에 있는 살고 있는 사람들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강단에서 들려오는 모든 설교들을 보면 도무지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죄로 가득찬 인생이며 하나님이 사유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이들이 용서함을 받을 수 없고 정말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붙드심이 아니면 이들은 끊임없는 범죄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들이라고 하는 신념이 설교자의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주님의 관심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제사로 모이고 대회로 흩어지며 절기로 함께 예배하는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많은 백성들이 이스라엘 속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율법을 깨알같이 베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거룩한 예복을 입고 사람들에게 죄사를 지내 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종교에 열중한 것 같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세례요한이 이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말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까? 정말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이 시대에 세례요한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을 떠나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보내노라고 하는 주님의 이 기대가 오늘 말씀을 수종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면서도 똑같은 기대를 주님이 걸고 계시다고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복음을 위해서 수종드는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는 도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의 복음이 만방에 알려지고 주의 거룩한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는 역사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여러 가지 행사를 교회에서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결과는 항상 비참하지 않습니까?
인천에 살 때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그 중에 감리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을 전도를 열심히 시키는 교회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은 시상을 하는데 성경, 찬송을 주는 것이 아니라 칼라TV, 냉장고, 세탁기를 상품으로 줍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 교회에 수종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전도의 동기가 되고 있는지, 정말 회원들을 모집하는 것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정말 정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종들지 않아도 하나님의 교회는 주께서 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헤아림을 받아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복된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열방의 생명수처럼 멈추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역사에 감격하는 이 내적인 변화가 교회 속에서 일어날 때에 되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무언지 압니까?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내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선교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 선교사들을 다 보내면 필리핀에서 만납니까? 마닐라에서 만난 선교사를 조금 있으면 왜 LA에서 다 만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대부분의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받고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례요한은 그런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에 보냄을 받아서 광야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 앞에 큰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례요한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불현듯 요단강변에 나타났습니다. 광야에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모래바람만이 일고 오가는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외쳤는데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 사면에서 나왔습니다. 우린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아파트에 들어서서 목회를 하려고 합니까?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광야였습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힘있게 외쳐지자 사람들은 나왔습니다.
제가 작년 가을에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설교 끝나고 간식을 들으라고 그러면서 다과를 펼쳐놨는데 어느 집사님이 인사를 해요. 경희대학교 회계학과 교수래요. 그러면서 주욱 이야기를 하는데 개척교회인데 제법 자리가 잡혔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건물을 하나 샀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30년 전에 교회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주일학교 학생이었거든요. 집사님 요새는 교인들이 너무 편하게 믿죠? 신학생들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해도 요새 평균 2억을 얘기하데요. 2억은 가져야지만 무언가 해본다고 하는데. 그러니 무슨 개척을 엄두나 꾸겠습니까? 옛날에는 천막치고 그 다음에 가마니 깔고, 시유지에서 그렇게 개척을 시작했는데. 그레도 성도들이 모여서 뜨겁게 위해서 기도해 주었는데. 요즘들은 교회가 그렇게 개척을 하면 교인들이 안옵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뭐라고 그러시는 줄 아세요? 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교수님 지금도 그때처럼 말씀에 능력이 있고 은혜가 되면 가마니 까는 교회에 가서 봉사할 교인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는 강단의 문제고 강단의 문제는 설교자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면에서 그에게 모두 나왔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그에게 갈 길을 물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도 진리의 말씀이 능력있게 선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 요한과 같이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종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 빈들이든, 사막이든 주님은 사람들을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참되게 증거하고 힘있게 외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의 흙먼지에 묻혀 어린시절과 청장년시절을 보낸 무명의 들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그 시대를 향하여 외치는 자가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그의 불붙는 메시지 앞에 유대인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사두개인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임박한 하나의 심판 앞에 오금을 떨었습니다. 얼굴에는 교만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해야 하오리까? 가슴을 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능력으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하는 그의 시대에 대항하여 마주하는 자로 큰자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신학교에 와서 보면은 교회의 미래가 컴컴합니다. 컴컴합니다. 30년 전의 목사님들은 지금 신학생들보다 훨씬 경건했습니다. 그리고 훨씬 헌신된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대학교 떨어진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는 것이 태반입니다.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이 30년 교회를 섬겼는데 한국 교회는 사향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철부지들이 이렇게 훈련받고 나아가서 넥타이 매고 전도사, 목사라 그러면서 껍죽대고 다니는 시절이 올 때에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면 세상을 나갑니다. 신학교 들어온지 1년만 되면 전도사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이 뭐하는 것입니까? 정말 전도사와 목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의 자격들이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신학과정을 마쳤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는 먼저 그의 영혼을 말씀을 주시는 일들이 있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스스로 선지자로 지망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 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기차를 타고 오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주님, 나의 가슴 속에 이 세상을 향해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말씀들이 사무치는 가슴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의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 도저히 살아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설교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외쳐도 강단에서 심각하게 불꽃이 튀지 않고 있습니다. 말은 많습니다만은 그러나 그 말씀이 파도와 같이 다가와서 교만한 영혼들을 모래성처럼 쓸어내버리는 일들이 그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얼굴에는 교만함이 뚝뚝 떨어집니다.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목회자가 비굴해 보이는 그런 교회 시대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무얼 외칠지에 대해서 무얼 공교할 학문에 대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먼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증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는고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거되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그리고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주는 일들이 그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만은 십자가를 보고 온 증언, 골고다 언덕에서 주의 십자가를 만지고 내려온 피묻은 설교자의 손을 보여준 증언들이 왜 그치고 있느냐 말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말씀을 외치는데 듣는 성도들이 뼈 속 깊은 곳에서 사무쳐서 골수에 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러한 심각함이 설교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할 기회도 많지만 들을 기회도 참 많습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선포되지 않고 설교자가 그 설교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밑에서 듣는 회중들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지 전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 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멸망 직전 유대의 마지막 시대를 외롭게 지키면서 민족의 멸망을 눈물로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경험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예언을 거절하며 핍박하던 그 시대에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수치와 모욕거리가 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침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열두제자를 보내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의 제물로써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렸던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의 심령 속에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는 그리스도라 제목 붙일 수 있는 한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로마 옥 속에 갇혀 몸은 매였으나 목을 멘 밧줄과 차꼬가 묶어둘 수 없었던 메시지가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소정의 과정을 마치매 신학교는 졸업장을 주고 필요한 전철을 마치면 시험한장 치르면 노회는 안수를 줍니다. 교회는 목자를 초빙하고 이 교회에서 초빙하면 저 교회로 가고, 저 교회에서 초빙하면 또 이 교회에서 옮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학훈련을 마치면 수료증을 받고 선교지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패역과 불신앙이 소용돌이 치는 이 세상과 그리고 안일한 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길들여져 있는데 교회성도들을 변화시키기에는 --- . 먼저 고요히 무릎을 꿇고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임해서 그것이 내 골수에 사무쳐서 정말 내가 죽더라도 이 말 한마디는 하고서 죽고 싶다라고 하는 사무치는 진리가 교회를 강단을 섬기는 우리들의 가슴에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메말랐던 강단의 샘은 터지고 외치는 자 많건만은 생명수가 없어서 갈하던 영혼들이 말씀에 갈한 목을 축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왜 그렇게 큰자가 되었느냐?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이야기는 그냥 어떤 말씀을 설교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의 가슴 속에 세상을 향하여 주님이 직접 하시고 싶은 말씀을 요한에게 주신거요. 이것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함께 임하는 것이 선지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강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강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기능입니다. 강단은 뭘 보여줍니까? 교회의 뱃머리입니다. 성도들은 모르는 일들을 강단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해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주님은 우리 교회의 이러이러한 죄악들을 심히 가슴아파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이 환란과 큰 시련과 핍박 속에서 교회를 섬길 소망을 잃어갈 때에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세상에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너희에게 승리를 주겠노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을 펴고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가운데 주님이 그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강단이 이렇게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방향을 못 잡아 줄 때에 수없이 많은 일을 해도 표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에 --뭡니까? 성전 건축하면서 한번 쫘악 몰아요. 그러더니 기도해야되겠죠? 돈 내야겠죠? 부흥회 해야 되겠죠? 섰다 앉았다 하면서 또 작정금액도 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고 나면 성전 지어놓고 봉헌하고 나면 또 교인들이 해이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2단계 발동을 거는 거예요. 땅을 사자, 왜? 수양관 짓자, 그렇게 나가는 거죠. 한번 또 모으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이 은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외에는 성도들을 잠시 마음을 들뜨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도 집단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신앙을 세워주고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을 소유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통해 은혜 받은 사람이 혹가다 있을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주께서 교회를 움직이시는 방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 사모하기 위해서는 오늘 요한에게 이 말씀이 임한 곳이 빈들이었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주목을 하면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가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그말은 '다바르'에서 왔어요. 왜 이런 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체험이 향기로운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이 아니었겠습니까? 랍비들이 열심히 율법을 강론하던 회당이 아니었습니까? 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습니까? 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을까요? 왜 율법을 낭독하던 그의 공부방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실로 우리들로 하여금 무얼 할까하고 팔을 걷어 부치고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 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의 옷자락을 붙드는 말씀입니다. 신통치 않지만 교회를 조금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길 때 주일날 말씀을 열심히 증거하고 분주하게 교회일을 다 보고 저녁 때 혼자 집에 돌아갈 때면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공허함이 가슴 속에 밀려들 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들이 제직회 그리고 성가대 연습, 교사 수련회 다 마치고 돌아가서 고요히 여러분 침실에 누웠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허망함을 느껴보신적은 없습니까? 빈들이 무엇입니까? 팔레스타인의 빈들은 광야, 이 광야는 아기자기한 숲이나 운치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 추위를 피해야 하는 곳입니다. 맹수들의 습격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빈들이 의미하는 바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과만 고요히 만나는 긴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조국의 교회의 목회 형편은 너무나 힘들고 그런 목회 현장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유린당하기가 일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빈들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온갖 속된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런 곳들을 말합니다.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홀로 서 있게 되는 시간, 그런 영적인 훈련, 매일의 그런 빈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탐욕으로 물든 심령, 분주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생활, 이런 예배의식. 예배의식은 또 그렇게 복잡합니까? 복잡하면 뭐합니까? 사람들이 수없이 앉았다, 일어섰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말씀의 능력이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지면 예배는 경건해지나 이런 일들이 그쳐지면 예배의 시간은 휴식시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빈들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지식에 대한 과도한 탐욕들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들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께로부터 주시는 말씀과 나의 목양지를 향한 주님의 뜻들을 알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들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시대의 강단들은 쇠약해 있고, 쇠약한 영성은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으르렁 거리는 마귀의 세력들로부터 성도와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배우기를 원하고 교육의 이론과 화려한 목회의 방법론과 수많은 성경공부의 이야기들이 우리들 속의 많은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있지만은 그러나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에는 모래성처럼 연약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된다고 외쳐도 성도들은 말씀대로 살기를 즐거워하기보다는 죄악의 세상과 함께 짝하기를 즐겨합니다. 세속의 물결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고 사회개혁의 몸부림은 있어도 불신앙의 이 시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을 인하여 괴로워하는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의 능력들은 보기가 어려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사람들은 한없이 교만합니다. 말씀은 외쳐져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은 죄인의 심장을 찔러 쪼개는 진리의 능력은 파장을 맞고 있습니다. 많은 배운 사람들의 설교내용은 화려합니다만은 파도처럼 보여도 그 물은 죄인의 발목만 적시고 빠져나갑니다. 이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상담을 하지 않고 심방을 하지 않아도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수천명의 영혼들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고 통하였습니다. 누가 진리의 말씀을 해일과 같이 몰고와서 패역한 이 시대의 바벨탑을 쓰러버리고 여호와의 깃발을 성도들의 가슴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척박한 조국의 땅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 가득하도록 만들어 줄 자가 누구입니까? 성도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들의 심령이 물같이 녹아지고 자기들의 마음이 촉농같이 녹아져서 주 앞에 탄원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가 영혼 속에서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생명샘을 바라보고 있으나 외치는 자 많은데 생명샘은 말라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므로 큰 자가 된 요한을 보십시오. 한 시대를 일깨워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광야에서 극심한 훈련을 받으며 영성을 키워갔고 영력을 쌓아갔습니다. 한 시대를 일깨워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포자가 되기까지 그는 그토록 긴 기간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영적인 연단과 체험을 가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 외롭고 쓰라린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그의 심령에 불붙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로 세우셨습니다. 외쳤습니다.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앞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율법사들에게 눈물 흘리는 것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통곡하며 자복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돕는 자도 없고 동역자도 없으면서도 홀로 광야에 등장했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깨웠습니다. 그는 비명에 갔습니다만은 그의 외침은 남아서 그 시대를 깨웠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불현듯 주 앞에 설 것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주의 거룩한 심판대 앞에서 오늘 이 말씀도 기억하며 조국의 교회를 섬겼던 종들로서 손잡고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인생을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나는 내 목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노라고 말했고, 나는 나의 인생을 보람있게 보냈다라고 우리의 인생을 마감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그분 앞에 설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풀 같이 마르며, 우리의 자랑하던 모든 아름다움도 들의 꽃과 같이 시들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주 오실 앞길을 예비하기를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기대를 걸고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던 이 세상을 위해서 말씀으로 수종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들의 선포를 통해 교회와 그리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이 내 조국의 동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 큰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크게 여겨주셨을 때 세상도 그 앞에 꼼짝 못했습니다. 학위도 없었습니다. 정규 신학교도 안졸업했습니다. 박사 밑에 수업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임했고 그의 영혼은 외치고 싶은 진리로 불타올랐습니다.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광야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광야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②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2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눅 1:15上).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희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낳음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슬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8-17)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리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저는 오늘 누가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세례요한의 탄생에 관한 예고의 기사 속에서 첫 번째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생애를 오늘 성경은 단적으로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세 가지 일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가 주 앞에 큰자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저는 오늘 첫 번째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와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려고 했던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권의 복음서를 너무나 깊이 묵상하고 또 연구하고 파헤쳐야 합니다. 다른 모든 성경도 그렇지만 특별히 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는 철저히 그 기사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그리고 그분의 구주되심을 선포하고자 기록된 이 4권의 복음서가 모두 한결같이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세례요한의 생애를 상세하게 일치하게 전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줍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으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결코 제외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예수그리스도의 등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는데, 주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였다고 성경은 거듭거듭 말합니다. 그는 구약의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그의 인생은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짧은 생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을 가르켰던 그의 삶은 오늘도 그와 같은 길을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자 하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 깨워서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세례요한의 출생은 예수님의 탄생과 버금가는 이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제사장 사가랴와 늙어서 이미 수태의 능력을 잃어버린 엘리사벳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식을 주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름까지 지어주셨는데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네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요한은 히브리어 동사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진 '하난' 그리고 '야훼'라는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실 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실 자', 그런 뜻이 되겠지요. 오늘 본문은 그의 태어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된 것인지를 말합니다.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의 생애는 부모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인생이 아니었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청년과, 소년과, 장년시절을 모두 빈들에서 자라야 했고, 따라서 아주 어린시절부터 예루살렘과 부모의 곁을 떠나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과 친척들이 있는 예루살렘 거리를 떠나서 허허벌판의 광야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삼고, 약대털을 의복삼아서 지내는 소박한 삶 속에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가정은 유복했을지라도 그는 이 모든 삶의 물질적인 누림에서 벗어나서 광야 속에서 지내는 삶이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말년은 정적인 헤롯에게서 박해를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결국은 그의 목이 떨어져서 헤롯의 딸에게 준 선물거리가 되어버린 비참한 생애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아무리 들쳐봐도 그의 부모는 끊임없이 그로 말미암아 애통하며 가슴이 아팠을 것이며, 그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든 광야의 위협과 광야의 외로움과 광야의 고통과 정치적인 핍박과 종교적인 핍박 속에서 괴로움으로 얼룩진 인생을 보내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험난한 생애를 맞게 될 세례요한의 태어남이 너희 부모와 그리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어째서 그토록 고난과 고독으로 점철되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의 태어남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은 계속해서 그가 출생한 이 사실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전해줍니다. 이는 헬라어 성경에는 바로 '왜냐하면'으로 기록됩니다. 왜냐하면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 중 많은 사람들을 주 하나님 곧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 속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 구주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매어있고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이 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로 드려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초라하다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드려진다면 이 세상은 우리의 인생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애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은 첫 번째로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의 인생이 불신앙의 어둠 속에 잠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워 주 곧 하나님께로 많이 불러오겠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위대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요한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이 위대한 일을 위한 사역자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기 살아있고, 이 세상은 지금도 거대한 불신앙의 물결 속에 수많은 영혼들이 고통 속에 떠내려 갑니다. 우리들이 잠들어 있는 이 시간에도 지옥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살아있고 이 세상의 속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살아있음과 우리의 죽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속에 죽어져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태어남과 죽어감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해서 그의 인생이 예정되었음이라.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 중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 세례요한 때보다 더 험한 불신앙의 물결이, 타락의 물결이 이 시대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실 때 거셨던 하나님의 기대는 지금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도 똑같은 기대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은 이 세례요한이 이 세상 속에 큰 자가 되어서 불신앙의 세계를 호령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준비시키셨는지에 대해서 똑바로 눈여겨 보아야 될 것입니다.
같은 준비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준비에 대해서 오늘은 세 가지 문장으로 말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다.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부문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주의 두 눈 앞에서 크게 되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에스타이 가르게 메가스 에녹 키온 큐유'.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서 크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세례요한은 하나님 앞에 큰 자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의 인생은 조금도 큰 자다운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저명한 가문의 후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현란한 학식을 교육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화려한 신학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년시절을 광야에서 보냈고, 그의 신앙과 신학도 광야생활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복음 역시 모래바람 일어나는 황량한 들판에서 외치는 외로운 외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인인 헤롯을 번뇌케 하는 설교의 능력을 받았으면서도 의를 외치던 그의 몫은 여호와에게 주는 선물거리로 전락되어버리는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주님의 두 눈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큰 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큰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름없이 30여년의 세월을 광야의 흙먼지 속에 묻혀 지나야 했던 들사람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눈앞에 큰 자가 되게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마어마한 화려한 신학의 지식이 그를 하나님 앞에 큰 자로 만들었습니까? 사람들이 능가할 수 없는 수많은 학위가 그를 하나님 눈 앞에 큰 자로 만들었습니까? 만약에 그가 수십 개의 학위를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큰 자로 보셨을까요? 만약에 그가 수십 개의 학위를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큰 자로 보셨을까요? 만약에 그가 수많은 사람을 압도하는 놀라운 수사학의 지혜를 가졌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보고 큰 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가 처음 선포를 시작한 이 위대한 사역의 첫 장은 누가복음 3장에는 기록했습니다. 아까 읽어드린 대로 누가복음 3장에는 7명의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들이 나오는데 한결같이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준 본디오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정부로 취해서 인륜을 땅에 떨어뜨린 헤롯의 이름이 들어져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종교재판을 처형한 가야바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안나스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부패와 도덕에 눌려 하나님의 의가 숨쉬지도 못하던 배반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에게 임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이 고통스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자 세례요한에게 임하자 그는 주님의 두 눈 앞에 큰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불신앙으로 타락의 길을 가던 그 시대에 회개를 선포했을 때 우리는 이제 그가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라 큰 자가 된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나아와서 그가 선포하는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자들이 되었을 때 그가 큰 자가 되었음을 목격합니다. 당대의 종교의 정치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치고 도전하는 요한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었음을 봅니다. 아무도 돌아보아 주지 않는 타락의 시대 속에 세례요한은 홀로 마주서서 역사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그가 큰 자였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오직 두 가지 사실만이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큰 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하나님의 눈앞에 큰 자로 만들었습니다. 들판에서 버림 받은 것처럼 자라온 그의 삶이 하나님의 눈 앞에 그토록 큰 자로 변화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가복음 1장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어린시절부터 광야의 선포를 시작하기까지 계속해서 광야속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 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말한 다음에 그 다음에는 곧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그리고는 회개하라 외치면서 등장하는 30세 이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어가는 것이 예루살렘 거리에서가 아니라, 모태에서부터가 아니라, 광야에서였음을 우리들은 보게 되는 것입니다 . 도대체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한데 성경은 그저 두 가지 사실밖에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광야에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과 또 하나는 광야에서 다 잊고 이제는 외치기 시작한 직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 그는 결코 큰 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타이 메가스. 그는 크게 될 것이다. 미래인 것입니다. 그는 큰 자가 되어갈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큰 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깊이 이상하게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줍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버지는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경건한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읽었고 율법을 들었고 율법을 외웠고 율법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30년동안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연구하며 탐구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뭐가 부족한 것처럼 세례요한을 세상으로 내보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했다는 말씀을 -------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을 뜨십시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 하나님! 이 시간에도 이 심령들을 깨우셔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시기를 원합니다. 단순한 지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 받게되는 신학적인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 시대 속에 외치고 싶으셨던 그런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자 그의 마음은 불붙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빈들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광야의 흙먼지에 묻혀서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익명의 들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얼마나 뜨거운 메시지로 많은 유대인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두려워 떨며 군인과 세리들이 죄를 자복하고 어찌해야 하오리가 하고 가슴을 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시대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선포 앞에 번뇌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슴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나서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받았다고 믿으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지자로 지망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에 먼저 그들의 가슴 속에는 목숨을 걸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린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멸망을 눈 앞에 둔 유다의 역사의 마지막 비탈길에서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험은 이같은 사실을 증거합니다. 자신의 예언을 거절하며 핍박하던 시대를 향해서 다시는 예언하지 않으리라 고백할 때 그는 마음 속으로 일어났던 뜨거운 열망을 말합니다. 다시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거니와 내 가슴에 불붙는 것 같아서 내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12제자를 보내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스데반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돌에 맞으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제목붙여질 수 있는 한편의 설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옥 속에 갇혀 그 몸은 매였으나 그러나 그를 매였던 밧줄과 차꼬가 묶어둘 수 없었던 메시지가 사도바울의 가슴 속에 불 붙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노라. 지금도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라. 저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향한 사랑이요, 저들은 멸망의 사람들이요.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면 신학교는 문교부 법에 의해서 졸업장을 줍니다. 필요한 절차를 마치면 노회는 여러분들에게 안수를 줍니다. 정해진 요식행위를 거치면 교회는 여러분들을 목사로 초빙하거나 일꾼을 ---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그것만으로는 불신앙의 이 거대한 물결에 휩싸이는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불붙는 말씀이 주어지기를 간구하십시오. 이 시대를 향해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여러분들의 심령을 사로잡히게 하도록 구하십시오. 주님은 배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목놓아 우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등진 예루살렘 성,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그분이 우셨다고 하는 기록을 “클라이 우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서 엉엉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통곡하셨습니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외치면서 예수님께서는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와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열심을 보십시오. 이 열정을 보십시오.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 . 이 말씀이 있기 전에는 세상에 나가기 전에 광야로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있기 전에는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광야에서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립시오. 끝까지 이 말씀이 임하지 않으시면 차라리 광야에서 버림받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쓰러지십시오.
세례요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에 큰자가 되었지만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요한 의 생애를 들쳐보면은 끝까지 쫓아다닌 것은 광야, 헬라어로 에레니서스. 세례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곳이 빈들, 혹은 광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수많은 시사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광야라고 하는 “미르바르” 이말은 “다바르”에서 말씀에서 나온 파생된 명사 -- 우리들에게 수만은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나와 있던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왜 화려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거리가 아니었을까요? 왜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왜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던 하나님의 회당이 아니었을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던 그의 공부방이 아니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기 하기 전에 먼저 그를 광야에 두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나가 있던 요한에게 임했고 그것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둔 고된 훈련을 마친 후에 있었습니다. 죄악이 물마시듯 하면서 살아가는 삶, 분주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생활, 뜻없이 되풀이 되는 예배의식, 경박한 기도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이 여기는 바쁜 생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말씀---. 주님은 빈들에 외롭게 서 있는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빈들에서 어쩔 줄 몰라서 말에서 떨어져 주저앉아서 어쩔줄 몰라하던 바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와 같은 고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던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이 세례요한에게도 똑같이 외롭고 부족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들판에 서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고, 이 세상에 지식에 대한 탐심이 과도하고, 이 세상의 일에 너무나 몰두하고,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분주한 나머지 위에 계신 하나님을 ----- 관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위로는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꿀 필요를 느끼는 마음들이 사라져 버렸단 사실인 것니다. 이 시대에 강단의 쇠약한 영성은 끊임없이 으르릉대고 있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 많은 교육이 있고 가르침이 있습니다만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에는 모래성처럼 연약합니다. 그많은 교육의 이름들과 화려한 신학과 아름다운 목회방법론들이 이 시대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회개혁의 몸부림은 있어도 불신앙의 이 시대로 인하여 고민하며, 자기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영광스러운 말씀의 능력은 보기가 어려워졌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람들의 박약하고 초라한 영성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큰 자가 된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한 시대를 일깨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 시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그 시대를 흔들어 깨워서 예수그리스도 앞에 세웠습니다. 이 짧은 외침을 위해서 그는 30년 가까운 생활을 각고의 노력 끝에 고통을 받으면서 그분 앞에 홀로 선 광야의 ----였습니다. 광야에서 극심한 훈련을 쌓으면서 영성을 키워갔고, 영력을 쌓아갔습니다. 급기야는 이 시대가 그의 설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큰 자가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뒤로 큰 기강이 그 짧은 외침이 불과 일이년 밖에 되지 않는 그 외침이 그리고는 그것도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그 죽음을 위해서 세례요한은 30여년의 세월을 외로운 광야에서 그 분 앞에 홀로 무릎을 꿇는 연단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 살아있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우리의 삶의 가치라고 믿고 있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겠노라고 맹세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거대한 불신앙의 물결 속에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떠내려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거대한 타락의 물결이 삼킬 둣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이 시대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대 속에서 살아 있고, 또 죽어 가고, 우리들이 아무리 바쁘게 살고, 내가 내 인생을 보람있게 마쳤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거스리는 이 시대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 저는 이 시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오, 주님. 살아있는 나의 생애와 죽어가는 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없거들랑 오 하나님 나는 이 세상에 살아갈 ------------.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주시고, 수많은 당신의 사랑하는 선지자들을 내어버리시고 죽게하시고, 그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큰 자로 여기셨던 세례요한의 목을 떨어지게 하시면서까지도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 이 시대 속에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나 타락해서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고소하는 이 불신앙의 시대에 세례요한의 시대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시대에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도덕적인 혁명이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의인들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죽인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비록 1~2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사람이었지만 그는 한 시대를 열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다 마친--- 하면서도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큰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자일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들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앙 속에 임한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것입니다. 30여년 가까운 오랫기간동안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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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시대가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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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소주를 먹지 아니하며
“이는 저가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말씀 증거자로서 보내시기에 앞서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시는 가운데 특별히 그에게 세 가지로서 하나님께서 준비를 시키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경이 오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먼저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평탄케 하는 것, 이사야 40장에 나온 데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고 외치리이까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마침내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영광을 보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그리고 낮아진 마음은 돋우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평탄케 되어지는 일들을 이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뭘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그 입을 통해 증거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 그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받은 마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캄캄하게 400년 동안 하늘이 닫히고 주님의 음성은 그쳤습니다. 선지자들의 선포가 있을 때도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을 살았는데 400년 동안 하늘이 닫히고 그리고 계시가 그쳤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와서 이 세상에 증거해주는 선지자의 선포가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400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말씀하신 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닮고 싶은 사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흐르다보니까 요나단이 훨씬 멋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바울을 한때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오히려 바나바가 더 훌륭한 사람 같았고 바나바를 좋아하다가 또 마가가 훨씬 훌륭한 사람 같고 오락가락하다가 한 7년 전에 정착했습니다. 그게 누군가 하면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았지만 그러나 요한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말씀 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우리들의 모본이 다른 성경에는 없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그것은 이 사람은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처럼 이적을 행하므로 커다란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직접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했다는 점에서 모든 선지자들 위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세력을 규합한 것이 아니라 오직 준비한 말씀을 외치다가 그 외친 말씀 때문에 죽어갔던 그런 선지자의 모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을 보면 참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는 이 놀라운 일을 예언하는데 있어서 세례 요한을 세 가지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첫째는 주 앞에서 큰 자로 남게 되었다. 이게 작년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인가 하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으셨다. 세 번째 것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만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며” 한 것은 요한이 누가복음 1장 80절에 보면 갓난아이 때 광야로 보내집니다. 그래서 거기서 30년 가까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거기서 영력을 쌓고 거기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듣게 되는 하나의 영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말씀 선포자인 세례 요한의 영적인 권위의 준비에 대해서 증거 해주는 것이라면 오늘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이 말씀 증거자, 마지막 증거자 세례 요한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 증언자로서의 요한의 삶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토록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준비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능력 있는 선지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과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포도주는 물대신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소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되어있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시케라이’ 약간 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합니다. 알다시피 자연적인 포도주 속에서도 숙성된 포도주에는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아주 귀해서 옛날에는 우비때 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두고 음료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물이 귀한 지역이었습니다. 수질도 아주 좋지 않아서 땅을 파도 그 물을 계속 먹으면 다리가 퉁퉁 붓고 그 다음에 쓴물이 되어서 먹을 수가 없는 그런 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주를 만들어왔고 그것을 음료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난받으신 일이 “너희 선생은 어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랬습니다. 마신 것이 포도주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포도주나 소주의 용도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제재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영적인 인물로 준비시켜서 주 곧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요한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는 삶이었다. 하였습니다. 주님도 거침없이 드셨던 그 포도주와 소주를 왜 요한은 안 마실 것이며 그 안 마시는 것이 주 곧 하나님께로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을 이루는데 중요한 준비가 되는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대답을 위해서 그가 사도들과는 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에 마지막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율법 아래 태어난 선지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신약이 뭐라고 가르치는지를 가지고 설명해서는 안 되고 율법이 뭐라고 그러는지를 가지고 설명해야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6장을 보지 않고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민수기 6장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포도나무 소산의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 것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만 드려진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이 왜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는지 그런 것까지도 따져볼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나실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이 나실인들은 하나님 앞에 특별히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율법이 모든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명하는 것들을 나실인들은 혹은 지켜서는 안 되거나 혹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 하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엇입니까? 성경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부모가 죽었을 때도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나실인들은 하나님께만 드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는 이 요한에 대한 예언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언인 것입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질 재물과 같이 살아가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실인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자신의 인생을 드리기 위해 몸을 구별하였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시신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생이 그럴 것이라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그 일만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되어야 할 인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역자 된 말씀의 증인된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되어야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로 요한의 인생은 하나님께만 드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꿈도, 그의 소망도, 그의 모든 기대도, 그의 마지막 목적도 모두 하나님 한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만 드려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먼저 그는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이 ”나자르“라는 말입니다.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파도시와(?)비슷한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이 쟈르다. 짤라내다. 라는 동사 카도시에서 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헌신된 인생이 되기 위해서 먼저 세속과 구별되는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 위한 좋은 비전과 훌륭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를 위해 살기를 원하는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늘 찾으시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 이것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나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에 있어 보여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완전한 헌신으로서의 삶을 나실인과 다름없이 요한이 살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속된 것과 완전히 구별된 진정한 거룩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따로 떼어놓은 일에 익숙해져있습니다. 헌신을 익숙하게 알고 있으나 거룩함은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출생에 관한 예언과 그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갔던 그의 생애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집을 떠났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며 도전하는 광야의 선포 사역으로 보건데 우리는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뒤에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요단강에서 주의 진리를 증거하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로부터 사랑하는 부모와 그리고 이웃과 그리고 친지의 곁과 그리고 화려한 예루살렘 곁을 떠나서 모래바람이 불고 있는 황량한 유대벌판에 서서 그곳에서 훈련받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고독과 씨름하고 그곳에서 외로움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모든 기대와 사랑을 끊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모래바람이 귀에 친구가 되어주었고 광야에서 일어나는 외로운 흙먼지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속에 들리는 이 거룩한 진리에 자기의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 자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증거하는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매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갔습니다. 온전한 거룩함을 위해서 그의 모든 생애를 붙잡힌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자가 없고 요한이라는 그 이름은 어렸을 때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이제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그는 누가 한사람에게도 명함을 내밀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이 많은 세월을 광야에서 외로운 훈련과 연단으로 그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 광야에서 수염이 더부룩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리고 약대 털옷이나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모래바람 날리는 황량한 벌판에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영적인 훈련과 연단을 받았을까요?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 그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떠나서 외롭게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말씀과 기도로 광야의 생활을 지내어야 했습니까? 외롭고 피나는 광야의 훈련이 끝나면 그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의 생애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인생이었고 그 짧은 시간동안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몇 편의 설교를 위해서 그의 인생이 철저히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오직 우리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매어있었습니다. 우리처럼 목회의 성공의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학위를 목표로 세우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었고 꿈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고 소망은 오직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져야 하리라. 그는 결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적지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 다리를 지나 강을 건넌 후에는 다시 그 다리를 돌아보고 그리워하지 않는 것처럼 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를 원했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주기를 원했지만 일단 자기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서는 잊혀지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선포와 증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의 생애는 어떠해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는 온전히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의 완전한 헌신은 세속과 구별됨으로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요한의 인생에 대해서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 나실인의 구별에 대한 예언을 기초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초라한 들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흔히 누리고 있던 모든 문화적인 해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토록 좋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인생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그 사실을 빌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그것이 그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로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메뚜기, 석청 그리고 약대 털옷, 어떤 사람에게 요한이 이렇게 살았다고 하니까 화려한 삶을 살았군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천연모피에 무공해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교수님 자연 꿀이 얼마나 비싼 줄 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지금이야 천연모피가 비싸지만 들판에 죽어간 약대 가죽을 벗겨서 입은 그 옷, 그것은 자색 옷도 아니었고 고운 베옷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조건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역사적인 선포를 시작할 때 누가 그의 옆에서 목회의 동역자가 되어주었을까요? 누구의 소명을 받았나요? 누구의 추천서를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광야에서 요단 강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일생을 살았을 때 성경은 말하기를 유대와 요단강 사면에서 예루살렘과 요단강 사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왔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단번에 그의 선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권세 있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의 설교를 그렇게 능력 있게 하였습니까?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기에 그 시대에 흔히 통역되었던 세리들이 늑징하는 것,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군병들이 강포하던 것,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탄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 그의 마음에 분노와 아픔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빌미로 첩을 삼고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는 헤롯왕의 축적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으로 떠올랐기에 그 설교를 하면 죽을 텐데 그 설교를 하고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비명에 갔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의 풍조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세속과 구별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안일한 그 시대의 종교계의 풍조와도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과 그 시대로부터 그를 구별해놓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그의 정치적인 적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받음이더라. 이것이 바로 패역한 헤롯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한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웠습니다.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와 그 시대의 교계의 풍조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경건을 빼놓고는 요한의 인격을 생각할 수 없고 의로움을 떼놓고는 그의 삶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품은 그의 내면속에 자리하고 있는 거룩함과 구별시켜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웠기에 (?)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경건했기에 그 시대의 타락은 그로 하여금 도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탈 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졌다고 말했습니다. 도덕적인 사회가 되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그가 마음 아파하고 책망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순결했기 때문에, 그의 심령이 거룩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불의가 그에게는 유독 아픔으로 다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직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직이 성직자를 만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직은 성직이고, 성직자는 성직자입니다. 성직이 결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거룩하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일들도 그 말씀의 사역자들로 저절로 거룩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 들어와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빈들에서 외로움 속에서 세상에 대한 모든 소망을 끊고 그분의 거룩함 앞에 마주할 때 우리가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헌신에 있어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나실인은 부모 형제가 죽을 때도 그 시신에 가까이 갈수 없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일반원칙에 비추어볼 때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율법과는 다른 특별한 율법 아래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시대가 아무리 변화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렇게 나실인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하나님을 믿는 평범한 성도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불러내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내신 것은 여러분들이 바로 마음과 삶과 인격이 다른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과는 구별되도록 나실인처럼 구별된 헌신으로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야 하고 혼탁한 이 교회의 풍조로부터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약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 주께서 이런 나라를 바벨론의 심판의 칼 아래 붙이기 전에 예루살렘의 상황입니다. 거룩한 도성, 율법이 시온에서 나게 하는 그 예루살렘의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타락한 도시를 보십시오. 무엇이 그때 예루살렘과 다릅니까. 우리가 이 같은 도시의 정신과 시대의 풍조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불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고민하고 고통해보지 아니하는 설교자가 어떻게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쓸어안고 가슴을 찢으며 거룩한 성전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거리 사이 성전 문 앞에 주저앉아 가슴을 찢고 고통하며 수염과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였던 에스라와 같은 선지자가 될 수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서 누가 이 민족을 향하여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를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어리석은 시대가 누구의 말을 듣고 가슴을 칠 것이며 누구의 음성을 듣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타락한 죄악의 물결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모든 풍조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지은바 된 새사람을 입어야 될 것입니다. 결코 이 시대 속에서 여러분들을 통하여 증거 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 주 오실 길을 예비 하고 거룩한 구속의 십자가 앞에 강철같이 굳어졌던 이 백성의 뺨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구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초라했습니다. 외모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요즘에 이토록 탐내는 학위도 없었습니다. 훌륭한 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장도 없었습니다. 길목이 좋고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목회지가 그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노회장의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동역자도 없었고 개척멤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외로운 광야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처음 외치는 그 음성은 광야를 휘돌아 지나갔지만 그 말씀은 살아서 예루살렘과 요단강 건너와 모든 사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선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고 외침은 회중들의 영혼을 두드리는 강한 설교였습니다. 유대백성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모두 무릎을 꿇고 굴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할 것도 없는 짧은 인생은 자기의 목을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에게 선물거리로 주기 위해서 잘라졌습니다. 소반위에 담겨져서 하나님 앞에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포는 살아서 그 시대를 뒤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 오신 그 앞길을 사람의 마음속에 예비했고 400년 동안 닫쳤던 하늘의문을 열고 하늘로부터 그 빛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오신 그 빛을 사람들에게 믿어지게 만드는 위대한 일들을 함으로 750년 전 피를 통하는 아픔으로 외쳤던 이사야의 메시지를 이루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요한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까?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기에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살기를 원합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액자에다가 어떤 사람이 “하면 된다.” 이렇게 써놓은 사람은 ‘매일 해도 안 되는 사람이 그 집에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실하자” 그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이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성실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에도 액자가 하나 있습니다. 커다랗게 하나 걸어놓고 매일같이 하루에 세 번 정도 그 앞에서 그 액자를 읽습니다. “설교자의 기도” “하나님이여 면류관이 쓰일 내 머리끝부터 복음을 신을 이 발끝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흐르고 있다면 그 피를 출혈시켜주옵소서. 내 몸에 있는 살 중에서 단 한 점이라도 주를 위해 찢기기를 싫어하는 살점이 있다면 예리한 칼로 그 살을 도려내어주시옵소서. 나의 몸과 나의 모든 영혼이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은 이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두운 한 시대를 하나님께서 깨우신 그 손에 붙들린 요한은 삶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마음이 열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일, 이것이 그가 살아있는 이유였으며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공경하며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에 녹아지고 마침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온 땅을 덮는 이것이 요한의 소원이었기에 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하나님 앞에 소원했던 것처럼 그는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름은 빛났고 그의 이름은 쇠하여갔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그의 생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혔습니다. 자기가 다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것, 그것이 그의 유일한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