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턴십 2
녹취자: 김경애
발표자
본 책을 통해서 세계관의 변화가 지극히 성장한 가운데 놓여있고 철저하게 특별계시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들과 실질적인 삶속에서 성도들의 목양에 있어서 괴리가 발생하는 것은 신학이 하나의 통합성을 이루지 못하고 올바른 체계로써 각 분과의 연합이 되지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희 순모임에 있어서도 순원들과 나누는 과정 가운데 저희가 다 모태신앙이기는 하지만 온유와 부조화는 차치하더라도 소망에 관한 이유를 이야기할만한 체계가 부족하다는 고백에서 실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런 신학들이 체계화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서가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신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하는지와 바르게 읽기를 회피하는 나태에 관한 해결함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사랑하는 것만큼 알면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P44에서 성경을 신학적으로 묵상함에 있어서 그것을 교회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굳이 당시를 이야기하면 이를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귀납적 성경읽기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십니까? 흔히 성경언어와 관련해서 원어로 읽는다는 것은 앞뒤 전후 문맥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많은데 커다란 문맥은 교리가 투영되지만 사실 강의시간 내에서는 귀납적 읽기로 크게 볼 때가 왔는데 이 둘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목사님
오전 내내 그 이야기를 하다가 와서 지금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맥이 빠지기는 하는데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Presupposition없이 사물을 대하거나 Text를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나는 Presupposition 없이 Text를 읽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Presupposition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읽는 내용들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해석과 해석자는 순환관계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오늘날 현대의 성경해석학이 완전히 객관적인 자세로 성경 속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미 자체를 선입견 없이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 해석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 모두 신비주의처럼 보이는 것이고 제자훈련을 한 사람이 성경을 보면 모든 성경구절이 소리를 치면서 제자훈련을 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 그래서 여러분 칼빈에게로 돌아가면 칼빈이 성경을 먼저 읽기를 바랐겠습니까? 아니면 기독교강요를 먼저 읽기를 바랐겠습니까? 바로 회심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성경을 읽기를 바랐겠습니까? 기독교강요를 먼저 읽기를 바랐겠습니까? 기독교강요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기독교신앙의 얼개에 대한 이해와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는 해석학적으로 순환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이 잘 구축된 상태에서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속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성경을 원어로 읽는 것과 두 번째로 어떤 성경을 읽어도 그 안에서 신학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신학과 논리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는 것과 아무런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똑같이 한번 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많은 설명과 논의를 적어도 두 시간이상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자 어쨌든 지금은 책을 중심으로 나갑시다.
발표자
신학적 성경읽기에는 실천적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시대 때 영적으로 암흑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때 몇까지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시아 왕이 각성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을 때 도움을 주신 사건과 그리고 다니엘이 예레미아를 읽고 또 각성하고 민족적 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함을 통해서 부흥을 주신 사건 그리고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낭독할 때 백성들이 각성하고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부흥사건에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읽을 때라는 말씀에 주목을 했습니다. 율법을 읽음으로 말미암아서 선지자와 또 학사 그리고 백성들까지 대 각성을 하게 되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고 그래서 부흥까지 이루게 되었는데 특별히 지금 멸망직전의 남 유다와 시대상황이 거의 일치하는 조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볼 때 성경적 신학읽기는 이 시대에 그야말로 가장 필요한 은혜의 방편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발표자
저는 설교말씀 중에 연 비유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연을 만들어 날려보아도 줄에 매달려 팽팽해져야 연이 제가 원하던 시간까지 한정 없이 날 수 있는데 연줄이 끊어지면 오히려 잘 날 것 같지만 머리서 그것을 지켜보면 나풀나풀 대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데 우리의 신학이 이래야하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 중에 신학교육을 받았어도 어떻게 활용해서 양떼들을 돌볼 것인지 적절한 연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는데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곁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당장 설교에 쓸 수 있는 세미나를 찾아다니고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말하는 강단에서의 총체적인 복음의 상실 문제가 신학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목회자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목회자가 참 경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27P의 신학적 지식의 파편화가 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저희가 처음 지식을 접하는 것은 파편적인 지식들 밖에 없을 텐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
무슨 이야기냐 하면 원래의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자이고 목회할 사람이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그냥 성경이나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것은 모두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기독교 신학을 배우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쓰지만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옛날에는 쓰던 말인데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인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귀의라는 말 자체가 자기의 인생관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사상의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이미 다 상실되어버리고 그래서 신자가 되면 신학공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공부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체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다 사라지고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흔적이 있는데 그것이 세례문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육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들어가 보면 서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분야로 나뉘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끔 인용하는 이야기가 ‘나는 조직신학전공이기 때문에 성경을 모른다.’ ‘구약전공이기 때문에 신약은 모른다.’ ‘복음서를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서는 모른다.’ ‘바울서신 중에서도 나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서는 모른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전공했기 때문에 9장은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오늘날에는 권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경과 신학적인 지식이 기본이 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하고 그런 점에서 모든 지식들이 통합이 되지 않고 조각으로 떨어져있습니다. 오히려 김용옥씨의 철학을 보면 모든 지식이 연결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똥을 누는 것도 그렇게 똥을 누니까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는지가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오히려 김용옥씨 철학이 오늘날 신학보다는 훨씬 더 적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 신학을 통해서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는 예수를 믿는척하고 그 다음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상식적으로 판단하면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개혁주의설교연구원에서 설교했는데 지금은 이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이 얼마나 거대하게 선회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지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대 젊은이들의 사상의 변화에 대해서 가장 캄캄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 목회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오면 목사의 설교가 옛날에 우리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침에 힘들어 죽겠는데 운동장에 땡볕에 세워놓고 대머리 벗겨진 교장선생님이 나와서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리고 한참 떠들면 우리는 계속 밑에서 투덜거리면서 발로 돌멩이를 차면서 ‘아이 꼰대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빨리 끝나지!’ 그랬는데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무시해서라기보다 자기의 현재의 삶에서 생생하게 고민하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체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신학지식이 통합되어있다면 그러면 그 통합되어있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관이 나올 것이고 그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조는 잘못된 것이다. 이런 풍조는 잘못된 것이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지혜자로서의 판단이 나오는 것인데 그런 판단들이 너무나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책을 한 권 읽으니까 전에 읽은 것 세계화를 읽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전체가 커다랗게 변해가고 있는 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 안에서 우리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을 믿고 그 다음에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어떻게 믿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대목입니다. 지난주에 무슨 책을 나눠주었습니까? 이 책을 나누어주었습니까?
발표자
저는 목사님 책을 읽으면서 렉티오 디비나가 성경읽기의 한 방법론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구체적인 툴이고 신학 전체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좀 질문이 많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인데 얼마 전에 신문에서 목사님이 총신대학교 총장후보에 오르셨다가 사퇴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 목사님이 왜 사퇴를 하셨을까? 물론 여러 가지 정책적인 면에서 잘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셨으면 너무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신학교를 바라보시는 관점이 있고 총장을 맡으셨을 때 학교에 이런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나 신학교를 이렇게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있으셨을 텐데 굳이 사퇴하셨는지요?
목사님
그러니까 내가 열린 교회를 떠나고 가야하는데 아무도 내가 열린 교회의 5,000명을 버리고 총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4년 동안 새벽기도를 인도할 각오를 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가지 않게 된 이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갈 수 없었습니다. 나의 신앙의 원칙을 저버리기 전에는 나는 갈 수 없었고 내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내가 갔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양지 지하에 감옥을 만들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친구들을 다 착고에 채워서 거기에 집어넣고 사도행전처럼 찬송을 부르게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지 않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참 다행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졸업한 다음에 오시면 참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책을 받은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손을 든 사람 빼고 나머지 숫자만큼 옛날 소프트 커버본이 있는지 갔다 오십시오.
발표자
많은 교회에서 성경묵상을 이야기하면 보톤 20분 정도면 끝나는데 QT를 말하는데 혹시 열린 교회에서 목사님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런 묵상을 하는 교재나 툴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
한번 가르쳐준 적은 있었고 그것이 서점에 가면 김남준 목사의 교리묵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보았는데 우리만을 위한 묵상집을 만들고 그러지는 못했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있고 그것보다 사실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설교가 나오고 오히려 책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각 교회학교에서 QT를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하는데 내가 시범을 보여준 적은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했던 것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교재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집 뒤에 나올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가지고한 것이 있습니다. 이번 주 말고 다음에 복사해달라고해서 나누어주십시오. 그것을 보시면 여러분들에게 답이 될 것입니다.
발표자
인터넷에서 개혁주의 자료를 찾다보면 블로그나 카페에 많은 자료를 올리는 인터넷상의 유명하신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나 개혁주의 신학을 외치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목회자가 맞나?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냉소적이고 심지어는 욕설까지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신학으로 말씀을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혹시 목사님이 고민하신 것이 있으신지 아니면 어떻게 그들이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 혹시 목사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고 계신 활동이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청교도 지식은 가졌는데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그 속에서 배워야하는데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적인 지성은 완고한 지성이 아니라 유순한 지성이다. 사람의 사상 앞에서는 강철 같지만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물같이 녹는 유순한 사랑이다. 그 사랑과 지식의 탁월함이 공존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아름다움인데 지금은 같이 청교도 신학을 가지면서 자기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이 새끼 저 새끼 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같습니다. 로이드 존스목사님은 이미 자기의 책속에서 이야기합니다. 청교도에 심취한 사람들의 위험은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청교도 연구하는 사람들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는데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안 좋아합니다. 청교도는 제가 30대 때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33살에서 35살 사이입니다. 제가 청교도 책만 3,000권이 넘게 모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마 나만큼 청교도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청교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사가 40대 들어서면서 청교도를 넘어섰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청교도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게 된 원인이 존 오웬이 청교도인데 존 오웬을 깊이 만나면서입니다. 청교도들이 십만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오만 권은 없어지고 오만권정도 남았는데 그리고 오만권 남은 책 중에서 삼만 권 정도는 별 의미가 없는 책들이고 이만권정도가 의미 있는 책들입니다. 그런데 존 오웬을 읽고 나니까 나머지 청교도들의 책을 읽으면 대학생을 읽다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읽는 것 같은 왜소한 느낌이 납니다. 최고입니다. 몇 사람이 있는데 윌리엄 아네스, 윌리엄 퍼긴스,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토마스 리즐리, 그런 걸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읽고 나면 특히 그중에서 윌리엄 퍼킨스와 존 오웬은 최고봉입니다. 읽고 나면 나머지 청교도들의 책들은 그렇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설교집을 읽다가 동료목사님의 설교집을 읽어보았답니다.
발표자
책을 받고 책을 읽고 주신 문제집을 풀어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주신 이런 제안을 이렇게 하나로 받기 전까지는 저는 파편적으로 받았었는데 이렇게 모아진 것을 받은 것은 기뻤지만 저의 인생에서는 처음에 소개를 받았었다면 신학을 할 때 통합적으로 적실성 있게 성도들에게 연결해주는 좋은 목회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읽다가 꽂힌 것이 렉치오 디비나였습니다. 책을 꼼꼼하게 읽었는데 목사님의 노트를 보아도 정작 원래 전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렉치오 디비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볼 수 없어서 제가 한정된 시간이지만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아쉬운 느낌은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이름 앞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신비를 생각하면 수덕, 관상 이런 것을 무조건 듣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은 그런 편견이 저에게도 있었고 그래서 하는 말이 그러면 용서해주시고 우리가 ‘해방신학’ 그러면 거절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거대 교단인 합동이 과연 전 세계의 거대의 힘으로 있는 로마 가톨릭이 낮은 자와 작은 자를 위해서 그들 전체 신학을 해방신학으로 수용해서 허리를 숙일 만큼 우리는 로마의 한명의 교황이 싫어서 그 교황의 정치체제를 버리고 개혁주의로 받았는데 오히려 수백 명 수천 명의 각 개교회의 교황을 만들었고 그리고 현재 우리 합동에서 만약에 우리가 신학적으로 비판한 것이 합당하지만 자생적으로 그 낮은 자를 위해서 교단 자체가 허리를 숙여서 하나의 신학으로 통일될 수 역량이 우리 가운데 정신의 개혁주의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니까 저도 이번에 렉치오 디비나가 무엇일까 하면서 쭉 살펴보니까 굉장히 긍정적인 것도 많고 목사님께서 텍스트에서 주셨던 좋은 제안들이 용어의 표현에, 어떤 용례에, 개념에 이런 것들을 다 치워버리면 이런 것이 있었나할 정도의 괜찮은 것들이 있어서 ‘성독’ 제 안에 있었던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질문도 아니고 그냥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렉치오 디비나에 관련해서 우리들이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가시가 많은 생선입니다. 그래서 잘 발라먹어야합니다. 원래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읽기의 전통이었는데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신약시대의 초창기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이 있었지만 분량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크니까 사람들이 휴대하고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렉치오 디비나의 전통이 사실은 처음에는 굉장히 폭넓은 읽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독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그때 성경도 편리하게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신앙의 도움이 되는 글들을 경건하게 읽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것이 교부시대를 지나고 핍박의 시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많이 변질됩니다. 그래서 학문을 연구하고 글을 읽는 학문 활동 전체를 가리켜서 렉치오 디비나라고 의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관상기도 같은 것들이 렉치오 디비나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조금 읽고 그 다음에 한없이 묵상을 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그러면서 신비주의적으로 가는 이런 길들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런 아주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전통들이 함께 뒤섞이면서 렉치오 디비나의 전통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시대에 와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납니다. 마틴 루터가 주창했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정경론이었습니다. 성경이 어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러면서 정경이외의 성경인 외경을 거절하고 그리고 성경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렉치오 디비나는 그 사람 자신이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이미 렉치오 디비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렉치오 디비나의 대상은 롬바르드의 명제집으로 시작해서 베르나르 구스의 글이나 신비주의적인 글까지 시작해서 광범위한 당시의 교부들의 책들이 렉치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것을 개혁정신에 맞게끔 확 뜯어고치면서 성경을 묵상하는 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인문주의자로서 뚜렷한 개신교의 신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 압도적인 신학에 의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신학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신학적 성경읽기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오랫동안 개신교 개혁파 전통 안에서 이것들이 전승되어 내려왔는데 그러다가 이것들이 경건주의 운동과 함께 매우 약화되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렉치오에 있어서 신학적인 요소들이 강조되는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히 이 시점에 들어와서는 실존주의 성경해석이 들어오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성경을 펼쳐서 누가 이렇게 QT를 하라고 책을 냈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하나님 나는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 하나님 저는 매우 피곤합니다. 이런 식으로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성경을 읽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려고하는 사상에 대한 생각들은 다 빠진 상태에서 말하자면 자의적인 묵상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우 나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개혁신학에 입각한 확고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이 서는 것과 성경을 그대로 읽으면서 그 속에서 신학을 찾아내고 그 결과물들로 우리의 신학을 교정하고 신학에 의해서 성경 자체를 읽을 때 부족했던 이해들을 보충하면서 서로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해석학적인 순환이 가장 이상적인 렉치오 디비나인데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설교의 어떤 깊이라는 것들이 결국은 신학적인 해석을 성경의 본문 속에서 얼마나 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발표자
저는 책을 읽고 강연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 한 개의 문장으로 제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참된 철학은 참된 신학과 다투지 않는다. 이 문장으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철학은 늘 신학과 견제하면서 신학과 다투며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저의 이런 생각을 바꿀 수 있었고 그래서 모든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과 참된 철학은 이성으로 시작하고 참된 신학은 성경으로 시작하지만 그 둘이 올바로 추구되고 다투지 않을 때 하나의 완성된 지식을 우리들에게 전달한다는 이 내용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지금 하는 이야기도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역사신학에서 Doble Truth 라고 이중진리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신학에서 출발하는 진리를 찾는 것 그 다음에 철학에서 혹은 이성에서 시작하는 진리를 찾는 것 이것이 두 개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된 철학은 신학과 다투지 않는다.’는 명제이고 이중진리론은 이게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결론이 다르게 난다는 것이 아니라 두 신학과 철학은 진리를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사실은 둘 사이에 조화를 꾀하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이중진리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신학은 성경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찾아가지만 그러나 이성은 신학의 원리가 아니라 신학의 원리는 내적인 원리와 외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외적인 원리는 계시이고 내적인 원리는 신학이나 혹은 성경입니다. 그 원리에 의해서 찾아가면서 말하자면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계시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신앙으로 진리를 찾아가기 때문에 진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하는 이성은 과연 그렇게 정확하게 진리와 비 진리를 가리면서 신학의 결론과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이성 그 자체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된 철학이라면’ 이라는 가정이 붙지만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할 때 우리는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앙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이성의 우월한 활동력에 의해서 두 개가 만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으로써 신학을 하고 철학의 질문에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결론을 얻으면서 접근해나감으로써 이 명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신학은 참된 철학과 다투지 않는 명제가 대 전제로써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충만한 신앙으로 자신의 이성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승복시키는 가운데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순들을 우리들로서는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참된 신학은 초월적인 의미에서 가장 탁월한 이성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발표자
이번 책과 지난번 책을 읽으면서 사실은 제가 얼마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세뇌를 받고 영향을 받았는가를 생각했었습니다. 학문이나 신학의 본질적인 목적이 인간이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이런 가치에 대해서 사실 저는 ‘진리탐구’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적하신 것처럼 신학의 여러 분과들이 통합이 필요하고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만 저도 XX을 발표하는데 가보았었는데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의 본문을 가지고 했었는데 그것을 발제를 하신 분은 바울신학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제를 다 하신 다음에 요한신학을 하신 분들이 거기에 계셨는데 거기서 딱 지적을 하시면서 그것은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요한복음에 속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이야기라고 하니까 요한 신학을 하신 분들이 다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발제하신 분이 그냥 그 다음날 귀국하셨는데 제가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참 맞고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갈수 있을까? 너무 멀다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그 모임에 가서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매력도 많이 있다고 느끼면서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에 있어서도 앞에 목사님이 말씀하셨지만 제가 다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고 전에는 한 본문이 반드시 하나의 뜻으로 일대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총신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나와서는 그렇지 않은 본문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 이렇게 조금 잘못 보는 것들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는 것들에 대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다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질문을 드린다면 절대주의가 가진 그런 아름다움도 있지만 또 절대주의적인 것들 때문에 사회나 헤게모니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사실은 철학의 흐름이 역사의 어떤 잘못된 오류들을 발견해서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를 질문합니다.
목사님
그러니까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막연하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역사를 볼 때 성경이 부여하지 않은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행사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전체성의 폭력으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고유한 특성들을 짓밟고 무시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있어 왔고 그런 것들이 사실은 성경에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휴머니즘에 도달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맥락에서 모든 가치에 대한 것들을 이해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유하게 주신 권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자의적으로 쌓아올린 것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면서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권위가 아닌 것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 이런 것들을 짓밟는 것에 대한 철저한 항거 거기로부터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은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억압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노예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전체성들을 권위가 없는 것들을 권위가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예민하게 대하고 그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들이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그러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됩니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받아야지만 겨우 행복해지실 수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인간이 가장 복되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라고 내버려두면 반드시 불행해지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에게 개인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긍정적인 측면과 가치의 기준에서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를 이야기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보면 오늘날 개신교의 코드는 현대코드와는 너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나누었지만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목회를 해나가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이 본격적으로 목회를 해나갈 때에는 정말 비범한 사람들 소수만이 이런 목회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발표자
신학적 성경읽기에서 통합적인 사고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신학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종교적인 의미와 학문적인 의미가 존재하지만 저는 읽으면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는 전도사님들이 좀 넓은 시각을 가지고 신학을 하면 안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기독교라는 미명하에 기독교와는 다른 것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귀를 막았기 때문에 통합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성경을 제시하지는 않았는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성도의 입장에서 설교를 듣고 나서 적용에 있어서 잘못된 적용들을 굉장히 많이 해서 답답한데 어떻게 설명을 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성경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통합적인 지식을 갖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전도사님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전체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시켜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도 각 교수님들이 책을 추천해주시기는 하는데 자기가 전공하신 것을 추천하시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추천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긍정의 힘이 출판된 출판사가 두란노서원인데 그래서 두란도서원에서 나온 책들 가운데 보면 성경과 맞지 않는 책들이 많이 출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직도 봐야할 책들이 거짓의 사람들 같은 책도 처음에는 모르고 읽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뉴에이지에 속한다고 들었는데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기독교출판사라는 이유 때문에 무작위로 받아들이는데 두란노에서 나오는 번역된 책들이 거의 미국에서 들어오는 것이라서 우리의 기독교신앙의 기초에 있어서도 제가 봐서도 미국에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나 실용주의적인 것도 미국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두란노서원이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목사님들이 읽어도 맞는지 아닌지 구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목사님의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목사님
아닌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읽을 책들이 가장 좋은 것은 교회에 도서관을 만들고 도서관에 신뢰할 수 있는 책들을 집어넣어서 혹시 조금 의견이 다르고 신학적인 견해가 다르지만 그래도 참고할만한 책을 거기다가 어떠어떠한 신학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어떠어떠한 점에서 유용하다고 표시까지 해서 활용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무슨 책을 읽어야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학문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학공부라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인문학적인 기반이 너무 없습니다. 사실 신학공부를 하려면 초등학교 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중학교 때까지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 사상서와 철학서들을 읽으면서 답을 찾고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서 복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이제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찾으려고 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정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면서 그 위에 신학공부가 쌓여가고 올려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대학교육 자체가 거의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취직을 한답시고 토플공부하고 영어공부하고 회화를 공부하고 그리고 특별히 책을 끼고 다니다가 그리고 전공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이 그냥 끝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니까 인생을 살면서 괴로움을 많이 겪었지만 고민은 별로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민은 많이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책속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혼자서 들을 가다가 논두렁에 엎드려서 한없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울게 된 이유가 가난해서도 아니고 물론 가난했지만 배고파서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고 그게 인간으로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한번 자살을 결심했었습니다. 그런 인생에 대해 진지한 무게에 대한 고민과 성찰 속에서 복음을 통해 이것이 나의 인생의 모든 무게와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기쁘다는데 그것은 주관적인 종교의 체험이고 그래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도움을 복음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나의 인생에 도움을 다오 그러면 언어 자체가 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간증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신나는 이야기겠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20대 초반이었는데 아직 살아계실지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까지는 살아계셨는데 김영석 교수인데 연세대 교수인데 그분이 우리 때에는 베스트셀러작가였습니다.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삼중당문고에서 계속 책을 내셨습니다. 그런 책들이 나를 굉장히 견고하게 해주었고 철학서인데 철학서라기보다 에세이인데 이런 사람들의 책이 사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아이폰과 이런 것들에 묻혀서 아이들이 전혀 책을 읽지 않습니다. 한 시간도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애들이 대화하는데 반기문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여자아이가 ‘오빠 그건 어디에 있는 문이야?’ 애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신학을 공부하는데 세뇌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월요일에 데리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제 눈이 조금 떠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기대를 해보십시오. 내가 ‘신학공부를 이렇게 해왔다.’ 1000페이지짜리를 다 써놨습니다. 양이 워낙 많아서 올해는 나오기 힘들 것 같고 내년 봄쯤에 출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 마지막 1%, 2% 남은 것을 정리하는 중인데 그 책을 읽고 나면 훤히 뜨인 다기 보다는 이렇게 공부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공부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줄 수 있는 충고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학교에서 공부하는 공부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십시오. 체제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냥 해야 합니다. 그나마 하지 않으면 진짜 설교단에 올라가서 허튼소리를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교의학도 하고 신학도 하고 다 하십시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책도 멘토로 삼지 마십시오. 멘토는 사상가에서 찾으십시오. 어거스틴을 멘토로 삼든지, 조나단 에드워드를 멘토로 삼든지, 아니면 로이드 존스를 멘토로 삼든지 좋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멘토로 삼아서 모든 작품을 다 읽으십시오. 물론 1, 2년에 끝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20년 가까이 걸렸는데 에드워즈 책이 출간되었는데 18,000페이지입니다. 여러분 영어공부를 얼마나 하는지 모르지만 하루에 10페이지를 읽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300년 전의 영어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번역자들도 어떤 때에는 한 페이지를 놓고 하루 종일 걸린다는데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일관된 사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멘토로 삼으십시오. 그 대신 그 멘토는 신학이 건전하고 깊은 사상이 있어야하고 두 번째는 책을 한 두 권밖에 쓰지 않은 사람은 안 됩니다. 양 자체가 많아야합니다. 방대해야합니다. 그런 사람을 멘토로 삼으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 그런 사람들 중에 멘토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의 18,000페이지짜리 책을 하루에 10페이지씩 원서를 번역하면서 읽어도 1,800일을 쉬지 않고 읽어야합니다. 그러면 6년을 읽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에드워즈의 전집을 완독한 사람은 우리나라에 몇 명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에드워즈를 박사로 쓴 사람과 대화했습니다. 아무도 전집을 완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가치 있는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에드워즈나 찰스 스펄전이나 이런 사람들은 설 교가이고 사상가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출간된 책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사상 전체의 얼개를 만들어야합니다. 내 말을 따라 하면 10년 후에 나를 만나면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감사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고했을 때 내 말을 따라하는 사람을 아직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이고 외로운 일이기 때문에 감시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서 꾸준히 그 어려운 영어책을 놓고 읽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존 오웬은 에드워즈의 영어를 읽는 것보다 두 배쯤 걸립니다. 영국 사람이 존 오웬의 책을 읽지 못합니다. 월인천강지곡이나 용비어천가 같은 것을 주고 읽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 결심으로 읽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사상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은 우선 방대한 양의 독서와 일관된 스승이 필요합니다. 어느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이 이 책 저책 집적거리면서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지 말고 깊이 한 사람의 저자를 읽고 멘티가 되어라 은혜를 받고 따라한 사람이 존 파이퍼입니다. 그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선택했고 끝까지 따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의 설교와 글은 아무 책을 읽어도 깊고 좋습니다. 아무 책을 읽어도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렇게 설교할 때 그렇게 개혁주의적인 방법으로 목회를 하는데도 수천 명이 모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합니다. 이것 하나는 여러분들이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저자를 잡아라. 그리고 그 사람을 쭉 읽어라.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습니다. 확고하게 올바른 신학위에 서있고 사상이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사상적인 기준이 있는 사람을 쭉 읽으십시오.
발표자
책과 강의를 통해서 통합되지 않고 파편화된 지식에 대해서 저 자신도 직면하게 되었고 성장 중심으로 제 안에 어떤 법과 지식과 학문과 정보들이 언어와 문자적으로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채 무관심하게 그런 것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도전받고 또 정리를 할 수 있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전도사님들이 질문을 던져주신 부분들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 목사님을 통해서 정리가 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은 목사님께서 성독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서 성독과 신학 함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좀 더 덧붙여서 해주시고 싶으신 부분이 있으면 해주시고 또 하나는 제가 이 책에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현대사회가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는 체제를 많이 잃어버렸고 상실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치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사람들의 어떤 고통에 대한 문제들을 회복하고 바라봐야할까 하는 고민들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예비 된 고통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정말 예기치 못하는 고통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그런 사건들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저의 가까운 지인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파키스탄에서 10년 정도 사역을 한 사역자인데 파기스탄 현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무릎 관절이 나가서 어쩔 수 없이 자가용을 구매하게 되었는데 자가용을 운전하다가 대형버스를 피하면서 인도로 차를 돌리게 되었는데 그 교통사고로 거기에서 현지사람의 한 가장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파키스탄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1년 정도 지났는데 지난주 주중에 그 선교사님의 오빠가 뉴스에도 나왔는데 월계동에서 똑같은 비슷한 상황으로 불법 유턴하는 택시가 SBS 자동차를 박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오빠는 인도를 걸어가다가 날벼락처럼 자동차가 피해서오는 것에 치이게 돼서 그 자리에서 붕 뜨게 되었다가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 친구가 경험하게 된 것은 굉장히 자기 상황이 억울할 수 있는 죽음으로 오빠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 가운데서 그런 부분을 보았을 때 너무 마음이 아픈 것 이상의 어떻게도 위로할 수 없는 문제들을 보게 되면서 어떻게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는 관점을 가져야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학이나 철학이나 유사한 면이 있지만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사람이 살면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태를 만나게 됩니다. 부유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고 다양한 삶의 상태를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삶의 사태들이 아무리 많이 변해도 인간이라는 본질,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서있지 않다면 사태를 만날 때마다 헤헤거리고 웃으면서 하늘을 찌를 듯이 행복하다가 아까 같은 일을 만나면 꼬꾸라져서 도저히 자살해버리고 싶고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사태들을 꿰뚫고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의 다양한 사태 하나하나에 웃고 울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그러지 않고 꿋꿋하게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냥 먹고 마시지 말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신앙도 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행복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게 되는 게 그 수많은 삶의 사태들 속에서 예수 때문에 웃고 때문에 불행 때문에 슬퍼하고 죽고 싶고 그 다음에 천국에 온 것 같고 그렇게 산다면 그러면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인생의 날들 중에 그렇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행복하고 기쁜 날이 며칠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그러면서 그렇게 삶의 다양한 사태들 속에서 본질을 꿰뚫고 살기위해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신앙이 든든하고 온전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신앙을 든든하게 온전히 붙들어서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인가? 그래서 결국은 지식과 XXXX 그러니까 너무나 문제지만 그것은 XXXX 역시 이 책의 문제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발표자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통해서 지식의 해갈을 느끼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미국에서 초기의 우주생성 과정을 담은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빅뱅이론에 무게를 두는 것 같았는데 세상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조차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교수님이 신학과 교수님이신데 어떤 말씀을 하시다가 조직신학과 신학 함은 다르다고 하시면서 조직신학은 조지는 신학이라고 비하하시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신학교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로 목사님이 조지는 신학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경건과 지식이 하나로 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신학의 지식이 파편화된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회자 본인에게도 그렇겠지만 실은 이 땅에 이런 진리를 아는 교회가 얼마가 될지 의문이 들고 그럴만한 설교와 목회철학을 가진 목회자가 얼마나 될는지 그러면 그런 진리를 모르는 성도들은 그런 진리의 계시의 빛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평가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와 성도들에게 열린 교회와 같은 교회 말고 다른 교회는 편파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정말 그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진리가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입니다.
목사님
우리에게 진리가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진리 위이시거나 혹은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식들을 사랑하고 우리 자식의 잘못된 버릇도 있고 무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의 장애가 있어서 부모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자식도 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교회가 진리가 풍성할 수도 있고 미약할 수도 있고 거의 진리의 불꽃이 꺼져가는 시대일수도 있고 또 어느 교회는 그런 진리를 많이 가진 교회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희미한 불꽃을 가지고 교회사속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다음의 읽을거리에서 답을 주겠습니다.
발표자
지금까지 나눔과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얻고자했던 답을 찾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에서 거룩한 성경읽기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기위해서 교리를 공부하는 것이고 깊이 묵상하기를 말씀하셨는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리를 정말 중요시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을 어떻게 묵상하고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목회자로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가지고 설교하게 되고 적용 점을 찾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저희도 신학적인 지식이 짧기 때문에 뭔가 주석을 참고하고 어떤 책들을 참고하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실제적인 부분인데 신학생이 아니더라고 평신도들도 기본적인 그런 성경에 대한 어떤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아까 목사님께서 어떤 책을 읽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저희들이 가장 개혁주의이고 알고 있는 답이 기도하지만 현재 나와 있는 주석이라든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어떤 자료나 책들을 참고하고 계시고 또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첫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세 번 정도 만났는데 차차 공부해 나가면서 알게 될 것이고 일단 우리의 화두가 있는데 우리가 신학의 파편성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신학이 세상의 사조와 관계가 있는데 그래서 결국은 교회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통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진단을 하면서 알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우리들이 두 주 동안에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한번만 더 공부를 해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여기서 끝나면 질문만 잔뜩 남고 끝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내주겠는데 다음시간에 올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을 한권씩 주고 싶었는데 지금 책이 없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서보십시오. 다 읽으라면 참 좋겠는데 420페이지 정도 되는데 여러분들이 한주에 읽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다 읽어도 그래서 1장부터 3장까지만 읽어 오십시오. 그 대신 절대 3장은 건너뛰면 안 되고 3장은 반드시 읽어야합니다. 1장, 2장, 3장을 읽으시고 너무 시간이 없으면 1장과 3장을 읽으시고 그래도 시간이 없으면 그냥 서론과 3장만 읽으시는데 분량이 얼마 안 되는 1장, 2장, 3장을 다 읽으십시오. 3장은 반드시 읽어 오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책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선물로 주는 것인데 받으십시오. 있으신 분은 받지 마십시오. 열린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한은 아마 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이리 주십시오. 이 책은 맨 뒤에 보면 mp3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운데 보면 잡아당기면 문제집입니다. 얼마나 친절합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첫날에 이야기 드린 것같이 기왕에 훈련을 받으려 왔으니까 일 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고 12주를 하는데 한 시간씩 덜자고 덜 먹고 덜 놀면서 하십시오. 우리 열린 교회 성도들은 교리 학교 때 중간고사 때 기말고사 때 청심환 먹고 시험을 보는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시험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십시오. 뒤의 것은 mp3입니다. 그리고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도 내가 저작권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누어 주십시오. 다음 주에 오실 때 1번 들으시고 1장 읽고 그리고 오십시오. 이렇게 합시다. 다음 주에 오실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읽어야 하니까 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을 테니까 가다가 열린 교회 본관에 들려서 서점에 있으니까 1장부터 3장까지 읽고 오시고 그리고 그 다음 주 숙제는 mp3 1번을 듣고 1장을 읽어 오십시오. 다음 주는 봐드리겠으니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을 읽어 오시고 다음 주부터는 숙제는 따로 나가고 이것은 매주 mp3 하나를 듣고 한 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그 대신에 리포트는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와서 읽은 것처럼 다른 이야기하면 그러면 제가 다 압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안 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다른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 주에는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주는 글’ 그것을 서점에 갖다 놓으라고 해서 읽으십시오. 다음 주에는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을 읽어 오시고 그 다음 주에는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주는 글’을 읽어 오시고 그 다음 주에는 그러면 여러분들이 각자 사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1장부터 3장까지 읽는 것이 그것이 숙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