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을 헤아리심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녹취자 : 김세나
Ⅰ.본문해설
어느 때 다윗이 이 시를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왕이 되기 전 고난의 때이던지, 왕이 된 이후에 여러 가지 우환을 만나며 당한 고난이든지 간에 주님을 간절히 찾았던 시인의 내면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진실성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더욱이 큰 시련을 만났을 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간절하고 자기 마음을 바치는 기도로써 생사 간에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1절과 2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 주제는 시인의 소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Ⅱ.심정을 헤아리심
A. 가장 간절한 소원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구절은 시편 5편에서도 가장 간절한 기도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인이 기도를 통해 가장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원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 덩어리인 인간에게 어찌 원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인간은 많은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고, 오늘도 감사하지 못하며 욕구 불만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소원이 아닙니다. 오늘 시인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앙적인 소원과 사람 안에 있는 욕망은 어떻게 다를까요? 시인 안에 있는 소원은 본질상 욕망임에 틀림없지만 그 욕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 따르는 욕망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아무리 많이 욕망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리가 없고 더 많은 욕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을 찾게 되는 선한 바람이 소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 어떤 좋은 옷 한 벌부터 시작해서 근사한 식사, 그리고 여성들에 경우에는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은 하나님 앞에 소원으로 아뢰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양심이 이미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전심으로 구하도록 우리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질문을 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소원이 있는데도 왜 우리는 열렬히 기도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으로서는 그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진짜 소원이 되어야 하는 그 바람은 작고, 그리고 바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소원은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른 것을 바라고 있어도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시인은 지금 악인에게 에워싸여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고, 그 악인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심하게 훼손하는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인 개인의 행복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악들이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한 사람들과 그들의 강력한 힘에 저항하고 그것을 꺾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시편 5편을 시작하자마자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하나님께 외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옛날 번역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입니다. 왕에게 아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은 고난을 당할 때, 이 사람 저 사람 집적거리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의 편을 구하고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의존의 행위들입니다. 살면서 힘겨운 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가를 토로하며 조언을 구하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오고가는 의사소통의 행위이고,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던 지혜를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쳐서 마음속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욕구 불만이 되어서 이 안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나 복수심 같은 것들로 쏟아져 나와서 배설하듯이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모욕하고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사실 위에 표현을 보태어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서 말이 나왔으나 휘돌아 말한 그 사람의 마음속에 다시 돌아가서 그 마음의 질서들을 모두 어지럽혀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 많은 날들 중 사람에게 많이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유익을 얻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내 인생에 생사 간에 내가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신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무엇인가 노력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도 있고,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이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에게 무한한 고통을 경험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고통과 악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시인은 꿈꾸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은혜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꿈꾸는 가정과 꿈꾸는 지체들과의 관계, 꿈꾸는 세상이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의 거룩한 영광을 경험한 시인은 그 깊이만큼 그가 바라는 이웃과의 관계와 사회가 있었습니다. 악인들에 의해서 그 아름다운 질서들이 산산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이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 위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사회가 이렇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에 대한 고통을 함께 경험한 것입니다. 고통으로 말미암는 개인적인 고통 위에 비애가 겹칠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언어 속에 담아서 마음의 고백으로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기도합니다. 얼마나 견딜 수 없었으면 “나의 심사를 통촉하옵소서.” 도저히 언어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님께 아뢸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동원하여도 이 고통과 괴로움이 모두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나보다 모든 것을 더 잘 아시는 언약의 여호와가 자기를 통촉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추호의 흐트러짐 없이 한 가지에 온 정신이 꽂혀진 채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결정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오늘 시인은 너무 너무 간절해서 주님께 아뢰고 싶은데 어떠한 표현을 동원해도 내 마음속에 이렇게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그리고 불타는 것 같은 소원이 있어서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 있어서 차라리 제가 말을 다 못하니 왕이신 하나님,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번역된 ‘통촉’이라는 단어는 이 문맥을 잘 고려해서 하나님을 왕으로 보고 존경의 표현으로 동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냥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만 ‘통’은 예리하게 속지 않고 꿰뚫어보듯이 보는 것이라면 ‘촉’은 불을 켜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떠한 실수도 없이 내 마음이 우리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에게 감추실 수 있는 것이 있겠으나 내가 당신 앞에 무엇을 감출 수 있겠나이까?” 모두 주님 앞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오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개방 가능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시인은 어디에서도 ‘나는 완전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편 곳곳에서 완전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완전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찌르듯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제 마음은 개방 가능합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시인이 ‘내 마음이 완벽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의식 속에서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 있는 한 ‘내 마음이 개방 가능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가장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맨 처음에 하나님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내가 정말 억울하고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함께 있어서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를 가엽게 생각해 주는 사람만 만나도 위로가 됩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이것은 히브리어로 귀를 달라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귀를 주셔서 귀 속에 이야기를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에서 여러 차례 나옵니다. 안 들리는 말없이 모든 것을 소통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이렇게 당신의 귀를 내게 주셔서 내가 말을 해도 못 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주님이 오셔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 주시옵소서. 제 마음은 우리 주님에게 개방 가능한 마음입니다.’ 고백하면서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언제쯤 우리 마음이 개방이 가능할까요? 한 십년 쯤 성화가 된 다음에 개방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주할 수 없는 불결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깨끗한가 안 깨끗한가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faith’, 믿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죄가 남아있지만 “통촉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는 이제 그것을 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완전한 것이 자기 안에 남아 있지만 그것을 미워할 마음이 있는 상태가 바로 통촉해달라는 상태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의 깊은 상태를 어김없이 헤아릴 수 있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한 놀라운 섭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몰라서 기도를 통해서 스스로 지식을 얻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르실 것처럼 간절히, 때로는 큰 소리로 여러 번 반복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진심으로 여러 번 간절히 기도할 때, 확실하게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매우 중요한 기도의 섭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시인은 명백하게 악인들이 처처에 날뛰는 가운데 확실하게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완벽한 평강 속에 있으면 이렇게 애달프게 기도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간절한 기도를 한다고 해서 주님이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의 증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을 쏟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에서 의심과 불신, 그리고 평안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불안의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치 사람이 격렬하게 운동하면 땀 속에서 온갖 중금속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식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기도의 경륜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들여서 간절히 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염불입니다.
이 시인은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것을 보면 결국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악인들의 끔찍한 죄악상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기뻐하시는 신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당신 앞에 그냥 서 있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에 의해서 세워진 잘못된 질서들을 정돈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질서가 펼쳐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러한 상황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욱 간절해 질 수 있는 이유는 가보지도 못한 먼 나라에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질서를 심히 훼손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그들이 악을 실제로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시인 자신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주님 앞에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악인들과 그들에 의해 전개되는 무질서한 현실의 질서를 주님이 올바르게 바로 잡아달라는 것, 이것이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현재 자신 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의 상황과 자신의 행복이 찢어져 있는 분리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악인들이 처처에 행하고 그러한 무질서한 악들이 계속 있는 한 자신이 평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평화이지 마음속의 진정한 평화일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살아야지 행복하지 악인들의 질서 속에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새벽기도를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매일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 이러한 질문과 함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간절한 소원이, 신앙화 된 소원이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소원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반드시 이바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이 자신의 열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도 소원이고 저 사람에게도 소원입니다. 한 사람은 간절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으면 참 좋을 텐데….’ 식구들이 손잡고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부럽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고민꺼리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럴 때 그것이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다 필요 없습니다. 좋은 집도, 아름다운 옷도, 훌륭한 파티도 아름다운 장신구도 다 필요 없고, 내 생명을 반토막쯤 가져가신다고 하더라도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사랑하는 동생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지 바치고 싶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원입니다. 그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선이 하나님 한분에게 고정되는 것입니다. 빛을 한줄기로 모아야 불이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소원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 마음속에 절실한 소원이 되게 만들어서 더욱 치열한 기도 속에서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긴다는, 어떻게 보면 주제가 넘는 신앙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간절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 “내 심사를 통촉해 주옵소서.”라고 하소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할 때는 대부분 통곡하게 됩니다. 더 이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통곡으로 언어를 대신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그러한 기도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언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도록, 이제 나의 언어로써 표현은 더 이상 동원할 수 없어서 통곡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는 기도는 그 기도가 양보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의 믿음이었습니다.
B. 부르짖는 기도
두 번째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가장 간절한 소원이 부르짖음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르짖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실제로 사람을 부를 때 소리를 내어서 크게 부르는 것, 의도적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기도에 적용될 때는 결국 마음에 있는 간절함이 언어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원통하면 사람들은 흐느끼지 않고 큰 소리로 통곡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아뢰기를 바라는 소원이 너무나 간절하고 펼쳐진 현실은 그 소원이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고,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간절한 소원의 목표를 포기할 수 없을 때 그는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길이 없다고 하는 절대의존의 정서로 가득 찬 상태를 보여줍니다.
억제할 수 없는 정이 언어 속에서 초월적인 감정으로 부어집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간절히 부르짖을 때는 힘이 이 속에서 나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짜 이 소원이 너무 간절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부르짖으면 극단적으로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하면, 나는 껍데기이고 성령님이 오셔서 내 육체를 사용하셔서 당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심한 통곡으로 다 쏟아 부으시고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체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냥, 그냥 하는 기도가 일만 시간을 해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을 이렇게 간절한 소원으로 이 기도 속에서 내 자신이 산화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할 때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부르짖는 간절한 소원에 대해서 피의 펌프질이 이루어집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비밀스러운 일들을 그렇게 자신을 찾는 종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들어가 보지 못한 지극히 깊고 비밀스러운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바다로 들어가기는커녕 바닷가에 앉아 조약돌을 던지며 발이 바닷물에 젖을까봐 파도가 밀려오면 도망갑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발목까지 빠지는 물에 들어가서 조각이라도 줍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지극히 넓고 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일을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니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도 시간을 기도의 진수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흘려보냅니까? 억제할 수 없는 정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초월적인 감정으로 부어집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시인은 시편 62편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로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번민, 그리고 상한 마음, 울컥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와 고통이 출렁거립니다. 그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께 마음을 온전히 토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 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눈 뜨면 잠드는 시간까지 그것에 대한 고민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합니다. 문제는 하늘로 올라가다가 떨어지는 기도입니다. 힘이 없습니다. 이 시인이 하였던 것처럼 가장 간절한 기도, 그리고 생사 간에 자신의 표현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을 부르짖음으로 토해놓는 기도가 없습니다. 넋두리 하듯이 그냥 계속 이야기할 뿐이지, 그 중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기도가 얼마나 될까요? 한번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짜 이렇게 울부짖는 기도가 있었는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넘칠 때 우리의 기도의 자리는 언제나 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원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파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영혼들인데 그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간절히 기도가 되어 집니다. 남의 기도, 나의 기도,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자기희생이 없다.” 희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자기가 그것을 희생이라고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몸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배고플 때 내 몸을 먹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서운 사고를 당해서 파편들이 날려 올 때 피하면서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한 뜻에서 어거스틴은 “참된 사랑에는 희생도 없고 자기부인도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자기부인은 아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정말 우리가 매일 매일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면 너무나도 좋겠습니다. 매일은 그렇게 못하여도 정말 가슴이 미여지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면 그 기도의 제목이 나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몸과 한 마음이 되었으니 같은 기도제목일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제목으로 간절히 부르짖은 때가 언제인지 반문해보십시오. 이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우리는 부르짖는 것을 목표로 삼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흐트러진 마음이 모아지고, 모아지고 모아져 마지막에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나의 생사를 건 나의 어떤 기도제목이 나의 생명처럼 살아서 이것을 위해서 내 마음 안에 피의 펌프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이 부르짖는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류에 빠져도 이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찰과 그리고 발견한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한 부르짖는 기도로서 정결한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모두 보고 지나쳐도 그 하나님의 사랑은,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이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자기의 뜻을 이루십니다. 깨어진 질서를 회복하고 없었던 질서를 다시 세우시고 그 질서위에 영적인 번영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장 고귀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때문에 무지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 인생의 참된 빛으로 돌아오고 주일에 제가 설교시간에 예화로 들었던 것처럼, 젊은 청년이 수없이 자살하기 위해 면도칼로 팔뚝을 긋다가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섬김의 기도를 받고. 이 인생의 참된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까짓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영혼 속에 일어난 그 변화를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고, 그것보다는 얼마나 큰 집을, 얼마나 훌륭한 집에 시집을, 얼마나 커다란 저택을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눈길을 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의 그 진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왕이신 나의 하나님
마지막으로, 그가 그렇게 심정을 헤아려달라고 울부짖을 때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왕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왕은 오늘날 전 세계의 대통령을 모두 합해도 옛날 중국의 황제 한 사람의 권력에 비할 수 없습니다. 나라 전체가 왕의 소유입니다. 생사여탈로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법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왕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바라는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나만의 왕이 아니고, 이 땅의 왕이십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의 나라에서 이 말도 되지 않는 무질서의 일이 일어나고 있고, 악인이 처처에 횡횡해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왕이십니다. 당신의 왕권을 펼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명목상의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입헌군주국의 왕, 뒤에서 대비가 수렴 청정하는 꼭두각시 왕, 왕은 왕이지만 이미 늙어버려서 많은 신하들의 관심이 이미 세자에게 이동해 있어서 뒷방늙은이처럼 변해가고 있는 퇴물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왕이고, 전능하신 왕이고, 지금도 한 음성을 바라시면 천하의 만민이 두려워 떨고 산천초목을 흔들릴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어디에 그러한 증거가 있습니까? 어디에 그러한 증거가 시인 앞에 펼쳐졌습니까? 눈을 뜨면 말도 안 되는 율법을 짓밟는 악인들이 기세를 부리고 득세하여 그들의 천하가 되어버린 것 같고 주님을 의지하고 간절한 소원으로 눈물로 통곡하는 자신은 그들의 밥이 되어버린 현실인데, 어디에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현실을 보고 왕을 생각한다면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현실이 아니라 이 현실을 뛰어 넘어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잠시 악인들이 횡횡하고 불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붙들고 계시고, 이 역사의 움직이는 모든 줄들을 붙들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여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인은 어떻게 이러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나라와 임금들이 일어나서 잠시 득세하는 것 같고, 이 세상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질서를 부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들은 바로 검불과 같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질서가 다시 이루어져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인이 악인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은 경험이 이날 하루였을까요? 이보다 더 극한 상황을 수없이 만났으나 그는 믿었습니다. 번성하는 악인은 벤 풀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무성한 것 같지만 낫에 잘려서 던져진 풀들은 하루가 지나가기 전 이튿날 바람의 검불처럼 사라집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진 잠시 모순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이 역사를 우리 주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금도 보존하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 왕이 아니라 시인에게는 나의 왕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였던 왕, 내가 그렇게 충성하였던 왕, 내가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의 이유가 되는 그 왕을 깊이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에 그분의 통치에 이 세상의 만사가 달려있고, 자기의 인생도 예외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잠시 악인이 번영함으로써 시인은 혼란을 느끼는 대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평화로운 때는 그렇게까지 못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만나면서 시인은 자신의 이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신앙의 모든 엔진을 100% 출력으로 힘차게 돌립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그 마음에 있던 찌꺼기와 더러운 것들이 검불처럼 사라지면서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잠시 눈앞에 펼쳐 보인 순간의 모순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훼손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그리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세상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세계다운 새 사회가 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현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징벌할 자를 징벌하고 분노할 자에게 의로운 분노를 품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세상은 그렇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한편으로 이 세상을 보면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인이 처처에 일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것 같고 자기 혼자 남은 것 같아도 시인 속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찬양)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자신이 온 마음으로 높이는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라도 인간들의 악에 의해 굴복하여 당신의 통치를 포기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휘지 않는 법으로 당신의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가장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압니까? ‘내 인생을 왕이신 당신의 처분에 맡기나이다.’ 고백하면서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운명이 아닙니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너무 높이고 너무나 경배하는 그 왕에게 자기의 인생을 통째로 맡길 때에는 자신 속에 그 분의 통치를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것을 모두 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내 심사는 통촉하시고 내 삶은 통째로 당신께 맡겨졌고, 주님의 뜻에 내 인생이 달렸나이다. 아무데든지 주님 나를 이끌면 나는 갈 것이고 그 곳이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거기에서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부이든지, 전부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전부를 걸고, 그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으로 고치며 하나님 앞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누리며 자신도 감히 할 수 없는 그 삶을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눈을 들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주를 보십시오. 영광의 주가 왕이신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그리고 내 영혼은 그분의 통치를 기뻐하며 기다립니다. 기도는 그렇게 믿는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마음을 쏟아놓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께 쏟아진바 되었고 그분은 우리 마음을 받으셨으니 우리의 인생은 그분의 처분에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그 분은 나를 위해 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줄을 아십니다. 종종 나는 나를 위해 좋은 것이 정확히 알 때도 있으나 그것을 실현해 줄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있습니다. 그 일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쏟으며 피의 펌프질로 자신의 진액을 쏟아 기도하였던 사람들에게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을 알도다.”
Ⅲ.적용과 결론
언제까지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듣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집사 시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성경학교에 철야기도를 하면 2-3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이 시편 5절 1, 2절의 표현 그대로를 기도하였습니다. 이 목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누구도 달랠 수 없는 울음으로 통곡하며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나에게 은혜를 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충만하게 만나주십니다. 천국에서는 나이, 학벌, 신앙의 경험, 신학의 지식의 깊이, 그러한 것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들을 주님께 데려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지 않는데 약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자동차가 길 따라 가지 않는데 네비게이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은 이렇게 울부짖는 기도를 우리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 통곡하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1년, 2년, 3년, 4년, 5년, 영혼의 침체 속에서 지냅니다. 세월이 너무 지나면 이것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놀랍습니다. 단 한 번에 울부짖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밟고 올라갈 사다리를 주십니다. 그 깊은 웅덩이에서 하나님이 헬기에 특수대원을 매달아 건져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깊은 웅덩이에서 주님은 밟을 발판과 그리고 붙잡고 올라올 수 있는 밧줄과 사다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죽기 원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운명처럼 수십 년 동안 침체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을 건져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적입니다. 그 속에서 그러한 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아, 내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진짜 이러한 기도의 깊이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러한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 앞에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