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15 새벽예배
4월 15일 새벽예배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녹취자 : 김세나
어떻게 보면 이러한 권면은 사실 좀 논리가 잘 논리가 안 맏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제 11장에서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에 대해서 논했고,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에 대해서 논한 다음에 그 다음에 이제 12장에서는 그렇게 그러므로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만을 바라보자고, 이렇게 권면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사람들에 대해서 걸고 있는 이 사도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 걸고 있는 신앙의 기대는 참 대단히 높은 것이었고, 실제로 아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말 그러한 그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게 하지 말아라. 음행하는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아주 단호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도 그 탁월한 그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을 본받고 그들처럼 살려고 하는 많은 사람과 같은 그러한 그 사모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점에 있어서 얼마든지 온전하게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그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잠자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부부 관계에 있어서 더러운 다른 성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오염되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실제로 다윗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러한 죄가 그러한 탁월한 신앙과는 관계없이 언제든지 그들의 인생길에 매복하고 있는 죄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일생을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과 거룩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다윗이었지만,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떤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적절한 방법으로 이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그러한 특별한 은혜의 간섭이 있기 때문에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지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출 시켜 버리시면 얼마든지 이러한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신앙을 그르치게 되기가 십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신실한 성도로 성장해 가야되겠다라고 하는 이 모든 삶, 이 모든 것들은 결코 허공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저한 반성, 어디 행음이나 음행이나 간음의 문제만 그렇겠습니까 만은, 모든 문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탁월함 보다는 오히려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그러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결국 그것이 끝까지 가려고 하는 그 궁극적인 발전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마지막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마지막의 빛 아래에서 처음을 봐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우리들이 명백하게 알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살인,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으로 가는 시작이에요.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그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러한 여자를 보면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그 자체가 마지막에 가고 싶은 것이 결국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보고 저 사람 정말 못 됐다. 이렇게 미움이, 미운 마음이 드는 것, 그리고 이렇게 보면서 마음에 그 음욕이 잠깐 생기는 것, 이런 것들을 그것을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지 않으니까 저항감을 갖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마음에 착상이 되어서 그것이 발전하고 발전하고 발전하고 해서 그래서 더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우리들이 다른 문제들을 우리들이 성화의 문제를 가지고 이해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 사실 우리는 그렇게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많은 죄를 우리들이 인정합니다. 음욕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 속에 있는 죄의 활동입니다. 아주 명백한 방식으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 회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꿈을 꾸는데 아주 불결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들이 아주 잊혀 졌으면 모르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들도 기도를 통해서 회개하고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우리 안에서 비록 꿈속에서 활동을 해서 우리에게 불결한 상상을 불러 일으켜서 그것도 무의식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기억 못 하니까 할 수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을 하고 그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이러한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씻어 버리실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에 즉각적으로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대입니다. 그리고 요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결국은 이러한 음행이나 간음, 여기까지 가서 결국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는 자기 자신을 경계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러한 식의 삶을 통해서는 이 속에서는 누구도 자유스러울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유스러울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일생을 예수님만 추구하며 산 사람도 누구도 이러한 죄의 희생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간음, 음행이나 간음의 죄들은 어느 한 순간에 습격하듯이 이렇게 덮칩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것은 신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죄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계속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국방비 가운데 어느 나라든지 이 국방비 가운데 굉장히 많은 액수의 돈을 경계를 하는데 사용을 합니다. 여러분 그 요즘은 그런 소리 잘 못 듣는데, 저쪽 강북에 있을 때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납니다. 못 들어 보셨어요? 쾅 하는데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같이 들어보신 적 있죠? 그게 아왁스라고 하는 공중조기 경보기 인데, 그게 비행기인데 그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내는 소리입니다. 그 비행기가 미국에 밖에 없었는데, 우리나라도 아마 도입이 되었을 것입니다. 도입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세 대를 도입한다고 했었는데, 그 아왁스가 뜨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저 백두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골프공 하나까지도 파악을 한다고 평양시내에서 두드리는 타자기 소리까지도 파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력이 이동하고 이러는 것이야 뭐 확실하게 파악이 됩니다. 그 공중조기 경보기, 그 비행기 딱 한 대에 2600억원입니다. 상상이 안 가는 액수의 돈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그러한 공중 경보기 같은, 왠만한 나라에 있어서는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부자 나라는 그런 것들을 몇 십대씩 만들어서 띄어서 그래서 전세계의 군사정보들과 많은 정보들을 수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 띄어 주는 것을 의존을 하다가 이제 구입을 뭐 아마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몇 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구입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한 경비를 들이는 것입니다. 공격용 무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말하자면 경보 시스템입니다. 그것은 쉽게 이야기 하면 휴전선에다가 5미터 간격으로 군인을 세워가지고 망원경을 가지고 북쪽을 감찰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죄들이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해서 움직이냐 하면,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각은 어떻게 해서 움직이게 되나요?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보고, 보이고 들리고 뭔가 자기를 연상하게 하는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들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가져다주고 그래서 그러한 자극들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죄에 대해서 약해지게 만들고 그래서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데로 나아가도록 우리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그러한 것들을 철저하게 자기가 멀리하고 차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보면, 이러한 음욕을 품게하는 그러한 도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같이 손만 뻗으면 성을 매매할 수 있고, 이렇게 되어 있는 겉으로는 유교적인 그러한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모두 껍질일 뿐이고, 속으로는 이러한 정도로 이렇게 자유스럽게 성을 매매하고 그러한 말하자면 산업들이 이렇게 일간신문에 공공연하게 도배질 하면서 나오는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왜 이것을 근절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간신문만 열어봐도 그 낯 뜨거운 도색산업들에 대한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외국 같은 곳에,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도 심의기준들이 한없이 낮아져서 어마어마한 음난물들, 장난 같은 것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에는 뭐 그러한 영화만을 상영하는 그러나 포르노 영화만을 상영하는 상영관들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뭐 이야기 들어보면 도시에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산속 같은 곳, 마음을 굳게 먹기 전까지는 찾아 갈 수도 없는, 그리고 광고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러한 법적인 규제를 받고 그러한 곳에서 운영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러한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엄청난 이러한 일들이 결국은 점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가치와 길에 쉽게 융합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져야 합니다. 꼭 그러한 음란산업에서부터 나오는 여러 가지 것들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심지어는 백화점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하기 위한 전단지에서까지도 심지어 가전제품이나 이런 것들을 판매하는 곳에서도 전부다 도발적인 이러한 그림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지켜야 하고,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우리도 예외없이 이러한 잘못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음행이다 그리고 간음이다 하는, 음행은 간음보다 훨씬 더 넓은 그 말하자면 넓은 개념입니다. 그러한 넓은 개념입니다. 그래서 혼인 이외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음란한 상상이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거기에 동생애 라든지 이런 것들 모두 포함이 됩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삶, 이것은 정말 진실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은사보다도 더 탁월한 가치는 뛰어난 은사보다도 뛰어난 은사를 받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는 순결입니다. 그 사람이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순결은 어느 한 방면이 아니라 모든 방면입니다. 돈에 대해서 아무런 욕심이 없고 이타적인 사람도 이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러한 음행이나 이러한 것에 대해서 정말 정말 그러한 죄 같은 것 짓지 않는 사람도 돈에 대해서 과도한 탐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결국은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온전히 채우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서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한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신혼 시절에, 물론 신혼 시절에 별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뜨겁게 사랑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도 어느 자매가 결혼을 했는데, 어느 교회에서 자매가 결혼을 했는데 어렸습니다. 스무 살 밖에 안 되었는데 시집을 갔는데 그래서 너는 어떻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집 가냐 그랬더니, 그냥 너무 같이 있고 싶어서 자기는 시집을 간다고.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는데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자매의 마음속에 이 세상에 남자들이라고는 없습니다.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기 안에 가득 채워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모든 남자를 자기와 반대되는 성에 있는 남자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혼인 서약이 느슨해지게 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서 아내나 남편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그러면 오히려, 오히려 아내가 객관적이게 보이고, 다른 여자들이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객관적이게 보이고 다른 남자들이 주관적으로 보일 수 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변화가 결국은 어디에서 찾아오는가 하면 자기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데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 되실 때에 그 신랑을 객관화 시키고 신자의 주관적인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득있는 동안에 이게 세상입니다. 이게 다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 입니다. 그렇게 느슨해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고 거기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께만 사랑받는 것이 우리 인생 전체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마치 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모세와 함께 말하기를 친구와 대면하여 이야기 함과 같았고라고 하셨을 때에 그 탁월한 친교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들이 그러한 점에 있어서 탁월함 보다는 온전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온전함을 정말 사모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이게 원래 그 세상 사랑의 그 극치가 이러한 그 음행과 간음이고, 여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게 되면 결국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강력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앉아서 이야기 하다보면 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농담에 올리고 그러는데 그러한 것들은 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잡지에서 이렇게 해서 잘 생긴 잘 생긴 여자, 잘 생긴 여자들 이렇게 들여다보면서 응시하면서 몸의 곡선을 따라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모두 다 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 속에서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몇 년에 한 번씩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결심을 하고 외국에서는 무슨 promise keeper 라 해가지고 아버지로서 서약도 하고 그러는데, 백 번 하면 뭐 하겠습니까. 수많은 decision, 결단보다도 중요한 것은 doing, 자기가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정말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의 어떠한 불결하고 더러운 행동을 인해서 주님의 얼굴빛이 자신에게 가려지는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갖고 그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고 어떻게 그 수많은 유혹들에 노출되어 있는 가운데서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발에서부터 그것들을 철저하게 이렇게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보면 텔레비전이나 나오는 잡지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말 오늘날은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그러한 무서운 시대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정말 모본을 보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혼, 이혼 하고나서 바람피우고 그리고 아무하고나 동침하고 하는 그러한 것, 그러한 것들을 예술적으로 포장을 해서 거의 그 속에서 도덕적인 판단들을 빼 버리고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동요하도록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 동정심들을 불러일으키고 하는 그러한 세상의 자태들 속에서 그것을 접촉하면서 계속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조하는 그것이 로마서 11장에서 이야기하는 이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에 있어서 그것, 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누구든지 그러한 약점과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경계하면서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셔도 끊임없는 죄와의 씨름입니다. 부패한 세상과의 싸움이 있고,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철저한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너무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도 이제 그 주님의 품에 이르러서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우리들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없는 괴로움과 이 피곤함 속에서 시달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신음하기까지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삽시다 라는 고백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들은 거의 유전이 됩니다. 그래서 불결한 집안에서 자란 자식들이 대를 물려서 그렇게 불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도색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보면서 거기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반발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따라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복적 모방 심리입니다. 따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러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징벌을 하지 않으셔도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자녀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문제 안 된다, 이것을 암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러한 삶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지키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화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항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바다를 항해 할 때, 수시로 풍랑이 붑니다. 세찬 파도가 막 거의 우리의 신앙의 배를 침몰 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도로 뱃전을 두드리고 지나갑니다. 곧 뜯질 것 같은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 보십시오. 그런 것을 만약에 환란과 핍박, 시련이라고 말한다면 이런 간음의 죄, 음행의 죄, 이런 것들은 폭풍과 같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폭풍은 다 끝났습니다. 다 잔잔한 바다가 이어집니다.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디 잠시 들르고 싶은 항구가 보입니다. 내가 나의 믿음이라는 배가 그 어마어마한 폭풍까지도 해치면서 그 다른 배 난파될 때 내가 살아남았고, 다른 사람들까지 다 태워주고, 이렇게 그 말하자면 수십 미터 파도를 해치면서 대양을 가로질러 온 그러한 항해 전적을 가진 뱃사람인데, 자만하고 갑니다. 그리고 잔잔합니다. 풍랑도 없습니다. 운전할 것도 없습니다. 비스듬히 누워서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해변 가까이에서 수많은 암초들이 잔잔한 바다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 까지 피해 가야지만 항해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의 폭풍을 지나 온 것이 탁월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잔잔한 바다에서 그 물속의 상태, 물속의 바위에 있는 상태까지 헤아리고 배가 잠겼을 때의 수면이 올라온 깊이와 모든 것들을 재면서 항해하는 이것은 온전함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하게 잠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안식처일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폭풍과 시련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싸우고, 그리고 평안한 길을 주셨을 때에는 그 잔잔한 바다 밑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 암초들을 경계하면서, 그러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또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쉼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 괴롬과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그 곳을 날마다 바라 봅니다
그래서 정말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은 성화의 길을 걸어갈수록 그들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행복할수록 이 세상의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자신을 채우고 있는 행복이 이 땅에 있는 행복들이 아니라 그 나라에 있는 것들에 대한 맛보기를 통해서 채워지는 행복, 그러니까 그 모든 고단한 이 성화의 싸움, 순례자의 투쟁을 모두 끝내고 완전한 쉼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흐느끼기까지 사모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거룩한 삶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죄, 특별히 이런 죄에 빠질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많고, 실제로 우리 가운데 이런 데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매우 근접할 정도로 가까이에 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언에서 말합니다. 불이 품고 어찌 데지 않겠으며 숯을 밟고 어찌 그 발바닥이 온전하겠느냐. 그냥 그러한 가까이에 있는 조건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끌리는,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에 끌리는 예쁜 성도들은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전단지나 모든 것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에 꽂히면서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는 삶에 대해서 사도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기를, 그것은 곧 피 흘리기 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이다. 그것이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형벌하시고 그들의 삶에 징계를 내리시고 혹은 그들을 지옥 보내시고 하는 심판, 그것도 말할 수 없이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그러한 치열한 성화의 싸움을 통해서 쌓아올린 그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이러한 죄악을 통해서 한 번에 와르르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고통스럽고 마음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