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새벽예배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 )
녹취자: 박정윤
6절에서는 결국 돈을 사랑하게 되는 신앙적인 기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을 사랑하게 되는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심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이런 믿음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생겨난 현상이다라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많이 소유했느냐 적게 소유했느냐 와는 상관없는 마음의 경향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문제삼는 것은 돈을 소유한 유무가 아니라 돈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고간에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사랑을 얘기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가난은 미덕이라든지 부유한 것이 악이라든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문제로 삼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내면입니다. 물질이 없어도 물질을 과도하게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물질을 과도하게 탐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어도 물질을 과도하게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경향이 물질로 향하고 있느냐 우리 주님께로 향하고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과도히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영혼을 심하게 불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육체가 비만으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음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물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젊어서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유혹에 빠질 위험이 높아집니다. 물질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부지런히 직업활동을 하고 성실히 사회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많은 물질을 주십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물질이 증식되도 시편에서 얘기하는바 같이 ‘거기에 치심치 말라’ 너희들이 재물이 늘어난다 해도 마음이 거기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음식을 보면서 내 앞에 놓인 음식 중에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음식을 주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내가 절제해야 한다 왜냐면 내가 비만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야채는 싫어하지만 먹어야 한다 비타민이 부족하니까 이렇게 보는 것이 객관적으로 보는것입니다. 비만일수록 음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것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많이 주셔서 물론 자기가 노력해 번 돈이라 자기돈이기에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저축할 수도 있고 좋은거를 살수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작은집이 불편해서 큰집으로 옮길 수 있고 작은차가 불편해서 큰 차를 탈 수 있고 옷도 헐벗었다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고 음식도 저악한 음식을 먹다 나은 음식을 먹는 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가가 중요합니다. 물질이 많이 들어오면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물질을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물질의 많은 것이 반드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돈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생각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마음에 맞게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물질을 가지고 사용하는 원리 그 중심에 하나님의 뜻이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뜻 속에 자기 자신을 공개하는 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있으면 돈이 많이 생겨도 마치 그 일이 자기와 별로 상관없는 객관적 현상으로 느껴집니다. 그게 성화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누구도 그러한 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성화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성적문제, 물질문제, 교만의 문제, 미움의 문제 이런 것들을 극복하지 않고는 그것이 올무같이 사도가 디모데전서에서 말한거처럼 부하려는 사람마다 올무에 빠지게 되나니 올무는 짐승을 잡는 덧인데 짐승을 잡을 때 올무가 짐승의 온몸을 전부 가두지 않습니다. 물론 위에서 밧줄을 던져서 위에서 떨어지게 만들어 자루에 들어가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고대에서 쓰는건 올무입니다. 기다란 포승줄에 발을 집어넣으면 줄이 묶이거나 덧이 튀어올라 발을 치어버린다든가 그렇게 나머지 몸은 자유로운데 어느 하나가 잡혀서 그 한 부분이 자유롭지 못해 헤어나지 못합니다. 사자라 생각하면 커다란 포효하는 그 울음소리도 그냥 있고 날카로운 발톱 뾰족한 이빨도 그대로 있지만 발 하나가 틀에 쪼이는 것 이것이 부하려는 자들에게 올무가 되나니 돈이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자신의 영혼도 망가뜨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시인이 여기서 고백한 바같이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두려움이 없도다 라는 고백을 영원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사는 그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돈과 한편 되어 사는 인생이 안전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어렸을 젊은 시절에는 성적 유혹이 그에게 넘기 힘든 올무가 되고 나이가 좀 들면 명예가 그렇게 작용하고 더 나이가 들고나면 노역이 되게 물질에 대한 것으로 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에 맡길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날에 눈에 총기가 빛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앙망하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총기가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는 있지만 젊어서 흐릿하던 눈동자가 나이가 들어 점점 맑아지고 순결해져서 또렷하고 정확한 판단을 가지고 일생을 성화의 길을 걸어가다 마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모든 것이 노역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우리들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어 넘어지고 물질이 많아 넘어지고 그래서 성경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를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너무 부유하면 주님을 잊어버릴까 너무 가난하면 주님을 모른다 할까 하나이다 그 고백이 사실 연약한 평범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보면 물질이 어느정도 있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의 부자 록펠러라고 하는 사람을 기자가 해마다 인터뷰를 했는데 작년에 얼마나 보셨습니까 많이 벌었습니다. 올해는 어떠십니까. 작년보다 조금 더 해마다 작년보다 조금 더 결국은 누구도 그것을 다 쓰다 죽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끊임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도 기껏해야 대여섯자 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를 물질로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도토리만한 인간 속에 있는 물질에 대한 탐욕은 한이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 하나를 버렸다고 온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물질에 대한 탐욕은 한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에 자유롭다 말할 수 업습니다. 결국은 이 물질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질이 어떻게 사용되냐면 자기가 사랑하는 중심에 맞게끔 쓰여집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물질을 얻었는데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위해 많이 씁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위해 많이 쓰거나 자녀를 주기위해 예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에 맞게끔 물질이 사용됩니다. 물질이 쓰여질 때도 결국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의 고백을 따라서 물질이 사용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형제를 위해 많이 쓰여지고 부모를 깊이 사랑하면 그 물질이 부모를 위해 쓰여지고 이 세상의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여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들을 위해 쓰여집니다. 항상 자기의 마음을 애틋하게 울리고 지나간 그것을 위해 쓰여집니다. 저는 작년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그 신학교에서 후배들이 점심시간에 150명 내지 250명이 밥살 돈이 없어 물 한 모금 마시고 산으로 올라간단 얘길 듣고 며칠 가슴이 저렸습니다. 아마 그 얘길 들은 모든 사람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셨는지 저의 마음이 그렇게 저릴 수 없었습니다. 저도 못지않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고 500원이 없어 매점에서 100원짜리 빵으로 때운 적도 있지만 매일 식사를 거르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산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무엇이 사람을 움직였는냐 하는 그 동기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 사용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움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은 물질을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마음이 감동되어서입니다. 내가 물질 때문에 어려운 적이 있다하고 교회도 물질 때문에 압박을 받는다 해도 내가 최소한 점심시간에 밥이 없어 냉수를 마시고 식사시간을 피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렇게 움직인게 부모라 그럼 부모를 위해 효도하게 되고 그렇게 움직인 것이 하나님이다 그럼 하나님을 위해서그렇게 움직인 것이 나라다 그럼 나라를 위해서 이게 그 사람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그대로 나타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물질들이 다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신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고 자기만을 위한 물질을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많이 소유하게 되도 항상 그것을 객관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모든 물질을 하나님이 많이 주셔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다면 믿음에서 파산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관리해가면 하나님은 절대 신앙 없는 사람에게 한번에 어마어마한 돈을 맡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영혼이 반드시 파괴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냐면 물질보다는 당신의 자녀가 훨씬 소중하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험을 하십니다. 조금 맡겨보십니다. 그래서 그가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좀더 맡기시고 좀더 맡기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에게 맡기신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때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십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에 나오는 것처럼 길 잃은 자들을 친절히 이끌리 내 형제 섬기리 무엇으로 형제들을 섬길 수 있겠느냐 중요한 자원이 이세상의 부조리, 개인의 능력차이에 있어 불균등하게 배분된 물질을 은혜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손길이 되어 그것들을 재분배하는 경제적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벳사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먹이실 때에 모두 똑같이 40,50명씩 원을 그리며 앉게 하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많이 없는 사람들에게 적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늘 일어날수 있어도 그런 불균등에서 오는 고통을 해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 자녀들의 본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순결해지고 물질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