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하나님의 영광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1-4)
녹취자: 원수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났는데 누구의 죄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II. 장애와 제자들의 시선
A. 장애를 죄의 결과로 봄
여기서 우리는 장애와 제자들의 시선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어보았지만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 사람이 갓난아이였을 때, 뱃속에 있을 때 죄를 지었겠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지만 제자들은 아마도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도 똑같이 이런 장애에 대해서 심리적인 편견과 사회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B. 정상인, 자기 의를 드러냄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정상인으로서, 우리 얘기로 하자면 비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는 그렇지 않게 태어났으니까, 만약 저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우리 조상은 의롭고 나도 또한 의롭다.’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남의 아픔, 남의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는 맨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한 사람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다음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그의 신체의 일부분을 취하여 여자로 창조되고, 그 다음부터는 둘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음으로 인류가 번식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취하셨을까요? 온 인류가 한 사람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모두 하나의 몸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 이 연합들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깨어진 사람들이 각각 죄와 타락에 물들면서 이기적인 마음이 생기고 결국은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상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III. 장애와 예수님의 시선
A.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님
1. 죄 때문이 아님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다른 시선으로 장애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장애와 예수님의 시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2. 성경의 저주에 대한 이해
이것은 아마 그 당시 구약에 익숙해져 있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신명기 28장 15절에 “순종치 아니하면 저주가 네게 임하며”, 창세기 12장 3절에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하면서 신적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저주를 생각할 때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저주는 하나님이 인간을 매우 증오하고 인간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불행하게 하려고 내리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이 어떤 불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사람의 반응에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확 솟구치는 분노가 일어나고, 절제를 못해서 인간을 쳐 죽이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원하면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얘기합니다. “너 인마,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들어와야 돼! 너 오늘 또 학교 끝나고 나서 친구들하고 PC방 가기만 해 봐. 너 죽을 줄 알아. 너 여섯 시까지 안 들어오면 죽어.” 그러면 엄마가 다섯 시부터 숫돌에다가 칼을 갈고 있는 것입니까? “이 자식 들어오면 숫돌에다 칼을 시퍼렇게 갈아서 죽여 버려야지.” 그렇게 하겠냐는 겁니다. 부모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있을 때 사랑도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야지만 그 두려움이 무서운 두려움이 되지 않고 공경하는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만약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너희들이 불행한 일을 만날 텐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너희를 저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경고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고 죄를 싫어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편 속에서 이런 언어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장애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에 대표적인 세 가지 삼중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세 번째는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고치실뿐만 아니라 그들을 잘 돌보시며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얼 보여 주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의 인간들을 향해 품고 계셨던 마음을 새롭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장애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충만히 입어서 그런 장애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장애를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중풍병 들린 자를 온전하게 하고, 문둥병 들린 자를 정결하게 하셨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애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으로 보여주셨고 이것은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일을 나타냄
1. 장애를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님이 이런 장애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를 고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고침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약을 사용해서 의학적인 방법을 쓰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제한이 없는 능력을 보여주셨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인간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권능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장애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
이것은 장애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과 은혜의 힘으로 이런 장애들을 고치시는데 이 광경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저 분이 누구이길래 날 때부터 소경된 저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을까?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많은 선지자들이 있고 율법을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이 있어도 보지 못했던 일인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일을 하시는구나!’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태어났을까? 지 엄마 지 아빠가 아마 엄청나게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눈먼 자식이 태어났겠지. 그리고 쟤는 뱃속에서부터 죄덩어리였나보다.’라고 생각할 때에 예수님은 오히려 그 아이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차별을 읽을 수 있습니까? 차이를 읽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인류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몸으로 본다면 자기 몸의 한 상처처럼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회적인 장애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저는 한번,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화란의 자유대학 교수가 쓴 논문을 읽으면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어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논문의 내용의 요지가 뭐냐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사회가 돈을 걷어서 도와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일평생 누군가를 의존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사람은 먹고 쓸 수 있는 물질적인 요건이 조성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 독립된 힘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그 사람을 사회 속에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맥도날드 같은 햄버거 회사에서 장애인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포장하는 일들을 맡깁니다. 자기가 그렇게 근무를 하면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 해고될 염려도 없이 자기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사랑부 지체들이 만든 커피를 한 잔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자꾸 커피를 먹지 말라고 그래서 반으로 줄였습니다. 하루에 두 잔을 먹는데 절반씩만 먹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얼마나 맛있는지 한 컵을 다 마셨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그렇게 뭔가 기술을 습득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라 당당하게 사회의 어떤 역할을 하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도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쳐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눈먼 사람은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맹인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저는 여러 사람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소경된 것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고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간증하면서 일평생 하나님 아버지께 또 다른 방식으로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날 주님께 많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 자체를 없게 하시지 않고 병자를 돌보셨습니다. 가난 자체를 완전히 기적적으로 없애버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적으로 한 번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실 때도 있지만 그 기적보다 오히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또 다른 찬란한 은혜의 성품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를 다니면서 늘 궁금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다닐 때 내가 예수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산 얘기를 하면 동료들이 무슨 소설 읽는 것처럼 들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돈은 안 주셨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성도들이라도 와서 “전도사님, 7만원씩 받아서 45만원 학비를 어떻게 냅니까? 이거 보태 쓰십시오.” 그렇게 해서 준 적이 없습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교수님이 주신 적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친구들 보면 너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 때 저는 교회에서 사례금을 12만원 받았는데 그렇게 사례 받다가 강사로 나가게 됐는데 나한테 배운 한 학생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교수님, 저는 이번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뭡니까?” “직장을 다녀서 늘 공부를 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더니 교회에 있는 집사님이 공부만 하라고 한 달에 70만원씩 생활비를 주기로 했답니다. 그게 1983년도 일이니까 지금부터 22년 전입니다. 지금 화폐의 느낌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250만 원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250만 원씩 줄 테니까 그것으로 생활을 하고 직장 다니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했답니다. 돌아오는데 마음이 많이 상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해주시고 나는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은 학교 옆으로 이사하려고 왔는데, 방 한 칸에서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큰 방을 봤는데 너무 비싸게 달라고 그러더랍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변두리에서 방 하나를 빼가지고 학교 옆으로 왔는데 방 두 개짜리를 얻으려고 그러니까 만만치 않잖아요. 얘기를 하다가 “뭐하는 분이세요?” 그래서 “네, 전도사입니다.” 그랬더니 아니 그냥 방 하나 값에 두 개하고 마루달린 거 쓰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절반을 내고 전세를 들어간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놀러오라고 그래서 그 집에 가서 보는데 또 마음이 상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나한테 이렇게 하실까?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그 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이유가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 제가 이제까지 키운 게 뭐냐면 독립심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손을 얹고 누군가에게 부당한 도움을 기대하거나 분에 넘치는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살지 않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영혼의 한 자유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으며 감격하며 잠시 울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고통을 많이 당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니 각자 하나님은 정해진 길대로 인도하여서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기적보다 사랑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셨고 약한 것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C.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함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에게 주신 일인데 그 일을 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는 참여할 수 없는 사역이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이런 사역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여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장애인과 함께 계셨더라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라고 생각하며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사랑받을 자로 선택하셔서 돌보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편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그것을 느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환자를 치료하고 하신 모든 것은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알았던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결론을 맺자면 예수님은 장애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로 보셨지 불행과 저주라고 보시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의 자녀만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고, 아이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인생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현실을 잠잠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불행해 보이는 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시고, 그래서 이런 믿음으로 살면 내게 일어난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오히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으로 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불행해 보이는 일들을 사용해서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장애는 한 몸인 교회의 약함입니다. 우리들이 몸이 있을 때 덧나거나 상처가 나거나 혹은 다쳤을 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약을 바르고 치료해서 온전케 하며 살아가려고 끝까지 노력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이 장애를 가족들과 지체들이 깊이 끌어안고 이 아이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들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