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하나님의 영광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맹인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나타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애에 관한 제자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II. 장애와 제자들의 시선
A. 장애를 죄의 결과로 봄
제자들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즉,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인데 자신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든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애를 하나님의 저주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들만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를 지닌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모로서 커다란 죄인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사회적인 편견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우리들이 오늘 이 성경을 통해 올바로 풀어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히틀러는 나치 시대에 장애인들을 학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더욱이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위대한 게르만 족의 후손이 될 수 없고, 나라의 건강을 좀먹는 자들이고, 또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손을 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깨끗이 없애버려야 강인한 게르만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B. 정상인, 자기 의를 드러냄
제자들은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동일한 시선으로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정상인으로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저 사람은 자신이나 혹은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맹인이 되었다면 앞을 볼 수 있고, 장애가 없는 우리는 저 사람에 비해서 나 자신이든지 우리 부모든지 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를 갖지 않은 자신이 신체적으로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깊은 강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가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어두움 쪽에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분법으로 장애의 문제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을 때에 장애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지에 대한 아주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남의 죄를 자신의 죄와 동일하게 여겨 마음 아파하도록 만들고 사랑은 아파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공감을 형성해서 남의 아픔인데도 그것이 나의 아픔인 것처럼 절절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장애의 문제를 그저 몸의 장애라고 생각하지만 몸의 장애는 다른 사람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마음의 장애는 종종 성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부의 크기를 대게 저택으로 가늠하기 좋아하고 저택의 크기는 베드룸이 몇 개냐를 가지고 잽니다. 6개의 베드룸을 가진 저택에서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부부가 교회 다니고 있었고, 특별히 부인은 아주 열심히 교회에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고 아들은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세월이 흐른 다음 어느 날 아들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이제 군대 복무를 모두 마치고 이제 귀국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정말 잘했다. 네가 제대하게 되었다니 정말 잘했다” 그랬더니 아들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가긴 가는데 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제 친구가 같이 갑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저와 함께 우리 집에서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월남 전쟁에서 두 팔과 한 다리를 잃어버린 장애인이 되었고, 곧 귀국해 봐야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이 친구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불쌍한 친구입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묵는 거는 상관없다만 우리 집에서 계속 있는 것은 안 된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뭐라고 그러겠니? 너희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우리가 그동안 좋은 평판을 쌓아왔는데 네 친구 때문에 우리 집안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친구는 두고 너 혼자만 얼른 돌아오너라. 그리고 몇 날이 흐른 다음 경찰서에서 이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살을 했는데 우리 경찰이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소지품에서 나온 유품을 확인해 보니 선생님 집안의 아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고 두 팔과 한 다리를 잃어버린 상의군인이었습니다.” 육체의 장애는 누구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장애는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죽음으로 내몰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두 하나의 가족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문화와 모든 혈통과는 상관이 없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서로 고백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시려고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각각 두 덩어리의 흙으로 빚지 않으시고 한 사람만 그렇게 빚으시고 나머지 사람은 그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사람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의 사회의 목적을 다시 구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죄와 인간의 허물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이 모든 가족 관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고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용납함으로 남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남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모두 한 몸을 이루며 살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선교를 통해 온 인류를 한 가족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비추어 본다면 제자들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과 자신 사이를 이분법으로 가르고 그의 장애는 죄의 결과이고, 나의 정상은 나의 의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 이분법적인 구도를 예수님께서 이기심이라고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이런 시선으로 장애의 문제를 보는 사람이 교회 바깥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외식과 거짓이 나오는 것입니다.
III. 장애와 예수님의 시선
A.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님
1. 죄 때문이 아님
이에 비해서 예수님이 장애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제자들이나 유대인의 그것과는 현저히 달랐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해석은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니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는데 언제 죄 지을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또 그럼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이 앞을 보지 못하는 이 맹인이나 그의 부모가 무슨 성자처럼 아무런 죄도 없는 순결한 사람이라는 것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원죄도 있을 것이고 모든 평범한 사람처럼 죄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 때문에 일어난 장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저주에 대한 이해
그러면 우리는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기록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9장 1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네게 임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 구약에서만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기록했던 사도 바울은 동일한 서신을 받았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과는 매우 다른 성경 해석을 우리들이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구약에 나타난 저주에 대한 내용, 특히 시편 같은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적들에 대한 저주를 탄원하는 기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들의 저주를 비는 탄원이 저주 자체가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훼방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인간을 향한 저주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신적인 경고의 말씀으로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말로만 이렇게 저주가 임하며 재앙이 임하며 라고 말씀하시지 모두 뻥이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런 화법을 화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더욱이 이 저주가 언약 백성들에게 게시된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해석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자, 여러분의 자녀들 중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가장 개념이 없는 나이가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합니다. 중 2. 그래서 중 2가 많아서 북한이 못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내미가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 자녀 중학교 2학년 딸 중에서 학교 갈 때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십시오. 중 2는 그렇게 안합니다. 말도 안하고 휙 나가거나 “엄마 나 학교가”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가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지릅니다. “야, 너 오늘 어제처럼 다른데 가면 혼나. 너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와야 해. 너 6시까지 안 들어오면 죽어” 딸에게 얘기합니다. 강조점은 “죽어”가 아니라 “6시까지 꼭 들어와라. 엄마가 제발 빈다” 그것입니다. 딸에게 “너 6시까지 안 들어오면 죽어” 그런다고 해서 엄마가 6시서부터 불 끄고 숫돌에다가 부엌칼 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징계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기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에게 이것을 강하게 바라고 계신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에는 장애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한 말씀을 잘못 해석한 유대인들이 성경에 기초했다고 주장하며 장애를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그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의 장애를 향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긍휼이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장애가 있는 자들을 치료해 주셔서 새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런 인간들과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더러운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인습을 깨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 많은 긍휼과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시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아마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 사람에게 예수님처럼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친히 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대화하며 실로암 물가로까지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시기까지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절을 베푼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장애가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일을 나타냄
1. 장애를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
오히려 이 장애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병을 고쳐주심으로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고, 문둥병 걸린 사람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제한이 없으시고 모든 자기의 뜻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초대교회 때만큼 풍부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이렇게 큰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리가 없었고, 복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기적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큰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이 맹인을 통하여 펼쳐 보이시고, 이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영광의 기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장애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어떤 심정이 기적을 행하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사도라 명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병과 약한 것과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셨고, 이 능력으로 제자들은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능력을 주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마음이 칼로 에이는 것처럼 아프셨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을 주셔서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라고 제자들을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만 보지 말고 그렇게 거의 버려진 것처럼 방황하던 백성들을 위해 그 놀라운 기적의 능력으로 장애를 고쳐주시고, 치료해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 마음 안에 있는 장애를 당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애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장애를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장애를 이기며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도 보여주십니다. 사랑과 은혜의 힘으로 이 모든 장애의 상태를 이기며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 있는데 이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일까요? 단지 병든 자를 고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기적으로 치료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베풀고 보여주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도 함께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셨는데 병 자체를 없애 버리지 않고 병 걸린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가난 자체를 없게 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기적적으로 믿게도 하셨지만 사람의 몸을 가져 인간의 형체로 오셔서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기시면서 까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병든 자를 끝까지 돌보고 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심으로써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 이 일은 우리 중 모든 사람이 함께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느냐고 더러운 물건 보듯이 하는 이 사람들의 시선을 고쳐주고 이 장애 상태에 있는 사람이 당하게 된 이 장애가 버림 받아야 할 이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아야 할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임을 예수님께서는 몸소 보여주셨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일이었고, 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여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C.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함
예수님의 사역에는 참여가 불가능한 사역이 있고 가능한 사역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대속해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 그리고 절망적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는 이 사역은 우리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고 마음 아파하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시기까지 불쌍히 여기신 이 사역은 우리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역이고, 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장애인과 함께 계셨더라면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장애인들을 본다면 아마 지금처럼, 제자들처럼 그렇게 장애가 마치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까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뭔가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라고까지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 사람에게 이 세상 누구도 베풀어 본 적이 없는 큰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 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서 씻도록 부르셨던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장애를 가진 가족을 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돌이킬 수 없도록 일어난 과거에 대한 집착하는 후회는 어떤 식으로든지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수 없습니다. 하필이면 왜 내 아이에게, 하필이면 왜 나에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한탄하며 장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람들이 묻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라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 사람을 만족하게 할 만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답이 아니고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어쩌면 천국에 갈 때까지 왜 내 아이에게 그 일이 일어났고,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장애가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믿음으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출발선입니다.
비록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우리 아이의 죄나 혹은 나의 죄나 심지어는 우리 조상의 어떤 죄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이 일이 내게 일어났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확신입니다.
한때 제가 좋아하던 가수 가운데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팝페라 가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맹인으로서 파바로티 콩쿨에서 우승을 하고 화려하게 데뷔한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게 되었고, 의사가 당신은 다시는 눈을 볼 수 없다고 선언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 일평생을 맹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 엄중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1시간 반 동안은 온갖 생각과 고민이 오고가고 고민했지만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이 열린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고, 그래서 이 장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을 향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 하나님께 대한 반항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런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영혼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게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어느 부모는 이 아이가 우리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왜? 그 아이 때문에 하나님 더 많이 의지하고 그 아이 때문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그 아이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갈 때 남이 보기에는 꽃처럼 향기로운 생활이 아니지만 그러나 갈피갈피 숨어있는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들,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약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터득할 수 있었던 하나님 성품에 관한 지식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낮고 천한 인간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 이 세상의 편견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오해에 시달려도 그 속에서 주님을 굳게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넘치는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웃의 장애를 한 몸인 교회의 약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마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되면 어떡하든지 그것을 고쳐서 사용하려고 하지 안질이 났다고 눈을 빼버리고, 코가 막힌다고 코를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몸을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몸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그들의 장애가 바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섬김으로 드러낼 기회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영성이고 경건인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주님은 오늘도 이 세상 사회적인 편견에 시달리고, 그 옛날 유대인들이 가졌던 거짓된 편견으로 장애를 마치 죄악시하고 마치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징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 모든 사랑 없는 판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 자신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을 지를 한번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매일매일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이 사랑과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이웃의 모든 장애를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여기며 그래서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 단지 물질적인 도움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모든 어려움들을 딛고 정상적인 사람들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도움 때문에 살아가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꾸시면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라고 은혜를 주시나니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어디서든지 유대인 같은 마음 품지 말고 예수님 같은 마음을 품어 섬기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