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코넬 종강예배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42:1-2)
녹취자: 박지성
이 시편은 시편분류에서 탄원시에 속하는 시편입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나오는데 ‘마스길’이라는 뜻은 ‘지혜롭게 하다’의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반복해서 읽으면 아마 지혜로워진다는 교훈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라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는데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라자손이 쓴 시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고라자손의 소유라는 의미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뉩니다. 어떤 사람은 이 42편의 문체가 다윗의 다른 시편의 문체와 아주 흡사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시가 고라자손의 시이고 고라자손의 독특한 탄원이라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다윗이지만 이 시를 가지고 보관했던 사람이 고라의 자손이라고 보고 그 사람에게 속한 시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누가 이 문제에 대해서 ‘증거는 이것이다’라고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라자손 중 한 사람의 시 일수도 있습니다.
고라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에 모세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었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나쁜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엄중하게 벌하셨습니다. 고라자손의 진이 지진이 일어나면서 모두 땅속에 들어가 버리고 족속들이 멸망하는 전대미문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라의 자손들이 전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했던 반역의 당이라고 하는 부끄러운 오명을 쓴 채 슬픈 집안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가문의 명예를 회복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주어지는데 다윗이 왕국을 세울 때에 그의 사역에 협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이 사람들을 성전에서 수종드는 일꾼으로 섬기도록 배려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고라의 자손들은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 아주 부끄러운 족속이었다가 성전에서 존귀한 직무를 감당하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목마릅니다.”라고 말입니다. 공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시대적 문맥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트랜스 요르단으로 망명하였을 때에 기록한 시였을 것으로 대개 합의를 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망명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기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왕국을 빼앗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성 앞에서 재판을 받으러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시작했고 의도를 가지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작업과 함께 군사들을 모으고 무기를 착실하게 준비하며 부왕을 살해하고 왕국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의 반란은 급속하였고 다윗이 아끼던 많은 장수들이 반역자의 무리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황망하게 성을 빠져나와 망명의 길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을 와서 법궤도 없이 성소에서 축출당한 채 그는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이 있어도 예배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망명길에 동행했던 고라의 자손이 이 시를 지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을 지극히 사랑하고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이 고라의 자손은 지금 자기 생애의 최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수들을 쫒아내시고 이스라엘의 기름부음 바 다윗왕에게 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절실한 기도의 제목들을 뒤로한 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갈망을 우리 하나님께 기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문맥을 고려해야지만 해석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지방 팔레스타인에는 사슴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슴들이 가을철에 교미를 하게 됩니다. 하나의 암사슴을 놓고 뿔을 길게 기른 사슴들이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암컷을 차지하는 계절입니다. 수사슴들은 이 가을에 발정을 하게 되는데 이 발정한 수사슴들이 짝짓기를 위하여 암사슴을 찾아 나섭니다. 이 발정기가 되면 수컷 사슴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면 타는 듯한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처음 광야에 나섰을 때에는 암사슴을 찾아 나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슴의 몸속에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 엄습하고 그리하여 그는 이제 암사슴이 아니라 한 모금의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물을 찾는데 이스라엘에는 알다시피 아무 곳에서나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슴들이 물을 찾기 위해서 헐떡거리고 나중에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물을 찾습니다. 너무 목이 마르면 사슴의 눈에 신기루가 보이기 시작하고 달려가 보면 저만치 샘물은 이동을 하였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들판에 쓰러져 뜨거운 뙤약볕아래 죽어가면서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헤친다고 합니다. 이 시인은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이렇게 가을철에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죽어간 사슴의 시체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느끼고 있는 이 영혼의 대치할 수 없는 갈망을 조용히 뜨거운 마음으로 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의 주석’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지성의 행복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과 함께 지성으로 교제하며 그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흠뻑 맛보는 그 희열과 행복 속에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 행복을 자신의 인격과 삶속에 온전히 구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삶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두고 온 가족이나 두고 온 재산 그리고 원수들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잃어버린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 차 있으나 그분께 제사할 수 없도록 추방된 상태 때문에 영혼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는 같이 사는 동안에는 확인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떨어지고 헤어져보면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교통하고자하는 정신의 속성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관계에서 떼어놓으면 그와 함께 교제하고자하는 성향은 있으나 교제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 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 자신도 죽기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할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야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경건한 수도사이던 시절에 하나님이 그를 내려다 보셨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렸고 때로는 금식과 고행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참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고 그의 신학은 가톨릭의 고전이 되었지만 우리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독교 사상사의 아주 중요한 한 산입니다. 그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토마스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공부만 열심히 하니까 아버지가 걱정이 됐습니다. 만날 하나님만 찾고 공부만하니까 아들을 신학공부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예쁜 자매를 한 명 구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방에 살며시 들여보냈습니다. 미인계를 쓰게 한 것입니다. 아퀴나스가 공부하다보니 문이 열리면서 눈부실 듯이 예쁜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보면서 아들이 마음이 동하여 좀 타락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들어오자마자 이 형제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물러가라.” 물러가지 않으니까 난로를 열고 난로에서 활활 타고 있는 장작을 하나 꺼내서 휘두르면서 “사단아! 너는 내게서 물러가라.” 그러고 쫓아내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다음 그 장작의 시커먼 숯 덩어리로 자기 공부방에 십자가를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 경건한 수도사가 간절히 기도하며 금식하고 때로는 밤을 새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퀴나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퀴나스야,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랬더니 아퀴나스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매일 그렇게 눈물로 금식하며 고행을 하며 나에게 부르짖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그랬더니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고 만약 하나님이 제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당신은 저의 것이고 저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찬송)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가 주를 찾고자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저는 한때 신학교수가 된지 3~4년 동안 괴르너의 판화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뭉툭한 목판화로 돼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고 얼굴에 주름살이 있는 어떤 남자가 주님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 괴르너의 판화. 거기에는 독일어로 써 있습니다. “헤르 이히리베 디히 이빈 다이 두 비스드 마이” 오랫동안 그 판화를 보는 게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을 하는 것도 다른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코아’가 있습니다. 핵심. 핵심이 뭐냐면 갈망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연인이 되거나 부부가 되었다고 칩시다. 연인인 것이 더 좋습니까? 뜨겁게 불이 붙었으니. 같이 아이스크림 집에도 가고, 낚시도 가고 예배를 드리러 가고, 피크닉도 가고, 도서관에도 가고, 같이 운동도 하고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다 주변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사이에 있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로 든 모든 일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신학에도 그런 ‘core value’, ‘core relationship’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축적과 그 지식이 적용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마치 영혼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는지 아십니까? 저는 많이 봤고 제 품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죽을 때에는 몸이 툭 하고 풀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이 척추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얀 실같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시에 보면 ‘그의 등을 창으로 찍었다. 창끝에 하얀 실 같은 그의 영혼이 묻어 왔다.’ 확 찌르니까 으악 하고 죽는 것입니다. 확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영혼이 이렇게 온 몸을 실처럼 쫙 연결해서 꽉 붙들고 있다가 영혼이 툭하고 끊어지니까 확 몸이 풀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사실은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신학함에 있어서 신자로 사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은 마치 그리스사람들이 이해했던 육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와 같아서 그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사랑이 살아있으면 그의 모든 삶과 행실 그리고 그의 영혼과 정신의 모든 작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자매들이 독신으로 외롭게 있다가 좋은 형제와 눈이 맞아서 사랑에 불이 붙습니다. 그런 사람을 의학적으로 촬영을 해보면 신체에 모든 변화가 다 일어납니다. 뇌파도 달라집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텔레파시를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가봐야 수신 불가입니다. 그런데 수신처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뇌가 안 변하겠습니까? 신체에 모든 변화가 다 일어납니다. 인간끼리 주고받는 육욕적인 사랑도 그러한데 이 영혼 깊은 좌소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실재적으로 내재하는 삶과 그것이 별로 없는 쇠약해진 삶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신학이 생명이 있다는 가장 훌륭한 표는 페이퍼 속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실존 속에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찬송)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요새도 그럴 때가 있지만 요즘은 좀 덜합니다. 한 7~8년 전인가 제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저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아주 깊은 터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매주 금요일 마다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도하고 말씀 준비도 했지만 제일 즐거운 시간은 캄캄한 밤중에 기도원 숲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온 땅과 하늘 가득히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꽉 차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의 지극하심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내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이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사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모욕적인 삶의 태도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엑스겔렌 띠아 크리스틴” 이것은 뭐냐면 “풀 크롬데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영혼도 그 하나님 때문에 아름다워져 가는 것, 그 모본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것이 신앙이 주는 유용성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뒤집어서 말하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부지런히 기독교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움과 그 사랑의 정동에서 오는 기쁨이 없다면 허위로서의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신학자들이 남겨놓은 신학적 모든 진술들 중 우리에게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신학을 도구삼아서 성경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거기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주 조잡한 인간의 언어로 서술해 놓은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이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처럼 인간의 언어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글로 써진 하나님에 관한 진술은 가장 낮은 상태라는 것을 느껴야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생명 속에서 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오늘날 신학을 올바르게 공부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신학들이 창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뭐냐면 신학이 올바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에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유명한 최고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인 조지 마이스턴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와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두 시간 동안을 우리들이 강가에서 정말 달콤한 시간을 가졌는데 그분이 오늘날 현대 미국교회에 대해서 저에게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미국교회의 특징은 ‘슈퍼피셜’ 너무 피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피상성들을 극복하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뭐냐면 피상적인 신자들이 전혀 피상적이지 않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피상성에 대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목회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두꺼운 신학책을 읽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상적인 신자들보다는 피상적이지 않은 우리들이 훨씬 하나님 앞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아주 깊고 깊은 은혜의 샘에서 뿌리를 박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을 향한 가장 우렁찬 선포는 ‘프레즌스’ 그 자체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최대의 ‘프로크레메이션’ 다른 삶의 양식으로 다른 존재로 그들과 다른 ‘디퍼런스’를 가지고 내가 여기 있는데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헤도니즘’을 내가 느끼고 있는 그런 ‘헤돈’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갈망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그 건장한 사슴이 광야에 쓰러져서 거품을 흘리며 죽어가는 것처럼 이 시인 자신은 지금 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한 모금의 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이 한 모금의 물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이야기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그 물을 가지고 워드플레이를 하십니다. 그 여자에게는 낯선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뿌리 깊은 비유입니다. 그 여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메시아이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런 갈망이 우리의 삶속에 깊이 묻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생활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하는 경건의 기법중의 하나가 모든 신학활동 속에 기도가 배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신학책을 읽을 때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학기 중에 수업을 하는데 조국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내 머리를 스쳐가서 마음을 우울하게 할 때 혹은 생활비가 떨어졌다는 염려와 근심이 내 머리를 스쳐갈 때 모든 수많은 상념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인격과 삶이 아주 더럽다고 느껴질 때 ‘용서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공부하는 시간과 설교하는 시간은 나누어지고, 설교하는 시간과 사역하는 시간은 나누어지고, 사역하고 시간과 오락을 하는 시간은 나누어지지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핏줄 같이 흐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이 시인은 그런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품고 있는 소원이 2절에 나타납니다. 그것이 뭐냐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이 시인이 비록 요단 건너편으로 왕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나왔지만 거기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잡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상천하지에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평진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시인이 만나고 싶은 하나님은 그렇게 이론적으로 어디든지 다 존재해계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이 구약에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과 활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상태가 생명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언약백성과 함께하실 때에 일어났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합니다. 저 위대한 출애굽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광야의 그 수많은 전쟁들 가나안의 정복이후의 모든 그 사무엘과 사울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역사 속에 함께하셔서 살아계신 당신을 계시하셨던 위대한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그 크고 위대한 역사적인 간섭이 지금 자기의 시대에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함이다’, ‘꼬람데오’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누가 ‘꼬람데오’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인간이 당신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면 당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순종하면 기뻐하시는 당신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반역하면 진노하시는 당신을 만날 뿐 우리 중 당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 ‘꼬람데오’의 삶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꼬람데오’인가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많이 만나야합니다.
(찬송)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러면 아주 놀라운 일은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면 성경을 읽으면 하늘이 열리고 지식의 빛이 금가루처럼 떨어집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나쁜 것은 하나님의 좋은 것을 보여주는 소재가 됩니다. 내가 외로운 것은 나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나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내가 몸이 아프면 나를 치료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가 너무 나쁘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오류에 빠졌다면 내 하나님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서 나쁜 모든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얘기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좋은 일들의 도입을 위한 말하자면 배경음악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갈망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목회하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항상 내편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만 편애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사람과 같이하십니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동행함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말로 ‘히트 할라크’라고 합니다. 에녹이 바로 ‘히트 할라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함. 우리들이 정말 사모해야 할 삶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학을 배우고 공부하는 이 과정에서 지금은 공부하고 언젠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못 돌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다 죽기도 합니다. 벌써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동창도 선배들도 미국에 와서 공부하다가 죽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준비하다 죽은 것일까요? 준비라는 것은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하나님께는 연습이라는 삶은 없습니다. 그때에 매순간 하나님 앞에 행복해지고 매 순간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매순간 그분을 알아가는 기쁨 속에서 사는 것. 이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공부를 위해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영혼의 갈망이야말로 모든 신학함의 핵심적인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행동, 섬김 심지어는 우리의 숨 쉬고 배설하는 모든 것 속에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배어있어야 합니다. 갈망을 지니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영혼의 병든 상태입니다.
(예화) 역사상 미국의 연예인 가운데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사람 중 하나가 엘비스 프레슬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저택을 청소했는데 그 딸을 위한 장난감만 세 트럭이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엘비스 프레슬리가 활동하던 그 시기에는 미국의 역사에서 올덕스 헉슬리 같은 사람들이 LSD 같은 환각제를 복용하면서 천국으로 이르는 지각의 문을 넓히라고 가르치던 시대였습니다. 이 사람도 마약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취재를 하러 왔습니다. 둘이 앉아서 같이 인터뷰를 하는데 달걀껍질 타는 냄새가 납니다. 기자가 어디서 뭐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하니까 그는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 계속 대화를 하는데 기자가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가락사이에서 담배가 타더랍니다. 둘째손가락과 셋째손가락이 담배와 함께 타는 냄새였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니까 감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의 감각을 매일 매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날마다 죽고 다시 깨어나는 영적인 예민함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하던 사람이 내일 설교를 못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이번 주에 하나님을 아는 신학지식이 상당히 많아서 똑똑한 학생이 다음 주에는 어쩜 저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라고 평가를 받는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삼일 전에 열렬히 기도하던 사람이 삼일 후에 아무 기도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잘한 학자들은 남이 배운 것을 베끼고 있다가 이름을 내게 되지만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사상가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한 단독자로서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과 씨름하는 그 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함이 여러분들이 배운 모든 신학들을 여러분들 속에 소화시켜서 피처럼 흐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복음주의자 혹은 몸 전체가 개혁주의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학함이니 여러분들은 이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는 시간까지 하나님을 향한 이런 갈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