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새벽예배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 8:26-31)
녹취자: 추진호
이제 사마리아에 내려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그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마리아가 훨씬 안전한데 핍박이 무서운 예루살렘으로 두 사람이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교회에 대해서 느끼는 책임감이 무거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빌립만 남았는데 요한과 베드로가 왔다가고 난 다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뭐냐면 이제 이 빌립을 통해서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유사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회심하는 이런 축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여기서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한테 물론 성령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한테 달린 것인가? 왜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왔다가고 나서 빌립의 사역이 놀랍게 달라졌을까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가장 우선적인 뜻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이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때, 그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이 일들이 진행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설복시키셔서 이 일들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 이것과 유사한 장면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10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분수령이 되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10장에서 고넬료의 회심이 일어납니다. 이 고넬료의 회심은 바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첫 번째 징표가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하고 많은 사람 중에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하십니다. 맞습니까?
사실 그때 이미 흩어진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을 통해서도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 부어주시는 첫 번째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에게 성령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건을 누군가가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두고 이것들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참된 것이냐, 또 이방인에게 이런 성령 부어주시는 역사가 정말 일어났는데 이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하고 많은 논쟁에 휩싸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그 당시에 그들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편견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입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님은 메시아일리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 점에 있어서는 깨뜨려졌으니까 이제 신학적 편견은 사라졌습니다. 근데 심리적 편견은 남아있습니다. 심리적 편견이 뭐냐면 유대인 제일주의적인 선민사상입니다. 그거 때문에 인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거를 차별 없이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 사도들에게 직접 목격하게 하신 겁니다. 사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심리적인 편견도 이방인에 대한 심리적 편견 못지않았습니다. 저주의 땅이고 이방족속들과 잡혼을 해서 튀기들이 태어난 땅이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듣기만 했다면 거기에 성령 부어주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교회의 기둥 같은 두 지도자 베드로와 요한을 직접 보내셔서 현장을 목격하게 하시고, 그들에 의해서 성령의 역사가 도입되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고 나니까 이제 빌립을 통해서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전파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전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놀라운 말씀을 듣는 사람들 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이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사람 말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회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사실 이 예배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이 예배가 복음이 전파됐기 때문에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을 믿으려고 온 예배는 아니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무엇인가 당시 유대교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하여튼 여러 가지 추측을 하게 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막연하게 경외하는 사람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올라왔다가 돌아가는데 이제 이 여호와의 종교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을 읽는데 이사야를 읽고 있었습니다.
근데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빨리 그 사람에게로 가라. 그래서 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뜻을 아느냐. 모른다. 이런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인제 그 성경을 풀어줄 때에 이 사람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인제 말하자면은 예루살렘 바깥으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에서 앞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복음이 전파될 때에 성령이 역사하실 방식에 대해서 이미 벌써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말씀을 풀어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들을 그들의 지난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죄를 용서해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는 이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거기에 참된 회개와 믿음,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성령의 위로가 거기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고 깨달아지는 곳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이것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그 위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 이것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