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교직원 예배
미련한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 12: 15)
녹취자: 김경애
사람에 따라서 오래도록 어떤 일을 위해서 아주 훌륭하게 준비를 갖춘 다음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도 복을 받은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도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부하직원으로 거느리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모신 사람도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인데 우선 첫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는 무엇인가 그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일을 주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도 훨씬 더 큰일을 해야 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본인들이 스스로를 평가할 때 자기에게 딱 맞는 일을 주었을 때에 ‘나는 이정도 밖에 해낼 수 없는 인간입니다.’ 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사실보다 조금 더 낫게 평가하고 또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그것보다는 약간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 때문입니다. 대리쯤 하면 마땅한 사람에게 대리를 맡기면 그 사람이 이 일이 나를 위해서 주어진 일이라고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대리밖에 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과장 정도할 수 있는 일과 직책을 주면 이것은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해요. 왜 하나님이 교회에 청빙을 받아 갈 때에 늘 응답받았다고 가는 교회가 큰 교회냐?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만 인도하시느냐? 1,000명을 목회하다가 100명이 있는 교회로 가라고 응답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떠나는 목회자는 없느냐고 반문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일들이 잘 안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용하실 때에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려고 하시지 1,000명의 교회를 훌륭하게 잘 목회하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50명밖에 안 모이는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보내시는 그런 경우는 우리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결국은 사람은 일을 하기 전에도 자기 자신을 잘 준비하지만 아무리 잘 준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일을 해나가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일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간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똑같이 그 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빨리 빨리 발전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발전을 못할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이제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그런 것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음이 나타납니다. 뭐냐 하면 자기가 어느 모임에서 사랑을 받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유능해서이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아부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모인 사람들과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가 워낙 올바르게 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그러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한계들을 갖는데 어떤 사람은 어쨌든 똑같이 그 일에 대해서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발전을 못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삶의 태도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학습이론에서 학습이 효과적으로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능한 선생이나 좋은 교재가 아니라 배우려고 하는 이 피학습자의 학습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이 학습의 효과는 가장 크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좌우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배우려고 하는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을 하면서 배우게 되는 지식들이 마치 스펀지의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쫙쫙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업무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태도도 바꾸어서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일들을 하면서 만나는 많은 역경과 어려움들이 모두 학습의 기회가 됩니다. 그러면 쫙쫙 빨려들 듯이 정보들이 빨려 들어가면서 그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고 자기를 고치려고 하고 그리고 또 고쳐졌을 때에 기뻐하고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즐거워하며 자기의 일들을 해나가고 태도가 그러니까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왜 그럴까요? 이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별로 교정할 것이 없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면 학습의 욕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우고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욕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업무능력이나 이런 것들이 조금 뛰어날지는 모릅니다. 그건 것을 믿고 교만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발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저는 학생이었던 적도 있고 선생이었던 적도 있는데 선생님에게 사랑을 받는 학생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선생님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이 자기 과목을 공부 잘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학생들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선생님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격적인 교통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인격적인 교통을 느끼느냐하면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올해는 제가 중국에 가있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서 우리 선생님들을 못 모시고 그냥 스승의 날 선물만 보냈는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0여년이 훨씬 지났어도 그 선생님이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이유는 내가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저는 성격이 수줍고 그래서 누구하고 이렇게 또는 선생님을 불쑥 찾아가서 질문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 중의 한분이셨습니다. 그냥 애들을 한참 때는 개 패듯 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기 별명을 포도대장이라고 나한테 그러시는데 사실은 그 포도대장이라는 선생님의 별명은 똥물이었습니다. 왜 똥물이 되었느냐하면 공부 안하고 숙제를 안 하는 놈들은 나한테 두드려 맞는데 똥물이 나올 때까지 맞아야한다고 그래서 별명이 똥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때는 통금도 있던 때였습니다. 밤 10시는 넘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밤중에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선생님이 코트를 입고 그것도 추운겨울에 퇴근을 하려고 가방을 들고 나오시면 그것을 따라가서 무슨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즈를 종로서적에서 구해다가 늘 읽으면서 영어 공부하는 재미를 붙였거든요. 그것을 줄을 쳐서 가서 뉴욕타임즈를 아니면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워싱턴포스트 같은 일간지를 줄을 쳐서 읽으면서 그 추운데 수송동 골목에서 보안등 아래에서 그것을 펴놓고 그것을 해석해달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보면 얼마나 짜증이 나고 귀찮은 일이겠어요? 그런데 거기서 20분씩 서서 토론을 하면서 번역을 하고 그 뜻을 묻고 그러면서 그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배우려는 학생을 좋아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절대로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직장에 가서 한번 보십시오. 일을 잘하고 유능한 사람이 상사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그러지만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잘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받습니다. 그 배우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부족한 것이 많다. 나는 고쳐야 될 점이 참 많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이 배울 것들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는 저 사람이 나만 못한 것 같지만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나를 능가합니다. 그 점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점에서 자기만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장점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교만한 마음의 발로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나보다 못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나보다 뛰어납니다. 이 사람은 공부는 나보다 못했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면에 있어서 사랑을 많이 받아요. 그런 것들을 또 배워요. 이 사람은 나보다 일도 못하고 공부도 많이 못했지만 단정한 예의와 사람들을 향한 깍듯하고 친절한 태도에 있어서 내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을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나보다 일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는데 그 사람에게 훨씬 더 호의를 느끼고 밥 한번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그런단 말이죠. 그런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에 시기하고 좌절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면서 자신에게 적용하며 계속 고쳐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속에서 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고정관념, 이런 것들을 고수합니다. 그런 것들이 진리와 관계되는 문제일 경우에는 자신의 인생관 전체를 뒤흔드는 선악의 문제일 경우에는 양보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 것을 양보하고 사는 것은 혼을 빼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그래도 제멋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결과는 뭐냐 하면 고립입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해보면 발령 날 때 보면 사람을 알아요. 승진해서 발령이 난다든지 그런 발령은 아니지만 좋은 곳으로 전근을 간다든지 아니면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6층의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다가 4층으로 다른 전보발령을 받아서 간다든지 7층에서 근무를 하다가 9층으로 올라가게 된다든지 이런 등등의 수평이동이라고 할지라도 덕을 쌓은 직원들은 틀려요. 우선 송별회할 때 숫자가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송별회로 모이라고 사내방송까지 해도 10명도 안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송별회를 모여도 누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옛날에 우리는 참석한 사람 명단을 적어도 경리과에 던지면 경리과에서 월급에서 다 떼었습니다. 자기 돈을 내고 와서 밥을 먹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음식점이 꽉 들어차도록 많이 모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덕입니다. 어떤 사람은 7층에서 근무하다가 4층으로 전보발령을 받으면 그까짓 거 잠깐 갈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보따리를 다 같이 싸서 들어줍니다. 섭섭해서 어떻게 하느냐하고 그래봐야 같은 빌딩 안에서 근무하는데 예를 들자면 관리과에서 기술과로 갔는데 그동안 너무 정들었는데 어떻게 하느냐하고 그러면서 그 캐비닛을 정리할 때 다 도와주어서 보따리 보따리를 그렇게 들고 가고 어떤 때는 꽃병 같은 것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발령이 났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혼자서 쓸쓸히 보따리를 써서 짐을 두 개, 세 개 이고 지고 메고 그리고 혼자 쓸쓸히 걸어 나옵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나 좋은 대로 하고 살면 나중에 찾아오는 것은 고립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권력이 강하게 있으면 그러면 그 권력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함부로 그를 소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마음으로부터는 소외된 사람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아첨하는 사람은 있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심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혼자서 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양손에 들고 내려갑니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뒤에서 보면 그때 제 나이는 그래봐야 스물둘, 스물 셋밖에 안되었는데도 이렇게 보면서 ‘야, 참 사람이 인생을 사는 게 참 여러 가지구나!’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덕을 쌓으면서 살아야 되겠구나! 덕을 쌓으면서 살자!’
그래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자기만 못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장점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매력 있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그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면서 자기를 완성해 가도록 그렇게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돌아보면서 나의 상사에 대한 태도, 그리고 나의 동료에 대한 태도,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직원들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을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들에게 정말 매력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사랑과 은혜의 자원들은 바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자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성적으로 사교적이지 못하고 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수줍은 성격, 비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주어지면 그 은혜의 힘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견디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권력도 없고 지위도 낮고 아무 힘이 없는데 동료들 모아놓고 큰 소리를 칩니다. ‘나는 절대로 이게 나의 사는 방식이야! 나는 누가 못 건드리는 사람이야!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이게 가장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힘이 없는데 그리고 그것이 옳은 태도가 아닌데 ‘나는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식으로는 못해!’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의 태도나 생활의 방식에 대해서 고집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마지막에 완전히 따돌림을 당해서 자기 혼자 외롭게 덩그마니 남아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상이 나면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고 어려움을 당하면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가 되어도 누구도 그 편에 서서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본인에게 유익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자신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어제 부산에 내려갔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의 고신대학에서 하는 개혁주의 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제1회 목회자를 위한 포럼을 하는데 저를 처음 강사로 불렀습니다. 가서 한 시간 30분정도 세미나를 했는데 내가 간다고 그래서였는지 목회자들이 많이 모여서 꽉 찼습니다. 그런데 어느 청년이 하나 오더니 ‘목사님 아무개 자매를 아십니까?’ 그래서 압니다. 예쁜 편지봉투 하나를 나를 주고 가기에 뜯어보았더니 내게 와서 일 년 가까이 심리학을 가르쳐주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이제 제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자아비판 하는 것입니다. 부산을 내려갔는데 그 자매가 매주 와서 나에게 공부를 7, 8개월 가르쳐주었는데 교사 강습회를 하는데 사람이 한 이천오백 명씩 모였습니다. 꽉 찼는데 끝났는데 정신없이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어느 자매가 와서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러면서 인사를 해요. 그런데 내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자매님 너무 죄송한데요. 제가 자매가 누군지 identify가 안되는데 어떻게 하나요?’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1년 동안 심리학을 가르쳐드렸는데요.’ ‘아 맞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이제 백배사죄했습니다. 사실은 눈이 나빠서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사실 목소리는 기억이 나지만 얼굴 인상이 기억이 안 났는데 본인이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났는데 그 아버지가 고신대학교 조직신학교 교수님이셨는데 내 책도 열심히 읽으시는 선생님이신데 포럼에 초청을 해서 그래서 내가 얘기가 나왔습니다. ‘아 따님을 참 총명한 자매를 두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자매들 가운데 아주 bright한 자매입니다. 참 따님을 잘 기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칭찬을 많이 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엉겁결에 ‘아 사실은 우리 딸이 다음 달에 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이제 기억을 해놨다가 화한을 하나 보내주었습니다. 그랬으면 ‘감사합니다. 화환이나 하나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이 목사님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정도 했으면 되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에는 편지를 예쁘게 써서 그래서 ‘여러 달 전에 우리가 결혼했는데 그때 목사님이 화환을 보내주신 것이 우리의 기쁜 날에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과 함께 7, 8개월 공부하던 기간이 제게는 참 행복한 순간이었고 지금 이렇게 대학에서 상담사역을 하면서 목사님이 시시때때로 나에게 일러주시던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을 상담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길지도 않습니다. 두 페이지 정도 간략하게 써서 그렇게 해놓고 자기 신랑하고 찍은 사진 두 장을 한복 입은 사진 하나하고 예식사진 하나하고 두 장을 넣어서 예쁜 봉투에 넣어서 붙여서 주었습니다. 그것을 자기가 와야 하는데 근무시간이어서 못 오니까 지금 나와 있는 남편에게 직장에서 외출을 하라고 그래서 그것을 남편을 통해서 들려서 보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참 사랑받는 사람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참 세심하구나!’ 그래서 우악스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정말 세심하고 남을 향한 배려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 선물도 없지만 그러나 그 편지 한 장을 받아오면서 오는 시간 내내 비행기 안에서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참 개념이 있는 자매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시집을 가서도 시부모님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삶의 태도입니다. 자신이 올바른 줄 알아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직원이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 상사의 눈에 났어요. 한두 번 잘못하는 것 때문에 눈에 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너무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상사가 마음이 상해서 야단을 칩니다. 야단을 치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왜 그랬니?’ 끌 먹은 벙어리입니다. ‘앞으로 또 그럴래?’ 말이 없습니다. ‘원인이 뭐니?’ 말이 없습니다. 야단을 칩니다. 즉시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적을 받고 보니까 이제야 제가 일을 처리한 것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만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면 이제 그 사람의 사과나 그런 것들이 언어로 사람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질서에 있어서 자신이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과 실제 이 사람이 내게 받은 충고나 권고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두세 번만 상대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꾸려는 의지가 있을 경우에는 오히려 그것이 서로의 관계를 강화하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서로의 관계를 강화하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건성으로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자신의 태도를 고치지 않고 바꾸지 않으면 그러면 잘하려고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것이 확인이 되면 이런 사과나 이런 ‘잘못했습니다.’ 이런 고백들이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까지 전해집니다. 마음에 없는 말은 그 사람의 머리까지 밖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끊임없이 고치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누가 감히 나는 내 일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부족합니다.
어제도 부산에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그렇게 낙심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너무 많은 세월을 허송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이 하나님의 큰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내가 무슨 책을 쓰며 내가 무슨 진리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정말 일천하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연필을 꺾고 그렇게 살면 더 낫지 않을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겠단 말이냐?’ 이러한 낙심된 마음이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내 마음속에 들었습니다. 사실 그게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길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해주셔서 보게 해주실 때 겨우 볼 수 있었고, 연약한 우리의 무릎에 힘을 주셔서 펴게 하실 때 기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실 때에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사람 앞에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는 늘 다른 사람의 온전한 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서 잘하고 싶고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실패한 것을 보면서 경계를 삼습니다. 이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합니다. ‘나는 너무 어리석습니다.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일을 내게 맡기셨는데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훨씬 잘할 수 있는데 나도 주님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능력이 없고 지혜가 모자라서 잘 못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잘하고 싶습니다.’ 그 열망을 가져야합니다. ‘잘 하고 싶습니다. 필요하면 내 살을 베고 내 뼈를 갈아서라도 잘 하고 싶습니다.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정말 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만 주신다면 내가 무르팍으로 산이라도 기어오르겠습니다. 제가 잘하고 싶습니다.’ 그 기도가 반드시 뒤따라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매 순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의 질과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상황에 따라 흔들리면서 그때그때 넘어가면서 산 사람 발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요즘 교인들이 도덕적 통치를 읽으면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우리는 예수를 믿었지만 지성에 헌신은 별로 안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노력을 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육 중에 우리가 쓰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랍니다. 사용을 안 하니까 거기에 기름이 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성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완고함을 고쳐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자신이 끊임없이 고쳐지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이 부르는 이 노래는 자기 연민의 노래입니다. 다시 한 번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고치고 온전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를 때 그것이 기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를 고치려는 사람, 그래서 그렇게 변화되지 않으려는 자신이 미운 사람, 그래서 지금도 온전해지고자 많이 애를 쓰는데도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인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부르는 이 노래는 영혼을 울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러실 것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네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려고 애를 쓰니? 괜찮다.’
제가 내수동 교회에서 햇수로 7년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6년 정도 사역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날 박 목사님께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잘 하고 싶었는데, 잘 하고 싶었는데, 잘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밖에 사역을 못하다가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주 짤막하게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전도사님! 얼마나 열심히 하셨습니까?’ 그게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해야 합니다. 아주 잘해야 합니다. 잘하는 것이 아닌 것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온전해지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지혜가 없어서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해서 아주 통한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사람과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너무 미숙하지만 그러나 계속 발전하고 그래서 ‘이 모습 이대로’ 찬송을 부를 때 마음이 늘 녹아내리는 사람, ‘아직도 나는 부족해.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시는구나. 더욱 분투하고 잘하고 싶은데 내 건강이 내 지식이 내 능력이 내 지혜가 여기밖에 안 오는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있는 것이 주님의 사업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