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전에 즈음하여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감사로 찬양할 이유①(시57:9-10) 2002.4.7 주일오전 1
2. 감사로 찬양할 이유②(시57:9-10) 2002.4.14 주일오전 13
3. 감사로 찬양할 이유③: 은혜와 섬김(시57:9-10) 2002.4.21 주일오전 22
4. 주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마음(마9:36) 2002.5.5 주일오전 31
5. 기도로 세워지는 교회 1(왕상8:22-23) 2002.6.16 주일오전 41
6. 기도로 세워지는 교회 2(왕상8:23) 2002.6.23 주일오전 48
1.감사로 찬양할 이유①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57:9-10)
이 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곤고하던 때에 하나님 앞에 노래하며 지은 시입니다. 표제에 보면 이 노래가 ‘알다스헷에 맞춘 곡조’라고 되어 있는데 알다스헷은 히브리말로 ‘멸망시키지 마옵소서’하는 뜻이니 아마도 그 당시에 알다스헷이라고 하는 대중적인 찬송이 있었는데 그 곡조만 빌어서 시인이 지은 이 노래에 가사를 붙여서 불렀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듯이 표제에는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존중했고 사랑했지만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고 자객을 풀어서 시시각각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을 부음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이 미움은 육적인 미움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영적인 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잘못한 것이 없이 사울의 집에서 오히려 충성했지만 원수가 되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그가 그렇게 도망 다니던 때에는 추종자도 없었고 자기를 호위하는 힘센 병사들도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이 시편 앞부분에는 다윗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노래하며 하나님밖에는 내가 피할 곳이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시련과 견디기 힘든 핍박 속에서 인내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시인의 모습이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임하자 자신의 마음을 확정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찬송이 시작되게 됩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평강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면서 그는 사울에게 추격 받는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제껏 자기에게 행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마음을 확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주여 내가 백성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사람들 가운데서 주를 찬송합니다” 라고 되어 있고 9절과 10절이 한 문장으로 붙어 있는데 “찬송하리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대저” 라고 하는 뜻은 히브리말로 ‘키’인데 ‘왜냐하면’ 의 접속사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는 하늘에 이르기까지 크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까지 닿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찬송하리이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까지 닿고 주의 진리도 궁창까지 닿았기 때문이옵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진리’라고 하는 말인데 히브리말로 ‘에매트’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앞에 나오는 ‘헷세드’ 즉 ‘인자’라고 되어 있는 단어와 병행법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에매트는 ‘진리’라는 말도 되고 ‘신실함’이라는 말도 되는데 여기에서는 진리라기보다는 신실함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뉴 인터네셔날 버전에서도 이 부분을 페이스플리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기에서 시인이 찬송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인데 하나님의 인자의 성품에 맛 먹는 하나님의 성품이 신실함일 수 있지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은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일 뿐이지 하나님의 성품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신실함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진실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진실함인데 그 진실함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관계에 대입을 시킬 때에는 그 진실함이 신실함으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내적 성품이지만 신실함은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을 진실한 성품으로서 수행해나가시는 행동적인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신실함이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인자, 그리고 자신이 받은 그 하나님의 신실함 그것이 이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신이 떠났고 자신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사울은 여전히 주관자가 되어서 자객을 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며 온 나라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를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시인이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목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시인은 이렇게 고통 당하는 상황에서 지은 시를 살펴보면 곳곳에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며 하소연하는 기록들이 시편 여러 곳에 흩어져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인생 중 가장 곤고하던 때에 아직까지도 굴속에 숨어 있어서 원수들의 칼날을 피해야 하는 가슴 졸이던 그때에 시인은 주의 인자와 그리고 주의 신실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신실은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막 곤고하고 고통받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 굴에서 저 굴로, 이 광야에서 저 들판으로 방황하던 거기에 골몰하던 다윗이 눈을 들어서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러면서 하늘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 곧 헷세드와, 아가페와 그리고 궁창에까지 가득 닿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묵상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추격을 받으면서 다니며 곤고하고 괴롭다가 한순간에 눈을 떠보니까 그냥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하늘에 가득하게 미쳤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신실함이 온 하늘에 온 궁창에 가득 찬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과 궁창은 어떤 차이인가 하면 하늘은 히브리말로 샤마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하늘은 영어로 말하자면 heavens그래서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 하늘나라를 포함한 것입니다. 궁창은 새가 날아다니는 푸른 하늘, skies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주의 인자는 커서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온 우주, 온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세계 하늘나라까지 가득해서 내가 어디로 가든지 그 사랑을 피할 수 없고 그리고 주의 신실함은 푸른 하늘 가득히 차서 이 땅 어디로 가든지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벗어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 확신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밀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평안, 이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시인은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이 들판에서 저 들판으로 도망 다니는 그런 신세 속에서도 주의 인자와 그리고 주의 신실함을 발견하고 그 안에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오래 전부터 저는 교회를 떠나는 때가 다가오면 한 두 주나 세 주정도 주님이 이곳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회고하고 우리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제일지 모르던 때가 불쑥 다가왔고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이제 한번만 더 예배드리거나 혹은 두 번을 예배 드리면 이제 영원히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이곳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고 여기에서 예배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들이 누렸던 많은 은혜와 하나님과의 애틋한 사랑의 기억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이곳에서 만났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추억들은 건물과 함께 모두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서는 영원히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아서 이 교회당은 없어지지만 이곳에서 만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들은 살아서 남은 우리의 생애를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만약에 4월 10일날 떠난다고 한다면 아주 정확하게 날짜 하나 틀리지 않는 3년 6개월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낸 것입니다. 3년 6개월이니까 약 180주 정도를 이곳에서 보낸 셈이 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거기에 배인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밤을 새워도 여러분들에게 다 증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특별히 저의 가슴속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일평생 잊혀지지 않는, 그리고 잊어서 되지 않는 세 가지 깊은 감사의 제목을 기억하고 미래에 그런 은혜에 빚진 자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선 이곳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큰일 가운데 하나는 이 교회당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하실에서 셋방으로 교회가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7-8명이 모여서 시작을 해서 200여명 이상 모였을 때에는 지하실에 있는 25평의 예배당 가지고는 도저히 그 교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궁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교회를 짓자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돌아봐도 우리가 들어갈 만한 땅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300명 정도 들어가는 예배당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약 15억 원 이상의 돈이 필요했는데 우리 중에는 그런 정도의 헌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교인이 가득 모여서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건축위원회를 구성해놓고 교회를 짓든지 어떻게 해야지 될텐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쭉 물어보았을 때 그 무거웠던 분위기를 저는 일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 돌아오면서 저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진리의 말씀으로 기른 사람들인가. 어쩜 저렇게 믿음이 없을까? 하는 실망의 마음이 마음에 스쳐갔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주님이 제 마음에 은혜를 주시고 나니까 정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무거움이 보였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다가 인생에 벼랑 끝에서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서 교회라고 찾았는데 자기도 허덕거리면서 살아가는데 교회 건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눈앞에 두고 근심하는 성도들의 표정 속에서 전 참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음속에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를 위해서 교회를 짓겠습니까? 하나님 제 마음속에 교회를 짓고자 하는 사심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 저 성도들에게 한번 제 속마음을 꿈에서라도 보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회 건물을 높이 올려놓고 거기에 목회 승부수를 거는 그 미련한 방법을 택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상황에 이득이 아무 것도 없는 주택가 건물 뒤에 교회를 설립한 게 어 그제 같은데 제가 왜 그런 일들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본질적인 일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돌아간 날 그날 밤에 교회당에 앉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적인 상황이고 현실적인 상황은 속히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고 그리고 교회당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깊이 마음에 결단을 내리면서 건축헌금을 하지 맙시다. 제가 제안을 했고 그리고 한 달에 한 4만원씩 월세 헌금을 해서 그저 조그만 빌딩이라도 마련이 되면 거기에 들어가서 신앙생활 하다가 거기가 좋으면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그렇게 한껏 성도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마음에 결심을 했지만 어떻게 결심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위에 있는 제일은행 빌딩 자리가 딱 한군데 났는데 거기 월세 2억에 700만원을 하자고 해서 2억은 어떻게 대출을 받아서 할 수 있으니까 700만원을 각자 한 달에 한 4만원씩 돈을 내서 그래서 헌금을 해서 거기 들어가서 살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몇 번을 주인을 찾아가서 마지막 여러 가지문제들을 타결을 짓는데 합의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다가 그러면 우리가 양보하고 사인을 해야지 되겠다 그리고 마음을 갖고 보증금의 안전장치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가 좀 양보를 하고 사인을 해야지 되겠다. 마음을 먹고 그날 밤에 목요일이었는데 엎드려서 교회에서 철야를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새벽기도를 인도하려고 차를 몰고 나왔는데 그냥 교회를 옮기는 생각에 골몰하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해서 집으로 가야지 되는데 잘못해서 한참 가다가 보니까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빠져 나온 곳이 방주교회 골목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여기는 제가 별로 올 일이 없는 동리였습니다. 늘 저쪽 뒤로 다녔으니까.
그런데 쑥 나왔는데 교회당이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는 옛날부터 있었으니까 교회가 거기 있으려니 했는데 교회가 텅 비고 저 지붕 꼭대기 양쪽에 빨간 줄이 있고 가운데 노란 현수막 작은데다 ‘임대 혹은 매매’ 그리고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것을 딱 보는 순간에 그냥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그게 뭐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뛰는 것도 아니고 어째든 호흡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6시 30분이나 7시까지 세 바퀴나 유턴을 하면서 돌면서 교회당을 봤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교회당은 이사가고 빈지가 2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건축업자에게 넘어간 교회당이었습니다. 그때는 IMF가 터졌던 때였기 때문에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IMF가 터지기 직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니까 천 평쯤 되어 보이는데 시세를 따져 보면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낼 것이고 전세를 얼마나 달라고 할까. 한 20억 정도의 전세를 달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20억이 있으면 교회를 짓지, 그리고 돌아오는데 마침 건물에서 누가 손을 내밀고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자석에 끌리듯이 교회를 돌다가 드디어 이제 그때 관계되었던 건축위원회 두 분을 불렀습니다. 어떻습니까? 물으니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아무래도 이 건물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인가 한번 알아보시오. 그랬더니 14억 5,000만원인가 뭐 15억인가를 전세를 달라고 하는데 15억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1500만원도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해서 이제 집사님 한 분에게 그랬습니다. 다시 가서 14-15억은 말도 안 되고 10억에 빌려주면 우리가 얻는다고 해라. 그랬더니 눈이 둥그래서 목사님 10억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어차피 없는 것 구체적으로 코치를 했습니다. 가서 돈이 없는 것처럼 하지 말고 바지 주머니에 10억 짜리 수표를 넣고 온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위풍당당하게 흥정을 해라. 가서 정말 당당하게 흥정을 했더니 10억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5억은 월세로 받아라.
그리고 헌금을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그날 금요일 날 비상소집을 해서 온 제직들이 여기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그 제직들에게 완전히 한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돈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좋아했습니다. 그러더니 교회 건축과는 거리가 멀던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그야말로 에스라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의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때 헌금이 지금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헌금이 5억 6,000만원인가 헌금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청년이 반 이상이고, 성도 모두 합해서 200명이 되던 시절에 그만큼 나왔으니, 특히 청년들의 그 눈물겨운 헌신을 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에게서 거의 1억 가까운 돈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날품을 팔아서 헌금을 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뭐 정말 그 사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직장 다니는 청년들은 일년 치 생활비를 거의 교회에 바쳤습니다. 넘치게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하나님이 손에 넣게 만들어주셔서 이제껏 까지 1,100만원씩 월세를 물며 여기서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짐은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 그 성도들 중에서도 참여한 사람들은 실제로 헌금에 참여한 사람이 180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 사람들이 진 5억 6,000만원, 그리고 거기에 여기에 1,100만원의 월세의 짐은 정말 자신들로서는 거의 자신의 생계를 하나님 앞에 접은 정도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성도들의 희생에 힘입어서 이곳에서 3년6개월 동안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셔서 많이 헌신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또 다른 예배당이 마련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 있어서는 무리를 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런 교회 건물이나 생명을 걸기에는 제 목숨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언제든지 무리가 뒤따를 수밖에 없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180명의 성도들이 이 예배당을 마련해 났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16-700명되는 성도들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3년 6개월 동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에 가난하고 힘들던 교인들이 힘에 넘치게 지나도록 마치 많은 환난과 시련가운데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겼던 마게도니아 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이름도 빛도 없이 그렇게 중심을 다해서 헌금하고 어려운 형편인데도 거액의 헌금을 하기 위해서 품까지 팔아야 했던, 자신의 생활비까지도 반납했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지체들의 눈물겨운 그 헌신을 전 지금도 기억하고 지금도 시간만 나면 그때 그 사람들을 주님이 넘치게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름도 기억할 수 없고 이제 많이 잊혀졌지만 그들이 여기에 남아 있든지 어디로 떠나 있든지 저는 마음속으로 늘 빕니다. 그렇게 눈물로 그들이 헌금했을 때 그들의 손이 드렸던 것은 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 존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헌금 때문에 상당한 기간동안을 물질로 고통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상당한 헌금을 드렸기 때문에 그들은 생활비를 줄여야 했고 심지어는 퇴직금을 타서 하나님 앞에 바친 후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고심하여야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하나 하나의 어려운 형편과 주를 위해서 당한 많은 힘든 과정들은 사람은 기억하지 않고 교회의 기둥에 일일이 아로새길 수 없지만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저는 그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디에 가든지 간에 갚아주시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넘치게 복 받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주님의 교회당을 마련해주시고 그뿐이 아닙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 교회당을 수리하는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거의 인력으로 때우면서 봉사하여야 했습니다.
지금은 디자인에 밝은 지체들도 많이 들어오고 그리고 헌신된 지체들도 많이 들어와서 지금 시작하면 이것보다 훨씬 같은 돈을 가지고도 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고 지금보다는 좀더 투자해서 좀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모든 형편이 여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우리의 노력으로 봉사했습니다. 물질을 드리지 못한 지체들은 와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으로 흙을 나르고 돌을 나르고 먼지를 닦고 걸레질을 하고 못을 박으면서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매일 4-50명의 청년들이 밤을 새우면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예배당을 모두 고치느라고 애썼고 입당하는 98년 10월10일전, 10월9일 그날은 30여명의 청년들이 온 밤을 꼬박 세우며 24시간 노동의 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10월10일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기에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헤세드, 아가페의 은혜와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 신실함을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감사의 마음 때문에 아이들도 울고 어른들도 울고 청년들도 흐느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그후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고향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목양의 관계가 있었고 위로가 있었고 교제가 있었고 궁핍할 때는 도움이 있었고 그리고 섬길 수 있는 일터가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그 모든 것들보다 뛰어난 하나님 자신이 여기에 계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한 주에 300만원씩 들어오는 헌금을 4주를 모아야 겨우 월세가 되는 상황이었어도 하나님은 이곳에 오자마자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해주셔서 180여명밖에 되지 않던 성도들이 한 달만에 3,4,5,600명 끊임없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추측을 넘어서서 역사 하시고 그리고 당신의 교회를 눈동자같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합니다. 그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소중한 물질을 아버지 앞에 바친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무명의 성도들의 그 헌신, 그것은 살을 에이는 것 같은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을 모두 내놓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드릴 물질이 없는 사람들은 물질보다 더 귀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물질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데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건축헌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자가용을 몰 수 있었던 사람들이 대중교통으로 바꾸고 좋은 점심식사를 마다하고 조악한 식사로 끼니를 이으면서 건축헌금을 하나님 앞에 완수하기 위해서 눈물로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눈물겨운 수고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오늘 우리들이 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당을 떠나면서도 늘 구석구석마다 우리의 정성이 배어있고 그리고 어디 한군데도 우리가 사랑이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여유가 있다면 이 교회당을 여기에 기념처럼 남겨두고 또 다른 교회가 이곳에서 영혼들을 돌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기회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여기에 세우신 그것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이 이 교회가 여기에 서게 된 과정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인자, 주님의 그 신실하심 때문에 많은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바치고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희생을 강요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헌신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그리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더 많이 맛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이곳에서 있었던 3년6개월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한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힘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그러나 사실 힘쓰고 애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셔서 이곳에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전해도 오는 자가 없다면 들을 리가 없고 듣는 자가 많지 않다면 그들 중에 구원을 얻을 리도 적었을 텐데 주님께서 끊임없이 많은 영혼들을 보내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이전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계속 교회에 왔고 등록했습니다. 그래서 건축헌금을 하고 교회를 이전한다라고 하는 묵직한 부담들이 교회 앞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해서 한번도 교회의 식구들이 뒤로 숫자적으로 물러간 적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계속 보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지 못하던 생명이 없었던 영혼들을 이곳에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단에 절어 있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는가 하면, 특정한 죄에 빠져서 아무 희망이 없이 흐느적거리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으며 그리고 여러 가지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이념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구원받은 자녀로 생명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교회당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 교회당 안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러 구원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의 역사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교회당 주신 것이 우리에게 조금밖에 감사하지 않을텐데 하나님은 우리들이 물질로 바친 그래서 세운 이 교회당을 십분 활용하여 당신의 모든 계획을 이루어갔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셔서 지금도 많은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새 인생을 찾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핍박하고 핍박받음으로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던 집안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시는 은혜로운 역사들도 이곳에서 무수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숨질 때 되도록 하나님 앞에 거둘 수 없는 찬송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한 영혼, 한 영혼 구원받는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임한 이 구원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주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며 그 명분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 구원받은 자녀로서의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대해서 새삼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가족들의 손에 반강제적으로 이끌려 교회에 온 식구들이 천하보다도 귀한 하나님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던 그날에 우리는 먹지 않아도 배불렀고 우리의 가슴은 뛸 것처럼 기뻤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기서 3년6개월을 지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고하면 회고할수록 주님이 우리에게 이곳에서 베풀어주신 그 생명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좀더 주님 앞에 충성했더라면 더 많이 눈물을 흘리고 우리들이 더 많이 희생하고 그리고 복음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지 못한 영혼들 앞에서 더 많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의무를 다했더라면 아마 우리들 가운데는 더 많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있었을 것이고 주님의 기쁨은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지금보다 덜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하고 이곳을 떠나면서 그렇게 마음 한구석으로 죄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송한 마음이 감사해야 할 이유를 감속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송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밖에 헌신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조금밖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보다 그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조금밖에 헌신하지 않았는데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시고, 조금밖에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수많은 영혼들의 가슴에 십자가의 피로 아로새기셔서 그들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곳에서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이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가슴 깊이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는 그 약속의 땅에서는 이곳에서 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 전하기 위해서 구원의 은혜 전하기 위해서 힘써야 하리라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다고 다짐해야 하고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은 사랑하는 지체들은 숨질 때까지 이곳에서 만났던 주님과의 그 뜨거운 만남의 감격들,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에 아로새겨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곳에서 잊혀지지 않는 감사의 제목은 핍절한 영혼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신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 사람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모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주님이 생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핍절한 삶을 이어가며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메말라 가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불러주시고 이곳에서 원 없이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무지한 눈을 열어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주님이 우리에게 누리며 살도록 주신 그 영광의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인생에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도 있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받으며 눈이 떠져서 신앙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서 이전에 주님 앞에 노예처럼 살고 짐승처럼 살았던 자신의 삶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은혜의 감격도 하나님이 이곳에서 주셨습니다. 다 부서진 가정을 안고 왔지만 이곳에서 부부가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가정으로 거듭나는 것과, 사업에 모두 실패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흐느껴 울다가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업보다 더 귀한 주님을 발견한 지체들, 물질보다 귀한 생명의 은혜를 한 몸에 받고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들로 태어난 사랑하는 지체들도 이곳에서 많이 만들어주셨습니다.
곤고하고 실패하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던 사람, 특정한 죄에 빠져서 영혼에 자유함을 잃어버리던 사랑하던 어린 지체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하늘을 가르고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의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시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뜨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인 것과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피 절인 사랑과 우리를 위해 자기의 살을 버리고 그리고 자기의 뼈를 깎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대속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절이는 사랑도 우리는 이곳에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3년6개월 동안 신앙이 미끄러진 소수의 지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이 아픈 마음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습니다. 혹은 그 사람 자신의 부패한 성품에 고집스러움 때문에, 혹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혹은 은혜는 받았으나 영원히 단절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의 욕심 때문에 미끄러진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우리들이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종이 되신 것처럼 더 많이 우리가 종이 되고 마지막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그 영혼에 가치보다 하찮게 여기며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고 그 영혼을 끌어안고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아파했더라면 그들 중에 여러 명은 아직까지도 여러 지체들과 함께 나와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우리들이 그렇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미끄러진 지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의 장본인은 여러분들의 목자인 저입니다. 선악간의 모든 판단은 주님이 하시려니와 그날에 주님 앞에 누가 옳고 그르고 간에는 상관이 없이 미끄러진 지체들에 대한 기억은 항상 세상에 있는 동안에 뽑을 수 없는 가슴에 못으로 남습니다. 지하실에서 주님의 인도 가운데 이 교회당으로 옮길 때 죽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고 우기며 교회를 떠났던 소수의 지체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릴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선악간에 누가 옳든지 간에 그들이 우리 중에서 미끄러진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없는 교회당이 무슨 의미가 있고 사람의 영혼이 미끄러지고 그러면서도 소유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교회당이 좁아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지만 주님이 명백하게 주시는 그 길을 따라서 인도를 받으며 어린아이처럼 그 손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가슴을 졸이며 걸어오는 와중에서 그 길을 가야되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소수의 지체들을 보면서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이제 평촌 예배당을 옮기면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간혹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선악간에 주님이 판단하시겠지만 어째든 모든 지체들의 미끄러짐을 우리는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흉악한 죄인들도, 흉악한 강도도 예수의 사랑에 녹아져서 십자가에서 낙원에 이르는 첫 열매가 되었는데 우리들이 더 많이 죽고 우리들이 더 많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나의 영혼을 염려하는 것처럼 더 많이 고뇌하고 예수 사랑으로 아버지 앞에 매달렸다면 전부는 아니었어도 그들 중에 일부는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3년6개월 동안의 기억 속에서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에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 수많은 영혼들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풍성한 변화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미끄러진 지체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많은 지체들에게 변화를 주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주셨고 어두움 가운데서 그들을 돌이켰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옛 과거와 결별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서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내 마음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어두움을 뿌리쳤던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름다움 결단들이었습니다. 세상밖에는 사랑할 줄 몰랐던 그 완악한 사람들, 이 세상에 오네시모와 같이 아무 쓸모가 없었던 우리와 같은 사람들, 주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들로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싸개에 그들을 감추어 지키고 보호하셔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님의 도구들로 바꾸어놓으신 것은 모두 그들의 영혼에 참된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이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웠던 존재들이 변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 자신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함께 주님을 닮아 가는 지체들 때문에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관계의 축복들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두 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제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은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없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저의 설교를 들고 계시거니와 추호도 그런 욕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와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혹은 어머니와 같이 자애로운 사랑으로 이제 것 까지 우리같이 몹쓸 인간들을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이제껏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영혼들이 이 빛 가운데 나오는 소망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 우리들이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 어두움 속에서 흐느끼며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는 그 불쌍한 영혼들, 어두움 속에서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길로 행하며 더욱 더 자신의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은혜의 빛으로부터 소외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얼굴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알게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계승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일 뿐입니다. 호젓한 갈릴리의 호수 그리고 인적이 끊긴 여리고와 그리고 팔복산을 오르내리시던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복잡한 시대에 오신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시며 영혼에 병든 자들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소외되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흐느끼며 한숨을 쉬는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전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주님이 오신 그것에 바로 그들에게 그런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기 원함임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기 위해서 그분은 끼니를 잊으실 것이며 잠자는 일을 잊으실 것이며 이 동리 저 동리를 마다하지 않고 고통 하는 영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곳에서 베풀어주신 그 풍성한 삶의 은혜를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가슴에 부채로 생각해야지 됩니다. 이전에 우리보다도 더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우리들을 그 은혜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무릎을 꿇고 쓸모 없는 우리의 종처럼 우리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섬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의 인자와 그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며 우리도 영혼들에게 이 풍성한 삶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받고 우리의 가진 소유를 드리고 주님을 위해서 가난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의 소중하던 것들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것이고 그리고 멸시받고 고난을 당하는 가슴아픈 것은 모두 우리의 것으로 짊어지며 일평생을 충성스럽게 살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건지신 그 보람을 주님의 마음에 안겨드릴 수 있는 착한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감사로 찬양할 이유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57-9-10)
지난 시간에 저는 이곳에서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보여준 증거였다는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수많은 감사의 제목 가운데 세 가지를 먼저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주님이 예배당을 여기에 주신 것과,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받는 영혼들을 날마다 더하신 것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을 영적으로 변화시키셔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3년 6개월 동안의 은혜 가운데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을 여러분과 더불어 나누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제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신앙고백 속에서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성도의 교제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이 교제의 특권은 이 지상에 살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 다음으로 가치 있는 소중한 특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성도들의 삶 속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3년 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도 많고 신앙의 간증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날 우리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교제를 사용해서 우리를 어루만지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지만 우리들이 험한 세상을 신앙으로이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 스스로 개인적인 경건을 지키면서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싸워가기에 충분하지 못할 정도로 침체된 적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부족과 무능함을 인해서 다 알면서도 마땅히 살아야 할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는 상황에 도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고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느낄 수 없어도 주님의 사랑 받는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과 그리고 주님의 자녀 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자녀들을 두시되 홀로 두시지 않고 한 목자 아래 두셨습니다.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과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목자로 아는 신앙의 겸비함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시되 천사나 당신이 직접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연약한 형제들을 세워서 이 일들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두시되 홀로 두시지 않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 생애를 배워가고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 지어졌으나 그러나 아직은 성화 되지 못한 성도들로 인해서 온전히 지어지지 않은, 이미 지어졌으나 또한 아직도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를 짓게 하심으로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단지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교회 다니는 소속감만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한 교회가 우정으로 가득 차는 것과 신령한 교제로 말미암아서 온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한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성도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영적인 변화의 은혜가 없이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은 결코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지난 3년 6개월 동안에 많은 지체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주님 앞에 우리가 섬긴 것은 보잘 것 없지만 지푸라기 같은 섬김을 통해서라도 당신이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싶어하시는 지체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들을 주셔서 영혼의 변화를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지체들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난 다양한 간증들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원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느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도록 만들고, 잊고 살아가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기도록 만들어주는 큰 힘이 됩니다. 회심에 관한 많은 간증들과 은혜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한 인간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교제 속에서 3년 6개월 동안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해서 짐승과 같은 삶을 청산하고 신실한 주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다고 해서 늘 행복하고 기쁜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도 있고 특별히 주님의 큰 은혜를 입고 방향도 없이 인생을 살던 지체들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명한 소명을 깨닫고 그리고 그 소명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는 삶을 살 때에 그들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핍박과 고통도 뒤따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교회 안에는 새롭게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아서 주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간 아름답고 기쁜 소식도 들리지만 연약한 지체들이 분에 넘치도록 고난을 당하고 시련 속에서 아파한다는 가슴아픈 소식도 들려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더더군다나 불 신앙으로 인해서 뒤로 미끄러진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빛 가운데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더더욱 가슴아프게 만듭니다. 그런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성도는 마치 온상에서 심었던 꽃나무가 밖에 심겨지면서 바람과 그리고 비를 맞으면서 그 들판에서 튼튼하게 자라 가는 것처럼 그렇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도는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강하지만 한 인간은 아주 연약한 사람일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특성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양의 문인 당신을 통과하게 하시되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연약한 지체들끼리 함께 살아가도록 공동체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피해 양의 우리의 모인 양들이 그 추운 날 목덜미를 서로 비비며 추위를 피하고 한 목자 아래서 안식을 누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혼자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황야의 외로운 양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서로 기대며 살아야 할 연약한 양떼들로 부르셨습니다.
고난이 겹치고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 이를 악물고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서 핍박과 험한 고난이 찾아올 때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느끼며 곤고해졌을 때 우리는 어디서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어디서 고난과 그런 시련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심지어 지체들도 모르는 죄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의 목자들도 모르는 불의 가운데서 죄로 인해서 핍절해진 영혼을 끌어안고 총에 맞은 짐승처럼 신음해야 하는 그때에 어디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결심을 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아닙니까?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지난 3년 6개월 동안은 이곳에서 지난 저의 삶은 앞으로 36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내적인 고통도 많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증도 참 많았던 곳이 이곳입니다. 여러분들과 꼭 같은 형제중 한 사람으로서 단지 주님이나를 그대들의 목자로 세우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여러분의 한 형제이면서도 여러분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꼭 같은 연약함을 가진 한 형제로서 여러분과 똑같이 울고 웃으며 3년 6개월 동안을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곤고하고 지치고 낙심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도저히 살 힘이 끊어지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난과 우리의 터널을 지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일한 위로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아 계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으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세상이 준 괴로움과 마음의 번민을 씻어버리고 조용히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수들을 깊이 묵상함으로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욕망 가운데 영원한 세계에서 볼 때 의미 없는 것들을 버리고 그리고 쓸모 없는 것들을 모두 내어버립니다.
욕망들을 그 십자가 앞에서 포기하고 자기 자신의 자만심으로 말미암아 가져온 영혼의 상처들을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죽으신 겸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단지 벌레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먹구름이 지나고 나면 찬란한 태양 빛이 비추는 것처럼 순간 하나님의 인자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회의하였지만 그러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은 것 같고 주님이 신실하지 않은 것 같은 모든 생각들이 사실은 우리의 느낌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땅 아래서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가득 차도 그 먹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불변하는 빛나는 태양이 온 하늘을 두루 비추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런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런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서 언제든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셔야 할 특별한 의무가 그 분에게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그 보혈의 피를 힘입어 자기 앞에 나아와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은총을 기대하며 실패한 자기의 자녀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항상 주님의 만나주시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탁월한 그 은혜 아래서 버릴 것들은 버릴 용기를 갖게 되었고 질 수 없었던 십자가는 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에서 받는 가장 중요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런 위로를 누리면서 살아왔습니다.
또 하나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의 때를 지나며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위로는 바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였습니다. 진리로 말미암은 영혼의 진실한 변화가 있는 곳에는 항상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습니다. 그런 교제 속에서 낙심했던 영혼들은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런 교제가 있는 곳에서 불결했던 지체들은 자신의 불결을 미워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성품을 따라서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는 소원을 품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지체들을 다루어오셨는지를 들으면서 캄캄하고 어두운 죄악의 길, 하나님의 도움조차 끊어진 칠흑과 같이 어두운 동굴과 같은 상황 속에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살 소망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치고 고단할 때 사랑하는 지체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간증은 우리에게 양 약이 되었고 고난가운데 있으면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기 위해 분투하는 지체들의 용감한 무용담은 우리로 하여금 버렸던 신앙의 병기들을 새롭게 챙기고 다시 믿음의 전투 장으로 나아갈 담력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은혜의 수단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은혜 받은 성도들 틈에 우리를 섞어놓으셔서 그 신앙의 열기와 은혜의 따뜻함을 보전하게끔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앞에 누렸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교제를 인해서 주님 앞에 감사하는 것은 거기에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지체들의 무릎꿇는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를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같은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과 은혜를 더 뼈저리게 느끼며 아버지 앞에서 살 소망과 은혜를 되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살다가 보면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되면 꼭 낙심한 사람이 면담을 신청합니다. 그래서 나도 낙심이 되는데 면담을 신청한 사람이 낙심한 사람입니다. 잘 만나서 둘이 손잡고 그래, 참 이놈의 세상 거지같다. 그리고 신세타령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가 하면 낙심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낙심하느냐. 주님이 이제껏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주님의 자녀라고 일컫게 하시고, 또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해라. 그게 여기서 나와서 여기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너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다 면담이 끝나고 기도하면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지체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참 그렇게 낙심할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교제를 갖게 하셔서 그래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낙심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도 그런 은혜로 3년 6개월 동안을 살았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고 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련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컸고 고난보다는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는 그 무한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런 사랑이 여러분과 같은 성도들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이게 어떻게 저만의 간증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3년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교회 구석구석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그렇게 주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굳게 세우시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열린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식당을 들여다보면서, 심지어 교회 화단을 들여다보면서 지체들이 앉아서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던 그 수많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었던 교제의 모습들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복하게 3년 6개 동안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다듬어지지 못한 성격, 그리고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변화되지 못한 연약한 지체들로 인해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사는 것이 특권이 아니라 고통처럼 여겨지던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은혜로 극복하고 나니까 모두 주님이 우리를 다듬으시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맨 처음에 지하실에 세우고 한 3년 넘어 까지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열린 교회는 예배 시간에 눈물도 많이 흘리고 은혜도 많이 받는데 사람들이 너무 차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나 열심히 찾는 나머지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 그게 사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째든 그렇게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저의 따뜻하지 못한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따뜻한 사람인데, 사실 안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저의 험한 인상 속에서 그런 따뜻함을 느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껍질이 험하게 생긴 과일 중에서 속이 맛있는 과일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일까? 사실 여러 해 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열심히 찾은 나머지 인간을 우습게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 말이 안 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셨던 분들에게는 좀 죄송한데 뭐 꼭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때는 험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이 등록을 하면 첫 번째 심방을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하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사실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 뭐가 좋습니까? 곱게 자란 게 좋지, 산전수전도 모자라서 화생방전까지 다 겪은 사람들이 뭐가 좋습니까?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옛날에 크게 사업했지만 지금은 망한 사람, 옛날에는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다 그 지위에서 떨어져서 실업자가 된 사람, 청년들이 와도 재수 삼 수, 사수, 오수 한 사람, 등록금 못 내서 학교에서 잘린 사람, 또 가정이 깨트려진 사람, 가슴에 한이 주저리, 주저리 서린 그런 사람들이 와서 그래서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주님, 제게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드시렵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 많습니다. 이현세 씨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울 때 주신 그 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 하는 많은 영혼들을 보내줄 것이다.
그런데 진짜 파란만장한 생활을 산 사람이 모이니까 사람들이 은혜는 받았지만 여러분 자신이 증인이듯이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것이 순식간에 그렇게 바뀌어집니까? 단지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은 60세에 시작하는 에어로빅과 비슷합니다. 이게 가고는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비유를 하자면 그렇게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가 은혜를 받아서 자기가 그렇게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방위가 람보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되어야 하겠다는 그림은 있는데 이게 뜻대로 그렇게 움직여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깨트려져서 잘 변화되어서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옆에서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정말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지체들과 대판거리로 싸우고 옛날에 계할 때 하던 그런 습관입니다. 한번 뒤집어서 싸우고 나서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래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그 파란만장한 속편을 또 씁니다. 그러니까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은 남아서 주님의 은혜 안에 더 많이 살면서 변화되어 가는 그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과 요즘에 자기 자신이 많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면서 정말 엉망으로 살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 이제 단정한 성도가 되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거기까지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주위에는 많은 지체들이 눈물 흘리고 가슴을 졸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서 무릎을 꿇고 섬겨준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뒤로 물러가 미끄러져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의 속편을 쓰는 대신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고 이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전편으로 끝내고 성도의 천로역정을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런 지체들의 이름 없는 섬김과 봉사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돌보는 지체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칼에 맞고 그리고 고통받고 할 때가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안에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했고 그런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나면 연약한 지체들의 어이없는 행동들이 우리를 더욱 더 성화 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아직까지도 이 속에 남아 있는 많은 부패한 성품과 자기의 성질대로 살고자 하는 못된 본성들이 있는데 엷은 은혜에 가리워 있다가 지체들의 그런 어이없는 행동을 대하면서 자극 받아서 그래서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석수의 손에 들려서 쪼여지는 그 수많은 쪼임 끝에 울퉁불퉁한 돌맹이가 아름다운 석상을 만들어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지체들에 의해서 깎이고 다듬어지며 주님 앞에 변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게 교제를 나누면서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참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교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셨고 그 교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주님의 백성들은 이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큰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핍박과 고난이 올 때에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는 피로 맺어진 육신의 형제들의 연합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그 연합을 통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은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지를 가슴에 새록새록 새기게끔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3년 6개월 동안 이곳에서 그런 교제를 나누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교제를 누리면서 살았던 지체들 가운데 우리의 부족함이나 사랑 없음으로 인해서 미끄러져 나갔던 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비록 교회는 떠났고 제가 목양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멀어져 갔지만 어디에서 살든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보다 훨씬 좋은 지체들을 만나고 저보다도 훨씬 유능한 목자를 만나서 주님의 더 아름다운 성도들로 다듬어져가기를 우리는 늘 기도해야지 됩니다. 이곳에서 나누었던 많은 교제들, 주님이 주님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셨던 큰 교제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참 이상합니다. 교회가 꽉 차면 시간이 지나면 터질 것 같이 모여드는 때가 있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 꽉 차고 나면 이상하게 교인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상황이 딱 그렇습니다. 창문에도 매달리고 강대에도 올라가고 난간에 턱걸이를 해서 예배를 드릴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습니다. 공간은 그런 교제의 은혜를 담는 훌륭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가슴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지체들의 손을 잡고 열린 공간에 들어와서 어디 앉을 자리를 막 찾다가 결국은 밖에 나가서 화단에 앉는 지체들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정말 이 고통스럽고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가 주는 힘과 유익은 얼마나 큰가. 우리에게 이 공간이 있었고, 이 공간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었고, 이 공간 안에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며 주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지금은 이름을 기억할 수 없고 그리고 기억되기를 원하지도 않는 많은 지체들의 눈물어린 헌신과 수고가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때에 미래에 주님의 은혜를 받고 이곳에서 사랑의 교제 가운데서 주님의 형상을 받아 자랄 그런 많은 지체들을 기억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했던 지체들의 그 헌신을 통해서 이곳에서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고 교제를 누리며 그 사랑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무거운 짐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게 마련이고 무거운 짐은 항상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들은 소수이고 다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위대한 역사 뒤에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소수의 사람들을 들어서 수로 해결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이 해오셨습니다.
이곳에서 섬긴 사랑하는 많은 지체들의 물질적인 헌신이 힘겹게 이 교회당을 마련했고 그리고 이 교회당 속에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끊임없는 헌신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교제하고 진리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그래서 이 세상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봉사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하는 그런 변화들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어제 마감이 거의 끝난 평촌 예배당 본당을 보면서 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공간, 사방 어디를 보아도 설교자가 보이지 않는 그 최악의 공간에서 저는 고뇌했습니다. 어떻게 이 공간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람들이 변화를 받을 수가 있을까? 우리 모두 함께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그 아름다운 공간을 보면서 장소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한계를 인간의 지혜로는 최대한 머리를 짜서 극복을 하려고 애를 쓰는 과정에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도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설교할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에게 예전에 우리와 같았던 많은 사람들, 인생의 목적도 없고 곤고하고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그 막대 먹은 인간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여기가 그들을 목욕시키는 목욕탕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의 주린 영혼을 먹이는 식당이 되게 해주시고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는 옹달샘이 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많은 지체들이 그런 지체의 섬김을 받으면서 주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섬기는 그런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예쁜 예배당을 여러분들이 보게 될 터인데 보면서 아! 이것 우리를 호사시켜주려고 목사님이 고생을 많이 했구나. 나는 여러분들을 호사시켜주려고 고생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평촌 예배당에는 식당이 없습니다. 식당이 하나 있는데 새 가족 식당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벌써 근심하시는데, 우리는 밥을 어디서 먹습니까? 그래서 좀 생각중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 것인가. 그래서 할 수 없이 마당에서 밥을 먹이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혜를 짜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배당을 보면서 ‘아! 잘 지었다.’ 그것 말고 ‘이 그릇이 평촌을 뜨는 국자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깨끗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왔을 때 머물고 싶고 가고 싶지 않고 그리고 그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생활하는 성도들,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맛보는 성도들이 부러워지는 그런 교회가 되고자 주어진 비용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주님이 이곳에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셔서 사랑하는 지체들의 섬김 속에서 이름 모를 성도들의 섬김 속에서 우리를 이곳에서 주님 만나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셨으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이 교회당에서 철없고 유년시절과 같은 신앙은 모두 묻어버리고 그리고 새 예배당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섬기고 예전에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의 빚을 주님께 진 것처럼 이번에는 그 사랑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지체들에게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섬기고 또 섬기고 그들을 교제 속에서 봉사함으로서 주님의 진실한 사랑으로 세워서 언젠가는 그들도 여러분처럼 주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세워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감사로 찬양할 이유③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57:9-10)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몇 주 동안에 생각해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만 오늘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되새겨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은혜가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섬김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던 때가 있었고 섬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 중심의 삶을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면서도 주님이 그 섬김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잘못된 섬김의 때, 빛나간 열심히 주님을 섬겨서 자신의 영혼의 유익이 별로 없던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이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일이라면 열심히 하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해놓고는 대부분 우리의 신앙의 체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열심히 섬기던 때에는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은혜가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와 섬김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가난하기 이를 때 없던 마게도니아 교회가 거액의 연보를 내놓아서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돕게 된 일을 회상하면서 그 섬김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마게도니아 교회에게 주신 그 은혜를 나는 너희에게 알리고 싶다”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가 있으니까 그 은혜 때문에 시험을 많이 만났는데도 섬겼고, 그 큰 가난 가운데 있는데도 봉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섬김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교회가 주의 은혜에 차고 넘치지 않으면 교회는 항상 일군의 부족을 느끼고 섬겨야 할 사람이 모자란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셔서 주님이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자기 지체들을 택하신 것으로서 완성되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이미 이루어진 교회인 동시에 또 이루어져 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 교회가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니까 성도들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져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셔서 교회를 세우셨으니까 이미 이루어진 교회인 동시에 또 앞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교회입니다.
보십시오. 한 명이 모이든 일만 명이 모이든지 간에, 몇 명이 모이든지 간에 성도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모여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설립하면 교회는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가 그 교회를 흔들 수 없고 아무리 연약한 신자들이 그 교회에 모여도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어져 만들어진 그 교회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한편으로 보면 지어졌지만 이제 그 교회가 얼마나 많이 지어져 가야할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7-8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개척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일이 산더미처럼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그 봉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도들의 애정 어린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고 쓰러진 지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 피눈물나는 사랑과 섬김, 그리고 그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사람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주님의 사람답게 빚어져 갑니다. 한 아이를 낳아서 길러본 부모들은 그 아이가 어떻게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잘 압니다. 낳아놓는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퍼 먹인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을 저미는 많은 통증이 있고, 그 아이를 위한 눈물의 섬김과 희생이 있고, 그리고 그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기를 원해서 베푸는 많은 교육이 있고 난 후에 주님의 은혜로서 그가 정말 사람다운 사람, 부모의 명예를 높여줄 만한 자식이 되어 가는 것처럼 영적으로 갓 태어난 주님의 자녀들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도 잘 양육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가정도 없이 방황하면서 혼자서 자란 사람과 같이 그렇게 영적으로 미숙하고 신앙적으로 무례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섬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이면 그 모이는 성도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결국 그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직원들을 채용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잘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그들에게 공급해주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모든 교인들이 그렇게 한결같이 헌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곤충학자의 실험 이야기-유리 상자 안에 개미들을 모아놓고 살펴보니까 개 미들 중 일부는 열심히 일하는데 소수는 놀고 있기에 놀고 있는 개미들을 꺼내면 열심히 일할 개미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소수의 개미가 놀더라는 이야기)
어째든 그런 원리입니다. 절대로 모든 교회에 교인이 한결같이 봉사하는 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장해가면서 성도들의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한 4년 동안에 건축헌금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을 가만히 보니까 4년 동안에 한 건축헌금이 4년 동안에 번 돈보다도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교회에 다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해왔습니다.
지금 이사간다고 하니까 조금 주춤합니다만 한참 열심히 등록할 때 한 달에 35명까지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도 많이 등록을 했습니다만, 그러니 그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는 교회에 잘 신앙생활 하면서 정착할 수가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그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고 새 가족반에 와서도 새가족반 공부를 이해할 수가 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어떻고, 빛을 잃은 신앙생활이 어떻고 그런데 빛을 받아본 적도 없고 충만해져 본적도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 남의 나라 사람들 같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 90%이상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교역자를 비롯해서 새가족 위원회, 기타 여러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말 눈물로 열심히 섬겼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기의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바쳐서 그렇게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선 주님이 각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죽음과 사망의 줄로 사람을 묵는 것은 그를 노예 되게 만들지만 주님의 사랑의 줄로 그 사람의 마음을 묶어도 노예가 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항상 주님 앞에서 자신에 관해서 표현할 때 그리스도의 종, 혹은 예수의 노예라고 표현했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그대를 종을 삼으셨습니까? 언제 주님이 그들을 너희는 내 종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려고 하셨고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보다 낮아지셔서 발을 씻기시면서 그들을 위해 노예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결코 노예라고 임명하신 적도 없고 종이라고 불러주신 적도 없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역사 하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그들을 사로잡자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노예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종처럼 대접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갔고 주님이 있으라고 하는 곳에 있었고 주님이 참으라고 하시는 고난을 견디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주님이 계획하셨던 그 사명을 이루어드리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합니까? 누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누가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재능과 물질을 드려서 섬깁니까? 모두 하나님에게 은혜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한 주 한 주 지나갈수록 주님의 교회를 찾는 영혼들을 돌보기 위한 섬김의 필요성은 가중되었고 그리고 주님의 그런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격무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모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이 교회를 훌륭하게 섬겨서 희생, 봉사, 충성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사람을 높일 마음보다는 그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을 높일 마음이 더 생겨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섬김에 있어서 드러난 모든 영광은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그런 섬김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주님이 그 은혜와 영광의 그늘 아래 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한 일을 다 감당하고도 오히려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본분을 아는 종의 겸비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여기에 머무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사람 때문에 섬긴 것이 아니고, 교회 때문에 섬긴 것이 아니고, 더욱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살도 피도 섞이지 않은 지체들을 섬기고 교회가 아파할 때 함께 울었고 교회가 기뻐할 때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주님과 함께 달콤한 섬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물론 고난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그 고난을 이길 힘도 주고 시련을 견딜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들 하나 하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리게 하셨고 그래서 힘에 넘치도록 주님 앞에 드려서 마지막에는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을 이렇게 조금밖에 섬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흐느껴 울도록 만드신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꼭꼭 숨겨두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했을 그 아름다운 재능들을 단지 재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님의 교회에서 정말 열심히 일해서 밤늦도록 봉사하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서 자신이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바쳐야 했습니다. 구석구석 교회당을 매만져 보는 일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돈 한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재능과 시간을 주님 앞에 바치면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시간과 힘을 따라서 다양한 일들을 위해서 봉사하며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교회의 그늘진 구석에 서서 그 어두운 부분들을 붙들며 기도하며 자신들이 타올라서 불을 밝히는 성도들의 이름 없는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며 사랑하는 지체들을 어머니처럼 품고 돌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를 이제껏 우리들이 받으면서 살아왔으니 또한 앞으로도 그 은혜를 유지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3년 6개월을 지난 동안에 정확하게 사랑하는 지체들의 숫자는 거의 8배 가까이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지체들은 모두 한결같이 성숙한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면서부터 우리의 낮아지는 섬김을 필요로 했고 그 중에 여러 지체들은 섬기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주셔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인간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소망의 마지막 푯대 때문에 주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이 교회를 섬기고 여기에 있는 지체들을 봉사하기 위해서 세우신 것임을 깊이 깨닫고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면서 날마다 자기와 싸우며 섬겼습니다.
그렇게 섬길라치면 곤고하고 힘든 때가 찾아오는데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많은 지체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닫혔던 마음을 다시 열게 하시고 곧은 무릎을 다시 꿇어 주님 앞에 기도하며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고 자기의 부르심을 감당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경험한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격적으로 만나주셨고, 어떻게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보게 해주셨고, 어떻게 우리와 같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본분과 표준을 보게 해주셨는지, 어떻게 질 수밖에 없는 인생 길에서 죄와의 싸움을 이기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 예수 따라가는 제자들이 될 수 있는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교회에 와서 갑부가 되지도 않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도 주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에 그 은혜에 붙잡혀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섬겼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섬기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고 하나님의 은혜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힘든 일은 힘들고 은혜 받은 사람도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에는 마음이 아픕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도 낮아질 때는 힘들고 높아질 때는 기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지만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 속에 온전히 역사해서 진짜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이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사람에 불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붙으면서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그런 소원에 불타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불탑니까? 항상 뜨겁습니까? 항상 순결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항상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우리가 있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때의 삶과 똑같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 더러운 자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끊임없이 역사하고 끊임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서 자기의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 역사 할 때에는 사명의 길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고 우리가 봉사를 해도 주님이 주신 은혜는 작게 느껴지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너무나 커서 섬길수록 우리 자신이 너무 많이 희생한다라고 하는 어리석은 자만감을 불어 넣어주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육에 속한 생각이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크신 사랑, 나같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해주셔서 마음만 먹으면 빛 가운데로 살 결심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하는 그 처절한 감사와 그 처절한 은혜로 자기 자신을 추스르면서 다시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따라서 섬기면서 사는 자기 싸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주님을 제대로 섬겨본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조금 힘들고 항상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와 스스로 싸워서 이기는 이 일은 많이 힘들고 마지막에 죽기까지 자기를 복종시키는 그 일은 정말 죽음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깨닫습니다.
그뿐입니까? 또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환경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어디 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남겨드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안일하게 살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지만 나머지 두 종은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열심히 장사할 때 항상 남았습니다. 밑지는 날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본전을 남길 것 같아서 근심하고 가슴을 졸이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우리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려고 할 때 이 세상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없고 세상 사랑에 빠지면 그는 필연적으로 주님의 사명을 상실합니다. 그런 환경에 에워싸여서 살면서 주님이 살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크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섬기기 위해 가정을 버릴 수 있었습니까? 직장을 떠날 수 있었습니까?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우리들이 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생활의 그 짐 위에 주님을 위해 져야 할 사명의 십자가가 하나 더 지어진 것입니다. 다만 주님께 은혜를 받을 때 하나 덜어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죄의 짐이 아닐까요? 그 죄의 짐을 내려놓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각자 은혜 받을 때에 우리에게 지어주신 그 십자가를 지고 각 사람에게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애를 쓰면서 살려고 할 때 그 일이 쉬웠습니까? 끊임없는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 사명에 응답해서 이것이 내 인생에 푯대이고 이제 이 일을 위해 주님이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이제 내가 이것들을 위해 살아야되겠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명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악마의 표적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그저 무슨 밥인지 죽인지 모르고 그저 말갈 때, 소 갈 때 가고 그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마귀도 신경을 안 씁니다. 오죽했으면 마귀도 신경을 안 쓰겠습니까? 왜 그런가 하면 어차피 자기 수중에서 잘 노는 애들인데 뭐 하러 신경 쓰겠습니까 내버려두면 되지. 자꾸 자극하면 또 엉뚱한 대로 살지 모르니까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따라 미력이나마 섬기며 살아야지 되겠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할 때 즉각적으로 수많은 악마들이 그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겨눕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마음을 흔들고
그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와 동행하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고난도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사람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종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좋은 줄 알았더니 대게 인생을 힘들게 하네, 맞습니다. 힘들게 합니다. 그러며 굳이 은혜 받고 힘들게 삽니까? 그냥 서금 서금하게 살지. 그래요, 그런 은혜 없이 살면 그러면 그 인생은 편안한 인생이 되는가 하면 아닙니다. 힘듭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 사명 때문에 힘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죄 때문에 힘든데 사명 때문에 힘들고 고난을 당하며 길을 걸어갔던 사람은 하늘에 빛나는 상급이 있고, 죄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마지막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과 더불어서 치열하게 싸워온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주님이 주신 은혜들을 회고하면서 마음한구석이 아파 오는 그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고 그리고 섬기며 살 수 있는 은혜도 주님이 주셨지만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섬기던 자리에서 미끄러졌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우리의 마음에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을 복 주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잘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우리는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싸움을 싸워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도가 정말 주님의 형상을 이루고 성화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은 사람이 되어 가는 이것은 진공상태에서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울퉁불퉁한 돌이 수 없는 정과 그리고 망치에 맞으면서 아름다운 석상으로 변해가듯이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 은혜를 주신 주님이 요구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그 삶 속에는 반드시 또 은혜를 받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어떤 섬김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가슴에 새기면서 미력이나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희생적인 섬김이 없이는 그가 받은 그 은혜가 그 속에서 유지될 수 없고 그가 받은 하나님의 그 은혜가 정말 마지막에 결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오는 동안에 많은 은혜 받은 지체들도 주님을 위해서 수많은 싸움을 싸우면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길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게 은혜를 주신 그 주님이나를 여기에 세워주셨고 그리고 나의 이 존재의 가치는 내가 바로 여기서 이 영혼들을 섬기고 이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희생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쌓았고 그 섬김 하나 하나가 재료가 되어서 그 교회당을 아름답게 건축해가고 지금도 또한 지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친밀한 사랑을 당신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에 은혜 받은 한 성도가 사명을 따라서 희생하며 주님을 섬기며 사는 그 일은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유리방황 하던 지체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마치 여기 저기 변을 보고 다니는 어린아이같이 미숙할 때 먼저 주님의 은혜를 받았던 지체들이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해서 그가 좋은 성도로 자라서 이제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끄러워하고 오히려 자기를 섬겼던 많은 지체들이 그 섬김으로 자기를 위해주었던 것처럼 스스로 종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낮아져서 사람들을 섬기는 지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은혜였고 고난 중에 넘치도록 커다란 위로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힘겨운 자신의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면서도 여력은 없었지만 단지 주님이 자기에게 이 교회에서 주신 은혜가 감사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지 섬기고 싶어서 애를 썼던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스스로 드러나기를 거절하며 섬기던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이만큼 주님의 은혜로 세워질 수 있었고 방배동의 이 교회당이 마치 산새들이 깃들이고 들새들이 쉬어 가는 하나의 피난처처럼 되어서 많은 지체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새 생명으로 살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데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죽어버릴 정말 쓸모 없는 인간들인데도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우리를 권고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이 복된 일을 위해서 섬기도록 만들어주셨는지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마음속으로 매일 기도합니다. 특별히 이제 일주일 후면 떠나갈 이 교회당을 돌아보면서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성도의 그 수많은 섬김을 보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에 십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그러나 기억나는 대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 시계 어떤 청년이 날품 팔아서 사서 걸어놓은 것인데, 그리고 저 물건은 누가 사다 놨는데, 사람은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스스로 가난해지기까지 힘에 지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긴 사랑하는 지체들, 자기의 물질을 드려 쪼들리게 살기까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섬기고 부유한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섬김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던 사랑했던 지체들,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에게 맡겨주는 영혼을 하나 둘 붙들고 넘치도록 바칠 건축헌금은 없어도 그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서 교회당 한구석에서 끌어안고 씨름하며 기도하면서 가슴앓이 하던 그런 하나 하나의 섬김을 주님이 잊지 마시도록 그리고 그들을 반드시 복 주시되 제가 볼 수 있게 그렇게 복을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매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섬김은 여기서 멎지를 않습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우리들이 이사하는 그 지역은 정말 곤고한 영혼들이 너무 많은 지역입니다. 교회당이 아직 지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왔다가 갔습니다. 제가 작업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가루에 잔뜩 묻어서 작업모까지 쓰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까 제가 목사라고 하는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아마 감독쯤 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어느 사람이 와서 여기가 교회가 온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가 그 예배의 감격이 있는 열린 교회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여기가 김 목사님 계신 교회가 맞지요? 예, 맞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그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런데 그렇게 애정 어린 눈빛으로 교회를 둘러보고 갑니다. 그 사람들은 미래에 다 등록자들입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주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그래서 그렇게 많이 왔다가 갑니다. 내가 본 것만 여럿입니다. 그게 결국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곤고한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히 너무 곤고하고 아파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교회당에서 다음주에 여러분들이 저 교회당으로 가면 이 교회에서 만난 하나님은 생각날지 모르지만 이 교회당은 생각도 안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좋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머리에 쥐가 나도록 지혜를 짜내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썩어진 공장을 예배당으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어 그제 제가 부산에 집회를 갔는데 교회가 너무 보고싶어서 새벽 다섯 시에 차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하나도 덧붙이지 않고 이제껏 내가 적을 두고 다녔던 교회, 설교하러 갔던 모든 교회들 중에 가장 큰 교회는 아니지만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교회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교회에 오면 집이 생각이 안 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당에서 결국은 그것을 모두 지으면서 우리들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누리며 살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 목사님이 우리가 예배를 편하게 드리라고 돈 좀 쓰셨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 우리들이 편하게 커피도 마시면서 안락한 교회생활을 하라고 참 수고 많이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렇게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하면 전적으로 예전에 우리처럼 유리방황 하던 사람들, 그들이 좋은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할 때 우리는 처마 밑에서 서서 밥그릇을 들고 밥을 퍼먹어도 우리는 배부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아니! 뭐 건축헌금은 누가 했는데 우리보고 처마 밑에서 밥을 먹으라고 하느냐고, 좀 썰렁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겠습니까? 당장 새가족위원이 50%정도 늘어나야 될 것이고 그리고 넓은 공간을 청소, 경비, 도서관, 퀴즈 렌드의 시설 관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일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주님 앞에 진 많은 사랑의 빚, 갚지 못한 그 섬김의 그 빚을 새로이 이사가는 그 예배당에서 정말 많이 갚고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사랑하는 지체들 때문에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고 교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방황하며 유리 하는 많은 지체들이 우리들의 낮아진 종 된 섬김을 통해서 그곳에서 그렇게 새 생명을 얻고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기를, 여러분 모두 빌어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주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마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하신 일 세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삼중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일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천국에 관한 비밀을 가르치신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세상에 있는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섬기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리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치료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택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하신 그 일을 위탁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10장은 마태복음 전체를 갈라놓는, 복음서 전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셨기에 자기의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사람을 택하여 자기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리고 세상에 보내셔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을까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시대에 살아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셨는데 그 사람들의 영적인 형편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 아프셨고 그래서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셨고 또 그에 앞서서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아버지 앞에 간청하도록 주님의 복음 사역을 거들 일군들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바라보신 사람들은 그 당시 예수님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불쌍하다고 말씀하신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리고 못 먹고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영혼들에 대해서 느끼시는 그 연민은 불우 이웃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우 이웃을 우리들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가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분으로서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직시하셨고 그리고 그 영혼들의 비참한 형편을 통찰하셨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이 심히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한다고 말씀하신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있던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예수님에게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목자 잃은 양이었습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서 비참한 딸을 데리고 주님 앞에 긍휼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혹은 가난하게 오누이가 함께 살던 나사로의 집안에 그 형제 자매들이나, 높은 지체를 가진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나 예수님에게는 모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돈이 있고 그리고 물질이 넉넉해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세워지는 교회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신용협동 조합을 설립하는 것처럼 교회가 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서기전에 먼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움직이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 사람에게 그 시대를 향해서, 흩어진 영혼들에 대해서 주님이 가지시는 그 마음을 갖게끔 만드십니다.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그 영혼을 향한 마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볼 수 없어서 마음 아파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한 목회자에게 주심으로 주님이 그 교회를 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통로로 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 교회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 받은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열린 교회가 서던 그 해에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예정에도 없이 개척 교회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저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늘 알고 있고 듣고 있던 말씀이었지만 교회를 세우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제 마음에 불을 주셨습니다. 예전에도 영혼들을 보면서 많이 울고 그 영혼들의 곤고함을 보면서 아파하면서 살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던 시절에 특별히 흩어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민망한 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교회를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주장 하에 교회를 세웠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교회에 왔고 저는 주님의 마음을 힘닿는 대로 전하고자 애썼고 여러분들은 그 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온 마음이 이렇게 이 세상에 한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동안에 일평생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교회 재산이 예수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교회 재산은 교회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재산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관 로비에다가 예수님 초상화를 붙여놓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크고 높은 교회당을 짓는다고 해서 예수님 교회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당이 되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교인들이 그 교회당에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면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 아직까지도 복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 세상에 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진 교회가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 교회이고 그런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계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불행을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사람들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혹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육신이 건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불행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런 외적인 환경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불우 이웃을 바라보는 것처럼 먹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들만을 보시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리 돈이 많고 빌딩을 몇 채씩 가지고 있고 좋은 자가용을 굴리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안식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쉼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이 세상에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참 사랑과 위로가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한 나라의 황제도, 돈이 많은 귀족도 권력을 손에 넣고 예수님 자신의 생명도 좌우할 수 있는 헤롯이나 이런 사람들도 모두 목자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증인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 태어나면서 신자였던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거의 불신자였습니다. 불신자인 시절에 어땠습니까? 은혜가 떨어지면 세상 적인 욕망이 여러분 속에 솟구치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유혹들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정말 옛날이 좋았습니까? 주님 없이 살던 그 옛날이 좋았습니까?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면 누구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버림받은 자처럼 내동댕이쳐지고 그리고 목자 잃은 양같이 돌볼 사람이 없어서 악한 세력들에 공격을 받으면서 영혼의 번민을 이기지 못하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주님이 손내밀어서 붙잡아주시지 않으시면 벼랑으로 떨어져버릴 사람들, 그렇게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개선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 주님이 만나 주시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그 마지막 경계 선상에 선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신자들이라면 여러분들은 그런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믿는 것은 부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고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건 우리의 인생의 명제입니다. 주님을 모르던 시절에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기 전에 잘 나가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예수 믿기 전에 정말 승승장구하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모두 유리하고 고생하던 목자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를 누리며 황제처럼 살아도 해가 지는 어두운 밤이면 고통 하면서 아버지 앞에 그 사랑과 은혜도 모른 채 방황하며 살던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이렇게 주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그러면서 더더욱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우리들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정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 가운데서 불순종 가운데서 유리하고 방황하며 목자 잃은 양같이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우리들을 주님의 날개의 그늘 아래 살고 하나님의 사랑 아래 사는 복된 양 무리들로 삼아주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는 십자가 앞에서 드리는 우리의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인생의 불행이 궁극적으로 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우리의 인생이 마구 뒤꼬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두드리며 우리의 인생의 문을 열고자 해도 마치 밀봉된 공간 안에 갇힌 포로처럼 우리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을 그때에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신 방법은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 형편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여셔서 어느 날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는 세상사랑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진리를 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서 우리에게 예전에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에는 우리가 어리석게만 여겼던 신령한 비밀들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방황하고 고통 하는 것,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실은 주님의 어린양으로 지음 받았으면서도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진노 아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는 존재들이고 주님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심으로서 그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그 궁극적인 불행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눈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많은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행과 견디기 힘든 우리의 모든 고통들, 고생하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우리의 구겨진 인생살이가 사실은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서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짊어졌지만 스스로 이 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엄청난 무게에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밖에 없던 외아들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에게 더 이상 주실 수 없는 최고의 것을 주신 것입니다. 흠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이 아프신 데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죄는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스스로 왕 같은 하나님의 신분을 접으시고 감추신 후에 당신이 구속해야 할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또 낮아지셔서 죄인이 맛본 그 고통을 다 맛보셨고 죄는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당하는 그 슬픔과 아픔을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한 몸에 모두 당하셨고 진리를 외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 받으셔야 할 그 분이 미움을 받으셨고 그렇게 종 되게까지 낮아지신 섬김의 그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 하려고 애를 쓰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의 불행을 해결해보려고 몸부림쳐도 궁극적으로 조금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불행의 모든 뿌리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와 불순종의 대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택함을 받아서 신기하게도 예전에도 말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 예수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믿어지는 그 축복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진 그런 주님의 어린양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그렇게 방황하고 고생하던 옛 삶과 결별하고 주님의 은혜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가능했습니다. 그 분이 거기서 당하신 그 치열한 고난과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치욕스러운 고통은 모두 주님의 법을 어기고 주님께 불순종한 우리들이 받아야 마땅한 형벌이었고 우리들이 받아 마땅한 대가였건만 우리들이 차마 죄 가운데 형벌을 받고 죽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주님이 대신 그 잔을 마시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옛 삶을 결별하는 지점에는 반드시 십자가 앞에서 흘린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비참하게 재물로 죽어 가신 찢기신 어린양 예수에 대한 가슴아픔과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 관대 주님이 그렇게 사랑해 주실까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사랑에 대한 감격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서 회개하며 주님의 그 크신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고 고백을 했고 그리고 나는 주님이 구원하셔서 주의 자녀로 불러주셨지만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나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그 눈물어린 사랑과 그리고 공로 없는 죄인을 아들의 피를 보시고 용납해주시는 한없는 사랑 그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평생에 나도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의 소원이라면 하늘에서 별을 따다 달라고 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드리리라는 마음으로 들어선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님이 우리만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0장에서 내게는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않는 내 양이 있어서 그들도 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게로 인도하여 나와 함께 있게 하여야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그렇게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자신을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우리의 놀이터였고 육체의 연락을 즐기는 무대였고 돈벌어먹고 사는 밥벌이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한 작은 목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어두운 죄악 길에서 방황할 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직접 오셔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의 그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 뒤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여러분들 뒤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새벽마다 밤마다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쓸어안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던 무명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분들을 이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면 예전에 여러분처럼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보일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십자가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그 사람들이 사실은 빚쟁이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이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석 달 동안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앞으로 몇 달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두 달 후에 여러분들은 이제 완전히 예쁘게 단장된 교회를 보게 될 것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는 제 생전에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교회당을 이렇게 예쁘게 지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럴 것입니다. 아니 헌금은 내가 했는데 왜 나를 위해서 안 지었다고 하는가. 여러분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 주님이 우리를 보내셨을 때 주님의 마음을 갖고 여기 오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예수님은 정말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골목 저 골목 다니시고 주님이 가르치셨을 그 사람들, 가슴에 품어 안고 눈물로 기도하셨을 그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었다가 교회를 찾았을 때 만약에 예전에 그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그 교회당을 마련하기 위해서 헌신한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한 예배당이라고 주장했더라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돈만 내고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당은 모두 이제 주님을 믿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당으로 쓰여지기를 바랬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맛본 것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좋은 의자에 앉지 않고 좋은 식당에서 밥 먹고 좋은 시설을 사용하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고 이제는 이 곳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예전에 우리처럼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무 목적한 수많은 인생들,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보석처럼 빛날 인생이건만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무 희망도 없는 그 인생들을 위해서 이 교회당은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에는 항상 눈물이 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 주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통곡하셨건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섬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늘 섬겨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에 비하면 이 섬김이 너무 초라하다는 이유 때문에 추수해야 할 영혼들은 너무나 많은데 함께 그 추수에 동참할 동지들은 너무나 적다는 사실 때문에 아파하고 울면서 주님이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탄원하는 눈물이 있는 그 교회가 정말 주님의 교회입니다. 초막이면 어떻고 궁궐이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애통하는 성도들이 있는 그곳에서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실 것이고 그리고 그들을 도구로 해서 주님께서는 잠자는 영혼들이 있는 그 어두운 땅에 부흥의 불기둥을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지역을 섬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지어진 교회 한구석을 매만지면서 예쁘게 단장된 좌석 하나 매만지면서 편안하게 차려진 커피숍에 가구 하나 만지면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 우리 교회가 돈이 많아지니까 우리 안락하게 신앙생활 하게끔 목사님이 신경을 많이 썼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벌받을 것입니다. 제게는 여러분들의 그런 유익을 위해서 봉사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피땀을 흘려 이 교회를 지어 제일먼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바치고 그리고 두 번째는 이 평촌 지역에 죽어 가는 많은 영혼들,
여러분들은 그래도 어느 순간에 여러분 자신이 목자 잃은 양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고생하며 유리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찢기면서도 자신이 고생하는지를 모르고 버림받아 내동댕이쳐졌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버림받은 지 모르고 살아가는 정말 극도로 불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가 그들의 눈을 열어줄 수 있을까요? 누가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어서 자신의 인생의 실상을 보게 하고 예수님 없는 자신의 삶의 비참함에 눈뜨게 만들어서 우리들이 사랑하는 그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일은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이 주님의 손에 달렸지만 주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드려서, 우리의 일생을 다 소진해서 주님이 이 일을 이루는 도구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의 마음에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교회 마당을 거닐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일을 시작했고 그리고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많은 성도들이 헌신했습니다. 적은 물질이나마 지갑을 찢었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바치지 않았다면 더 안락했을 자신의 삶의 안락을 포기하고 힘에 지나도록 물질을 드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지갑을 찢는 대신 마음을 찢으며 더 많이 아파하고 울던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해본 사람은 바치고 싶은데 바칠 것이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압니다. 그들의 축복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으로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보시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피나게 섬긴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주께서 베푸시는 그 놀라운 영혼의 은혜와 축복을 제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보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넉넉히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찢은 적이 없는 사람들, 소유도 아버지 앞에 드린 적이 없고 마음도 하나님 앞에 찢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자신들의 희생 없음을 인해서 부끄러워하는 날이 오도록 도와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많이 섬겼건 적게 섬겼건 왜 섬겼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섬김을 강요했습니까? 그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옛날을 기억했기 때문에 드린 섬김이 아니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물질도 아무 것도 아니었고 가슴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정도의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던 때는 몰랐는데 거기에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의 품에 쉬게 하셨을 때, 한 교회에 한 지체가 되게 하셔서 우리 교회에 우리 목사님, 우리 형제, 우리 지체 부를 수 있는 한 공동체 일원이 되게 해주셨을 때 그때 우리는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들어서 정말 저는 지체들, 눈먼 지체들, 그리고 영혼의 깊은 병을 앓고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로 보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인생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지 말고 빛 가운데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형제가 되어서 주님의 사랑 안에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자리에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밖에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 안에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들이 참 신자가 되고 싶으나 정확하게 신앙의 길을 가르쳐주는 목자가 없어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고, 정확하게 잘 가르쳐주었는데도 그 뜻대로 살기 싫어서 자꾸 욕심에 넘어져서 죄를 지음으로 사실은 거의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교만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서 결코 목양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양으로서 주님의 돌봄도 받기를 거절하며 살아가는 막무가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자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나의 구주라고 부르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지 못해서 마지못해 죽은 자처럼 교회 출석하는 그 비참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호적 등록시켜주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그리고 거룩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는 보람에 살아서 주님의 나라에 유익한 일군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한편으로는 집나간 자식 때문에 울고 또 한편으로는 바르게 자라지 않은 자식 때문에 저녁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그런 교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믿는다면 다 믿는 것입니까? 신자면 다 신자입니까? 그런 사람의 결국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도 모르고 은혜의 복음도 모르고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은 어두워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았노라고 핑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도 알고 목자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했는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디에 가서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또한 이미 믿은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잘 가르치고 그리고 바르게 살지 못하면 야단을 쳐서 혼을 내주고 그리고 가는 길을 모르면 알려주고 가는 길을 알아도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없을 정도로 연약하면 훈련을 시켜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그 고되고 힘든 일들을 해야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오셔서 이층을 걸어가면서 목사님, 왜 이 교회는 좁은 방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거기 다 사람 만드는 곳입니다. 일층은 예배드리는 곳이고 이층은 사람 만드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느끼잖아요. 예수님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만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까? 여러분들이 신자답게 살지 않으면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지금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면 주님이 울고 계십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흉악한 죄 가운데서 형벌 받을 죄인들을 내 아들의 피로 구원해주었건만 너희들이 그 은혜를 기억하고 내 뜻대로 살지 않는구나 그리고 주님이 아파하십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민망히 여기신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희랍어로 ‘에스프랑크니스데’ 라는 표현인데 원래 뜻은 ‘창자까지 흔들린다’는 표현입니다. 그 사람들은 창자가 자신의 영혼이 있는 자리라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문맥에 맞추어서 등가번역을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으니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주님 모르고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할 때 주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그래서 천에 하나 만에 한 사람 가운데 먼저 믿은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예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정도였습니까? 교회에 와서 얼마나 따뜻하게 돌보아주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시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섬겼습니다. 그런 섬김을 받은 여러분들이 다시 뒤로 물러가서 주님 없는 삶을 살고 죄 가운데서 목자 잃은 양 같은 삶을 살면 주님이 더 뼈저리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이제 주의 사랑을 가진 자 되어서 자기처럼 유리하고 고생하고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사랑의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그 일을 위해서 쓰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도 그 일을 위해서 쓰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이나 시간이나 재능도 그 일을 위해서 쓴다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여기에 있는 날 동안 우리는 이 마음을 가지고 이 평촌 지역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 한 죄인이 돌아오면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리고 이곳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것들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주님 만나고 변화되어 섬길 수 있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세월이 흐르면 다시 그들도 우리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가운데 이 척박하던 평촌 땅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 차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꿈꾸면서 우리는 오늘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기도로 세워지는 교회①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왕상8:22-23)”
흔히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 예루살렘의 성전은 솔로몬이 즉위한 후 4년부터 시작해서 즉위 제 11년까지 건축 공사가 계속되었으니 7년 동안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짓기는 솔로몬이 지었지만 다윗의 성전이라 해도 맞을 정도로 이미 아버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말년에 철저히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 속에 있는 사랑이 한 일이고 또 아들에게서 성전을 받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다윗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준비를 다윗이 갖추어 놓았습니다. 금이 2.5톤 트럭으로 80대 분이고 은이 300대 분이었다고 하니까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물질을 준비했고 그것을 가지고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 장면은 7년 동안 성전 건축의 역사가 모두 끝나고 입당하는 때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모두 완공되었을 때에 첫 번째 한 일은 솔로몬이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손을 높이 펴들고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에 있어서 물자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았지만 물자가 준비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건축하는 일이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건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물자를 준비해놓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공사를 실행하는 일이 10년 동안 계속되었을 때에 이 솔로몬은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고 더군다나 이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상당히 많은 자재들을 이웃나라에서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무역과 외교의 문제까지 얽혀서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전의 높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고 책을 뒤져보니 15미터 정도라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런 높은 지붕을 가진 건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미 주전 10세기의 일입니다. 주전 960년대의 일이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완공을 위한 파티를 하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지은 성전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백성과 함께 모여서 그 성전이 건축된 것을 경하하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손을 펴들고 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펴들고 기도한다는 것은 앙망과 경배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앙망 속에서 이제 이 솔로몬은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전이 지어지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솔로몬이 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예전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손을 들고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하고 주님을 찾는 일들이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건축하게 하신 참다운 뜻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지어지고 나서 솔로몬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늘을 우러러 손을 쳐들고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놓고 제일 먼저 고백한 것이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겠거늘 하물며 사람이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모든 만들어 놓은 성전에 묶이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찬송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엎드려서 빈 것이 이곳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은 귀를 기울여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많은 백성들이 기도하지만 그러나 이 곳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귀를 기울이시고 이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주님이 기억하시고, 이것을 지은 백성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부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았고 그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그 성전을 지었는지를 기억하시고, 당신은 여기에 계실 수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여기에 두셔서 그 이름이 높아지고 그 장소에서 특별히 기도할 때에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유념해 달라고 하는 것이 성전을 지은 다음에 솔로몬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간구한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의 영광은 반짝반짝 빛나는 성전의 외모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성전의 크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많이 간구해서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을 때에 주님이 그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들이 그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소원이 되는 그것이야말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을 때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가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헤롯의 성전이었습니다.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돈을 많이 들인 -솔로몬의 성전까지는 안되더라도 그 이전에 있었던 스룹바벨성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채찍을 휘두르시면서 비둘기 파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내 집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었고 그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 초기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7년 동안 많은 수고를 해서 성전을 지어놓고 그 성전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 왕이었지만 겸비하게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낮아진 마음으로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여한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집이 무엇을 하는 곳이고 이 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그 일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되는 사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끼도록 그렇게 각인 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동일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큰 건물을 갖고 잘 정돈된 시설을 갖추었으니까 아마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생활하기가 편해서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정말 커다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부왕이 모아놓은 모든 보화와 금고에 있는 모든 보물들을 그 성전을 건축하는데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성전은 보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이 거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곤궁한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개인적인 고통을 가지고 주님 앞에 올라와 하소연할 때 주님이 그 기도를 특별히 들어주시도록, 백성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 성전에서 그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하나님과의 기도 속에서 응답 받은 수많은 기억들이 그 성전 속에 쌓인 기도 응답의 추억이 되는 그러한 건축물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소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솔로몬의 겸비한 마음을 저와 함께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힘을 다해서 교회당을 지었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예배당을 잘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몰라서는 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의 한도 내에서 힘을 다해서 하려고 애를 썼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고 또 저를 믿어주면서 이 큰 역사를 짧은 기간 내에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염려와 우울함이 교차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새벽기도입니다. 방배동 예배당에서 새벽기도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기도하고, 비록 우리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곤고할 때에 가까운 교회에 걸어나와서 오랜 시간동안 눈물로 흐느끼며 기도하던 좋은 기도의 지체들이 예배당이 이전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진지하게 새벽기도 장소를 방배동에 하나 만들까 하는 마음까지도 가질 정도로 안타까운 심정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그 교회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거기 있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높은 뜻을 본받아서 어떻게 하든지 그 교회에 주님의 복음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그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이제 이 교회를 기도의 집으로 만들고 이 속에서 고쳐지지 않는 여러분 자신과 기도 속에서 씨름하고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붙들고 씨름하고 무엇보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게 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셨는데 이제 그러한 부르심을 따라서 영혼들을 잘 섬겨 가는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급한 대로 많이 채워주셔서 이 크신 성전 건축의 역사를 모두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감격으로 우리를 붙들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돈이 모자라서 쩔쩔 매고 고통받을 때도 있었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길을 여시면서 시작한 일을 부끄러움 속에서 중단하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이제껏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일을 위해서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힘에 넘치도록 헌금했고 액수는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서 넘치는 액수는 아니었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보면 있는 사람들의 더 많은 헌신보다도 더 크게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했고, 또 그것을 드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안타까운 눈물을 보석 삼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며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물질과 마음을 묶어서 이 역사를 여기까지 이루어 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배당 건축은 끝났고 더 이상의 건축헌금은 필요가 없습니다. 부채가 남아 있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갚아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전에 하나님 앞에 건축헌금을 할 때에는 돈이 없으면 드릴 수 없었지만 이번 입당예배에서는 부한 자나 빈한 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드릴 수 있는 헌신을 여러분으로부터 받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기도의 헌신입니다. 그래서 입당 예배하는 날 여러분 모두에게 작정카드를 나눠드리겠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예’ ‘아니오’ 밖에 없는데 그 카드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있거나 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숨질 때까지 새벽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여러분들이 헌금 많이 하고 집 팔아서 예배당 지었는데 여기서 싸움질이나 하고 교회 분쟁이나 생기면 헌금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 일입니다. 우리는 넉넉하지도 않았고 부족한 것 많았지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 앞에 드려서 그렇게 크지 않지만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배당을 지은 것은 2-3년만 지나면 아무도 기억을 안 합니다. 누가 건축위원이었는지 누가 예배당 짓기 위해서 집 팔고 무주택자가 되었는지 그런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원하지도 않습니다.
방배동 예배당에서 그렇게 많은 지체들이 주님 만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오늘 이렇게 좋은 신자들로 자랐을 때 그들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 밖에 안보였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그후로부터 2-3년 전에 2백 여명의 성도들이 모든 것을 드려서 허리가 휘도록 힘에 넘치게 만들어 놓은 그 예배당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저는 힘에 넘치도록 액수에 상관없이 헌신한 지체들, 눈물로 기도하고 자신의 몸을 바쳐서 봉사하면서 드릴 것이 없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나님 앞에 아파했던 모든 지체들의 그 섬김을 하나님이 갚아주시지 않으시면 제 마음에 한이 생길 것 같습니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지나면 모두 잊어버리겠지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영혼들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들이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생명 받은 사람들이 될 때 그 때에 그것이 오늘날 이 교회를 짓기 위해서 우리들이 바친 그 헌신을 의미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하고 비유를 하자면 어부가 넓은 바다에 나가려고 이제 겨우 그물코를 다 짜서 접어놓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는 이제 이 그물을 가지고 깊은 데로 가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넓게 그물을 치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그 그물을 거둬올려서 만선의 기쁨을 가지고 항구로 돌아오는 일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은 돈이 있어야 하고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심지어는 병들었을 때에도 베개머리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가난해졌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죽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화:교인이 2백여명 될까말까하는 어느 교회에서 추운 겨울에 집회를 하는데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오기에 목사님께 물어봤더니 많은 성도들이
평생새벽기도에 서원 했다고 했다-학교 선생님이고 야간 강의까지 하시는 한 장로님은
10년간 새벽 4시 10분에 일어나셨는데도 단련되기는커녕 아직도 그 시간에 일어난다 는 것은 어렵다고 하셨다)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을 에는 것같이 추운 언덕 위에 걸어나와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지체를 위해 기도하기를 10년이라니 그것이 어찌 몇천 만원의 건축헌금보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는 단숨에 짓습니다. 그리고 또 잘하면 몇 사람이서도 지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렇게 단숨에 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꼭 본교회로 새벽기도 나와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이사오면 제일 좋지만 멀리 있으면 멀리 있는 동안에는 가까운 교회에 새벽기도 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그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하셨던 그 새벽기도, 당시 그런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예수님이 그렇게 새벽에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지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 뜻이 이 세상에 성취되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주기도문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제는 보이는 예배당은 지어졌습니다. 누가 여기에 와서 위로 한 층 더 올려주겠다고 하는 헌신도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교회 건축에 손 댈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싸인탑까지 올라가고 나면 모두 완공이 되고 모두 끝납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그것은 돈 가지고 건축업자들과 함께 세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기도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해야지 교회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미 솔로몬이 완성된 성전 완공식에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서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정말 이렇게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어느 날 불쑥 나와서 평생 새벽기도 질문지를 보며 갈등 느끼지 마시고 지금부터 기도하십시오. 건축헌금을 드릴 때 여러분들이 가슴에 품고 많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다음 주에 여러분들에게 작정서를 나눠줄 때 그것을 가지고 한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평생 새벽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손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 이제는 내 기도의 헌신이 벽돌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어 이 교회를 건축하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명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 제가 이렇게 새벽기도에 헌신해도 괜찮겠습니까?’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이 ‘너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빼고 나머지는 모두 헌신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말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다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아직까지도 주님의 은혜 아래로 들어오고 있지 못하고 있는 많은 지체들을 위해서 정말 기도해서, 하나님이 정말 문을 열어주시는 것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그런 일을 가능케 합니다. 잘 지어진 교회는 성도들을 수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잘 된 시설은 효과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는 준비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바쳐진 성도들의 헌신적인 기도는 하늘의 불이 되어서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죄악의 땅에 불을 던지고 빗장처럼 걸어 잠갔던 어두움의 땅에 그 대문을 부수고 예수의 복음이 물처럼 흘러 들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건축하면서 잠시 분요했던 우리 마음을 다 털어 버리고 정말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래서 여기에 있는 젊은 형제 자매들이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그 후손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얘야, 이 할아버지가 이 예배당에 와서 평생 새벽기도 헌신하고 입당을 하면서 작정을 한 지 34년의 세월이 흘렀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미혼일 때나 결혼을 했을 때나 변함없이 나와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그 분의 심장을 나눠 가진 착한 사람들이 되어서 누구도 울어주지 않는 죄인들을 위해서 울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주님의 말씀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래서 보이는 교회는 잠깐 동안의 헌신을 통해서 섰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세워진다는 것을 가슴에 깊이 기억하고, 제 2의 성전 건축에 여러분들이 참여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가슴에 손을 얹고 일평생 새벽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내가 생명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 조국 교회와 목회자,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서원하며 드린 그 한 장의 작정서는 집문서 못지 않게 정말 소중한 하나님 앞에 드릴 최고의 헌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지어졌다고 해서 커다란 역사를 마쳤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두 번째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워 가는 이 일에 여러분들이 간절한 기도로 보태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기도로 세워지는 교회②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왕상 8:23)"
하나님의 집을 지어놓은 다음에 입당을 하기에 앞서서 솔로몬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것을 말씀드렸고 우리들도 기도로 입당을 맞이해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송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 가운데서는 주님과 같은 신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을 알면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고 자기를 향한 사랑과 자비가 너무 뛰어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에게 너무나 커다란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증거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된 것 중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데 죤 웨슬레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찬란한 존재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충분한 설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또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런 풍부한 경험이 있을 수가 있는데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주목하게 되고 다른 것들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입당하는 그 순간에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신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절대자이십니다. 그 아래 모든 신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고 더욱이 신들도 아닌 인간들과는 비교되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감격, 그래서 그 영광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절절이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인데 교회에 입당하면서 솔로몬은 바로 그런 경험과 고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이 간절히 기도하고 났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박석 깐 땅에서 엎드렸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를 짓는데 많이 힘들었습니다. 안 힘든 사람이 별로 없이 모두 힘들었습니다. 우선 재정적으로 헌금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돈만 가지고 교회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예화: 한 건축업자의 말-돈이 하나 없이 시작했는데도 은혜롭게 끝나는 교회가 있는 가하면 10억 들어가는 교회를 지으려고 12억을 준비했는데도 분란이 일어나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물질로만 지어지는 것은 세상의 건물이고 교회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것들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혜와 재능 등을 가지고 많이 수고하고 애를 썼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교회 이사온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문이 여기에 달렸는데도 놀래지도 않고 여기에 복도가 있는데도 별로 놀래지도 않고 당연한 듯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참 섭섭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설계도도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추운 겨울에 두꺼운 잠바를 걸쳐 입고 일꾼들과 여기에 서서 교회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백지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 벽을 다 뜯어내면 저와 일하는 사람들이 연필로 그려놓은 설계도가 가득합니다. 그렇게 즉석에서 그리면서 했습니다. 설계를 미리해서 했으면 좋았겠지만 설계를 하자면 우리가 이사해야할 날짜에 겨우 설계도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저쪽에서는 나가라고 할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맡겨서 일을 하게 되면 7-8억은 더 웃돈이 들어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거의 끝날 때쯤 되어 가는데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있습니다. 밟고 다니는 저 문턱을 놓고 우리들이 몇 일을 고민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밟고 지나가고 바람이 불면 제쳐지는 자동천막도 거의 한달 동안 고민하다가 주문해서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것을 만들었느냐는 소리도 안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는 것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말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감탄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여기에 산을 만들어 놓으셨네. 어떻게 이렇게 산을 만들어놓으셨을까’ 지나다니다 예쁜 개울이 나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디자인하셔서 여기에 개울이 흘러가게 하셨을까. 참 기가 막히다’ ‘오늘은 왜 저 하늘에 구름이 떠있을까’ ‘오늘은 어떻게 비가 내릴까’하면서 다 감탄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비천한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경험과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의 경험은 하나님의 영광의 경험 속에 포함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첫째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그리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 있는 신들과 겨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그 모든 것과 구별되는 뛰어난 분이시라고 하는 초월적인 인식과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아름다운 성품이 우리 인간의 성품들에 비해서 탁월하시다고 하는 인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하더라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모든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비결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뵈옵고 나니까 거룩한 경험이 생겨나게 되고, 누가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고는,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정결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날이 있기를 고대하고 그런 일들의 실현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 지어지고 나면 그렇게 지어지고 나서 누가 이 건축을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누가 돈을 얼마를 냈고 누가 이것을 위해서 자기 집을 팔았고 누가 금식기도를 했고 하는 것은 모두 교회의 기초공사와 함께 땅 속에 다 들어가서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은 교회와 함께 땅에 묻히고 우리는 모든 자부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지휘해서 이 교회를 지었다’ ‘내가 헌금해서 이 교회가 지어졌다’ ‘내가 집을 팔아 바쳐서 이 교회가 올라갔다’ ‘적어도 이 교회의 반은 내가 낸 돈이다’하는 식의 생각들을 교회가 지어지는 것과 함께 모두 땅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들어오는 그 일이 우리가 이 예배당에 입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경험해야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 바로 그런 것입니다.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재물을 모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재물이 있다고 해서 솔로몬이 아무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외국의 기술자들이 들어왔고 그렇게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결국은 모든 일들을 솔로몬이 전체적으로 주관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도와서 정치적인 역량, 경제적인 역량, 심지어는 외교적인 역량까지 모두 동원해서 이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그랬으니까 사실 생각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입당을 하는 그 순간에는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생각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렇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능력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일을 위해 헌신했으나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하는 분명한 생각이 이 솔로몬의 마음에 가득 들어왔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당이 지어지기까지 그렇게 수고한, 자신을 버리기까지 그렇게 애를 쓰고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물질이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또 눈물로 기도하고 돈은 없지만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하는 애썼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식구는 아니지만 관련한 많은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중요한 일에 우리가 만났으니 우리가 헤어질 수 있느냐. 우리 교회 계속 나와야지’하며 이번 목요일에도 모두 불러다가 예배드리고 저녁도 드리고 전도하려고 합니다. 그 시공업체 사장님들이 다 우리 교회에 등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교회 지을 때에는 은혜 좀 많이 받고 더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서 큰 어려움 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참 고맙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으로 그런 기도도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특별히 물질로 많이 수고한 그 지체들, 어려운 가운데에서 넘치도록 헌금한 지체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내 마음에 맺히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저들에게 복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너무 감사하고 귀해도 그러나 이제는 그 사람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수고한 것보다는 그 모든 수고를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송,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고생을 많이 해서 교회를 지었다’ ‘몇몇 사람이 똑똑해서 사기 안 당하고 교회를 지었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신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하는 고백이 입당하면서 우리 속에 가득 차야합니다. 그래서 이 입당 예배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이 큰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만이 우리에게 가득하고 충만해질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찬송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두 가지였으니 그 하나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잊지 않고 베푸시는 은혜였습니다. 우리들은 언약을 지키시는 것을 신실함이라고 부릅니다. ‘진실’이 하나님의 인격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 인격이 약속을 지키는 쪽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하신 것은 당신에게 손해가 나시더라도 인간처럼 변하지 아니하시고 한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것을 가리켜서 ‘신실하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믿을만한 분이라는 고백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사는 삶의 초점을 두어서 말할 때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그 사람의 성품과 관계시켜서 말할 때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한 사람이 신실하지 신실한 사람이 거짓될 수 없고 거짓된 사람이 신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실과 신실은 그만큼 신앙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한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렇게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전을 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시면서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내가 너희를 위해서 한 땅을 지정할 터인데 거기에서 너희들이 나와 예배하리라’고 거룩한 장소를 하나 지정해줄 것이라고 하는 성전 개념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때가 주전 10세기이고 출애굽을 할 때가 주전 15세기경이니까 5백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고, 20년을 한 세대로 잡는다고 하면 25대 정도가 흘렀으니까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새카만 시대에 하나님이 하셔서 그 말씀이 조상들의 기록을 따라서 후손에게 전해져 내려왔는데, 이미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죽고 세월은 수없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그 5백년의 역사는 진실의 역사도 신실의 역사도 신앙의 역사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가 있었는가하면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버리던 때가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거의 무정부 상태로 살던 사사시대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서 행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 무쌍한 태도에 의해서 자기의 언약을 이리저리 바꾸시거나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변경시키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입으로 흘러나온 말씀을 식언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켜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대방은 진실하지 않고 늘 여러분을 속이는데 여러분은 언제나 그 사람과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그 자리에 굳게 서서 언제든지 뉘우치고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사랑과 용서로 맞아준 적이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그래 알았어. 관두자. 내가 너 복수하지 않을게’하는 정도지 그렇게 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긴 세월동안 그렇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왜 그렇게 찬송 제목이 될 수 있는 지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보고 잘못 살아본 사람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이 솔로몬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찬송하여야 할 제목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의 길은 형통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한없이 찬송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나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송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내가 잘 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내가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넘어지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끊임없이 쓰러지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거의 생명과 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은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는데 1년 후쯤은 어떻게 되어있을까요? 1년 후에 더 굳센 믿음으로 더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5년 후에는 어떨까요? 10년 후에는 어떨까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신하며 살아온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아마 반쯤은 그을리고 반쯤은 물에 젖었을 것입니다. 반쯤은 지옥 불에서 데고 반쯤은 천국 생명수 물가에 빠졌다 나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무엇인가 크게 잘못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찌르는 것은 죄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변함없으신 예수님 앞에서 너무 기회주의적으로 살았구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내게 약속하신 것들을 진실하게 지키셨는데 나는 언제나 이중간첩 같은 삶을 살았구나. 필요하면 하나님을 팔고 필요하면 세상을 팔고, 어떤 때는 신자처럼 어떤 때는 성도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았구나’하는 자신의 불 신실함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대비되면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신실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당을 지어서 하나님을 늘 만날 수 있는 복된 성소를 소유하는 것이 자신들의 처지에서는 너무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5백년 전에 주님이 하신 약속과 그 동안 자기 조상부터 시작해서 신실하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들의 반역한 삶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대비해 놓았을 때, 백성과 함께 이 솔로몬이 성전이 완공되고 입당하기에 앞서서 제일 먼저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이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실수도 없고 변함도 없이 여러분들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셔서 이 교회에 오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이 헌신해서 교회당을 짓게끔 만드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건축해놨는데 다시 성도들로 꽉 찬 것을 보면서 걱정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2년 정도 이 일에 매달려 오면서 정말 너무 힘들고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목사이지 무슨 건축사인가’ ‘내가 설교하고 말씀 전하는 사람이지 금융전문가인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제가 해야할 그 일에만 전념하고 말씀 전하고 기도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나 자신의 얼마나 이기적인 순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해야될 일인데 누가 그것을 대신 지겠는가.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일도 아닌데 누가 그러겠습니까?
(예화:일꾼들과 나눈 이야기-교회를 잘 지어놓으면 성도들은 한 일주일동안 ‘정말 잘 됐다’ ‘정말 수고했다’ 하지만 1-2년 지나고 나면 누가 했는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잘 못 지어놓으면 몇 년 후에 물이 새도 ‘누가 이렇게 해놨지’ 할 것이다)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완공식을 하면서, 말하자면 입당을 위한 헌신을 하면서, 이것을 무거운 부담처럼 느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신 커다란 특권처럼 느꼈습니다. 그 아버지 다윗의 믿음도 그러했고 솔로몬의 믿음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솔로몬을 많이 부러워하며 죽은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애를 많이 썼지만 누구도 그것을 헌신과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영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이 일에 솔로몬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수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이처럼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입당을 하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교회당을 짓는 그 일에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주역이 되었고 어떻든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교회당이 지어졌습니다. 많이 헌신한 사람, 적게 헌신한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그 많다 적다는 것도 모두 산술적인 계산일 뿐 정말 누가 많고 누가 적은 지는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대로 그렇게 헌신한 바를 따라서 갚아주시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기뻐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교회를 짓는데 자기 일처럼 생각하면서 헌신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일들의 이루어짐을 위해서 목놓아 기도하면 안타까워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가 올바르게 잘 지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힘에 넘치도록 고생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이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을 따라서, 당신의 신실함을 좇아서 이 일을 성취하신 것이니까 이제는 많이 헌신한 사람, 헌신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구별이 다 사라지고 오로지 우리를 이제껏 인도하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와 찬송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일들을 위해서 많이 수고하고 애를 쓴 사람들이 오히려 수고하고 애쓰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오히려 이렇게 교회가 입당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많이 헌신한 사람이나 적게 헌신한 사람이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나 바친 것이 많은 사람이나 모두 서로가 하나 되어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신실하게 갚아주심으로 우리가 이 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송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송 제목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은혜 베푸심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넘치도록 하나님이 부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친절 내지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솔로몬과 솔로몬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 큰 일을 이루기에 뽑힌 사람들이고 아주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대에 이 성전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는 고백을 이 사람이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자 왔는데 하필이면 왜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 일을 시작했을까?’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만 않았어도 교회를 짓는 일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텐데 그 새털같이 많은 날 은혜를 안 주시다가 하필이면 교회를 지을 때가 되니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많은 짐을 안고 하나님 앞에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솔로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힘에 넘치도록 아버지의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백성들과 함께 아름다운 전을 건축한 다음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을 하고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이 일을 수종들어서 부왕이 꿈에도 그리던 그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특별한 특권이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이모저모로 애쓸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하는 증거니까 이 특권은 정말 많은 사람 중에 선택되어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구나’ 하는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오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씩이나 건축을 했는데...’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은혜를 베푸신 사람들만 사용하셔서 자기의 집을 일구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은혜 베푸신 뜻을 좇아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특별히 그 위에 하나 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게 하셨는데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경험하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하는 고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이제껏 까지 주님의 교회가 흘러왔고 교회가 건축되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밖에는 할 얘기가 없고 주님의 은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이 교회를 완공하고 입당하는 입당 예배 때에도 사람에게 진 신세나 사람의 헌신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움직여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 이 연약한 자기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갈 바를 전혀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던 우리들을 목자 읽은 양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손으로 이끌어서 예비하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이 영광의 유업을 누리게 하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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