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인간이란 무엇인가?(시73:28上) 2006.1.8 주일오전 1
2. 소유와 행복(시73:28上) 2006.1.15 주일오전 16
3. 인간 비참의 정체(시73:28上) 2006.1.22 주일오전 33
4. 행복의 길에 들어서서(시73:28上) 2006.1.29 주일오전 49
5. 빛으로 가는 길(시73:28上) 2006.2.5 주일오전 65
6. 사랑으로 가는 길(시73:28上) 2006.2.12 주일오전 85
1.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73:28 상)
I. 본문해설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시인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이 방황하다가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복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여러 가지 많은 회의와 정신적인 방황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마지막으로 인간의 참된 행복은 눈에 보이는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II. 행복을 찾는 인간 존재
A.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찾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면 그냥 행복을 누리고 행복해지지 않으면 할 수 없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가 행복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 속에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초점이 자신의 행복에 맞추어져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 하나 행동할 때마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 배어 있어서,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위해서 행동하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갈망하면서 인간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퀴즈를 내겠습니다. 자동차를 탈 때 운전석에도 사람이 타고 조수석에도 사람이 타는데 달려가서 앞에 있는 차를 추돌하거나 어떻든지 간에 정면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람이 다칠 확률이 운전석에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게 왜 그렇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핸들을 틉니다. 옆에 반드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트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그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기가 피하기 위해 핸들을 틀어서 정면으로 부딪치면, 자기가 부딪칠 충돌 사고에서 조수석에 있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 전도사님 한분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진석이라고 하는 애인데 그 애 얼굴이 진짜 한국적으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토종’이라고 불렀는데 그 아이가 온 교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고 교회에 와서 항상 볼을 내밀면 뽀뽀를 해주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 애가 교회 통로에서 사탕 두개를 들고 먹으려고 그것을 까다가 하나를 그만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사탕이 한 개 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옆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진석아! 목사님에게 뽀뽀 한번 해라.’ 아는 뽀뽀를 쪽 해주었습니다. ‘진석아! 목사님 사탕 먹고 싶은데, 사탕하나 줄래?’ 그랬더니 애가 갑자기 긴 속눈썹을 내려 깔고 생각에 잠깁니다. 왜냐하면 손에 한 개밖에 없는데 이것을 사랑하는 목사님이 달라고 하니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해결점을 찾았는지 눈을 딱 뜨더니 부지런히 사탕을 깝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내 입에 넣어줄 줄 알았더니, 자기 입에 쑥 집어넣기에 하도 기가 막혀서, ‘진석아! 목사님은 안 줘’ 그랬더니 땅에 떨어진 것을 주어서 먹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아니 그것을 자기가 먹지.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가 그에게 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행복추구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이고 본성 자체가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작동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살다가, 살다가 힘들면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자살할 때 너무 사는 것이 행복할 때 자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하는 것이니 이것 자체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몸부림을 치면서 죽음에 항거하는데 인간이 자살할 때는 생명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살아서 고통을 많이 받는 자신을 그 고통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피하게 하려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니 방법이야 잘못되었지만 그것 역시 인간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이런 처절한 본성과는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이 너무나, 너무나 극소수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B. 네 종류의 인간들
이 행복과 관련해서 인간은 크게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입니다. 첫째는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거의 모르는 채 그냥 사는 사람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참 길이 무엇인지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매일 그냥 자기가 좋은 것이면 선택하고 싫은 것이면 버리면서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에 이를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6년과 6년, 4년 최소한 16년의 교육을 받고 사회라고 하는 곳에 나와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할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많은 역사가 지나오면서 인간이 이렇게 16년 정도는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사회에 쓸모가 있고 본인도 자기 몫을 감당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16년이라는 교육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 길은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16년을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좋아하는가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야단을 쳐서 공부를 시킵니다. 하고 싶을 때도 있고 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이런 변덕스러운 것들을 부모가 야단을 치고 통제해서 16년을 걸어가게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 아이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길 자체가 없습니다. 그 어린아이 때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우리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니까 부모들이 한 일주일 동안은 교실 뒤에 서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영래 짝에게 ‘애야, 너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니?’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아줌마,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이달 말까지 다니고 끊어야겠어요.’ 그 애는 학원에 다니면서 계속 끊어버릇해서 학교도 끊는 것인지 아는 가 봅니다. 그런데 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결국은 길이 정해져있지 않으면 결코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행복해지는 길은 이것이라고 정해놓고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길에 맞추어서 걸어가려고 하는데 그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한쪽 방향으로 계속 가려고 하지만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인생관, 그릇된 종교, 그리고 타당성이 없는 심령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한 방향으로 길을 걸어가게는 만들지만 그러나 그를 절대로 행복하게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올바르게 길을 찾았습니다. 엄청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가 하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기독교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에 하도 힘들어서 도망친 제 삼의 통로가 아닙니다. 이 기독교는 인간에게 참다운 인생의 길이 무엇이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고 인류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모든 철학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로 길을 찾았습니다. 아직 지식이 없어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길로 올바르게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올바르게만 들어서면 안 되고 올바르게 끝까지 걸어가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고 더 큰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길을 가기 싫거나 시험을 만나거나 해서 미끄러져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가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뮤얼 러더퍼드라고 하는 청교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양쪽 절벽에 통나무를 걸어 놓고 그 위를 걸어가는 것에 비유를 했습니다. 양쪽에 깎아지는 수십 길의 절벽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기를 건너야 되는데 도저히 인간의 방법으로 건널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선택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보같이 껑충 건너뛸 수가 없으니까 계곡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야지 된다고 하면서 계곡을 수십 길을 밧줄을 타고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계곡 밑에는 수십 길의 물이 흐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건널 것이며 또 천신만고 끝에 물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내려갈 때는 줄을 잡고 내려간다고 하지만 올라갈 때는 줄을 내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 수십 길을 다시 올라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바보같이 자기가 한번 어깨위에다 커다란 튼튼한 천을 매달고 한번 힘껏 저으면 그 정도는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가 무슨 새라고, 못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큰 나무를 잘라서 그 두 절벽 사이에 놓고 흔들리지 않게 딱 만들었습니다. 올바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통나무 위를 걸어가게 되었으니까 올바르게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통나무를 올라선 것까지는 잘했는데 그만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디디면서 가야지 되는데 까붑니다. 생각이 없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거기를 겅둥겅둥 뛰어가다가 결국은 미끄러져서 떨어집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똑바로 신앙생활을 안 하게 되어서 미끄러지게 되면 참다운 인생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행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이렇게 올바른 길을 선택을 해서도 미끄러진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지옥 같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나 하는 회의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네 번째, 올바른 길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똑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통나무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통나무 위를 걸어가면서 능히 건널 수 있지만 염려 없이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해서 길을 건너는 사람이 건너편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걸어가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그 걸어감으로 인해서 결국은 절벽을 건너 지복의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행복을 이야기하려면 결국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가를 알아야지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을 선택해도 참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I. 인간의 자기 이해
여기에서 우리들이 인간의 자기 이해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인간이 자기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이 됩니다. 우선 첫째는 인간이 무엇인가?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이 누구인가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은 인간만을 생각해서는 참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보면 이렇게 등근 천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맨 처음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이게 뭘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인생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 여기 위에다 뭘 올려놓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종을 생각합니다. ‘바닥이 나무인데 쇠로 된 이 종은 예배에 기여하는데 여기에 있으면 미끄러지기 쉽고 또 이 책상이 긁히기 쉬우니까 이것을 이렇게 올려놓으면 참 좋구나. 그리고 이 색깔이 황금빛이고 여기에 있는 천 색깔도 같은 배열의 색깔이니까 올려놓으면 어울리고 종이 원형이니까 이것도 원형으로 디자인을 해서 전체적으로 이것이 이 밑에 있는 것이 종과 이 종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겠구나.’ 그런 다른 사물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아! 그렇다면 이게 참 좋은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의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A.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똑같이 인간이 행복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자기가 무엇인지를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고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원하는 어떤 사물들에 진짜가 생겨나는 것이니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는 자기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위해서 긴 역사 속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물어보았고 인생의 의미를 묻는 모든 사람들은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 속에서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인지가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두개의 무한한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입니다. 그 두개의 무한한 세계중 하나는 자기 밖의 무한한 세계이고, 또 하나는 자기 안에 있는 무한한 세계, 두 무한한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밖에 있는 세계도 자기보다 크고, 자기 안에 있는 세계도 자기보다 큽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속에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1. 자기 안의 무한 세계(외연적 무한 세계)
밤하늘에 별이 반짝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별이 6천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지구나 화성, 목성, 토성 이런 별들은 지구에서나 보이지 다른 별들 속에 있는 이런 종류의 행성,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니고 움직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모두 태양과 같이 스스로 이글거리면서 빛을 발산하는 그런 종류의 별인데 항상 제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발광한다고 해서 이것을 ‘항성’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항성이 몇 개의 행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태양만이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9홉 개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그럼 목사님, 과학이 이렇게 발달되었는데 왜 다른 별들이 그런 것을 거느리고 있는지 왜 못 볼까요? 안 보이니까 못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늘에 떠있는 수천 개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중에서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이 빛으로 4년을 달려가야지만 만납니다. 그러니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별은 아무리 좋은 망원경으로 봐도 까만 점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 항성 자체가 이글거리는 빛을 가진 항성이 점으로 보이니 그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들이 눈에 띨 리가 없습니다. 그 별들이 이렇게 있으니까 사실상 이 우주공간은 텅 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별과 별사이에 항성과 항성 사이가 4년을 달려가야지 되니까, 그러나 더 멀리서 그 별들을 관측하면 그 별들이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우리들이 밤하늘을 보면 저 건너편에 은하수가 보입니다. 마치 뿌옇게 우유를 뿌려놓은 것 같다고 그래서 이것을 은하수라고 부릅니다. ‘milky way, galaxy’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유를 뿌려놓은 것처럼 뿌연 것이 보입니다. 그 뿌연 것이 바로 은하계입니다. 이 지구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에 있습니다. 그 뿌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수십억 개의 별들이 모인 무리입니다. 뿌옇게 보이니까 별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수십억 개의 별인데 그 한군데 모여 있는 뿌옇게 된 별 하나 하나의 사이 최소한 빛이 몇 년을 달려가야 하고 긴 것은 몇 십 년, 몇 천 년을 달려가야지만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이니 그 은하계가 지구가 속해있으면서도 그 은하계에서 오는 빛은 장구한 세월을 걸쳐서 날아오는 빛이니 짧게는 수 만년, 수천 년, 수십 만 년 몇 억년 되는 거리에서 빛이 날아와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 멀리서 보면 지구도 보이지 않거니와 태양조차도 그 빛나지 않는 은하수 속에 있는 먼지와 같은 한 별일뿐인데 이 은하계가 모여서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모여 있는 곳에 인간이 모여 살듯이 별들이 모여 삽니다. 거기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은하계가 여러개 모인 것이 은하단입니다. 은하단들이 모인 것이 수십억 개가 모여서 그것이 이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럼 우주밖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묻는데 모든 과학자들은 그것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개념이고 아마도 추측컨대 수십억 개의 은하계가 있다고 하지만 우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헤아릴 수 없는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그 수많은 은하계들 속에 그 은하계 안에 있는 수십억 개의 별, 그 안에 있는 그 수십억 개의 별들 중 하나인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아홉 개의 행성 가운데 하나, 그것이 지구이고 우리 인간은 거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자기 안의 무한 세계(내포적 무한세계)
파리하고 하루살이하고 놀다가 가면서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집에 돌아가면서 내일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파리하고 잠자리하고 놀다가 지나가면서 다다음주에 만나자. 칠일내지 팔일밖에 살지 못하는 파리는 다다음주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잠자리하고 개구리하고 놀다가 개구리가 들어가면서 내년에 만나자. 잠자리는 내년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아무 염려 없네!
그래서 천재적인 사상가 파스칼이 자신의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한없이 두렵게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창조하신 끝없는 무한의 세계 속에 아주 유한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입니다. 그리고 보면 인간이 얼마나 같지 않은 존재인지!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하루살이보다 존재에 있어서 하루살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했지만 아직 인간은 인간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다 이해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모릅니다.
B.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느 의사선생님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의사들이 얼마나 인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지를 생각하면 아마 함부로 병원에 못 올 것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우리 같은 일반인에 비해서는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한 의사선생님들이 인체에 대해서 많이 알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일부분만 알뿐이지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조차도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20세기를 들어서 과학이 치열하게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인간이 어떻게 사물을 보고 기억하고 뇌에 저장하고 다시 활용하는지에 대해서 개념만 잡았을 뿐이지 아직까지도 모두 파악을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만 그렇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나 인간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이고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아무리 연구해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전, 저하고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저를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정말 물어봤습니다. ‘너는 누구인가? 넌 나에게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때는 네가 나 같고 어떤 때는 네가 전혀 내가 아니야. 그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갑니다.
인간 내부에도 무한의 세계가 있습니다. 육신과 영혼 및 정신의 세계가 그것인데 이는 다 밝혀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거대한 비밀 속에 묻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인생의 행복을 이야기하기 전에 꼭 알아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않고는 행복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행복을 올바르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첫 번째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의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그것일 수가 없게 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본질입니다. 거기에서 본성이 형성이 되고 그 본성에서 작용과 행동, 생각 이런 것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면 본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본성이 바뀝니다. 그러니까 바꾸어진 말과 생각과 행동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행복을 향해 갈수 없는 사람이 행복을 향해 갈수 있도록 다시 세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 때 비로소 인간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참으로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밖에 있는 요인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V. 인간의 본질(육체와 영혼)
그러면 도대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을 빼놓으면 인간이 될 수 없는 그 결정적인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옷, 이렇게 잘 입은 사람도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다 벗고 내복차림으로 있는 사람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지위, 아닙니다. 대통령도 사람이지만 거지도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식, 박사학위를 받고 공부를 많이 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식을 가진 사람도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만 학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도 사람이고 머리에 아무 것도 든 것이 없는 사람도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은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태입니다.
그러면 양보할 수 없는,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요소는 딱 두개밖에는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입니다. 육체만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영혼이 분리되어서 차가운 시체로 누워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또 육체를 내버려두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영혼에게 주민등록증을 들려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 두 가지가 만나서 살아있는 상태. 이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훅!'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영혼을 주입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생령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이 육체와 영혼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어째든 육체도 잘되어서 좋은 상태가 되고 영혼도 잘 되어서 좋은 상태가 되어서 두개가 더 좋을 나위가 없이 좋은 상태가 되어서 결합이 되면 그게 인간의 본질이니까 그 인간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육체가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영혼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각각 똑같으면 좋겠는데 틀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육체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체의 좋은 상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영혼과 정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으면 이것이 좋은 육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가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육체가 계속 섭취하고 그 양분들을 분해하고 빨아들여서 그 육체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한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A. 육체-음식의 공급
본래 인간이 창조될 때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결함에 의해서 신체의 각 부분이 완전함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질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가장 좋은 상태는 그렇게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고 또 음식을 계속 섭취해서 건강을 지킨 상태, 다시 말하면 육체가 강건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육체는 좋은 상태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육체가 그런 음식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고 그래서 육체가 망가지게 되면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정신으로 그것을 극복해서 매이지 않고 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인간의 구성요소 자체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강건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지만 인간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끊임없이 좋은 음식을 섭취해서 육체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음식을 거의 안 먹어서 점점 육체가 핍절하여 육체로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떨어지거나 먹어도 소모하는 것에 비해서 매우 적은 양밖에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서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기능이 저하되게 되면 육체는 좋은 상태를 잃어버리게 되어서 행복하기 위한 요건을 상실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육체는 따라서 먹는 것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보호하게 됩니다. 추위, 더위, 굶주림으로부터 보호해서 계속 공급함으로 이 육체는 강건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가 그런 것들을 공급받고 보호받음으로서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똑같이 영혼도 그런 보호와 돌봄, 그리고 무엇인가 양식이 되는 공급이 주어질 때 영혼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좋은 상태를 보존해서 좋은 육체와 함께 결합해서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육체의 경우에는 음식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영혼에는 뭘 집어넣어야지만 영혼이 그것을 양식 삼아서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지식입니다. 지식을 넣어주면 영혼이 건강하고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또 오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아! 그럼 목사님, 유치원밖에 못 나온 사람의 영혼은 거의 빈사상태고 박사쯤 받은 사람의 영혼은 비만에 걸렸겠네요.’ 그게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배가 매우 고픕니다. 그럼 밥을 먹어야 되는데 유리구슬을 잔뜩 먹었습니다. 한 바가지 정도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은 다음에 배가 고플까요, 안 고플까요?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배가 고플까요, 안 고플까요? 안 고픕니다. 배가 고프고 안고프고는 이 복부의 포만감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헛배가 꽉 찰 때 배가 고픕니까, 안 고픕니까? 하나도 안 고픕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들어가든지 간에 포만을 느끼면 일단 센서 작동이 멈추어서 배가 안 고픕니다. 그러니까 유리구슬이 들어가도 배는 안 고픕니다. 그런데 문제는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움직이는 것은 음식이 분해가 되고 소화가 되어서 에너지가 되어서 열량을 채워야지만 거기서 힘이 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영혼에도 밥과 같은 지식이 있고 구슬과 같은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구슬과 같은 지식을 계속 집어넣으면 이상하게 영혼이 허기지지는 않는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 똑같이 이 지식이 없는 사람과 다름이 없이 우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영혼이 좋아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영혼이 좋아하는 지식, 먹고 배부르고 힘을 낼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지식이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이 될 만한 지식이 주어질 때 영혼에 그 힘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혼이 양식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이 무엇인가? 그럼 영혼이 구슬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은 무엇인가? 쓸데없는 잡다한 지식이 그런 것입니다. TV프로를 외우는 것, 신문기사 외우는 것. 연예인 신상조사를 외우는 것, 그 다음에 맛있는 집 식당 외우고 있는 것 이런 잡다한 쓸모없는 지식들, 모두 영혼에게 있어서 구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밥과 같은 지식이 무엇인가? 가슴에 새기십시오. 영혼이 진짜 좋아하는 지식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두 번째는 무엇을 믿어야할까? 이것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이 주어지면 영혼은 그것을 밥 삼아서 마구 섭취하면서 튼튼해지게 됩니다. 튼튼한 그 영혼이 튼튼한 육체와 만나면서 인간이 행복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행복한 상태에 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B. 영혼-지식과 분별력(지혜)을 공급
그러면 그 지식은 당연히 분별력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지식과 그 분별력을 합쳐서 아주 쉬운 말로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번 시리즈 내내,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wisdom, sapientia'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어떤 사람에게 많이 생기는가 하면 참다운 영혼의 양식이 되는 지식을 많이 집어넣은 사람들이 지혜가 늘어납니다. 구슬과 같은 지식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지혜로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보면 세상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보다는 세상에서는 공부를 거의 낫 놓고 기억자 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고, 내가 어떻게 믿어야 하고 ‘아멘!’ 이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배워간 사람이 훨씬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훨씬 더 좋음을 유지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와 영혼 두개가 결합이 되어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데 사실 주도권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래서 육체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육체라고 하는 것은 쇠하고 질병에 걸리고 연약할 수밖에 없게 되기에 아무리 먹을 것을 잘 공급해주고 시시때때로 보호해주고 덮어주고 씻겨주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부흥회를 하는데, 연세 드신 할머니 한분이 무릎이 안 좋으시니까, 저 강사 목사님에게 기도한번 받게 해주세요. 그러면 웬만하면 강사 목사님 피곤하실 텐데 그래도 목사님, 우리 교인이 기도를 받고 싶어 하시는데 한번 해주십시오. 그렇게 할 것인데 냅두세요. 뭘 기도를 받으십니까.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아! 목사님 무릎이 아픈데, 기도해도 안 납니다. 집이 다 낡았는데 뭘 그래. 그냥 그대로 사십시오. 다 그런 것이지 뭘 그래. 목사님 밥 먹으러 갑시다. 그 목사님의 지론은 그렇게 자연을 따라서 늙어가고 소멸해지는 질서를 그냥 받아드리는 것도 믿음의 한 종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순응하는 것 자체가,
그러면 만약에 육체가 질병에 걸리고 늙어 가면 영혼이 아무리 건강해도 이 쇠해가고 늙어가는 육체가 영혼을 붙들고 늘어져서 인생이 똑같이 육체가 쇠잔해가는 것처럼 행복도 쇠잔해 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럴 것 같다면 사실 기독교 신앙이 특별한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서 육체는 다 죽어가면서 영혼의 건강한 상태에서 이 육체가 죽어가면서 오히려 이 육체는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혼 때문에 오히려 육체는 소멸해가는 데도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마지막에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썩을 육체를 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아홉 번이나 걸쳐서 설교하면서 인간의 존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 있다고 제가 그렇게 설교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탄광 사고가 났습니다. 그렇게 발달한 나라에서도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와르르 무너져서 그 갱에 묻혀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나중에 그 시체들을 다 발굴했는데 그 중에 한 편지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짜릿하게 만들었습니다. 갱도에 묻혀서 죽어 가는데 그 흑인이 그 팔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편지를 가족들에게 썼습니다. 그러면서 첫 손자를 처음 안았을 때 자기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써내려가면서 가족들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썼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똑같이 죽으면서 글을 남겼는데 가족들에게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아. 그런데 내가 죽어가거든. 안녕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얼마든지 이 영혼이 건강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 육체의 건강함과 쇠약함, 변천하는 내 밖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요, 믿음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 있는 자원들이 줄어들고 늘어나고 하는 것에 따라서 영혼이 함께 곤두박질치면서 인간이 불행해지고 좋아하고 행복해지고 그 다음날이면 다시 불행해지고 이렇게 된다면 이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아무리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어도 잃어버릴 것 같은 염려에 사로잡혀있으면 그것은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과 육체가 있는데 이 인간의 본질이 있는데 영혼이 지혜를 계속 공급받아서 그 지혜를 소유하고 있을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V. 지혜와 행복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행복과 지혜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한 자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자가 지금은 모르는 계약이야. 나는 그런 것이 필요 없어. 내가 좋다는데 왜 그래. 그러지만 결국은 그것은 일시적으로 자기가 느끼는 것일 뿐이고 마지막에 인생이라는 이 길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게 되면 나방과 모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유화등이 라고 해서 등불을 밝혀놓고 밑에다 물을 떠놓고 석유를 부었습니다. 그러면 날아왔다가 거기에 뚝 떨어져서 이제 석유와 물에 빠져서 죽게 했는데 요즘은 발달되어서 전기 나방 살충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기도원 마당에 걸어두면 거기에서 벌레들이 좋아하는 자외선이 나옵니다. 그러면 벌레들은 그것을 보면서 따라갑니다. 아!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불빛인데 그러면서 더 가까이 다가가니까 탁! 다니까 피시식! 하면서 새카맣게 타면서 떨어집니다. 타죽는 소리도 들리고 냄새도 나는데 그 다음 나방이 또 날아갑니다. 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저 불빛이 좋으니까 그냥 날아갑니다. 탁! 하고 부딪히니까 피시식! 하면서 시커멓게 타면서 떨어지고 또 날아가고 수없이 날아갑니다. 어떤 나방은 날아가다가 피식! 하니까 튀어나옵니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날아갑니다. 결국은 타죽습니다.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어쩌면 저럴까.
금붕어의 기억력이 3초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가 그러는데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그러는데 실험해봤어?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그러는데 실험해봤어? 또 조금 있다가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그러는데 실험해봤어? 이게 말을 해놓고 자기가 한 말을 잊어버립니다.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난 하나도 안 우스운데 그게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날아가 타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빛을 향해서 탁! 만났을 때 숲에 있는 나방에 비해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저 불빛이 다가오니까 막 날아갑니다. 그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것에 빛의 양이 점점 많아져서 자기를 행복할 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불에 타서 죽습니다.
A. 무지한 자
이처럼 영혼의 양식인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생각이 오류로 꽉 차있으니까 많은 생각을 해도 쓸모 있는 생각은 거의 없고 그릇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생각입니다. 그 그릇된 것으로가득 찬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니까 수많은 판단이 전부다 오류로 가득 찬 판단입니다. 그 그릇된 판단에 기초해서 행동을 하니까 그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최선을 다해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판단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것은 결국은 오류로 가득 찬 것이 되어서 그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과 오류 속에서는 인간이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신나게 먹고 퍼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일만 일어나면 그게 행복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한 인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실험을 해봐도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이해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을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적용해보십시오.
옛날에 저희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남준아 하고 부르시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실을 붙잡고 있을 때입니다. 옛날에는 그 실이 실타래로 나오는데 실타래를 사서 실패에다 감는 것인데 이 실이 그렇게 똑바로 되어 있으면 혼자 놓고 감으면 되는데 공장에서 생산된 게 그렇게 안 되어 있어서 이렇게 들고 춤을 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게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빨리 해버리려고 막 하면 계속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이 엉켜있을수록 찬찬히 생각해서 풀고 필요하면 실패를 돌리고 팔을 움직여서 실을 풀어가면서 감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행복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여러분들이 사모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주 그냥 복잡한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나는 다 필요 없어. 나 지금 굉장히 경제적으로 어렵거든, 돈만 있으면 심히 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해보면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나는 다른 것이 필요 없어. 일자리나 하나 생기면 될 텐데, 아 나 일자리는 다 필요 없어, 있을 만큼 있는데 우리 자식 그 아들 골치를 썩이는 그놈 진짜 새사람이 되었으면 내가 심히 피겠어. 걱정을 안 해.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하면 이것은 마치 나방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초가 탄탄하고 인생 전체에 가는 길의 구도가 서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지금 내가 올바로 가고 있다. 잘못 가고 있다. 이 길로 가면 불행해지는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복된 사람, 그러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게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대의 재앙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오류로 가득 찬 생각과 판단과 행동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밧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을 계속 얽어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만 행복을 너무나 원하는데 스스로 불행해질 일만 골라하면서 자기 자신을 불행의 줄로 얽어매어서 그래서 비참한 상태로 데려갑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복 좀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도 이상하게 복이 안 내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복인 줄 아십시오. 어떻게 그게 복이 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고 있는 최고의 축복은 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여러분들에게 지혜를 주어서 변화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올바른 것을 선택하면서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이렇게 올바른 길을 따라서 걸어가게 됩니다. 그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B. 지혜로운 자
지혜로운 사람은 반대로 어떨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과 판단력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믿어야 될지,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에 대한 지식이 꽉 차있고 이것을 가지고 활용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분별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통칭해서 가리켜서 우리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로우니까 생각하는 것들이 옳은 생각들로 꽉 차있습니다. 생각이 올바르니까 판단이 정확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불빛을 향해 날아가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좋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옳은 판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옳은 판단으로 가득 차있으니까 이 판단에 기초해서 실천에 옮기는 행동들이 올바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데 항상 행복해질 수 있도록 삶을 개척해나가지, 자기가 행복을 원하면서도 스스로 어리석음 때문에 자기를 불행해질 수밖에 없도록 행동을 해서 그것을 자기를 밧줄로 얽어매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런 어리석음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 행복을 찾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올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자, 지난 시간에도 제가 그런 말씀을 잠깐 드린 것 같습니다. 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지혜가 없어서 생각의 옳고 그름이 뒤섞여있고 판단이 어리석어서 오류로 가득차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가난해서 물질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요? 그 물질 때문에 타락하거나 범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만약에 가난해졌습니다. 가난해지기 때문에 어리석어져서 더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렇게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무엇을 뺏어가도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 진짜 하나님을 잘 믿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려운 위기 상황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요셉처럼 연단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더 지혜롭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말을 모두 먹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말은 하루에 당근을 딱 세 개만 주어야지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쓸데없는 근육질이 생기지 않아서 최고의 경주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세 종류의 사람이 말을 먹입니다. 한 사람은 세 개밖에는 줄 것이 없습니다. 더 주고 싶은데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가난해서 그래서 할 수 없이 세 개씩 주었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이 말을 좋은 말로 길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세 개만 주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세 개를 계속해서 주었습니다. 왜 계속 세 개를 주는가? 산신령이 이제 그만 안 그랬기 때문에 계속 세 개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말을 기르는 사람도 세 개를 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말과 당근에 대해서 잘 연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론이 났는데 뭔가 하면 아! 이 말은 네 개를 주면 살덩이가 생겨서 경주를 못하고 두개를 주면 힘이 떨어져서 근육이 풀어지는구나. 그리고 세 개도 아무 때나 세 개를 주는 게 아니라 아침에 하나를 주고 점심때는 반개만 주고 오후에 한개 반을 주어야지 되는구나.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여러 가지 정확한 조사에 의하면 비 오는 날에는 이 당근을 깊은 밤에 먹여야지만 이 말에게 좋구나. 이런 모든 것을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종류의 사람이 각각 말을 먹이는데 가장 훌륭한 마부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몇 번째 사람일까요? 왜냐하면 첫 번째 사람은 심히 피면 네 개를 줄 사람이고 더 가난해지면 두개로 줄일 사람이니까 이것은 소 뒷발질에 우연히 개구리가 맞은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산신령이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에 앞에 있는 사람보다는 조금 낫지만 앞에 그러나 혹시 개꿈을 꾸어서 잘못 착각을 하면 그 규칙을 깨트려서 말을 망가트릴 염려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그 모든 이치를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을 신자에 비유하자면 무슨 사람인가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 주일날 왜 교회에 왔습니까? 아! 조상대대로 하던 것입니다. 왜 주일날교회에서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십니까? 아! 밖에 다녀보십시오. 요즘 같이 물가가 비싼 때에 낭비입니다. 가정형편이 일한 형편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있으면 예배를 드리고 밥도 주고 추수감사주일에는 떡도 주던데, 이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냥 아무 이치도 모르지만 아멘, 한 사람입니다. 자, 주일 잘 지키십시오. 아멘, 왜 주일을 잘 지켜야지요? 목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이 그러라고 그러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멘, 하면 됩니다. 이러면 이 사람도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항상 은혜 충만해야 합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실천해야지 되니까 믿음으로 꽉 차야 합니다. 믿음이 조금만 식으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회의가 듭니다. 믿음으로 꽉 차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 믿음으로 꽉 차있다고, 우리 흔히 첫사랑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첫사랑 자꾸 그러는 게 뭔가 하면 첫사랑으로 꽉 차면 아멘이 잘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믿음으로 충만해지면 작은 지식에도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아멘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불안한 행복입니다. 언제 이 믿음이 식을지 모릅니다. 언제 은혜가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면 곧바로 자기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추락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믿음이 충만하면 자기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집사님, 그렇게 주일을 잘 지키고 정직하게 사니까 행복해집니까? 아멘, 그런데 왜 그래야지 됩니까?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믿음이 없거든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은혜 받아. 그렇게 계속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되는가 하면 참다운 지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그럴 때 그 빛은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인생이 혼돈 가운데 혼란 가운데 정신없이 있는 사람에게 가서 그 고통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당신이 진리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지 이것을 찬찬히 풀어서 가르쳐주는 것은 돈 봉투 하나를 주는 것보다 그 사람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지혜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빛들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주 성공하면 자기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옆에 있는 아내도 왜 행복한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왜 그것을 믿어야 되는지 계속해서 배우면서 지혜를 계속 쌓아가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 안에서 지혜가 계속 쌓여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 사람이 진짜로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간 식을 때도 이게 견고하게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라갔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없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간이 안 좋은 사람이 술을 먹으면 큰일 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술을 멀리 하기 위해서는 항상 술이 먹기 싫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술이 간에 얼마나 나쁜지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은 먹고 싶은 마음이 변해서 너무 먹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있으면 감히 술을 마실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과 지식을 함께 잘 가지고 있을 때 이 사람이 생각과 판단, 행동이 올바름으로 가득 차서 그래서 정말 행복의 길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빛이 들어와도 그 빛이 자기에게 마지막에 미칠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거절합니다.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있어도 저것을 움켜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그것을 포기합니다. 이것을 너무나 소유하고 싶은데 이것을 소유하게 될 때 육체는 너무나 행복하지만 영혼에 미칠 파괴적인 결과를 생각하면서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절제입니다. 그런 절제 속에서 인생의 참된 지혜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VI. 결론과 적용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는지 아십니까? 인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리석어서 인간들이 영혼을 위해서는 양식을 공급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구슬 같은 것만 잔뜩 먹이고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는 탐욕으로 가득 찬 삶을 사니까 그 탐욕 때문에 영혼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애를 쓰지만 결국은 망가진 영혼과 잘못된 육체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참다운 안식과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차마 보실 수없어서 그분이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오셔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병든 우리의 육체는 고쳐주셔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양식이 필요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우리의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십니다. 영혼의 양식이 필요해서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 모든 것들을 엑기스를 모아놓은 것이 이 성경이고, 설교는 이 엑기스를 여러분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물에 타서 먹여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교회는 바로 이런 지혜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이 세상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진리를 먹고 정말 자유와 행복과 쉼을 누리는 영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소유와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73:28)
I. 들어가면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은 “소유나 존재냐” 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를 십분 동의하면서도 오늘은 한번 우리의 신앙적인 사유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한번 맨 처음 기초부터 우리들이 새롭게 생각해 나아가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의 모든 정신에 입각하여 먼저 명제를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II. 사람의 불행
인간이고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소유함으로서 인간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시간은 이제 이 명제를 성경을 따라서 논증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선 먼저 인간의 불행은 소유하고 싶은데 그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인간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첫째는 소유하고 싶은데 그것을 가지지 못할 때 인간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그 소유에서 만족을 느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고 그런데 그것을 결코 소유하지 못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때 그 즐거움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단지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할 때 그때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갖고 있어서는 안 되는 잘못된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도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설날을 맞아서 온 가족이 모여서 떡을 썰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에 있는 한 두 살쯤 된 한 어린아이가 떡을 써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참관하면서 자기도 한번 그 칼 좀 갖게 해달라고 떼를 썼는데 어른들이 그 칼을 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한사람 두 사람 밖으로 나가더니 그 아이 혼자 그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비명소리가 들려서 가보니까 그 아이가 그 칼로 손을 썰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칼에 배어서 상처로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이가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습니다. 어른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이아이가 혼자서 살금살금 기어가서 그 칼을 손에 쥐는 순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에게 그 칼은 소유하는 그 순간에는 원하는 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그 아이에게 그것은 악하게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칼로 자기 손을 베었습니다.
B. 원하는 것이지만 악한 것을 소유할 때
이처럼 우리들이 잘못된 것을 갖고 있을 때도 인간이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소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때, 또 악한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때 인간이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러면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 여기서 우리들이 인간의 참된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해지게 되는 것이고 스스로 없기 때문에 그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결론입니다.
III. 사람의 행복: 원하는 것을 소유함
그런데 문제는 이제 소유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나중 문제고 도대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부터 규정을 해야지만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을 때 인간이 행복하다는 말이 모두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
A. ‘소유하였다’는 말의 의미
1. 원할 때 사용할 수 있어야함.
우선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원하는 때에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사용이 제약을 받는다면 그러면 그것은 자신의 소유라고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조금 더 고위의 이자를 받기 위해서 어떤 금융상품에 저축을 합니다. 이자를 조금 더 주는 대신에 3년 안에는 찾을 수 없다. 6개월 안에는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제약이 붙습니다. 그러면 심지어는 20년 동안 찾지 못하는 상품도 옛날에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에 돈을 맡기면 20년 후에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줍니다. 그런데 그 대신 그 20년 동안은 전부도 찾을 수 없고 일부도 찾을 수 없고 해약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자신의 소유이기는 소유인데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해서 쓸 수 없으니까 사실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던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유산을 나누어가지고 가서 허랑방탕하게 모두 사용했습니다. 사용하는 동안에 자신의 것이었고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서 즐겁게 했지만 마지막에 빈털터리가 되어서 그래서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주려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아주 배 고른 처지가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아버지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니 그 집이 자기의 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활용할 수 없는 동안에는 자기의 집이 부자인 것이 그 사람의 곤궁함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야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가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소유할 수 있는데 뜻밖에 행운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서 찾아오게 되거나 또 빼앗기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상실할 두려움이 없어야함.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일등에 당첨이 된다면 백억을 탈수 있는 로또 복권 한 장과 십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주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로또 복권을 고른다고 하는 정신없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는 언제든지 그것을 자신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경우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워낙 이 세상에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충분한 이 세상의 재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그것을 사용하고 쓸 수 있으니 그러면 그가 원하는 것을 소유했으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들이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또 하나가 포함되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실할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릴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불안해한다면 그가 많은 것,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한국 역사에 4명의 왕 중 1명은 독살을 당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칼에 죽거나, 정변이 나서 살해를 당하거나 어째든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4명 중에 1명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간에 왕의 진지를 담당하는 수락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만들어진 모든 음식은 왕의 식탁에 오르기 직전에 그것을 검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거기에 독약을 탔는지 실험해보기 위해서 몸 바쳐서 그것을 먹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왕은 은수저를 식사를 하면서 혹시 자신의 음식에 미량의 독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식탁을 대하여야 했습니다. 왕이 아니었고 아마 왕으로서 많은 자원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사례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것인데 왕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례의 위협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자금성을 방문했습니다. 자금성에 가서 아주 깊은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그 궁궐의 비교가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것은 그 지은 건축들의 독특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닥이었는데 바닥이 이런 작은 타일이 아니라 꽤 큰 밥상 하나 될 정도의 크고 두꺼운 사각형 돌들로 질서정연하게 깔아서 그것이 큰 축구장보다 넓은 마당을 이루고 그 마당을 지나서 문을 열면 같은 마당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아직까지 나는 그게 몇 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넓이의 그런 궁궐이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며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큰 돌멩이를 들추면 바로 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바위가 나온다고 합니다. 즉 바닥을 깔 때 궁궐터를 4미터 정도를 파고 거기에다가 승용차 같은 바위를 쭉 깔고 그 위에 흙과 모래를 채워서 그 넓고 두꺼운 도저히 몇 사람이 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돌 판을 질서정연하게 놓아서 오늘날의 자금성 마당이 된 것입니다.
그 설명을 저에게 해주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뭐 때문에 힘들게 그 땅을 파고 거기에 승용차만한 바위를 집어넣은 이유가 뭡니까? 목사님이 한번 왜 그런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에 탱크가 지나갈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힘들게 공사를 했을까? 그랬더니 그 사람의 하는 이야기가 자객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객이 담장을 넘기에는 담의 높이가 너무 높습니다. 보통 앞에 있는 담장이 20미터 이상 되니까 그것을 넘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왕을 시해하기 위해서 멀리서 땅굴을 파고 이 궁궐로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눈에 띄지 않고 땅굴을 파서 궁궐 속으로까지 들어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뚫고 들어와도 머리 위에는 승용차만한 바위덩어리가 깔고 있어서 도저히 그 위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무협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도사가 제 자리에 서서 막 팽이처럼 돌고 땅을 파고 들어가서 어디로 툭 튀어나오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 자금성에는 그것이 안 통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계속 돌아봐야 머리만 터집니다. 바위가 누르고 있기 때문에, 왜 왕궁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위협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원을 누리면서 살았던 황제나 왕의 삶이 소유와는 상관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이 왕이나 황제들은 우리나라나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나 황제들이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후궁들과 같이 침소에 들었을 때 그 모든 부부생활의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한 나라의 왕이나 황제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는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침소가 있으면 그 침소 뒤편에 왕의 침소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방이 만들어져있고 그 방에 몇 명의 사람이 창틀로 그 방안에서 일어나는 정사의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도 그런 방을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부부생활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돌연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왕이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래서 중국의 역사에 보면 황제가 잠자리를 같이할 여성은 완전히 온 몸에 있는 부착된 모든 물건들을 제거하고 핀 하나 머리에 꽂지 못한 채로 완전히 나신을 비단에 싸서 사람들에 의해서 떠메어서 왕의 침소에 넣어주고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똑같은 사람들이 와서 데리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지켜보고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왕이 돌연사 할까봐 지켜봐야 하고, 또 하나는 이 여자가 겉으로는 가냘프게 보이고 아무 무기도 가진 것이 없지만 이 여자가 무예에 특출한 사람일 경우에 일격에 황제를 죽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황제가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줄을 잡아당기면 불과 한 10미터 채 안되는 거리에 숙직하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득달같이 왕의 침소에 무장한 군인들이 들어와서 왕을 건집니다. 그러니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혹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정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바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생겨나는 조치들입니다. 이런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성적인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상실할 위험이 없을 정도로 안전하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 평생을 다 쓰고 죽어도 다 쓸 수 없을 정도 그런 정도의 재산에 안전한 상태에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그가 행복의 조건을 갖춘 셈이 아닐까요? 사실 시간이 없어서 이런 의문에 대해서 제가 가치 없는 질문까지 낱낱이 대응할 시간은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 안에 혹시 그런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니 논리로서 제거하고 다음 단계로 간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이 모든 조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상실할 두려움도 없는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경우일진데 그런 것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라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상승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향해 욕망이 집중되고, 지위가 낮아서 비참하게 짓밟힐 때는 지위에 대한 욕망이 생기지만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 갖게 되면 인간의 욕망은 이런 식으로 가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해서도 욕망들이 자꾸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은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욕망에 만족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망의 시련을 통해 자극을 받아야지만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구조를 보면 우리의 기관이 어떤 것에 의해서 감각을 하게 되면 그 감각이 이 감각 세포와 기관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몸에 전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눈이 무엇인가를 흥분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이 교감신경에 연결이 되어서 그래서 그 세포 속에서 물질들이 분비가 됩니다. 그 물질들이 하나하나가 이렇게 축색돌기를 통해서 이 세포 세포마다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1의 자극으로도 흥분을 하던 사람이 그 다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자극을 주어지게 되면 1가지고는 안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2, 2가지고 안되면 그 다음에는 4, 4가지고 안되면 그 다음에 8, 8가지고 안되고 16 이런 식으로 이것을 “역치”라고 하는데 역치가 계속 상승해야지만 비로소 인간이 같은 크기에 흥분을 하게 됩니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비슷하게 한 개의 효용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먹고 싶을 때 사과 한입을 깨물었을 때 느끼는 만족도와 두 번째 한입을 깨물었을 때 느끼는 만족도가 다르게 되고 0이 되게 되면 인간이 이제 더 이상 사과 먹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경제행위와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 속에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에 만족을 위한 역치가 계속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자극들을 필요하게 되고 그런 방식으로 인간 자체 속에 계속해서 이 욕망 자체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은 그런 욕망들을 스스로 채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욕망들이 인간을 자꾸 마땅히 소유해야할 것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현혹시키기 때문에 인간이 결국은 계속해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민족 가운데 가장 풍부한 먹거리들로 스스로를 즐겁게 하던 민족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 몇을 들라면 불란서, 이태리, 중국 정도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 세 나라의 특성은 모두 추운 지방부터 따뜻한 지방까지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다양한 먹거리들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문화가 발달했고 문화적으로는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아니라 아주 피비린내 나는 독재정치가 행해지는 나라에서 이 음식문화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인데 세 나라 모두 이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중국에서 돈이 많은 부자들이 옛날에 했던 일 하나는 이제 늘 그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많이 먹는 것 중에 하나가 돼지고기인데 돼지고기를 별의별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먹고 보니까 맛이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돼지새끼를 하나 낳자마자 그 새끼를 가난한 집에 길러달라고 보냅니다. 그러면 그 갓 태어난 돼지새끼를 가난한 집에서 우리에 넣고 사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에다 넣고 그것도 첫 번째 아이를 낳은 젊은 부인에게 맡기면 그 부인이 이 돼지를 자기 젖을 먹여서 키웁니다. 그래서 그 돼지가 적당한 크기로 잡아서 한 접시 요리를 해서 처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먹는 그 고기의 맛이 돼지우리에서 자라는 그 고기의 종류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많은 식자제로 쓰던 동물 가운데 하나가 오리입니다. 이 오리를 기를 때도 아예 이렇게 마당에 펼쳐놓고 기른 것이 아니라 판자를 막아서 아주 좁은 골목을 형성하고 거기에 알에서 갓 태어난 오리새끼를 집어넣습니다. 오리가 이게 너무 좁으니까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서 못 움직이게 하고 기름진 사료를 계속 줍니다. 이 오리가 운동을 해야지만 기름은 기름대로 모이고 근육은 근육대로 발달하고 살이 찔 텐데 살이 계속 찌는데 운동을 못하니까 살 사이에 기름이 분리되지 않은 채 쭉 섞입니다. 그게 바로 소고기에서도 고급부위에 속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근육이 발달하거나 자기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신경이 지배하고 있는 기관의 고기는 쌉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기관들, 그래서 거기에는 살과 근육이 없이 살과 기름이 갈라지지 않고 함께 층층이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기가 아주 비싼 부위가 됩니다. 오리 전체가 그런 종류의 오리가 됩니다. 그러면 적당한 시기에 잡아서 그래서 한 접시 먹는 것입니다.
불란서 같은 곳은 이 요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를 요구하는 귀족과 왕족의 등살아래 요리사들이 왕궁이나 귀족의 집안에서 목매어 죽는 일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 속에 결국은 자살을 해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제 나라가 큰 나라가 되고 엄청나게 많은 부가 로마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귀족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늘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고 먹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끊임없는 먹는 것들에 대한 탐심들이 끊임없이 요리가 발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을 수 있는 위장은 한계가 있는데 새롭게 보는 요리들은 끝없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한참 먹다가 뒤뜰에 가서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하고 와서 다시 먹고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하는 것도 힘드니까 이번에는 한 젓가락씩 집어서 씹어보고는 그 국물만 빨아먹고 건더기는 뱉어버리고 또 다른 요리로 옮기면서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배에 기름밖에 더 생기겠습니까. 그러면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서 인간이 만족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소유가 무엇인가를 규정하기 전에 먼저 이 끝없이 팽창하는 인간의 욕망을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그가 무엇을 소유하든지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소유해도 결코 그는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처지로 만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 자체를 절제하지 않으면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이외에 이 세상에 지각 있는 사람이 만든 모든 사선과 철학, 그리고 지각이 있는 모든 종교에서 이렇게 가리키는 종교는 없습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모든지 네 마음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럼 너도 행복해지고 주위도 행복해질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면 그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우둔한 사람도 회심하기 전에 조차도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소유하고 활용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철든 이후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보다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비록 불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런 자명한 이치를 진리의 빛으로 충만해진 교회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지체들이 오히려 이 명백하고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추루한 욕망에 매인 그런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더 많은 자원을 공급해주셔서 신앙의 힘으로 자기를 행복해보려고 하는 무지몽매한 교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빛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시간도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홈페이지가 생겼으니까 담임목사님의 에세이를 하나 쓰시오. 내가 매일 쓰는 게 글인데 이것까지 하나? 그래도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제가 담임목사의 에세이 안에 글을 세 개를 올렸습니다. 대부분 제가 개인적으로 홀로 사유하던 내용과 사연들을 올렸는데 거기에 답변, 리플들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리플들을 보는데 착플(좋은 리플)입니다. 착플은 무슨 뜻인가 하면 착한 리플, 악플(나쁜 리플)은 악한 리플입니다. 몰랐을 것입니다. 착플들을 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중에 몇몇은 아주 철학적 사유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기뻤습니다. 야, 이제 눈에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뭔가 생각을 하려고 그러는구나.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한번 얻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진짜 이 세상에서 경쟁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종교의 힘을 빌어서 그런 자원이나 공급받으려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정말 그 자기 밖의 모든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가치가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고, 그리고 자기는 그 하나님과 자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으로 어떻게 살게 해야지 되는가. 이런 것들을 사유하는 지평 속에서 신앙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베라 릴레기온에 라고 하는 참된 철학이라는 책 속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을 하되 종교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 종교나 가지고 있으나 철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외해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어서 그래서 모든 인간이 그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며칠 전에 방송에 보니까 로또 복권이 실행된 이래로 엄청난 당첨금을 탄 사람들의 그 후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조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에 40억을 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혼자 150억을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사람만을 추적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밭이나 가꾸고 거름통이고 다니면서 농사나 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개발이 되면서 한번에 50억 100억 200억씩 이렇게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한결 같이 다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가정의 이야기는 제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진짜 밭이나 일구고 거름통을 지고 다니면서 지게나 지고 농사나 지을 때는 행복하던 가정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라에서 그 땅을 수용하고 토지보상금을 150억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땅도 다 팔아서 부자가 되었겠다. 더 이상 시골에 살 이유가 없으니까 올라갑시다. 아버지가 내가 여기서 태어나 조상 땅에서 살았는데 나는 서울에 안 간다. 자식들이 이렇게 부자가 되었는데 이 촌구석에서 고생하고 살겠는가 하니까 아버지가 너무 괴로워하다가 보상금을 써보지도 못하고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자살하니까 그 다음에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아버지가 보상금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상속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제들이 막 소송을 하고 고소를 해서 재판이 걸리고 재판이 끝나나 했더니 이번에는 부인이 안 살겠다고 데모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평안했을 가정이 그 엄청난 돈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풍지박살이 되어서 다 깨져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몇 번 실험을 해봐도 항상 똑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예 그 100억에 딱 당첨되었을 때 열린 교회에 헌금을 했으면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그런 경우가 있으면 즉시 119에 전화하듯이 교회로 전화하십시오. 그게 여러분의 행복을 보장하는 길입니다. 아멘을 해야지 됩니다. 로또 당첨된 것은 내가 십일조도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입을 올리려고 그렇게 합니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두 바친다면 생각해볼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벌써 미국에서 다 먼저 입증이 된 것입니다. 거기는 슈퍼볼이라고 있는데 거기는 우리나라보다 판이 큽니다. 돈도 많고 사람 머리수도 많으니까 그 슈퍼볼복권이 계속 당첨자가 없어서 누적이 되어서 2600억까지 올라갔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런데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 10명이 계를 조직해서 매달 50불씩 내고 몇 년을 복권을 샀습니다. 그래서 당첨이 되면 얼마가 되든지 똑같이 나눈다고 계약을 했는데 그 대박이 그 사람들에게 터졌습니다. 한사람에게 260억씩 돌아갔습니다. 10사람이 그 일을 했는데 뭘 했는가 하고 돌아보니까 다 똑같습니다. 당첨되자마자 우선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가 좋은 차를 사고, 세 번째가 큰 집을 사고, 네 번째가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여기서 중간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 이렇게 우리는 외적으로 자원을 많이 거두어서 자기 소유아래 두어서 그렇게 해서 자기로 하여금 그것들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끔 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이런 노력들만으로는 그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 글자인 라틴어로 절제라는 단어가 “후르갈리 따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열매라고 하는 영어의 fruit가 바로 여기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어도 인간의 욕망은 “네꾸비아” 즉 없는 것, 허무한 것이라고 보았고 절제는 열매가 있는 ‘후르갈리 따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무저갱과 같은 이 끝없는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그것들이 우리들이 갖지 아니하고는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만 가지고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아담에게 없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셔서 그에게 맡기셨고 사실상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동산 중안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따먹었습니다. 먹을 것이 지천에 있는데 왜 그것을 따먹었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게 더 맛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먹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던 사람 다윗의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그가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는데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살해하는 살인죄를 범합니다. 그때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내가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여 이 나라를 너에게 맡겼고 그리고 이 나라를 너에게 맡길 때 네 원수들에게 있던 많은 재산과 여자들까지도 너의 품에 다 주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부족해서 네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으면 이것도 저것도 내가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 큰 악을 행하였는가.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 한 톨도 안 되는 인간들의 욕망을 채우시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그냥 내버려둔 상태에서 자기에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만을 무한대로 모집한다고 해서 그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수 없는 자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 돈으로 살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인터넷에서 채팅을 하던 어느 남자 청년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매번 열 번 찍으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으랴. 하면서 매일 장미꽃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몇 달 만에 이 여자로부터 청첩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청첩장에 쓰여 있는데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그 관심과 그 선물을 잊을 수가 없다고, 정말 고맙다고 평생 안 잊어버리겠다고, 그런데 저는 그 장미꽃을 배달해주는 그 남자와 결혼한다고. 당신 덕분이라고,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끝이 없는 것이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가지고 살수 없는 자원들이 이 세상에서 아직은 많습니다. 진실한 사랑,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흉내 낼 수 있을까요? 저는 허리가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끔 갑니다. 그 사람이 온 몸을 치료를 해주는데 아주 금방 느껴집니다. 그 사람이 지금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지금 내 몸을 누르고 있는 것인지 마음을 담아서 누르고 있는지 느껴집니다. 전자일 경우에는 너무나 마음이 상합니다. 돈도 문제이지만 이 황금과 같은 시간을 쪼개서 여기까지 와서 치료를 받는데 이 사람이 지금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하는구나.
아직도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질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혼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상의 물질로는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자원을 모은다고 해서 그가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끊임없이 증폭되는 욕망을 인해서 그는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IV.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유
A. 창조된 것들이 아니어야함
그러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소유가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이것은 창조된 것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자기밖에 있는 모든 존재는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원래 존재하는 존재이고 나머지는 모두 원래는 존재하지 않던 ‘무’였던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 자신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이 홀로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한분이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은 자기를 뜯어서 다른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 혼자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없는 것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의 본질은 무입니다. 흙도 없는 것을 하나님이 땅이 있으라 하니까 창조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빚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후! 불어넣은 이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는 불멸하지 않지만 영혼은 불멸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밖에 창조된 모든 사물들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에 의해 무에서부터 창조된 것과 무로부터 창조되었지만 하나님 자신에게서부터 나온 이 영혼을 부여받은 것, 영혼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특별한 방법에 의해서 불멸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찢어서 나누어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원래 모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는 오직 두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 인간의 영혼입니다. 왜 이 둘만 불멸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창조된 시점이 없으시지만 영혼은 창조된 시점이 있다는 것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된 것들이 이처럼 모두 본질 자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는 이야기도 사실은 진리의 일면을 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서 눈에 보인다.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물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지금은 손에 들려서 이렇게 유용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그 다음에 썩고 그 다음에 다 낡고 그래서 점점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없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없는데서 존재로 태어나고 태어난 것들은 죽고 존재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완전성을 상실하고 변천하며 변천하는 것들은 결국은 그 변천의 과정을 통해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꽃이 이렇게 있지만 일주일 후에는 훨씬 더 무에 가깝게 돌아갑니다. 몇 백 년 후에 나타나면 흔적도 거의 없을 정도로 모두 무로 돌아갑니다. 그 존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있는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꽃이 다 시들고 나무가 다 썩어서 바람에 날려서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고 그러면서 존재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그런데 하여튼 없어집니다. 그래서 몇 백 년, 몇 천 년 후에 나오면 거의 존재가 없어집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시체가 되어서 땅속에 들어가면 7년이면 뼈만 남고 모두 없어집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성질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붙들고 소유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내가 기쁨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이 소유한 사람 안에 소유되고 있는 이것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점점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주체인 인간의 육체조차도 함께 소멸되어가는 것이니 소멸되어갈 육체가 소멸될 운명에 있는 사물을 붙들고 느끼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진짜 그것이 행복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창조된 것들은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편에서 시인은 아주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나가보니까 사람들이 너무나 하나님 없이 짐승처럼 삽니다. 저렇게 살다가 우리하나님이 가만히 안 내버려두시지. 웬걸,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는 불행한 일을 당하면서 죽을 걸, 아니 제 명을 다 누리고 죽습니다. 죽을 때는 아마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죽어갈 것이야. 아니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고 사람들이 와서 그를 애도하고 꽃상여에 싸여서 장지로 갑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번 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짐승 같은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주의 뜻을 행하며 살려고 애를 쓰는데 자기는 무엇을 하나님 앞에 대접을 받았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나이다. 아침마다 주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야단치십니다. 너 왜 그렇게 사니? 내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랬지. 네 마음에 아직까지 죄가 있는 것을 너 알고 있어. 그렇게 해서 네가 나를 경배할 수 있겠니. 하나님의 책망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때 시인이 뭐라고 낙망하는지 아십니까? 아! 막 살걸.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일시에 혼란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까리따스가 순식간에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는 정연한 이성의 질서와 충만한 믿음 안에서만 거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혼란스러운 이런 사람, 마음에 욕망이 부패함이 깃든 사람들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가게 되면 성막의 휘장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성막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막을 열고 들어가서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때 불현듯 벼락을 치는 깨달음이 쾅! 하고 그에게 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성막 뜰 세상과 성막 안에 들어온 세계가 틀린 것입니다. 고요한 성막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 느껴지는 거룩한 성막 안에 들어왔을 때 성막 뜰로 이어지는 이 세상에서 보았던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때 이 시인의 벼락 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구나. 살아있는 것이 성막 밖에서의 생활이라면 죽음이라는 성막휘장을 지나서 성소로 들어온 그 영원의 세계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처럼 이렇게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구나. 그러면서 아름다운 그릇을 땅에 탁! 내려쳐서 깨져서 박살이 나는 것처럼 성막 그 전까지 아주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성막에 들어오면서 쾅! 하고 내려치면서 박살이 나는 도자기처럼 하나님께 심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영원히 입증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거기에서 섬광과 같은 지혜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하는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 하나님, 저는 깨닫지 못함이 짐승과 같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잘 들으십시오. 종교생활을 잘 하려고 했는데 사유하는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열정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니까 갑자기 모든 질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던 이세상의 질서가 아주 가지런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B. 하나님의 소유해야함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지혜의 안목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정연한 질서가 무질서해 보이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식의 지평이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하늘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자가 내가 누구뇨. 주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영원을 향한 지평이 확 열리면서 자기가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으로 피난처로 삼고 그 하나님에 관한 지혜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사는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성실이 큼이나 신실하신 주님
1. 하나님 없는 삶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님
그러면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선 여기서 우리들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될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출발입니다. 그러니 가져도 행복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는 그가 아무리 행복하고자 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상당부분 하나님의 선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결국 무엇입니까? 창조된 것들은 소유할 수 있지만 소유해도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행복이 이 지상에서만 행복하고 죽음이라는 휘장을 걷고 나아갔을 때는 땅에 던져 파기되어버리는 토기그릇처럼 되어버리는 종류의 행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인생사는 것이 너무 고달파도 실컷 술을 마시고 즐거운 마음이 되면 저녁 시간동안 한 5-6시간 동안 인생의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밤거리를 방황하고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복을 얻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6시간 밖에 안 가는 행복을 아침에는 견딜 수 없는 두통과 숙취 속에서 눈을 떠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미친 짓이다. 어리석다. 오늘은 네가 그렇게 행복해보여도 내일 아침 술 깰 때 네가 지금 느끼는 행복이 아침에 술 깨었을 때 그 다음에 이어지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해서 일생동안 그럴 수도 없지만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은 아닙니다. 왜?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고, 또 완전한 것이 아니고, 또 불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한계인 것들을 붙들고 60년을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 영원에 들어갈 때는 그것이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질 것들이라면 사라질 소유들이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행복의 상태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원이라고 하는 끝없는 무한의 관점에서 보면 5-6시간을 행복하기 위해서 술 먹고 미친 짓을 하는 것이나 50-60년을 행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소유나 영원히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붙들고 행복해하면서 나는 보람 있다고 하면서 인생을 산 사람이나 무한대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미친 짓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예술과 학문, 하나님 없는 사상에 대한 모든 탐닉과 지식에 대한 갈구, 이 모든 것들이 갖는 유토피아적 갈망이 한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짓이나 하고 하루 저녁에 쾌락이나 즐기기 위해서 껄떡거리고 다니는 사람보다는 일평생 예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모두 흘러가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며칠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비루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상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없는 모든 것들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 모든 고상해 보이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도대체 뭘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진짜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자기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죽음이라는 문턱을 지났을 때도 통용되는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불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줄 알고 사랑해서 붙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한때 은막에 아름다운 미모로 날렸던 여배우들이 어느 순간 전 세계에 사랑받는 팬들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나중에 신문에 누가 죽었다고 조그맣게 나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젊었을 때 그 완전하던 아름다운 모습이 후에 늙어가는 모습으로 덮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러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만 그대로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변천하는 것이니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하고 그 다음에 불변하고 그 다음에 완전한 존재이면서도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소유해도 고갈되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것에 도덕적인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소유의 대상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행복의 필요 충분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선생님, 부자는 확실히 하늘이 내지요? 왜요? 그러니까 뭐 좀 벌어먹고 살려고 하면 밥은 먹는데 부자는 안 되더라고요. 하늘이 낸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저의 상사가 고위공직자가 전체의 공직자에 비해서 얼마나 비율이 작은 소수인지를 이야기하면서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래서 누구도 그 하나님의 통치를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심령 정도는 운명을 믿는 다른 형태의 신앙이지 하나님을 소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은 하나님의 힘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강제만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이 그분의 뜻에 어긋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소극적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합치되고 연합되며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행복과 만족, 누림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분을 누릴 수 있어야 그분을 진정으로 소유한 것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목표를 대상으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것만을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누린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누리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누린다고 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이 전체로서 그것을 사랑함으로 도달하려는 또 다른 상위의 목표가 없이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 즐거움이 되는 것, 이것이 누린다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다시 한번, 분리되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서 즐거움의 대상이 되며 그 누림을 통해 그것을 수단으로 또 다른 단계의 누림으로 가려는 별도의 목표가 없는 최종적인 즐거움 그게 누림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서 그런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데 우리 딸아이가 5-6살 그때쯤 될 때 집회를 많이 다니니까 전화를 해서 내가 정말 네가 보고 싶다. 나도 아빠 보고 싶어. 그리고 옵니다. 오면 막 끌어안고 뽀뽀를 합니다. 그럼 애가 얼마나 유별난지 침대에 우리 집 사람하고 누워있으면 내 품에 안겨서 자기 엄마는 두 발로 막 찹니다. 그래서 침대에 내려가서 자라고. 그리고 꽉 끌어안습니다. 아빠 보고 싶었니? 응 보고 싶었어. 그럼 한번 대답해봐, 코, 눈, 귀, 입, 이마, 턱 이중에 어떤 곳이 제일보고 싶었어? 그러면 항상 똑같이 하는 말이 전부 다. 이렇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궁극적 사랑의 대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어느 한 부분을 빼놓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격이 바로 심미에 대한 즐거움입니다. 이게 중생한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하나님 중에 어떤 것들을 삭제하고 좋아하는 것 말고 하나님 있는 그대로를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둘이서 결혼을 하는데 형제가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자매하고 결혼을 했는데 곧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갈 것 같습니다. 얼굴도 자기가 좀 더 못생긴 것 같고, 키도 작은 것 같고, 지성도 좀 떨어지는 것 같고, 여자는 지적인 품격과, 미모와, 교양과, 식욕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자기 정말 날 사랑해. 그럼 정말 날 버리지 않을 것이야. 그럼 세상 끝까지 나를 따라갈 거야? 그럼 나를 정말 좋아해. 그럼 내가 왜 그렇게 좋아? 그럴 때 내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게 대답하면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말로 해. 그런 정도면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날 좋아해. 나 없이 살수 없어. 그럼 끝까지 나를 그렇게 사랑해. 그럼 내가 왜 그렇게 좋은데. 부자잖아. 그럼 안돼. 그러면 결국은 그 사람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더 사위의 목표를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기도원에 있었습니다. 매일 밤 숲 속에 나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대부분 하늘이 흐려서 별은 볼 수 없었지만 캄캄한 밤하늘을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대부분 인간이 못 가 본 별입니다. 앞으로도 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별들이 모인 공간이 50원짜리 동전이라면 밤하늘에 여러분들이 보는 별들 중에 가장 가까이 보이는 별이 부산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별이 저렇게 구름처럼 무리를 지어서 우유 빛으로 은하수가 되어서 흘러갑니다. 한없이 무한히, 그래서 파스칼은 자신의 팡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들이 우리는 행복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주님이 그 영원한 세계 안에 계시다는 분임을 우리들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밤에 숲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제가 한때 너무너무 좋아하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게레나 라고 하는 사람이 만든 목판화였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무를 홈을 파서 십자가에 매달라신 예수님과 이마에 주름이 깊이 간 중년남자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예수님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밑에 뭉툭한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있었습니다. ‘헤르 이히빈 다인 투 비스트 마인’ 주님이시여 저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저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회상록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을 알아가게 해주십시오. 주님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온전함에 이르도록 변화되는 동안에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점점 더하여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존재의 가치는 이런 지혜를 소유하고 앞을 보지 못해서 어두워하는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리퍼블리카 국가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동굴에서 면벽을 하고 생활을 합니다. 거울도 없고 뒤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니까 자기의 그림자가 벽에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희미한 것을 보면서 그게 자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거기서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을 봅니다. 그리고 동굴에 있는 세계를 보고 자기 자신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굴 속에서는 모두 희미하게 볼 수 없었던 모든 것들 다만 희미하게 생각하고 혹은 생각할 것조차도 잊어버렸던 자기밖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실체를 그리고 그 실체를 인식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론은 그렇게 빛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보고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본 사람은 반드시 그 동굴로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외치게 됩니다. 마지막은 그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이것을 “아나바시스 카타바시스” 라고 합니다, “아나바시스”는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카타바시스”는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나바시스를 새로운 지혜의 세계를 본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세 명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습니다. 예수님,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삽시다. 산 아래 동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답도 하지 아니하시고 고통 하는 세상으로 다시 카타바시스 하십니다. 다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바로 내려온 그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가치는 바로 그런 삶을 사는데 이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눈멀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참된 것을 아닌 것을 참으로 생각하는 이 세상에 희망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세상으로 카타바시스 내려가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본 이 지혜의 아름다운 세계,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할 수 없는 것들, 참으로 사랑하지만 영원한 것과 잠시 있을 것들을 우리들이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빛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 속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입니다. 얼마나 이 삶을 잘 사는가가 그의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요?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이 세상에 사셨을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정말 인간들에게 그렇게 행복을 주고 싶으셨는데 그 행복의 길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해 주의 종을 통해 가르쳐주셨어도 사람들은 행복하고자 하는 본성적 갈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행복의 길에 이르는 참된 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소유해서는 안 될 것들을 소유한 채 행복하기를 바랐고 마땅히 소유해야지만 행복할 것인데 그 소유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번에는 진리로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진리 자신이 자기를 비워 육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종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또 영원히 그들을 지혜롭게 하실 성령님을 그들 가운데 보내시기 위해서 당신은 그 미련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셨고 죽으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
V. 결론과 적용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주셔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여 지혜롭게 되게 하시고 싶으셨던 하나님이아직도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어떤 마음이 되시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더구나 당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 안에 이런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의 지체들이 있다고 생각하실 때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소유나 이 세상의 수많은 자원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어두운 이 세상에 예수를 비추어주는 한줄기 빛으로 그리고 한줄기 어두움을 가르는 지혜의 빛으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지혜의 빛을 통해 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광명으로 보여주는 그리고 그렇게 산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고통은 있지만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참으로 인간이 됨으로 그 인간이 완전함에 도달하여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이것이 이 세상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만의 행복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끊임없이 온전함에 이르도록 변화될 때까지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더해지도록 지혜로운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인간 비참의 정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73:28)
I. 들어가면서
지난 시간에는 인생의 행복이 소유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인간이 불행한 것은 마땅히 소유해야 하는,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못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악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진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마땅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싶어 해야 하는데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과 그리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사악함 때문에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다면 가져야 할 것들을 가지지 못한 것이 인간의 불행인데 그 불행 속에 있는 사람은 모두 비참합니다. 그러면 그 인간 비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드림으로 우리들이 행복에 대한 지식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불행의 정체가 무엇이며 불행한 인간은 모두 비참한데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정말 인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II. 인간 비참의 정체: 궁핍
그러면 도대체 이 불행 속에서 경험되는 ‘인간 비참의 궁극적인 실체는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궁핍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먼저 현상적으로는 육체의 궁핍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이제 인간의 영혼의 궁핍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현상적으로 볼 때는 인간의 육체의 궁핍 때문에 불행해 보인다는 점을 논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육체도 어느 정도 궁핍으로부터 벗어나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비록 육체가 영혼과는 달리 불멸의 존재는 아니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헤어질 수 없으니 육체와 헤어진 영혼을 우리들은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육체와 영혼이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육체가 지나치게 궁핍해서 본연의 존재를 훼손하게 되면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고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A. 현상적: 육체의 궁핍
그러면 ‘인간의 육체와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한데 그 자원이 어느 정도나 필요할까?’ 하는 질문에 접하게 됩니다. 육체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원은 이렇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우선 첫째는 자연적 생존을 위한 조건입니다. 자연적 생존을 위해서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과 그리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옷, 그리고 외부의 손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복이나 그리고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식물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필요한 자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만 가지고도 인간은 충분히 자신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심리학에서도 자아의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기본적인 먹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인 욕구, 인정의 욕구 등등으로 상승해서 마지막에 인간이 가장 행복해지는 것은 자아를 실현할 때 행복해질 수 있을 때 행복해진다고 보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치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단지 자연적인 생존이 가능한 상태로 이 땅에 있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대로 하나님이 할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기여하고 창조하신 세상에 우리의 노동을 보태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적인 재능을 이 세상에 자신의 재능을 보태서 이 세상을 예술이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서 세상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문을 연구해서 그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서 창조하신 세상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농사를 짓고, 어떤 사람은 기계를 만듦으로서 그렇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각자 이제 자연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그 필요 이상의 사회 속에서의 자기실현을 위한 사회적 완성을 위한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농사를 지으라고 그러셨습니다. 땅을 주어서 농사를 지어서 ‘애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네가 농사를 지어라. 그래서 너는 너 먹을 것만 짓지 말고 좀 더 많이 지어서 너도 먹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주어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옷을 많이 만들어서 너에게 옷을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구두를 많이 만들어서 구두를 줄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악기를 만들어서 너는 못하지만 그 사람이 연주를 하고 노래를 들려주어서 너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내가 너에게 사명을 주니 이제 논밭을 가꾸어서 곡식을 잘 기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칩시다. 그럼 그의 자연적 생존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복과 그리고 먹을 것과 물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그런 사회적인 실현을 우해서는 그에게는 남에게 필요 없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쟁기도 있어야 합니다. 소도 한 마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비료도 있어야 합니다. 농사지을 때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는 농사법에 관한 책도 있어야 합니다. 등등의 많은 도구들이 필요로 해서 농사짓는 사람의 살림살이와 음악을 연주하는 살림살이가 틀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아가서 그 곡식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먹고 입고 그리고 잘 수 있는 집뿐 아니라 소 한 마리와 쟁기, 그리고 비료, 농사지식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참으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이렇게 필요해서 갖고 있는 것과 인간이 마지막 그것을 목표로 하면서 추구해야 할 것을 혼동을 일으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소를 한 마리 주셔서 소를 사용해서 잘 밭을 갈고 논을 갈아서 농사를 지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소를 잡아서 온 식구들이 모여서 한우 불고기를 해먹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생각 없이 한 것입니다. 왜 소를 잡았는가 하니까 맛있잖아. 그러면 이 사람은 농사를 어떻게 지을까요?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구로 주신 것과, 사용하라고 주신 것과, 궁극적으로 향유하도록 주신 것 사이를 혼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완성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인 완성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을 우리들이 가지고 우리 자신을 자연적으로 완성시키고 사회적으로 완성시킬 때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그런데 어디에서 오는가하면 이렇게 자기를 완성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실현하기위해서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을 그것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본연의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육체에 우리들의 자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우리들이 그렇게 자연적인 완성, 한 번 더 나아가서 사회적인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우리들이 만족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것들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되는 우리의 자아의 실현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려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많은 물질들을 통해서 그가 영혼이 궁핍해지고 고통 받고 탐욕 때문에 그의 영혼이 사악한 욕망에 빠져서 갈 길을 잃어버리는 일들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모든 사물과 자신의 질서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갖지 못하는 데 있기 때문에 결국은 더 많은 이 세상의 자원을 소유하면 자신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서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많은 관심이 육체에 필요한 이 세상의 자원을 과다하게 공급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현대 국가가 생기고 나서 아마 국민의 복리증진과 복지사회를 위해서 가장 많이 헌신하고 두각을 나타냈던 나라가 덴마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원래 매우 가난한 불모지였지만 그룬투비형제를 비롯한 많은 개척자들이 나라를 일구어서 그래서 부강한 나라가 된 현대 국가에 성공사례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이 나라 기본정신이 백성들을 잘 섬겨서 훌륭한 복지국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캐치 프레이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였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기만 하면 그때부터 정부가 책임을 지고 교육을 시키고 건강을 돌보아서 마지막에 죽으면 자기가 묻혀야 될 곳까지 나라에서 책임져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스웨덴이라고 하는 나라가 나옵니다. 그들은 이제 덴마크보다 더 완벽한 복지를 자기네 국가 속에서 실현하겠다고 캐치 프레이드를 내걸었습니다. 그야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캐치 프레이드를 사람들이 건 것인데 그것은 배속에서 천국까지, 그러니까 천당도 아마 나라에서 보내주는 모양입니다. 사실은 배속에 아이를 가질 때부터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복지를 누리게 하고 마지막에 천국이 있다면 돈으로 보내줄 수 있다면 그것도 나라가 조취해서 천국까지 가게 해주겠다고 하는 생각이니 그야말로 그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스웨덴을 소개하는 어느 이야기를 외부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특별히 그 스웨덴에 교도소를 소개하는 특집이 있었습니다. 전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사형제도는 없는 나라인데 그 교도소의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2급 호텔 수준이고 사우나는 물론이고 당구장, 탁구장, 테니스장, 심지어는 카드놀이를 하는 방까지 마련되어있고 아마 전 세계에서 죄수들이 자유롭게 데모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합니다.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게 그렇게 집단행동도 할 수 있게끔 허락이 된 나라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얼마나 행복할까? 죄송하지만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스위스라는 나라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정말 가정중심적인 나라입니다. 온 도시가 오후 7-8시가 되면 완전히 철수상태입니다. 그래서 모두 우리 시간으로 저녁 8시쯤 되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가게들이 거의 다 문을 닫고 몇몇 열어놓은 가게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관광객이나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이고 식당도 그렇게 많이 열지 않고 혹시 열은 식당에는 가족단위로 모여서 와서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 남자끼리 모여서 술을 먹는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여자끼리 모여서 차를 마신다든지 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는 참 낯선 그림이고 그저 관광객이나 하는 그런 행동일 뿐입니다. 나는 보면서 사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행복한 나라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들이 일찍 퇴근만 하면 거리를 방황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 반대입니다. 혹시 어쩌다 일이 있어서 12시쯤 사우나를 가도 남자 여자가 어쩜 그렇게 많이 누워서 그렇게 지내는지. 아니 왜 집을 놔두고 거기에 와서 누워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애들, 할머니,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모였는데 가족단위로 온 것은 아니고 친구하고 동리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밤을 지내고 있으니 참 그 나라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런데 저는 사실 한 가지만 보았습니다. 최근에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지금 그렇게 가정적인 나라 8시만 되면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는 그런 나라에 이혼율이 65% 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게 지금 스위스 정부에서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100명이 결혼하면 65명이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8시가 되기 전에 가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왜 그럴까? 아마 그때 일찍 돌아가서 싸우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육체를 위한 자원이 많아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현상적인 것일 뿐이고 육체의 궁핍은 하나의 불행의 현상적인 원인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아니라 이제 본질적으로는 영혼의 궁핍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이라고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B. 본질적: 영혼의 궁핍
저는 첫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화두를 열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뭘 먹어야지만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육체에 음식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육체가 핍절하게 되듯이 영혼도 그렇게 될 것이 아닙니까? 육체의 음식이 만약에 먹을 떡과 물이라면 영혼의 음식은 지식이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 그러면 지식이 밥이군요. 그러면 우리가 많은 지식을 섭취하면 우리의 영혼이 궁핍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겠군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인류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들이 한 시대에 모여 살던 때는 주전 5세기에서 3세기경 그 시기일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때는 특별히 철학자들의 시대였습니다. 멀리는 7-8세기경부터 철학이 시작되었지만 5세기에서 3세기가 가장 왕성하게 철학의 거인들이 출생하던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모두 이 시대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획기적인 그런 놀라운 지성의 역사를 일구어내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한 시대를 살았던 아류의 많은 철학자들은 정말 인류역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들은 바로 자신의 그 지성을 개발해서 진리를 찾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일생동안 탐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처럼 생각하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지성적인 헌신을 통해서 그들이 일구어놓은 인류지성사의 기초들은 그 이후에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간들이 수없이 철학을 연구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때에 만들어온 철학적인 기반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해석하고 그것들을 토대로 이해를 넓히고 그것들을 적용하고 그것들을 단초로 해서 또 다른 것들을 사유하면서 펼쳐간 철학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이후에 모든 인간들이 이런 근본적인 질문, 우주는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이고,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한 중요한 탐구들이 이미 3-5세기 주전 사이에 모두 끝났다고 우리는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지식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행복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 고민하고 현자라고 불렸던 사람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자살했습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자살률을 기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호르텐시우스를 지었던 그 유명한 티케르 같은 사람도 결국은 선과 악에 대한 그런 훌륭한 글들을 남겨놓고 자신은 죽음이라는 비상구를 이용해서 비겁하게 현세에서 빠져나가는 자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살이라고 하는 것을 미워하여 동물과는 달리 신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특권이라고 해석하면서 언제든지 존재의 한계를 느끼면 도망칠 수 있는 비상구를 열어놓았으니 현대에 와서는 헤르만 헷세 같은 사람들이 이런 자살에 대한 찬양론자들이 되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결국은 지식이 인간을 제대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들이 잠시 그런 지식으로 인해서 남이 못 누리는 평안을 누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이 정말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지식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인류역사이례 가장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말 과학은 뛰어나게 놀랍습니다. 얼마 전에 대덕 기술단지에 가서 제가 거기에 에너지 연구소에 근무하는 박사들과 대화를 하면서 우리 인류의 마지막 자원의 문제를 가지고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각은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우리의 에너지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석유는 고갈될 것은 뻔한데 제 삼의 에너지는 아직까지도 요원한데 인류는 생존의 가망이 있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참 획기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지금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달나라에서 발전을 해서 지구에 내려 보내는 발전계획을 50년 계획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니, 달나라에서 무슨 발전을 하고 또 발전한 것을 어떻게 지구에 보내는가 하니, 달나라에서 태양광으로 발전해서 그래서 전선 없이- 물론 전선은 매달 수 없겠지만 -거기서 새로운 방법으로 이쪽에 빛처럼 쏴서 그것을 사막에서 흡수해서 다시 에너지로 바꾸는 그런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상소설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놀랍게 발달하고 있는데 이렇게 발달하는 과학 속에서 인류가 더 행복해졌는가? 하고 물을 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중국을 보면서도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쪽 해안을 중심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면서 이미 상해는 국민소득 5천불을 넘어섰고 10년 전만 해도 5만원밖에 월급을 못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20만 원 이상 월급을 받는 소득층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그리고 어느 나라가 부럽지 않은 번영한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물질생활이 풍만해지는데 이혼율이 이쪽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물질적으로는 번영해도 그 속에서 영혼들은 점점 더 황폐해지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물질로는 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지식으로도 안 되고 그 무엇으로도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그 궁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 그렇게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자원을 공급해주실 방법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III. 행복: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궁핍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 우리에게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르지 않는 자원, 육신의 것이 필요하지만 육신의 것도 우리의 행복을 영원히 보장해줄 수 없고 지식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지만 그러나 심지어는 진리를 찾는 그런 철학적 지식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더욱이 물질문명을 이루는 이런 지식들이 그의 영혼을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영혼을 모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끊임없는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그 원천이 무엇이고 그리고 방법이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들이 영생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원래의 고유한 개념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수학적인 시간 속에서 길게 산다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영혼을 담고 있는 우리의 육체는 불멸한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A. 영생: 하나과의 교통
결국은 우리의 육체가 영혼이 아무리 훌륭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는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죽음의 기운과 함께 육체는 본래의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쇠해지는 육체의 죽음의 기운에 삼켜지는 자신의 소멸될 존재 속에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역시 제한되지 않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영생은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참으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소멸되지 않고,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고,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리고 완전한 그 원천에 잇대어서 그것들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이 소유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생의 고유한 의미는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이 영생을 적용한 의미는 이 모든 자원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영적 연결을 회복하고 그에게로 그것들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을 우리들이 영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생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서 그 영적 교통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교통함을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자신이 언제든지 활용함으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필요와 사회적 욕구를 모두 채워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서 하나님에게는 이 창조의 완성을 통해 영광을 드리고 자신은 그렇게 참으로 인간으로 존재함으로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목적이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교회의 책임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모든 성도들이 끊임없이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인생 전체의 지평 속에서 지혜자적이고 구도자적인 자세로 탐구를 하게 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교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안임을 지혜롭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성적인 헌신을 하지 아니하고 사회적인 삶을 살지 아니하면 그가 참으로 지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으로부터 사는 것이 너무나 고달파서 인생의 길로부터 도피해서 신앙의 길을 찾아간 사람들이라는 인상밖에는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인간 자신의 자원의 한계에서 오는 수많은 고통에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영생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영생에 대한 소망 또한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의 많은 눈에 그리스도인들이 우매무지한 사람들로 보이게 됩니다.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말 격조 높은 그런 지적으로 품격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들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합의를 가져오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진리의 지평 속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보고 거기에 자기를 부지런히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하는 구도자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 하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없다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이 기독교 신앙은 모든 철학자들이 찾고 싶었으나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죽어갔던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 찾고 싶어 했던 그 길이입니다. 그 많은 길 중 하나가 아니라 바로 그 길 오직 한 길입니다. 이 길을 떠나서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상의 완성이고 철학의 완성이며 종교의 백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철학을 보고 그 사상의 철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은 있으나 종교가 없고, 종교는 있으나 철학이 없는 모든 무지몽매한 사상과 그리고 어리석은 모든 인간의 종교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우리는 이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라고 말했고 그 아버지께로 다가가서 그분과 함께 연결을 맺고 그 무한한 자원에 줄 대어 사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들을 우리들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이 세상에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자에게 합당한 삶이고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만 자신의 본분을 따르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숙고하고 그 빛 아래서 살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될 때 그 사람들만 진실한 신자가 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로또복권에 몇 백억씩 당첨된 사람들이 한결 같이 불행해졌다는 이야기와 신도시 개발과 함께 토지보상금을 받은 다음에 몇 백억씩 재산이 불어난 사람들이 불행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소상하게 드렸습니다.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뭐 하러 그런 것을 사서 그런 것에 꿈을 거십니까? 바보같이,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이 당첨되어도 우리교회에는 십일조도 안 받습니다. 몰라, 또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 내면 참작할 그런 것이 있지만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로또에 당첨되어서 거금을 손에 쥐는데 안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등은 못하고 2등한 사람입니다. 3천 5백 만 원인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당첨이 되었는데 당첨되자마자 여보, 그리고 뛰어가면서 개봉동 만세! 그러지 않고 그 사람의 집이 개봉동이라서 그러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당첨이 되기 전에 장애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항상 그 생각이 꽂혀있는데 당첨이 되었는데 받는 순간에 불행한 사람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이 뜻을 세웠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이 공돈을 써야지 되겠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아내에게, 집안 식구들에게 그 장애인들이 얼마나 사회적인 돌봄을 못 받고 비참하게 살아가는지를 다 이야기했더니 가족들이 모두 공감을 했습니다. 부인이 가장 깊이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로또복권에 당첨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쓰자, 그랬더니 이 부인이 아주 흔쾌하게 동조했습니다. 그 부인하는 이야기가 만약에 그에게 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당첨된 이야기를 먼저 했으면 틀림없이 자기는 가전제품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가전제품 쓴지 벌써 10-12년씩 되어서 아주 옛날 낡은 제품들입니다. 부부가 그 돈을 가지고 장애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섬기는 과정에서 그들의 비참한 삶을 더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감사를 모르고 살았던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이 당첨되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당첨되고 나서 부부사이가 더 화목해지고 자신의 삶의 처지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B. 이중의 공급
1. 생명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정말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물질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무엇인가 새로운 자원들이 공급되는데 행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이 바로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궁핍을 몰아내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공급을 우리들이 이중의 공급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중의 공급은 첫째는 생명의 공급입니다. 나무를 가지를 꺾어서 원 둥치에 매달아서 접붙이기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뽑아서 예수님의 몸에 접붙이십니다. 나무는 그렇게 꽂아놓은 후 오랜 세월이 흘러야지만 접붙여지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그래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생명을 정의하기를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붙어서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붙어있는 한 그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삼위 일체적 교제를 통해서 그 생명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이 생명으로부터는 영원히 끊어내어질 수 없도록 우리가 예수에 접붙여져있습니다. 이 생명의 공급을 통해서 우리들이 영생을 누리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불행을 가져다주는 궁극적인 궁핍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지상과 하늘의 자원
그러나 이런 생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만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우리들이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 이상의 자원을 공급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자원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자원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육체의 자원과 또 하나는 영원의 자원입니다. 즉 지상의 자원과 천상의 자원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을 때는 그냥 우리가 움직이면서 애써서 그래서 재산을 모으고 물질들을 수집해서 그래서 그것을 유일한 자원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 완성과 사회적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그 자연적 완성과 사회적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이 세상의 자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우리의 소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들이니 사실은 내게 필요하다기보다는 나를 이 세상에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살려주신 하나님 자신에게 더 필요한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영생을 누리게 되면 우리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공급해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이런 육신에 필요한 자연, 지상의 자원의 부족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강화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훈련시켜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완성도를 더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물질이나 기회들을 그 자체가 주님의 뜻인 것처럼 사랑하고 거기에 안주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실 것이고 또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 상태를 만족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혼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기회로 삼으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악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원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 우리의 인생의 관심사가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에 자연적 완성, 사회적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면서 살고 안주시면 안주시는 대로 영혼에 훈련의 기회로 삼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만족함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아가면 그러면 충분한 것입니다. 사실 영생의 요체는 오히려 이 육체보다도 영혼에 필요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는데 그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 접붙여져 생명만 누리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풍성한 하늘의 자원을 부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으로 살도록 만들어주시고 창조의 삶에 부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약에 한 과수원을 농사짓는 과수원지기로 우리를 불렀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1년 동안 사과농장을 만들어놓고 그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이제 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서 그것을 따다가 추수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칩시다. 그런데 왜 그런지 농사가 잘 안되어서 온 과수원 넓은 밭에 사과가 맺히기는 맺혔는데 열매를 못 먹는 나무가 대부분이고 맺은 나무도 그 사과에 크기가 작은 정도밖에 맺히지 않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열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올해 농사 망쳤어. 나무가 다 못 쓰게 되었어, 사과나무가 다 죽어버렸어. 그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쓸모없는 열매가 매단 것은 사실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접붙여있어도 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손 마른, 마른 손처럼 마비를 일으키고 간신히 붙어있는 살코기처럼 이렇게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참된 의미에서는 정말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았다고 하는 것은 몸에 일부가 되어서 활발하게 움직여서 그래서 몸 전체의 목적, 머리 안에 있는 몸의 계획을 완수하는데 억압과 매임이 없이 이바지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지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생명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온 몸에 상처가 나고 높은데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도 이상하게 깁스를 하고 약을 바르면 며칠 지나면 멀쩡하게 새살이 돋고 뼈가 붙어서 살아납니다. 이런 놀라운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인 은혜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어려운 가운데 신학을 공부하시는데 그 부인이 내조하시는 가운데 어려운 살림을 도우시느라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시는 가운데 청소를 하기 위해 사용한 약품으로 인해 몸에 이상이 생겨 몸에 있는 피를 모두 뽑아내고 새로운 피로 공급하면서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생겨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그로 인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럼으로 애들은 굽어진 엄마의 성품을 보면서 영향을 받고 또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 불행해지는 것이 공식이라는 내용)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맺힌 것을 풀어야지 영혼이 삽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공식입니다. 그 사모님은 다 쏟아놓고 나중에 큰 소리를 지르고 그러다가 나중에 안 되면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울어버립니다. 그 집에 딸이 하나 있는데 아직 어려서 그때 18-9세 된 그런 나인데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쥐어뜯고 그러고 있으면 조금 있다가 다가가서 엄마를 꼭 끌어안고 엄마, 힘들지.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지켜줄게. 그리고는 눈물을 다 씻기고 그러고 안아주다가 엄마 착하지. 이럴 때는 목욕하는 게 제일 좋거든, 그러면서 욕조에다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아놓고 엄마를 데려다 옷을 벗기고 욕조에다 넣고 목욕을 정성껏 해줍니다.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니까 혈액순환이 되면서 피곤이 풀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엄마를 깨끗이 씻겨서 그래서 잠옷을 입혀서 침실로 모시고 갑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엄마, 너무 고단해서 그래. 신경 쓰는 게 많아서 그래. 내가 엄마 재워줄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무릎에다 베고 재워줄게. 그리고 엄마를 눕혀서 두들겨주면서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 육신적으로는 나를 낳아서 엄마가 내 엄마지만 영적으로는 내가 엄마잖아. 자장자장, 한숨 자요. 엄마. 괜찮아질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 그리고 자기는 거기서 엄마가 잘 때까지 찬송을 불러줍니다. 그 사모님이 나에게 직접 간증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공식이 그게 아닌데. 여러분 그렇게 살았습니까? 뭐가 그렇게 엄마를 미워하고 원수지고 상처가 대물림 하고 본성을 망가트리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다른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줍니까?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예수 사랑 예수 사랑 내 마음속에 넘쳐 형제를 사랑해
답은 하나입니다. 하늘의 자원, 그 여자애가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나도 은혜가 떨어지고 못 된 애 같으면 그럼 뭐하나 집어던지고 이놈의 집구석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지 않겠습니까? 요즘 애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오나 봐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짜 예수를 믿고 창조의 목적을 알고 풍만한 하늘의 자원으로 이렇게 감쌌더라면 여러분들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들의 자녀,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얼마나 많이 행복해졌겠습니까? 그렇게 나는 깨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의 피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IV.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
궁핍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을 소유한 영혼이 행복해지는데 그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그럼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비참한 정체는 궁핍이고 그 궁핍은 보다 본질적으로 영혼의 궁핍인대 그 영혼의 궁핍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은 무한한 자원을 소유하는 것이구나,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그렇다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도덕적 통치를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드신 모든 것들은 목적이 있고 인간은 또한 더더욱 아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한번 보십시오. 그중에 어느 하나도 목적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고 만든 사람도 있고 만든 사람의 분명한 의도도 존재합니다. 여기에 있는 이 탁자는 설교하기위해 만들어졌고, 그리고 이 종은 울리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여러분들이 앉아있는 의자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앉아서 설교 듣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딱딱한 나무 의자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 하는 말이 설교가 너무 길어서 이 의자에 앉아서 들을 수가 없어서 그럼 설교를 줄이지 말고 의자를 바꾸자. 그래서 엉덩이가 배기지 않는 푹신한 의자를 거기에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 목적대로 지금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그 받침대는 성경을 올려놓기 위해 제작된 받침대입니다. 받침대 옆에 있는 쇠붙이는 그렇게 성경을 올려놓고 일어나서 밖에 나가려면 그 받침대가 앉아있을 때는 유용한데 통로를 통과할 때는 거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금속쇠붙이를 이용해서 그 판대기를 위로 올려서 통행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그 쇠붙이를 붙였고 여러분들이 앉아계신 그 무릎 바로 맞은편에 갈고리가 하나 걸려있는데 그것은 성경가방을 걸어놓게 하기 위해서 매단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목적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것도 영이신 당신의 모상을 따라서 그래서 창조한 인간에게 창조된 목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성적인 설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으면 그 인간이 원래 자신을 창조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지 않고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결론은 초등학교 학생도 생각이 있으면 동의할 수 없는 그런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권능을 가지고 지혜 속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가 그중에 일부가 되었다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행복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상당히 깊이 고려되어야지만 된다는 그런 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태어나도록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는데 그 목적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냥 행복하려고만 애를 쓰는데 이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행동이고 결코 그렇게 해서 인간은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지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직장에 취직하면 마당을 쓸고 있는 청소부나 수위 아저씨의 성격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 안 갖고 더군다나 그 사람의 인생관 같은 것을 연구하는 어리석은 회사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좋은 기업에 취업한 사람들은 들어가기 전서부터 그 회사를 창립하고 그 그룹에 총수가 된 사람의 인간성이 어떻고 경영철학이 무엇이고 또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해서 이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가려고 하는지 경영이념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바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조직에서 잘 사는 방법이고 심지어는 출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 자기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그 주인과 코드를 맞추어야지만 그 조직에서 정말로 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게 수준 낮게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계라고 하는 그룹의 회장님이신데 그분의 경영철학이 무엇이고 결국은 하나님이 이 회사를 운영해서 어떤 것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지 나를 이 세상이라는 회사에 사원으로 태어나게 하셨는데 내 부서가 어디고, 나는 뭘 하면서 살아야지 이 회사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생각안하면 그러면 정말 행복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이 회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경영철학에는 관심을 안 갖고 끊임없이 이 회사를 갈구고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경쟁회사 사장의 철학을 가지고 거기와 내통하면서 정보를 팔아먹고 이러고 산다고 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람이겠으며 자신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중립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미국에 있는 친척의 집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버벅 거리고 찾아갔습니다. 미국은 높은 울타리가 없으니까 어느 집에 성큼 들어가서 잔디밭에 걸어가서 물어볼 요량이었는데 이층에서 창문이 열리더니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손짓 발짓을 하는데 이렇게 뚱뚱한 아줌마가 총을 들고 쏘면서 위협사격을 해서 기겁을 해서 뛰어나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생각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가능합니다. 왜 허락도안 받고 주인이 사는 사생활 주거지에 침입을 하니까 위협사격을 한 것입니다.
B. 중립은 없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대항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우리의 인생은 중립이 없고 딱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거기에 거스르면서 살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거스르면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 기뻐하십니다. 바로 이런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계획과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지만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 그렇구나.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하나님이 어디에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떠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교리에 동조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그 생명으로부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나서 그에게 자연적인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필요까지 채워서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자아목적의 실현에 이바지하면서 살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지고는 자원을 공급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연합되고 그렇게 해서 영생의 자원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사는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C. 하나님과 화목함
그럼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그 모든 자원이 자기가 필요할 때 끊임없이 흘러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나님과의 화목함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교회에 다니고 단지 입으로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면서 사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진짜 하나님을 소유해서 그래서 영혼의 궁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지 되는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1. 소극적 의미: 그릇된 욕망과 사악함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우선 소극적으로는 사악한 욕망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교회에 다녀도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면 그러면 그는 그런 영혼의 진정한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그 끊임없는 자원의 공급으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안 믿을 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연결이 끊어져서 자원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혼의 궁핍 속에서 살았고 그래서 불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장소가 교회 속으로 바뀌었다는 것 이외에 나머지는 거의 비슷합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예수의 몸에 접붙여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립니다. 선택하면 안 될 것을 선택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 삽니다. 그것을 수단으로 주었을 뿐이고 사용해야지 되는데 궁극적으로 그것을 향유하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누려야 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라고 자원을 공급해주셨는데 그 자원을 힘입어서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더 멀리 떠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공급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원이 고갈됩니다. 그 고갈된 자원 속에서 결국은 궁핍하게 되고 그 궁핍한 영혼으로 이 사람은 교회 속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2. 적극적 의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과 삶을 바침
뿐만 아닙니다. 화목하다는 말의 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과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모든 궁핍을 벗어나게 해주는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자원입니다. 그러면 그 자원이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 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또한 목적을 이루겠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럼 마치 결혼한 아내가 남편이 너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데,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하는데. 물어보니까 돈 많잖아. 그렇게 대답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하고 결혼했지만 관심사는 이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용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남편 아닌 다른데서 즐거움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정이고, 이것이 바로 더러운 타락이고, 이것이 정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의 모든 영생의 마르지 않는 자원의 근원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사용되어야 할 자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최종족적인 목적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을 가지고 뭘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그래서 그 하나님이 마지막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통해서 마지막에 하나님에게로,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마지막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경제를 사랑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로 그렇게 가기를 원하셔서 당신이 원천이신 동시에 사랑을 받으시는 마지막 목적이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바로 마지막 우리의 목적이고 원천이니까 우리가 단순히 이용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자신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계획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이나 사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마르지 않는 근원에 잇대어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이고 그 마르지 않는 근원을 활용하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때 인간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나 얼마나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영생을 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좀 복을 많이 받아야지 되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들에게 가서 빌면서 그런 길을 찾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은 그 이상의 것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요즘, 별에 대해서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훤히 다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내가 로켓이 있다면 한번 타고 저 멀리 빛나는 저 별에 날아가서 한번 거기에 서봤으면 좋겠다.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한번 그렇게 로켓을 타고 가서 그렇게 서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번쯤 안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평범한 사실인데 너무나 모르고 살았던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저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별을 연구해보니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달이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것을 빼놓고는 태양을 포함해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그 수많은 별들이 모두 불덩어리입니다. 태양도 똑같습니다. 빛의 덩어리입니다. 만약에 불에 절대 타지 않은 로켓이 있어서 그 별에 내리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 이쪽을 뚫고 들어가서 불 가운데 반대편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이 하늘에 그렇게 수십 억 개 모여서 은하를 이루고 여기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가 6천만년을 가야지만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그 은하들이 이웃집에 붙어있는 것처럼 은하단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대 그것들이 모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입니다. 수백만도 수천만도에 열을 뿜어내는 기체의 응집된 덩어리들입니다. 그렇게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그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열과 빛을 내는 그것들이 오늘 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우리 눈에는 깜빡깜빡 빛을 냅니다. 오히려 차갑게 느껴질 듯이 별빛이 비쳐집니다.
전 그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사유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겠다. 우리도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의 존재가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때 사람들 눈에는 그 별인 우리 하나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별들 가운데 하나 공기의 흐름을 따라서 깜빡이는 작은 불빛처럼 그렇게 영롱하게 보일 텐데 그런 불빛이라도 우리의 눈에 그 빛을 전달하기 까지 자신은 수백만의 불빛으로 이글거리며 타오를 때 우리의 눈에는 깜빡거리는 작은 별빛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제가 무릎을 치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보이는 별빛과 같은 단 하나의 희미한 별빛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라도 만약에 정말로 우리가 그런 별빛과 같은 아주 작은 빛이라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이글거리는 그 불꽃처럼 우리 자신이 그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타올라야지 될까?
그렇게 이글거리며 자기를 모두 바쳐서 불타올라도 아마 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빛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야. 하고 그러나 비록 이글거리는 불빛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작은 별이 길 잃은 바다위에 많은 배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듯이 우리의 인생의 존재의 가치는 바로 그런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정말 지혜로운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것을 예수 혼자 보여주셨던 그것을 오늘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 모두에게 보여주시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바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할일 많은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이유입니다. 밤늦도록 그분과 동산 안에 있고 싶은 우리를 이 슬픔이 많은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행복이 있지 그 밖에서 행복을 찾는 모든 것은 미친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정받은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도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은 주님이 허락하신 욕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지정해주신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은, 우리의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우리가 누리도록 지정된 행복이 아닌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쫒으면서 살다가 비참해지는 것은 회심하기 이전에 세상에서 있을 때 우리의 삶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절제와 조화와 그리고 균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온 우주의 한 별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을 자리를 지정해놓으시고 그 인간의 자리 안에서 또한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각자 세워준 그 개별적인 자리 안에서 거기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고 그래서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생의 연합을 이루며 거기로부터 마르지 않는 자원을 우리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우리의 필요를 따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있다가 사라지거나 갖고 싶어도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자원을 소유함으로 그 소유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서 제발 이 어두운 세상에 갈 길을 모르고 오늘도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지혜의 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별빛과 같은 존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행복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28상)
I. 들어가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인간의 비참의 궁극적인 정체가 결핍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인간이 꼭 가져야하고 또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그것은 곧 비참의 정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 이런 절대적인 궁핍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영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이 땅의 자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이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II.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
조금만 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런 지난주의 저의 결론이 어쩌면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고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온 자원이 없어도 자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A. 더 이상 욕망이 없음
이런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만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빛을 가지고도 욕망을 억제할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분별력이 있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많이 가지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이런 것만으로는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뛰어난 이성적 분별력 때문에, 때로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욕망이 증대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스스로 만족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무엇인가 끊임없는 욕망이 증대되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많이 모자라고 결핍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B. 결핍을 느끼지 못함
그러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 비참의 원인이라고 말씀드렸다면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어진 영생을 통해서 무엇인가 계속 공급되지 않아도 이것으로 내가 평안하다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논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오늘 이 사람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욕망이 무분별하게 증대되어서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덕성스러운 삶은 아마 이런 것일 것입니다. 자기를 향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인색해서 절제와 검소가 뛰어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한없이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모두 내어주는 사람이 가장 덕성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고, 반대로 가장 악덕스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매우 인색하고 무자비하며 자기 한사람만을 향해서 매우 너그럽고 그리고 풍족하게 모든 것을 사용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두 극단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결국은 이 두 극단 사이에 어디엔가 대체적으로 존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도 자기와 자기 처, 자기 자식, 가족들은 돌볼 줄 알고 그리고 가장 몹쓸 인간이라도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조차도 할 수만 있으면 상대방이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할 정도로 인색하고 자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사람을 볼 때 정말 검소합니다. 그리고 절제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대로 낭비하지 않고 아주 검소하고 절약하고 그리고 그렇게 아주 내핍에 익숙하고 더 이상 욕망이 없는 그런 절도 있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이 대부분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짠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매우 너그러우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엄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의 덕성스러운 삶을 좌우하는 것인데 그러나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도 다소 너그럽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고 인색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와 똑같이 살도록 아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욕망이 없습니다. 더 많은 재산도 필요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도 필요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아주 다른 사람과 자기를 향해서 그렇게 아주 뛰어난 절제. 그리고 아주 인색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자체가 욕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왜 그렇게 짠돌이처럼 살겠습니까? 결국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가 어떤 미래인가 하면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욕망은 없지만 그러나 사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게끔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그 물질이 썩어지고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그것들을 계속해서 쌓아두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안 때문입니다. 그러니 증대되는 욕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남아 있으니 그 사람이 진정으로 궁핍을 못 느껴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경우의 사람은 첫째 사람은 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주관적으로 볼 때는 이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더 이상의 욕망도 없고, 더 이상의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래서 욕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어떤 이유에든지 간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8-90년 초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인신매매 범이 극성을 부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도 이런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라가 자본주의가 되어가면서 이제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게 되면 인간을 존귀한 존재라고 보지 않고 물질과 연장선상에서 봅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성적욕구들이 사회적으로 생겨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공급이 있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그 수효를 조달해주는데 이런 왜곡된 방법들이 바로 인신매매 같은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제가 기억에 생생한데 85년도쯤 제가 기억이 되는데 그때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한편 보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라서 그렇게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래서 한 5년 만에 영화관에 갔는데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거기서 인신매매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납치해서 그를 굉장히 망가트려서 인신매매조직에서 그 사람을 활용하는 이야기, 어머니가 그것을 알고 그 범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그 영화가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고 받은 충격이 세상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충격을 받았는데 사실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영화가 나온 지 한 5년 후에 일어나는 사회적인 상황과 환경이 영화가 다루었던 그 충격적인 내용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실제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동네에서 들리는 소문에 싼 물건이 있다고 하면서 봉고차를 가지고 어느 회사에서 와서 물건을 보여주고 그 물건을 사고 싶다는 젊은 여자들을 몇몇을 태워서 사라졌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실종신고에 들어갔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로 그렇게 인신매매가 성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신매매에 끌려간 사람들의 공통적인 것이 아주 인신매매범들은 인신매매 범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인신매매범으로부터 산 조직은 아주 심리를 뛰어나게 꿰뚫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 사람들에게서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던 사람들을 6개월 내지 1년에 걸쳐서 잔인한 학대를 통해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존감과 모든 것들을 다 앗아가고 짓밟아서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 한 2-3년 후에 가족들이 찾아와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새로운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다 박탈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노숙자 생활을 6개월을 하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 속에 넣어도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영국 같은 곳도 가보면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청만 하면 들어가서 편안한 환경의 복지시설이 되어있는데 안 들어갑니다. 그런 속에서 생활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처리합니다.
그럼 한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폭력과 무자비한 폭행에 길들여져서 모든 소망이 다 끊어졌고 그래서 그렇게 인신매매조직에 의해서 끌려가서 그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무슨 욕망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그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이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매슬로우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인간승리를 피라미드 형태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5가지 심리적인 욕구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제일 밑에 있는 기초적인 욕구가 생리적인 욕구입니다. 먹고, 그리고 마시고,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 용변을 볼 수 있는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아주 기본적인 욕구라고 본 것입니다. 성적인 욕구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욕구인데 그 다음에 이제 그 욕구가 채워지면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겨납니다. 지금 이렇게 먹고 배변하고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살아가는 이 삶이 외부적인 환경이나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박탈당하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게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가 갖추어져서 이제는 먹고, 자고, 배변을 하고 하는 것들이 이제는 방해받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정도의 욕구가 채워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세 번째,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납니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 나도 혼자 있고 싶지 않다. 이런 사회적 욕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욕구가 생겨나서 이제 동아리들을 형성하고 동지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면 네 번째로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 욕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기는 싫고 그 속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가 꼭 거기에 있어야 하는 독특성을 인정받고 싶다고 하는 그런 자존감의 욕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충분히 채워지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최상위에 마지막 욕구를 향해 가게 되는데 그것은 다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가 참으로 되고 싶은 자기가 되고 싶고 그리고 자기가 정말 되고 싶은 일을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고 싶어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5가지 단계의 욕구는 각각 무슨 특징이 있는가 하면 아랫단계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위의 단계의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먹고 마시고 배변하고 하는 이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이렇게 안전하게 있고 싶다고 하는 욕구가 안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워낙 굶주리게 되면 목숨을 걸고 도둑질을 하고 그리고 아주 무모할 정도로 위험스러운 결과가 생겨나는데도 그것을 무릅쓰고 성적인 범죄를 하고 그리고 마실 것을 찾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위에 것이 안 생깁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기본적인 욕구에 시달리면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2, 3, 4, 5 단계에 있는 욕구는 그 사람 속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사람에게 욕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서 끼니가 간곳없고 분투하면서 씨름할 때는 우리의 소원 같은 것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본적인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런 환경들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욕구를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비유를 여러분들에게 들면 이제 명쾌하게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탕자가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허랑방탕하게 모든 물질을 다 허비하고 이제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프니까 이제 그 돼지우리를 기어 다니면서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먹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쓰였지만 반대로 거기서 그 사람이 먹을 것을 구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죽을 뻔 하다가 돼지우리에 있는 쥐엄 열매가 아주 많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컷 먹고 배가 불러서 아, 오늘은 진짜 운이 좋은 날이다. 며칠 동안 못 먹었는데 쥐엄 열매를 먹고 나니까 배가 부르고 편안하구나 하고 웃으면서 그 돼지우리 곁에서 아주 달콤한 잠에 빠졌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가 만족을 느꼈다고 칩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그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머무는 그것을 우리는 행복하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더 이상 욕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니까 그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더 이상 결핍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그의 삶이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그렇게 느껴도 객관적으로는 그 사람 이상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우리는 행복하다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이 있고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우리의 느낌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여건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정말로 우리가 객관적으로도 우리 인간은 이렇게 살수 있다고 허락된 그것을 살 때 행복한 것이고, 또 주관적으로도 내가 그것을 정말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 행복한 것이고 또 객관적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 그 어떤 생명과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있어야지만 행복하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영혼의 완전성
그러면 이제 이런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그 본질적인 요소가 결국은 우리의 외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영혼의 문제에 대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과 관계있는가 하면 영혼의 완전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우리 인간에게 창조하여 넣어주신 이 영혼이 완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육체는 영혼을 싸고 있는 잠시 있을 껍데기고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영혼이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때 영혼이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영혼이 충분한 행복을 소유할 때 그때에 인간은 행복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A. 영혼의 완전성
그럼 이 영혼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무한히 완벽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이치에서 인간의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수준에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여기에 물 컵이 있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도자기입니다. 이 컵은 완전한 컵입니다. 불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한히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컵에 찬물, 더운물 담아도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다가 아주 펄펄 끓는 시뻘건 쇳물을 여기에 부었다고 칩시다. 아마 붓자마자 이 컵은 박살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펄펄 끓는 쇳물의 온도가 보통 1250도쯤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컵이 불안전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컵은 맨 처음 도공이 만들 때부터 그런 펄펄 끊는 쇳물을 담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차가운 물이나 따뜻한 물, 인간이 호호! 불어서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뜨거운 물, 얼음을 넣어서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차가운 물을 담는 용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이 컵은 상대적인 완전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무한히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는 완전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그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이 세상에 사물들을 사랑하고, 알고, 사랑하고, 다스리기에 충분하도록 또 한쪽으로는 똑같이 창조된 다른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알고,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기에 충분하도록 하나님이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영혼을 하나님이 만드셔서 우리 인간에게 넣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런 영혼의 상태 안에서 그 영혼의 완전성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가는데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 영혼의 상태에서 육체는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멸할 육체와 그 다음에 완전한 영혼이 함께 만나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세상의 목적을 알고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며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함께 이루어가기 위한 이웃들로서 그들을 알고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었으니 영혼의 그 완전함이야말로 그런 인간 존재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자 그 죄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려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또 옆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싸움 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각자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나니까 두 사람 사이에 옛날과 같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는 그 애틋한 사랑의 고백이 사라지고 서로가 자기에게 원하지 않는 질서 중에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런 고백이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에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을 때 원망하는 말에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래로 하나님께서 다스리도록 파송한 자연과의 관계가 깨트려졌습니다.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수없이 습격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 영혼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멸하도록 창조된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래서 결국은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고 영혼은 처음에 창조될 때 완전한 그 아름다움이 깨트려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육체보다는 영혼이 행복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기 전까지는 인간의 육체가 늙지도 않고 영혼이 불멸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제 불과 5-60년 혹은 그것보다 더 짧게 길어야 7-80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지정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점점 더 인간의 육체는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삼키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하지만 20세 정도 이후부터는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서서히 삼키면서 결국은 인간의 육체가 쇠잔해져서 이 땅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육체는 그렇게 돌아가는데 영혼은 여전히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행복한 상태로 불멸하게 될지 불행한 상태로 불멸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완전성을 잃어버린 영혼인데도 어째든 불멸하게끔 되어있는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본질을 이루지만 인간이 타락하고 죄 때문에 육체가 이제 죽음의 기운에 삼키게 된 다음서부터는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본질이 거의 영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 이제 본래의 완전성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영혼의 본래의 완전함이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파괴되어 버린 상태 속에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망가진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미친 듯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잠시 몇 십 년 후에 사라질 자신의 육체를 위한 자원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 되고 오히려 영혼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 되어버렸는데 이렇게 영혼이 망가진 인간은 진짜 자기 영혼에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자원은 자기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경쟁관계에서 치열하게 싸워서 이겼다고 할지라도 진짜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은 경쟁을 통해서 남에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B. 영혼의 두 바램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죄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고 망가트려졌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도 행복해질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다시 완전하게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어주시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영생이라고 하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생명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인바 되어서 그래서 거기로부터 진액을 먹고 영혼이 완전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 안에는 두개의 바램이 있습니다. 이 두개의 바램을 잘 충족시켜줄 때 이 영혼은 완전해지게 되고 이 영혼이 완전해지게 되면 영혼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게 되고, 영혼이 행복해지게 되면 영혼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1. 목적
그러면 그 영혼 안에 있는 영혼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램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영혼이 맨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영혼을 만들어놓은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우리 존재 전체가 영혼의 바램을 따라서 살아갈 때, 이 영혼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도 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고단하게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그리고 가정주부가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밥이라도 해놓고 이제 집안을 치워놓아야 하는데 들어오니까 아이들이 완전히 초토화시켜놓고 어디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행복하지 않고 화가 나거나 심지어는 슬픈 생각까지 듭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집안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이 집안 꼴이 자기가 원하는 그 질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서 자신의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반대가 있습니다. 고단하게 들어와서 이제 마음속으로 가서 집을 치워야 하는데 정말 힘들어죽겠다. 그리고 왔는데 애들이 깨끗이 반짝반짝하게 집안 청소를 해놓고 그리고 단정한 모습으로 두 아이가 앉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뭐 꿈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놓습니다.
한때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아줌마들이 저를 참 좋아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청소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직장 다닐 때도 즐겨했습니다. 물론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실컷 뛰어놀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4학년 쯤 되었는데 야. 이제 우리 신나게 놀았으니까 착한일 하나씩 하자. 엄마 셋이서 놀러가셨습니다. 큰 집에서 아이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 한집씩 청소해주기로하자. 그러니까 애들은 왜 그런지 내 뜻에 잘 호응을 해줍니다. 그래서 이제 지휘를 해서 이것은 이렇게 치우고 해서 깨끗하게 해놓고 이집을 치운 다음에 그 옆집에 가서 깨끗이 치워놓고 그 다음에 옆에 집을 가서 치워놓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밤늦게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르지만 그 세 여자가 들어와서 아주 환상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어디에 갈 때쯤 되면 날 불러서 애들을 데리고 놀라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지금도 청소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잘 청소가 되었다고 그럴 때 너무 기쁜 것은 왜 그럴까요? 마음에 원하는 바와 그 다음에 몸밖에 일어나고 있는 바가 일치하게 되면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는 우리가 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그렇게 영혼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만들어놓으신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따라서 몸인 우리의 인간 존재가 자기가 속해있는 몸 전체가 원래 자기가 만들어져서 인간 속에 있게 된 그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될 때 영혼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행복한 것이 느껴지게 되는데 반대일 경우에는 영혼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가끔 큰 범죄를 하고 쫓기며 살던 사람들이 체포가 되었을 때 그때 고백하는 말이 이제는 속이 후련합니다. 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최근에도 77차례에 걸쳐서 부녀자를 폭행하고 돈을 빼앗고 이런 상습적인 강도, 강간범이 체포가 되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이제는 속이 후련합니다.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쫓기고 불안의 연속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어떤 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완전하게는 못살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도 선하고 착한 일을 하며 하루를 살 때는 저녁때 편안한 안식 속에서 잠이 듭니다. 그런데 몹쓸 짓을 하고 악을 행한 날은 불안 속에서 쫓기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자기는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 속에는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자기를 사용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바램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인간 존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바램이 영혼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영혼이 좋아하는 바램을 따라서 살면 이 영혼이 계속해서 행복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2. 완성
두 번째는 완성입니다. 이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완전한 상태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 완전한 상태는 아름다운 상태였습니다. 그 완전하고 아름다운 상태에서 영혼이 창조되었고 그 창조된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다 파괴되어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해주시고 거듭나게 하신 순간에 영혼이 다시 한번 완전한 모습에 가깝도록 다시 한번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모두 사람들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 없이 살아갈 때 고통스럽고 그렇게 마음 아파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깊이 회개하여 거듭나게 된 그 순간만큼은 아주 행복하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이 바로 그런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서 영혼이 가장 완전하게 아름답게 고쳐진 상태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아름다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혼 안에 있는 자기를 그렇게 완전하게 하는 상태로 데려가 달라고 하는 바램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 믿고 나서 그 후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마음에 번성하는 정욕들을 처결하지 않고 그냥 은밀하게 그런 것들을 가지면서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영혼의 회복된 완전함이 이 속에 있는 부패성으로 인해서 자꾸 파괴됩니다. 그럼 영혼이 본래에 멀리는 본래 창조되었던 완전함에서, 가깝게는 주님을 믿고 거듭났을 때에 회복하게 되었던 완전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불순종과 죄, 은혜의 부패로 말미암아 영혼의 완전함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영혼은 행복해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 3년 되었는데 하도 신문사나 잡지사, 이런데서 사진을 자꾸 달라고 그러니까 주다보니까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진을 좀 찍어놔야 되겠다. 그래서 하루 맘을 먹고 여러 장 찍었습니다. 그런데 현상을 해서 이렇게 보고 나서 며칠동안 마음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얼굴이 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실물보다 잘 나왔다고 그러니까 동의가 안 되어서 그래서 내가 몇 번을 그랬습니다. 동생들에게도, 이게 진짜 내 얼굴이 맞아. 내가 진짜 이렇게 늙었어. 이상하다. 그리고 거울을 가만히 보니까 이 사진이 진실입니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마음이 우울하고 그리고 이렇게 변하는구나. 제가 젊었을 때 로션도 안 발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자꾸 바르면 피부가 간사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일체 안 바르다가 그냥 30이 좀 넘으면서 스킨 정도, 그래서 스킨하고 로션하고 선물을 받으면 로션은 항상 남아서 버렸습니다. 스킨만 발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보니까 얼굴이 골이 패면서 죽음의 기운이 나를 삼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때 제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저는 여자들이 막 화장품을 바르고 법석 떠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그때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남자인데도 이런데, 여자들의 경우에 내가 나이가 들었는데도 이런데 젊은 사람인 경우에 환경에 의해서 자신의 얼굴의 완전성이 자꾸 상실될 때 완전성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완전성이 자꾸 상실될 때 그때 느끼는 그 심리적인 비감함이 어떨까? 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인데도,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인데도 며칠 동안 시험에 드는데 그러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이제는 설교 시간에 화장하는 것에 대해서 비아냥거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에는 좀 그랬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만나면 뭐 좀 찍어 바르라. 항상 이야기하고 그리고 가끔은 형편이 안 되면 형편이 좀 나아지면 쓰레기 같은 제품을 쓰지 말고 조금 나은 제품을 쓰라. 그래서 완전성을 유지하도록 해라.
참 신기합니다. 우리 딸이 사춘기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세수를 하지 않아도 얼굴이 아주 곱고 예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세수를 하고 거기에 뭘 많이 발라야 예뻐 보입니다. 안 보일수록 예쁘니까 그래서 10대가 뭘 바르면 치장이라고 합니다. 20대가 바르면 단장, 30대가 바르면 화장, 40대가 바르면 변장, 이게 그렇게 사람들이 표현할 정도로 얼굴의 완전성이 자꾸 상실되어갑니다. 그때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서 아, 인간이 얼마나 불안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정말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의 완전성도,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완전성도 그것이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데 하물며 이런 육체보다 보다 본질적인 영혼의 아름답고 완전한 상태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만족을 주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체중이 130킬로가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고 살았는데 그 젊은애가 하여튼 저녁 때 치킨을 한 두세 토막 먹고 배가 불러야지만 잠이 들었다고 하니 그게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130킬로 나가는 그 뚱뚱한 사람이었는데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가는 저 뚱땡이 재수 없어. 오늘 재수 옴 붙었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그 순간에 이 자매가 최초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리고 치열하게 몸 빼기 작전에 들어갔는데 아침에서 주스 한잔 마시고, 점심에 밥을 반 공기 먹고, 오후 세시에 하루 식사를 끝냈다고 합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공복으로 지내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51킬로까지 살을 뺐습니다. 그러니까 79킬로를 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재미있는데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남들 앞에 서있을 때 자신감 있게 서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살을 빼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 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 썩을 육체가 어느 정도 완전하게 회복하게 되어도 심리적으로 그런 자신감이 생겨나는데 하물며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영혼의 그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영혼의 바램을 따라서 살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생각해보십시오. 큰 풍랑이 일어나고 인생에 있어서 고난과 위기가 닥칩니다. 많은 어려움들이 옵니다. 이럴 때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라고 외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돈, 높은 지위, 아름다운 얼굴, 외모 이런 것들이 이것을 외치게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영혼 자체가 자기는 이렇게 처음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고 싶은데 그렇게 그것들을 만족시켜주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은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의 완전한 상태 안에서 하나님이 이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의 애성에 사랑을 주시고, 그의 의지에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충분한 자원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IV. 신자: 현자의 길에 들어 선 사람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의문이 생기는 것이 그러면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게 산다고 치는데 그런데 신자인데도 정말 그렇게 행복한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는가? 그럼 그 신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눈이 띄어져서 아, 그렇구나. 인간의 본질은 영혼에 있구나.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들, 영원한 것들, 불변하는 것들, 완전한 것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그 영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히 공급해주심으로 우리들이 결핍이 없는 삶을 사는구나. 이것을 안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불행해지는가? 이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신자는 이미 그런 점에서는 눈에 껍질이 벗겨져서 현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A. 지혜로울 때와 어리석을 때
그럼 현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불행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지혜로울 때와 어리석을 때가 있다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비록 현자의 길에 들어섰지만 현자의 길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이 사실상 현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치 군대에 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듯이 똑같이 현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도 그 현자의 길에 들어선 행복을 알고 현명하게 살아갈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그저 한 몇 년이나 될까요? 14살부터 시작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거기 살았으니까 한 12년 정도를 기차 길 옆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서울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두리였는데 거기에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경춘선이 지나가고, 경의선도 지나가는 그런 기차역이 있는 거기에 제가 살았습니다. 기반시설도 안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정착하다가보니까 하수구 시설도 안 되어있고 한가로운 공터 같은 곳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개딱지 같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런데 특히 여름이 되면 정말 좋은 곳이 철로 길이었습니다. 철둑위로 올라가면 그 철둑이 높은데 바람도 잘 불고 모기도 없고 그리고 우선 좌우로 확 트여서 저 아래로 동네가 보이고 편안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잘 놀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해서 다리가 끊어져도 철교는 안 무너지니까 그 철교를 처음에는 좀 무섭기는 하지만 이렇게 토닥토닥 디디면서 침목을 밟고 지나가면 수십 개의 개울도 건널 수 있었고 또 빙빙 돌아가지 않고 질러가기도 하고 하여튼 철로 길을 잘 애용하면서 살고 또 애들은 하도 놀게 없으니까 돌멩이를 세워놓고 기차가 그것을 어떻게 밟고 지나가는지 본다고 숨어서 보면 지나가면서 자갈을 깨트리면서 기차가 지나가면 박수를 치고 그것도 심심하면 유리창에 돌멩이도 던져보고 이러면서 놀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좀 큰 애들은 못을 주워서 기차위에다 침을 뱉어서 흔들리지 않게 못을 놓고 기차가 한번 지나가면 못이 납작해져서 드라이버가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좋다고 실을 꿰어서 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사고가 아주 심심치 않게 많이 납니다. 그리고 기차 길에서 사고가 나도 보상을 안 해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은 접근 자체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서 사고가 나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불구가 되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던 언제인데 한 사람이 기차 철로에서 치여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가 하면 거기서 소주를 마시고 거기서 게걸대다가 기차 지나가는 철길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아무리 잠이 들어도 기차가 소리를 지르고 오면 깨어날 텐데 워낙 곤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푹 잠이 들었는데 그 기차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사유를 해봅시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와서 기차철로 위에 꽁꽁 묶여서 이 사람이 뻔히 기차가 오는 것도 아는데도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은 그 기차에 깔려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비참은 그 시간에 어찌할 수 없이 철로에 묶여있는 그 사람에게로 기차가 달려왔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게 묶여있을 때는 그 기차가 달려왔다는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을 먹고 게걸대다가 거기 철길이 어디라고 거기 누워서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죽은 경우에는 기차가 달려온 것이 비참의 원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리석음이 비참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앞에 사람은 자기 힘으로 피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둘째 사람은 정신을 어느 정도만 차리고 지각을 가지면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차철로 위에서 술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누워서 옆에 풀숲에서 잠을 잤다든지, 집으로 내려갔다든지 하면 죽을 리가 없고 또 잠깐 졸았다고 할지라도 기차가 기적을 지르고 올 때 일어나서 피했더라면 안 죽었을 것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지식이 있는데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비참의 원인이 기차가 온 것에 문제가 아니라 그의 무분별의 어리석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게 보면 인간의 경우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기적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기적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누구이고,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고, 어디로 가는가. 이것을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전혀 안 하면 그냥 짐승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다가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상에 대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그렇게 어두운 사람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왜 그렇게 기쁨 가운데 사나? 너희들이 무슨 소망을 가졌기에 그렇게 고난 속에서도 행복해하고 이 결핍이 많고 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가?’ 하고 누가 물어보거든 무엇을 대답해야할지를 준비하면서 살라고.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하나, 하나 터득하고, 배우고, 깨닫고, 믿게 된 것은 알려고 노력하고, 알게 된 것은 또 믿으려고 노력하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B.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의미
신자의 경우에는 이미 현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나는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사람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고 이렇게 하신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진리를 아는 지식이 요긴한 이유는 많이 가르쳐주면 가르쳐줄수록 이 지식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잘 깨닫고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면 지혜가 많아서 그런 어리석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데 있어서 최고의 거침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물질이 없거나 이 세상의 환경에 비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불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인생에 있어서 참다운 행복으로 우리를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것은 지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부 안셀무스라고 하는 사람은 11세기 때의 사람인데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만약에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 가운데 최고이시며 그 이상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이 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최고이신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 이상의 존재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원래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유가 없이 만든 물질이 없듯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창조하신 세계 안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드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런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지 못하는 눈먼 인간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살게 하시려는 의도와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고 창조하실 때 목적이 있으셨다면 내가 창조된 목적과 상관있을 것이고 나를 구원하셔서 다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나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가 원하시는 쪽으로 나를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을 더 낮은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바로 이 시대에 태어난 것, 다른 나라가 아닌 이 나라에 태어난 것,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 어머니 아버지 안에서 내가 태어나게 된 것, 지금 내 형제자매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내가 다른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에 있게 된 것, 이 직업에 종사하게 된 것, 그리고 아직까지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아주 분명한 우리들이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아주 분명한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과 의도를 따라서 살아갈 때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면 인간 자신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지혜는 우리의 영혼이 진리를 붙들고 이해하는데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표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혜와 사랑이신데 이 지혜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주신 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인간의 영혼 깊이 이해하고 그것에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 진리의 영향 때문에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생겨나게 되면 그 지혜 때문에 인간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에 이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멈추고 싶은데 이해가 덜 되시는 것 같아서 하나만 더 예화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가구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이 가구를 여러분들이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가구를 하나 사놓고 마음의 소원은 이 가구를 오래도록 완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오래오래 잘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나갔다가 들어오면 가구를 닦는데 우선 깨끗한 걸레로 비누로 잘 빨아서 물을 흠뻑 묻혀 와서 그래서 열심이 문질러서 하루 동안에 묻은 때를 닦아내고 먼지를 다 털어냅니다. 그 다음날 또 하고 또 하고 그런데 왜 그런지 이 가구가 자기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매일 물걸레로 닦아주는데 이상하게 썩기 시작하고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가구에 봉사하기 전에 먼저 그 가구를 맨 처음 납품한 사람에게 설명을 들으면서 이 가구의 본질이 어떤 것이고, 성향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를 해야 합니다. 물을 바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비싼 가구는 물을 바르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구를 잘 만들어났는데 어느 날 도서관에 가보니까 이상하게 가구가 번들번들합니다. 니스 칠을 한 것처럼 번쩍번쩍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가구가 촌스러워졌나 했더니 매일 정성껏 직원들이 가구를 닦는 것입니다. 뭘 하나 보니까 거기에 광약을 계속 바릅니다. 그래서 내가 그 가구는 광약을 바르는 가구가아니라 이렇게 나무를 잘라놓은 것처럼 이렇게 광택이 나지 않는 나무, 그대로인 상태로 유지하면서 쓰는 것이 이런 가구를 만들어놓은 목적입니다. 그래서 다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광약은 너희 집에 니스 칠한 가구에 열심히 바르고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수건을 꽉 차서 가능하면 세탁기에 돌려서 물기가 거의 없게 만든 다음에 그것으로 먼지만 깨끗이 닦아내고 그 가구 위에 물기가 남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가구를 원색 그대로 오래도록 쓸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광택 난 것을 전부다 깎아냈습니다.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할 때 그 한계성이 있기에 참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 아무리 공을 들이고 사랑을 퍼부어도 행복해지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깐에는 자기를 행복하기 위해서 아주 애지중지 하는데 그것이 자기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기를 파멸시키는지 안 그러는지를 알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데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자원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통로를 여셔서 생명과 은혜의 공급이 계속 주어집니다. 특별히 은혜의 공급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면서 슬픔을 이기고 고난도 이기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없는 사람을 아끼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모든 힘과 능력이 바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이 파이프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늘의 자원이 주어집니다. 은혜라는 하늘자원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고 하는 하늘자원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 공급되는 이 통로는 그냥 기계적으로 열려있는 통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를 하나님을 향해 유지하고 있을 때 이 하늘자원이 신자에게 계속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면 그런 공급들이 끊어지게끔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현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런 통로가 주어졌으나 막혔기 때문에 사실상 자기가 정말 필요한 것을 소유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 것인데 소유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그 아버지의 아들인데 결국은 나가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아버지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똑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그 충만한 소유는 믿음과 순종, 사랑을 담보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런 공급들이 끊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가스요금을 몇 달만 안내면 끊어집니다. 도로에서 여러분 집까지 들어오는 파이프를 잘라서 집어던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살아있습니다. 스위치를 내려서 공급을 못 받게 합니다. 돈을 내면 다시 풀어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결핍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그 통로를 순종과 사랑,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열어주시지 만약에 자기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가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불순종하며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럼 그런 은혜의 자원들은 막히게 됩니다.
V. 결론과 적용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저렇게 예수를 믿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 그런데 나는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서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내 이웃이 행복한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이 지점에 걸리는 것입니다. 파이프는 다 연결되어있습니다. 요금을 안 내서 과태료가 부가되어서 끊긴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의 판단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으려고 애를 쓰면서 모든 이치가 그러한지를 이 지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씩, 둘씩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생각 없이 교회에 다니면 기독교 신앙이 여러분들을 절대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행복은 하나님이 정말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이지 돼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어거스틴의 글을 읽는데 여러분들에게 너무 적합한 거기 쓰여 있어서 제가 외워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 내가 참으로 진리를 말하노니 그러므로 만약에 그대들이 나와 생각이 같거든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만약에 그대들이 나와 함께 의심이 생긴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같이 탐구하고 만약에 나의 글을 읽고 나의 설교를 듣고 그대들이 나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되면 그대들은 돌이켜서 나에게로 돌아오고 만약에 내가 틀렸다고 생각이 된다면 나를 가르쳐 너희에게로 돌이키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이 없이 아멘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베레아사람이 그러한지 하나님, 저 말씀이 정말 그러합니까? 생각을 하고 하나씩 그래서 아주 이해되고 믿어질 때 아멘 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냥 아, 싫어요. 너무 예수 믿는 것이 복잡합니다. 그럼 그냥 그렇게 사십시오. 생각해야지 될 것도 많고 그럼요. 하나, 하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므로 그대들이 나와 생각이 같다면 나와 함께 전진하고 의심이 된다면 나와 함께 진리를 탐구하자. 내가 옳다면 그대들은 돌이켜 내게로 돌아오고 내가 그르다면 나를 돌이켜 그대들에게 돌아가게 하라. 그리하여 어찌하든지 우리 모두 진리 가운데 돌아가고 한 사랑 안에서 그 진리를 향해 걸어가자.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셔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가족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복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의 눈이 뜨여지게 되면 우리가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살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생각하십시오. 지금 오늘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많은 불행과 고통이 정말 불가항력적이고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까? 아니면 어리석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통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이런 어리석은 여러분들을 위해 일깨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지혜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 때문에 자기가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할 때 여러분들이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가지고 행복의 원천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 화목하고 그분께로부터 공급되는 끊임없는 은혜의 자원들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결핍과 고난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빛으로 가는 길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28)
I. 들어가면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되돌아보면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진리를 덜 깨닫고 하나님께 봉사도 더 많이 못했고 신앙생활도 지금처럼 이렇게 틀이 잡히지 않았었는데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진리도 많이 알고 또 하나님만 섬기는데 왜 그때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지는 못했는데 작은 깨달음으로 나를 크게 감동을 시켜서 은혜생활을 하는 때가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깨달아지는 것은 굉장히 분량이 많은 것 같은데, 그 중에 어느 것도 그 진리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행복해지고 그리고 지혜로워지고 하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세 번이나 다섯 번쯤 마칠 것 같았는데 여섯 번에 맞추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과 다음 주를 마지막으로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시리즈를 끝내겠습니다.
우리는 맨 처음 인간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누군가? 그리고 인간의 비참의 정체가 무엇이고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면서 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신자가된 사람들인데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이미 두 가지 점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행복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첫째는 그가 이 세상에서 죄인이오, 하나님 앞에 낙인이 찍힌 하나님의 원수였었는데 그 죄를 모두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이 화해해주셨다는 점에서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고, 또 하나는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발견한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예전에는 없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런 은혜의 힘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신자는 행복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고 또 이 말은 진리를 향해서는 현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II. 빛으로 가는 길: 지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이 신앙의 길에 들어서서 정말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미 이렇게 행복한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 행복을 소유하지 못할까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참된 행복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미 행복해질 수 있는 신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그 길을 걸어가면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개의 등불이 필요한데 하나는 지혜의 등불이며 또 하나는 사랑의 등불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첫 번째 등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A. 지혜의 정의
결국 신자가 정말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고 할지라도 충만하고 풍성한 지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지혜의 정의가 무엇인가?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정의를 하자면 사물을 잴 수 있는 불변하는 척도,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지혜를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살기가 좋아져서 그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만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물건을 재는 도량형들이 매우 원시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저울도 못 믿겠다고 그래서 디지털로 되어 있어서 물건을 올려놓으면 숫자가 새겨져서 그람 수까지 나오지만 옛날에는 꽤 무거운 물건도 저울추에 달아서 재었습니다. 그러니까 쟁반 같은 곳에 물건을 올려놓고 여기서 이렇게 높이 들고 기다란 막대기가 달렸으면 여기에다가 쇳덩어리 추를 올려놓아서 왔다갔다 당기면서 눈금대로 가서 이제 몇 근입니다. 하며 잽니다. 그러니까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저울추를 가지고 속입니다. 원래 이 저울추는 공인된 기관의 검사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이 저울추의 크기를 약간 작게 만든다든지 혹은 그 속에 있는 금속의 성분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든지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이제 물건을 적게 달았는데도 눈금은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도량형을 속여서 돈을 버는 사람이 많았고 이 역사는 굉장히 오래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저울추를 속이는 사람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잠언에 나옵니다.
(예화; 어릴 때 할머니께서 무슨 이유인지 땅을 파서 항아리를 묻어 거기에 쌀을 담으셨는데 두 곳의 쌀집이 있어 쌀을 사서 담았는데 그 당시 저울이 아닌 말로 쌀을 팔았는데 한곳에서 산 쌀은 항상 부족하여 이상히 여겼는데 어느 날 경찰서에 그 쌀집주인이 잡혀가 알고 보니 그 쌀을 담는 말밑에 송판을 깔아 실제의 부피를 줄여서 쌀을 팔 때마다 조금씩 덜 주는 것으로 몇 년씩 계속하며 거기서 이득을 취했다는 내용)
엿장수 마음대로 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엿을 이렇게 판에다 떡처럼 하나로 만들어 다녔습니다. 그것을 리어카에 끌고 다니면서 고무신도 가지고 오고, 양푼도 가지고 오면 그것을 이쪽서부터 이렇게 끌로 대고 가위로 탁! 치면 끊어집니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고무신 5켤레 가지고 오면 엿 한줄 줄게. 그런데 한 줄은 맞는데 두께가 문제입니다. 가져 왔는데 이 아저씨가 왠지 기분이 좋으면 폭을 넓게 잡고 두들깁니다. 그러면 한 줄인데도 꽤 두툼한 엿이 이만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뭐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박하게 잡고 두들기면 길이는 똑같은데 반밖에 안됩니다. 그게 누구에게 달렸는가 하면 모든 주권이 엿장수에게 달린 것입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라고 하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제 사물을 재는 척도가 이렇게 변한다면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여러분, 친구나 이웃들 중에 변덕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이 척도에 이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와서 저렇게 좋은 이야기를 하고 김밥을 싸고, 김밥 싼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부를 막 하면 갑자기 자아가 조그맣게 됩니다. 그래서 너 나 좀 한번 재봐. 그러면 요만한 자를 가지고 와서 1.2.3.4 아! 5이네. 정말 많다.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 다음에 그 사람 때문에 열 받는 일이 생겼어, 그러면 나 좀 한번 재봐. 이번에는 가져온 것을 잡아당기니까 이만해졌습니다. 대보니까 넌 반토막짜리야. 어제는 기분이 좋아서 자가 작아졌는데 이번에는 열 받으니까 자를 잡아당겨서 고무줄처럼 늘렸습니다. 지난번에 재보니까 5이었는데 이번에는 재보니까 반 토막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5토막이 되었을 때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잘해주고 반 토막밖에 안 될 때는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박대를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변덕스러운 사람들 중에는 깊은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주 표피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지만 사물들을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판단으로 측정하지만 도덕적인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을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나름대로의 도덕적 척도를 이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매우 작은 것인데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성이 작은 것인데 아주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굉장히 중요하지만 실제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게 다가올 때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속에 그렇게 사물의 표상에 흔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크기를 잴 수 있는 의미의 불변하는 척도가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의 삶은 결국은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이렇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결국은 행복에 이를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그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등불이기 때문에 그런 지혜가 없는 대신 불 꺼진 등을 들고 밤길을 여행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가 있어야지만 그가 그 지혜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게 될 때 그가 비로소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보면 우리의 마음을 끄는 많은 이유와 사람, 그리고 사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형의 것, 혹은 유형의 것이건 불문하고 그런 것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만날 때 이 지혜라고 하는 척도가 없으면 현상만 보고 거기에 중요성을 부여하거나 혹은 사랑하거나 탐닉하거나 하면서 자기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의 대부분 모두 이런 판단의 상실 때문에 미끄러집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의 상실입니다.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 이 총명은 가장 완전한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이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질수록 이 총명은 흐려지게 됩니다. 그런 척도가 바로 지혜입니다.
B. 지혜가 부족할 때
1. 자기 사랑
그러면 이제 이런 지혜가 부족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첫째는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이오, 행복인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에 동의가 잘 안됩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거나, 친구에게 희생적이거나, 나라를 위해서 신명을 바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형된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확장되지 않을수록 더 더러운 사람이 되고 많이 확장될수록 덜 더럽습니다. 그래서 확장되지 않고 극단적일 경우에는 민족도, 나라도, 사회도, 교회도, 가정도 없고 심지어는 자기 남편, 자식 아내, 동기간도 없고 모든 자원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이론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아주 극단적으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는 봉사합니다. 왜 그 사람이 불행해진다든지 죽어버린다든지 병에 걸리면 자기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행복을 추구하려고해도 밥을 먹어야 하니까 밥을 아내가 해줍니다. 또 아무리 자기밖에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도 자기가 다니는 직장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왜 잘리니까. 회사가 망하면 자기가 잘리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복은 무인도에 혼자 살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엮어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이 확장되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진짜 도덕적인 사람인가, 부도덕한 사람인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안쪽으로 계속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자유의지론에서 말하기를 악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공통 선에서 좁은 공통 선으로 이행하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표현에 의하면 확장된 자기 사랑에서 축소된 자기 사랑으로 이행하는 그것이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뭘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가 그것을 좋아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에 그것이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쪽 사람들은 자기 사랑의 축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이 축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축이 되어서 이것이 계속해서 파문을 그리면서 사랑의 범주가 확대되어가는 것입니다. 확대되어가면서 하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이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 나라의 씨앗입니다. 이쪽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 사랑의 깃발아래 모여서 파문을 그리면서 자기 사랑을 확대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라에는 깃발이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깃발아래 모여서 파문을 같은 방향으로 그려가는 것입니다. 같은 동심어원의 방향으로 확대되어 그려갑니다. 그러니까 이쪽은 자기 사랑이라는 게 있는데 그 놈의 자기가 누구입니까? 제 삼자가 아니라 자신입니다. 그럼 누구? 다 저마다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깃발이 하나가 아닙니다. 백만 명이 모이면 백만 명의 깃발이 모여서 파문을 그려갑니다. 부딪히겠습니까, 안 부딪히겠습니까? 부딪힙니다. 그래서 결국 거기에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나라를 세상 나라라고 부르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는 사랑의 질서의 차이입니다. 이 나라도 평화를 원하고 이 나라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실제적으로 평화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깃발이 사람마다 한 개씩입니다. 그래서 그려나가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가운데 그래서 통일된 깃발을 세우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통일된 깃발아래 사람들이 일치하게 모이는가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원하지만 여기는 평화가 없습니다. 여기는 평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이 교회에 평화가 없는 그런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데 깃발을 꽂아놓고 호박씩 까는 사람들이 거기에 모이니까 깃발을 하나라고 그래놓고 그 다음에 그 깃발아래 뭉쳐야 하는데 품속에서 또 자기 사랑의 깃발을 가지고 또 하나의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에서 펼치는 것입니다. 동심원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 모두 엎드려져서 회개합니다. 회개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 사랑의 깃발을 부러뜨려서 땅에 묻어버립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깃발로 돌아갑니다. 거기에서 형제들이 모두 모이면 한마음이 됩니다. 다시 또 동심원을 그리면서 갑니다. 아직 이해가 잘 되는 표정을 지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그래서 결국은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설교에 대해서 올렸는데 불만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뭔가 하면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깨어야 됩니까? 매일 설교를 들으면 매일 깨트려져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대답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깨트려져야 합니다. 너무 율법적이 아닙니까? 율법적이 아니라 그게 은혜적입니다. 왜 은혜적인가 하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깨트려질 때 그때 아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게 깨트려질 때 우리가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도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될 때 그때 우리가 행복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것은 아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깨트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영혼에 아름다움에 관하여 나를 깨운 하나님의 말씀을 쓴 지체가 있는데 그 마지막 소원이 하나님께서 나를 깨트리고 녹이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빚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을 읽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글을 쓴 지체는 무슨 고통심리주의자, 그런 사람입니까? 아니 바보같이 그렇게 이해가 없습니까?
저는 이렇게 제 몸에 이상이 와서 행동하기 불편하고 이런 것을 한 8년 전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겸손케 하시기 위해서 그러시는지 섭리 중에 허리가 안 좋아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고 소화도 안 되고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서부터는 먹는 것과 건강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건강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굉장히 막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 음식을 가려먹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려먹습니다. 그런데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그 브로콜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파대가리도 아니고 털 달린 채소가 아주 씹히는 맛부터 아주 혐오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한 7-8년서부터 그것을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비타민A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암을 예방하는데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난 옛날에 얘기하다가 입에서 마늘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렇게 마늘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에 대해서 강좌를 듣다가 보니까 이 마늘이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천혜의 식품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암을 예방하는 강력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마늘을 싫어하지만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순대 국입니다. 순대국 집에 가면 항상 큰 숟가락 하나 정도 주방에 요구를 하면 어떤 때는 주고 어떤 때는 안 주는데 한 숟가락이나 두 숟가락 정도 무조건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뜨거울 때 돌리면 먹을 때 목이 조금 따끔따끔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한 끼에 마늘을 한 스픈 정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마늘이 굉장히 좋습니다. 기분 나쁠 때 마늘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이 마늘같이 생긴 사람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먹을 때 늘 조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작은 닭을 바짝 튀겨서 설탕물에 한 닭 강정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가끔 가족들과 함께 마트에 가면 항상 그 집 앞에 갈 때 유혹을 느낍니다. 금방 튀겨서 묻혀주는 아삭아삭한 닭고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안 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너무너무 먹고 싶은데 안 먹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나니까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온갖 기름이 껍질에 있는데 강정에서 껍질을 벗겨내면 아무 맛이 없습니다. 그 껍질을 또 제조 처를 알 수 없는 기름에 튀긴 것입니다. 몇 달을 썼는지도 알지 못하는 기름에 튀겨서 그 다음에 지독한 설탕물에 그것을 범벅을 했으니 몸에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먹고 싶은데 꾹 참고 안 먹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합니까? 당연합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오 주님 날 이끄소서 아이같이 약하오니
두 손잡아 이끄소서 아버지 나라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아니 뭐 그렇게 사나. 그까짓 것 닭 강정 먹으면 되지, 인생이 아니 얼마나 된다고. 그럼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 대신 이러고 살면 됩니다.
우리 아들이 체중이 계속 불어나다가 작심을 하고 18킬로를 뺐습니다. 한두 달 반 만에 18킬로를 뺐는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살이 넘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 이야기를 하니까 애가 하는 말이 누나, 다이어트를 하려면 우선 Ap 용지 두 장에 칼로리를 외워야 해. 기본적입니다. 그래서 계란은 100칼로리, 그 다음에 커피는 50칼로리, 그 다음에는 원두커피는 10칼로리, 컵라면 600칼로리, 국물을 안 먹으면 400칼로리 이런 식으로 해서 다 외워야 한다고,
결국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존재의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1번, 그 다음에 2번, 3번, 4번 이렇게 자리가 매겨지는데 그 1번 자리에다가 self 자기를 갖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존재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잘 들으십시오. 희생의 질서입니다. 아랫것은 위에 것을 위해서 희생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게 본능적으로 그렇게 움직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얀 예쁜 손수건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손수건을 쓸 때는 입에 뭐가 묻으면 휴지를 닦은 다음에 그 다음에 손수건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방바닥에 커피를 엎질렀습니다. 그럼 이 손수건을 꺼내 방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닦을까요, 안 닦을까요? 안 닦습니다. 걸레로 닦지 안 닦습니다. 그런데 옷을 새로 사 입었습니다. 오늘 방금 사 입고 친구에게 폼을 잡는데 커피를 마시다가 스커트에 쏟았습니다. 그러면 이 손수건을 꺼내 닦습니까, 안 닦습니까? 왜냐하면 손수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손수건이지 이것은 그래도 정장인데. 그러니까 존재의 질서가 그 사람에게는 그 부분만 가지고 본다면 그 상황에서 본다면 제 하위 질서가 방바닥, 두 번째 질서가 손수건이고, 세 번째 질서가 새로 사 입은 스커트입니다. 그러니까 밑에 것이 위에 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뀌게 되면 침해가 오는 것입니다. 침해와 건망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열쇠를 손에 들고 어디에 있지. 그러면 건망증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그러면 침해입니다. 그러니까 판단이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최상의 질서에 있으면 하나님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하나님이 저 10번째 20번째 될 가능성은 적고 대게 2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보고 2위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의 동심원이 충돌을 안 일으킬 때는 신앙적으로 범죄를 안 합니다. 불순종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제 충돌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보고 희생하라고 합니다. 이 질서를 따라서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서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되는데 그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사랑을 하셔도 그 사랑을 못 느낍니다. 왜 못 느끼는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핵심만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하자면 그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Intention 의도입니다. 의도의 방향이 다르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게임이나 놀이에 빠져있고 청소년으로 방종에 빠져있는 애들이 부모가 아무리 애들을 사랑해주어도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부모와 관계를 맺는데 그런 쪽으로 의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의 방향이 틀립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사랑해주어도 그 아이는 자기 의도가 사랑하는 부모에게 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못 느낍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만약에 이런 식으로 자기 사랑의 욕망을 강력하게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사랑을 하셔도 그 사랑의 의도와 방향이 틀리기 때문에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결국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지혜가 부족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진짜로 그런 식으로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자기를 정당하게 미워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회할 때 느끼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참회 속에서 결국은 자기혐오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 자기 사랑을 못 박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동심원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모자라면 그런 판단을 못합니다. 그래서 의미를 모릅니다. 잘살게 되면 잘살게 된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왜 척도가 사라지거나 변형된 척도이기 때문에 척도를 갖다댔는데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아!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영혼을 팔고도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을 위해서 신앙을 파는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이상한 척도가 들어오면 영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쥐뿔도 헌신을 하지 않고 육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다 헌신을 합니다. 영혼이 망가져서 몸매가 흐트러진 것은 생각을 안 하고 계속 배만 만지면서 날씬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러고 적성에도 안 맞는 다이어트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척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 허탄함에 헌신함
뿐만 아닙니다. 여기서 지나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허탄한 것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탄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치가 없는 그 일에 거기에 몸과 마음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은 낭비가 되는 것이고 없는 것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거기에 신명을 바치게 되니까 그 삶은 결국은 악을 향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사치
사치나 허영, 사치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 위에 헛된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이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무절제한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면서 인간이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물질이 필요한데 그것이 아니라 전자를 후자를 위해서 사용해야 될 것으로 이게 존재의 위치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헌신하면서 그것을 소유하고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더 자기를 소진합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런 사치는 항상 탐욕과 결탁되어 있어서 이것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만이 빠지게 되는 위험이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쥐뿔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치합니까?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사치하는가, 사치하지 않는가는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영혼을 가진 인간이 행복의 길로 걸어갈 때는 실제의 삶이 사치하는가 안 사치하는가보다 더 중요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마음의 경향입니다. 그 마음과 영혼의 미치는 영향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에 넘치는 호사스러운 식탁을 받으면서도 영혼의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조강한 밥상을 받으면서도 영혼의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다 화려한 식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 속에 음식을 탐하는 욕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사스러운 식탁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쏟아야겠다는 의도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영화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해야겠다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그런 호사스러운 식탁을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영혼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쥐뿔도 없습니다. 그런데 비록 라면 하나에 계란 하나를 넣어서 먹는 가난한 식탁이지만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영혼에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기를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그 살아온 덕성스러움은 얼마나 소박한 식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그 욕망에 절제에 의해서 가늠되어져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치하고자 하는 분수를 모르는 마음의 작용, 이것은 실제로 물질이 있고 없고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헌신합니다. 영혼의 에너지를 거기에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 영혼이 존재하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몸이 존재합니다. 몸을 움직이기보다도 살게 하기 위해서 영혼이 존재합니다. 영혼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육체가 영혼의 성향대로 살아갑니다. 또 하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육체는 그런 지복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완전한 지복의 비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관상하며 행복해질 수 있게 되는데 그 관상하는 주체가 육체가 아닌 영혼입니다. 그래서 함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b. 절망
그런데 또 어떤 것들에 빠지게 되는가 하면 예를 들자면 절망입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질서가 다르게 변화될 수 있으리라고 하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려서 자기가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 그것이 절망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자기 사랑의 산물이 아닙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인데 그래도 그것이 옳은 것이면 자기가 바뀌어서 그 사물의 질서에 적용함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인데 그 질서를 하나님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면 그렇게 바뀔 것이고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절망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노골적인 반역입니다. 그래서 이 절망 속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원망과 반감이 내포되어있습니다. 키에르케고아 같은 사람이 이 절망을 인간 영혼에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정의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던 것입니다.
c. 미움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움 같은 것, 내가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면 그 미움을 받는 사람도 불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뻔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이 미움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도 불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사랑하는 부모님이 누군가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수를 맺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면 여러분도 불행해집니다. 하나님도 마음 아프시고 누군가를 그렇게 치열하게 미워하면 자신의 영혼 속에서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럼 도대체 덕을 보는 것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미움으로 치달아서 그렇게 극렬하게 미워하면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고 파멸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게 마치 인간의 존재의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거기에 헌신합니다. 없는 것에 열렬히 돌진하는데 마지막에 파멸밖에 없습니다.
d. 정욕
정욕도 그렇습니다. 출렁거리는 정욕들이 결국 마지막에 뭘 이루고 싶어 하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쏟아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럼 사물의 질서들이 아주 악하게 되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정욕은 그것을 쏟아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 하자는 것입니까? 헛된 것인데 자기 사랑에 빠지니까 이렇게 미친 듯이 감정에 요동이 일어나면서 이렇게 올바르고 영원한 길을 찾아서 걸어가는 진정한 현자의 구도의 발걸음들을 이탈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데 거기 그렇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결국은 척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혜라는 척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욕망이 내키는 대로 인간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 참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III. 지혜를 소유하는 길
그러면 결국은 그렇다면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분명히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A. 두 지혜
1. 원천적 지혜
그럼 도대체 이런 사물을 재는 척도를 소유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들이 두 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원천적인 지혜이고, 하나는 파생적인 지혜입니다. 원천적인 지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이고 지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원천적인 지혜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이 실존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존재가 실제로 활동하고 움직이고 선택하는 이것은 하나님 부여하신 범위 안에서 인간 자신이 그렇게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혜가 인간 안에도 있어야지만 그가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지혜가 바로 파생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 자체이십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 사랑으로서 그 지혜를 이 세상에 펼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해서 여기에 있는 모든 만물과 존재하는 삼라만상, 그리고 그것들이 아무렇게나 움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그의 작정을 따라서 움직이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지혜로 사랑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자기 존재 밖에서 구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지혜 자체이시지만 인간이 그 지혜를 바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지혜 자체이신데 이런 지혜를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인간 속에 또 주십니다. 그래서 그 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완전성과 크기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동질의 지혜입니다.
2. 파생적 지혜
그러니까 지혜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지혜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가 있는 것 같은데 창조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 지혜를 잘 이해를 못한다면 헛된 지혜입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사실은 참된 지혜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원천적인 지혜,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파생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은 이웃의 참된 행복에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웃의 참된 행복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창조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그 사람이 존재하는 중요도가 각기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존재의 품격이나 중요도에 있어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기본적인 존엄성은 양보될 수 없는 것이지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그런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을 지위, 학교 어디에 나왔나. 그 다음에 얼굴이 예쁜가, 안 예쁜가. 직장이 좋은가. 나쁜가. 그것도 다 만족이 안 되면 젊은가 늙은가. 이런 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따로 정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도 그러하고 그런데 이것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평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평가는 어떤 것인가 하면 그 사람에게 만약에 존재의 중요성에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지혜의 여부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런 지혜가 탁월하게 아주 많으면 이웃의 참 행복에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러니까 몇 달 전에도 설명을 했지만 도자기 굽는 사람, 나라 지키는 사람, 그 다음에 장사하는 사람. 그럴 때는 도자기 굽는 사람에게는 도자기를 잘 굽는 것이 덕이고,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덕이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이익을 많이 올리는 것이 덕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한달에 백만 원을 주면서도 아까워서 벌벌 떨면서 이놈, 언제 안나가나. 끝까지 안나간다고 그러면 관둬, 어떤 사람은 십억 이십억을 일년에 주면서도 그것도 모자라서 더 원하면 더 주겠다고 하니 그게 무슨 얼굴 순서입니까? 그게 아니라 중요도를 이야기합니다.
B. 지혜와 진리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중요성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 지혜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무엇에 대한 답인가 하면 무엇 하면, 무엇 하면이라는 관용사를 다 떼어버리고 나면 군인도, 도자기 굽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다 관용사를 떼어내면 공통적인 것이 나옵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면 도자기 굽는 사람의 덕은 도자기를 잘 굽는 것인데, 싸움하는 사람은 이기는 것인데 이게 다인데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빼버리고 그럼 공통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덕이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 사랑의 깃발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모호해집니다. 그러니까 철학이 깊이 들어가면 미신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답을 무엇이 주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이 주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 인간을 그런 존재라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정의하고 그 자리를 지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런 지혜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달해주시는데 어떻게 전달해주시는가 여기에 이제 지혜와 진리의 문제가 나옵니다.
지금은 굉장히 잘 살게 되어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되어있는데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애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는데 왜간장에다가 참기름 넣고 비비는 것, 그 왜간장이 오늘 우리들이 대부분 조선간장인데 안 먹고 들큰한 왜간장을 먹습니다. 그게 그렇게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간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밥에다가 그 간장을 넣고 마가린을 넣고 비비면 애들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장이 지금은 병에 담아서 나오는데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런 것이 없고 신앙촌이라고 하는 곳에서 간장을 나무통에 담아서 팔았습니다. 꽤 통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통을 자전거나 리어카 뒤에 실고 아저씨가 간장사려! 하며 다닙니다. 아침이나 저녁 어스름할 때 동네를 돕니다. 그러면 그 간장을 살 사람이 각자 용기를 들고 골목으로 집합합니다. 그럼 돈 달라고 하는 대로 주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데 아니! 그럼 뚜껑을 열어서 바가지 같은 것으로 퍼서 이렇게 담아준다든지, 여기 장치가 있어서 꼭지를 틀면 나온다든지 그러면 되는데 이 아저씨는 꼭 그 뚜껑을 열고 고무호수가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새카만 호수를 항상 입으로 쭉 빨아서 병에다 담아주고, 그릇에다 담아주고 하는데 아줌마들은 그 간장 장수 아저씨가 뽀뽀한 그 간장을 좋다고 가져가서 좋다고 밥을 비벼먹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간장 원통에서 이런 데로 간장을 옮겨 담을 때 호수가 필요했듯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지혜를 우리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호수가 필요했습니다. 그 전달되는 호수가 무엇인가 하면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지혜를 사랑으로서 밖에 펼쳐내시니까 이 온 우주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 지혜안에서 그 모든 우주 만물들을 운행하시고 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뜻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인간 속에다가 하나님이 단번에 넣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맨 처음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지혜를 주셨지만 그 처음 창조된 인간이 그 다음서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계속 배워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배워갈 때는 진리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 속에도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지혜를 함께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입니다. 지성을 구성하는 지식 자체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지혜로 가득 찬 존재이신데, 무한한 존재이신데 그것을 인간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인간이 지혜를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지혜가 발달해도 아무리 명상을 많이 하고 고도의 수련을 거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를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보여주시는데 그 지혜를 어떤 식으로 전달해주시는가 하면 진리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는 이 세상에 어디나 다 있습니다. 쓰레기통에도 진리는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음식물이 썩는다. 그 사실도 진리입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이 되면 썩는다. 물론 자연적인 진리이지만, 모든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을 가지고 그 원천적인 지혜를 받아서 파생적인 놀라운 지혜를 소유하고 행복에 길로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존재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진리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런 진리들이 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도 있고 도덕의 질서 속에서도 인간의 본성 속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 모든 질서를 엑기스처럼 다 모아서 둔 곳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지혜로운 길로 갈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원천적인 지혜를 우리 속에 심으시는 도구가 되는 진리의 내용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지금이야 깨끗하고 편안하게 잘 준비되어서 나오지만 옛날에는 미역 같은 것을 먹으면 큰 것을 부엌에 걸어놓고 그리고 가위로 자르거나 부러트려서 미역국을 끓여먹었습니다. 식구들이 10명이 넘는데 엄마가 미역을 자르는 것을 보니까 요만큼 자릅니다. 뭐 그렇게 인색하게 그러시나.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을 쌀 뜬 물에 집어넣고 한참 나두고 어머니가 어디에 가셨다가 오시면 요만큼 밖에 안 넣었는데 양푼으로 하나 가득 됩니다. 이 미역이 불어서 그렇게 됩니다. 진리가 그런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아주 짧고 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렇게 적용될 때 어마어마한 지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성경말씀도 아무리 오래 설교했어도 그 진리를 모두 말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가 지혜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행복의 길로 걸어가게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그럼 이 지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한번 들어온 지혜는 영원히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가끔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런 도덕적인 모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인간을 보니까 저 인간 왜 저러고 사나,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인간이 와서 물어봅니다. 언니, 혹은 형님, 제가 이렇게 어려움이 있는데 너무 혼란스럽고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네가 지금 이런 상태에 있고 이것은 네가 옳게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방법이 틀렸고 이것은 네 생각이 잘못된 것인데 원인은 어디서 왔는가 하면 1,2,3,4 그리고 4번째 원인은 또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a, b 이런 것을 경험할 때 지성적인 혼란이 5번째 나타나는데 이런 지성적인 혼란이 이런 것이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이 빛이 막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진짜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내가 안 그럴 것인데 아! 그렇구나.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와야지 된다. 딱 불러내는 것입니다. 빛이 확 들어옵니다. 형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그때는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이미 의사 앞에 드러누운 환자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사람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빠졌던 오류에 이 사람이 빠져서 행복에 길에서 미끄러지는 일이 그 사람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럼 도대체 그 지혜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있으니까 그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옳은 길로 인도했는데 자기는 후에 빠졌으면 그 지혜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들어갔다 나갔다 합니다. 그 지혜가, 그런데 장작이 타면 재를 남기듯이 지혜가 사라질 때는 항상 새카만 숯덩이 같은 그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것은 차가운 지식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굉장히 많이 깨달았고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고 이러던 사람인데 언제 보면 도대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옛날의 그 지혜의 발자취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혜가 계속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 차가운 숯덩이 같은 것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서는 우리가 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붙들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아이를 길러보면 알지만 아이들이 올바르게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녀석보고 공부하라고 등록금을 주고 책사서 보냈더니 공부는 하지 않고 살살 나쁜 짓만 합니다. 가방을 뒤집어보니까 나체사진의 여자모습이 나오고, 저 구석에 보니까 담배도 나오고, 밤늦게 어떤 때는 술도 먹고 들어오는 것 같고, 학원 갔다 온다고 가더니 학원에 없고 PC방에서 열심히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너 왜 그랬니? 하고 물었을 때 그 아이가 나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엄마, 엄마 말을 잘 듣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 제가 변화를 경험하고 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모범생이나 이런 것은 나쁜 것이고 예전에는 공부를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생각이 바뀌어서 공부를 잘하면 참 불행한 결과가 도래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엄마, 다 아는데 그런데 싫어요. 그게 아주 정확한 답입니다. 다 아는데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 있는 지식은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한사람이 지혜를 소유한다는 이야기는 한때 지혜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추운 지방입니다. 그래서 오버 위에 코트, 코트 위에 파카, 그렇게 해서 끌어안으니까 뚱뚱보가 되어서 안아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포옹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의례적인 포옹이라면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두꺼운 옷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느껴질 수 있도록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때에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의 만족감은 증진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게 결국은 일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을 당신 자신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주심으로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 이상은 어떻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 안에 집어넣으셨습니다. 일체가 이루어집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소유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소유다.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냥 우리 등 뒤에다 표 딱지 붙이고 하나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신 그런 식의 소유가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시고 우리를 당신 속에 이끌어 들이십니다. 하나가 되게, 그런 고백을 사도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때는 자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숯덩이 같은 지식만 남겨놓고 사라져버린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지혜가 숯덩이 같은 지식을 남겨놓고 사라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그것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과 모든 것들을 판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총명의 판단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렇구나. 하나님의 지혜가 진리로 표명이 되었고 그 진리를 인간이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동질의 지혜를 완전성과 크기에 있어서는 틀리지만 동질의 지혜를 우리들이 소유하게 되는구나. 그런데 그 모든 진리의 총체로서 오신 분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 진리를 통해서 반드시 지혜로워집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어떠한 현명함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진리를 파악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게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입을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사랑을 동시에 드러내준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모든 인간들은 사람의 말과 그리고 사람의 사고 속에만 오고가는 이 평면적인 진리만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분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그 진리를 받아들여서 지혜롭게 된 인간이 살아야할 삶을 진리 자체이신 그분이 그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그 진리이신 그분을 앎으로 하나님의 원천적인 지혜에 도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지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넘어가겠습니다.
C. 지혜를 소유하는 길
1. 진리를 깨달음
그러면 그 진리들이 성경에 남아있는데 이 진리를 통해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런 지혜를 소유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 첫째는 그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진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그에게 곧바로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지혜의 원천이신 그분께로부터 그 지혜를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많이 배운다고 할지라도 이후에 지혜를 소유하는 방법들에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지성적으로 많은 것을 알기는 했지만 자신의 영혼에 참다운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식은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지혜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지식이 들어와서 이 안에서 생명의 작용을 거쳐야 우리 안에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지혜는 진리에서 비롯되었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경험된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잘 활용하고 이후로 그 진리를 통해 지혜를 얻는 방법을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아주 적은 양의 지혜밖에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많이 깨닫고 그 사람과 같이 철저하게 자기를 합치시키며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많으면 많은 지혜가 생겨납니다. 사람의 삶의 상황은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을 괴롭히는 문제가 물질의 부족의 문제였는데 잠시 후에는 물질의 풍요함이 내 인생을 괴롭히는 문제로 대두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이미 다 설명했습니다. 복권 예를 들면서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물질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데 미움이라고 하는 문제가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장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그렇게 인생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출몰하는 수많은 불행의 요인, 미끄러지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총체적인 방식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진짜 지혜 있고 그리고 이 사람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창조의 목적에 사는데 회사 다닐 때만 그렇다. 실업자가 되고 나니까 완전히 인생 막판으로 가더라. 그러면 진정으로 지혜를 소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양태에 불과하니까.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지혜일수 없습니다. 그런 지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학생이라는 생각을 일평생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최고의 관심사가 한참 성장하는 청소년들이 먹성이 좋을 때 뭘 보든지 먹을 것이 생각나듯이 영혼의 관심사가 진리여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고 싶어 하는 그 목마름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2. 진리를 사유함
두 번째는 그렇게 깨달은 진리들이 생각함, 혹은 사유를 통해서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흘러 내려와야 합니다. 아이가 언제 한번 신문에 났습니다. 남은 그런 일을 한군데서도 그렇게 되기 힘든데 이 아이는 17살밖에 안된 아이가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에 10개 대학으로부터 동시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책을 썼기에 한번 읽었는데 정말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 17살짜리의 글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 중에 하나 오늘 내용과 관련지어서 생각나는 게 무엇인가 하면 동생한테 이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쳐주면서 복습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머리통 세 개를 그렸습니다. 첫 번째 머리통에는 화살표가 막 달라붙어있습니다. 두 번째 머리통에서는 화살표가 새처럼 다 날아가는 그림입니다. 세 번째는 화살표가 이 머리통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림입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네가 책을 읽거나 선생님 강의를 듣고 아! 그것이구나. 깨달았을 때 지식이 네 두피에 다 달라붙어있는 것이란다. 그런데 그 다음날 복습을 하지 않으면 새처럼 다 날아가 버린단다. 그리고 다시 맨 머리가 된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것을 다시 복습을 하면 화살처럼 달라붙어있던 지식들이 네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저장이 되기 시작한다.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독서하는 법을 잘 안 가르쳐주는 것인데 제가 여러분들에게만 특별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물론 똑같은 이야기를 2부에서도 했습니다만 책을 오늘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읽었으면 내일은 몇 페이지부터 읽어야겠습니까? 101페이지부터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제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읽었으면 오늘은 책을 펴서 다시 1페이지서부터 100페이지까지 읽고 101페이지부터 200페이지까지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요령이 있습니다. 하루에 읽을 때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읽은 다음에 중요한 부분에 줄을 칩니다. 아니면 책장을 이렇게 접어서 그것도 시간이 없으면 표시만이라도 해놓으십시오. 그렇게 놓고 다음날 읽을 때 그 부분만 접어놓은 부분이나, 줄을 친 부분, 무슨 표시를 해놓은 부분만 빨리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며들어가게 하고 101페이지부터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페이지까지 읽고 내일 읽을 때는 그다음에 101페이지부터 200페이지까지 읽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하면 한권을 읽고 나면 시간은 조금 더 사용하였는데 책의 중요한 내용들이 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상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아! 그것이구나. 화살표처럼 진리가 머리에 달라붙어있는데 오늘 가서 다시 드라마나 보면서 흔들흔들 하면서 지내고 그 다음주 화요일 쯤 되면 새처럼 다 날아가서 맨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습을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힘들지만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펼쳐놓고 다시 공부하듯이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째는 또 깨달음이 틀립니다. 한참 1년이나 2년 혹은 10년 산 다음에 다시 돌아가면 삶의 상황이 다시 바뀌었기 때문에 또 다른 진리를 가져다줍니다. 이게 진리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입니다.
그러니까 7살짜리가 성경을 한번 읽은 것과 그 다음에 17살짜리 읽은 것과 27살 37살에 읽은 것이 틀립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진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리와 아주 친근함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 지혜는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그 사람 속에서 새롭게 솟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에 와서 설교 듣는 시간에만 진리를 생각합니다. 성경공부 하기 위해서 책을 펴놓은 시간에만 진리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 와서 예배드리고 주일을 지키는 시간에는 비교적 진리에 합치합니다. 떠나는 순간에 머리는 맨 머리로 세탁됩니다. 맨 머리로 살아가니까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이 저장하고 와서 세상에 가서 쏟아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리를 잘 이해하게 되면 성경밖에 있는 예전에는 무시했던 진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상 속에서 그런 진리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끊임없이 진리를 깨달아가는 기쁨 속에서 인간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증진이 되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그냥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시간, 그것도 은혜 받는 시간에만 달라붙다가는 새처럼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제 진리가 깊이 들어와서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되면 어디서든지 그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 됩니다. 아주 목마른 사람이 됩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전도사 때 지금은 다 시집가서 중년 부인이 되었을 자매가 그런 질문을 했는데 처음 받았습니다. 전도사님, 아주 진지하게 지난 한 주간 동안 사시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제게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저는 한번밖에 그런 질문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때는 제가 한참 은혜를 많이 받을 때니 얼마나 대화를 많이 했는지 그런 질문이 얼마나 놀라운 질문인지, 그런데 그게 무슨 교만하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로,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진리가 계속 생각이 납니다. 꽃을 보면서도,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막 생각할 때 그것 봐. 들에 핀 백합화를 봐. 그러니까 물질을 사랑하지 말거라. 알았지. 맷돌을 막 갈다가 야, 두 여자가 맷돌을 갈잖아. 그런데 한 여자는 남고 한 여자는 갔다. 종말이 그렇게 온다. 뭐가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그 수많은 비유들이 성경 놓고 줄 그어가며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분 자신이 이미 성경이셨기 때문에, 모든데서 모든 사물을 보면서 쏟아지는 수많은 진리의 빛들을 그분이 관상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계속 지혜를 재충전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관상하면서 살아가게 되니까. 그러면서 인간이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영적 성장입니다. 그게 행복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사랑함
세 번째는, 그 진리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열애에 빠진 지성입니다. 하나님과 열렬한 사랑에 사로잡힌 지성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대게 지성적인 사랑은 요리재고 저리재고 그러면 사랑에 안 빠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되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지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이고 나 자신에 대한 바램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거스틴의 글을 읽다가 보니까 아주 감명 깊은 글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모든 지혜에 이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관건이 진리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대단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그대들에게 이렇게 진리를 표명한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진리를 나와 함께 확신하면 거기서 나와 함께 전진하자. 만약에 나와 함께 의심이 된다면 나와 함께 탐구하자. 만약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전해주는 이 진리가 옳다고 생각된다면 그대들은 나에게로 돌이켜라. 만약에 내가 가는 이 길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그대들은 힘을 다해서 설득해서 나로 그대들에게 돌이키게 하라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얼굴을 구하리니 한 말씀처럼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결국은 모두 한 길로 가자. 그래서 한 사람 안에 한 빛 안에 거하자. 그래서 인류 모든 사람을 향해서 제안한 것입니다.
그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서 찢겨져나간 이단, 교회 안에 남아 있지만 찢어진 열교자들, 그 다음에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교의 생성을 가진 이교들,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과 하나님이 없다고 불신사상을 가진 모든 사람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확신한다면 전진하고 의심이 된다면 함께 탐구하고 내 말이 옳다면 그대들은 내게로 돌이키고 내가 틀렸다면 나를 설득해서 당신께로 돌이키게 해다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한 사랑 안에서 한 빛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명백하게 진리에 대한 사랑은 곧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래서 복된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4. 진리를 실천함
마지막으로 그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면서 인간이 참된 행복에 이르는 정수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세 가지는 모두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은 아닌데 물론 사랑은 삶 자체를 바치지만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굳이 말한다면 지적인 호기심만 있어도 진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깨닫지 못했다면 깨달아지고, 자기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면 책망을 받고, 자기의 삶이 올바르지 않다면 교정되고 그래서 끊임없이 그 진리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위해서는 자신이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할 때 진리를 내가 깨달았으니까 그대로 상황에 떠밀려서 살면 다행이고 못 살면 그저 유감이고 이렇게 해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마치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거기에 그 참다운 행복에 자기 존재 자체를 다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길이다. 그러면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면 피할 음식이 있고 섭취할 음식이 있는데 행하여 할 행동의 강령과 괜찮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의 위험과 모든 외모와 모든 것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고 싶을 때 먹고, 입고 싶을 때 입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다가 결국은 퍼진 몸매가 되어서 비만, 당뇨, 고혈압 이런 것에 걸려서 결국 제 명에 못 죽고 그 다음에 생활의 불편한 수많은 것들을 감수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더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 없이 네 욕심대로 살아라. 그래도 행복은 보장된다.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더더욱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어떻게 할 때 인간이 정말 행복해지는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 안셀무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분께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인간을 지으셨다면 목적과 의도가 없이 만드셨을 리가 없고 그것이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따라서 인간은 참으로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할 때 그의 자유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 하는 비결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큰 불행과 고통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변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행복의 근원을 두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 행복의 근원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행복의 길로 걸어가기 위해서 잃어버려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혹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차피 본질 자체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의 참된 원천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절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상한 길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욕망의 요구를 따라서 거기에 노예처럼 복종하면서 살아서는 행복의 길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하나님과의 놀라운 화목, 내가 어디에 있든지 환경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내가 어떠한 결핍에 있든지 모자람이 없는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은혜의 자원으로서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의 씨앗을 이 온 세상 동산에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에 맞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보시면서 기쁨을 얻으실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다. 거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을 희생시키고 누리게 되는 행복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행복입니다. 그 큰 구도 안에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노동하고, 쉬고, 잠자고, 깨어나고, 탐구하고, 반성하고, 회상하고, 기억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운동하고, 여행하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될 때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마당에 그려놓은 분필 하나의 자국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나드는 그런 자유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어떤 동물들에게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자유인으로서 이 어두운 세상을 훨훨 날아서 빛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지혜의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사랑으로 가는 길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28)
I. 들어가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열망하면서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근원부터 미궁에 빠지게 되어서 그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남겨진 가운데추론해가는 모든 인생의 이치를 가지고는 참으로 우리 인간 본질을 알 수 없고 그리고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덕이 되도록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행복을 간절히 갈망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행복이 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과 그리고 마음에 원하는 바를 따라서 사는 것을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자신을 행복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에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을 힘입지 않고는 행복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주어질 때 그 길은 빛이라고 하는 지식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 빛의 지식, 지식을 통해 획득되는 지혜의 빛을 따라서 인간이 비로소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매주일 설교를 하지만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모두 다 이해시키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유사 이래로 찾아온 그 모든 진리로 가는 참 길이며 그리고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택한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습니다. 물론 그 자부심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자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자랑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그리고 인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참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이 기독교 신앙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는데 우리가 항상 그 빛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빛은 우리에게 계속 비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빛을 사랑하며 걸어가지 않으면 그 빛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에 길에 들어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에서 미끄러질 경우에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빛으로 걷는 이 길과 함께 또한 우리는 사랑으로 걷는 이 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5시간 동안의 설교를 통해서 행복이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의미는 첫 번째로 지혜라고 하는 사물의 척도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는 출렁거리는 존재이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든 환경도 역시 출렁거리며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척도를 지성 속에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자신은 자기를 위해서 많이 애를 쓰는데 그것이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지식의 척도를 가지고 그것을 지혜라고 말한다면 그 지혜라는 척도를 사용해서 내가 느끼고 내 눈에 감각되는 것, 그것에만 의존하지 말고 그 척도를 가지고 그 만물들을 재고 평가해서 이것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치사선택하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이 비로소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행복: 하나님을 소유함
우리들이 행복을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합치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면 오늘날과 같이 인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디에 가있는가? 그것이 정말 인간에게 행복일 수 있는가하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수준 높은 신령한 삶,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지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도사적인 삶이 아닙니다. 모든 욕망을 죽이고 철저히 자기를 포기하고 깨트려서 그래서 자기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고행으로 가득 찬 길이 이 지순의 사랑의 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기도원에 올라가는데 내려오기 싫을 때가 참 많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제가삼일을 가있었는데 정말 내려오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으면 먹는 것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다 불편합니다. 그런데 좋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죄를 덜 지을 것 같습니다. 진짜로. 왜냐하면 보는 게 풀, 나무, 밤이면 달, 별 그런 것이고 사람들이 올라온다고 하지만 기도원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대게 인생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니까 대게 머리에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담요 하나 짊어지고 올라오는 데가 기도원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을 보며 특별히 무슨 유혹을 느낄 것이나, 시기심이 나거나, 경쟁심을 느끼거나 그럴 만한 사람도 없고 3천 원짜리 밥 사먹고 거기 앉아서 있다가 밥 먹고 산책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나서 성경보고 글이라도 쓰고 TV도 안되고 인터넷도 안 되고 그러니 죄를 지을 것도 없고 그저 뭐 자극해야지 죄를 짓지. 보이는 게 뭐 풀이나 나무, 별, 별을 보면 하나님이 생각나고 나무를 보면 여러분 생각이 나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독수리 5형제에게 맡길 수도 없고 누가 있습니까? 우리들은 흔히 고매한 영성, 그러면 아씨시의 프란시스 같이 그렇게 아주 청빈의 삶을 살고 자기 학대에 가까운 비물질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이 고매함을 찾지만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영성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가난을 미덕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난 속에 있을 때 인간의 영혼이 순결해진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번 잘 사유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타락하지 않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멀리 퍼졌더라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해서 이렇게 창조세계의 영광을 더 충만하게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어도 도로와 교량은 건설되었을 것이고 왜냐하면 무슨 아담과 하와가 스파이더맨처럼 날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도로와 차량, 교량도 건설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문학작품도 나왔을 것이고, 예술도 나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한가운데 들어가 있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수많은 물질들에 에워 쌓여 있으면서 그 물질들의 질서를 올바르게 잡음으로 그것을 사용해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문화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그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래서 거기에서 그 문화를 사용해서 문화를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문화를 변혁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창조의 영광들을 나타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창조의 영광을 나타나게 했을 것입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가 들어왔다는 것만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죄가 안 들어왔다면 있는 것을 사용하는 창조의 영광이 드러났지만 이제는 그 속에 있는 죄들과 싸우면서 그 물질들을 사용해서 그 물질을 바로 잡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 재능을 사용해서 음악이나 예술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지성을 사용해서 학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런 식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너무 힘들다고 나는 순결한 지순의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자꾸 물질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고, 여성을 보면 탐심이 생긴다고 다 멀리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결국 진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가, 자기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제가 신학대학에 있을 때 졸업생들이 사은회를 하는데 어느 선교 찬양 팀이 와서 찬양을 하는데 굉장히 잘합니다. 그중에 피아노를 하는 자매 하나가 나를 찾아와서 교수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기에 누구입니까? 저는 사실 교수님이 전도사님으로 있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매입니다. 그때 제가 전도사였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 자매가 알고 보니까 여러분들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 자매가 작곡한 곡도 여러 곡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원을 나오고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불러서 너 그렇게 신학교 사은회 하는 곳에 쫓아가서 그런 연주를 하고 있냐. 그러지 말고 대중가요에 진출해라. 자매가 굉장히 황당하게 생각하기에 내가 30분을 설명했습니다. 왜 너 같은 애가 대중가요를 해야지 되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한가운데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한 1년만이라도 여러분들이 휴가를 주면서 숲 속에 들어가 있으라고 그러면 내가 진짜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아무도 안 만나고 묵상하고 밤이면 별을 명상하고 그리고 책도 쓰고 그러면서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삶이 선한 삶일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마치 산 아래서 귀신들린 아이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겠습니다, 고 한 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요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물질 속에, 이런 권력 속에, 이 혼탁한 문화 속에, 이 수많은 혼란스러운 예술 속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셨지만 여러분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생을 살면서 주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사적인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아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적극적인 기쁨의 삶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어느 글을 보니까 50대가 되면 이제 여성이 폐경기가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경도가 그칩니다. 그때 얼마나 심리적인 공항의 상태가 오는가. 하는 글을 상세하게 썼습니다. 생체심리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나는 정말 그게 눈에 안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프도록 다가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가지 않았지만 젊을 때 수많은 고난의 고비를 지나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년의 강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중년의 강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 세상에서 갱년기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 강을 하나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강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답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렇게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인간들에 대해서 항상 사랑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성들은 좀 덜한데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눈이 이렇게 세모가 됩니다. 왜 세모가 되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서 눈가죽이 처지는 것입니다. 이게 심한 사람은 거죽 눈이라고 그러는데 여기 이렇게 텐트가 처집니다. 그래서 이게 안쪽으로 자꾸 쳐져서 이렇게 됩니다. 심하면 이게 눈썹이 이 속을 자꾸 찌릅니다. 그래서 염증이 됩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수술을 했습니다. 노안 수술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그렇게 작은 신체의 조건 하나에도 정신이 휘둘리고 하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것은 신앙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연적으로 흐르는 인생의 물결 속에서 자기도 작은 배에 떠있는 것 같은 연약함을 느낍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스스로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연약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해하는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주시면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도 괜찮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좀더 나은 집에서 좀더 좋은 옷을 입고 조악한 음식에서 좀 더 편안한 음식을 먹고 그것도 괜찮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지체들을 판단하지 말고 또 여유 있는 지체들은 가난한 지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진짜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여자들이 화장을 요란하게 하고 그러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었고 그랬습니다. 제가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로션도 안 바르던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다니는 자매들을 보면 가끔 그렇게 말합니다. 뭐 좀 해라. 덜 먹고서라도 미장원에 가서 고대를 하든지 파마라도 하든지 좀 보태어줄까? 좀 가리고 다녀라. 남편이 그러고 다니면 좋아하겠니. 원판도 별로 없는데. 질서를 좀 잡고, 그렇게 하면서 살라. 많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자기의 외모를 바꾸는 것 등등도 이제 많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생각을 좀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서도 항상 잃어버려야 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A. 척도를 가짐
도파민이라고 하는 물질이 사랑을 하게 되면 나와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데 존속기간이 18개월에서 20개월 정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많이 나오면 정신분열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보면 이게 그 국물 몇 방울에 의해서 인간이 휘둘리는 것처럼 인간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은 자신의 약함을 계속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약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끌어안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그러면서 늘 조심해야지 되는 것은 항상 그 척도는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물질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물질을 만지지 아니하고는 그 물질의 바른 질서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 권력을 재분비할 수 없습니다. 그 재능과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그 문화를 향해서 재편할 수 없습니다. 모두 기도원으로 도망가고 여기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창조의 목적에 거듭나도록 실려진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겠습니까? 기도원에 들어가서 결혼도 안하고 죽기만 기다리는 그런 영성, 어디에 쓰겠습니까? 오히려 이 속에 있으면서 권력을 가지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대들어서 그렇게 못하게 하고 나라도 물질의 질서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내 물질을 쏟고 이렇게 하면서 이 세상을 맑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매에게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네가 대중가요 가수가 되면 내가 전폭적으로 밀어주겠다. 내가 매일 기도해주고 후원도 하겠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복음가수로서 소명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냐고. 아니 그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데 찬송 안 부르면서 뷔페를 먹으면 무슨 상관인가 그게, 사은회인데. 자기네끼리 부르면 되지. 진짜 이런 노래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야 거기에 가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부를 수는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계신 그 세상을 찬양하고 이렇게 하면서 세상을 맑게 하는 그런 일에 종사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 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 속에 있는 위험이 무엇인가 하면 자칫하면 그런 속에서 물질의 질서를 바로 잡도록 물질 한가운데로 보냄을 받았는데 그 물질을 사랑하게 되니까 예수를 통해서 그 예수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그 아트, 예수를 올바르게 놓도록 보냄을 받았는데 그 자체가 목적처럼 사랑하고 빠지게 됩니다. 학문을 그렇게 하도록 보냄을 받았는데 학문지상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늘 있기 때문에 항상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끊임없는 감화,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이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이것들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소유하면서 살지 않으면 산으로 도망친 수도사들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 영혼이라도 건지지만 그것마저도 못 건집니다. 이게 바로 개혁주의의 영성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적인 영성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성을 가지고 잘못된 질서들을 뒤바꾸어놓는 그런 신본주의적인 변혁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지혜의 척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 하나님의 진리의 비춤을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진리의 빛이 자신에게 비추어서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B.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따름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그 진리에 합치하도록 따르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을 소유한 삶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변하지 않는 척도인 지혜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이며, 그 지혜를 전달하는 진리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사랑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핸복은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나의 삶을 합치시키며 주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III. 사랑으로 가는 길
이렇게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 길을 가야지 되는데 그래서 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맨 처음에 한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 인생에 무게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이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사랑의 연장선상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도 이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에로스의 사랑은 우리들이 흔히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이게 원래 철학에서는 이 에로스의 사랑은 그런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도 포함하지만 자신과 이웃에 덕이 되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괄적으로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그렇게 고통 하는 자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끔 만드는 자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출발은 에로스에서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 삼위 안에서 교통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만물을 사랑하시고 자기를 사랑하시고 결국은 그 사랑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이전까지 자기 인생을 움직였던 사랑의 중심축이 하나님을 향해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신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무엇인가 하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지순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하고는 다른 게 자기 사랑의 연장 에로스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이 까리따스에 의해서 통합이 됩니다. 지평융합이 됩니다. 이런 지순의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같은 자비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사랑의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것으로서는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향한 이 지순의 사랑을 불어넣어주십니다. 그때 돌아와서 다시 자기가 하던 그 예술을 발견하며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대하는 그 예술의 목적과 모든 동기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동기 목적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방식입니다. 이게 모든 사물에 다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재산, 예술, 학문, 심지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의식주의까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그 물질 가운데로 들어가고, 학문 가운데로 들어가고, 예술 가운데 들어가고 이렇게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그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관리자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교통하는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그 모든 것들의 질서를 덮고 그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속하시고 구속하신 여러분들을 산위에 두지 아니하고 어두운 이 세상 한가운데 물질 가운데 혼란스러운 문화 한가운데 여러분들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A. 진리가 책망할 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항상 같은 정도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올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사랑으로 그 길을 걷는 신자를 진리가 책망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책망 받는데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진리로 책망을 받는데, 야단을 치는데 진리가 그렇게 책망을 하는데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청소년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한 놈은 죽어라 부모 말을 안 드는 비행청소년입니다. 그래서 제 부모도 하다가, 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놈은 자기세상이라고 학교도 끊고 그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불량 가출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먹고 싶은데서 먹고, 자고 싶은데서 자고 그 다음에 폭력조직에도 가담하고 나쁜 짓도 하고 심지어는 그러다 마약에까지 손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애가 있고 또 한 애는 지극한 모범적인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구속이나 속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애는 속박 투성입니다. 아빠가 오늘도 매우 심하게 꾸지람을 학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왜 이 중요한 시기에 집중해서 학업에 열중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도록 교양을 쌓지 왜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빼앗기냐고 하면서 자꾸 탈선하려고 하는가, 그게 야단맞은 이유였습니다. 애가 그런 속박을 스스로 느끼면서 저 아이의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할 때 여러분들은 이 속박 받는다고 느끼는 이 아이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야, 너희 부모는 비인간적이야. 메뚜기도 한철인데 그러고 살아서 뭐하나. 새장을 박차고 나와라.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렇게 자유 가운데 있는 그 아이가 불행한 것이다. 그렇게 타이를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성도 한사람은 천애의 고아였습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자기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아빠가 혼내는 아이, 그래서 얻어맞은 아이를 부러워했다고, 왜냐하면 속박이 인간의 진정한 불안과 고통은 속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인간은 무한히 자유 하도록 내버려둘 때 이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진리의 책망을 받는다고 하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으신 분들이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혼율이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게 점점 높아질 것이라고 저는 전망합니다. 아마 까닥하면 이제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혼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고 이게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 안 가진 사람과 상관이 없이 퍼센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여러분 아십니까? 이게 사회심리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때만 해도 다산의 시대였습니다. 저희 집안의 형제가 4입니다. 그러니까 이 4형제가 같이 자라면서 싸우기도 수없이 하고 첫째랑 둘째랑 편먹고 셋째 왕따 시키고, 셋째랑 둘째랑 편먹고 형을 왕따 시키고 별의별 것을 다하면서 3명 이상 형제가 되면 사회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수많은 사연들이 생겨납니다. 그 속에서 타협하고 양보하고 당해보고 또 사람들을 당하게도 해보고 형이니까 네가 양보해라. 동생이니 네가 양보해야지, 야. 오빠를 학교에 보내고 너는 공장 다녀라. 여러분들은 웃지만 실제로 눈물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자라면서 꺾이는 것을 많이 연습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이 여자가 내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나도 많이 꺾이면서 살아봤기 때문에 이 여자를 도저히 꺾을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고 내가 꺾는 것이 꺾일 때 느끼는 고통이 저 여자가 꺾일 때 느끼는 고통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이 되면 내가 져주는 것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타협하고 양보하고 꺾이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자신만만함 독창성, 발상의 특이함 이런 것들은 모자랍니다. 그 대신 사회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자라나는 세대는 하나나 둘밖에 안 키웁니다. 아이가 식당에 가서 뛰어논다고 저쪽에 있는 사람이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아버지가 일어나서 그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한주먹에 날려버립니다. 괜찮아. 계속 뛰어.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라서 결혼을 합니다. 아니! 웬 여자 하나가 와서 살겠다고 그래서 허락을 했는데 이게 단칼에 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태까지 살면서 부모도 자기를 안 꺾었는데 어디서 굴러온 게 자기를 단번에 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꺾어, 우리 아버지께도 내가 안 꺾였는데, 네가 뭔데. 나하고 살려면 꺾어라. 그런데 이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내가 외동딸로 커서 진짜 해달라고 한 대로 다 해주면서 엄마 아빠도 절절 매게 하면서 자란 귀한 집 딸인데 꺾어질 것이 아니니까 바이바이 하고 헤어집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진짜 한숨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결혼을 하면 저 형제를 얼마나 성화를 시킬까? 저 형제는 지독하게 불행해지든지 (?)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형제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인간이 아이고. 그런데 희망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자란 인간은 절대 안 꺾입니다. 그리고 불을 보듯 뻔한 게 절대로 불행해집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보면 물질이나 주된 환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한 가지 있는데 이들이 하나님을 그래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네가 꺾이나, 내가 꺾이나 보자. 이 자식, 이놈 저놈 하고 대판 싸우다가도 저녁 때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훌쩍거리고 웁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무슨 이유야. 자기 성질이 개떡 같아서 그런 것이지. 섭리는 무슨 섭리야. 무슨 계획 가운데,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하고 싶습니다. 네 못된 것을 고쳐주려고 그런다. 내가 너 못된 것 고치려고 강적인 남편을 만나게 했단다. 너 못된 것 고치게 하려고 너는 그 자매가 그 하늘하늘 거려서 좋아했지만 정신은 강철이다. 너 혼 좀 나봐라. 그러면서 남편의 목에 칼을 대도 죽음을 안 두려워해서 안 꺾였는데 교회에 와서 기도하다가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훌쩍훌쩍 울며 주님 맞습니다. 목사님이 그동안 설교하실 때는 무슨 말씀인가 했는데 이게 바로 그 말씀이군요. 시련의 폭풍, 고난의 골짜기, 눈을 감으면 다시 뜨고 싶지 않은 것이 이게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그러면서 꺼이꺼이 웁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어제처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밖에 없으면 단칼에 날려버리겠는데 그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이 교회에 가서 그렇게 훌쩍거리고 울고 있는 동안에 남편이라는 인간은 혼자서 그 넓은 집에 주저 않아서 TV나 보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데. 그러니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수준끼리 내가 만나게 해주었지. 그럼 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나마 그런 세계가 있으면 이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깨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무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성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깨트려집니다.
1. 하나님을 생각함
그 깨트려진다고 할 때 결국은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의 책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의 길에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행복의 길로 계속 가게 하시기를 원하는 친 아버지가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서 잘못된 선택을 해도 그 선택을 최종적으로 이룰 수 없도록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 진리를 통해서 간섭하십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이제 차례대로 세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관념적인 인식이 있고 경험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관념적인 인식 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목적을 받아들이면서 살수 없습니다. 그냥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명목적인 신자의 삶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그분의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주는 도덕적 의미를 수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러면 교회에 기둥이 7개인 줄 아는데 8개이다. 여러분들의 도덕적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아는데 그런데 계시다. 이것은 중대한 변혁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인데 그럼 도덕적 어떤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도덕적인 의지를 가지고 계시면 그 하나하나의 사물들에 대해서 모두 끝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셔서 여러분 자신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일생을 살게 하시고 싶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의 의미도 틀려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왜 그 수많은 땅 중에 이 시대에 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 문제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수많은 교회에서 왜 나를 하나님이 여기에 보내셨을까? 그리고 수많은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는데 왜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나를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리고 내 주위에는 왜 경건한 부모님이 아닌 예수 안 믿는 식구들이 있게 하셨을까?
2. 하나님을 찾음
이 모든 것들이 다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매순간 거기에 그것을 통해서 이 시점에서 거기에 여러분들을 보내고 있게 하시는 그 목적을 따라서 사는가, 살지 않은가 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옳고 그름의 판단이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그렇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러면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의미를 기준으로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을 진리가 책망할 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 다음에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그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은총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진리로부터 내가 멀어졌는데 그래서 불행하게 미끄러졌는데 내가 다시 그 진리로 돌아가고 다시 그 행복의 길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니 하나님의 은총이 내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사랑 받고 싶어 함
그러면서 인간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책망을 받을 정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아까 맨 처음에 정리해준 그 사랑과 사물의 질서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진리가 책망한 것입니다. 진리는 자기에게 부합하는 사람은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 질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그 충만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물질 속으로, 문화 속으로, 예술과 학문 속으로 일단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많은 물질들을 누리고 또 한편으로는 만지면서 취급하면서 살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것들이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을 무너트리게 될 때 그때에 그의 삶은 진리와 합치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탈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너무나 힘드니까 많은 사람들이 탈 현세적인 삶, 파괴적인 신앙생활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으면서 계속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또한 하나의 자기 사랑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의 가치는 죽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정신을 삶 속에 투영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만물들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고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는데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그때 내가 세상을 향한 사랑을 그리로 붙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나를 책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생각하고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 이런 물질에 대한 사랑, 아까 자매가 기도한 것처럼 우리 인생을 살게 되면 취업, 결혼, 육아, 우정, 친구관계, 진로 이런 많은 것들에 생각합니다. 이게 질서가 도착되어버렸습니다. 질서가 뒤집혀서 하나님을 위해서 원래 이런 것들을 다 생각하며 그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가야지 되는데 하나님을 사용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식으로 문제가 입장이 바뀝니다. 이렇게 될 때 영혼에 말 할 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순전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고 spiritual virginity 영적 처녀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께 사랑을 받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영혼의 고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해서 다시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잴 수 있는 척도를 회복하게 됩니다.
B.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함
1. 교만을 버림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 속에서 가장 빛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어 하게 될 때 그때 이 신자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그 넓은 간격을 자신의 힘으로 메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메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고 자기가 그 거룩에 멀어진 지극히 불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으로 뛰어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짜 지순한 순결인데 나는 이미 더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무엇으로 뛰어넘겠습니까? 이때에 결국은 신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찾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말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자적인 공로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이제 신자는 자기의 모든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대로 온전히 합치되어서 그래서 창조의 목적인 그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도구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을 완덕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완덕은 이루어지는 성취의 완덕이 아니라 그 성취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내가 이미 붙잡았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그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그 완덕, 나는 완덕이라고 하지 않고 온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온덕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완덕은 정지의 개념이고 온전은 이행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온덕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온덕의 삶은 결국은 사랑의 완성의 삶입니다. 왜 사랑의 완성의 삶인지를 이미 여러분들이 다 들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주님께 사랑을 받는 것 이외에는 그 이상의 목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온덕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의해서 모든 정의와 목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그 뜻에 부합할 테니 그 뜻이 정의라면 바로 그 사랑에 의해서 정의가 이루어짐으로서 온덕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지성이 온전히 지혜를 회복했을 때 이게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이게 바로 현덕의 삶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고 그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과 접촉하면서 살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가 모든 덕의 어머니라면 교만은 모든 악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절덕의 삶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이 사물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해쳤다고 생각이 되면 그 지식의 빛에 의해서 용기를 내리고 그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게 용덕의 삶입니다. 그래서 현덕의 삶, 그 다음에 절덕의 삶, 용덕의 삶을 통해서 애덕의 삶을 이루고 그 애덕의 삶을 통해서 온덕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 교만은 이 모든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버지입니다. 이교만이 지성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훨씬 존중하게 됩니다. 이 교만이 애성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보다 훨씬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의지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꺾습니다. 이 교만이 모든 악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런 모든 교만을 꺾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희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주저앉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 대한 성화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계속 되어야 할 경험입니다. 이 모든 거룩과 모든 성화, 그리고 모든 행복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적인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입니다. 거기서 깊은 교만을 내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때 자기가 욕망에 눈이 어두워서 사물의 질서를 잴 수 있는 척도를 상실하고 흐려진 총명가운데서 그릇된 것들을 감히 선택했던 교만들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 교만을 무너트리고 해체시키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기적이나 징계, 완력, 힘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그 사랑이 깊이 스며듭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버렸는데 내버려두셨습니다. 물질을 주님보다 사랑했는데 내버려두셨습니다. 정욕을 따라 살았는데 하나님이 지켜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스스로 맛보아 알도록 그래서 네가 나를 버리고 행복한지 한번 실제로 경험해봐라. 결국은 오래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뭔가를 잘못했을 때 즉각 한방에 내려칩니다. 그래서 반쯤 죽여 버리십니다. 그래서 설설 기게 만드셔서 펑펑 회개하고 즉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인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오래참고 인격적으로 못 깨달으면 깨달을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거부하면 더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고 환경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고 지성을 열어서 결국은 누가 강요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깨닫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인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전자입니다. 그게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나만 오래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참으시기를 원합니다. 거기에서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도 교만을 버리고 그렇게 참으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을 내어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이 그 모든 수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2. 완성 지향의 불안
그러면서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그게 무슨 행복입니까? 매일 내가 진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어! 정말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갔는가. 자기를 끊임없이 살피고 불안해하고 그게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마지막으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완성지향의 불안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제가 여러해 전에 건강검진을 하러 병원에 갔는데 꽤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시간이 남아서 책을 보는데 그 의사가 쓴 책입니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유명한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그게 정확하지는 않는데 스트레스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런 역설적인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웃긴다. 하면서 읽었는데 그런데 평소에 굉장히 제가 궁금해 하던 것이 있었는데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근심이 많거나 너무 힘들면 이상하게 갈비뼈 사이를 누르면 아팠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정수리 부분에 스펀지처럼 이렇게 부풉니다. 그래서 누르면 고무처럼 물렁물렁합니다, 그래서 의사한테 한번 보였더니 그게 멘탈 텐션 때문이랍니다.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 되면 그런 증상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게 스트레스라는 것인데 그런 스트레스가 오면 대부분 암의 원인인데 우리 가족도 병에 이력이 있고 해서 늘 신경이 써집니다. 그런데 내가 이러다가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걸려도 할 수 없지만 그거 참 안 좋겠다. 그러고 있는데 요점은 모든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적 스트레스와 파괴적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적 스트레스는 그런 것,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니까 심령이 가난해져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파서 텐션을 느끼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놀라운데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살아서 어떻게 하나. 하는데서 느끼는 그런 텐션, 또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경건한 슬픔에 잠기는 텐션, 성도들을 돌보고 올바르게 양육하면서 그들을 바르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책망하면서 느끼는 텐션, 이런 것들을 그런 것들이 건강하게 사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의학적으로 다 논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파괴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면 더 벌어야 될 텐데, 두 여자 사이에서 어떻게 하나, 내가 이 나쁜 짓을 했는데 들통 나지, 이런 스트레스, 이런 것들은 파괴적 스트레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막 육체가 똑같은 텐션이 와도 육체가 그것을 감지한다고 합니다. 인체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을 감지해서 그래서 거기에 합당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스트레스의 경우에는 그런 스트레스가 계속 되면 암이나 이런 것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관들이 압박을 받으면서 그렇게 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나면 이 영혼은 영혼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풍취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이 사랑을 받고자 하고, 온전한 삶을 살고 그 행복을 맛보게 되면 더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성향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완성을 지향하는 성격입니다. 그런 완성을 지향하게 될 때 그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실존은 아주 경건하고 건설적인 의미에서 불안한 존재가 됩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하나님이 왜 나를 향해 얼굴을 가리우시나이까. 내가 주를 바라봅니다. 내가 주님께 목마릅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주님의 사랑은 길이 다하였는가. 그 은혜는 이제 그쳤는가.” 이게 모두 이렇게 방탕한 영혼 속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합일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완성을 지향하는 영혼 속에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런 종류의 불안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나에게 물었던 사람처럼 우리가 언제까지 깨트려져야 합니까? 그렇게 깨트려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극적으로 묘사를 하면서 얘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환희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이 그릇된 자기 사랑과 그리고 죄에 대해서 인간의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게 될 때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옳지 않게 살아갈 때는 진리의 책망을 받으면서 다시 돌아오고 그러면서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 구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며 행복해하며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경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유무의 경계이지만 이런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마당에 그어놓은 아이들의 석필 자국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떠나있을 때나 떠난 후에나 변함이 없는 동일한 사랑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지니면서 살아갑니다.
IV. 결론과 적용
마지막 결론적으로 결국은 이런 사랑과 소망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견고한 신앙,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이라는 견고한 신앙, 그 다음에 확고한 지식, 왜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왜 이 길이 행복에 이르는 참 길인지 확고한 지식, 그리고 가슴이 벅찬 기쁨, 소망으로 가슴 벅찬 기쁨 내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파도와 같이 내게 밀려와도 나는 거기서 주님을 찬송하며 죽음의 파도에 떠밀려 오히려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리라는 확신이 주는 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쁨,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가슴에 안고 그들도 나와 함께 이 길을 따라 걸어가도록 그렇게 힘닿는 대로 주님이 내게 주신 모든 자원으로 그들을 돕고 섬기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이것을 제외한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모두 참된 행복일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모든 삶을 통해서 이제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그리고 이 여섯 편의 설교를 통해서 충분히 논증되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이 자기의 기념비적인 작품 삼위일체 속에서 언급했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여섯 편의 시리즈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나는 나의 지성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온 힘을 다해서 성경의 지도를 받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지는 길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동일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만약 나의 설교와 함께 여러분들이 진리의 말씀을 확신한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이 설교를 토대로 우리들이 전진합시다. 의심이 된다면 우리 함께 탐구합시다. 그리고 만약에 나의 설교가 참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면 그대들은 나에게로 돌이켜 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그릇되었다면 나를 설득해서 나로 여러분들에게로 돌이키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성경에 기록한바 경건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리니 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같은 일치한 마음을 품고 한 사랑 안에서 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지혜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