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섬김의 날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녹취자: 백지영
오늘날 사람들이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말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 속에도 성공과 번영에 대한 개념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영향은 예외 없이 스며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목회에서 성공을 했다느니 누구는 목회를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 진정한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갈라디아서 교회 교인들을 향해 쓴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다른 서신에서와는 달리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친절한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바로 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탄핵하는 어조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사도 바울이 전해 준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교리를 버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잘못된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래서 그 율법을 지키는 표로 남자들이 할례들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강조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을 사도 바울은 너무나 마음이 상하고 분노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그대로 믿지 않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천사라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탄핵하며 갈라디아교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뒤편에 가서 그들을 향한 분노의 마음이 누그러들면서 유모와 같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이제 너희를 해산하기 까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노라 고백을 하면서 이제 이 맨 마지막 서신의 말미에 그의 전 존재적인 신앙의 고백이 담겨져 있는 선언을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하게 됩니다. 그 선언이 바로 누구든지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하는 이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예수의 흔적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해석들이 있어 왔고 그리고 논란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 해석사에 관한 관례를 크게 둘로 나누어 본다면 그것은 육체적 해석과 형상적 해석으로 나누어집니다. 육체적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이론이 나뉘는데 첫째 해석이 여러분 대부분의 많은 한국 교회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유명한 핍박설입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생겨난 육체에 새겨진 물리적 상처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을 따르고 있지만은 사실 여기에 나오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이 표현이 사도 바울의 몸에 난 그러한 실제의 상처를 가리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여기에 보면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스티그마타’는 ‘스티그마’의 복수입니다. 물론 이 ‘스티그마’에는 흔적, 상처, 화인 뜻이 있고 이러한 표식 이런 뜻이 있는데 이것이 핍박을 통해서 난 몸에 상처를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보면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갈라디아교인들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는 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 대응하는 복음, 그들이 말하는 육체에 대응하는 영혼, 육체의 표인 할례에 대신하는 예수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영혼과 육체와, 율법과 복음, 할례의 표와 예수의 흔적, 육체의 표와 영혼의 표식 이런 것들을 수사학적 기교를 통해서 대웅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진정한 유대인이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하는 로마서의 사상을 여기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진정한 자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고백하던 이 사도 바울이, 이 할례의 표를 남자의 생식기에 새긴단 말이에요, 그것을 보이면서 나는 이런 육체의 표를 가졌다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매우 육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이 자기도 보여 주면서 “너희들에겐 거기에 그런 표가 있냐? 나는 예수 믿고 복음 전하다가 이렇게 많은 상처를 팔뚝에 등에 나게 됐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랑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게 될 때 풀리지 않는 어려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뭐냐하면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표현을 한정하고 있는 ‘내 몸에’ 라고 하는 대목이지요. 이것은 희랍어 성경에는 ‘내가 나의 살에’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이 한정어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핍박설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분명히 흔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몸이 나의 몸 안에, 엔 소마티 무나의 이런 살로 되어 있는 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랬으니까 이것은 핍박으로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되면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다시 제기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거기에 보면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할 때에 그 몸이라고 하는 단어도 역시 똑같이 ‘소마티’예요. 그런데 그 앞에 예수 죽인 것 이라는 어구가 나오거든요 이것은 우리 식으로 이해를 하자면 우리 때문에 예수가 죽으셨으니까 우리가 결국은 예수를 죽인 것이 되고 그 양심에 가책이나 괴로움을 내가 짊어진다는 뜻처럼 생각이 드는 데, 그것이 아니고 희랍어 성경에 보면 예수의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죽으신 것이지요. 예수 죽으심을 우리의 몸, 소마티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이 그것이지요. 죽음을 짊어진다고 했는데, 죽음이라고는 것은 추상명사예요. 어떻게 짊어져요? 죽음이라는 추상명사를 이 살로 되어 있는 이 몸에 짊어질 수가 있느냐 반대로 마찬가지지요. 예수의 생명이 어떻게 우리 몸에 나타나느냐 물리적인 이 몸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살 달린 몸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핍박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소마티라고 할 때에 이 ‘몸’이 문자적인 이 물리적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 사람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일일이 다 예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런 용례가 성경에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결국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핍박설, 육체에 난 흔적이라고 보는 학설들, 헤르만 리더보스, 랄프 마틴, 알렌 코울이런 신학자들이 일관되게 주장을 하면서 결국은 이 ‘내 몸에’ 라는 한정어구로 볼 때 물리적인 상처일 것이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결국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야기하는 ‘내 몸에’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에’ 그런 뜻이 되는 것이지요. 영혼과 육체를 불문하고 나의 존재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예수의 몸이라고 했을 때도 교회 자체가 영적 통일체이잖아요? 그러니까 물리적인 몸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비유이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또 이것을 육체적으로 해석하는 케이스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의적 문신설’이예요. 그 당시에 이방 종교의 제의를 참고해서 볼 때에 종교사학파적인 연구 방식에 의해서 사람들은 어떤 설정을 하느냐 하면 이방 종교의 이방신께 자기를 데디케이트(dedicate)하는 그런 문신 예식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런 종류의 문신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성흔설’이에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코의 전기에 의하면 그 말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나서 기도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얼굴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가시면류관 자국이 나타나고 두 손과 두 발에 구멍이 뚫어지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기적의 성흔(聖痕), 혹은 오상(五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건전한 성경적 주석에 의해서 생겨난 결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미신 정도로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어쨌든 육체적 해석설에 속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생각하는 주장은 무엇이냐 하면 형상설이라는 것입니다. 형상적 해석으로 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형상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하는 이것은 성화의 맥락에서 본 사도 바울 자신 안에 있는 자기도 숨길 수 없는 예수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지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노예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에 노예제도가 있었는데요. 로마 시대 이전이 여러분 잘 아는 헬라시대 헬레니즘 시대 아닙니까? 이때는 노예가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 제국 이전에 폴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그 노예들은 상당한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플라톤의 대화록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으러 가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요. 그런데 그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를 법정에 고발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네가 네 아버지를 그렇게 고발한 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그랬더니 그럼 왜 그렇게 아버지를 고발했느냐 하면 아버지가 노예를 죽인 것이에요. 그 얘기는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면 노예들을 주인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자료에 보면 노예 주인이 쓴 글에 “노예에게 밭을 갈라고 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밭 갈러 갔다. 정말 나쁜 노예다.” 노예들이 상당한 인권을 보장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문제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국가 권력과 귀족들의 권력에 의해서 노예가 고전적인 신분보장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당시의 노예제도에 ‘스티그마타’ 제도가 있었어요. 이 스티그마타는 노예의 몸에 새기는 표예요. 모든 노예가 이렇게 취급된 것은 아니지만 가문에 따라서 노예를 팔이나 등에다가 새기는 것입니다. 독특한 문신을 새기는 것이에요. 마치 가축에게 화인을 찍어서 그 가축을 자기네 가축인 것을 표를 하듯이 노예에게 새겼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노예가 해방이 되면 몸에는 문신이 있으니까 증서를 가지고 자기가 해방된 노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는 것이에요. 이러한 노예의 스티그마 제도를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 관습을 잘 이해하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스티그마타 투’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여기 나오는 소유격 ‘투 예수’는 ‘예수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스티그마타가 복수예요, ‘스티그마’가 이것이 노예의 흔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투 예수’는 그 노예와 소유관계에 있는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의 노예라는 것, 사도 바울이 나는 예수의 노예다 했을 때 그것은 결국은 자기 정체성이지요. 그러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다” 라고 하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을 때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그 노예라고 하는 그 정체성이 무엇에 의해서 확인되어 질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여기에 난 이 상처들이 예수의 노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뭐냐하면 자기의 영혼과 마음, 정신 안에 있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움직이고 있는 그 예수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 강하게 사로잡힌 그 정신과 혼, 그것이 빚어낸 영적이고 정신적 특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그러면 결국은 무엇 때문에 사도는 자기가 그러한 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느냐? 이것은 결국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것이에요. 근원적으로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에요. 바울이 되기 전 이 사울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편견이 그의 인생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하나는 신학적 편견과 심리적 편견이에요.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는 그리스도 일 수 없다 라는 편견이에요. 그 다음에 심리적인 편견은 이방인은 아무 것도 아니요 지옥의 땔감들이나 될 인간들이며 유대인이 최고다 라는 이 두 가지 편견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것 이에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분명히 예수는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는데, 그를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사람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인간이 한 것이지만 살아난 것은 하나님이 직접 살려주신 것이에요.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경우는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도대체 그의 무얼 인정해 주셨다는 것일까? 또 하나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사람이라면 왜 죽어야 했을까? 이런 신학적인 의문들이 계속해서 제기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 속에서 다 풀린 것이에요. 그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으셨는데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다시 살아나셨으니, 예수의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라는 결론이 난 것이에요. 그러면 누구의 죄를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 Jesus died for us.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이것이 결국은 그래서 복음이 된 것 이에요.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예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신 사람이셨기 때문에 결국은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진리였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어서, 자기가 그렇게 지독하게 예수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상처와 고통을 주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시지 않고 용서해 주신 것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간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사는 자기같이 쓰레기 같은 모든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것이에요. 거기에서 이번에는 그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자기의 출세와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이에요.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거꾸러진 것이에요. 그 사랑이 사도 바울의 심령 속에 신적인 강제력을 형성한 것이에요. Divine E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을 형성해서 그 강제력에 확 사로잡혀서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서 죽으신 그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하는 사랑의 강제력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이에요.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복음 안에서 빚진 자들이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강제력을 갖게 만들었던 그 힘이에요.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소명의 코아(core), 핵심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데, 어머님이 서원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이 신학교 가야지 왜 자기가 신학교를 가.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그 예수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 이것이 소명의 핵심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사기예요.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는 의식 속에 예수의 사랑이 살아있고 그 사랑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신적인 강제력이 움직이는가? 이것이 바로 소명이에요. 이것을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내가 다시는 말하지 아니하리라 할라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중심에 사무치니 내가 견딜 수가 없나이다.” 이것이 소명이에요.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 자기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 하나로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서신서 마다 고백했던 ‘나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바울은’ 할 때에 ‘둘로스 크리스 투’ 그리스도의 노예, 그리스도의 종 하는 그 표현과 같은 의미라 이것이에요. 왜냐하면 ‘스티그마타’ 그것이 노예의 ‘스티그마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은 하나님의 종, 거기에 넘어서 종님까지 나가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좀 이해가 잘 안가지요. 종 그러면 벌써 굉장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은 노예예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노예됨, 그리스도 노예사상이라고 하는 것인 신약시대 문맥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에요. 그 뿌리가 구약으로 넘어가요.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에벳 야웨의 사상이에요. ‘에벳’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노예’라고 하는 뜻이에요. ‘아바드’가 봉사하다 섬기다, ‘아보다’ 예배, 경작 그런 뜻이니까 ‘에벳’은 명사형이 되어서 아바드를 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 노예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노예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 그 에벳 야웨가 누구냐? 넓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부 다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에벳 야웨지요.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노예계급을 가리키는가? 아니에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벳 야웨 사상은 이 신약성경에 ‘둘로스 크리스 투’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 데 그때에 에벳 야웨, 여호와의 종 사상은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노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나라의 신정통치를 구현하기 위한 세 기관이 솥발처럼 있었어요.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게 하였던 것이에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의 노예로 불려지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왕이든지, 선지자이든지, 제사장이든지 간에 그들이 그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뭣이냐 하면 자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부인하며 ‘나는 하나님 야웨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 고백이 이 사명을 감당하는 데 기본이었다는 것이에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지자와 관련해서 이 에벳 야웨의 사상이 형성되고 그 에벳 야웨의 사상이 결국은 이사야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사상을 통해서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종으로 오셔서 메시야의 대업을 이루시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연결이 되어 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선지자가 어떻게 해서 야웨의 종, 에베드가 되었느냐? 이것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관계성을 찾아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없어서 이 문제를 길게 학술적으로 논의할 시간은 없어요. 그렇지만 간략하게 빠른 시간 내에 정리해 줄테니까 이해를 가져보라는 말이에요.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지자는 제사장하고는 틀려요. 제사장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받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일이 제사장하는 일이고, 선지자가 하는 일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가지고 와서 이 백성들에게 외치고 전파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제사장들은 전통과 인습 위에 서 있고, 선지자는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선지자들은 그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이에요. 거의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던 사람인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전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방금 내려 보낸 사람처럼 이 시대와 영합하지 않은 때 묻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에요. 칼도 없고, 창도 없고, 군대도 없어요. 맨몸으로 나오는데 무기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 밖에 없어요. 그들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그들에게 부어 주는 것,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에요. 그래서 그들을 율법을 따라서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음성을 가진 사람으로 내려오는 것이에요.
그럼, 원래 이 세상하고 똑같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전혀 다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내려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들려줄 수 있는 대변자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단순히 학교에서 받는 그 학문적인 훈련을 통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주님의 음성은 그렇게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도움이 되지만 그 위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이 임하는 사건이 필요했어요. 그것이 없이 누구도 선지자가 될 수 없었고, 그것이 없이 선지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였단 말이에요. 그러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 장면이 바로 전형적으로 이렇게 번역이 되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 이렇게 나와요. 와이예이 데파르 엘로힘 혹은 아도나이 엘 누구누구, 벨 누구누구, 알 누구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였다. ” 호세아서 1장 4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데힐라트 디베르 아도나이 베후쉬라흐’라는 말은 ‘처음으로’ 그런 말이에요. ‘디베르’, 말씀하셨습니다.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베 호샤’. 호세아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 ‘에게’ 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히브리전치사 ‘베’를 사용해요. 이것은 인 투(in to)에요. 호세야가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를 관통하고 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에요. 그의 내면의 세계를 확 휘 집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나간 것이에요. 이때에 변화되지 않은 호세아 속에 있는 인생관, 우주관, 하나님에 대한 생각, 가치관, 이 세상의 길 이런 모든 것들이 강력한 쇄신의 작용을 통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에요. 그리고 지존하신 하나님,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꽉 찬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되요. 이 세상이 모든 티끌처럼 보이는 그 영광에 대한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하찮은 것들과 결별하고 그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 이런 전형적인 선지자의 소명이에요.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갔다가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찬란한 빛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면서 이제 제단의 숯불로 자기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이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할 때 그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온 인류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날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니다.” 이것이 파송이에요.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에벳 야웨의 선지자의 전통 속에서의 소명을 체험하게 된 것이에요. 여기서 나오는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가 가졌노라는 이 고백은 바로 이러한 야웨의 종 선지자들의 신학적인 체험이에요. 그래서 이런 에벳 야웨인 선지자가 되게 한 체험 그 속에는 날리지(knowledge), 지식이 있는 것이에요. 그 지식이 바로 ‘다트 에본’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상, 그게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기독론적 신학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로니스 투 크리스투’,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기독론적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얘기해요?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광대한 성경 속의 지식 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되고 어떠한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전존재를 던져서 추구하게 되는 지식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노시스 투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사상은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사상인 구약의 그 사상이 기독론적 전환으로 적용된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에요. 난 이 시간에 어떻게 해서 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이 에벳 야웨의 사상에서 나온 ‘다트 엘로힘’ 사상의 신약적인 적용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사상과 같은 것이에요. 삼위 하나님 중에서 특별히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삼위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그것이 곧 삼위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단초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인격 안에 나타난 그 놀라운 계시는 예수 자신에 대한 계시일 뿐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계시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삼위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로 신약에서 제시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化肉)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래서 진짜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사람으로 그렇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파일 끊김) 방금 사가지고 온 따끈따끈한 책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읽지 않는다면 교회와 저의 마음이 매우 아플 것이에요. 성도들의 소중한 헌금으로 여러분들에게 거의 정가를 다 주고 사 온 것이에요. 그 속에서 그것을 쭉 풀어가요.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복은 예수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참회 속에서 자기 깨어짐이 있을 때 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확 솟아나는 것이에요. 막 기쁜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까 이제는 나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해...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고난이 오고 시련이 많은 그 속에서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경험해요. 예전에 주님 모르고 변화되지 않았을 때는 인생 더럽게 재수 없다 왜 이렇게 생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십자가를 붙들고 시련이 오고 고난이 오고 그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이 떠오르는 것이에요. 내가 받는 많은 이 육체와 정신의 고난 속에서 주님 붙들고 깊이 기도해요. 그러면 그 속에서 내가 그 십자가,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철저히 깨뜨려질 때 예수의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나의 삶 속에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스며들어 오게 되는 것이에요. 실제화, Actualist! 그러면서 내가 고난을 당할 때에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예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고통 속에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나의 삶 속에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때에 그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자신의 영혼과 삶 속에 흘러들어오면서 예수께 항거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했던 모든 이 육적 자아의 욕망이 예수 죽음의 기운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돼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하는 고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고백을 하게 됩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되요. 최근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해 본 경험이 있어요?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 시간이 있었어요? 그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를 소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요. 그래서 보이는 이 세상에 살지만 실제로 그 마음은 보이지 않는 예수께 매인 사람, 그래서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그 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
(찬양)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고난이 많이 와도 주님의 십자가를 꽉 붙들고 내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바로 그 길을 걸어가서 여러분들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깊이 지닌 사람들이 될 때, 여러분들이 가서 전하는 복음에 예수는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서 예수의 흔적을 이 심령 속에 가득 지닌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