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교 섬김의 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도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어느 종교도 이렇게 한 사람의 인격에 종교의 모든 것이 매여 있는 종류의 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 인격 안에 모든 종교의 본질이 존재해요. 따라서 인간은 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그를 공경할 만한 지식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가장 우려할만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교회의 중심이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인격과 존재의 탁월함, 그 성품의 뛰어남이 교회의 선포를 통해 하늘의 찬란한 빛처럼 성도의 가슴속에 어두운 지성을 뚫고 흘러내릴 때에 그 때에 그들은 비로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은 당신을 알만한 모든 지식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 두셨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그 안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죠.
오늘 사도는 이 골로새서에서 골로새교회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먼저 창조론과 기독론으로부터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존재가 이 세계에 대해서 갖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그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의 탁월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이 의무는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 의무로 돌아가지 않는데서 생겨나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아주 분명하게 이처럼 인간을 향하여 인간본연의 의무로 사람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중생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관련지어서 말해보자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는 이전에 없던 존재로 자신이 중생을 통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본질은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생을 통해서 예전에는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교만을 포기하고 그리고 예전에는 없다고 믿었던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 성향이 부여되는 것이 중생의 본질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중생의 본질이 이처럼 성향의 변화라고 한다면 이 성향의 변화와 함께 중생한 인간에게는 인식론적인 혁명적 전환이 도입됩니다. 중생한 자의 인식론적인 전환은 바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센스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예전에는 없었고 혹시 부분적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더라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선입견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뒤엉켰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부여한 이 세상의 달과 별을 보고 그것을 섬기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아래 승복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그분의 대리자로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여야할 인간이 자신을 자기 존재의 최고의 목표로 알고, 그리고 자기를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복종하기를 원하는 제왕적 가치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구체적인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며 그리고 가치에 있어서 자신이 최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중생은 바로 이렇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가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인식론적인 전환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나면 예전에는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는 어디서든지 만지고, 어디서든지 보고, 어디서든지 들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식론적인 전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지라도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의 탁월하심 앞에 그의 인격의 눈부신 초월성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 떨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기뻐해보지 못했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중생한 신자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의 탁월함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으신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인간과 화목 시키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참된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과 그리고 완전한 인간의 인성이 만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의 탁월함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감각의 시야로 볼 때에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에 나사렛에서 살던 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감각의 눈으로 보는 예수일 뿐입니다. 믿음의 눈은 그 인간의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보도록 만들어주고 그 신적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하나 된 그 아름다운 조화와 영광을 보게 만들어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 등에 이러한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창조된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고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단지 흙인 육체와 하나님이 분여하신 영으로 창조되었을 뿐입니다. 뱅상, 빅토르를 비롯해서 교부들이 이야기하던 것처럼, 어떤 교부들이 그릇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 영혼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가 숨을 불어넣는 행동 속에서 주입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닮은 영혼을 당신의 창조행위를 통해 자유롭게 만드시고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은 신적 본질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닮은 인간의 존재가 창조세계의 면류관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탁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 창조될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분의 한 인격 안에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심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래가 없는 존재의 방식으로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영광의 본체 그 자체로 머물러 계셨더라면 인간이 범접할 수 없었기에 그분은 죄인들도 볼 수 있도록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의 완전하고 탁월하게 아름다운 신적 본질을 인성 아래에 감추셨습니다. 케노틱히오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하실 때에 자신의 신적 본질을 파버리시고 양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본체인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오셨으나 누가 강요하는 이 없이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의 신적 본질을 인성 아래에 감추심으로 마치 그분의 지상생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니시고 계신 것 같은 그러한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주심으로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존재와 인격,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무엇을 통해서도 보여줄 수 없는 철학과 사상과 학문이 보여줄 수 없고 예술이 흉내만 낼 뿐인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말씀사역과 그리고 목회자의 거룩한 삶과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과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진리를 찾아가는 그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내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죠. 오늘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이렇게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와 성품의 탁월함에 대해서 감격하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 마음속에서 affection을 느끼고 그 affection의 반복이 하나님이 중생과 함께 주신 사랑의 성향을 강화하여 그래서 그 하나님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이 땅에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모두 드려서 온 땅과 만물위에 그분의 탁월한 아름다움이 모든 사람의 지성 속에 찬란하게 빛나기를, 그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명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의 구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참 신자로 만드시기 위함이고 참 신자로 만드시는 이유, 연단과 시련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는 그 마지막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에요.
신성과 인성으로 충만해졌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사색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그릇된 교리로 나아갔습니다. 신성과 인성은 구분이 없다는 견해든지, 혹은 신성과 인성은 구별할 수 없이 섞였다든지, 이런 모든 이론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탁월함의 본질을 설명하는 적합한 설명이 아닙니다. 이 두 본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공존하지만 그러나 본질의 섞임이 없이 그러나 그 둘은 결코 나눠지지 않고 한 인격 안에 어느 한 본성이 어느 한 본성을 억압하거나 저해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는 자신의 책속에서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섞임에 대해서 마니교 교도들과 논박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의 섞임은 잉크와 물의 섞임과 같지 않고 오히려 공기와 빛의 섞임과 같이 공기가 빛을 방해하지 않고 빛이 공기를 방해하지 않지만 둘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두 본질이 아름답게 공존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통해서 무한한 신적본질과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비치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광스러운 아름다운 영원하고 끝이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목회는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활동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과 사상, 찰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음악,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의 조화와 질서를 대위와 화성 속에서 도입하는 음악과 하모니, 이 모든 것들도 우주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일부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크러스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이 덩어리는 바로 진리입니다. 그 성경의 진리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덩어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이 용해되어있고 뭉쳐져 있는 보고이고 그리고 원천입니다. 우리는 그 성경의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연속성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다면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 탁월한 아름다움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은 존재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그리스도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물론 그분의 육체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던 요세푸스의 책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이 탁월한 아름다운 외모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체도 또한 이 세상에서 참 아름다우신 육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그리스도 사이를 뚜렷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탁월성을 지니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일 뿐이고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에 의해서 상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하시고 그분의 인격이 이 땅에 인격을 가진 모든 지성적 피조물들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신 인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분의 인격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그분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것을 통해 한 인간의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고, 그리고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같은 맥락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혼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그분의 지성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존재 자체도 불완전하거니와 그리고 인간에게 부여한 그 존재 자체도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릇된 감각 속에서의 수많은 사물들의 표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그런 연약한 지성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신적 본질을 지니신 참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지성을 구가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들을 아셨으며, 인간의 지식과 한계를 초월하는 모든 것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을 알 뿐 아니라 그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혹시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존재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서 당신 스스로 신적 본질을 인성 아래에 감추신 때문에 스스로 양보하신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탁월한 지성으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뵈오며 진리를 당신 자신이 진리로서 진리를 알아야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혼의 탁월함은 그분의 탁월한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40일 기도를 마치신후 그분이 제일 먼저 가신 곳은 자기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언제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전율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선포하는 내용의 다름이고, 두 번째는 선포하는 그 행위 속에 깃들여있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었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사람들은 기이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보게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학문을 갈고 닦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우리에게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 한 가지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열고 부어지는 충만한 기름 부으심, 설교자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에 감화시키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주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과 한량없는 기름 부으심, 그 성령의 권위에 의해서 녹여진 입술의 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불로써 선포하게 만드는 그 모든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현시에 원천이 되는 그 성령의 탁월한 기름 부으심,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배우는 모든 공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두 개는 어느 것을 선택하고 취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개는 모두 소유해야 할 것이고 어떤 것 때문에 어떤 것을 버릴 수 없는 절대필명의 두 가지 사명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지만 만약에 바알 산에 장작이 없었더라면 그 불이 활활 타올랐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바른 신학을 알고 참된 개혁주의를 하는 진정한 신학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장작이라면 그 위에 부어지는 강력한 불덩어리는 바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부어지는 기름 부으심인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떠드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하늘의 신령한 능력으로 기름 부어진 한마디의 언어는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이 없이도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말할 수 있고, 그리고 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또 좋은 언변과 언사는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상당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변화일 뿐이지 영혼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사로잡혀있는 영혼의 사슬을 끊고 그리스도가 아닌 이 세상을 사랑하는 끈질긴 사랑의 힘줄을 끊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존재의 탁월하심과 인격의 탁월하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격하고, 그리고 이 모든 교만하던 지성에 눈이 멀게 만들어주는 이 모든 지성의 벼락이 치는 위대한 변화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기름부음이 없이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난쟁이 같은 교회의 지도자는 분재와 같은 교인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에게는 거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의 충만한 능력과 우리의 능력 받음은 뚜렷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인성위에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받을 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는 인성과 함께 신적 본질 위에 부어지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 있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도덕적 피조물 중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혼의 기능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못지않게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 예수의 영혼을 탁월하게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성향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은적도 없고 그러실 수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방해하는 많은 문제들과 싸우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이미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 신적 본질 안에 사랑의 필연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성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자비하심은 구약의 계시 속에서도 아주 아름답게 계시되었고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할 때에 선지자들이 즐겨 외쳤던 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감화시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보여주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질과 그리고 그 크기가 보여주는 인간과 보여주는 방식에 의하여 심각하게 제한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자신의 온 몸을 던져 고멜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말했고, 예레미아 선지자가 쏟아 내리는 눈물로 통곡하며 가슴의 불을 그 백성들에게 토해놓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 사랑을 충분히 우리에게 전달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그 탁월한 아름다움 사랑을 이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 그분 안에는 신적인 사랑이 충만하셨으니 이 인간의 성육신 안에 있는 이 사랑은 다른 사랑이 아닌 영원 전부터 삼위 안에서 성삼위 간에 교통하시던 그 신적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신적 사랑을 볼 수 없었고 외치는 선지자들의 소리와 행동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감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래서 당신의 모든 행동과 그리고 인격의 나타남과 성품의 발현 그리고 죄인들을 돌보시는 그 모든 자비로운 행동 속에서 목 메이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찬란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우리들이 돋보기를 통하여 빛을 모을 때 그 빛은 잘 보이지 않지만 모은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 때에 프리즘 이쪽에는 색깔도 없는 빛이지만 프리즘 저쪽에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찬란한 무지개 빛깔이 공간 안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그 찬란한 분광하는 아름다움을 이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 나타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목회자가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렇게 이 세상에서 살다가 그렇게 프리즘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와 성품을 통해 비치는 그 탁월한 심적 초월성의 빛 아래에서 엎으려진 사람,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 속에서도 비교될 수 없는 그 탁월한 아름다움에 감복한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했기 때문에 아름다우신 그 분을 찬송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을 빼앗을 수 없는 사람,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비친 이 찬란한 아름다움의 빛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자기를 하나님 삼으며 살아가는 멸망에 이른 수많은 인간들을 보며 떨리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굴복하고 그 아름다움의 탁월함 앞에서 자신은 티끌일 뿐이며 그 탁월하신 아름다움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오직 이 아름다움을 온 땅과 만물위에 충만하게 비취실 그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완성,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의 탁월함과 성품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그 날을 꿈꾸며 사는데, 그것이 가슴 아파서 견디지 못해서 오늘도 외치고 목회를 하고 심방을 하고 신학을 하고 영혼들에게 전도를 하고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요, 교역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선배들의 잘 성공한 교회에 가서 그 모델을 공부하고 그리고 신신학적인 방법으로 목회에 성공하는 이 시대의 코드에 몰두하고 그리고 별로 가치가 없는 정보와 일에 젊음을 허비하면서 보내는 그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가슴을 찢으며 ‘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미천하기 때문에 나는 너무 괴롭습니다. 내게 무엇을 주시려면 주님 자신을 아는 그 지식의 빛을 나에게 주옵소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위대한 개혁주의자의 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탁월한 지성 속에서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노래하고 감탄했던 그 개혁주의의 아름다운 유산 속에 티끌만큼이라도 나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은 지금쯤 많이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셨다는 점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있지만 그분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필연성이 없다면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리가 없지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목적은 이렇게 하나님을 당신은 알고 있는 그 삼위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교통 안에 있는 탁월한 사랑, 그리고 이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창조의 의도, 이것을 이룰 수 없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죠.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그 유명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도 사실은 창세기 1장 1절의 역사적 기초가 없다면 사실은 허공에 뜬 계시일 뿐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날 신학을 하면서 한쪽으로 너무 쏠렸기 때문에 좀 더 많이 공부해야 될 부분이 뭐냐 하면 창조론이에요. 창조론……. 그 창조론을 공부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탁월한 위대성,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만물위에 초월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 그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 안에 이 모든 세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하는 그 초월자로서의 인식, 그것을 먼저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한분 초월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진 죄인임을 자각하고 중생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속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게 되신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목적,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좌절된 것과 같은 이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오신 것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하나님을 당신 자신의 충만한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짓밟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향한 긍휼과 신실하심, 이러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성품이 찬란한 빛으로 나타났던 것이죠.
다시 말하면 밝은 대낮에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는 의미가 없지만 캄캄한 어두움에서 하늘을 찢고 올라가는 조명탄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듯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탁월한 신적인 긍휼과 자비,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 믿음으로 그 사실을 보는 모든 사람들 속에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자국지어 놓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하신 성육신의 계시를 무지한 영혼들의 가슴속에 칼로 새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나 저나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복종하고 그를 높이는 이 하나의 일에 인생의 모든 가치가 걸린 것처럼 살아가야 되겠는지 한번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난 수련회 때에 ‘Experience of Jesus Christ’를 강조한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사람의 옷을 입고 내려오신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참 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왕궁과 영광스러운 귀족의 집안을 버리고 오히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구유의 누울 곳이 없이 태어났고 그리고 그 후로 일생을 사시면서 그분은 가난과 결핍 속에서 이 세상의 왕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난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가난한 생애를 사신 이유는 아마도 이 세상에 있는 영광과 존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꿈꾸며 다가오는 인간들을 실망시키고 그리하여 정말 당신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당신의 인격의 탁월한 본질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비록 한 벌 옷밖에 없으시고 좋은 집도 그리고 아주 뛰어난 추종자도 없이 당신 자신의 고백대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은 이 땅에서 살아가시는 삶 그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신적인 본질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말 한마디, 그의 행하심과 그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주일학교에 어떤 학생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죽어도 안 믿어진대요.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이 아이의 손을 잡고 막 하나님이 얼마나 너를 사랑하시는지를 설명하다가 울어버렸어요. 그 순간에 아이가 그렇게 성경을 읽고 집에서 이야기를 해줘도 무엇인지 알 수 없던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마음속에 빛으로 다가왔다고 고백했어요. 그렇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하고 성결하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아래로는 이 땅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고 창조의 이 세계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살아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한편으로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능력을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슬픔과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분은 어떻게 티끌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바람의 갈대처럼 나부낄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복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인하여 기뻐하여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분의 그 탁월하신 인격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우리가 죄인인줄을 알고 또 그분의 인격 안에서 탁월한 사랑을 발견하며 우리가 슬픔이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일관되게 자기를 꺾으며 우리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은 가셨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기록들은 성경 속에 남겨놓으셔서 인생의 갈 길을 묻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성경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누구에게서도 꺾을 수 없었던 교만한 자존심은 무릎을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그 모습을 보며 자기를 꺾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있던 사역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의 생애를 대하는 가운데 그분도 이 세상에는 머리 둘 곳 없고 그리고 깃들 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의 탁월하심 앞에서 마음이 녹아내리게 됩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더 중요한 이유는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전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하나님 앞에 죽임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을 잠시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임시적인 교제의 길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교제의 길을 열어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래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창조의 세계를 무너뜨린 우리의 죄는 무한히 컸지만 그분 자신이 바치신 제물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참 사람이신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속죄는 무한한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주님의 그 공의를 만족시켜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그 분의 죽음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으나 죽임은 그분이 당하시고, 심판은 그분이 받으셨으나 자유는 우리가 얻어 이제는 사망과 그 모든 어두움을 뿌리치고 내가 원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그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묵상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신적인 사랑을 중생한 우리 안에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우리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탁월한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기독교사업가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신 그 성품 앞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예전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왜 이 길을 들어섰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었다면 이 길로 들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매 순간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의 빛 아래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욕이 되던 그런 피조물이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주님의 탁월하심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매일매일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행동이 되고 거꾸로 우리의 모든 행하고 배우는 그것이 결국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 안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득 채우면 순결한 사람으로 자라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쓰실 것이고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 때문에 이 창조의 세계가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