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
2022년
가을말씀사경회 저녁설교
설교기간 | 2022년 10월 17일 – 10월 23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12월 09일
목 차
1. 땅과 사람의 평화(레 26:4-5) 2022.10.1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1 8
2.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레 26:6-7) 2022.10.1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2 24
3.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1)(레 26:1-2) 2022.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3 41
4.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2)(레 26:1-3) 2022.10.23. 가을말씀사경회 주일오전 56
<설교 프레임>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1 2022. 10. 17 가을말씀사경회 첫째 날
< 땅과 사람의 평화 >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레 26:4-5)
I. 레위기의 개관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중심에 있다. 위치상으로만이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레위기에는 사건 이야기가 아니라 제사법과 시민법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있어 지루하게 느껴진다.
레위기의 주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불결한 죄인(罪人)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레위기는 출애굽기의 연장이다. 그 책의 후반부(25~40장)는 성막(聖幕)을 만드는 일에 할애되었다. 성막은 회막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인간과 만날 장소를 정하셨다. 그것이 에덴(Eden)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타락으로 그 땅에서 쫓겨났다.
그 에덴의 모형으로 다시 주신 것이 성막이다. 그런데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너무 거룩해서 모세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이 모순을 레위기가 다룬다. 불결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交際)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것은 바로 제사(祭祀)를 통한 속죄였다. 레위기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a. 제사와 의식(1~16장): 제사1~7장, 제사장 8~10장, 정결과 부정11~15장, 속죄일 16장
b. 생활과 윤리(17~27장): 거룩함 18~22장, 절기와 성막 및 안식년과 희년 23~25장,복과저주 26장, 서원과 헌신 27장
레위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조건으로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거룩함(holiness)과 정결(淨潔)함이다.
거룩함은 지위(地位)고, 정결함은 상태(狀態)다. 거룩함의 반대는 속됨이고, 정결함의 반대는 부정함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정결하시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다. 거룩한 지위를 주셨으나 수시로 부정(不淨)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정결케 되는 일이 필요했다. 그 길이 제사를 통한 속죄였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가 제사와 의식법으로 가득 차게 된 이유였다.
무엇을 기준으로 정결과 부정의 기준(基準)을 정하셨을까? 학자들마다 견해가 분분하지만 대체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1)가나안족의 종교생활과의 구분 (2)위생과 섭생학적 고려 (3)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상기
레위기에 나오는 명령들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는가? 율법(律法)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a.도덕법 b.의식법 c.시민법
이것들 중에서 도덕법, 곧 십계명은 항구적으로 준수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완성되었다.
나머지 두 가지, 곧 의식법(儀式法)과 시민법은 한시적인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II. 땅과 사람의 평화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다루는 26장 첫 머리에서 강조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화”(shalom)다.
이 평화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평화(平和)이고 옆으로는 이웃과의 평화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연과의 평화를 가리킨다.
평화는 언약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때 하나님과의 평화는 지켜진다. 그 평화가 타인과의 관계를 지배할 때 사회(社會)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그런 평화 속에서 자연(自然)과의 평화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땅과의 평화는 인간의 생존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
A. 땅을 의존하는 인간
인간은 창조되면서부터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도록 지정되었다(창 2:16). 동물을 먹게 된 것은 타락으로 땅이 저주를 받은 후였다(창 9:3).
그러나 생명이 되는 피째 먹는 것을 금하셨다(창 9:4). 이처럼 땅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關係)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전체가 하나처럼 묶여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땅은 인간에게 정복되고 다스려지도록 의존하는 지위에서 벗어났다. 인간과 갈등하고 저항하며 위협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이기적 탐욕과 교만으로 땅을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은 산업혁명 이후 소비(消費)에 대한 욕망이 폭증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땅에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자연의 훼손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자원의 고갈,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라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전쟁(戰爭)과 굶주림이었다. 출애굽 이후 굶주림을 면하게 해줄 첫 번째 양식으로 하늘의 만나(Manna)가 제시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1)육체(肉體)로 만나를 먹는 것은 곧 말씀으로 영혼의 생명을 누릴 것을 예표했기 때문이다. (2)먹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보여준다. 비록 땅이 식물을 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존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돌보신다. 양식을 자연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 같아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햇빛과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려주시기 때문이다(마 5:45).
B. 비를 의존하는 대지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레26:4)
땅은 스스로 곡식과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다. 비와 햇빛이 필요하다.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결실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創造)하셨다는 사실은 그것을 당신의 질서대로 움직이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만물은 서로 상호의존하며 그 모든 의존의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창조주께서 주시지 않으면 어떤 좋은 것도 얻을 수 없다.
어찌하여 악인(惡人)이 많은 부를 누리며, 의인이 궁핍하게 사는지 모든 의문에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땅의 자원은 내 힘으로 얻고, 하늘 자원만 하나님 도움으로 얻는다고 믿는 것은 바른 신앙(信仰)이 아니다.
우리는 영혼의 은혜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존을 위한 모든 물질적 조건들도 한결같이 하나님(God)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불신자는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신자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땅의 자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궁핍한 자는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증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또한 부유(富裕)한 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인정하고 계신 증거라고 교만해서도 안된다.
빈부 간에, 신자는 모든 물질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依支)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물질보다 더욱 사랑해야 한다.
C. 땅과 평화: 배부름과 안전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레 26:5)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했다. (1)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함 (2)농경생활로 굶주림에서 벗어남
이것이 그토록 땅을 바라던 이스라엘이 그리던 평화(平和)였다. 땅을 주심으로 더 이상 외적으로부터 침입 받을 두려움이 없고, 짐승들을 제거해 주시고, 이민족의 칼이 해치지 못하게 해주실 것이다.
안전(安全)이 없다면 배부름이 의미가 없고, 배부를지라도 안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탈출하여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征服)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 두 가지를 저절로 영원히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3)
“만약에 … 준행하면”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비록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거기서 영적인 번영을 누리고 소명(召命)을 다하기 위해서는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 했다.
신자가 구원 받은 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 때보다 더욱 불행(不幸)해지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지상적 축복은 땅과의 평화를 통해 왔고, 땅과의 평화는 오직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다.
약속(約束)의 땅에도 기근이 올 수 있고, 젖과 꿀이 흐르던 땅에도 재앙이 덮칠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번영과 안전에 대한 약속은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적 부요와 안전을 바라본 것이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궁핍하게 하시겠는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황폐한 땅과의 관계(關係)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시려 함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물어 메마르고 땅이 산물(産物)을 내지 않아 배고플 때, 땅과의 관계를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했다.
깨어진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 이스라엘은 고통 받을 때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면 다시 땅과의 평화(平和)를 회복하게 하셨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이었던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III. 적용과 결론
그분께로 돌아가서 다시 땅과의 평화를 회복하여야 한다. 무너진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지고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돌이켜야 한다.
구원 받은 자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지상적 복은 하나님 뜻을 이루라고 주신 수단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라. 땅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살펴보라.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성하고 바르게 하라.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돌이키라.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2 2022. 10. 18 가을말씀사경회 둘째 날
< 사람과 사람의 평화 >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레 26:6-7)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족한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땅과의 평화(平和)를 통해서였다. 물질적 축복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소명(召命)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땅과의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 수직적 평화는 수평적 평화로 나타내야 했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 사이에 불화(不和)하고 포악(暴惡)한 사회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따르는 평화의 공동체였다.
II. 사람과 사람의 평화
A. 땅을 주신 뜻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의 악(惡)이 하늘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신 9:5)
그들이 누리고 있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그들은 악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쫓아내셨다. 땅과의 평화가 깨지자 그들은 멸망하였다.
그들의 악이 임계점을 넘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경륜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이스라엘을 거기 심으신 것은 은혜(恩惠)였다. 일찍이 아브라함(Abraham)과 맺으신 언약을 따른 것이었다. 땅의 풍요를 주셔도 악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족속을 멸하셨다.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삼중(三重)의 평화(平和)였다.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땅과의 평화였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사회와 약속의 땅에서 이루고자 하셨던 사회 사이에 가나안 정복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로 보여주고자 하심이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다. 이는 이스라엘을 통해 사랑으로 정의(正義)를 완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시고자 함이었다.
호수 위에 파문(波紋)처럼 퍼져가는 사회 질서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여주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셨다. 땅과의 평화를 누려 풍족한 삶을 살고,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누려 사랑하며 살게 하고자 하셨다.
땅을 주심은 착취하듯이 그 산물(産物)을 빼앗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땅을 주신 은혜(恩惠)를 기억하게 하심이었다.
광야에서 나그네로 굶주림과 불안 속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를 건설하게 하심이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이스라엘(Israel)에게 가나안 땅과 같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 평화를 누리며 사랑의 삶을 살게 하셨다. 그 첫 사회가 교회다.
B.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平和)를 이루며 살아갈 때 땅과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그 두 가지 평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평화(Shalom)가 필수적이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레 26:6-7)
a. 대적(對敵)을 없게 하심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b. 전쟁(戰爭)을 막아주심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c. 승리(勝利)를 안겨주심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C. 사람들과의 평화
그리스도는 평화(平和)의 왕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참 평화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원래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불화(不和)하다는 것을 앎으로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보다 완전한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깊어진다.
1. 그리스도의 모본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 그것은 두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구현되어야 한다. 교회(敎會)와 가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 속에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죄인(罪人)조차 불쌍히 여기시며 온유하게 대하셨다.
왜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죽으셨는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죽으셨다.
신자의 비전(vision)은 그리스도의 인격(人格)을 닮는 것이다.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인격으로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며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정의(正義)가 이루어지는 데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다.
2. 평화를 깨뜨리는 태도
a. 교만
몸에 밴 교만(驕慢)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게 한다. 유능한 사람에게 겸손을 발견하는 것은 비굴한 자에게서 자존감을 찾는 것만큼 힘들다.
교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사소한 일로 다툼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사소한 이견에 서로 쉽게 등진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 갖지 않는 것을 못 견뎌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면 그에게서 배우기보다는, 흠을 찾아내서 헐뜯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는 이미 그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진 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b. 자기중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共感)하기보다는 시종일관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은 평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 박수 받을지는 몰라도 친구는 없을 것이다. 자존심은 높지만 자존감(自尊感)은 낮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어두운 성장기를 갖고 있다.
부모나 가족에게 한 인간으로서 소중히 여김을 받은 경험이 없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가슴 벅차본 적이 없기에 남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 여럿이 모였을 때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의 뿌리는 자기사랑이다. 사람들과의 평화(平和)가 깨어질 때 거기에는 깨어지지 않은 자기사랑이 있다.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이다.
c. 무례함
거칠고 야비한 말투,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무례(無禮)한 태도는 사람들과의 평화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무례한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다. 이익(利益) 때문에 짐짓 그를 따르는 체하는 기회주의자들과 똘마니들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대신 거칠고 조잡한 인간을 보여준다. 이는 구원(救援)을 얻게 해주신 목적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
사랑이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사랑을 통해 먼저 겸손(謙遜)을 배웠기 때문이다. 상남자(上男子)는 남의 남자지 자기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사랑이 없기에 평화에 무관심하고 질서를 모르기에 무례한 것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의 평화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사라지고 악(惡)이 한계치에 달하면 땅은 사람을 토해버린다(레 18:28).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사람들과 불화(不和)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시 그 화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자기가 누구냐고 묻지 말라. 사람들 속에 있는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 거칠고 막된 성품으로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에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살았기에 땅과의 평화도 깨어졌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평화를 회복할 때다.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3 2022. 10. 19 가을말씀사경회 셋째 날
<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1-3)
I. 본문해설
땅과의 평화가 깨어짐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된다. 사람과의 평화가 깨어짐으로 악(惡)한 사회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평화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통해 만물의 평화를 주시고, 인간의 죄(罪)에 의해 평화가 깨어진 이야기다.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평화(平和)를 회복시키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땅과의 평화나 사람과의 화목은 모두 하나님(God)의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인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실현된다.
이 평화는 항상 인간에 의해 깨진다. 하나님이나 땅에 의해서 깨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계의 평화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는 것은 회개(悔改)를 통해서였고, 유지되는 것은 순종(順從)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평화가 회복된 때는 연애시절처럼 짧고 깨어진 배신의 때는 긴 세월이었다. 우리도 별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땅과의 평화를 잃은 고통(苦痛)을 통해서, 사람과의 평화를 잃은 소외(疏外)를 통해서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신다.
II.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
본문은 레위기의 결론(結論) 부분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선택하게 하신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게 하신다.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결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지키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A. 두 계명을 상기함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十誡命)에서 엄중히 명령하신 바였다.
십계명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핵심적인 의무(義務)였다.
이 중 하나님과의 종교적(宗敎的)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1~4계명이었다. 그것을 반복해 명령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킬 것을 촉구하신다.
1. 우상숭배를 금하심
첫째로, 우상숭배(偶像崇拜)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그것에 경배(敬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반하는 것은 또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첫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에 대한 해석(解析)을 비틀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었다.
*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출 32장)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形像)으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자주 받았다. 그들은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셨다.
여호와의 종교가 지성(知性)의 헌신을 요하는 종교로 남기를 원하셨다.
* 형상과 선교, 형상화와 미신
더욱이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심판받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않았는가?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우상숭배 때문에 그들이 받은 저주를 기억해야 했다. 다시는 그러한 죄에 빠지지 말아야 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그들처럼 심판받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간절한 심정을 느껴보라.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땅이 그들을 또 다시 토해내는 불행을 겪기를 원치 않으셨다. 악(惡)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탐욕(貪慾)의 산물이다. 이는 십계명(十誡命)의 구조와 수직선의 구조가 아니라 순환하는 원형(圓形)의 구조로 이해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욕망과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에 반항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상(偶像)을 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世上)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세상을 좋아하는 자기(自己)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랑은 자기사랑(self-love)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우상숭배이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와 공존할 수 없다.
2.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
둘째로,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모든 절기는 안식일의 연장이었다.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초실절), 장막절(초막절).
안식일을 준수하는 동기가 처음에는 창조(創造)였으나 후에는 구속(救贖)으로 전환된다. 육체로는 몸의 쉼을 통해 자연적 질서를 회복하고,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분주했던 세상사에 얽매였던 마음을 떼어놓아야 했다. 육체의 안식으로 영혼에 자유를 주어야 했다.
잠시 있는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知慧)를 함양해야 했다. 태어난 것들과 태어나게 하신 분을 구별하는 총명을 길러야 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모든 쉼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영원한 안식을 바라게 하심이었다.
땅과의 화목(和睦)을 통해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 사랑을 누리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주일을 잘 지키라.
B. 하나님과의 평화
1. 평화의 근원
모든 평화의 근원(根源)은 하나님이시다. 평화는 삼위일체 안에 있었다. 삼위의 평화를 본뜬 질서를 세상에 나타내셨으니 평화(平和)를 누리는 자가 행복을 맛본 자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는 없다. 당신과 평화를 누리는 자에게 땅으로부터 결실의 복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덕을 입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복을 누리라
2. 회복의 길: 悔改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삶은 불행하다. 땅과 불화하며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는 행복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평화를 회복하시려고 그리스도(Christ)께서 오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화목(和睦)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 평화를 주신다.
3. 평화 유지의 길: 順從
하나님과의 평화는 마음에서 위협을 받는다. 죄(罪)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며 대적이다. 불순종은 이것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다.
죄(罪)와의 사랑에 가까울수록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멀어진다. 그 징후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誡命)을 사랑한다. 계명은 그분의 목소리니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음성을 기뻐한다.
사랑은 의지(意志)의 일치다. 그것을 받아들임이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다.
이 계명들은 모양으로만 준수함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에서 비롯된 계명지킴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라. 평화(平和)를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 마음을 지키는 법이 없고, 마음을 지키는 데 공들인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명에 합치시킨다.
삶의 태도를 바꾸라. 은혜를 받으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평화를 회복하라.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4 2022. 10. 23 주일 낮예배
<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2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1-3)
I. 안식일의 계명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누릴 때 비로소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關係)를 맺어야 했고, 도덕적으로는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했다. 이를 위해 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종교적 관계와 도덕적 관계를 규정하는 십계명(十誡命)은 수직선이 이니라 원형의 구조이며 그 중심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켜 주신 두 계명이 있었다.
a.우상숭배를 금하심
b.안식일을 지키게 하심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2)
우리말 성경에서 “내 안식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샵베토타이’()인데, 직역하면 “나의 안식들”이다.
이것이 복수로 쓰인 것은, 이 단어가 안식이 선포되는 모든 절기(節期)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 “안식일”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안식일과 안식의 절기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위해 안식일이 이처럼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식은 영혼(靈魂)에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육체로 하던 세상일을 멈춤으로, 정신을 세속에서 떼어 놓으시기 위함이었다.
안식일과 안식일의 절기들은 예배(禮拜)와 교제, 감사와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사람도 제사와 회개(悔改)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회복하게 하신다.
다시 은혜(恩惠)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다시 영혼의 힘을 얻고 땅과의 평화를 회복한다. 사람과의 평화를 누리며 땅을 주신 소명(召命)을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자녀의 행복(幸福)이 거기에 있었다.
여기서 안식일과 안식의 절기들을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특이하게 강조되는 것이 있다. “경외하라”는 명령이다.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26:2하)
이 명령이 하나님 아닌 장소와 관련지어서 사용되는 것은 거의 유일하다.
“특별히 꼭 집어 성소를 경외하라고 한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성소의 순결함이야말로 바로 레위기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Gorden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328~329)
이것은 성소를 모든 부정(不淨)으로부터 보호하고, 성소에서 행해야 할 모든 봉사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 하듯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모든 규례를 지킬 것을 지시하신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성소(聖所)라는 장소, 모인다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쉬는 날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날임을 보여준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레 23:3)
거룩함/속됨은 지위(地位)고, 부정함/정결함은 상태(狀態)다. “성소를 경외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holiness)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뜻이다(레 19:2).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가 구별된 백성임을 상기(想起)하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두 가지, 안식일(安息日)과 성소(聖所)에 대한 명령이 무시되면서 깨어졌다.
하나님을 향한 내적(內的)인 사랑은 우상숭배와 안식일의 계명에 대한 외적(外的) 준수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II.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과 유지
모든 평화의 근원(根源)은 하나님이시다. 평화는 삼위일체(三位一體) 안에 있었다. 삼위의 평화를 본뜬 질서를 세상에 나타내셨으니 평화(平和)를 누리는 자가 행복을 맛본 자다.
하나님과의 평화(平和) 없이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는 없다. 당신과 평화를 누리는 자에게 땅으로부터 결실(結實)의 복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平和)를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덕(德)을 입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고 복을 누리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A. 회복의 길: 회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은 회개(悔改)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삶은 불행하다. 땅과 불화(不和)하며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는 행복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평화를 회복하시려고 그리스도(Christ)께서 오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화목(和睦)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關係)를 회복하고 다시 평화(平和)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 평화를 주신다.
B. 유지의 길: 순종
그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순종(順從)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마음에서 위협을 받는다. 죄(罪)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며 대적이다.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그 반감과 대적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다.
죄(罪)와의 사랑에 가까울수록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멀어진다. 그 징후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不順從)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誡命)을 사랑한다. 계명은 그분의 목소리니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음성을 기뻐한다.
사랑은 의지(意志)의 일치다. 그것을 받아들임이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다.
이 계명들은 모양으로만 준수함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love)에서 비롯된 계명지킴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라. 평화(平和)를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 마음(heart)을 지키는 법이 없고, 마음을 지키는 데 공들인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명(誡命)에 합치시킨다.
삶의 태도를 바꾸라. 은혜를 받으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평화를 회복하라.
1. 땅과 사람의 평화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레 26:4-5)
녹취자 : 김경애
I. 레위기의 개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레위기에 있습니다. 아마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조는 책이 레위기일 것입니다. 레위기는 매우 지루한 책으로 느껴집니다.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중심에 있습니다. 앞에는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있고 뒤에는 민수기와 신명기가 있으니 정확하게 한복판에 있습니다. 위치상으로만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의미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우리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재미없이 읽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지루하고 읽기가 힘든 이유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책에는 집안 이야기, 사건 사고에 관한 이야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 심지어 꿈꾼 이야기라도 나오는데 레위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짤막한 한두 토막의 이야기만 나오고 나머지는 전부 다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 법과 어떻게 백성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인가? 또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을 산에다 비유하면 창세기에서 산에 올라서 출애굽기의 중턱을 오르고 레위기가 산꼭대기이고 레위기에서 조금 내려오면 민수기가 되고 완전히 내려오면 신명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레위기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레위기와 친숙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레위기 전체는 무엇을 다루고 있습니까? 주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불결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오직 이 하나의 주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사실 출애굽기와 연장되어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가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무려 40%인 15장이 모두 성막을 만드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지루하기 시작한 것은 레위기 1장부터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막을 만드는 이야기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성막이 만들어지게 되는지는 지루하지 않은데 그 성막에 대한 세세한 제도와 구조에 대한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뭐가 이렇게 복잡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바로 그 성막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세계가 창조됨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물질세계에 담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만날 한 장소를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인데 그 에덴에서 처음 만드신 아담과 하와와 교제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귐이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는 없었지만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교육이 필요했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도 필요했습니다. 그 지혜와 사랑을 힘입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거기가 에덴이었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에덴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만날 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상실했습니다. 만날 장소를 마련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인간과 본격적으로 만날 마음을 가지시고 만든 장소가 성막입니다.
성막은 제2의 에덴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데 성막에 나오는 각양 양식과 장식들이 에덴동산에서 따온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식물부터 모양까지 그렇게 해서 성막을 만드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성막이 그냥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텐트가 아니라 이것이 엄청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막입니다. 이제 성막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두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천막이라는 것은 건물에 비하면 후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건물을 지으라고 했으면 가나안으로 이동하는 곳마다 계속 건축을 하다가 볼일을 못 봤을 것입니다. 지어놓은 성전은 또 관리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동식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거룩함의 의미는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성전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막보다 더 거룩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성막을 만들어 놓으니까 하나님이 그 성막에 임재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인간과 만날 장소를 잃어버린 후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과 함께 교제하고 싶어 하셨습니까? 또 인간은 하나님과 그렇게 교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성막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큰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서 그 거룩한 사람인 모세조차도 그 성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엄청난 격차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 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아니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시기 위해서 에덴을 대신해서 성막을 만드셨는데 그래서 그 성막 이름을 회막이라고 합니다. 회(會)자는 모인다는 뜻입니다. 누가 모입니까? 사람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성막에 못 들어가면 그 장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인가 불결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그 더러움을 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만들어야지만 성막이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하시는지를 레위기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결한 죄인인데 어떻게 모세조차도 접근할 수 없었던 그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방법이 바로 제사를 통한 속죄였습니다.
레위기가 길게 되어 있지만 두 토막으로 나뉩니다. 27장으로 되어있는데 1장부터 16장까지는 제사와 의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장부터 27장까지 두 번째 토막입니다. 그 열장은 생활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두 가지만 머리에 넣고 있으면 됩니다. 전반부는 제사와 의식인 불결로부터 어떻게 정결해지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고 17장부터 27장까지는 거룩함, 절기, 성막 그리고 서원과 헌신이고 바로 26장에서 다루고 있는 복과 저주 같은 것들이 후반부에 담긴 내용입니다. 세미한 것은 그냥 정리해버리고 1부는 제사와 의식을 다루고 2부는 생활과 윤리를 다룹니다. 그러면 눈치채실 것입니다. 뭐냐 하면 불결한 죄인은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 정결케 하셔서 감히 성막에 들어오게 하신다. 두 번째는 그 성막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러나 그 성막에 들어오는 자에 합당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것에 레위기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오늘날 예수를 믿은 다음에 구원을 얻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주제라면 구원 얻은 성도가 어떻게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이런 형식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조건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두 기둥과 같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는 거룩함이고 하나는 정결함입니다. 거룩함의 반대는 속됨이고 정결함의 반대는 부정함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은 지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거룩함은 지위이고 정결함은 상태입니다. 지위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위는 한번 차지하면 변하지 않습니다. 상태는 변합니다. 구원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거룩함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한번 구원을 얻은 그 지위에 비할 수 있고 정결함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지만 불신자 비슷하게까지 도덕생활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서 잘 경건생활을 하면서 살면 아주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정결하시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이 구별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 거룩한 백성의 반대가 속된 백성인데 그 속된 백성들이 당시의 이방인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구약에서 인간을 차별하는 것처럼 이방인과 교제를 철저하게 미워하시고 단절시키려고 애쓰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속된 사람들을 아주 무가치하고 더럽게 여겨서가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교류함으로써 그들의 속됨에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거룩한 백성이었는데 문제는 이 거룩한 지위에 어울리는 삶을 잘 못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욕먹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은 좋지 않고 부끄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새벽에 설교했는데 눈물을 많이 흘리고 새벽에 기도하고 회사에 나가서 오후시간에 탈세 장부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새벽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학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에는 1시간을 일하고 2시간이라고 쓰고, 2시간 일하고는 3시간 일했다고 쓰는 것이 서슴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겠다고 나온 사람들이 불법 주차를 해서 예배시간에 수없이 전화가 와서 처음부터 육두문자로 시작해서 욕에 욕을 퍼부으면서 차를 빼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 것들은 벌써 윤리적인 생활이 자신의 지위를 못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관심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거룩한 백성이지만 언제든지 정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부정하게 되면 다시 하나님과 사귈 수 없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다시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냐를 다루는 것이 바로 제사를 통한 속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가 왜 그렇게 지루한 제사와 의식에 대한 법칙들로 가득 차 있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레위기에 보면 부정하고 정결한 것에 대한 수많은 조건들이 나오는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정하셨는가? 그래서 이 질문이 굉장히 답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가 생리를 하게 되면 불결한 자로 취급을 받고, 시체를 만져도 불결한 자로 취급되어서 일정기간 성소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금하신 동물이나 이런 것들을 만졌을 경우에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을 만들었을까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간단하게 대답하는 학자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냥 하나님이 까다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이다 같이 시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규칙을 까다롭게 해놓음으로써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주의 깊음은 공경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애들이 ‘누나 나 물 좀 줘’ 그러면 ‘옜다’ 그러면서 툭 올려놓지만 어른이 달라고 하면 컵을 바쳐서 살살 가져가고 진짜 높으신 분이면 이것 가지고 모자라서 쟁반까지 담아서 가져가는데 애들한테 주다가 넘어져서 쏟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되지만 자기가 존경하고 공경하는 분 앞에서 넘어져서 쏟아져 물이 흘러서 물이 그분의 옷에 튀었을 때에는 그런 일을 당한 당사자는 인간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너무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공경하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공경하는 마음이 별로 없고 존경하는 높은 분에게는 공경심이 있기 때문에 주의 깊음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주의 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까다롭게 만드셨다는 해석이 가장 단순한 사이다 해석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 설명을 들으면 일리는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는 이렇게 복잡한 규칙이 하나님이 심술을 부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설명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때 대개 학자들이 세 가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까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것 이외에 첫째는 이렇게 해놓으신 것은 하나님이 원래의 그 땅에 있었던 가나안족들의 종교생활과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을 완전히 구분해 놓으시기 위해서 이렇게 까다로운 법칙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정하실 때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신을 믿고 살았는지를 너무나 잘 아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쉽게 이방신들에게 오염되는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까다로운 규칙을 정하셔서 가나안 종교의 생활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이것과 함께 이 속에는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생과 섭생학적인 고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체를 만졌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이 모이는 성소에 못 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있습니까? 시체를 만지면 그때는 균을 알지도 못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병균에 오염되거나 바이러스에 오염되는 위험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위험을 차단하는 위생적이고 또 어떤 음식은 먹거나 먹지 말라고 할 때 그것이 섭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까다로운 규칙이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이 추가됩니다. 그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나오는 것은 어떤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명백하게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 지를 답변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그것을 까다롭게 지키면서 우리가 성소에서 만나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배려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제단을 쌓을 때 정으로 쪼고 다듬는 그런 돌은 쓰지 말라.’ 부터 시작해서 세세한 명령이 나오면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대게 이 4가지 전제의 빛 아래에서 조명을 받으면서 각각 합당한 해석을 해나가면서 레위기를 읽는다면 많은 어려움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고 읽고 나면 아주 놀라운 감격이 이 레위기 속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레위기에 나오는 명령들이 있는데 오늘날 어떤 것은 계속 따라야 하고 오늘날은 안 따라도 되는가 하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가 도덕법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의식법입니다. 이것은 제사와 예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시민법입니다. 왜? 그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일체를 이루었으니까 어쨌든 종교인인 동시에 시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법이 없어서 무조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아니면 남의 소를 훔쳐다가 자기의 소라고 우기고 땅을 침범하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런 규칙들을 정해서 형벌로 다스리게끔 만들어 놓은 것을 시민법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의식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종료되었습니다. 시민법도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속에 있는 어떤 정신과 원리는 우리들이 지키지만 조항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리를 하고 마지막 한 가지만 문제가 되는데 도덕법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항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영구히 우리들이 지켜야 할 유효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결국은 이 십계명을 자기의 시대에 맞게끔 설명하고 가르치신 것이 예수의 가르치심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팔복에 대한 선언으로 말씀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산상수훈의 첫머리입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면 저 십계명을 마구 짓밟으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팔복의 사람이 바람직한 한 인간의 내면의 구조를 보여준다면 그런 내면의 구조를 가진 사람이 외면적으로 어떤 삶을 실천하면서 살까? 할 때 그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면 그 내면의 구조와 외면의 삶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팔복의 인격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삶이 십계명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가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26장은 유명한 장입니다. 하나님이 이 법을 모두 선포하시고 거의 결론 부분으로 들어가십니다. 결론 부분으로 들어가시면서 하나님이 이 말씀의 규례를 따라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고 이 명령을 따라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 마치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내용의 예고편처럼 또렷하게 보이고 사실 27장은 레위기의 부록과 같은 장인데 거기에서는 서원과 예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26장이 대 결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경회에서 평화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우리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이 평화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첫 시간에는 땅과 사람의 평화를 다루고 두 번째 내일은 사람과 사람의 평화를 다루고 마지막 셋째 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시간으로 땅과 사람의 평화를 다루려고 합니다.
II. 땅과 사람의 평화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다루는 26장 첫머리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평화’ 즉 ‘샬롬’입니다. 이 평화가 총체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평화라는 말을 씁니다. 복잡하고 힘든 일을 끝내고 이제 마쳤다고 소파에 기대면서 음악을 틀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정말 평화롭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아주 고단하게 일하다가 휴가를 가서 바닷가 해변에서 베드침대에 누워서 오렌지 주스 한잔을 마시면서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진짜 평화롭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평화의 모상입니다. 진짜 평화를 닮은 것입니다. 그 평화는 그것보다 훨씬 더 통일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옆으로는 이웃과의 평화이고 아래로는 자연과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없고 사람 사이에 갈등이 다툼이 없고 아래로는 자연과 갈등과 다툼이 없는 평온한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구분은 되는데 두 개가 서로 찢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세 개의 평화가 삼위일체로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평화는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격으로 계시는데 그 안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기쁨이 평화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그 평화를 당신이 창조한 이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누리고 그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평화가 없으면 사실 행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읽었던 서울 쥐와 시골 쥐 이야기가 생각나십니까? 시골 쥐가 서울 쥐 집에 초대를 받아서 올라왔는데 진짜 보지 못하던 먹을 것을 주고 기가 막힌 집에서 살고 물론 집구석에서 기생충처럼 사는 것이지만 못 보던 것을 보고 서울 구경을 많이 하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는데 수시로 주인이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놈의 쥐가…….’ 하면서 꽝하고 벽을 치는 소리가 나면 도망을 가야 하는 광경을 보면서 시골 쥐가 서울을 떠나면서 ‘이런 것 없어도 우리 시골은 편안한데…….’ 시골사람들은 쥐를 거의 친구처럼 생각합니다. 왔다 갔다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러고 특히 불교 믿는 분들은 아예 불쌍히 여겨서 먹을 것을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면서 삽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우리 집 바로 뒷집이 콩나물공장이었는데 콩나물 대가리가 많이 나오니까 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쥐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안 나면 수면에 지장 받을 정도로 거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쥐가 있습니다. 자다가도 천장에서 오줌을 싸서 천장이 찢어지면서 새끼하고 어미하고 한꺼번에 우르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평화라는 것이 결국 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다루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땅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인데 그곳에서 땅과 평화를 못 이루고 살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평화는 원래 언약관계를 기반으로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할 때 하나님과의 평화는 지켜집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도 똑같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아내가 남편의 말을 모두 들어준다면 평화롭습니까? 안 평화롭습니까? 평화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가능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그 가정이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 대화를 해서 불가능한 것을 남편에게 설득해서 포기하게 하고 아무리 기대를 걸어보아도 안될 것은 아내가 스스로 포기하면서 그러면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야지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언약관계를 지킬 때 평화는 지켜집니다. 그래서 땅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는 마지막 날 설교할 하나님과의 평화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절대로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 평화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사회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사회의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때 자연과의 평화도 이루어집니다. 저는 요새 학의천 쪽을 걷습니다. 대공원을 가는데 아는 사람 여럿을 만났습니다. 피해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도로 쪽을 걷는데, 가면서 학의천을 봅니다. 옛날 30년 전쯤이면 밤중이면 등불 들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안 잡습니다. 가다가 가만히 보면 꽤 큰 물고기가 돌아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먹고 살만하니까 횃불을 들고 고기 잡으러 가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니까 자연을 덜 괴롭힙니다. 그래서 하천에 고기들이 많습니다. 고기들이 많아도 사람들이 거기서 가지고 가서 잡아먹을 정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A. 땅을 의존하는 인간
땅과의 평화는 인간의 생존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땅이 먹을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땅을 의존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되면서부터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도록 지정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입니다. 나중에는 동물도 먹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해서 땅이 저주를 받아서 심은 대로 열매를 못 거두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이 되는 피 째 먹는 것을 절대로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인간은 동물들을 살육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동물들과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이 먼저 변심한 것입니까? 동물들이 먼저 변심한 것입니까? 인간이 먼저 변심한 것입니다. 왜? 동물들은 전혀 인간의 먹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친구처럼 공존하는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의 공생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천적도 있지만 공생관계에 있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것, 이렇게 해서 사이좋게 함께 살면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던 것이 창조 당시의 모습입니다. 인간도 모든 동물들과 그렇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게 생각하던 개를 식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살육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동물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격을 해야 되는 처지가 됩니다. 내일 나오는데 뒤에 보면 짐승들을 쫓아내 주신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당시에 굉장히 많은 사자 같은 것들이 가나안 땅에 많았답니다. 우리나라에도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재난 가운데 하나가 호환이었습니다. 호환이 무엇이냐 하면 호랑이로 말미암는 환난이었습니다. 호랑이가 물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땅과 인간이 큰 갈등 속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세 관계 땅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구분될 수 있지만 전체가 하나처럼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가 깨졌으면 이것은 볼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진 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을 캐 들어가면 깨뜨려진 인간관계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수없이 나타나고 자연에 대한 관계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 땅은 인간에게 정복되고 다스려지도록 인간을 의존하는 지위에 있었는데 이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대항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인간이 정말 훌륭하게 자연을 지배하는 것 같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일본의 수족관을 보면 10톤 가까운 고래를 잡아다가 어항 속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잡아넣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100kg도 안 되는 인간이 5톤, 6톤 되는 코끼리를 자유롭게 부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노동을 시키고 심지어는 죽여서 상아를 뽑기도 하고 호랑이를 포획하는 모든 일들을 다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지만 그러나 자연은 더 이상 인간에게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합니다. 이번에 몰아닥친 코비드나 허리케인 같은 것을 볼 때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면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강남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갈등하고 저항하는 자연의 위협에 인간이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 인간과의 화해와 함께 자연과의 화해가 절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인간이 이기적인 탐욕과 교만으로 땅을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유명한 작가에 의하면 인간이 지구에 빨대를 꼽고 까만 주스를 빨아먹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석유를 채굴하기 위해서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산업혁명 이후에 소비에 대한 욕망이 엄청나게 폭증하면서 가속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20년 전을 기준으로 오늘날 중산층의 사람들이 누리는 생활이 17세기에 왕족들이 누렸던 소비생활이랍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소비하고 진짜 플라스틱이나 이런 것을 소비하는 것을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한번 쓰고 버리면서 편리성을 위해서 자연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플라스틱을 비롯한 이러한 물질들이 전 세계를 전부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해류가 전 세계를 한번 휘감아 도는데 천년이 걸립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정확한 환경문제에 대한 대담한 조치가 없이는 지금 우리가 겪는 환경의 재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몇 백 년 후, 본격적으로 800년이나 900년 후에는 지구상에 오렴되지 않는 땅은 하나도 없는 심각한 오염의 상태에서 인간은 그것을 다시 빨아들이고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질병들이 생겨나면서 인간은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더욱 더 땅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 더 많은 소비를 천체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물론 바다 속에서도 가져오지만 기본적으로 땅에서 자연을 훼손하면서 소비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자원의 고갈, 지구 온난화, 기후 위기라는 재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두 가지였는데 전쟁과 굶주림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이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시는 첫 번째 양식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만나가 제시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육체로 만나를 먹는 것은 곧 말씀으로 영혼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예표 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관심사 자체가 인간의 영혼에게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만나가 어디로부터 내려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로부터 내렸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베푸신 것이니까 말입니다. 결국은 먹는 것이 땅에서 채취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흉작이 들었을 때 자연재해로 농사가 망가졌을 때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것을 거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땅이 식물을 줄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돌보십니다. 양식을 자연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 같아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햇빛과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에게 내려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나오는 바입니다.
B. 비를 의존하는 대지
결국은 인간은 땅을 의존하는데 대지는 비를 의존합니다. 그래서 26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철을 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강수량이 많은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리면 파종을 하고 늦은 비가 내리면 그 물을 먹고 마지막으로 곡식들이 무르익어서 추수를 하게 됩니다. 이 비가 정확하게 철따라 내리는 이것은 관계시설이 없던 그 당시에는 농사에 있어서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 옛날에 있던 계단식 논인 천수답을 생각하면 됩니다. 물을 싣고 갈 수도 없고 그냥 하늘만 바라보면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은 스스로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비와 햇빛이 필요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결실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그것을 당신의 질서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 상호 의존하며 인간은 땅을 의존하고, 땅은 하늘의 비와 햇빛을 의존하고, 그리고 그 햇빛과 비를 받아서 식물이 열매를 맺고 그것이 인간에게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의존의 맨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땅과의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야고보서 1장은 말합니다. 창조주께서 주시지 않으면 어떤 좋은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어찌하여 악인들이 이 땅의 많은 부를 누리고 의인이 궁핍하게 사는지에 대한 의문에 모두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신자는 땅의 자원은 내 힘으로 얻는 것이고 하늘의 자원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는다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돈을 벌고 이 땅에서 내가 먹고 사는 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영육간의 모든 삶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은혜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존을 위한 모든 물질적인 조건들도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인정하지 않지만 신자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구약에서 복을 이야기할 때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그 안에는 정신적인 복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악인들이 어마어마한 물질을 가지고 번영하는가 하면 욥과 같은 의인이 완전히 망해서 거지가 되는 것 같은 장면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 땅의 열매를 누리지 못했을까? 에 대해서는 우리가 완벽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숙제로 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의 번영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지만 악인의 번영도 때로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적으로 딱 잘라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부자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는 이런 공식을 도입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해석하는 학자들도 직면하는 어려움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학자들은 아예 여기에 나오는 이런 모든 물질적인 복을 보지 말고 이것은 미래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적인 복으로만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맞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누렸던 물질적인 복은 신약시대에 하나님 안에서 누릴 많은 영적인 복과 혜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경건하게 살던 사람들이 누렸던 많은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할 때 적당한 대답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번영하게 한 후에 하나님이 아주 준엄하게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보여줄까? 그러면 가난하고 궁핍하고 힘겹게 사는 악인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정리를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고 부하게 사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게 살아도 나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 있고 내가 부유하게 살아도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자신이 잘 못살게 되고 어렵게 되고, 궁핍하게 되었을 때에 이것이 혹시 내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땅과 불화한 가운데 내게 다가온 재난은 아닐까? 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는 자신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이 필요하냐 하면 그렇게 깊이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 속에 있고 궁핍 속에 가난하게 살지만…….’ 저도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충만하게 느끼면서 살아서 그 가난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의심할 정도로 힘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그것을 충분히 극복하고 남았습니다. 그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극복하고 남고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든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희망은 반드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복을 주실 것이고 혹시 내 생각에 그래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평화를 누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져보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네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니까 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구나!’ 하며 이런 식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한번 극도의 궁핍함에 처하고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에 대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의 자세는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거기서 그렇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위로를 받을 것이고 그 고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받을 것이고 맞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 못살았기 때문에 열심히 헌금도 안 하고 구제도 안 하고 모았지만 알고 보니 구멍 뚫린 전대였고 나만 먹고 살겠다고 끊임없이 물을 모았지만 그것은 저장할 수 없는 웅덩이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때 땅과의 평화가 깨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어떻게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어려움을 만날 때 허둥거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패착에 패착을 거듭하게 됩니다. 바둑을 둘 때 졌으면 끊임없이 진 것을 가지고 복기를 해보듯이 생각 속에서 복기를 해보는 것입니다. 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나? 그리고 이 상황이 왜 전개되었는가? 복기해 보면서 어디에서 내가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즈음에서 그런 땅과의 평화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하게 사는 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삶을 인정하고 계신 증거라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간에 신자는 모든 물질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물질보다 더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C. 땅과 평화: 배부름과 안전
그러면 그 다음에 땅과의 평화입니다. 땅과 이스라엘 백성이 평화를 누릴 때 그때에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어느 정도 적대관계에 있게 됩니다. 지금 보면 문제가 들짐승들이 내려와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자꾸 잡아먹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잡아먹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농장주들이 더 많이 농사의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예전에는 짐승들이 사는 숲이 있고 사람이 사는 숲 사이에 완충지대가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처럼 말입니다. 동물들도 잘 오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도 잘 안 들어가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접촉을 완화해 주는 지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생깁니까? 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에 자본주의를 공부할 때 다 보았지만 우리들이 식품을 살 때 농부들이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는 장면도 나오고 볏단을 끌어안고 활짝 웃는 장면도 나옵니다.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런 농사는 없습니다. 지금 누가 곡괭이질을 합니까? 추수한 것을 끌어안습니까? 기계가 다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면적을 넓히면 생산량이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놀리지 않고 산림을 파괴하면서 계속 들어갑니다. 세계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도 계속 파괴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소공급량이 줄어듭니다. 들어가면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인간과 직접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보면 멧돼지들이 내려와서 현금인출기를 깨고 들어가고 은행에도 뛰어 들어가서 포획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을 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개체수도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땅과의 평화가 깨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입니다. 그냥 단순히 자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를 생각합니다. 내가 경제적으로 너무 곤궁하고 육체의 삶의 심각한 위협을 받을 정도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때 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땅은 단순히 물질로써의 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전부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 그래서 땅은 정확하게 인간들이 땅이 있으면 그 위에 인간들이 살아갑니다. 인간이 자기를 밟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땅은 관심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만약에 땅이 땅위에 인간이 아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땅이 호응을 해줍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불화가 일어나고 이 속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땅이 계속 나쁜 결과를 내어놓고 마지막에는 땅이 사람을 확 토해버립니다.
미국에 갔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근처에 있는 공원을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갔는데 수백 년이 된 나무를 횡으로 잘라서 나이테를 보이게 세워 놓았습니다. 실제 나무를 썩지 말라고 니스 칠을 해서 잘 보존했는데 그 나이테에다가 연도를 다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이고 힘든 시기의 나이테와 평화로운 시절의 나이테의 모양이 다릅니다. 제가 거기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또렷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2차 대전 때, 남북 전쟁 때, 그럴 때 나이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보아서 그러지 모르겠지만 평온한 때에는 이 나이테가 넓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겨울에 자란 나이테는 선을 그리고 여름에 자란 것은 쭉 나무를 통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의 간격이 좁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으면서 나무 무늬가 아주 촘촘합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성경적인 사실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 비슷한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운명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허리케인이나 자연재난을 통해서 어느 지방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죄가 컸으면 죽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신학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단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과연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땅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땅과 온전한 평화의 관계를 못가지고 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평화에는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생각할 필요는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욕망을 가지고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시키면서 땅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땅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우리가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땅이 생각하기에 기분 좋은 사회가 될 때 하나님은 이 땅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풍족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자, 레위기 26장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작물을 심으면 그 작물을 거두고, 포도를 심고 또 포도를 거두고 또 작물을 심고 하면서 다시 계속해서 열매를 냅니다. 그런데 흉작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음식물로 쓸 수 있는 것들이 귀해지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당연히 음식이나 식품의 값이 폭등하게 됩니다. 그러면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아주 각박하고 범죄율이 급증하게 됩니다. 인간이 악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임금까지 끌어내리고 나라가 아주 부서지는 일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4대강을 끼고 있는 문명의 지역에서 왕들의 최고 관심사가 치수입니다. 어떻게 물을 관리해서 이 농작물을 풍성하게 추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땅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 땅과 평화를 누리는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공급해서 부족함이 없이 살게끔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땅과의 평화는 땅에게 아부를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면서 그 땅과 화해하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줄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을 동안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성벽도 없고, 보호해 주는 요새도 없습니다. 왜? 내일이면 이동할 테니까 그런 것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기습해 들어와도 그냥 다 뚫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주셨다는 것은 이제 그 땅에서 정착하기 때문에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성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농경생활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만나를 주셨지만 그것은 비상조치이고 결국 한 나라가 존속하려면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목축과 이런 산업을 일으키면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나라가 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땅을 주신 축복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땅을 바라던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리던 평화였습니다. 땅을 주심으로 그들은 더 이상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받을 두려움이 없고 짐승은 제거해 주시고 이민족의 칼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평화라는 안전이 없다면 배부른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은 배를 두드리며 먹지면 저녁이나 내일은 다음 주는 보장할 수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탈출해서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고 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된 것은 맞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농경문화를 이루면서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절 말씀이 나옵니다.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3) ‘만약 준행하면…’이라는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거기서 영적으로 복을 받고 번영을 누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가나안 땅에 심으신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신 책이 레위기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빼놓고 대부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 백성들인가? 하는 것과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불결해지기 쉬운 존재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다시 정결해져서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을 말하는 데에 성경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레위기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은 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때보다도 더 혼란스럽고 불행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룩함이라는 지위는 얻었는데 정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혹은 불결한 채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상적인 축복은 땅과의 평화를 통해서 왔고 땅과의 완전한 평화는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사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모순입니다. 아니 약속의 땅에 왜 기근이 옵니까? 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재앙이 덮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무엇인가 약속한 땅으로 갔는데 흉년이 든다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갔는데 재앙이 덮칠 때에는 뭔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 이것들이 깨어진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번영과 안전에 대한 약속은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누릴 영적인 부요와 안전을 바라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궁핍하게 하시겠습니까? 거기에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반드시 희망적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면 하나님이 나에게 다시 은혜를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것만큼, 사람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만큼, 땅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나에게 풍족하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물어 메마르고 땅이 산물을 내지 않아 배고플 때에 땅과의 관계를 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깨어진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고통 받을 때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면 다시 땅과 화목을 회복해 주시고 땅은 그들을 위해서 소산을 내주게 해주신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 7:14)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드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박살나고, 땅과의 평화는 산산조각나서 기근과 굶주림 외적의 침입으로 피 흘리고 죽어가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의 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거룩한 백성으로 그 지위로 우리를 올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무슨 말을 하든지 누구와 함께 사업을 하든지 또 어떻게 행동하든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내가 포기하고 버릴 수도 없고 이것은 일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지위이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지위를 주신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높은 지위를 가지고 하인들이 깨끗이 청소한 집에서 수많은 시종들의 섬김을 받으며 살던 귀족의 자제가 헛간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것과 원래 머슴으로 구르면서 살던 사람이 어제와 똑같이 헛간에서 사는 것 중에 누가 더 속편하게 잠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평소에도 그렇게 살던 머슴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한번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정결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거룩함이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지위도 갖고 불결하게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선택된 거룩한 백성들만 만날 수 있지 이방인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받은 백성들 모두가 성막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백성들만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왜? 그들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여러분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불화를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친히 죽으시고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자기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시도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제사도 그들을 정결케 할 수 없었고, 율법을 지키는 모든 열심도 모두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자기가 깨끗케 된 사람, 그것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 피로 말미암아 불결했지만 다시 정결해질 수 있었고 속되었지만 거룩한 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정결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중학교 때 부모님이랑 세를 들어 살았는데 옆집 주인할머니가 무지하게 저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때였습니다. 전도했습니다. 젊은 사람 같으면 한번 말싸움이라도 해보겠는데 할머니가 자꾸 그러시니까 피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얘야 남준아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개뿔 살아있기는 뭐가 살아있어? 나는 무신론자인데……” 그 할머니는 무신론자라는 단어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줄까?” “말해보세요.” “내가 말이야 그렇게 술을 좋아했단다.” 할머니가 말술을 드시고 담배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펑펑 울고 회심을 하셨는데 이제는 술을 앞에 놓으면 토가 나온답니다. 담배 냄새가 자기를 너무 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저도 21살에 회심했는데 5년 동안 담배가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할머니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에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났는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확실한 증거를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불결한 삶을 살았었는데 이렇게 예수를 믿고 정결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며 “나는 평생에 술을 못 끊으리라고 생각하고 담배를 위안으로 삼으면서 살았는데 절대 못 끊는다던 그것이 하루아침에 끊어지더라.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니? 네가 한번 생각해 보아라. 예수 믿어라. 예수 믿으면 참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생각에는 땅과 불화하게 살면서 고통을 받는 이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변화되는 것도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하나님이 그것을 끊어 놓으실 수 있으십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께 돌아오는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시켜 주시고 또 그 회복된 평화 속에서 땅과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분께로 돌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땅과의 평화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 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레 26:6-7)
녹취자 : 허혜숙
I. 본문해설
어제는 땅과의 평화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이 땅과 평화를 누릴 때 땅은 제 때에 비를 맞고 풍성한 작물을 내어 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것은 세 가지 평화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제 사람과의 평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풍족한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땅과 평화를 누릴 때였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소명을 따라서 살게 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경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겪는 고통 중 많은 부분이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 때문입니다. 편안히 예배드리는 이 환경도 누군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과의 평화는 그래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과의 평화는 땅하고 무엇을 계약을 해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수직적인 평화와 수평적인 평화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닮았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래로 땅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탐욕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욕망을 가져도 땅과 함께 평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수직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지혜를 보면 감을 다 따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따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그것을 까치가 와서 먹게 둔다고 하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힘들어서 못 땄을 것 같습니다. 장대를 가지고 따보니까 꼭대기에 있는 감은 마음껏 따가라고 장대를 주는데 딸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생태계를 향한 동정심과 자비심을 가르쳐왔던 것입니다. 그 뜻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삶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이 땅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라 그러면 메아리가 되어서 땅을 통해서 그 복이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와 거기서 비롯되는 땅과의 평화 이것이 수직적인 평화이고 이 수직적인 평화를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누려야 할 평화가 있었는데 수평적인 평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 사이에 불화하고 포악한 사회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땅과의 평화도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는데 그 안에 있는 가나안 백성들이 아주 포악하고 악해서 하나님에게까지 그 악이 상달이 되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랬습니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때로 징벌하기 위해서 땅의 소산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흉년이 오게 한다든지 메뚜기가 기승을 한다든지 혹은 풍재가 일어나가지고 한발이나 가뭄이 일어나서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메마른 땅이 되어버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금년에 지은 죄에 대해서 금년농사를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인내하시면서 기다릴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땅이 가나안 족속을 토해버렸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오게 해서 가뭄이 들어서 땅의 작물을 먹지 못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칼날에 멸망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결국 땅에서 일어나는 재앙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땅과 평화를 유지해야 했고 그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 사회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신 이유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유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따르는 평화의 공동체였습니다.
A. 땅을 주신 뜻
그래서 오늘 다루는 주제는 사람과 사람의 평화입니다. 자, 그러면 어제에 이어서 하나님이 땅을 주신 뜻을 이 주제의 빛 아래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 때 가나안 땅은 미개발 지역으로 남아있는 텅 빈 공터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물려받을 가나안 땅은 광야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되지 않은 농업 문명을 이루고 이미 벌써 철기 문화를 받아 들인 타이트 족속을 비롯해서 가나안 원주민이 발달된 문명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역사적으로 거기가 메소피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의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소피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 사이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가 꽃피던 그런 문명의 배꼽에 이스라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맨 처음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서 갔을 때 그때 받았던 그 충격은 아마 시골에 사는 사람을 강남 한 복판에 갖다 놓은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강력한 민족들이 다스리고 있던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그들과 싸워서 도저히 이길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열 두 지파의 정탐꾼 중 열 명이 거짓말로 보고를 하면서 그 땅을 악평을 하면서 그렇게 싸우면서까지 거기 들어가야 할 가치가 있는 땅이 아니다 라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길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미 그 사람들의 신장이나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도 안 되는 병력과 성, 방어시설, 공격시설, 무기 모든 것들이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증언을 하고 4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그렇게 하나님의 징계로 그렇게 광야를 방황하면서 그 애굽에서 탈출한 세대들이 거의 모두 죽을 정도까지 그렇게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징계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성숙하게 훈련시키셔서 가나안 정복 직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가장 순수하던 상태에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연애시절이라고 회상하던 때가 아마 그 때였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이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그 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광야생활의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이 결코 의롭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셨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이 더 정의롭고 훌륭한 백성이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의 악이 하늘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9장 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누리고 있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이 악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물론 없고 사람들과의 평화도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땅이 참다가, 참다가 가나안 백성을 토해버린 것입니다. 땅에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보는 중요한 구도입니다.
그들은 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땅과의 평화가 깨지자 그들은 멸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악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그 때까지 참으셨다가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경륜이 있으셨습니다. 그 경륜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음 성경구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코 너희 이스라엘에게 저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 그것도 이스라엘이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강력한 민족이 살고 있는 그 노른자의 땅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저들을 쫓아내시고 멸하시고 너희에게 그 땅을 주셨는데 착각하지 마라, 너희에게 무슨 장점이 있거나 정의롭거나 혹은 너희가 훌륭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강조하시면서 그러면 그것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각각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성격이 좀 다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맺은 언약 중 가장 으뜸 되는 언약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 때에 그 언약이 최초의 언약이면서 최고의 언약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때 모든 조상들은 다 유리하는 나그네였습니다. 땅이 없는 설움을 알았고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었는데도 아내를 묻을 땅이 없어서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아내를 묻어야 했습니다. 나그네였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곤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너무 귀하게 보셔서 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도 은혜였고 또 아브라함이 순종했는데 그 자손이 그 땅을 그 오래 전에 한 그 조상과의 약속을 통해서 물려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결국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 하신 것입니까?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정의롭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악해서이다, 그래서 너희는 절대 그 땅에 들어가서 땅과의 평화도 깨지 말고 사람들과의 평화도 깨지 말아라. 두 번째가 무엇이냐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그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릴 때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은혜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을까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단칸방에서 지하에서 살 때에는 월세라도 좋으니까 지상으로만 올라가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지하에서 살아보니까 여름에는 옷 전체가 곰팡이가 생깁니다. 비위생적입니다. 올라옵니다. 올라와서 월세를 주고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면 매월 월세를 내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전세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갑자기 단칸방 사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제가 한참 어려울 때 한 방에서 여덟 명이 잤습니다. 발을 부채꼴로 펼치고 잤습니다. 서양속담에도 있습니다.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집을 사면 일주일이 행복하답니다. 말을 사면 한 달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얼마를 살다보면 이 집이 좁게 느껴집니다. 더 넓은 집에 살고 싶고 넓은 집을 살다보면 낡습니다. 그러면 새 집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새 집에 들어가면 정원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잊어버렸습니까?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대로 다 점령한 것입니다. 포도원이고 집이고 심지 않은 포도를 따서 먹고 그 작물을 거두어들일 그 때까지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 때 첫 번째 추수를 하면서 그 만나가 아무리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적인 양식이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40년을 먹었는데 지겹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곡물을 추수해서 그 곡식으로 요리를 해서 먹을 때 그 첫 번째 식사의 감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가 밥을 먹게 되어도 감격하고 눈물이 나는데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격이 며칠이나 갔겠습니까? 그것이 이스라엘 족속이었고 그 이스라엘의 족속이 매우 특별한 족속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땅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특징은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고 땅에 대한 고마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땅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와서 그렇게 궁핍하고 자연으로부터 재앙을 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거기에 심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매일 매일 자기가 이렇게 살아가는 현실이 꿈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었는데 질병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설명을 했지만 군대에 가서 정찰기를 타고 어떤 집사님이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났는데 1년이 넘도록 병원에 있다가 살아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때 그 감격이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그런 감격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나야지만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있으면 매일매일 현실이 꿈꾸는 것 같은 감사함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세상 자체가 너무 아름답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볼 때 나쁜 일이 일어나도 이 나쁜 것을 반드시 좋은 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확신이 이 마음속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현실 모든 것 자체가 너무너무 감사한 제목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서는 이 사랑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자냐?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있느냐? 아닙니다. 미인이냐? 아닙니다. 젊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돈이 많냐? 아닙니다. 뭐가 많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매일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찬송의 제목입니다. 찬양의 바다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정말 가슴이 벅차도록 정말 목이 메이도록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 그것이 언제였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저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때가 언제였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주는 선물입니다. 그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땅을 대한다, 땅을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습니다. 탐욕을 가지고 땅을 그렇게 괴롭히고 그 땅에 고통을 주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람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따라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맨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감격은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BTS가 한 번 인터뷰를 하는데 그 멤버 중의 하나가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인가? 자기는 매일 눈을 뜨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꿈인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추수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때 했던 신앙고백이 우리의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빈손으로 이렇게 광야를 방황하다 여기를 들어왔는데 이렇게,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의 표시로 이 예물을 드리나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 번 감사하라고 모세가 유언으로 가르쳐주고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이미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충만히 느꼈던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그런 예비하신 것을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 것처럼 영적으로 모세는 그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에 못지않은 기쁨을 미리 성취감을 누리고 그 땅을 바라보며 죽은 것입니다. 아멘.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그 약속의 땅을 주신 것입니다. 땅의 풍요를 주셔도 악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이 멸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제거하심은 그들의 사후에 오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른 바 삼중의 평화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땅과의 평화 이 삼중의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주인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들고자 하셨던 사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주 많은 인류를 이 땅에 들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회를 이루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회가 약속의 땅에서 성취될 것인데 그 사회는 평화의 사회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그림을 하나 그려드렸습니다. 모세오경을 이해할 때 산으로 이해를 해라. 창세기에서 시작을 해서 출애굽기에 능선을 지나 레위기의 봉우리에 오르고 그 레위기의 봉우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민수기 신명기로 내려오고 평지가 나오면 그 평지에서 여호수아서가 나오면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사기를 거쳐서 국가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레위기는 어떻게 보면 재미가 하나도 없고 누군가가 성경에서 수면제가 있는데 그것이 레위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 중에서도 레위기를 보면 반드시 자니까 불면증 치료제로 특효약입니다. 그런데 의미를 알고 나면 이 레위기 한줄 한 줄이 아주 눈부신 비수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있을까 할 정도로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결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가? 에덴동산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지만 죄 때문에 없어져버린 에덴동산 대신에 어떻게 성막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의 복이 없다면 온 땅을 다 가져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말씀을 받으러 시내 산으로 올라가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지도자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너희가 불순종해도 내가 주마, 나는 약속을 지키겠다. 그런데 너희들끼리 올라가라, 나 하나님은 안 간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백성들이 대성통곡하며 회개하면서 회막을 만든 것입니다.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이 가나안 땅을 모두 주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거기는 애굽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하면서 충격적으로 정신이 든 것입니다.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부흥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것은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통해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만나는 길을 레위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시편을 해설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 시편을 열심히 읽으셨죠? 오늘 가셔서 어제 오늘 설교를 기억하면서 레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빛이 들어오면서 얼마나 감사한 성경인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셨을 때 하나님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나라였느냐 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땅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사람과도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호수를 그려보십시오.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호수 위로 저 넓은 꼭대기에서 헬리콥터에서 돌멩이 하나를 떨어뜨렸습니다. 하나의 큰 돌멩이가 풍덩하고 떨어졌습니다. 호수에는 바람도 안 붑니다. 물결이 정확하게 원을 그리면서 파도를 치면서 물결이 파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넓은 호수 끝까지 쭉 뻗어나갑니다. 그런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렇게 돌이 떨어져 최초의 파문이 이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해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당신은 우리를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마치 큰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위협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시나이까?’ 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필요해서라면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서 실패하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환란과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복이었다, 나머지는 다 쓸데없는 일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돈에 대해서 이성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만 나이가 다 들고나면서 결국 그것이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지점이 하나님 사랑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파문이 되어서 아주 질서 있게 퍼져나가면서 그렇게 파문이 퍼져나가는 그러한 사회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이 질서가 바로 사랑의 질서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이 사랑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는 가나안 땅에서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사회가 되어야 했습니다. 땅과의 평화를 누려서 풍족한 삶을 살고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평화를 누리며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신 것은 착취하듯이 그 산물을 빼앗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땅이 내는 많은 산물들을 보면서 그 땅을 자신이 땅을 얻을 자격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나그네로 굶주림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매일매일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보호해 줄 성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를 건설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가나안 땅이 결국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처럼 감격스러워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 중에 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내 인생의 시련과 고통이 있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이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고 내가 간구하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얻는 유익입니다. 그것을 먼 천국에 가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굉장히 명랑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몇 년 됐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살았는데 그것은 간헐적이었는데 염려에 관하여 그것을 설교를 하면서 저도 믿음이 훨씬 더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정리가 됐지만 그렇게 근심하고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끊임없이 밤에 잠을 못 자고 상상을 하고 염려를 하고 대비를 하는 성격입니다. 항상 옆에 폰이 놓여있습니다. 할 일을 자다가도 일어나서 적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두 사라졌습니다. 며칠 전에 눈에 띄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갑자기 염려와 근심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순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내가 그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명랑한 삶에 대해서 정말 놀라운 감격의 말씀을 주셔서 한 6개월 내지 8개월 동안에 밤중에 대공원을 혼자서 감격하면서 몇 바퀴씩을 돌았습니다. 한 세 바퀴씩을 돌았습니다. 걸으면서 묵상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왜 남의 말을 무시를 합니까? 그렇게 걸으면서 감격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이런 진리를 모르고 어리석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다 정리한 다음에 여러분들에게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설교를 한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놀랍게 생애적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삶의 명랑함이라고 하는 것이 이까짓 생각 하나에 무너지는 것인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자괴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기도를 했습니다. 10시에 기도를 했는데 잠깐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새벽 한 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그 때는 은혜롭게 기도를 하고 들어가서 잤습니다.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어제까지 있었던 그렇게 우울하고 염려되었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명랑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아, 그래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했구나.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니까 그 허깨비가 실체처럼 보이고 실제 있는 명랑함과 행복은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뒤집힌 삶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것, 그래서 그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 모든 염려를 극복하면서 사는 그 행복한 삶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바라던 삶이었습니다. 그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입니다. 땅을 주시면 성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왜적이 쳐들어와도 한 번에 삽시간에 진멸되지는 않습니다. 대항할 수 있습니다. 땅을 주시면 곡물을 기릅니다. 곡물을 잘 자라게 해서 그것을 물건을 바꾸고 경제활동을 합니다. 그것으로 군비를 충당하고 무기를 만들고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너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행복을 누리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예수를 주신 것입니다. 그 우리의 땅이신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이 은혜에 감사하고 소명을 따라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두 번째는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입으며 살아갈 때 땅과의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는 구분은 되는데 삼위일체처럼 하나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과의 평화가 깨졌으면 볼 것도 없이 그 위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보나 마나입니다. 그리고 그 두 관계가 무너졌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살펴볼 필요도 없이 이미 산산이 박살이 난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하늘의 은혜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강퍅해지고 땅이 열매를 내지 않으니까 인심은 흉흉해지고 사람들이 야박해지면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스러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복을 누리라고 만드신 그 사회가 아주 비참한 사회가 되면서 땅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 사는 동안에 이 삼각형의 평화의 삼위일체를 항상 기억하면서 살 때 경제적으로도 복을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덕을 쌓으며 하나님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죽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늙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합니다. 결국 우리가 죽을 때는 사고로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아니면 뭔가 예기치 못한 일을 겪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자연사라는 병명은 없습니다. 죽을 때는 심장이 갑자기 멎었든지 뭐가 있으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못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이 세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평화 샬롬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6장 6.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 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레 26;6-7) 이것이 바로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렇게 평화를 누리면서 살면 아무 왜적도 안 쳐들어오고 그리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어떤 불행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대적도 쳐들어올 것이고 전쟁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갈등도 있을 것인데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그것 때문에 너희를 멸망하게끔 하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적을 없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누울 때에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사실은 잘 때가 제일 무섭지 않습니까? 왜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보초를 세웠다고 하지만 잘 때가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왜? 안전이 확보가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전쟁을 막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민족의 칼날이 땅을 두루 다니면서 너희들을 헤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 원수를 쫓아내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도망을 가다가 자기 칼에 엎드러져서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복입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적이 쳐들어오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전쟁도 없습니다. 그러면 좋을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오고 그 다음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보다 좋을 것입니다. 그 대신 뭐가 없을까요? 감격도 없을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적을 막아주십니다. 전쟁을 했는데 보기 좋게 승리를 해서 쳐들어왔던 원수들이 모두 진멸당하는 모습을 볼 때 그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구나, 아멘. 놀라운 감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승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승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 때는 질 것 같은 인생의 위기가 있을 때 그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하나가 모여서 예수예수 믿은 것이 받은 증거가 많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꽃길만 걷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신하게 됐을 때 그 때 점점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승리의 감격을, 대적을 무찌르는 감격을 주시면서 그들의 신앙을 북돋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연애하던 때라고 표현할 수 있는 가나안 정복 직전에 모든 지파의 마음이 완벽하게 일치를 한 것입니다. 마치 그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처럼 완전 일치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가자마자 그렇게 싱겁게 성을 빙빙 돌면 우르르 무너질 그런 기적은 꿈꾸지 않았습니다. 피 흘리며 싸워서 저기를 점령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긴장되면서 오직 하나님 이외에 의존할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사람이 이기심을 버리고 평화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 때를 하나님이 연애시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달콤한 신혼 기간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감격을 주기 위해서 어려움도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드는가? 그럼, 그 기근을 통해서 하나님이 풍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땅에도 전쟁이 일어나는가? 그럼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서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부대끼고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십억짜리 바이올린도 벽에다 걸어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활로 켜야 됩니다. 활로 문질러야 됩니다. 활에 가루가 되어서 떨어지잖아요? 문지르면 울림통을 통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상황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문제처럼 보이고 시련처럼 보이고 고통처럼 보이는 그것들을 활을 삼아서 우리의 마음에 줄을 켜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C. 사람들과의 평화
그 평화는 결국은 사람들과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따라서 참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기껏 말하는 평화는 이익이 일치되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하나님과 불화하다는 것을,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이 내 인생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신앙이 시작을 하고 하나님과 더 완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신앙은 깊이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매달리고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서 누리는 그 평화가 결국은 땅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 모든 것을 다 연결시키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것인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지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가 두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구현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먼저 평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사람들과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 평화를 이루어져야 되는 사회가 두 개가 있는데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한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라고 할 때는 이 두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고 정말 평화로운 사람이다, 교회에서 참 평화로운 사람이었다, 두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과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와의 평화가 깨지고 그 다음과 가족들과의 평화가 깨지면 반드시 땅과의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그 많은 유산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올라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은 지옥입니다. 결국은 땅이 그를 토해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나로 하여금 교회와의 평화도 지킬 수 있게끔 해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고, 가족과의 관계가 아무리 나쁘고 원한이 맺혔어도 반드시 그 관계도 평화로운 관계로 고쳐주실 수 있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윈스턴 처칠의 억양으로 이 말을 해 보겠습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2차 대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마라. ‘목사님, 제가 그렇게 되기엔 너무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출발점이 되면 하나님이 다시 샬롬, 평화를 주십니다. 그래서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그 평화를 얻으려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성경과 양심이 가르칠 때 자신을 먼저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설득되고 난 다음에 깨끗이 가족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왜? 그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고 싶어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는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깨끗이 자녀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괜히 심심해서 무릎을 꿇으면 안 됩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너 그렇게 카드 많이 긁고 술값을 많이 내도 되겠니? 에이, 집에 가서 무릎 한 번 꿇으면 되지.’ 그런 무릎 말고 자기를 설득하면서 내가 진짜 잘못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싶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실레아 슈링크라는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진정한 회개는 그 벌을 안 받은 채 하나님과 불화하게 사는 것보다는 그 벌을 다 받고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진짜 회개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 깨끗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아들아, 딸아 내가 너희에게 너무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또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진심으로 노력할게, 나를 용서해다오.’ 그렇게 꿋꿋하게 자녀나 남편이나 아내에게 깨끗이 고백을 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더 좋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보십시오. 과연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가족이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한 번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 모든 마음을 놓고 펑펑 울면서 아니야 아빠 우리가 잘못했어, 그런데 그런 일은 대부분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 이상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한 번 이야기해보십시오. 그것 말고 더 좋은 길이 있는가? 교회하고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체들과 얽힌 일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설득을 합니다. 성경과 이성으로 설득을 해서 자신이 잘못 됐다는 것을 스스로 설득을 합니다. 그것이 확신이 서면 깨끗하게 승복을 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용서를 받아주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나눔과 용서, 이것을 오늘은 내가 주지만 내일은 저 사람으로부터 내가 받으면서 서로를 의존하면서 사는 것이 교회에서 평화를 이루면서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끼는 사람이 없이 죽는 것입니다. 살 때는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죽을 때는 모든 사람이 그리워하고 아까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를 누려야 할 명령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사랑 속에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죄인조차 불쌍히 여기시며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린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늘 울어도 눈물로는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깊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막에 회개하며 돌아가는 곳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이 평화를 깨트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 평화를 깨트렸기 때문에 세상에서 되는 일도 없다 이렇게 반성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가족들과의 관계, 교회에서의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깨트린 채 망나니처럼 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구나,’ ‘수많은 재물과 명예가 내 손을 거쳐 갔지만 마지막에는 마치 손으로 바람을 움켜잡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구나,’ ‘이것이 나의 어리석음의 결말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그 시점에서 다시 땅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인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자의 비전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인격을 그대로 닮으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으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고 자연에 대해서 땅에 대해서 일체 탐욕을 버리고 땅을 선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땅은 아름다운 수확으로 메아리를 돌려주고 그리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덕으로서 자신에게 메아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 속에 있다는 그것이 너무 감사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조건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것을 동무처럼 여기게 되는 그런 삶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행은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가 불행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대부분 땅이 아니면 사람을 통해서도 옵니다. 그래서 이런 세 가지 평화가 깨지고 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원망이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이 그린 파문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너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말아라, 사람들 속에 있는 네가 바로 너다. 그것입니다. 사람들 속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싫어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람을 싫어하면 좋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데 이바지 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성공입니다. 많은 재산 그것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지 않아도 그것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우린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못 누려도 불행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누릴 부귀영화도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누릴 부귀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준화가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런 것에 대한 욕심을 자연스럽게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안 되는 사람들은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희끗 희끗해도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런 사람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비결인데 그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땅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에 사람과의 평화도 깨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독이 깨지니까 간장이 세듯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에 세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인데 그런 것들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태도입니다. 평화를 깨트리는 태도입니다. 삶의 태도입니다. 첫 번째가 교만입니다. 교만 때문에 사람들과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몸에 밴 교만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에게 겸손을 발견하는 것은 비굴한 사람에게서 자존감을 발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소한 일로 다툼을 일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종종 주위에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정의감 하나를 가지고 그런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싸우면 매우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정서를 다스리면서 안정된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소한 이견에 쉽게 등집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그것이 관종이라고 부릅니다. 관심주의자. 관종의 기원이 결국은 교만입니다. 무슨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고 싶고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떠받치면서 살 수 있는 어떤 편안한 주체성이 자기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떠받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속에서 겨우겨우 자신이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때 인기를 누리던 스타들이 인기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스캔들에 휘말리고 이렇게 될 때 그 때 사람들이 쉽게 절망하고 죽는 이유가 결국은 인기 속에서 살다가 자기 정체성, 주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발견하면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든지 흠을 찾아내어 헐뜯어서 결국은 그 사람보다 자기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이미 이전부터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심리학자들을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손절해라 하는 성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만나면 한 시간 중 59분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는 1분도 안 듣는 사람입니다. 할 이야기를 다 하고야 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손절해야 할 1위의 사람들입니다. 전혀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들어주는 사람은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친구는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외롭기 때문에 한 시간 중에 59분은 자기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주연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람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무슨 불편한 일이 없을까? 내가 어떻게 봉사를 하면 이 사람이 좀 더 편안해 질 수 있을까? 더 즐거워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 되는 사람인데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삽니다. 이런 사람들이 손절해야 할 1위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깊이 경고를 받으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서로 만나는 것은 서로 교통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 이슈가 있고 자기가 감명을 받은 것이 있으면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것은 맞는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그런 일이 있으면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내가 재미있으면 듣게 됩니다. 그렇지만 항상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 성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을 가지고 살 때 평화가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떠한 단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훌륭합니다. 그리고 내가 배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만나는 첫 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입니다. 맨 처음 들을 때는 그의 지식이나 경험에 감탄하지만 한 번 두 번 그런 생각이 들면서 이 사람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하고는 손절을 하는 것이 맞다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심이 높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조금만 상처를 내면 바르르 떨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낮은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를 하면서 느끼는 열등감 같은 것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학적으로 대부분 어두운 성장기를 보낸 사람들입니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한 인간으로서 소중히 여김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애정 결핍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가슴 벅차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배려심이 없습니다. 결국 공감능력이 떨어집니다. 여럿이 모였을 때는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회중을 좌지우지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람들과의 평화가 깨어질 때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평화가 깨어질 때 거기에는 깨어지지 않은 자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사람들과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는데 우아하고 교양 있고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항상 대화의 균형을 맞출 줄을 압니다. 그래서 한 몇 시간을 이야기하고 나와서 가만히 계산을 해보면 내가 50%를 이야기 하고 자기도 정확하게 50%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참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또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서로가 존중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헤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만나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보고 싶은 마음 그리움입니다. 그것이 깊이 있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과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슬기로움이 두 개가 함께 우리 안에 있을 때 사람들과의 평화는 덜 깨지고 촉진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례함입니다. 거칠고 야비한 말투 그리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무례한 태도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마음에 사람과의 평화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똑같은 원리로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평화에도 큰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본 사람들은 관계가 깨질 때 얼마나 그것이 이상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지만 깨진 채로 몇 십 년을 살아온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부부가 약 20년 동안 쇼윈도 부부처럼 살고 싸우고 볶으면서 살아서 아무 기대도 없는 부부는 부부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결혼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정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결혼을 생각해도 그것을 집안에 대한 탈출의 도구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경우에 좋은 선택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는 나 자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많지만 무례한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이익 때문에 짐짓 그를 따르는 체 하는 기회주의자들과 아무 생각 없이 쫓아다니는 똘만이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거칠고 조잡한 인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땅과의 평화가 자꾸 깨지고 사람들과의 평화가 자꾸 깨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겸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겸손과 사랑에 대한 체험은 함께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가 정말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무례히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종종 연예인이나 인기인들 중에서 TV나 영화에 나와서 사람을 같잖게 여기며 연기를 하면서 아무 눈치도 안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을 상 남자라고 합니다. 상 남자는 남의 남자이지 자기 친구는 될 수 없습니다. 남으로서 보는 것은 멋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 남자는 외롭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더 상 남자 짓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관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평화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평화에 무관심하고 질서를 모르기에 무례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의 평화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사라지고 악이 한계치에 달하면 례위기 18장 28절에 땅이 너희를 토해 내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 사람과 불화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화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그 화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태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마음대로 하찮게 여기고 허물면서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문지 상에 오르내릴 어마어마한 죄를 지음으로서만 이 평화가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태도, 하나님을 향해 정성을 다하지 않은 태도, 사람을 향해 예의를 갖추지 않은 태도, 자기중심적인 태도, 자연을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모품처럼 대하는 학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결국 이 세 가지 평화를 다 깨트리면서 우리를 결국 더욱 고립되게 만들고 이 평화가 모두 깨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게끔 우리 스스로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땅으로부터 풍족한 것을 얻고 사람들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면서 사는 이상의 행복한 삶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생각이 평화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 많은 성경의 말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주고 또 가르쳐주고 기도하게 하고 또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약을 하면 땅과 사람과 하나님과의 평화 그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그 사람에게 가장 그 사람이 그렇게 살 때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했을 때 그 때만큼 행복했을 때가 있었습니까? 가족들과 화목했을 때처럼 즐거운 퇴근길이 있었습니까? 교회 모든 지체들과 화목하며 그리워하면서 살 때만큼 교회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을 때가 있었습니까? 그 평화가 깨졌을 때 주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왠지 내키지 않았고 교회는 왠지 등지고 싶은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두 떠나버렸을 때 자기 자신은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려고 하다가 자기 자신에게 속박되어서 묶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어떻게 더러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 올 수 있는지 이 일을 통해서 우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자기가 누구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람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칠고 막 된 성품으로 가정에 평화를 깨트리고 교회에 상처를 주면서 산 것이 우리의 지난날이었고 그 평화가 깨진 때 우리가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참해 지는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 지옥 같은 심정이 가나안의 땅이 토해버렸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멸망당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셨는데 우리가 왜 다시 그 평화를 깨트리고 굳이 그 지옥 불과 같은 속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거칠고 막된 성품으로 교회에 상처를 주고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면서 그렇게 죽어도 아무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 아무 곳에서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비참한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고함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설득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결론은 정말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면 땅과의 평화를 지켜라, 그리고 사람과의 평화를 지켜라, 이 설교를 듣고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두 번 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회개를 하십시오. 누구와의 관계가 깨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기까지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는 우리도 이 평화를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지키라고 주신 평화입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 지체들을 위해, 형제들을 위해, 그렇게 내가 참고 희생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평화였는데 그것을 내가 깼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 나를 다시 이 두 평화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간구하고 내일 집회 나오기 전에 그 사람과 소통하고 내가 진심으로 미안하다, 진심으로 너와 나의 관계가 깨진 것은 나 때문이다. 말로하기 쑥쓰러우면 편지를 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평화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면서 산다면 반드시 여러분들은 세 개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여러분들의 삶에 밝은 행복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3.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1-2)
녹취자 : 백지영
I. 본문해설
땅과의 평화가 깨어지면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평화가 깨어지면 악이 가득한 사회가 됩니다. 그런 조건 속에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평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안에 있는 그 온전한 평화를 하나님이 이 땅의 시간과 공간 속에 물질로 그 평안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창조될 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평안하게 하기위해서 질서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저 멀리 하늘의 우주 공간의 수많은 별들이 각기 자기 자리를 따라서 운행함으로 우주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질서들이 자연 세계 속에서 펼쳐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부터 시작을 해서 거대한 몸짓의 해양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만물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가지고 자신에게 합당한 작용을 하면서 다른 것들과 상호관계를 이루면서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과의 평화가 왜 깨집니까?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땅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은 산물을 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평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조를 통해 만물 속에 영원한 하나님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물질세계를 통해 보여주시고, 또 그 평화가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진 이야기가 성경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깨어졌을 때 어떻게 불행한 일이 전개됐는지가 구약성경 전체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깨어진 평화 속에서 인간이 고통 받는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 평화를 회복시킬 약속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땅과의 평화 그리고 사람과의 화목,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인데, 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동행이 두 가지 조건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 신자가 마음속에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갈망이 꽉 찼을 때, 그 사람이 바로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이 꽃길만 걷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밭길도 걷고 진흙길도 걷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거기에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행복에 대한 관점이 그냥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려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살고, 그 다음에 질탕하게 자기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써도, 써도 남을 정도로 많은 물질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그저 몸이 건강하고 편안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종교로서는 기독교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두 조건만으로 인간이 결코 불행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하고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으로서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사람으로 오셔서 참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습니다. 모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행복에 대한 개념을 가질 때 그때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그리고 무조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그 다음에 그냥 맘 편하기만 하면 최고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규정하기 전에는 행복을 그런 식으로 설정할 수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앞의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수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행복을 불행으로 바꿔놓지 못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비밀을 세상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돈이 많고 그러면 행복하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허무감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기를 지탱하지 못해서 무너집니다. 높은 지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땅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과 평화를 누리는 그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의 상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개념을 설정할 때, 이런 의미에서 행복을 줄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그 얘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평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평화로운 세계를 창조하시고, 죄 때문에 이 평화가 깨지고, 그리스도 때문에 이 평화가 복원되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려고 이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마지막에 결국은 이 평화가 모두 완성되어서 하늘나라의 완성을 누리는 것이 이게 성경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항상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인간에 의해 깨어집니다. 땅은 스스로 이 평화를 깨지 않습니다. 인간과 땅은 그런 의미에서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땅과의 화목이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땅에 의해서 그 평화가 깨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도 깨지고 땅과의 평화도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타락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사람 때문에 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계와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땅들이 인간의 몸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져서 이 자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끝나기를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기다리는 것이지요. 땅은 인간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세상이 되고, 자신은 인간을 위해 풍족한 것을 생산해내는 평화로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책임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신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있음으로서 인류가 땅과 평화를 누리는데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이바지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을 때 그 평화가 회복되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회개를 통해서 그 평화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도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비록 땅과의 평화가 깨져서 굶주리고 재앙을 만났을지라도, 사람과의 평화가 깨어져서 악한 사회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만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평화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평화는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데서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면 사람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평화가 깨진 가운데 서로 악을 행하면서 악다구니같이 싸우면서 폭압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 땅과의 평화도 거기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땅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께로 버림 받은 채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사회의 불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진 평화는 회개를 통해 회복되고 회복된 평화는 순종을 통해서 유지되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평화가 회복되는 때는 연애시절처럼 짧았고 깨어진 배신의 때는 긴 세월이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그게 깨어진 채로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결국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땅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고통을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소외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어떤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을 합니다. 아버지 다윗이 모아놓은 그 어마어마한 물자로 하여튼 최고의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 이전에 성소, 성막이 있었고, 그것이 지상의 완전한 건축물로 세워진 것이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 차서 모든 사람들이 그 가득 찬 영광 때문에 돌멩이를 깐 땅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는 에덴동산을 당신과 만날 장소로 삼으셨는데 이 평화가 다 깨지면서 인간이 추방되고 다시 하나님이 인간과 만날 제2의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이 성막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회막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성전이 되었는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세상에 있는 물질로서 표현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최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와 성전 이 두 개는 떼어놓을 수가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과의 사람의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유지되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은 레위기의 결론부분입니다. 26장, 27장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본문은 무엇을 다루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제시하고 그들에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그것을 결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국 우리가 이틀 동안 3절부터 7절까지 땅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를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그 땅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장 1절, 2절에서 땅과 사람과의 평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이번 설교의 제일 뒤편에 놓음으로서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결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만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순종이었습니다. 그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II. 두 계명을 상기함
그러면서 하나님은 십계명 중 특별히 두 개의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속에서 엄중하게 명령하신 바였습니다. 십계명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핵심적인 의무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십계명의 확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십계명은 열 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서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가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관계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사람과의 도덕적인 계명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결국 십계명이 두 관계에 대한 계명으로 집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 다음에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그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규례들이 나오는데, 그 속에서 땅과의 대한 평화를 유지하며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될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일 같은 것, 또 안식년 같은 것, 땅을 쉬게 하는 것, 이러한 규례들이 바로 자연과의 관계도 함께 규제하고 있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돌판에 새겨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여섯 개의 계명이 그 다음 뒤따라오면서 그러면서 두 번째 돌판에 새겨져서 십계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셨으면 이 십계명을 안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계명을 두 장소에 새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돌판에 새겨서 주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로 마음에 새겨주셨지만 돌판과 함께 주셨고, 다른 사람들은 마음속에 새겨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십계명은 아직까지 시퍼렇게 진리로 살아서 그래서 사람들의 양심 속에 이것이 규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을 어기면 인간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그것을 새기셨다고 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결국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겨야 할지에 대한 순종의 계명이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계명은 사람들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 신앙을 삶으로 고백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십계명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그 계명 중 하나라도 어기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서는 특별히 계명 중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 두 번째 계명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 네 번째 계명을 다룹니다.
첫 번째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지 말라’,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리고 네 번째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십계명 중 네 개인데, 그런데 그 네 개가 이 안에 이미 다 녹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사실상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계명은 당연히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을 그런 정신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경외심이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1, 2, 3계명은 사실은 하나의 계명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리고 네 번째의 안식일의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2계명, 4계명 속에 그 1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모두 통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형식상으로는 2계명과 4계명이 나오지만 사실상 이것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고, 이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5계명서부터 10계명까지는 1계명서 4계명을 진심으로 지키면 나머지 도덕생활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어떤 신도 앞세우지 않고 어떤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안식일을 지키는 그 사람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처음 믿고 은혜를 많이 받고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오직 구원의 길이 예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때, 죄를 짓고자 하는 어떠한 마음의 의지도 그 순간에는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는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다가 굳이 이미 앞에 나온, 출애굽기에 나온 이 십계명을 다시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면 사람과의 평화와 땅과의 평화는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A. 우상숭배를 금하심
그러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첫째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과 그것에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반하는 것은 또한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는 첫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야 할 조건이 되는 이 계명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에 대한 해석을 비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지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체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의 빽빽한 구름이 있는 그 아래 있으면서도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는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알지를 못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가나안으로 가려면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의 기적을 따라서 우리가 여기 왔는데 이제 모세도 없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신을 우리가 만들자, 그리고 사람들이 각기 금패물을 다 내놓아서 그것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이 대목이 우리가 대개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땅이 멸망당한 이유도 분명히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고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인데 어떻게 우상을 만들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해석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에 대한 해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우상에 대한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송아지를 만든 그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완전히 다른,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경배하고 신이라고 이름붙이는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닌 완전히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추상적이었는데, 눈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금신상을 경배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각에 즉각적으로 호소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모든 종교가 각기 자기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절에 가보면 부처의 상이, 가톨릭에 가면 성모마리아상이 있고, 심지어는 예수의 상이 있고 하는 것들이 다 널리 퍼지게 된 것도, 결국은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그렇게 유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우상을 만들면 이 우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우상을 만든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제 본격적으로 우상숭배가 일어날 때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진짜 여호와를 버리고 그러니까 결혼생활로 말하자면 본 남편을 버리고 바람이 나서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듯이 그렇게 아예 확실하게 이방에서 들어온 신을 여호와를 버린 채 그것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두 신을 모두 섬긴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결국 당신을 버리신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은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네게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랬을 때, 그 ‘신’(神)하고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우상 속에서 표현된 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 2계명을 1계명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당시의 모든 종교가 각기 자기 종교의 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선교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믿음을 북돋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보면 소위 이야기하는 ‘아이콘 논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상(像)을, 그것을 사람들에게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커다란 격론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제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러한 여호와의 종교의 특성을 이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종교는 보이는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류의 정신사의 계몽을 가지고 왔던 문명의 발상지를 다 뒤져보면 사실은 종교의 흔적이 빠짐없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어디에? 인도문명 그 다음에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그리스문명까지. 그러니까 어디를 가든지 간에 신들의 천지입니다. 그리고 신들은 모두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경의를 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그런 우상이 필요했을 텐데 하나님이 그것을 못하게 하십니다. 절대로 못하게 하시고, 이것을 하고는 당신과의 평화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규정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그냥 하나님이 멸망시켜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신 죄가 바로 그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럼 그렇게 모든 종교가 그것을 통해서 종교심을 북돋우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를 전파했는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왜 그것을 못하게 강력하게 막으셨을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아킬레스건이 되게끔 하셨을까? 우상숭배의 그 죄는 구약에서 가장 가차 없이 하나님이 벌하시는 대표적인 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우상을, 그렇게 당신의 형상화하는 것을 금하게 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구약의 종교를 가리켜서 여호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쉽게 믿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여호와의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그리스도교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거기서 빗나간 것이고. 그런데 그 여호와의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성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멀리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간 아빠 사진이 있습니다. 어릴 때 떠나셔서 얼굴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여기 아빠 사진이 있습니다. 이것을 매일 보면서 아빠를 생각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이 사진 없이 아빠를 생각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당연히 사진을 보면서 생각하는 게 쉬운 것이지요. 아빠에 대한 기억을 아무런 매개체 없이 떠올리려고 할 때에는 정신을 보통 집중해서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찾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결국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마음과 뜻을 다하여”라고 했는데 그게 가장 먼저 포함되는 게 지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너희는 잊지 말라, 잊지 말라. 너희는 기억하라, 기억하라” 이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아마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생각 속에서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그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자신의 지성적인 헌신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세상에서의 많은 종교는 그냥 돈을 많이 바치고 치성을 드리고 하면 그냥 공덕이 하늘에 달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 갔을 때 그들의 신에 대한 공경에 감탄하면서 너희들 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상도 있더라, 하다가하다가 혹시 빠진 신이 있으면 그가 섭섭할까봐 우리가 잘 모르는 신이라고 해놓고 그것도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구약 여호와의 종교,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보면 너무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성의 헌신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제가 교리반을 할 때 일인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까막눈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경을 20년 동안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또 몇 번 읽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의무감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런 스터디바이블이나 좀 두꺼운 게 있어서 가장자리에까지 꼼꼼히 읽으면 공부가 될 텐데, 그냥 큼지막한 글씨 갖다 놓고 이십 년 동안을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교리반을 가리키면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에 여러분들의 행복이 달렸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운전면허 문제집을 푼 것만큼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거기 모인 20명이 모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은혜를 못 받았느냐?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자기의 지성으로 헌신을 안 합니다. 그 은혜가 끝날 때 하나님도 함께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명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결국 우상을 만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우상 없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성소를 통해서 배워가는 것보다 보이는 신상 앞에서 구부렁거리며 절하는 것이 훨씬 쉬웠기 때문에, 이 어려운 여호와의 종교를 버리고 이방신을 따라서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매력이 있다는 말이지요. 뭐냐 하면, 바알 종교 같은 것에는 그 의식을 행하면서 성적인 쾌락을 맛보는 순서까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부여하면서 지성의 헌신 없이도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길을 이방종교가 끊임없이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비해서 이 여호와의 종교는 너무 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도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에 접근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다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가나안 땅을 얻게 됐습니까?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심판을 받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우상숭배를 받았기 때문에 가나안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을 가나안과 원주민과 다른 사람들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정말로 이렇게 간절히 우상숭배와 안식일에 대해서 명령하신 것은,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가나안의 원주민처럼 심판받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한 심정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땅과 평화를 누리면서 모든 것을 풍족히 누리기를 하나님을 바라셨고, 사람과 평화를 누리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덕스러운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입니다. 땅이 그들이 싫어서 가나안 백성을 토해 내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토해 내쳐지는 그런 불행을 겪기를 원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악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우상숭배의 동기가 무엇이냐? 그게 궁금하지요. 보면서,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우상을 섬겼을까하는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탐욕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이해할 때 기다란 막대기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계명이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리고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라’,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 등등, 부모를 공경하라 죽 이렇게 나옵니다. 맨 위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는 점점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되어서 그게 십계명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막대기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십계명이 아니라 원형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계명에서 시작은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이렇게 나옵니다. 죽 돌아가고, 마지막에는 탐내지 말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탐욕은 곧 우상숭배란다” 그러면서 십계명이 다시 일계명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 전체가 수직적인 막대기의 구조가 아니라 원형 고리의 구조로 되어있고, 이 모든 원형의 계명을 지켜나가는데 이 가운데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스며들어서 1계명과 2계명, 3계명, 4계명부터 십계명까지를 지키게 하는데, 우상숭배 하지 않게 하는 동기는 사랑이고 이웃에게 탐욕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게 만들고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사랑으로 이 열 개의 꼬리를 무는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도 그것은 모두 하나의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원리를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있는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고, 선지는 선지자들이 쓴 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약성경은 아직 쓰이기 전이니까. 그 ‘강령이다’라고 할 때 그 강령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런데 그 사랑이 두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깊이 회심하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남을 향해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의 기쁨을 누렸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들, 그리고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내 형제들이 생각이 나는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조문 열 개를 놓고 그것을 더 상세화한 수많은 규례들, 거기에서 다시 또 상세하게 주석이 된 사람들이 만든 전통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것을 지키느냐에 따라서 의로운 사람이냐 불의한 사람이냐를 쟀는데,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원통형으로 제시하시면서 그 계명을 지키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빠져서는 절대로 그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을 강조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결국 십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나아가서 땅과의 평화를 좌우하는 요소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가운데 있는 내용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 사랑이 이 평화를 유지하는 답입니다. “제가요 저의 남편을 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매일 싸워요.” 말이 됩니까? “제가 아내를 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보기 싫어요.” 그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끊임없이 서로의 결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정답은 뭐냐 하면 싫어진 것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 인간이 싫어진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책을 썼습니다. ‘인간과 잘 사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이 써있기는 그 책의 이름이 ‘인간과 잘 사는 것’ 이렇게 됐는데 읽을 때는 ‘남편과 잘 사는 것’, 그러니까 남편의 이름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느 강사가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어렸을 때 하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이 인간아, 이 인간아’ 불러서 자기 아버지 이름이 ‘김인간’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아니 그런 결점이 옛날 연애할 때는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안보였지 않습니까?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어리석어서 그랬다고,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랑해서 안 보인 것입니다. 그 사랑의 감정이 계속 살아 있으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내가 다 끌어안고 그냥 데리고 살게.”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별거 아니거든요.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이유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혼사유 가운데 제일 웃기는 사유가 성격차이입니다. 아니 도대체 성격이 일치하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내 뱃속으로 난 새끼도 나하고 성격이 일치 안 하는데 일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 사람 버리고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하고도 또 성격차이로 이혼하더랍니다. 그럼 도대체 그 성격이 맞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아니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는데 어떻게 남하고 성격이 완전히 일치하느냐 말입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일치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성격이 다르다는 게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냥 성격차이라고 그러지 말고 “내가 사랑이 식었으므로 이혼을 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해야지,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싫어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싫어지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안 되는 것이지요. 깨지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영국에서 히트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좀 검토를 해보려고 따끈따끈한 소식을 찾아가지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데, 55만 쌍이니까 110만 명이 소위 ‘메리지 코스(marriage course)'라고 하는 코스에 들어와서 7주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어떻게 부부관계가 다시 회복됐는가 해서, 사람들이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그 간증들이 인터넷에 죽 떠있습니다. 한글로는 아직 번역이 안 됐는데 영어로 죽 나옵니다. 들어가서 한번 보십시오. 그런데 거기서 이제 이혼직전까지 가가지고 완전히 싸우려고 하는 부부들이 결국은 관계를 회복하고 너무 행복한 삶을 살면서 자기네들이 이렇게 바뀐 삶을 살게 될 줄 몰랐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정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부부가 그 운동을 펼치는데 굉장히 헌신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성격차이에 대한 대안은 성격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고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그 성격차이를 극복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도 돌이 있어서 부딪히니까 산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산속에서 물이 흐르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흐른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무섭지 않습니까? 괴기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내가 좀 다르니까 남편의 성격이 흐를 때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이렇게 재잘재잘 재잘 물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차이가 있으니까 부부가 일생 살아오면 수많은 사연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고운 정만 든 사람이 금방 헤어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고운 정 미운 정까지 다 든 사람이 못 헤어집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정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성격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는 그 성격의 차이를 오히려 사랑 때문에 성격의 차이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절대 못 헤어지게 만들고, 어떤 부부는 사랑이 없으니까 그 미운 정이 결국 사람을 갈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뭐가 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까? 사랑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인데 욕망과 탐욕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질서에 반항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방식으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가끔 점집에 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고 기독신문의 리서치 같은 데 보면 통계가 나옵니다. 전 교인의 7퍼센트는 점집에 드나든다고 등등 통계가 나오는데, 미친 짓입니다. 바보짓입니다. 그런 구약의 방식으로 우상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니까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지요. 뭐냐 하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 결국은 지금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세상 사랑입니다. 세상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 세상에서 만족을 얻고 싶어 하는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랑은 자기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랑은 자기사랑이고, 세상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들이 경계해야할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준엄하게, 그렇게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과의 평화와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땅과의 평화도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깨진 것이고, 그러면 결국은 인간은 그 세 평화, 삼위일체적 평화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 그 평화가 모두 깨어지고 나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고통 받고 인간으로 고통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불행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없이, 성경을 통해서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생생하게 경험하는데도 그 간 길을 또 가고 또 가고 또 가는 것이 그게 돼지가 씻고 나서는 다시 토한 데로 돌아가고, 더러운데 있던 돼지가 다시 또 그 더러운데 눕고 하는 일들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이 너무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신령한 것과 희망은 정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그 정신 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친 듯 돈 벌어서, 몸과 마음과 뜻을 바쳐서 미친 듯 돈 벌어서 뭐하려고 하십니까? 결국은 자기가 쓰지도 못하고, 그리고 누가 가지고 갈지 모릅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간식하나 안 사먹고 그렇게 수전노처럼 돈을 싸 모았는데, 침대 밑에 감추고 어디다 감추고 막 이러면서 사는데 정신이 흐려져 가지고 자기가 돈을 어디다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돈을 누구 빌려주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유언도 못 남기고 메모도 안 남겨놓고 죽습니다. 돈 꿔간 사람만 신나는 것이지요.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뭐가 시키는 것입니까? 모두 탐욕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 깨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떠난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것에서 사랑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의 총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게 결국은 방향을 생물처럼 방향을 수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하지 않는 것만큼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은 물처럼 출렁거리면서 사랑할 곳을 찾아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러니까 마음에 안정이 없는 것이지요. 늘 불안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지요. 결국은 뭐냐 하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왜? 마음속에 우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우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라고 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섬기는 것이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 때문에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섬기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게 탐욕의 산물이라 이것이지요. 그게 우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도 바로 그런 탐욕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주셨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그 산 아래 있는데 왜 못 기다립니까? 왜 우상을 만듭니까? 결국은 자신의 탐욕을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성결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복잡한 길보다는 보이는 우상에게 구부렁거리고 절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길이 쉬웠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결국은 신(神)이 신(神)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투영해 낸 허상이라 이것입니다. 허상,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행복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게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죄를 뉘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냥 퉁쳐서 “그런 것 있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삶을 면밀히 살피면서 내 마음이 어디서 미끄러졌는가, 어디서 처음 사랑을 버리고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랑을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이었고 내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그 사랑에서 돌이켜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왜?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사랑을 회개하고 주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
마지막 두 번째가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식일을 핵심으로 이제 절기들이 나옵니다. 특히 이 레위기에서 절기들이 나오는데 세 개의 유명한 절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유월절이라는 절기입니다. 이것이 왜 생겼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땅의 모든 초태생을 치실 때 어린양의 피를 인방에 바르고 그렇게 약속을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을 기념해서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생긴 것입니다. 유대인의 최고의 절기입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입니다. 초실절이라고도 말하고 맥추절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그게 뭐냐면 보리를 수확을 하는 것입니다. 수확을 하는데 그것을, 첫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바로 그 오순절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그 오순절이 보리를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장막절입니다. 초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치고 생활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인 것과 동시에 이제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인 일종의 추수감사절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절기들이 나오는 것의 핵이 무엇이냐 하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확장되면서 절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절기들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일을 준수하는 동기가 맨 처음에는 창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쉬셨으니까 너희도 쉬어라 이것이었었는데, 출애굽기에서 그렇게 나오는데, 신명기에 다시 한 번 십계명이 반복될 때는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창조의 휴식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로는 몸의 쉼을 통해서 자연적인 질서를 회복하고, 영혼으로서는 그날 특별히 세속에 얽매어 있던 정신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들어줌으로서 이 영혼에 은혜를 받고 도덕적인 질서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시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분주했던 세상사의 얽매었던 마음을 떼어놓을 수 있었고, 육체의 안식으로 영혼에 자유를 줌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영혼과 육체의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일로, 구속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육체를 쉬는 것과 함께 영혼이 번잡한 세상사에서 떨어져 나와서 하나님을 충분히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로 깊이 잠기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체성을 가지고 충만한 사랑을 가슴에 채워서, 이 계명을 모두 준수하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안식과 은혜 안에서 인간은 잠시 있는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찾게 되었고, 또 태어난 것과 태어나게 하심을 구별할 수 있는 총명을 길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모든 쉼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영원한 안식일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땅과의 화목을 통해 복을 받기 원합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를 원합니까? 그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주일은 다른 날하고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주일에 대해서는 이미 성수주일이라는 책에서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이 주일이 여러분의 영혼을 보양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논쟁이 끝나지 않았지요?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교회에 꼭 나가야 됩니까? 꼭 본 교회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아무데나 드리면 되는 겁니까?” 등등 얘기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성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 성소는 그냥 장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입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 성소를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성소를 경외하는 것이 같은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소를 멸시하는 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사람답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끊어진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끊어진 사람을 그래도 사람답게 살려고 하시려니까 하나님이 잃어버린 에덴동산 대신 성막을 만남의 장소로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나와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내적인 자원들을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늘자원이라고 제가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땅의 자원은 땅으로부터 얻고, 그렇게 해서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고 육체는 좀 쉬고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쉬지 않고 계속 굴리면 그러면 기계와 같아서 금방 망가집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땅도 쉬게 하시고 인간의 몸도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방점이 그냥 육체의 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충만한 은혜를 주일날 교회에 와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하니까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깨진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땅과의 평화가 깨지고, 땅과의 평화가 깨지니까 그 다음에는 사람들과의 평화까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서부터 시작해서 세 개의 평화를 모두 잃어버리면서 결국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깼는데 마지막 돌아오는 것은 쓰디쓴 열매입니다. 그리고 고통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 땅과의 평화 그 다음에 사람과의 평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여러분을 위해 내어주셨는데 하나님이 뭐가 아까우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주셔도 당신자신은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살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긴급동의입니다. 긴급동의라는 게 무엇인지 아시지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안건을 철폐하고 이것부터 먼저 들어야 된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난 모릅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여러분들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게 여러분들이 고달팠던 여태까지의 인생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길로 또 가려고 하느냐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길을 주셨고, 그리고 그 평화로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이 거칠었던 땅은 다시 산물을 내고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사람과의 관계는 고쳐져서 덕을 입고 사랑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이 그 땅과 사람을 기뻐하시면서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왜 하나님과의 관계 그 평화를 깨뜨린 채 하나님 아닌 곳에서 복을 얻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거친 땅을 헤매면서 죽어가는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제껏 실패한 인생만으로도 아깝지 않습니까? 이제 남은 인생은 그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1-3)
녹취자 : 조복령
I. 안식일의 계명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켜주신 두 계명 중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2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2) “내 안식일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내 안식일’이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솹베토다이'(שַׁבְּתֹתַ֣י)라는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나의 안식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복수로 쓰인 것은 이 단어가 안식이 선포되는 모든 절기, 다시 말해서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든 절기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 ‘안식일’이라고 된 이 단어는 ‘안식의 절기들’이라고 다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 안식일이 이처럼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흔히 안식일 하면 노동을 쉬는 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안식일 계명의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식은 영혼의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육체로 하던 세상일을 멈춤으로써 정신을 세속에서 떼어놓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과 '안식의 절기들'은 내포와 외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안식일은 씨앗과 같고 그 안식일을 바깥으로 펼친 것이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구약에 세 중요한 절기를 예를 들어 보자면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많은 성품들 중 특히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내시고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런가 하면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수장절은 곡식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든 가나안 땅을 주셔서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찬송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은 모두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을 받으라고 주신 날들이 '안식일'과 '안식의 절기'입니다. 이 날과 이 절기에는 예배와 교제, 감사와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 그리고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깨어진 사람도 이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때 다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찾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영혼의 힘을 얻고 땅과의 평화를 회복합니다.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 소명을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일과 안식의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특이하게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경외하라는 명령입니다. 레위기 26장 2절 하반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2 下) ‘경외하라’는 명령형 동사가 장소와 함께 연결지어서 사용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이라는 신학자가 자기의 레위기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별히 꼭 집어 성소를 경외하라고 한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성소의 순결함이야말로 바로 레위기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Gorden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328~329)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것은 성소를 모든 부정(不淨)으로부터 보호하고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봉사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 하듯이 경외심을 가지고 수행할 것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할 우리도 속된 이방인이 아니라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했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다시 정결함을 받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성소라고 하는 ‘장소' 그리고 ‘모인다'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막은 열여덟 평밖에 되지 않는 사각형의 텐트였습니다. 그러니 마당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남자만 60여만 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리적으로 성막에 모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날은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지키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혼자 쉬는 날이 아니라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날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레 23:3) 성회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모임입니다. 결국은 안식일의 중요한 개념이 ‘모인다’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참 많은 교훈을 안겨주었습니다. 또 코로나 상황은 우리에게 당연한 줄 알았던 많은 일상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음을 깨달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각각 이 코비드(COVID)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저는 예배와 관련시켜서 볼 때 이 코비드(COVID) 상황은 하나님이 교회를 키질하신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큰 키에다가 쌀과 겨가 뒤섞여 있는 곡식을 키 위에 올려놓습니다. 심지어 돌멩이까지 섞여 있습니다. 키를 단단히 붙들고 곡식을 위로 휙 던집니다. 그러면 큰 키가 흔들리면서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겨는 가벼우니까 키 바깥으로 날려가게 되고, 그리고 곡식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칭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코로나라는 상황의 키 위에 올려놓고 하늘 높이 던지셔서 키질한 사건이 코비드(COVID)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알곡과 쭉정이들을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지난 2주 동안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교역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지를 교구에서 모두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하게 이백 명 정도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도 나오지 않고, 실시간으로 예배도 안 드리고, 그렇다고 다른 교회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충격적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들이 이백 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안 나오는 게 아니라 이백 명 내지 삼백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교회를 빠지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가족들이 코로나에 걸리거나, 본인이 걸리거나, 아니면 코로나 후유증으로 안 좋거나, 혹은 중증 질환에 걸려서 교회를 못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코로나라는 상황을 통해서 예배에 잘 참석해야 한다고 하는 예배에 대한 의무감들이 많이 약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독특한 사정이 있을 것이니 예배에 못 나오는 모든 사람이 신앙을 버렸다고 우리가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코비드(COVID)라는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키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신앙이 어디쯤 와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고 우리 눈앞에 들이민 사건이 코비드(COVID)라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로서 생각할 때 과연 이 코비드(COVID)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정말 침체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코로나 상황 전에 비해서 매우 약화되었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오히려 영적으로는 코로나 이전보다도 훨씬 더 좋은 시기를 지났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특이한 것은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 자기 발로 교회에 걸어 나와서 등록을 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민이나 입대나 혹은 해외 근무나 사망이나 등등으로 교회를 떠나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걸어온 사람들이 이 코비드(COVID) 상황 속에서 많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넘쳤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뭐냐 하면 신앙이 어리고 태만했던 많은 사람에게 이 코로나 상황은 예배에 대한 의식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그것이 영적인 미끄러짐에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미친 듯이 이 세상에서 많은 소득을 얻으려고 하고 사람들로부터 유익을 얻으려고 하지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상태에서는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사람들로부터는 위로와 평화 대신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의 절기들을 지키고 내 성소를 경외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입니다. 거룩함은 지위이고 정결함은 상태입니다. 이 두 개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지위를 가졌는데 부정결하게 살아갈 때, 그때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뜨려지게 되고 그의 마음과 육체는 더럽혀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고 하셨는데, 성소를 경외하라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가 구별된 백성임을 상기하는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는 이 두 가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성소를 경애하라는 명령이 깨지면서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게 되었고, 이것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도 구약에서 불렸던 이 주일은 결국 산을 올라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아침에 일어나면 이 안식일의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가 예배를 드리는 때입니다. 그 산꼭대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순간이 설교를 듣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해서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깨달으며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다시 예배의 산을 내려 봉우리를 내려오고 주일이 끝나면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봉우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던 여호와의 집의 경험을 가지고 평지로 이어지는 일상의 삶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고 안식일은 그 주일을 바라본 날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성소를 경외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우리의 은혜의 때에는 예배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예배에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송을 드릴 때는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모두 바쳐진 가운데 진심으로 올려지는 찬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은 그 찬양으로 하늘을 향해 고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 속에서 세상의 헛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어리석은 삶을 뉘우치게 되었고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에 누렸던 예배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주일이 이런 주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며 또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외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적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 좋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예배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로 변명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형편 속에 있었는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판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결국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반드시 보이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주일을 바람처럼 날려 보내고, 오락이나 여흥으로 주일을 보내고, 섬기는 일도 없이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존경심도 없이 그렇게 주일을 보낸 사람에게 일주일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 생겨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예배 시간에 겨우 졸음을 쫓으며 힘들게 힘들게 견디다가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6일 동안의 삶이 바로 이 안식일을 고대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안식일에 영혼을 마음껏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과 은혜의 빛을 충만하게 받아서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은혜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지점이 어디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었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환경을 핑계로 삼아 신앙의 나태함이 여러분을 더럽히지 않도록 유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사랑은 우상숭배와 안식일의 계명에 대한 외적인 준수를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회복해야 할 것은 이 안식일의 계명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주일에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감격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주일이 영혼에 큰 자유를 누리며 이 세상 속에서 부정한 모든 것들에 물들지 않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하는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과 유지
그러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어떻게 회복되고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원래 평화는 삼위일체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평화를 모든 피조물들도 함께 누리며 기뻐하고 쉼을 얻으며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세계는 평화로운 세계였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순종하며 그 통치에 복종하며 평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땅은 아름다운 곡식과 각종 열매들을 풍성하게 내고 인간은 탐욕을 가질 필요가 없이 넉넉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죄로 깨뜨렸고 그렇게 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를 통해서 자연과의 평화도 누리게 하시고 사람들과의 평화도 누리게 하십니다. 자연은 아름다운 결실을 내고 사람들에게는 덕을 입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복을 누리는 백성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물 없는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고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욥기 22장 2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합니다. ‘복을 먼저 받고 싶다.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고 그러면 내가 비로소 하나님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입니다. 네가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하나님과 먼저 평화하라. 그리하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네 마음은 안정을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땅은 너를 위해 풍족한 열매를 내줄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A. 회복의 길: 회개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삶은 불행합니다. 우리 모두 그 깨어진 것을 경험했고 너무 불행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땅과 불화하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지 못해서 결국 행복을 찾아 미친 듯이 노력했지만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자연으로부터 토해 내쳐진 느낌,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경험을 하면서 인간은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만 그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기 위한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다시 평화를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면 사람들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자연 모든 만물과도 화해가 이루어져서 땅은 많은 열매를 주고, 사람으로부터는 덕을 입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것이 없이는 인간이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요청하기를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의지해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두 때가 있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할 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회개할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저 사람에게는 평화를 더욱 공고히 해주시고, 이 사람에게는 그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항구를 떠나기 위해서는 항구에 묶은 밧줄을, 부두에 묶인 밧줄을 풀어야 하고, 그때의 그 배는 바다를 항해하며 또 다른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것처럼 결국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마음의 죄를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마음의 죄를 눈물로 회개할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 영혼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그 두 마음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면서 정결한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주일에 와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는 오늘 예배하기를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 전체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배는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생각만 하면서 살았던 하나님을 거룩한 주일에 영혼의 눈으로 생생하게 만나는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끄러진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으려면 복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돌이켜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거룩한 성수주일은 어디서 미끄러졌고, 언제부터 나의 예배생활이 무너졌는지를 기억하면서,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증거라는 사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태만했던 예배 생활을 뉘우치고, 안식일을 아무렇게나 보내면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진심으로 통회하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는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다시 부정한 데서 정결한 데로 옮겨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길은 멀지만 가깝습니다. 또 가깝지만 멀기도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우면서도 먼지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에서 심장까지의 길이는 삼십 센티가 되지 않지만 삼십만 킬로보다 더 먼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기억하며 이제껏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하며 살았기에 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통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런 죄인을 위해서라도 자기를 버려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신 아버지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 평화를 주시는 줄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유지의 길: 순종
마지막으로 그 평화를 받은 사람은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 순종입니다. 그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마음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합니다. 점점 기도하기 싫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기 싫어질 때 이미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미운 감정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려는 대적의 의지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불순종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그 반감과 대적이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죄와의 사랑에 가까울수록 하나님과의 평화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 징후가 바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음성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하나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분의 음성을 기뻐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지의 일치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람이 달라도 한없이 사랑하면 그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나의 뜻이 그의 뜻이 됩니다. 이게 사랑이 주는 의지의 일치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하는 자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겉모습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바리새인들도 한 일이었고 오히려 그렇게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세리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드렸던 그런 기도를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그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니, 계속 불순종하며 살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태양을 등진 채 그림자가 없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삶에 정성을 들이십시오. 생활에 공을 들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분이 죽으신 것과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그분이 불행에 처해지신 것과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하신 성찬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시며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이는 잠시 후 십자가에서 찢어질 당신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주를 받아 자신의 몸이 갈갈이 찢어질 것을 떡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은 결국 한 가지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죄짓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 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차마 보실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모두 찢어 주시고 피를 쏟아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 피로 구원함을 받았으니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버린 대가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모질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린 채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땅은 열매를 내지 않고 사람으로부터는 찌르는 것과 같은 상처를 받으며 하나님께로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면서 더이상 세상에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기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라는 이 초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더 나은 행복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용감하게 걸어가십시오. 나와 성도들은 그 길로 가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이미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수없이 걸어봤던 길이고, 그 길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살면서 인생의 절망적인 허무감이 파도처럼 마음에 밀려온 적은 없었습니까?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고 싶을 정도로 낙심되는 때는 없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모를 때에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이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는 인생의 허무 그리고 언제까지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저주받은 것 같은 이 외로운 길을 걸어야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들려주었고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메마른 광야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마른 목 한 모금 축일 수 있는 물 한 방울조차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많이 받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림으로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거칠고 강퍅한 마음으로 몸부림치며 살아보았지만 그러나 도저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뜨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어제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어둡고 칙칙한 길을 들어서 우리는 암흑 속을 헤매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썩고 또 썩어 희망이 없는 더러운 쓰레기통 같은 세상에 코 박고 우리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 외롭기 한량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한 채 다시 살아가려고 하는 세상의 본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를 너무 빨리 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평화가 없을 때 자신이 겪었던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과 괴로운 시간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어떤 하나님 안에서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이 세상 속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이 이야기하는 죄의 낙(樂)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일을 하찮게 여기고 다른 날과 똑같이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어지기 시작했고, 우상 대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마음의 결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세상,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손을 붙잡고 악수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침 뱉고 욕을 했던 세상과 입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미워하고 원망하며 독한 말을 쏟으며 살지만 그것은 모두 허공을 휘도는 메아리가 칼로 변하여 자기 자신을 찌를 뿐 어느 다른 곳을 향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꺼이 반납하고 옛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여러분의 심정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약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모른다고 말하기에는 이제 핑계될 것이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지러질 듯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양심의 고발을 받으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린 모든 책임이 누구에게도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그 순간이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진실해지십시오. 속임수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십시오. 주님 앞에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떨어졌든지 거기에 나를 다시 세워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피로 나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과 평화를 잃어버리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분이시니 그 기도를 왜 거절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졌던 주일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은혜의 햇살을 받으며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났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쁨으로 살았는지를 되새겨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여러분이 소홀히 여겼던 거룩한 주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집을 경외함으로 그 평화를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삶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 마음을 지키는 법이 없고, 마음을 지키는 데 공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삶의 태도를 고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십시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내 마음의 우상을 허물어버리십시오. 불결하게 되어버린 여러분의 주위를 다시 한 번 정결하게 하고, 그날에 주님과의 만남을 가장 기뻐함으로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으로 돌아가 한없는 복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