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7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는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알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그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셔서 당신이 살아계신 것과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철저히 감추어진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 저 고장을 여행하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만 사실은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떠나는 자아 속으로의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을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혼이 순전해 질 때 우리의 마음도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그 하나 된 마음 안에서 올곧은 삶과 행동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신자들의 삶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잇대어 있고 그 영혼이 순전함을 회복하는 길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사랑할 때에 영혼은 순전함을 회복하게 되고 그 순전함 속에서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게 될 때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거절하게 될 때 영혼은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음은 찢어져 나뉘게 됩니다. 마음이 이처럼 찢어져서 나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많은 사물을 보는데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가 다 인상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출렁거리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출렁거리는 감정들이 불러일으키게 되면 그것들을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것들이 없어져 버리면 슬퍼하거나 해서 욕망과 기쁨 두려움과 슬픔 이런 것들이 마음 안에서 출렁거리고 일어나면서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어지게 되면 마음은 올곧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삶은 많은 모순 가운데 행동을 낳게 됩니다. 그런 삶속에서 결국 인간은 자기 좋은 대로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그만 두고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삶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 쾌락을 즐기고 기쁨을 누릴지는 몰라도 그 기쁨과 쾌락이 끝나고 나면 더 큰 슬픔과 고통이 밀려오고 또 어려움을 만나면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고 평안함을 만나면 그 평안함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몸의 주인은 영혼이고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몸이 올바른 영혼의 힘에 의해서 통제되고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솔되어질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잡다한 일들에 마음이 매몰되게 되고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그 자리에서 그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부터는 멀어지는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더럽고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눈이 진리의 말씀에 영향을 받을 때는 마음의 눈 따로 있고 육체의 눈 따로 있습니다. 육체의 눈이 “저거 예쁘다. 탐나지?” 라고 말하면 마음의 눈이 그 물건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면서 그것을 탐내고 욕심을 부리면 ‘너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돼’ 하고 타이릅니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마음의 눈과 육신의 눈이 하나가 됩니다. 급속히 죄에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 영혼의 더러운 상태와 마음의 고통 하는 상태를 보여주셔도 신자는 그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통과 시련 가운데 두십니다. 그 고통은 대개 육신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고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입니다. 눈에 있던 것들을 치워버리시고 없던 것들을 생겨나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해결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고통일 수 없습니다. 빚을 진 사람에게 빚보다 더 많은 돈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고통일 수 있습니까? 작은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그 병을 능히 고칠 수 있는 좋은 약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환난일 수 있습니까? 이런 때는 대부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자원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시선을 들어서 나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I.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구원을 갈망하였사오며” 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은 ‘했으면, 할 텐데’로 끝나는 것입니다. 갈망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절대적인 욕망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상태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어려움이 어떤 종류의 어려움인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육체와 환경의 어려움은 마음과 영혼의 어려움을 항상 동반합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웬만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더욱 은혜로부터 멀어진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지닌 자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모자라면 남의 자원이라도 써 보려고 합니다. 이제 도저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감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고치시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속에서 고통을 겪게 하시고 거기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하셔서 영적인 것으로 옮아오게 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처음에 나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빨리 기도해서, 간절히 기도해서 내 문제를 후딱 해결해야지 이런 고통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왜 그런지 하나님은 쉽게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사람의 가장 절박한 소원은 빨리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데 다른 환경을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들 그의 삶이 바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꾸고 영혼의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쪼가리 흩어져 벌어진 그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하시고 일관성이 없는 비척거리는 우리의 삶의 행동들을 올곧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곤고하면 교회에 와서 한번 기웃거리고 말씀에 눈물 찔끔 흘리고 세상에 돌아가서 다시 또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서 허덕거리면서 욕망을 따라 살고 그러다 많이 다쳐서 피가 흐르면 돌아와서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면 즉시 하나님의 사랑 잃어버리고 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런 종류의 생활로는 행복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아니면 희망이 없는 죄인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인간 존재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방 기도해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믿습니다’를 연발해도 왜 그런지 내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그때에 주제넘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하고는 상대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짐짓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더욱 어두움에 빠지게 되고 나누어진 마음은 나누어진 상태에서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목표가 없습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의 삶이 무슨 목표가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허덕거리고 사는데 자기도 왜 이러고 사는지 모릅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이 잘 하는 말이 ‘나도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다 이야기 해 본 것일 겁니다. 모릅니다. 답이 없습니다. 자기의 충동이 시키는 대로 습관에 의해서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않지요. 가끔 쾌락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나고 나면 더 큰 허무가 밀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도록 내버려 두시고 신자가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신자의 관심은 어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기회에 그의 영혼을 세탁하시고 찢어진 그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는데 뜻이 있습니다.
돈 좀 잘 벌면 뭐합니까? 기뻐요? 움켜쥐고 있으면 탐심이 자라고 흩어서 쓰면 정욕을 따라 쓰니 더 많은 죄를 짓고 영혼에는 찌르는 살이 됩니다. 심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좋은 일도 다 나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건강하고 평안하다고 해 봅시다. 건강하니까 하나님을 덜 의지하겠죠? 평안하니까 교만해 지겠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마음을 고치기를(쇄신) 원하십니다.
여러분 햇빛이 비취면 별것 아닌 것 같죠? 커다란 돋보기에 모으면 나무도 태우고 종이도 태웁니다. 우산만한 집열판으로 햇빛을 모으면 라면하나 끓일 정도가 됩니다. 빛을 그렇게 모아보기 전에는 그 햇빛 속에 그런 뜨거운 열의 힘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영혼의 힘은 하나님을 향해 모으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이 모아진 영혼의 힘 같은 것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시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음이 갈라졌다고 표현했는데 증거를 대볼까요? 은혜 가운데 있지 않을 때 엎드려 기도하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왜 그러죠? 마음이 하나가 안 되니까 이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다 찢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기도하라고 하면 못 합니다. 왜? 마음이 다 나뉘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나누어진 것은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더러워져 있는 것입니다. 불결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인상이 새겨져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기도하면 오히려 머리가 더 산란해집니다.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것은 모으려고 해 볼 때 혼란스런 것이 느껴집니다. 세상에 팔면서 살아갈 때는 자기 마음이 갈라져있고 혼란스럽다고 하는 것 못 느낍니다. 왜? 그 혼란스런 생활과 생각이 자기의 마음과 똑같은 반영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못 느낍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모아보려고 해 보세요.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합쳐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간절히 마음을 모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죄가 생각나기 시작하고 자기가 객관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겼던 마음의 눈이 떠지면서 육체의 눈과 사이에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까지 하나님 기다리십니다.
마음이 나누어진 사람들의 특징은 거의 기도가 없습니다. 거의 기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에 힘이 나고 보람이 느껴지지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에는 기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엎드려서 갈라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려고 애를 쓰다가 한 시간 뒤에 일어나는 것은 허무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쳐다도 안 보신다는 느낌 밖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이 텅텅 비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이... 그 나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흩어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왜 기도가 안 되는지 이제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그러고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신자로서 의무를 했다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보이시기까지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간절히 찾게 만듭니다. 평안할 때에는 그저 이런저런 삶, 초점 없이 삽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더더욱 그렇게 삽니다. 그러다가 큰 물질적인 어려움을 만납니다. 당장 돈을 갚지 않으면 집이 날라 가고 차압이 들어오고 구속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모든 것이 돈과 연관이 됩니다. 아는 사람도 내가 사랑하던 사람도 돈을 빌려줄까? 인간관계를 이용해서 자금을 조달할 길은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먹어도 먹은 것이 아니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오직 생각이 돈 하나에 꽂혀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주지도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쪼개진 마음의 나뉨을 합쳐주지도 못합니다. 오직 마음을 그렇게 순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입니다. 진리에 영향을 받아서 밝은 빛을 영혼이 받고 있을 때에만 나누어진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영혼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 신자가 얼마나 마음으로 씨름해야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렇게 나누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뉘고 더러운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겠어요? 뭐가 행복하겠어요? 여행을 해도 죄가 자기 눈앞에 있고 깨어진 하나님의 관계가 눈앞에 있는데 여행을 한다고 행복하겠어요? 좋은 옷을 입는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한두 번 칭찬해주고 만족을 느끼게 해 줄지 모르지만 행복하겠어요? 푸짐한 음식을 먹는다고 칩시다. 그것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겠어요? 모든 문제는 이 영혼과 마음의 문제는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모든 인간이 결국은 빗나가게 마련입니다. 온전하게 살려고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런 질서를 따라서 사랑해야 하는 것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는 안 될 것도 사랑합니다. 여기에서 이것이 고통의 화살이 되어 모두 자기에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고통이 되게 해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길을 잃어버릴 인생인데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II.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하나님을 갈망할 때에 그 갈망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통과 시련 속에 있어도 두 가지 사실만을 명심하면 그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하시다는 사실과 그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움이 된 것을 경험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기쁨들입니다. 복수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이 나에게는 즐거움입니다.
사랑과 맑은 지성 진리를 깨닫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작은 소리를 통해서도 그 소리에 담겨진 마음을 들어요. 사랑이 없는 마음은 고함치는 소리를 통해서도 그 마음에서 소리치는 외침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파악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명령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파악됩니다.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싶으셨던 존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득이 됩니까? 혜택 받는 것은 우리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라 명령하시고 그렇게 안 하면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책망하시면서 까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라고 분부하십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참된 효도는 고기와 피륙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작은 음성 속에서도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큰마음을 이해하고 느껴서 목표와 동기에 있어서 합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효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마음에 있는 말이 잘 들릴 수 있도록 만드셔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인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소식이 되게 만드십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느낀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행복에 어떻게 써 먹을 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누구도 그 분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마다 모두 자기 욕망에 의해서 파멸해 떨어지는 법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이고 그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분토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분의 참다움을 발견할 때에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이 세상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분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었던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답게 보이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추루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게 만들어줍니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그 큰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하며 살았던 우리의 교만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주고 우리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 마음의 비늘을 벗기시고 감겼던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물들에 현혹되지 않고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III.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건강함을 잴 수 있는 척도를 한번 말씀드려 볼까요?
육체가 건강한 것은 식욕을 통해서 입증이 됩니다. 어디 부러지고 피 흘리지 않아도 음식이 싫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내부의 육신의 기관에 균형이 깨지고 무엇인가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은데도 배고프지 않고 마시지 않는데도 목마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할 때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말씀이야말로 영혼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영혼은 더더욱 정화되기 시작하고 정화된 그 영혼 속에서 마음은 온전해지기 시작하며 마음이 온전해질수록 영혼은 더더욱 그 마음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고 한 분 하나님을 앙망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육체의 더러운 욕망을 멀리하고 사악한 이 세상의 자랑을 하찮게 여기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아가는 까리따스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싸울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커다란 용기와 힘, 그것이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를 찾는 자를 하나님도 찾으시고 당신을 향해 마음을 고정하고 당신의 은혜의 보좌로 나오고 싶어서 마음이 고정된 사람들을 지금도 만나주십니다.
최근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본 것이 언제입니까? 정말 주님을 만나보고 싶어서 내 영혼에 치료자이신 주님,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내 영혼은 곤고하고 마음은 나누어져 있습니다. 영혼은 더럽혀져있고 나의 삶은 올곧지 않습니다. 나의 살아가는 삶으로 주님을 욕 먹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뜬 구름 같은 삶, 시간이 이끄는 대로 찢어진 마음으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지만 그것을 통해서 아무것도 하나님을 위해 섬기지 못하는 그 삶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가 포기하기를 바랐던 삶입니다.
신자의 삶은 도열의 삶이어야 합니다. 도열이라 하는 말은 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이신 그 도로 말미암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 도열의 삶, 도의 기쁨인 삶,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이 도열의 삶, 그 속에서 갈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어 영혼은 맑고 깨끗하며 우리의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고 좋으신 주님께 하나로 모아져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단하고 지친 삶을 힘겹게 이어가도 마지막 결과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주님이 그 중심에서 사라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참 도가 마음에서 없어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소유하므로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럴 때에는 다시 자신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개선해 보려고 하는 육신적인 노력을 접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영혼을 고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책속에서 진리를 멀리 떠나 영혼은 더러워지고 마음은 찢어져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의 길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불순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의 진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내 힘으로 홀로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자는 나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불순종을 꺾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들리고 보이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은 두 번째로 우리의 마음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비추면 어두웠을 때는 보지 못하던 말로 다할 수 없는 더러운 것들이 우리에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로 자기를 그렇게 보면서 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한편으로는 자신의 더러움과 비참함,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때에 자기는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품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이 그들의 뺨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때 그들은 더욱 설움에 복받쳐 우나이다. 그 슬픔 끝에 즐거움이 있사옵나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경험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삽니다. 구름같이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은 이 구름같이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을 받고 섬기지만 우리의 몸을 그렇게 움직이고 섬기게 하는 주인인 우리의 영혼이 이익이 없는 일에 자기를 소진하는 인생이야말로 짐승과 같은 삶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 허무함을 어디에다 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대들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영혼의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들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이 진리를 들을 때에 여러분을 향해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이 몸에서 해방시켜 달라, 내 영혼을 이렇게 방치하지 말아 달라. 내가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려고 하니 너는 나를 더 이상 묶어두지 말라. 진리가 저 문밖에서 소리치니 나로 하여금 달려갈 수 있도록 욕심의 밧줄로 나를 더 이상 묶지 말라 고함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무엇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를 다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까? 진리를 모르고 육체를 쫓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그 허무함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멸시와 욕을 다 당하시고 우리가 갚지 못하는 죄를 당신의 죽음으로 갚으셨으며 귀로는 들어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살과 피를 다 찢어 나눠주는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집에 안온하게 살게 하시기위해서 그분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서 뭐합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는데 먹기 싫은 음식을 꾸겨 넣듯이 살아가는 삶, 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대열에 이끌려서 한걸음한걸음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우리에게는 무슨 기쁨이 되겠으며 하나님에게는 무슨 행복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조금 지나가다 보면 좋아지겠지?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길 텐데 이러면서 살아온 날들이 벌써 몇 년입니까?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영혼에는 초점을 잃었습니다.
정말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셔서 나는 행복하고 무엇 때문에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아들의 생명까지 주셨습니까? 이런 감격적인 사랑의 고백이 우리에게 언제쯤 생겨나겠습니까?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질병을 고쳐주실 약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무엇보다도 목말라 하십시오.
왜 수련회 참석 못합니까? 여러분 지금 교통사고 나면 스케줄이고 뭐고 없습니다. 무조건 입원입니다. 내가 해보니 그렇습니다. 달력은 빽빽합니다. 일시정지입니다. 몸을 못 움직이고 의사가 입원하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망가진 차는 사람의 교통사고를 내지만 망가진 영혼은 더 커다란 인생의 사고를 냅니다. 그러지 말고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치료받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