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0-31)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두 번에 걸쳐서 해서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해서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 문제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과 그리고 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을 통해서 용서의 기초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사도는 이 에베소 4장 마지막절과 5장에서, 사실은 5장이 이렇게 나뉘어 졌습니다만 그러나 장을 나눈 것이 꼭 문맥과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장절을 무시하고 성경을 읽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분명한 사실 하나는 4장과 5장은 지금 성경이 나뉘어져 있는 그 부분에서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32절과 1절이 동일한 하나의 문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선 용서에 대해서 4장 마지막에서 이야기를 하고 그 용서의 기초에 대해서 5장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용서의 마무리에 대해서 5장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도는 이 미움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뿌리가 무엇이고 그것이 또 우리의 영적 생활에 어떠한 해악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는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화하게 살아가는 그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 그것 혹은 화목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그 현실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를 무용하게 만드는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았지만 오늘 여기서는 외관적으로 드러나는 삶이 아니라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한마디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먼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강조한 다음에 용서를 이야기하고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대비를 3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2절은 현격하게 미움과 용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와 있는 31절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과 정반대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31절입니다. 그러면서 그 31절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보증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성령의 증거 하심이 있습니다. 성령이 인치심을 증거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친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단 한번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시는 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늘 그 성령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역사하셔서 늘 그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말해주고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격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동기로 삼을 수 있는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면 그런 삶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인격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들이 같이 사귀며 살다가 깊은 정과 사랑을 나눈 친구나 형제 혹은 부부였음에도 혹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는다든가 아니면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신의를 저버린다든가 해서 인격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면 그것이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혹은 자신의 어떤 커다란 치부나 약점을 사람이 알게 되었을 때도 인격적인 관계가 서먹해 집니다. 성령도 인격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와 똑같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시키게 해 드리는 것이 이것만이 아니라 모든 죄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만 그러나 오늘 사도는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제기되는 문제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그러고 나서 뒤에서 용서에 대한 교훈이 나오는 것을 보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딱 하나였는데 그 씨앗은 굉장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열매로서 맺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만이 우리 가운데 자라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의 씨도 처음에는 지극히 작지만 후일에는 아주 크게 자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거의 뽑을 수 없게끔 인격과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그러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매일매일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문제를 깨끗이 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맹수를 키우거나 아니면 악한 열매를 맺는 나무를 잘 자라도록 허락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점점 자라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이런 모든 열매들이 솟아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속함을 입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즐겨 불렀던 찬송은 이런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모임은 각자 다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지만 교회는 특징이 설교자로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세상에서는 제법 쓸 만하고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어디가든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인격적인 대접도 받고 살아가던 사람이 교회 와서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내가 이 교회 속에서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겸손한 인격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구속의 가치를 발견할 때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안에서 아직도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본질상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모든 교만은 진정으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신 보배로우신 주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자신이 가치 없고 그리고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알고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나 같은 죄인이 이곳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피로 구속하신 귀한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분을 내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지체들을 향하여 분노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지체를 향하여 마음속에서 용암과 같이 분출되는 분노의 감정을 지니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 죄와 허물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면서 교회에 덕을 떨어뜨리고 자신의 신앙인격에 스스로 불명예를 자초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이러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렇게 하다가 비방하는, 하나님께 비방하는 발언과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게 되는 이제는 지체를 향한 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에로 까지 나아가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보십시오. 분노의 감정이 지체를 향해서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그는 즉시 겸손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할 때에 자신의 영혼 속에 흘러들어오던 그 참된 안식과 은혜를 단숨에 잃어버립니다.
저는 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작년에 3일 입원해 본 것이 최초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그때는 문이 뒷문이 있고 앞문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광교에서 운전수가 앞에 뭐가 끼어들었는지 하여튼 비 오는 날이었는데 브레이크를 엄청 세게 밟았습니다. 그러니까 단숨에 굴러 떨어져가지고 출입구 있는 통 속으로 거꾸로 처박힌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났는데 다리가 까졌습니다. 외상은 별로 없는데 다리를 절어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걸어 보니까 걸을 만해서 가려고 했더니 운전수가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해서 차장이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까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사를 놓아주는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주사 하나가 빨래방망이 반 만합니다. 태어나서 아직도 그렇게 큰 주사는 못 보았습니다. 하여튼 주사약이 한 컵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바늘은 좀 두껍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중에 그게 무슨 주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것이 피로회복제랍니다. 그런데 엉덩이에다가 놓았는데, 그 경험이 제가 1981년도에 성령 체험할 때하고 아주 똑같습니다. 그런데 차이는 성령체험은 머리부터 시작됐는데 이 주사 체험은 엉덩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만 다르지 똑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탁 하고 주사를 맞으니까 그 뜨거운 기운이 사방으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퍼집니다. 한 3분정도 있으니까 혀끝에까지 느껴집니다. 뜨거운 기운이 확 느껴집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분노가 우리 속에서 탁 하고 솟아오르면 그러면 그 순간에 말하자면 영적인 혈관을 타고 우리의 전신에 확 침투해서 우리를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 절제, 그 다음 성령이 기뻐하시는 생각 이런 모든 것들을 단번에 다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의 감정이 확 치받치면 눈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라가지고 뒤덮게 되었을 때에는 그 분노가 무엇 때문에 말미암았는지도 문제가 안 됩니다. 똑같은 분노인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참지 못하는 분노일 경우에는 기원이 틀립니다. 이 감관은 똑같은 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도 기원이 틀립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오르는 마음과 분노는 영혼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 영적인 깊은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뒤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 한 분을 주목하고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하나님과 더욱더 하나 되게 하는 것들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 속에 있었던 분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데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이니까 이것은 기원이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노가 쏟아져 나와 가지고 덮어버리면 그 다음에 십자가와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과 매일 외우는 우리가 우리의 죄지은 것을 사하여 준 것같이, 그리고 옛날에 강도사한테 주기도문 설교를 들으면서 한없이 울었던 것 그런 것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다 잊어먹는 것입니다. 온 영혼의 혈관을 침투해서 사로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저 사람 때문인지 나 때문이진 오해 때문인지 환경 때문이지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쏟아져 오르는 것입니다. 이미 쏟아 올라서 무엇이라도 하나 집어던질 정도가 되면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순수하게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 우리 속에 있을 때 미치는 해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곳에서는 겸손함에 대한 자기인식 다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그 놀라운 감격과 그 놀라운 인식 모두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한순간에 마비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감정이 바로 구약에서 사람들이 살인하는 기초입니다. 그것이 그 모든 노함 그리고 분을 품는 것 그러면서 이 뒤에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훼방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말이 쓰였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질서를 훼방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왜 이 끝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체를 향한 분노는 그리고 지체를 향해서 솟아나오는 이 분노는 필연적으로 그런 지체를 우리 가운데 놔두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동시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경이 계속해서 이 분을 품는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굉장히 많이 당부합니다. 너희가 분을 품되 해가 지기 전에 그 문제를 처리하라고 말합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든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분노하는 것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정당한 것인지 않은지 투표를 해서 자기가 100퍼센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악한 분노의 마음이 들어오도록 허락한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우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차단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에 깊이 깔려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지는 않지만 우리 속에 깊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한번 간증하는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집회를 갔는데 딴 데서 그렇게 역사가 일어났는데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입이 떨어져 말이 나오지 않더랍니다. 너무 억눌려서. 그래서 기도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면, 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분만이 그런 것은 아니잖습니까? ‘에이, 쪽발이 그놈들.’ 그런데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이 속에서 지금 일본 사람을 때려주고 싶다든지 일본 망하기를 기도한다든지 그런 것 아니잖습니까? 우리 피해 받은 한국 사람에게 깔려있는 공통적인 정서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모인 앞에서 내가 진심으로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여러분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이 이 속에 깔려있는 것을 고백을 하면서 자신에게 진정한 용서와 자유를 먼저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그리고 마음으로 깊이 용서하고 나니까 성령이 다시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간증을 제가 직접 들은 기억이 납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알지도 못하게 깊은 곳에 깔려 있습니다. 역사하지 않으나 역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악함, 분냄,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어디서 나오는가, 열매는 많지만 나오는 곳은 무엇을 동반하느냐 하면 악의, 악독 이런 것들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악독입니다. 여러분은 뱀을 한번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독사를 잡아서, 꼬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꼬리에도 침이 있습니다. 꼬리를 꽉 밟고 그리고 장갑 같은 것을 안 물리게 끼고 그리고 모가지 위를 꽉 잡고 입을 벌려서 그 벌어진데다가 나무 같은 것을 집어넣고 이빨을 툭 건드리면 기가 막히게 거기서 물이 한 방울 쫙 나옵니다. 그것이 독입니다. 이빨이 주사바늘 같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구멍이 뚫어져 있습니다. 딱 물면 반사적으로 우리가 음식을 뜨려고 하면 침이 나오듯이 딱 물면 이빨이 딱 들어가면서 자동으로 그 속에서 물린 생물의 체내에 독이 투입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에 대한 성경의 묘사입니다. 그리고 미움이 그런 감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악함과 그리고 악의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미워하는 자를, 용서치 못하는 자를 향한 악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성도는 함께 축복을 빌어주도록 부름을 받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서로를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 교리적인 문제나 진리나 신령한 문제로 인하여 혼돈이 있을 때는 교회가 교회의 권세로 정죄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대신해서 치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진리의 문제를 떠나서 개인이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밀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관계는 그가 누구이든지 손을 높이 들고 진심으로 복을 빌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진정으로 축복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있는 이 악독과 악의,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약속된 이러한 삶을 아예 불가능하게 (mp3 여기서 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