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요셉이 경험한 용서와 치유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 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37:2-5)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50:17)
녹취자: 김미영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허물밖에 없는 인생들을 지난 3일도 가당치 않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붙드셔서 생명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호흡이 머물러 있게 하시고 오늘도 약속한 날이 되매 하나님을 찬송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이시간도 주께서 미움과 용서에 대하여 마지막 말씀을 상고하는 시간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삶과 마음과 그리고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도록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더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또 다른 주제들을 다뤄야 되기 때문에 오늘 한 여덟 번째 시간쯤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미움과 용서에 대한 시리즈를 오늘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서 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되었고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용서하기 위한 그 참된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을 더듬으면서 에베소서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순서가 좀 바뀐 것 같지만 미워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소한 마음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의 열매를 맺는가 라는 문제를 오늘 실례를 가지고 살펴봄으로써 다시 한 번 미움과 용서의 문제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주의를 환기하고 그리하여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깊이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되고 있는 심각한 미움과 죄의 문제를 고치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될 것은 요셉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 성경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면서도 고난을 당하여야 했던 사람을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같은 ‘요’자 돌림입니다만 하나는 요셉, 또 하나는 욥입니다.
그래서 욥이나 요셉이나 똑같이 우리는 이유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해야 했던 사람으로 꼽고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여기서 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먼저 읽은 창세기 37장의 기사를 보면 우리의 그런 생각이 상당히 선입견에 많이 사로잡혀 있다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듭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도 끔찍하게 사랑했겠죠. 그렇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노년에 아들을 얻어 보지 못해서 노년에 얻은 아들이 얼마나 젊어서 얻은 아이보다 다른지 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공통적인 인간의 경험은 노년에 얻은 아들일수록 더 깊은 사랑이 가는 모양입니다.
뭐 우리와는 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해 아래 사는 인간이 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이 아버지 야곱의 경우도 그렇게 졸지에 두 여자를 한꺼번에 얻고 네 여자를 한꺼번에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잖아요? 그러고 나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납니다만 그러나 요셉을 낳을 때 쯤 되어서는 세월이 상당히 흘렀고 그리고 아마 집안도 상당히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태어난 이 요셉이 상당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또 형들에게 아주 특별한 미움을 받으면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미움의 원인에 대해서 한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그 형들이 물론 그 요셉을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를 애굽에 팔아버린 것, 이런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셉의, 요셉 자신에게도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오늘 성경의 기사는 요셉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일곱 살이면 지금도 철이 다 든 나이고 더군다나 그 당시로서 열일곱 살이면 거의 성인에 가까운 나이였습니다. 그런 나이 들은 아이가 아버지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아이가 여러 면에서 볼 때 자긍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거기에서 자식은 상당한 자부심을 갖게 되겠죠? 다른 형들에 비해서. 그런데 그것보다도 아마 자기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볼 때도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라헬의 아들 아닙니까? 레아는 괜히 쫒아온 사람이거든요. 라헬을 얻으려고 했는데 그 외삼촌 라반이 사기 쳐서 그 레아까지 끼워주는 바람에 7년을 더 봉사를 해야 됐거든요. 그리고 뒤에 실바와 빌하, 이 두 사람은 그 두 여자의 말하자면 종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어 온 겁니다. 그러니까 신분으로 보나 아버지가 사랑한 여자와의 관계로 보나 그는 다른 형들과 선택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미 클 만큼 큰 아이가, 아이도 아닙니다.
클 만큼 큰 사람이 무슨 습관이 있었냐하면 형들이 잘못하는 일을 잘 살펴본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한테 고발하는 그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의 편이니까 그 아이의 말을 듣고는 쉽게 그 아이의 말을 신뢰하고 아마 그것 때문에 형들이 요셉으로 말미암아서 아버지에게 심한 책망을 듣거나 꾸지람을 듣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멀리 양을 치러 갔을 때에 아버지가 가서 그가 있는 곳을,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할 때 그는 확인하러 아버지의 명을 받들고 갔지만 형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놈이 또 와 가지고 우리가 양치는 것을 보고 무슨 잘못을 아버지한테 가서 꼬드겨서 우리를 혼나게 할까 하는 이런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실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그렇게 하니까 결국은 요셉이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가서 더 관용하고 너그러운 사랑으로 그 형들을 대해 주었어도 형들에게는 늘 피해의식이 있는데 그런데 이 아이가 늘 자신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가서 고하고 그것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들과의 신뢰관계가 자꾸 금이 가는 것들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준 장본인이 이 아이였기 때문에 이 요셉에 대해서 언사가 불편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나 아버지 앞에서는 어쩌지 못하지만 늘 아버지 옷자락을 붙들고 뒤에 숨어서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형들 속에서는 미움이 싹트고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편애라는 위험에 대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 미움이라는 건데 결국 그 형들의 잘못을 이 나이가 성숙할 만큼 성숙한 이 요셉이 신앙 인격으로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바라보고 감싸주는 어떤 미움에 대한 용서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결국은 자신에게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다시 되돌아옵니다. 이 요셉이 이렇게 자기 형들에 대해서 그런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들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때는 신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는 이미 그 때 상당히 신령한 세계를 가진 신앙의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꿈이라든지 그 다음에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을 향하여 경배하는 거라든지 하는 것들을 꿈을 꾼 그 자체도 참 특이하지만 그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내는 것도 또한 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어느 정도 신앙에 있어서 신령한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관용할 수 있는 신앙의 인격의 부족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은 형들의 미움을 촉발하게 되었고 형들의 미움은 결국 그에게 쓰디쓴 고난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형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것을 사용하셔서 그것을 도구로 삼아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고 그리고 거기서 참 많은 시련 가운데 인격과 영성이 연마되게 하시고 그리고 신령한 사람으로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셔서 결국은 그 불행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서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들이 잘못된 일을 행하고 나면 그것도 우리가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면,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후일에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그러한 마치 그것을 빼 버리고 나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 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필요 불가결한 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운행되는데 그것을 섭리가 전개되기 전에 미리 내다보는 방법이 있고 다 이루어진 다음에 회고를 하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더 쉽게 예를 들어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합하다’ 고 하는 말처럼 재밌는 말이 없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의 뒤에 있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영어 성경에는 'be after heart of the god' 하나님의 마음의 뒤에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마음을 먹으시면 ‘그 마음을 뒤 따라 가는 사람’ 이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가 왕에 오르고 그리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생을 보면 그는 인생의 말년에 오히려 젊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 때에 그 때에 도달할 수 없었던 놀라운 신앙의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이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우주적인 성격, 그리고 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왕이 된 의미, 그리고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왕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보다 더 완전한 나라, 그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누가 뭐라 그래도 그는 고난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을 위해서 예고된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때에가 아니라 그 후에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고 또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고 온역의 재앙을 겪고 하는 깊은 시련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왕좌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왕좌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늘 기도 속에 고백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하는 노예라고 하는 고백을 스스로 토해냅니다. 그리고 나의 이 영광스런 위를 통해서 더욱 더 흔들리지 않고 빛나는 그리스도의 보좌를 바라보고 다윗의 번창하는 왕국을 통해서 이 왕국의 껍질을 깨고 완전하게 성취되어야 할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망할 수 있는 그런 시야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고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난은 자기가 죄 지었기 때문에 그 열매로 말미암아 다가온 고난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비록 회개했지만 너희 집안에서 칼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한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서 그는 또한 말년이 될수록 더욱 더 경건을 넘어서서 이제는 거룩해져 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범죄 한 것이 그 신앙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본 관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 보면 이런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국무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다 이루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팔려가기 위해서는 형들이 그를 파는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그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형과 요셉과의 관계가 나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난 다음의 일이지 요셉이 그 후에 믿음으로 살아서 그렇게 자기가 잘못 한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가 막힌 부속품이 되게끔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형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로 하여금 가장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실질적인 적자로서 여러 방면에서 소외감과 컴플렉스를 느껴야 했던 빌하나 실바의 아들들이나, 혹은 레아의 아들들인 형들을 그 시간에 인격으로 끌어안고 그 신령한 세계와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영통한 사람이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아버지와 형들과의 관계에서 중보자적인 삶을 살아서 그들 가운데 진정한 샬롬이 있도록 만들어 주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는 형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 형들이 큰 아픔을 겪으니까 형들의 입장에서는 요셉을 구덩이 속 정도에 쳐 넣는 것은 전혀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그렇게 떨어진 것을 다시 끌어 올려서 죽이지 않고 팔아버린 것, 그런 것 정도는, 아버지 야곱에게 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묻혀 가지고 요셉의 옷을 갖다 줌으로 말미암아 동생은 발견하지 못하고 오다가 이 피 묻은 옷을 발견했는데 이게 요셉의 옷이 맞습니까? 이렇게 얘기해서 그렇게 모든 것을 꾸미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서 결국은 이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보세요. 살인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어떻습니까? 가장 간단한, 말하자면 평상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에서 오는 미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읽는 가운데 외국분인데 참 신령하게 설교를 참 잘 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피 묻은 칼과 침에 묻은 입술은 똑같다. 피 묻은 살인자의 칼과 그리고 사람의 말을 찌르는 악한 말을 하기 위해서 묻혀 진 입술의 침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요셉이 결국은 말하는 그 문제 가지고 형들과의 관계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결과로 요셉은 깊은 쓰라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팔려 옵니다. 성경에 상세한 기록은 안 나와 있지만 이미 그렇게 팔려갈 때에 이 요셉은 상당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뭔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막연한 예측을 했으리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애굽으로 와서 비록 그런 신앙을 가지고 애굽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그의 애굽에서의 생활은 형통했다고는 성경에서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이 신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가 형통한 것이지 그의 인생은 코에서 단내가 나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아이를 낳아서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그게 잊어버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생각하고 싶지를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거의 똑같은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내 연수가 조상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이 요셉도 야곱 못지않은 험악한 세월을, 더군다나 야곱은 아는 사람이 있는 속에서 아내도 있고 자식들이 있는 가운데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이 사람은 정말 혈혈단신으로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심한 고통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도 그 상처가 치유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 그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잊어버리고 싶다 뭘 잊어버리고 싶겠어요?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좋게 살던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겠어요? 채색 옷을 입고 다니던 그 어린 시절의 물장구치고 다람쥐 쫒던 시절의 그 기억을 잊고 싶겠습니까? 뭘 잊고 싶겠어요? 그가 잊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구덩이에 들어가던 그 순간부터 시작해가지고 애굽에서 살았던 모든 날 들 그것들은 정말 한없이 끔찍한 고난의 날 들이었고 시련의 날 들이었습니다.
군인이 씩씩하게 걸어갈 때는 산이라도 삼킬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언제 군인보고 어느 사회자가 ‘어머니 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 씩씩하던 군인 눈에 눈물이 핑 돕니다. 그게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그게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꽃다운 젊은이 때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살았던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가족도 없고 형제들도 없고 아무도 없는, 그 언어조차도 통하지 않았을 그 곳에서 말하자면 1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은 요셉이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그러나 만약에 요셉이 형들을 미워하거나 또 형들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고 진심으로 형들을 사랑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샬롬을 이루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았더라면 하나님은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는 막히지 않고 이 사람을 결국은 애굽의 총리로 만드셔서 하나님이 그 곤궁하던 흉년의 시기에 세상에 있는 만백성들을 구하는 도구로 요셉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섭리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측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요셉이 이 형들과의 관계에서 행했던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미움, 용서되지 못한 감정, 그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이 요셉의 경우를 통해서 보더라도 결국 그것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미움이 지향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꼭 죽음으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계속 미워하다 보면 마지막의 소원은 그 사람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의 시카고가 그렇게 유명하다 그럽니다. 쉽게 얘기하면 살인청부로 업이 성행한, 그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사람을 시켜서 엊그제도 신문에 났습니다마는 청부살인을 하는 이유가 뭐죠? 그 사람은 밉고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셉과 요셉의 형들과의 그 말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 참된 평화의 상실, 미움의 증진은 결국은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후에 이 형들이 아버지와 함께 50장에서 다시 돌아오잖아요? 애굽으로 오잖아요? 떵떵거리고 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살 때 까지는 문제가 안 됐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니까 이 형들의 마음에 덜컥 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저 쓰레기 같은 것들 날려버려’ 하면 한 시간도 안 돼 깨끗이 정리될 인간들이 바로 형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겁이 덜컥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무엇의 필요를 느꼈냐하면 용서의 필요를 느낍니다.
그러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아버지와 함께 와서 고센 땅에서 진을 치고 그리고 이 요셉이 국무총리였으니까 부족한 것 없이 애굽의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바로의 특혜를 받으며 짐승을 치면서 거기서 상당히 유복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이 요셉은 형들과 만났을 것이고 또 아버지와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들이 아버지가 죽고 나자 이 형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요셉의 용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무슨 교훈을 하나 깨닫게 되냐 하면 진정으로 사람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용서는 복수를 하지 않는 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수를 하지 않는 것만 으로는 이 미움의 문제가 고리를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요셉의 형제들이 진심으로 요셉을 향해 원하는 것은, 요셉이 마음속에 있는 진노, 요셉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화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얘기를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시는데 그 사죄는 두 가지로 말하자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속죄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 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신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켰냐 하면 죄인을 향해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신 심판을 당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화’라고 합니다. 달래 드림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그리고 인간들도 만족하는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의 마음속에 아직도 그렇게 유화되지 못한, 풀어지지 못한 형들을 향한 미움이 남아 있다고 형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이렇게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건 사실이다. 내가 아버지한테 너희들이 뭐 어쩌구 저쩌구 한다고 가서 이른 건 내가 잘못했다 그런데 내가 고자질해서 아버지가 칼 들고 너희들에게 쫓아갔니? 내가 물론 잘못했지만 그건 사소한 일인데 어떻게 내가 그거 쪼금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렇게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이 애굽의 땅에 끌려와서 노예로서 기약도 없는 종살이를 해야 하는 이 비참한 운명에 나를 장난처럼 몰아넣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나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구덩이 위에서 낄낄대고 웃었지만 그렇게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며 애원했는데도 너희들은 나를 결국은 팔아 버렸는데 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그런 계산을 할 때에 그 요셉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싹트고 있었을까요? 만약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요셉의 마음속에 싹트는 것은 당연히 나는 내가 받은 이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되는데 그 보상은 결국은 복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사극이나 이런 거 보면 누구만 죽으면 내가 여한이 없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서 슬리퍼 신고 칼 하나 매고 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가는 그림이 가끔 텔레비전에 나옵니다. 그놈만 죽이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게 바로 미움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안고 있으리라고 형들이 생각한 겁니다. 자기의 눈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미움은 성장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성장을 합니다. 어느 나라인지 잊어버렸는데 축구를 하다가 시비가 붙었습니다. 두 나라가. 그러니까 탱크를 몰고 와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명한 축구전쟁입니다. 그런 거 흔합니다. 애들이 둘이 나와서 골목에서 톡탁톡탁 거리고 싸웠거든요 뭐 뼈도 부러지지 않았고 코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살짝 긁혔는데 마데카솔 발라주면 나을 텐데... 그러면 조금 있다가 엄마가 씩씩 거리고 뒤뚱뒤뚱 거리면서 행주치마 두르고 나와 가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삿대질 하면서 싸우고 조금 있다가는 아빠까지 튀어 나와 가지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싸웁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종식 시킬 수 있는 것은 성장하기 전에 빨리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인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그 다음에 번성하면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웬만한 은혜를 받아도 뽑히지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가장 좋은 것은, 미움이 일어날 때 예를 들어서 아이가 싸우고 왔다 그러면 손톱이 좌악 그어졌다 그러면 부모 마음에 열이 얼마나 치받치겠습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감정을 누르고 이웃을 한 번 용서하고 나면 그러면 더 이상의 미운 뿌리가 자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고 나면 그 날 밤에 용서를 구한 기도도 잘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폭발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이 차가 나갑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언덕길을 내리 달리듯이 치받칩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거나 막 들이박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결국은 요셉이나 요셉의 형들이나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요셉은 돌아 올 수 없는 그 먼 가시밭길과 같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는 시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관심은 뭐냐 하면 이 전체 시리즈에 대한 종합으로 그러면 이런 미움의 감정들이 결국은 어떻게 뿌리가 뽑히고 해결이 되느냐 이 문제를 오늘 다룸으로써 전체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50장 17절을 다시 한 번 봐야 되겠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자기들이 자기가 뭘 잘못을 했는지 이제 아는 겁니다.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 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요셉이 복수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미움을 극복한 최종적인 마무리가 사랑이라고 말씀드리는 그 이유입니다. 여기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형들은 요셉으로부터 오는 보복에 대한 위험을 요셉의 마음속에 없었어도 그 속에서 애굽의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가마를 타고 다닐 때에도 계속 그것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당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상처는 더 깊은 것입니다. 악을 당하는 사람의 상처는 육체에 나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의 상처는 영혼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 자유함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삶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악인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육신의 고난을 받으나 영혼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사람, 그 사람은 자유함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고 고통을 주는 악한 자의 상처는 영혼에 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쉽게 씻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해 주소서’ 이것도 사실 다 거짓말입니다. 다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런 얘기를 하고 죽지 않았습니다. 아마 야곱은 이 요셉의 성품을 믿었을지도 모르고 또 아버지는 제 3자니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그 사건 하나로 이제는 현재 누리고 있는 영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영화에 묻혀서 과거의 상처쯤은 다 씻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은 그 아버지에게는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자식이 모두 자기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야곱이 죽은 다음에 요셉이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요셉의 형들과도 같은 생각을 아버지는 거의 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형들은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이 순간 요셉은 그 미움을 당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악을 당한 사람으로서 이 순간 요셉은 요셉의 형들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행했든 그것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진정으로 자기에게 가져다 준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제 당한 자신의 모든 고통을 자기의 형들에게 되갚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영혼을 향하여 화해하고 화해표시로 그에게 사랑의 정표를 줄 때에 그 때에 그 모든 형들의 마음은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내가 진실로 당신들이 내게 한 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도다. 결단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그 사람들은 그 죽음 자체였습니다. 형벌로 말미암아서만 죽음이 아니라 그 관계가 깨어지는 그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권세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누군가가 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권한을 행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냐 하면 진정으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 용서의 고통, 그 용서는 그러니까 상처받기로 각오한 사람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상처받기를 각오한 사람, 그런 것들을 행할 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뭘 보게 되냐 하면 그리스도의 예수의 그 놀라운 구속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용서와 그 관계의 화해의 비밀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놓았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악 가운데에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육신이 생명을 향한 사랑, 하나님이 나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풀잎처럼 사라질 가치 없는 인생이 영원을 향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요셉이 그렇게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냐면 ‘우리는 당신의 종이옵나이다’. 놀랍죠? 역시 그 말은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고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절하는 그 비전은 결국은 성취되고야 맙니다. 그런데 그렇기까지 고백을 하니까 그런데 형들은 자존심이나 이런 것 다 그만두고 다 내어 맡기고 그 앞에 부복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 앞에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임재 속에서 살며 복의 근원이 되었던, 믿음으로 애굽의 시련을 이기며 살았던 이 사람, 지금 어느덧 자신의 그 시련 가운데 몰아넣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채 사람들의 생명 전체를 손에 넣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용서와 사죄를 할 수 있는 그런 특권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높이는 것이고 시편기자는 이것이 바로 원수 갚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일이 너희에게 있지 않고 내게 있다 나는 저희를 사랑하였으나 저희는 나를 미워 하는도다 내가 저희를 위해 기도한즉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 왔도다’ 자기에게 악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 선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머리에 숯불을 피워 놓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수를 갚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기 전 보디발의 집에서 극도의 고생을 하다가 내 인생 이제 막가는 인생인데 내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형들을 다 찔러죽이고 나도 죽어 버릴 테야. 그리고 그 애굽의 집에서 탈출을 하다가 붙잡혀서 처형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형들을 만나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리고 자신도 죽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는 원망할래야 원망할 대상도 없고 결국은 자기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복수 갚는 방법은 이렇게 저질적이고 세상적인 게 아닙니다. 통쾌한 방법, 신령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복수는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형들이 뭐라고 말하고 뭐라고 말하는 ‘자식이 쬐그만 게 이게 밥을 먹어도 우리가 너희보다 몇 끼를 더 먹었는데 쬐그만 게 넌 빠져’ 맨날 그러면서 구박을 받았을 겁니다. 아버지 없을 때, 그랬을 사람들이 오늘 이 요셉 앞에서 그 형들이 그 모든 자존심을 다 꺾고 무릎을 꿇고 나를, 우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당신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당신의 노예이옵나이다. 생명과 우리의 자녀의 생사 여타의 그 모든 권한이 당신의 손 안에 있사옵나이다. 하나님께 부복하듯 내가 당신께 엎드렸나이다. 그렇게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복수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주일학교 선생 하나가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옛날에. 애들이 나를 우습게 아는데 진정한 권위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교인들에게 무시당하면서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우스운 사람 취급당하면서 살아가는 가장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진정한 권위의 비결이 둘 있는데 하나는 진리요 하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는 당신이 가르치고자 할 때 당신 자신이 진리대로 살아가는 그것이 권위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단지 당신이 진리대로만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 또 다른 요소가 없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우려고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설교시간에 이런 얘기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은나라 때의 일입니다. 큰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장수들이 뱅 둘러싸 같이 연회를 벌이는데 그 왕 옆에는 최근의 우리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좀 낮은 사람, 빈이나 이 정도 되는 아주 절색의 미인의 여성이 자리를 했습니다. 거기에는 정전도 없었을텐테 어떻게 바람이 휙 불면서 연회장에 켜져 있던 불이 단숨에 다 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을 이용해 가지고 그 여인의 재색을 너무나 탐하던 그 젊은 장수 하나가 그 불 꺼진 틈을 이용해 가지고 이 여인을 한 번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으로서는 너무나 해괴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뒤에다 장수들이 꽂는 핀 같은 게 있는데 그것을 뽑아서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다 켜진 다음에 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폐하 지금 이 시간에 이 중에는 훌륭한 장수들만이 아니라 아주 치한이 하나 섞여 있습니다. 그가 불 나간 틈에 나를 껴안고 입을 맞췄는데 그 장수의 머리핀을 손에 넣었사오니 이제 이 주인을 찾으면 그 자가 누구인지 밝혀 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눈을 지그시 눈을 감더니 여러분 모두 모자를 벗고 핀을 다 뽑고 우리 중단된 만찬을 계속 하십시다. 다 뽑았으니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죠. 그러고 지나갔는데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소위 얘기하는 친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친전은 왕이 전쟁에 친히 임해서 장수의 옷을 입고 진두지휘하면서 벌이는 국가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그 대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탄 마차가 적군에게 둘러 싸여서 말하자면 위기를 맞고 있을 때에 온 몸에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으면서 달려와서 결국은 그 왕을 구출해가고 그 구출된 왕 앞에 엎드려져 죽어가는 한 장수를 발견했습니다. 니가 누구길래 나를 위해서 이 온 몸이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가 되도록 나를 위해서 이렇게 죽어가느냐 그랬더니 그 때 허옇게 늙어가는 장수가 고백을 하는 겁니다. “폐하 제가 바로 그 날 그 주연에서 그 마마를 범했던 그 장수이옵나이다. 저는 그 순간 죽음을 각오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 날 모든 사람들에게 핀을 뽑고 모자를 벗으라는 말을 하는 동시에 이제껏 사는 동안 나는 오로지 폐하를 위해서 죽어야 되겠다 라는 일념하나로 매시간 매일 자고 깨고 그 생각만 하면서 살다가 오늘 드디어 폐하를 위해서 죽게 되니 한없는 영광이옵나이다” 하고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단지 우리가 진리대로만 살고 그 이상의 것이 없다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목회자인 나는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못 하냐 바보들이냐 왜 못하냐 나하고 여러분하고 틀린 게 뭐가 있냐 남들 다 잘하는데 왜 그것 못하느냐 여러분, 그러면 목회자와 교인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맙니다.
훌륭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난 그렇게 살 가망성이 없습니다. 설교시간마다 뭘 확인하고 가냐 하면 저 사람하고 나하고는 틀리다. 나는 도저히 못 쫓아가는 사람이다. 나중에는 뭐라 그러느냐 너는 너대로 가라. 놔둬. 나는 이대로 살다 죽을껴.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말하자면 그것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용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서. 용서해야지 용서 못하는 사람도 그렇게 끌어안을 수 있는 진정한 용서. 이것이 창출해 내는 그 힘은 실로 위대합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저는 학교에 있으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배웁니다. 어떤 때에는 학생들이 심하게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반쯤 죽었다 그러고 올 때 그 때 파격적으로 그를 중심에서 용서하고, 그 때 그것은 말하자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랑으로, 충성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놀라운 헌신과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꿈도 그렇게 해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그것을 놀랍게 깨달아 아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이 사실에 대해서는 한 번 하고 잊어먹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오늘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매일 이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로 그리고 그것이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재현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로 만들어 지고 하나님의 그 우리를 용서하신 사랑을 볼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나 같은 인생 얼마나 가치 없는 인생이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나를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밖에는 내가 무슨 희망이 있겠는 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얼마나 깊이 용서할 수 있느냐는 요즘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사는 가 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않고는 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않고는 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거꾸로 오르는 피와 같은 솟구치는 정욕과 맞먹는 이 혼탁한 이 미움의 불같은 치밀어 오름들, 우리가 무엇으로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요셉이 형들이 그 말을 할 때에 막 흐느껴 우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막 울었습니다. 그 울 때의 그 심경을 오늘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느끼도록 노력해보십시오 그런데 놀랍습니다. 요셉은 상처가 치료됩니다. 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십니까? 물론 순간적으로 옛날의 그 모든 쓰라린 과정들이 다 생각납니다. 미움의 고리와 그 아픔들이 다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그 아픔과 애굽에서 겪었던 치열한 고통들이 다 생각이 납니다. 쓰라린 아픔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생각이 났는데 결국은 여기서 이 솟구치는 눈물의 의미는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구덩이에 집어 던지고 팔 때는 세상을 손에 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식들과 함께 부복하고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자기를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이라고 부르는 그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없는 연민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요셉은 이 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 형들이 자신을 그렇게,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사 오늘날 당신의 생명들을 구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그런 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놀라운 방법을 사용하셔서 결국은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경륜, 다시 말하면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다시 찬송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깨닫는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그 알량한 인격 믿을 것도 없습니다. 안됩니다. 요셉은 결국은 그 애굽의 땅에서 수많은 세월을 시련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그런 자기 연단의 과정을 겪어 나갔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영적인 신령한 복은 그 깊이를 더하였고 신앙의 인격은 풍부함을 더하여 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 믿음은 그렇게 좋고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데 인격이 왜 그렇게 개판이냐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는 자기는 소판입니까?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신앙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리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아픔과 깎임의 과정을 겪지 않고는 거룩해지지를 않습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귀한 사람들일수록 시련의 혹독한 시련을 거치게 만드셔서 그러니까 이 요셉을 언제까지 하나님이 놔두셨습니까? 그렇게 고발하는 정신, 시비를 가리는 그러한 말하자면 불응한 마음 형들을 미워하는 감정, 그리고 아버지의 총애를 의지하여서 사람들을 멸시하려고 하는 이 자긍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깎여 나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깎여지고 가다듬어져서 거룩하게 성화가 된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요셉을 드디어 30에 이르게 하시고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게 이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한을 품은 요셉이 그냥 국무총리가 됐다 그래 보세요. 국무총리의 포고령 제1호는 가나안에 가서 그 놈들을 다 잡아 오너라 그것이 포고령 1호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깨닫게 되는 건 이것입니다. 미움과 용서의 문제는 사람 사이에 행해지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처리되고 결론이 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면서도 기도할 때마다 너 그것 잘못됐다 너 그러면 안 된다. 너 그래봐? 니 기도 내가 안 들을거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영적으로 무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 자체로써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명민한, 영적으로 아주 감각이 깊이 깨어 있는 그런 상태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 때 그 때에는 작은 죄에 대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혼이 예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디어지게 되면 감각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리고 커다랗게 성령이 슬퍼하시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것으로써 미움과 용서의 시리즈에 대한 중요한 결론을 맺습니다. 미움과 용서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양자의 문제가 아니라 3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문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이 형을 이를 갈도록 미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꼬드겨서 야단을 맞게 하는 정도를 가지고 요셉을 그렇게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어야 할 정도로 아픈 것이었다면 실제로 죽음의 구덩이와 같은 시련의 골짜기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역경 가운데 애굽 땅에서 살아온 가혹한 형벌을 받아온 이 요셉의 속에는 수없는 칼날이 솟아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하나님 앞에 주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이루실 보다 원대한 꿈을 위해서 그는 자기의 마음속에 돋아나고 있는 미움의 칼날들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정리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꿈과 자기의 일생을 향해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에 자신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독초와 같이 돋아나는 그 미움의 뿌리들을 깎아내고 잘라내는 아픔들을 날마다 매 순간 매 순간 경험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원대하신 뜻이 사사로운 복수심이나 미움의 감정 한 두 가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을 표출하고 말아야 할 자기의 인생이 자기의 모든 원한을 풀고 그리고 모든 사람을 원망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미워하며 죽어가는 불행에 떨어지는 이 어리석은 자리로 자신을 몰고 가지 않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매일매일 자기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그 미움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기를 세웠습니다. 주의 말씀이 자신 앞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맺혀진 아픔과 미움의 씨앗들을 솎아내고 그 아픔들을 씻어내는 그 속에서 그는 또 다른 종류의 거룩해지는 아픔들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픔 속에서 요셉은 드디어 자신에게 그 미움을 준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그 자유를 애굽 땅에서 충족하게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형들이여 걱정 마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영원히 돌아보겠나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내려왔던 시작은 비록 작은 말이었지만 수 십 년 동안 내려오던 미움과 그리고 아픔과 시련의 세월은 이 요셉의 한 마디로 말미암아 완전히 종식되고 그야말로 그 집안의 진정한 평화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이번 기간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미움과 아픔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치유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이 주님이 주신 권세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게 하옵시고 그리하여 자유를 주고 샬롬을 이루는 도구들이 되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