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있는 복음(청년)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5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7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1. 용서하시는 하나님(사55:7) 2012.8.5 온가족 여름수련회(청년) 1
2. 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마6:14-15) 2012.8.6 온가족 여름수련회(청년) 16
3.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엡4:32) 2012.8.7 온가족 여름수련회(청년) 33
4.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요21:15) 2012.8.6 온가족 여름수련회(청년)(새벽) 51
5. 골짜기의 많은 샘물(시84:5-6) 2012.8.7 온가족 여름수련회(청년)(새벽) 56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용서가 있는 복음(청년) 1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5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7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2012.8.7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용서가있는복음] 2012. 08. 05(저녁)
1.용서하시는 하나님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I. 본문해설
-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40장)
-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 예언(53장)
- 회복될 영적 나라와 하나님 사랑(55장)
II. 자기 백성을 부르심
A.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1. “악인”(רָשָׁע)과 “불의한 자들”(וְאִ֥ישׁ אָ֖וֶן)의 구분
a. 언약관계와 상관없는 불법자들
b.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자들
2.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B. 죄인들에게 요구하심
1. 악인은 그 길을 버리도록
a. “악인의 길”
- “길”(%,r,,D,)의 의미: 성향, 취향이 되어서 살아가는 본성적인 삶
- 이스라엘의 오래된 악을 보여줌
- “악”(!w,a)은 구속목적을 떠난 삶을 가리킴: 자기만족, 세속적 번영,
우상숭배
- 이스라엘을 ‘의의 포도원’으로 심으셨으나 ‘포악’과 ‘부르짖음’만 가득하게 됨(사 5:2)
b. “버리고”(יַעֲזֹ֤ב)
- 순종과 순종을 위한 싸움
- 의인의 길을 가는 것과 악인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한 싸움
- 시대 정신, 사회 구조, 자기 성향에 대항함
- 순종하는 사람만 은혜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함
2.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a. “너의 생각들”(מַחְשְׁבֹתָ֑יו)
- 불의한 삶의 뿌리로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킴
-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니라”(창 8:21)
-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삶의 근원인 마음을 가리킴
b. “버리고”
- 인간은 불순종하는 마음을 스스로 고치고자 할 때, 자기 안에 있는
악의 심각함을 앎
- 그 일을 위한 자신의 절대 무능을 인식함: 자포자기와 하나님 의존의 갈림길
- 단지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라, 기도에 이르도록 실천적 이해로 나아가야 함
- 기도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질 때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짐
III.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심
A. “긍휼히 여기심”(ירַחֲמֵ֔הוּ)
1. “긍휼”의 두 구분
a. 사람의 긍휼
- 본성적 도덕관념과 이차적 사랑에서 비롯됨
- 응분의 대가를 넘어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감정
- 인간의 근원적 비참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지 못함
b. 하나님의 긍휼
- 하나님 자지사랑과 일차적 사랑에서 비롯됨
- 정당한 대가임에도 비참한 상태 자체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
: caritas의 특징
-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기 회귀적 사랑
2.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 법은 책임을 묻지만, 복음은 하나님 사랑을
보여줌
-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처럼 긍휼히 여기지 않음
- 하나님만 죄인들의 비참함 보시며, 그것이 정당한 보응인데도 긍휼히 여기심
B. “너그럽게 용서하심”(יַרְבֶּ֥ה לִסְלֽוֹחַ)
1. 정확한 의미
- “용서하도록 너그러워 지심”
- 은혜의 날을 약속하심, 은혜 받을 만한 때,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때
- 지금은 은혜의 시대,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1)
2. “용서하심”
- 용서는 과거의 죄책을 사함 + 현재의 관계를 복원함 + 미래의 관계를 지속함
- 우리의 죄는 관계를 지속치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보여줌(사랑의 결핍)
- 하나님의 용서는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줌(사랑의 표현)
- 용서의 약속 안에는 복음과 함께 주어진 특권을 다시 누림이 포함됨
- 불순종과 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유업들을 다시 누리게 하심 (탕자의 반지)
IV. 결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용서가있는복음] 2012. 08. 06(저녁)
2.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I. 본문해설
- 주기도문 다음에 다시 한 번 용서의 문제를 반복함
- 용서의 실천이 기도의 실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줌
-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들 사이의 용서를 실현하는 원인이며 목적임
II.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
A. 교리적 문제
-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하는 공로에 달린 것인가?
- 구원에 이르는 용서가 반복되어야 하는가?
- 이미 용서한 신자들을 용서치 않으시는 일이 가능한가?
B. 단회적 용서로 충분한가?
1. 구원에 이르는 용서
- 하나님 안에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
- 인간 경험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사건, 교화의 수단임
2. 단회적 용서의 충분성과 불충분성
a. 용서의 충분성
- 구원 받기에 충분함. 하나님의 불변성과 관련
- 성령의 내주, 자녀 됨, 그 유업의 특권이 불변함.
b. 용서의 불충분성
- 구원은 교화의 삶을 필요로 함.
- 성화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음.
- 죄로 말미암는 낯섦(unacquaintedness)과 거리감(alienation)
- 용서의 경험을 통해 이를 해소하심
-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사용하심
- 영혼에 직접적으로 주시는 축복
III.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
A.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두 방법
1.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깨달음.
-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한 자신의 고립을 깨달음.
- 불순종하기에 적합한 마음을 고치심.
-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경험하게 하심
- 오래 참음, 긍휼, 자비는 사랑의 하위적 속성
2.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a. 하나님의 용서의 경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다시 여심
-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사랑받고 사랑하게 하심
- 영적 자원의 분여와 실제적 교제가 이루어짐
-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 오게 하심
b.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
-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의 연합 안에서 구현하게 하심
- 나를 사랑하심은 그들로 더불어 하나 되게 하심임
-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하심
- 용서할 때 십자가의 희생의 크기를 알게 됨
-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임을 알게하심
B.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때
1.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
a. 부정적 의미에서
-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님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신다는 의미가 아님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수하신다는 의미가 아님
b. 긍정적 의미에서
- 우리의 과실에 대해 훈련하심
- 하나님과의 교통의 복됨에 대하여 알게 하심
-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위하여 교통하게 하심
2.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심
a. 사람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님
b.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심
c.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만큼 당신의 용서를 누리게 하심
C. 용서받은 증거: 사람들을 용서함
1.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임
2. 하나님 사랑은 흘러가도록 주신 사랑임
3. 용서는 우리의 의무나 권한처럼 부여하심
-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서 행사되기를 바라심
-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항상 경험하게 하심
-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 하심
- 용서는 단지 항상 사랑 가운데 하나 되게 하기 위함임
- 용서의 진정한 표지는 사랑임
IV. 결론: 용서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용서가있는복음] 2012. 08. 07(저녁)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I. 본문해설
II.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
A.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심
1.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심
2.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 됨
3. 만물을 다시 하나 되게 하심
B. 만물의 하나 됨의 핵심
1. 인간과 하나님의 하나 됨
2.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하나 됨
3. 모든 만물들이 그 화목의 덕을 누림
III. 교회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경륜
A. 교회를 통해 하나 됨을 보여주심
B. 제도와 형식이 아닌 영적 하나 됨임
C. 삼위일체의 모상은 사랑의 모상임
IV. 사랑: 오래참음, 긍휼, 자비
A. 사랑: 관계의 성향 - 친밀함 + 정염 + 헌신
- 관계를 세우고,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
B.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함
- 인간의 불완전성 + 자기중심적 죄성
- 자신도 알 수 없는 내면의 모순률들
C.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심
1. 중생을 통하여 사랑의 성향을 부여 받음
2. 은혜를 통하여 사랑의 정동을 경험함
D. 교회의 이상을 실현함에 신자들이 참여함
- 사랑을 실천을 통하여 받은 은혜의 가치를 알게 하심
-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당신은 의존하게 하심
V.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김”
A. “서로 친절하게 하며”(εἰς ἀλλήλους χρηστοι)
- “서로들 속으로”(εἰς ἀλλήλους): 깊이 영향을 주고받음
- “친절하게 되며”(γίνεσθε χρηστοί)
- 친절이 사람됨에서 나옴을 보여줌
- 친절한 사람됨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줌
- “친절한”(χρηστοί); 쓸모 있음, 이용할 수 있음, 봉사할 수 있음,
- 고전 13:4에서 “온유함”으로 번역: 남의 유익을 위해 쓸모 있게 됨
- 친절한 사람은 온유하며, 온유한 사람은 남의 유익에 기여함
- 치열한 자기 이익에 공동체의 하나 됨이 상처를 입음
B. “서로 긍휼히 여기며”(εἰς ἀλλήλους εὔσπλαγχνοι)
- “긍휼하게 되며”(γίνεσθε εὔσπλαγχνοι)
- 긍휼이 사람됨에서 나옴을 보여줌
- 긍휼히 여기는 사란이 되는 것이 하나님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줌
- “긍휼한”(εὔσπλαγχνοι): εὔ + σπλαγχνοι
- 목자 없는 양떼를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마 9:36)
-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는 마음” 그 마음에 “좋음”이 덧붙여짐.
- 긍휼은 비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불쌍히 여기심을 본받는 것임.
-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중심성이 가르쳐 준 것
: 소중히 여김 받고 싶어하는 존재
- 그 소중히 여김이 하나님의 품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VI.결론: 자신을 다 주신 사랑
용서가 있는 복음(청년) 1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5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7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2012.8.6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2012.8.7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1.용서하시는 하나님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사야서 55장입니다. 아는바와 같이 이사야서는 39장까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기록한 다음 40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53장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을 노래한 다음 55장에서는 회복될 영적인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동일하신분이시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나타남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실 다윗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선지자가 여호화을 만날 만할 때에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한 그 복된 때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II. 자기 백성을 부르심
A.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오늘 성경은 55장 7절에서 자기의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강력하게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일먼저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불의한자들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인, 불의한자 이것은 각각 다른 종류의 사람을 가리키다는 보다는 악인은 한사람의 내적인 상태를 지칭 하는 것이고 불의한자는 악인이 실제의 삶속에서 걸어가는 그 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사야서 39장까지 하나님은 악인과 불의한자를 마치 자기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섞여있는 가라지와 그리고 쭉정이인 것처럼 그들을 강력하게 탄핵하던 음성을 거두시고 악인과 불의한자들도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1. “악인”(רָשָׁע)과 “불의한 자들”(וְאִ֥ישׁ אָ֖וֶן)의 구분
이 악인이나 불의한자들 성경에서는 크게 두부류의 사람들로 구분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언약관계와 상관이 없는 불법하고 무도한자들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자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오게되면 하나님은 당신과의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조차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며,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때가 온다는 것을 이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오늘 이 은혜 하는 이때에 이 말씀은 응하였던 것입니다.
2.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오늘날도 당신의 백성이면서도 그 언약관계에서 상관없는 불법자들이 아니라 이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이지만 어둠속을 걷고 있는 자녀들을 지금도 부르시며 그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선지자가 바라보았던 영광스러운 복음의 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이제 이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구속의 사건을 통하여 하늘이 열리고 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바로 구약속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바라던 영광스러운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의 때요 따라서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요 하나님께서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계신 때 그래서 그를 찾고 부르는 자마다 만나 주실 수 있는 바로 그때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 위대한 장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그 유명한 구절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들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렇게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B. 죄인들에게 요구하심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악하고 불의한사람들 언약관계에 있었으나 당신과의 관계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을 무조건 아무런 요구도 없이 당신과의 관계로 불러들이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죄인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1. 악인은 그 길을 버리도록
a. “악인의 길”
먼저 악인들은 그 길을 버리도록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악인의 길, 이것은 바로 악인들이 걷는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데라크라고 나오는 이 길은 실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가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을 의미합니다. 길이 나있으면 사람들은 그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거 묻지 않고 그 길로 걸어가고 그 길이 아닌 곳으로는 사람들이 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성향 그리고 그것이 취향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 본성에 충실한 삶을 가리켜 주는 것이니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적인 사랑으로 다시 부르고 계시는 그 악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된 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연히 저지른 한 두번의 삶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악하게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성향이 되고 취향이 되고 본성의 일부가 되어서 이제는 그 본성을 따라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이라고 하는것은 아웬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고 또 구속하신 그 목적을 떠난 모든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답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지만 추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이 선은 아주 풍랑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고 지향하는 목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선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 되기 때문이고 이 사람에게 악한 것이 저 사람에게는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화) 여러분들은 아마 어렸을 때 들었던 전래동화가운데 두 아들을 두고 매일 근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나막신을 만들어서 밥을 먹고사는 아들이고 또 한아들은 짚신을 만들어서 먹고사는 아들입니다. 나막신은 비가 올 때 신는 신이고 짚신은 비가 오면 신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나막신을 파는 아들에게는 좋은날이지만 짚신을 만들어 파는 아들에게는 나쁜 날입니다. 개인 날은 반대입니다. 어머니는 맑은 날이면 나막신을 만드는 아들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비가내리는 날이면 짚신을 만드는 아들을 인해서 근심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처럼 명확한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이 사람에게 선하고 좋은 일이 저 사람에게는 악하고 나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그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 건져내어 그들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해주신 것은 바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언약백성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 모든 열방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들을 모든 민족가운데에 구속하셔서 선택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악인이 그 길을 버리라고 말씀 하신 것은 바로 그 구속 목적을 떠난 모든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모든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그 목적과 관계없이 그 목적에 이바지 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자기만족 세속적 번영 그리고 마지막이 우상숭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가치는 자기만족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만족하는 것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번영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까요? 우상을 숭배하면 이러한 자기의 육욕적인 만족을 누리는데 우상은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은 그런 길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사야 선지자가 돌이키라고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이 악인의 길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신 그 구속의 목적을 떠나서 자기만족과 세속적인 번영 급기야는 우상숭배를 일삼는 삶이었고 사도바울은 이 우상숭배가 결국은 탐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장 2절에서 선지자는 한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의 포도원으로 심으셨으나 포악과 부르짖음만 가득히 열매를 맺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을 마치 포도원에 포도를 심으신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포도원농부들이 이 겨울부터 땅을 잘 일구고 가꾸어 이 포도나무를 잘 돌보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햇빛을 잔뜩 받아서 벌레를 잡고 비료를 주면서 포도나무를 가꾼 것은 가을에 여름에 그 포도에서 굵고 탐스러운 열매들이 많이 맺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이 포도를 심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포도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간 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사옵니다. 이 포도주가 그렇게 특히 가본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니까 가나에 그 포도주가 그렇게 기가 막히다 그럽니다. 최상의 포도주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포도농사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카일델리치라는 사람이 쓴 주석에 보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쓸 때가 19세기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스라엘 에스골이라고 하는 골짜기에서 포도 한송이에 4.5키로에서 6키로짜리 있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이 큰 포도송이로 거기에 알들이 얼마나 굵은 것들이 탐스럽게 맺혔는가 하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뒀을때 그 포도원 주인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포도를 가지고 즙을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물로 조달을 하고 그 포도를 가지고 말리고 해서 그 포도를 가지고 온갖 음식들을 해먹고 자기의 육신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이 포도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히는 포도원을 생각하면서 의의 열매가 그렇게 많이 맺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의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갈 때에 열리기 되는 인격과 삶의 아름다운 결실들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잘 믿을 때가 있고 하나님 잘 안 믿었을 때가 있잖아요? 불신자로 그렇게 살 때에는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아주 이 사고방식이나 생각들이 음침하고 마음의 기쁨도 없으니까 삶이 불만족으로 가득차고 퇴폐적인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우울증에 걸리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잘 믿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 다니고 예쁜 얼굴이 되고 뭐 그런 것도 포함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빛이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과 어둠이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같이 살고 있으나 다른 사람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열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런 열매를 가득히 맺어서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서 정말 부러워하는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그 참된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에 거기에서 아 저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 저들을 저렇게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물질이나 이 세상에 번영이나 자기만족 때문에 저렇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 가는 것이다. 우리도 만약에 저 백성들 중에 한 무리가 되어서 저들처럼 저렇게 중앙에 있지는 못하더라고 할지라도 변두리에 붙어살면서 저들처럼 저렇게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백성들로 하여금 시기심을 느끼게 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하는 뜻입니다.
그 나타난 결과는 포악과 부르짖음만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고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서 짓밟고 그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하는데서 일어나는 강자의 승리와 패배한 약자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보여 주냐 하면 이 열매가 의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만족과 세속적인 번영의 추구와 그리고 우상숭배였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뚜렷한 특징 그것이 뭐냐 하면 자비와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때에 부동산 투기 그리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지게표 사상 남의 유혹을 침범하지 않는 사상들을 버리고 끊임없는 탐욕으로 전토의 전토를 땅에 땅을 이어가면서 부동산을 확보하고 이속에서 땅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야욕과 그리고 악한 탐욕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악인의 킬이 너희들에게 이미 인격화 되었고 본성의 일부분 되어서 너희들이 계속 자기만족과 세속적인 번영 그리고 쾌락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기위해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좋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완전히 동행하고 싶진 않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그분의 원수처럼 취급 받는 것은 미워하는 적당주의 삶,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미끄러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b. “버리고”(יַעֲזֹ֤ב)
신앙의 세계에는 스펄전이 말한바와 같이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사랑 하는 것,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인의 길을 버리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적당히 우리의 의무를 따라서 봉사하고 기독교인의 삶을 산다고 칩시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의 걸어가는 길이 의인의 길 언약백성의 길이 아니고 악인의 길이라면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와 사랑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이 길을 버리도록 자기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큰 심판과 진노로 협박하는 대신에 이번에는 하나님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의 심정을 녹이시면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들이 얼마나 행복할지를 말씀하시면서 결코 너무나 멀리 하나님을 떠났다고 절망하지 않도록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는 늦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도록 이들에게 강력히 촉구하고 계신 겁니다.
2.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a. “너의 생각들”(מַחְשְׁבֹתָ֑יו)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자들을 또한 부르고 계십니다. 너희 불의한 자들은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 생각들이라고 하는 것, 히브리어로 이 생각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언뜻언뜻 떠오르는 그런 우연적인 생각의 떠오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의한 삶의 뿌리로서의 인간의 마음을 깊은 곳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에서 하나님은 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큰 홍수로 멸하신 다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셨고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이 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지 말씀하시는 가운데 인간이 마음에 계획하는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 하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볼 때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다시는 이 지면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비록 인간이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지라도 이렇게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인간이 커다란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남았지만 그 남아있는 인간들의 본성까지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그 생각하는 바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목적을 떠나서 사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삶의 근원인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어떤 것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일부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면 그는 선한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행동으로는 남이 볼 수 있도록 악을 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생각들이 떠오른다면 그는 악인임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들을 버리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고쳐 우리를 개선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악인이 어느 순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잠시 악을 멈추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잘못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잠시 잘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짐짓 선을 행하는 일들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가 그 생각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순종과 순종을 위한 싸움을 보게 됩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것과 의인의 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노력하는 것과 함께 다시는 악인의 길을 걸어가지 않겠노라 하는 의지적인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단순한 싸움이 아닙니다.
b. “버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 시대정신에 에워 쌓여있습니다. 이 시대정신에 에워 쌓여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이 시대정신의 암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얼마나 인간의 외모만을 중시하는 시대인지 모릅니다. 아마 이것은 문화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이렇게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집도 많지 않았고 영화도 이렇게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정보를 눈으로 읽는 신문이나 책, 그리고 들려오는 라디오에 이 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접하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비주얼의 매체들이 아주 파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 결국은 혹하는 것이 사람의 외모 육욕을 따르는 사람들의 외모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창세기 6장에서 이 땅에 사람의 딸들을 보고 유혹을 느끼고 그리고 그들에게 유혹을 뺏기고 그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혼인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광범위하게 시대의 문화를 형성하고 보니까 이러한 것들이 도가 지나쳐 요즘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 성형을 권하고 그 성형을 하기 위해서 어린 학생들이 알바를 하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장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은 스무살이 넘어서도 키가 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이거를 17,18때 양악수술을 한다고 턱을 쪼개서 뭉툭한 턱을 쫍힌단 말입니다.
(예화)그런 사람은 캄보디아 같은데 가면 완전히 미녀 취급 받아요. 캄보디아는 턱이 메주처럼 네모나야지만 최고의 미녀입니다. 실제로 갔었는데 첫날 얼굴이 예쁜게 아니라 얼굴 모양이 예쁜 사람이 있더라고요 저사람 예쁘지 않느냐 했더니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사람들은 밥 맛 없다고 얘기한데요 그래서 미인들을 모아 놓은 데를 가보니까 여자들이 한결같이 사각턱이에요. 마치 앙코르와트에 돌멩이로 빚은 사람처럼요.
사실 얼굴을 고칠게 아니라 나라를 고치면 된단 말이에요 이민을 가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턱을 쪼개놨는데 자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신체의 부작용이 생긴단 말입니다. 예전에는 가수는 그냥노래를 잘하면 어디서든지 환영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클래식계에도 노래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지 아니하면 주연을 절대로 주지 않는 겁니다. 엑스트라밖에 안줍니다. 실제로 음반을 파는 것보다 dvd 파는 수입이 훨씬 더 많은 겁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포위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정신이 우리를 거대한 힘으로 억압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고 창조하신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우리를 억압하는 겁니다.
사회의 구조도 우리에게 이러한 악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엄격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려고 할 때에 사람들이 칭찬은 하지만은 그러나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계속 번영하기는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 주는 겁니다. 직장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회부적응 자가 되는 겁니다. 부적응자 처럼 취급을 받는 겁니다. 이런 현실들이 우리에게 악의 길에서 돌이키기 매우 어렵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어디 이런 외부적인 것뿐입니까? 외부적으로 이런 악을 강요 받아도 내 맘 깊은 곳에서 선을 사모하고 오직 선한 일만 그리워하고 그렇게만 살고 싶어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내적인 성향도 선하지만은 않습니다. 교회에 있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고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려하고 그리고 하나님에 순종하고 고통 받기보다는 불순종함으로써 불순종함으로 나 자신이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사면을 돌아봐도 우군은 없고 적군에게 에워 쌓여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악인 불의한자들이라고 거명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아주 독특하게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을 포함하고 또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우리들을 이속에 함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악인의 길에서 돌이키고 불의한 자들은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귀환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순종할 수 있는 거룩한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자신의 길을 버리려고 할 때에 인간은 큰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나 불순종 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 고치고자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의 심각한 힘을 자각하게 되요 그러면서 우리는 바로 자신이 얼마나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은 두 가지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자포자기하는 절망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희망사이에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깊이 절망시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시련이나 가난 혹은 고통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시련과 가난 고통 괴로움 외로움 이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거기에서 우리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적응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적응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진실된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돌이키기에는 절망적인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에는 가능성이 없는 정말 나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처절히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그 절망에는 익숙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순수하게 우리 안에서만 조용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정신의 작용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악인의 길을 돌이키고자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이제는 이세상의 탐욕을 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을 때 이 젊은 날의 정욕이 그에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정말 나를 버리고 가려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주었는데 니가 나를 이렇게 떨쳐 버리고도 떠나갈 수 있을 줄 아느냐 그러면서 유혹을 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이 깊은 고민을 합니다. 그때 천사처럼 나타나는 누군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기를 금욕의 천사에요 이 육욕적인 모든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바깥에서 번영하고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삶을 포기하려고 하니까 저쪽에서는 이제까지 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데 니가 나를 버릴 수 있느냐 과연 니가 나를 떠나서 살수 있겠냐는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저 앞에서 금욕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 금욕의 천사는 인간이 모든 자기만족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에 누리는 그 행복의 한 표상이었습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예화) 어쩌면 우리는 회심의 전야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경험 했던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갈등의 시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 갈등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포자기의 길을 걷느니 차라리 거기에는 아무 희망도 없으니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 내가 당신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 순종할 힘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가 가장 싫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미워하는 것을 먼저 제게 주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바를 내게 명하시옵소서.” 이 말은 유명한 명언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내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수없이 실험해봤는데 자기에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내게 좋은 거를 명하셔도 나에게는 그것이 그림의 떡입니다. 왜?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내안에 없는 겁니다. 이건 아우구스티누스가아니라 경건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모든 우리 같은 사람들도 경험하는 바입니다.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명하는 바를 주옵소서.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하시려고 하면 명령하시기전에 먼저 그 명령에 부응할 수 있는 의지의 힘을 은혜의 능력을 나에게 먼저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제게 명령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이 주신 능력으로 그 명령대로 살겠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앙이 잘못되었고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을 가지런하게 깨닫게 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변적인 깨달음입니다. 제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잘 받아 드립니다. 아예 마음이 굽어서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 자체가 아예 싫고 역겹고 반항심이 생겨서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변화되려면 아직 때가 먼 겁니다. 좀 더 고생을 해보고 고통을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들으니까 설득이 됐습니다. 그리고 집중해서 들으니까 자기가 무엇이 잘못 됐는지 왜 하나님을 내가 멀리 떠났는지 그리고 떠나기엔 그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안 되는 위험한 영혼의 상태에 있다는 것까지 가지런하게 다 깨달아졌습니다. 이게 사변적인 깨달음입니다.
실천적인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가지런하게 다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이 상황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웅의 투쟁적인 움직임들이 이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첫번째 움직임이 뭐냐면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으로 멀리 떠난 사람들은 다른 거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거는 다 할 수 있습니다. 헌신적인 삶도 때로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는 기도 오늘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눈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지는 기도 내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그 피 떨어지는 기도 이런 것들은 악인들의 입에서는 마음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불의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의 입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참 신기한게 영혼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는 너무 힘든 일을 만나면 펑펑 울잖아요 펑펑 눈물이 막 쏟아지는데 그때 기도하려고하면 눈물이 멈추는 겁니다. 한번 실험해보세요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요. 너무 괴로워 옛날의 억울한 일들을 생각하고 괴로운 일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 그 순간에 이렇게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쏟아지는 이 순간 기도해야지 하면 마음도 닫히고 눈물도 닫힙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자기를 배설하면서 쏟아 붓는 그 감정의 체계와 하나님께 마음을 묻으며 기도하는 그것이 겉모습으로 볼 때는 우는 것 울부짖는 것 마음을 쏟아 놓는 거 다 똑같지만 이거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이게 유통이 안 되는 겁니다. 이 기도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에 하나님은 놀랍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힘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정말 진실한 회개를 경험해 본 사람은 모두 칼빈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고백 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맘을 녹이셨네
내가 하는게 아닙니다. 계속 온 영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나의 악한 길 주님의 은혜를 버리고 불순종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 던길 그리고 주께 불순종했던 길을 회개했습니다. 울부짖은 것도 나였고 가슴 아파한 것도 나였고 가슴을 치면서 눈물로 통곡했던 것도 나였고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것도 나였습니다. 근데 사실은 내가아니에요 다른 때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거니와 하고자하는 마음도 없었거니와 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을 때조차도 그걸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그게 어느 순간에 그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악한 길을 버릴 수 없었고 마음의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는 나뉠 수 없도록 아주 아름답게 작용하는 겁니다. 아주 달콤하게 작용을 해서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고 어떻게 보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런 복잡한 사변을 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시고 내가 당신께 돌아갈 힘이 없지만 돌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없는 힘을 나에게 주셔서 당신께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신앙 이 믿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똑같이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같은 강도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러 돌이키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니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심
A. “긍휼히 여기심”(ירַחֲמֵ֔הוּ)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하나님께로 돌아오거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제시가 되는데 하나는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과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성품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자주 듣는 이 긍휼이라고 하는 이 단어의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이미 교리반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말씀을 드렸죠. 오래참음과 긍휼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비 이 세 가지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 사랑의 각기 다른 두면들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래참음과 긍휼과 자비 이 세 가지가 지향하는 공통적인 목표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관계의 지속입니다. 오래참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고 행복하고 떠나고 싶지 않은 이런 상태를 참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화) 오늘 저녁에 정말 맛있는 식사였어요. 생선가스도 주고 내일 저녁은 더 맛있는 거 줄게. 내일 저녁은 특식을 장로님들이 돈을 주셔서 분부를 했어요. 아 정말 오늘은 한우고기에다 생선회에다 정말 오늘 저녁 오래참았어. 항상 자기에게 즐거운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은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참는 목적이 뭐냐 하면 여기서 괴롭다고 내가 뛰쳐나가면 저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음입니다. 그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향해서는 뭐로 나오냐면 오래참음으로 발현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속성이 자비로 나타납니다. 자비는 뭐냐하면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소비해서라도 상대방이 행복하고 유익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게 자비입니다. 그게 자비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히랍어로 자비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사용할 가치가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용당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 사랑이 있는 사람만 그렇게 이용 당할수 있는 겁니다. 그게 자비입니다.
1. “긍휼”의 두 구분
마지막으로 긍휼이 뭐냐하면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근데 이 긍휼이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사람의 긍휼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a. 사람의 긍휼
사람의 긍휼은 기원이 본성적인 도덕관념과 이차적 사랑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본성적인 도덕관념과 이차적인사랑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언제 이런 것들이 나오냐하면 응분의 댓가를 넘어선 비참한 상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불쌍히 여기게 되는 감정이 생겨나는 겁니다.
(예화) 여러분 운전할 줄 알죠? 운전을 하고 갑니다. 아까도 오다가 큰일날뻔 했습니다. 앞차가 지하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차가 빨리도 안가고 천천히도 안가고 따라갔는데 들어가려고 하다가 이 차가 지하도로 안 들어가고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부딪힐뻔 했어요 뒤에 타고 있다가 너무 놀랐습니다. 오늘도 수련회도 못하고 부름을 받는게 아닌가 설교 준비한 것 끝내야 하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그때 막 삿대질하고 그랬으면 얼마나 창피하고 그랫겠습니까. 창문을 열고 이렇게 쳐다봤는데 어떤 아가씨가 운전하고 있더라구요 여기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운전하지 마세요 큰일납니다. 예를 들자면 고속도로에서 차를 부르릉 하고 몰고 가는데 빵빵 거리는 겁니다. 고속도로를 100키로를 달리는데도 빵빵거리고 새치기를 막 하면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쁩니다. 에구 저렇게 고속도로에서 까불다간... 나쁜녀석이구나 근데 저기가서 서있어요 왜냐하면 교통경찰한테 걸려서 딱지를 끊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기분이 어때요? 솔직히 말해봐요 아이고 까불더니 싸다 근데 이런 경우도 있어요 실제 경험한 겁니다. 티브론이란 차가 그 껍데기가 쇠가 아니라 플라스틱이에요 티브론 한데가 까불고 오더니 내 차 뒤를 바짝 달라붙는 거에요 왜 저라나 하며 난 강원도로 말씀 준비하러 가는데 지그잭으로 이러면서 달리는 겁니다. 저러다가 사고 나면 어떻하나 계속 그러면서 달리는 겁니다. 가다가 속도위반으로 걸려라 그러고 설교준비하러 가는데... 저 앞에 그 차가 서있는 겁니다. 손을 막 이러고 이러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 났구나 했는데 차에서 연기가 나는 겁니다. 너무 빨리 달린거지 연기가 무럭무럭 나 저기서 차를 보고 멈췄습니다. 내가 설 때쯤 차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혹시 소화기 있어요? 그때 제가 산타모 짚차 같은 거 타고 다녀서 가스 차에는 소화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난 그거 있는지도 모르고 없는데요 했더니 아저씨 소화기 좀 빌려주세요 마음 속으로 지가 한 짓은 생각은 안하고 뭘 빌려달라고 그러나 하고 보니까 소화기가 있는 겁니다. 소화기를 얼른 뛰어서 줬어요 소화기를 뿌리는데 2초도 안 걸려요 이사람 저사람 소화기를 뿌리는데 이미 차가 다 타기 시작한 겁니다. 본네트가 다 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모이기 시작한 겁니다. 119에 전화를 하니까 저쪽에서 소방차가 오는 거에요 그러더니 얘기를 하는 거에요 당신 뭐하는 거에요 차량등록증하고 면허증이나 빨리 꺼내라구 이거 어차피 다 탈텐데 빨리 꺼내라구 그래서 꺼냈어요. 결국은 운전석까지 다 탔는데 소방차가 도착했습니다. 근데 소방차도 대책이 없는 겁니다. 소화기로 안 꺼지면 결국은 그 커다란 소방차에서 호수를 꺼내더니 호수를 확 뿌려 버리는 겁니다. 결국은 차가 온전히 침수가 다 되어 버린 겁니다. 다 타버리고 절반만 남았어요 그때 맘속에 오늘 까불더니 싸다 싸 이런 생각이 안 들고 아주 가엾다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나에게 뭔가 손해를 끼치고 까불던 사람이 경찰한테 걸려서 딱지를 떼면 가면서 정말 고소하다고 웃으면서 그러지만 충돌을 해가지고 피 흘리고 사람이 쓰러져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잘못한 거에 비해서 현재 일어난 이 일에 대해서 댓가적인 상황이 너무 큰 겁니다. 이럴 때 긍휼의 마음이 생긴 겁니다.
b.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은 그런 게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해서 비롯된 것이고 이차적 사랑이 아니라 일차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고통을 당한다고 칩시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불순종 했을 때 고통이 찾아 옵니다. 번민이 찾아오고 괴로움이 찾아오고 심지어는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 옵니다.
(예화) 여러해전에 어느 성도 한사람이 등록을 했습니다. 나하고 약속도 안했는데 비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목사님 좀 만나자고 해서 앉으라고 그랬더니 목사님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 교회가 제 코드가 딱 맞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찾던 교회입니다. 제가 이 교회와서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등록하시고 신앙생활 하시라고 그러면 된다 했더니 너무 감격스러워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며칠 있더니 교회를 안 나오는 겁니다. 왜그러냐 했더니 검찰에 구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공무원인데 부정을 한겁니다. 그래서 구속이 된 겁니다. 그리고 나한테 부탁을 하는데 자기 좀 석방 시켜달라는 탄원서를 온 교인이 써달라는 겁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교구에서 알아서 하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런거 몇 번 써봤지만 만난 적도 얼마 안 되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라고 얘기해 주었죠.
악인이 고통을 당할 때는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당한 거잖아요? 부당할 수가 있어요? 정도에 지나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아주 어려운 도덕 철학이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잊어먹지 않게 비유로 가르쳐 드린 게 있습니다. 길거리 지나다가 누구 나쁘다고 욕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구속 됩니까? 경찰에 잡혀갑니까? 아닙니다. 경찰에 가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보내주겠죠! 그런데 만약 황제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황제보고 나쁜 놈 멀리서 들릿 듯 말듯하게 그랬습니다. 벌이 뭐에요? 사형입니다. 근데 죽이려고 황제에게 칼을 들고 덤비다가 걸렸어요. 그럼 벌이 뭐에요? 군대를 동원해서 왕을 죽이려고 암살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걸렸습니다. 그럼 뭐에요? 왜 똑같아요? 아니 나쁜놈,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한게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민간인한테는 그래도 괜찮고 칼로 찌르려하면 징역 3년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테러를 조직했다하면 징역 7년을 했다고 하면 차이가 있잖아요. 근데 왜 황제한테는 나쁜 놈, 칼로 찌르려 해도, 테러를 조직해도 사형이고 술에다 독을 타도 사형 이냐는 겁니다. 왜 그러는 겁니까? 이것은 대상의 지위와 관련이 있는 겁니다. 대상의 지위가 무한히 높으면 이 죄의 크기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건 도둑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논점입니다. 이해되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불순종하고 고통을 받는데 자기가 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인간들속에 통용되는 의미의 긍휼은 우리에게 적용될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겁니다. 이해가세요? 긍휼이 적용될 여지가 없는 겁니다. 왜? 가장 작은 죄도 무한히 큰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의 긍휼과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죄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보다는 항상 작습니다. 악인이 무한한 형벌을 받기위해 지옥불에 던져져도 그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 행한 죄의 크기에 비하면 그건 작은 겁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이런 긍휼이 하나님 앞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긍휼이 위대하다고 인정받는 점입니다. 그가 당하는 당연한 댓가, 하나님에 행한 일에 대한 댓가치고는 너무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백성들이 복락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자녀들이 지금 현재 비참한 상태에서 고통을 받는 것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기는데 긍휼이 여기는 이것이 까리따스의 아주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2.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나는 요즘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떠한 악인이라도 그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필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면 물론 그것이 그 사람의 의지나 책임을 면탈 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전에도 내가 설교했잖아요. 내가 만약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랐더라면 나도 그랬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종류의 필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이 세상의 죄를 범한 모든 인간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을 바라보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일 겁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리켜서 우리는 긍휼이라고 말씀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나님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 법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지만 어떤 때에는 내가 살아왔던 잘못된 인생의 날들을 회고하면서 내가 다시 인생을 돌아가서 그 시점에서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이 없다면 다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내가 실패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았다면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거기서 만약에 내가 넘어졌다면 일으켜 세워 주셨다면 나를 버리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날 설교하겠지만 주위에 있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잘못된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만 보지 말고 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저런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면 그 사람과 나의 차이는 큰 게 아니라 그는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차이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했어요.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될 때에 상대방을 용납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우리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비참함을 보시며 그 비참함이 정당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댓가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크게 고통을 받고 정도가 넘는 피해를 입을 때에야 겨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발동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모든 것이 불쌍히 여기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세
예수 내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신앙의 깊이는 이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죄 못짓고 하나님께 받을 형벌이 두려워 악을 그치는게 아니라 이세상의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예수는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깊이 생각하는것, 이것이 한사람의 영적인 깊이입니다. 이러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길 바라니다.
B. “너그럽게 용서하심”(יַרְבֶּ֥ה לִסְלֽוֹחַ)
1. 정확한 의미
마지막으로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말했는데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정확한 의미가 용서하도록 너그러워지시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날을 은혜 받을 때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그때 바로 지금은 그런 은혜의 시대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 하시리만치 충분히 너그러워지시는 때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야할 때입니다.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셨습니다.
2. “용서하심”
여러분들은 혈기가 등등해서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들고 치려고 하던 이스라엘 무리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용서하시면서 나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거라 타일러 보내시며 그에게 새 삶을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바로 이런 은혜가 주어지는 시대이고 돈 없이 값없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는 과거의 죄책을 사해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관계를 복원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관계를 지속해주는 힘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리의 마음 사랑의 결핍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신자가 죄를 지을 때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더 이상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할 때에는 단지 우리를 벌주시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와 함께 복음 안에서 주어진 모든 특권을 다시 누릴 수 있는 보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유업들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때 용서해주심으로 다시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상대해 주시지 않는 그런 종류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 관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런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으며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며 하나님께 매달리던 경험, 나의 젊음을 모두 불태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했던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헌신, 주님을 섬기면서 내 맘속에 가득찼던 천국의 희열과 은혜의 기쁨,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뉘우쳐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습관들과 우리의 육욕적인 경향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하는 지체의 도움을 받으며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고쳐져 갈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노니 생명에 이르도록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도 점차 고쳐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모든 성경의 인물들은 용성의 경험을 통해 사랑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시편에서 자주 노래하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를 돌이켜 주옵소서 내가 늙기까지 주의 도를 전하리이다 미끄러졌고 넘어졌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큰 은혜로 나를 회복시켜 주실 때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며 이때에 나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미끌어지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을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죄인들에게 증거하고 의심하는 자들에게 증언함으로써 그들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뜻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 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여러분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며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주신 그 구속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소중한 사랑스러운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2.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Ⅰ.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문맥상 주기도문이 앞에 나오고 바로 뒤에 나오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기도문 다음에 다시 한 번 용서의 문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기도문 속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주기도문 속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용서의 실제적인 실천이 기도의 실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진실로 이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고 또 너희의 삶으로 이 주기도문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반드시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모인 공동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은 바로 공동체의 기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용서하는 대상으로써의 사람은 그 공동체의 지평을 뛰어넘는 모든 사람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여야합니다. 결국 우리가 어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으로써 이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들 사이의 용서를 실현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목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이러한 용서를 받았으니 너희도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용서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용납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
A. 교리적 문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 본문을 보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에게 떠오르는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하는 공로에 달린 것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게 하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들이 이제껏 배운 은혜의 교리, 일방적인 주권적 은혜의 교리와는 모순되고 상충되는 사실을 이 본문이 보여준다고 우리는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리적인 문제는 과연 이 용서는 정말 반복되는 것인가?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질문은 하나님이 구원에 이르도록 이미 용서한 신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수 있는가? 이런 복잡한 교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하나씩 풀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하는 것입니다.
B. 단회적 용서로 충분한가?
우선 제일 먼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단 한번 우리가 받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를 우리의 모든 죄지은 것으로부터 용서해주시는 것은 분명히 단회적인 용서일 텐데 이 단회적인 용서로써 정말 우리는 충분히 용서받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구원에 이르는 용서
우선 우리들은 제일 먼저 구원에 이르는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은혜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고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단 회적인데 이것이 만약에 우리의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만을 가리킨다면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있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짓게 되는 모든 죄를 우리들이 기억할 리가 없고 기억했다고해서 기억하는 모든 죄를 회개할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든지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죄는 남아있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고 구원에 있어서는 일회적 구원이 주어지기 전의 문제와 똑같은 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태어나서 공간 속에 묶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미 지은 죄와 미래에 지을 죄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고 그래서 미래에 지을 죄는 가능태적으로 우리에게 있고 이미 지은 죄들은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차이이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게끔 우리가 지를 지으며 하나님 앞에 실제로 죄를 실현하면서 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를 시간 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우리를 보실 때에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뿐만 아니라 짓고 있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하나님에게는 아신바 되셨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시간과 상관없이 우리가 스스로 짊어지고 태어난 그 원죄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이 실제로 죄를 짓게 되는 모든 실행 죄까지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용서하지 않으시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죄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우리와 화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단회적이고 영원한 용서이고 그리고 단번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그 죄를 한 번에 용서해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단 한번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에 이르는 이 용서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인간의 경험 속에서는 반복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잃었다, 찾았다, 다시 잃었다, 다시 찾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 안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주셨는데도 마치 우리가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나의 어떤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고 하는 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교화의 수단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2. 단회적 용서의 충분성과 불충분성
a. 용서의 충분성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합니다.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하나님은 불변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와 구원에는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에 이르는 용서를 받고나면 이것은 단 한번 주어지는 것으로써 이를 통해 성령은 내주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유업을 특권으로 누릴 수 있는 이 모든 자격들이 불변하도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b. 용서의 불충분성
그러나 만약 이 용서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동일하게 계속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교화시키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훈련하시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 훈련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이 구원은 반드시 교화의 삶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에 대해서 복수의 감정을 품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을 유아적인 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자랄 때에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너 학교 갔다가 곧바로 와야지 다른 데로 새면 너 죽을 줄 알아!’ 그러면서 혼냅니다. 그것을 영어로 그대로 옮겨보면 무시무시한 말이고 ‘I will kill you. You shall die.’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엄마의 성품을 모르는 사람들은 엄마가 ‘너 학교 갔다가 곧바로 와야지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그럴 때 엄마와 이 딸의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문장에만 주목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줄 알아!’ ‘저 죽을 줄 알아! 는 자녀를 죽이고자 하는 살의가 있구나! 어쩌면 밤새도록 숫돌에 칼을 갈았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의 성품을 아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강조점은 ‘죽을 줄 알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갔다가 끝나면 바로 와야 해.’ 거기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전 그런 소리를 별로 듣지 않으면서 자랐습니다. 워낙 착해서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고백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살면서 너 때문에 속상해본 적이 없단다.’ 교만을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엄마한테 ‘너 학교 끝나면 바로 들어와야 해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그랬을 때 진짜 살해의 위협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가 ‘바로 집에 가지 말고 우리 놀러가자’ 그렇게 꼬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말합니다. ‘나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해 안 들어가면 나 죽어!’ 그럴 때도 그 죽는다는 의미는 칼에 찔려서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런 식으로 자녀를 다루지 않으면 교육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과 죄인에 대한 감정을 분리해서 이해해야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그 불순종과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대항하는 악입니다. 그 불순종과 죄는 목적이 없습니다. 선과 은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GBS공과에서 배웠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미움이 아주 크지만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를 이렇게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자기를 긍휼이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성품이 안 느껴지는 것입니다. 안 느껴지게 하셔야만 이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죄와 은혜의 지배를 설교하면서 기가 막힌 예화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들어보십시오. 둘이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매가 예쁜 옷을 입고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기를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지만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형제는 아주 말끔한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정말 휴일에 아주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아주 예쁘게 서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서 ‘정말 나는 참 복 있는 여자야! 저렇게 얼굴도 멋있고 키도 크고 배도 안 나오고 저런 좋은 형제를 만나다니!’ 그래서 내려서 저기 형제가 있으니까 막 달려가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포옹을 할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까 형제가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토끼의 죽은 시체였습니다. 차를 타고 오다가 토끼가 숲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차가 치어서 죽었는데 이 형제가 토끼 탕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깝다고 끊여먹겠다고 들고 온 것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가 눈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가 저기서 막 슬로우 비디오로 달려오다가 딱 멈추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이 자매는 동물을 아주 좋아하고 육식 자체를 하지 않는 자매입니다. 그런데 토끼 탕을 끊여먹겠다고 치어죽어서 창자가 흘러내리는 것을 붙들고 있을 때 이 자매의 마음속에 있는 형제를 향한 사랑은 그것 때문에 추호도 식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 품에 안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성품과 이 상황을 놓고 볼 때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를 들고 있는 그 남자의 품에 안길 성품이 아닙니다. 이 자매가 토끼 탕을 좋아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이 형제에게는 아무 감정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놓으면 됩니다. 이것을 놓고 손 정도만 씻고 오면 다시 슬로우 비디오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죄는 미워하고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 매일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매일 매일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미워하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사랑해’ 그러면서 나에게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경험은 우리에게 이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이 떠오르느냐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영혼들이 나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죄의 피해자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만약 나에게 비친 것 같은 복음의 빛이 있었다면 만약 그들에게 나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참되고 진실하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들도 저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미움과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불순종하고 잘못하면서 살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불편한 감정이나 하나님의 불쾌함 혹은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느낄 수 없다면 성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 구원을 받아서 우리들이 새사람이 되었지만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밑에 깔려있는 것은 역시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고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에 꽉 붙들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면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붙잡지 않으시고 놓기만 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와 거의 다름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보지는 않았는데 도가니라는 영화가 나와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려진 것은 정말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총신을 다닐 때에도 그 동네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장애인들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 혹은 우리가 불순종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원수처럼 대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하면 학교에 다닐 때도 보면 이렇게 선생님께 체벌을 당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체벌을 당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아예 연초에 목공소에 몽둥이를 주문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정말 개 패듯 팼습니다. 그렇게 때렸습니다. 왜 그렇게 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학교 다니면서 제자들을 때린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지 회초리 한번 못 드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은 선생님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실력이 있는 선생님들은 그렇게 애들을 잘 때렸습니다. 믿는 게 있어서 그랬나봅니다. 대개 아이들을 못 때리는 선생님들은 실력도 없고 성품도 온순하고 그래서 애들이 우습게봅니다. 졸업식을 하고나서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고 끌어안고 울고불고하는 선생님들은 때린 선생님들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선생님이 잊히지 않는데 애들을 다 엎어놓고 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엎드려놓고 ‘내가 이렇게 때리는 것은 너희들이 좋은 사람이 되라고 때리는 줄 생각하지?’ 황당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때리는 것은 너희들이 착한 사람이 되라고 그러는 거야!’ 그럴 줄 알았더니 막 때리면서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때리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라고 때리는 줄 알지?’ 황당했습니다. ‘너희들이 착한 사람이 되던 안 되는 나는 상관없어. 하도 성질이 나서 때리는 것이다. 인마.’ 그러면서 확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애들이 그 선생님이 좋다고 따라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교사를 하려면 옛날에 했어야합니다. 좋은 시절 다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징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징계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4가지 특권중의 하나입니다. 특권입니다. 그래서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때리실 때에 하나님께 상처받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반역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빛이 그 사람에게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영적인 회복이 아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때 그 마음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복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들고 있는 이 내장 터진 토끼를 버리라고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당한 우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당한 고통을 복수로 해소하시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징계는 크게 두 가지로 주어집니다. 하나는 우리의 내적인 고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고통 중에서 제일 커다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리감과 낯섦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낯섦, Unacquaintedness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멀리 느껴지는 거리감입니다. Alienation. 이것은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내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자책감 같은 것도 이런 내적인 징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때로는 그래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움직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환경적으로 징계를 하십니다. 그것은 그 목적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용서라는 수단이 없으면 해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멀리 느껴지던 거리감들이, 낯선 것들이 사라지고 다시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먼 거리감이 해소되어서 다시 하나님이 가장 내 가까이에 계심이 느껴지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엄중한 징책 아래에 있다고 하는 감정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이 나를 선대하신다고 하는 것들이 내 마음에 느껴지는 이것은 용서라는 경험을 통해서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헤어진 사람들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헤어졌을 때 후일 다시 만나면 다시 사랑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라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사랑이 만약에 계속 흐르는 물이라면 거리감과 낯섦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서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이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용서는 이것을 다시 흐르도록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잘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 세 가지가 있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Intimacy’ 친밀함입니다. 그래서 장소적으로 그와 함께 있는 것, 그와 가까이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아주 좋고 다fms 사람과 있는 것보다 훨씬 친밀하게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Passion 정념입니다. 뭐냐 하면 좋아하는 친밀함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랑의 감정들이 이 안에서 계속 솟아나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요즘 제가 다 폐업했습니다만 옛날에 교회가 좀 작았을 때에는 결혼을 많이 시켜주었습니다. ‘너희 둘이 그냥 해라.’ 그러면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안합니다. 자꾸 해봐야 권위만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안하려고 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하는 말이 ‘해라.’ 그랬더니 형제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 자매 너무 좋아요. 그리고 같이 있으면 너무 편합니다. 그런데 여자로서 느껴지지는 않아요.’ 그게 사실은 결정적인 말입니다. Intimacy도 있습니다. 그런데 Passion이 없습니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냥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결격사유입니다. Passion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Commitment 헌신입니다. 책임질 수 있는 헌신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있을 때 이 삼각형이 딱 될 때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이다음에 형제나 자매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그럴 때 이 삼각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재보면 삼각형이 되어야지 삼각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Passion만 막 불붙습니다. 그런데 Commitment는 없습니다. 책임을 안집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얼마나 친밀한지 매일 친구처럼 같이 있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형제하고 같이 있으나, 자매하고 같이 있으나, 강아지하고 있으나 똑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냥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시골집에 가서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편한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시기에 따라서 이 삼각형이 예각삼각형이 될 때도 있고 이렇게 길어질 때도 있고 위로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사랑의 세 가지 속성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느냐하면 사실은 어떤 때는 나 자신도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각형을 가지고 재봅니다. 이 세 가지가 나에게 있는지 재보는 것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혹은 자기의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단되었을 때에 그때 어떤 감정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판별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랑은 관계를 끊임없이 맺고 그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차단됩니다. 그런데 그 차단되었던 것이 어느 순간에 다시 열리면서 물이 합쳐서 흐르듯이 확하고 흐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히려 용서받지 않은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주 확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잘못했을 때에 생기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죄감, 낯섦, 거리감 이런 것들을 해소하시면서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그래서 당신에게 꽉 붙어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녀가 둘이 있는데 고운 정만 많이 든 사람들과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사람들 중에서 못 헤어지는 커플은 전자냐? 후자냐? 이런 말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정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서로를 볼 때까지 다 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안 끊어지는 것입니다. 못 헤어지는 것입니다.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영혼의 정신의 구조를 모두 알고계시기 때문에 이 용서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이미 구원과 함께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죄 때문에 미워서 우리에게 복수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 보면 아주 무서운 하나님이 진노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생각해야합니까? 이것은 아까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징계의 경고가 아주 극단적인 어휘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것은 하나님 안에 불붙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없이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용서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게끔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토대로 우리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인하여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주시지만 용서의 경험은 항상 우리에게 똑같은 정도로 남겨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교화시키고 훈련시키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 살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때에 크게 은혜를 받고 용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감이 사라지고 다시 친밀함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Passion 이 느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Commitment 하고 계시다는 그 헌신도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긍휼이 여기시고 그렇게 대해주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내 쪽에서도 이 세 가지가 다 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살고 싶다는 Passion 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희생하며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이 마음의 변화와 그 다음에 이 사랑의 감정 이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구원받았을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의도에 부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주 탁월한 지혜의 경륜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목적을 멀리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 때에는 사랑에 있어서 이런 거리감, 낯섦, 정죄 이런 것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괴로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누었던 그 친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증거들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보이시는데 영적인 방법으로 보이시고 일반섭리의 방법으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일반섭리의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이 잘 술술 풀리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항상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완전한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악인에게는 번영이 없어야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 교인가운데 있었던 일인데 교인 한 사람이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교회에 등록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왜 왔느냐고 그랬더니 이분이 다른 교회에 다니던 분이셨는데 도서관에서 일을 하셨답니다. 교회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굉장히 많은 기도 응답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하나님이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은 다 주시는데 당신 자신은 안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일반섭리 속에서는 모든 은총들이 주어지는 것 같은데 하나님 자신은 안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시편에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주셨지만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막 ‘고기도 주세요. 뭐도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파리한 영혼으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영적인 축복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영적인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잠자는 것 같은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영적인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기도가 안 되었는데 그런데 은혜를 받고 무릎을 꿇고나니까 마음이 물처럼 쏟아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가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찬양)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까도 내가 우리 목사님, 전도사님들과 내려오면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직장을 다닐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40년은 안되었고 35년 정도 전이었습니다. 그때 금요일 저녁때 서울근교의 산에 가면 골짜기 골짜기마다 기도하러 온 청년들이 꽉 찼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때도 개념이 없는 교회에서는 통닭에다가 수박에다가 잔뜩 싸가지고 와서 무슨 밤야(夜) 야유회 오는 것처럼 오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여러분들을 지금 거기에 데려가면 안 믿을 것입니다. 마치 봄날의 야유회를 온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산속 구석구석에서 청년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장년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35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그것을 한번 체험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영적인 축복입니다. 기도가 그렇게 되는 것,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면 항상 나를 위한 맞춤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일주일을 살면서 고민하면 정확하게 주일날 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영혼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나의 영혼에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그것들이 받아들여지도록 나를 변화시키고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때에는 교회에서 피곤하도록 섬겨도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돌보는 아이들이 막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주일학교를 열심히 하라고 늘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막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막 쌍욕을 하고 이러던 아이들이 이상하게 한 달, 두 달, 석 달 정도만 지나고 나면 변합니다. 평신도 스물 몇 살짜리 청년이 중얼중얼하면서 공과 책을 가리키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입니다. 입에서 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욕하지 말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아이들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앉아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립니다. 옆에서 까불고 막 그래도 눈물을 주르륵 흘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영적이 축복을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면 이러한 영적인 축복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번영을 누리며 살 때와는 그 삶이 너무나 비교되는 것입니다. 많이 애쓰나 열매가 매우 적고, 기도하려고해도 기도할 수 없고, 어느 예배도 나를 위한 예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샬롬이 깨뜨려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Ⅲ.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
A.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두 방법
1.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다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두 방법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함으로써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서 멀리 이탈해서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저 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는 조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불순종하기에 적합했던 마음이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삶은 불순종하는 마음의 소산입니다. 그 불손종하기에 적합했던 마음을 그 통절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제 설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긍휼, 자비, 오래 참으심, 이런 사랑의 하위적 속성들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 때 즉 회개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새롭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a. 하나님의 용서의 경륜
여태까지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용서의 짝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관계 자체가 사랑하는 관계, 사랑하여야할 관계, 그리고 사랑을 지속하여야할 관계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으면 용서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강아지나 한우나 돼지를 향해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끼리 맺는 관계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끼리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라는 경륜 그 자체가 사랑이고 이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고 이 사랑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모두 하나로 포괄하는 우주적인 사랑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온 우주를 휘돌고 사람들을 엮어서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는 회귀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이 특성 자체가 맨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진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함께 아우르는 경륜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까 강 교수님 시간에 나왔던 샬롬은 희랍어로 에히메네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샬롬’ 그 자체가 우리로 말하자면 정확한 번역이 ‘안녕’입니다. 그런데 그 안녕은 혹은 평강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없는 안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안녕이 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안녕하면 우리의 모든 삶은 어떠한 풍파를 만나도 상관없다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과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고 샬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야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분리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샬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것 때문에 저해 받고 있다면 이것은 가짜 평화이고 위조된 평화이지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샬롬 속에 들어있는 거 자체의 요소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희들이 샬롬 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 말씀하십니다. ‘샬롬을 주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언입니다. 처음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제 내가 부활했다. 너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여기셔서 나를 부활시키셨다. 그래서 내가 생명의 주가 되었노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누리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샬롬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샬롬을 주시는 그 마음 자체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샬롬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용서를 베푸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내게로 주어지고 내게 흘러넘쳐서 이것들이 펴져나가서 사람들을 모두 휘돌면서 그 사랑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묶는 그 특성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3장을 30번 설교하면서 거의 매주 반복했던 내용입니다. 사랑은 본래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모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을 흉내 낼 수 있는 가장 근접하게 흉내 낼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고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Confession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람들이 사치를 좋아한다지만 당신의 풍족함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교만하기를 좋아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흉내 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포악을 행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쭉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흉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르게 흉내 내는 것을 우리는 덕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흉내 내는 것을 우리는 악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셨을 때 그 계획 자체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나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랑을 흐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주시는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이 용서를 통해 다시 여시고 그렇게 열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용서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느껴지고 하나님과의 열정이 느껴지고 하나님과의 헌신이 느껴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을 때에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왜?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은혜를 받아서 진심으로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내가 진심으로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안합니까? 그 사람을 다시 미워하게 되는 일은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현재적으로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과 용서에 있어서만큼은 당신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어떤 선한 인간도 그것을 행할 수 없게 하십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것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과 사랑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용서를 경험하면 그럴 수 있는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자원입니다. 은혜의 자원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정말 나 자신을 생각해도 그 사람을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변화시켜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을 할 수 있게끔 나에게 능력을 주고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b.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 모든 사람들의 연합 안에서 구현하게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그것이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임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은혜가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정말 크게 용서를 했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 사람을 다시 치열하게 미워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에 있어서도 당신의 은혜를 매일매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는 사실이 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자신을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느니라.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노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핏값으로 사신바 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니라.’ 이것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에게 부채의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 의로운 사람 이런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정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격렬한 진노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되어야 마땅한 우리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주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채의식을 느끼며 살도록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인생의 말년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 고백을 했습니다. ‘예쁘다 이 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함이로다. 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그 일평생 가족도 없이 자기를 다 소진해서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서 살다가 지금은 순교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이 노 사도가 고백한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지적으로 용서해본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원한의 감정을 품었는데 내 힘으로 그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격렬한 감정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십자가 희생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이렇게 미련한 인간들도 그것도 크고 완전한 용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을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사람의 몸을 입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진심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으로 용서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어제 저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정말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는 기도를 해본 사람만 자기가 결단을 하고 기도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똑같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용서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은 기도하려는 사람에게 기도할 힘을 주시지만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뜻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기도할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똑같이 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말 위대한 힘은 용서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를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시는 그 큰 사랑이 내가 그를 용서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그 큰 사랑이 나를 통해 저 사람에게 흘러들어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신 이 사랑이 우리 자신의 불순종과 방해 때문에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랑이 막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제가 초창기에 전도사할 때인데 여러분들은 청년이니까 성숙해서 조금 낫습니다. 그런데 이 중고등학교 애들은 잘 삐집니다. 아직도 여러분들 중에 중고등학교 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잘 삐집니다. 그래서 이제 수련회를 가면 전통적으로 첫날 맺힌 것을 풀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고 하면서 맺힌 것을 푸는 시간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처음 부임했는데 누가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다 전하고 분위기가 숙연해질 때 ‘우리 모두 이대로 수련회를 해서는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여러분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면 모두 그 사람에게 가서 모두 풀고 내일 새벽부터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부흥의 은혜를 경험합시다.’ 그러면서 불을 켜놓으면 창피하니까 불을 껐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애들이 가서 쭉 날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개념 없고 인간성이 별로 안 좋은 학생 앞에는 줄을 선 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이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까 내 앞에 줄을 선 애들이 17명이 줄을 선 것입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가 막힌데 각자 풀면서 기도를 하는데 ‘너는 나한테 왜 그렇게 맺힌 것이 많으냐?’ 했더니 아주 너무너무 다양합니다. 설교시간에 자기들을 너무 혼내서 상처가 되어서 왜 하나님은 좋은 전도사님도 많은데 저런 사람을 보내주셨냐고 자기가 기도까지 했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토요일에 기도하러 와서 ‘전도사님!’ 그러면서 반가워서 인사는 하는데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걸레를 빨아오라고 그랬다고 그러면서 그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하면서 줄줄이 17명이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고 그랬습니다. 참 나를 용서해라. 그리고 나면 항상 놀라운 기도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가 대구를 내려갔습니다. 달성공원이라고 있는데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굉장히 새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창경원에 망을 쳐놓고 새들이 날아다니는데 망이 없습니다. 새들이 전부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데 날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새들이 날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못 날도록 여기다 다 고무 바킹을 매어놓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 고무 바킹과 같은 것입니다. 가끔 막 난리를 치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새들이 다리만 점점 굵어지는 것입니다. 참 불쌍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때
1.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
a. 부정적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우선 이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노하신다는 의미도 아니고, 우리에게 복수를 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b. 긍정적 의미에서
어떤 뜻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셨지만 용서해주신 그 충분한 사랑의 경험, 이것들을 하나님이 거두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이 느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또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복됨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내가 치열하게 미워하고 마음속으로 복수를 꿈꾸면서 그러나 복수를 이행할 정도의 능력이나 담대함은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으로 그들이 나쁘게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살 것이냐? 이것을 대비시키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심
a. 사람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님
이러면서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를 매일 매일 생각하게 할 적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b.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게 하심
그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죄밖에 없다고 가르쳐드렸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 덕분이고 그분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한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하는 것입니다.
c.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만큼 당신의 용서를 누리게 하심
그래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만큼 당신의 용서를 누리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C. 용서받은 증거: 사람들을 용서함
1.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임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받은 가장 중요한 증거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눠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인 존재이기 때문에
2. 하나님 사랑은 흘러가도록 주신 사랑임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이 사랑이 나의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 자신도 하나님 앞에 고립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3. 용서는 우리의 의무나 권한처럼 부여하심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무로 제시하셨지만 고난처럼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우리가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마음이 생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는 명령하시지만 하기 싫어하는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서 용서가 행사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항상 경험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항상 사랑 가운데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물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 용서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표지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Ⅳ. 결론: 용서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렇기 때문에 사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 세상에서 한 단어로 말하라면 그것은 용서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용서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사람에게서 어느 한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나에게 잘못한 저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주지만 내일은 내가 저 사람에게 잘못해서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의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오늘은 나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지만 내일은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받으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결점과 불완전함들을 용서로 덮으면서 그러면서 모자라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완전한 공동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삶입니다. 한순간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될 때 그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고 그를 진정으로 용납할 마음이 생겨나게 될 때 많은 결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벌써 한 3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저희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저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그리고 아주 허름한 집에 할머니, 어머니, 할머니, 동생, 저 이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재개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하고 있었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재개발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재개발을 돈이 없기 때문에 못한다고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과 빨리 헐어버리고 새집을 짓고 들어가자고 하는 개발파가 서로 다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여름으로 기억되는데 직장에서 끝나서 마음이 불안해서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분명히 집에서 출근했는데 저녁때 오니까 집이 없어졌습니다. 완벽하게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 땅굴 같은데서 어머니가 걸어 나오시는데 피가 막 흘러내렸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이것이 뭐냐고 그랬더니 철거반원들이 경찰과 와서 집을 다 때려 부수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각목으로 때려서 피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 속에서 쓴물이 확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정말 은혜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 변화를 받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를 많이 하던 때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을 제가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거기를 관할하고 있는 파출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서너 명 정도의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에서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왔는데 주민인데 당신들이 철거반원들을 옹호하면서 철거반원들이 주민들을 구타해서 우리 어머니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당신들이 그러고도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무슨 정신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고 순리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고함을 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보기에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설교단에서만 소리를 치지 거기가 어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당신들은 경찰 복무에 어긋나는 매우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당신들은 범죄자다. 내가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기대해라.’ 그러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단호하고 강력했는지 그 정도면 경찰들이 ‘당신 뭔데 여기에 와서 소리를 질러!’ 그럴 것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면서 그랬습니다. 국보위에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두환 씨가 정권을 잡고 다 해체해버리고 국보위를 만들었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인데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무엇이든지 총알같이 달려오던 시대였습니다. 거기다가 정식으로 고발해서 이 사람들을 전부 다 사진을 찍어서 파면시키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변두리였으니까 철길이 있는데 철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쭉 걸어오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눈물은 흐르는데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용산참사가 났을 때도 그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이 사람들에게 복수하리라. 경찰이 거기서 철거반원들을 호위해주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는 관례상 그것을 시행하는 시행사측에서 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걸어오는데 20분정도는 걸어야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철길을 쭉 따라 걸어오는데 그 분노의 이글거리는 감정을 가지고 중간쯤 걸어오고 있는데 석양빛이 지는 저녁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종소리가 울리듯이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를 용서해주옵소서’ 그 철길에 주저앉아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까지 용서해야합니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그러면서 마치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저 사람들이 너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피를 흘리게 했다고 해서 네가 저 사람들을 이를 갈며 증오하고 있느냐? 너는 예전에 내 앞에 더 나쁜 죄인이었단다.’ 그래서 그 철길에 주저앉아서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기도가 모두 끝났을 때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인데 죽이고 싶도록 독한 마음을 품고 저희를 증오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 기도를 하는 그 순간에 강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큰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저에게는 예수를 믿고 나서 처음 경험하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게 살게 하실 때 한순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이렇게 뼈저리도록 아파하시는 분이구나!’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당시에 가난하던 경찰공무원 그저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무슨 나쁜 짓을 그렇게 했을까? 그러면서 마음 깊이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용서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주 앞에 우리가 죄인이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곧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과실을 행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토를 달수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가 예수의 것이니까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저녁에 기도할 때 깊이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틀림없이 여러분들 가운데는 가족을 미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무관심은 가장 잔인한 복수입니다. 그 자체가 미움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나쁩니다. 왜? 미움은 그래도 관계를 계속하려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진정으로 용서를 비십시오. 오늘밤에 당장이라도 좋으니까 회개하고 그리고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과 맺힌 것이 없도록 모두 풀고 옳고 그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실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억울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갚아주실 것이고 만약에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은 그들대로 다루실 것입니다. 깊이 용서하고 마음에 맺힌 것을 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찬양)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지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면 다시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와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부인하고, 나를 희생하고, 나를 버려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며 사는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못났다고 짓밟혀도 주님께는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3.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이 쓴 서신가운데 에베소서는 가장 우주적인 서신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창조 이전의 경륜, 그 모든 세계의 완성을 지향 할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감추어진 경륜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주적인 서신이 있는데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같이 우주적인 전망을 담고 있지만 에베소서와는 대조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점으로 놓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위대한 세계 그 영원 이전의 경륜 완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우주적인 서신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우주적인 계획을 말한 다음에 후반부에 가서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은즉 땅에 것을 바라지 말고 위에 것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이 땅의 육체의 지체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도 4장까지 우주적인 교리와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다음에 교회와 가정,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II.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
두 서신의 신학적인 구조는 우리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바라보면서 살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삶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세계에 대한 전망을 품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실제적인 삶속에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너희들이 우주적인 전망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이 너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이 ‘교회에서 하나 되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부모는 애들을 때리지 마라, 자식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 종들에게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말고 너그럽게 해라’, 이런 아주 실제적인 권면들을 주고 있습니다.
문맥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구속하셨다. 그리고 너희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모든 구속이 완성이 되고 창조의 아름다움이 다시 재창조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전망하면서 미리 앞당겨 미래에 이루어질 세상의 모형으로 만들어 진 것이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와 관련된 하나님, 교회와 관련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와 관련한 인간, 교회와 관련된 세상으로 볼 때 가장 정확하게 세상과 우주에 대한 전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열린 교회에서 이루어졌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성도의 공동생활’ 같은 시리즈를 깊이 숙독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해야지만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너희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는 외적인 일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된다. 내적인 일치란 사랑에 대한 일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우주적인 계획과 어떻게 떨어질 수 없는 연결을 이루고 있는가? 그래서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A.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심
1.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심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통일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을 하나로 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모든 세계를 창조 하셨습니다. 사실 모든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거기에서 이미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것을 거꾸로 놓고 보면 현재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정체가 없습니다. 모든 만물들이 소멸하는 것은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상태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다음에 모든 세계를 분리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된 세계, 창조된 사물들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묶으셔서 모든 세계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인간이 만든 모든 디자인은 전부 자연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가우디가 건축을 시작해서 후손들이 아직도 100몇 년 동안 짓고 있는 파밀리에 성당은 기둥부터 천장에 이르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디자인은 자연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름다움도 전부다 미학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역학적으로도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연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부터 수금지화목토천해명까지 늘어서 있는 태양계의 모든 것들도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도 모두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의 계획에 의해서 모든 만물들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창조되어서 실제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모든 만물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결 중에서 최상위에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영적으로 타락을 하면서 모든 세계의 질서들도 흔들리게 됩니다. 기본적인 질서들은 남아 있지만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연결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다시 회복하십니다. 모든 세계가 아름답게 완성이 되었을 때,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 이루어질 자연의 세계의 광의와 아름다움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입니다. 찬란한 아름다움입니다.
B. 만물의 하나 됨의 핵심
그런데 모든 만물의 하나됨의 핵심은 인간과 하나님의 하나됨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하나 됨은 인간의 영혼의 본질이 영이신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을 가장 근접하게 닮은 것이 인간의 영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이 맺는 관계는 아주 특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셔서 사랑으로 피조물과 조물주간의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는 유지하면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피조물이 천사도 아니고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셨을 때 수평적으로 당신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셔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 됨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인간이 인간 사이에 하나 되면서 모든 만물들이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뤄진 온전한 평화의 덕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계입니다.
창세기 2장이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상의 사물들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직접 흙으로 빚으셔서 남자를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부를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후’ 하는 행위자체가 하나님의 영혼을 창조하시는 명령적인 행위입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똑같은 흙으로 만들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자는 원재료가 흙인데 여자를 훨씬 더 우월하게 창조하시려는 듯이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물들도 하나님 앞에 하나이지만 그것들은 각기 땅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게서 살과 뼈를 받아서 또 다른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창조행위입니다. 맥튀레라는 사람이 기술하기를,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를 짓밟도록 머리뼈도 아니고 밟히도록 발바닥뼈도 아니고 보호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여자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요즘말로 아담이 한눈에 뿅 갔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미시안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남녀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두 사람이 인류의 전부였습니다. 부부인 동시에 이웃이었고 부부인 동시에 인류였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끼리만 된다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이후입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다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당신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경륜입니다.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를 생각할 때 이것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꿈꾸고 그리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습니까? 먼저 자연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는 하나님이 가능성을 많이 주신 세상입니다. 누구는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벌거벗고 에덴동산에서 뛰어다니면서 과일이나 따먹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았어도 인류의 문명은 계속 발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입니다.
또한 인간은 인간들끼리 뜨겁게 사랑합니다. 가족이기주의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류는 입안에 있는 혀같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기계적이거나 율법의 협박이나 공갈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입안의 혀처럼 움직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꿈꾸며 만드신 세상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이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깨진것입니다.
III. 교회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경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시킨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타락한 것을 통해서 오히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구속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구속을 시작하셔서 만드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구약에서는 교회가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하나님을 믿는 가정, 하나님을 믿는 족속들, 하나님을 믿는 나라 이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눈에 보이는 육적인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가정, 영적인 왕국으로 선교를 통해서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교회의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경륜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하시고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믿는다면, 세계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자기 입장이 있어야 세계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입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개똥철학이 아닌 성경에 입각한 우주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장엄한 계획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세계와 역사를 보고 나를 볼 때에 도대체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전의 장로님처럼 대한항공에 취직을 해서 월급생활을 할 것이냐 아니면 벤처기업을 해서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예술가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공부 좀 더 해서 의사가 되고 말거냐 아니면 변호사가 될 거냐 아니면 교사가 될 거냐 아니면 치킨집이라도 하나 해서 먹고 살 것이냐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무리 각기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이 나가는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행복 속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실 세계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인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샘플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A. 교회를 통해 하나 됨을 보여주심
그런데 이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며, 완성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이 충만하게 비치고, 성경의 놀라운 은혜가 있고, 사람들이 죄가 아직 있음에도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교회 지체들끼리 일체를 이루면서 하나님을 섬겨가려고 할 때는 세상과 아주 뚜렷하게 구별 됩니다. 그런 집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보면서, ‘저들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 하겠구나!’ 행복의 의미가 잘 먹고 잘 살고 호강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는 저들보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지만 난 저들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가장 타락한 세상 한복판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B. 제도와 형식이 아닌 영적 하나 됨임
제도와 형식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됨입니다.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샬롬의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하나됨입니다.
C. 삼위일체의 모상은 사랑의 모상임
하나 됨의 최고의 궁극적인 모상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완전한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투영된 것이 교회에서 하나 됨입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역사는 르네상스에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고민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그 고민의 물줄기가 14세기 중반쯤에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한 갈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세계를 통합할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에는 거의 다 동의를 합니다. 다른 갈래는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함으로써 이것을 너무 절대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인본주의가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모든 것에 있어서 중심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중세시대까지 묻혀있던 교회의 위계적인 질서에 인간은 속박 받고 하나님의 천상의 질서에 의해서 교회가 구원과 생사여탈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기독교 인문주의라고 불렀는데,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북유럽에서는 사상적인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문주의입니다. 그런 것들을 발견 하면서 기독교 사회에서 지금 통용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과연 올바를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회의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어제 강영안 교수님과 대화를 했던 주제가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면서, 에라스무스가 온갖 자료들을 다 동원하려고 하자 마르틴 루터는 자신은 성서 이외에 지금까지 인정되어오던 모든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강영안 교수님의 의문은 그러한 초시대적인 발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이 하나님의 성경 66권으로 기록된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추호의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는 발언은 그 시대로 보면 돌출적인 발언입니다. 공감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성서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은 마르틴 루터가 그런 논쟁의 방식을 르네상스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옛날에는 사람들이 전부 다 해석이 됐는데 그것이 이차, 삼차, 사차, 오차, 육차 계속 해서 되어 오던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을 통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받아들이면서 원문이 정말 그런지는 아무도 확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잘못 베껴 쓰면 계속 잘못 쓴 것이 내려옵니다.
그때에 르네상스 사람들이 ‘원천을 향하여’ 그러면서 라틴어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같은 옛날 사본들을 펼쳐놓고 비평하기 시작하면서 현재 이야기 하는 것들과 맞는지를 비교하는데 엉터리가 수없이 발견됩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원천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의 문헌은 물론이거니와 교부들의 문헌,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3-430), 네매시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45/676-749) 같은 위대한 교부들의 작품들을 공부하면서 중세에 있어서 지금까지 교회에서 가르친 것과 비교해보니 엉터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런 방식을 깊이 터득했습니다. 교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고 실제 성경의 원어로 돌아가서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본질적이며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인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재발견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생각하자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신학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이마고’(imago), 라틴어로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닌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닌 창세기 1장에서 나온 소위 ‘첼림과 데무트’, 형상과 모양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이마고’(imago),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간의 위대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경은 다음 두개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두 가지가 균형을 잃고 자꾸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가 정화되어 가는 것, 바로 영혼의 정화입니다. 영혼이 순결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순결해질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인간의 영혼은 상위의 기능부터 하위의 기능까지 갖고 있습니다. 가장 하위의 기능은 인간으로써 동물적인 욕구를 느끼면서 먹고 배설하고 욕망과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맨발로 걸어다니면 흙이 묻는 것처럼, 세상에 살고 있으면 인간에게 죄성이 남아 있어서 감각적인 것들에 계속 매이면서 끊임없는 육욕들이 생겨납니다. 끊임없이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것을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정신이 고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의 것을 바라라’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께서 나의 육욕적인 삶의 결과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을 땅에서 떼어 놓아야 합니다.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고 실패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울고 웃고 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것들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마음과 정신이 달라붙어서 출렁거리면서 살면 하나님이 형상을 주신 목적대로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등한 이상을 추구하는 어느 종교라도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라. 그러면 너희들은 훌륭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절제와 자기극복 같은 욕구들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 방법들 중에 희미한 빛을 보고 자기네 세계관으로 가져와서 정립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속된 이론들을 내어 놓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마음을 세상에서 수시로 떼어 놓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합니다.
살이 계속 찌는 체중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음식을 볼 때 항상 주관적으로 봅니다. 음식을 보면서 맛있겠다고 생각하고 많이 먹습니다. 저도 다이어트를 해서 두 달 동안 14kg까지 감량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다이어트를 하려면 칼로리를 A4 3장 정도까지 암기해야 합니다. 음식점에 갔을 때 생선전이 세토막이 나오면 밥 수북한 한공기보다 칼로리가 많습니다. 과자 한 봉지를 먹으면 680칼로리입니다. 간식으로 먹었는데 밥보다 더 높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려면 음식을 보면서 애정을 끊고 객관적으로 이 음식의 칼로리가 얼마이고 먹으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생각을 해야지만 조절이 됩니다.
마음을 세상에서 수시로 떼어놓는다고 해서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돌멩이같은 존재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슬픈 일들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삼십대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할 때 너무 감동받지 말고 쿨하게 결혼해라. 결혼하면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기대하지 말고 결혼 하니가 한다고 쿨하게 생각해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 주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직 위의 것을 바라면서만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제일 잘 하는 사람들은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을 절벽 꼭대기 같은 곳에 높이 짓고 문은 만들지 않습니다. 문을 만들면 수시로 드나드니까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려가려면 5층 높이에서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야 합니다. 올라갈 때는 두레박을 타고 위에 있는 수도사들이 당겨 줘야 합니다. 자연스레 다른 수도사들에게 미안해서 진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나가지 않습니다. 지금 문이 있는 경우에는 나중에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에 부합한 삶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모든 사람들은 도망쳐서 산에 올라갑니다. 밖에는 두레박 타고 1년에 몇 번만 나오고 결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주님 바라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인류의 멸망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 하나님과 관계하고 깨끗한 영혼이 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실제로 그런 예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도 그런 사상을 은근히 전해줍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이 있는데 바로 이 세계를 창조적인 행위로써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것보다 더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주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새기면서 우리의 노동을 보태서 학문을 발전시키고 개발할 때 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최선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동을 보탤 때 이 세계가 하나님이 가능태적으로 세계 속에 주신 것이 발현됩니다. 즉 자매들이 지금은 자매들이 예쁜데 어렸을 때는 예쁜 자매가 아니었잖습니까. 남자, 여자 섞어나도 모르는 갓난 애기였잖습니까. 그 아이 안에 예쁜 자매가 될 수 있는 가능태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타났을 때 현실태라고 합니다. 그런 가능태를 주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파악하고 노동을 보태게 될 때 이 세상은 아주 아름답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가능성들이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는 더 많아지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아름다웠을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세상을 잘 가꾸면 도달하게 될 상태가 내버려두면 망가질 상태와 어마어마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하지 않았다면 세계가 선한 상태에 있었을 텐데, 인간이 타락하고 모든 사물들과의 아름다운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세상이 망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의 노동으로 아름답게 만들면, 내버려두었을 때 망가질 상태와 창조적인 행위로 그것들 위에 봉사했을 때에 이루어질 아름다운 상태의 격차가 훨씬 더 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이 죄 때문에 비참하게 됐잖습니까? 그래서 인간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인간은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내버려두면 파멸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의 주신 형상을 발견하고 그를 사랑하면서 창조적인 행위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그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멸망할 상태에서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고 세상을 향해서 창조적인 행위로 봉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의 삶과 하나님을 만나서 세상을 섬기는 삶, 이 두 사이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생겨납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타락한 다음에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한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존엄과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삶은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영혼이 정결해지는 내적인 정화의 삶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노동을 보태어 망가질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고치는 일에 이바지하며 살 때,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창조하신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둘 다 문제가 됩니다. 사회 봉사한다고 매일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주일 예배도 안 드립니다. 그렇게 한창 살게 되면 몸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데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한쪽에서는 그런것들은 필요 없고, 내 영혼은 날마다 봐도 불결해서 늘 찬송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기도원 다니고 늘 교회 와서 가스펠송 부르고 삽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영혼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두 가지 본분, 하나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형상을 따라서 이 세계에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존재했을 세상보다 자기가 태어남으로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 여기에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위엄, 존귀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도바울이 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존재와 인격에 관한 것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 섬김다는 것은 사람됨과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됨이 중심에 있고 사람됨과 인격, 사람됨과 행위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화라고 하는 맥락입니다. 이 사실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내가 인간으로서 위대함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서 내 영혼이 정결해져서 예전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순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미끄러지고 불순종하고 영혼이 더렵혀졌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용서를 받고 다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존재에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나의 창조적인 행위를 섬김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티끌만큼이라도 부합하는 세상이 되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 안에서 행복해지길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뜨거운 신앙으로 예수를 믿어도 결국은 신앙을 여러분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성경본문을 볼 때, 저의 설명을 염두에 두면서 그 그림을 가지고 인간 존재를 생각해보고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을 렌즈삼아서 하나님이 교회 안에 두신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순결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순결은 고행과 고난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육욕적인 것들로부터 자기를 절제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화)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입니다.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 사람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진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됐습니다. 그리고는 잘나가던 변호사직을 포기했습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수입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호사 경력을 가지고 초등학교 선생이 되겠노라고 신청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 시골에 내려가서 작은 학교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물으니까 “나는 일평생 법학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들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진짜로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려고 하면 가난해 지기를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로서의 수입은 죄인을 변호하려고 할 때 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때로는 내가 봐도 죄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변호하는데 내 인생을 허비하면서 살았다.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식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예술을 행위를 해도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요한 세바스천 바하’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음악가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음악의 목적은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세바스천 바하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음악이 아닌 것은 음악이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 그 일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일 일 수도 있고 작은일 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분량입니다. 그러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창조하셔서 구원받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정결한 영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또 다른 일을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위한 하나의 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결해진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자기의 창조적인 섬김을 보태는 것입니다.
IV. 사랑: 오래참음, 긍휼, 자비
사업을 한다, 기술을 발전시킨다고 할때 기술과 덕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술은 사물을 사용해서 인간을 이롭게 합니다. 이로워진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유익을 얻으시도록 합니다. 그것이 기술입니다. 그런데 덕은 나 자신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키케로가 자기의 의무론에서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정신적인 일에 기여하는 것도 이런 물질을 사용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을 사용을 해서 기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면 더욱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떤 물질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삶에 유익을 주게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도 그 사람에게 굉장히 덕이 되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소멸할 덕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것들을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의 세계와 영혼을 바라보게 만들고 인간의 본분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좀 더 유익하겠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서 영혼이 진리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 하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일에 있어서 무엇인가 그들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그들이 직접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보여주어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어떤 일 보다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아주 탁월한 일입니다. 그것을 오늘 사도는 사랑으로 풀어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너희들이 우주적인 계획을 가지고 한 그리스도의 하나의 몸으로서 부름을 받았으니까 너희들이 이제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 이런 삶을 살아라.’ 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서부터 6장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거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말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A. 사랑: 관계의 성향
신학적으로 사랑은 세 가지로 구성이 됩니다. 오래 참음과 긍휼과 자비입니다. 원래 사랑은 영혼의 성향입니다. 관계의 성향입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 혹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있고 이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이미 있는 것은 강화하고 돈독하게 하여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정신의 끊임없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이야기 했잖습니까? “형제 나를 좋아해?” “어 좋아해” “왜 좋아해?” 그럼 모른다고 하던지 아주 멋있게 대답을 하든지, “Because you are.”(네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이야기 있잖아요?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산을 1953년에 등반하고 나서 그 당시에 등반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왜 그 위험한 산을 오르느냐?” 그랬더니 “Because there is.”(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명언을 딱 본 따서 “Because you are.” 그러면 합격입니다. 그런데 “너네 아버지가 부자니까”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또 “네가 예뻐서” 그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이 들어서 다 망가지면 그 사랑은 갈 곳이 없잖습니까? 또 다른 예쁜 여자를 찾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친밀함(intimacy), 정염(passion), 헌신(commitment) 이 삼각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이에 따라서 한쪽이 더 길던지 다른쪽이 길던지 다른 모양의 삼각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정염이 아주 강하겠죠? 나이가 좀 들면 친밀함이 더 많아지겠죠? 그리고 헌신도 왔다 갔다하고 그렇게 되겠죠? 사랑은 이러면서 관계를 세우고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사랑이 자가 발전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육욕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가발전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런 종류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모두 통할하는 종류의 사랑은 인간 안에 있지 않습니다.
B.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함
그래서 사랑의 사도로 불리 우는 요한이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그래서 그 사랑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이유는 인간자신이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인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내면의 모순률들 속에서 시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오늘은 꼴도 보기 싫고 미워집니다. 또 뭐 어저께까지 헤헤거리며 좋은 사이였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사랑의 깊이만큼 미움이 증폭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막 충동질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는 진정한 평화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냄비에다가 콩을 넣고 불을 대면 콩이 튀듯이 마음도 어디로 튈지 모르고 안정감이 없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콩이 튀듯이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연애도 성령 충만할 때 시작을 해야 됩니다. 대부분 미끄러졌을 때에 시작 하지 않습니까? 그럼 피차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하지 않으면 연애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할 때 만나면 비교적 평화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를 규율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C.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심
그래서 성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창조적인 행위로서 보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향을 부여하시고 매일 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에게는 “항상 희생하라” 그러십니다. “네가 희생하라” “왜?” “너는 나에게 사랑을 더 많이 받았잖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말 대접받는 사람들은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그들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납니다. 희생을 계속 하면서 죄인처럼 사는 사람은 예수의 넓은 사랑을 먼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버리셨는지 깨달은 사람은 죄인처럼 짐승 같은 교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남이 없는 것 받았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D. 교회의 이상을 실현함에 신자들이 참여함
그러면서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에 신자들이 참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때는 자신에게 놀랄 때 있지 않습니까? ‘참 내가 대단하다. 큰 돈을 수련회 회비로 바치고 아침부터 땅콩빵 하나밖에 안 주는데 그거 먹고 집이면 잘 시간인데 일어나서 새벽예배 참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공부, 설교, 점심 먹고 또 공부, 설교 이러면서 내가 살다니 대단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나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이야기를 듣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은혜가 없을 때는 한바탕 했을텐데 마음을 침잠시키면서 주님! 주님!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보니까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구는 그 형제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서 멀어져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건조하고 팍팍했으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그걸 받아줄 줄 알고 나에게 저렇게 하는 구나’ 가엾은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 한 성깔 했는데 내가 누구한테 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야 정말 대단하다. 나도 정말 이해가 안 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긴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람들을 속이거나 오늘 방장로님 설교하신 것처럼 자동차 북 긁고 도망가는 것들은 스스로에게 높은 상벽을 쌓는 것이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은 인간 자신이 결국은 자기가 지은 업보에 의해서 자기가 고립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웃에게 자기가 잘못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한편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속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좋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하고 나면 굉장히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폭발할 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자기를 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 받을 때는 수많은 언어들이 떠오릅니다. 밤새도록 잠이 안 듭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러면 그 인간이 나에게 이렇게 대꾸 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변할꺼야. 그러면 다시 이렇게 변명하겠지. 그러면 나도 이렇게 말해 버릴꺼야’. 막 자기 혼자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 쏟아 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 쏟아 놓았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자기는 계속 고립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살면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개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속된 표현을 써서 미안합니다. 개긴다는 말 아십니까? 사람들이 막 측은덕 거리면서 개기면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한 1년만 그렇게 까칠하게 살면 아무도 안 그럽니다. 늘 옆에 있으면서 기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 도망가서 옆에서 견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인간 자신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외로움입니다.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에게 신세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 때가 행복한 사람의 삶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V.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김”
A. “서로 친절하게 하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지체들에게 베풀어질 때 그것이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김이라고 나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의 희랍 언어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에이스 알렐루스 크레스토이'(εἰς ἀλλήλους χρηστοι)입니다. 알렐루스는 other(다른) 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는 복수입니다. 에이스는 속으로라는 into입니다. 다른 사람들 속으로 깊이 스며들면서 어떻게 되냐면 크레스토이 즉, 크레스토스에서 왔는데 이것은 이용할 수 있는(useful), 쓸모 있는,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봉사할 수 있는(servable) 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친절이라고 번역된 것이 결국에는 무슨 뜻이냐면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할 수 있는, 써 먹을 수 있는, 다른 사람 속으로 깊이 진심으로 그의 심령 깊은 곳에까지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서 늘 베풀어 주어서 사람에게 보태어주고, 이 사람이 신세질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복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용당하는 사람, 누군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만만하게 생각날 수 있는 사람이 성경에서 친절함, 크레스토스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온유하며’ 라고 할 때 온유라고 번역되는 크레스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을 성경은 완전히 다르게 해석합니다. 우리는 남 때문에 덕을 보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이용할만한 무엇인가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 있을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그 사람이 절대로 생각이 안 나는데 너무 괴로운 일이 있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서 다 털어 놓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다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을 누구한테 빌려 달래도 왠지 그 사람에게 가면 왠지 다른 친구한테라도 빌려서 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사람이 크레스토스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원래 사람이 좋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사람의 모자라는 상태에 나의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서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교통을 아주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세상과 구별된 집단이 그리스도의 교회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끊임없이 상처를 입는 것은 전부 대부분이 자기의 유익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기가 유익을 얻는 대신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결국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요, 자기 희생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많은 문제들은 사라집니다.
우리들은 상처를 입어서 곪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어도 덧나지만 않으면 상처는 금방 아물게 됩니다. 그런데 덧나면 아주 작은 상처에도 다리를 잘라야 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이익에는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아니면 여러 가지 자기의 체면이라든지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이러한 자기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하나됨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깨어짐을 경험하고 나면 정확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힙니다. 이웃과 피터지게 머리 당기고 싸우고 그 날 저녁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누가 카드 두 개를 가지고 고민을 한다고 하는데, 고민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됩니다. 왜 내가 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돈을 쓰는데 회사 카드를 가지고 그것을 긁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방 영향을 줍니다.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되는 것 보다 더 고귀한 이상은 없습니다. 그것과 바꿀 수 있는 이익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에 책에도 썼지만, 국제 유주 같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데도 ‘밤에 혼자 이불을 덮고 누워도 내 이불보기에 부끄러운 짓은 안 한다.’ 자기 자신이 신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인간 자신을 모순 덩어리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영혼을 순전하게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자기 이익에 집착하면서 살게 될 때, 사람과의 관계가 막힐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막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고립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덮으면 그 사람의 허물은 여기가 종착역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저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마땅한 바로 반응을 합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반응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또 옮깁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의 허물은 끊임없이 공동체 속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 사람이 완전히 낙인이 찍힌 사람이 됩니다. 결국엔 그렇게 해서 공동체가 깨뜨려지고 분열이 되면서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나에게 악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최선의 방책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손해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한 손해를 생각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그래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이 관계를 계속 하고 싶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입증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정말 잘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하기 위한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은 잘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싶은데 힘이 없습니다. ‘나를 정말 도와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교역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에 최근에 등록한 어느 교인 이야기입니다. 시월드 압니까? ‘시’ 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이 시월드라고 하지 않습니까? 시월드의 대장 시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서주면서 아들 도장을 찍었습니다. 며느리와 의논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며느리가 좋아할리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아버지 친구가 빚을 못 갚은 것입니다. 그래서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며느리 속에서 뚜껑이 열릴 정도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린 교회를 왔습니다. 그 날이 어버이 주일이었다고 합니다. 제목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였습니다. 설교를 다 듣고 나서 펑펑 울고 회개하고 시아버지를 용서하고 자기가 2억원을 대출을 받아서 갚아주고 끝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꺼이 저 사람에게 이용되는,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쓸모 있는, 저 사람에게 충분히 이용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음식점에 가면 이런말 듣잖아요? ‘자주 이용해 주세요.’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자주 이용해 다오, 네가 가난할 때, 병들었을 때, 마음이 아플 때, 상처가 있을 때 나 자신을 이용해 다오 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B. “서로 긍휼히 여기며”(εἰς ἀλλήλους εὔσπλαγχνοι)
둘째는 ‘서로 긍휼히 여기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똑같이 에이스 알렐루스(εἰς ἀλλήλους)입니다.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에이스는 into입니다. 속을 뚫고 깊이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으로 스며들도록 긍휼히 여기라.’ ‘유스프랑크노이’ 라는 단어입니다. ‘스프랑크노이’라는 단어는 ‘be moved to one's bowel’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유’가 붙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창자 끊어짐’입니다. 누군가의 너무 비참한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마음이 끊이지는 것처럼 아플 때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지금도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소아암에 걸렸습니다. 폐암인데 암덩어리가 허파를 압박을 해서 갈비뼈를 몇 개 뜯어야 할 상황이 온 것입니다. 시안부입니다. 힘 없이 누워 있습니다. 그 아이를 보는데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주면서 그랬습니다. “얘야, 목사님이 너 대신 누워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져라.” 그게 바로 ‘유스프랑크노이’입니다. 그 마음은 누구 마음인가 하면 똑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마태복음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할 때 그 것이 스프랑크니스데 라는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하고 불쌍한 지체를 보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결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교회에 원하시는 것입니다. 긍휼과 친절함, 이 모든 것들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됨에서 이러한 것들이 나옵니다. 원인과 결과를 사람의 잘못에서 찾는 동안에는 긍휼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와는 상관이 없이 그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 하나님의 절대적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정화된 영혼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창조적인 행위로서 이 세상의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보탤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오히려 더 현명한 삶을 살게 됩니다.
VI. 결론: 자신을 다 주신 사랑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진리는 철저히 상대화되고 기독교에 참 많은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입니다. 인간만이 중심에 있다고 외치고 인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중심에 있다고 몸부림치면서 부르짖는 것이 결국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존재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향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 없어도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 심지어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 심지어는 우리와는 사상이 다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러야 할 노래가 있습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데 가서 대접을 못 받는데 그 못된 사람이 교회에 오면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못됨을 온 천하에 표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인간인지라 그 사람과 상대하고 나면 너무 괴롭습니다. 회사 같았으면 ‘너 나가!’ 너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을 다스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제일 첫 번째 기도는 그를 축복합니다. 많이 축복합니다. 처음에는 마음에도 없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계속 기도를 하다보면 마음속에서 진심이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드는가 하면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저 사람은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가. 이 세상에서 저러한 사람을 용납해 줄 수 있는 곳이 교회 밖에 어디 있을까.’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행동하면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지체들이 나를 용납해 주었기 때문에 퇴출당하지 않고 교회에 있고 그래서 목사까지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가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눈물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유익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나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영혼들이 내 품에서 기대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게 하는 것, 없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게 하는 것, 그래서 빼앗기고 잃어버려도 결국엔 그가 나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유익과 행복이 나의 것입니다. 힘들 때 마다 ‘하나님, 나는 괜찮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정결한 영혼이 되어가고, 자기의 창조적인 행위를 망가진 이 세상의 사람들을 향해서 보탭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 앞에 죽을 사람을 살게 하고, 외로운 사람을 사랑받게 하고, 단절된 사람을 관계 맺게 만들고, 쓸모없는 사람이 될 사람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늘의 작용이 교회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상식을 깨는 곳입니다. 그 속에서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이 가장 많은 사랑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정화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 필요 없습니다.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이 끝없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그렇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아침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제가 이용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나를 사용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행복하게 하시고 외롭지 않게 하시고 유익을 얻게 하시고 물질을 나누어 갖게 하시고 그래서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 일이 힘들 때마다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자기를 다 주셔서 내가 그것을 누리게 하셨는데 지금 내가 이용당하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주님이 하신 그 일에 비하면 티끌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 베풂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 할 때에 마음속에서 자유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정결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독점적인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남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겉으로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어두운 골방에서는 그 사람들만이 아는 놀라운 보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의 도구로 긍휼의 도구로 일생을 살아서 아낌없이 여러분을 주어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5)
요한복음을 읽을 때 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20장에서 끝나게 되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리고 이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복음 21장을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부릅니다. 부록이 기록된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록처럼 느껴지지만, 만약 21장이 요한복음 끝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상당히 커다란 혼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끝일 뿐 아니라 사복음서 전체의 마지막입니다.
다음에는 사도행전이 시작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기다립니다. 그 때에 이미 베드로는 열두제자들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2장에서 드디어 성령이 강림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이 나와서 이방선교의 한 축을 담당할 때까지 사도 베드로의 권위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고, 심지어는 사도 바울과 이방선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조차도 베드로의 리더십에 복종하였습니다. 21장이 없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까지와 사복음서로 미루어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실패한 사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실패한 베드로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력을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지도자들이 위대한 영웅이기를 꿈꾸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을 지워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소설처럼 이야기를 그려본다면 이렇게 만들고 싶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때 모두 도망갔지만 끝까지 도망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채찍을 맞고 심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로마 병정들에게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정들이 그를 심하게 때리고 핍박을 해서 결국은 죽었습니다.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내다 버렸는데 새벽에 찬 공기를 마시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부상 받은 몸을 치료했습니다. 모두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에 결코 배신하지 않은 신앙의 정조를 지킨 단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고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소설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주님을 버린 사람,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는 길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사용하신 것 자체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패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로마 당국에 심문을 당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이나 살았고 그동안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고 한 번도 부인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내 생명을 연장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베드로의 믿음은 폴리갑의 믿음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 중의 하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장담했을 때에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고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여기에는 당신을 부인할 베드로에 대한 어떤 미움이나 복수의 감정도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부인하고 버릴지라도 너의 마음과 너의 의지로는 나를 배반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진실한 고백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니, 너는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고 결국은 범죄하게 될 것이지만 후에 너는 돌이키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너의 형제들을 굳세게 하거라.” 굳세지 못해서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을 사용하셔서 굳세게 하는 역할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째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은 개인적인 대화가 없었고, 세 번째 만남에서 베드로는 제자들과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 선생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아직 베드로와 일행에게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마치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데자뷰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던 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모두 실패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밤새도록 잡지 못했던 고기가 가득 걸려 그물을 들 수 없게 된 것도 누가복음 5장과 똑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상황을 똑같이 연출하심으로써 처음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소명을 재현해 보여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인줄 몰랐다가 가까이 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을 알게 되었고 요한이 베드로에게 “봐라! 우리 예수님이시다” 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려서 예수님께 헤엄쳐 가고자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만큼은 자기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잠시 잊어버렸고 다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반갑고 기뻤을 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갔을 때 숯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윌리암 헨드릭슨’이 주석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숯불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세 번째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날 밤의 모닥불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반가워서 덤벙거리며 달려가던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고 온 몸은 물에 젖었습니다. 그리고 타오르는 숯불을 보면서 예수님을 배신했던 그 날 밤의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그 날 밤의 기억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선을 마련하셔서 떡과 함께 준비하고 계셨고 떡은 아마 말랑말랑했던 것 같고 생선은 숯불 위에 구우며 사랑하는 제자들의 아침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식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누가 어떤 사람에게 ‘우리 같이 밥 한 번 먹자’ 하면 그것은 아주 친밀한 우정의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형제됨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마음속에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제자들의 숫자가 얼마인지를 헤아리셨을 것이고 아마 충분한 생선을 준비하셔서 이미 거의 다 굽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지금 너희가 잡은 생선을 좀 가지고 오너라.” 어쩌면 예수님께는 생선이 더 이상 필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색해하고 거리감을 느끼는 제자들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생선이 필요한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를 들었을 때 베드로가 먼저 배에 다시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내렸고 배에 가득 찬 153마리의 물고기 중에 얼마를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에는 티끌만한 그림자도 없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용서하시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고 승천한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충만하게 무장시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을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로마에 갔을 때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소가 꾸오 바디스(Quo Vadis)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승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오 바디스 교회는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말 “꾸오 바디스 도미네?” 즉, “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질문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당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 커다란 핍박이 일어났고 베드로가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듯이 빠져 나올 때 저 멀리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베드로는 여쭈었습니다. “꾸오 바디스 도미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의 양떼를 위하여 로마로 들어가노라.” 거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서 자신이 다시 돌아갈 테니 예수님께서는 로마로 가시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로 다시 돌아갔고 거기에서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사랑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셔서 과거에 잘못한 것들은 철저히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잘못한 것이나 불순종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용서, 사랑, 자비, 긍휼을 체험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예전에는 불순종했으나 이제는 순종하고, 예전에는 세상을 섬겼으나 이제는 주님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붙들어서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죄된 사람으로 만들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실패를 사람들은 두고두고 기억하며 비난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할 수 없는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베드로에게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교회를 방배동에서 평촌으로 옮기고 제 영혼이 아주 곤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옮기면서 저는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이러다가 과로사로 쓰러져 죽는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 한계가 끝까지 왔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때 깊은 침체에 빠져서 거의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끄는 사역에 얼마나 모자란 지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이 산더미처럼 짓눌렸고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캐나다에 목회자를 위한 집회 일정이 잡혀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설교할 수 없었지만 할 수 없이 떠밀려 출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며칠 동안을 울면서 한 마디의 기도만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시옵소서.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어려움들은 누구도 나누어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전혀 설교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탔고 비행기 안에서 수면제 먹고 내내 잤습니다. 캐나다에 도착을 했고 그 다음 날 새벽부터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밥도 잘 먹을 수 없었고, 간밤에 잠이 들면서도 내일 새벽에 무엇을 설교할지 수많은 설교 본문만 떠올랐지 결정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요한복음 21장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나아가 한 시간 정도 설교를 했는데 저는 그 때의 설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고 이상하게 내 눈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교회당에 앉혀놓고 당신 스스로 설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가 끝 난후에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때 깊이 하나님이 제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얘야, 네가 사는 것은 네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은혜로 사는 것이란다. 내가 너를 건져냈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란다.” 정말 몇 달 만에 회개다운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날 새벽에 저의 영혼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준비했던 어떤 집회보다도 은혜롭게 집회를 마쳤고, 귀국할 때는 새 힘을 얻어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부인했느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나모른다고 하였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떼를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으뜸이 되었고 예수님을 가장 부인했던 사람이 예루살렘 양떼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베드로를 한 때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셨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실패했으나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임을 떠올리며 베드로를 볼 때마다 복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일 핍박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망을 가지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은 믿음에서 미끄러지지 말고 신앙의 정절에서 더럽혀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살아 있는 순교자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가 갈릴리 호숫가입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다시 입으십시오. 예전에는 실패했으나 다시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섬김의 장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에게 근심이 되었고 부끄러움이 되었으나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따라가서 주님 앞에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5.골짜기의 많은 샘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 84:5-6)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고라 자손은 단지 시를 보관했던 사람들일 것이고 이 시의 저자도 다윗일지 모른다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찬송시입니다. 시를 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생살이를 회고하면서 부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던 기억까지 여기에 첨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이 살아가는 인생살이는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던 광야 생활의 아주 중요한 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복된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 84:1). 광야와 같은 인생길과 대비를 이루는 하나님의 성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길에는 고단함이 있지만 하나님의 집에는 쉼이 있고,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는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지만 성전에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는 끊임없이 결핍에 시달리지만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이 풍족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곳입니다. 대비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의 제목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자비를 누리는 것이 단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제단에서 참새도 집을 얻고 새끼도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모든 인간들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향해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은 하나의 정수를 이루고 외연적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의 혜택을 입히시고 사방으로 확대되어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들짐승과 피조물, 심지어는 참새들과 제비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택을 입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입지만 자비와 은혜를 더듬어 내포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중심에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가 농축되어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집약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장 충만하게 누리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시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 84:4). 언제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향해 자비와 선을 베푸신다는 사실이 믿어질 때 터질듯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원래 이 찬송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복을 비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찬송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후행적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 있고 그것에 감읍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나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시련을 만나고 곤고한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찬송을 공로로 여기셔서 우리를 어려움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찬송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련과 고난이 겹칠 때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지만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인도하신 과거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나라와 왕들을 꺾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나가게 하신 특별한 은총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굶주리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내리시고 목마를 때에 샘을 터뜨려 물을 주신 것을 찬송했습니다. 이전에 우리와 함께하셔서 광야의 생활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지금도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앙을 자신 속에 북돋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그들의 찬송 제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성막을,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뒤에는 정착된 곳의 성막을, 가끔 장소를 옮기기도 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마지막에는 성소로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때로 성전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에는 성전을 향하여서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신앙과 아주 일치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와 맺은 관계는 하나님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는 보이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인은 갑자기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힘을 얻는 사람들이라고 노래합니다. 시온의 대로는 시온 자체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에 시온이라는 말은 마른 땅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왕권을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예루살렘과 시온을 하나님의 보좌로 상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예루살렘과 시온에 임재 하셔서 당신의 우주적인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은 사상을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합니다. 이사야 50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시온에서 나간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율법과 함께 예루살렘 시온에서 이루어져서 온 땅을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스러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 힘을 얻는 은혜였습니다. 이 힘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영혼의 힘이었고 정신의 능력이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력이고 우리의 힘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우리가 고난과 눈물의 광야 생활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런 힘을 당신의 교회에서 주십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현실생활에서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실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부족한 목회자에 의해서 영도되고 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성화에 있어서 미미한 정도의 진척밖에 보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때 이런 놀라운 은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영적인 새 힘을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은혜를 끊임없이 부어주고 계시다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충만한 사랑을 경험할 때에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부어주신 은혜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전달됩니다. 내가 오늘 받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진 은혜가 마치 헐몬산에 내린 이슬이 흘러내려서 온 땅을 적시는 것처럼 나에게까지 임한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을 때마다 항상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많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는 교회보다 더 많이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부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이슬이 흘러내려 그리스도의 교회를 적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적신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나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 하나를 향한 개인적인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품고 우리를 당신의 한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왕의 길입니다. 그래서 왕이 행차하기 전에 선포하는 자가 지나가면서 왕이 모년 모월 모시에 이 길을 지나가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외치면 곡괭이를 든 사람들이 그 길을 보수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존귀한 왕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물론 그 길은 왕이 지날 때까지 누구도 지날 수 없도록 구별됩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왕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절망하여 주저앉은 마음은 거두어지고 교만하여 높아진 마음은 낮아져서 굽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 즉, 왕을 맞이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 지는 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도 우리의 집착과 애착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면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낙망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이 혹시 그들을 형통하게 해주시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무시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마음이 고르게 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될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이르는 시온의 대로가 있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기도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신자의 내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은 어차피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인생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 우리의 인생은 종종 눈물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시인도 노래합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주께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주신 사람들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눈물은 ‘바카’라고 나오는데 원래의 바카는 통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눈물 골짜기가 아니라 통곡의 계곡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이 많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이 그들을 찾아왔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도 통곡의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걷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으니까 종종 저의 과거를 회고하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 와서도 개척하자마자 30명 정도 모임 첫 번째 수련회부터 20년 동안 매년 했던 수련회를 모두 회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살아온 길도 회고하게 되었습니다. 회고하면서 발견한 것은 젊은 시절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극한 가난 속에서 고통과 연단을 받고 인간관계로 연단을 받았는데, 좀 지나니까 하나님이 물질도 넉넉하게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인간관계도 시달리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단이 지나면 눈물 흘려야 할 또 다른 이유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도 끝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눈물 흘려야 할 또 다른 이유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껏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부러워 할 삶은 없습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늘 물질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신학생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비록 지금 내가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은 당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뉘에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면 우리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을 얻으며 극복을 한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께 은총을 입으면 어려움이 전혀 없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그분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들치고 시련의 골짜기, 통곡의 계곡을 지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물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대신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원수들에 의해서 아주 밟히거나 엎드려지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 신비한 방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이스라엘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 나라여서 농사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아주 잘 사는 나라입니다.
지난 번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곳에서 학살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나치 정권이 저지른 인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독일은 깨끗이 사과를 했고, 지금도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사과를 합니다. 몇 년 전에는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는데 나치에게 학살당해서 죽은 사람들이 있는 묘지에 갔습니다. 거기서 총리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게 깨끗하게 사과하고 배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배상을 받은 금액이 천문학적인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돈을 받은 이스라엘은 의회에서 법을 제정하고 한 푼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돈으로 이스라엘 전체에 수로를 놓아 이스라엘 어디든지 물이 공급되도록 해서 땅 전체를 농사짓기에 최고로 적합한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 아주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온 땅에 많은 수리시설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곡식을 심는데 정확하게 두 번 때를 맞춰서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른 비가 내리면 파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늦은 비가 한 번 더 내리면 성숙하면서 마지막에 수확을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른 비가 복을 채워준다는 것은 농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농사와 목축이 이들의 가장 중요한 생명 유지의 수단이었고 제때에 비가 내려야만 짐승들도 먹을 수 있는 풀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눈물 골짜기에서 생명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많은 샘이 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곤고한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거기에 샘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샘은 거의 생명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거의 없고 땅을 아주 깊이 파서 물이 나와도 먹을 수 없는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샘을 터뜨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은 삼손이 블레셋과 싸웠던 경험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나귀의 턱뼈로 일천 명을 때려눕힌 후 그는 혼자 남았고 모든 기력이 쇠하여 주저앉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블레셋 군사들이 몰려온다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간절히 부르짖는 삼손 앞에 샘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생수를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습니다. 어차피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에 부분적으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고통과 슬픔이 그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 통곡의 계곡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게 해주시고 쓰러질지라도 원수에 의해서 짓밟히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생명의 샘, 은혜의 샘을 터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기 힘든 괴로운 일을 만났고 이길 수 없는 고통이 나의 삶 속에 펼쳐 질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기력이 모두 쇠하여 도저히 더 이상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생명의 양식을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이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주소서
종종 몸이 상하고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기력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하면 얼마나 큰 원기가 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병원에 입원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가까이에 있는 어떤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집사람한테 부탁을 해서 한 그릇을 사왔습니다. 그것을 먹고 나니까 힘이 났습니다.
우리가 너무 곤고하고 사면을 다 우러러 보아도 어디서 손을 내밀만한 곳이 없을 때 또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으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솟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샘들을 터뜨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제거하심으로써 우리가 행복하게 살 것 이라고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극심한 눈물의 골짜기, 통곡의 계곡을 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크고 시련이 많으면 하나님이 주실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십니다. 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은혜의 샘을 터뜨려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은혤르 체험하고 죄를 회개합니다. 눈물 골짜기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믿을 때 주님이 우리의 가장 가까이 오셔서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아주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곤고한 일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늘 부르던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그래서 하나님의 터뜨리시는 은혜의 샘을 만날 때까지는 정말 곤고합니다.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시련의 날을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샘을 터뜨리시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하게 되고 우리가 만난 어려움과 악한 상황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우리가 당한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을 의지할 기회가 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행운을 만나고 시련을 만나지 않는 것에 행복의 기준을 두면 안됩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통틀어볼 때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 중에 평탄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약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사도 바울은 자기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남들이 모르는 눈물 골짜기,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통곡의 계곡을 지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은혜의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그래서 충만한 은혜의 샘을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문제는 고난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은 우리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지만,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영혼의 샘,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은혜의 물, 생명의 양식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충만히 공급해 주실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경험됩니다. ‘키푸리아누스’라는 교부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처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교회와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지체들을 통해 주시는 두 가지 영적인 공급이 있습니다. 구제와 용서를 통한 것입니다. 구제는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이지만 용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저 사람을 구제하고 이 사람을 용서해주지만, 내일은 내가 저 사람으로부터 구제를 받고 또 그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이 베풂과 용서는 끊임없이 물처럼 흐르면서 궁핍한 사람이 없도록 모두를 건져주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모두를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인생살이를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이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빼앗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크고 비밀스러운 복입니다.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명에는 잃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터뜨리신 은혜의 샘들은 세상 사람들이 약탈해 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죽은 나의 영혼을 살리고 병든 나의 심령에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큰 샘물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끊임없이 내 마음에 솟아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접붙여진 자녀들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은혜를 누리고 이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해서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 가지 터득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 고난과 시련이 너무 크기 때문에 멸망하는 자녀들은 없습니다. 오직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서 주저앉는 교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금 당하는 것보다도 더 큰 시련을 당하고 정말 살을 베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었는데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면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매 순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낙심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간증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보다 훨씬 작은 시련인데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련이 커서 멸망당한 하나님의 자녀는 없습니다. 은혜가 모자라서 주저앉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하늘로부터 나에게 그냥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가 당신의 신부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진 은혜가 거기에 접붙여진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진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하는 일종의 자해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인생이 너무 곤고하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시련과 고난이 큰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더 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은혜에 참여하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있는 교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용서가 있는 복음(청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