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지 않는 복음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녹취자: 정유선
Ⅰ. 본문해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전에 62년경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됩니다. 그리고 잠시 전도하다가 66~67년경, 그러니까 석방되고 한 4년 내지 5년 어간에 네로의 치하에 있을 때에 다시 체포가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네로 시대 때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 로마 감옥에 갇힌 것 같고 거기서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생각보다는 내용이 간단합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 있고 바로 2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시종일관 교회의 질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2장 이후 6장까지 이어지는 내용과 1장의 찬양 사이에서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2장의 전반부인데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은 이 디모데에게 소명을 일깨워주면서 좁게는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넓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체가 된 모든 신자들이 복음에 대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번영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 때문에 복 받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도덕적이고 치유적인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데 직접 이 세계에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 높이 계셔서 이 세계를 간접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가 이 세상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살고 또 평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저 나의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때가 되면 위급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이 비상하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다시 하늘로 철수하시는 것 같은 그런 신앙관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관에서 보면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희생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몸으로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사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Ⅱ. 목회자의 고난
그러나 오늘 성경은 목회자인 이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지금 감옥 속에서 당하고 있는 바로 이 고난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사도 바울이 뭘 잘못했습니까? 누구의 물건을 도둑질했나요? 어떤 사람들을 괴롭혔나요? 누군가에게 어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나요?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난을 받았으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고난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카코파도’(kakopatho)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카코’는 ‘카코스’, ‘나쁘다’ 그런 뜻입니다. ‘파도’는 ‘겪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돌멩이 같은 것들이 서있으면 눈보라와 비바람이 수없이 쓸고 지나면서 깎이고 다듬어질 때까지 모든 것을 묵묵히 당하며 겪는 것, 그것을 바로 ‘파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것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결국 복음 때문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죄인과 같이 취급을 당해서 포박당해 사슬에 매여 감옥에 던져지고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겪기를 원하지 않은 각종 모든 나쁜 것을 겪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인 바울의 고난이었고 바울은 옥 속에서 이것을 당하고 있었고 디모데는 옥 바깥에서 이것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지, 목회자니까. 하나님께 특별히 소명을 받았으니까 고난을 당해야지.” 그러나 사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고난은 목회자이기 때문에만 당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매우 비성경적이고 그리고 전통적이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어느 날 복음을 들었고 그래서 내가 믿기로 결단을 했더니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고 천당에 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그리고 성령은 지금 내 마음에 와 계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주론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기 전에 우리는 벌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고 그래서 사실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주셨는데 우리를 영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서 그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양자라고 할 때는 항상 아들이라는 말하고는 다른 개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지요? 내가 직접 낳은 아들. 양자는 그런 아들이 아닙니다. 남이 낳은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핏줄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양자 그러면 항상 친아들은 아닌, 그런 인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받아주셨을 때 그 사랑과 친밀함은, 여러분이 자녀를 몸으로 직접 낳았을 때 느끼는 그 친밀함을 물론 능가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몸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일부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당하셨을 고난을 함께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입니다.
A. 복음을 싫어하는 세상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로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한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는 교회의 몸의 일부로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까? 복음을 싫어하는 세상 때문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복음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못 박혀 죽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싫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희망을 말하고 싶은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 희망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규정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지만 그러나 인간 자신은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무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복음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복음에 기초해서 쌓아올려진 모든 우리의 인생관, 모든 우리의 세계관, 그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나오는 우리의 삶의 모든 방식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들, 그 모든 것들을 이 세상은 싫어합니다. 요한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추었지만 어두움이 빛을 싫어했다,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어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고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사도이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복음, 그가 살아가는 삶의 토대인 복음, 그가 충성하는 복음적인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을 미워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을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싫어하는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은 모든 신자에게 있고 만약에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고난이 없다면 그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책 속에서 참된 설교자와 거짓된 설교자의 차이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참된 설교자는 고난이 있고 거짓된 설교자에게는 고난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 당시에 그렇게 간단하게 참된 설교자라면 반드시 고난이 있고 고난이 없으면 거짓된 설교자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그 시대에 온 세계에 가득 찼던 복음에 대한 반감과 대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싫어하는 세상이니까 만약에 그 사람이 참 설교자로서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의 신학을 외치고 이 세상의 번영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고 인간의 공로 대신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고 인간의 행위 대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선포한다면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할 것이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들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우리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그 고난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복음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복음에 매여야 할 신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싫어하는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견디면서도 이 복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 복음에 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매인다’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복음에 ‘매인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줄로 묶는다’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거기에 매여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를 돌보고 양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밤에도 몇 번씩 일어나서 젖을 먹여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되고 그리고 엄마들은 아이를 낳으면 한 2~3년 동안은 이 세상 물정도 모릅니다. 밖에도 못 나갑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혹시 자유가 주어져서 며칠 집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엄마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 이 아이에 마음이 매여 있기 때문에 이 아이가 너무 궁금하고 너무 보고 싶고 너무 그리워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누가 그럽니다. “목사님 외국에 나가는 것 대개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죽기보다 싫다 그러면 안 나갔겠지만 일이 있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인천국제 공항에 갈 때까지는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비행기 타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내려서 외국에 내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너무 오고 싶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매일매일 하루하루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시지요? 너무너무 오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시 오지 말자, 너무 힘드니까. 그래도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 때는 마치 군대 갔던 병사가 휴가 오는 것처럼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와서 또 한참 있으면 별로 좋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0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작년에 휴가 한 달 간 것 이외에 두 주 이상 교회를 비울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충성스러워서가 아닙니다. 그냥 마음이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인 것입니다. 그 복음에 매여 있어야지만 고난을 받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8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나오는데 옛날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아니라 희랍어 성경에는 ‘에반 게얼리 온 무’입니다. ‘나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예수님 복음 따로 있고 사도 바울의 복음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은 하나인데 내가 그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해서 지금 내가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말한 것처럼 “내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한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 바울의 복음이고 사도 바울이 붙들고 있는 그 복음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일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랬는데 히랍어 성경에 보면 관계대명사로 나옵니다. 9절이 그것 안에서 나의 복음, 곧 그 안에서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 이 얘깁니다.
그러면 복음에 매인다, 우리 흔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산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중요한 것은 지식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그 복음에 묶여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 속에서 그것이 강제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절실하게 체험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다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숙명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운명과 같은 만남이 되었습니다. 나사렛에 있었던 그 젊은이, 그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셔서 자기가 볼 수 있게끔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가 받는 박해를 당신 자신이 받는 박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혼란이 무엇입니까?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그 십자가에 직접 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더군다나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자기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만약에 하나님이 저주하셔야 됐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리 없는데 저주받은 것도 사실이었고 인정받고 다시 사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커다란 혼란이 밀려왔지만 어느 한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비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을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이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을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순간에 어두운 천장이 확 찢어지면서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의미와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구원하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온 우주와 역사와 인간과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학문과 철학들을 볼 수 있는 눈들이 환히 열리게 되었고 그 웅장한 사상들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기록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복음에 매였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복음 전파의 열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복음의 의미에 이 사람이 매여서 그 복음을 따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복음을 따라 살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불붙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전존재적인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로마서에서?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붙붙는 고통의 마음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너 복음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신 적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붙들어 매고 있는 이 복음의 의미에 그는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 복음 때문에 영혼을 위해 자신이 죽음의 길을 택했고 또 그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편지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매여있다 라고 하는 것은 매일 매일 현재형입니다. 옛날에 젊었을 때 복음을 크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 언제까지 옛날에 있었던 신앙의 체험을 간증하기만 하겠습니까?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에 매여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 상관이 없이, 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도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에 붙들렸을 때에는 잃어버린 영혼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고 싶은 치열한 열정이 가슴에 불붙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어차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십자가 사건은 이천년 전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오늘 우리의 심령 속에서 재현되어 그 그리스도 예수의 이천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재현되고 재현되고 재현되는 사람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복음에 매일 것이고 그 경험이 그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가 마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가득 찬 이유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Ⅲ. 매이지 않는 복음
정말 이 세상에 어떠한 죄인,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지 무디어진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에 붙들리기만 하면 그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한두 번 이야기한 기억이 납니다. 1904년도에 웨일즈의 부흥이 있기 전에 인도 카시 지방에서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동네에 갔더니 어른들은 없고 아이들만 골목 구석구석에 모여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얘들아 왜 우냐? 엄마 아빠 없어서 우냐? 엄마 아빠 어디 갔니?” “우리 엄마 아빠는 모두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어요.” “너희는 왜 우냐? 엄마 아빠 없어서 우냐?” “아니오.” “왜 울어?”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납니다.” 그랬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인 성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교회를 핍박하고 그래도 놀랍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복음에 매여 있는 사람이 있는 한 하나님은 바로 그 복음을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는 강력한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정권 때문에 복음이 전파가 안 된다, 세상이 너무 타락해서 복음이 전파 안 된다, 뭐가 어때서 안 된다, 그게 아니라 문제는 뭐냐면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에 덜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덜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선교의 현장을 통해서 그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돈으로, 물질로, 인간의 방법으로, 수단으로 복음을 대신해서 선교하려고 할 때 자꾸 벽에 부딪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에 매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는 바로 그 연약한 사람들을 붙드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오늘 사도는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의 확장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이 복음의 의미를 선포하면서 그들은 매일매일 이천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그 복음의 의미에 붙들리고 매였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복음에 매인 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매인 사람들의 마음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복음은 끊임없는 역사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핍박을 하거나 막으면 복음은 기다립니다. 그래서 물이 꽉 차면 물이 댐을 넘는 것처럼 불가능한 상황을 넘어갑니다. 잠시 복음을 막았구나 생각하지만 복음은 넘어옵니다. 때로는 복음은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땅을 강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겨울의 힘이 위대한 것 같아도 봄의 따뜻함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복음은 동토의 땅들을 녹이며 전파됩니다. 문제는 이 세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에 붙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복음에 매여 이 복음의 질서를 따라 살고 이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매이지 않고 놓여져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 복음의 의미에 굳게 붙들려 이 복음을 전파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