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2014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4년 1월 13일 - 1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1월 21일
목 차
1. 말씀으로 위로하심(시 119:50)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2. 여호와, 나의 분깃(시 119:57)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5
3. 악인의 줄에 얽혔을 때(시 119:61)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9
4. 고난 중에 주신 유익(시 119:67)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2
5. 내 인생 길에 빛을(시 119:105) 2014.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6
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1 (2014.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말씀으로 위로하심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녹취자 : 김세나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 불리웁니다. 그 만큼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 시를 외우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시인이 다시 살아나게 된 은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 깊고 오묘함을 깨달아 영혼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 그 환경이 평탄하고 안일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 앞에 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고난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시인은 깊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교만한 자들이 조롱하고 그리고 악한 자들이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길이 나그네 인생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느끼면서 살던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이 고백하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들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고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가 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들이 원하고 우리들이 평소 살아오던 질서가 있는데, 이것들이 급하게 흔들리면서 원하지 않는 질서가 되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을 고난 혹은 고통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어떤 높은 가치를 따라 살기 때문에 우리들이 겪게 되면 상 받을 만한 고난이 되겠고 그러한 높은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런 일들을 겪게 된다면 이것은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이든 저런 고난이든지 간에 사람이 고난을 받게 되면 정신의 상태가 매우 특별해 집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면 내적인 에너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겪을 때, 우리들이 고난을 겪지 않을 때에는 많은 관심사들이 있었는데, 고난을 많이 겪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들이 아주 축소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평안한 때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운 일이 많지만, 정말 고난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듣기 싫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소리도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위로를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칭찬해야 할 선행 가운데 하나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하는 것입니다. 그 위로는 고난을 통해서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해 주고,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이 소외된 가운데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들도 함께 멀어지게 됩니다. 시인들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이 오면 이상하게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자기의 친구들도 자신을 해치는 적으로 돌변해서 그를 향해 발꿈치를 들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제 이 시인은 그 고난 중에 위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 나갈 때 사람들도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말도 건네고 도움도 주고 그러지 우리가 정말 고난을 당하고 나면 사람들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실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종종 우리들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의 상태이지만 그러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구했는데 그 위로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경우 더욱 더 자신에 대해서 비참함을 느끼고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도 똑같이 고난을 당하고 교만한 자들의 조롱을 받고 시련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사랑하던 친구들도 떠나고 악인들이 자기를 두루 에워싸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을 때 그 때 상황에서 그는 정말 자신의 영혼을 돕는 방식으로 위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입니다’ 라고 고백하였는데, 그 뒤에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이 ‘말씀’이라는 단어와 뒤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말하면 앞에 나오는 ‘말씀’은 단어가 없습니다. 지시 대명사만 나옵니다. 아마 앞에 나오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할 때에 그 말씀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단어가 ‘다바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뒤에 나오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어떤 성경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이니 이는 주님의 약속이 나를 다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메라’라는 단어인데, ‘에메라’라는 단어가 ‘약속’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그 고난을 받을 때 고난 받으며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소망이 되어서 이 시인을 굳게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깊은 동굴에 갇혀서 도저히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어디를 가야지만 이 동굴을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한 줄기 아주 가느다란 빛이 들어온다면 여러분은 그 빛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빛은 외부 세계에서 들어오는 빛이고, 그 작은 바늘 구멍으로는 사람이 나갈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길로 가면 바깥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아주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오를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다면 그리고 어느 날 낙심하고 있는데 밧줄 하나가 내려와서 여러분 눈앞에 있다면 당연히 그 밧줄을 온 힘을 다해 붙들고 그 웅덩이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시인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한 식으로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보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 말씀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 때에 그 말씀이 이제 이 시인의 마음속에 위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성품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의 모든 환경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깨닫게 되는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고통스럽고 시련을 당하는 환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앞에 있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바꿔 놓는 때는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다릅니다. 시련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바꿔 놓고 우리의 심령의 상태를 변화시켜서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중에 위로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곤고하고 고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깊은 웅덩이에서 밧줄을 잡는 마음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에서 한 줄기 빛으로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태도의 정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엄중한 태도이며 진지한 태도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중심에 있고 자신이 그 말씀 앞에 부복하여 말씀이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해 줄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을 책망할 때에도 기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주님께 붙잡혀 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강하게 붙들려 산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강하게 붙들려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그 말씀이 주장하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 붙들려 산다’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깨달음으로 지성이 장악되고 그 지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의지 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장되어서 내가 내 뜻대로 살기보다 나를 깨운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으며 산다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결국 그것에 붙들려 살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에 붙들려 살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그 말씀을 끊임없이 거역하면서 살면 그것은 하나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엄청나게 큰 변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들을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붙들어 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당신의 말씀에 굳기 붙들려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간에는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물처럼 녹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한 없이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에게 영향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시고 당신에게 붙들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또한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에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살리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만약에 어떤 주석가들처럼 약속으로 해석을 한다면 이 성경 구절은 더욱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아무 희망 없는 그 때에 시인도 때로는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총은 끝났는가. 하나님의 자비는 다 하였는가. 이제 나는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말인가’ 인간이 강한 것 같아도 고난이 겹치고 인생의 힘든 날이 계속 되면 그 강함도 한계를 노출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는 것과 믿음이 없다는 것은 어떤 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와 같습니다. 그 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어쩌면 성경 자체에 나오는 일반적인 고통 받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 일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 시인에게 하나님이 깊은 기도와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많은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 중 어떤 말씀이 매우 특별하게 우리의 마음에 다가와서 우리의 심령을 깨우고 우리의 마음을 두들길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수많은 대중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나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세우고 고난 중에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 속에서 깊은 위로를 이 시인이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어떤 물질을 주시고, 때로는 시련을 당할 때 시련을 금세 물러가게 하시는 것에서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면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곧바로 우리를 건져 내 주실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 시련과 위기를 사용하셔서 평탄한 길을 걸어갔다면 바꿀 수 없었을 우리를 바꿔 놓으시기도 하고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고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올바른 태도로 고난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 시인을 다시 살렸습니다. 여기서 ‘살렸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시인을 건져 주시고 고난이 끝나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 속에서 고난을 받으며 낙심하여 영혼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영혼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서 고난을 받으며 영혼이 시인의 모든 삶을 지도하는 원리가 되지 못했었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었고 그래서 시인의 인생을 주관하며 이끌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영혼이 올바르게 살아 있으면 우리 주위에 다가오는 삶의 강한 환경들을 해석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잘 헤아립니다. 이러한 모든 기능들이 영혼이 살아 있을 때. 우리들이 영혼이 죽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기능을 상실하고 쇠약해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낙심하고 기운이 하나 없는 사람보고 ‘다 죽어 가네.’라고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그러한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있는 것을 가리켜 영혼의 죽음의 상태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많은 미끄러짐이 있고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게 될 때 죽음의 행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환경을 해석하면서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똑같이 시련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인데도 낮에는 술 먹고 그리고 밤에는 수면제 먹고 잠을 자면서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시련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시련 속에서 건져 주실 것이고, 이 시련을 만난 것이 반드시 유익이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삽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똑같은 상황에서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결국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살림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 이제까지 제가 시련 속에 있으면서 모든 것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혹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환경을 바꿔 주시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은 이 환경을 통해서 먼저 나를 바꾸시기를 원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2 (2014.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여호와, 나의 분깃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셨나이다”(시 119:57)
녹취자: 김세나
시인은 여기에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말합니다. ‘분깃’은 히브리말로 ‘헬렉그’ 인데,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 때에 아직 정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가나안 땅을 제비뽑기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하고 난 다음에 어느 지파가 어느 지역을 가질 것인지 나눕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지파 별로 얻은 땅은 다시 족속별로 나뉘게 되고 가문별로 나뉘게 되고 가정들에게 그 땅을 할당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데 헬렉그, 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업’ ‘할당된 몫’ ‘제비뽑기를 해서 얻은 땅’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화)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 살아계실 때 일인데 어느 날 굉장히 흥분된 채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조상들의 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사연인가 하면, 어느 날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개 씨 입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당신 엄청나게 큰 땅이 당신 땅으로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전혀 모른다고 하니까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땅의 지반을 보여 주면서 이 땅, 이 땅, 이 땅, 이 땅이 당신 조상들이 남긴 땅인데 후손들이 제대로 찾지 않아서 이것이 국가 소유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소송을 하면 찾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20년 전에 시가 15억 원 이상 되는 땅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땅을 놓고 국가와 소유권 다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엔 잘 나가다가 패소를 하였습니다. 결국 날아가 버린 꿈이 되었는데, 그때 그 흥분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상들이 남겨 놓았지만 찾지 못한,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땅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벅찬 감격과 기대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사이좋던 형제, 자매들이 이 유산 때문에 분쟁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흩어져서 살고 심지어는 미국까지 흩어져서 자식들을 보기가 참 힘듭니다. 그 때 모든 자식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명절에 오너라 하면 며느리가 ‘요새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요’ 하면서 핑계를 댄 답니다. 그때 ‘괜찮다, 그런데 오는 명절에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하면 모두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어 질 때에는 ‘올해는 아무래도 결론이 안 날 것 같으니 내년에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고 하면 내년에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례 업을 하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모가 남긴 것이 없고 가난한 집안에는 그 장례를 치루면 분위기가 그렇게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여윈 자식으로 여기면서 불쌍히 봐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제 돈 유산이 많고 그것도 갑자기 유언도 안 남기고 죽었을 때에는 아주 분위기가 험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가 치러져도 이 구석 저 구석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덕거리면서 관심이 장례가 아니라 장례 후에 한판 붙어서라도 어떻게 유산을 차지해 보려고 하는 암투들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장례 업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이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하는데, 우리는 죽었다 개도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이 느낌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땅이 없어서 노예사리를 하며 방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지만 이 약속이 가나안 정복을 통해 겨우 실현이 됩니다. 그러니 그 땅 없는 설움, 땅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나그네와 같이 유리방황하는 삶, 그리고 마지막에는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비참한 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이 분깃을 받은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는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저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 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축을 하며 헤매고 또한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올 때까지 40년 가까이 헤매던 땅은 기름지고 그리고 아름다운 땅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깃으로 주신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소산이 약속되어 있는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라고 고백하였을 때 그 그림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분깃이시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당신의 말씀들을 준수하리라고 말하였나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준수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또한 준수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항상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인데 누군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이 쉬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이 고난 중에도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여호와의 법도를 따라 살려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분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영적인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즉,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로 재어준 아름다운 땅이 우리 집안에 배정이 되었습니다. 그 땅에 곡식을 심어서 작물을 재배할 수도 있고 짐승을 쳐서 목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집을 지을 수도 있고 그 터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 자녀들의 후손, 그 후손들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보장된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소산과 열매로서 그들의 배를 불리고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가업을 삼으며 살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이 기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종이 무엇입니까. 당시로 말하자면 이렇게 부쳐 먹을 땅이 없어서 빈털터리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남에게 팔거나 혹은 빚을 져서 남에게 차압당하여 자유인에서 노예의 신세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땅이 있고 없고가 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엄청나게 바꿔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을 둘러 싼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호와가 나의 분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토대이며 번영의 기초이며 그 속에서 모든 가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생활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는다, 라고 할 때 이것은 언제든지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뒤져 보면 집안에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는 땅입니다. 산꼭대기 봉우리에 붙어 있는 땅, 접근할 길도 없고 지금도 아마 시가가 한 평에 몇 원 밖에 안 되는 땅입니다.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입니다’ 라고 할 때 이 ‘분깃’은 이용할 수 있고 오늘 내가 누리며 살 수 있는 유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언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언제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여호와가 아니십니까.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어 있어서 예배드려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본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나의 분깃’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정말 시련으로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폭풍 속을 지나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좌절하고 낙심된 상황 속에서도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나의 능력의 근원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나의 분깃으로 삼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주의 말씀들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잘 믿으며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그 은혜가 충만하면 그 은혜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을 만나도 그 가슴 아픈 고통 보다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훨씬 크기 때문에 이상하게 하늘의 힘으로 그 시련과 고난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류에 빠질 것 같은 위험한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지치고 고통스러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생활은 그저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편하게 자는 시간에 기도해야 하고 남들이 자신의 마음을 방치한 상태에서 상실한 자가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휩싸여 우리의 마음이 불안해 질 때에도 우리는 주님을 꼭 붙들고 그 하나님께 자신을 부탁하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한숨 쉴만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찬송하면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살도록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순종하고 우리 자신을 다그치는 삶 한 복판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충만히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이 되십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가 아주 많고 복잡한 것 같아도 결국 마지막의 결론은 우리가 그 하나님, 여호와를 충분히 누리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거기에서 모든 자원의 고갈의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통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다시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며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헌신하지 않았던 것, 주님이 내게 주신 많은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거기에 헌신하지 못하였던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나의 분깃이 되셔서 내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3 (2014.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악인들의 줄에 얽혔을 때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61)
녹취자 : 김세나
61절에 가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일 때에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토로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악인들도 복수이고 줄도 복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인들의 많은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에 비유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번제단에 올릴 때, 그 제물을 묶습니다. 단에 묶어서 그 제물이 떨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묶어서 그것을 불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죽음, 희생, 이러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 시인을 비롯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없는 전쟁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제 전쟁에서 포로된 사람들이 포박되어서, 전쟁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이러한 광경도 많이 보았을 것이고, 꼭 전쟁 때가 아니더라도 범죄하고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해 체포되어서 그 줄로 묶여서 끌려가는 범죄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쨌든 그러한 줄에 묶여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붙잡히기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좋은 뜻을 따라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이렇게 붙들려 밧줄에 포박하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시인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119편에서 많이 거론하는 것으로 볼 때에 악인들의 비난과 박해, 그리고 악인들로부터 받는 시련 때문에 자신이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된 속박 받는 상태를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습니다’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또한 하나의 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줄에 얽혀있고 어쩌면 그 줄을 각 사람들이 이 시인에게 얽어맨 각각의 이유들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왜 입니까. 자신의 육신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악한 자들이 여러 가닥의 줄로 이 시인을 손과 그리고 모든 몸들을 묶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인의 마음이요 영혼이었습니다. 몸은 속박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롭게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을 대할 때에 그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이 시인은 마치 여기가 옥중인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서 주께 감사하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온 몸은 줄에 얽어 매여 있고 어쩌면 투옥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속하고 지체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제 속박 받는 가운데서도 한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 이 시인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줄에 얽매여 있었던 것처럼, 결국 이렇게 사람들이 시인을 밧줄로 동여 맨 것은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밧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환경적으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에 많이 연루되어서, 그래서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저런 일들로 연루가 되어서 우리들이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과의 잘못된 거래 관계에 매여서, 결국엔 처음에 발을 들여 놓을 때는 자신의 의지로 들여놓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그 얽어맨 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 이러한 상황,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이러한 관계가 되었을 때에는 손쉽게 우리가 거기에서 헤쳐 나올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악인들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때 이렇게 눈에 보이는 줄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악한 습관이나 혹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습관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마다 우리를 어떻게 떼어 내어 보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마음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몸더러 명령을 하면 참 잘 듣습니다. 발을 올려라. 팔을 내려라. 이제는 걸어가자. 이제는 밥을 먹어라. 이제는 누워라. 우리의 마음이 명령하면 우리의 육체는 잘 순종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착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 쪽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나를 스스로 주인삼은 삶을 살려고 하는 그러한 것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온전하고 선한 마음이 악한 마음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잘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병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안에 있으면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의 욕심에 얽매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갈라지고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분열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성공과 모든 것이 보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선하게 살자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자기를 주인삼은 삶을 살려고 애쓰며 살아가려고 그렇게 몸부림 칠 때, 수많은 분열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속에서 인간이 어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은 순수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모든 만물들을 사랑할 때 자신은 마음의 찢어짐과 갈라짐 없이 하나님과 일체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행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악인의 줄이 얽혔을 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에서 ‘법’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토라’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 두 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오경에 기록한 모든 율법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토라,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책은 모세가 썼다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권위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성경은 서서히 장구한 세월을 두고 완성이 되어 갑니다. 시인이 다윗이라면 10세기 때의 사람이니까, 그때만 해도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이 율법이 모든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이 산란하고 혼란스럽게 되면 우리는 정신의 분열이 일어나고 무엇인가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어려움에 처해서 고통을 받게 되면, 생활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화장도 하기 싫고, 쉽게 이야기 하면 가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리고 점점 자기 자신이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집중할 수 없는 정신의 힘이 모자라거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쁜 상황에 얽어 매여서 자유를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얽어 매여 있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진정한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옥중에 갇혔을 때에도 그 옥 속에서 그렇게 평안을 누리며 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던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몸은 가두었지만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히려 이렇게 삶의 상황들이 얽히고 섥혀서 우리의 마음에 자유를 앗아가면 앗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셔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을 주시면 우리는 좀 더 초연한 마음으로 우리를 얽어 맨 삶의 상황에 대해서 기도할 수 있고 이 때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인생의 위기를 넘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아니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모든 시련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을 다스리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4 (2014.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고난 중에 주신 유익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녹취자 : 김세나
성경의 역사를 보면 아주 탁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은 우리들도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후에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훌륭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처럼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믿음의 규칙들을 굳게 믿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생활의 교훈들을 생명을 걸고 실천한 사람들, 그랬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깃이 되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았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하게 최후를 마쳤다고 판단하신 사람 중에도 선하게 살아온 구석이 왜 없겠으며, 또한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다라고 해도 그 안에 왜 오류가 없겠습니까. 그러한 상대성들을 우리들이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이 일생을 살아온 그 사람을 선하고 충성스럽고 진실한 사람이었다라고 판단을 내리시기까지 그 사람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구원이라는 선물 다음으로 우리가 가장 탁월하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선물이 지식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지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올바른 예배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예배는 언제나 올바른 삶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그릇되게 살았던 자신의 생활을 회개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탁월한 말씀의 사람들을 주셨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진공 가운데서 무위도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치열한 고난 받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가운데 말씀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준다할 때 우리는 비록 그 사람보다 훨씬 낮은 지식의 수준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정말 저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그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의 지식으로부터 그저 끌어내는 것인지 우리는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의 사람으로 삼으셔서 그래서 그들을 매우 강한 자로 만드시고 그리고 믿음으로써 이 모든 세상을 해쳐 나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자신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러한 시련을 많이 당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고난의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아는 깊이가 곧 믿음의 깊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일평생 마음속에 간직했던 신앙적인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옥중서신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와 및 부활의 권능과(혹은 능력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일평생 사도바울이 찾고 달려가야 했던 비전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구나, 그것만을 안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내시고 마지막에 그를 믿어 그에게 접붙힌 바 된 모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그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위대한 능력,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 우주적인 생명과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마지막에 어쩌면 마지막 가장 높은 단계에서 깨닫고 싶어 하였던 것이 이렇게 시간 속에서 살다가 죽어도 시간을 초월하고 영원한 세계에서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지금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신비이고 또한 그 영적인 연합의 신비를 통해서 나의 고난이 그 분에게 전해지고 그 분의 고난이 나에게 전해지는 이러한 일체된 사랑과 생명의 교통입니다. 이것을 바로 사도바울이 간절히 알기를 원했고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아름다운 그 은혜와 사랑을 고난 속에 감추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고난은 싫고, 그리고 좋은 것만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순종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거역하고 살면 하나님이 이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도 고갈되고 그리고 우리의 예배와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교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공급되는 것이 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폭이 매우 크고 강력하고 생생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품으로부터 훨씬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은혜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회상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이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운 것이 고난 때문이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즐겁고 좋은 것이지, 미친 사람이 아니고야 자기의 육신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고난의 사건들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그 고난당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고난이 아니고 평탄한 삶이었더라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커다란 유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67절에서는 고난이 그의 의지와 생활에 준 유익을 노래하고 있다면 71절에서는 고난이 자신의 지성과 마음에 끼친 영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못 깨달았었는데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나니까 늘 읽는 하나님의 말씀, 늘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새롭게 다가온다면 아마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현명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당했더니 모두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에게 닥치는 시련과 고난을 영적인 각성의 상태에서 그 일이 왜 일어났고, 그것이 나의 인생에 어떠한 의미를 주며 그것이 나의 영혼의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깨달아서 자신의 영혼을 객관적으로 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는 그러한 현명한 판단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였을 때 이 시인에게 준 유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몇 해 전에 신문에서인가 잡지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자동차가 세계 인류 수준에 들어가려면 멀었다고 하면서 외국 차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아주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이제 우리는 웬만하면 내비게이션을 달면 그 다음에 기아를 백 하면 뒤의 광경이 나옵니다. 물론 안 달고 다니는 차들도 많지만 뒤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래서 얼마나 운전하기가 안전하고 편한지 모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뒤를 걸어가면서도 차가 보고 있겠지, 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뒤로 가다가 부딪히면 100% 운전자 과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기어를 넣으면 뒤만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차를 소개하면서 보여주는데, 카메라가 앞, 뒤, 옆까지 4개인가 6개가 달려 있는데 화면에 자기 차가 노랗게 나타나고 360°의 풍경이, 자동차 주변의 풍경이 360° 다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보았더니 하나하나 한 쪽만 보여주는 영상들을 모아서 중앙에서 컴퓨터로 합성처리를 해서, 마치 인공위성에서 내 차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만 보면 앞에는 누가 있고 뒤에는 누가 있고 하는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술이 여기까지 왔구나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에 몰두하면 우리의 관심은 한 군데로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한 탄탄한 기반이 없이 일에 매달리게 되면 일 때문에 영적인 생활이 방해를 받고,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 깊이 몰두하게 되면 때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완전히 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해 줘도 그 사람 역시 전체로 우리의 인생을 볼 능력이 안 되는 경우에는 충고도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보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그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다고 해서 보여주신 그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님이 보여주시면 보여주시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삶의 균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는데, 가난 때문에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돈은 안 주셨지만 우리에게 예전에 그렇게 기도하기 전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나의 신앙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서 보게 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서 온전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크고 어려운 일이 발생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할 수 없을 그 때에 자기의 교만을 버리는 경험들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도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했더니’ 다시 말해서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것이 어떤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다스리려고 할 때 앙탈을 부리고 반항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잘 깨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당신의 사랑을 느끼며 이끌리게 하실 때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일평생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생활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 쓸데없는 암 덩어리 같은 것들이 내 인생을 왜 괴롭힐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이고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묵상한다면 결국 그 고난들은 하나님의 큰 축복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2년 동안 틈틈이 써서 900페이지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한 2/5정도는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서 어떻게 하고 나니까 마치 자서전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새벽에 일어나서도 생각하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더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것을 쭉 써 놓았지만 다시 읽어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의 생애 가운데 가슴이 벅차도록,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한 큰 감격, 그 다음에 하나님이 예전에 없던 그 무엇을 나에게 영적으로 선물로 주셔서 그래서 나를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빚어 가셨던 감격이 있는 특별한 날들이 있습니다. 그 날들을 가만히 집어 보면 그 날들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고난’이라는 접시에 담겼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맛있는 음식이 ‘고난’도 그냥 유리 접시가 아니라 불판으로 뜨거운 접시에 담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글지글한 접시. 사람들은 ‘고난’이라는 접시는 싫고, 하나님의 크고 특별한 은혜라는 선물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큰 은혜, 남이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실 때에는 손으로 집어서 그냥 입에 넣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뚝배기 불고기처럼 그렇게 이글거리는 고난의 접시에 담아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따뜻한 맛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먹고 싶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마음에 깊이 우러나오지 않을 때에는 마음에 좀 없어도 일단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율례를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계속 기도하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적시면서 아, 그렇구나.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짐승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큰 고난을 통해서라도 무지한 나를 살리고 깨우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예수님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인생 길에 빛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녹취자 : 김세나
시편 119편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밤중에 길을 떠나는 모습이 이 아래에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등은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 다니는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지체 높은 사람들이 밤길을 걸을 때에는 종들이 그 발 앞에 기다란 초롱불을 비춰 주어서 발을 헛딛거나 잘못 딛지 않도록 만들어 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한 등이기 때문에 ‘내 발의 등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고 매 순간 무엇을 선택할 때에 그 말씀의 빛을 받아서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제가 하나님 말고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해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백과 실제의 삶 사이에서 말하자면 모순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보존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점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도 매우 속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가끔 은혜를 받거나 생각을 하거나 할 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참 크다, 나는 옛날에 주님을 깊이 만나서 내 인생을 아버지께 드린 사람이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나 소명 때문에 ‘이제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 바쳐졌다’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그러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린 총체적인 헌신이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부합하는 매일 매일의 실제적인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실제적인 삶이 그 고백을 뒤따라 갈 때 그 때 우리의 입술의 고백과 삶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진리에 부합한 생활이고, 그 때에 우리의 양심은 자유를 얻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들이 매일 매일 무엇을 결정하고 뜻하든지 간에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어두움 속에서 한걸음 두 걸음 발자국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발자국에 하나님의 말씀의 등이 드리워져 있으면 그러면 우리가 실족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경회 때나 아니면 무슨 큰 행사가 있을 때 아니면 큰 환란을 당하고 많은 사람 앞에 간증거리를 남길만한 그러한 사건을 겪은 후에야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을 하는 것은 그것도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와 은혜를 받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붙들려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이 주는 감화력 속에서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진리의 빛을 받지 아니하면 자기의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처지인 것입니다. 누가 그 점에 있어서 예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나를 깨우는 말씀이 있어야 하고, 나의 마음을 흔드는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가는 길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일찍 체험하였습니다. 90년대였습니다. 처음에 보았을 때 너무 너무 신기하였습니다. 기술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항공산업에서 온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97년도에 충무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 집회를 마치고 바로 부산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였습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그때 삼성 그룹에서 헬기를 운행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최 측에서 그것을 태워준 것입니다. 산꼭대기로 차를 타고 올라가니까 헬기가 와 있는데 손님이 저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혼자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5만원인가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계산도 안 나올 텐데 미래에 그렇게 국내 단거리 라인이 많이 생겨나게 되면 선전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와서 타고 가는데 그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 빨간 줄로 쫙 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날아가니까 파란 줄이 나오는 것입니다. 20분인가 걸려서 날아갔는데, 비행기가 옆으로 가면 파란 줄이 빨간 줄 옆으로 갑니다. 이렇게 돌리면 다시 파란 줄로 겹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을 완벽하게 똑같이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가려고 애쓸 뿐이지 풍파와 사연이 많은 현실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이탈하고 때로는 아는데 그렇게 살 힘이 없어서 이탈할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일부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알면서 이탈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만약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이 길이라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제시가 없다면 우리가 거기에 다시 그리로 돌이켜서 합치할 수가 있을까. 또한 그 길이 우리에게 알 수 있도록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그렇게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마음이 장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분이 저에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지만, 일단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동해 쪽에서 최전방 쪽에서 보초를 섰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군대가 많이 나아졌지만 아주 옛날이니까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그랬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예수 믿는 청년인데 군대를 가서 얼마 안 되는 신병 때인데 고참이 오더니 ‘이번 주에는 네가 고추장과 김치를 조달하는 당번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밤중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고추장과 김치를 훔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당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훔쳐오면 거기 모여 있는 분대원들이 한 주 먹고 그 다음에 또 가서 훔쳐오고. 그런데 고추장을 항아리 째 들고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덜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는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인인데 어떻게 훔쳐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랍니다. 미리 가르쳐 주었더라면 집에다가 편지를 해서 고추장과 김치를 보내달라고 하면 집에서 아무리 그때가 어려워도 아들이 거기에서 고생을 하는데 안 해 주겠습니까. 복잡한 절차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신병이 교대로 부쳐오면 검열단에서 볼 때 어떻게 돌아가면서 집에서 고추장과 김치를 가져오는가, 분명히 고참 누군가가 시켰겠구나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결론은 뭐냐 하면 내가 배트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훔치는 것은 못 하겠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지혜를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안 가고 낮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추장이 있을만한 집에 가서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아주머니, 정말 죄송한데요. 저희들이 여기에서 보초를 서는데 고추장이 너무 먹고 싶은데 군대에서 고추장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아주머니가 손을 꼭 붙들더니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아. 우리 아들도 군대 가서 서해안에서 근무를 해.’ 그러면서 퍼주는데 이 집에서 얻고, 저 집에서 얻으니까 훨씬 더 맛있고 많은 고추장과 김치를 잔뜩 얻어서 가져오니까, ‘너 임마, 이렇게 많이 훔쳐 오라고 그랬어?’ ‘훔쳐 온 것이 아니라 가져 온 것입니다’ 했는데 아주머니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웃으면서 그러더랍니다. 요새 밤중에 누가 와서 자꾸 고추장을 퍼 간다고, 아무래도 독을 다른데다 옮겨서 숨겨야 되겠다고. 다 알고 웃으며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본인에게는 충격적이고 은혜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 결국 상황이 안 돼서 순종을 못 한다고 하는 말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순종하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21살 때 회심을 하고, 그 때는 기도원들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삼각산 꼭대기에 불법 건물로 지은 기도원이 있었는데 몇 번 이야기 한적 있습니다. 새검정에서 버스에서 내려 직장에서 퇴근하고 올라가는데 후레시를 가지고 올라갔는데 1/3쯤 올라갔는데 이게 불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믐이었습니다. 캄캄했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 10분 내지 30분이면 걸어가는 산길이었는데, 젊었을 때 힘이 넘치니까 단숨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길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한참 걸어가 보면 낭떠러지가 나오고 한참 걸어가 보면 얼음절벽이 나오고, 산속에서 3시간 반을 헤맸습니다. 중간쯤 올라갔는데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기운이 다 빠지고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면서 3시간 반 만에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기도원에 마침 사람이 있어서 이 후레시도 없이 어떻게 올라왔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밤새도록 바위 위에서 기도를 했는데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한 1시간 기도하고 들어와서 30분 녹이고 가서 1시간 기도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말 ‘내 발에 등이요’라는 이 말을 어린 나이에 절실하게 실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살면 우리의 인생길이 이렇게 1시간 10분이면 올라갈 이 산을 3시간 30분 동안을 온 몸이 흠뻑 땀에 젖을 정도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 우리의 인생길도 이렇겠구나. 그래서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한 주일학교 학생이 자기 엄마의 일상에 대해 소개하면서 항상 설교 테이프를 싱크대 위에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그 다음에 엎드려 물걸레질을 하면서 설교를 듣고 그러한 모습을 흉내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확실한 것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는 사람들보다 삶이 낫습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2번 3,4번 안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즉시 돌아옵니다. 오전에 한번 고치고 오후에 고치고, 밤에 한번 고치고 그게 옛날에 성현들이 이야기 했던 일일삼성이면 그 마음이 명경지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람과 1년이 지나도 한 번도 고치지 않을 때 이 마음이 이탈하는 정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애를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은혜 말고도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에 은혜의 단비로 적셔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감화가 매일 매일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대조해서 뭐라고 나왔는가 하면, ‘내 길의 빛이니이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큰 빛 덩어리를 가리킵니다. 길이 쭉 나 있는데 큰 빛이 환하게 비취면 저 먼 길이 저기구나라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내 발의 등’이라는 것이 매일 매일 무엇인가 결정하고 살아가는 작은 선택들의 연속이라면 ‘큰 길’은 내 인생이 가는 방향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업을 하는데 그 사업이 전혀 하나님이 동의할 수 없는 사업입니다. 누군가가 자기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면서 축복해달라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다단계였습니다. 다단계 중에서도 아주 불량한 것이었습니다. 통장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여기에 돈을 맡기면 매일 1%의 이자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증거를 보여주는 통장을 쭉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100만원을 맡겼더니 매일 1만원씩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서 자기가 이것을 모집해서 하면 그 회사에서 돈을 많이 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그 나이가 되도록 어리석으냐. 그 사람들이 그것을 자본을 모아서 매일 1%씩 이자를 넣어주면 그것이 바로 달러 이자 아닙니까. 100일이면 그 돈만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 이것 100% 사기다. 100만원 이니까 1만원씩 이자를 넣어주지 만약에 여기에다가 10억을 맡겼다면 매일 1천만 원씩 여기에 넣어주겠느냐고 하였더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지, 당장 집어치우라 하였습니다. 결국 투자 모집한다고 돈을 줄 사람도 없지만 그 푼돈이라도 100만원씩 그 통장을 보고 그렇게 해서 얻어 가면 일정 금액이 되면 그 돈을 먹고 도망가지 그것을 너한테 수수료를 주겠느냐. 어쩌면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자, 그런 사업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올바른 선택을 합니까. 할 수도 없거니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길 자체가 하나님이 동의하시는 길이 아닌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매일 매일의 선택이 올바른들 그 길로 가기 위한 선택인데 그게 하나님의 인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매일 매일의 삶, 그리고 이 사업을 내가 가는 이 인생의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의 가는 어떠한 길을 올바르게 목표를 정한다고 할지라도 매일 매일 마음이 그 목표를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받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보면 기도는 많이 하는데 말씀의 빛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빛이 없는 사람이 오래 기도하고 응답받은 것 보다는 말씀의 빛이 있는 사람이 기도 안 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도 기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이제 살길이 막막한데 하나님 직업 하나 주십시오’ 어디서 가서 거지 깽깽이 같은 것을 사업이라고 들고 와서 목사님도 여기에 투자를 하시래, 내 얼굴을 봐라 내가 바보냐 거기에 투자를 하게. 어쩌면 그렇게 분별력이 없을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서 쉽게 돈을 버는 것은 대부분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내 손이 수고한대로 먹으리라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보면 일 조금 하고 돈을 많이 받는 직장을 구하려고 합니다. 탐욕입니다. 탐욕. 그러한 사람들이 탁월한 능력이 있는가 하면 별로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결국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지 않습니까.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환한 빛이 어두운 길을 비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조명탄을 생각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굉장합니다. 몇 발만 쏘면 진짜 쥐새끼 걸어가는 것까지도 보일정도로 환합니다. 캄캄해서 어디가 길인지 산인지 알 수 없을 때 조명탄이 터져서 서서히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환하게 비췹니다. 아, 저기가 길이구나. 그러면서 그쪽 방향으로 갈 길을 잡으면 그것이 안전한 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매일 매일 마음에 담그며 은혜를 받고 단련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삶을 산다면 주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에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살린 하나님의 말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