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성과 복음의 비밀 1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서 7장 10절)
오늘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오전에는 그 목회자의 목회와 학문, 신학생들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염두를 두고 목회자들이 어떻게 스터디해서 설교강단을 풍성하게 하고 자신의 성화의 삶을 위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오전에 하고요.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는 목회자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 공부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많은 지도자가 나오는데요. 이 에스라라고 하는 사람은 포로 귀향시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포로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에 고레스의 종교정책으로 이제 호의가 베풀어진 것이죠. 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지도자로서의 여러 가지 특성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대표적으로 꼽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의 리더쉽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꼽고 싶은 것은 순결입니다. 순결. 그래서 9장과 10장으로 넘어가 보면, 사람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벌써 이방 여인을 취하고 죄를 짓고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가슴을 찢으면서 아파하는 장면이 일어나고 그것이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지요. 그런 점에서 아주 순결한 지도자였고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철저한 말씀중심의 리더쉽이었어요. 그것이 오늘 여기에 나오는데 이 사람이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까, 사실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엄밀한 의미에서 그렇게 돌아오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해야 했으니까 이 사람이 사실은 단순한 어떤 선생으로서의 기능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치가로서의 기능을 더 많이 강요받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이 사람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기로 한 것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 둘째는 스스로 그것을 지키면서 행하는 것, 세 번째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서를 보면서 목회자인 우리는 이 순서가 참 예사롭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목회를 하면서, 평신도들이 여기 있어서 좀 껄끄러우네요. 하하하. 그렇지만 할 수 없지요.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우리 목회자들끼리 가만히 얘기를 해 보면, 사실은 대부분 말씀에 대한 고민, 그럴 때 설교꺼리에 대한 고민인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평신도가 고개를 끄덕거리면 안되지. 목사님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면 목사님이 얼마나 무안하겠어. 그런데 하여튼 실질적으로 보면 그렇거든요. 그래서 말씀에 대한 관심사가 다분히 설교를 하고, 아주 현실적이잖아요.
제가 어느 기도원을 갔는데, 다 쓰러져 가는 아주 작은 기도원이었는데 밥을 먹는데 저 옆에서 그 기도원에서 밥을 해 주는 어느 여자 집사님하고 목사님하고 둘의 대화에요. 난 여기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고. 한 50쯤 넘어 보이는 목사님이었는데, 시골 교회 목사님이었던 것 같아요. 부티나 보이지는 않고 좀 가난해 보이는 목사님이었어요. “아휴 목회 힘들어서 못하겠어.”, 그러니까 집사님이 밥을 퍼주면서 “왜요? 뭐 힘든 일 있으세요?” 그러니까, 아는 사이인 모양이에요. 목사님 하는 얘기가 “아휴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집사님이 “아니 목사님이 되셔가지고 설교하기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요.”그리고 밥을 뜨고 국을 뜨는데 목사님이 “아니 말이지 설교하는 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와. 밤새서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 먹고, 죽어라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 먹고, 또 죽어라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먹고, 아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휴 말씀 전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집사님이 “아니 목사님이 말씀 전하는 게 일인데 그게 힘들다고 그러시는데 그럼 의사가 환자 보는 게 힘들다고 하는 거지. 목사님 좀 문제가 있네요.” 그런데 그 분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게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에 대한 관심, 그럴 때 그 자체가 내가 빨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빨리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 또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가르쳐 줄게 너무 없고 궁핍해지니까 어디서 가서 좀 들어서 이것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 주워다가 저 사람들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렇게 나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말씀 주워다가 저 사람 주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에스라는 여기서 뭐라고 그래요? 말씀을 연구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뭘 위한 거예요? 자신이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연구를 하는 거예요. 그 결과 그 말씀이 소화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 가끔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엄마가 있잖아요. 그 엄마가 입맛이 없다고 하면 옆에서 대개 뭐라고 그래요? 어른들이 “아, 이사람 그러면 안돼. 아이 생각해서라도 먹어야지, 먹어야지.” 그러면서 먹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아이 생각해서 먹는다기보다는 자기가 맛이 있어서 먹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몸을 위해서 삼겹살도 먹고 된장국도 먹고, 미역국도 먹고, 김치도 먹고 생선도 먹고, 이렇게 맛있는 것을 계속 먹으면 그러면 그것이 엄마에게 소화가 되어서 젖이 꽉 차잖아요. 그러면 아이에게 이렇게 먹여야지, 그게 몸에 삼겹살도 좋고 멸치는 칼슘이 많고 뭐 이렇다고 해서 그것을 갓난아기한테 먹일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 혹은 말씀과 관련된 공부를 우리들이 해 나간다, 그럴 때에는 항상 실용주의적으로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목회자인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방법으로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일생동안 공부해 나가야 하겠는가, 하는 것들이 방향이 정리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 거죠.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어디서 뭘 듣고 그 다음에 와서 갖다 놓고 이것은 괜찮은데, 이것은 전부다 인스턴트에요. 그래서 만약에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약을 즉각적으로 어느 하나만을 고려해서 머리 아프니까 이 약 먹고 관절이 쑤시니까 저 약 먹고, 위가 나쁘니까 이 약 먹고, 이렇게 종합적인 몸에 대한 이해도 없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약을 먹다 보면 약과 약이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커다란 질병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마찬가지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렇게 쉽게 자기 사상도 아닌 것을 어디서 쉽게 배워서 월요일에 배워서 수요일에 갖다 주고 목요일 날 배워서 주일날 갖다 주고 하는 식으로 이렇게 산발적으로 하다 보면, 그것이 다 교회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수 없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충분히 소화되어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자기를 변화시키고 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자기화 된 것으로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또 다른 말씀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사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잖아요. 그런데 그 복음을 내 복음이다, 라고 했거든요. 내 복음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내가 받고 그것대로 생각하고 살고 은혜 받고 변화되어서 내가 그것을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쏟아놓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둘 사이에 사도바울에 의해서 소화되었다고 하는 특징은 있지만, 사도바울이 소화되어서 사도바울의 인격을 입혀서 밖으로 토해낸 그 복음과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의 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자신을 깊이 소화시키고 한 그런 거죠.
여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은 참 재미있어요. 제가 목회자 세미나에 부지런히 불려 다닌 단골 강사중의 하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안나갔어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뭐냐 하면, 목회자들을 모아 놓고 세미나를 하면, 들으려고는 모이는데 자기가 변화되고 싶은 사람은 안 모여. 관심 자체가 내가 저 강연을 듣고 내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얘기를 한 번 해 보면, 내가 그 중에서 골라서 교회에 갔다가 이번 주에 쓰겠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회자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의도하는 그런 것들이 안나오는 거거든요.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자기의 것으로 소화를 해야 하는데 이 에스라가 그런 절차를 밟았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해서 쓰려고 하면 안 된다 이거죠. 참 재미있어요. 제가 신학교에서 한 9년 동안을 교수생활을 했는데 신학교 때 그렇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 공부 안 해요 학생들이. 그래가지고 그냥 저냥 해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요. 목회지에 가잖아요. 목회지에 가서 그냥 유격훈련 하듯이 정신없이 전도하고 목회해가지고 한 100명쯤 교회가 자리를 잡아요. 그럼 한창 목회에 전념해야 할 때잖아요. 그런데 그 때 가방 들고 공부하러 다닌다 이거에요. 공부하라고 할 때에는 목회하고 목회에 전념해야 할 때에는 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월요일에 하루 쉬는데 그 고단하게 일주일을 보내고 하루 쉬는데 쉬지도 못하고 가방 들고 여기가고 저기가고 그런다 이거죠.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또 화요일부터는 사역을 해요. 왜 그러느냐. 목회자가 부지런해서도 그렇지만,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이 교인이 한 100명쯤 넘으면서 이제 나름대로 한계를 느끼니까 그러니까 지적인 한계를 느끼니까 무엇인가 목회에 도움을 받을만한 것을 찾고 싶어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이 대부분 세미나를 한다든지 아니면 무슨 커다란 목회자들을 위한 conference가 있어서 간다든지 하면 제가 보기에는 조금 불만인 것이 뭐냐 하면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면, 말씀의 샘이 무한히 쏟아져 나오거든요. 그런데 목표 자체가 목회자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정보를 얻어 가는 것으로 자꾸 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관심사 자체가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는데 연구하는 목표 자체가 내가 어떻게 율법을 잘 준행해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율법을 더 잘 지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게 에스라의 관심사였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살게 될 때에 비로소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가지고 있었던 거라 이거죠. 그래서 우리도 이 모본을 따라서 공부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거죠.
오늘도 제가 오면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만, 그런데 실제로 목회를 하고 보니까 말이죠. 무게 있는 책을 잘 안 읽게 되요. 너무 부담스러워지고요. 저는 그래도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신학교에서 선생을 9년이나 했고, 했는데도 무게 있는 신학 책을 펴서 목회하는 와중에서 시간이 틈틈이 날 때 묵직한 책을 펴서 읽으면서 신학을 다시 생각하고 최근에 나오는 신학적인 논증 같은 것들을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굉장히 안 된다는 거죠. 그 안 되는 이유가 뭔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더니 몇 가지 이유가 있더라고요. 첫째는 시간적인 요인이에요. 무게 있는 책들을 읽으려면 장시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그래야지만 하나의 논지를 이해할 것 아니에요. 논문 하나를 읽는데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에도 다 못 읽을 수 있단 말이죠. 생각할 게 많으면. 더군다나 그것이 원서이고, 두꺼울 경우에는 일주일 읽어도 못 읽을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공부가 자꾸 끊어지는 거야. 학교 다닐 때는 몰두할 수 있는데. 심방 나가야지, 또 돌아와서는 회의 해야지, 그 다음에 또 원고 써야지. 이러니까 틈틈이 읽는 사이에 자꾸 끊어져서 며칠 읽다보면 앞에서 뭔 이야기 했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시간적인 문제가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냥 가벼운 책을 읽으면 예화거리라도 나오니까 다음 주일에 써 먹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전문적인 것이니까 당장 써 먹을 수가 없어요. 언제 써 먹을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의 것은 읽으면 금방 표를 낼 수 있는데 뒤의 것은 읽어도 당장 써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설교 준비가 막 밀리고 그럴 때에는 책 읽는 것과 설교 준비하는 것이 같이 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자연히 할 수 없이 묵직한 책들은 자꾸 멀리 밀치게 되고 가벼운 책들을 읽게 되는 것이죠. 아주 심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남의 설교집을 막 읽는 거예요. 남의 설교집을 읽는 건 문제가 없어요. 남의 설교집을 읽고 은혜를 받고, 설교집 덮고 성경을 펴고 그 다음에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다시 설교 원고를 쓰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그걸 그냥 찢어서 가지고 올라가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웃는데 실화에요. 누가 그랬는지까지 내가 얘기할 수 있어요. 한국 교회에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에요. 부흥사로 널리 알려지신 분인데, 직접 목격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그 사람 손에 들려있던 원고가 또 한국 교회 어떤 목사님의 설교집이었어요. 너무 시간이 없으니까 면도칼로 잘라 가지고 올라간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한 장이 떨어졌어요. 흘리고 가신 거죠. 그런데도 그 분은 설교를 워낙 많이 하셔서 재능이 있으셔서, 듣는 모든 사람이 그 책을 다 읽었겠어요. 그런데 자기 설교처럼 했으니까 다행인데 표현도 제대로 못해서 버벅 대면 다 탈로가 나잖아요.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자기 자신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이 단지 설교하는 기계가 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더 재밌는 건 말이죠. 인터넷에 설교들이 많이 올라와 있단 말이죠. 인터넷에 설교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요. 그 정도가 아니고, 한 만 편정도 들어있는 그런 CD롬 팔아요. 그거 갖다 놓고 ‘사랑’ 치면 사랑 설교가 쫙 나와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 따오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토요일 날 눌러서 쫙 출력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렇게 되면 교회도 죽고 한참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죽어요. 그래서 한 5년, 10년을 설교했는데, 자기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하면서 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이게 한 사람 것만 베끼면 일관성이 있는데, 그게 안 되잖아. 이 사람 것 좀 쓰다가 또 저 사람 것 좀 쓰다가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사상이 좀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는 하고 잊어버렸는데, 들은 사람들 중에서 이게 사상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거야. 실제로 어느 교회에서는 열심히 노트 필기하는 교인이 있었는데 들고 와 가지고 목사님한테 항의를 한 거예요. 1년 전에는 요 부분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왜 이번에 설교할 때에는 완전히 두드려 엎었느냐. 그런데 이 목사님은 옛날에 한 걸 잊어버린 거죠. 교인들이 설교 시간에 적는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증거를 남기는 거라고. 더군다나 요즘은 비디오까지 있으니까. 다 보고 앉아 있잖아요. 그렇게 되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겨나냐 하면, 설교하는 것 그 자체가 단순한 기능이 되어버리고 설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설교자의 삶과 실제적인 고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이 속에서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거기서 이렇게 길어 올려지는 것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설교가 장난이 아니잖아요. 솔직히 한달에 한 편 준비하는 거라고 하면 어떻게든 해 보겠어요. 그런데 네 편이에요. 제가 한 주에 설교를 새벽기도 하는 것은 빼고 주일 1부, 2부, 물론 이건 같은 설교지만, 주일 오후, 수요 예배. 이렇게 해 가지고 설교를 네 번을 한다, 이거에요. 직원 예배가 있으니까. 다섯 번을 설교해요. 그것을 준비할 때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그걸 하고 나면 다른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도 바쁜 일정 속에서 성실하게 말씀을 준비하는 목회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교회 목사님 방에는 항상 ‘설교 준비 중’ 이라고 걸려 있어요. 실제로 전화를 해도 목사님 설교 준비 중이시래. 그러니까 이거는 보통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어떻게 공부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것까지 우리들이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뭐냐 하면, 목회자가 되기 전까지는 책들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목회자가 될 소양을 닦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목회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저처럼 이렇게 늦게 결단하지 말고 좀 일찍 하나님을 만나고 결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소한 고등학교 때쯤. 결단을 하고 그게 늦으면 대학교 1,2 학년 때쯤 결단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신학 대학원에 가기 전에 최소한도 한 4년 정도를 확보하고 독서 계획을 세워서 그 때에는 신학 말고 비신학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그 책들이 신학을 연구할 때 기본학문으로서 바탕이 될 수 있는 그런 책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역사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철학, 문학, 인류 정신사에 영향을 준 문학,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그런 문학들을 읽고 그 다음에 사회학이나 사회에 관한 것들, 최근에 현대 사회의 지성을 대변하는 그러한 아주 현대적인 책들을 읽어가면서 그러면서 광범위하게 공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언어 같은 것들을 공부해서 이제 자기가 신학을 공부하려고 할 때에 신학적인 지식들을 섭취하는 도구로서 언어 같은 것들을 습득하고 그리고 더 한편으로는 성경을 오리지날 텍스트로 읽을 수 있도록 히브리어와 히람어, 그리고 아랍어들을 공부해서 오리지날 텍스트들을 다룰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준비를 한 다음에 그 다음에 대학원에 가서 한 번 더 좁혀서 그래서 안쪽으로 들어 온 책들을 읽고, 신학의 공부를 더 해 나갈수록 광범위하던 독서의 폭들이 이렇게 이렇게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좁아져서 그 다음에 목회자가 된 다음에는 독서를 좁게 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지론이에요. 그러면 이상하다. 독서를 폭 넓게 하라고 하는데. 물론 독서를 폭 넓게 하는데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폭을 넓히려고 욕심을 부리게 되면 이제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연구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공부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목회를 해 보시면 알겠지만 공부하기 위해서 목회자가 뽑아 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제한적이에요. 그런데 그 때에 겨우 소설책 같은 거나 읽고 있고, 잡지 같은 거나 읽고 있고 그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전혀 학문을 통해서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그런 발전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거죠. 그래서 저는 책을 많이 사는 편이에요. 1년에 한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의 책을 사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사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그래서 일단 새로운 책이 들어오면, 아직 번호표를 분류하기 전에 서재가 있는데 서재의 책들을 전부 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서 도서관처럼 분류를 해 놓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거 가지고 부족해서 책을 열면 나오는 목차 있잖아요. 원서도 있고 한글 서적도 있습니다만, 목차를 입력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만약에 ‘이혼’ 이라고 탁 치면 이혼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 지금 서가의 어디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다 찾아낼 수 있도록 그렇게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저 한 만 권정도 되는데도,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책이 들어오면 목차를 보면서 어떤 것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보고 흥미 있는 부분은 체크를 해 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읽어요. 부분적으로. __?__책을 볼 때에 이제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서 저는 이제 그 책을 다루는 거예요. 첫째는 뭐냐 하면 화장실에서 읽는 책, 화장실에서 이제 볼일을 보면서 읽고, 그 시간이 너무 집중이 잘 되니까요. 읽고, 그리고 밥 먹으면서 옆에 이렇게 놓고 읽고, 그런 책들. 그런 것들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그런 책들이죠. 그 다음에 두 번째 부류의 책들은 쉴 때 읽는 책들. 공부하다가 너무 지칠 때에 쉬면서 읽는 책들. 소파에 이렇게 기대거나, 아니면 공부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 읽는 책. 그런 부류를 놔두고요. 아니면 차를 타고 읽다가 덮어두고 다음에 읽어도 문제가 안 되는 그런 책들. 그런 책들은 대개 사회 현재의 돌아가는 얘기든지, 그런 것들이에요. 그래서 안 읽는 건 아닌데 그것이 주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거죠. 그럴 시간이 없다 이거죠.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진짜로 정자세로 앉아서 읽어야 되는 책들, 그것이 이제 세 번째 부류의 책들인데 그런 책들은 신학적인 책들이죠. 그런 책들을 세 분류로 해서 그렇게 책을 다룹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항상 좁은 독서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그것을 너무 오해하진 마시고 이제 한 가지에 접근을 해서 읽어야지만 실제적인 그 목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대개 이거에요. 바이블이에요. 바이블. 성경 읽고 그 다음에 출발을 이 바깥에서 아무거나 읽어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고. 여기서 에스라가 이야기 한 것처럼, 그 성경을 잘 준행하며 살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에 성경이 필요한데 이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책들을 먼저 읽어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나가는 거지요. 그 다음에 이것을 이해하다가 보면,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 읽어야 하는 책들이 나오잖아요. 그렇죠? 이렇게. 그럼 또 이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책들을 읽게 되지요.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보면, A에 들어가야 할 책들이 뭔지를 이해하게 돼요. 그 다음에 이것을 잘 읽다가 보면, B에 들어갈 책이 어떤 것인지 알게 돼요.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뭘 더 읽어야 할지 알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읽다 보면 C는 어떤 부류가 되는지를 잘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거냐 하면 능력 닿는 만큼 바깥으로 원을 그리면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남는 것은 이거에요. 성경이 남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요. 아니면 이런 데서부터 아무렇게나 시작을 해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성경으로 안 돌아오고 길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설교는 항상 허탕이야. 그리고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공부를 하는 게 목회에 방해가 되는 거예요. 목회를 하니까 공부가 방해가 돼. 왜 그러냐 하면 공부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야. 그래서 항상 비교하고 비판하고 분석하는 이것을 갖게 돼. 그런데 목회는 이해하고 포용하고 끌어안아야 해. 그러니까 마인드 자체가 공부 마인드하고 목회 마인드가 좀 다르다 이거에요. 그래서 교수 많이 하던 사람들이 목회를 잘 못해요. 그리고 목회를 잘 한다는 사람들은 교수를 잘 못하고요. 그러니까 그런 갈등이 있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자꾸 방해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출발 자체가 항상 성경으로 출발을 해서 성경에 관한 길을 가야해요. 오늘날 제가 대학원에서 설교를 가르쳤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를 보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설교 속에 목사님들이 성경을 연구한 흔적이 너무 안 나타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성경구절을 하나 읽고 어쩔 땐 하나가 아니죠. 이만큼 읽고 이것을 읽으면서 하나를 생각하는 거야. 뭐야 이거. 어, 축복이구나. 이 전체에서 하나 탁. 축복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미 벌써 이것을 연구하다 결론을 낸 게 아니라 축복을 그 날 설교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맞는 성경구절을 찾아 낸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는 축복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느 한 구절을 찾은 다음에 그 단어는 성경하고 별로 상관이 없어. 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해 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은 A라는 텍스트를 선택했어요. 몇 주후에는 B라는 텍스트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여기서도 축복이었어요.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어차피 이것을 연구를 해서 이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본문은 다르지만 여기에 나온 이 결과는 이게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으로 설교해도 축복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창세기를 읽었든지 에베소서를 읽었든지 이거는 몸통은 상관없이 결론은 언제나 똑같아. 예화만 살짝 살짝 바뀌는 거지.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설교를 억수로 많이 들었는데 성경을 읽는데 그 설교들이 별로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안 주는 거예요. 여러분 정상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배추 심는 법이 있는데 뭘 하든지 간에 한 주일에 60분씩 세 시간 동안을 배추 심는 법을 배웠다면 1년 정도 듣고 나면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져야 될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죠. 왜냐 하면 배추 심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테니까. 별로 가슴에 안 다가오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이해 가세요? 그러니까 제 얘긴 그거에요. 만약에 설교자가 설교하기 위해서 읽은 성경의 구절을 해석해야 되겠다, 라는 의지를 가지고 그 연구를 통해서 설교를 했다면, 이게 1년 들으면 벌써 설교를 150편을 들은 거예요. 그러면 150개의 성경구절에 대한 꼼꼼한 해석을 제공받은 것이죠. 10년이면 1,500개의 한 절씩만 설교했다고 그래도 1,500절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가져온 거죠. 그런데 성경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성경 자체가 각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 66권이 unit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을 들으면 다른 성경 구절에 대한 이해의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해될 수 있죠? 아니 어느 구절을 해석을 하다가 믿음이라는 걸 제대로 해석을 했으면 그 다음에는 성경 전체에서 믿음이 뭔가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다면 10년이면 1,500구절, 30년이면 4,500, 거의 5,000구절의 성경을 꼼꼼하게 해석된 결과를 제공 받았을 거 아니에요.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성경에 대한 이해가 놀랍게 빨리 진전된다고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러느냐 하면, 거의 안 그런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30년 예수 믿고 예배에 거의 안 빠졌는데도 성경 순서도 모르는 사람 많아요. 어떤 목사님이 가만히 오래 믿은 집사님들이 많은데 “구약성경 히스기야서 제 8장에서 보겠습니다.” 그랬대요. 열심히 이 집사님들이 히스기야서를 찾는거야. 그 예화를 했더니 웃지도 않는 집사님들이 많더라고.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니까 이게 안 이루어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항상 독서의 관심사가 성경이어야 해요. 성경. 제가 존경하는 은사님 가운데 김 희보 교수님이 계셨어요. 총신대학교 총장도 하신 분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저희 교회도 몇 번 오셨었는데, 그 분의 성경책을 보면 가장자리에 새까맣게 기록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러면 가서 읽어보면 신학 서적들의 이름과 페이지에요. 깨알같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항상 관심사가 자기네들 신학자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에 관심사가 있는 게 아니라 거기서 성경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신학적인 결론을 성경 옆에 써 놔요. 그렇게 해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이 구절이 뭐더라’ 하면 그 신학 책을 찾아 가는 거예요. 그래서 펼쳐보면, 도움을 주는 내용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을 전문적으로 한 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굉장히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오히려 신학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성경에 관해서 뭐라고 하는지를 잘 캐치를 하면 그 읽고 이해하는 노고를 많이 지불해야 하지만 상당히 묵직한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이 많다 이거죠. 그런데 만약에 성경과 단절되고 나면 계속 학자이름만 생각나는 거야. 그리고 그 학자가 이야기하니까 저 학자가 깨부수었고, 깨부순 그 학자 (말이 끊어짐)
희기본 소장실이 있습니다. 아무나 못 들어가죠. 거기 들어가 보면 1,700년대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쓰던 성경책이 있어요. 그 성경책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성경을 다 뜯어버렸어요. 다 뜯어가지고 창세기1장 놓고 백지 한 장 놓고 2장 놓고 백지 한 장 놓고 이렇게. 성경이 두 개가 되겠죠. 그죠 그래서 그것을 다시 묶었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탁월한 학문적인 생각들, 다른 성경과의 연관, 이런 것들을 깨알같이 거기다 적어 놓은 거예요.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들 이해한 것들, 적어 놓은 거예요. 그 분량을 본 사람이 쓴 글을 읽었는데 어마어마하고 우리가 읽으면서 아무 뜻도 없는 것 같은 성경구절 속에서 엄청난 내용들의 진리를 이끌어 내더라 이거죠. 만약에 살았으면 그것이 몇 십 권의 책이 되었을지 모를 정도의 분량. 그 양반은 어느 정도냐 하면 예일 대학을 나왔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지독하게 공부를 했어요. 워낙 천재이기도 했지만 세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대요. 사물을 보면서. 여섯 살 때 자연 과학에 대한 논문을 썼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여덟 살 때는 유물론에 대한 논문을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죠. 그리고 열세 살 때에는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를 섭렵하고 그리고 예일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서 4년 뒤에 졸업할 때에 졸업생 대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연설을 라틴어로 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2년 뒤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얼마나 명석했느냐 하면 언제나 외출할 때면 여기다 메모지를 넣고 핀으로 탁 꽂고 그리고 나서 출발을 하는 거예요. 말을 타고 가다고 뭔가 생각이 나면 말을 멈추고 핀을 뽑아서 메모지를 꺼내고 거기서 적어서 다시 꽂고 갔다고 그래요. 그렇게 해 가지고 계속해서 하는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다고요? 성경이요 성경. 성경에 관심사가 있었다고요. 그래서 관심사가 성경으로 모아져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책을 읽을 때 너무 현실적인 책들만 읽지 말고 균형을 맞추어서 성경 자체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그런 책들, 그렇다고 꼭 주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책들을 신약신학이나, 구약신학, 조직신학, 교리, 성경신학, 역사,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성경을 논하거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을 메모하면서 그러면서 그 책들 속에서 내용들을 끄집어 내어서 그것이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깊이를 더해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그런 방법으로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그렇게 읽어나가는데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도 시간이 너무 없어요. 너무 없어요. 그래서 목회를 하다가 보면, 실제로 심방 다니고 하는 그런 시간도 많이 빼앗기지만, 목회를 생각할 수는 없거든요. 항상, 오늘도 제가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올해가 현재 2003년도 9월이잖아요. 2004년도 1월에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조직을 어떻게 짜고, 사람은 누구를 세워야 되나, 대책이 안 서요. 그래서 아침에도 그 생각을 하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지적인 에너지를 목회는 많이 빼앗아 가요. 그렇다고 해서 머리 떼어 놓고 목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계속 생각을 하면서 목회를 해야 해요. 에너지를 너무 많이 빼앗아 가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도 이렇게 이건 따로 공부하는 달, 이렇게 시간을 떼 놓을 수가 없어요. 공부하다가도 누가 죽었다고 그러면 빨리 달려가야 해. 아프다고 하면 심방가야 해.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시간이 자꾸 끊겨요. 그래서 보통 결심을 하지 않으면 꾸준히 계속 공부한다, 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아마 여기 목사님들은 이해가실 거예요. 새 책 한 권 사가지고 한 달 두 달씩 들고 다니다 결국은 못 읽은 적 많죠. 그렇게 어려워요.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 결심이 필요한 거예요. 지금 내가, 기가 막히게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성경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후일에는 내가 더 이상 길어낼 것이 없을 때가 올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개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베짱이처럼이 아니라. 그리고 공부하기 위해서 항상 뜻을 딱 세워야 해요. 그래서 제가 항상 나 자신을 향해 암시하기를 ‘넌 고3이다.’ 고3은 뭐든지 좋은 건 다 대학 간 다음으로 미루잖아요. 여자친구 만나고 싶어도 고3인데 대학가면 다 된다. 극장구경 가고 싶다, 고3이잖아. 고3이. “아저씨, 혹시 저기 고3하고 사람하고 같이 지나가는 거 보셨어요?” 그랬대. 그러니까 고3은 사람이 아니라 이거지. 등산가고 싶다. 고3이잖아. 그렇게 하면서 절제를 하듯이 목회자인 우리도 고3이라고 생각해 되요. 언제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고3이에요. 하고 싶은 거 천당 가서 하면 되잖아. 천당에 극장이 있겠습니까만, 천당에 가서 한다고 치고 여기서는 고3처럼 살아야 해요. 그래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그리고 항상 되뇌이어야 할 것이 ‘나는 공부해야 한다.’ 자기를 계속 암시해야 해요. 그리고 책을 읽어가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건 일반적인 이야기이고요. 이제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목회를 할 때에 진짜로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지식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요. 지금 신학적인 책들 속에 나와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에요. 예를 들자하면 요한복음이 요한이 지었느냐, 아니냐, 엄청난 논쟁이에요. 시편 89편에 나와 있는 그 신학은 도대체 어떤 신학인가, 이런 것들은 하나의 큰 논쟁이거든요. 그런데 그 논쟁들에 대한 많은 책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직접 성도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거죠. 여기는 신학교도 아니니까 교회에서 그런 거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이 출애굽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도들은 이제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박 집사, 자네가 그랬어? 출애굽기 하나님 말씀 아니라고.”,“아니, 난 그런 말 안 했어.” 그건 뭐냐 하면 옛날에 자유주의자들이 공격한 거예요. 요새는 그런 공격 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괜히 쓸데없이 출애굽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다 쓸데없는 얘기다, 그러면서 얘기하는데 성도들은 멍한 거예요. 자기는 출애굽기뿐만 아니라 레위기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갑자기 설교를 하는데 출애굽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인들 중에는 아무도 없는데. 설렁한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은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공부는 했지만 설교단 위에 들고 올라올 일은 전혀 아니다 이거죠. 꼭 필요한 공부에요. 그러나 당장에 들고 올라올 일은 없다 이거죠. 무슨 뜻인지 이해가시죠? 그래서 결국은 신학적인 책들을 많이 공부하는 것은 성경의 원래의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성경의 원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목회에 진짜 도움을 주는 어떤 지식을 얻기 위함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복음의 비밀이에요. 그래서 mistery of gospel 이라고 나오죠. 사도바울이 복음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랬잖아요. 이것은 복음이라는 비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게 아니에요. 동격이 아니라 소유격이에요. 복음이 있는데 복음에 소속되어 있는 미스테리가 있어요.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기셔서 목회를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복음의 비밀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복음은 아주 간단하죠. 복음은.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요약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범죄 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떠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고 그를 믿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구원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신다. 이게 복음이죠. 복음이에요. 복음은 심플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면 구원을 받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요. 복음을 딱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영적인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이 사람이 영혼과 육체가 있는데 영혼에는 어두움이 가득해. 그러니까 이 지성에는 눈멂으로 가득 찼어요.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주인 것도 모르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몰라. 그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지적으로 눈이 멀어 어두워졌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경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런 것들을 몰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멘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구원을 얻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그 순간 어두움이 물러가 버리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예전에는 자기 밖에 없고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메시야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내가 이제는 이 세상에 살지만 얼마 후에는 하나님이 나를 데려 가시고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내 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막 눈물이 흐르면서 회개도 나오게 되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완전히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영적인 어두움이 물러갔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복음이 그것을 가져다 준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런데 그래서 기도가 잘 되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어요. 교회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고 목사님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 없고,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는데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은 맛이 하나도 없고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으니까 기도는 하나도 안 되고 전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것이 느껴졌는데 이젠 하나님이 나 같은 거 쳐다도 안 보시는 것 같고 교회 나와서 주님의 일 하는 것도 힘도 하나도 없고 재미도 하나도 없고 만나는 인간들의 많은 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교회가 싫어지기 시작해. 목사님도 옛날처럼 존경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위선자처럼 느껴지고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확실히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확실하잖아요. 그죠?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거야.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교역자를 찾아가서 증상이 이렇다고 다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처방이 간단해. “은혜가 떨어져서 그래요.”, 아 그렇구나 은혜가 떨어졌구나, 다시 주워야겠다. “기도합시다.” 답은 찾았어.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다더라. 그런데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거 왜 떨어졌을까. 그러면서 복잡해지는 거예요. 은혜가 왜 떨어졌을까. 그래서 또 찾아갔어요. “은혜가 떨어졌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옛날에 있던 은혜가 왜 떨어졌을까요?” 그 다음에 그 교역자 하는 말이 간단해. “내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한테 물어보시오.”그래서 하나님 앞에 갔어요. “하나님, 제가 은혜가 떨어져서 이렇게 변했답니다. 왜 은혜가 떨어졌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음에 영적 어두움이 물러가는데 이런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영적 어두움만 물러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적 눈멂이 사라져야 해요. 그럼 이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뭘로 해결해야 되느냐. 지식이에요. 이건 또 뭘 이야기하느냐. 이게 아니라 복음은 복음인데 복음에 속한 교리들을, 복음에 속한 비밀들을 터득하게 될 때에 지적인 눈멂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자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드릴께요. 그리고나서 돌아갔는데 영 이게 배가 고픈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 나니까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리고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그 다음에 갔더니, 다른 분을 찾아 이야기하러 갔더니, “그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시작하니까, 은혜 받고 나서 성경도 안 읽었거든요. 맨 날 박수만 치고 다녔는데, 어느 한 순간에 보니까, 죄를 지으면 기도가 안 된다고 나오는 거야. 아, 그렇구나, 이게 죄를 지으면 기도가 안 된다는 거구나, 깨달은 거야. 이게 자기가 이미 경험을 한 거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느 한 순간에 탁,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덜컥하고 기도가 내려온 게 아니라, 은혜가 충만할 때에 생각으로부터 죄가 들어오고 사고와 정서 속으로 들어와서 죄 짓고 싶은 마음을 주면서 서서히 서서히 밖으로 아직 죄는 안 지었지만, 죄짓고 싶은 마음과 정욕들이 들어와서 자기 안에 있는 은혜를 고갈시키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고갈시킨 다음에 자신의 마음이,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어떤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닿고 유혹에 빠지니까 그 속에 있던 죄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죄를 짓게 되니까 상황이 자기를 얽어매게 되었고, 상황이 얽어매게 되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기도에 게을러지고 기도할 수 없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더 설명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이 사람이 죄가 기도를 가로막는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이 사람은 그 성경구절이 단순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경구절처럼 보일 거 아니에요. 자기에게 어떻게 죄가 들어와서 어떻게 자기를 망가뜨리고, 자기를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 때에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느냐 하면, 좀 더 자세히 그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잖아요.
그것들에 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 이 세상에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 말씀을 하고 싶은 거예요. 매우 제한적이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자기주장을 따라서 열심히 설교를 해서 뭔 성경을 읽든지 비슷한 설교를 한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설교가 은혜가 되는데, 2년 3년만 신앙생활하고 나면, 마음에 그 설교가 하나도 다가오지 않아. 왜냐하면 욕구는 계속 깊어졌는데 설교의 수준이 그 욕구를 못 받쳐주는 거야. 아이가 갓난아이일 때는 우유를 이렇게 넣어주면, 쭉쭉쭉 빨아먹으면서 자라잖아요. 그런데 얘가 쭉 커가지고 벌써 24개월쯤 됐어. 이 때는 벌써 우유 끊고 이유식을 먹여야 될 때이거든. 그런데 계속해서 묽게 탄 우유만 주는 거야. 그런데 얘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많이만 먹으려고 하는 거야. 많이 먹어도 소용이 없어. 그 자체에 영양가가 없으니까. 그런데 목회자의 무리들이 어떻게들 생각하느냐 하면, 넌 왜 그러느냐, 저기 저 사람 봐라, 금방 들어온 애 저렇게 말씀 듣고 은혜 받고 변화 받는데 넌 왜 2년, 3년 다니고 왜 그 모양이냐, 그러니까 뭐냐, 넌 강퍅해서 그래. 쟨 순수하니까 이거 봐라 이렇게 변화되잖아. 그런데 그게 맞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안 맞을 때도 많다 이거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아무리 마음이 가난하고 강퍅하지 않아도 그 3살쯤 되었으면 이유식을 먹여주어야 해, 밥도 좀 먹여주고, 그리고 그거하고 계속 우유주어서 영양보충이 안되어서 이러고 다니는 거하고 지금 갓난아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우유 먹고 토실토실 살 붙는 거 하고 이렇게 비교를 해서 살 안 붙으니까 넌 강퍅해서 그런 거다, 라고 해 버리면, 틀리는 거지. 말도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서 이제 복음 교리, 혹은 복음의 비밀을 터득해 가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말이죠. 이 사람이 도대체 왜 기도가 안 되었을까. 이러면서 그런 것에 대한 책들을 쭉 찾아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할 때 이 사람은 실제로 허공에 떠 도는 지식을 섭취하고 있는 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제 다시 기도를 회복하느냐, 첫 사랑을 회복 하느냐 못하느냐 생사가 달린 문제에요. 그렇게 해서 그것을 지식적으로 쭉 정리하고 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아요? 누군가가 죄를 지어서 기도를 못할 때에 그 사람한테 가면 제일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어. 무슨 말씀인지 알죠. 시편 130편에 보면,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매 이는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또 나를 백수가 되도록 살게 해 주십시오. 내가 주의 기사를 전파하겠나이다.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전하겠나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편에 다 나오는 비슷한 얘긴데 시인의 죄 가운데 깊은 데 떨어져서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헤어 나와야 될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사죄의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거기서 벗어나게 되요. 진리를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내가 왜 이런 깊은 곳에 떨어지게 되었고,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고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자기가 그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게 될 때 비로소 그 과정을 통해서 지적으로 정리가 되면 말이죠. 그 다음에 자기와 같은 상황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죠. 목회를 바로 그것으로 목회를 하는 거라 이거죠. 그게 여기서 이야기 하는 복음의 비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존 오웬 같은 청교도는 말하기를 복음의 비밀을 많이 간직한 그것이 목회의 소명의 증거라는 거야. 그래서 그것이 없이 목회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는데 혼자 날뛰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복음의 비밀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문제를 여기서 조금 다루어 보려고 해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냐면요. 그럼 여러분들은 제 강의를 들으면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머릿속에 있는 질문을 제가 끌어낼께요. “목사님, 그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 안 됐다가, 다시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공부해서 지식적으로 정리가 되어서 아, 내가 그래서 기도가 안 되게 되었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지식적으로 다 정리가 되어야지만 기도 안 되던 자리에서 회복이 된다는 겁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실제로는 안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기도도 안하고 까부러지면서 살다가 부흥회 나오든지, 뭐 아니면 하나님이 어떻게 손좀 보시던지 사업을 망가뜨리시든지, 하여간 한 대 때리셔서, 그래서 정신 번쩍 차려서 엉엉 울면서 회개하니까 어느 순간 기도가 펑펑 나오는 사람으로 변했다 이거죠. 그런데 그 차이는 뭐냐? 이 사람은 다음에 똑같은 상황에 또 빠질 가능성이 많아요. 어떻게 해야 나오는지 몰라. 여우는 똑같은 덫에 두 번 안 걸리는데 인간은 똑같은 덫에 자꾸만 걸려. 그래서 성도들도 보면, 물질 때문에 시험 드는 사람은 그게 전공이야. 항상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들어.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 비바람이 불고 그래도, 변변하게 버티는 사람들이 꼭 물질에 함정에 텀벙텀벙 빠져요. 똑같아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 목회자들이 특성상 공통적으로 빠지는 시험이 있어요. 그거 빠지는 사람들은 이 교회를 목회하다가도 그 시험에 빠지고, 딴 교회 옮기니까 또 거기서 하다가도 그 시험에 빠져요. 미국으로 가서도 그 시험에 빠지고 한국으로 다시 와서도 그 시험에 빠져요. 항상 그 독에 빠져요. 그렇게 된다 이거에요. 물론 하나님이 그런 지적인 탐구의 과정 없이도 건져주셔요. 그런데 지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있으면, 또 빠져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요. 그 사람 찾아갔어요. “집사님, 그렇게 기도가 안 되고 첫사랑을 잃어버리셨다가,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하나님한테 된통 얻어맞고, 갑자기 기도가 됐다고 그러는데 내가 지금 꼭 그런 상황에 있거든요. 제가 이제는 기도를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그러는데 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 아까 그 사람은 차근차근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왜. 복음의 비밀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 사람은 몰라. 하여튼 때가 되면 하나님이 살려주셔. 그러니까 그 다음에 더 이상 얘기가 안 되는 거죠. 내 땐 언젠가.. 그러면서 가는 거죠. 그래서 복음의 비밀들을 배워나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잘 들어 보세요. 이 복음의 비밀을 배워 가는데 이게 맨 바닥에서는 잘 안 배워지는 거예요. 맨바닥에서 거의 성경과 신앙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데,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해졌을 때, 이게 어떻게 될 거냐가 기도해도 응답이 안 와요. 대부분의 경우는 기도해도 응답이 안 와요. 그러니까 지적인 것들은 지적인 탐구의 방식으로만이 공급을 받게 되어 있는 거지, 영어 공부 하나도 안 한 애가 어느 날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가 I am a boy도 모르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학교 입학 토플시험 만점을 받게 해 달라고, 생명 걸고 금식기도해도, 그런 기적은 안 일어난다 이거에요. 능력이 되어야지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행히 그 사람이 비록 평신도이지만 성경을 많이 읽어서 지식이 있고, 이 기도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훈련 받아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면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까닥 잘못하면 객관성을 읽어버리고 주관주의에 떨어지고 쉬운 거예요. 기도원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원에서 소나무 묘목을 식목일 때 쭉 심었거든. 그런데 그걸 붙들고, 지금 우리교회 교인 아니고 내가 전도사 할 때 교회, 그 양반이 그 묘목을 붙들고 기도를 하는 거야. 그런데 왜 그랬느냐, 이 사람은 어디서 들은 거야. 어떤 사람이 소나무를 하나 뽑았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더라. 그것은 그냥 기도를 하다가 너무 간절해진 나머지, 손을 뻗었는데 그 소나무가 있었고 그것을 붙들고 얼마나 자기를 잃어버린 채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지 뽑혀졌고 응답이 되었다는 거지, 그것은 간절하게 매달리다 보니 생겨난 부수적인 현상이지, 소나무 뿌리 뽑힌 거 하고, 기도응답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목표 자체가 소나무를 하나 뽑는 거야. 큰 것은 자신 없고 묘목은 자신 있거든. 묘목 앞에 두고 새눈 뜨고 기도하는 거야. 이게 언제 뽑히나, 그 사람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런 무지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또 한 사람은 기도원을 갔는데 기도하는데 말이죠. (뭔가 동작을 보여주시고) 이게 뭐 하는 거냐고 그러니까 하늘 올라가는 줄 잡고 올라가는 거래요. 본인은 은혜가 될 수도 있겠지. 너무 설렁하잖아. 그런데 또 따라서도 해, 추종자들이.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마다. 주여, 아버지 이러면서 몇 시간 째 이러고 기도하는 거야. 이걸 잡아당길 때마다 쭉쭉 올라가는 영적인 느낌을 받는다는 거예요. 이런 게 다 뭐냐 하면, 체험은 있고,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강의를 대충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거예요. 이제 복음의 비밀들을 풍부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 시대가 크게 어느 시대이든 가르쳐주었는데 아주 풍부하게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폭포수처럼 가르쳐주던 세 시기가 있었어요. 첫째는 사도들의 시대였어요. 그것들은 어디에 나와 있느냐면 성경에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성경은 사정상 그 모든 것들을 압축해서 적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만을 가지고는 그 모든 것들을 아는 데에 충분하지 않아.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을 잘 누가 풀어줄 때에 그 진리들이 드러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지게 된 방법이 뭐였죠. 그들은 시편과 선지자의 글에 나와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이해하기 쉽게끔 연관관계를 잘 풀어서 해석을 해 주셨더니, 그것이 그렇게 풀어서 해석해 주시니까, 가만히 누워있던 성경들이 전부다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제자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뜨거운 마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거예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지요? 구약의 말씀을 풀어서 쉽게 설명하고, 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처음 설교한 것이 무엇이었어요?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였다. 성경에 보면, 나무에 매달아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바 되신 것은 그러한 말씀을 따라서 너희의 죄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다. 너희들이 예수를 못 박았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떻게 할까. 하니까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렇게 풀어주니까 성령의 강력한 감화의 역사가 각 사람 속에 파고들어가면서 3,000명, 5,000명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거예요. 이해하시죠. 바로 그거에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그런 것들이 다 농축되어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거죠. 두 번째 시기가 종교개혁 시대였어요. 세 번째 더 풍성했던 시기가 청교도 시기였어요. 청교도는 존 낙스 이래로 청교도의 역사가 약 150년 정도 계속됩니다. 그 때 청교도 시대에 작품이 5만권 정도가 나옵니다. 그 중에 3만권 정도는 그렇게 뛰어난 가치가 적은 책이고, 2만권 정도는 여기서 이야기 하는 저런 복음의 비밀을 이야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진리들이 담겨있는 그런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연구함으로써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청교도의 책들을 전 개인적으로는 존 오웬의 책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그 좋은 청교도의 책들을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이 서점에 가서 펴 보시면 영어 읽으실 줄 아는 분 많으시니까, 솔리데어글로리아 출판사나, 그 다음에 그 어디야 (? ) 출판사에 들어가 보면, 청교도들의 문헌이 많이 나와요. 특히 솔리데러글로리아 출판사의 경우에는 엄청난 고전들은 (?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들을 읽어보시면 이제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하실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거지요.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실들을 많이 가르쳐주어도, 목회자나 성도들 자신들이 그런 책들을 통해서 이렇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는 그래서 지적인 눈멂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복음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위한 이런 복음의 풍부한 지식들을 소유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매우 적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하나만 하고 마칠게요. 그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이것은 순수하게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탐구로 접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구도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 구도자적 열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내가 그 말씀을 준행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거룩해져서 주님 앞에 내가 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겠다. 더 진실한 신자가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 라고 하는 이 신앙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접근할 때에 많은 책들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에게 활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통해서 깊이 감화를 받는데 성경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없었던 아주 놀라운 세계들을 펼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내가 이 구원받아서 복음과 화해하고, 영적인 어두움은 사라졌지만, 내게 있는 이 지성적인 눈멂을 극복하고, 보다 더 죄의 유혹을 이기고 나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서, 세상을 깨달아서, 내가 이 모든 유혹과 이런 것들을 뿌리치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까라는 갈망을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이해하려고 접근할 때에 아주 풍부한 지식들을 얻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 나온 지 좀 되었습니다만, 마음지킴이라고 하는 책을 여러분들이 아마 신문이나 어디 오고가면 보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 책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 ) . 목회를 하고 또 제 자신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 너무 빨리 변하는 거예요. 너무 빨리 그 은혜를 떨쳐버리는 거죠. 그리고 진지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삶에 나타난 열매가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잘못된 삶으로 나타나요. 또 그런 일을 나 자신도 경험해. 그래서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고 깊이 탐구하고 깊이 들어가 보니까, 결국은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청교도들 속에 들어가 보니까 산발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잠언4장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들 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남이니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 마음에 관한 것들을 산발적으로 많이들 연구했더라고요. 그것들을 가지고, 나 자신의 목회적 필요와 신앙적 필요를 위해서 부지런히 탐구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설교했어요. 뭐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그 설교가. 한 5일 동안 설교했는데 사경회 때.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깨달은 것들을 다 모아서 1년 동안 책을 썼어요. 그래서 원고지 한 2,200매 정도의 분량을 썼어요. 그런데 그것을 쓰면서 제가 깊이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의 계획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마음으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생각을 타고 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터득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그러는 과정에서 누가 마음에 어떻게 죄가 영향을 주나,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변하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왜 내 마음은 이렇게 딱딱하고 강퍅해질까. 어떻게 이것들을 극복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있을까. 그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충분한 답을 줄 수 있게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 그게 뭐냐 하면 복음의 비밀들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이 여러분 사랑하셔요.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다른 사람한테 다 물어봐 안 사랑하시는지.” 그렇게 설교를 해도 깨뜨려지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황소 뒷다리에 개구리가 우연히 맞은 거예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해져 있어. 그럼 그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하나하나 먼저 이해를 시켜야 해. 우기지 말고. 물건을 팔 때에도 “우리물건이 비싸다고 그러는데, 어느 놈이야. 이게 얼마나 좋은데, 동네에다 물어봐.” 이러고 팔면, 바보취급 당해요. 싸우지 말고 천천히 물건을 놓고 “이 두 물건이 여러분들 보기에는 똑같아 보일 겁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뚜껑을 열고 잘 들여다보면, 틀립니다. 똑같이 까맣게 보이지만, 이쪽 물건은 비닐이고 이쪽물건은 가죽입니다.” 이러면서 차근차근 설명하면 소비자가 생각을 하게 되듯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딴 사람한테 물어봐” 그러면 회심 안 해. 회심해도 그건 어쩌다가 정말 하나님이 너무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 해 주시는 거죠. 그런데 찬찬히 하면 의외로 아주 강퍅한 가슴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거예요. 몇 달 전에 우리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복사기를 고치러 온 사람이 있었어요. 우리 복사기가 전부 다 렌탈해서 쓰거든요. 렌탈해서 쓰는 것이 속이 편해요. 돈도 싸고. 그래서 렌탈하는데, 복사기가 망가졌는데, 직원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저 사람이 진짜 전도되었으면 좋겠어. 얼마나 뺀질뺀질한지 몰라. 그러니까 전화해서 예배시간 직전에 복사기가 망가졌다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진짜 또 망가졌고. 고치려고 막 와서 손을 보고 딱 고쳤는데 딱 예배시간이야. 주일 날. “아저씨, 기왕 예배시간 되었는데 예배드리고 가세요.” 이 사람은 지금 10년 넘게 교회를 떠난 사람이야. 갔어요. 하도 사정을 하니까 예배당에 끌려서 왔는데, 근데 오는 날이 장날 이라고 설교가 ‘거듭 나셨습니까?’ 였어요. 그래서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펑펑 울면서, 중간에 앉아있었거든요. 펑펑 울면서 회심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고 일어났어요. 그리고 돌아가서 자기 부인하고 교회 등록하고 신앙생활 잘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왜 거듭나는 게 필요한지, 그냥 교회 다니면 말짱 쓸데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찬찬히 설명해서 이성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해야 돼. 그리고나서 마지막에 성령이 임하여 주시면 변화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자기 자신이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한 구도자 적인 열정이 필요해요. 그런 과정에서 이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많은 사람이, 많은 교인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여기 외과의사 계세요? 손들어 보세요. 없으시죠? 그러면 제가 권위 있게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푸줏간에서는 항상 이 푸줏간 하는 사람들이 칼을 갈잖아요. 그죠? 외과 수술하는 칼은 한번 쓰고 다 버립니다. 왜냐하면 한번 살을 닿고 지나가면, 그걸 두 번째 쓸 때에는 벌써 감각이 달라진데요. 그러면 1mm 사이를 그어야 하는 이 정밀을 요구하는 수술 칼로서 적합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배를 가르는데, 안 갈러져서 깍두기 쓸 듯이 막 이렇게 해서 배를 가른다면 다 망가지지. 그 저 동태 자르듯이 이러면 되겠느냐 이거야. 칼이 수술 할 때는 어떻게 되겠어요? 말도 안하잖아. 눈빛으로 서로 통하잖아요. 아주 고참 간호사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수술을 집도하는 칼은 수 십 종류가 있는 거예요. 용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라고 그랬잖아요. 근데 청룡도 딱 하나가지고 목회를 하는 거야. 청룡도 하나가지고 목회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좋아요. 청룡도.. 내가 오늘 이렇게 웃기려고 사실 생각한 것은 아닌데. 청룡도 딱 하나야. 둘도 없어. 근데 효과는 있어. 말 타고 달려오는 사람 떨어뜨리는 데는 최고야. 딱 떨어뜨리는 거야. 근데, 교인 중에는 그런 교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목사님, 영혼 여기가 너무 이상해요. 곪았나 봐요.’ ‘수술해야지.’ 그리고 눕혀놓고 청룡도를 들고 오는 거야. 근데 이거는 손을 대자니 배가 다 갈라지는 거고, 1cm만 찢어야 되는데 이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더 재미있네요. 그 웃음이. 아.. 또 한 사람은 말이지 면도칼만 있는 거야. 하여튼 이게 옳고 그름을 갈라내는데 면도칼이야. 오죽하면 까다로운 사람을 면도칼이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죄인이 떼로 몰려오는 거야. 면도칼 하나 딱 들고 돌격...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별 죄인을 다 만나거든요. 청룡도도 있어야 돼. 그래가지고 까불고 날뛰면 말이죠. 확 하고 휘두르면 목이 한 이삼십 개쯤 떨어져야 돼. 아니 교인을 그렇게 치라는 게 아니라. 그래서 큰칼, 작은 칼, 동그란 칼, 그 다음에 뾰족한 칼, 그다음에 세모난 칼, 이렇게 자르는 용, 끊어 매는 용, 파내는 용, 여러 가지 칼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쫙 있어서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환자를 딱 보고, 너 그거야, 가서 하나, 둘 꺼내 와서 딱 찌르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거. 그래서 여러분, 제 이아기가 웃으며 이야기 하는데 이게 다 뼈 사이에서 나온 거예요. 목회하면서. 어떤 목사님은 전도 설교만 잘해. 그러니까 그 교회가면 맨 날 회개하는 데, 다 새로 온 사람만 회개하는 거야. 오래된 사람은 뒤에서 자. 그리고 새로운 사람은 계속 등록하는데 오래된 사람은 사표내고 나가. 무슨 뜻인지 알죠? 또 어떤 목사님은 오래된 사람들한테만 설교를 잘해. 새로 와서 예수 좀 믿어 보려고 죽 앉았는데 신령한 설교만 하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푹 자다가 가는 거야.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도에 대해서만 설교를 잘해. 그렇게 되면 안 돼요. 그 칼이 다양하게 있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끌어 와야 돼. 그 칼이 뭐예요? The mystery of gospel. 복음의 비밀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집이라고 하는 대장간에서 만들어 진거예요. 그만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