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10
부흥과 언약의 갱신(1)(창 35:9-1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벌써 10번인가 11번인가 하는데 진력나지 않습니까? 10번째입니다. 진력이 안 납니까? 35장에서 뭐 9절까지 우리들이 헤매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말씀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들이 그 성경이 한없이 넓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뭘 모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간단하고 좁아 보이는 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쪽 19줄 저쪽 19줄, 두는데 처음에 둘 때는 좀 넓어보이다가 좀 두면 7, 8급 두면 바둑판이 뭐라고 하다가 그러다가 7, 8단이 되면 바둑돌을 들고 바둑판을 볼 때 고독해진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가 했더니 중언평야와 같이 넓어서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우리들이 들어갈 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비로소 우리들이 성경의 숨결을 듣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으로 쭉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제 드보라가 죽는 장면을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안에 안 죽은 드보라 때문에 고민을 했는데 오늘은 이제 그 드보라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9절에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행차하시기가 힘드십니다. 34장에서 그 수난의 세월을 보내고 35장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리고 이제 35장 9절에서 드디어 나왔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그러니까 그 앞에 35장 1절에서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9절에서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차이는 35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이 자기의 모습에 눈뜨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아, 내가 정말 이렇게 잘못되었구나. 그렇게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단히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 없는 9절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없습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부흥, 가짜 부흥이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이비 부흥,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때는 부흥 같지만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닙니다.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꼭 개털같이 생겼는데 모피코트라고 하면서 960만원으로 붙여났습니다. 꼭 개털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내가 아시는 분은 정말 나쁜 사람은 시골에서 아주 빛깔 좋은 개를 잡아다가 껍질을 벗겨서 그렇게 처리를 특수하게 해서 만들어서 알라스카산 여우 모피라고하면서 그것도 1,20십 만원 붙여놓은 것도 아니고 수백 만 원을 붙여놓고 파는 그런 사기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개털같이 보이는데 그게 800만원 960만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멋있게 보이는 모피가 다 진짜 모피가 아닌 것처럼 반짝이는 모든 게 다 금이 아닙니다. 부흥 같은 게 다 부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현혹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순복음교회가 얼마 안 있으면 문을 닫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하향 길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굉장히 지적이지 않고 정적입니다. 그래서 쉽게 흥분을 잘하고 또 잊어버리기도 잘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이 전통적인 장로교회는 체질에 잘 안 맞는 것입니다. 조용하고 그런데 장로교회가 본바탕이 그런 게 아닌데 그러니까 한국의 국민성과 굉장히 잘 맞아떨어집니다. 물론 거기서 사람을 뭐 감정으로만 사람들을 부채질한다는 그런 뜻으로 하는 것은 아닌데 물론 거기도 말씀이 있고 성경이 있지만 그런 면들을 특별히 놓치지 않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국민들이 어필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허한 장로교 교인들이 그리로 잘 갑니다. 이게 무슨 5년을 믿었고 10년을 믿었어도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머리를 긁적긁적 거리면서 글쎄요. 하나님이 아시죠. 이게 무슨 체험도 별로 없고 가니까 뭔가 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막 기도하고 무슨 불을 받았다고 그러고 그런데 이제 반짝이는 게 다 금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된 부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의 본론으로 이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이 없는 9절이 없다는 것을 먼저 말 을하고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절이 없는 9절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 각성이 없는 부흥은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각성 속에서는 대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자기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34장적인 무감각에서 깨어나서 35장에 와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인지 결코 내가 이런 세겜에서 살아가는 이 생활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눈뜨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대해서 불편함을 못 느끼는 그것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깊은 문제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았다고 그래서 그것이 곧 부흥이 아닙니다.
그러나 1절의 만남을 통해서 놀랍게 바뀌게 됩니다. 무엇이 바뀌게 되는가 하면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과 기독교와 교회를 바라보는 견해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 바뀌었나, 안 바뀌었나는 보려면 뭘 실험해보면 되는가 하면 이제 여기서 강의를 계속 듣고 설교를 들은 다음에 바깥세상을 보십시오, 옛날에 보는 것과 조금 다르게 보여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우리의 신앙현실도 그렇고 그러면서 뭔가 여러분들이 전에는 다 용납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이제는 왠지 용납이 안 되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제를 자꾸 느끼게 되고 그리고 전에는 눈에 안 들어오는 것들이 사소하게 지나가던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이 됩니다. 전에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고 하찮고 그 까짓것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래버립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죽을 듯 말 듯 목숨을 걸었던 것은 이제는 될 대로 되라지 뭐 아무렴 어때,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는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시각의 변화, 그러면서 1장의 각성을 경험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모든 1절에서의 각성, 사물을 보고 그 다음의 신앙의 현실을 보고 그 다음에 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을 보고 교회를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보는 새롭게 만들어진 그 시각이 누가 같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남을 통해 갖다 준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쉽게 얘기하면 그때는 성경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만나주셔서 얘기를 하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미 있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만나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지게 하시고 그리고 각성이 생겨서 사물에 대한 판단과 이치가 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제 강의를 듣고 설교를 듣고 그러면서 이제 뭔가 이렇게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한번쯤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나름대로 이제 뭔가 지금 내가 바뀌어가고 있다. 판단하고 생각하는 대신 달라져가고 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아, 좋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다. 9절이 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우선 1절이 와야지 됩니다.
야곱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좋다. 세겜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좋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고 이렇게 그런데 1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예리하게 자기의 현실이 어떤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각성이 일어납니다. 그게 문제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어려움이 먼저 출발하면 자꾸 이런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쑥 나왔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뒤로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언제든지 해결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신앙을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는 것 같다가 문제만 사라지면 쑥 들어가는데 그 문제를 해결 받고 나서는 무슨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늘 그런 상태에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더 큰 문제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와 같이 인생의 모든 구도를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고 그리고 교회와 내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리고 주기도문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과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과 이런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내 인생의 방향이 지어져야 하는데 계속 해서 무슨 복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복을 주는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꾸 복을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비비꼬이면서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축복을 주십시오.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나올 때 항상 하나님이 우리말을 들어주시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로 한 사람들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에 머물고 있으면 하박국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신실한 자들이 이렇게 압박을 받고 악한 자들이 저렇게 날뛰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머리가 혼돈하고 혼미합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일입니다. 벌써 이미 마음속에 의심의 틈바구니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이 무엇인가 하면 내 시각에서 내 인생과 그리고 교회와 역사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기독교 신앙까지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볼 것인가? 그러면 아주 쉽게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정말 진리 안에서 한번쯤 각성이 일어나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쾅! 하고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올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올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고요히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서서히 우리의 머리가 정복이 되면서 우리의 마음으로 서서히 올 수도 있습니다. 머리가 정복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그러면서 여기서부터 정복되면서 서서히 내려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마음이 감동을 받으면서 아, 인생을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느낄 때 깊이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그러는데 이미 옛날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세겜에서 살았던 모든 기간도 밧단아람에서 영원한 정착지가 아닙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야영하는 그 장소에서 진짜 판벽한 집을 짓고 한없이 오래 산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돌아오게 되었을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드디어 복을 주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복도 잘 살펴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이 세상에 물질을 주시고 그런 것인데 여기 야곱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그 언약을 내가 충실하게 수행하고야 말겠다는 이미 주신 약속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자손을 자꾸 낳아서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 용할 양식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매일 달라고,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무슨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물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눈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이 그 많은 제물과 그 많은 복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11장이 말하기를 그가 돌아가면 돌아갈 수 있었으려니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수준대로 대하십니다. 절대로 처음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기도가 네 핏줄 속에서 나오게 하겠다. 야곱의 당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이합니다.
그러니까 사고 자체가 상당히 영적으로 전환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일하는 게 처음에 예수 믿자마자 오 하나님,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죽어야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왜 예수 믿게 되었는가 물어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젊은 사람은 잘생긴 처녀가 하나 없을까 해서 왔다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교회에 나가면 제사를 안 지낸다고 그래서 그 놈의 제사가 지겨워서 나왔다는 사람도 있고 시어머니가 하도 구박해서 위로를 받을 때가 없어서 나왔다는 둥 사업에 망해서 기도원으로 도망갔다가 왔다는 둥 예수 믿는 동기는 다양합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 뭘 기도하겠습니까? 사업에 망해서온 사람이 이 빚더미에서 날 건져달라고 할 것이고 생각이 달라서온 사람들은 장가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그렇습니다. (?)할 필요 없습니다. 처음에 다 그렇게 믿는 것이니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고 이제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자꾸 주셔서 뭔가 이렇게 깨닫게 하시면 변해야 되는데 안 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자라면서 우리의 기도도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가 변한다는 것은 뭐가 변한다는 것입니까?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삶은 기도 안에 묵이고 기도는 삶 안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5년 10년을 믿어도 늘 뭐 주십시오. 하면서 매일 계산서를 내는 것같이 청구서를 내는 것같이, 그렇게 별로 필요한 것이 없을 때는 기도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볼일이 뭐가 있어. 다 있는데, 궁하면 또 가서 한번 두드려보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영혼 속에서 점점 예수를 믿고 신앙이 성숙하면 그러면 내면적인 욕구가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주께서 식물을 저희가 원하시는 대로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주님께서 주는 것들은 누리고 사는 데 영혼은 파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영적인 문제는 관심이 없고 육신에만 귀가 기울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임을 사교 모임정도로만 생각하며 시름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에 잘못된 곳에 가서 타락한 것보다 나니까 그런 생각정도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데서 점점 자라가야 합니다. 내적인 희열과 충만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모든 원인이 각성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세상과 그 다음에 인생과 하나님과 교회를 바라보던 그 시각과 시야가 변화가 안 됩니다. 늘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앙이 높다는 것이 그때 가졌던 그 시각을 가지고얼마나 세련되게 교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자기가 적응해주는가 그런 정도가 신앙의 수준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는 입에 쓴 약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어떤 한 형제가 하는 말이 예수를 믿기 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전도를 받고 나서 예수가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다 버렸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자기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와보니까 자기가 다 버린 것을 그것을 주워 모으면서 키 재기를 하면서 서로 자랑하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각성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견해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런 면에 있어서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그 피비린내 나는 시므온과 레위의 세겜에서의 살육과 그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는 그 말할 수 없는 심령의 그 깊은 긴장과 고통 속에서 다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정이 더 큰 문제에 부딪히면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말씀하셔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해지면 하나님께서 이제 환경으로 할 수 없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돈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알고 아등바등하며 살다가 언제 그런 것을 다 놓게 됩니까? 덜컹! 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서 병상에 눕게 되면 자기의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들며 그때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애야,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안개와 같은 것이 고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의 생명이 무엇인가. 아침에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지 않은가, 이슬과 같지 않은가. 이게 도대체 마음에 어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번 실감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놔라. 비로소 인생을 그때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9절에 나타나셔서,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9절에 오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4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태까지 다 이야기한 게 9절에 오기 위해서 계속 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하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렇게 타락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권위를 잃어버린 것, 그러면서 이방신상이 들어온 것,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멸시를 당한 것,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서 벧엘로 도망한 것,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가장 사랑하고 자기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드보라마저도 죽어서 이제 마음이 완전히 가난해졌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한번 출두하는 것을 여러분 어떻게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 한번 유성의 어느 작은 호텔에 행사가 있어 가서 누울 기회가 있었는데 가만히 누워서 보니까 거기에 도자기가 있어서 그것을 뒤집어보니까 아니, 세상에 도자기 침대에 놓여있는 재떨이, 꽃병 그런 것에다 전부다 딱지가 붙어있는데 박대통령 살아계실 때 몇 년, 며칠, 몇 시에 검침, 해놓고 대통령 경호실, 그러니까 꽃병 하나, 하나를 다 들여다보고 탐지를 해서 이런 것 하나도 딱지를 다 붙인 것입니다. 딱지를 안 붙인 것은 못 들어오고 들어온 다음에 한 달 전서부터 문을 잠가놓고 경호원이 와서 벌써 일주일 전부터 지키면서 누구도 접근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홀 뚜껑까지 다 열고 들어가서 시궁창까지 다 탐지한 다음에 그 다음에 대통령이 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술 먹다 한방에 맞아 죽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 미물의 인생도 세상에서 한번 왕래하기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절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와서 며칠씩 묶고 그렇지 않고 하루 와서 온천하고 그런 것인데 두 달 전서부터 그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오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가보면 실감이 납니다. 아, 정말 이런 길에 정말 하나님이 오실 수 있겠는가. 이런 마음입니다. 덜컹덜컹 자동차가 우직끈 하며 바퀴가 닿는 소리가 납니다. 잘 나갑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곡괭이와 삽을 들고 사람이 먼저 갑니다. 그러면서 왕이 온다. 그러면 곡괭이 부대가 먼저 지나가면서 길을 전부다 편편하게 다듬어놓으면 멀리서 가마를 타고 왕이 옵니다. 왜 울퉁불퉁 하면 쿠션이 안 좋으니까 편편하게 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야곱의 마음을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정비작업을 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이 살아있어야 할 소망을 이 세상에서 못 느낍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까지 완전히 낮아졌습니다. 왜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습니까? 왜 말씀을 듣는데 허공중에 자꾸 흩어집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이 콩밭에 가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콩밭에 가있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내가 아는 형제 한사람이 강의 부탁을 받아서 갔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그 리더들을 수십 명 모아놓고 거기서 교육하는 거기에 갔는데 이들이 계속해서 시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까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면서 다 극장표를 한 장씩 사서 있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와서 뭔 일이 되겠습니까? 절대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와주시지 않으십니다.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 한분에게 고정시키고 그분을 추구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니 무슨 드보라가 옆에 있는 것이 야곱으로 하여금 범죄 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드보라를 네가 의지하는 것도 영혼에 하나님만 주목할 수 있는 시선이 흩어진다고 데려가신 것입니다. 벌거벗겨 광야에 혼자 세워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나아오실 수 없게 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치워주시는 것입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도 우리 교회에 있는 어떤 지체에게 주일이면 매주 무슨 누구 생일이라고 그러고 누구 돌이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그리고 자기조차도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확 절정에 올라서 보름달이 들 때 한번 싹 빠졌습니다. 하필이면 보름달이 뜰 때 빠져, 결정적인 게 보름달이 뜰 때 빠지지 않았는가. 그때 만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 그것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에 모든 시선이 하나님 앞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얽매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늘 누르고 치우고 그리고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에 그렇게 될 때까지 모든 과정이 여태까지 강의한 것입니다. 8절까지 강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만나주셔서 하신 일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천사와 씨름한 게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을 드렸고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것은 성도의 깊은 회개입니다. 정말입니다. 깊은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깊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네 이름이 무엇인가, 야곱입니다. 아, 그 이름이 사기꾼이구나. 내가 다른 이름을 줄 텐데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늘 볼 적마다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을 잊게 하는 참된 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한없이 가난하게 되어 회개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인데 왜 지금 또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게 20여 년 전에 얘기하는 것인데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그 동안에 왜 얘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이름이 그동안에 새카맣게 잊혀져버린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거기에서하나님과 함께 만났을 때 이미 그것은 땅에 묻어둔 이름이었습니다. 영원이 땅에 묻어진 이름이고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하나님과의 언약이 주는 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 매인 존재인데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35장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과 말씀하시면서 한 번도 이스라엘이라고 안 부르십니다. 살아가는 꼴을 보니까 이스라엘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값을 못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디어 8절까지 와서 9절에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네가 그 정도로 나를 추구하는가. 이제는 내가 너의 이름을 회복시켜 주리라. 그러면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인데 우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없습니까? 아니 왜 이래. 그렇습니다. 성도. 나는 감히 내 자신이 성도라고 부르기가 참 어렵습니다. 난 스스로 자칭해서 성도라고 부르기가 어렵습니다. 성도,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구약에서는 경건한자들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들, 그 이름값을 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너를 통해서 이 세상에 구원받을 그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다가 마지막에는 너의 후손 가운데 모든 인류를 구속할 메시야가 나게 하여서 온 세상이 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리라. 그런 약속의 조상입니다. 그런 광대한 이 세상에 영혼들에 대한 구원과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왕국이 아닌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왕국에 대한 그런 소망과 기대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이 얼마나 원대한 계획과 그리고 어마어마한 작정 속에서 우리를 부르셨는지 그 계획은 너무나 원대하고 그 비전은 너무너무 커서 세겜에서 돈 많은 부자 정도로 불리는 것 가지고는 바꿀 수가 없는 것인데 그런데 세겜에서 사는 동안 그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 그 이름을 새카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할 때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10년 20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이제는 그 이름만 잊어버린 게 아니라 뭐도 잊어버렸나. 그러니까 그 이름대로 살아야 할 모든 삶도 모두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 잃어버린 가운데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하나님이 불러주셨을 때 무엇을 생각나게 만들었을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주어졌고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언약의 조상들의 계보를 타고 내려온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언약 위에 다시 그 언약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사람 마음속에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어떤 것들을 계속 바라봅니다. 물론 그것도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내어 쫓고 마귀를 굴복시키는 그 70인의 전도대가 돌아와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명하매 귀신이 나가고 그리고 사람들이 병이 낫고 악령들이 쫓겨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나이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너희가 귀신을 쫓아낸 것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러니까 시대가 타락하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잃어버릴 때 그때에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요즘의 구원은 식당에 가서 그저 엽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짜 요리접시가 나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나서 그 사람 뭐 회장이 되었다더라. 새마을 회장인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회장이 되었다더라. 승진이 되었다고 하더라, 땅값이 올랐다고 하더라. 이런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가 말하자면 이스라엘에 많이 있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이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도 하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까 뭐라고 그러십니까?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행하였는가. 내가 너희를 무엇으로 너희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희는 내게 증거하라. 나는 너희를 애굽의 종살이하는 데서 구원해내 준 그리고 발람이 너희를 저주하려고 할 때 그 저주를 바꾸고 싯딤과 길갈에서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 싯딤을 이제 광야 생활에 마지막 지점인데 길갈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처음 지점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출애굽을 시작했던 것이 요단강이 갈라지면서 출애굽이 끝납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행하시는 이 놀라운 일들을 누가 했는가. 하나님이 행하셨다.
여러분, 사람들이 기적을 많이 보고 축복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것 같지요?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자기를 그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믿지 마십시오. 인생을 그렇게 믿으면 늘 실수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축복을 많이 받는 것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 이 세상에서 기적을 많이 보는 것과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것, 전혀 일치가 안 됩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나왔습니다. 거기 계속 살았으면 종 밖에 더 됩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애를 낳으면 누구 집 재산을 늘려주는 것입니까? 바로의 집 재산을 늘려주는 것입니다. 두당 얼마씩 계속 늘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태어나도 계속해서 그 인생은 오직 바로의 집에 재산을 늘려주는 것입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고 소가 새끼를 낳을 때 주인들이 좋아하는데 그것은 크면 잡아먹으니까. 그런 것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닐 그런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이 건져내셔서 이제 노예 된 곳에서 해방시켜주셔서 땅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포도열매를 먹게 하시고 세우지 않는 집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언제 판벽한 집에서 살아봤습니까? 이런 벽이 있는 집에서 살아봤습니까? 매일 사는 집에 텐트, 펄럭펄럭 바람이 부는 텐트, 그 속에서 살다가 이제는 문화 주택에서 사는데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나오면서 두 달 지나니까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만나를 내리십니다. 왜 웃습니까? 하루에 10억이고 한 달이면 3,600억이고 일 년이면 3조 6천억 원입니다. 10년이면 36조입니다. 4년이면 150조 되는 돈이 되어야지만 우리나라의 1년 예산에 10년을 거두어들여야지만 겨우 먹고 사는 그럴 정도의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들이 갖고 나온 것이 무엇입니까? 금붙이 조금 가지고 나온 것과 거기에서 겨우 먹을 것을 갖고 나왔지만 두 달 먹으니까 다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셔서 먹는 문제가 일체 해결되어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아, 얼마나 신기합니까? 어두운 밤길에 300만 명의 사람이 행군할 때 아니, 플래시가 몇 개 있으면 행군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위로부터 하늘 끝까지 맞닿은 찬란하게 타오르는 그 불기둥이 얼마나 장관이었겠습니까. 불꽃놀이만 해도 장관인데 캄캄한 밤에 불길을 환하게 보여주고 그 다음에 따뜻하게 해주어서 앞길을 비쳐주고 그 다음에 구름기둥이 햇빛을 막아주면서 인도하시니 300만 명의 사람이 그 그늘에서 더위를 피할 정도니 그 구름기둥도 참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입니까? 눈뜨면 기적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을 때 너희가 신발이 떨어진 적이 있으며 의복이 헤어진 적이 있는가.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먹이신 것뿐만 아니라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기적으로 타오는 그 불꽃 그 앞에서 그 불빛을 받아가면서 행음하고 범죄합니다. 그러니 기적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군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오, 할렐루야! 두 번 일어나면 응, 세 번 일어나면 다 그런 것이지. 그러면서 당연하게 삽니다. 그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믿을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서 얻은 감격과 신비가 아니면 절대로 다 가짜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적을 수없이 체험했다는 사람치고 왕년 이야기 안하는 사람 있습니까? 왕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 왕년 이야기입니다. 왕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지금 신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금년 신통한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앙 자체가 견고하게 말씀에 서지 않고 진리 속에서 그런 빛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늘 깨달음이 없고 여기서 얘기하는 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와서 하나님과 만나고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장엄한 약속들, 그리고 너의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드러내주시는 이런 일들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런 것들에 대한 각성이 안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자기의 노력에 합당한 마음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시선을 하나님 한분을 깊이 주목하면서 나아갈 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앞에서 홍해가 갈라집니다. 우리 앞에서 반석이 터지고 우리 앞에서 사망의 골짜기에서 피리소리가 들리는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말씀을 더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 있는 이름이다. 무슨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뭘 주십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방망이를 두들기면 모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라도 주시는 것 같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편하게 살다가 때깔이 좋게 살다가 천당에 오는가. 그게 아닙니다.
이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네가 이제는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목적, 자기욕심을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사람이었지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이라 불러준 그 순간에 그 언약의 조상의 반열에 너를 세우고 그리고 조상에게 약속했으나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들을 너를 통해 계속 이루어가리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러니 야곱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 물줄기를 타고 신약의 계시가 내려오고 그리스도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구원의 커다란 그 반열에 너를 세워주시겠다고 하는 이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야곱에게 그 이름을 대신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을 때 그 이름의 의미가 깃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자가 맞아야 하나님이 뭘 좀 해보시지. 사람들을 불러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해서 그래서 너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라. 불리어져서 그리고 위대한 언약의 대열에 너희를 세워서 그래서 구원받은 자녀로 이제는 너희가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 밭 갈고 논농사를 지어서 그리고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치고 그리고 돈을 번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 그런 인생들이 이제 변화가 되어서 이 세상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빛나고 없어지지 않은 천국의 영적인 세계들을 위해서 너희들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불러주었는데 그때뿐이지 늘 야곱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돌아보면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매주일 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쁨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대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웃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거두어가시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두고 갑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여기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 이름인가 하는 것을 그 이름으로 자기의 인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흥은 무엇인가? 성도답게 살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성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세상에 있는 이름처럼 살아가지 아니함으로 성도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처럼 살아갑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을 너무 폼 잡고 잘 짓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그냥 대충 집니다. 예를 들면 킨타쿤테에 나옵니다. 아버지가 매일 닭싸움 하러 다니니까 아들의 이름을 치킨 조지, 그리고 아버지가 목수입니다. 딸을 낳았습니다. 카펜터, 그냥 막 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좋은 것은 다 끌어다 짓습니다. 그런데 이름값을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이름값도 못하고 산 때가 많습니다. 제 이름도 김남준, 남쪽에 준걸이라고, 뭔 남쪽에 준걸인지, 남쪽은 강남에 와서 사는데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아침이면 에고, 왜 이렇게 쑤시지, 매일 이러는데 무슨 호걸이 그래. 이름값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인생들이 무슨 성도 이름값,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 어떻게 사는지, 그 모든 것이 세상에서부터 태어나고 세상에서 사랑하고 그리고 세상과 함께 짝하며 살아갈 때 소속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죄악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더욱 소속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릴 때는 참을 수 있는데 세상이 자기를 버릴 때는 외로워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여러분 지금 기가 막히다고 웃는데 그 웃는 게 바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회복 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야곱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야곱아. 너는 세겜에서 돈이나 모으고 물건이나 팔면서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돈푼이나 세면서 돈 궤짝을 붙들고 좋다고 희희낙락하며 사는 그런 정도의 인생이 아니다.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잖니.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 아니나. 그래서 결국 네게서 태어날 종족이 결국 나의 이스라엘 민족이 됩니다. 그런 터닝 포인트에 네가 서있다. 그런 계획을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28장부터 찾아오셔서 29, 30, 31, 32, 33장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아, 그 이름을 가진 인생이 엎드려서 계속해서 돈푼이나 세고 앉아 있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가련한 인생으로 보이시겠습니까? 너무너무 비참하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바꾸어주시면서 야곱에게 큰 충격을 주신 것입니다. 아, 맞다. 내 본분이 누군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고민은 자기의 소망하는 것에 묶여있습니다. 돈이 소망인 사람들은 모든 고민의 시작과 마지막 끝이 돈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들은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이 늘어나는 허리 살, 그런 것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버립니다. 하여튼 옛날에 내가 있던 직장에 자매는 아주 다이어트를 너무 해서 위에 구멍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봐야 하나도 안 줄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찾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 같은 그런 열심히 모든 소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34장에서 살아오면서 계속 고민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고 33장 34장 마지막에 와서는 그렇게 비참하게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 그때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던 모든 고민이 무엇 때문입니까? 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야곱처럼 살아갈까? 그러나 깨닫게 되면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이전에 나를 고민 하게 만들었고 이전에 나를 고통하고 시험 가운데 몰아넣었던 그 모든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왜 소망이 다른 데 있으면 그런 것이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꾸 사랑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을 사랑하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고민이 변합니다. 이스라엘에 합당한 고민으로 변화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아까도 몇 번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가끔 나옵니다. 은혜를 한참 받고 나서 저는요, 가끔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너 이제 교회에 나오지 마. 그러신다고 그러면 꿈에서 막 운다고 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봐달라고, 그러면서 불안한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누가 나보고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교회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일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50분까지 TV붙어 앉았다가 할 수 없이 먼지 털면서 나가서 꺼덕꺼덕 졸다가 축도 끝나면 벌떡 일어나 해방감을 느끼니 그러니 뭔 일이 일어나겠으며 어떻게 일주일을 경건하게 살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경건하게 못사니까 그 다음 주일이 어떻게 거룩해지겠습니까?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전혀 그 이름대로 살고 싶어 하는 욕망과 이런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 물어볼까요? 매일 기도하고 염려하는데 그 모든 염려와 고민과 근심이 아, 왜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을까? 주님의 나라가 확장이 안 되고 정체되고 있는데 이렇게 불순종하는 것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은혜가 떨어질까? 어떻게 하면 말씀이 새롭게 회복될까? 그것 때문에 고민이 되어 지고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 눈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고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게 야곱의 고민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습격으로부터 벗어날까? 다 야곱의 고민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우리에게 뭘 얘기해줍니까? 그럼 여러분은 얘기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들이 누가?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들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뭔가 깊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에 대해서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누구와 같은가 하면, 에서와 똑같습니다. 한 그릇의 팥죽만 주면 얼마든지 팔 사람들입니다. 그 까짓것 뭐, 그렇게 중요하고 좋은 일인데 주일쯤이야. 장자의 명분을 팔수 있을 정도인데 뭐 한번 장자라고 불림을 안 받는 것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쉽게 얘기해서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주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광대한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스라엘의 이름이 장엄해보이고 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좀 직선적으로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 훌륭하고 위대해보이시면 그리고 그것이 가슴에 다가오면 내가 그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하면 자기가 그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 아버지, 누가 이름을 알까봐 걱정입니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숨기고 다니는 것, 있었습니다, 5공 시절에 매일 데모하면서 자기 아버지가 바로 그 돌을 맞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친구들도 애가 누구 아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견디다, 견디다 괴로워서 유학가고, 떠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전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전혀 도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신 이것은 단순히 그런 것들만 회복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잊혔던 삶, 34장의 모든 실패가 무엇 때문입니까? 잊혔던 삶으로 다시 한 번 부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주신 것이 11절입니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거기까지만, 야곱이 이 35장 부흥에서 깨닫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즉 아브라함과 만나실 때, 시름에 잠겨있는데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모하고 만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86살 때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 앞에 온전하라. 그것은 온전하게 못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불러준 것은 이스라엘처럼 못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34장의 그 모든 야곱의 그 모든 죄악, 그리고 그 영적인 깊은 침체,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왜 그랬을까? 33장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헌신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던 것, 거기서 돈을 벌고 골몰해있던 것, 그 모든 것,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야곱의 모든 실패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그러니까 야곱이 그냥 평생 지워지지 않는 화인과 같이 가슴에 확 새겨지는데 그것이 전능한 하나님,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야곱의 생애에서 35장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확실하게 가슴에 새겨진 것이 여호와는 전능하시다. 그것이 가슴에 확 새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생을 지배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런 심경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부흥 비슷한 것을 많이 경험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은혜를 받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면 은혜를 받고 나서 그 다음에는 은혜를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공부도 못하고 그 다음에 직장일도 못하고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고 인생이 너무너무 비참해지고 막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된 부흥, 그래서 하나님께서 참된 부흥으로 그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깨닫게 하셨을 때 그때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는데 그 지식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러니까 그 지식이 가슴속에 새겨지게 되면 지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은혜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져도 전에는 은혜가 없었을 때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막 괴로워서 못 견딥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이 누구신지 새겨졌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새겨졌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그것이 이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으로 회복되지 못했을 때 한없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신앙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은 성령에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도 신앙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태고 수준은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으로 만족하면서 살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과의 충만했던 교제, 그런 것들을 이제 사모하는데 회복이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한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를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같이 깨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서 한번 추락을 하면 그 다음에는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다루는 방법이 틀립니다. 예전에는 좀 죄를 짓고 잘못했어도 그냥 봐주시고 눈물 좀 흘리고 회개하면 툭툭 털고 일어났는데 이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어림없어집니다. 요만큼 실수한 것 같은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보내서 사자 소리를 들으면서 두려워 덜덜 떨면서 몇 달 동안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말씀을 전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조금 다른 생각을 했는데 탁 치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어려서 뭘 모를 때는 겁이 없습니다. 동물원에 가보면 조심해야지 되는데 호랑이에게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애들이 호랑이에게 과자를 주려고 막 다가가는데 그것은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무지함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게 만드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담대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가슴에 새겨집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참된 부흥입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 이후로 야곱이 잘못하지 않았단 말인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가슴속에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는 사실을 계속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을 움직였습니다. 찾아볼까요? 9절, 같이 읽으십시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더라, 그가 그 꾼 꿈을 부형에게 고하되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절하겠느냐” 1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실 수도 있다. 그것이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진 그 인식 속에서 그러실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자식들 가운데 나중에 태어난 아이인데도 내가 그 아이에게 엎드려 절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엎드려 절할 수도 있다. 누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렇게 행하실 수도 있다, 그것을 은근히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이게 35장의 영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43장을 또 한 번 넘어가봅시다. 43장, 12절 내가 읽겠습니다.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에 도로 넣어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가서 다시 그 사람에게 가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야곱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올라가서 요셉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자루에다 돈을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거기에 볼모로 잡혀있는 사람이 있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너희의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주겠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요셉도 죽었는데 베냐민을 어떻게 주겠는가, 사은품도 아닌 정품에서 낳은 두 아들인데 나머지 전부 사은품에서 나온 자녀인데, 나중에 온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장가들 때 끼어들어서 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나머지는 다 사은품입니다. 그리고 이제 정품은 라헬 뿐인데 라헬에서 나온 사람은 둘 밖에 없는데 하나가 죽었으니까 이제 진짜 정품에서 나온 아들은 하나뿐인데 사은품에서 나온 자식은 눈에도 없습니다. 제품 자체가 사은품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것들은 야곱은 별로 신통치 않게 여겼습니다. 달달 더는데 더군다나 막내를,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잘 보십시오. 14절,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도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 사람으로 너희 형제와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읽으면 잃으리로다.” 죽어도 좋다는 그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 주님이 또 다른 뜻이 계셔서 그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나는 할 수 없다. 이게 옛날 야곱하고 상대가 됩니까? 옛날 야곱 같으면 또 머리를 굴렸을 것입니다. 아, 이거 어떻게 할까? 다른 사람을 하나 사서 베냐민이라고 그러고 끌고 갈까.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백번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그 사람이 애가 베냐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베냐민과 비슷한 사람을 성형수술을 시켜서 옷을 입혀 보내면서 베냐민이라고 그렇게 틀림없이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렸을 것입니다. 반짝반짝 하는 머리입니다. 고수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인간의 잔재주를 버린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로 돌아간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합니까? 35장에서 새겨진 그것이 이미 상당한 세월이 흘러서 43장까지 왔는데,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반짝이는 것이 금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반짝이는 금과 같은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가? 참답게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인생과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과의 깊은 9절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지식이 막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렇게 머리로 아는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온 영혼이 그 지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참된 체험이 없는 진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참된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비유를 하나 제가 생각해냈는데 옛날에 70년 대 쯤에 너도 나도 중동에 가서 돈을 한없이 벌어오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월급을 세배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한물 갔습니다 여기가 임금이 하도 높아지니까. 세배를 주니까 엄청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필리핀에 있는 사람이 여기에 와서 가정부 노릇하면 삼 십 만원을 준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필리핀에서 최고수준의 의사들이 받는 월급이라고 합니다. 대학교수도 그만큼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도 서독에 광부로 가고 간호사로 가고 그러면 완전히 봉 잡는 그런 시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서 한 달만 일하면 자기네 거기에 가서 가정부 생활을 해봐야 3만원 밖에 못 받습니다.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 백 불을 받는다고 합니다. 8만원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때 거기에 가서 막 돈을 벌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애틋한 사연이 있습니다. 둘이서 남녀가 아주 좋아하다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계속해서 시름에 잠기며 잠 못 이루기에 왜 그러는가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잠시 헤어지자기에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여기서 이렇게 살아봐야 우리가 집 한 칸도 장만하지 못하니까 내가 사우디에 가서 이년만 모으면 집을 사서 살수 있다고 하니 부인이 싫다며 집에 없어도 좋으니 당신과 여기서 어렵게 굶고 살아도 혼자서 살기 싫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안 섭니다. 그날 먹어서 쓰면 없으니까 그래라, 그래서 헤어졌습니다. 거기에 가서 열심히 일하면서 일 년 하고 중간에 휴가가 있어서 한번 나오면 되는데 휴가를 안 나오면 삼백만원인가 절약이 된다고 해서 아예 안 나오고 이년 꽉 채워서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국제 전보가 와서 보니 당신의 남편이 공사장에서 추락해서 다쳐 몇 월 며칠 비행기에 후송되어서 온다고 하니 그 여자가 졸도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8층에서 떨어졌으니 죽지는 않았는데 후송되어서 온다니 한없이 울며 공항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얘기하는데 쯧쯧 하는데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설교의 본 대목에 가서는 쯧쯧 하지 않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의 신앙이 두 종류인데 하나는 깨닫는 것도 없으면서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고 습관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기도하지 못하고 의자를 막 그냥 덜컹덜컹 하면서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뭐 봤다고 그러고, 또 하나는 정 반대입니다. 그냥 이해하는데 그런 사람을 비유하자면 그것입니다. 내려오는데 한사람이 나갑니다. 몇 편 비행기지 하면서 가면서 계속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 남편이 큰일 났다, 우리 집은 이제 망했다. 계속 눈물이 뚝뚝 흘리며 슬픔에 사로잡혀서 가니까 비행기가 와서 트렉이 열리고 여보, 하고 비행장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리 남편 어떻게 하나. 그러는데 알고 보니까 화물칸에서 짐짝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분명하게 깨닫고 알아야지만 그 다음에 무슨 통곡을 하든지 말든지 행동을 할 것인데 이것은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뭘 느끼는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슬프다. 이것입니다. 우리 남편 어떻게 하나, 자기는 진지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말하자면 신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늘 벌벌 떨기 좋아하고 괜히, 물론 기도할 때 떨 수도 있습니다. 다 왕년에 나도 한 번씩 해본 사람입니다. 왕년 이야기가 나왔으니 요즘은 안 떤다는 이야기입니다. 떨 수도 있고 졸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나겠습니까? 죽은 사람도 살아났는데, 그런데 뭔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떤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또 한사람은 그 다음에 아주 냉철하고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조용히 하는데 오늘 설교 어떻습니까? 참 좋은 얘기 많이 하십니다. 그런 이야기. 남편이랑 같이 왔는데 이 사람은 너무 똑똑해, 이지적이고 전보를 펴놓고 대한항공 757기 딱 맞추어보고 아 맞구나. 몇 시 어, 11시 10분 비행기, 맞구나. 큰 비행기 그래 맞구나. 트렉이 열리니까 아 사람들이 내려오는구나. 자기남편이 들것에 실려서 내려오는데 다 깁스를 해서 알아볼 수는 없는데 윗도리가 갈 때 입고 간 옷이야, 병자가 하나 실렸는데 이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했고 한명밖에 없다고 했으니 이 사람의 이름이 우리 남편의 이름과 똑같구나. 저 옷이 내가 사준 옷인데 맞구나. 어, 내려오는구나.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내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뭘 느끼는가 하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경공부를 할 때 국어공부를 하듯이 관심이 많습니다. 책도 많이 보고 어디에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느끼는 게 없어. 그것을 또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것으로는 결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것은 우선 울기 전에 확인을 해야 합니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아, 그거다. 우리 남편이구나. 그러면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선 머리가 깨닫고 그 다음에 깨달았는데 어 그렇구나. 우리 남편이지 그럼 되겠어요.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날들이 한없이 서럽게 다가오면서 돈 좀 벌려고 갔다가 떨어져서 반신불수가 되어 돌아오는 장면이 눈앞에 스쳐가면서 그 옛날에 연애하면서 사귄 모든 것이 필름처럼 스쳐가면서 자기의 감정에 복 바치면서 눈물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볼 거 뭐 있습니까? 공항으로 뛰어가면서 그 남편을 얼싸안고 우는 것,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진리와 정상적인 신앙인의 만남입니다. 그러니까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다는 것, 괜히 감정적인 흥분을 잘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참 이야기하는데 레아가 불쌍해요. 사은품과 정품을 이야기하면서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성도가 눈물을 흘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설교자는 착각하는 게 아, 진리의 말씀에 녹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물어보니 레아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골교회로 성경학교를 갔는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분명히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도를 하는데 십자가를 전하는데 어쩜 아이들이 마음이 정말 고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완전히 심령이 녹습니다. 초등학교 애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울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우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거듭나지 않았는데 그 자매가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구나. 어린이 설교를 들으면서 드디어 주님을 영접하는구나. 그때 한참 운동권 이야기가 많을 때인데 나중에 왜 울었니? 하고 물으니 농촌에 사는 사람이 너무 불쌍해요. 가스레인지도 없고 뭐도 없고 그런 불편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눈물이 나기에 자기가 결심했는데 다음에는 용돈을 아껴서 연필이라도 보내주기로 했다는 것이 눈물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는 것을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만남이 있으면 거기에 반드시 감격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는 게 균형이 잘 잡히고 냉정한 것, 그것은 벌써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지금 야곱이 균형을 잡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치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이 야곱과 만나주실 때 가슴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주신 그것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슴에 확 새겨주십니다. 놀랍게 새겨주십니다. 그것이 잊혀지지 않게, 또 있습니다. 46장으로 넘어가봅시다.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어봅시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한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겠으며 요셉이 네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 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러온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의 처자를 태웠고 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그런 속에서도 이 야곱이 애굽으로 올라가면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건져내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47장으로 넘어가면 8절,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수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에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수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된 세월에 미치지 못하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깊은 특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야곱이 이렇게 깊이 철이 든 다음에 인생길이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까? 나그네길이라는 것입니다. 34장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그네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세겜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뒤로 넘어가면 48장 11절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에 돌아가게 하시리라.” 그렇게 하실 것을 야곱이 믿었던 것입니다. 50장으로 넘어가도 역시 똑같습니다. 24절입니다. 여기서는 그 아버지의 신앙부터 배운 요셉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4절 “요셉이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멩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믿고 있습니다.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매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느니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는 이 사람들이 아버지도 그렇고 아들도 그렇고 공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런 것, 그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요셉도 그렇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큰 뜻이 무엇인가를 눈치 챈 것입니다. 새로운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구원의 민족을 이루는 그루터기로 우리를 사용하시리라. 하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원대한 계획에 눈뜨게 될 때 말하자면 이 세상을 향하여 나그네 길이라 그리고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그러면서 장엄하게 손을 들고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갔을 때 당당하게 느껴집니까, 기가 죽은 것처럼 느껴집니까? 당당합니다.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13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하나님의 그 큰 부흥을 경험하면서 마지막으로 깨닫는 것은 인생은 풀이요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이 나그네 길이 130년이요, 야곱이 생각할 때 나는 나그네지만 당신은 나그네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나는 비록 이렇게 허름한 옷을 걸쳐 입고 짐승을 치는 사람으로 나그네지만 당신은 애굽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당신의 인생도 나그네길이요. 자기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할 때 바로 왕의 인생도 그 야곱 앞에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것입니다. 당당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벌써 사람이 이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사람이 된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여러분들이 왜소하게 느껴질 때가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열등감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 앞에서 정말 무력하게 느끼고 왜 그렇습니까? 부흥을 만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때 바로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임금을 다 합쳐도 바로에 못 미칠 것입니다. 그런데 목부에 지나지 않는 짐승을 치는 야곱이 손을 들어 축복하면서 내 인생의 길이 나그네 세월이었다. 바로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나그네 길이다. 왜 자기의 인생만 나그네 길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인생의 길은 나그네다.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사람이 평안한 가운데 나그네 길에서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습니다. 정품하고 사은품하고 싸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들놈이 서모와 통간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뭐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보내면서 그 모든 것들을 겪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굳게 세워진 하나의 계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거기에서 야곱의 모든 인생은 쉼을 얻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부흥이 일어나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때 여러분은 더 많은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벽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왜, 전에는 이정도만 살아가는 것을 덜렁덜렁 만족하며 살았는데 이정도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됩니다. 더 넘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대적들이 가만두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너희에게 주어진 그 능력, 그 큰 능력을 따라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이 결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고 원대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계획을 위하여 우리의 인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겉 사람이 후패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입니까. 골 패인 얼굴을 바라보면서 시름에 젖습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후패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오히려 후패해가는 우리의 육신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소망, 아, 우리 주님을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까워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얼마나 좋습니까?
가까워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젊고 이제 막 싱싱하게 자라는 사람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아니하고 애들아, 나는 그 많은 나그네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주님께로 가까이 갈 날이 내게 날마다, 날마다 가까워진다. 매일매일 희열 속에서 하루, 하루 육신이 후패해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보며 담대하고 장엄한 시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모든 기대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이제는 이름 누구, 누구를 가진 그 사람이 아니라 성도라고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 불림을 받아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았다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줌의 모래처럼 스러져갈 그 인생을 썩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런 인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아니하고 섬기고 살아가고 숨 쉬는 모든 것이 영원을 향하여 관계가 있는 그런 인생이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향하여 삼킬 듯이 달려오는 죽음 앞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찬양할 수 있는 주를 위해 살기를 원하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는 이 세상의 모든 파도와 물결 앞에서도 오히려 우리들이 담대하게 잠잠하라고 명할 수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인생의 시련의 때 속에도 우리가 쇠해가고 고통 받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도도히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속사람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비극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은즉 나도 너희를 버리리라. 모든 영적인 궁핍함과 가난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져다줍니다. 버리십시오. 하나님과 같은 꿈을 갖지 않고 주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방향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 신앙생활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옛날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믿은 그런 삶을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념하고 포기하고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일을 지키고 그저 십일조 몇 푼 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살아가다가 마지막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이 책임지실 수 없습니다.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시각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는 같은 시각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큰 부담을 주십니까?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내가 너희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게 말하라.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행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일은 너희를 애굽에 종 되었던 것에서 건져내어 사단의 권세에서 빛으로 그리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너희를 구원한 것이 아니냐. 행한 것이 무엇이냐. 일용한 양식을 너희에게 주었고 너희가 죄 사함을 간구할 때 내가 너희에게 용서를 주었다. 그러면서 지금도 살아가는 너희의 인생에 나로부터 주어지는 그 은혜로 살아가는 그 인생이 아니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열고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주관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계획에 박자를 맞추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계획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며 거기에 살아가면서 그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여시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그 음성을 들려주시며 하나님의 교통은 주님이 능력주시는 이런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에 친밀한 사랑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으니 그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려보고 그 한없는 하나님의 사귐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말할 수 없는 기쁨,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몇 절에 와 있습니다. 아직 34장입니까? 캄캄합니까? 주님의 음성이 안 들리십니까? 이제 1절입니까? 2절입니까, 3절입니까, 4절입니까, 5절입니까? 이제 드보라 죽는 일만 남았습니까? 자기가 어느 절에 와있는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비우고 삶과 영혼에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모으고 주님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나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친 돌이 되고 있는 것들을 치울 수 있게 해주시고 주님을 마치 내 인생에 박자로 맞추어주시는 분으로 생각했던 이 어리석은 착각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야곱과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