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9
목 차
악인이 앞에 있을 때(시 39:1) 31
내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2-5) 34
내가 잠잠함은(시 39:6-9) 38
주께서 징계하실 때(시 39:10-11) 42
영화가 사라질 때(시 39:11) 46
내가 눈물 흘릴 때(시 39:12) 50
건강을 구하는 기도(시 39:13) 55
시편56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시편39편 강해 1
악인이 앞에 있을 때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본문해설
시편 39편도 탄원시입니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때 ‘탄원시’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차있을 때 ‘찬송시’라고 부릅니다. 그 밖에 자신의 정체를 왕이라고 밝히면서 부르시는 시를 ‘제왕시’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르에 따라서 명칭들이 붙습니다. 이 시는 38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호소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악인이 앞에 있을 때
1절에서 시인은 자기의 상황을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라고 표현합니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4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악인이 내게 있을 때에” 이것은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은 일반적인 악인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은 근본적으로 나쁜 일을 행한다기보다는 본질상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의인’은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많은 약점과 허물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그분께 속하려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악인이 사람들에게 악을 행할 때 악을 행하는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서 옵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함이 없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앞에 있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구체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직면하여 그들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이때 시인은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라고 결심합니다. 혀로 범죄한다는 이야기는 악인이 자신을 향하여 나쁜 일을 행해서 큰 고통과 괴로움이 밀려들 때 누구든지 거기에 대해 반응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기 위해, 혹은 악인은 악을 계속 행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은 없는 것 같은 때, 하나님 앞에 불평하면서 혀로 범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아야 할 가장 절실한 순간에 그분과의 관계가 상처나고 그분 앞에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나 은혜, 이런 것들이 다 끊어집니다. 그러면서 인생 자체가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입으로 짓는 말의 범죄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를 줄 사람을 향한 미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나 원망으로 입술로 범죄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원망과 불평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이나 말로 나오기 전에 그 마음이 이미 변해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에만 그것이 있을 때는 마음에 있는 것으로 그치는데, 이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어서 밖으로 나올 때는 나온 것이 휘돌면서 마음을 더욱 더럽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뒤로 나오는 것이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힌다.”라고 하셨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말과 생각, 정신적인 것들이 행동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 이것들이 다시 되돌아가서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험에 들었을 때 자신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애를 쓴 것을 보면, 이렇게 경건한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었으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시험에 들고 악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보면 자신도 선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결국에는 마음에 악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악인은 적극적으로 범죄 하지만, 자신은 그 범죄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악인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나 평안할 때나 그 사람이 은혜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을 때 비로소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시 39:2-5)
괴로울 때 잠잠함
2절부터는 1절에서 구체적으로 내린 결심 즉, ‘시련을 당할 때 내 행위를 조심해서 범죄치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어떻게 이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절에서도 “내가 잠잠하자. 악인이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줘도 내가 침묵하자.” 그랬는데 단숨에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화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분노가 폭발하면 말부터 폭발합니다. 잠자코 있다가 화가 나니까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며 집어던지는 게 아니라 말부터 폭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감정이 먼저 있고 나서 언어가 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면, 설날에 만두를 만듭니다. 만두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든지 만두껍질은 하나의 반죽에서 나옵니다. 인간이 무엇에 감동을 받거나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서 출렁거리는 것을 만두를 만드는 반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희로애락이든 무엇을 크게 경험하면 큰 덩어리가 형성됩니다. 부딪치는 느낌이 거의 없으면 형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많은 글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느낌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의 정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감정에 커다란 덩어리가 형성될 때 그것이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지는 것이 만두를 하나씩 빚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원수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덩어리는 형성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밤새도록 떠오르는 것입니다. 가상 속에서 그 사람을 세워놓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내세우는 논리로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화가 나는 것입니다. 시인이 새로운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성화되어도 인간에게 희로애락은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그것이 모두 언어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표현하느냐 안하느냐가 성화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근심이 더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 화가 확 발하면서 감정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 때 시인이 1절에서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합니다. ‘자갈’은 말을 운전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을 당기면 입이 찢어질듯 아프니까 말이 멈추는 것입니다. 자갈을 어떻게 물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인생의 연약함을 깨달음
시인은 시련을 당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 인간의 생명의 길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자신의 존재가 정말 하찮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한 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잴 수 있는 길이인데 하찮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길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우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귀해도 오래 있지 않는 것은 귀하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이로 볼 때 하루살이는 정말 하찮습니다. 오늘 아침에 태어나서 오늘 저녁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별에 비교하면, 별은 몇 억 년, 몇 십억 년이 지나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인생이 팔십수라는 것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없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이 속해있는 곳을 우리은하라고 부릅니다. 약 2천억 개의 별이 있고 2천억 개 안에는 수성, 금성, 지구, 같은 것들은 해당이 안 되고 태양 같은 것만 2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은하라고 하는데 우리은하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입니다. 그것이 시속 50만km로 우리은하를 향해 돌진해온다고 합니다. 우리은하에 2천억 개의 별이 있고, 안드로메다 은하에 1천억에서 2천억 개 사이의 별이 있는데, 30억년 후에는 두 은하가 합쳐진다는 것입니다. 약 3천억 개의 별이 되는 은하가 되는 것입니다. 중력으로 끌어당겨지면서 별들이 합쳐져서 덩어리가 되는데, 약 1억년정도 걸린다는 것입니다. 10억년, 30억년, 1억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마어마하고 상상이 가지 않는 수입니다.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기껏해야 문자기록이 남겨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50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억년, 10억년 하니까 이해되지 않지만, 별들의 나이로 보면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없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됩니다.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사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관점자체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밖의 영원한 세계에서 나를 보는 관점이 있을 때 나는 속히 지나가는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가진 욕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이런 것 중 어떤 것이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없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나의 일생자체가 하나님 앞에 없는 것 같구나. 내가 든든히 서있는 때도 그림자 같을 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집착하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죽음의 빛 아래에서 비춰 보아야 인생의 참된 가치와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장사집에서 슬기를 얻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얽매이기 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순례자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잠잠함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시 39:6-9)
본문해설
시인이 고난 받는 상황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었습니다. 자기를 악하게 대하며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부분 이익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이 무엇인가 자기의 욕망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중에서 재물은 다툼의 이유 중 으뜸일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누가 취하게 될지 모르는 재물에 집착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고 구박하는 사람들, 이것이 인생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통해 깊이 알게 된 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신자에게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신자의 마음을 놀랍게 바꾸는데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마음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죄과와 잘못이 고통을 통해서 본인에게 밝혀지게 되고 그것을 버리는 정화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한 지상의 성도들 중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고통이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시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만약에 이 모든 것을 살아있는 인생의 과정 하나로만 보면 모든 것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것은 지상세계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형벌과 상급을 예비하셔서 거기에까지 맞닿아 공의대로 갚으시기 때문에 지상에서 불평등해 보이는 고통과 심판들이 모두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자신의 이익 때문에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지만, 시인은 이 문제를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악과 자기 사이에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
그러면서 고백하는 것이 내 죄과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경건한 시인이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가 지은 죄 때문이었다고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를 심판하고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를 혼내줄 권한을 악한 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런 권한을 부여 받았다면, 경건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벌 대신 상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경건한 시인은 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과 고통을 당하는 신자의 시각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게 되면 탈이 나는 것 같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마음 안에서, 환경 안에서, 혹은 사람을 통하여, 혹은 질병을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고통은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찾아올 수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입장에서 고통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받고 있고 악인의 행위가 부당하지만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기의 죄과와 자기의 과오 때문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잠잠해야 할 이유를 거기에서 발견합니다. 시인이 말하기를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 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인은 우리들이 흔히 행하는 것처럼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죄는 하나님 앞에 옳게 행하지 못하여서 마음 안에 죄과를 가지고 있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가 바뀌는 대신 고통의 도구일 뿐인 그 사람과 다투고 미워하며 살인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일을 섭리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한 반항이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향한 불순종이기 때문에 결국은 두 번을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가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연극배우일 뿐이고 모든 각본은 하나님에 의해 짜여지고 하나님이 연출하셔서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도구로서 내게 왔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라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비춰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그릇된 태도를 고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릇된 태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고치고 돌이켜 살 때 거기에 신자의 희망이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보증이 되어 있는데, 죄를 이기고 순종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의 공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용서와 자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그가 악을 행하였더라도 용서해주실 것이고, 그 악 때문에 필연적으로 짓게 될 더 큰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의 힘을 주십니다. 유혹을 받거나 어떤 오류에 빠질 것 같은 때 우리가 거기에 쉽게 빠져버리는 이유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 유혹에서 벗어날 마음과 정결함, 싸울 수 있는 내적인 힘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징계하실 때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시 39:10-11)
본문해설
시인은 비록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는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 사람이 자기에게 악을 행할 때 시선이 거기에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뜻으로 그 사람을 자기 옆에 두셔서 고통을 받게 하시는지에 대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원인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들 때문입니다.
지난겨울에 제가 책을 한권 완성하고, 가을사경회 때 <만물의 상호교통과 세계완성>이라는 시리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우리 교회에 계시던 집사님 한 분이 있는데, 포항공대에 교수로 계십니다. 수소문을 해서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글을 썼는데 아무래도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들은 당신이 보고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냈습니다. 읽어보고 2주 만에 나름대로 의견을 가지고 왔는데, 그분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글을 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목사님은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서 물리학에서는 ‘힘’을 어떤 물질을 운동하게 하는 운동력, 요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건이 움직일 때 뒤를 돌아보면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요인 없이 움직이는 물질은 없습니다. 틀림없이 바람이 민다든지 다른 물체가 밀든지 무엇인가 원인이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도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움직인 것이 있습니다. 계속 더듬어 추적을 해보십시오. 무엇이 움직였습니까? 그 뒤에는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성경이 떨어졌다고 합시다. 뒤돌아보니까 다른 성경이 이것을 밀었습니다. 이것을 왜 밀었나 했더니, 여기에 내 손이 있습니다. 손이 왜 밀었나 했더니 내 팔꿈치를 앞으로 쭉 뻗은 것입니다. 왜 팔꿈치를 뻗었나 했더니 어깨가 움직이면서 이것을 민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였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내 안에 있는 영혼이 정신을 민 것입니다. 영혼이 정신을 민 것까지는 정신세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신경다발을 통해 전기 작용과 화학 작용이 일어나고 이것들이 물질과 만나면서 민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구조 가운데 신경구조가 가장 복잡하고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움직이도록 마음을 먹거나 그 물질에 대해 명령하실 때 모든 것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너무 자연스럽고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와 똑같이 이 세상의 인간사 속에 일어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많은 일들은 단지 자연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보고 “이 자식” 한다고 해서 개가 우울해진다거나 견생에 위기를 느끼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행복했다가도 자기에게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 “이 자식” 하면 위기감이 느껴지고 ‘내가 왜 사나?’ 하는 회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부하직원이나 자기 자식이 그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에 위기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고통이라는 것은 단지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때리는 것만이 고통이 아닙니다.
시인이 느끼는 고통도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면 잠을 못자서 그러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 주셔서 그의 삶에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들이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친구였던 사람이 배신자로 변하고, 자기를 섬기던 사람이 변하여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자기 자식이 반역자가 되어서 자기를 제거하고 왕이 되려고 하는 질서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질서를 이탈했을 때 오는 고통
원하지 않은 자기 주변의 사물들의 질서, 이것이 바로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런 질서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 사물들의 움직임들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주님이 명령하셔서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일어나는 질서들의 원저자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입니다. 변론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어떤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라고 이야기해도, 그것은 힘의 원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서 오겠습니까? 힘, 생명이라는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움직임,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알고 보니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깊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에 정돈되어 있던 질서들이 움직이며 흔들려서 고통을 주게 될 때, 자기가 질서를 이탈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굉장히 커다란 불행입니다. 짐승과 다름없는 수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질서가 움직이기 전에 자기 마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를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참회하고 돌이키고 말씀을 통해 그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사물들이 움직이고 춤추기 전에 자기의 자리로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평안함이지 내적으로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데서 오는 불안함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은 질서의 이탈로 말미암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불안이 아니라 평안하고 안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안입니다. 사랑하면 불안합니다. 맨날 전화통을 붙들고 살고, 밤에 잘 때도 품에 안고 자지 않습니까? 연애하기 시작하면 박수치는 데가 있습니다. 이동통신사입니다. 전화 요금이 막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신 파괴적이고 절망스러운 불안이 아니라 온전함을 찾아가는 불안입니다. 그런 불안이 있을 때 인간은 생생하게 생기가 돌게 됩니다.
영화가 사라질 때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시 39:11)
고난을 통해 마음을 다루심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시인은 큰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복을 주셔서 그들로 형통하게끔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려고 애를 써도 자신 안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악과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삶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함에 있어서 빈틈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나 자신도 알지 못하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사는 일이란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허락하십니다. 오늘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면서 뉘우치게 된 것도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그의 일생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의 어려움의 크기라기보다는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크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인 파란만장하였다고 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으니까 환경적으로만 보면 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고난은 왕위를 잃어버리고 도망을 다니고 살해자의 위협과 추격을 당했던 데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환경과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내적으로 받았던 큰 고통, 그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큰 고난에도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고난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심령이 크게 흔들려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루고 싶은 것은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사고의 방식이 하나님을 향하게 될수록,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령해 질수록, 하나님이 환경으로써 다루셔야할 이유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환경이 뿌리째 흔들리고 물질의 공급의 줄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요동치면서 나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지 않아도 날마다 기도와 묵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전수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생활인 것입니다.
영화가 사라질 때
오늘 시편에 보니까 사람에게 영광이 있는데 하나님이 징계하시니까 이것을 좀먹는 것처럼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일 먼저 이것을 깨달은 계기가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닙니까? 범죄 하기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는 자신에게 영광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것은 중요성입니다. 가치, 그것을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중요성과 가치가 있고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어서 영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이 자기를 징계하시니까 좀먹음 같이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좀먹는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옷장을 열어보았더니 좀이 슬어서 조직을 갉아 먹고 옷은 헤져서 못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물건 자체를 못 쓰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중요성과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왕이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모든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시인도 인간이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 리 없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지상에서의 영화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를 지탱하며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 사람들에게 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간이라는 것,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 준다는 것, 내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인간의 자의식이라는 것은 결국은 관계를 통해서 입증이 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나 홀로 있으면서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평소에 하던 대로 강단에 올라와서 설교할 때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에 대한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분을 의존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변할 수 있는 모든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과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거기에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관계를 통해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게 됩니다. 관계를 통해서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게 옳은지 그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은 사람에게 있는 영광이라는 것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광이 하나님을 의존하여 있고, 하나님 때문에 영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각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앞에 기대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큰 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도 그 사실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찮아 보이고 주님은 매우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 흘릴 때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시 39:12)
본문해설
헷 사람들 앞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고백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나는 이 땅에 들어와 우거하는 나그네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기 고백이었습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은 자신을 이 땅에서 나그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한 나라의 왕이었고 이제는 더 이상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거류자’라는 말은 히브리어 뜻으로 보면 묵어가는 과객을 말합니다. 이것이 거류자의 의미입니다.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고 요셉 같은 사람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그곳은 진정한 자기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땅, 영토, 조국의 문제가 아니라 천성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나그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땅이 있고 지위를 갖고 영구한 영토를 소유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이 세상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들이 나그네, 또는 외국인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그들이 떠나온 본향보다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을 때
시인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었으나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져서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인생길은 나그네 길이요 자기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과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범죄하고 악을 행하며 사는 동안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욕망은 항상 죄와 우리를 하나로 연합시키고 세상의 끈끈이에 달라붙게 만듭니다. 찰진 세상 사랑에 빠져서 마치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고 이 땅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이고 이 이상 다른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울고, 세상과 함께 웃고, 세상과 함께 정들고, 세상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영혼과 마음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모든 힘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느냐 누리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칭찬하거나 높은 덕으로 칭송하지 않습니다. 부유하고 높은 권세를 지닌 것도 성경에서 덕성스러운 것으로 높이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관심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의지하고 그분을 향해 온전한 순종 속에서 살아가려는 마음과 영혼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서 그의 덕을 평가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세상과 하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세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과 한 덩어리가 됩니다.
문제는 시인이 욕망을 따라 범죄 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깊은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시 간절해지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복된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도 이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며 내 인생의 본질은 이 세상에서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매순간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시인은 “나는 주께 객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손님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분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언약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주께 객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주님께 낯선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늘 친밀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야할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낯선 자가 되고 주님 앞에 객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언제 그를 떠나셨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 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결국 “주께 객이 되었다.”라는 말은 예전에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경험하였던 아버지의 친밀함,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
주님께로부터 비춰오는 친밀한 사랑, 그런 것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것을 사라지게 했을까요?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던 애틋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그것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부모도 자녀도 아내도 남편도 교회도 목회자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시인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평안하게 살 때는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이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단절을 경험하고 난 후에 주께 객이 되는 것, 이 세상에서 거류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때쯤에는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 은혜를 다시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눈물은 자신에게 소중하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깨닫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주님을 찾는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고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간절한 눈물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시인의 경험을 보면서 우리에게 참으로 복된 것이 무엇이고, 고난인 것처럼 보이지만 복된 것이 무엇이며, 영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큰 어려움이 없을 때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되어서 흘리는 눈물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는 분이 아니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형통하고 좋은 길만 주시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박수와 갈채만을 받으면서 살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 깼습니다. 뒤척이다가 기도나 해야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5시가 조금 안 되었는데 어쩌면 날이 이렇게 포근한지 모르겠습니다. 마당을 한동안 어슬렁거리다가 교회에 왔습니다. ‘무섭게 춥더니 결국은 겨울이 가는구나. 오늘 이 계절의 변화를 매서운 추위가 꺾지 못하는구나.’ 기분 좋은 새벽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구나. 지금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너무나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지만, 지금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너무나 괴로워서 가슴 아파하지만, 결국은 좋은 것이 힘든 것을 꺾고 영광스러운 것이 부끄러운 것을 이기며 영원히 있는 것들이 잠시 지날 것들을 이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언제 끝나든지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깊이 매달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인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차라리 평소에 눈물을 흘리며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못 깨닫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에 빠지고 시련을 만나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구하는 기도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체력을 소진하는 참회의 기도
마지막 기도는 다윗의 회개가 얼마나 엄청난 강도의 회개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기를 “밤마다 눈물로 자기의 침상을 띄우고 내 몸이 수척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체력을 소진할 정도의 깊은 참회는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첫째는 그의 참회가 온 마음을 쏟은 참회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체라는 것은 육체 자체에도 좌우되지만 마음에 의해서 많이 좌우됩니다.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육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조금 고단하고 잘 먹지 못하면 육체가 상합니다. 잠을 자고 푹 쉬어주고 적당한 영양을 공급하고 운동을 해야 육체가 괜찮습니다. 그런 점에서 육체는 육체에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육체도 자연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든지 안정이 안 되면 많이 먹을 수 없습니다. 먹는 것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고, 먹어도 소화가 안 됩니다. 밥을 먹다가 안 좋은 소식을 듣거나 기분 나쁜 생각을 하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얹힙니다. 마음이 올바르고 안정된 상태가 안 되면 잘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많거나 괴로움이 있으면 푹 쉬거나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 때 경쾌하게 운동하는 사람 봤습니까? 결국 육체의 모든 것을 휘두르고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와 정신이 마음 안에서 신기하게 만납니다. 만약에 아주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면 몸에서 액을 냅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거나 싫은 사람을 만나면 몸이 그런 것들을 분비합니다. 그런 것에 의해 육체 전체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들이 나오는지는 아직까지 학자들도 모릅니다.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이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기도는 자기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했는가를 보여줍니다. 한 번 애달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고 해서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빌 정도로 건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회개의 정도가 그 마음 전체를 움직일 만큼 쏟아 붇는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가 일주일을 금식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확하게 10kg이 빠졌습니다. 아주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리니까 일주일동안 10kg이 빠진 것입니다. 그 때 하나 깨달은 것은 오래 금식기도하면 살이 많이 빠지고 적게 금식하면 적게 빠지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것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강도에 많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그토록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기도를 볼 때 정말 부끄럽습니다. 과연 건강이 상할 정도까지 하나님 앞에 매달려본 적이 있을까요? 결국 한 사람의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매달리는 기도는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중함을 깨달음
시인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통해서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깊은 신앙의 경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받으며 주님과의 불화가 거의 없는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늘 햇빛 속에 있으면 그 햇빛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행복하게 해주셔도 그 행복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일단, 그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으면 하나님도 인간을 만족시키실 수 없습니다. “당신 자리에 내가 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구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께 눈을 떼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오로지 바라보게 될 때에만 인간은 싫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기쁨과 행복은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안주셔서 인간의 자원이 고갈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해도 인간이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받으면서도 그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 가출한 자식들은 부모가 애틋한 마음으로 자기를 기다리며 찾고 눈물지어도 일단 세상의 재미있는 것, 가정을 떠나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 이런 것들에 몰두하다 보면 부모의 애틋한 눈물, 사랑은 변함없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인의 건강을 위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된 하나님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전심으로 그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
그러면서 그는 건강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는 나를 용서하사”라고 빌고 있습니다. 용서 받기를 원하는 시인에게 있어서 용서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가장 크고 절실한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에 대해 담대해지게 됩니다. 죄의 특징은 담대함과 맹렬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진정으로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회개의 동기는 제공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회개시킬 수 없고, 죄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진정으로 보여주지만 그 죄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깊은 고통 속에서 혼란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돌이키는 일은 너무 쉽고 비용이 들지 않는 일인데 심판 받는 일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돌이키기는커녕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인간이 마음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려고 하는 점에서 인간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봅니다.
우리의 마음의 거리라고 하는 것은 자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하나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이 거지같은 인간들, 이 빌어먹을 세상’ 이렇게 보면 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모두 다 정리해버리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인간들, 풀잎의 이슬같이 가엾은 존재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의 형상을 받은 존재들’ 이렇게 생각하면 모두 불쌍한 것입니다. 마음의 거리가 얼마쯤 되겠습니까? 물리적인 길이로 잴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의 움직임인데 그것에 의해 인생 전체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상태에서 위선적으로 살아왔지만 이 순간에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녹아지고 상당히 긴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그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고 예전에 자신에게 베풀어주셨던 사랑과 자비를 다시 베풀어 주시기만 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왕위가 아까웠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귀영화가 아까웠겠습니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의 회복을 구함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어두움이 있지만 주님 앞에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이 되시고 그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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