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유혹이김의 교리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시험과 유혹 (마26:41上) 2002.8.11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1
2. 시험에 든다는 것 (마26:41上) 2002.8.12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20
3. 언제 시험에 드는가? (마26:41上) 2002.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47
4. 깨어 있다는 것 (마26:41上 ) 2002.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63
5.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1):거듭 구함(마26:41上) 2002.8.18 주일오후 80
6.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2):그리스도께 피함(마26:41上) 2002.9.1 주일오후 91
7.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3):구원의 약속을 붙듬(마26:41上) 2002.9.8 주일오후 103
8.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4):시험의 경로를 살핌(마26:41上) 2002.9.15 주일오후 118
9.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5):경건생활을 회복함(마26:41上) 2002.9.29 주일오후 129
1. 시험과 유혹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할 수 있으면 조금 씩 조금씩 메모를 하시면서 들으셔야 될 정도로 내용이 많습니다. 그대신 계속 필기하지 마시고 간략하게 메모하시고 그리고 다시 설교에 집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고 설교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첫 시간에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 1번을 설교하면서 오늘 그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다루어 보고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는데 첫째는 시험의 특성, 두 번째는 인간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세 번째는 시험의 기원 그리고 네 번째는 시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시험아리고 할 때에 흔히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이 시험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결국은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시련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를 죄에 빠뜨리는 시험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어떤 분들은 시험을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으로 나누면서 이제 시험을 다룹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물론 시험에는 그런 시험도 있고 저런 시험도 있어서 그러한 구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그 시험은 원래 시작될 때서부터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다루어져야 될 것인데, 그 시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어느 설교자의 표현처럼 그 결과가 창조적인 시험이 되기도 하고 파괴적인 시험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느냐? 안 시험하시느냐? 하는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시험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소위 이야기하는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을 다르게 묘사하지를 않고, 동일한 희랍어 단어로 기록합니다. '패이라조‘ 라는 단어 에서온 패이라스모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것은 결국의 의미는 뭐냐하면 시험을 해서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의 일반적인 특징은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한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즘은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 아주 뛰어납니다. 심지어는 건축물 중에서 돌을 붙인 것도 유심히 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면 이것이 인공으로 만든 가짜 돌인지, 아니면 산에서 캐온 진짜 돌을 가공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가끔 가서 건물을 보면 어떤 때는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손톱으로 긁어도 보고, 자동차 키로 문질러도 보는데 그런데 그래도 역시 저의 짧은 지식을 가지고는 그것이 진짜 돌인지, 아니면 가공해서 만든 돌인지 결국은 구별을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로 만든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전문가들이 아니면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떼어 내어서 혹은 갈아보기도 하고 혹은 어떤 사람들은 혀끝에다 맛을 보기도 하고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약품을 묻혀보기도 하고 하면서 정말 그것이 자연적인 제품인지, 가공의 제품인지 하는 것들을 구별해 내는 그 과정을 가리켜서 희랍어로 말하자면 ‘페이라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나 일차적인 의미로서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그것이 우리의 시험의 일방적인 특성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렇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이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순수함이 어느 정도 인지를 하나님이 시험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심,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거룩한 성화의 진실한 정도를 하나님 앞에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험의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일반적의 의미 못지않게 시험에는 또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특별한 의미에서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우리들이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만은 시험이 특별히 우리를 죄에 빠뜨리게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각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그러니까 시험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우리들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우리 보고 성경이 권면하기를 “너희 자신을 스스로 시험하라고 그렇게 권면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시험은 우리를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시험의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이 혹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실험해서 그래서 우리 자신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과 거룩의 정도를 입증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그런 권면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특성에 있어서는 이 시험이 우리를 죄로 몰고 가고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죄 가운데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각력한 힘이 있는데 사실 오늘은 총론적인 것들을 살펴보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설교에서 우리들이 한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템푸테이션' 유혹과 죄에 빠지는 이 문제를 우리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시험을 이야기할 때에 아주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들을 시험하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그 시험의 과정을 혹독하게 통과하게 하시는 것일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결국 우리를 축복해주시기 위한 것일까? 하는 이런 의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실까? 인간을 시험하시는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은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 시험을 통해서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심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 시험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새롭게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인간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시험하신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실 우리는 정말 속기 쉬운 피조물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들은 신뢰할 수 없는 면들이 많고, 더더욱 인간을 존재 그 자체가 자기 사랑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전개되지 않으면 사실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 판단에는 오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해본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충격적인 자각이 있습니다.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 하면서는 자기가 제법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동안에는 자기에게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 지체들을 조금씩 도와주고 넉넉하지 않은 생활비에서 이렇게 저렇게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할 때에는 상당히 지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신앙이 굉장히 성숙해 있고 좋은 주님의 사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환란이 오거나 시련이 오거나 아니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는 난관들이 밀어닥칠 때 그 때에 그 한순간에 자기 자신이 이제껏 까지 지탱해 왔던 삶의 형식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그 때 비로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야, 내가 이정도의 믿음밖에 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시험을 당하고 보니까 내가 정말 믿음음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누리게 하셨던 그 평안하고 좋은 환경들이 모두 사라져버리자.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평과 원망, 그리고 형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껍질뿐인 사람이었구나, 겉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지만 속에서는 온갖 이기심들이 한 덩어리가 된 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내 삶 이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험을 당하기 전에는 어떤 환경이 우리를 이렇게 시험해 보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 모릅니다.
저는 벌써 오래된 일입니다 만은 목회를 하기 전에도 목회를 하면서도 두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9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면서 저는 한순간도 “내가 이 세상에서 교수가 된 사람처럼 그렇게 내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9년 동안 두 신학 대학에서 몸을 담으면서 특별히 첫 번째 한 대학에서 4,5년을 지내면서 교회와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흘린 눈물은 개척 교회를 하면서 5년 동안 흘린 눈물보다 훨씬 많을 정도로 그렇게 가슴 아픈 기도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교회에, 목회에 전념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뜻을 세우고 학교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 자신이 한번도 신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목사로 잘 길러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라고 보내주신 이 자리를 내가 누리고 있다든지 세상에서 생각하는 지위와 신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든지, 꿈에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부유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저는 시험 당했습니다. 그 사건은 분명히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사건을 통해서 저는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제가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어느 날 교회에 나 자신의 몸을 위탁하려고 하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교수 사택을 얻으라고 학교에서 빌려준 것을 값 아야 몸이 풀려날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생활비가 정확하게 3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에이, 사람이 믿음으로 살지 돈으로 사나,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그랬는데 그것도 반도 아니고 3분의 1로 줄어들고 나니까 갑자기 생활이 너무 불편해지게 되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신용카드 한 장을 내려 해도 이제는 가보니까 그 때는 교회가 설립도 안 되었을 때입니다. 은행에 가니까 제가 무직자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실직자 내지 무직자로 분류가 되어 있고 소득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드 한 장도 낼 수가 없고 심지어 미국 비자를 내려고 해도 서류를 이만큼을 해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학교에 있을 때는 제직 증명서 한 장만 떼어 가면 서로 내준다고 했을 판인데 번역하는 사람을 붙여서 서류를 이만큼의 뭉치를 가지고 가도 면담 한참하고 그리고 비자를 받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교원으로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 자신을 혼자 조용히 살폈습니다. 갑자기 위축되는 것을 느끼면서 초라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교회 사무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것 봐라. 이제껏 까지 너는 그렇게 장담하고 살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이 너를 시험하시고 나니까 결국은 그 시험을 통해서 사람이 보기에 많은 것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네 안에 있는 옳지 못한 것들만큼 섭섭해 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괴로워하지 않느냐?” 저는 그 사건을 통해서 아주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인간은 정말 하나님께 시험 당하기 전까지는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 받았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죠? 자기 깨어짐이 무엇인지 맛보 보았죠? 그리고 예전에 어깨동무 하며 같이 신앙생활 하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는 황당한 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었죠? 그러나 인간의 내면의 세계는 양파 껍질 같아서 벗겨내고 벗겨내도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갈피갈피에 숨겨진 그 사람의 참된 내면의 세계의 그 무엇을 시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드러내실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속에 옳지 못한 것이 있는 것,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옳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보시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적하셔도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 저 얘기는 나하고 상관없어, 아, 저 얘기는 아무게 집사가 와서 오늘 꼭 들어야 되는데, 그 인간만 깨지만 우리 교회에 평화가 오는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막 야단을 치셔도 항상 “아이, 사람들이 왜 저렇게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리지.”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이 야단을 치셔도 자기는 자기 스스로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이, 좀 나만 같아도 안 그러실 터인데” 그래서 하나님만 알고 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도 이것은 적용이 됩니다. 저는 소원이 수영을 잘 하는 것인데 저는 수영을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수영을 잘해서 파도가 철썩철썩 칠 때에 그 파도를 가르면서 한번 수영을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영 잘하는 사람 많이 부럽습니다. 그런데 수영 배운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수영은 영어 공부하고 비슷하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가고 물어보았더니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계속 물 먹으면서 펄썩펄썩 대다가 어느 날 해보니까 확 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수영장을 가로지르면서 인어처럼 헤엄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입증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죄와 악함도 우리가 모르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도 어느 정도인지 모릅니다. 그렇죠. 큰 시련이 밀어 닥쳐오면 그냥 하나님만 의지했는데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다시 그런 시험이 온다면 그 때처럼 내가 신앙 하나로 살수 없을 것 같은데 하여튼 그 때는 그것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면 내 자신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교만하게 작용하면 넘어지는데 도움을 주지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 믿음에 있어서 인정받고 확증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 의식이 부정적으로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사용되면 신앙에 담대함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죄든지, 혹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든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가장 정직한 것입니다. 이 껍질은 사실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의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시는데 두 가지를 통해서 자기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우선 첫 번째는 뭐냐면 시험을 막아주심으로서 시험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막 괴롭고 어려운데 그 속에서 그 시험을 막으면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눈앞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 당하기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자기를 맡길 수 있는 그런 신앙심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항상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학교로 말하자면 제 네들은 앞줄에 앉아서 늘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학생들이고, 그리고 자기는 저 뒷줄에 앉아서 그저 오면 왔다보다. 가면 갔나보다. 그저 하나님의 관심을 조금밖에 끌지 못하는 그런 소외감을 느끼던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가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시험 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 때에 그때에 우리는 마치 어떤 착각에 빠지느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모두 통치하시는 일을 잠시 휴업하시고 오늘은 내 문제만 가지고 다루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온 세상에 세상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른 지체들도 없고 오직 나와 하나니 밖에 안 계신 것 같은 그런 깊은 인식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에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인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인식들이 생겨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험을 막으심으로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이 시작 될 때에 혹독한 시련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의무를 하나님이 부과하시기도 하고 환란과 핍박이 오기도합니다. 그래 처음 맞이할 때에는 벌판에 서서 혼자 그 시련을 당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시험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 시험을 막아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때 비로소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자기고 계신 그 마음과 뜻, 성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시험을 당하기 전에는 열등감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으실까?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님 대면하기 싫듯이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과하게 하실 때에 그 때에 그 시련의 폭풍 속에서 그를 강렬하게 붙드시는 그 과정, 시험이 강력하게 엄습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 시험의 폭풍 가운데서 안전하도록 당신의 날개 그늘아래 보호해 주시는 시험을 막아주시는 은혜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 하시는구나“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를 사랑하사
내 방패 되시니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이 하나님만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오히려 필요한 것이 이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여러분들도 그런 시험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큰 환란, 그것이 내가 잘못했던지 잘못하지 않았던지 어쨌든지 간에 큰 시련과 환란을 당합니다. 내가 잘못했어도 그래도 환란이 와도 내가 믿음으로 이기면 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하지 않아서 당하는 시험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거기에 굴복하고 유혹에 떨어지면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련을 당하는 분들 여러분들 가운데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인생의 길이 막히고 무엇 하나 형통한 것이 없고, 믿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위로는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이 첩첩 산중처럼 쌓일 때, 그 때에 여러분들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속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그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그 시험을 막아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작게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두 번째 방법은 그 시험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시험이 와서 환란이 많이 불어 닥치는데 그 시련의 과정이 혹독하게 전개가 되는데도 그래서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빠졌는데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많이 보여주시니까 그 시험에 임하는 나 자신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련은 계속 되는데 그 속에서 예전에 전혀 그럴 수 없었던 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놀랍도록 새롭게 되어지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모두 망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까 폐허가 되었습니다. 다 부서졌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그러는 사람들은 이제 자기 집에 있는 보물들을 가지고 나와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는데도 자기 집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나와서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면서 양식을 바꾸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일에 오히려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말발굽 아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성, 그리고 성전까지 모두 부서진 그 광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사실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백성을 버리셨다. 라고 하는 이 흔적밖에는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조용히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진멸하시되 완전히 파멸로 몰아가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깨닫게 하셔서 그 그루터기를 남기시고 그 백성들을 다시 새롭게 새우시는 그 한 방법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고 나니까 눈에는 변화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 부서진 예루살렘이 오늘도 부서진 그대로 있고 그리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유리하는 그런 비참한 난민들이 가득한 그 때에 그 파괴된 예루살렘 터 위에서 선지자가 홀로 찬송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한 주님
예루살렘을 파괴시킨 적군들이 몰살을 당한 것도 아니고 하늘나라의 군대가 이 땅으로 내려와서 원수들을 진멸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셨을 뿐인데 어제는 흐느껴 울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늘은 마음으로 두 손을 높이 들고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주의 인자와 자비, 그리고 성실하신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왜?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낙망하던 선지자의 마음을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인간은 환경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면 살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러니까 불 가운데를 통과하고 물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노래할 이유가 없는데 찬송하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한명 있었죠. 누구입니까?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하고 정신을 못 차리니까 하나님이 갈 대아 사람들을 보내서 그들을 진멸하실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미리 보는 비디오처럼 쭉 보니까 다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무화가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그리고 외양간에 송아지도 없어졌습니다. 왜 없어졌습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니까. 그런데 그 속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하박국 선지자가 예전에 고민했던 것, 왜? 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있는 이 악을 하나님이 징벌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진짜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것일까?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이렇게 내더려 두실까? 그랬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을 보았는데도 그렇게 기뻐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상황이 그를 찬송하게 하는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새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신앙이 어릴 때에는 항상 하나님이 환경을 가지고 인도를 해 주셔야 지만 비로소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고 믿는 것이 사실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놀랍게 그 시험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정탐꾼 들이 와서 다른 보고를 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 렙이 “그들의 보고는 사실이다. 진짜 우리는 메뚜기와 같고 그들은 크고 그리고 요새가 있고 그리고 그들은 강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예전에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시련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그 시험들을 이기게 하시는 과정들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은혜로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시는 믿음의 갱신의 과정을 함께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는 도저히 그 엄청난 가나안 족속을 어떻게 무찌를 것에 대한 계산을 방정식처럼 풀어서 사람들에게 보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저희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셨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시험이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알아 가게끔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에서 크게 두 번째로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시험하실까?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커다란 의무? 커다란 책임, 혹은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될 큰 사명을 주심으로서 그가 정말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만 그 속에 진정으로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창세가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아주 굉장히 커다란 이무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 이 삭을 재물로 바치라는 명령 이었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 이삭을 향한 사랑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셔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사랑하는 것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쐬기를 박으시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내가 평범하게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그 선, 이상의 것을 나에게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내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정말 내가 시험을 이기고 너의 속에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선택에 기로에 놓여보신 때가 있죠. 그래서 자신의 양심도 아주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의지를 뚜렷하게 이것을 원하신다. 라고 하는 것을 아주 뚜렷하게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 때에는 내 뜻도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그렇게 살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가 명백해지게 되면 그 다음에 내 의지가 그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뜻이 하나님과 배치되고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하면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이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저울에 달립니다. 그래서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아는 일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나는 가고 싶은 길이 있는데 이미 상당히 왔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물어보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물어 본다. 라고 하는 것은 보통의 용기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 안하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기왕에 제가 시작했는데 좀 밀어주세요.”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기왕에 내가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다시 돌아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밀어주세요.” 그리고 자꾸 능력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만 달라하고 그리고 이제 “나는 이 길로 가기로 했으니까 능력을 주시옵소서. 밀어 주시옵소서. 환경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참 딱한 것입니다. 그런 씨름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큰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하심으로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시고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아픈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정말 우리의 믿음이 참된가 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하심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방법은 큰 고난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그 명령은 사실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이라기보다는 이행하기 어려운 무거운 의무였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큰 풀무불과 같은 시련을 통해서 그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심으로서 성도 안에 있는 이 더러운 내면의 세계의 불순물들을 주님께서 그 찌꺼기 들을 걸러 내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유혹을 받아서 변절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변절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두개는 사실은 동일한 무게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유혹의 경우는 유혹에서 이긴 것은 별로 간증거리가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혹에 이긴 것이 무슨 국민 일보의 신앙 간증으로 나오겠습니까. 뭐라고 나오겠습니까? “내가 어느 날 이러 이러한 더러운 욕심이 막 일어나고 그랬었는데 그 유혹을 내가 이겼다.” 그런 간증 거리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시련에서 이긴 것은 아주 훌륭한 간증 거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시련에서 이긴 간증은 우리들이 많이 듣는데 유혹을 이긴 간증은 상대적으로 별로 못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시련을 이겼다는 간증은 많이 듣고 유혹을 이겼다는 간증을 많이 못 들으니까 유혹은 우리를 대부분 다 파괴하고 그리고 시련, 고난, 이런 것들을 잘 승리하고 이기는 길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힘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가만히 보면 자매가 먼저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정말 하나님께 은혜 많이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생활 잘 하고 나면 가정에서 박해가옵니다. 때로는 믿는 가족들을 통해서도 박해가 올 때도 있고 시련과 혹독한 환란을 지나면서 그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그러한 그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잘 통과하는 지체들도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시련에 지고 넘어져서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지체들이 없지 않습니다. 똑같이 힘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살면서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시련이 훨씬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련도 어렵고 유혹은 이기는 것도 모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그런 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가 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같은 시험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렇게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믿음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지만 불같은 시험을 당하는 지체들 있죠. 그리고 견디기 힘든 눈물겨운 핍박 속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있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시험하시는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뭐냐면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심으로서 또 우리를 시험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명기 같은데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인데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점치고 마술하고 이러는 사악한 사람들을 많이 생겨나게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너희들이 정말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나 여호와만을 사랑하는가? 경외하는가?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자기를 향한 진실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려내시느냐? 이런 논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죄악 된 세상에서 전혀 유혹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유혹을 받으면서도 그 유혹에 대해서 대적하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를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고 하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신이 많은 것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세상이 자신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라고 하는 그 타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커다란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하시든, 환란과 고난을 만나게 하시든, 혹은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든 그 모든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뭐냐면 우리 안에 무엇이 있으며,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새롭게 하시는지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에게 성취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로 영혼이 잠들게 하지 않는 자극제이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결심을 갖게 만들어 주는 그런 중요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은 이제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시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크게 세 가지로부터 오는데 하나는 사단으로부터, 또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또 하나는 부패한 육신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기원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사단으로부터, 하나는 부패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또 하나는 부패한 육신으로부터 시험이 오게 되는데 그런데 그 세상으로부터도 오고, 부패한 육신으로부터도 오는데 궁극적인 시험의 궁극적인 원인자는 누구냐면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보면 사단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인간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 갑자기 더러운 생각을 집어넣기도 하고, 신성 모독적인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그래서 인간의 부패한 욕망이나 아니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언뜻언뜻 인간에게 그런 것들을 주입시키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단은 결국은 두 번째로 세상을 사용해서 인간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온 세상 천하를 보여주면서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한 것처럼 그렇게 인간이 갖고 싶어 하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그것을 가지고 인간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은 반드시 우리가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 시험은 우리들이 번영하고, 그리고 태평한 가운데서도 이런 시험들이 오는 것입니다. 안일하고 아무 문제도 없이 자신의 인생이 승승장구 하는 것 같은 그 때에 조용히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병들기 시작하면서 이런 세상을 활용해서 인간을 꼬이는 이런 시험에 우리는 직면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가장 커다란 시험인데 그것은 뭐냐면 이제 이 부패한 우리 인간의 부패한 내면의 세계를 사용해서 그래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지만 그러나 부패한 인간을 그 자신 속에 부패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단의 꼬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시험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힘이 바로 부패한 자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한 욕망을 이용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욕망이 그것들을 붙들어서 때로는 세상과 함께 부패한 욕망이 짝을 이루면서 시험이 역사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이러한 부패성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부패한 욕망을 가진 그 때에 어떤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 점 점 점 크게 다가오면서 이 부패한 욕망과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자기의 집착을 이용해서 함께 결합하면서 그러면서 인간을 끊임없는 시험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입증할 기회를 받고 또 한편으로는 잘못해서 특정한 죄로 이끌림을 받아서 결국은 깊은 악에 빠지는 그런 불행한 상황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 세상과 그리고 부패한 우리의 욕심,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시험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사단의 세력조차 그들이 결합해서 사용하는 그 시험의 방법들은 정말 무궁무진하고 우리들이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고 삶에서 만나는 모든 다양한 환경들이 결국은 시험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아주 강렬하고 놀라운 그런 역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보태신 기도가 있었는데 “다만 악에서 구해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시험과 악이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들이 시험을 당하기는 해도 그 시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 시험 속에 들어가서 악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이 불행한 일들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도대체 이 시험이라는 것이 그러면 무엇인가? 그리고 결국 이 일방적인 시험을 하나로 놓고 볼 때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면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시험이라고 하는 것을 어느 범위까지 봐야 되겠는가? 하는 그 문제와 특별히 이번 집회 기간동안에 우리들이 관심을 갖고 싶어 하는 이 유혹의 문제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펴보아야 하는가? 하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시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들이 가져야 되는데 우리들이 흔히 ‘시험이라‘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을 ’큰 환란‘ 그리고 엄청난 핍박,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방향으로 유혹을 받아서 금방 죄에 빠질 그런 위험한 상태, 이런 것들만 가리켜서 우리들이 시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시험에 들었다. 그럴 때에는 이미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적으로 넘어진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시험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아, 저 사람은 시험에 들었어, 그래서 요즘 교회에 안 나와” 엄격하게 말하면 교회조차 안 나오는 것은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격적으로 보면 “시험에 들었다.” 라고 하는 “시험을 당 한다” “시험을 받았다” “시험에 들었다”라고 하는 것 할 때 거기에서 시험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교회를 안 나오고, 그다음에 기도생활도 안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 자기의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고, 이런 것을 시험이라고 말하고 거기에 들어갔다. 그러면 실제로 그런 일을 안 하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시험이라고 말하거나,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시험에 들었다” 할 때는 그가 바람을 폈다. 아니면 세금을 떼먹었다. 절도죄로 구속이 되었다. 그런 구체적인 범죄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겨우 시험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하면 시험에 들어가서 망가지기 전까지 시험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연초에 “마음 지킴이의 교리”를 했습니다만 가장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도록 동기를 부여받은 훌륭한 기회가 어느 때 입니까? 시험을 당할 때 입니다. 내가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수시로 자기의 마음을 노략질 하려는 어떠한 상황이나 세상, 혹은 마귀의 움직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힘든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 라고 다짐하는 사람들은 뭐냐면 수시로 자기의 마음을 누군가가 훔쳐가려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이제까지 생각해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악이나 죄와 거의 동의어로 쓰여 졌습니다. 혹은 환란이나 시련과 동의어로 쓰여 졌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시험이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시험 자체가 아니라 시험 속에서 져서 성취된 어떤 결과를 어떤 시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험에 완전히 들어가서 이기기 힘든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면 경계해야 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살다가 이것이 시험이다. 라고 인식하게 된 때에는 이미 늦어버린 그런 상황을 만나데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이런 안일한 견해 때문에 사실은 성도들이 마음을 지키면서 살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설교 되겠습니다 만은 그런 시험에 대한 구태의연한 이해 때문에 사실은 깨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이 의미조차도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 가르쳐 주시던 그 선명한 의미들이 오늘 우리에게 그처럼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고 있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자 존 오 웬 은 시험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시험이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죄에 빠지게 하는 모든 상태, 모든 방법, 모든 상황인데 그것은 종류와 등급을 불문하고 시험에 해당된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시험이란? 신자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해서 죄에 빠지게 만드는 종류와 등급을 불문한 모든 환경과 상태와 일, 모든 것이 시험이다.” 그러니까 그 시험에 대한 견해 자체가 우리들이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시험에 실패한 어떤 결과들을 겨우 시험이라고 말하는데 이분의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복음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우리들이 이렇게 충만한 시험 속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보십시다. 어제는 시험이 아닌 것이 오늘 시험으로 돌변 할 수도 있고, 어제는 시험일 수 있었던 것이 내일은 시험이 되지도 않을 수 있는데 이것은 수시로 마치 살아났다. 죽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수많은 생성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가시죠.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다윗에게 왕이 되게 만드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누가 다윗을 왕 되게 만드셨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다시 말하면 다윗으로 하여금 한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게 만드는 그 상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죠.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 상태에서 그런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다윗은 타락했습니다. 그렇죠. 지혜는 분명히 솔로몬이 간절히 구하니까 하나님이 그 솔로몬을 너무 기뻐하고 사랑하셔서 그 믿음을 보셔서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타락의 상황들을 성경에서 읽으면서 이 사람의 이 철저한 타락은 그의 천재성에 기인한다. 라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렇죠. 너무 머리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세워주신 왕 자리인데 그것이 어떻게 시험이 되나? 왕이 된 것이 어떻게 시험이 되나? 하나님이 세워 주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시험이 되나?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지혜 그 자체가 시험이 되다니? 시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참 잘못 살다가 기껏 하는 이야기가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것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 하고 그것 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직장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주셨는데” 누가 아니래요?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 위를 주셨지만 왕 위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이 왕 위에 있는 동안은 왕으로서 가진 권력과 그 위엄이 절대로 다윗의 신앙에 누가되지 않겠다는 것까지 하나님이 보장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그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솔로몬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절대로 주님이 주신 그 지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우는 데는 사용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게 그것을 막아 주시겠다. 라고 하는 보증이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은 이런 생각들을 올바로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게 하신 사업인데” 그러니까 큰 시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뭐냐면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사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은 다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업을 주셨어도 정직하게 그 기업을 해 나가고, 양심적으로 그 기업을 해 나가고, 그 기업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책임질 문제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그냥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적은 아주 분명히 시험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데 우리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수많은 복병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비유입니다. “아휴, 적은 무슨 적이야? 적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동산인데” 그리고 제멋대로 살다가 날아오는 불화살에 한대 맞았습니다. 그 옛날에는 그 화살에 독을 발라서 쏘았습니다. 한방 맞으면 죽습니다. 독이 막 퍼져갑니다. 막 살려 달라 그래서 어떻게 해독제를 발라서 나았습니다. 그랬으면 즉시 “이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날아온 화살일까?” “약속의 땅에도 복병이 있는가?” 그러면 날아오면 즉시 자기가 아직 확인은 안했지만 그러나 숫자 미상의 정채 불명의 적들이 내 삶의 현장에 도사리고 있고, 어디서든지 이 화살이 날아와서 나를 치명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하고 일단 적이 있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 적이 무엇일까를 성경을 통해서 탐구해 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쾅 얻어맞고 막 가서 살려 달라. 그래서 해독제를 맞은 다음에 그다음에 뭐라고 하느냐면 다 아물고 통증이 가시고 나니까 “없지, 내가 무엇인가 잘못 알았겠지, 주님이 보내주신 곳인데 그런 화살이 날아올 수가 있어 이것은 지금 내가 무엇인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리고 지나가다가 결국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고슴도치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를 여기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여기는 약속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사람이 한두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세워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을 이러한 청교도들은 꿰뚫어 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냐? 안 주셨느냐? 그런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의 자체가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죄에 빠지게 만드는 모든 상황, 상태, 일, 소유, 모든 것이 시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느냐? 안 주셨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오늘은 시험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내일은 안 되고 자꾸 사라진다고 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 위를 주셨죠. 그 왕이 왕의 권세를 받자마자 그 왕이 권세를 사용해서 계속해서 타락으로 일관된 삶을 다윗이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는데 놀라운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를 받자마자 순간적으로 확 돌아서서 그래서 그 지혜로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을 욕보이는 삶을 시종일관 살다가 죽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런 지혜가 없었더라면 하나님께 그렇게 영광 돌릴 수 없었을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비유를 하는데 불을 이렇게 피우다가 솔로몬이 지혜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불을 피웠을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그 지혜는 그 위에 끼 얻어지는 한 박스의 기름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확 타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이 온 누리에 두루 비쳐서 남방 여왕까지 그 지혜를 알기 위해서 왔지 않습니까. 그렇게 찬란하게 타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지혜가 훌륭한 시험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끊임없이 경계했던 것, 고린도 전서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한 세계를 본 것, 능력을 많이 받은 것, 그것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어떤 위협을 느꼈습니까? 이것이 타락한 자신의 본성과 결합되면서 자기를 교만해지게 하는 한 원인이 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의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시험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보내주셨다. 안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아니다.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아브라함이 아들하나 점지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물로 주셨죠. 하나님이 주셨죠. 하나님이 응답이었죠.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흔드는 시험의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의가 얼마나 어울려요. 시험이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성도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은 모두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렇게 시험에 관한 성경의 이 결론을 받아들이고 나면 한편으로는 정말 시험에 관한 이 성경적인 입장이 너무 냉혹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사실 우리들이 그동안 너무나 잠자는 삶을 살아왔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너무 가득하지 않습니까. 지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 요즘 어떻게 기도생활 합니까?” “아, 목사님 애기 한번 낳아보세요. 기도고 뭐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러한 상황 자체를 시험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뭐냐면 아이가 다 클 때 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방학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성들의 경우는 “그래 요즘 어떻습니까?” “아, 목사님 직장생활 한번 해보시죠. 7시에 출근해서 밤11시에 돌아오는데 목사님처럼 사명 받은 사람이라도 나처럼 직장생활 하면 10분도 기도생활 못하고 성경도 못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것을 자기가 경계하고 맞서서 그것을 다루어야할 시험이라고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 환경이 모두 물러가서 9시쯤 출근하고 5시쯤 퇴근하는 직장의 환경이 될 때까지는 할 수 없이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다 커서 이제는 그렇게 어른을 고달프게 하지 않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밤에 잠만 자면 기도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잘 자고나니까 그 다음에 좀 커서 기어 다니면서 화장대고 뭐고 다 어지럽혀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력만 생기면 똥오줌만 가리면 그래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똥오줌도 가리고 분별력도 생겨서 하지 마라. 그러면 안 해요. 이제 어느덧 유치원에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뭐냐면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도전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생활에 대한 욕구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목사님이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살아가는 이 고달프고 바쁜 삶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직장생활 했나 봐요. 알아요. 안다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래도 나는 어느 한 순간에 “그래 아이고 그렇게 힘드니 어떻게 하겠니? 정말 안됐소.” 그렇게 말해줄 수는 있죠. 그것이 그 영혼에 도움이 되느냐고요. “아니, 하나님 저보고 너무 기도 안한다. 깨어 있지 못한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제 고충은 목사님도 이해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깨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깨어 있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살아요? 보십시오. 우리 한번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시험이 아닙니까? 그것이 정말 시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셨다. 그 직장에 보내주셨다.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기회는 하나님이 주셨어도 그 기회의 선용까지 하나님이 보장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 성화를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죠. 어차피 날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절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십니다.
보세요. 그 무엇인가 상황을 여러분들은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너무 사업이 잘되고 돈이 많이 벌리고 직원들도 속을 썩이지 않고 세무 감사도 없고, 순풍에 돛단 듯이 계속 잘 굴러가요. 그런데 이 신자의 마음속에 뭐냐면 “역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라서 하나님이 친히 인도 하시는구나” 점점 바빠져요. 직원도 늘어나고 할일도 점점 많아집니다. 그러면서 점 점 점 점 일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월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순종의 삶으로부터 멀어져요. 그런데 그것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셨다. 라고 하는 것 하나 붙들고 그리고 저절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켜주시기는 뭘 지켜주셔요. 자신의 영혼은 그렇게 핍절해져 가는데 이런 비유가지고 여러분에게 아주 더 생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을 충격을 좀 받으시겠죠. “교회가 곤고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많이 오고, 그 영혼들 때문에 교회가 커지고 교역자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더 많은 비용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래서 교회를 짓고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점점 더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점점 더 교회가 커지고 그러는데 그것도 시험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믿으시겠습니까? 저에게는 시험입니다.
진짜 그 최근의 2년 동안의 성장의 과정을 통해서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믿으시겠습니까?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새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곤고한 사람들을 데려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점점 더 은혜 받고 땅을 사자. 그리고 집을 짓자. 그리고 방을 더 만들어 달라. 그리고 교역자를 보내 달라. 그리고 얼마나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개인적으로는 저에게 시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알았다. 우리가 시험에 든 목사님을 도와야 되겠다. 전도하지 말고 우리 너무 많이 모였으니까 이제 신앙생활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우리 목사님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죄 악 된 세상으로 옛 삶으로 돌아가자” 그것 아닌 줄은 여러분들 아시죠. 그렇죠. 더 많은 영혼들이 얼마나 곤고한 영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대책 없는 영혼들이 이것은 모인 숫자도 아닙니다. 하늘 아래 누구도 가눌 수 없는 가슴 아프고 슬픈 사연을 가지고 안고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대적이 무엇이고,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불행해 지는지도 모르고 어둠 가운데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사실은 너무 왜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강물처럼 사람들이 밀려와도 우리는 그것을 많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계속 일어나야 되고, 그리고 그렇게 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희생해야합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교회의 성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계하지 않고 살아도 저절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소유가 좀 적고 가난할 때에는 하나님 정말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어느 자매의 고백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천 원짜리 열장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소비생활의 양태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던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하게 사는 것을 찬미하지는 않지만 가난도 우리의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고, 부요함도 우리의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라는 사실을 성경은 거듭거듭 해서 경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하는 나의 자녀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맺어준 형제자매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내게 세워준 이 가정의 기업,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시작하게 해주신 간증을 간직한 나의 직장생활, 모두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아주 깡마르고 핍절한 영혼을 가진 볼품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만들도록 돌연히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계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정말 깨어 있습니까? 마음의 움직임 하나에 유의하고 마음에 떨어지는 생각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이것이 시험이고 시험이 될 수 있고, 그럼으로 너희는 깨어 있어야 하고, 그 시험이 어떻게 너희의 영혼을 망치기 위해서 역사하려고 움직이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우리에게 경계를 명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이 육신의 연약함,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이런 에메한 말로 다 뭉개 버리면서 스스로 명백하게 적군을 볼 수 있는 그 땅에서 스스로 연막을 퍼뜨리고 어둠 속을 헤매며 대적도 알지 못한 채 수 없이 날아든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되는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거저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기도의 은혜도 회복하고다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깨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할 필요를 못 느끼는 이유는 뭐냐면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일생에 몇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건전하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내가 시험이 든 것일 수가 없고, 시험이 나를 위협하는 것일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직장, 주님이 주신 사업, 주님이 주신 자녀들, 주님이 주신 남편 뒷바라지 하면서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가운데 조금 마음이 태만해졌을 뿐이지 아직은 시험에 든 것이 아니고 또 그런 것들이 시험이 되어서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부모나, 네 처자나, 네 집안이나, 그 어떤 것도 너희가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나는 그래서 직장생활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열심히 젊은 날에 공부하고 노력해서 이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되어라. 선택의 기회를 넓게 가져라. 그리고 직장을 택하든지 사업을 해라.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직장,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사업 도 그대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시험의 대상일수도 있으니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하나님 우선 주의로 살아라. 그런데 그대의 하고 있는 사업이 죽어도 그대를 기도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직업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라.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체력과 이해의 범위 내에서 도저히 그 환경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께 다른 길을 구하라. 우리들이 일생을 영혼을 어둠 가운데 묻고 그리고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두다 사표내고 집에서 백수로 있으면서 새벽기도나 다니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는 경계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환경과 상태, 소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각양 많은 욕심, 많은 주변의 환경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의 삶에서 멀어지도록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웠지만 자기가 왕의 위에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적수인 것처럼 생각하고 언제든지 이 지위가 돌변하여 나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의 삶에서 멀어질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경계심 속에서 깨어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 그런 지경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지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이 지혜가 나를 시험에 빠뜨려서 그래서 이 좋은 머리로 하나님을 대적하게도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주님이 주신 그 지혜의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의 종노릇 하면서 살게끔 일평생 경계했더라면 그런 비극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시험을 볼 눈이 있습니까? 이제까지 오랫동안 여러분 곁에 있었던 환경이 한번도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지만 그것이 여러분들의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그만두고 떠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목숨과 성품을 다 바칠 분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어느 곳에도 그렇게 바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아무것에도 바쳐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바칠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입니다. 다른 것에는 그렇게 모두 마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공적인 고백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에 매여서 살겠다. 라고 하는 복종의 노예 됨의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소위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악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유혹이라고 불리 우는 이 시험의 특별한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악을 집어넣거나, 혹은 그 마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악을 끌어냄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의무로부터 태만히 멀어져서 궁극적으로는 죄에 깊이 빠지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시험의 특별한 면인데, 이것이 우리들이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유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보십시오.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솔로몬의 경우에도 전자를 토대로 후자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불러주셨을 때에 그의 곁에 모였던 사람들을 기억하시죠.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눈멀고 다리 저는 병신들, 소외된 사람들,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가슴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사람들이 다윗의 주위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왕으로 삼으셨을 대 다윗은 자기가 왕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마음에 슬픔이 많은 사람들을 사울이 버린 그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모처럼 끌어 안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변절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왕 위가, 왕의 권세가 그에게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기회, 상태, 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지위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종노릇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든든히 왕국이 서 갔습니다. 점점 신하들은 관료 주위 되어 갔을 것이고, 그리고 한 시대에 세워진 국가였으니 그 시대에 영향을 받아서 왕국다운 풍모를 갖추어 갔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초막과 같은 초라한 집에서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끌어안고 사는 대신 호화스럽게 지어진 왕궁에 거처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왕의 처소는 솔로몬이 지은 왕궁만은 못했지만 그러나 분명히 어느 정도의 영화가 있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가는 곳마다 이기는 승리의 소식은 다윗으로 하여금 점점 더 교만해지게 하였고,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고,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자기의 악함을 그 시련과 위기 속에서 즉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게 만드는 그러한 신앙의 작용들이 거의 멈추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까지 한번도 자신에게 그런 위험한 시험에 도구가 되지 않았던 왕위가 급작스럽게 떠오르면서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인구 조사도 하게 했고, 그리고 급기야 우리 야의 아내를 빼앗게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으로 가지고 있는 그 권위와 세력을 이용해서 자기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었으니 그 상태와 그가 가진 지위가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보십시오. 결국은 일반적인 그런 시험이 그로 하여금 이런 특별한 유혹이라고 하는데 빠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결국은 한때 하나님 앞에 파산한 자처럼 파멸의 길을 걸어가는 불행한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깊은 웅덩이에서 시험에 빠져서 슬피 울부짖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갈망하는 가운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되었고, 자신의 안일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철퇴에 맞은 것 같은 개안의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하고 꾸준히 새벽기도 나오고, 성실하게 교회생활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우리들이 이런 점에 있어서 각성해야 될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눈을 떠서 한번 여러분들로 하여금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이 어떻게 여러분들의 주위에서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과 아주 교묘하게 부패함과 함께 결탁하면서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허물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건,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건,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시험의 도구가 되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온전한 순종과 복종의 삶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내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라고 하는 사실에서 눈을 떠야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런 시험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주님이 맡겨주신 자리에서 이탈되지 않고 모든 것을 감당해 나가면서 동시에 자기의 자신의 영혼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이후의 삶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성도의 아름다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른 땅에 막대기를 꼽아놓는 것 같은 그런 종류로 이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탄탄한 기초, 그리고 면밀하고 정직한 통찰을 통해서 그래서 이 기초가 탄탄하게 잡힌 그 위에 쌓아 올려져 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경회를 통해서 그런 깊은 통찰과 함께 실제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 공급받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시험에 든다는 것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지난 시간에는 시험에 대한 일반적인 전체적인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았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익숙해 왔던 시험에 대한 생각과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시험에 대한 생각이 현저한 차이가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시험에 든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어제 설교를 듣고 보니까 그것은 사실 악에 빠졌다는 이야기 이고 ‘시험에 든다.’ 라고 하는 '시험' 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든,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어쨌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시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서론적으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다면 이제 오늘부터 본론이 되겠는데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시험에 든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첫째로 주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말기를 우리에게 당부하셨고 두 번째로는 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깨어 있는 것과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첫 번째로 도대체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제 잠시 말씀 드렸던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제껏 생각하는 시험에 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험에 든 것을 넘어서서 완전히 악에 빠진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건강한 삶과 그다음에 완전한 실패한 삶 사이에 사실은 시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우리들은 건강한 삶, 한 발을 딛고 넘어서면 그 경계선 너머에는 바로 깊이 추락해 버린 신앙의 낭패가 있는 그런 구도를 가지고 우리들이 시험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라는 것입니다.
우선 시험이 무엇인가? 라고 할 때에 우선 첫째는 그 시험은 단지 유혹을 받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혹을 받는 것이 자기가 워낙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많이 만지고 지나가고 날마다 죄와 더불어 분투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도 많이 유혹을 받을 수 있고 그런 신앙생활을 거의 안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거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들이 악하기 때문에 본성의 더러움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유혹을 받는 그 자체는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양에서 40일을 굶주리시며 기도하실 때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분명히 유혹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죄를 지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혹은 단지 유혹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에 든 다’ 라고 하는 것은 단지 유혹을 받고 있는 그런 상태를 가리켜서 시험에 들었다. 라고는 말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좀 유치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젊은이들은 컴퓨터를 참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젊은이들이 꼭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주 성능이 좋고 작고 아주 예쁘고 그런 노트북 컴퓨터. 그것은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노트북 컴퓨터 도서관이나 직장 같은데서 잃어버린 사람들 많습니다. 사서 몇 번 써보지도 못하고 누가 와서 다 훔쳐갑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갖고 싶어 하고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새로운 작업들을 하기 위해서 옛날에 노트북이 성능을 따라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노트북을 갖고 싶고, 유혹을 많이 느낍니다. 그러나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시골 할아버지가 좋은 컴퓨터를 갖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를 죽이는 삶이라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이라든지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받고 있는 그 자체는 사실은 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단지 유혹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시험에 든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또 유혹에 완전히 넘어져버린 상태도 우리는 시험에 든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혹에 이미 넘어져버린 상태는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무엇에 빠진 것입니까? 악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 하옵소서” 할 때 그것은 연속적인 기도가 아니라 별도의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다음에 악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별도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에 완전히 굴복해서 넘어진 것은 이미 범죄 해서 악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제 이쯤 이야기를 듣고 보면 여러분들은 좀 혼란을 느끼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시험에 든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답변을 조금 있다 하고 이제 세 번째. 그러면 그 시험에 든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시험에 들 때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두 가지가 평소보다 더 강력하게 상당한 힘을 가지고 역사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어가는 때가 되면. 그 두 가지가 뭐냐면 사단의 역사와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욕망의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사단의 어떤 공격이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어느 한 시간이 되면 끊임없이 자기 가까이 있어서 자기에게 계속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기를 유혹하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도수가 굉장히 많아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 유혹이 굉장히 강력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평소에는 그런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로 잘 누르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이 되고나니까 이상하게 일정한 욕망이 강하게 고개를 들면서 자꾸 내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그것과 더불어 싸우고 그것을 통제하는데 아직까지는 지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을 잡고 통제하는데 그 욕망을 억제하는데 굉장히 큰 힘이 소모된다. 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시험에 든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험에 든다. 라고 하는 의미는 마지막 네 번째로 깊은 웅덩이에 떨어지도록 걸어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누군가에 의해서 떠밀려서 시험에 들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 혼자서 우리가 동의해 주지 않는데 우리를 그 깊은 웅덩이로 데리고 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마치 우리가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나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과 거의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살다가 신앙의 세계로 들어올 때 회심이라는 것을 경험하죠. 그렇죠. 회심을 두 가지 요서로 이루어지는데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막 살다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간증했지만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렇게 될 때에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이런 삶 말고, 이 신앙의 세계에 있는 삶은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내 삶보다는 더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에 문을 두드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미리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 길로 하는 것입니다만. 가서 하나님 앞에 복음을 듣습니다. 그런데 “너는 죄인이고,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무조건 적으로 너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리고 너를 위해 대신 화목 제물이 되셨다. 이제는 네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너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다시 사신 것을 믿고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을 듣습니다.” 그 때에 우리들이 기쁨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직전에 육신에 속한 영의 깊은 고뇌가 있습니다. 회심 직전에, 그것이 뭐냐면 희망을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뭐냐면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이 너무 힘겹고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제 그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면 다른 인생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 희망, 또 하나는 뭐냐면 두려움 입니다. 이제껏 나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내 자신의 인생의 주인 노릇하면서 내 욕망이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 인생은 비참하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은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결국은 항복하고 하나님께 나오게는 되었지만 그러나 내 인생이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산다. 그 때에 이제껏 살아왔던 죄 악 된 삶으로부터 자기를 끊어내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죄 가운데로 들어갈 때도 똑같은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살아요. 은혜 안에 사니가 참 좋지 않습니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주님 안에 있어
항상 은혜와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어요. 그리고 이제는 말하자면 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똑같은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미 벌써 시험에 들어 있는 것이죠. 이 시험정도에 그치는 것, 단지 유혹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제 이 지금의 나의 삶의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죄를 지음으로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누리게 되는 죄로 말미암는 기쁨이 주는 기대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에 들어올 때도 항상 결단이 필요하고, 죄 가운데로 들어 갈 때도 항상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또 비유를 하자면 그래서 그렇게 두려웠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주님 만나고 항복하고 신앙의 세계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예전에는 정말 부자가 되지 못하면 인생에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앙의 세계에 들어 와보니까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보다도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자신을 정말 행복하게 할 수 없었는데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는 언제나 외톨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앙의 세계에 회심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니까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죄 악 된 세상에서는 누려본 적이 없는 마음의 평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평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과 결별하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 느끼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경계해야할 적수처럼 생각하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 볼 때에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렇죠.
그 고백을 사도바울이 한 것입니다. 뭐라고?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도 그 십자가에 못 박혔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문을 두드리고 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요. 그런데 충만한 은혜의 세계 속에 있다가 한번에 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에 뭐가 있느냐면 시험의 때를 지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의 때를 지나면서 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악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 딱 들어가고 보니까 처음에 악을 행하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 버리고 난 다음에 즉시 깨닫는 것입니다. 뭐냐면 아, 그 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함으로 죄 가운데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기쁨이 범죄 하기 전에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미 시험에 빠져서 죄를 지음으로 자신의 영혼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 전에는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조금 무엇을 잘못했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에 있어서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의 때를 통과하면서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죄 가운데로 쑥 들어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머리 속에서는 진정한 참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데 자기 자신이 그렇게 참회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처음에는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습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라기보다는 악인이 받는 고통의 눈물입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과는 다릅니다. 모든 눈물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눈물이 아닙니다.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벗어날 수 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아니 수입 고기도 많고, 고기 많은데 싼 냉동고기 같은 것도 싸잖아요. 먹으면 되지 지금도 산에 엄청나게 많은 덫을 놓아서 짐승을 잡습니다. 올무를 나무에다 쇠사슬을 걸고 올무를 놓는데 거기에 먹이 같은 것을 놓거나 혹은 그냥 나뭇잎으로 덮습니다. 그러면 거기를 짐승이 지나가다가 밟으면 탕하고 튀어 오르면서 그 발을 이런 톱니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번 채워지고 나면 이렇게 보고 기다리고 있다가 탁 채워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가서 그 짐승을 꺼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짐승은 몇 일 만에 사람이 올라올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짐승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특히 멧돼지 같은 것이 걸려서 막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미 벌써 발 한쪽을 아주 날카로운 톱니가 쫙 채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이 톱니가 살을 파고 뼈까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단속 반원들이 가 보면 얼마나 멧돼지가 살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쇠사슬을 묶어 놓은 그 나무 기둥은 하얗게 벗겨지고 그리고 다리에는 피가 철철 흘러서 뼈가지 파고 들어간 것입니다. 결국은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은 시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생각하기에 “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런 속에서 어떻게 사나?”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또 나름대로 생존의 방법을 익혀나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창조 시대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통이 한번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셋도 후에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어쨌든지 죄가 들어오게는 되었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수 받으면서 그렇게 살죠. 그러다가 결국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범 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교통은 다시 한번 현저하게 단절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 후손 에녹이 성을 쌓고 나서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 그러면서 악기도 만들고, 그다음에 성도 쌓고, 문화를 건설하면서 막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신자도 똑같이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악에 빠졌을 때에는 잠시 고통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스스로 적응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혹은 자신의 욕망에 순종함으로서 영혼의 외로움을 달래고, 거의 가치가 없는 세상일에 몰두함으로서 영혼의 곤고함을 잊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번성하는 이 많은 향락 산업들과 그리고 젊은이들이 별 가치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듯이 그렇게 열중하는 것들도 결국은 인생 자체의 허무를,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가져다주는 그 허망함을 잊어버리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깊은 웅덩이와 같을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혹은 자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밖에서부터 그 유혹이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마지막에 악에 깊이 빠지고 나면 인간을 자력으로는 도저히 그 깊은 웅덩이에서 해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서 해오 나오는 길을 모르지만 성경에는 그 모든 대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완전한 절망 가운데 깃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미로에서 벗어나서 빛 가운데로 나오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생의 시험을 지나서 악에 빠지는 그런 비참한 지경에 가게 되어서 거기에서나마 진짜 자신은 도저히 이 깊은 죄악의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기는 자기의 영혼을 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그 웅덩이에서 눈을 들어서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시편 여러 곳에 나오는 기도처럼 깊은 웅덩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무슨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제까지 신뢰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수렁에 빠진 이 인생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패자 부활전에서 다시 올라오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거기에서 보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인생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유혹에 굴복해서 깊은 악에 빠지는 것은 시험이 깊어지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고 시험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유혹이 계속해서 많아지면 반드시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관찰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시험에 든다는 것이 뭐냐? 시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유혹을 받고 있거나 혹은 유혹에 굴복해서 죄에 빠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우리가 시험에 들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시험 가운데 두는 것이 아니라. 시험은 일종의 우리로 하여금 영적 싸움에서 무장해제의 과정입니다. 여러분 에이즈가 굉장히 무서운 질병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저는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는데 제가 전도사 시절 때 돌보던 청년 가운데 아주 희기한 병에 걸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병이 뭐냐면 감기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생화학전을 한다고 하면서 감기 균을 배양해서 적군을 일시에 퇴치해야 되겠다고 공작을 꾸민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웃겠죠. 아스피린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언제든지 물리칠 수 있으니까. 그렇죠.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우습지만 그 형제같이 몸에 저항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이고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많이 나았는데 한참 아팠을 때에는 감기가 오면 병원에 가는데 무 균 실에 들어가야 된답니다. 한 10년 전에 하루 사용료가 30만원 있었다고 하더군요. 무 균 실에 들어가서 간호원도 반도체 만드는 사람처럼 장비를 쓰고 들어와서 인큐베이터에 있는 어린 아이 만지듯이 그렇게 치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감기가 들어오면 바로 그것이 기관지 폐렴으로 번져가서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기’ 그러면 사실 우리는 질병이라고 생각도 안합니다. 그렇죠. 직장에서 제일 결석계 쓸 때 쑥스러운 것이 '감기‘ 그래서 저는 직장 다닐 때 결근할 때에 하루 결근은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했습니다. 하루 결석은 꾀병 같아요. 3일 결근하면 이것은 좀 너무한 다. 이틀이 가장 진지해 보입니다. “이것 또 꾀병 아니야” 그러다가 그 다음날도 안 나오면 “정말 아픈가보네” 3일째 안 나오면 “이거 너무 한거 아니야” 4일째 되면 “진단서 떼어 와라” 이틀이 딱 좋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이틀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아파?” 하면서 근심 섞인 목소리로 물어보는데 “감기야” 그러면 “어, 난 또 뭐라고”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 안에 살 때에는 그까짓 것 문제가 안 됩니다. 악한 생각이 스쳐 가면 털어버리면 됩니다. 그렇죠. 잠깐 실수해서 작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당장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면 주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놀라운 은혜의 순발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촛불이 있는데 방금 끈 촛불은 금방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에 꺼 놓은 지가 몇 시간이 지난 차가운 초에는 성냥을 켜서 심지에다 문질러도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잘못했어도 웬만한 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 참회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아주 순간적인 복원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이러한 은혜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껏 생각하고 있었던 시험에 든다는 것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시험에 든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내가 은혜를 못 받고 있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장차 임하게 될 아주 나쁜 것들에 비하면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반복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은혜 안에 살지 못한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 이후에 오게 될 보다 나쁜 것에 비하면 이것은 예고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그다음에 시험의 때를 지나고 그다음에 사단의 괴교가 성공하면 악에 빠지게 되고, 악에 빠지는 것이 성공하게 되면 계속해서 그 악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패역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계략입니다. 이 네 단계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시험의 때에 무장 해제를 당하고 악을 행하게 되고 그 악이 반복됨으로서 그다음에는 이 영혼과 마음, 인격 속에 하나님을 향한 완고한 패역이 형성되어서 쉽사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서 죄를 위해서 기여하고 봉사하는 고착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사단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죄와 범 죄 와 마지막에 패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은혜를 모두 무장해제 당하는 그 시기가 시험의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는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는 교회에도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고 교역자들 애도 많이 먹이고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예요. 나 쓸 돈도 없는데 그렇게 살고, 뭐 의무 같은 것들은 생가지도 않고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으로 그렇게 교회 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낫습니다. 주일날이면 꼬박꼬박 와서 앉아있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월급타면 그저 예외 없이 십일조 헌금 챙겨서 바치고 그 정도입니까. 교사로도 봉사하고 성가대도 봉사하고 또 집사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받고, 남들이 볼 때에는 그 사람보고 교회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술을 먹어요. 담배를 피워요. 그리고 교회에 다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한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 은혜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관상으로는 아주 균형이 잡히고 성실한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장차 반드시 여러분들을 점점 더 큰 시험으로 데려가서 결국은 악에 빠지고야말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빠진 것이 아니라. 내게 있던 하나님을 향한 생생한 은혜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그 과정, 그래서 죄를 짓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그 마음으로 사람으로 환경으로 준비되어 가는 그 작업의 시기를 가리켜서 우리는 시험의 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모두 시험에 든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때에 사단의 입장에서는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자기가 볼 때에는 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훌륭한 묘목들이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에 미친 사람들에게는 성공을 줍니다. 그리고 실패하게 해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사람들은 실패하게 합니다. 사람과 부딪혀서 그래서 사람을 등지게 함으로서 그 관계가 깨뜨려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부딪히게 만들고 관계가 깨뜨려지게 만들어서 그 사람을 은혜의 자리에서 그를 떼어 내는 것입니다. 아주 집중적으로 사단이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중적으로 사단이 투자를 할 때에 시험의 초기에 있는 사람들이 초기에 그런 것들을 파악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저항하고 항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잘 되어도 “내가 지금 이렇게 잘 풀린다고 이럴 때가 아니지” “남들이 볼 때에는 내가 예수 믿는데 미쳤다. 그러는데 이상하게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그러면서 괴로워한다든지, 뭐가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은 사실이고 이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 아냐? 이러면 마지막에 결국은 누가 기뻐하겠는가? 자기 마음을 추수기를 것입니다.
누가 싫어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런데 결국은 딱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이 싫지만 그러나 저 사람과 관계가 깨뜨려 질 때에 결국은 마지막에 내 인생의 열매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깨뜨려지고 주님을 믿는 자녀들끼리 원수를 맺고 악한 감정을 품고 살아갈 때 결국은 사단의 계교를 훌륭하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경계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미 그가 넘어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리고 막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과 시련을 올 때에 소나기 같이 몰아닥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대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공격받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막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에 남아있는 은혜까지 모두 소진하게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착실하게 나오고 이러는 것 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일 예배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버텼지만 그것들 다 고갈되고 나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사실 교회를 못 떠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워주신 자리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교회는 다녀야되겠고 지금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또 새로운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사귀나, 그냥 다니자. 지금 내가 교사인데 교사 시작한지 두 달도 안 되어서 집어치우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불성실 하다고 하겠지. 어떻게 12월까지는 끌고 가야지. 뭐 이런 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있는 동기입니까.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타고난 성실성과 은근과 끈기로 버티면서 끌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껍질들은 시험에 든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는 껍질들입니다.
그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찬송할 수 있습니까?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부어지는 중입니까? 완벽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예배시간마다 자기 갱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 기도 할 때마다 내가 비록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그 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있어서 더 순전해지고, 그리고 그분께 더 온전히 순종하고 싶고, 주님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지만 그분을 정말 간절히 닮기 원한다. 라는 지배적인 소원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소원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갖고 싶고, 저런 것도 해보고 싶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해볼 마음도 생기고 하지만 그것이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주님처럼 정결해 지고 싶고, 그리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그런 소원이 여러분 속에서 계속 회복되어 지는 상태에 있지 않으면 모두 시험에 든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은혜로 살 때에 복음의 진리가 그 마음을 움직이고 진리의 빛이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켜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고 그 신앙에 붙들려서 주님 앞에 살게 하는 동안에 그 때는 정말 행복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나면 영혼에 어두움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제일 좋은 것은 정직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이 한번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라고 “나는 지금 시험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한번 인정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은혜를 누리면서 생생한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항상 그 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온전한 내적인 순복을 가지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이 여러분들에게서 없는 것, 여러분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기도시간에 옆에 있는 지체가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해본 적은 없습니까? 내게도 저런 은혜의 때가 있었는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기도, 복음의 진리를 묵상하면 떠오르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조나단 에드워즈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평범한 단어 하나가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감격해 하던 그런 은혜의 때, 그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제는 주일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었고 예배 시간에 졸지 않고 다리 꼬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성숙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하던 나쁜 짓 다 버리고 진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교회에서 맡겨준 그 일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인 줄 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실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곧 여러분들의 영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오늘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주님이 있습니까?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까? 날마다 그분이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생생한 교통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의 과정들을 통해서 지금 반듯한 교회 생활을 하고 이런 저런 직분을 가지고 교회생활 해 나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그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험에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을 시험에 들었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지 않고, 더 이상 기도가 내 영혼의 호흡이 되어서 그 기도의 내쉬는 숨으로 내 안에 있었던 더러운 것들을 토해내고 하나님 앞에 들여 마시는 심호흡으로 주님의 은혜의 신령한 것들을 자기 속에 부어 넣는 이런 호흡으로서의 기도의 작용이 멈추었을 때 그 성도의 삶이 행복합니까?
나는 예배가 끝나고 돌아갈 때 얼굴이 활짝 피고 두 눈이 이슬에 젖은 성도들을 보면 기뻐서 눈물이 나오고 무 뚝 뚝한 표정으로 인사도 받지 않고 돌아가는 메마른 얼굴을 보면 그것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왜? 저렇게 밖에 예배드릴 수 없을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그런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시험에 빠진 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앙의 스타일도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합리화 하거나 이런 저런 원망을 하면서 하나님을 등지기 시작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성도가 시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채 그 시험의 시기를 지나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시험의 때가 끝난 이후에 임하게 될 그 커다란 고통에 비하면 은혜를 받지 못하면서 느끼는 그 괴로움은 장차 다가올 커다란 고통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오늘 한번 여러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진단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들의 영혼은 안전합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자신 있게 “나는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크게 두 번째로 그러면 시험에 들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두가 일이 일어나는데 첫째는 사단의 강하고 집요한 역사와 그리고 두 번째 일어나는 것은 그 결과로서 마음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선 신자가 시험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사단의 강력한 역사가 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사단의 세력들이 잠잠합니다. 은혜가 식으면서 시험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마치 다른 지체들을 공격하던 사단의 휘하에 있는 많은 세력들이 전부 집합을 해서 자기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처럼 그렇게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게 함으로서 강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 갈 때에 서 있던 그 의무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핍박과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괴롭히면서 그러면서 그 핍박과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영적인 긴장감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핍박과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이 막 닥치기 시작할 때에 사실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사단이 노리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인데 고난과 어려운 시련이 많이 닥치게 되면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오히려 그러한 사단의 계교를 알고 더 경계심을 갖기 보다는 지금 이렇게 시련과 어려움이 많이 닥치는데 신앙은 나중에 생각을 하자. 하고 신앙의 경계심을 오히려 늦추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 때에 이제 시련과 고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에 이제 그의 은혜의 무장들을 하나씩 하나 해제시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 떼어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해제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강력한 사단의 아주 집요한 공격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동물들이 싸울 때에 상대방의 급소를 한번 물고 죽어도 놓지 않고 그 이로 꽉 깨물고 가죽이 찢어지도록 뒤 흔드는 것처럼 그래서 상대방이 뒹굴고 몸부림을 쳐도 한번 물었던 그 목을 놓지 않고 그 가죽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심줄이 끊어지기까지 그 이로 악물고 놓지 않듯이 일단 사단이 한번 물어야 할 곳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을 딱 물고 그다음에는 죽어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몸부림칠수록 그 이빨이 깊이 들어와서 목덜미를 꿰뚫는 것처럼 그렇게 이빨로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의 무장들을 해제당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 그래서 결국은 제일먼저 허물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생활을 허물기 시작합니다. 고난이 너무 많고 시련이 와서 기도할 수 없게 만들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롭게 잘 되어가고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좀더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의 무장이 해제되고 나면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감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하고 정직한 반응들이 굽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이제껏 모든 부패성을 딛고 진실한 신자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었던 두가 커다란 화두, 진리와 성령이 그 사람 속에서 영향력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진리와 성령, 곧 은혜의 영향력이 고갈되면 고갈될수록 그다음에 고개를 드는 영향력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부패한 본성의 강력한 욕망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령 속에서 진리와 은혜의 물이 쫙 고갈되면서 그 은혜의 물 속에 깊이 잠겨서 통제되던 야비하고 사악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옛 욕망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성령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살아가게 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죄의 영향력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소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이 죄에 대한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어떤 죄에 대한 욕망들이 고개를 들면 항거할 수 없이 걷잡을 수 없이 그를 몰고 죄 가운데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제 강력하고 집요하게 사단의 세력들의 공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미 시험에 드는 동안에 영적인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단에게 그렇게 집요한 공격을 받으면서 경건 생활이 거의 파괴되고 그리고 은혜의 무장들을 해제당하면서 죄에 대한 저항력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당사자는 그 집요한 사단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그 사고가 영적이지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사고가 영적이 아닙니다. 사고가 영적이라는 말 아십니까? (예를 들자면 하다못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누가 다쳤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했을까?” 뭐 하다못해 직장에서 퇴출을 당했어도 “이런 해고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또 좋은 일이 생겨요 갑자기 사업이 잘되고 번영할 때도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셨을까?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영적 사고력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사고 자체가 그렇게 영적입니다. 그래서 자꾸 일어난 일가지고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집요하게 찾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사고 자체가 영적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잘 되었어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 뭐 어떻게 되었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뭐가 어떻게 잘 안되었어도 “하나님이 막으셨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려고 한다.” 이렇게 사고자체가 항상 자기 속에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은혜에서 벗어나서 시험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의 사고자체가 굉장히 육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뜻이 계서서 무엇인가 잘 번영하게 해 주시면 “재수가 되게 좋았다.” 하나님께서 뭔가 막으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시면 “운이 더럽게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런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우연히” “재수” “운” “행운”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환경이 변하는 것 자체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를 모두 다 차단하는 것입니다. 육적 사고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죄에 대한 저항력들을 다 말려버리는 것이 시험 기간 중에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포로를 다스리는데 포로들이 음식도 잘 먹고 운동을 해서 거의 다 전부람 보 같아요. 그런 포로가 수 백 명입니다. 내가 아무리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포로들을 다루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기관총을 가지고 멀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다룬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천발의 기관총이 있고 담장으로 둘러 쌓여있고 수틀리면 다 죽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칼 한 자루 가지고 그런 람 보 같은 포로 100여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일 것입니다. 왜 한 칼로 모두를 찌를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아까 주 왕조 장로님이 아까 마지막에 자기 아버님의 그 비참한 모습을 얘기 했는데 포로가 먹지도 못하고 온갖 고문을 통해서 거의 혼자 일어 설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수 천 명의 사람도 몽둥이 하나 가지고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단은 너무 정확합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사는 여러분들을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번에 죄 가운데로 몰아넣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복원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패역으로 치닫게 되는 일들은 자기 자신도 한번에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사단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까 먼저 중요한 것은 뭐냐면 많이 양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닌다. 그래도 사단이 다 이해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양해하는 것입니다. 가서 제직이 된다. 그래도 다 봐주는 것입니다. 헌금 낸다. 그래도 그저 내게 내버려두고, 가서 일 한다. 그래도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목표는 뭐냐면 “다 해라. 내가 너 안에서 은혜의 힘을 다 빼버리고 그래서 죄에 대한 나의 유혹에 대한 저항력만 모두 제거해버리면 그다음에 너는 나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많이 유혹을 해도 네가 조금밖에 굴복을 안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저항력을 시험의 때를 통해서 내가 다 빼내고 나면 너는 아주 작은 유혹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낚시 바늘에 미끼가 내려오면 덥석 물고 물 위로 끌어 올려지는 굶주린 물고기처럼 그렇게 네가 나의 미끼를 물게 되리라. 마귀에게는 그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은혜를 받지 못하면서 사는 그 자체가 시험이고 지금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지만 그것은 장차 나타날 더 나쁜 일들에 비하면 이것은 겨우 예고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뭐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왠지 속이 컬컬하다. 기도를 열심히 못했더니 왠지 마음이 답답하다. 이런 것은 단지 불편할 뿐이고 괴로울 뿐이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 시험의 때에 그나마 여러분들에게 있는 죄에 대한 저항력들을 다 사단이 빼버리고 나면 그다음에 완전히 거기에 끼어서 비참하게 끌려 다니는 그런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종노릇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이 살던 옛 사람,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의 옛 시절의 삶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험에 들 때에는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되느냐면 마음에 큰 혼란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뭔가 유혹이 올 때에 은혜의 때에 있는 사람들은 유혹이 올 때에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도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수시로 성적인 욕망을 느껴서 너무 괴로운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의학적으로 자네가 건장하다는 증거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굴복하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면 이런 식으로 일어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도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을 받는데 그 유혹과 씨름하지를 않고 씨름한다. 라는 의미 아시죠. 이렇게 부둥켜안고 막 서로 엉켜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씨름한다. 라고 하지만 이 씨름이 우리들이 흔히 이해하는 그 씨름하고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씨름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붙들었을 때 상대방 선수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공격적인 의도에서 그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씨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무엇인가 애착이 생겨서 자기를 유혹하고 있는 이 문제를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형태가 씨름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씨름이 긍정적인 의미의 묘사가 아니라. 약간 부정적인 의미의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집착으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유혹이 올 때에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칩니다. 그런데 시험의 때에 있을 때에는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어떤 유혹이 오면 물리칩니다. 악에 빠져서 패역 가운데 있을 때에는 유혹이 오면 붙잡습니다. 그런데 시험의 때에 있을 때에는 유혹이 오면 물리치지도 못하고 덥석 붙들지도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놓자니 무엇인가 여기에 나를 만족시킬만한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다음에 뿌리치자니 뭔가 이것을 붙들면 하나님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어떤 즐거움이 있을 것도 같고, 그리고 꽉 붙들자니 하나님에 대한 엄위하심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에 든 때에는 아직 은혜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대교회를 향해서도 말씀하시기를 뭐냐면 “너의 죽게 된 것을, 마지막 남아 있는 것을 그것을 일깨우라. 실상은 죽은 자로다.” 너에게 남아 있는 것, 그것을 일깨워라. 그렇게 비참하게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그 교회에도 뭔가 은혜가 남아 있었던 것처럼 시험의 때에 들어 있는 성도들에게도 은혜가 계속 고갈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약간은 남아있습니다. 그 은혜가 그 죄를 덥석 붙들고 패역 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 죄를 물들 듯이 그렇게 물지 못하게 그 은혜가 죄에 대한 반응을 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그러니까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는 유혹을 물리치지만 패역 가운데 있는 성도는 그 유혹을 강하게 붙들어요. 그런데 시험 가운데 있는 성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것을 붙들고 씨름을 하는 동안에 그나마 남아 있는 은혜의 영향력들이 소명되기 시작하면서 부패한 욕망이 고개를 들고 그 시험에 넘어질 가능성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깊은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개되는 과정이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어떻게 되느냐면 제일 먼저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공격하는 부분은 어디냐 하면 우리의 머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어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객관적으로 자기의 마음에 휙 하고 스쳐가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가 주님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불순종을 할 생각을 하지. 내가 진짜 짐승 인가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퇴치해버리면 괜찮은데 그다음에 다시 생각이 떠올라요. 그때에는 처음에는 “그럴 수는 없어” 탁 뿌리치면서 “내가 짐승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떠오를 때에는 그 생각이 자기의 마음에 좀더 많이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신자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똑같은 생각이 떠올라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 볼 때에 “야, 저 인간, 어떻게 저렇게 막 생길 수 있을까 내가 대신 사과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혐오감을 느꼈는데 그 다음에 나와서 한번 만나서 씩 웃고 지나가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처음에는 휙 지나가더니 그 다음에는 “안녕하세요. 두 번째는 ”별일 없으셨어요?” “또 만났네요.” “집이 어디에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정이 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옛날에 직장에 다닐 때 보면 남녀가 결혼을 했는데 사무실에서 여직원하고 남자 직원하고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진짜 몇 년 만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그런 싸움이었는데 나중에 결혼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애들도 맨 처음에 영화 같은데서 살인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막 으악,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여러분 보고나면 그다음에는 뭐냐면 컴퓨터 게임 탁 펼치면 칼 든 놈이 나타나서 배를 푹 찌르면 피가 쫙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타 탁 타 탁 두들겨서 폭 폭폭 찌르면서 피가 막 쏟아져요. 그렇게 하면서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조직 폭력배들이 지옥훈련 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그것 맨 정신에 살아있는 사람의 배를 사시미 칼로 찌를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하느냐면 큰 도사 개를 데려다가 찌르게 하는 것입니다. 덤벼들게 하고 배를 푹푹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 마리 죽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담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처음에 딱 드는 생각은 그것은 자기가 책임질 것은 아닙니다. 휙 하고 스쳐갔으니까, 똑같은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형제가 한번 저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해 주었는데 저도 예수 믿을 때 아주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이상하게 예배만 드리면 가만히 설교 듣고 은혜나 받을 것이지 계속해서 목사님이 벌거벗고 있는 모습만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할아버지 목사님이셨는데 아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 마음속에 무슨 음란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음란한 생각이 있었으면 여성을 생각하지 왜 그 다 늙은 할아버지의 그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뭐냐면 내가 책임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그냥 휙휙 떠오르는 생각들이고 더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사단이 어느 한순간에 휙휙 던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단이 예수님께 온 천하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책임을 져야합니까.) 그렇게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예배 시간에 상당히 방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꼭 그런 경험은 아니지만 예배 시간에 아주 쓸데없고 엽기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것, 어떤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외게 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내려오는 그것이 자꾸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웃죠. 그런데 당사자 에게는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바둑을 많이 두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이렇게 이렇게 아다리 저것은 죽었다. 대마가 다 죽은 것입니다. 그런 것이 스쳐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처음에는 말도 안돼 그리고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쉽죠. 그런데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오면 한번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오면 더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말도 안돼” 털어버립니다. 그런데 은혜의 영향력이 깊이 쇠퇴하고 이제 시험 가운데 있게 되니까. 이제 떠오르는 생각들이 우리를 시험으로 데려가는 생각들이 좋은 생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쓸데없는 욕망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떠오르면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니 말도 안돼 내가 어떻게 불순종을 할 수 있어” 그러다가 똑같은 생각이 한번, 두 번, 세 번 떠오를 때에는 그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 네 의견을 이야기해 봐라” 그래 이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애 이, 그래도 안돼” 그리고 보내죠. 그다음에는 그 나쁜 생각과의 더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제 설득을 당합니다. 설득 당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 날수도 있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꼭 필요하다. 반드시 그런 불순종이 행해져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렇게 생각은 안합니다. 그렇지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를 향해서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마음 밭에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지적인 설복을 통해서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성도의 심령 속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과 완벽할 정도로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를 떠나도 좋으니까 논리가 없는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약합니다. 그러나 논리만을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논리적으로 거의 들을 가치가 없는 어 거지와 같은 방식으로 설교를 하면 그 설교를 듣고 인간이 변화될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합니다. 그것은 마치 도끼로 1미리 간격으로 종이를 국수 같이 자르려고 하는 시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논리에 의해서 굴복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인간이 살아가는 그 인생의 이치가 여기 있었구나.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당해야 했던 그 고통이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여러분 생각하기에 죄와 구원 같은 시리즈 우리 교번에 E. B. S교제 나왔죠. 사실 그것을 모두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예수도 모르고 신앙에 대해서 아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처음 예수 믿으러 오는 사람에게 “예수 열심히 믿으십시오. 자꾸 따지지 말고 아멘만 열심히 하십시오.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당신 신앙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쇠뇌 받은 사람치고 건강한 믿음을 전수 받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가슴을 겨냥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그를 데려다 놓고 그를 잘 이해시키라. 그래서 당신이 사는 이 세상의 많은 비극과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는데도 불행해지는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어떤 사람은 가난 때문이다. 인간 때문이다. 뭐 건강 때문이다. 라고 말했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죄 때문이다. 그렇게 어려운 진리를 가르쳐 주었을 때에 무릎을 치면서 “아, 정말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믿는 군요” 하는 고백을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렇게 머리가 정리되고 나면 그 다음에 그것이 깊은 묵상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가슴 속으로 내려 와야 합니다. 그래서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을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깔때기 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것을 품어 안는 것입니다. 아까는 욕심이 잉태했는데 이번에는 뭐냐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잉태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똑같은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사단이 먼저 사고를 겨냥하면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계속 우리를 설득한다. 그랬는데 그 설득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불순종에 대해서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묵상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 하게 되면 손해 보게 될 것들을 계산하고 그렇게 불순종 하게 될 때에 내가 맛보게 될 행복과 기쁜, 두 가지를 놓고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그가 거듭난 성도이고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기가 불순종 하고 죄에 빠지게 될 때에 자기가 잊어버릴 것들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질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고, 그리고 오늘 이처럼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게로부터 받는 아름다운 신앙의 평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뭐 등등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버려두고는 그 유혹에 굴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주는 즐거움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작업을 해서 그래서 이렇게 내가 불순종함으로서 입게 되는 손해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작고 그리고 불순종함으로서 그 시험에 굴복함으로서 내가 받게 되는 유익은 굉장히 크다. 그래서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선을 넘어가도 사실 문제가 덜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택하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할 테니 들어보세요.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느냐면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이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격 아닙니까? 아니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게 되면 자기가 당하게 될 그 불이익과 고통을 감소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복음을 가지고 그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순종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 것이다. 그렇죠.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날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감기가 낫듯이 금방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불순종 하게 될 때에 사람들에게로부터 나의 평판과 이런 것들을 내가 일시에 잊어버릴 수도 있다. 나의 이 잘못은 나와 하나님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러면서 복음으로 이 죄와 불순종이 몰고 올 심각하고도 진지한 결과에 대해서 감소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감소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그 시험에 빠진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불순종 할 수 있는 담대함을 충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흐르면서 점 점 점 점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급속도로 은혜의 영향력들이 마음속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이 죄에 대한 더 강력한 욕망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그 죄에 대한 욕망이 그를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 성령 충만 하던 사람이 변해서 이번에는 사악한 욕망으로 가득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시험의 때를 모두 지나면서 본격적인 불순종과 범죄의 나락으로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패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활짝 열려있습니다. 종착역은 사망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이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것은 시험을 벌써 지났습니다. 죄에 확 빠지기 시작할 때 이제 어떻게 되느냐면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욕구와 그 불순종의 욕구에 상황이나 대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현저하게 욕망이 미친 듯이 고개를 들면서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그 초대 교회 시대에 보면 그리스도인을 사형시키는 방법으로 ( ? )던져놓고 사자들을 풀어놔서 물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자연 세계에 과식을 하는 동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 맹수는 거의 과식을 하지 않는답니다. 인간만 과식하지 절대 과식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사자를 만나도 그 사자가 배부를 때 만나면 그 사자가 포만감을 느끼는 것만큼 안전하데요. 자기를 향해서 적극적인 위협만 가하지 않으면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고플 때 만나면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외 없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처형식이 있을 때에는 사자들을 몇 날을 굶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쇠 창 살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저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껏 까지 배가 고프니까 힘이 없어서 가만히 엎드려서 졸던 사자들이 채찍에 맞고 그래서 피 냄새가 공기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미친 듯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면서 철 창 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빨리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먹으리라.”) 지금 생각난 비유인데 아주 정확하게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상물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계속 욕망으로 존재하고 그 욕망이 성취가 안 된다는 이야기는 불순종과 범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대상을 딱 만나게 되면 그 동안에 은혜가 고갈되고 특정한 욕망에 대해서 미친 듯이 고개를 들었던 이 욕망들이 수일 동안 굶주린 사자가 그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인들의 피 냄새를 맡은 것처럼 길길이 뛰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거의 이성적인 판단이 멈춘다고 봐야합니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그 때가 바로 언제냐 하면 시험에 들 때입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앙적인 실패에 대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죠. 그렇죠. 몇 주 전에 타임지에 카바스토리가 ( ? ? ? ) 그런 제목의 해드 타이트였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카 톨 릭 교회는 과연 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왜 그러느냐면 연일 특히 미국에서 그 카 톨 릭 연일 보도되는 것이 뭐냐면 어린 아이들에 대한 신부의 집요한 성추행이 보도되는데 경악할 정도로 끔찍하게 보도가 되는 것입니다. 쭉 읽어보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분노하면서 털어놓는 그런 것, 그 중에는 굉장히 높은 주교 이런 사람들의 이름까지 다 거론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세계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경악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성당을, 그 화려한 복장, 그리고 그 엄격한 교회의 규율, 그리고 목사와 달리 그 사람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 결혼까지 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 이기주의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거의 사례금이나 그런 것 없이 그냥 진짜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고 그렇게 살아온 성직자들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날수 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역사를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교황의 역사를 보면 사생아를 가진 교황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 ? ) 시대 때에 비오 6세 인가요. 그 사람은 사생아를 낳고 그 사생아를 신부를 만들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하려고 끊임없는 스 캔 달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나면 사실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커다란 모자, 금칠해서 만든 지팡이, 휘날리는 도포자락,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저는 설교 시간에 까만 가운 입지 않습니다만 그 까만 가운 입는 것이 그것이 효력이 있을 것 같으면 서 너 개 입고 있지. 웃을 일이 아니라. 여러분들이야 가운 입을 일도 없고 식당에서 배식하는 사람 이외에는 이런 모자 쓸 일도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반듯한 교회 생활이 모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남들이 성실한 교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것이 까만 가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5년 6년 그렇게 오래 다녔다는 것이 페인트칠한 십자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것이 우리를 자동적으로 보호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화에 대한 제 설교를 쭉 들으면서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좋은데 너무 가혹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 얘기하지 말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 말씀드려야지. 나는 성경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성화의 의무와 교리를 가르쳤고 지금도 성경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름길이 있으면 날 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지름길이 있다면 제일 먼저 애도를 표해야 될 사람은 예수님과 밎 사도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왜 날마다 죽어요. 왜 예수 죽인 것을 짊어져, 왜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요. 왜 날마다 그런 긴장 가운데 살아요. 왜 바보같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자기는 믿음이 없어서 자기는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그런 엽기적인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있으면 알려 주세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 앞에서 사는 성도의 이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을 천로역정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맛보는 즐거움이 아무리 많아도 역시 성도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완전히 행복해 질수 업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은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러니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분명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데 지금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데 지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현저하게 고갈되어 가고 있고 그래서 나의 삶, 구석구석에 배었던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 경험했던 그 철저한 자기 깨어짐, 그리고 자아가 부서지고 나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한 감격이 없는데 예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안 것이 오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균형 잡힌 교회생활, 은혜 안에 있지도 못하면 이 교회에서 뼈를 묻겠다는 그 겁 없는 고백들 말이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어디에 이 세상에 가서 뼈를 묻고 그까짓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 사랑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 밖에 모르면서 열심히 섬기다가
길 잃은 자들을
친절히 이끄니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그렇게 주님 사랑으로 눈물 흘리며 예수의 은혜를 간직하고 나만 못한 형제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예전에 나처럼 하나님 몰라서 세상에서 방황하던 지체들을 끌어안고 그 눈물을 씻기고 더러운 죄악의 덫에 상처 난 발에 그 피를 닦아주고 그렇게 살면서 뼈를 묻는 것이 은혜가 있는 것이지. 무슨 은혜가 있습니까. 죽고 나면 인간의 몸이 980원 어치의 가치밖에 없다는데 어디에 묻히든 그까짓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딱딱하게 굳어져서 그러면서 은혜도 없이 예전에 마음을 뒤흔들었던 예수 사랑의 감격도 없이 곤고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도 없이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불타는 가슴도 없이 그렇게 꾸역꾸역 교회에 나와서 자기를 파수하고 자기 자리를 파수하는 것 자체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오산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고 지금 은혜를 못 받는 일은 나쁜 일이지만 그 나쁜 일은 다가올 일들에 보다 나쁜 일에 예고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합니까? 정말 우리가 누구 말대로 복음을 다 떼었습니까? 이제 예수의 사랑은 내 손 안에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내가 다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의 세계는 발견할 아름다운 보물들이 없습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합니까.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이 결국은 잠시 은혜 안에서 즐거워 하다가 이렇게 굳어진 신앙생활, 시험에 푹 빠져서 영적인 은혜들을 하나씩 둘씩 무장 해제당하는 이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정말 진지하게 제 눈에는 여러분들이 대부분 시험에 든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생기를 간직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자책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이 값없는 사랑에 대한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 어떻게 그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여러분들의 은혜 없는 생활이 결국은 여러분들의 남은 은혜를 모두 무장 해제시키는 시험의 때를 지나게 할 것이고, 그래도 다행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성공하면 여러분들은 형식주의의 일인자가 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여러분들이 성공하면 은혜 안에 살지 못하고 시험의 때에 머무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성공하면 바리세인과 같은 형식주의, 외식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시험 중에서도 특별히 그 시험의 강도가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시험이 올 때, 그 때를 일반적인 시험의 상태와 구분해서 그것을 ‘시험의 때’ 라고 부릅니다. 그 시험의 때는 어떻게 오게 되는가? 그것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드릴 수 있는데 첫째는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끊임없는 유혹을 통해서 시험의 때가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험의 상태에서 은혜의 영향력이 서서히 고갈됩니다. (비유가 떠올랐는데 이런 비유입니다. 노아 시대 때 물이 꽉 찼지 않습니까. 봉우리들이 다 잠겼습니다. 그런데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하여튼 제일 높은 봉오리가 제일 먼저 드러났을 것 아닙니까. 이치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점점 빠지면서 그것보다도 덜 높기는 하지만 다음에 높은 봉오리들이 차례차례 드러났을 것 아닙니까. 물이 이렇게 빠지지 않았다면 하여튼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부패한 욕망은 그 은혜의 물 밑에 해저 봉오리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어가면서 아직 특정한 죄에 빠진 것은 아니고 시험에 들어가면서 이제 서서히 그 은혜의 물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쫙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봉오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은혜의 물에 잠겨 있어서 자극을 받지 않을 때에는 어느 욕망이 우세한 욕망인지는 신자가 자각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말 이해 할 수 있습니까?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마음이 있는데 은혜의 물이 꽉 차 있을 때에 봉오리처럼 부패한 욕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높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그 봉오리가 모두 물에 잠겨 있을 때에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제되기 때문에 자기가 특별히 어떤 욕망이 더 우세하고 그것에 쉽게 굴복 할 수 있는지를 충만한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보통의 통찰력이 아니면 그것을 깨닫기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더군다나 과거에 이렇게 고갈된 경험이 그래서 우세하게 드러나는 봉오리가 어떤 것인지를 몇 번 경험했다면 경험에 미루어서 그렇게 추측은 할 수 있지만 그런 때가 별로 없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이 상태 자체를 가지고 판단하기는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딱 들어가게 되면 그 시험의 상태에서 아직 어떤 죄를 지어야 되겠다. 라는 강한 욕망은 솟구치지 않는데 은혜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나쁜 생각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주야로 묵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계속 부어지지 않고 빠져나가는 그 상태 자체가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계속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첫 번째 봉오리가 드디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바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용암이 분출되고 화산이 폭발합니다. 그런데 깊은 곳은 11킬로 미터씩이나 내려가니까 밑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것이 지표면까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음파나 이런 것들을 탐지하면서 지질학 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할 뿐이지 그 속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안 나타납니다.)
보세요. 속에서 그런 화산이 폭발한다고 해서 물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냥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쫙 빠져나가면 쾅하고 화산이 터지면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수 천 톤 수 만 톤의 돌 맹이들이 튕겨져 나가면서 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언제냐 하면 시험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니까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빠져나가서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때를 총체적으로 그 기간을 시험이라고 말한다면 특정한 욕망에 대해서 강력한 욕구가 생겨나는 그 때를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시험의 때라고 부르는데 그 시험의 때는 곧 범죄와 불순종이 임박했다. 라고 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특정한 죄에 대한 아주 집요한 유혹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여러 가지 생각을 사단이 던져주어서 그래서 우리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 하려고 하는 욕망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어요.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예수 사랑 받으면서 살면 나는 가난해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은혜의 물이 쫙 빠져나가면서 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강력하게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도록 계속 그 사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그래서 결국은 나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게끔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인 경우에는 이런 공식들이 더 잘 적용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사고가 계속 되는 가운데 사고와 타협하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 죄에 대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정당화 하게 되고 그다음에는 마지막에는 의지가 무릎을 꿇음으로서 이제 그 시험의 때가 끝나고 불순종의 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의 계절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시험의 때는 끊임없는 유혹으로 오기도 하고 또 하나는 뭐냐면 상황과 타협함으로서 한 순간에 문을 열고 정문으로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 왕조 장로님의 간증을 쭉 들으면서 아주 정확한 케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가 아직 신사참배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결의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정죄 받은 마음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에 불과하니까 온 교회가 해도 문제가 없다. 이렇게 하고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아주 담대하게 신사참배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앞세워서 교회를 박해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대표적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분노하면서 “누구든지 예수의 전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서 강력하게 질타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타협한 것입니다. 왜?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데 유대의 완전주의자들이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안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을 하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뭐 할례도 받고 복음도 지키자. 그러면서 한순간에 타협하면서 시험이 확 밀려들어 오면서 그러면서 특정한 죄에 대해서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주는 그런 상황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시험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 인간이 아주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그 죄를 받아들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언제냐면 어떤 특정한 죄가 교회나 세상에서 보편화 될 때, 그렇죠. 보편화 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도 그런 죄에 빠지고 저 사람도 저 사람도 저 사람도 빠졌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이라면 도저히 두려운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가기가 가장 힘든 자리가 정직한 신자들이 모인 자리일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제 시험의 때가 어떻게 오는지를 우리들이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집요한 유혹을 통해서, 상황과의 타협을 통해서 죄가 보편화 될 때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이제 특정한 죄에 대해서 물이 쫙 빠져나가면서 사단이 가장먼저 반응하는 강력한 효력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신자를 물고, 집요하게 거기를 공격해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험이 마지막 우리를 몰고 가려는 그런 목적지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이제 두려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이 죄를 거부할 때에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집착, 이런 것들이 함께 뒤 엉키면서 그러면서 특정인에게 시험의 일반적인 기간이 아니라. 특별한 시험의 때가 확 밀어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자가 시험에 들 때에는 단지 은혜가 고갈될 뿐인데 시험의 기간이 잘 지나고 나면 반드시 그 시험의 기간은 특정한 죄에 대한 시험의 때를 향해서 치닫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다음에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한 죄를 짓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은혜의 영향력이 다 빠져나가면서 항거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런 궁금함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설교에서 묘사한대로 볼 것 같으면 이런 죄와 시험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속수무책이구나, 정답이 내일 저녁 때 주어지겠지만 우선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이제 시험에 딱 들면서 그러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부터 공급 받는 것이 거의 없거나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 공급 받는 것이 너무 미약한 정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복종과 순종의 삶을 가능케 할 정도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은 모두 시험의 때입니다. “아, 그래도 가끔이기는 하지만 몇 달에 한번씩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찡할 때가 있고 오후 예배시간에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 흘릴 때도 있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해서 공급되는 은혜는 적은 물방울에 불과하고 시험에 든 상태에서 빠져나가는 그 은혜의 영향력들은 물소리를 내면서 빠져나갑니다. 그것은 그가 순간적인 감동이나 감화를 받고 약간의 눈물이 있다. 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리켜서 그것 때문에 그가 시험의 때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시험에 든 사람들은 최악의 극단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시험이 아니라. 저의 분류에 의하면 시험, 시험이 때를 지나서, 범죄, 범죄를 넘어서서 완전히 패역으로 고착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시험에 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고 하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넘어졌다는 사실, 시험에 들어서 자신의 영혼이 위험하다는 사실,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이 시험의 상태가 시험의 때로, 시험의 때가 범죄의 때로, 범죄의 때가 패역의 때로 진척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심각성을 모르니까 자기는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진지하게 자기가 이런 지경에 오기까지 자기가 마음으로 일반적인 삶의 의무에서 경건의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지은 자기의 죄에 대한 아주 진지한 성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진지한 성찰이 없으니까 참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시험의 기간 중에 은혜를 모두 고갈 당하고 특별한 시험의 때에 은혜가 고갈된 가운데 특정한 죄에 대한 욕망이 솟구치고 그래서 결국은 범죄의 때에 범죄하고 불순종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오래 살면서 패역에 이르기까지 고착화된 사람이 이제는 이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강력한 은혜가 없이는 이 사람은 참회할 힘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지금 시험에 가운데 있고 여러 가지 괴로운 죄에 시달린다고 할지라도 매일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번은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예배 시간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진실하게 참회 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참회하리만치 내가 잘못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 시험에 드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있는 사람은 저 끝에 극단적인 경우까지 간 패역에 고착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회개할 힘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에 든다. 라고 하는 말의 의미 자체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서 경계하고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염려는 해야 되는데 자신은 없다. 자신이 염려할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한데 다만 은혜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좀 냉정하게 보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마치 갈 때까지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왜? 시험에 들었는데 자신의 시험의 상태를 인식하고 그 시험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가서 결국은 어떤 특정한 욕망이 솟구치는 그 시험의 때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저항하는 몸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잘못 지적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의 영향력들이 거의 사라지거나 현저히 줄어들었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런 영혼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를 잊어버린 상태에 대해서 왜 저항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의 은혜를 거의 상실하고 있는데 그렇게 여러분들의 영적생활을 고사시키는 기도의 태만에 대해서 왜 위기감을 느끼고 무엇인가 거기에 저항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미 여러분들이 깊은 시험의 때를 지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이 아니겠습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저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 죄 악 된 세상에서 건져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의 동산에 심어놓으실 때에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바와 같이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얻기 위함 이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그런 열매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단지 그 동산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 아직 뿌리 채 뽑혀지지 않고 그 동산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에 심겨져 있어서 아직까지도 내가 이 하나님의 교회의 동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만족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땅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그 나무를 찍어서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충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순간에 부어지는 은사나, 혹은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초가 탄탄해야합니다. 그리고 일년이나 이년에 한번씩 자기를 쏟아 붓는 간헐적인 열심과 열 열한 기도생활 보다는 날마다, 날마다, 유혹 받을 때 우리가 갑자기 죄로 가득 찬 것이 느껴질 때,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정직한 진리의 빛 앞에서 자기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깨닫고 거기에서 진실 되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런 상황을 다 보면 “인간은 진짜 이 시험에서 어떻게 할 수 없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시험 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은혜가 고갈되기 시작하고 이윽고 특정한 욕망이 용솟음치기 시작하고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불순종과 범죄로 넘어가고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죄에서 고착되어 가면서 패역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저항할 수 있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아직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주시는 권면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든 사람이 아니라. 아직 시험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권면의 해결책이 뭐냐면 깨어 있는 것과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시험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깨어 있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여기에서 진실한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가 빠져나가기만 하고 빠져나가는 것만큼 그 이상으로 생생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으심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영적 생활이 현저하게 고갈되고 육체의 습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떠받치는 이런 불행한 상황으로 떨어지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궁극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의 집으로부터 멀리 이사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직장이 요즘에 너무 경기가 좋아서 일거리가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들은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환란도 위험도, 적신도 칼도, 장래 일이나 권세 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것도 끊어놓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라에 대한 감각을 단절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죄입니다. 우리들이 삶의 실천으로 지은 죄는 우리의 생활자체를 노예 되도록 얽어매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빛을 가립니다. 그것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합니다.
나는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경건을 위해서 열심을 내지도 않고 기도생활도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영향을 받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꾸역꾸역 살면서 늘어나는 것이 많은 죄일 터인데 그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없이 그 사람의 영혼이 시험에 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험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느냐고요. 그래서 여기에서 반드시 이미 시험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깨어서 경계하면서 기도하면 되지만 이미 시험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 하느냐면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진실한 참회가 필요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온 마음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다메섹의 체험에 버금가는 신기한 체험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 속에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참회하는 진실 된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여러분들이 그런 위대한 체험을 통해서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마지막에 여러분들에게 남은 인생은 짐승과 같은 신자의 삶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끊임없는 영적 성장과 성화의 삶을 볼 때에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는 그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혔던 사람을 만나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장엄한 체험, 회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돌이켜 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그 특이하고 아주 놀라운 몇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그 어마어마한 그 체험이 그 위대한 회심의 경험 때문에 위대한 바울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모태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속에는 전부다 후진 신자들밖에는 나오지 않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 고려해야 될 것이 뭐냐면 그 위대한 체험이 그를 저절로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그런 온전한 성도의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끊임없이 분투하면서 자신을 그 시험의 상태에 두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은혜에 대한 갈망의 발자취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삶에 순간순간 다메섹의 체험에 버금가는 매순간 자기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자기를 죄 가운데서도 새롭게 갱신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고린도서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우리의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아침 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한 주님
나는 예견합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한때 저를 통해서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서 뼈저리도록 변화를 받은 여러분들 중에서 저의 설교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나오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확실히 신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상당수를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 안에서 제가 여러분들을 낳았지만 저에게는 영적인 어머니로서 여러분들의 본성을 보는 감각이 있습니다. 반드시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저의 이 예고가 이루어진 것을 상기하십시오. 반드시 나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생각이 고쳐지고 그래서 정착된 교회생활을 하게 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자신이 깨뜨려지는 진실한 참회가 없이 살아갈 때에 그에게 쌓이는 것은 자기의 의일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몇 년 전에 왔는데. 내가 김 목사 하고 같이 개척을 깃발을 든 사람인데. 교회를 옮길 때 내가 거액의 연보를 했는데.” 그런 것들이 쌓이는 것입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와 성령의 만져주시는 은혜, 어둠 속에서 자기 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의 눈을 띄어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사랑한 교회였지만 이제는 너무나 오래 다녀서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느 교회에 가도 그렇게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교회를 선택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바리세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청교도 헬리스 쿠가는 말하기를 “한 신자가 진실한 신자인지를 확인하는 훌륭한 증표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깨어짐이라.” 고 말했습니다.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자기 깨어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에 닫혀 진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않고 점점 하늘은 문을 닫고 더 이상 은혜의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 곤고한 영혼의 때를 지나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한 시간의 설교로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마음껏 만져주고 위로하는 설교를 정말 원하십니까?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위로를 받고, 여전히 어두움의 길을 걸어가고 더듬는 소경과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시험 중에 있는 것과, 그리고 이런 시험의 시기를 오래 지나는 마지막에 깊은 시험의 때에 도달할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여러분들을 특정한 죄에 대한 범죄와 패역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것을 경계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떨어야합니다. 마치 부모와 함께 유원지에 가서 막 놀다가 엄마 아빠의 손을 놓치고 잊어버리고 나서 가졌던 풍선, 가졌던 과자 다 내어버리고 입술이 새 파래서 우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은혜가 없는데 교회에서 받는 좋은 평판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고, 주님의 은혜 부어주심이 없는데 나의 이 빛나는 섬김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한번 이렇게 어울려서 그냥 병아리가 되어서만 살지 말고, 다 쓸어내고 모래바람만이 일어나는 광야에 걸어 나가서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하나님 혼자 계시고 나 혼자 있고, 그러면서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누구입니까? 제 영혼의 상태를 한번 솔직하게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참회해야 합니다. 긴 인생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까 찬송을 부르면서도 저는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너무나 사랑했던 분들도 있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금은 비록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 일생에서 주님만큼 사랑하는 분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처럼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신 분은 없습니다. 진실하게, 소리 고래고래 지르는 그런 형식적인 기도 말고, 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혼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 영혼에 빛이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셨을 때 주님과 풍성한 교제의 은혜 속에서 살 때에 느껴지던 예수님의 그 향취가 내 마음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시험의 시기를 지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온전한 순종의 마음을 잊어 벼렸는지를 어린 아이처럼 헤아려야합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그렇게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세요. 옹기종기 묻어 다니는 교회의 생활로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웃으면서 살지만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주일날 교회에 오지만 저의 영혼은 매 말랐습니다. 시험의 때라고 확신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이니까 그 부분을 두드리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당신이 그렇게 전해주시고 싶으셨던 자기의 마음을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 확 전수시키십니다. 그리고 회개가 진실한 참회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참회하고 싶어도 참회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런 정직하고 진실한 접근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이 부어질 때 그 참회의 은혜에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도 그렇게 진실하게 주님의 은혜의 문을 두드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실 때에 그렇게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뉘우치는 것입니다.
잘 살면 참 좋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요동함이 없이 주님 앞에 일사각오의 신앙을 성취하면서 끝까지 한걸음에 내지르면 참 좋죠. 그러나 한번 넘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죽어야합니까? 한번 쓰러졌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포기해야합니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었습니까?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일생동안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 제일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아주 희망 없이 저희 속에서 버려진 영혼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보시는 대신에 주님을 갈망하는 가난한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상상치도 못했던 구원의 은혜를 그들ㅇ게 베푸시고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었던 그런 구원의 은혜의 자리에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은혜에 살아있는 증인들입니다. 아무 선한 것이 없고, 마음에 가득한 악덕과 미움과 분노로 주님을 대적하기를 그것이 나의 본업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찾아오셔서 우리를 지금보다도 더 깊은 죄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고, 진실한 참회로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우리는 모두 걸레 존재들이었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주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우리의 방탕한 죄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철저하게 실패한 베드로에게 과거에 죄과에 대해서 묻는 대신에 ( ? ) “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이런 자비로운 분을 만나본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불꽃처럼 살도록 불러주신 자기의 자녀들이 빛을 잃고 시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보다가보다가 저같이 막되 먹은 막대기와 같은 인간을 들어서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그분을 영화롭게 할만한 금, 은 보석이 있습니까?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뛰어난 재주가 있습니까? 주님 섬기는 일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동방박사처럼 황금과 유황과 몰 약이 없고,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거액의 연보는 드릴 수 없고, 팔 밭도 매매할 집도 없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우리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는데 한번 가면 오지 않는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시험 속에서 보내야합니까. 한편으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한편으로는 은혜의 단절 가운데 살면서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는 그런 위험한 곡예를 우리들이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속히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의 때를 아껴서 사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험의 때에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정말 떨쳐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살려달라고 생기도 없고 형식만 남은 이 시험에 든 착실한 교회생활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부르짖어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께 발견되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핏 길을 걸어서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아 갈 때에 주님이 내게 약속하신 삶은 이렇게 비루하고 가난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영광의 기업의 그 풍성함을 따라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보여 달라고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탄원해야합니다. 그래서 브레이크 풀린 자동차처럼 은혜의 때를 지나서 은혜의 고갈의 때를 지나서, 시험의 시기를 지나서, 시험의 때를 지나서, 범죄의 때를 지나서, 패역의 때를 지나서, 힘차게 굴러가는 우리의 인생의 수레바퀴에 무엇인가 재동을 걸어야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을 모르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영혼들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과 이스라엘의 집에 잃어버린 양들이 다시 당신의 품으로 귀향하여 그 사랑의 품안에서 목양을 받는 것, 그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그 때입니다. 나는 한번 보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어린 아이처럼 모일 때마다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 때문에 손에 손을 붙들고 기뻐하고 형제가 형제를 자매가 자매를 끌어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그 영혼의 부흥의 때를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의 예배가 진실한 참회와 한 주간동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이루셨던 혁혁한 승리를 나누는 그런 영광스러운 만남의장이 되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았다면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시험에 들어있다면 여러분들은 진실 되게 참회하여야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지금 벗어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더 어려워 질것이고 지금이 가장 쉽고,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시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셔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3. 언제 시험에 드는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저는 지난 시간에 시험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가지고 장시간 동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특별히 그렇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하는데 그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은 깨어 있어서 기도하면서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록 자기를 잘 지키는 것인데 이미 시험에 들어가 버리고 나면 깨어 있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거기에서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그 시험의 덫에서 풀려 나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가 시험의 시기를 지나고 그리고 시험의 시기 마지막에 시험의 때를 통과해서 범죄의 시기로 들어가고 그 범죄가 오랫동안 반복되면 마지막에 고착된 패역으로 흘러가서 그래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기 힘든 완고한 죄인이 되어간다. 라고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이미 시험 가운데 들어가 있다면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 시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고, 그리고 일평생 사는 동안에 시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사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안전함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그러면 어느 때에 시험에 드는가? 하는 문제와 그리고 크게 두 번째로는 그러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말이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우리들이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황이 조성되면 그리고 어떤 마음의 상태가 되면 우리들이 쉽게 시험에 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크게 네 가지로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에 드는 때를 말하는데 그것은 뭐냐면 크게 네 가지인데 첫째는 외적인 번영, 그리도 두 번째는 신자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멈출 때, 그리고 세 번째로는 큰 영적인 기쁨이나 혹은 계시를 경험한 후에,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인간이 자만심으로 가득 찼을 때. 예외 없이 시험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첫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시험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시험은 인간이 범죄에 떨어진 것을 시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의 마음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해서 자신의 고유한 의무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모든 조건과 환경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외적으로 무엇인가 이렇게 모든 것이 형통하게 잘 되어 나갈 때 모든 것이 번성하고 뜻대로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에는 염려와 근심 같은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세속적인 염려와 근심은 그것들을 신자가 마음에 가득 가지고 있으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꾸 고갈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잘 되어가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때에는 근심과 염려가 없으니까 세속적인 염려와 근심, 이런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데 문제는 뭐냐면 외적으로 많이 번성할 때에는 신자가 정신을 차리고 살지 않으면 세속적인 염려와 근심도 빠져나간 동시에 함께 무엇도 빠져나가느냐하면 경건한 근심과 염려도 함께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근심과 염려는 신자가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아주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근심과 염려도 두 가지인데 세속적인 근심과 염려는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고갈시키지만 거룩한 근심과 경건한 염려, 경건한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깨닫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을 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모두 다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에서 고통하고 갈구하고 괴로워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챨스 스펄젼 목사님이 성도는 마른눈을 가지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그랬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하늘에 어떤 신령한 약속과 하늘을 향한 그 아름다운 소망은 뭔가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그리고 진지한 이 슬픔과 염려를 가지고 거룩한 슬픔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헛된 영화와 영광의 껍질을 뚫고 그 뒤에 성도의 영원한 소망으로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안목으로 직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외적으로 막 번성하게 되고 모든 것이 염려가 없고 잘 될 때. 이것은 자기가 막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잠시 형통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형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과 형통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배를 탔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야지 않습니까. 배가 출발하자마자 배에 구멍이 나서 빠져버린다든지, 고래가 와서 뱃머리를 받아서 배가 부서졌다든지, 무선 해적이 와서 그랬다든지, 그런데 순풍에 돛단 듯이 쫙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동안에 득의만만하게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순조로움은 아니죠. 그렇죠. 그러나 이제 우리가 첫째 시간에 예를 들었던 다윗에게 주신 그 많은 권세들, 하나님이 주신 거죠. 그리고 그 다윗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을 이기게 하시니라. 승승장구하고 외적으로 계속 승리하면서 왕국이 번영하여 가는 가운데 그 모든 번영과 승리는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죠. 하나님이 그렇게 주셨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번영 때문에 다윗이 넘어지지 않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진설병을 먹으면서 이 동네 저 동네 도망자처럼 수배자가 되어서 다닐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던 사람이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형통함 가운데서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외적인 성공, 외적인 잘 되가는 형통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의 안전까지 보장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까지 모두 안전하게 지킬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인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인데, 주님이 내게 주신 기업인데" 소용없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자식을 낳았어도 낳은 후에 제대로 안 가르치면 짐승 같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안 주신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주셨지 누구 마귀에게 점지 받아서 아들 낳은 집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서 그 믿음의 집 안에서 짐승 같은 놈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 자꾸 그런 것으로만 묻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든 어떻든지 간에 자기가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외적인 번영 속에서 모든 것이 잘되 가고 있는 가운데서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해서 우리의 신앙을 초토화 시키는 전략이 삼단계입니다. 첫째는 뭐냐면 제일 먼저는 영어로 말하자면 ( ? )꼬이는 것입니다.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피고 있는 시험하는 것입니다. 계속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처음 유혹이 올 때에는 “말도 안돼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어. 내가 짐승이란 말인가?” 그러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지적으로 승복을 당하면서 그다음에 죄에 대한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 죄에 대한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두 번째 사단이 쓰는 전략이 뭐냐면 ( ? ) 신자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단번에 은혜 받은 신자의 심령을, 삶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새벽기도 나와서 펑펑 울며 기도하는데 마귀가 “야, 간음하러 가자.” 그러면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마귀도 그것이 성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은혜 받고 눈물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얼굴이 다 부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나오는 사람에게 마귀가 “야, 내일 아침에 탈세하러 가자.” 그런다고 해서 넘어가느냐고요. 안 넘어 간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들어오는 과정과 죄가 들어오는 과정, 인간이 불신앙의 상태에서 회심하는 과정과 은혜의 상태에서 죄로 떨어지는 그 과정이 너무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면 신학적으로 죄의 자리와 신앙의 자리가 동일합니다. 그것이 뭐라고요? 그렇죠.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이고 그리고 신앙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은혜 안에 있는 신자를 끊임없이 유혹하면서 마지막에 두 번째 그것을 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것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죄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떨어져서 그것을 이렇게 끌어안게 되면 그다음에는 아주 놀라운 속도로 그 성도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 마음에 마치 보드라운 흙과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짚으면 손자국 발자국이 날 정도로 그렇게 부드럽고 씨가 딱 뿌려지면 즉시 그 씨에서 싹이 나면 그 땅이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신자라고 해서 나쁜 생각 하지 않습니까? 은혜 안에 있는 신자라고 해서 완벽하게 마음을 지킵니까? 완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신자라고 해서 죄 짓지 않습니까? 짓습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죄를 짓거나 나쁜 생각을 해도 아주 놀라운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금방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나쁜 생각이 떠올랐는데도 금방 지워버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이 마음이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드러운 마음을 놔두고는 사단이 우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성과를 크게 거둘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즉시 참회하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이 부드러운 마음을 어떻게든지 딱딱하게 만들지 않으면 한번 그 집요하게 그 사람을 공격해서 범죄 하게 하거나 나쁜 생각을 품게 한다고 할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털어버리니까 그러니까 파괴적인 결과를 가지고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서둘지를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사랑은 오래 참고뿐만 아니라. 사단은 오래참고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요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그래서 그다음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승복된 죄에 대한 생각들이 이 통로를 타고 가슴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딱 마음에 그 더러운 생각을 착상하고 그것을 끌어안게 되면 그것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막 흩어서 휘날리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딱 털어버리면 없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딱 떨어지면서 뿌리를 내리면서 이 생각이 마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휙휙 스쳐서 지나갈 때에는 마음에 영향을 별로 안주었는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자양분을 빨아 먹으면서 그러면서 아주 급속하게 암 세포가 착상되어서 뿌리를 내리듯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그런 악한 생각들이 스쳐갈 때는 물리치는데 1의 힘이 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정말 뒤집어지는 참회가 아니면 이것을 뿌리 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쫙 뻗어내려 가면서 이제 마음에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느냐면 마음이 아주 강퍅하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악한 생각들이 그 속에서 자라면서 유혹에 굴복한 생각들이 자라면서 죄에 대한 소원이 생겨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성도의 이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의 성분들이 그 뿌려진 악한 생각의 뿌리에 의해서 전부다 흡수 되어서 빨려 나가면서 그러면서 아주 몹쓸 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데 그 때까지도 아직 실질적으로 범죄가 행해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보면 범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범죄를 억제하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뭐 두려움이라든지, 그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라든지, 그다음에 하나님까지는 아니라도 사람들에 의해서 추락되는 자신의 명예라든지, 이런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들이, 은혜를 잊어버릴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제동장치가 되어서 마음에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담대하게 그 죄를 밖으로 손을 뻗어서 그 악한 생각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미수 상태에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사실은 사단의 계교를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니 그 속에서 계속해서 신자의 마음은 실제로 죄를 행하든지, 안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제 계속해서 이 속에서 그 마음이 딱딱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딱딱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 그것을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뭐냐면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이제 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좋은 은혜들이 그 신자의 마음에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정도에서 사단이 손을 떼면 좋은데 그 정도가 아니라. 이제 그런 것을 더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에 죄에 대해서 노예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이 뒤 엉키면서 그 죄를 도저히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거기에서 오는 이 깊은 영혼의 곤고함과 고통들을 범죄를 통해서 획득하는 즐거움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죄 가운데서 계속 고착화 되어 가면서 거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패역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죄에 찌들어서 아예 전에는 이렇게 죄를 지을 때, 패역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죄와 그다음에 단지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죄는 다릅니다.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항상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주저주저합니다. 그런데 패역함 가운데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 마땅한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이 거의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데 담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죄 악 된 행동들이 그의 신앙의 인격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아주 인격 그 자체를 죄와 결탁되어서 떨어질 수 없는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그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지만 사단의 목표는 그렇게 그가 평생 살다가 죽으면 아주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라고 사단은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단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나라를 건설해 갈 때에 자기 나라 안에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헌신 되어서 몸의 어디를 찌르든지 예수의 피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대응관계에 있는 상태가 그런 죄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면 외적인 번영에서 그런 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갔을 때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면 “은혜 가운데 잘 지냅니다.” 그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사고 안 났습니다.” 그 뜻입니다. “사고 안쳤어요.” 그 뜻입니다. 그것 아닙니다.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사고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예수보다 귀한 분이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은혜 중에 사는 삶입니다. 우리 교정합시다. 진짜 여러분 전 집회 세 시간 동안에 확실하게 여러분들의 상식을 깬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뭐냐면 시험에 대한 정의가 우리는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시험이 아니라. 범죄를 우리는 시험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또 하나는 뭐냐면 은혜 가운데 산다. 라고 것, 사고 안치고 사는 것, 사고 안 당하고 큰 어려움 안당하고 살아가는 것, 사업 말아먹지 않고 직장에서 안 잘리고 집 식구들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자식들이 사고치지 않은 것이 은혜 가운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사고력을 가져야합니다. 어쨌든지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되어갈 때에 그 때에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정확하게 뭔가 이렇게 모든 것이 정말 우리들이 통념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날 형통하게 해 주시지 진짜 요즘 근심이 없네, 잘 나가네,” 그 때에 그 외형만 보지 말고 자기 속을 봐야합니다. 그 때가 바로 시험에 들기 아주 쉬운 때라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사업이 잘되어서 돈이 막 벌릴 때, 직장에서 승승장구 할 때,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어갈 때, 거기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진짜 그분이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시대의 우리 성도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이미 벌써 신약시대 이전 천년 전에 그런 계시의 빛 아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형통할 때에 넘어지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어떤 때 오느냐면 은혜가 멈출 때, 아까도 설명을 이미 드렸습니다만 그 외적으로 많이 번영하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들은 까마귀 고기 먹은 사람처럼 외적으로 잘 되어갈 때에는 항상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런 연약함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증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간증을 들을 때에 고난을 많이 당할 때에 그 가슴이 찢어지도록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나를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성공해서 승승장구 할 때에 그냥 높은 산 꼭 대에 올라가서 가슴을 찢으면서 그냥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런 간증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데 왜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고 금식 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나오고 왜 그래요. 새벽 기도도 이제 쉬어야지. 그 때에 그렇게 잘 나갈 때 뭐냐면 은혜가 멈추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잘 나갈 때만 은혜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질 때에도 은혜가 멈추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는 졸지에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업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이 일어날 때는 항상 예고편을 수없이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예고편을 해석할 수 있는 영적 사고력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 시험에 들게 되면. 마음이 무디어 지면서. 오죽 답답했으면 예수님이 “너희가 천기는 분변할줄 알면서 어찌 때를 모르느냐?” 예수님의 눈에는 이제 심판의 때가 무르익었어요. 그런데 한 녀석도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아는 녀석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 앞에서 “예수님 이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것이 최신 건축자재로 지은 대단한 집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무지하고 바보 같으냐고요. 예수님은 그냥 펑펑 우는데 자기네는 종려나무가지 흔들고 겉옷을 흔들면서 그냥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리고는 잠시 후에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 손가지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 손을 흔드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신자가 가끔가다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항상 시험에 들기를 고대하면서 사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항상 은혜 가운데 살아야지 그런데 무슨 문제냐면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해서 교회생활이 무너집니까? 십일조 생활이 무너집니까? 아니면 무슨 속에 은혜가 떨어져도 그냥 은근과 끈기로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날 와서 “목사님 저 교역자 그만두겠습니다.” “왜” “요즘 은혜가 떨어집니다.” 그런 사람 있느냐고요. 은혜가 떨어져도 그냥 뭐 맡겨줬으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한번도 그런 것 받아 본적 없습니다. “목사님 나 집사 그만두겠습니다. 은혜가 자꾸 떨어져서 이것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범죄만 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은혜가 고갈되는 정도는 조금 불편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지 못하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보다 나쁜 일들의 단순한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 롯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갔죠. 그리고 그때부터 이 사람은 완전히 신앙의 세계를 거꾸로 놓고 말한다면 결단을 하고 회심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기로? 예수를 팔기로. 이제는 딱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한 것 입니다. 아니 그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가 롯 유다에게 들어갑니까?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평소에 가 롯 유다가 마귀에게 예쁘게 보였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제일 친하니까. 그러니까 베드로도 실패했고, 아니 실패 안한 제자가 어디 있습니까? 가 롯 유다는 은 30을 사랑해서 예수를 팔았지만 다른 제자는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님 버리고 도망갔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가 롯 유다는 이미 굉장히 오래전부터 은혜를 예전에는 받았지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그 마음이 철저하게 그런 범죄를 위해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들어 갈 때에는 이미 충분히 “마귀 우리 주여 오소서. 다스리시옵소서.” 이 내면의 세계가 이럴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서 다스릴 수 없을 정도의 그러한 아주 나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그렇게 들어가서 그런 생각을 넣어줘서 했는데 유다가 왜 책임을 져야 된다. 라고 묻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초보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고집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멈춥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자기가 은혜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너그럽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 오늘 이 시간에 진짜 반성하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꾸 지름길을 찾는데 그랬다면 여러분들은 이 신앙의 길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될 사람입니다. 이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닙니다.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싸우나 하듯이 누워서 저절로 천사가 밀어서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여러분들은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신자가 정상적인 신앙의 상태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나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제공 받아야합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이 되어 갈수 있는데 이 속에서 끊임없이 부패한 욕망과 눈에 들어오는 그 모든 이 부패한 세상의 욕구들이 함께 만나서 우리를 죄짓게 하고 얼마나 많이 마음으로 많이 범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것이 결국은 전부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 명증한 영적 투명성들을 모두 다 더럽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취오니” 그러니까 정결하고 정직하고 투명한 그 마음에 신령한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더럽고 부정직하고 이렇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가 마치 영적인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토할 것 같이 구역질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시험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마귀가 한번만 시험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역질나는 더러운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서 뭘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신자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건강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웅덩이가 하나 있습니다. 웅덩이가 있는데 애들이 와서 그 맑은 웅덩이를 막대기를 가지고 쑤십니다. 그런데 위에서 물이 계속 흘러 내려오면 잠시만 지나고 나면 애들이 신발까지 신고 들어가서 흙탕물을 만들었는데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라앉을 것 가라앉고 빠져나갈 것 빠져나가면서 맑은 물로 다시 그 웅덩이가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끊어지면 고여서 나중에 썩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새벽기도마다 나와서 그렇게 눈물 흘리고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어떤 사람은 그냥 아예 예배를 두 번씩 드리더라고요. 한참 은혜 받을 때 일부 예배 드렸으면 가야 되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요. 재방송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 때는 테입까지 사가지고 갑니다. 그렇게 은혜 받을 때도 죄의 유혹 받지 않습니까. 완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삶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고 자기가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면 더 많이 참회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뭐냐면 회개할 필요가 증가될수록 사람들은 회개할 수 없는 심령이 되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회개할 필요성이 증대될수록 그 사람의 마음은 회개할 수 없는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회개의 필요성이 줄어들수록 그 사람은 많이 회개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마음이 딱딱해지느냐 부드러워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많이 받으면 어떻습니까? 늘 참회의 눈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뭐 조금 잘못했는데 그냥 마음 아파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다. 회개하다 회개 할 것이 없으면 그다음에 뭐냐면 남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중보기도 입니다. 선지자들이 아니 뭐 예루살렘이 망하는데 예레미야가 보태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망함을 보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다니엘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나라가 망한 죄를 그렇게 통회하고 아파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자기와 나라를 망하게 한 제3의 백성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나 구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교회의 ‘바디’ 교회가 한 몸이 된 연합니다. 그것, 동일체성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에 그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데도 마치 죄인인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인데도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그렇게 통회하시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멈추었습니다.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외부적인 유혹과 내적으로 솟아나는 부패성이 만나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급속하게 딱딱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 시험이 점 점 점 그 죄를 향해서 다가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은혜의 공급이 떨어지고 나면 기도생활이 건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새벽기도 자체도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그것이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전혀 안나오던 사람들에게는 거기 나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만 오래 나온 사람들은 새벽 기도 매일 다니면서도 거의 기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엎드려서 푹 자다가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부음이 다 그치는 것입니다. 그치고 나면 그 때에 이제 시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시험에 들어간 것입니다. 시험에 드는 때입니다.
그런데 정말 분하게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는 자신의 영적 현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가 그렇게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기는 있는데 은혜 충만할 때는 기쁨이 많았었는데 기쁨이 없고 사는 것이 좀 힘들뿐이다. 좀 불편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편할 뿐이 아니라. 지금 은혜를 못 받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쁜 것은 장차 다가올 보다 나쁜 것들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정말 훌륭하게 사단의 계교들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를 밟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입학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솔직히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여러분 마음속으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특정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한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내버려 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참회 해본 적이 최근에 있습니까?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예배시간에 매일 늦게 오고 말이죠. 예배시감에 와서 심지어는 멍하게 딴생각하고, 졸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래도 거기에 참여시켜서 이 사람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실까 하고 고민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회복의 기회들을 모두 무산시켜버립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참회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성실과 끈기로 버티면서 그러면서 교회에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 이 메가 처치들, 큰 교회들이 그 부흥을 대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이 참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아래서 살아가는 그 맛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물 붓듯 부어질 때에 이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난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만져주셔서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일주일, 이주일 동안 회개하는 사람을 데리고 정신과 병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정신과 병원에를 가야지. 그렇게 죄가 많으 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기가 병원에를 가야지. 오죽했으면 역사에 보면 윗 필드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윗 필드가 설교자로 취임을 해서 설교를 했는데 막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뭐 15명 정도가 거의 미쳐버리다시피 죄를 회개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 눈에는 미쳤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했더니 모두 미쳤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은혜가 멈출 때 그 때 벌써 영혼은 빨간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시험에 대해서 아주 친화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벌써 영혼에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들을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적합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치려고 하는 진지한 변화의 노력이 없이 더 좋은 말씀을 들어서 뭐하겠습니까? 더 많이 알아서 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살지도 않을 건데 더 많이 알아서 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의 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은혜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넘어짐과 미끄러짐, 나아가서는 어쩌면 오늘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이 배교와 방불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현재적인 긴장감을 가져야합니다. 뭐 잘 벌리는 사업이나, 잘 들어오는 수입이나, 넉넉한 생활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어리석은 부자와 유사한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지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자.”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다.” 그래서 일생에 몇 번 찾아오는 다메섹 체험과 같은 그런 그 어마어마한 체험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지금 현제 더 필요한 것은 뭐냐면 날마다 주님이 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시는 이 은혜의 체험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갈 길을 지시받고 어린 아이처럼 매순간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진실한 신앙생활, 살아가야합니다. 좀 눈에 말이죠. 그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탄원의 눈물이 흐르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자신의 이 고갈된 모습에 대한 그 진실한 애통의 눈물들이 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구리 빛으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한 방울의 눈물도 없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버티고 앉아서 더군다나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받을 하나님의 치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작년에도 설교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신자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떠들고 난리를 쳐도 매일 국솥, 밥솥 들고 청량리로 뛰어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말이죠.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면 세상을 위한 섬김은 거의 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삶 속에서 밥 퍼주고 국 퍼주는 사람도 생겨나고 고통 하는 영혼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그러면 정말 자기가 은혜 받지 못하면 옛날에 아무리 하나님이 나를 크게 만나주시고 내가 아주 뚜렷한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말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수 없다. 라는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부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영적 사고력이 멈추니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그런 ( ? )
맨 처음에 교회를 지어놓고 교인들이 와서 “와, 목사님 이것 너무 좋네요. 이것도 좋고” 그래서 제가 듣기 좋았는데 요즘은 좀 싫습니다. 그래서 내 속으로 “그래 교회 예쁘다고 칭찬만 하지 말고 망가진 너 좀 봐라. 너 좀 봐” 은혜가 멈출 때에 시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은혜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만 돌이키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자리는 돌아올 수 없는, 돌아오기 너무 힘든 그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주위에 지금도 10년, 20년째 옛날 19살 때 첫사랑 회상하면서 흰 머리 되가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 왜 그렇게 사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날마다 내 영혼 주를 만나” 이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그냥 지나가다가 간헐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을 가지고는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수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그 은혜의 영향력 아래서 장구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뭐 자기는 은혜 많이 받고 이 교회에 와서 고침도 많이 받고, 뭐 어쩌고저쩌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에는 누구하고 똑같으냐면 배에 목수가 차고 암 말기가 되어서 수술 하려고 수술대에 눕혀놓고 이제 겨우 개복했는데 그 내장이 나왔는데 이제 치료가 끝난 것처럼 뛰어 다니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아주 오래도록 그 병상에 누워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대 수술인데 고쳐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망가진 채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까. 짐승처럼 포악하고 미움의 칼을 한번 품으면 놓지 않는 그런 완고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역하고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로 살아가다가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한번의 눈물로 그것이 고쳐지겠느냐고요. 두 번의 회개로 그것이 치료가 되겠느냐고요. 치유는 무슨 얼어 죽을 치유에요. 은혜의 영향력이 그 더러움들을 누르고 있는 동안에 그 때에만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은혜 안에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은혜 있습니까? 은혜 안에 살아갑니까? 사고 안 났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매일 매일의 터치가 있습니까? 그 은혜가 여러분들을 만지고 여러분들에게 어두운 눈을 열어 진리를 보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의 처지를 생각나게 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볼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날마다 버리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내 인생의 보좌로 임하시옵소서. 내 인생의 최상의 즐거움은 당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매일 누구 못 믿는다는 이야기나 하고 교회 욕이나 하고, 설교자들 흉이나 보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뭐가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시험에 들어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큰 영적인 계시나 기쁨이 있는 후에. 이것은 성경에 아주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 증거의 장본인이 누구냐면 예수님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쫙 열리면서 전대미문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커다란 영적인 기쁨과 주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뭐가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도 보면 계시의 빛을 받은 후에 시험에 빠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죠. 뿐만 아닙니다. 바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사단이 둔 가시로 인해서 괴로워하면서 육체의 가시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물러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고 고백한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삼층 천을 보고 놀라운 이 영적인 세계의 신비를 본 후에 그는 그런 영적인 위대한 세계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자기의 몸에 두신 사단의 가시, 그것을 인해서 한편으로는 고통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이렇게 영적인 큰 기쁨,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 그 때에 그러면 왜 이런 위험한 때가 되는가? 왜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왜 위험하게 되는가? 그것은 뭐냐면 이제 여러분들이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한 것이 뭐냐면 마귀가 상대해줄 사람만 되어도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레오날드 ( ?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면 “자기는 소원이 있는데 천국의 생명책에 자기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지옥의 게시판에 자기의 이름이 올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나 그랬더니 얼마나 그 신자가 후지면 지옥의 게시판에도 안 올랐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롯해서 바울과 사도들의 이름은 지옥의 로비에 다 게시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나가는 마귀의 조무래기들이 나가기 직전에 항상 그 교관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받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가면 거기에 이러이러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라. 잘못 잡히면 죽는다. 여기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다 너희들의 밥이다.” 한 10년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은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 그 찬송가가 있지 않습니까. “지옥의 게시판에 올랐을까?” 마귀가 뭔가 이렇게 경계심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접근할 가치가 있습니까? 은혜가 모두 고갈되고 악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자동인데 그것 왜 찾아가서 힘을 주느냐고요. 내버려둬도 잘 사는데,
마귀가 사창가나 폭력배의 주위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어디 주위에서 맴도나요? 교회 주위에서 맴돕니다. 그것이 벌써 예수님이 시험 받으시는 장면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 성전이 어디입니까? 그 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사단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느냐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사창가나 폭력배 소굴이나 아니면 부패한 정치인들이 있는 그런데다 있어야지, 어떻게 거기에 있느냐고요. 거기는 안가도 됩니다. 왜 그러느냐면 잘 돌아가는 구역입니다.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교역자 없이도 잘 돌아가는 구역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계속 가서 손을 좀 봐야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습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사단이 여러분들을 기억해둬야 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존재입니까? 괜히 호언장담하고 호기나 부리고 말이죠. 허세나 부리고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은혜가 모두 고갈되고 교회는 나옵니다. 어제 말씀드렸죠. 사단이 그 정도는 이해를 합니다. 양해합니다.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다 양해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네 나라에 해가되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유익할 수 있죠. 마귀에게 잘 훈련된 사람이 교회에 깊이 투입될 때 언제든지 자기를 위해 역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마귀가 정말 신경쓸만한 그런 존재들입니까? (예를 들자면 아니, 나는 잘 모르는데 타임즈 같은데 보면 논쟁이 많더라고요. 컴퓨터 황제 빌게이츠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나는 미국 사람들이 다 이렇게 우리나라 박 세리 선수처럼 떠받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욕을 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매일 법정에서 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이 그 예수 믿는 사람을 좋아 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무시 받아도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 그 간증을 들으면서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쓴 책도 내가 읽어보았는데 그분이 왜 그렇게 박해를 당했느냐? 그분의 해석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일재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참된 신자로 존재하는 그것이 일본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바람직한 현존입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깨뜨려지기를 원하고, 성화의 원리를 터득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싶어 하고, 진리를 깨닫고 싶어 하고 목양을 받고 하는, 마지막 이 모든 작업을 통해서 완성 되어 가야할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현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부패한 자신과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사람 자신이 사단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요하게 그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청교도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것은 뭐냐면 은혜가 많은 곳에 마귀의 역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것이 개인적으로 적용하자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실 때 그 성도가 마귀에게 집요한 표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 일치된 합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경험도 그것을 말해줍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짐승처럼 살아 갈 때, 무슨 마귀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습니까? 변화 받고 보니까 이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이 내 마음을 흔들고 그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을 떠서 보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우군이 없는 것입니다. 가득 둘러 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그 사람이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가 영적 전쟁터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혼의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 다 웃기는 소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슴에 다가오기를 않는 것입니다. 왜? 육적인 사람들은 성령만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귀도 못 느낍니다. 다 영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은혜의 세계의 터치를 느끼는 것만큼 죄의 세계의 악한 영향력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그러면 그런 은혜를 어떤 신자가 확 받고 하늘의 놀라운 기쁨을 누리고 나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쇠신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그분을 위해서 주님이 바라실 존재가 되어갈 각오가 되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아주 즉시 그 사단의 타겟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경우가 또 나옵니다. 가이사랴의 빌립보에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할 때 다들 헛소리 할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니까 “야, 베드로야. 너는 어부지만 어쩜 그렇게 똑똑하냐.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뭐라고 그런지 아십니까? “너에게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말하자면 평소의 신앙고백이기도 했지만 베드로가 그 순간 누린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와 지식의 빛이 그것을 힘입어서 그 진실하고 교회의 초석이 되는 그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내 놓고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조금 있다가 금방 “사단아 넌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께 그런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되면 즉시 사단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은 후에 반드시 시험에 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두 번째로 인간의 약함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 영적인 커다란 은혜를 맛보는 것과 그 다음에 어느 순간에 깊이 좌절하는 동공상태가 되는 이런 것들은 백지장 한 장 차이입니다. 그 성경의 증거가 사사 중에 삼손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불래셋의 군대와 더불어 싸우지 않습니까. 당나귀 턱뼈로 1000명을 때려죽입니다. 그것은 사실 하늘로부터 내린 성신의 충만함을 힘입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 닭을 1000마리를 잡아도 쓰러질 터인데 그래도 명색이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장난하는 사람들입니까. 다 무기 들고 왔는데 그것을 춤추듯이 1000명을 당나귀 턱뼈로 때려 눕혔을 때에 충만한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 전쟁을 치룬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금방 털썩 주저앉으면서 “내가 이제 할례 받지 못한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확 낙담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때에 이제 에낙골의 물을 마시면서 다시 힘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신에 충만하게 되는 것과 매우 약하게 되는 것이 백지장 한 장 차이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약함 때문에 어느 순간에 굉장히 강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확 집요하게 밀려오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아주 그 조금 전에 강함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주 굉장한 연약함에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그 직후에 시험에 들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성경이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세 번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뭔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자기가 이렇게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주셔서 충만한 상태가 되면 그 때에 이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면 이것이 굉장히 견고하고 안전한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막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영적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질서가 딱 잡히고 그리고 예전에는 그렇게 나약했었는데 뭔가 이렇게 강해지고 기도도 너무 잘 되고 말씀에 은혜도 오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도 생겨나고 심지어는 지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안목까지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에 “그런 상태가 굉장히 견고하고 안전한 상태다. 그리고 굉장히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가만히 나둬도 상당히 오래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 ?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전한 상태에서 견고하게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맨 처음에 신앙의 초기에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로 세움을 받고, 그리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너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를 하러 다니면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한 1,2년 한 3년 사역을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크게 하나님을 만난 지체들이 너무나 빠른 시간 안에 아주 하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항상 어떤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느냐면 ‘이정도 은혜니까 저렇게 한 6개월 만에 금방 쓰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하늘을 열고 더 큰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셔야 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무리 큰 은혜라도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죽는 그런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그 견고한 영적인 상태는 유지되는 것입니다. 견고하다기 보다는 그 영적인 상태가 견고해 질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하면서 제 마음에 너무 아픈 것은 뭐냐면 예전에 은혜 많이 받은 지체들이 은혜를 더 이상 잘 못 받는 상태에서 견고한 교인이 되어 갈 때, 그 때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가서 막 때려주고 싶습니다. 이제 말씀의 지식도 어느 정도 쌓였으니까 어느 정도의 설교는 귀에도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리도 많이 아니까 어느 정도의 신자를 만나면 성도 안찹니다. 너무 비참합니다. 그것 모두 어디에서 오느냐면 그런 어떤 영적인 은혜의 빛과 은혜가 주어지고 나면 그것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셨어도 날마다 끊임없이 자기가 깨뜨려지고 매일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매일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그러한 성화의 지속적인 영향력 없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 자신도 아주 훌륭하게 그 점에 대해서 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다메섹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그 사건을 세 번이나 간증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인지, 그것이 결국은 신학적으로 보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바울이라는 사람이 되게 한 그 핵심입니다. 다메섹의 체험이 그것을 통해서 이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고 하는 신적인 강제력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고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되게 하는데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체험이었든지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간증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들이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메섹에서의 체험이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울 될 수 있는 것은 그 체험이 바울만한 크기였기 때문이었고, 우리가 우리 밖에 될 수 없는 것은 그 주님을 만난 그 체험이 우리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체험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사람이 그것만 가지고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앞에서 자기가 천하게 몹쓸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지금 이렇게 주님을 위해 유용한 일군이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자기는 지옥에 떨어져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며 이 구원의 은총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그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매일 매일의 자기 깨어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그 견고한 은혜의 계시와 빛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일평생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이, 그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고 내 안에도 있고 지금도 너희가 내 안에서 보는 바라.” 그러면서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다메섹의 체험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기 깨어짐과 변혁의 과정을 통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데서 맛보는 새로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획득입니다.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다메섹의 체험이 오늘 우리가 보니까 그렇게 엄청난 체험이지 솔직히 성도들이 모인 그 다락방에 임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의 그 체험이 아니 다메섹의 체험만 못하다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이제 자기의 시대를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구속사의 맥을 잇는 사건인데 그것이 일개의 개인의 다메섹에서 넘어진 그 체험만 강도가 못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그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령 강림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바울보다도 훨씬 더 높은 강도의 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 보다도 더 고상한 삶을 살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생애의 지축을 뒤흔드는 그 회심의 경험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체험이 없이는 내가 신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자신의 무능을 하나님께 모두 핑계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오늘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면 여러분 안에 주시는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붙들고 사세요. 오늘,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자신이 깨어지면서 그때 그것이 바로 큰 은혜와 빛을 받은 후에도 시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첫 번째 시험에 들게 되는 때의 마지막 네 번째는 뭐냐면 자만심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성경이 아주 풍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도바울이 사단의 사기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두시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해석했습니까? 너무나 많이 받은 계시를 인해서 내가 교만할까봐 하나님이 그것을 두셨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은혜가 마음에서 사라지고 나면 교만해 지지만 특별히 이 기질적으로 의시대기 좋아하고, 큰소리치기 좋아하고 교만하기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넘어질 위험이 항상 더 많습니다. 그런 자만심이 가득 찰 때에 그 자만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기대는 마음이 적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세울 수 있다. 라고 하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지나친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 싫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고장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 때가 아니면 이야기하기가 힘드니까 신념과 확신에 충만한 사람들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을 많이 못 보았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신앙에 있어서 균형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더라도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신자가 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법칙과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자신의 신념과 합치되는 것만을 골라서 그것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이상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굉장히 절약을 많이 하는 사람이 성경을 보았습니다. 이 복음서에 뭐가 나오느냐면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축사하신 다음에 그다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다음에 그 부스러기를 다 모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12광주리나 되는 것입니다. "봐라. 예수님도 이렇게 재활용 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 기사를 통해서 성경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남은 보리떡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물자절약 정신이 아니라. 아니 이것이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신념과 신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주시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거의 핍절한 지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은 예수님의 물자절약 정신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인데 그분이 이 세상에 헐벗고 유리하고 굶주린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그 놀라운 일들을 주님이 행하심으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는 것이 그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뭐냐면 “봐라. 재활용의 원조는 예수님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지 나는 정말 너무너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모르시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사고, 사상, 신념, 이런 것들이 다 깨뜨려지고 그리고 그 신앙의 중심에 예수가 다시 서는 체험이 없습니다. 저는 정말 언젠가 한번 이것을 몇 달에 걸쳐서 설교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너무너무 불쌍합니다.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면서도 그것이 결국은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돌 맹이를 던져서 별을 맞추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일 전도하기 힘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런 자만심에 가득하게 되면 반드시 시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것을 예방하는 것은 뭐냐면 정말 복음의 빛 아래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자기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없이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주님을 붙들고 주님 의지하면서 사는 매순간, 매일 매일의 자기 낮춤, 자기 비하의 삶, 그것을 통해서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무가치를 확인하고 그런 현제적인 복음의 체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이런 자만심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험을 면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모든 시험에 들게 되는 이 때를 정말 분별하고 슬기롭게 그 시험을 피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깨어 있다는 것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그러면 이제 도대체 이 깨어 있다는 것이 뭐냐? 이것은 우선 어휘적으로 볼 때 깨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잠자던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고, 아니면 푹 잠들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이제 처녀들이 모두 다 졸면서 자지 않습니까. 그 때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서 보라 신랑이다.” 하니까. 그들이 일제히 다 깨어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는 아니다. 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어.” 라고 하는 이 의미는 정확하게 말하면 잠든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는 깨어남이 아니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무엇인가를 살피는 기능을 유지하면서 깨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귀에 익숙한 말로 표현한다면 잠든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서 깨어나는 것은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 깨어 있는 것은 뭐냐면 영적 수면상태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적극적으로는 수면 상태에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똑바로 깨어 있어서 그래서 정확하게 무엇인가 자기의 시야에 있는 움직임들을 정확하게 관측하고 해석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대에서 보포 서 보신 때 있죠. 그런데 진짜 못할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다음에 이제 목회 다 은퇴해도 경비는 절대 안할 것입니다. 아파트 경비 그런 것은 절대 안할 것입니다. 너무너무 지겹습니다. 제가 방위 생활 할 때 그런데 그 때의 방위는 지금 방위하고 틀렸습니다. 경계 근무를 서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가서 보포를 서게 되었는데 이제 중요한 군사시설은 아니고 요인들이 많이 오는 그 장소에 경계 근무를 서는데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서는 것을 동초라. 하고 서서 스는 것을 정초라고 하는데 동초가 훨씬 더 낫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순회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딱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렇게 딱 서 있어라. 고 하지만 누가 그렇게 서 있어요. 앉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그러니까 방위죠. 그런데 어떤 애들은 아예 잡니다. 그리고 이제 서 있는데 말입니다. 제일 서기 싫은 시간에 2시에 4시까지 보포입니다. 이것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자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자겠습니까. 그 때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그러니 자면 되겠습니까. 자면 안 되는데 관측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밤은 어둡죠. 더군다나 눈은 나쁘죠. 그런데 피곤이 막 밀려오죠. 그런데다 춥죠. 그러니까 분명히 자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눈을 뜨고 이렇게 있는데 사람이 10미터 앞에까지 오는 것도 못 봅니다. “잦지” 그러면 “안 잦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잠은 안자고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깨어 있는 상태는 어떤 것이냐면 그 때쯤 되었습니다. 김포 쪽으로 무장공비가 두 명이 침투했는데 보초선지 얼마 안 된 이등병이 그 밤중에 캄캄한 그믐밤에 시커먼 옷을 입고 갯벌에 기어서 들어오는데 그것을 사실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라이트를 대낮처럼 켜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기어오는데 그것을 거의 놓치는 것인데 그 작대기 하나가 금방 갔으니까 이 친구가 말이죠. 군기가 바짝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 졸면 안돼.” 그리고 이제 고참은 옆에서 졸든지 그랬겠죠. 그런데 그 고참들은 그것을 못 보았는데 이 근무선지 불과 3일인가 밖에 안 되는 이 사람은 그것을 본 것 입니다. 왜냐면 군기가 바짝 들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데 진흙이 뭔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넘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제 보고를 다 한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뭐 게슴츠레 하게 있던 그 고참들이 “어디 어디” 하고 보니까 “어 진짜 있네.” 그러면서 막 연락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명은 사살하고 한명은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사람이 그것을 쏘아서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해서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느냐면 그 때에 그 사람이 현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제 제가 근무하던 곳에서 소령들, 중령들 이렇게 쭉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헬리콥터를 전용기로 내어주고 그리고 두 달 휴가를 주었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것을 타고 가자 그러는데도 간 것입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비밀 이었는데 진짜 실화입니다. 이 사람이 짝 대기 하나가 그것을 타고 자가 그러는 데로 가는데 그 헬리콥터를 조정하는 사람이 소령이었답니다. 아니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을 타고 어디로 갔느냐면 이 사람이 다녔던 초등학교, 이 사람 태어난 고향, 이 사람이 다녔던 중학교를 갔는데 국민들이 전부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환영대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때도 참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영대화를 하고 거기에서 모금까지 해서 그 초등학교에 가서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800만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그렇게 헬기로 휴가를 즐기고 나서 그 다음에 어느 사단의 제일 편한데 가서 있다가 통장에 돈 많이 챙겨서 제대했습니다. 지금도 아나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그러면 많은 성도들이 “그것은 요즘 교회에 안 나오는 최 집사에게 한 소리지. 내가 언제 잤나? 예배 시간에 좀 졸았지만” 그러니까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식의 회피를 통해서 다 비켜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변화 받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런 식으로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정직을 계속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가 막히게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셔도 “나는 지금 글쎄 자지 않았다니까?”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 많은 말씀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깨어 있어라.” 고 하는 이 의미는 잠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아직 잠들지는 않았지만 경계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든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직 잠들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사물을 식별하며 경계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채로 눈만 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해놓고 나면 이제 확실히 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가 뭐 교회 안 나오고, 타락하고, 죄 짓고, 아니면 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그냥 이렇게 은혜의 물에 저절로 떠밀려서 저절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 그냥 엎드려서 주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이 오셔서 다 살아드립니다. 그런 것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의 해석의 오류가 요한복음 15장에 대한 해석입니다. 저도 신앙의 초창기에 그런 해석에 유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니까 우리는 가만히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신 것은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비유를 하실 때 어떤 비유를 가지고 어떤 부분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시고 싶은 것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해석해서 적용하면 성경해석에 오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래놓고 소금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소금이라 그러셨습니다. 이 소금이라고 하셨으니까 결국은 무엇인지를 알아봐야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소금을 쭉 설명하는데 소금이 치료제로도 쓰였다. 또 방부제로도 쓰였다. 나중에는 양념한다는 비유를 들면서 소금 안 친 국을 먹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치료제도 되고 뭐도 되고 양념 같은 존재도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면 좀 좋은 이야기도 해주고 이렇게 그것은 당연히 오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금을 말씀하실 때는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 그것 딱 하나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썩은 세상을 생각하시면서 그것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포도나무 가지 말씀하시는데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해야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가만히 붙어 있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절로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지 내가 깨끗해질 것인가? 이것은 포도나무가 염려해야 될 것이지 가지가 염려해야 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성화의 책임을 통째로 예수님께 떠맡기는 것입니다. 아주 굉장한 오류에 빠진 현상입니다.
그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는 잠들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게슴츠레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그 소명에 부합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신자의 삶은 삶을 말하기 전에 먼저 영어로 ( ? )주의 깊어야합니다. 주의 깊지 않으면 절대 그 사람이 제대로 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겨우 구원의 티켓을 거머쥘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고도의 성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또 여러분 중에 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 아닙니까. “아니 뭐 그렇게 어렵습니까. 아니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됐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면 돼지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그것을 이야기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질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가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극상품의 포도나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상품의 포도나무로 초이스 해서 심으셨는데 그래서 그냥 열매를 따기 위해서 갔는데 가 보니까 들 포도가 잔뜩 맺힌 것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다니는 복숭아나 참외, 한 박스를 갖다 줘도 특상품의 황도 그 하나를 못삽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 그것이 바로 특상품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희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고도 쓸모없거나 쓸모가 매우 적은 존재가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을 수 있으면 벌써 그런 심리자체로서 자기가 주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해 놓고, 그러면 도대체 이 깨어 있다. 는 것이 무엇이냐?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자기를 아는 일에 깨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환경에 대해서 깨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시험이 다가올 때에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뭐냐면 시험이 시작되는 것과 진전되는 그 루트, 경로를 파악하는 일에 있어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자기를 아는 일에 깨어 있는 것을 깨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와서 “야, 너 영혼 병들었어. 그것도 영혼이라고 들고 다니느냐 쓰레기통에 버려라.” 그렇게 말해줄 때에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은 내적인 정직함만 있으면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해져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솔직해 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솔직해야합니다. 그래야지 영적인 회복도 가능하고 회복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준이 없으면 자기는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고등학교를 갔는데 저는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서 고등학교를 갔고, 내 주위에 있는 굉장히 많은 아이들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시험을 봐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같이 모여 앉아서 밥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내 앞에 옆에 앉은 애들이 거의 시골에서 많이 올라온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하고는 자존심이 상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부다 전교에서 1,2등 하던 아이들입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교에서 1.2등 하던 아이들이 전부다 포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해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교제하고 나니까 나중에 그 녀석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야, 너 중학교 다닐 때, 1.2등을 다투었다며 너 이제 고등학교에서 공부 잘 하겠다.” 그랬더니 이 아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세요. “야, 시골에서 1.2등소용도 없어.” “왜” 그러니까 “나 입학시험 보는데 수학 문제지를 받아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데요. 이것 우리 선생님 같다주면 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러다는 것입니다.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지를 가지고 자기 선생님이 시험 보면 70점 밖에 안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지만 도외지에 와서 시내 한 복판에 있는 학교 들어오니까 시골에서는 자기가 1.2등을 하면서 수재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 그 교육의 수준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도시와 시골과의 격차가 심했으니까 그것이 아주 말로만 들었지 와서 보니까 뼈저리게 실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소용없습니다. 제가 남쪽 어느 섬에 왔는데 여객선 운행하는 사람이 이랬습니다. 저기 저 동네의 학생인데 저 동네에서 두 학생이 그 옆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데 둘이서 계속 1,2등을 다툰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학생이 두 명이래요. 그 두 명 놓고 졸업할 때 수석 졸업장 주고 차석 졸업장을 줘도 그것은 기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잘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그 느낌만을 가지고 판단하면 낭패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 개로 봅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면 성경이 기준입니다. 사심 없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리얼 크리스챤이 누구인가? 진짜 신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다음에 참된 신자의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그것을 아무편견 없이 최대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신자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그 가르침들을 이끌어 내어서 그 참된 신자의 영혼의 상태를 재구성 해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작업을 통해서 사실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왜냐면 어느 해에 신약 성경을 읽는데 그렇게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인데. 그래서 아이들을 다 보내놓고 지친 몸으로 창가에 기대어서 성경을 펴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쭉 읽는데 이 신약성경을 다 읽으면서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이 뭐냐면 나는 성경이 말하는 그 신자가 아니라는 것. 기형적인 신자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런 기형적인 신자로 자랐던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배운 기독교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와는 굉장히 다른 것이었고, 그리고 내가 이제껏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신앙도 성경에서 가르쳐주었던 그 신앙하고 너무 달랐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영적인 순례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면 기준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뭐냐면 성경을 통해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실하고 은혜 가운데 있는 신자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그것을 성경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두려움과 떨림, 그다음에 경건, 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 객관적인 잣대에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집어넣고 재보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도 안 나오고 그러던 사람, 교회에 나와서 헛소리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내가 그 사람들 보다 얼마나 잘하는데” 그런 것 소용없는 것입니다. 객관적 기준이 첫째는 뭐냐면 성경입니다. 그것이 우선적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정말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거룩한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생명력 있는 신자로구나” 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이죠. 이 세상을 향한 특별히 여러분들의 불신 가족들을 거느리신 분들 많지 않습니까. 그 분들을 향한 가장 강력한 핵폭탄과 같은 복음증거의 위력은 무엇을 통해서 나타나느냐면 자기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가 변하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가 보여주니까 그런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가 정말 정상적인 영혼의 상태를 가진 것인가. 비교를 해야 합니다. 몇 달이 되도록 기도 한 번도 안하고 교회에서 사고나 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교회를 잘 섬기고, 목회자를 섬기고, 일평생 교회밖에 몰랐고, 그런 쓸데없는 자기 공치사는 하지 말고,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비쳐 봐야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자신의 생애 가운데 자기가 가장 바람직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었던 때의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비교해보면 거의 정확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좋다. 나쁘다. 위험하다. 건강하다. 병들었다. 이런 판단이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아는 일에 있어서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첫 번째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정확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단이 나와야지만 처방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정확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려야지만 어떻게 그 영혼을 돌봐야 할 것인가 라는 답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것이 깨어 있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 속에 지금 정욕이 얼마나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계측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어제 제가 예를 들었죠. 자기는 수시로 이렇게 종종 여성들을 보면서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는 그런 이야기를 해서 다 듣고 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라, 자네가 의학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갖는 그런 욕망 말고, 뭔가 자신 속에 욕망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이 인간으로 갖는 아주 자연적인 욕망인지, 아니면 특별히 역사하고 있는 위험한 욕망인지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해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만난 한 형제 한 사람은 아까 같은 경우 말하자면 건강한 젊은이인데 자신 속에서 종종 성적인 욕망이 솟아난다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그것이 마귀의 올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의 특징이 뭐냐면 자기 하체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우울증 비슷한 것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무섭더라고요. 영혼이 아주 황폐하게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무지하면 그것은 비참함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판단해서 자신 속에 일어나는 욕망이 어느 부분까지가 통상적인 욕망이고 어떤 것이 나를 시험의 때로 끌고 가는 경계하여야할 이 솟구치는 욕망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진단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신 속에 일어나는 정욕을 살피는 것,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결국은 마귀가 우리를 아무리 유혹하려고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욕망에 사무치게 하지 않으면 그 죄가 실현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욕망에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그 죄가 실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물이 동하게 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죄에 빠뜨리기 전에 어떤 특정한 죄를 범하고자하는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욕구는 죄가 아닙니다. 인간이 여러 가지 욕구를 느끼면서 살지 않습니까. 그 욕구 자체가 사람이 의학적으로 건강하다. 라고 하는 증거 아닙니까. 통상적으로 욕구를 느끼는 것은 그렇게 커다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욕구에 계속 흘러 들어가도록 내버려두면 그것이 통상적인 욕구를 넘어서서 그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뜨리는 강력한 욕구로 발달되어서 우리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뭐 가끔 그런 케이스를 상담합니다. 만은 인터넷을 이용하다가 아주깊이 영혼이 병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란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들어가서 한 장 두장 사진을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이죠. 그렇지만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체는 조금 죄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특정한 욕망을 확 부추겨서 그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있어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 파괴 일보직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욕구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욕구들이 이제 막 솟구치고 이러는 것, 그것을 정확하게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그런데 생각을 안 합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주의 깊지 않으면 그는 진짜 참다운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욕망이 일어나면 일어나나보다. 늘 느끼는 욕망인데 그렇겠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살펴야합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것인가. 위험한 수준의 욕망인가 하는 것을 살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있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자신 속에 있는 이 타락한 성품에 대해서 살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신자가 성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함에 있어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 라고 하는 이 교리를 아멘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화의 작업과, 나는 아직 쓸만하다고 생각하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화의 작업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교리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뼈저리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어떤 영적인 경험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를 정확하게 살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니, 그렇게 자기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깊이 타락해야 되겠네요?” 그것 아닙니다. 타락한다고 해서 자기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타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를 못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전도자로 일생을 살면서도 복음과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깊은 이 죄악들을 묵상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속속들이 부패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탄식했던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영적인 깊은 통찰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영적 통찰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어린 아이라도 작은 행동을 보면서 그 아이가 어떠한 아이인지를 이해한다고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작은 움직임 하나를 보면서 깊이 통찰하면 자기가 얼마나 부패하고 썩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늘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 네 번째는 뭐냐면 자기의 기질과 특성을 이해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람은 너무 약하지만 자기는 어느 점에 있어서 강한 점이 있듯이 반대로 다른 사람은 굉장히 강하지만 자신은 굉장히 연약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는 그 특질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죄와 관련된 연약한 특질들, 이런 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이상하게 하여튼 명예에 대해서 굉장히 약하고, 가난은 잘 견딜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고 이러지 않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다. 라고 하는 이런 명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욕망을 자극하는 데로 가서 자꾸 그것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 신앙생활 할 때는 점잔한데 뭔가 이렇게 경쟁적인 놀이를 하면 열 열해 지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윷놀이든지 뭐든지 그래서 전에 제가 모시고 있던 그 목사님이 당신이 직접 본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시골에서 장로님 가정하고 그다음에 목사님 부부 모여서 편을 짜서 윷놀이를 하는데 그 장로님이 굉장히 점잔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연습게임 할 때는 별로였는데 딱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아 그냥 너무 열 열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그 도를 계속하게 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야, 이년아 왜 도만 계속치냐? 이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그것이 뭐냐면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경쟁적인 게임의 자리에 많이 가면 죄를 짓게 되고 성화에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을 보면서도 그런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는 아주 깊이 동정이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사랑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은 그런 외디퍼스 컴풀렛그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약점이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약점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뭐 상황이 어떻게 되어서 그 여자가 거기에서 목욕을 하고 벌거벗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더라면 그 시험은 모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유혹과 시험의 환경 속에서 처신하는 철칙을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함에 따라서 각기 그것을 파악하면서 다르게 처신한 룰을 경험상으로 이렇게 처신할 때에 유혹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러한 룰을 자기가 세우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이제 그러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첫째는 자기를 아는 일에 깨어 있다는 것인데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환경에 대해서 지속적인 감시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을 깨어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시험은 아무런 외부적인 도구가 없이 그냥 우리 속에서 시작되는 경우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주 드믑니다. 그래서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할 때, 그 타락의 발단은 무엇이었습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어떻게 하니까? 보니까. 거기에서 발단이 된 것입니다. 보니까 그다음에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 먹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죄에 대한 유혹, 이것은 항상 아무런 매개체 없이 인간의 내면 속에서 그냥 시작되는 경우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오관을 통해서 만져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혹은 냄새를 맡게 되거나 혹은 말을 하거나 하는 그 외부적인 것들에 대한 자극을 통해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생각이 마음으로 떨어지면서 이제 유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세요.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냐면 자기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모든 환경이 잠제적인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잠제적인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시작했는데 은혜 가운데 잘 성장합니다.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뭐 커다란 문제없이 하나님께서 놀랍게 해서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그것도 어느 순간에 목회자나, 혹은 교회를 섬기는 일군들로 하여금 시험에 떨어지게 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심지어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시험의 도구가 되었습니까? 아들입니다. 그것도 언제 아들을 주라고했습니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 그 아들이 시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렇죠. 아브라함이 기근이 되어서 약속의 땅에서 나와서 방황하고 고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가라고 주신 약속의 땅인데 그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이 충분히 시험의 도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삶의 환경을 밀접하게 살피면서 무엇을 파악해야 되느냐면 그것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많이 악하게 발전이 되어서 후회를 불러올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기 전에 징후를 보면서 그것을 파악해야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아무리 심각한 시험이라고 할지라도 문제가 안 됩니다.
암에 걸렸는데 암이라는 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었더니 저쪽 구석에 구슬만큼 동그랗게 뭉쳐서 딱 거기 하나 있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냥 찢어내고 꺼내면 살수 있습니다. 치명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육적인 사람들은 이제 은혜가 식고 시험에 이미 벌써 들어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업해서 돈을 얼마나 벌었나? 내일은 물건을 어떻게 받을까? 오늘은 어떻게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고 해서 내가 어떻게 승진하고 수당을 좀더 많이 받을까? 돈 좀 많이 받을까? 내가 좀더 올라가야 되는데. 뭐 이런 생각밖에 안 하는데 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깨어 있다. 라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장사가 잘 되면 오늘 장사가 잘 된 것이 내 영혼에 지금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요즘에 내 사업이 계속 번창하고 있는 것이 내 영혼에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내가 지금 어떤 사람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단편적인 것 하나를 가지고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저 사람과 교제하면서 내가 내 영혼에 받는 유익과 그리고 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심지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환경, 심지어는 휴가, 여가, 아니면 자기 취미생활,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내가 이런 취미 생활을 계속했더니 나의 경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도움이 되고 있는가? 손해가 디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어떤 위험한 징후가 발생되면 이것은 일시적인가? 아니면 계속 놔두면 계속 발전해서 내 믿음을 파괴시킬만한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문제로 발전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 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것 보면 우리는 너무 부주의합니다. 그냥 씩씩 거리고 그냥 살다가 쾅, 하고 부딪혀서 피가 펑펑 쏟아지면 “어, 벽이었네” 그러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가다가 쾅 하고 빠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나면 “아이고 웅덩이였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빠졌으면 거기에다 막대기라도 세워주면 안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저이 얘기가 틀렸는가. 여러분들이 시험에 든 때가 있죠. 그리고 벗어난 때가 있죠. 그런데 시험에 벗어나서는 자기가 왜 들었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다 날아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다가보니까 시험에 들었고, “너 시험에 들었는데 어떻게 극복했냐?” 그러면 “내가 시험에 들었을 때 내 영혼의 상태가 이랬었는데 여기에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했더니 시험에서 벗어났다. 이런 것 없습니다. “몰라. 하나님의 은혜지 뭐.” 그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나도 몰라.” 그 뜻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난리를 치다가 보니까 쑥 하고 나왔는데 시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마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시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동료들이 그 시험으로 뚝 떨어져서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야, 너는 어떻게 들어왔니?” “몰라, 하여튼 살다가 보니까 들어왔어.” “어떻게 나갈 건데.” “아, 뭐 난리치다 보면 언젠가는 나가겠지” 그것이 전부다 페어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사니까 신앙의 경험이 쌓여도 그 경험이 주의 깊은 삶을 살면서 말씀의 빛에 의해서 우리의 경건한 성황의 삶을 위한 우리의 분투하는 노력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서 정확하게 해석되기만 하면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자료가 안 남습니다. 워낙 개판지면서 살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막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다보니까 시험에 떨어졌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나왔다는, 기껏해야 나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왜 들었니?” 그러니까 “교회 안 나오기 시작하면서 시험에 들었데요.” “어떻게 시험에서 벗어났니?” 그러니까 “부흥회 가면 해결됩니다.” 그런 정도의 지식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쭉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있게 살아야합니다. 아니 뭐 사람이니까 사업을 할 수도 있고 하다가보면 크게 확장할 수도 있고, 회사를 다니다가 옮길 수도 있고,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고, 휴가를 갈 수도 있습니다. 또 건강을 위해서 취미생활을 할 수도 있고, 또 건강이 굳이 아니더라도 뭔가 이렇게 자기 속에 있는 이런 어떤 정서적인 해소를 위해서 자기 취미생활 할 수도 있고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친구들 만나서 밥도 먹을 수 있고 놀러 다닐 수 있고, 그 집안 식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인생 살아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은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 아주 굉장히 쉽게 시험의 구덩이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면 다하죠.
제가 교역자들과 직원을 데리고 항상 수련회를 가면 항상 하는 것이 있는데 동해 바닷가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는데 그 가위, 바위, 보가 뭐냐면 가위, 바위, 보 이것이 있는데 이것을 한 2-30명이 모여서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판이 날까요? 안 날까요? 하루 종일 해보세요. 결판이 나겠는가. 11명, 18명이 이것과 이것을 내서 결판을 내도 한 사람이 이것을 내면 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유도를 하느냐면 제가 이제 ( ? ) 미리 말하면 안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루 루 바닷가에 나가면 "야, 우리 오징어 내가 가위, 바위, 보, 하자” “그것이 뭔데요?” 그러면 “야, 해 보면 알아” “자 모여” 한 30명이 모여서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하니까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압니다. 한 3분 동안 가위, 바위, 보, 실컷 해도 안 됩니다. 그 때 이제 갑자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야, 이렇게 하면 결판이 안 나니까 이것 하고 이것 하고 둘 중에 하나만 내자.” “예” 가위, 바위, 보, 안 나오는 때가 없습니다. 항상 나옵니다.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사람이 무슨 이야기 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저쪽은 전혀 밤중입니다. 가위 바위 보해도 해결이 안 나지 않습니까. 그 때 딱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야, 이렇게 하면 결판이 안 나니까 이것 하고 이것 하고 둘 중에 하나만 내자. 그러면 누가 이기든지 지든지 결판이 날것 아니냐?” 그러면 당연히 이것을 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내는 사람이 상당수가 항상 나옵니다. 그래 누구냐면 정신이 산만하고 주의력이 없는 사람들, “그래그래 이거나 이거 둘 중에 하나. 야,”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은 안 넘어갑니다. 골려먹으려고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몇 번을 하다가 “야, 결판이 안 나니까 이것 하고 이것 둘 중에 하나 하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예, 예“ 그러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아니, 잠깐만요. 뭐 지금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그러면 이제 끝난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이것 하고 이것 하고 둘 중에 하나 내자. 그러는데 누가 이것을 내요. 이것을 내지. 그런 사람이 나오면 그 판은 끝난 것입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상세하게 설명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내면 결판이 안 나니까 이렇게, 이렇게, 둘 중에 하나 내자 이거죠. 그것이 맞습니까?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주의력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주의력이 있어야 됩니다. 잘 살피면서 그것은 마치 바쁘니까 막 바쁘게 살고 일이 생기니까 막 뛰어다니고, 이러니까 막 하고, 이것이 하고 싶으니까 이것 하고, 저것 하고 싶으니까 저것 하고, 이것 그만두고 싶으니까 집어치우고 이렇게 사는 것은 꼭 뭐냐면 그냥 옹기종기 모여서 무엇을 내는지도 모르면서 와, 와. 하면서 가위 바위, 보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세요? 왜 하나님이 이렇게 잘 되게 해 주시는 것일까? 이것이 진짜 이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잘되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가지 않고 내 사자를 보내리라.” 하나님은 빠지고 이것이 저절로 잘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사업이 잘 되고나면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가?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이런 식으로 삶을 게으르게 살고 이렇게 되면 이것이 지금 내가 주님이 주신 육체를 쉬면서 제 충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태만하게 게기고 있는 것인가? 내 영혼에는 이 휴식이 어떤 의미를 주나? 이런 것을 생각 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지. 그러니까 말이죠. 이 신자는 항상 사는 동안 쉬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면 이 대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뭐가 많이 나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찾아오실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생각하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그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의 두 번째 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시험을 당하기 전에 시험이 닥칠 것을 예견하면서 시험에 임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말이죠. 사람들이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사고 약방문 같은 실수를 범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잘 나갈 때 아주 태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벌써 이렇게 시험이 오기 시작하면 환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환경에 막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 캄캄하게 있다가 시험에 쾅 넘어지고 난 다음에 “내가 한번 해 봐야 되겠다. 내가 이 시험에서 넘어질 줄 아느냐?” 그리고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데 진짜 넘어집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가능하지는 않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야지만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시험이 오기 전에 시험이 올 것처럼 자기를 준비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깨어 있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업도 잘되고 직장도 잘 다니고 뭐 가정도 편하고 다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험이 온다면 유혹이 온다면 내가 그 유혹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군대에 가면 5분 대기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상황이 벌어지면 5분 안에 현장에 도착한다고 해서 5분 대기조입니다. 착출 됩니다. 한달씩 이렇게 근무 한다고 합니다. 5분 대기조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총은 투구 위에 놓고 구두끈 다 매고, 그리고 완전군장 하고 그리고 총 들고 잡니다. 언제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것이 깨어 있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금은 유혹이 없습니다. 지금은 시험이 없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유혹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심 후 시험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때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에 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말의 세 번째 의미 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뭐냐면 시험이 자기를 넘어뜨리는 경로와 그 유혹이 발전하는 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첫째는 뭐냐면 시험의 시발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시발을 관측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시발을 관측한다는 것이 뭐냐면 노도와 같이 시험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시작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날은 선악과를 쳐다보는 그 순간에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날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이 시발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더라면 시험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시험이 자기 속에서 시작될 때에 그 첫 번째 시발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그것들을 잘라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아주 명백해집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그 유혹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딱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에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그 유혹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자기를 데려가는가? 라는 것을 우리들이 오늘 당하는 시험 가운데 과거에 당해보지 않은 시험은 별로 없습니다. 사단이 쓰는 무기가 항상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무기입니다. 예전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던 무기는 지금도 그런 무기가 여전히 발휘합니다. 교만해지는 위험과 유혹이 이미 2000년 전에 유행했지만 요즘 세대에는 사람들이 교만한 것, 요즘 유행이 아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것이 1세기에는 유행이었지만 요즘은 가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욕망이야. 이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껍질만 바뀌었을 뿐이지 그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와 특성은 변함없이 계속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 천년 전의 성경이 오늘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유혹의 경향을 성경이나 혹은 예전의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경험을 통해서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것이 자기를 어떻게 데려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 경계를 멈추지 않는 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그 유혹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는 목적지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알고 있는 것, 또 그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 깨어 있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깨어 있기만 하면 굉장히 파악하기 쉬운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마귀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세속적인 근심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에 몰고 가고자 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다 잃어버리게 만들고,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서 우리 속에 있는 영적인 생명을 모두 쇠퇴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어느 순간에 어떤 형제가 자매를 보았는데 이것이 평상적인 것이 아니라. 과도한 성적인 욕망이 솟구쳐서 자기를 사로잡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이 마지막에 자기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은 어디겠습니까? 그 자매를 만나서 대화 하는 것, 차를 마시는 것 가지고도 해소가 안 됩니다. 결국은 간음의 죄까지 자기를 데려가는 것이 그 솟구치는 그 욕망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사람이 자꾸 교만해지지 않습니까. 어디까지 교만해지면 그 교만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위에 올라가야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욕망이 충족이 안 됩니다. 그래서 파멸로 가버려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욕망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어 있는 사람은 그런 사악한 욕망이 솟아날 때 마지막에 나를 이것이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다. 라는 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타협하지 않고 뿌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성경이 “죄의 모양도 버리라.” 모양은 좀 가지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모양조차 버리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모양을 계속 취하면 그 본질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낚시 얘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낚시 많이 하시는 목사님이 저에게 한수 가르쳐 주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낚시를 던지면 고기가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웃기네. 그리고 휙 지나가는 놈. 다시는 안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한 놈은 절대로 미끼를 안 물면서 미끼를 주둥이로 탁치고 심술부리듯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 놈도 다시 안 온다는 것입니다. 와서 한번 툭 건드려보고 툭 건드려보는 놈들은 그 주위에서 물지는 않지만 뱅글뱅글 도는 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놈들은 반드시 걸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못 잡으면 다음주에 와서 꼭 잡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뱅글뱅글 돌면서 처음에는 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미끼를 던지면 그다음에는 툭 하고 한번 건드려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던지면 그다음에 툭툭 서 너 번 건드려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몇 일 있다 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유혹이 오면 그것이 마지막에 자기를 궁극적으로 몰려가려고 하는 그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딘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리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작은 마지막 네 번째로 뭐냐면 시험의 경로와 진전을 살핀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 네 번째는 뭐냐면 초기에 믿음으로 그것들을 맞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십자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죄를 짓고자하는 유혹을 강력하게 받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것이 시험에 들어서 죄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에 그것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해서 미리 쫙 생각하면 그것은 결국은 마지막에 범죄로 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범죄가 이루어진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가? 이것이 이 결론이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제 칼빈 같은 경우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어떻게 했느냐면 결국은 이것이 죄 죽임의 교리하고 통합니다. 그런데 칼 빈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것을 발전시켜서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에게 지워준 그 십자가를 충실히 지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면서 사는 동안에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 이 욕망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이 욕망이 성취되는 이 세상은 헛된 것이다. 라고 하는 어느 정도의 이 세상의 허망함에 대해서 눈을 떠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급격하게 자기 자신의 욕망이 격감하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게 얘기하면 그 욕망을 죽이는 것이 사실 죄 죽임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죄 짓고자 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은 뭐냐면 십자가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지금 내 속에서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욕망이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소원이 생겨나는데 결국 이러한 죄를 나를 비롯해서 많은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분으로서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우리들에게 견디기 힘든 이 고통의 마음을 전해다 주는 그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욕망에 굴복한 수많은 사람들의 죄, 그리고 그 많은 죄를 예수님께서 지신 그 결과로 인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면서 유혹을 받는 동안에는 그 죄에 대한 사랑과, 굴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한순간에 증오로 바꾸어버리는 힘이 그 믿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교수님이 한분 계시는데 뭐 월급도 많이 타고 생활도 괜찮은데 절대 차를 안 삽니다. 매일 학생들 차 얻어 타고, 다른 교수 차 얻어 타고 그랬습니다. “왜, 차를 하나 사시지 그러세요.” 나중에 얘기하는데 뭐냐면 부모님들이 절대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형이 하나 있었는데 차 사고로 아주 비참하게 절명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식구들이 그 차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혐오감이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과 그 교묘한 유혹들이 일단 초기단계에서 성공을 거두면 그런 마음을 즉각적으로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굴복할 위험에 처했을 때 뭐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보혈 흘렸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지금 내가 이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서 유혹을 받는 이 상황에서 결국은 이것이 진전되어서 짓게 될 그 죄,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짓게 된 그 엄청난 많은 죄들을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지금 내가 유혹이 굴복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당하셨던 일을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에는 세상이 어떻게 그분을 냉혹하게 대우했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어떤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자기를 버려 생명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 세상인데도 이 세상은 그 분의 소유가 되기를 거절했고, 그분을 박대하고 핍박하고,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적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영적인 적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너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살기는 하지만 그러나 너의 근본적인 정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대적한 것이 너의 정체다. 내가 너를 고치기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여기에 살아가고 있지만 나의 영원한 친구가 네가 아니라. 너에 의해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이 고백을 하면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붙은 그 사악한 욕망과 유혹들을 떨쳐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죄를 이기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것들을 잘못 처리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금욕주의, 아니면 고행주의, 그런 것들은 잠시 그것들을 수그러들게 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단번에 끊어서 잘라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는 아니지만 단번에 끊어서 잘라버릴 수 있는 그 힘은 그런 금욕주의나 아니면 자신이 이 범죄에 빠지게 될 때에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비난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는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는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내가 지금 지으려고 하는 이 죄를 위해서, 내가 지금 빠져 들어가려고 하는 이 시험과 유혹의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리고 내가 주님의 자녀 될 때에 그 십자가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가슴 아파하고 회개했던 죄가 바로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데, 그러면서 깊이 자신 속에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죄에 대한 욕구들이 옳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본분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살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본분을 정확하게 다시 아로 새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불렀던 사람이었고, 야곱은 원래는 야곱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는 아브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는 그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주님 모르고 살 때에는 죄인이 우리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 죄와 익숙하고 죄와 사귀고 죄 가운데 살고, 죄와 함께 먹고, 죄와 함께 마시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그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특정한 죄 앞에 유혹을 느끼며 시험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예전에 살아가던 그 삶의 모습으로의 환원입니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모든 죄를 참회하였던 순간과 거기에서 깨달았던 복음적인 사실들, 그리고 그 주님이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의 죄를 위해서 자기의 훌륭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어서 죽으셨던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내가 지금은 사랑하고 있는 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 죄를 깊이 인식하고 자기가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도다.” ( ? )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이렇게 살수 없는 사람이다.”
내 평생에 힘 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
숨 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유혹의 선상 앞에 서서, 그 십자가의 사건 앞에 서서 자기가 이 죄의 굴복하고 얻게 될 그 순간의 만족에 비해서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반하고 체험하게 될 양심의 번민과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 속에서 신음하게 될 그 고통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라고 하는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가능합니까? 왜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짓이김을 당하고 처절하게 찢어진 고깃덩이가 되어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셔야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을 그렇게 다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그 죄에 대한 진노와 엄위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가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이 범죄가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외곡 된 복음적인 생각을 거기에 도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참 사랑하십니다. 정말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혹을 뿌리치고, 죄를 뿌리치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영혼들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이지 죄 가운데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사실 사랑하시기는 하지만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이 죄에 굴복함으로 느낄 수 있는 만족에 비해서 이 죄에 굴복하고 경험하게 될 그 처절한 고뇌,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가난해서 하나님께 나왔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먹여달라고 하나님께 나왔습니까? 우리가 정말 부자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왔습니까? 하나님께 정죄 받은 채 살아가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비참함, 자기고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그 곤고함,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제까지 살았던 인생의 모든 기대를 버리고 그리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정말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고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 없는 그 쓰라린 삶의 한 복판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서 혹은 유혹의 시험에 자기의 마음을 모두 내어주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처절하게 아픈 것인지를 여러분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신자는 바로 그 순간에 “아, 그렇구나. 내 속에 일어나는 이 강력한 죄에 대한 욕망은 순간에 스쳐가는 것이고,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분도 예수님 밖에 없구나. 순간순간 유혹을 받았지만 그것은 모두 순간에 충동이었고, 눈뜨면 다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믿음의 한 대상이 계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구나.
저는 몇 일전에도 복음을 묵상하면서 너무 가슴이 아프도록 울었습니다. 살아온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니까 내가 사랑한 것, 사랑한 사람도 많고, 사랑 받은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자면 사실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내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흥할 때만 나를 사랑했죠. 예수님은 내가 사랑하던 것들로부터 모두 배신을 당하고 정말 쓸모없는 자가 되어서 돼지우리 바닥에 내동냉이 쳐진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나를 그 존재자체로 소중하게 취급하시면서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이국땅에 허랑방탕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다 허비해버리고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쥐 염 열매마저 먹을 수가 없이 돼지우리에 엎드려져 버렸을 때 누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나 가졌습니까? 그러나 그 아들이 그 돼지우리에 엎드러진 그 날에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그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먼 길을 바라보며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방자한 삶으로 주님을 욕보이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는데도 불구하고 힘에 부쳐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다가, 걸어가다가 지쳐서 다시 엎드려진 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 앞에 우뚝 서 계신 그분,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아직까지도 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죄가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만이 불변하다. 라고 하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욕망도 사라지고 죄도 소원을 성취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세계도 모두 파괴당하고 그리고 우리의 두 눈에 아름다운 광채도 잃어버리고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이름이 땅에 짓밟혀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 마귀에 의해서 실패의 삶의 현장에 내 팽개쳐졌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온 것은 우리를 그렇게 유혹한 세상이 아니었고 결국 우리를 그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분은 우리 주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이 마름하기까지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신실하신 주님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죄에 끊임없이 넘어지고 엎드려지고, 쓰레기처럼 인생을 살았는데도 우리를 죄인 중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의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 자신도 포기한 인생의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실하심, 한번 불러 자기의 피로 그 가슴에 발라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그 집념어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우리가 그분을 버리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을 가슴 아프게 하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그분보다 소중한 것들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연약한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위대하고 강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강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 실망하는 일들은 어리석은 일이고, 크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깊이 실망해야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고 오로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영광을 받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신 이 은혜의 비밀들을 흘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시험의 때를 맞이하여서 인생의 벼랑에 한발을 내딛고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어쩌면 하나님이 잠시 후면 미끄러져버릴지 모르는 여러분들의 손을 붙들기 위해서 이 수련회에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그 시험에서 벗어나는 일은 믿음이 없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받으셨던 그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갖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숙명처럼 생각했던 그 실패의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믿음과 함께 역사하셔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고,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날 그 이후로 시험에 들어서 생기를 잃어버리고 산 날들을 다 빼버리고 나면 우리가 타오르는 사랑의 전념을 가지고 예수 한 분을 위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쳐진 순종과 사랑의 상태 속에서 주님 앞에서 산 날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남아있는 때를 다시 시험 가운데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이 시험에서 벗어나서 사자와 같이 주를 위해서 살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는데 우리가 왜 이 시험을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영혼의 모든 생기를 그 더러운 유혹에 반납한 채,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그런 신자의 삶을 이어가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얼마가 남았든지 간에 그렇게 시험 가운데서 잃어버린 날들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빛 각운데 살아야합니다. 너무나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하는 일 없이 그 시험 속에서 자신을 소진하면서 보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인생이 더 이상 그렇게 어두움에 짓밟힐 수 없습니다.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서 정말 이제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서 예전에 시험에 들었던 많은 날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서 무기력하게 살았던 그 날들을 우리의 남은 생애를 가지고 우리 주님에게 보상해 드려야합니다. 더욱이 늦게 회심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젊은 날에 회심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이 특별한 이른 구원의 은혜를 주님이 주셨으니까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께서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과 그리고 일평생 나의 의무가 그분만을 순결하게 사랑하고 그분께 내 인생의 소중한 모든 것을 드리면서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내가 또한 그분이 남기신 그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서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이 현존한 그 자체가 우리 주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되도록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아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1):거듭 구함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교리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해야지 만 여러분들의 신앙이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죽임의 교리'가 어떻게 교리가 될 수 있을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교리가 될 수 있을까, 유혹을 이기고 시험을 견디는 것에도 어떻게 교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데 그것은 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잘못 내려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교리'라고 하는것은 대부분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신앙고백서에 나와있는, 그야말로 기독교신앙의 뼈대가 되는 지식적인 내용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설교한다고 하면 항상 마음속에 딱딱한 기독교의 진리들을 서술한 것일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머리 나쁜 사람들은 배우기 힘들고 아주 사변적이고 실제생활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리'라고 하는 것은 신학용어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교리'가 아니라 '교의'입니다. '교의'는 영어로 'dogma'이고 교리는 영어로 'doctrine'입니다. '교리'도 성경 속에 흐르는 일반적인 진리에 대한 진술이고 '교의'도 그러한데 다만 '교의'는 '교리'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으로 말하자면 '교리'가 시행령이라면 '교의'는 그 나라의 형법이나 민법쯤 되고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은 그 나라의 헌법쯤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의'는 '교리'의 내용 가운데에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이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는가에 대한 뼈대를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의'의 분량은 '교리'의 분량에 비해서 훨씬 적고, 그 '교의' 아래서 '교리'들이 어마어마하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의'는 개인 개인이 '교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들을 교회의 회의를 통해서 '우리는 이 장로 교회에 소속된 교인들로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에 관한 진리가 이러 이러하다고 생각한다'고 공적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시 교회의 전체적인 회의를 통하지 않는 한 뒤집힐 가능성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교의' 중 중요한 부분들을 거부해 버리면 그것으로서 그 사람은 그 교회의 회원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덜 치명적인 것들을 주장하면 다른 교파로 가는 것이고, 치명적인 것들을 거부하면 이단이 되버리는 것이고, 더 본질적인 것들을 거부하면 아예 이교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교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교리'가 아니라 '교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을 해서 끌어내면 어떤 진리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어떤 진리를 찾아냈다고 해서 곧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골격을 가지고 그 사상을 지지해주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나하고 찾아서 설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해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성경적인 신앙인이 된다기 보다는 자기에게 설교한 사람의 사상을 전수 받은 또 다른 작은 그 설교자에 딸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건전하고 좋은 신앙을 가졌으면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 그 본문이 언어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거기에서 어떤 진리를 이끌어내게 되면 그 진리 하나를 이끌어 내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교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는 그 진리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창세기부터 모든 성경에 다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찾아낸 '교리'들이 많이 있는데 그 '교리' 속에 집어넣어 놓고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것이 보편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도록 끄집어낸 것을 가리켜서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것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교리'들을 찾아내는 것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될 몫이고, 그런 전문적인 설교자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신학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찾아내어질 수 있고, 신학적인 균형 속에서 찾아내어진 진리를 계속 크게 확대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놓이는 정확한 자리를 찾아서 놓아줄 수 있고, 그 중요성만큼 설교 속에서 강조될 때 그때에 그것이 다른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전체를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혼자 성경공부를 하다가 이단으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많이 읽은 사람들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목양도 없이 좋은 설교도 못 듣고 거의 무지한 상태에서 성경만 읽고 무엇인가 강한 확신을 갖게된 사람들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예화:신학교 교수생활 할 때 학교에서는 공부를 안하고 성경책만 보면서 낙제하는 학 생들이 있었다)
이단에 속한 교파들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루트를 다 차단해서 교리에 접할 수 없이 차단한 다음에 '이것이 성경의 정확한 의미이다'하면서 혼자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리를 잘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은혜(잘못된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사람이 가르쳐준 교리의 얼개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가 정말 성경에 가깝고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강한 빛을 던져주는 설교일 경우에는 많이 들을수록 그 자체가 하나의 컨텐츠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지난날의 설교들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들은 데서 많이 나옵니다. 기름병에 기름을 많이 집어넣어야만 기름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많이 듣는 것이 굉장히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나 설교가 그런 정도가 아닐 때에는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편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많이 흘렸어도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어디에 가서 한편의 설교를 들었는데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바로 그것이었구나. 성경이 그런 진리를 가지고 있었구나. 이것을 알고 나니까 이제야 비로소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는구나'하는 고백을 하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후자의 설교에는 반드시 '교리'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성경 속에서 찾아낸 많은 진리들이 성경 어디서든지 전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핵심을 모아놓은 것이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마태복음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와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모든 방면에 총체적으로 이해의 빛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 선반이라고 한다면 은혜 받은 하나 하나의 깨달음 들은 그 선반 위에 꽂히는 책과 같습니다. 덩그마니 책꽂이만 있고 책은 없는 것도 이상하고, 책꽂이가 없이 책만 잔뜩 있어서 찾고자 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면 몇 권 소장했다 일 뿐이지 도서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교리'입니다. 그런 '교리'를 찾아내서 자신의 영적 생활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 처할 때 어떤 성경구절이 여기에서는 적용되고 저기에서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열 번에 거쳐서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시험이 무엇이고 어떻게 오고 그 시험과 유혹은 어떤 관계가 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파괴하고 어떤 루트를 따라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경계해야하고 어떻게 물리쳐야되고 물리친 후에는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건축해야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갖게 되어서, 이제는 그 시야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서 시험에 든 사람에 대한 기록들이 생생하게 다가오고 오히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험 중에 성경에서 고통 하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고뇌와 고통들을 헤아리고 심지어 그들에게 충고해줄 수 있는-그들이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경지에까지 우리들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신앙생활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계속 누적될 때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견고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가운데 '제레미아 버러스'라는 사람이 '예배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일 중요한 수단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설교를 듣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 시간에 설교에 집중하지 않고 땅이나 쳐다보고 발장난이나 하고 공상이나 하며 주보에 그림이나 그리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에 대한 에티켓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자기가 영혼의 변화를 받고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기회들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론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깨어있다는 것은 아직 시험에 들지 않은 상태인데 불행하게도 만일 그 시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거나 혹은 그 시험 속에서 유혹에 넘어져서 쓰러졌다면 거기에 대한 처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내용을 몇 번에 나누어서 설교하겠습니다.
일단 시험에 빠진 사람에 대한 처방을 다섯 가지로 내리고 차례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험에 이미 빠져버리거나 유혹에 넘어진 사람들에 대한 처방은 첫째 자기를 그 시험에서 건져주시기를 -유혹에서 넘어진 이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하나님께 거듭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게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수많은 구원의 약속을 묵상하며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그 시험 속에서 시험이 어떻게 왔고 어떤 방법을 사용했고 어떤 통로를 이용해서 들어왔고 그 시험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흘러가는 길을 만들어서 계속 그 시험의 파워들을 흘려보내는가 하는 것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잃어버린 경건의 삶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 거듭 구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님 앞에 거듭 구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몸에 두신 사단의 가시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추측하기를 눈에 있는 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박학다식한 사람이 로마서를 직접 쓰지 않고 더디오에게 대필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관습이었고 녹음기가 나오기 전에는 웬만한 설교자들이 어느 정도 회중을 거느리고 나면 제일 먼저 선임하는 사람이 속기사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들이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런 헌신적인 필사자들이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설교를 직접 쓰지 못하고 마지막 서명이나 할 정도였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눈에 관한 질병이 아니었나 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명백하게 그것을 사단의 가시라고 불렀고 그것을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세 번이나 구했지만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그것을 대적했지만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 섭리를 받아들이면서, 사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면서도 그것을 남겨두신 것은 '나로 하여금 약한 데서 겸손함을 배우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함이었다'는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모든 것이 우리가 대적해서 꺾어 버려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섭리 가운데에서 그러한 고통도 다 끌어안고 사는 포용력을 배워야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바울 자신도 주님께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응답이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만일 그가 한번도 기도하지 않고 '이 사단의 가시가 왜 내 몸에 남아서 이렇게 곤고하게 하고 사람들이 무시하게 할까. 아아, 더럽다'라고 생각했더라면 불평과 불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세 번이나 구한 끝에 결국은 그렇게 주님이 자기에게 두신 가시를 예전에는 사단의 가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자기가 주님 안에서 온전해지게 되는 수단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제일 어려운 점은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단절감입니다. 이것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예전에 복스러운 교제 상태에서 하나님과 사귀며 살던 때와 비교해볼 때에는 그 단절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생겨나고 혹은 그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겸비하게 대면하는 자세를 갖추는 자체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요나처럼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는 것이고 때로는 이런 영적인 단절감이 죄인의 마음을 절망 가운데에서 더 담대하게 만들어서 '내가 더 나쁘게 하나님 앞에 산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하는 악에 대한 담대함을 더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혹에 넘어져서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따스한 기도의 은혜들을 송두리째 모두 상실해버린 사람들은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을 쏟아놓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리며 주님이 그 찬양을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자신의 영혼의 어떤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이 세상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정말 소중한 자신의 삶의 자산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샘이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소중한 것을 모르는데 그 샘이 없어지고 나면 뼈저린 대가를 치른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고 정말 신앙의 선배들이 불렀던 '주 없이 살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제의 단절이 어려움이지만 그래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시험에 들거나 넘어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험에 들었을 때, 그때도 이미 영적으로 흐려지기 때문에 그렇게 명징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정도에 따라서 시험에 적게 들어서 자기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악에 대한 생각이나 정욕들이 엷게 깔렸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쓰는 잠시 동안에 그런 먹구름들이 마음에서 물러나고 다시 하나님과 명징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기를 즉각적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나 커다란 범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험이 오래되고 그런 속에서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상황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할 상황인데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그 매달리는 매달림이 차가운 거절감으로 반응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물러가기까지 거듭 거듭 매달려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어느 순간 기도하던 자기의 손을 거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뒤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영적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미끄러졌으면 미끄러진 것만큼 올라가야 합니다.
(예화: 눈이 와서 비료포대 타고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오면 다시 그 비료포대 타고 다 시 산으로 올라가야한다)
내려왔으면 올라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다리 품을 많이 팔고 높이 올라가면 많이 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거듭거듭 해서 기도하는 것이 시험에 빠진 사람을 위한 최상의 처방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기가 무슨 시험에 들었으며 자신이 그 시험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한 정확한 자기 인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 앞에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험에 들었는데 자신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유혹에 넘어져서 죄 가운데 있는데 자기가 은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듭해서 하나님 앞에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성전에 올라갔던 그 바리새인처럼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은 속에 죄와 악독이 가득 차서 오히려 회개한 세리를 보고 배우기를 바라셨는데 이 사람은 올라가서 하는 말이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나는 세리와 같지도 않고 저 창기와 같지도 않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 잘났습니다'하는 얘기만 계속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듭거듭 구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시험에 들거나 유혹에 넘어진 것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정도는 이미 정확하게 인식한 것을 전제로 깔고 시험에 빠져있는 사람의 첫 번째 처방은 하나님 앞에 거듭해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빠졌을 때 기도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화:늪에 빠졌을 때 나오려고 애쓰면 점점 더 들어가는 상황)
시험에 든 것이 마치 늪에 빠진 상황 같습니다. 헤어나 보려고 몸부림치면 되는 일이 없고 그 몸부림을 통해서 점점 빠져들어 가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자니 점점 차 오르는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간절히 기도하면 저 멀리서 통통거리며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밧줄을 타고 검은 옷을 입은 특공대원이 자기 팔을 붙잡고 일시에 구원해주면 자기는 공중에 매달려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하며 찬송하고 이번에는 와이키키 같은 해변에 가서 깨끗이 씻고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는 흔치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번의 기도로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것은 성경 속에 몇 번 안나오는 한마디의 짧은 기도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나서 어려움 속에서 건져냄을 받은 그런 경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고 실제적으로 신통치 않으면서도 회심을 이야기하면 항상 자기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한편에달리는 강도같이 회개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시간을 가져서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기 살고 싶은 대로 다 살다가 막차 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청교도가 '성경에서 그렇게 구원 얻은 사람은 그 사람 딱 한 명인데 왜 그 사람을 붙드느냐? 그 밧줄이 썩은 밧줄이면 어떻게 하려느냐? 자기가 그렇게 되는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 중 딱 한사람이 그렇게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 경우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늘을 안일하게 보내느냐'하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경제적입니까? 평소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것도 '물러가라'하면 물러갑니다. '나가라'고 하면 귀신이 나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여태까지 살기는 휘청거리며 살았으면서 하필이면 그 시험을 받았을 때 히스기야의 위대한 기도, 다윗의 위대한 기도, 엘리아의 불을 내린 기도 같은 것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 자신의 시험 속에서 재현되지 않으면 실망할 준비를 하고 그런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한번의 기도로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그 시험에서 우리를 단번에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만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자신은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들을 서서히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무장 해제된 다음에 시험 가운데로 들어갔고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지었는데, 거기에서 고통을 지불하면서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자기가 뿌려놓은 씨를 거두면서 아파하고 그러면서 주님의 손에 천천히 이끌려서 빛으로 나오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장기간 세월을 두고 천천히 버렸고 오랫동안 주님을 고문하듯이 고통을 드리면서 시험가운데 떨어졌지만 주님은 단번에 자기를 건져내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복의 과정 자체가 너무 아프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싹 건져내셔서 와이키키 해변에서 깨끗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파라솔 아래서 주스 마시면서 쉬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시험 속에 떨어졌을 때 혹은 유혹에 넘어졌을 때 거듭거듭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시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시험받는 그 상황을 물러가게 하실 수도 있고 거기에서 우리를 단숨에 건져주실 수도 있고 혹은 시험을 당했을 때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던 시험을 피하는 길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시험은 맞서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지만 어떤 시험은 돌아서 그 시험을 피하는 것이 이기는 것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거듭해서 구하면, 하나님이 그 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구원의 행동들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그 시험의 산골짜기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길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시험에 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절히 구하라고 했습니까?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 물리칠 능력과 권능을 구하라고 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참 많은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지혜를 구하라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으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시험을 당하게 될 때에 그 신자의 사고가 얼마나 복잡하게 엉키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중에도 나옵니다만 마치 컴퓨터가 열 받으면 성능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똑똑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하던 사람이 시험에 휘둘리고 나면 사리판단이 안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살 때는 지,정,의의 균형이 잡힙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든 신자는 제일 먼저신앙적인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인식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이성이고 하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신앙이 파괴되었고-한쪽 눈이 멀면 다른 한쪽 눈도 멀게 되듯이- 이성도 많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역동적으로 잘 살아있을 때는 이성의 작용이 최대한 지원을 받으면서 정확히 사물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작용이 신통치 않을 때는 이성에까지 악영향을 주어서 옳지 않은 것을 이성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반 마비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라고 성경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시험에 든 사람들은 상황이 복잡합니다. 다시 말해서 넓다란 광야에서 시험과 내가 진검승부를 하기위해서 마주서는 시험은 별로 없습니다. 시험은 항상 종합작전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데 부부간에 불화가 생기도록 만들고, 부부간에 불화가 생겼는데 회사에서도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자식들도 속을 썩이고, 교회에 가면 신경 거스르는 일들이 생기고 해서 총체적인 접근을 폅니다.
(예화: 한 수재인 법조인이 '판사는 고도의 판단력과 입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만 해 야하기 때문에 나는 판사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기만 가지고 안됩니다. 그렇게 시험의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에 지혜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시험 속에서는 우리의 지적인 작용만 혼돈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의 모든 것들이 혼돈이 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혼란 상태 때문에 더더욱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 거듭거듭 기도하면 하나님이 제일 먼저 주시는 것이 시험을 물러가게 하시는 대신에 신기하게도 마음에 평정을 주십니다. 마음의 평정을 주시면 평정한 상태에서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시험인데 이 시험 속에서 휘말리면서 시험을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 폭풍을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없습니다.
(예화: 미국에서 한 집사님이 잠깐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차가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고 한다-토네이도는 예측도 불가능하다)
그런 토네이도 한가운데 서서 토네이도가 무엇인지 볼 수 있겠습니까? 멀리 지평선쯤에서 토네이도를 보면 그것이 발생해서 옥수수 밭을 가르며 지나가고 많은 물건들을 하늘로 날려버리고 민가를 톱날처럼 파헤치고 지나가는 광경을 1-2마일쯤 떨어져서 볼 때 토네이도가 어떤 것인 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험에 처해있을 때에도 자기 속에서 엄청난 혼란이 생겨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은혜의 질서'가 파괴되기 때문에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에 든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모르겠다' '복잡하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거듭 구하면 하나님이 마음의 평정을 주시면서 그 다음에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서 "모든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각'은 희랍어로 '이해' (understanding)입니다. '모든 이해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감사할 수 없고 편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 그것은 모든 이해일 뿐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평면적이고 선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입체적인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시험의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첫 번째로 하나님이 그 시험을 물러가게 해주실 수도 있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평강을 주셔서 시험에 든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관측하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계속 거듭 구하는데도 그 시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혹에 넘어져서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할 때마다 상당히 마음을 실어 기도하는데도 이상하게 그 시험에서 넘어진 상태에서 완전히 일어나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은 이기지도 못하는데. 정말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위로와 은혜를 주시는데도 '이거 자기 암시가 아닐까? 나는 자꾸 죄에 쓰러지고 유혹에 넘어지고 시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데'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오늘 명쾌한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 완전히 그 시험에서 벗어나지는 못해도 그 시험에서 완전히 짓밟혀서 구겨지지 않도록 상황을 버티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백병전을 하다가 적군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적군이 어두움 속에서 개머리판으 로 공격할 때 저항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이다. 그러나 포기하면 죽임을 당하 는 것이다)
영적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마어마한 초인적인 능력으로 일생동안 우리를 짓누르면서 시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마귀는 없습니다. 시험의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험의 때가 있고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중 '열흘간 시험하리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힘이 딸리면 한번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도 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항복하고 쓰러져서 대검으로 배를 찌르고 지나간다든지 뼈가 부서지도록 밟고 지나간다면 다시 싸워볼 수 있는 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을 버티는 것과 항복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시험 중에서 낙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시험 중에 기도하면서 헬리콥터 소리가 나면서 특전대원이 자기를 끌어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응답이고 그렇게 오지 않는 응답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주님이 주신 은혜에 의해서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해석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매일 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받는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성품까지도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월이 오래되게 되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얼마나 많이 망가질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시험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서 당장 시험에서 건져주시거나 피할 길을 보여주시거나 혹은 시험과 쓰러진 죄 가운데에서도 버틸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암세포가 생겨나면 건강한 세포들이 암세포에 저항하면서 싸우는데 건강한 세 포가 우세하면 생겨났던 암세포도 죽는다. 그런데 상황이 나빠져서 몸의 어떤 부 분이암세포에 의해서 강력하게 둘러싸였어도, 그 속에 있는 건강한 세포가 계속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생체활동을 하면 암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간다. 그러나 그 공급이 끊어지면 암세포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어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유혹에 빠졌어도 기도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주일의 삶이 이렇게 불결한데 어떻게 성도들이 모인 예배당에 갈 수 있을까'하고 놀러 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개선될 수 없습니다.
잠언 3장을 하면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어디 가서 정결해져서 다시 나온다는 말입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험 가운데에서도 은혜의 수단들을 유지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젖줄 삼아 붙들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구하면서 그 시험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빠진 자의 처방 다섯 가지 중에서 첫 번째입니다.
6.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2):그리스도께 피함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시험에 들지 않게 미리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미 시험에 들어가 버렸을 때, 그래서 범죄로 가깝게 다가가 버렸을 때 혹은 아예 범죄 해 버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지킴의 교리' '죄죽임의 교리'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 이 세 가지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세쌍둥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됩니다. 생각의 반복이 마음을 지배하고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행동으로 옮기게 되고 그래서 범죄가 실행이 되게 되면 그 범죄가 반복되고 반복이 되다보면 습관이 되고 악한 습관이 더 강화되면 하나님을 등진 패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멸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는 그 앞부분을 주로 다룹니다. 마음에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이 일단 태어나게 되면 생각은 자기 나름대로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외부적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속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는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마음의 부드러움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주로 다룹니다.
이것들이 떨어져서 마음을 사로잡아 행동으로 옮기게 될 때, 생각이 떠올라서 우리를 유혹으로 가깝게 끌고 가고 죄를 짓는 상황으로 우리를 깊이 데려가서 죄를 짓게 하는 이 부분까지는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에서 다룹니다.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겨서 범죄가 반복되고 패역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고쳐져서 다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처음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죄 죽임의 교리'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에서 다룹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와 호세아서 '패역을 고치는 길'이 모두 한 집안의 자식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을 친자식처럼 가까이 두고 잘 애독을 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성화에 있어서 그 다섯 가지 주제를 파악하는 것은 성곽을 쌓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그것으로 일단 성곽이 쌓아지면 한 두명이야 넘어오겠지만 물밀 듯이 넘어오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속에 집을 잘 짓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이미 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다시 시험에 드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기도를 하면 최소한 시험이 든 가운데서 일어나는 정욕과 죄의 위험성을 감소시킬 수는 있습니다. 은혜와 죄가 우리 속에 함께 살아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가 죄의 영향력을 경감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가 그리스도께 피하라. 세 번째가 시험 든 자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네 번째는 자기가 시험에 어떻게 들게 되었는지 그 시험이 오는 통로, 방법, 그 결과들을 시험을 거치면서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하여 저장을 해서 다음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을 했는데 한 비행기가 날아오기에 손을 흔들며 환영을 했더니 폭탄을 퍼붓고 가는데 어떤 국기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고 합시다. 다음에 그런 일을 안 당하려면 그 국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 비행기가 나타나면 손을 흔들지 말고 빨리 피해야합니다. 그런데 수없이 폭격을 맞으면서도 비행기만 만나면 손을 흔든다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리가 안 되어있습니다. 체험을 많이 했는데도 그 체험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체험이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옳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그냥 체험 덩어리이면 안되고 성경의 빛을 비추어서 모두 분해를 해서 성경적인 검토가 끝나서 정리가 된 체험일 때 그것은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이 질문에 대해서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배운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체험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 일어나게 되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이 쓰라리고 괴로운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욕스러운 것이지만 그 시험을 당하고 난 다음에 잠잠히 생각하면서 왜 그런 시험이 왔고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통로를 거쳤고 나를 어떻게 이용했고 마지막에 어떤 역사를 이루었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 협조했고 마지막에 나를 어떻게 파멸시켰고 결론적으로 내가 어떻게 그 시험을 물리치게 되었는가를 정리해놔야 합니다.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이 이 상황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슷합니다.
전쟁이 나면 비행기를 띄워서 폭격을 먼저 하는 수도 있고 게릴라를 보내서 요인들을 암살하는 경우도 있고 땅굴을 파고 나와서 공격을 하는 수도 있고 배가 와서 항구를 폭격하는 수도 있지만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은 다 비슷한 것입니다.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사용하는, 우리를 시험 들게 하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방법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 방법도 전통에 빛나는 방법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구태의연하고 그것을 맞서 싸우는 은혜의 방법도 전통적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정리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깊이가 있다고 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자기는 시험에 빠져서 허덕이는데 저 사람은 내가 이렇게 시험에 계속 머물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 알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설마'하며 살아보니 그 사람 말대로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 속에 길이 다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그 입장에서 시험을 경험해보니까 예외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를 해두어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견고한 개인 경건 생활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 속에 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든 자들에 대한 처방입니다.
오늘은 시험에 이미 든 사람이 해야할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 피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죄는 없으시지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그리스도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었을 때는 심리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감쇄되기 시작하면서 시험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 경우에 시험 속으로 들어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단단하게 붙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이든 시련이든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이 그런 상태로 일단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점점 덜 느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불같은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과 열렬한 사랑을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불같은 시험이 불같은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가끔 불같은 시험을 만났는데 오히려 그 속에서 불같이 뜨거운 하나님과의 열애를 경험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불같은 시험을 당하면서 열렬하게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속에서 자기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엮어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을 다 버려야 합니다. 환경이 편안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거짓말이고 불같은 시련을 당해야지 만 내 믿음이 뜨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대담하게 '하나님 우리 남편을 치셔서라도 돌아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 영혼이 돌아오게 되기를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지만 설령 하나님이 치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극단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은 엄청나게 시련을 겪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엄청나게 행복하게 해주신 두 종류의 사람들밖에 없을 텐데 여러분이 모두 그 양쪽 중 한사람에 속하십니까?
인생은 모두 다 비슷합니다. 문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둔감하기 때문에 생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도 '팔자려니'하고 그 고난과 여려움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실패를 친구 삼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는 특별히 모자라는 것이 없었는데 어느 날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말씀과 은혜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도대체 내가 왜 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불평불만 없이 잘 살았던 것도 사실은 굉장히 불행하게 산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인생의 허무를 보이시고 각성시켜주시지 않으면 그들도 세상이 아직은 살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할 뼈저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의 대명사였습니다.
주 예수 오셔서 내 슬픔 아셨네
나의 눈물도......
주님이 오셔서 말씀의 은혜로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혼에 대해서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만족스럽게 살았는데 '이게 사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 시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지 시험 그 자체에 우리를 바꿔놓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인은 자기 남편을 치셔서라도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는데, 정말 불량배에게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붕대하고 다시 가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기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지 저 사람의 마음을 낮추어주셔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식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갈급해 하는 계기를 주십시오' 그런데 얻어맞는다고 해서 그 계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깊이 통회하고 참회하면서 무릎을 꿇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애통하고 고통할 때, 그래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들을 토해놓을 때 반드시 물리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반바지에 불량하게 껌을 씹으며 억지로 친구 따라왔는데 어느 순간 껌 소리가 멎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회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났기에 그런 차림으로 껌을 씹으며 친구 따라 놀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깨닫게 하시니까 이제껏 까지 볼 수 없었던 자기 인생의 허무를 보게 만들고, 동의할 수 없었던 자신의 죄를 깨닫게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슬픔과 고통의 이유까지 깨닫게 되고,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의 날들에 대해서 애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무슨 차림으로 오던지 어른들이 간섭하지 말고 다독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들어가면 그때는 타일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어있을수록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미 시험의 과정 그 자체가 유혹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있는 부패성들을 북돋웁니다.우리 내면의 부패성들이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하고 정욕들이 뭉개 구름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그만큼 우리 속에 있는 경건의 능력이나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순발력 같은 것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를 못하면서 내어주고 영적인 민감함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정서에 대해서 둔감한 마음이 생기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 전폭적이고 즉각적으로 순종을 잘했었는데 이런 것들이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점점 마음이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험에 들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 무디어짐과 둔감함이 심해지면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일단 시험에 들게되면 이미 기도의 힘 중에서 상당한 부분을 상실 당합니다. 그래서 시험의 과정이 그리스도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병기를 들지 않은 맨손의 군사로 만듭니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 움직이고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급의 병기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시험에 들었을 때는 당연히 사람들이 하나님과 굉장히 소원함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려움에 빠진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 사람 자신은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신다' 심하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공정하지 않게 대하신다'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물리쳐야합니다. '내가 어떤 시험에 들었던 지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심과 사랑은 나의 상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참 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탕자가 집을 떠났지만 그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많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가출하기 전이나 가출하려고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할 때나 보따리를 싸서 총총히 떠날 때나 이국 땅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들릴 때나 울면서 돌아왔을 때에나 그리고 함께 잔치에 참여할 때에나 항상 동일했습니다. 다만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아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시험에 빠지든지 두 가지만 붙들고 있으면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라도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 두 가지를 붙들면 어떤 공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오히려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분투하는 가운데 고통을 감내하고 아파하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도우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기억해야할 것이 바로 주님은 시험 당한 사람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중요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길을 걸어가는데 함정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육안으로 그 함정을 볼 수 없더라도 그 함정에 빠질 위험이 훨씬 적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단단하게 보여도 의심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는 사실이 모르는 사람은 그냥 걸어가다가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충분히 느끼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주님은 시험에 당했을 때 당신에게로 피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내 영혼의 상태가 충만하고 은혜로울 때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레기통에 굴러서 이 세상의 이 더러운 오물에 뒹굴어버린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주님밖에 없고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이실 뿐이다. 내가 그렇게 돌아가면 주님이 시험 당한 나를 반드시 도우실 것이다'하는 생각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으면 시험 가운데에서 자신의 상태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짐승처럼 막 사는 일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과 정서와 의지가 모두 결합된 것이 아름다운 신앙생활이지만 은혜도 떨어지고 의지가 연약해졌다고 할지라도 지식이 살아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주님이 시험을 당한 자들을 반드시 도우신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분께로 가야 합니다.
이 때 굉장히 많은 송사를 받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어서 은혜가 모두 사라지게 되고 죄에 대한 저항력들이 줄어들게 되면 안팎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잘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은혜의 영향은 덜 받는데, 세상에 나아가면 죄의 영향은 훨씬 더 잘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더 딱딱해져서 심령이 더 굳어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세상에서 약간 마음에 각질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잘 깨트려집니다. 그래서 다시 부드러움을 회복하고 세상에 나아갑니다. 세상에서 받는 영향은 적고 은혜 아래 살면서 하나님께 받는 영향은 크기 때문에 세상에 나아가서 조금씩 껍질이 단단해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단해진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가끔 마음이 굳어지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 전체, 삶의 진로 전체를 바꿔놓을 정도까지는 영향을 못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잘못되게 되면 세상에 나아가서 굉장히 많이 굳어져서 돌아오고 돌아와서도 거의 안 깨트려집니다. 다만 약간 멈추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나가서 더 두꺼워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 생활도 열심히 하고 계속해서 교회를 착실하게 다니는데도 그런 겉 태도와는 상관없이 마음은 점점 굳어 가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 돌덩이 같은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 사람의 삶 속에 거듭난 신자인지 아닌 지를 신앙이 상당히 깊은 사람들도 확신 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삶으로 그 굳어짐들을 드러내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깨트려지는 자기 깨어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마음속에서 성화를 위한 은혜의 작용이 자신 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금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멈추면 교회에 착실히 다니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막 나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 피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 이것을 확신하고 그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것, 그 도우심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 그 태도를 계속 가져야 합니다.
실제로 시편의 경험을 보면 시인들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굉장히 많이 맛본 것입니다 고난 중에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게된 당연한 대가를 치르는 징벌의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하는 하는 것은 그 고통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이 아무 죄도 없는데 어떤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을 때 그 고난은 자기의 죄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들이 다가왔을 때에 자기를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고난을 참으면서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대가를 치르면서 징벌을 받는데 그 징벌을 받으면서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면서 '이 고난은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게 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원망할 것도 없고 정말 이런 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새롭게 바꾸고 싶어하는 지를 하나님 앞에 묻는 사람의 고난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죄 없이 당한 고난 앞에 불신앙으로 반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죄로 인해서 징벌을 받을 때에 신앙으로 반응하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 자신도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흔히 '주님'이라고 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주'라고 표현하는 말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 온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의 권세를 아들에게 잠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고 다시 왕권이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제일 이해 안가는 교리 중 하나가 성육신의 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이 세상을 만드셨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내 삶에 지금도 간섭하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주님이 부르시면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동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가 하나님은 왜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해를 많이 받으실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부터 '예수님은 사생아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하는 말들이 있었고 최근까지 출판된 글을 보았습니다. 정말 신앙을 가지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난잡한 글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해 받을 수 없는 일을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받을만한 방법으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처녀의 몸에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면 찬란한 구름을 타고 그대로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시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셨다면 그렇게 내려오게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셨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성경공부 교재에 보니 거기에 대한 답을 예화로 말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차에서 내려와 쉬며 보니 개미들이 많이 모여있었답니다. 그냥 깔고 지나갈 수가 없어서 비키라고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개미들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몸을 입히셔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저는 그때는 굉장히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 말도 안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는 당신의 백성들과 의사소통이 안되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구약에서는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개미의 무리 같은 우리에게 오셔서 비키라고 하셨지만 비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안 비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 교리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 교리를 변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영적인 경험이 깊어지면서 요즘은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비와 도성인신의 교리에 숨겨져 있는 풍부함은 이렇게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사랑 앞에 뉘우치는 사람도 있었고 손들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이 도성인신의 성육신을 통해서 크게 네 가지 효과를 가지고 왔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성육신의 사건이 사람만을 위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사람만을 위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인격을 가지신 한 하나님으로서 이위인 성자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성품을 계속 자극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자비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극에 의해서 그 백성들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어떤 교파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형벌하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형벌을 한 몸으로 막아서시는 분이시라고 묘사를 해서 구속에 있어서 인간을 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아들의 사랑으로 이긴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렇게 되면 삼위일체간에 갈등이 있는 것이라 말이 안됩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촉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의 한 형제처럼 내려오셔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그분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할 때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죄인들 안에서, 죄인들 옆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을 사랑하며, 죄인들의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첫 번째 보혜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렇게 자기 아들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인간을 향한 자비한 마음,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의 원인과 책임보다는 그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자극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육신의 첫 번째 효과입니다. 이것은 제 영적인 순례에 있어서 중요한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성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런 유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보다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비유를 하자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말했는데 그것은 외국에 나간 아빠를 비디오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디오에서 체취는 안 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는 그 아빠가 실제로 와서 아빠의 가슴에서 나는 그 풋풋한 숲 냄새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서 구약의 성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체험한 바에 의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예고편이 아니라 본편을 본 것입니다. 목소리만 들었는데 이번에는 함께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아버지를 봤느니라"고 하신 것은 보여주시기 싫으시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보여줘봤자 너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직접 나타나시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 중에서 경건한 사람들,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하나님을 굉장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거나 잘못되었거나 하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패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무서워서 못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오해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다고 해도 그것은 굉장히 부족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이상한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약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다' '고난받는 자를 도우신다' '상하고 애통하는 자와 가까이 계시고 그를 구원하신다'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섬김의 과정을 통해서,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들, 죄가 많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고 그들을 당신과의 교제 속으로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런 생생한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중요한 두 번째의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구속은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서 죽으셔야 했는데 죽으시기 위해서는 참사람이 되어야 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지 않고는 참사람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는 참사람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저처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그리고 뱃속에 녹음기를 집어넣어 제 설교를 틀어준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그 로봇을 목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구름타고 그렇게 내려오셔서는 참사람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범하게 이야기하지만 얽매임에서 풀려난 자유 같은 것을 느끼고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상아와 같이 아름다운 저 천성 떠나서
이 천한 세상 오신 주 참 내 구주님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지만 그러나 죄인들을 알고 그를 사랑하시고 죄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식하고 계시고 당신이 그 죄인들을 위해서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낱낱이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이 누구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살면서 끊임없는 죄를 보시고 심지어는 당신 자신이 죄에 대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굴복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혹이 얼마나 강렬하고, 시험이 가져다 주는 고난이 얼마나 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 앞에 합당한 존재로서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이 세상에서 외로움과 고통 시련과 핍박, 세상으로부터의 배신에 직면해야 되는 지를 예수님 자신이 밑바닥에서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이들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죄인들 가운데 한 형제로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정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살 깊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의 경험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서 더 깊이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수 있는 한 어린양이 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그렇게 묵상하기를 좋아했던 진리 중 하나가 이 도성인신의 교리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시험을 그분도 한결같이 당하셨고 그 시험 속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그분도 함께 동참하셨다는 것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사람의 몸을 벗으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분은 한 때 인간이셨었고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당신 자신이 모두 뼈저리게 체험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한 목사님 댁에 묵었는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설교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때 저도 정말 닮고 싶은 설교자들의 사진을 서재 벽에 걸어놓고 싶은 욕망을 느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고 지푸라기 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은혜로 붙드셔서 인간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은 그들이 꺾이지 않는 열심으로 일생동안을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외치며 죽어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니까 저분들의 초상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저처럼 존경해야 되는 사람들을 깊이 존경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너희는 사람들을 아비라고 하지 말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이 청교도를 사랑하시는데 청교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청교도에 대해서 이제 조금 눈을 뜨고 설교를 하고 그들에게로부터 영적인 자양분을 어느 정도 공급받고 가이드를 받으면서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은 이제 '죤오웬'이나 '프라벨'이나 '에드워즈'같은 걸출한 청교도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가서 새가족반 정도는 착실하게 배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하시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눈물 흘리면서 설교를 적고 날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분들의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성육신을 통해서 그것을 강하게 알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당신도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당신도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예수를 바라보라"했는데 구약에서 이런 성경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이 히브리서 자체가 핍박 아래서 쓰여졌기 때문에 핍박을 이기는 영원한 영감의 원천을 그리스도께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역사 속에서 박해를 이기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그분도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죄인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지만 그분은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순결한 하나님 자신으로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 때문에 부당한 대접을 받고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당했다면 우리가 만약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분의 형상을 이루며 그분의 뒤를 따라 간다면 그분과 같은 대접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요 그분의 씨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도 욕을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라. 세상 친구 멸시해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겠다'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성경을 대면하면 2천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단순히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만 가르쳐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처럼 똑같이 굶주림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유혹과 시험을 당하시고 그리고 그것들을 이기기 위해서 하늘의 권세를 사용하시는 대신에 당신의 온힘을 다해서-가장 연약한 인간이 시험을 이기는 것과 같은 똑같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곧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신 발자취입니다.
그 주님의 지상의 생애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시험을 당했을 때에 버림을 당했다거나 주님이 우리를 상대를 안 해주실 것이라든가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죄인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에게 충성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함께 계셨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자기의 죄를 반복적으로 책하는 인간들에게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돌 같은 그들의 가슴에 생각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시험 들었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지요. 잘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생생한 은혜를 상실했지요. 잘못한 것입니다. 미끄러졌지요. 더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원수 맺으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왜? 한 때 당신의 신부로서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고 호세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서 연애하던 때가 있었던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혼들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시지만 더더욱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이 자기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하면 '정말주님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내 상태가 어떠하든지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나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심지어 시험에 들었을 때나 성령 충만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배신했을 때에도 돌아가면 주님은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하는 믿음이 주께로 피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께 피하는 실제적인 지침이 주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시험에 들었을 때 그리스도께 피하기를 원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피하지 않습니다. 그 피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피난처는 신기하게도 모든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마음을 낮추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영의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고난을 많이 당하고 시험을 당해서 인생이 곤고한데도 피하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허덕이고 더 깊은 시험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런 시험과 어려움을 모두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을 낮추지 않으니까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의 경험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 순간 마음이 깊이 상하고 경건한 슬픔이 우리를 깊이 감싸면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각성시키시면서 움직이십니다. 그때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피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납하기 위해서 팔을 벌리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로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인생의 어느 때에나 예수님은 우리를 용납하고 받아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하게 낮아지고 엎드려지지 않으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올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시험에 이미 들었다면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영혼의 비참함과 자신의 악한 영혼의 상태를 보면서 이전의 허위와 가식들을 보려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뭐였었는데' '예전에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 했는데'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증거들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3):구원의 약속을 붙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만약에 이미 시험에 들어버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이미 들어있는 사람의 처방을 크게 다섯 가지로 보고 그 첫째로 하나님께 거듭 구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비록 시험에 들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없어도 거듭 구하면 하나님이 즉시 시험을 물리쳐주시거나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그 시험에 넘어지되 완전히 꺾이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교리도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약간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되면 양심과 많은 작용들이 굴절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자격이 없다' '네가 시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야지 만 겨우 기도할 수 있다' '지금은 너의 상태가 불결하기 때문에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안 들으실 것이다' '가증하다'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비추임을 받은 양심의 작용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만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우리에게 요긴한 등대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이 양심의 기능이 제 기능을 안 합니다. 오히려 그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가지 못하도록 송사 합니다. 그 송사는 정말 나쁘다고 고소 질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자들이 굉장히 많이 속는 지점입니다.
오늘 시험에 들어서 심지어는 오늘 부득불 하게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가책을 이기고 오늘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넘어지되 완전히 꺾이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완전히 꺾이지 않으면 다시 싸워볼 수 있는 저력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 피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 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시험을 위해서 분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면 그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시거나 혹은 피할 길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께로 도망하는 것입니다.어떤 믿음을 가지고 도망하느냐면'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고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것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도움을 구하며 겸비하게 엎드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께 피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첫째는 '거듭 구하라'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으신다고 합니다. 시험에 들어서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은혜가 충만한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아주 건조한 가을날에 건초로 뒤덮인 들판에 불을 지르는 것같이 힘이 있고 쉽다면, 이렇게 시험에 든 날의 기도는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것처럼 힘이 드는 것입니다. 효과 면에서 그 힘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에 들면 우리 자신이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 인간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면 자기 힘으로 언제쯤 되면 다시 기도할 힘을 회복하겠습니까?
정결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것들이 있으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하는 경고는 은혜 가운데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뒤로 물러가서 나태하고 부정하고 불결한 삶을 살면서도 지금 계속되고 있는 이 기도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고, 지금 유혹의 현장에서 죄를 떨쳐버릴 수 있는데도 못 떨쳐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떨쳐버리고 다시 기도의 은혜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권면 하는 것이지 이미 시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밖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완전히 밟아버리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나 알려고 하면 끝까지 파고들어서 알려고 하는 진지함과 탐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지만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 들으면서 그런 의문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구원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약속을 붙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시험에 관한 경고도 많이 있지만 시험에 든 사람들을 위한 구출의 약속도 동등한 정도로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최선의 삶을 살면 물론 좋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 최선과 차선의 삶은 굉장히 엄청난 삶의 질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이미 최선을 선택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차선으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최선은 싫고 차선으로 가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지만 꼭 하고 싶다' '한 번내 가고 싶은 대로 가면 거기에도 길이 있겠지'하면 물론 길이 있고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안 버리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희망을 가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차선이 있다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그 불순종에 가서도 또 차선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불순종으로 계속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산 사람들의 삶이 똑같다면 하나님의 공정한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면 그 순종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건강한 습관과 같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 지금 당장은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시기는 언제일지 몰라도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고난을 받는 것 같고 손해를 받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건강하게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차선을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돌이킬 수 없을 때에 차선이라고 생각해야지 선택하기 전부터 차선을 생각하는 것은 불순종을 차선이라는 말로 미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과 안 기뻐하시는 길이 있는데 최선은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것-순종-이고 차선은 안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말이 차선이지 둘밖에 없는데 무슨 차선입니까? 하나는 악한 길이고 하나는 선한 길입니다. 차선을 택했는데 그것은 듣기 좋으니까 차선이지 분명히 말하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을 때 또 두 개의 최선과 차선이 나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느냐 계속 가느냐 입니다. 그런데 차선을 택했습니다. 결론은 차선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차선은 오직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시험에 든 사람들을 향한 많은 경고가 나오지만, 그리고 범죄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과 같은 정도로 많이 나오는 말씀이 이 시험 든 자들을 건지시겠다는 약속, 이미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이런 것들이 동일하게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런 구원의 약속을 주신 것은 스스로 죄를 택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행할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제공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시험과 죄에 들어간 사람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생각하고 그 신실한 성품의 빛 아래서 시험 든 자들을 향한 약속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듭해서 마음에 새겨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게 하는 상황들이 벌어질 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이 많이 후퇴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이 힘들어 질 때- 객관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온갖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자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묵상을 하십시오.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입고 마루에 나가서 무릎을 꿇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괜찮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 신실하신 하나님' 남들이 보면 자는 것 같겠지만 그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의심이 되지만 그렇게 끝까지 시험 든 상태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봐야 마지막에 손뼉 칠 이는 마귀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비록 은혜가 떨어져서 이 하나님의 당연한 약속을 온 마음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이것이 진실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불이 났으면 비상구로 도망을 가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비상그'라고 써놓았다면 그 글을 따라서 가겠습니까, 아니면 법정 비상구 표시를 따라서 빠져나가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탈출구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탈출구는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20년 째 시험 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신자는 거듭난 다음 주부터 시험에 들어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긴 세월을 살면서 거듭남을 한번도 믿어보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도망칠 수 없도록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느꼈답니다. 하나님이 자꾸 간섭하시니까 죄를 지을 때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적 경험입니다. 왜 그런 데서만 느낍니까? 하나님과의 연합을 왜 그런 식으로만 느낍니까? '때리는 것을 보니 우리 엄마 맞구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그것을 의지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신실하심을 묵상하고 그분의 약속을 깨닫고 믿어지지 않아도 그것을 가슴에 새기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화: 한 음식 배달하는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자기는 믿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설교 테이프를 들어야겠느냐고 물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실 것이라는 생각을 불신자들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매일 만나는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 때문에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그 신실하심을 가슴에 새기고 그 약속들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더 지켜야 합니다. 그런 토대 위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차례가 좀 틀릴 수도 있지만 첫째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두 번째는 은혜를 공급하시고 세 번째는 그 시험을 이기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그 시험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듭 구하며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피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대개 세 가지 방향으로 일하시는데 순서적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고, 그중 한 가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순서와 상관없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을 받도록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고통받게 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뭔가를 잘못해서 고통을 받으면서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하나님이 우리를 굉장히 불쾌하게 보시기 때문에 한차례 때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경은 그런 것들을 신자들에게 많이 일깨우면서 조심하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은 벌주시고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안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도 두렵고 두려우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그래서 사랑하지만 방종할 수 없고 두려워하지만 멀어질 수 없고 또 멀어지기 싫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이 신자들이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벌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렇게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너무 어긋납니다. '내가 언제까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이 불쾌감의 표시로 나에게 벌을 주신다면 내가 그 고통을 안 당하는 시점을 언제까지에 맞춰야 합니까?'하면 하나님이 화가 풀리실 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통받는 시간과 정도와 길이는 획일적이지 않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토마스왓슨'과 같은 청교도 설교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적게 받은 사람들은 적게 잘못해도 하나님이 적게 책망하시지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적게 잘못해도 많이 야단치신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의 성경구절이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하지만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다"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향해 '엘리야입니다'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하는 엉뚱한 대답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지고 죽으시러 가시겠다는데 가지 말라고 만류한 베드로가 잘못되었습니까? 감도 못 잡은 것이니 전자가 훨씬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정확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했고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가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누구와 같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못 갖고 그 사람들과 공감대를 이루면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그러나 베드로는 야단 맞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진리를 옳게 깨달은 사람들은 그 삶의 책임이 훨씬 더 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받게 하시는데 고통을 하나님의 불쾌함의 표현, 지난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만 생각하면 너무 율법적인 해석이 됩니다. 그런 면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단면만 보면 안되고 다른 면에서도 이것을 봐야 되는데 시험에 든 신자가 당하는 고통은 그것이 마음의 것이든 육신의 고통이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던 집착과 사랑을 끊게 하십니다. 고통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면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예고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텐데 그때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포로로 끌려가고 이민족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에 너희가 거기에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심으로 내 얼굴을 구하게 될텐데 그러면 너희가 나를 만날 것이다"하시는데, 고통 그 자체가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하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굉장히 힘겨운 일방적인 책망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죄를 죽이시고 자기를 깨트리셔서 자기를 시험에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죄에 대한 집착에서 자기를 끊어놓으시는 것을 경험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믿음에 많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데 그 첫 번째 방법이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으면 아주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시험에 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죄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적극적인 죄가 아니더라도 열심을 내지 않고 사는 안일한 삶에 대한 애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안일함, 유혹, 죄, 이런 것들에게 넘어짐으로서 자기가 받는 달콤함보다는 그것에 짐으로서 자기가 당하게 되는 뼈저린 고통들을 더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굉장히 중요한 비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죄가 가져다주는 쓰라린 고통과 하나님 앞에 느끼는 차가운 거절감이 가져다주는 뼈아픈 고통들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고통의 과정들이 그 죄의 헛되고 헛된, 그리고 자기를 시험에 들게 만들기까지 자기가 놓지 않고 집착했던 것들에 대한 허망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양쪽 측면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노예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을 주셔서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시험, 혹은 죄에 진 것에 대해서 고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과 자기가 탐닉했던 죄의 허무함에 대해서 눈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힘을 첫 번째에서처럼 주시든가 -죄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다 죽이셔서 자기를 유혹하는 것들이 아무리 있어도 유혹되지 않게 만드시든가- 아니면 그 사람의 연약함을 기억하셔서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를 벗어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회 구조악이라는 것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굉장히 무섭게 악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늘 뇌물을 주고받는 자리로 갔다면 그 사람이 직장을 쫓겨날 정도의 각오, 그런 신앙의 결단을 한 사람이 아니면 대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임자의 걸어갔던 길을 걸어가기가 십중팔구입니다.거기에서 만일 거슬려서 싸우려고 하면 어려운 일이 굉장히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 뇌물을 주는데 안 받으면 그것을 줘야지 만 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적대하기 시작할 것이고, 앞서 간 사람들이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예화: 사업을 하면서 다들 세금을 정직하게 안 내는데 혼자만 정직하게 내면 같은 사 업을 하는 다른 사람보다 세금을 훨씬 많이 내는 것 때문에 대적이 생길 것이다)
의의 길을 가면서도 많은 대적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유혹 받는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 유혹 받는 상황을 극복하기가 굉장히 힘들 때에는 하나님이 그 유혹 받는 상황에서 그를 벗어나게 하시거나 아니면 그 유혹 받을 상황을 퇴치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에서 돼지머리를 올리고 고사를 지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니엘처럼 간절 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안 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
그렇게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붙어 싸워서 그것을 짓밟아 버리는 것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 가는 것도 이기는 것입니다. 교회 오는데 대문 앞에 돌멩이가 놓여 있으면 번쩍 들어서 치워야 합니다. 길거리 가다가 똥이 있으면 피하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피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시험 투성이입니다.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산 사람들은 시험에는 전문입니다. 구원받은 다음 주부터 시험에 들어서 27년이 지났다고 하니 늘 시험의 나라에서 산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 자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시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시험 자체를 탐구하므로서만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의 세계인 은혜의 세계를 들락거리면서 시험을 당해야지 만 그 시험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막힌다고 하는데 뚫려봤어야 막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사랑을 거두신다고 하는데 사랑을 받아봤어야지 거두신다고 하면 겁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인생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구원 못 받은 세상 사람보다도 더 불쌍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어떻든 하나님께서 유혹 받을 환경을 치워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게 하시고 시험받을 환경을 없애 버리시는 것 없이 이것만 가지고 행하시는 것은 아니라 이것과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너무 근심이 되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고 하나님도 밉고 인생을 정리하고 싶고 평생 소원이 있다면 저녁에 자면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것밖에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났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이상하게 어제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야 기도에 나와서 열렬히 기도한 것도 아니고 금식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설교를 들으면서 부서지도록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나니 -완전히 시험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속에서 기승을 부리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확 꺾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자기가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방향으로 자기의 인생과 신앙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감지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자신의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이야기한 통회하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원기를 갖도록 생각을 바꾸시거나 우리의 마음에서 기승부리던 유혹, 죄, 근심과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한번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자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인가가 자신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이 감지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단을 무찌르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의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고 나신 다음에 고통을 통해서라면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의 허무함과 죄의 쓰라린 열매를 경험하면서 죄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니까 끊어질수록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싶어질 것입니다. 또 유혹 받을 환경에서 우리를 떼어놓으시면 실제적인 범죄가 반복되지 않으니까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있어서 양심의 가책도 덜고 우리를 계속 강퍅하게 하던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는 악의 공급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 차단되니까 하나님을 찾고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원활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영역에서 주님이 사단의 세력을 확 꺾어놓으시면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다 생생하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우리를 계속 죄 속으로 치달아가게 하던 우리를 악한 방향으로 끌어가는 연료의 공급이 차단되는 것입니다. 불이 계속 타기는 타는데 연료의 공급이 차단되면 언젠가는 그 불길이 잡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공급이 되니까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죄악과 우리를 향한 더러운 영향력들이 차단되고 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은혜를 가중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 계속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신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말보다도 생각을 많이 해야합니다. 정말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죄와 정욕의 공급이 차단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 어느 순간 압도할 것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더라도 예전에 느껴본 적이 없이 자기를 깊이 감동시키면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는 항상 죄 지은 다음에 왔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참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앙 하나로 줄기차게 잘 사는 사람도 너무 기뻐하시지만 방탕한 길로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아무리 인용해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탕자의 비유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가 '내 아들이 오랜만에 다시 왔다'고 말하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쁨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면 안됩니다. 후회는 회개할 때 하는 것으로 족하고 자꾸 반복해봐야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회개할 때 한번 후회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때로는 하나님이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엄한 사랑의 세계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찬란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그 장엄한 하나님의 '헤세드(인자)'의 세계를 볼 수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았더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 그 구원의 은총을 그렇게 목이 터지도록 일평생 외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러니까 죄를 택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해야 된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몇 주전에도 하나님이 치신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공상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일반화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악의 연료의 공급을 차단하신 다음에는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들어서, 혹은 죄에 빠져서 참회하면서 뼈저리게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뉘우치고 후회하지만 그 후회와 회개가 다른 이유는 후회는 과거에 집착해서 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회개는 죄를 청산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죄의 문제를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사는 것을 양심이 무딘 증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던 그날 닭이 두 번 울 때에 그렇게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그것을 한번도 반복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과거를 뉘우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돌이켜서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접어버리고
이젠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님 사랑 안에 하나되어
내 맘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하며 살아야지 되돌아볼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시험에 든 것과 죄로 인해서 깊은 수렁에 빠졌던 것들, 그리고 주님께 대항하고 불순종하며 살았던 것들을 기억하면서, 이제 과거는 흘러갔지만 남은 인생이라도 주님 앞에 잘 살아드려서 이전에 내가 시험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힘에 진하도록 그분을 섬기면서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며 주님 앞에 살려고 하는 빚진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공급해주시면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가면 반드시 삽니다.
(예화: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5600키로미터에 직경3.2미터 정도의 관을 묻어 바닷물을 끓여 수증기를 모아서 그 엄청난 관속으로 흘려보내면 소금은 꺼내 팔고 그 물을 사막으로 끌고 가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내용)
(예화: 한 사막의 선교사 부인이 밥을 하고 나서 항상 같은 방향으로 물을 버리게 되었는데 그 사막에서 풀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사막에도 비만 충분히 오면 몇 년 안에 생태계가 다시 형성됩니다. 황무지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은혜의 물을 흘려보내시기만 하면 정말 다른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도 바꿔놓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못 바꾸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믿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보면 됩니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의심되면 자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했습니다. 그렇게 포악하고 잔인하고 야비하고 혈기 충천하던 사람 속에, 각양 욕심과 죄가 가득하던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니까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많은 식물학자들이 선인장의 가시는 원래 잎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치다보니까 그런 변형이 생겨나서 수분의 증발을 막고 물이 거의 없어도 살 수 있는 식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면 망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 공급해주셔서 그의 영혼을 다시 살려보십시오. 많은 시험에 들었던 사람들은 시험에 빠졌던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며 흉악한 죄인이었던 사람들은 회개로 소문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그의 마음과 영혼 속에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묵었던 패역들이 녹아지기 시작하고 예전에 죄악 가운데 살면서 생겨났던 그 많은 패역한 행동들, 그리고 굽은 성품들이 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실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떼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은혜만 공급되기 시작하면,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꺾고 유혹을 이기고 시험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 발짝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계속 관이 굵어지면서 흘러 들어오고 있고 죄가 공급되던 관은 잘려서 연료공급이 차단됐으니까 불길이 있는 것 같아도 은혜의 물이 흘러 들어오면서 이 모든 상황을 바꿔 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를 잠시 후에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다음에 세 번째로는 부분적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시험에 들었을 때, 더군다나 죄에 져서 완전히 넘어져 있을 때에는 죄에 대한 친화력만 남지 죄에 대한 저항력들은 거의 없습니다. 워낙 죄가 기승을 부리면 무엇으로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예화: 외국의 경치 좋고 조용한 도시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화장실에 '마약하고 난 후 주사기는 여기에 버리시오'라고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도시 어른의 70%가 마약을 한다고 했다)
'이런 좋은 환경 속에서 이렇게 사는 기독교 국가에서 삶의 허무를 못 이기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살기 좋은 도시가 젊은이들의 자살이 세계 제 1위라고 했습니다. 정말 인간의 불행이 환경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뿌리가 사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크면 법으로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시험에 들어 죄에 저서 은혜의 세계가 거의 파괴되고 죄가 창일하게 자기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내 안에 심으신 생명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닌데, 죄에 짓눌려서 죄의 영향력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 죄를 저항하며 살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데 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 속으로 들어가다가 연료 공급이 차단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공급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겨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어서 죄 가운데 있었을 때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회복의 은혜를 주시면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이 죄를 차단하고 은혜를 공급하시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지만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자의 마음에는 부분적인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좋은 의미에서의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이 격리하시기 위해서라도 -그 시험 속에서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이기게끔 하나님이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공급이 거의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공급되고 있는 좋은 상태라면 그는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서 이제 시험에 들 가능성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보고 듣고 느끼고 유혹 받는 것들을 통해서 시험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이 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완전히 제거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이 차단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흘러 들어와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상태가 될 때에는 그때에도 유혹은 받지만 온전히 시험 아래 있을 때의 유혹은 곧바로 그를 죄로 데려갔는데 이 상태에서는 유혹은 계속 받지만 유혹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위험은 앞에서 말씀드린 시험아래 온전히 있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유혹이 오면 거의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의지만 가지면 부분적으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유혹하면 백발백중 넘어지는데 아직까지도 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은혜가 계속 공급되는 회복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공격을 많이 해도 성공하는 횟수가 아주 드문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공급될 때 신자들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옵니다.
(예화: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의 비유)
그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통합니다.교회에 나오거나 은혜의 방편에 참여할 때 조금씩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점점 더해져 가는데 완전히 끊어져 버리면 처음에는 갈급해서 미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그 은혜에 대한 욕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 철저하게 짓밟힌 자리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의 영향력이 차단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면 전에는 순수하게 죄의 유혹이 오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일까 말 것인가 하는 것의 통제 장치는 '너 그렇게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혼난다'고 하는 징벌적인 것밖에 없었는데, 은혜가 회복되면서 은혜 세계의 맛을 다시 보게되면 유혹이 올 경우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회복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하나의 브레이크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혼난다고 하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브레이크가 됩니다.
그래서 죄의식과 가책이라고 하는 것은 면역이 됩니다.
(예화: 도살장에서 소를 죽이는 것을 반복하면 능숙해진다)
(예화: 실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첫 살인이 두렵지 한번만 살인의 현장에 참 여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살인에 대한 담대한 마음이 생긴다)
(예화: 필리핀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순해서 싸우는 경우가 없는데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너무 화가 나면 어느 날 권총으로 쏜다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내가 이런 잘못을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하는 두려움이 최초에는 강력하게 다가오지만 똑같은 상황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그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적으로 우리가 죄의 길을 달려가는데 있어서 브레이크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실제로 잘못하기까지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있어진 다음에 잘못한다는 것을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그런 것들이 모두 자신 속에서 어느 정도는 약화되거나 합리화된 작용을 거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좀처럼 면역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늘 은혜 가운데 살지만 어느 날 예배드리는데 주님이 오셔서 마음을 만지고 지나가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는데 '지겨워, 오늘 또 사랑이야'할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어제 받은 사랑과 오늘 내가 느끼는 사랑과 아침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저녁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수 천년동안 해가 뜨고 지면서 찬란한 노을을 만들어냈지만 단 하루도 같은 빛깔의 노을이 없었던 것처럼 다릅니다. 그것이 제어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이미 과거에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평화를 회복해야겠다고 하는 갈망이 시험과 죄에 대한 브레이크 역할을 하지만 이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급격한 승리로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승리를 경험하면 신자가 자꾸 싸울 마음에 생기고 승리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더 귀한 것은 자기가 그렇게 시험에들었었는데 그렇게 유혹에 져서 실패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시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고 정말 위대한 사람은 없고 오직 그를 붙드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라고 하는 아주 복음적인 결론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자기가 승리했어도 자기가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 시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시험에 떨어져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할 수 없는 상황으로 떨어졌지만 여기에서 그것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승리들이 계속 주어지면서 은혜의 세력은 점점 흥왕하게 되고 자기 안에서 자기를 시험 들게 만들었던 죄의 세력들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지금도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쉽게 그런 것들을 물리치면서 자신이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전에도 이런 은혜의 상태에 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의 상태가 그때보다 훨씬 견고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영적으로 성숙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자기를 지배하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때 고백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쉽게 얘기하면 이것이 '죄죽임의 교리'에서 이야기하는 mortify 된 상태입니다. 'Mortfied Christian'입니다. 죄가 자기 속에서 거의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그 마음을 공유하면서 그 의지에 순종하며 어린 아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성화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언덕을 올라가다가 시험에 걸려서 웅웅 거리고 있다가 벗어나기 시작하면 다시 윙 하면서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영적인 수준이 고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시험에 들었으면 벗어나는 것이 두 번째 좋은 것이고, 그 시험 속에서 범죄 하여 넘어졌으면 돌이키는 것이 세 번째로 좋은 것입니다. 어떤 은혜의 경험도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는 없고 어떤 시험의 경험도 우리에게 완전한 실패를 안겨주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가져야할 태도는 자신의 영혼을 외과 의사처럼 다뤄야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찬란한 빛이 있어서 배를 헤쳐놓으면 그 속의 작은 핏줄까지도 또렷이 드러납니다. 다음에는 숙련된 의사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수의사나 정신과 의사는 못 들어옵니다. 다음에는 잘 드는 칼이 필요합니다. 수술실에서는 그 칼을 한번 쓰고 버린답니다. 숙련된 의사와 잘 드는 칼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 필요한 것은 환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의사의 마음입니다.
제가 처음 은혜 받았을 때는 불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지금의 제 마음은 살아있는 동안에 '히븐리 닥터'가 되고 싶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누웠을 때 하늘의 의사처럼 정확하게 치료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영혼을 수술대 위에 눕혀놓고 어두운 형광등 하나에 사람 배는 가른 적이 없고 칼은 과일 깎는 칼과 통닭 날개 치는 칼 두 개밖에 없는데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기는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잘 아는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진 채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 거의 없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지만 신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합니다. 수술실에 불을 아무리 밝힌다해도 그 불이 어떻게 환자를 살리겠으며 칼이 아무리 잘 든다해도 그 칼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결국 숙련된 의사가 살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빛과 말씀을 사용하셔서 사람을 그렇게 다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충해서는 안됩니다. 외과 의사처럼 다뤄야 합니다. 그래서 찬란한 말씀의 빛, 다음에 자기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수술 칼, 즉 자기를 다룰 수 있는 정확한 하나님의 교리, 그리고 자기를 다루어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 때 자기가 치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끊임없이 탐구해서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피면서 정말 지혜롭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보따리 싸들고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려고만 하던 유치한 신앙을 버려야합니다. 거룩한 성도의 삶이 온 인격적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의 영혼의 많은 비밀들을 터득하고 교리들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면서 외과 의사가 환자들을 눕혀놓고 그 찬란한 불빛 아래서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그 예리한 칼로 다루어서 핏줄과 핏줄을 잇고 신경과 신경을 이으면서 살과 살을 꿰매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다시 살려 놓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들을 살리시는 비결들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고침을 받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주님이 그 사람들을 고치시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어서 세상 끝날 까지 어디에 있든지 영혼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에 다가오는 모든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서, 예전에는 죄 가운데 살면서 실패했고 시험 가운데에서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 찬란한 지식의 빛 아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 앞에서 반복도 없고 복사판도 없는 단 한번의 인생을 주님 앞에 살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정말 감동하실 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를 안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8. 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4):시험의 경로를 살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시험에 들었을 때 처방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거듭 구하라.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 피하라. 세 번째는 구원의 약속을 붙들라.
여기에서 신실하고 약속에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성품을 가슴에 새기고 의지하면 다시 첫 번째로 하나님이 시작하시는데 고통을 주실 수도 있고 유혹 받는 상황을 없애실 수도 있고 사단의 역사를 밟으실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데 유혹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죄와 위험으로부터는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는 은혜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신감을 주시고 완전한 승리를 하게 하신다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네 번째로 시험의경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 때일수록 생각을 바르게 잘 해야합니다.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영혼의 변화가 제일 먼저 영향을 주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변화를 받으면 생각이 놀랍게 새로워지게 되고, 의지가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고, 정서가 신령한 은혜의 정서에 풍부해지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덜 예민해지는 정서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잘 해야되는데 시험에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자기가 이 시험에 들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잘 생각해야지 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시험에 들었으면 허둥댑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 상황에서 탈출해보려고 애를 쓰고 그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들도 동원해보는데 대부분 도움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에 들었을 때 시험이 어떻게 시작되어서 오게되었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나아갈 길이 밝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시험에 드는 데 있어서 매우 단순한 공식을 가지고 있고 사단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단순한 공식을 가지고 똑같은 것들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금만 주의 깊게 이것들을 살피면 다가오는 시험을 피할 수도 있고 또 시험에 들었을 때는 그 시험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과 마귀가 신자를 시험하는 방법이 항상 고전적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떻게 은혜 받고 새사람이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상황은 다르고 적용은 각각 상이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은혜를 받고 영혼이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고 하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는 것입니다. 시험도 그렇게 고전적이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오는데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시험의 경로를 살피는 일에 있어서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험의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의 할 일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험의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첫째는 어디서 시작이 되었나 두 번째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가 세 번째는 무엇을 도구로 그 시험이 진행되어왔나의 순으로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종이었던 이솝이 주인이 술김에 이 세상의 바닷물을 다 마실 수 있다는 것에 내기를 걸어 근심하는것을 보고 해결해준 이야기-강물을 모두 막고 순수한 바 닷물만 담아 두면 먹을 수 있다는 말로 피해갔다)
시험도 바다에 흘러 들어오는 강물과 같아서 시발점이 있습니다.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는 작게 시작되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실개천이 개울이 되고 강이 커다란 하수가 되어 흘러서 도도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강의 시원지에 가보면 조그만 샘입니다. 그 물이 내려오면서 물에 물을 합치면서 양자강이라고 하는 엄청난 강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는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저 문제가 얽히고 섥혀서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문제에 문제가얽혀서 점점 자기를 휘감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문제를 다뤄서는 안되고 시험에 들었으면 먼저 조용히 시험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조용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저런 문제를 가지고 시름을 하는데 사실 그 문제의 근원을 캐보면 지금 시름하고 있는 문제는 발전된 문제이고 그 문제에서 더 근원을 캐 올라가면 지금 시름하는 이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부터 시험이 시작됐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안 맞고 화합하지 못해서 미워하고 한 사람이 미워하면 다음에는 복수하고 복수하면 다시 원한에 불타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나뉘어지면서 시험에 듭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었다고 할 때는 싸우지 않고 시험에 드는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다툼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떤 문제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데 점점 캐 올라가면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 문제 때문에 시험에 들었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따지고 들어가 보니까 물질 문제가 아니라 신앙 전반에 문제가 있는 적이 있고, 지금은 이런 저런 문제로 고통을 받지만 따지고 올라가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하는 식으로 계속 근원을 추적해서 올라가 보면 지금 내가 시름하고 있는 이 시름이 아니라 전혀 다른 데서 우리를 시험들에 하는 연료들이 계속 공급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시험에 안 들었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 들었던 때에서 시험에 드는 때의 희미한 경계선을 찾아야 합니다. 그 시작이 어디였는가, 왜 내가 처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열정과 주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 열정적인 주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 그리고 진실한 섬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이 굳어지고 시험에 들게 되었는지를 추적해보면 다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찾아내고 거기를 막으면 마치 연료공급이 차단되는 것처럼 급격히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시험이 우리가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시험이 어떻게 왔는가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시험에 들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교회에 갔는데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항상 은혜가 오게 하는 어떤 도구, 은혜를 받게 되고 내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변화되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상황이 조성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제일 싫은 직업이 목사였다-교인들이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생각 했다)
저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정말 재미가 없고 무엇을 해도 목말랐습니다. 그때 주일학교 때 배웠던 찬송가가 생각나고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가라는 사람이 없는데 제 발로 교회 문을 두드리게되었습니다. 그러고도 정신 못 차리고 살아갔는데 은혜 받을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직장의 형제 자매들이 점심시간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자고 해서 갔는데 창고에서 종이를 쌓아놓고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예화: 입사동기인 한 친구가 '요즘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에 눈물을 흘리며 한 자매를 사랑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살기 싫다'고 했다-함께 성경공부를 하자고 해서 하다가 은혜를 받았다)
평소에 제가 그 친구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면 '너나 잘 믿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곤고한 상황에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보자고 하면서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죄의 길을 걸어가다가 은혜로 들어올 때도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도구로 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 때도 항상 상황이있습니다. 예배 잘 드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시험 들려고 간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상하게 사업이 잘되고 돈이 잘 벌리면서 바빠지면서 신앙이 살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빠져나가면서 시험에 들던지, 아니면 반대로 뭔가 잘 되어서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서 밤잠을 잘 못 이루면서 신앙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든지, 사업과는 관계없이 식구 중 누가 자기의 마음을 너무 곤고하고 고통스럽게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든다든지, 몸이 너무 아파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된다든지, 반대로 몸이 너무 불편하고 아픈 가운데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구나 하며 주님을 붙들게 된다든지, 시험이든 은혜든 항상 어떻게 오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이 시험에 시작되어서 나에게까지 왔나'를 생각하면서 그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항상 우리들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시험이 흘러 들어오는 명백한 통로가 있는데 상황은 그것을 다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왔는지도 모르고 단지 아는 것은 지금 내가 시험에 들고 기도할 수 없고 곤고하고 고통스럽다는것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방을 정확하게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원자력 병원 같은 곳에 가면 어떻게 하면 낫는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 다-그러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시험이 오게 되었는가, 시험이 어떤 상황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 시험이 어떻게 진전되어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전되어 오면서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시험 앞에 무너져 갔고 은혜를 향해 마음을 닫았는지 그리고 죄를 향해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의 발자취들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파악되는 것은 무엇을 도구로 해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도구는 자신의 약점과도 관련이 많습니다. 대개 어떤 이유 때문에 오늘 시험에 든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런 시험에 든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전 처음 시험을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질문제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시험에 드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잘 걸려 넘어집니다. 교회에서 사람들과 다투고 마음이 갈려져서 넘어지고 목회자와 다투고 그 속에서 시험에 들고 한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렇게 분쟁의 한 가운데서 휘말리면서 시험에 듭니다.
시험에 드는 종류는 수없이 많지만 그 유형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오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하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약한 것은 항상 잘 파고 들어오고 강한 것은 방심하기 쉽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 시험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장기간동안 놀랍게 새로워져서 본성적으로 갱신이 일어나기 전에는 예전의 그 사람이 오늘 그 사람입니다. 그런 본성의 변화가 뚜렷하게 주어지기 전까지는 항상 그 사람의 기본적인 성품을 그냥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사람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파악해서 시험할 때 그런 도구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들이 나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일정한 상황, 나로 하여금 늘 시험에 들게 도와주는 도구,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 시험에 들기 쉬운 상황을 스스로 피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러면 시험의 강도를 절반이상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의 경로를 잘 파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는 시험에 든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그렇게 발전해오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보면 항상 거기에는 적극적으로는 그 시험을 받아들이는 면도 있고 또 하나는 그것들을 경계하고 물리쳐야 하는데 물리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시험에 잠식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상 여건 하나만 가지고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여건에 잘 반응하는 부패한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에 시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 오는 과정을 추적해가면서 시험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고 무엇을 도구로 진행되었나를 살피는 가운데 반드시 그 속에서 자신이 그 시험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잘못 대처했다는 것이 파악됩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파악되는 것이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무지하면 그것은 거의 악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신성한 의무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야 하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그분의 성품이 어떠하고 우리는 그분과 어떻게 연합된 삶을 살고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숨지기 직전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로 말미암아서 시험의 어두움 속에서 지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험에 들었던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딴에는 잘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마치 뻘 속에 들어가서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발끝이 점점 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더 곤란한 지경을 만나는 것처럼 자기는 뭔가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정말 뭐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회개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였던 것,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의 빛 가운데서 살려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잘못을 파악해야 하는데 제일 먼저는 무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잘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시험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어떻게 오는 지도 알고 잘 알았기 때문에 빨리 대처해야겠구나 하며 신속하게 대응을 하는 부지런함이 없으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이 발전하고 어떤 도구를 통해서 시험이 이처럼 나를 삼켰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 나가다가 두 번째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식은 있었는데 게을렀던 것입니다. 게으름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굉장히 커다란 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이 투명한 영성을 가지고 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에 있어서 절제가 워낙 없는 사람들의 삶이 신령할 수 없습니다. 잠자는 것도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절제가 필요합니다. 자니까 기도할 시간이 안 나는 것입니다. 깊은 노년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구든지 잠자는 것이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화: 교회 건축하며 너무 힘들었을 때 소원은 이틀만 실컷 자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일에 태만하면 태만할수록 육신은 굉장히 즐거워합니다. 새벽기도 안나오고 한숨 자면 우리의 육신은 얼마나 행복해하는 지 모릅니다.
(예화 일본에 누르면 센서가 달려서 도망가는 자명종이 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을 이기기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안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이 야단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안 행한 사람은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못했는데 알았는데도 게을러서 안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이 그에게 선물로 많이 주셨는데 그 지식이 시키는 대로 살지를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찮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으름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는 반드시 우리의 게으름이 있습니다.
연초에는 감격하면서 '금년의 목표는 매일 성경 읽고 매일 새벽기도 해야지'하는데 작정을 하는 것은 순간에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기와 더불어 싸우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시험에 든 사람들은 대개 게으릅니다. 시험에 들어서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에게 테이프를 권하면서 들으면 시험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해도 받아가서 듣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잘 안 듣는 말씀을 아이 재워놓고 들으려니 좀이 쑤셔서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라디오나 들으면서 빨래 개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점점 더 시험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게으르지는 않았는데 부주의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의 깊게 다루어가야 합니다.
(예화: 교회를 지으면서 열린 공간 바닥에 기름을 너무 많이 바르게 된 것 같아 목양실 은 스프레이에 기름을 담아 뿌리면서 닦았는데 나중에 하얀 벽에 기름이 묻으니 닦아지지도 않고 그 위에 칠도 되지 않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잘한다고 하다가 저렇게 망쳐놨구나' 합니다.
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게으르지도 않고 부지런합니다. 그런데 부주의합니다. 그런데 부주의 한 사람은 부지런할수록 일을 더 많이 만들어냅니다. 어디에서든지 항상 일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알기도 아는데 부주의한 것입니다. 부주의하면 시험이 예리하게 우리의 부주의한 부분들을 파고 들어오면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의 경로를 파악하는 동안에 첫째로 '아 내가 그때 너무 몰랐구나' 두 번째는 '아 내가 너무 게을렀구나' 그리고 세 번째로 '아 내가 게으르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었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에 저렇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구나. 그 때 내가 정말 부주의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 모든 것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완전히 잠이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은혜 받으면서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항상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눈을 똑바로 뜨고 '잘해야지'합니다.
(예화: 예배 시간이나 강의 시간에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있다-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 굴을 쓸어 내리면서 정신을 집중하는데 그때는 뭔가를 듣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닙니다. 가끔 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깨어서 자신의 마음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와 시험이 자기를 정복하기 위해서 밀려들어오는 진행들을 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잘못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무지와 게으름, 부주의함, 지속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면서 시험이 흘러 들어온 통로 하나 하나에 맞춰보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내가 정말 몰랐구나. 말씀을 알았더라면 이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했을 텐데' 두 번째는 '아 그 지점에서는 내가 다 알고 있었지만 게을렀구나. 그 때가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해야할 때인데 그 때 내가 기도를 그치는 바람이 이런 시험이 왔구나' 다음에는 '게을렀던 것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좀더 정성스럽게 깊이 생각하면서 다뤘어야 하는데 잘못 다뤄서 결국은 망가졌구나' 그리고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하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악이 되고 나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됐고 어떤 상황을 거쳐서 오게 되었고 무슨 도구를 사용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자기를 계속 시험에 들게 하는 도구들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그런 도구들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면언제 시험에 드는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예화: 술 안 먹으면서도 술집에 열심히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먹는다)
그렇게 시험에 들게 하는 환경 같은 데에서 -시험의 도구들이 있는 그런 곳에서- 피해야 합니다. 술을 끊으려면 술집 근처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선 끊습니다. 담배를 끊으려면 재떨이도 버리고 라이터도 버리고 흡연에 관계되는 도구들을 다 청산하고 버려야 합니다. 놔두는 것은 언젠가는 한번 써먹겠다는 것입니다.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중독 된 사람이 많습니다. 심각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4시간 이상 하는 사람들이 비율적으로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샘물같이 조금이고 그 바다는 쓰레기 바다입니다. 몰라도 되는 그 쓰레기 바다를 누벼서 뭐합니까? 그런 속에 들어가서 잘못된 싸이트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화: 자살 싸이트나 음란 싸이트의 문제-그런 것들을 접속하지 않는 것이 좋고 보호 장치를 한다든지 연약하면 차라리 컴퓨터를 팔아버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시험의 도구가 되는 것들을 먼저 자신에게서 치워버려야 합니다.그리고 자신 속에 계속 은혜의 불을 끄는 정욕의 불길, 그리고 계속 시험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자기를 무기력하게 하는 연료들이 어디로부터 공급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근원을 파악했으니 파악이 될 것입니다. 그 파악된 곳에 줄을 긋고 그 부분을 막아버려야 합니다.
생각은 계속 떠오르면 마음이 그 생각을 수용하게 되고 마음이 그 생각을 수용하게 되면 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해서 마음의 경향이 됩니다. 마음의 경향이 죄 된 마음의 경향이 되면 실제로 죄를 짓게 되고 짓게 되면 그것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혼의 영향은 다시 마음으로 악영향을 미쳐서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이 계속 촉진되어서 처음에는 자기가 죄를 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누적되면서 패역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데 그 첫 번째 요건이 더 이상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근원이 차단되어 흘러 들어오지 말아야지 만 연료를 공급받으면서 불타오르던 자신의 죄 된 성품과 욕망들이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울고 불며 하나님 앞에 가슴을 찢어도 연료가 계속 공급되는 한은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잠시 움츠러들 뿐이지 눈물을 닦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죄에 대한 욕망들이 타오르면서 계속 불길처럼 번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도구들을 치워버리고 다음에는 자기를 그렇게 시험에 들게 만들었던 그 근본적인 근원을 차단해서 막아버려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이 건강함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기에서 자신의 할 일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첫째는 참회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가 다 파악되고 나서 원통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길만 잘못 들어도 '거기에서 왼쪽으로 꺾었어야 되는데'하는데 아무리 얘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물며 자기가 지금의 상태로 난도질을 당해서 비참하도록 시험에 들어서 엎드려져 있는데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서 왜 그랬을까. 그것이 시작이었는데 왜 내가 그걸 몰랐지. 그런 상황이 바로 나를 더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도구가 되었는데 내가 왜 몰랐지'하면서 파악하고 가슴아파하던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무엇을 회개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잘못했어요'하며 울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뭘 잘못했는데?'하시면 '몰라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참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상황이너무 고통스러워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정확하게 인식할 때 정직한 참회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참회할 때에 그 참회가 우리의 죄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왜 회개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뉘우치겠습니까?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우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감정적인 한풀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피게 되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적어보면 시발이 여기였고 이 상황이었는데 시험이 나를 이렇게 속였고 그것이 무지였고, 또는 알았는데 게을렀고......하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세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시험을 말씀의 빛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작은 이랬는데 내가 이랬습니다. 알았지만 게을렀고-혹은 게으르지는 않았지만 부주의했고-그러면서 점점 더 시험에 들었고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지만 늘 깨어있지는 못했습니다'하며 어느 지점에서 그랬는지를 하나하나 기도할 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참된 참회를 가져다줍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정확히 가져다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잘 찌르시지 않겠습니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면서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다 나 때문입니다'한다면 회개한 것이 분명해야 거기에서 돌이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시는 거기에 안 빠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시험에 들게되면 열 사람이면 아홉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때 내가 시험에 들 때 하나님이 좀 막아주시지 왜 내버려두셨을까?'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시작이 어디인가를 파악하기는 했는데 면밀하게 자기가 어떻게 부패한 욕망을 가지고 유혹에 반응하면서 시험에 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면밀하게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아가서 뼈저리게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통회 자복을 해도 다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변화되어서 은혜가 들어올 지 말 진데, 뭔가를 파악했다고 해서 들어보니 '그 때 주님이 왜 내버려 두셨을까?'하는 사람에게 회복의 은혜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다르게 깨닫고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가 별로 없습니다. 회개는 대개 깨어서 바르게 잘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회개를 많이 하지, 회개는 거룩과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지, 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고 나면 그 다음에 정결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납니다. 예전에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욕망이 없었을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고 그렇게 부지런하고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게 깨어있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거룩하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그 사람 마음속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그런 것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그렇게 깨어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은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 고귀하고 엄청나게 값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개를 경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감정에 충실한 사람,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신앙, 심지어는 죄가 많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적인 특성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자 '존 오웬'이 말하기를 신자가 부단한 뼈아픈 참회의 경험이 없이는 거룩에 대한 욕망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진실한 회개를 통한 자기 깨어짐이 반복되지 않고는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신자 안에 유지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나무는 계속 물을 줘야 자란다는 원리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 속에 깨어짐이 멈추면 거룩에 대한 욕망이 유지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해 보이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깨어짐이 없이는 거룩한 욕망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야되는 것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참회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영혼의 변화가 우리의 전 인격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참회를 통해서 자기 깨어짐이 있고 나면 우리의 이 지성도 새로워지고 우리의 정서도 새로워지고 우리의 의지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를 짊어지고 살 때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수도 없고 그렇게 힘들게 십자가를 지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깊이 회개하고 깨트려지고 나면 자기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 일에 순종하고 자기가 질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 짐을 지면서 하나님 섬기면서 살다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 받은 영혼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든 사람 머리는 항상 연탄가스 맡은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땠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는 대답뿐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참되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영혼에 변화가 오니까 머리가 초롱초롱 빛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느 지점에서 넘어졌는지, 왜 자기가 잘못했는지, 예전의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했는지 다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된 영혼의 영향이 그의 지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는 성경도 잘 안 깨달아지는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 시험에 들었을 때는 사람들이 우는 것 싫었는데-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싫었는데-진실한 참회를 경험하고 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과 너무나 관계없이 살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프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아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서 자기도 기뻐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자리에서 안타까워합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가 그 사람의 장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격 전체가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가운데 살아가면서 지성과 정서, 의지가 새로워졌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디에서 깨트려졌고, 깨트려진 것들을 어떻게 고치면서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건해나가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하고 어떻게 부서진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건축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하나 다루어나가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의 할 일들이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어서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의 깊은 회개를 통해서 단번에 은혜의 세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도 시험에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있었기 때문에 변화되고 정리되어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고 은혜에서 소외된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쌓여진 잘못된 구습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의 세계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어떤 사람이 천국을 올라갔는데 천사가 이력서 두 개를 보여주었는데 한 장은 땅의 이력서이고 또 한 장은 천국의 이력서였다-천국의 이력서는 거의 시험에 들어 하얗게 지워져있었다 )
시험에 들면 하나님께 별로 보탬이 안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세우기보다는 넘어집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베풀기보다는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진심으로 섬기기보다는 교회를 허물 때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바이런'이라고 하는 시인의 표현대로 초침소리가 관의 못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속히 지나갑니다.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무지 가운데 범죄하고 뒤척거리면서 살아온 날도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아픈데 이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서 이제 하나님의 지식의 빛 가운데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섬기면서 살도록 부르셨는데,이번에는 우리 자신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은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인생은 바람처럼 속히 지나갑니다. 그렇게 황금같이 귀한 10년의 세월을 뭘 하고 지냈는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목이 메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지나가는 이 오늘은 바로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목 메이도록 살고 싶어했던 그 내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적당히 아무 생각 없이 흘려버리며 대수롭지 않게 아깝지 않게 지내는 이 오늘이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그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내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그 내일이 주어져서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동안은 우리 인생은 괄호 속에 들어있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빛이라고 불러주셔서 어두운 동리 가운데 높이 세우셨으나 빛을 잃었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러서 우리를 소금으로 삼아주셨지만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상급 포도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지만 우리는 들 포도나 내는 삶을 살아가는 시기가 바로 시험에 든 시기입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낭비는 지난 날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면 섬기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어도 우리를 써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동안에 주님의 향기 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빛으로 소금으로 제대로 살아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시험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9.시험에 들었을 때의 처방(5):경건생활을 회복함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마26:41上)"
시험에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되느냐에 대한 다섯 가지 중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 견고한 경건 생활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런 많은 권고들이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론일 뿐이고 실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경건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이런 이론을 통해서 입증된 것들이 실제로 자신의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 구하라고 했으니 한두 번이 아니라 늘 기도해야 하는데, 거듭 구하면 하나님이 죄에게 져도 아주 꺾이지는 않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기도를 안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원의 약속을 붙들라고 했는데 약속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네 가지의 많은 것들도 다섯 번째 경건 생활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경건 생활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 이야기하면 신자의 모든 삶이 경건한 삶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경건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과의 교제에서 회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개인적인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충분히 영향을 주시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받고 그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응함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신령한 영향력이 자신의 마음속에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특별히 구별된 생활을 가리켜서 경건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전쟁으로 말하자면 큰 은혜를 받고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면 경건 생활은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지키면서 사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퀴즈를 내겠습니다. 우리가 6.25라는 비참한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으니까 정말 비참하고 그때의 슬픔의 한과 고통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경비가 많이 드는 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전쟁이 났을 때 미국과 소련이 북한과 한국을 도와주지 않으면 1주일 전쟁하면 돌멩이를 들고 싸워야한다고 할 정도로 이 전쟁을 위한 경비가 막대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행기 한 대 떨어지면 2-3백 억의 값이 나가고 미사일 한 대가 날아가면 4억-8억이 날아가고 폭탄 하나에 5-8십만 원씩 날아가고 삼천 발을 쏘면 사람 하나 맞을까 말까 하는 총알이 무수하게 날아가는 전쟁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이 오늘날 강대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돈이 있으니까 강대국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전쟁이 그렇게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6.25 전쟁에서 이긴 사람도 없고 진 사람도 없이 휴전선이 갈라졌지만 양쪽에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쏟아 부은 비용이 많이 들었겠습니까, 아니면 1953년 이후 2002년이 될 때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져서는 안 된다고, 각자의 평화를 지키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겠습니까? 후자입니다. 1년 예산의 30%를 거의 국방비에 쓰고도 이만큼 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을 치르는데 들어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50년간 전쟁 없이 살기 위해서 들어간 비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젊은이들이 한참 생생하게 공부하고 지식을 축적할 꽃다운 나이에 군대가서 꼬박 36개월을 썩었습니다. 그것이 나라가 발전하는데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가 얼마나 크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그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전쟁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늘 가슴조리면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아니면 예상치 못했다가 예배에 참석해서 자기 심령이 깨트려져서 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변화를 받았을 때 그 당사자는 그 변화 받은 상태가 굉장히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경험이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안정된 신앙이 좋은 상태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변화도 중요하지만 매일매일 이미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주신 변화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들을 유지하고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건 생활의 세계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생활이 결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목회 하는 교회에 가고 예배 시간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지고 기도 시간마다 펑펑 울어도 개인의 경건 생활 없이는 그가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교회에 은혜가 좀 덜하고 예배시간마다 큰 감격에 빠지지 못해도 개인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의 불을 마음에서 끄지 않는 사람들은 조금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영적 생활의 지성소의 깊이 곧 그의 영적인 깊이에 다름없습니다. 더 좁게 이야기하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 속에서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지키는 경건 생활에 힘쓰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인 깊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모였을 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배의 큰 영광도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런 예배의 영광과 함께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받는 은혜만 있으면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 거의 없이도 그런 은혜를 가지고만 충분히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 사실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일 어리석은 분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해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연약한 자가 낫고 눌린 자들이 해방함을 받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도 살아났는데 그 현장에 계셨으니까 매일매일 충만함을 받으셨을 텐데, 뭐 하러 밤중에 고단하게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시고 새벽이면 들판에 나가셔서 기도하시고, 제자들도 안 데리고 혼자 가서 기도하신 예수님부터가 너무 비생산적인 삶을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왜 그렇게 복잡해졌는지 아십니까? 저는 좀 단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직장을 그만 뒀더니 교회생활이 직장생활보다 훨씬 바쁘다고 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사는 것입니다. 공부는 왜 이렇게 많고, 기도회는 왜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현수막도 수없이 올려 붙는데 왜 이렇게 허한 것입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요하게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로 자기를 채우고 시험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고 그 시험의 경로와 방법, 통로를 생각하면서 지적으로 정리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을 개인 경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를 못하니까 모여서 무엇을 좀 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실, 수많은 공부를 해도 이상하게 채워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현수막은 부지런히 나붙고 세상의 여러 가지 교육의 제도나 방법들을 가지고 많이 시도를 하는데 왜 그런지 사람의 영혼은 곤고하고, 한번 은혜 가운데 들어오기는 힘든데 시험은 금방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가운데 다시 일어서기는 몇 년이 걸리는데 시험에 빠져서 몇 년 동안 얻게된 신앙을 털어먹는 것은 신속합니다. 청교도들의 영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성숙된 경건과 연단 된 꿋꿋함 들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제일큰 원인 중 하나가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 굳고 견고하게 서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경건한 생활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작은 죄들을 털고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을 유지하게 하는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면서 산다고 하는데 경건 생활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까? 예배 끝나자마자 핸드폰 들고 교회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주가 동향이나 두들기는 마음, 아침에 조간신문을 펼치자마자 화살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철렁 내려앉는 가슴,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 시간에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무엇인가 자기 마음이 속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명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묻은 때들을 털어 내고 자기의 헛되고 쓸모 없는 욕심 같은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여유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떼어놓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쯤 됩니까? 그런 시간 거의 없이 교회에 꾸역꾸역 나오기만 하면 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개인 경건의 삶 없이는 그가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목회를 받고 세례요한의 설교 같은 설교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는 견고한 신앙으로 자라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끔 부흥을 경험하라''시험에 들지 않게 폭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에 빠져라'고 말씀 안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도하라'는 교회에서 단체로 하는 기도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깨어있고 개인적으로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런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개인적인 예배생활로 표현될 수 있는 경건 생활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사람이 절제되고 경건한 삶을 살다가 왔기 때문에 그 예배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주일 예배가 그렇게감격스러우십니까? 일주일동안 분투하면서 살았을 때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다가 예배당에 와서 주일 예배를 맞이하면 정말 하나님의 위로가 넘칩니다.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살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든지 그런 가운데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 없이 아무렇게 살던 사람들이 주일날 와서 은혜 못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과 공적인 예배의 생활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절대로 개인의 경건의 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이 무너져 있을때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그것들을 먼저 복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원이 안 되는 이유는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런 경건 생활을 해야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천하기가 쉬운데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는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힘들까요? 그 이유는 자기가 마음속에 그러한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유익을얻기 위해서는 그런 경건한 형식을 지탱할 수 있는 내면이 따라줘야 하는데 시험에 들었으니까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신자가 깊은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성경을 한 장만 읽어도 그 속에서 항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었을 때에는 쌩쌩하다가도 성경만 보면 졸음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나이다'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시험에 든 사람들은 마음이 혼란합니다. 그리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기도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그 기도시간을 지키기가 쉬운데 욕구가 없을 때에는 지키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식욕이 좋아서 밥을 잘 먹은 아이들은 '식사시간을 꼭 지켜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밥 시간 되기 전에 벌써 숟가락 들고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병이 들어서 식욕이 떨어지면 식사시간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무거운 의무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먹기 싫은데 꼭 그 시간에 먹으라고 하고 왜 안 먹었느냐고 야단치니까 지키기가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먹고는 항상 핑계를 댑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누가 와서' '전화 받다 보니까' '외출하기 때문에'식으로 변명을 하면서 피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좋은데 은혜가 넘칠 때에는 '멕체인 성경 읽기 표에는 왜 4장만 읽으라고 되어있나' 합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성경이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지혜가 없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시를 이렇게 재미없게 써 놓으면 누가 읽을까 했습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들어가고 예화도 넣어두면 좋을텐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를 받고 보니 성경이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직장생활 하다가 교육받으러 가서도 구석에 앉아서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화: 점수를 잘못 맞으면 성경만 읽다가 그랬다고 할까봐 기도하고 시험공부를 열심 히 해서 1등을 한 이야기)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달고 맛있어서 읽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성경을 읽는 규칙을 세워놔도 지키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1장만 읽어도 잠이 오고 재미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의무감으로만 차게되면 원칙을 세워놔도 그 원칙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오기만 하면 너무 은혜가 되고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예배 시간이 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설교가 너무 간단해졌습니다.
(예화: 시간을 한시간 잘못 봐서 1998년 9월 마지막주 죄죽임의 설교 때 설교만 144분 을 했다)
(예화: 고린도전서 13장 시리즈 서론을 할 때 90분 설교를 마치며 다음시간에 하겠다 고 할 때 성도들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그런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시험에 들었을 때는 그런 욕구가 이미 거의 감퇴된 상태이기 때문에 형식은 세워놨는데 그것을 유지해나가기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 지 실제적인조언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형식을 복원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취하지 못해서 낙심할 정도까지 높게 기준을 세워서 복원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조금만 마음을 기울이면 이행할 수 있는 한계까지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해야겠다고 하면 새벽기도에 나와서 한마디도 기도를 못하고 예배당에 앉아 '주님, 주님'만 하다가는 한이 있더라도 세수하고 머리 깨끗이 빗고 오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기도의 은혜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제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깨워주시지 않아도 제가 자명종 누르고 깨서 스스로 예배당에 가는 것은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있는 한도까지는 제가 할 테니까 불쌍히 여기시면 제게 은혜를 주십시오' 시험에 들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아있는 은혜들을 얼마나 활용하고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소중하게 보시고 믿음이라고 여기십니다.
쉽게 얘기해서 돈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1억 헌금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없는 사람은 엽전 두 개도 전 재산일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어서 잃어버린 것을 어떻합니까. 잃어버렸는데도 그래도 남은 것을 붙들고 살려고 해야합니다. 성경을 4장 읽기가 힘들면 1장이라도 읽으십시오. 그것도 많으면 반장만이라도 읽으십시오. 그나마도 할 수 없으면 '예배는 참석하겠습니다'하며 무엇인가 자기가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성실하기만 하면 이행할 수 있는 기준들을 세워서 경건 생활의 형식을 복원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기도의 시간이 다시 길어지고, 말씀의 은혜가 깊이 들어가면 말씀을 읽는 시간이 길어지고, 예배의 은혜를 받게되면 예배의 길이를 가지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예배시간을 30분만 줄이면 열린 교회가 배나 성장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하는데 그렇게 해서 성장시키면 뭐합니까? 교회는 사람을 위한 곳이지 짐승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예화: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또 오라고 인사를 했더니 화를 냈다-영화를 보고도 오래 했다고 소리지를지 궁금하다)
형식 그 자체를 자기의 능력에 맞게복원하고 하나님 앞에 한 약속들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그런데 이 때 마음을 파고 들어오는 낙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은혜 누리던 때를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는 것입니다. 폭포수와 같은 기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결심들을 스스로 지탱해 나가기가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새벽 기도 꼭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하는 기도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느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귀는 우리가 무엇인가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성령이 주시는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절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만들지만 마귀가 주는 정죄 의식들을 그랬기 때문에 막 살아버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자포자기의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안되면 표를 만들어서라도 지키고, 자기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특별한 때에는 정해진 기간동안 일기를 쓰는 것도 괜찮습니다. 너무 기도가 안될 때에는 저는 기도를 글로 써본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은혜가 말라도 글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문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경건 생활의 틀을 자기에게 남아있는 은혜를 가지고 최대한으로 활용할 때에 실천할 수 있는 경건 생활을 다시 복원하고 그 안에서 그 형식들을 신앙의 내용으로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가 이렇게 실천하고 결심들을 이행하면 저절로 그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실천은 내가 하지만 이 실천하는 것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은혜의 불을 붙이셔서 나를 다시 타오르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계속 이런 것들을 복원하려고 할 때 순간 순간 죄에 대해서 자꾸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힘들게 다시 경건의 세계를 복원하려고 하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시험에 든 상태에서 이기고 극복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 계속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예배를 드려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차가운 거절감,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나를 버리셨다고 하는 소외감,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굉장히 열등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경우에 느낌보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실체가 있는데도 그것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자기 눈에 인식되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붙들면서 가야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표지판도 있고 길도보이면 좋습니다. 그러나 길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면 표지판을 따라가면 길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하나님이 이 침묵의 과정을 통해서 나를 단련하시고 또 이미 우리들이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배운 것과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부주의와 영혼에 대한 부주의를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게으름과 나태함 들에서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면서 그 일로 인해서 마음이 완전히 갈라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관리해나가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야단치다가 너무 화가 나면 아무 말 않고 몽둥이를 든 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침묵하는 시간을 통해서 아이가 자기가 행한 그 일이 인간의 도리와 본분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대해서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가 쇄신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하나님이 잠시 침묵하시면서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지고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어도 그것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소중하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실제적으로 그 죄에서 이기는 생활에 있어서 진전이 별로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것들을 충성스럽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의 생활이 복원되면서 시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복원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고 또 아직 시험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열심히 파수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험과 유혹이김의 교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