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나아가라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간절한 믿음으로(마15:21) 2004.1.12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진실한 참회로(눅7:38) 2004.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7
3. 확고한 결단으로(단9:3) 2004.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1
4. 철저한 개혁으로(스10:11-12) 2004.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6
1.간절한 믿음으로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마15:21)
이 새벽시간에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자세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여기에서는 믿음으로 가지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심리적으로 이러이러한 사실을 내가 믿는다 그런 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전인격적이고 영혼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전인격적이고 영혼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그 작용은 우리 정신과 온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려고 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혹은 정서, 의지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 모두를 회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어떤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 영혼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믿음으로 갖게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우리의 환경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가나안 여인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이 가나안 여인이, 커다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딸이, 하나 밖에 없는 딸이었는지, 많은 자식 가운데 하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 아이가 귀신이 들렸는데, 귀신이 들린 정도도 각각 다릅니다. 이 경우는 아주 심각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고백하기를 아주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이렇게 귀신을 내어 쫗아주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별 그렇게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고, 세상 의학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그 상황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아주 예쁘고 언제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주던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막말을 하고 그 딸이 귀신이 이끄는 데로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몸이 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볼 때에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차라리 사고가 나서 다리 하나 팔 하나 부러진 것이 낫지, 그렇게 흉악하게 귀신이 들려서,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 아팠겠습니까?
틀림없이 이 가나안 여인이란 여자는 무엇인가 이 상황을 개선해 보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선을 해보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무엇을 해보아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렇게 도움 없고,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고칠 길이 없는 이 여인에게 한 가닥 빛줄기와 같은 소망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거기를 지나가신다더라,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눈 먼 자와 병든 자, 그리고 귀신들린 자,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신다고 하는데, 그 예수께서 우리 딸을 어떻게 한번만 돌봐 주시면 저 흉악하게 귀신들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죠. 그러니 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소문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긴 겁니다. 구약에서 라합같은 사람이 그랬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요단강물을 말리며 가나안으로 들어온 그 광경을 라합이 두 눈으로 본 게 아닙니다. 남의 이야기를 건너서 건너서 풍문에 들었는데, 믿음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겁니다. 그렇게 소문을 듣고 이 여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진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부분을 들어도 믿음이 생겨나요.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것을 들어도 그것이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아닐 경우에는 믿음이 안 생기고, 비록 지식의 양이 적어도 처음 믿음이 생겨날 때에 그 지식이 결정적이고, 본질적일 때는 신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런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마 예수님께 나아가면 도움이 될까?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많은 생각 중에 하나였는데,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예수님께 도움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파문을 일으키며 커져가면서, 아 예수님께 의지하면 반드시 이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믿음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작은 믿음의 시작이 한 사람의 마음과 인격을 온전히 움직여서 나중에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이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습니다. 나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게 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고통 받는 많은 문제들은, 그 고통의 순서만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고통이 되고ㅡ 우리 삶에 큰 시련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고통 하는 만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해결은 아직 멉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구함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왜 그러면 문제 속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왜 그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을 견디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 더 좋은 텐데, 그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텐데, 왜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겪는 괴로움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지불하면서 그렇게 힘들게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근심할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후자는 육체로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육체로 할 수 없어요. 근심하고 염려해서 마음을 태우는 것은 육체로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요즘 근심이 잘 안 된다 그런 거 본 적 있어요. 요즘 은혜를 잘 못 받으니까 걱정이 잘 안 된다, 걱정할 능력이 떨어졌다 그런 거 본 적 있냐구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거는 그냥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염려와 근심을 하기에는 더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 없고 믿음 없는 사람의 틀에서 그런 것들이 생겨나니까. 그런데 기도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더 간절한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어쨌든 이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때 비로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갈등과 고통이 있었을 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또 만나면 나를 쳐다나 보실까? 또 내가 구하는 그 소원을 들어주실까? 나는 필요하지만, 예수님도 나를 필요로 하실까 등등......그래서 명백하게 여기 나와 있지는 않지만은, 많은 무리들에 에워싸여 예수님이 늘 다니셨습니다. 그러니까 저 뒤에서 여인이 소리를 지른다고 제자가 이야기 한 것입니다.
삶 중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하면 침묵이라는 난관에 봉착하죠. 이 여자가 아마 예수님 눈에 띄기 위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상당한 거리에서 불러야 했을 것입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랬더니 첫 번째 난관이 침묵이었어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많은 근심과 염려가 있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한번에 기도가 응답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때로는 마음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당장은 우리 주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고 고통스런 상황을 놓고 호소를 해도 주님이 대답하시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런 상황에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여인은 침묵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쳤죠.
두 번째 난관을 만나게 되는데, 주의 제자들이 저 여자를 보내라고 예수님께 거들었습니다. 주위에서 이런 환경적인 장애에 부딪치는 거죠. 마치 항해를 해서 일정한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바닷물이 잘못 조류를 타서 끊임없이 노를 저으며 북쪽으로 가고자 하는데, 배가 남쪽으로 떠내려 오는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내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제자들이 이 여자 좀 고쳐주고 갑시다. 예수님 이 여잡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너무 만나려고 하고, 이 여자가 처한 상황이 너무 딱합니다. 예수님 이 여자 좀 도와 주십시오. 이렇게 거들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주님 앞에 홀로 세우시려고 할 때에는 돕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나에게 기대와 희망을 주던 사람들이 네게 실망을 주는 일들도 생겨납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환경적인 장애가 생겨났습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아마 이 여인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야기를 보면, 제자들이 보내버리라고 이야기 할 정도니까 상당히 시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서 따라오면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는데 나 좀 도와 달라고.....그런데 사실 사람이 가난하고 병하고는 자랑을 안 하게 되요. 우리 옛말에 가난은 자랑하지 말아도 병은 자랑을 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치료법이 있으니까......그렇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게 자랑하지 않게 되요. 더군다나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아이고, 저 귀신들린 딸하고 사는 에미구만. 야 저 집안은 콩가루 됐겠다. 저 집 딸이 거 귀신들린 딸이구만......”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 나갈텐데, 그런데도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가 부르짖는 거에요. 이 뭐냐하면 속된 말로 하면 이판 사판이에요. 그래서 내가 한번 예수님의 긍휼을 입고 살던지, 내가 망신을 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한다고 할 지라도 내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리라. 그러니까 모든 생각과 모든 것이 예수님께만 꽂힌 상태에요.
그런데 그런 장애를 만난 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굴복하지 않은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을 부르는데, 제자들이 보내라 그러더니, 그것도 참고 예수님께 매달리는데,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나는 거에요. 예수님이 거절하신 거에요. 이건 하나의 좋은 의미에서 예수님이 시험하신 거에요. 뭐라 하셨나 하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은 부드럽게 하셨지만, 니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 말을 하신 거에요.
가나안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여기서 이런 궁금함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의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이 여인 말고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만나서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그 이스라엘과 섞여 사는 사람들을 핏줄을 따라 가려가며 사람을 다루시지는 않았던 거죠. 그렇지만 이것은 인정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 삼아 파송하실 때 제일 먼저 보내신 곳이 어디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그래서 예수님은 먼 곳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즉 바깥에서부터 복음을 전해서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구속을 이루심으로 성령이 임하시는 그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그런 작정이었죠. 그러니까 일부는 이 말씀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정신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이 아니죠.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 여자의 믿음이 정말 믿음인가 보시고 싶으셨던 것이죠.
그러면 또 의문이 생기죠. 예수님은 그러면 그 안에 믿음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아시는데, 보시면 되지 뭘 그런 시험을 하셔서 그걸 확인하시나......예수님은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이 여자가 예수님께 매어달릴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다 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이시고, 흘러서 고백으로 넘쳐 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전부를 하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죠. 그러나 그 사랑을 겉으로 표현해서 드러날 때 기뻐하시는 것이죠.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고백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말로 고백되고 삶으로 고백되어서 열매를 맺게 되길 바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변화된 우리 영혼을 통해서 변화된 삶과 변화된 언어들이 흘러나올 때에, 그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이 밖으로 흘러나올 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처럼,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된 영혼을 통해 흘러나오는 고백의 말과 변화된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런 말은 그 여인에게 견디기 어려운 커다란 난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너무 재밌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 달려 나와서 절하게 됩니다.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이 여인은 예수님 가까운 곳으로 인도되었고, 그리고 예수님 앞에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며 경배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걸고,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오직 주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주님이 난관위에 난관, 난관 위에 또 난관을 두셨는데도,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한 일은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경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낙심해서 실망하는 대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린 것이죠.
제가 처음 예수 믿고 은혜 받은 찬송 중 하나가 그 찬송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단락이 재밌어요.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 찬송을 부르면 그렇게 처절해 질 수가 없어. 주님이 박대를 하실 리가 없지만, 마지막에 주님이 박대를 하신다면 어디 딴 데 갈 데가 있으면, 아이구 뭐 주님 밖에 없나? 하며 보따리 싸겠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냐 이 말이에요. 예? 이미 벌써 세상 배신하고 예수님의 품에 안겼는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봐야 그 세상은 옛 세상이 아니에요. 우리를 배신자로 다 낙인 찍어놓았다 이거에요. 그러니 어디로 가느냐구? 그러니까 갈 데가 없는 거에요. 우리보고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주님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로 가리이까. 그런데도 계속 나는 아직 주님 앞에 열납될 수 없다라고 하는 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그러니 이 여인이 그런 심정이에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주님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경배하며 간절히 예수님께 부르짖는 겁니다. 그랬더니 네 번 째 난관이 던져지는데, 폭탄같은 시험이었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여기에서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죠. 그것들은 자녀들에게,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걸 취해 자녀들에게 안 주고 이방인들, 개들과 같은 너희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이러면 이건 사실 자존심에 관한 문제예요.
유대인들과 나는 관계있고, 너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한걸음 지나, 넌 개다......예수님이 어떻게 보면 참 가혹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어요. 뭐냐하면 믿음이 참 된 믿음이면, 이렇게 난관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 믿음이 자극을 받아서 불꽃처럼 치열하게 타오르고 믿음이 이런 참된 믿음이 아닐 때는 이런 장애 앞에서 믿음의 불꽃이 점점점 식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불이 나잖아요. 불이 치열하게 타오르면, 기름같은 것들이 타오르면,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이 확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일 경우에는 역경을 만나면 믿음이 타오르고 점점 좁아지는 거에요. 바라보는게......차를 운전할 때 한 30킬로 달리면 많이 볼 수 있지만은, 한 150-16- 달리면 점점점점 보는 시야가 좁아지는 거죠. 다른 쪽은 볼 수가 없잖아요. 너무나 빨리 달리니까 움직이는 게 보이질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간절해지면, 난관이 생겨날 때 더 치열하게 타오르면서 더 예수님을 붙들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죠. 이 여인이 뭐라 그랬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개들이 자녀들이 주인의 상에서 먹다 떨어지는 그거 먹고 살지 않습니다. 나를 개라고 하시는 것 좋습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지 마시고 나를 대신 사랑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고, 찌꺼기같은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주시면 내 인생을 고치기에 충분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마음에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셨습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네 믿음이 정말 크도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런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얼마나 절박하게 매달렸으면.....그래서 오래 믿은 사람이 큰 믿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절박하게 매달리는 사람이 큰 믿음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살 때에 마음의 틀들이 다 무너지죠. 그때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믿음을 갖는 그 과정을 통해서 죄는 털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생겨나도록 우리를 고치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 왔지만, 생사를 걸고 매달려본 적이 얼마나 됩니까? 근심은 많이하고 걱정은 자주 하지만 생사를 걸어본 적이 얼마나 됩니까? 오늘 내가 예수님 만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시든지, 아니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내가 목숨을 겁니다. 주님 만나야 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주님은 한 번도 외면하시는 적이 없어요. 지금도 눈을 들어 사면을 살피시며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간절히 주님을 부르며,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소자라고 할 지라도 주님의 시선을 붙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은혜는 많고, 능력도 많으시고 우리 인생의 곤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많은 권세도 그 분에게 있지만, 사면을 두루 살펴도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간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요.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어려운 일 생기면 근심하면서, 물결 치면 치는 대로, 유혹이 내 마음에 오면 유혹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면서, 예수 믿는다는 신앙의 연조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 만나지 못하는 게 너무 당연하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분발시키기 위해 주신 시련을 통해서 분발하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미끄러져 침륜에 빠져버리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라고 주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간사한 꾀를 쓰는 야곱과 같은 불신앙을 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이 여인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예수님 에 나와서 나를 도와달라고 할 때 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 내가 너하고 뭔 상관있느냐? 그렇게 말씀 하십디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들려 왔잖아요. 오늘도 모든 능력 모든 물질, 모든 권세, 모든 위로와 사랑을 가득 가지고 계신, 하늘의 자원 모두를 소유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그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그것을 주고 싶은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한번 목숨을 걸어보세요. 하나님 이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한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이렇게 인생의 언덕에서 밀리고 밀려 절벽 앞에 설 때까지 한 번도 생사를 걸고 주님 앞에 담판을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도 저에게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결단을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요. 주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제가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고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날 만나주시든지, 날 데려가시든지.....한번 내 인생의 위기에 찾아 오셔서 역사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이 없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믿음이 없는 것도 도와주십시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우리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2.진실한 참회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우니(눅7:38)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맙고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복 된 사경회를 열어 놓으시고 이처럼 이 새벽의 시간에도 우리를 주님 앞에 불러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데, 어제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죄인인 한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많은 주석가들이 아마 창녀요 기생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성경에 죄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인이라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을 받쳐주듯이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도 나오고, 또 그 뒤편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이의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런 예수님 자신의 고백까지 나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여자는 그 당시에 가장 죄인이라고 낙인찍던, 남성들의 경우에는 세리들, 여성의 경우에는 창녀요 기생이었던,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들을 합니다. 어찌되었든 확실한 것 하나는, 이 여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죄인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모든 사람들에 의해 낙인찍힐 만한 그러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세상적으로 보면 도저히 하나님과 화목하고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정말 비참할 정도로 죄악 된 삶을 살던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서 용서함을 얻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주었는고 하니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진실한 참회였습니다.
여기부터 이어지는 이 뒤편까지 이 여인에 대한 기사가 길게 나오는 데, 어느 한 구절도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질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여자의 대사가 나오질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생각들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아마 스스로 자기를 변명하고자 한다면 할 말이 없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식사하시는 예수님 곁에 불청객으로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며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다 저런 것 때문이다 라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 그런 환경이나 여건이 열린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화목한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그 은혜와 사랑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런 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환란과 시련이 많고 고난이 겹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결하게 살면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의 꽃은 핍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요인이 밖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내적인 마음의 죄에 있는 것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면은, 가장 좋은 것은 진실하고 순전하게 삶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들이 뉘우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결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간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늘 마음의 죄를 죽이면서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 그렇지 않고 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살려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뉘우칠 정도가 없을 정도로 정결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차선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그냥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이런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죠.
이 여자는 아마 지은 죄가 너무나 많고, 너무 큰 죄로 말미암아 동족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고, 이웃들과 사귈 수도 없는 외톨박이 여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라고 볼 수가 없죠. 왜냐하면 너무나 용의주도하게 준비되었고, 예수님이 어디서 식사하시는가 하는 일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만난 상황이라고 볼 수가 없죠.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 여자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인품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의 죄를 뉘우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렇게 방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던 옛 삶을 모두 뉘우치고 그러고 보니까 자기 자신에게 향유가 있었는데, 이 향유는 당시에 재산을 모으는 수단이었습니다. 금붙이 같이 재산을 모으는 수단이었고, 언제든지 시장에 가지고 가면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같은 기사로 여겨지는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여자가 예수님에게 부은 그 향유가 삼 백 데나리온의 가격 쯤 된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장정 한 사람의 품삯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아마 이천 만원이 훨씬 넘는 돈으로, 일 년 치 임금 정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 많은 값이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이지요. 이 여인의 이 행동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남자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술이나 팔고 몸이나 팔던 여자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렇게 해서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아마 그 돈을 밑천으로 새 삶을 꿈꾸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죄의식 속에서 늘 살고 외톨박이처럼 늘 고독하게 살다가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깊은 용서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자, 이 여자는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렇게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꿈같은 은혜를 주신 예수님께 무엇인가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유일하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향유를 담은 옥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붓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을 때 아마 그 향기는 온 집안에 가득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향유가 담긴 옥합이 최고의 세상이었고,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까? 이 여자의 옥합이 깨뜨려지자 향유가 흘러나왔고,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던 것처럼 깊이 깨뜨려 지기만 하면 아마 그것이 우리 옥합에 담긴 향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 여인이 예수님 정면으로 나오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떨어진 그 눈물을 황망히 닦아내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겸비한 참회였습니다. 자기의 죄를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참회하고 그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것이야 말로,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던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아주 강력한 훌륭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일생 살면서 지은 죄가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진실되게 그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죄를 짓지 않고 정결하고 순전하게 사는 것 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러나 어차피 일어난 일은 우리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자의 삶은 항상 참회의 눈물로 이어진 그 인생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있는 많은 죄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게 되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서 그렇게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빚어 가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진실한 참회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깊이, 말할 수 없이 사랑하시지만, 우리 안에 죄를 부여안고는 우리를 만나주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옷을 입고 깨끗한 옷을 입은 엄마의 품에 안기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성품 상 그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러 참회하게 하고 그리고 뉘우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이죠. 매순간마다 우리는 그런 용서의 은혜를 힘입으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진실한 신자에게는 자기 교만이나 자랑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루한 인간이고, 주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고, 주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데,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과 다시 사귀고 교제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너무나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이고, 또 우리 신자들을 바라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의 길에서 많이 미끄러지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질 때면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다른 노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이에요.
오늘 이 여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이 여자의 죄가 용서 받았으니 이는 사랑함이 많음이라....즉 죄를 용서받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표징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에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쏟아놓고 깊이 회개하고 나면, 차가왔던 마음에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하는 진실한 소원들이 우리 속에서 가득하게 밀려오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깊이 뉘우치고 진실한 삶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 앞에 한번 넘어진 사람들이 영원히 넘어지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제일 먼저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나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인격적으로 뉘우치고 참회할 때 우리들이 그토록 회복하고 싶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확고한 결단으로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9:3)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연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오늘 이 새벽에 사일 째를 맞았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삼일 째 새벽인데, 첫째 날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두 번째는 진실한 회개로,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시간에는 확고한 결단으로 나아가자입니다
다니엘이 아주 어린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게 하나의 통치 기술이겠죠. 어느 나라든지 이제 침략을 하게 되면 그 침략한 나라가 침략당한 즉 지배당한 나라를 다스리게 될 때 절대로 자기들이 직접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의 통치술이겠지만, 어떤 나라를 침략할 때는 그 나라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침략을 하고, 침략 후에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그 나라 출신의 앞잡이들을 세우는 거죠. 그게 역사적으로 언제나 있는 통치기술이에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들어올 때도 이미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연구했고, 침략 후에도 똑같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때 우리나라 가운데서 앞잡이들을 만들어서 그들을 통해서 자기네 마음대로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것이죠. 역사적으로 그렇게 같은 패턴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붙들어 갔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통치국의 문물을 배우고, 왕의 통치이념을 배우면서, 그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기네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뽑아가는 것이지요. 이게 꼭 정확하지는 앉지만 구약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 시기가 주전 605년 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한 19년 정도 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 나라가 역사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 어린 나이에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나라가 바벨론과 메대 바사 그 과정을 거치면서 신약시대의 헬라,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다니엘이 거기에 가서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 말씀을 연구하다가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포로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을, 그 서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 서책이 바로 예레미야서였거든요. 예레미야서를 보면서 자신들의 포로 생활이 끌려온 지 70년 만에 끝날 것이다, 라고 그 예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아마 이 다니엘이 그 70년이 바벨론 포로 생활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어쨌든 70년 만에 그 포로 생활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때에 다니엘이 70년에 포로생활로 끝날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개 63년에서 67년쯤 되는 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70년이 마치게 된 때가 다가오는 그런 시점으로 보는 겁니다. 그때에 다니엘은 굉장히 나이 많이 든 노인이었겠죠. 그 다니엘이 그 서책을 읽다가 이제 이70년이 거의 다 마친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 아마 다니엘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놀라운 감동을 받았을 거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니엘이 알고 있었는데,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이 다니엘이 역사의 새벽이 온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때에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깊이 결심하게 됩니다. 무슨 결심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광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아침시간이니까 깊이 다룰 수는 없지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깊이 결단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뜻을 세우고, 결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다니엘의 결단은 언제 이루어 진 것이죠? 이 상황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상황이 아니라 고통의 시기에 이루어진 결단이었습니다.
첫째로 고통의 시기에 이루어진 결단이었죠. 이 다니엘이 이렇게 결단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남의 나라의 포로로 끌려와서 이제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고토로 다시 돌아갈 기약이 없었고, 자신은 이곳에서 고위 공직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와서 정말 짐승처럼 노예처럼 그렇게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에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결심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좋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것 없을 때에는 결단할 필요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나 고난의 때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유 없이 고통 받으며 고난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과 고통 속에서 그 백성들의 행복보다도 더 중요한 그 무엇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자기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고통의 쓴 맛도 보게 하는 것이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해 져서 말씀을 바라볼 때도 사실 평탄한 때보다는 고난의 때였고, 우리의 마음이 겸비해져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총만을 바라보던 때도 고난의 때였습니다. 형통할 때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지만, 고난 받을 때에는 늘 주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죠. 고난 중에 마음이 강퍅해지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정말 주님의 사람을 갈망하는 자녀들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의 스승이고, 위로이고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고난 그 자체는 쓰고 아프지만, 그 고난과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게 될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틀들이 허물어지도록 내버려 두고, 고난이 올 때에 몸과 마음의 삶이 흐트러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고난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디까? 고난 받는 모든 사람이 진실해 집디까?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찾습디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은 객관적인 것이지만, 고난을 받아들이는 그 반응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다 고난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기로 결단했습니다. 이게 다니엘의 신앙입니다. 60여 년 전에도 다니엘이 맨 처음에 세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 왔을 때 처음 시험을 당합니다. 바로 그들이 왕의 상에서 나오는 진미를 먹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은 아마도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어쩌면 우상에게 이미 제사를 지낸 음식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영화의 기회가 되는 사건이, 다니엘과 다니엘과 동일한 수준의 신앙을 가직고 있던 세친구들에게는 커다란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무슨 뜻을 세웠을까요? 범죄함으로 나라가 망하였으니, 다시는 범죄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결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렇게 6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할 동안에 정치적인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고난도 당하기도 하면서 정말 힘든 세월을 보내왔지만, 그러나 이 다니엘의 마음이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 올곧고 순전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의지 가운데서 뜻을 세우고 결심하는 그런 신앙생활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젊어서 주님을 만나고, 수시로 결단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선명한 신앙의 양심들도 흐릿해지고, 활기찬 경건의 능력도 잃어버린 채 그렇게 나이만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주님을 뵈올 날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은 천국의 소망으로 빛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100미터 달음박질이 아니라 긴 거리를 달려가는 마라톤 같은 것입니다. 한번 이긴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영원히 이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다 싸웠으니 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훌륭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도 이렇게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다니엘이 이렇게 결단하게 된 때가 어떤 때였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비록 한 나라의 제상이 되어서 이미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육십 여년 넘는 포로생활을 보내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이 큰 나라의 고위공직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부족한 것이 없다,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난 동쪽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씩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이죠. 이 사람을 보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 부귀와 권세를 누리면서도 그 소망은 오직 두고 온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를 향해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 이외에 누구에게도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처벌하겠다, 라고 하는, 조서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전에 하던 그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해 난 동쪽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씩 기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이 나라에 끌려 왔는데, 이제는 노구를 끌고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이른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찾기로 그런 결단을 했던 때에는 예레미야의 서책을 보면서 이제 이 포로생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은총이 끝나는 구나 그걸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 은혜 받았던 경험을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우리가 얼마나 전심으로 매달렸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때 우리가 어린 아이같이 얼마나 간절하게 매달렸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정말 속히 회복해야 할 것들이 바로 이런 열렬함과 그런 간절함이에요. 은총의 기미가 보일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더욱더 필요합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마른하늘이 삼년 육개월 동안 계속 되었을 때 아마 그것은 죽음,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조그만 구름이 보인다고 종자가 전하여 주었을 때에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보고 기뻐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은총을 보여주기 시작할 때, 그 때가 바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할 때입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다니엘은 이제껏 어느 선지자도 경험해 본 적이 없을 정도의 장엄한 미래의 계시를 제시받게 되었고, 선지자의 비전을 품에 끌어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종들에게 당신이 행하실 일들을 언제나 미리 보이십니다. 바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총이 시작될 때에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계시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사람이 될 때에 주님 앞에 더 풍성한 은혜를 받으면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결단을 하고 나아가는 자세가 어떤 것이었을까요? 다니엘은 오늘 여기서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그렇게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으니, 이것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집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진다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나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비하던 때에는 하나님께 집중하던 때였고, 겸비해 지지 않고는 집중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자기 의에 가득차고 자기 자랑으로 꽉 찬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겸비해 진다고 하는 것 불가능하고, 또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만 집중한다고 하는 것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사람들이 집중할 때에는 겸비해 지고 또 겸비해 질 때만이 집중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섯 번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보다는, 주님의 그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하나님의 은혜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보다 더 많이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하찮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열렬하게 주님께 그 은혜를 구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너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평화롭게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마음 먹은 때에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셨죠. 우리의 신앙의 많은 선배들이 이 자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이 순교하고 얼마나 많이 피 눈물 흘렸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큰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부요해 지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처럼 평화로운 환경에서 주님을 믿고 있지만, 그러나 문 밖에만 나가도 전쟁터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을 찾는 간절함이 사라진 시대에 냉담한 신앙생활을 싫증으로 가득한 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울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울어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결단하고 기도해 주어야 할 때를 당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에도 겸비해집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 정욕과 죄악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싫증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또 우리를 둘러싼 많은 환경들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낙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겸비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희망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에게 이 마지막 때에 계시가 비추고, 60여 년 동안 어떤 은총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이제 민족의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뛰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니엘의 기쁨과 소망은 다니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전체의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전체의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삼으셔서 역사의 주인공을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위대한 일들에 희망을 걸고, 겸비하게 낮아진 사람,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위기 가운데 결단하고 은총의 조짐이 보일 때에 결단하고, 또 겸비함과 집중함으로 결단해서 이런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려고 하는 도구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신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도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의 부유함으로 주님 앞에 간절해지는 것이 없이 신앙생활하던 우리의 싫증난 신앙생활의 과거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합시다.
4.철저한 개혁으로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스10:11-12)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오늘도 지켜주시고, 오늘 새벽시간에도 주님의 집에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오늘 예배에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깊이 깨닫도록 지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 첫째 시간에는 간절한 믿음으로 둘째 시간에는 진실한 회개로, 그리고 셋째 시간에는 확고한 결단으로 오늘 이 시간에는 철저한 개혁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어제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포로 기간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서책에 기록된 예언대로 70년이 마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종교 관용 정책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일부의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은 포로생활에서 보따리를 싸고 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때의 그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사실 거기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자면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요즘 말로 하자면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70년이면 보통 대수로 따져도 2대가 넘고, 옛날 조혼의 풍습대로 봤을 때 20살에 아이를 낳는다고 볼 것 같으면, 벌써 이게 4대가 거쳐 세월이 지난 기간이거든요. 그맇게 3대 4대에 걸쳐 비록 포로생활이긴 하지만, 그들이 모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처럼 혹독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에요. 포로된 처음엔 그랬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벨론이라고 하는 커다란 영향권 아래서 살아갔고, 역사에 보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돈을 많이 벌고 장사를 해서 제법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하여간 그 긴 세월 동안 바벨론 생활에 정착되었고, 나름대로 재산도 모으고 삶의 기반도 있었던 사람들이 떠난 것이죠.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보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3번에 걸쳐 포로귀환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에스라와 함께 올라간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이미 예루살렘이 빈 공터로 있다가 포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민족들이 있었고,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사람들과 사이에 말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성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던 광경이 나옵니다.
그렇게 70년의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떠난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만약 여러분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고 했을 때, 돈도 많고 큰 집도 있어서 안정된 직장도 있어서 가기만 하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좀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겠죠. 그런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저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살지.....혹시 토인들, 식인종이나 만나서 혹시 잡혀 먹힐 지...벼라별 근심거리가 있는데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는 채 이 정든 곳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죠.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그리워 했고, 그 하나님이 그곳에서 자신들에게 예배를 받는 그 영광을 그렇게 그리워했던 것이죠. 그래서 에스라와 함께 그렇게 올라와서, 다 파괴된 성전에 새 지대를 놓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죠? 늙은이들은 통곡하고 젊은이들은 기뻐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왜 기뻐했냐하면 이제 성전이 지어지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기뻐하고, 노인네들은 왜 흐느꼈을까요? 이전에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포로 성전에서 짓는 이 성전은 그만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물자가 안 되었기 때문에 훨씬 축소된 채로 성전을 지어야 했죠. 그 지대를 보면서 노인네들은 통곡을 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사라지고 이렇게 초라하게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하다니 하고 통곡한 것이죠.
하여튼 이렇게 하나님의 힘에 굴복된 사람들이 올라갔으니, 이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뽑힌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이제 시간이 얼마가 지난 지는 연대를 잴 수 없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습니다. 그때 지도자가 에스라였는데, 이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학식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신앙의 인격은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을 깊게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이 험악한 세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죠. 그 정도가 아니었죠. 에스라는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자기가 먼저 배우고 준행하며 살려했던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라는 오늘 종일 자랑해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의 또 하나 뛰어난 장점이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 같이 순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리를 누가 와서 이야기 하는데, 와서 돌아와서 이방 여인들에게 장가를 들고, 거기서 애를 낳고 그렇게 살아간다는데, 그 방탕하고 율법을 배반하는 일에 지도자들이 으뜸이 되었다 하는 소문이 들리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쉽긴 하지만 경건한 지도자 에스라의 약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 경건한 나머지 상황 돌아가는 걸 잘 몰랐어요. 그래서 지도자는 그렇게 되면 안 돼요. 그래서 자신을 다 버려 경건하면서도, 그 경건한 나머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 안 돼요. 지도자는 모두 겸비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경건하면 너무 경건해서 상황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고, 상황 돌아가는 것은 잘 아는 사람은 경건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어쨌든, 순결한 지도자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으로 향했어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문지방에 엎드려 어린아이같이 통곡하며 가슴을 찢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이었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은혜를 베푸셔서 바벨론 포로 중 이렇게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 섬기게 하시는 데 이 백성이 그 은혜도 모르고 또다시 유다 나라가 망했던 그 죄를 반복했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서 주님 앞에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 백성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 여호와의 집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운 것이죠. 그런데 얼마나 장시간 동안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통곡하는 광경을 보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여호와의 집에 모였어요. 그래서 에스라와 함께, 왜 흐느끼는 지도 처음에는 잘 몰랐겠지만, 그 흐느끼는 에스라와 함께 회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그 영향력이 가정에 미치고, 구역에서는 구역장이 이렇게 하면 그 영향이 구역에 미치고, 교회에서는 그 목회자가 이렇게 하면 그 영향이 자기의 지체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니까 좋은 지도자가 중요한 거에요. 예루살렘 그 성전 문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흐느끼며 통곡하고, 그 모인 무리 중에 노인들이 점점 많아져서, 에스라와 함께 흐느끼고 있었을 때 잠시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에스라는 눈물 흘리는 연약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씻고는 여호하난이라고 하는 지도자의 방에 들어가서 다시 금식하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드디어 결단을 하고 눈물을 씻고 나와서는 공포를 합니다. 이 에스라에게 이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포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정적인 권한 사법적 권한이 있는 일종의 총독 같은 권한을 부여받았던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뭐라했냐 하면 이제 3일 내로 예루살렘으로 모여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흐느끼기만 하던 지도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도자는 착하기만 하면 안 돼요. 착하기도 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 결단을 하면 죄인의 완고함을 능가하는 거룩한 결의와 각오, 그리고 끈질김이 필요한 거예요.
일어나서 선포한 거예요. 3일 내에 안 올라오면 국물도 없다. 재산도 다 빼앗고 하여튼 가만 두지 않겠다 그렇게 결단을 한 거에요. 그 소식을 전파 받았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에스라는 강인한 지도자이긴 했지만 참 유하고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제 3일 내에 올라오지 않으면 가산을 적몰하겠다라고 하는 엄청난 선포를 했을 때에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드디어 그들이 모두 올라와 광장에 모였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왜 오래? 왜?? 그랬더니 사람마다 “말두 마 큰일 났어. 지도자 에스라께서 우리가 이방 여인에게 장가들고 그 여인들에게서 소생들까지 낳으면서 율법을 어긴 것을 보고 이제 뭔가 결단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 같애.” 그 때 참 하나님이 가난한 마음을 도와주시려는 지 비가 내렸습니다. 아니 이 광장에 모여 비가 내리니 이 비가 옷에 스며들어 살갗에 파고 들면서 추위를 느꼈을 것이고, 이 명령의 지엄함 앞에서 그들은 영혼도 떨고 육체도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에스라가 눈물을 씻고 그들에게 말한 것이죠. 이런 일은 도대체 있을 수 없다. 너희의 그 이방여인 아내와 그 소생들을 다 내어버려라. 왜? 율법에 의하면 그 백성이 그렇게 살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살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랬더니 그들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아내를 내어 보내고, 우리 소생들을 내어 보내겠으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그랬던 것이죠.
제가 오래 전 이 부분을 읽으며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치면 뭐합니까? 실제적인 삶의 개혁이 성도들에게 있을 때 그 목회사역이 빛나는 것 아니겠어요? 술 먹던 사람이 계속 술 먹고, 바람피던 사람 계속 바람피고 탈세나 하고 거짓이나 행하던 사람들 그대로 있고, 그런 상태에서 계속 교인 수만 늘어난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 목회사역이 아니라 범죄사역이에요. 양심에 면죄부나 주어서 그래서 양심에 철판을 깔게 만들고, 세상에서 그렇게 살게 만들고 그러다가 결국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구속되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게 사실 목회사역이 아니라 일종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왜 우리에게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왜 이런 변화가 그렇게 드물까? 또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철저한 삶의 개혁이에요. 회개를 통해 회개에서 시작된 죄에 대한 미움과 후회가 철저한 삶의 개혁으로 이어진 것이죠. 아무리 이방여인이라고 할 지라도 하룻 밤 데리고 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곰살궂게 아빠 아빠 그러고 다녀요. 거기 있는 민족들이 피부색깔은 거의 같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거의 같은 셈족 계열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별로 문제가 없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이 같이 사는 것, 뭐 몽고 사람이나 그 정도로 여겨졌겠죠. 생각 한 번 해보세요.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개혁을 할 일이 따로 있지, 뭐 예를 들자면 이제는 술을 끊어라 담배를 끊어라 그리고 다시는 이방 여인들에게 장가들지 마라 이러고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이건 가족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일인데, 이게 아무리 회개했다 하더라도 가능한 일일까요? 다윗 경우를 보더라도 우리아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여 범죄했지만, 그 여자를 내보냈습니까? 결국 못 내보냈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내를 다 내어버리겠습니다. 그렇게 각오하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죄인이 죄의 길 행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 죄의식을 느끼는 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 어렵죠. 이 가책이 단순한 도덕적 가책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찢으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하게 만드는 것 그거 쉽지 않죠. 그러나 그렇게 눈물을 씻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는 일은 더 쉽지 않죠. 진실한 회개야 진실한 마음과 눈물이면 되지만, 철저한 개혁은 이처럼 자신의 삶의 기반에 이처럼 칼을 대어야 하고 살을 에는 것 같은 실제적 희생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편에 가보면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이 큰 부흥의 때에 때려죽여도 우리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는 악한 무리의 명단까지 이 뒤에 가면 나와요.
그러니까 실제적인 삶의 개혁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만 주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로 그렇게 살게 하려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때때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는 실제적으로 그 회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일이 우리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는 가슴을 찢게 만들고,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지만, 그 회개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피 흘리는 분투와 살을 찢는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인생에 있어 다반사이고, 또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런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성경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실천적인 개혁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보면서 당신을 향한 순종을 판단하고 또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셨다고 한다면 말이 되질 않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네 산으로 데리고 가서 내게 재물을 바쳐라 하실 때 난 저 사람의 속을 도저히 모르겠다 과연 내 명령에 순종할까 안 할까 네 하나님이지만 난 도저히 네 속을 모르겠다라고 하셨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죠. 그분은 이미 아브라함이 순종할 것을 아셨죠. 그런데도 그분은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댈 때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알았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순종과 복종의 의도, 그것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교 계셨던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믿음 중에 하나는 말만 번지르르 하고 실천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 지 몰라도 삶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회개와 뉘우침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들입니다. 이제 오늘이면 사경회가 끝납니다. 은혜를 받으셨겠죠. 그리고 오늘도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삶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렇게 수많은 말씀으로 우리의 바르지 못함을 지적해 주시고, 우리 삶의 올바르지 못함을 주님이 그렇게 지적해 주셨다고 할 때, 그때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 삶을 고치시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주셔서, 돌이킬 수 없는 강퍅한 마음에 변화를 주시고,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마치 농부가 땅을 파고 나무를 심을 것과 같아요. 과일나무를 심을 때 농부의 소원은 푸른 잎과 큰 키의 나무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열매를 보고 싶었던 것이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시고 감화와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깊이 뉘우치게 하시고, 새 사람되게 하신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번 사경회 깨달은 것을 가지고, 고칠 수 없는 그 회개의 열매를 이번에 맺고 고칠 수 없는 삶을 고쳐서 개혁되는 것을 바라보신다면, 입술의 고백에 그치던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실천적인 열매를 맺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매를 맺어서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다가 편안히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삶에 개혁을 주십시오. 우리의 회개에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주십시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우리 같이 한번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