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시는 하나님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실상은 부요한 자(계2:9) 2005.10.24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
2.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1:3-4) 2005.10.25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9
3. 온전함과 위로(고후13:11) 2005.10.26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8
4. 깨어지는 자를 위로하심(고후1:7) 2005.10.27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26
5. 선을 좇게 위로하심(살후2:17) 2005.10.28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33
1. 실상은 부요한 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2:9)
요한계시록이 시작되면서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계시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먼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이 일곱 교회는 실제로 있었던 교회들인 동시에 그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빠질 위험과 그리고 그런 위험에 빠진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를 미리 보여주심으로 교회로 하여금 단정한 신부로 다시 옷을 갈아입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의도가 여기에 깃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들이 잠깐 살펴보려고 하는 이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만 들은 교회였습니다. 칭찬만 들은 교회가 있고,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들은 교회가 있고, 책망만 들었던 교회가 있는데 이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들은 교회였으니 주님이 보실 때 이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이들에게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면서 이제 이 서머나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 메시지 속에서 이제 서머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 평가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는데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사실 앞뒤가 말이 안 됩니다. 환난을 많이 만나고 그 다음에 아주 궁핍해서 가난하다면 어떻게 부요할 수 있겠으며 또 부요하다면 가난하지 말아야지 어떻게 가난한데 부요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그 부요와 궁핍에 대한 궁극적인 생각이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그 교회는 사람 하나하나가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개개인의 그 서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순결한 교회로 나타난다고 그럴 때 썩은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주님 앞에 순결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순결한 교회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한 교회의 성도들 하나하나가 순전한 사람이 될 때 그 교회 전체가 아름답고 순결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요한 자라고 하는 이 인정은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 앞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미 서머나 교회 전체를 그렇게 평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교회적인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 온 세상을 포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신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은 이중적으로 하나님 앞에 잘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으로서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이고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실패함으로 자신이 간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주님이 이 교회를 지금 환난과 궁핍을 당한 교회라고 했는데 이것을 뭘 얘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뒤에 부요하다고 하셨으니 앞에 나와 있는 이 가난이 뒤에 있는 부요를 재는 그것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는 가난하고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요하다고 이렇게 해석을 해야지 됩니다. 이 교회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가난하지 않은 아주 풍부한,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아주 풍부한 물질이 있어서 그래서 그것으로 부족한 것이 없이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라오디게아 지방 자체가 로마 시대 때 안약의 명산지였습니다. 개성 인삼처럼 라오디게아 산 안약하면 로마 전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품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그 안약을 만들어서 많은 수입을 올렸고 그래서 도시가 굉장히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너희는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물질적으로 많고 넉넉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실상은 벌거벗고 가난한 사람들이 너희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원하는 가장 좋은 삶은 돈이 좀 많아서 그래서 아주 넉넉한 물질 속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고 싶고 그렇게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꿔주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베풀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교회를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돈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있어서 어려운 일이 있고 그럴 때 좀 개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액들을 내놓고 그리고 교회에 도움을 준다고 하는 간증들을 목회자들을 만나서 들으면 좀 기분이 썰렁합니다. 왜 그럴까?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를 짓는데 몇 백 억짜리 공사를 하는데 장로님 한분이 거액의 헌금을 하셨습니다. 뭐 우리는 꿈꾸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특별히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들 좀 안 보내주실까? 오기는 오는데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옛날에 성공했던 사람, 옛날에 뭐 했던 사람 그러지 말고 요즘 부자인 사람, 그랬더니 누가 나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설교를 그렇게 해서 부자들이 오겠습니까? 아니 편안한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을 공기도 안 통하는 예배당에 놓고 120분 동안 쥐 잡듯이 잡는데 누가 돈 많은 사람이 여기에 오겠습니까?
그런데 참 감사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말 한번도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이렇게 그런 것을 성격상으로 별로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오래도록 기억해야할 만큼 그렇게 충격적인 헌금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해보시겠다고 하면 해보십시오. 내가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마 웬만큼 해도 충격을 안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물질적으로 아주 부요하지 않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아굴의 기도가 나오는데 너무 가난해서 주님께 영광을 가리지도 않고 또 너무 부요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그러지 않고 그럴 수 있도록 적당하게 채워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관점 자체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으면 잘살고 못사는 게 엄청난 최대한의 관심거리가 되고 문제가 됩니다. 마음이야 항상 그렇습니다. 아! 좀 이렇게 왜 하나님은 짜실까? 왜 나한테는 한번 쏟아부어주시고 물질을 주셔서 그래서 한번 마음껏 섬기고, 사실 섬긴다는 것을 먼저 얘기합니다. 그리고 좀 쓰고 이렇게 좀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안 해주실까? 하나님이 그런 질문을 가지고 본다면 사실 서머나 교회처럼 불평을 많이 할 교회도 없습니다. 환난을 많이 당하고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당하면서 주님을 의지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하고 비교해보십시오. 부자 교회였습니다. 진짜 돈으로 떡칠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도 수준이 틀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지키면서 산 이 서머나 교회는 너무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이렇게 인생을 넓게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 교회가 그렇게 가난한 교회였지만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너희는 참 부자다. 모든지 안 가진 것이 없는 정말 부자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 교회는 물질적으로 그렇게 가난할 뿐만 아니라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럼 이 당시에 교회가 왜 이렇게 환난을 당했을까요? 이 당시에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 이 교회가 환난을 많이 당한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당시에는 큰 교회당을 지어서 몇 만 명이 모이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 허락도 안 하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되고 이제 이 서머나 교회, 그러면 서머나에 있는 수많은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서머나에 감독이 있어서 그 지역 전체를 돌아보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교회였으니까 사실 뭐 교회 건축을 하다가 돈이 많이 들고 환난을 당한다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말 순수하게 믿음을 지키려하다가 보니까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까 가족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신앙을 지키려고 하니까 친척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많이 당하면서 이 교회는 그 궁핍위에 또 환난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모두 당한 교회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환난과 궁핍, 겹치는 고난 속에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고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평안함과 자유가 없었습니다. 늘 핍박, 오늘도 몇 명 잡혀갔다는 이야기, 고문을 당한다는 이야기, 누가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다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누가 예수 믿다가 끌려가서 가족들에게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 안 믿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자식으로 따돌림을 받아서 갈 곳이 없는 노인이 되었다는 이런 이야기가 교회에 오면 가득히 들리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가난하고 불행한 일을 많이 당한 교회를 부요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축복의 증거가 사라진 교회라고 아마 그렇게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아픈 사연이 많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예수 열심히 믿는다고 갑자기 하늘에 문을 열어서 획일적으로 그 사람들을 부자 만들어주시고 하나님 절대로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순식간에 원수들을 엎드러지게 하셔서 그래서 잠깐 동안에 그 사람이 승리한 사람이라고 만천하에 과시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정말 세상의 재물에는 티끌만큼도 욕망이 없고 정말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궁핍 가운데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 것 같은 사람인데도 하나님이 시련과 고난을 끊임없이 주시는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은이든지 금이든지 간에 여러 번 제련을 하면 그 은과 금이 순도가 높아지면서 아주 값진 보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제련을 하는지 여러분들은 보시지 못하셨겠지만 원리가 요즘이야 다 신세대 방법으로 하겠지만 흑연으로 항아리를 만들어서 거기에다 뜨거운 불을 가하면 흑연은 몇 천 도에서도 녹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거기에다 은이나 금을 집어넣으면 그게 모두 녹습니다. 녹기 전에 불이 붙어서 밑에서 탑니다. 그래서 태워서 없어질 것은 거기서 그게 녹으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불순물이 태워져서 없어집니다. 탈수 없는 불순물들이 있습니다. 그 밑에 가라앉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금을 다시 따라내면 순도 높은 금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한번 해서 안 되는데 7, 9번 이렇게 연단을 할 때 그 금과 은이 아주 순결한 은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연단한 은과 같도다.” 하고 시인이 노래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다 녹여서 탈 것은 타고 찌꺼기는 내려옵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순도가 높게끔 하기위해서는 일단 굳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녹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 아니 한번에 다 녹여서 무거운 것은 밑으로 내려버리고 태워버릴 것은 다 태워버렸는데 그런데 그것을 또 다시 하면 뭐가 나오나. 또 나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한번 녹였으니까 녹였을 때 불을 많이 때서 한번에 다 가라앉고 해서 한번에 순결한 것을 만들자. 굳힙니다. 그 굳은 금을 다시 집어넣고 다시 불을 때서 다시 녹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거기서 또 타는 게 또 나옵니다. 그리고 또 불순물이 나와서 또 가라앉습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하면서 거의 가치가 없는 그 금 부스러기 사금이 거기에 들어가서 모래와 이 쓸모없는 것들을 다 걸러내면서 그렇게 비싼 금붙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생각에는 가난하지 않은 것이 축복이고 환난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많이 소유해서 부자가 되고 그 다음에 또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정말 부요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마다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개인도 연단하시고 교회적으로도 연단하시고 하면서 이 속에 있는 찌끼들을 걸러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했는데 이제는 도저히 주님밖에는 의지할 때가 없다.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영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합니다. 그때 그렇게 가슴이 오그라들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빠져나갑니다.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슨 세상을 사랑하나. 내가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세상을 사랑하나.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녹아내리다 보면 그 불순물이 빠져나옵니다. 그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구나. 깨닫습니다.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물질이 많아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던 그 풍부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실상 가난한 자요, 벌거벗은 자라고 주님께 책망을 받았지만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가난했지만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였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 부요하다고 인정을 받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정말 부요한 사람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결핍의 때, 환난의 때를 잘 지내지 못하면 그때에 영혼에 큰 상처를 얻게 됩니다. 궁핍의 때, 환난의 때에 하나님 잘 의지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이 속에서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그래서 그런 원망이 듭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그래도 살려고 했는데 내가 받은 축복이 뭔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환난은 환난대로 만나고 가난함은 가난해서 육신이 고통을 받으면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물질에 대한 탐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평으로 꽉 차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의 환난과 가난보다 더 무서운 영혼의 가난함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 즉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환경은 재난으로 다가오고 영혼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잃어버리고 주님이 슬퍼하시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난은 고난대로 당하고 하나님 앞에 죄는 죄대로 짓는 그런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환난을 당하게 두셨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지 그 뒤에 보면 아직까지 환난이 더 남았다고 그랬습니다. 10일 동안 환난을 더 당해야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이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 10일간의 환난이 더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10일간의 환난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짧은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환난이 더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너희 교회의 머리인 나 그리스도가 사실은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그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서머나 교회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계시해주시는 당신 자신의 존재와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중적으로 적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 믿음을 잘 지키려고 하는데 말할 수 없이 환난을 당합니다, 박해를 당합니다.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데 고난이 겹칩니다. 그때에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중간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들판에 나가서 하늘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별들이 떠있습니다. 밝기가 다 틀립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신기한 게 하늘의 별이 있는데 하얀빛을 내는 별도 있고 붉은 색을 내는 별도 있는데 붉은 빛을 내는 별이 하얀 빛을 내는 별보다 멀리 있는 별입니다. 얼마쯤 멀리 있습니까? 20미터쯤 떨어져있습니까? 그게 아니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몇 광년 이렇게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 하나가 붉은 별인데 아주 찬란하게 빛납니다. 내일 밤에 가서 한번 보십시오. 어느 방향인가 하면 이렇게 강대에 서있어서 바라보는 그쪽에 아래쪽 쯤 떠있습니다. 10시쯤 가보면, 그래서 아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별을 보면서 하나님, 내 영혼이 이 어두운 밤하늘에 꼭 저 별 같게 도와주십시오. 다른 별은 빛을 내기는 하는데 가까이 있으면서 그렇게 빛을 못 냅니다. 그런데 그 별은 그 하얀 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리 있으면서도 빛을 내는데 내가 한번 천문대에 가서 그 별 이름하고 몇 광년이나 떨어졌는지 한번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그 별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렇게 멀리 있으면서 그렇게 붉은 빛을 발하면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하나님 이 어두운 밤하늘 같은 세상에 우리 영혼이 모두 이 순간에 일시에 어두운 밤하늘에 올라갔다고 칩시다. 밝기가 다 틀립니다. 그때에 그 어두운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빛나는 그 별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머지는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깊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그 풀밭위에서 간절하게 드렸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나는 애야.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란다. 이 모든 세상을 그분이 창조하시고 그리고 지금 눈에 보기에는 순간순간 주님이 안 계신 것 같고 그리고 내가 주님을 잘 믿는데도 환난을 당하는 것 같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데도 내가 가난한 것 같지만 그러나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지혜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슬픔도 아시고 오늘 아침에 떨어지는 내 눈에 한 방울의 눈물방울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모두 무질서해보이는 만물들이 그분의 손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고 마지막에 그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고 주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사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사람이 없는 이 모든 창조세계보다 더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잊혀진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주님이 기억하시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주님이 아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을 하나하나 주님께서 붙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가난한 것 같으나 주님이 모두 지켜보고 계시고 환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주님이 모두 바라보고 계셔서 결국은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가 주님의 손에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또 위로해주시는데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가 그런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느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예수님이었는데 누가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애야, 너희들이 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더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조금도 가난한 시간을 지나게 하고 또 내가 너희를 정말 보석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불같은 연단을 받게 한단다. 때때로 사람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고 묻고 그리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보호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봐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며 그 아버지가 죽었던 나를 다시 살렸단다. 이것은 결국 뭘 말씀하고 싶으신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살다가 보면 원수와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데 모질게 핍박이 온다든지 어떤 억울한 상황을 통해서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이든지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그런 것들은 모두 한번에 다 깨트리셔서 그래서 허무하게 만드시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를 타이르셔도 바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깨트리시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후자입니다. 본인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주위에 원수들을 가만히 놔두십니다. 고난을 당하는데 하나님이 그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모르셔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그러십니까? “너의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아노니.” 여기서 안다고 하는 말은 그냥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동의어입니다. 사랑하시는데도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룰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를 부요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중 또 하나가 마게도니아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는 극한 가난과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교회를 진짜 돈 많은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뭐라고 소개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너희로 하여금 마게도니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말하자면 좀 본받으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돈이 많고 잘나가는 교회이지만 나는 정말 너희들이 마게도니아 교회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 교회가 극한 가난, 그리고 모든 시련을 당했습니다. 폭풍과 같은 시련, 불같은 연단, 그리고 폭포수와 같은 그 많은 시련과 환난을 당합니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끼니가 간데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그랬고 외면적으로는 그랬으나 이 교회는 사도가 너무나 자랑하고 싶은, 사도가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은 주님이 자랑하시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싶으셨던 교회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는 너희가 마게도니아 교회에 주신 그 은혜를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꼭 알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교회이고 지지리 못난 교회처럼 보이고 핍박과 환난이 끊임없는 시련의 세월을 보낸 교회였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교회였다.
어제 밤에도 혼자 걸으면서 묵상했습니다. 살아온 인생 가운데 잘 나가던 때는 별로 특별히 주님께 받은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정말 고난이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즐겁고 휴식이 있던 시간은 다 빼가도 인생의 아름다움이 덜해지지 않았습니다. 놀고먹고 평탄했던 시기는 내게 준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그 속에서 보석과 같이 정금과 같이 하나님이 빚어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10일 동안, 잠시 지나고 나면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누구도 그렇게 다루시지 않는 것을 다루셨구나. 저희 대학원에 다닐 때는 딱 우리 때만 학생을 뽑아서 우열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한 반에 모았습니다. 그래서 교제를 내주는 것도 틀리고, 숙제 내주는 것도 틀리고, 심지어는 나중에 졸업하는 것도 틀립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1,200명이 시험을 쳐서 60명을 뽑았습니다. 너무너무 힘듭니다. 기말고사를 보는데 영어로 된 원서의 범위가 450페이지가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힘듭니다. 다른 반 학생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특수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특수반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환난을 당하는 게 가난한 것입니다.
오늘도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과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래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그렇게 하시려고 그래서 우리를 어두운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만드셔서 바다위에 잃어버린 배들을 인도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주님은 처음이시며 나중이시니라.”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인생을 꽉 붙드셔서 나를 특수반에 넣어주셨구나. 생각하면서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려고 힘쓸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위로하시는 하나님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이 고린도 후서는 이제 하나님을 섬기면서 당하는 고난과 시련에 관한 이야기를 1장에서 많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이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앞머리에서 사도는 그 환난과 위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위로해주시는 것은 그렇게 위로를 받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면 참된 위로는 오직 주님께로부터 만 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 말고 다른 곳에도 위로가 있지만 영원하고 진실한 위로는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당신에게서 위로받기를 원하시지 다른 곳에서 위로받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부부가 사는데 어려운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남편에게 위로를 받아야지 동네 아저씨에게 위로를 받으면 남편이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다가보면 우리들에게 많은 환난이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면 그냥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는 그런 태평한길을 가는 것처럼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살다가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우리들도 똑같이 많은 고통들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많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몇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고 불순종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이미 영혼에서 고통이 시작됩니다.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범죄 하는 영혼에게는 항상 곤고함이 있습니다. 그런 곤고함이 이 세상에 있는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이미 마음 안에서 그런 곤고함이 시작됩니다. 영혼에 피곤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불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심령만 곤고하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심령만 곤고해도 그것이 너무 괴롭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자인데도 자신의 영혼이 곤고한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안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길러보면 잘 압니다. 아이들이 판단이나 이런 것이 올바르지 않아서 공부를 하다가 성적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럼 애가 고민을 합니다.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지. 어떻게 하나. 대학도 가야지 되는데 이 성적 가지고 어떻게 하나. 그리고 고민하면 부모가 때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데 나쁜 부모들은 그래도 때리겠지. 고민한다고 되나. 성과를 가지고 이야기해라. 그리고 때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마십시오. 때린다고 사람이 됩니까? 어렸을 때나 때리는 것이지 다 큰 애를 뭐 하러 때립니까. 그런데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든 애들이 성적이 떨어지면 막 고민하고 괴로워하는가 하면 안 그런 애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적이 떨어지고 엉망이 되었는데도 고민하지 않고 그냥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괴롭지. 그런데도 그 다음에 금방 친구들과 어울려서 낄낄거리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돌아다닙니다. 내버려두면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때는 야단을 쳐야 합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단히 하나님 앞에 깨어있기 때문에 무단히 자기 깨어짐이 있고 자신 안에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들을 감지하면서 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 내가 정말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마음아파하실 텐데 하면서 늘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환난이 있습니까? 또 환난이 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기대가 되지 않을까요? 아!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또 한번 일이 일어나서 내 인생에 가는 방향이 바뀌는 거 아니야. 그런 기대감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중대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조짐입니다. 얼마나 기대가 되겠습니까? 아! 이제껏 그냥 주님 섬기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을 한번 바꾸시는구나. 아! 얼마나 더 멋있는 일들이 일어날까? 그래야지 됩니다. 곤고해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환경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보니까 필연적으로 환난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환경과 주위의 여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한없이 도움의 길이 열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뒤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살 소망이 모두 끊어져서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그랬습니다. 바울이 돈벌러 갔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고 지금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물러섰으면 그런 환난을 안 당했을 수도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하려 함에는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런 결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불퇴전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환난이 계속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투철하면 투철할수록 더 많이 환난을 당하는 삶을 살아서 마지막에는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까지 그렇게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뭘 보여주는가 하면 헌신적인 삶을 살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았는데도 이런 환난을 경험하게 되었고 오히려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더 많은 환난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그렇게 능력이 많아서 그래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또 사도들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산 사람도 죽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환난을 당하나. 자꾸 환난을 주고 고통을 주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뒤집어놓아서 회개를 시키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든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말이지, 아니 그렇게 해서 한번 바울이 지나가는 길, 대로변에 사람들이 다 엎드려서 그렇게 굴복할 텐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받아들여서 존경심으로 굴복하고 안 받아들인 사람은 죽을까봐 굴복하고 그렇게 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나. 이것을 벌써 예수님이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에게 그런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더 능력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능력은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동안에 덜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보시면서 마음아파하시는 예수님이 물고기와 떡으로 그들을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당신은 행로에 시장하시니까 무화과나무 열매라도 가서 먹고 싶어 하셨고, 행로에 너무 피곤하시니까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그 비천한 여인에게 그 물 한바가지를 구하셨습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많이 받으면 많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능력을 많이 받으면 사명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앞길은 환난과 고난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음의 능력을 따라서 고난을 받으라. 복음이 능력이 너에게 작다면 작은 고난이 있을 것이고 큰 것이면 큰 고난이 있을 것이다.
산에 태풍이 확 불어서 그냥 어마어마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을 맞고 가지가 부러지고 팔이 부러지고 허리가 부러지고 쓰러지는 나무는 큰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묘목은 안 쓰러집니다. 왜 맞을 바람이 별로 없습니다. 형들이 다 맞아줍니다. 큰 나무들이 다 맞아주니까 자기는 키가 요만해서 어제 심었는데 무슨 그렇게 모진 바람이 불어도 밀리면 그래도 덩치가 있어서 밀어서 부러지고, 말고 할 텐데, 태풍이 많이 불어서 잡초가 허리 부러진 것 봤습니까? 대게 가로수로 서있는 나무들이 막 부러집니다. 금방 생각해냈는데 딱 맞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은혜를 많이 주시면 사명도 크고 사명이 크면 고난도 많고 고난이 많으면 남이 알지 못하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까 또 고난을 당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다양하게 고난을 받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 오늘 뭐라고 말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위로를 해주시는 것은 그런 위로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자신 안에 치유의 작용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위로가 없이 그냥 힘들게 살아가면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모두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가 없이 고난만 계속 오게 되면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발전하는가 하면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 죄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께 연단을 받고 고난을 경험하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위로를 받지 못하면 마음이 더 강퍅해집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해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데도 이게 모든 사람들이 무한히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까지만 견디고 그리고 그 지점서부터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지점에서는 마음이 얼어붙습니다.
그 미후라 아야꼬가 쓴 ‘빙점’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그 빙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기억하는데 옛날에 읽은 것을 보면 인간이 모두 끝까지 참지만 어느 한계까지 가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점이 옵니다. 거기에서 콱 하고 그 사람이 꺾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굉장히 무섭게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애를 쓰던 어느 사람이 불현듯 마음이 아주 완강해집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세상을 택합니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오래전부터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그것이 밖으로 확 발산되면서 그러면서 담대하게 하나님 없는 삶을 택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도 보면 하나님의 일에 굉장히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그런 경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보여 지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어째든 이렇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인해서 환난을 당하든지, 사명을 감당해나기 위해서 환난을 당하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지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위로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 자기와 똑같이 곤고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교회가 그리고 이 온 세상이 위로의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그 위로라고 하는 것이 대게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위로지만 그 주님이 직접 내리시는 위로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사람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사람을 통해서 오는 사람의 위로가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는 항상 그 사람을 사람 앞에 세우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굉장히 더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을 세우되 어떤 상황에서든지 간에 그 사람을 자기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는 했지만 자기가 위로해서 그 사람을 자기 앞에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매우 더러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위로를 전해주는 도구가 사람이지만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고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위로를 그렇게 당신 자신이 사람들을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자,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 위로입니다. 권면을 받아도 하나님의 권면이지만 사람을 통해서 오는 위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위로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 위로입니다.
오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고린도 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혼냈습니다. 들었다 났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혼을 내놓고 났는데 그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마음이 많이 아파하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가 너무 심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고린도 후서에서는 많이 좀 뉘우치고 새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자기가 또 너무 야단친 것 같기도 해서 위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도 또 하나님의 위로인데 또 똑같이 사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것입니다. 위로의 사람들로 늘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위로받는 게 이렇게 뭐 큰 거, 그런 것만 가지고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게 넘치는 위로의 도구가 되어서 살 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바울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성경을 읽다가 바나바라는 사람에게 매료가 되었습니다. 아! 이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구나. 이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방금 회심한 열렬한 청년, 나이가 잘 안 나오지만 바나바가 훨씬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주님이 쓰시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의 비서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나오다가 뒤에 넘어가면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바울을 청종하고 바울의 순종하며 바울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영원한 이 인자가 됩니다. 리더십을 바울에게 내어주고 자기는 헬퍼십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쉴 새 없이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면 위로의 아들입니다. ‘바’ 가 아람어인데 ‘바르’가 아람어로 ‘아들’이고 ‘나바’가 ‘위로’입니다.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도 바울에게 접근했던 방식도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지만 자기가 회심했는데 사람들이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놈이라고 낙인이 꽉 찍힌 것입니다. 자기는 이제 하나님 일을 해야지 되겠는데 그렇게 회심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어줄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정말 회심한 사람이고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변호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상대방도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러니 내가 어떻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동안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그것이 진정한 환난을 당한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입니다. 환난당한 성도에게 가서 공갈이나 치고 협박이나 하고 환난당한 성도들에게 가서 나에게 기도를 안 받으면 안 된다. 나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국물도 없다 이런 식으로 공갈이나 치고, 결국은 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양떼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주님의 분신이 된 그런 마음으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그게 필요합니다. 이런 위로를 베푸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길을 가는 가운데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해나가면서 어려움이 많이 있을 때 모든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너도 나도 주의 일을 하겠다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주님의 일을 해나가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충만히 경험하여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 받는 환난의 고통들을 씻어내고 그 하나님의 위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신실한 고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딱! 하나가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되 믿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명을 받아서 그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하셨던 일들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당신의 일을 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또 사람을 죽고 살게 하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셨는데도 또 하나님과의 일이 잘못되거나 주님께 책망을 받을만한 실수가 없는데도 고난을 받으셨다면 그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을 계승해서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예수님이 당하신 것과 같은 고난이 능력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이,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크기와는 상관이 없이, 많이 그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한 헌신된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오히려 강물을 거슬려서 빨리 헤엄치는 사람들이 강물의 힘을 더 많이 느끼는 것과 똑같습니다. 더 열렬한 사명의 사람들에게 더 고난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난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크기와 관련이 있겠지만 그 사람의 인격과도 관련이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을 주어서 사명을 맡겨보면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혼자 서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혼자도 지쳐서 팽개치고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로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위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 위로를 못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죄를 짓고 불순종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한방씩 침을 놓고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들의 신앙도 다 흩어놓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자기 할일을 마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감당하다가 보면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모함을 받는 일도 있습니다. 오해를 받기도 하고 아주 악의적인 모함을 받으면서 견디기 힘든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지침이 뭔가 하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런 모든 고통 때문에 흔들려서 거기에서 사명을 놓고 집어치우면 그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그 사명을 맡겨주셨을 때 주위에 도운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박수치는 사람들이 꽉 찼기 때문에 그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그래서 거기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사람과 주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거기서 갈라집니다. 거기서 헤어집니다. 깊이 주님도 멸시를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그 죽으신 고난을 그대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부서지도록 고통을 받고, 때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때로는 악의적인 모함을 받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고, 때로는 환난을 당하면서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 고통 속에서 예수 죽음의 고통이 스며듭니다. 예수 죽음의 고통이 스며들면서 이 신기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이 예수 죽음의 기운이 내 안에 혈기와 욕망, 주님을 떠나서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그 육적인 고집, 혈기 이런 것들을 이 속에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그래서 이게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가면서 그 사람이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또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해나가려고 하는데 살이 떨릴 듯이 고통을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주님이 곁에 계십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잘 감당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고 찢어질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이 자기에게 깊이 스며들어서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혈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자기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욕망들이 이 안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놓고 보면 원수들은 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기위해서 그 시련을 가하고 핍박을 주고 나를 비난하고 그랬는데 그게 내안에 들어와서 나에게 오히려 덕을 주는 것입니다. 들어와서 그것이 도저히 고난을 받지 않고 환난이 없이 평안하게 살 때는 도저히 죽일 수 없었던 것들,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었던 것들이 그 환난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막 확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수를 치면서 철야기도를 하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교회에 와서 봉사를 하고 말씀을 듣겠다고 따라다니고 그래도 죽지 않던 그것이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러면서 콱 죽습니다. 그렇게 죽으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 하면 “이후로 나를 아무도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고백을 하게 됩니다. 더 했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서 아침 해야지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이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위로해주십니다. 넘치도록 위로해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죄를 지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는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니라 회개가 필요합니다. 참회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로가 없습니다. 그 죄 가운데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고 힘겹게 믿음생활을 해나가는데 그때에 말할 수 없이 많은 환난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 환난을 피해보려고 갖은 꾀를 다 씁니다. 하여튼 하나님 앞에 안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충분히 안 돌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깊이 쉽게 자기를 꺾고 깊이 참회하고 뉘우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고 자기의 지금 여태까지 살아온 그 삶에 대한 집착, 죄에 대한 집착, 그 죄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 주님 앞에 느끼게 될 그런 두려움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돌아와야 할 때 돌아오지 못하고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그러면 환난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 위로도 없습니다. 그가 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것입니다. 위로는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온 영혼들에게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데 성부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성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는 바로 이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을 통해서 위로가 오는데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진실하게 참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인해서 성령 자신이 근심합니다. 그런데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누군가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의 원수입니다. 화해하기 전에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아마 그 사람도 여러분들의 위로를 받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서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은 사람이면 눈물나게 고맙지만 화해를 안 한 이웃이 찾아와서 위로를 하면 저게 염장을 지르려고 왔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가 뭔데 여기 나타나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자기는 성령님을 그렇게 근심시켜드리는 죄악 된 삶을 살면서 그 성령님께로부터 어떤 위로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럼 위로가 옵니다. 그런 위로가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환난을 당하나. 믿음으로 살다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 사명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다가 환난을 당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서 환난을 당하고 있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 깊이 진실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 있습니다.
일생동안 몸을 팔며 죄 가운데 살던 그 여인이 식사하시는 예수님 앞에 와서 기름을 부었을 때 사람들은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은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깊이 위로를 주셨습니다. 네 죄를 사함 받았도다. 왜냐하면 네가 나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념이 될 것이다. 이 여자를 아주 위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가 하면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라고 사도가 이야기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자비의 아버지시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그 죄인을 선하게 대우해주시도록 하나님 자신에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에게는 의로우신 성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죄인이 잘못했으면 저 죄인은 벌을 받아야 된다. 마땅하다고 하는 공정한 판단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비는 그렇지만 저 죄인이 저렇게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너무 불쌍하니까 하나님이 저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저 죄인을 깊이 선대해주시도록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시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이 자비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와 긍휼,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선대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십니다. 자식은 죽었다 깨나도 부모님의 사랑의 그 깊이와 넓이를 모릅니다. 너무 모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라 오오 어서
깊이 사랑하십니다. 자비의 아버지시고 또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가 환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고생을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사람이 여러분들을 괴롭게 하지만 사람이 주는 고난이 아니라 환경 때문에 너무 괴롭지만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 많은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이 은혜를 많이 받은 여러분들에게 남들에게 안 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매일매일 천사들이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땅에서는 저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뻐하라. 기뻐하십시오. 죄 가운데 있어서 환난을 당하는 분들에게 내가 오늘 주님의 사랑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설령 여러분들이 많은 죄를 짓고 돌이킬 수 없이 주님 앞에 잘못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칩시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 처음 회심하고 나서 늘 부를 때마다 은혜 받은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상에도 한번 심취해보고 뭐 어디 무슨 인생의 좋은 길이 없을까를 다 하다가 다 소용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로 돌아왔는데 어떤 때는 나도 죄를 짓고 불순종합니다. 어렸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때는 교리적인 지식도 없으니까 뭐가 잘 안되면 왜 안 되는지도 모르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철야기도에 나가면 난로를 피워놓고 지체들이 쭉 둘러앉아서,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께로 옵니다
또 한번에 하나님이 용서 안 해주신다고 칩시다. 백번 양보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칩시다. 그래서 다른데 어디 빨리 해주는데 있습니까?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사람들은 제일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기다리겠노라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내가 기다리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많이 잘못했으니 결국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니 버릴 까닭이 없을 터이니 내가 그분의 임재의 문전에서 석고대재하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게 가장 빠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오,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죄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그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자기처럼 죄 가운데 빠지고 또 사명을 감당하다가 낙심한 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어루만지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온전함과 위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13:11)
사도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마지막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편지를 쓸 때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혹은 ‘종말로’ 그런 말을 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편지 여러 곳에서 이렇게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으로 이제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사경회에서 새벽마다 우리들이 살펴보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와 매우 중요한 상관이 있는 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선 기뻐하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그 고린도 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많은 고난의 이야기들이 기록이 되어 있고 그 고난가운데서 어떻게 그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고린도 후서를 가리켜서 신약의 예레미야서다 이렇게 부릅니다. 그럴 정도로 고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도가 오히려 평안한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으로 볼 때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기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 흐느끼고, 괴로울 수밖에 없을 때에 고통 받고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신앙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줍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만약에 우리도 똑같이 믿을 수 없을 때 믿을 수 없고, 괴로울 때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아프고, 환경적으로 어려울 때 마음에 번민이 생기고 이렇게 똑같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세상 사람들이 묻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평안한 교회에 많은 성도들에게 고난을 많이 당하고 있는 사도가 오히려 기뻐하라. 이것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 빌립보 교회입니다. 옥중에서 어쩌면 사형 받을 줄도 모르는 죄수가 옥밖에 있는 많은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18번이나 외쳤습니다. 이게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련이 올 수가 있습니다. 눈앞에 아무런 증거도 보이지 않고 그리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더 크신 섭리 가운데서 그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만약에 똑같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신자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유익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기쁨은 어디서 오는 기쁨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로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난이 많이 겹치고 시련이 오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성경은 이 믿음을 노래한 사람들의 운동장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시련이 많이 겹칠 때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오,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혹은 “고난과 시련의 태풍이 막 불 때 내가 이 폭풍이 지나기까지 여호와의 날개 그늘아래서 쉬리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런 신앙의 고백들이 생겨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경험하고 있는 것도 새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쭉 경험해오던 것,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고속도로 같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잔디밭에서 꽃이나 따고 놀고 그리고 잔잔한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이나 주면서 노는 그런 어린애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시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잘 믿으면서 살면 그 영혼의 유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경계가 없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믿음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조금 시련이 있다고 얼굴에 팔자를 그리고 꼭 치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다니지 말고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인데 뭐 그렇게 처음 알았습니까? 의연하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내가 만족합니다.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래도 힘들 때가 있는데 그래도 억수로 힘들 때 있습니다. 그때 내 말로 위로로 삼으십시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그럼 죽습니다. 위로가 안 되나, 되지.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한 20년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열린 교회 개척한지 벌써 12년인데 지긋지긋합니다. 얼마나 12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그런데 앞의 세월은 더 빨리 갑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 봅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씩 별을 봅니다. 내 사랑 별에 빌며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나를 다 지켜보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기쁨으로 이기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보니까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위로를 받으며 라고 나오는데 수동태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위로를 받으며 너희 자신이 위로를 받으며 그런데 위로받다. 이 단어가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입니다. ‘파라’는 이게 성령님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기에서 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것이 여기서 옵니다. ‘파라칼레스’ 라는 단어가 여기서 오는데 ‘파라’는 ‘옆에서’고 ‘칼레오’는 ‘부른다.’ 그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옛날 로마시대 때 법정에 가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데 죄의 혐의가 있는 사람이 와서 재판을 받으면 이제 법정에서는 어째든 그를 벌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검사가 있을 것입니다. 고발하는 사람이요. 그런데 항상 거기에 파라클레이테스가 있었습니다. 누군가하면 변호자입니다. 그 변호자가 이제 그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었지만 사실은 이런 점에서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변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를 받으며” 그랬는데 도대체 이 위로를 누구로부터 받는 것일까요? 누구를 보고 받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너희 서로를 위로하라는 권면을 여러 곳에서 합니다. 빌립보서에서도 하고 에베소서에서도 하고 여러 곳에서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위로를 받으며 그랬으니까 이것은 사실 너희가 서로를 위로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이렇게 위로해주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모자라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어떤 때는 나도 내 편이 아닌 적이 있습니다. 나도 내가 싫고, 나도 나에게 실망하고, 나도 나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반드시 누가 필요한가 하면 파라칼레오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대신 변호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 당신 그렇지 않아. 당신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누군가가 그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세상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어떻게 좀 먹고 사는 것이 옛날보다 난지 모르지만 하여튼 치열하고 각박해서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그런 시간들을 지나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뜸한데 몇 해 전만 해도 공중전화박스에서 사람이 가끔 죽고 또 동네에 골목에서 사람들이 가끔 죽고 그랬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공중전화박스에서 너무 전화를 오래 건다고 뒤에 있던 사람이 때려죽인 것입니다. 또 골목에서는 왜 그런가 하면 주차하다가 성질이 나서 이웃과 싸워서 사람이 가끔 죽임을 당합니다.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이게 아주 극도에 달해서 자기 뜻을 거스르면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 속에 분노와 미움이 꽉 생긴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의 삶의 상황이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주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참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위로를 경험하고 그리고 용서를 경험하고 자신이 많이 부족하고 때로는 잘못하고 때로는 현저히 잘못했어도 용납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용서하고 하는 그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이 사랑의 빚을 질수 있는 이 세상에서 정말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보십시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믿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는 사람들, 혼자서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살수 없는 저만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성화되고 변화된 사람들이야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은혜의 물에 제대로 잠겨지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전한 것입니다.
요즘 배추 값이 많이 비싸다고 합니다. 배추라도 좀 옥상에다 많이 심었으면 돈을 좀 벌었을 텐데 배추가 아주 비싸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김장들을 별로 안 하지만 옛날에는 김장하면 200포기씩 이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겨울부터 봄이 될 때까지 김칫독하고만 씨름합니다. 반찬이 여러 가지가 올라오면 김치, 김치찌개, 김치볶음, 김치 국, 김치무침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김장을 담글 때 배추를 가운데 쪼개서 커다란 다라니에 소금물을 붓고 거기다가 집어넣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뻣뻣합니까? 막 잎사귀가 뚝뚝 부러집니다. 큰 배추를 거기에 집어넣어서 한 하루를 담가 놓으면 그 다음날이면 부들부들해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거기에다 가운데 찢어서 속을 해서 점심때 먹습니다. 그런 것을 한번 보십시오. 소금물에 들어가서 푹 절여지고 나면 부들부들해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그렇습니다. 아! 진짜 교회에 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럼 묻고 싶습니다. 저는 누구를 그렇게 만족시켰는데. 내가 봐도 만족이 안 되는데 누구를 만족시켜봤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살아있는 것 때문에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십시오. 남편이 여러분 살아있어서 가슴이 시리도록 행복합니까? 자신 있는 사람은 한번 손 번쩍 들고 일어나보십시오. 없잖아요. 또 여러분 때문에 엄마 아빠가 너무 행복하고 천국을 날아갈 것 같은 자식들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원수는 여러 있어도 그렇게 가슴시릴 정도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 자기를 조금 만족하지 못하면 막 간이 떨립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미운 부메랑입니다. 부메랑이라고 아십니까? 그것은 뾰족하고 날카로운 그런 딱딱한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힘차게 목표를 향해서 날립니다. 그래서 목표에 맞으면 되는데 안 맞으면 이게 날아서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남을 향해 보내는 것 같은데 결국은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롱 펠로우라는 사람이 세레나데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외울 수는 없지만 제가 아주 좋아하는 시였습니다. 그 시 속에서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옛날에 옛날에 하늘을 향해 화살 하나 날려 보냈네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 나는 그 화살이 나무에 깊이 박혀있는 것을 발견 했네 그 다음에 재미있는 게 옛날에 옛날에 하늘을 향해 노래 한 곡조 불러 보냈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깨달았네. 내 친구의 가슴속에 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그 화살은 미움입니다. 그게 사라버린 줄 알았더니 어느 나무에 콱 하고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꽂힌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하면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하면 자신이 위로를 받습니다.
가끔 가다보면 이런 적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제가 간증도 얘기 했습니다 이정도 지점밖에는 제가 사랑할 수 없겠습니다. 그랬더니 애야, 나도 네가 그럴 때가 있단다. 깨닫게 됩니다.
사랑해요 경배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예수님
쭉 찬양합니다. 그래서 위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로하면 그 위로가 자기에게 충만해집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을 위로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위로해주십니다. 믿습니까? 그렇지만 이 위로는 사람이 위로를 주는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이 위로는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특별히 성령님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는 과정까지 성삼위 하나님이 각각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선택하실 때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분은 성자 하나님, 우리로 주님을 믿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은 하나님을 통해, 그리고 위로는 성령님을 통해 오는데 각각의 경우 어느 경우라도 이 삼위의 하나님 중 어느 한분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경험되기는 하지만 나머지 두 위의 하나님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순간에도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은혜의 예수님이 그 곳에 함께 하십니다. 다만 위로받을 때 성령님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위로를 느끼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는 성령님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오죽했으면 성령님을 파라칼렐오 하시는 분, 파라클레오트스라고 부를 정도로 이 위로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고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무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 안에 위로가 넘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수많은 사람이 나를 위로해주는데도 위로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리고 너무너무 가슴 아픈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때 그때 사람의 위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직접 오셔서 위로해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 위로를 해도 그 위로는 도구에 불과하고 마지막에 정말 넘치는 위로는 성령님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고 그냥 사람의 위로만 구하면 사람이 아주 추하게 됩니다. 이 믿음의 의연함과 담대함, 그 다음에 폭풍과 시련 가운데를 지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 이런 것은 사람의 위로에 목을 매는 신앙을 가지고는 누릴 수 없는 마음에 상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누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자기의 마음에 직접 오셔서 자기를 위로해주실 때 그때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직접 위로해주십니다. 그러면 넘치는 관용, 그리고 넘치는 사랑, 그리고 넘치는 평화, 무엇보다도 넘치는 마음의 건강함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위로는 누구를 통해서 온다고요?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옵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누군들 성령님의 위로가 없는 사람이 위로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 이웃하고 대판거리하고 싸웠습니다. 씩씩거리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도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쓰다듬으면서 애야. 네가 잘못한 것 없단다. 그 여자가 아주 못된 여자였거든, 개는 원래 그래. 네가 뭘 잘못했니. 이렇게 쓰다듬어주시면 그럼 여러분 아마 끔찍이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주님은 동네 아줌마가 여러분들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편들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싸움을 하다가도 자기 하고 친한 사람의 역성을 듭니다.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아주 순전한 영이시고 특히 성령님은 그야말로 온전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온전해져서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해져서 하나님 앞에 정말 순전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 편인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이 잘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슬기 하나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살다가보면 여러분들이 비난을 받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과정 속에는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것을 모두 자기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들으면서 자기에게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강물이 도도히 벌판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그러면서 그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흘러갑니다. 사실은 우리들은 우리들이 생긴 그 이상의 삶을 살수도 없고 이하의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는 우리 됨됨이대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항상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갖는가 하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은 무엇에 아름다움이라고 그랬습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영혼으로 더 온전케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지금 당장은 우리의 인생에 흐르는 강물이 바뀌지 않아도 세월이 지나면 바뀝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사도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좋은 것이고 이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위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치료제입니다. 비록 옳은 일을 위해서 고난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고난만 많이 겪게 되면 그 사람이 망가집니다. 뭐가 필요한가 하면 위로가 많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도 엄하게 기르는 집안이 있는데 공식이 없습니다. 어느 집안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주 엄하게 길렀더니 똑바로 잘 되었더라. 그리고 또 어느 집안은 엄하게 길렀더니 이 자녀들이 큰 다음에 자기의 엄마 아빠도 안 쳐다보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죽어라 하고 벌어서 입히고 공부시키고 그랬는데 한다는 이야기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부모는 황당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교육이 올바른 교육인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됩니다. 그런데 엄하게 길렀기 때문에 교육에 성공했다는 집안은 뭐가 있었는가 하면 아이들을 엄하게 기른 것을 사람들이 보고 왔지만 사실은 거기 살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엄한 교육이 그 아이들을 사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냥 때리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교육의 철학이 아무리 훌륭하고 좋아도 그것을 아이들이 동의를 해주어야지 교육이 됩니다. 동의해주는 것은 머리가 동의해주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동의를 해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부모가 나를 교육시키는 것은 훌륭한데 이성으로는 도저히 흠집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에서 동의가 안 됩니다. 그러면 보고 있다가 부모가 뭐 하나 잘못하면 ‘지는’ 이런다고 속으로, 그리고 한번에 다 날려버립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이런 성령님의 위로가 필요한데 그런데 어떻게 되어야지만 이렇게 위로가 넘치는가 하면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 때 그때 성령님의 위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육체를 성령님의 전이라고 표현하는데 성령님이 계시는데 성령님이 계시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 계시는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정말 깨끗하고 순전해지면 주님이 우리 안에 풍성히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쉬운 말로 은혜가 충만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고집 세고 방탕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러면 성령이 그렇게 충만하게 계시지 않습니다. 위로의 주체는 성령님이신데 성령님을 계속 근심시켜드리는 삶을 살고 그런 마음속에서 삽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충만하게 계시지 않는데 위로는 받고 싶습니다. 그 위로가 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가운데서 주님의 위로가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이 안에서 계속해서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들이 기도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럼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흡족히 받으면 성령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눈물을 뿌리며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고 내일은 죄 짓고, 모레는 의심하고, 글피는 사람과 싸우고 그들을 의심하고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속해서 충만하게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온전케 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온전해진 사람은 없지만 점점 더 온전해져가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마음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오래도록 지속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뒤집어질 정도로 은혜를 받는데 얼마 안 되어서 뒤집어지듯이 쏟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은 온전케 되기 위해서 노력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놀랍게 받아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말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고,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흘러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가게끔 마음에 생각이 방탕해서 미끄러지도록 내버려두고, 미워하고 싶을 때 미워하고, 그리고 좋아하고 싶을 때 아무것이나 좋아하고 이런 식으로 살면 성령님이 아무리 충만하게 우리 안에 오셨어도 며칠 안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그런가 하면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날마다 진실하게 참회합니다.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사랑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지만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때 그는 날마다 위로를 받습니다. 그게 이 위로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많이 성화된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많고 빠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하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서 마음이 막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제가 이런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번민스럽고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면 주님이 위로를 해주십니다. 그 위로를 받고 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늘 이기면서 하나님 편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한번 사람을 미워하면 가슴속에서 놓치지 못합니다. 그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칼질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도 망가지면서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의 죄가 너를 망가트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성화의 삶을 살고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위로가 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위로를 받고 이런 위로자의 삶을 살아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깨어지는 자를 위로하심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7)
오늘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고난에 참예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 앎이라.” 무슨 뜻인가 하면 고난에 참예한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이제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게 된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아주 강력한 희망입니다. 아시아에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했는데 너희가 꼭 우리가 당한 고난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이제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쭉 이야기합니다. 왜 지금 사도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고린도 전서에서 교회가 많이 잘못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야단쳤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고린도 전서에 보면 내가 곧 갈 텐데 가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도가 마음이 상하고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분노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돈이 많은 항구 도시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이 많으면 이기심에 빠지게 됩니다. 저만 알게 됩니다. 돈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기 사랑을 자극하니까 더더욱 사람을 각박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살면 사람들이 여유가 많은데 지금처럼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맨바닥에서 자기의 머리를 의지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돈을 벌고 경쟁을 해야 하는 이런 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째든 그런 도시였고 또 고린도 교회의 정신 가운데 하나는 파당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파당을 만드는 것이 결국은 세상에서 흘러들어온 정신입니다. 도시 안에 이제 자기의 철학적이 견해에 따라서 사람들이 추종자를 막 따라다닙니다. 그런 정신이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또 항구도시는 옛날부터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합니다. 똑같이 그런 문제가 있는데 교회 안에도 그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아주 분노하면서 야단을 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났는데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편지를 받고 저희가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교인들 일부 중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회개를 많이 하고 그 회개를 하는 과정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가 하면 16장에 넘어가면 너희 중에 누구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라. 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지순한 사랑이 없으니까 이제 그런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런 타락한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이러면서 심지어는 그리스도파 하면서 파를 만들고 하는 이제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니까 사도가 막 분노하니까 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그래서 사도가 그 다음에 고린도 후서를 쓸 때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렇게 회개하고 사람들이 가슴아파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교회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편지를 쓸 때 마음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혼을 내, 그러고 갔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이 고난이라는 것이 무슨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죽도록 고생하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서 이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참회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참회에서 오는 고난인데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를 향한 소망이 견고하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옛날에는 대게 실망해서 걱정했는데 그게 뒤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저게 교회가 될까? 꼴이 저래서 저들이 진짜 신자가 될까? 심지어는 그 정도가 아니라 사도가 막 진짜 사도일까? 이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이게 은혜가 떨어지면 막 방자하게 이를 때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분이나 나나 하나님 앞에 다 한 마리에 양에 불과하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교만한 것을 아십니까? 아주 방자해지고 그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이 태도나 이것들이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방자해집니다. 자기는 의식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면 너무 방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결국은 다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은혜로 자기가 깊이 깨트려져서 그래서 엎드려서 자기 자신이 이런 존재밖에 안되는 점에 대해서 너무 아파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왜 이렇게 살까? 하면서 자기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있어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린다는 깊은 뉘우침과 자기 깨어짐, 이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그를 높여주셔도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라집니다. 그러면 오만방자해집니다. 굉장히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방자하기 이를 때 없을 정도가 되면 그렇게 방자하고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뭘 합니까?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생긴 것이 아름답지, 추루하고 더러운 영혼으로 섬긴 것은 그 섬김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에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린들 짐승의 고기를 원하겠는가. 내가 피를 원하겠는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런 것 원하시지도 않으시지만 혹시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당신의 것인데 당신이 잡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전에 그랬습니다. 오만방자하니까 오죽했으면 바울보고 자기들이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저 인간이 사도일까, 아닐까? 왜 예수님이 직접 세우시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면서 이제 말씀의 원천부터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사도가 화가 날만 합니다. 그래서 엄청 강도 높게 그들을 책망합니다. 내가 가면 가만두나봐라. 그래서 강력하게 책망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이렇게 방자합니다. 자기는 모릅니다. 자기는 자기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와서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깊이 근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고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뭐 사도 바울과 보따리를 싸서 다니면서 막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한 그 이야기 아닙니다. 혼낸 것입니다. 그랬더니 고난에 참예한 것 같이 뭐 좋은 고난은 아닙니다. 진짜 고난을 어떻게 살아왔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주님, 저 어떻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고난을 참 많이 받았구나. 좋아서 피식 웃으면서 내가 고난을 받았구나. 예수님이 고난은 받았는데 종교가 좀 그렇다. 무슨 고난인데 매일 야단맞는 고난을 받았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는 그것을 고난에 참예했다고 불러줍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야단칠 때 그들이 마음상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책망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고 깊이 아파하는 것,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아파하면서 자기를 깊이 뼈저리게 뉘우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파하고 깊이 뉘우치면서 그때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기 깨어짐의 고난입니다. 자기 깨어짐의 아픔입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참예하는 고난과는 다른 자기의 일행들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그 아시아에서 당한 그 고난을 그 교회 교인들이 당한 고난과 대조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 고난은 단순한 자기 깨어짐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섬기다가 당하게 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깊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고난을 받아야겠습니까? 둘 다 싫어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우리 안에 지순의 사랑으로 꽉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우리들이 받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이 두 번째 고난에 참예하게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을 주의 은혜로 회개를 통해서 깨끗이 씻고 영혼에 추루한 것을 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다 버리고 그리고 순결해지고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넘치고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주님이 우리를 정해주신 그 질서 속으로 돌아가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까요? 그 다음에 살아야 할 삶이 바로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새벽에 나온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사십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두 번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묻고 싶습니다. 계속 그렇게 사실 것인가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험해봤는데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데 계속 그렇게 살면 똑같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안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현실하고는.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모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면 계속해서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똑같이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주셨더니 행복해지셨습니까?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셨습니까? 오래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셨나요?
세 번째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는 현장이 있습니까? 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 삶의 자리에서는 다른 소망은 없고 주님의 영광만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까 늘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삶의 자리가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제가 물어봅니다. 그런 삶의 자리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없다면 아니 그런 삶의 자리가 없다면 그러면 그 삶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는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마음이 까리따스의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마치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자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게 될 때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정말 이렇게 고난을 받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까?
사람의 영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영혼이 아름다움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냥 살다가 힘드니까 은혜를 원하고 은혜주시면 다시 또 제 위치로 돌아가서 살다가 털어먹고 그냥 세상을 사랑하며 살다가 견디다, 견디다 힘들면 와서 또 은혜를 구하는 이런 삶은 돼지가 씻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삶입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런 삶을 사는 동안에 그 사람의 영혼은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계속 시궁창에 구르는 것 같은 아주 더럽고 추루한 영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다른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세상을 얼마나 오래 사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지위를 누리는가, 시집가는가, 장가가는가, 아버지가 돈이 많은가, 공부를 많이 했는가. 그것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오히려 인간존재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에 달린 것입니다. 인간의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영혼이 얼마나 완전한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영혼 하나가 완전해지는 비결이 수만 가지가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세상의 지식이 좀 모자라도 높은 지위 없어서 매일 가난하게 살아도 육신은 다 늙어 후패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고 육신의 병마가 나를 엄습해서 이제 주님께 가까이 갈 날이 다가왔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이 주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있을 때 그 영혼이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세상에서는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아도 주님의 눈에는 너무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순결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이렇게, 이렇게 예배해야한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십니다. 그런 아름다운 영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서 이스라엘 왕을 설득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가서 보니까 이새의 아들이 대단한 아들들이 많습니다. 기름 부으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아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내가 그를 버렸다. 또 고르면 아니다. 또 고르면 아니다. 아들이 다냐? 물어봤습니다. 아버지가 하나 또 있는데요. 그때서야 생각이 난 아들이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 붓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 똑같이 그 집안의 아들인데, 그리고 육체의 아름다움으로 치면 다윗은 짐승이나 치던 목동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우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하도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합한 것을 느끼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합치된 것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 신자의 참다운 행복은 이렇게 합치되는 것, 신자의 참다운 행복은 이렇게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합치되는데 영혼이 추루하고 더러우니까 합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그렇게 순결한 영혼으로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다 받으실만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진짜 고난은 그런 영혼을 가지고 넘치도록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를 잘 섬기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는데 거기에서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당할 때 시련과 환난이나 고생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위로를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큰 위로를 경험하고 산 사람들은 대게 누구인가 하면 마음에 지순의 사랑을 품고 자신을 다 드려서 주님께 목숨을 걸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일이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 목숨을 걸고 드리는 그런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 생명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그러면서 주님을 위해 뜻을 세우고 넘치도록 고난을 받습니다. 그 위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위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큰 집을 주시고, 돈을 왕창 주시고, 세상에서 출세하게 하시고 그런 것을 통해서 오는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자에게 주시는 위로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위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기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고난의 참예하는 사람, 그 고난에 참예해서 예수 죽음이 기운을 날마다 맛보는 사람, 그래서 정말 예수의 죽음이 자기 몸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그런 위로를 넘치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안 됩니다. 주님을 저렇게 목숨 버려 섬기면 위로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섬긴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가 나오는가 하면 잘못해서 사도가 야단을 치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회개할 때 그렇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난이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보시되 그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결국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의 길에서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욕하는 삶을 살던 사람이 깊이 돌이켜서 그래서 마음이 찔림을 받고 아파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위로가 필요한 고난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에게만 있는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책망을 받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뭐라고 그런가 하면 내가 고난에 참예한 것과 같이 너희가 고난에 참예했구나. 너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너희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 살던 그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삶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아파하니까 주님이 그것을 고난이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또한 위로에도 그러할 줄 아노라.” 자신의 죄를 깊이 참예하면서 아파하는 사람들,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아픔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신실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마음을 바치는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부족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는 그 아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은 원합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주님이 위로하실 수가 없는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다 설교할 수 없지만 그 중에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그 가슴 아픈 뼈저린 고난도 없고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는 그 회개에서 오는 고난도 없다면 주님이 위로를 안 해주신다고 그러는데 왜 위로를 안 해주십니까? 그가 비록 그렇게 회개하지 않고 또 그렇게 정말 주님을 위해서 안 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닙니까? 좀 일단 위로를 해주시면 그 다음에 또 회개할 줄 누가 압니까? 우리 논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 안 하시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불순종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깊은 후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자기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가운데서도 항상 기뻤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어있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차야 될 사람이 세상사랑으로 가득 차서 살아가는데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 때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렸지만 하나님 마음 아플 때 자신들도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죄에 대한 미움도 없고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린 깊은 후회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위로를 해준다고 하면 위로받은 다음에 어디로 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가던 길을 더 힘차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러분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을 사랑합니까, 안합니까? 안합니까?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놈이 가서 새 옷을 입혀났더니 비 오는 날 뛰어나가다가 왕창 미끄러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 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외출하려고 예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막 달려오면서 그날따라 애가 왜 그렇게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 그리고 달려오면 오! 우리 아들 하면서 끌어안고 그 비싼 옷을 세탁소에 보내겠습니까? 뭐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 그러고 달려오면 안돼! 들어오지 마. 안아주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오지 마. 댓돌에 서있어. 가만히 있어. 그리고 가서 수건을 가져와서 거기서 옷을 벗고 발가벗고 들어오라고 하면서 목욕탕에 들어가게 합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위로를 안 해주시는가 하면 자기들도 그러면서 뭘,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혼을 안아주십니다. 추루한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는 것밖에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서 아름다운 영혼이 될 때 주님이 오시지 말라고 그래도 오셔서 사랑해주십니다. 그러면 결론을 내겠습니다. 우리의 위로가 어떻게 온다고 그런 것입니까? 진실하게 참회할 때 그때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 주님이 언제나 그렇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와 악함을 깊이 고백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 온전히 뉘우치면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크신 사랑과 위로를 깊이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거기서 감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 자기가 다시는 이런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회개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면 회개하고 나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꽉 채워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게 회개의 특성입니다. 회개하고 나면 주님을 잘 섬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회개하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주의 깊어집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그리고 진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솔하지 않게 살아야지 되겠구나,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게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경회 시간에 진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의 위로의 사랑이 있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없어서 모두 내 앞에 있는 것 같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모두 가진 것 같은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을 그렇게 붙들고 고집을 쓰면서 가도 영혼에 참된 기쁨이 없잖아요. 하나님의 위로에 사십시오. 누구든지,
지은 죄 흉악하나 눈같이 되겠네
하나님이 누구든지 모두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참회하는 영혼에 다가가셔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로와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위로와 사랑이 넘치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선을 좇게 위로하심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2:17)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가보면 위로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이렇게 힘이 있어야지만 활동하고 움직이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힘이 소진되게 되면 그가 살아서 움직이기는 움직이지만 그러나 그 삶의 활기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제가 전도사 때 가르치던 학생 가운데 운동선수가 설명을 하는데 무슨 운동을 하든지 간에 가장 기본이 체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체력 훈련을 엄청나게 시킨다고 합니다. 탁구선수였는데 탁구공 하나가 5그램밖에 안 되는 작은 공인데 하루에 1-20킬로씩 뛴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렇게 운동을 해서 체력을 보강하는데 그렇게 운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 목적인데 첫째는 그렇게 운동을 해야지만 다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입고 다치는 경우가 불가항력적으로 다른 선수가 밀고 그러니까 다치는 경우도 많지만 주된 원인 중에 하나가 체력이 떨어져서 다친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힘이 많아야지만 충분히 행동을 해서 자기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데 체력이 떨어지게 되면 그러면 자기 몸을 안전하게 지탱하려면 힘을 써서 균형을 잡고 발을 움직이고 그래야 하는데 체력이 떨어지면 그것을 될 수 있으면 적게 하려고 하는 습성이 사람 몸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힘이 넘치면 하지만 힘이 좀 없으면 그만두지. 그리고 욕망을 꺾습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체력이 넘쳐야지만 세밀한 기술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세밀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대게 몸놀림이나 동작에 정성을 쏟아야 되는데 정성을 쏟아야지 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고 아무렇게나 하지 말고 아주 세밀하게 해야지 하는 지시를 받으면서 몸이 그것을 움직이려고 해도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렇게 비싼 것은 쉽지만 다른 것을 건드리지 말고 이것만 가져오라고 그러면 힘이 듭니다. 그런 식으로 체력이 충분해야지만 다치지도 않고 세밀한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사는데 우리 안에 에너지가 가득 넘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주 세밀하게 섬길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대게 신앙생활을 은혜가 떨어지면 막 합니다. 그다음에 제일 뚜렷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생각을 잘 안 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이렇게 좀 깊이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 이렇게 하면 내 영혼에 유익이 있을까? 내가 이렇게 선택을 하면 나중에 이런 결과가 어떻게 해서 돌아올까?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은혜의 에너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뭐겠습니까? 원래 자기 자신에게 더 정성을 많이 쏟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더라. 누가 어떻게 되더라. 굉장히 사람이 무정해집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무정해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정해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은혜가 떨어지고 침체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무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게 지금 저녁때 계속 설교하는 원리가 여기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교통적 사랑이고 자기 사랑은 정말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있을 때는 사람이 교통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을 때는 교통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관심이 제일 많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고 어떻게 되었을까? 안되었다. 불쌍하다.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제 은혜가 사라지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애써서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하면 그렇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 사라진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자, 신경을 쓰자. 그게 잘 안됩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자기중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까리따스의 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만큼 부당한 자기 사랑이 자기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 삶을 바꾸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은혜가 다시 그 사람을 가득 채워주는 것, 그것보다도 더 큰 위로가 그에게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사라지고 나서 그다음에 뭐 좀 어떻게 다른 것으로 채워 보려고 하는 것은 배고픈데 모래를 퍼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지 모래를 퍼먹는데 그게 해결이 되겠습니까? 목마른데 소금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기를 원하는데 어두움 속을 걸어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성경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잠깐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면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이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치적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 지순한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 차면 다른 사람이 와서 그렇게 너만 위해서 살지 말고 내가 요즘에 굉장히 힘든데 나도 좀 생각해. 그렇게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까리따스의 사랑이 넘치게 되면 여러분 같은 죄인들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그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 자체로 꽉 찬 분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서 하나님 자신만 신경 쓰지 마시고 저도 좀 신경 좀 써주십시오.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그런 식의 사랑이 아니라 까리따스를 나눠주셔서 같이 교통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까리따스로 꽉 차신 분이니까 여러분들도 지금 대답을 했는데 여러분 자신이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나님 자신이 원래 그런 분이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근거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위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소망을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위로를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이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참된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셔서 이 변천하는 세상을 보면서 실망하고 낙담하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영원한 하늘나라, 변치 않는 주님의 나라를 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면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성부, 성령, 성자의 역할을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로는 성령님이 위로하시고,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고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을 모아놓은 것 같은 이런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왜 그것을 못 느낍니까? 왜 똑같이 곤고한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보여주시지 않고 그래서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궁금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대답은 하나님이 사랑과 넘치는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지만 그 위로와 소망과 사랑은 누구만 느낄 수 있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선을 찾아가는 사람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선이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창조의 목적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이것이 전부다 일치합니다. 하나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쪽을 향해 가는 것이 선함을 가진 상태입니다. 그쪽으로 향해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런 사랑과 위로와 소망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한 번 더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안 보여주실까요? 내가 비록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도 낯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위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면 그러면 내가 그 사랑에 감흡해서라도 내가 가던 길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돌이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하면 두 가지 일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과 맞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일을 기도해야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을 기도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욕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면 기도라는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부탁을 적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그러니까 선물을 많이 보내면서 꼭 한번만 도와달라고 그랬더니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 이런 것이 모욕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명시적인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고 하나님 앞에 그런 식으로 기도하다보면 자기 자신이 속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런 일을 굉장히 많이 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을 하나님께 하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하는 행동이나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이 여러분 자신의 성품하고 안 어울리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앙케이트를 했습니다. 어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상대로 아빠에게 제일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 그랬더니 술 먹고 수염 긴 채로 와서 뽀뽀하는 것, 너무 싫습니다. 그게 1위였습니다. 술 냄새도 아이들이 싫은데 밤에 오니까 아침에 면도를 하고 가도 자랍니다. 하루에 0.2밀리 정도 자랍니다. 하루 바빠서 못 깎으면 0.4밀리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애들이 얼마나 살이 야들야들합니까. 거기에 사랑한다고 막 문지르는데 지는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애는 털 고문입니다. 수염이 얼마나 따가운데 막 문지릅니다. 그러니까 너무 싫어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빠에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1위가 그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아빠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싫습니다.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술 냄새가 자기 성품에 안 맞고 따가운 수염으로 부드러운 뺨에 닿는 것도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안아주어도 애들이 가슴을 밀치면서 튕깁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품에 안 맞는 행동을 하니까 아빠를 향한 사랑은 그냥 있는데 그것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비유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설교시간에 하는 비유는 미리 생각하고 올라온 적이 20번이면 1번 정도 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는 또 헛방을 칠 때도 있는데 나도 하면서 뭘 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가 있는데 이것은 좀 괜찮네요.
두 번째는 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하겠으니 찔리십시오. 이게 좀 속된 말로 우리가 신자지만 우리는 인간이라 화장실에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틀립니다. 여러분, 이 새벽에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다급한 나머지 뭔가를 소원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틀립니다. 막 다급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응답만 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저 한번만 밀어주십시오. 주님이 아니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좀 도와주시면 십일조 생활도 하고, 교회도 잘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우리 부부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열심히 섬기고 그런데 이게 성이 안 차니까 우리 아들 신학교 보내고, 그 밑에 사모 만들고, 그 밑에 다시 선교사 만들고 하면서 하다가 안 되니까 애들까지 다 도매금으로 넘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루어주셨습니다. 까먹었습니다. 어차피 그때 믿음으로 한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되었나. 일이 되려고 하니까 된 것이지. 웃지 않는 것을 보니까 상당히 찔린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매우 너절하게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보면 교회에 무슨 건축헌금 같은 것을 덜컥 해놓고 휙 가버린 사람들이 너절하게 많습니다. 그런 것 없어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영혼을 볼 때 너무 불쌍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이사 갈 때도 전기세, 물세, 슈퍼에 밀린 외상값 정리하고 가야지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너무 너절하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럼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자,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돌아서지 않습니다.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끊임없이 거스르면서 삽니다. 그래서 곤고합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로해주시면 가던 길을 열심히 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가던 길을 열심히 가는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내가 그만두려고 그랬는데 증명을 해보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명백하게 주님을 거스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가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불순종하며 가던 길이 사업을 한다든지 그런데 이렇게 쭉 가는데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 사업이 잘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완전히 고무신 거꾸로 신은 게 아니니까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지만 그래도 큰 사업을 앞에 놓고 걱정이 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 한건 하도록 저를 밀어주십시오. 주님만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도와주셔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데도 일이 잘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일이 잘 되니까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나님, 먼저 이렇게 주님이 위로를 해주시니까 제가 돌이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돌이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돌이킵니까? 태연히 죄악으로 걸어가던 인생이 그 다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갑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위로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멍청합니다. 천치입니다. 바보입니다. 깡통입니다. 위로받을만한 마음의 상태가 되고 위로받을만한 자리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쏟아부어주십니다. 왜 하나님이 원래 그런 교통적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아모로 쏘키아 리스라고 그러는데 교통의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의 성품 자체가 그냥 계실 수가 없습니다. 병든 자, 고통 받는 자,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사람, 온 사람들에게 찾아 가서 나누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전 맨 처음에 회심하고 나서 너무 놀라웠던 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미사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경험 때문에 사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추적, 미사일이라는 놈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십시오. 비행기가 가는데 탕! 하고 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번에 휴대용 미사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을 만들어냈는데 세계에서 몇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만들었습니다. 휴대용 미사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크지도 않고 요만합니다. 그것을 어깨에 메고 둘이서 쏘게 되어 있는데 탁! 집어넣고 1.5볼트정도의 건전지 같은 것으로 작동합니다. 확 하고 쏘면 확 하고 미사일이 날아가는데 비행기가 4-6킬로밖에 있으면 못 맞춥니다. 그런데 4-6킬로 안에 있으면 그래도 요만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4킬로가 떠있는데 그런데 어디 숨어서 탕! 쏘면 미사일이 날아갑니다. 요즘에 개발된 것은 어떻게 개발하는지 모르는데 맨 처음에 외국에서 개발했을 때는 거기 선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이게 날아가면 비행기가 움직이면 저쪽에서도 전투기다 그러면 그런 정도는 다 감지상태가 되어 있어서 미사일이 발사되면 압니다. 그래서 피합니다. 이 미사일이 쏜 다음에 망원경이 있어서 비행기가 저기 있으면 따라갑니다. 여기 매달린 것으로 이렇게 움직입니다. 저기 가던 미사일이 보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움직이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이면 저쪽으로 계속 보고 있으면서 미사일이 계속 돌다가 마지막에 탁! 하고 맞혀서 박살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미사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속 추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싫어합니다. 끊임없이 추적합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주님을 피해 도망치는 동안에는 주님의 사랑이 아무리 가까이 나를 추적하고 있어도 주님의 사랑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돌아서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먼저 탕자를 발견합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아버지가 거기 계속 기다리고 계시다가 아들이 오니까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 가서 끌어안습니다. 정면으로 둘이 같이 끌어안은 것입니다. 보아하니 아버지는 재산도 있고 능력도 있으니까 무슨 사립탐정 같은 것을 붙이면 그까짓 것 자기 아들 어디에 있는 것을 못 찾아내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가서 아들이 계속 허랑방탕할 때 그때에 집에서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서 뒤에서 아들을 꼭 끌어안으면서 ‘누구 게?’ 이렇게 한번 하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누구 게?’ 그러면 아들이 쳐다보면서 아빠잖아. 여기 웬일이요. 돈도 남아있겠다. 그러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갔을 것입니다. 돌이켜서야 합니다. 그러면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기가막합니다. 너희를 위로하셔서 모든 선한 일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을 하나님이 견고하게 해주시고 또 말을 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주님께 덕이 되는 말, 하나님에게 딸린 영혼들을 섬기는 말, 허망한 풍설이나 허탄한 신화를 좇지 않고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그들을 세우는 말, 이런 것을 함에 있어서 너를 하나님이 견고하게 해주시겠다. 그것입니다. 이게 입증이 됩니다. 위로하시는 목적 자체가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계속 가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선을 향해 찾아가는 사람의 이 삶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일할 때 그때 그를 격려해주면 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가끔 교역자들보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심방은 우리들이 늘 연약한 자, 병든 자, 쓰러진 자,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 곤고한 사람, 죄 가운데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심방의 필요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심방하는 것이 심방의 주 임무인데 때로는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도 심방을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주님을 위해서 많이 애쓰는 사람들을 심방해서 격려하면 위로를 받으면서 달려가던 길로 더 확신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원리가 나옵니다. “너희를 위로하사 선한 일에 굳게 하시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 하라.”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가 권면했던 내용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남자답게 서서 강건하여라.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라.” 하나님이 위로해주시는 목적은 선을 향하여 굳세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위로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위로의 자리로 돌아가면 언제나 주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래서 넘치도록 위로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삶과 말과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돌이켜서 그래서 주님의 위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