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첫사랑을 버림(호9:10-11) 2008.10.20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
2. 신지식을 떠남(호4:6) 2008.10.21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6
3. 열정과 냉정(호7:8-11) 2008.10.22 가을말씀사경회(저녁) 32
4.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잊음(호13:4-6) 2008.10.2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50
5.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호11:7-8) 2008.10.24 가을말씀사경회(저녁) 63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첫사랑을 버림
호 11:10-11
I. 본문해설
II. 옛적의 사랑(10a)
상기하는 '사랑의 때'
① 애굽에서 부르심 : 하나님의 일방적 기쁨
② 가나안 정복의 때 : 믿음의 화합
III. 첫사랑을 버림(10b)
A. 바알브올에 헌신함
B. 하나님 없는 번영의 꿈
1.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 함
2. 만복의 근원 하나님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A. 하나님을 보여줌 : 하나님과의 동행
B. 사라진 영광
C. 그래도 '에브라임'
V. 결론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2
신(神) 지식을 떠남
호 4:6
I. 본문해설
II. 이스라엘의 영적위기(1-5)
① 신앙의 덕이 사라짐
② 땅이 저주에 직면함
③ 종교의 질서가 무너짐
III. 영적위기의 근원(6)
A.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
① 위엄 → 겸비
② 사랑 → 자비
B. 지식의 중심성
① 하나님께 대한 지식
② 삶의 의무에 대한 지식
C.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3
열정과 냉정
호 7:8-11
I. 본문해설
II. 이스라엘의 영적상태
A. 열방에 혼잡됨
B. 뒤집지 않은 전병
III. 세속의 열정과 종교의 냉정
A. 영적 힘을 잃음
B. 지혜 없음
C. 하나님께 교만함
D. 이 세상에 비굴함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4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잊음
호 13:4-6
I. 본문해설
II. 형통 속에서 주를 잊음
A. 광야의 하나님
B. 가나안의 하나님
III. 번영 속에서 잃는 것들
A. 하나님을 의지함
B. 구원을 기뻐함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5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호 11:7-8
I. 본문해설
II. 물러가는 백성들
A. 물러간 내용 : 신앙
1. 사랑에 있어서
2. 지식에 있어서
3. 의무에 있어서
B. 물러간 방식 : 결심
1. 돌아갈 수 없는 길
2. 은혜와 의지
III. 부르시는 하나님
A. 선지자를 통하여
1. 위에로 부르심
2. 말씀으로 부르심
B. 불붙는 긍휼로써
1. 아드마와 스보임
2. 버릴 수 없는 마음
3. 스스로 돌아서는 사랑
IV. 결론 : 하나님 백성의 행복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1.첫사랑을 버림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I. 본문해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주전 약 8세기경이었습니다. 8세기 중반에 선지자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10세기에 이제 그보다 더 오래전인 10세기에 남왕국과 북왕국이 갈라진 가운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는 구약에 역사적으로 여로보암 2세 왕의 치세였습니다. 여로보암2세는 세속적으로보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몇 명 나타날까말까 한 아주 탁월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주 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토가 확장되었고 경제가 발달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국가였습니다. 백성들은 무역을 통하여 아주 살기가 좋아졌고 번영을 누리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왕국이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그들 속에 있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들은 점점 부패하기 시작했고 호세아 선지자는 4장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며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눈물로 증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특이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의 부름을 받을 때에 디블라임의 딸 음란한 여자 고멜에게 장가를 가도록 하나님께 지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음란한 여자를 사랑하게 하심으로 끊임없이 남편인 호세아를 버리고 방탕하는 그 여자를 찾아나서는 호세아의 경험을 통해서 호세아 자신에게는 불붙는 뼈속깊이 사무치는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또 호세아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난 간음한 여자와 같은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II. 옛적의 사랑
호세아 선지자는 이 9장에서 옛적 사랑의 때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때에 광야에서 포도를 만난 것같이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포도처럼 소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나주셨다든지 좋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든지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포도는 그 당시에 물이없는 광야에서 포도가 난다고 하는 것은 참 힘든것이죠. 만약에 그런데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는 거친 광야에서 만약에 이 포도나무를 만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곡기도 해결되고 그 포도의 즙으로 음료도 해결될 수 있는 아주 반가운 그런 만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일방적인 사랑의 은총으로 좋을 것이 없고 탁월할것이 없는 이스라엘백서들을 그렇게 좋게 여기시며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뒤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처음 열매를 맺는 그 광경은 나무를 심고 애쓴 사람에게는 말할수 없이 커다란 감격입니다. 길가에 있는 나무에서야 매달리는 열매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처음것인지 두 번째 것인지 알수 없지만 자기가 애지중지 나무를 심어놓고 그리고 철이 되어서 그 나무에 열매가 매달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비한 다른 탁월한 장점같은거 없었습니다. 그런것들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발견하려고한다면 우리는 실패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백성이 된 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끊임없이 버리고 이방신에게로 달려가는 종자들이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옛적의 사랑을 회고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기뻐하시고 좋아하실때를 상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매우 기뻐하셨던 때가 두 번 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할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두 번을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예하는 것처럼 정겨운 기간을 가지시는 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애굽에서 고난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출애굽시키신 그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이TM라엘백성들에게는 무엇하나 특벽한 것이 없었습니다. 애굽의 치하에서 그저 남의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노역에 종사하는 고달픈 포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 백성들을 때가 되매 불러 일으켜 민족으로 세우시고 그리고 그 민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보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발달한 문명의 중심지였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패괴히 행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거기로 인도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심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문명한 세상에 알려 만천하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꿈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허접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향한 꿈을 가지고 하나님은 말할수 없는 기쁨으로 이 백성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짝사랑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셨고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방적인 기쁨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퍼부어주시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애굽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강한 왕 바로를 꺽으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그리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르는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들이 시내산에서 함께 수경을 하며 11개월동안 애굽에서 묵었던 모든 더러운 숩속들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그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한 기쁨을 거룩과 영광가운데 표현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끊임없이 하나님앞에 범죄하는 악함을 가진 종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렇게 이 백성들을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의 많은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함께 보살펴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앙의 길을 고집하는 많은 불신앙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죽어갔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조상들이 하나님이 인도하에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 기적의 영도자인 모세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눈에는 한없이 작아보이고 어려보이는 새로운 자신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인도아래 가나안땅을 정복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제일먼저 실험하신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기적을 보여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면 하나님이 그 믿음뒤에 기적이 뒤따르게 하심으로써 기적을 통해 믿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믿음을 통해 기적을보는 복음적인 신앙으로 이들을 바꾸어 놓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들어간 때부터 약 5년정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훌륭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크고 작은 불신앙의 사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광야에서 나온 이래로 이제 이때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여호수아를 따르며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화합했던 때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때에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기억하셔서 옛적의 사랑을 나누시던 때로 하나님께서는 기억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사랑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사랑의 경험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회심전야에 말할수 없는 번민과 고통속에서 고통하고 괴로워할 때 여러분들에게 무슨 선함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가운데 한사람 여러분들을 선택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여러분에게 당신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가운데 한사람 택하여 여라분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회심하게 된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애가운데 어느 한순간 이렇게 가나안 정복의 때처럼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 회심 때에는 물론 그러했겠지만 꼭 첫 회심 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변화 될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한동안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믿음으로 화합하며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옛적의 사랑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 옛적의 사랑의 때 생각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나누었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때, 여러분과 함께 연예하고 사랑을 나누던 그 친밀한 교제의 때, 그 때를 하나님께서는 상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 계셔서 여러분들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여러분들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III. 첫사랑을 버림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저희가 바알브올에게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바로 바알브올에게 헌신한 것이었습니다.
A. 바알브올에 헌신함
이 바알 브올이라고 하는 것은 바알이 원래 신이고 브올이라고 하는 것은 모압지방에 있던 한 장소에요. 브올이라고 하는 곳에서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바알브올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이 바알 신은 농경 사회의 풍요의 신이에요. 원래 바알이라는 말 자체가 주인이다그런 뜻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신앙을 가지면 안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해 들어가던 시기에는 거기가 중근동지방이었는데 그 중근동지방에서 가지고 있는 신관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신마다 자기 구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바다에는 바다의 신이있고 그리고 또 가나안에는 가나안의 신이 있어서 그 신이 그 사회에 복을 준다고 생각한거죠. 이스라엘 백성은 평생을 종살이하고 광야를 40년 돌다고 온 그러한 방랑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 그 자체가 유민이라는 뜻이에요.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다그런뜻이에요.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집을 짓고 살고 땅을 일구고 고정된 소득이 있어야지만 집에다 가 치장도 하고 뭐라도 하지, 아니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오늘이라도 텐트벗고 출발해야되는데 거기다 뭐 예쁜거 해놓으면 뭐하겠어요?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가나안에 정복을 하고 들어가 보니까 상상할수 없이 발달한 문명을 구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잘 사는 삶, 이면에는 바로 농경문화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 농경문화 뒤에는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좌우하는 그런 신이 있었어요. 그러면, 오늘날도 말하자면은 시골사람이 뉴욕에 간듯한 기분이었을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잘 사는 나라에 딱 들어가면 주눅이 들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는 건 모든지 다 좋아보이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가진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광야생활하는 길에 우리를 인도하셨지만 여기에는 이 나라 땅을 통치하는 바알이라는 신이 있으니 여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신다고 믿지만 굳이 우리가 오래동안 이 땅을 다스려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주었던 바알과 맞서고 비유를 상하게 하고 다투어서 우리가 얻을수 있는 유익이 무엇이겠느냐 그러니 하나님께도 불순종하지 말고 바알의 비유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가 양다리를 걸친다면 그러면 신앙도 잃지않고 번영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한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그렇게 변심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가나안 정복을 위한 광야의 길을 떠나기전에 십계명을 주셨던 것이에요. 그런데 인제 이렇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신앙이 이제 부패하기 시작한거에요. 그 독특한 신앙이 뭐죠? 그게바로 유일신 신앙이야. 유일신 신앙이에요. 그 유일신 신앙은 어떤것이냐하면 하나님이 이세상에 있는 모든 신중에서 제일 힘이 센 신이다그런뜻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에는 신이 없다라는 사상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것이거나 인간들이 지어낸신이다그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의 통치아래 있는 허무한 것들이다라고 하는 것이 유일신 신앙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힘은 바로 그 유일신 신앙에서 나왔던 것이에요. 그신앙으로 홍해를 건너고 그 신앙으로 요단강을 말리며 그 신앙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그신앙으로 그 나라의 많은 군대들과 이방의 족속들을 내어 쫓고 도저히 할수없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나 이들이 이제 그 모든 일들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자 부패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점점 타락하고 역사의 비탈길로 내려가고 있을 때에, 고고한 신앙의 외침을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담대하게 외치기를 ‘너희는 오늘날 섬길자를 택하라 너희들이 강건너 저편에서 니 조상들이 섬기던 그 조상을 섬기려느냐 아니면은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은 섬기겠노라’ 아멘.응?
그런 유일신 신앙을 고고하게 외쳤던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 이방의 신인 바알을 왜 그렇게 섬기려고 그 바알브올에게 헌신했을까하는 궁금즘이 떠오르는 것이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의 맥락을 이해해야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바알이라고 하는 신은 농사의 신이에요. 그당시에 복이다 라고 하는 것이 뭐냐하면 다신이이에요. 즉 그당시에 발견되는 여인들의 상을 보면, 여인들의 신들이 여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엉덩이 펑퍼짐하고 그리고 젖가슴이 아주 큰 심지어는 여기에 젖가슴이 열대개쯤 달린 그런 우상들이 발견이되요. 그건무슨애기냐 하면 다산을 의미하는 거죠.
사람도 자식을 많이 낳으면 그당시에는 축복이었죠? 짐승도 새끼를 많이 낳으면
기가막힌게 아니에요? 집에서 소를 세 마리길렀는데 다 새끼를 가졌어요. 어그런데 이게 하나씩 나오는게 정상인데 한 마리가 세쌍둥이씩 낳가지고세 마리가 아홉 마리를 낳다고 생각 해봐요, 그거 횡제한거 아니에요. 아니 송아지 한 마리에 300만원인데, 셋이 한꺼번에 태어났다고 100만원씩에 사가진 않을거아니에요?그니까 수지맞는거죠. 씨를 뿌려서 소출을 많이 걷히면 그게 농사짓는 사람에게서는 최고의 복이죠. 그러니까 다산이 최고란 말이죠.
그 다산을 좌우하는게 누구냐하면은 농경신인 바알이에요. 그런데 인제 이게 아주 회괴한 신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 바알신이 있는데 이 바알신이 이렇게 그 땅의 백성들에게 비를 내리고 풍년을 주는 주기가 있다고보는거에요이렇게. 주기가있는데 그러면 잘됬다가 그다음엔 안됬다가 잘됬다가 하는 주기가 있는데 이 주기를 잘되고 잘되고 잘되고 하게 바꿀수있다면 최고의 행복아니겠어요? 그렇잖아요. 근데 그거를 잘되게 잘되게 바꾸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바알을 흥분시키고 기쁘게 하는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바알이 어떤때 기뻐하느냐 다신을 할수있는 일들을 인간이 행할 때 바알을 기뻐하고 자극을 받는거죠. 그래서 비가 없는 땅에 비가내리고 이제는 이제는 복을 덜 줄땐데 다시 흥분해서 복을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신전에 가면 수많은 쪽방들이있어요. 그 족방에는 신전의 무녀들이 있어요. 제녀들이 여사제들이,그러니까 무동들이있는거죠.
무녀들이. 있어서 그사람들이 하는일이 뭐냐하면 거기에 와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에게 복을 내리도록 각 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제사 행위가 끝나고 나서는 성관계를 갖는거야. 그러면서 거기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성적인 도락속에서 이 바알신이 그것을 받으면서 다산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에게 그 사이클을 무시하면서 복을 내린다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바로 호세아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갔던 곳이 그런곳이라고 학자들은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서 돈을 받고 그리고 몸을 파는 그러한 제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이루어지는거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 이것은 기가막힌 기가막힌 유혹이었어요. 왜냐하면은 이땅에 와서 어차피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한 신인 하나님 한분을섬기고 오래동안 자기를 아니 자기 땅에서 터를 잡고 백성들에게 복을 주어온 이 바알브올하고 정면대결하는 것도 두려운데 그를 잘 섬길수만 있다면 복을 주겠다고 하는데 섬김의 현장에 가보니까 아주 공인된 타락의 행위를 하면서 육체의 기쁨을 만족시킬수있는 훌륭한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바알신을 섬기는 이일에 깊이 빠져들어갔던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바알브올을 섬기는 이것은 얼마나 재밌는거에요 하나님은 끊임없이 섬기면 섬길수록 너 그것밖에 못하냐 그리고 정성껏 제사를 드리면 너 마음이 떠났구나 또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면 마음이 있대며 왜 재물은 그모양이냐 끊임없이..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 십계명은 지켰니?그러고 물어보시는 거에요. 십계명지키면 제사도 못드리는 주제에..끊임없이 온전해지도록 하나님이 계속 거룩으로 부르시는 거죠.응? 그러다가 하나님이 그래 내 명령을 따르면서 성화의 길을 걷느라고 얼마나 고달팠냐? 앞으로 10일은 휴가다. 맘대로 타락해도 10일동안은 이제 타락면허를 이제 너희에게 주마. 그러고 휴가기간도 없잖아요. 여러분들에게 성화휴가기간있어요? 아유 7년동안 성화하느라고 고생많이 했다. 1년은 그저 내가 면허줄테니까 니 마음대로 사세요 하나님이 그러시냐 이거죠.응? 성화에 휴가가 없어. 당연하지. 우리 안에 있는 죄도 휴가가 없는데. 우리도 휴가 낼수가 없지.응?
그랬는데 그게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면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함의 기쁨이 있지만 이미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나가면 피곤하기 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번폐스럽다는게 무슨 뜻이냐하면 괴롭고 귀찮은고 이거죠.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뭐 잘못했습니다. 그러고 말씀에 비춰보고 깨닫고 또 펑펑 울고 그리고는 또 삶을 고치고...피곤하다이거에요. 근데 거기가면 기쁨이있어요. 여기는 일주일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래 당신이 과연 예배드릴만 합니까?라고 묻지만 거기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질않아요. 그저 여기서 오면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당신 자신을 엔조이 하십시오 복이 있을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러니 하나님 만나러가는 순간보다는 바알브올만나러가는 순간에는 막 옷도 예쁘게 입고 가다듬고 그리고 얼마나 기쁨으로 갔겠느냐 이거죠. 그게 결국은 첫사랑을 버리고 난 후에 일이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바알브올에 철저히 헌신했던 것은 결국 무엇이었어요?
B. 하나님 없는 번영의 꿈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는 거에요. 하나님 없이 번영하고 싶은 거에요. 세상에서 번영이 싫은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번영은 우리 자신을 마음껏 펼치는 수단이에요. 물질이 번영하면 우리 마음에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하면서 억제할 필요없이 우리자신을 실현할수 있게되는거에요. 건강이없으면 할수 없는 그일을 건강이 있으면 참 놀라운 일들을 해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번영이에요. 그러니 번영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거에요. 아무리 훌륭한 꿈이 있어도 사람들이 나에게 권력을 주지 않아요.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아요. 내가 건강이 없는데 내가 그것을 할수 있는 자원이 없는데 어떻게 할수 있겠어요? 이들은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번영을 꿈꾸는 까닭은 무엇이에요? 자 정식적으로 말하자면은 엄밀하게 말하자면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서 한해 먹을 만큼만 거두면 충분하잖아요? 그리고 내년엔 또 내년에 거둘꺼 아니에요? 그런데 더 많은 곡식을 농사를 지어서 창고를 서로 만들고 끊임없이 보관하고 그 보관할게 모잘라서 금부치로 바꾸고 그래서 그것으로 호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집에 살고 그게 모잘라서 이번에는 더많은 처첩들을 거느리고 그게 모잘라서 종들을 거느리고 그게 모잘라서 더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통치하면서 지배하며 하나님처럼 살고 싶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에요? 결국은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이땅에 있는 모든 백성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과 동해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해 주신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하나님을 덜 의지하며 살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면 도와주실수록 더많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나님이 그들과 동해하면 동행할수록 더욱더 함께하게 해달라고 더욱더 매달리며 은혜를 구해야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번영 속에서 이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게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사랑에서 비롯된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지하는 그것이 곧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처음 사랑에서 미끄러지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없는 번영을 꿈꾸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동행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사는 것보다 이세상의 번영을 더 많이 꿈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처음 사랑으로부터 점점 미끄러져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에 하나님의 가슴에 칼을 꽂고 돌아서는 뚜렸한 배반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한발자국씩 한발자국씩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짐으로써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게되고 그 속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그는 결국 하나님과의 생명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없이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렸던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흙에서 지어졌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부여하신것이죠. 우리의 육체는 육체의 생명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생각하고 그리고 마음먹고 기억하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것을 통해 자기 밖에 무슨 세계가 있는 알게 되고 해석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생명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단 죽고나면 그러면 그는 기억도 없고 먹을수도 없고 숨쉴수도 없고 주위에있는 사람이 수없이 그를 때리고 지나가도 화낼줄 모릅니다. 기쁜일이 눈앞에 벌어져도 좋아할줄 모릅니다. 그게 바로 육체의 생명이에요. 육체의 생명이 잠시 최소한의 활동으로 멈추어있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잠자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 일어나도 그는 기뻐할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잠자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 육체의 생명이야. 그럼 그 육체의 생명이 사라진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은 정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없겠죠?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도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에요. 영혼에는 영적 생명이 있어요. 그것을 가리켜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 영적생명을 영생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에요.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는 이 영적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러기 때문에 그는 영적으로는 죽어있어서 육신의 눈으로는 보는것을 영혼의 눈으로는 볼수가 없고 육신의 눈으로 냄새를 맡지만 영혼을 기쁘게하는 풍취는 느낄수가 없어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육신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죽어서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못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생명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에 우리의 속에 집어 넣어주셔요. 그 생명이 우리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게 될 때, 우리는 마치 힘이 세고 건장한 젊은이처럼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움직이고 뛰어다니고 할수 있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해요. 최근에 세계신기록을 세운 마라톤 선수 얘기를 들어보니까 참 기가막히데요.
마라톤의 거리가 42.195키로미터니까 옛날 거리고 꼭 100리에요. 서울에서 인천가는 거리정도되고 그리고 진부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가는 거리쯤 되는 것이 마라톤 거리에요 그 거리를 2시간 3분엔가를 뛰었는데 나누기를 해보면 100미터를 2시간동안에 17초에 계속달렸다는 거에요. 그런데 사실 여러분들 100미터만 달리라 그래도 이중에 17초에 테이프를 끊을 분들이 많지 않을 건데, 근데 어떻게 100리를 그렇게 쉬지 않고 100미터 달리기하듯이 에? 그거 17초도 쉬운거 아니에요. 저도 지금 달리면은 17초 될려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다닐때는 제가 42.2초까지 뛰었어요. 근데 그것만 해도 반에서 꽤 잘뛰는 거였어요. 아주 잘뛰는 학생들은 13.4 13.2 이렇게 뛰는 학생이 있지만 그런 학생들 한반에 한두명이고, 대부분 14초대만 되도 잘뛰고 보통이 15초정도에요. 그 젊은 아이들이. 근데 여러분들이 뛰면 17초 나오겠어요? 교만하시진 말고 또 무리하진 마세요. 절대 그렇게 되는게 아니니까. 그런 걸음으로 뛰는거죠. 그럼뭐죠? 그 사람안에 우리보다도 더 강한 생명력이 있어서 그렇게 육체를 움직이니까 그 일이 가능해지는 거에요. 그러면 영혼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도 우리 안에 충만한 생명이 있으면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살수 있는 거죠. 그니까 잘들으세요. 육체의 생명이 있는 한, 일은 할 수 있어. 그러나 영혼의 생명이 없는 동안에는 그 일 앞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이라는 말은 붙일 수가 없는 거죠. 혹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수는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건 불가능해. 자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에서 청소를 열심히 하는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에요? 안 기뻐하시는 일이에요? 찔리니까 또 큰소리로 대답 못하는 것봐. 하여튼 기억력은 탁월해요. 자 교회에서 열심히 청소하는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에요? 안하시는 일이에요? 기뻐하시는 일이죠. 그러면 영적인 생명이 없이 은혜가 고갈된 사람이도 그 일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야.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할수 없어. 무슨뜻 인지 이해되시죠? 에? 그러니까 그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그 사람이 그 일을 할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일을 할수는 없는 거라 이거죠. 왜?
영적인 생명, 은혜의 생명만이 그일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거죠. 그러니까 어떻게요?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다 보니까 하나님과 나누었던 그 첫사랑으로부터 멀리 도망갔어요. 몸으로는 제단에서 불을 피우고, 몸으로는 제단에 예물을 갖다 받치며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마음으로는 이거 빨리끝나고 바알브올에게 가서 재미도 보고 제사도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꽉 차있는 거에요. 제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지만, 그 사람이 하는 그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바로 이율배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었어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살면서 번영을 꿈꾸는데 그 번영이 만약에 성취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서 얻는 그 번영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번영이겠어요? 하나님이 없이 번영하는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될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에요. 하나님 안에서 얻는 행복은 최고의 행복이지만, 하나님 밖에서 얻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어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될수 없는 것이에요. 오늘 그것은 달콤함으로 다가오지만 잠시후에 쓰디쓴 쑥과 같이 다가올것이며 지금 오늘은 입술에 흐르는 기름같이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피묻은 칼이 되고야 만다 이거에요.
고난도 슬픔도 쓰라린 괴로움과 견딜 수 없는 외로움도 하나님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안갈려고 돌이키면 다 피할수 있어요.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고 선택을 하면 안가도 되는 가시밭길 같은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때가 있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 복이 되어져 돌아와요. 다시 돌아오는거에요.
많은 사람들은 죄 하면 신문에 날정도의 커다란 죄악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때 죄는 사랑이 없는 것이에요. 그것이 최대한의 실패요. 최대한의 죄에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최고의 강령이 무엇인지 첫 번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위선자들에게 예수님 말씀하셨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이 율법의 첫째 강령이니라 강령이라는 말이 크레마타이 라는 단어인데 벽에 박힌 못이에요. 옷을 걸때 그 옷을 무슨 옷이든지 그 옷에다가 다 걸자.. 그 옷걸이에다가 걸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은 길다란 옷처럼 내용이 많고 선지자의 글들도 무거운 옷처럼 그렇게 내용이 많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마지막 걸리는 단 하나의 못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거에요. 거기에 걸리는 거라 이거죠. 그러니 만약에 이 못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수없이 옷을 걸어도 그 옷이 걸리지않고 땅에 계속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너희들이 율법을 알고 선지자의 글을 알아도 그 중심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그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의 첫째가는 계명이 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계명의 그 모든 율법과 계명을 어기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에요. 그것은 뭐냐하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결국은 그 모든 계명을 어기고 물러나면서 살게 하는 궁극적인요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만큼 자기를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있는거라 얘기에요. 우리가 죄 하면 신문에 나는 큰 죄를 생각하는데, 타락하면 그런것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그 모든 것이 타락이에요. 그리고 죄인것이에요.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그러면 도대체 첫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렸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첫사랑을 버림으로써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세상에서 놀랍게 번영을 이루고 그리고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죠.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물러가서 그렇게 악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과 같이 그 백성이 함께 가증하여졌다고 말씀하셨어요.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면서 주님을 멀리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중요한 것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A. 하나님을 보여줌 : 하나님과의 동행
그것이 바로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상실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상실한 것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이에요.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었어요. 그래서 오늘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같이 날아갔도다 라고했어요. 이 세상의 나라는 돈 많고 군사력이 강하면 영광이 있는 나라에요. 넘 볼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의 나라들이 거느린 많은 군대 그리고 큰 보물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아니에요.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행할 때 특별히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제 모세까지 하나님께 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모시게 되었어요. 이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히 의지하는 가난하고 열정적인 마음이 되었어요. 모세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잖아요. 기적을 행했단 말이죠. 여호수아는 쉽게 말하자면은 담임목사인 그 모세 밑에서 부목사생활 오래 하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담임 목사가 됬는데 교인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교회나 작아? 남전도회만 67만명인데. 그러니 그게 300백만명이나 되는 대형교회가 아? 거 뭐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 여호수아를 보면서 저 사람을 의자하고 우리가 가야되나 하는 그 순식간에 아주 허전한 마음이 되었을 거에요. 그렇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오히려 그런 어려운 시기속에서 예전에는 모세만을 의지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 담임목사가 하도 신통해보이지 않으니까 아예 담임목사만 가지고 안되겠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난거에요. 그리고 그들이 광야의 길을 지났어요. 믿음으로 요단강 물에 발을 들여놓으니까 요단강 물이 마르면서 건넜어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어? 여리고성을 돌았더니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이러한 소식들이 가나안에 파다하게 퍼졌을 때 그들은 이미 정신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물같이 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서워하기 시작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큰 백성으로 여기며 아직 쳐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투항해서 이 나라의 백성 중 한사람이 되어 내가 구원을 얻기를 원합니다라는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어요. 그때 이스라엘이 선진국과 겨룰 수 있는 국력이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훌륭한 무기가 있었습니까? 엄청난 보물이 있었습니까? 성이 있었습니까?그들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40년 동안 광야에 유리방황하면서 다 낡은 신발과 빨래도 제대로 못해 입었을 그 누덕누덕 기운 옷과 그리고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받아먹고 사는 만나. 이게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영광이 있었어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영광의 때가 있었죠. 저도 이 설교 준비하면서 그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 안에서 살던 옛날을 생각했어요. 그때는 결혼 한지 얼마 안되서 너무 가난해서 출근할 때도 도시락 하나 500원 용돈 들고 에 하루에 생활비가 500원이었어요. 거 들고 그리고 통근 버스 타고 출근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친구가 찾아와도 밥 한번 사 줄 수 있는 여유가 안되었어요. 그래도 항상 기쁨이 충만했어요. 응? 왜냐면..주님이 어디가든지 나와 함께하시고 동행해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과 그 용기가 있었어요. 가난해서 불편했긴 했지만 그러나 세상이 이길 수 없는 담대함. 앞에는 훤한 길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매일매일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을 때
(찬양)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님이 새로운 길을 가라그러시는데 어떻게 가야할지 알수가 없어요. 점심때 가까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눈물이 막 쏟아져요. 기도하러 갈 때에는 근심과 걱정에 찬 마음이었지만 기도하고 나올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 세상의 친구들이 나를 다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는거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보여주면서 사는 삶이에요. 성도의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죠.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충격받게 한다든지 남이 할수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그것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차피 산같이 그렇게 큰 물질도 아니고 바다같이 넓은 물과 같은 존재도 아니에요. 어차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세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의미는 오직 하나야. 그 하나가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회복시키시려고 하는 그 영혼의 참된 형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예수의 형상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러니까 그 형상은 우리의 영혼의 변화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충분히 본받게 될 때에 우리는 굳이 나 예수 믿는 사람이야. 나 굉장한 사람이거든. 내가 옛날에 왕년에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하고 이런 일도 했지 라고 뻐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그가 가만히 있어도 저 사람은 무엇인가 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거죠. 오래됬어요. 한 10년 됬는데 부산에 내려갔어요. 꼭 어딜 가든지 그런사람이 있어요. 교회 다니는 거를 전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래서 돈벌어도 교회에서 쓰고 하다 못해 오락을 해도 교회에서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자기를 소개하는데 장로라 그래요. 그래서 아유 반갑습니다. 그리고 인제 밥을 먹으러 갔어요. 밥을 먹는데 자기 소개를 하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는지 그걸 참느라고 아주 혼났어요. 뭐냐하면 제가 오늘 목사님 대접합니다. 그래서 아유 잘하셨습니다. 좋은 거 드십시오. 아니 그냥 뭐 거 아무거나 먹겠습니다. 그리고 인제 하여튼 시켰어요. 목사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하나 탁 내놓드라고 근데 명함이 이름은 석자 밖에 안되는데 직함은 되게 많아 한페이지도 넘어서 뒤페이지도 계속 나와. 근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재미있는게 뭐냐하면 목사님 이 부산에 저만치 하나님 일 많이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야 이 장로가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잠시 후에 한번 두고 보자 그래서 아 그러세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하세요 하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하여튼 부산시 복음화는 혼자 다하는 거야. 참 대단하다. 그리고 인제 저녁예배가 시작이 됬어요. 근데 인제 저녁예배가 시작이 됬는데 어 분명히 이 사람 성격으로 보아서 끝날 때 되면 또 가방 들겠다고 뛰어 나와가지고 한번 폼을 잡을 텐데 뵈질 않아요. 그 다음날 식사시간에 다시 또 만났어요. 목사님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죄인인줄 몰랐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제께 한말을 생각하면 오늘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제 간이 조금 배안으로 들어갔구나 그렇게됬어요.
교회 역사에 터툴리안이라는 인물이 나와요. 3세기 때 사람인데, 아주 훌류한 교부였어요. 이 아버지가 로마의 하급 군인이었어요. 그 집안에서 자랐고 근데 이 사람 원래 예수와는 아무상관이 없는사람이었어요.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죄인들을 벌주고 하는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이 사람이 그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인제 치졸을 하고 그 다음에 재판을 해서 벌을 주고 하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나라가 너무 하는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믿는 사람이 이렇게 잘못한 사람이 아닌데 너무 중벌을 때리고 심지어는 사형을 시키고 목숨을 빼앗고 이러는거죠. 어 그러면서 아 이건진짜 정의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한사람씩 한사람씩 만나는데 아 이 사람들은 자기가 로마에 살면서 그렇게 그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종류의 사람들인거야. 정직하고 진실하고 그리고 지금 자기가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우기면 사형을 당하는데도 변절 하지 않고 조용히 웃으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 젊은 테르툴리아누스 가슴속에 무엇이 들어왔냐하면 하나님은 있다 하나님은 계시다 이게 확 들어오는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B. 사라진 영광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을 인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거죠. 근데 이런 사랑에 멀어지게 될 때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 때문에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되고 알려지고 그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상실하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찬송해 주기를 원하고 나를 경배해 주기를 원하는 거죠.
길을 가다가 보면은 표지판이 나오죠. 부산으로 가시오. 여기 부산이에요이렇게에? 여기 부산이에요. 근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표지판 같은 존재야. 예수께로 가시오 이렇게 되있는거죠. 그러면 그거를 그거를 제대로 제자리에 제대로 서있어서 그래서 제대로 보여주면 사람들 이걸 딱 보면서 아 그렇구나 예수께로 가야되는 구나 그리고 우리를 한번 쳐다 본다음에는 예수께로 가는거야. 그때 우리는 기뻐하는 거야 야 우리를 보고 저사람이 예수께로 가는구나 응? 야 정말 우리가 예수께로 가니까 그렇게 행복하고 기뻤는데, 저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께로 가네. 아무데 돌아다녀도 예수께 가는 길을 못찼던 사람들이 우리보고 예수께 가네 이런 마음이 생기면서 나 때문에 예수께로 가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 때문에 이 안에서 막 기쁨이 막 솟아나는 거에요. 근데 인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땐 그렇게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식으면은, 이 표지판이 보이지도 않거니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께 간다고 할지라도 어이씨 내가 이렇게 힘들게 서서 예수께 가라고 가르쳤는데 에? 나는 한번만 그렇게 쳐다보고 예수께로 가? 어떻게 인간이 그럴수 있어? 거 원하는게 뭐에요? 예수께로 가라고 표시판 되있는데 우리한테 와서 막 만지면서 예수께로 가래 어? 세상에 예수께로 가래. 야 이 표지판 봐. 이 최신 글씨체, 이 새로깎은 나무. 야 놀랍지. 새가 와서 똥도 싸고 갔네. 이러면서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야 예수께로 가래 예수께로 가래 이래주기를 원한다 이거죠 안가고. 응? 이렇게 해도 이해가 안가면은 예수 믿는거 졸업해야지.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데..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만족이 없는 거에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허리가 휘도록 이 세상에서 자기 번영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거에요. 성공하면 세상의 것을 얻고 신앙을 파는 것이고. 실패하면 이것도 잃어버리고 저것도 상실하게 되어서 그래서 마지막에 벌거벗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충만한 영적인 교제와 생명이 가득하게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충만하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영광이에요. 여러분이 비록 이 세상에 지위 높지 않고 가진 돈 많지 않아도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경험할거에요. 그죠? 예. 나를 사용하셔서, 어그제도 어느 성도한분 만났는데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깊이 회심했더니 자기 동서가 누가 너무 가엷서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또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래서 우리 함께 예수를 잘믿으면서 우리 집안을 복음으로 인도하자 그래서 뜻을 합쳤더니 너무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자기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은혜 안에 그 생명 안에 살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셔요. 그래서 사용하셔서 그사람을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펼쳐가시는 거에요. 비록 그가 회사에서 세상의 지위로는 꼭대기에 있지 않아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사람을 지도자로 삼으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고 집안에서 이 사람이 비록 아버지요 가장이 아닌 아주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이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움직이시면서 일꾼으로 삼으셔서 당신의 뜻들을 펼치시는거죠. 그렇게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을 드러내면서 사는 그 안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도 함께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에요.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만약에 이렇게 살아간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너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어요.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도 하나님이 설령 우리에게 많은 물질과 건강과 자식의 복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죠.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죠.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지시는 분이 아니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상실하지 않지만 하나님 없이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한 것만큼 아파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변하지 않을 것을 소유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을 소유한 그것이 최고의 소유를 가진 것이고 그런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서 그렇게 나라가 번영하고 세속적으로는 너무나 잘 살게 되었지만 진짜 없어서는 안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그것은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오늘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같이 날라갔다. 그랬습니다. 새는 앉아 있지만 언제까지 앉아있는다는 기약이 없어요. 무엇에라도 놀래면 바로 날아가버리는 것이 새이고 날아가 버리고 나면 그 새는 다시 잡을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이었어요. 있어야할 자리에 그것이 있으면 너무 아름다워요 그리고 고귀한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쓰심에 제일 아름답고 깨끗하고 소중하고 고결한 것이에요. 그러나 거기로부터 떠나게 되면 그것은 추하고 더러운 것이 되는 것이죠.
C. 그래도 ‘에브라임’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번영을 위해서 바알브올에게 헌신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각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셔요. 이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애칭이에요. 별명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거에요.응? 만에 번역을 한다면 나의 사랑스러운것, 나의 귀여운것 그런 표현의 애칭이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첫사랑의 때를 배신하고 바알브올에게가서 헌신하고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다가 넘어지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그 백성들이 에브라임이었어요. 나의 사랑하는 것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영원히 버릴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당신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제멋대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들을 에브라임으로 기억하고 부르고 계시는 것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이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뛰어난 장점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탁월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구원해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보다 의로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이기에 우리 공로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주님 앞에 우리가 깨트려져서 그 십자가의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이 세상의 영광이 나와 죽을 때까지 관계가 없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했고 주님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은 언제나 순종하기에 달콤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연예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었고 주님이 떠나가시는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번영과 그리고 복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 안에 있는 복이 아니면 우리의 분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을 잃지 않으리라는 마음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만 한다면 주님의 그 손이 어디로 이끌든지 주님없이 천국의 길을 걷기보다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지옥의 불길가운데를 지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V. 결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처음 사랑의 품으로부터 멀어졌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며 주님 대신 바알브올과 같은 세상에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기도가 가득하던 우리의 마음에는 기도의 향불이 꺼졌습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흐르던 뜨거운 눈물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엔 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까지 퍼버리며 주님을 향한 사랑까지 퍼버리며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구하고 성공을 갈망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허기졌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기갈은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멀어진줄도 모르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며 참회의 눈물도 없이 뜨거운 사랑의 감격도 없이 우리는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살아가는 것처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삶으로부터 돌이킬 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말고 더 깊은 경고를 주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고통을 드리지 말고 우리들이 걸어갔던 이 첫 사랑을 버린 길들을 깊이 회개하고 그 옛적의 사랑의 길로 돌아와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록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잠시 죄에 미끄러져서 세상사랑에 빠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는 여러분들이 소중한 에브라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2.신(神) 지식을 떠남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 6).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또 당신의 뜻을 보이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흔히 선지자 그러면 사람들은 미리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기능이 선지자에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미래에 될 일을 먼저 알려주시고자 하실 때,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긴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설교중에 지극히 일부분이었고, 미래에 될 일을 미리 알아맞추고 알려주는 것이 선지자의 본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의 본무는, 본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잘 해설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무였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 가르쳐서 바로 돌아가게 하려고 할 때의 그 기준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조는 사람에 대한 말씀) 선지자는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참된 신앙과 삶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해 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하면 모세오경이예요. 만약에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라면 우리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사셨을까 이렇게 생각하듯이, 그때 사람들은 모세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겼을까라고 상상했기 때문에 모세오경을 그 시대에 맞게끔 풀어서 그들로 하여금 참된 율법의 삶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였기 때문에 당시에 선지자의 임무는 오늘날 설교자의 임무와 아주 흡사했어요. 그래서 교부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목사는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던 사도들의 후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실 때에 항상 말로만 하신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가르쳐 주시는 방식은 여러 가지 방식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목적이고, 또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목적을 이 하나님의 설교를 통해서 그대로 구현하는 사람이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들의 목표는 더 상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수종드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죠. 그게 놀라운 것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이 있는데, 비위 맞춤 이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성령의 기능이예요.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지자에게 주셔서 그래서 선지자가 그 말을 전했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설교하기 전날밤에 하나님이 오셔서 소곤소곤하고 귀에다 얘기해주면 그걸 적었다가 가서 기계처럼 낭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구약에 나오는 이 율법과 그리고 특별히 모세 오경을 잘 배워서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것을 설교하던 사람들이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러한 선지자들의 설교하는 이 예언의 방식이 이게 말로만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동들도 사용을 하였어요. 그래서 그 행동을 가르켜서 행동 예언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호세아는 그렇게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예언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었으니 그게 바로 디블라임의 딸 음란한 여자 고멜과 함께 결혼해서 끊임없는 가정의 파탄속에서도 그 아내를 끊임없이 사오는, 이 열렬한 남편의 뼈속깊이 사무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광경을 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호세아는 그 죄인된 우리들을 찾아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찾아가시는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는 한 예표라고 할 수 있으니 호세아라는 이름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과 완벽하게 그 뜻이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1장서부터 3장까지는 이 호세아의 가정의 이야기를 다뤄요. 그래서 이 음란한 여자가 끊임없이 남편을 버리고, 그리고 외간 남자에게 가서 바람을 피고 아이를 낳고, 오면 이 사람이 돈을 주고 그 부인을 다시 사오고 그리고 다시 다독여서 이 사람을 데리고 사는데, 이 동기 자체가 선지자는 형벌과 같은 사랑이었어요. 그러니까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그러셨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끊임없이 음란하게 자기를 버리고 가는 그 여자를 뼈속깊이 사무치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선지자의 마음속에 넣어주심으로 끊임없이 배교하고 하나님을 돌아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선지자 자신이 뼈속깊이 사무치게 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선지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던 것이죠.
이렇게 3장까지에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끝난 후에 4장에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을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를 1절서부터 5절까지 다루고 있어요. 여기에서는 크게 3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첫째는 신앙의 덕이 사라졌다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적인 특성은 공의와 자비예요.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이야.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법도에 맞게끔 의롭게 성품을 따라 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힘입은 사람이기때문에 그 아가페의 사랑을 자신의 동족에게는 물론이고, 그리고 열방과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덕이었고, 바로 그 덕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 되게 만들었던 것이예요. 그러나 그 덕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오히려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유절과 간음 폭행, 피가 피를 뒤때이는 이 무한 폭력이 뒤따르는 그러한 나라가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II. 이스라엘의 영적위기(1-5)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신앙의 덕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단지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이 타락하고, 똑같이 더럽고, 똑같이 정욕을 따라 살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영적인 위기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서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땅이 슬퍼하고 거기에 거하는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가 전부 다 쇠잔하고 바다의 고기까지 없어질 지경에 될 때까지 이렇게 그 땅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임박한 이런 저주를 알지 못한채 여로보암 2세의 지도 아래 부강한 나라를 꿈꾸며, 그리고 무역을 통해 벌어들이는 많은 돈과, 그리고 튼튼한 국방과 그리고 군사력을 토대로 한없이 교만해지고 있었습니다만은 잠시후에 이제 이 모든 번영들이 사라지고 슬픔이 임할 차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 보내실 때에 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하나로 묶으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올바르게 살면 그 땅은 번영하고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속에서 열매를 내지만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우상을 숭배하면 유일신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저주하여 그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리고 단물을 내지 못하고 그리고 깜부기와 재앙으로 그들은 기근과 흉년에 처하도록 하나님이 격륜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은 영혼의 곤핍함에 대해서 신경쓸 수 없을 정도로 육신의 곤핍함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영혼이 너무나 곤고하고 괴롭지만 육신적으로 너무나 곤고하고 어려운 사정가운데 있기 때문에 차마 영혼에 대해서 신경 쓸수 없을 정도로 근심과 염려, 그리고 근심과 괴로움 속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했지만 돈에 대한 염려와 가사에 대한 염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삶의 고통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때문에 오늘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다수는 그러한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의 근원이 되고 있는 여러분들의 땅이 저주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들짐승들이 기근에 처하고 그리고 처처에 단물이 나오던 우물들에서 쓴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무엇을 뿌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떠나서 심고 씨를 뿌리지만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는 그런 쇠약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번영이 사라진 인생의 들판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방법에 호소해서 여러분들 땅에 하나님 없는 번영이 꽃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영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종교의 질서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다투는 자들과 같이 되었고, 그리고 선지자는 밤에 거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으로 가르쳐야 될 의무를 거스리면서 살고있는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올바로 종교를 수종들때에 이미 그 거룩한 종교의 도리에 대한 거룩한 존경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무너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룩한 종교의 제도들을 무시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교회의 제도들을 짓밟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덕이 사라지자 땅에는 저주가 임하고 종교의 질서까지 무너지는 상황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말할것입니다. 너무나 먹고 사는 일에 긴급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 세상의 일들이 사라지는 번영때문에 안타까워한 나머지 신앙이야 어떻든 아무런 종교의 질서들도 여러분에게 존중심을 얻지 못하고 깔보고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이 자기보다 훨씬 강한 짐승을 물듯이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깨닫기 위해서 여러분을 인생의 구석으로 몰아넣으실 때 하나님을 한번 물어볼 양으로 여러분들 으르렁 거리며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감정이 교회의 제도를 무시하고 신앙의 법도들을 하찮게 여기고, 교회의 질서들을 같지 않게 여기면서 여러분들의 교만을 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쓴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더러운 물줄기들이 바로 여러분들 속에 있는 영적인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인생이 곤란에 처할수록 냉정해지고, 문제의 근원이 어디인지 지혜롭게 살펴서 거기에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살아볼려고 애쓰는 여러분들의 몸부림은 말이 뒷발질을 하며 가시를 차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III. 영적위기의 근원(6)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이러한 영적인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우리는 궁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그것을 아주 간명하게 말합니다. 네 백성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
이것은 놀랍게도 1장서부터 3장까지 나오는 호세아 집안의 이야기와 놀라운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음란한 여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소문난 창녀, 그 사람이 바로 고멜이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끊임없이 버리며 도망갑니다. 참 놀라운건 말이죠. 이 호세아의 사랑은 단순한 부부의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부부의 사랑도 이런 사랑을 본받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얘기 안하겠어요. 얘기하면 길어요. 문제가 있는 부부들은 한번 좀 모아놓고 내가 이 얘기를 해야겠어요. 진짜 해결의 길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부부가 둘이 사는데 너는 인간, 나는 사람. 그리고 각기 아무 상관도 없이 산다고 칩시다. 그래서 추호의 사랑의 정이없어. 근데 부인이 가서 간통을 했어. 그 얘기를 들었을때 남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날까요, 안날까요? 아이고 꼴깝하네, 아이고 별거 다하네. 그러고 말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만약에 뜨겁게 사랑해요. 근데 그짓을 부인이 했어. 그럼 남편이 어떤 감정이 생기겠어요. 아이고 당신만 기쁘다면야, 그러겠어요? 내가 사랑하는데 뭔들 못주겠어. 내가 좀 희생하면 되지. 그러겠어요? 안하죠? 그럼 어떻겠어요? 그 사랑의 감정이 변하여서 치열한 복수의 감정이 되어서 쏟구칠 거예요. 그게 없으면 사랑한게 아니죠.
그러면 이 호세아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예요. 부인을 사랑한거예요? 안 사랑한거예요? 거봐 대답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난 보람을 느낀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무리 가르쳐도. 그럼 사랑한거예요, 안한거예요? 한거예요. 하면 핏대가 나야 되잖아요. 당장에 요절을 내야지 그러고 횟칼을 들고 뛰어야 되잖아요. 근데 안하잖아요. 그럼 뭐예요? 이게. 그래서 아까 이야기 한대로 그냥 남녀간에 있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것도 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 사랑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랑타령 수없이 목이 쉬라고 해도 살아보면 사랑 안하잖아요. 세대가 마지막때가 될수록 삶의 모든 대화와 주제가 사랑하나에 꽂혀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사람들은 같이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 시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답이 나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다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사랑이 그렇게만 되어서는 절대로 완성된 사랑이 안되는 거죠. 그럼 이 사람에게는 뭐가 있었냐면, 하나님의 헷세드, 하나님의 자비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여자를 그렇게 찾아간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 아내가 외간 남자하고 놀아나는 현장에 가서 이 여자를 다시 사 가지고 올때 교인 심방가는 마음으로 갔겠어요? 그건 또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사랑은 아까 이야기한 부부로서의 뜨거운 사랑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으로까지 승화된 사랑이예요. 이런 사랑이 있으면 부부들이 잘 사는 거예요. 그게 마누라 저기 비유 맞춰준다고 그래서 그렇게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영감 비유 맞춰주고 식모처럼 복종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거는 아니라는 말이예요. 그 사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죠. 그게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아내로서 그 여자를 뜨겁게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것만 있었더라면 횟칼을 들고 달려갔을텐데, 근데 그게 아니라 그 이상의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죄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그 고멜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그 처절하게 불붙는,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말하기를 뼈속깊이 타들어 가는 사랑이라고 했어요. 난 그 묘사가 너무나 아주 진지해. 뼈속같이 불붙어서 타들어가는 심지가 되어서 골수까지 타들어가는 그래서 자신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를 찾아간 거예요. 그러면 그 여자가 무슨 기분 나쁘게 외간 남자하고 같이 끝어 안고 잤느니 뭐 애를 낳느니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건 그 사람의 인간적 실존과 그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녹여서 다 사라지게 하면서도 살리고 싶은 영혼이었다는 말이죠. 그 사랑이 무슨 사랑이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퍼부어 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알지 못하는 그 사랑이었다는 말이죠. 그런 사랑이었어요.
그러면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생긴 물건이길래 자기를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바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잖아요. 그거를 팽개치고 그게 뭐가 좋다고 그 미친짓을 하느라고 가정을 뛰쳐나갔느냐? 오직 하나예요. 그 남편을 몰랐기 때문이예요. 그 남편을 몰랐기 때문에. 그게 뭐냐하면 남편을 아는 지식을 몰랐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섬기면서 사는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것 이외에는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예전에는 왜 그렇게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하고 악을 행하고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살았던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었어요?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놀라운 병행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고멜이 자기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 주는 아마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랑을 받은 여자는 극히 소수일거예요. 그죠? 아니면 남성들이 한번 아니라고 큰소리로 대답해 보세요.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라고 말해 보세요. 못하잖아요. 그런 사랑을 받은 여자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을 버리고 그렇게 했던 이유는 남편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예요. 똑같이 이스라엘이 자기의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며 바알브올에 부속되었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예요.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그럼 여기서 말하는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거예요.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 모든 고통의 마지막 원인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거죠. 그럼 한번 보십쇼. 우리가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지가 주인인줄 알고 교만하고 까불고 그리고 세상 정욕을 따라서 살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그런 삶이 허무한 것인줄 알고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누가 우리를 불러다가 똑바로 안살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습니까, 아니면 이때까지는 니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 교회에서 이만큼 돈을 줄테니 똑바로 살아라 우리에게 그렇게 해서 계약서를 썼습니까? 우리의 환경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요. 그런데 단 하나 변화가 왔다면 예전에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게 뭐냐하면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고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고 살아온 날들 중에서 한가지보다 더 큰 사건은 없어요. 그게 뭐냐하면 몰랐던 주님을 알게 된 것(아멘). 더 크게 해야지 말이지. 몰랐던 주님을 알게 된 것.(아멘)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몰랐던 주님을 알게 된 것,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예요.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렸다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여러분들은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들겠죠. 그 지식은 과연 버릴 수도 있고 그냥 소지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고 버리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가, 하나님이 여기에 지식을 이 백성들이 버렸다고 판단하시면서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응분의 댓가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댓가였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자부심과 영광이 무엇이었어요? 내가 너희를 제사장 나라로 삼아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 제사장이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대표로 나아가서 이들 중의 한 형제이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면 하나님이 그 제사장의 기도와 헌신의 제사를 보면서 그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였어요.
이제 개개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이 중보자가 되었던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중보자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그들이 이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그런 지위로 이들을 부르신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아니면 선택은 의미가 없는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쓰시는 것과 사랑하셔서 선택하시는 것은 나뉘어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선택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소명으로 불러주시는 것을 함께 내포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의미를 받는 것 이미 그 자체안에 소명이 내장되어 있고,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살다가 나중에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소명을 받게 되는 것이죠. 물론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한참 살다 보니까 뭐 목사가 되라는 소명을 받기도 하고, 장로가 되라는 소명을 받기도 하지만 그거보다 더 뛰어난 기초가 되는 이 소명은 너는 이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즉시로 너는 이 세상과 나 사이에 또 다른 내가 세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백성들과 나 사이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이 소명이 구원의 은혜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얘기예요.
그러면 그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그걸 버리니까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제사장 나라가,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언약에서 떼어내는 것처럼 선언하시는 그러면 그것은 아까 말씀드리는 것처럼 아이고 제사장 안 시켜주면 평신도 하면 되지뭐, 그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한다는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독특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쉽게 하나님이 너희들을 반 죽여버리리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벌이었단 말이죠. 그러면 의문이 드는 것은 도대체 그 지식이 뭐길래 이렇게 중요해서 이걸 버리면 하나님이 너희를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극단적인 선언을 하시는 것일까하는 질문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이 지식이 뭐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동반한 앎이예요. 이것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 없어요. 하나님께 대한 앎, 하나님을 앎, 그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로 지식이예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둘로 집약이 되요.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위엄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삶과 관계를 맺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주와 종말과 창조에만 하나님이 관련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내 영혼이 곤고한 것, 내가 오늘 밥먹고 사는 생업, 나의 사업, 우리의 자녀, 그리고 내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에 하나님이 관여하시면서 그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요.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기대할 아주 훌륭한 근거가 되는 것이죠. 나는 하늘에 있으니 땅에서는 니들끼리 알아서 살아라 내 유치하게 너희들의 인생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는 하나님이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셨어요. 아버지는 우리의 일상속에 모두 관여해서 그래서 우리의 염려와 우리의 고민과 우리의 문제들을 함께 나누며 우리가 올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우셔요.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죠. 우리가 이런 것에 예민하고,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늘 익숙하게 살다보면 하나님이 마치 우리의 진짜 아버지이고, 이웃집 아저씨이고, 그리고 돈 많은 이모나 그리고 맘씨좋은 삼촌같은 느낌이 든다그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은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의 위엄과 엄위를 알게 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첫 번째 요소예요.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셔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그리고 우리와는 비견될 수 없는 전적인 타자이고 질적인 차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무한한 차이, 그 앞에서 우리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부복하여 그 분의 엄위 앞에 두려워떨 수밖에 없는 그런 티끌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걸 갖게 될 때 인간은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죠. 아 그렇구나, 인간이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미국이 당하는 이 엄청난 위기를 보면서 전 세계 국가들이 벌벌떨고 있어요. 우리는 그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근데 막상 이 일을 당하고 보니까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아주 하찮은 나라일 뿐이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게 될 때에 깊이 겸비해지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시다는 경험을 우리의 신앙속에서 수시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분수를 아는 인간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알고 자기의 자리를 찾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는거죠. 그렇지 않으면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그리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렇게 신앙의 모든 덕을 잃어버리고 땅이 저주에 직면하고 종교의 도리와 질서가 무너지는 그러한 삶의 현장이 연출이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거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셔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온 세계와 우주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묵상하며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고 온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을 보며 그분의 위엄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할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이 모든 만물과 우주위에 뛰어난 주권을 가진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 심판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수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위엄과 그 권위가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하나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의 두 번째 요소는 사랑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같이 티끌같이 더러운 존재, 그런 존재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거죠.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고 만물 위에 뛰어난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감히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위대하고 지존하신 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오늘 깊이 우리의 인생속에 내려 오셔서 아침은 먹었니? 물어보셔요. 허리가 아프다더니 오늘 자고 일어나니까 좀 괜찮니? 물으시죠. 내가 고쳐줄게, 말씀하시는 거죠. 애들 다 시집장가가고 남편도 죽고 나니 많이 외롭지? 찾아오셔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그때에 우리는 가슴 깊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위엄을 생각할 때에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하나님이셨는데 오늘 그 위엄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이 지상의 삶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래서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거예요. 나같은 인간은 온 땅과 하늘 위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공항을 이륙할 때 땅에 있는 인간들을 봐도 개미처럼 느껴지는데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과연 나같은 존재를 알아나 보실까라고 생각했는데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감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엄을 알때에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주님이었는데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속에 찾아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 사랑에 자기 자신이 완전히 녹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선지자는 미처 바라보기만 했고,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호세아보다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셔서,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주님이 나같은 인간을 기억도 안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들이 주님이 자기에게 찾아오셔서 우러 만지시는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그래서 자기같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런 사랑이 밀려올 때, 그것이 이제 그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으로 나타는 거예요. 자비심으로.
호세아가 만약에 영감의 시각에서 마누라를 보는 것 같이만 봤다면 요절을 냈을 거예요. 근데 그 시각위에 하나님이 고멜을 바라보는 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예요. 그런 하나님의 자비, 이런 것들을 위엄을 심판을 통해 경험하게 하셨다면 이러한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경험하게 하신거죠. 용서를 통해. 그래서 이제 대게 사랑에 대한 경험이 먼저 오고 위엄에 대한 경험이 오는게 아니라, 위엄에 대한 경험이 먼저 오고 사랑에 대한 경험이 와요. 그래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거죠. 그때 하나님이 온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시고, 나의 인생의 계획은 그분 손 안에 있는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에 심판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든 것이 2차, 3차의 원인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인생 꼬일때 사람 원망하고 원수맺고 불평하던 사람이 변해서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거죠. 그때 하나님이 그를 사죄의 은혜로 용서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놀랍게 경험한 모든 사람은 모두 죄인이었어요. 그래서 용서를 통해서 이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니 큰 죄를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이예요.
그러면 이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의를 내리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중심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그의 삶을 하나님 중심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영광을 따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예요. 이것을 버린다는 이야기는 뭐냐하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게 하는 유일한 엔진을 뽑아서 던져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전거는 사람이 발로 굴려서 가는거고, 자동차는 엔진을 굴려서 가는 거 아니예요. 하늘에 뜨는 비행기도 엔진을 굴려서 가지만은 비행기에는 제트엔진이 달려 있고, 자동차에는 자동차 엔진이 달려있어요. 자동차를 아무리 빨리 몰아도 하늘로 오를 수는 없어요. 비행기가 비행장에서 박차고 이륙할 때 속도가 250~350km 정도예요. 자동차 경주에 쓰는 포밀러카가 전속력으로 밟으면 350~380km 나와요. 그러나 그것은 하늘로 날아 오르지 못해요. 왜냐하면 처음서부터 엔진이 다르게 설계되어 있어서요. 그러면 비행기가 형체는 그대로 있는데 그 비행기를 보잉 엔진을 달았다가 맥도날드 엔진을 바꿨다고 하더라도 비행기는 변하지 않지만, 비행기 엔진을 떼어버리고 그걸 떼어버리고 포니 엔진을 달았다면 그건 비행기가 아니예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런 엔진이야, 엔진.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만 살수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은 살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이런 생각들어 본적 없어요? 누가 와서 아주 잘났다고 간증을 하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은혜가 안돼. 혼자만 은혜를 받아. 말하는 사람. 아무도 하나님에 관해서 뭐라고 막 떠들고 간증을 하는데 쌩소리가 나요. 어떤 사람 올라와서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는데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구나. 감동이 싹하고 밀려와요. 그런 차이가 뭐냐면 이 속에 있는 엔진이 무엇이냐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사람들이 모여서 호랑이 얘기를 했대요. 호랑이가 어떤 거냐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아, 호랑이로 말할거 같으면 밤에만 나타납니다. 대게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언덕위에 나타나죠. 그리고 그는 달뜨는 밤이면 앞발을 쫙 내밀고 엉덩이를 낮춘 자세로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는데 양쪽에는 하얀 수염이 네 가닥씩 나있고, 그리고 크게 벌린 입에는 10cm가 넘는 이빨이 달빛에 빛나고, 수박속같이 시뻘건 혀가 속에서 널름거리고, 등에는 누런 줄무늬와 검은 줄무늬가 이어지는데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이 떠가고 보람달이 찬란하게 떠 있습니다. 다 사람들이 하품을 합니다. 왜 이발소에 있는 그림이거든요. 그게. 다 하품하고 자는 거예요. 그 다음 주제가 올라왔어요. 호랑이, 저는 그 말만 들어도 그러고 쭉 얘기해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1953년 1월 25일 밤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태백산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 급한 전령의 임무를 띄고 태백산을 동료와 함께 넘고 있었습니다. 사방은 고요했고 살을 에는 것같은 겨울 바람이 불었습니다. 때는 그믐인지라 달빛조차 없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모퉁이를 돌아서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침을 꿀꺾 삼키는 거예요. 아직 호랑이 얘기 호자도 안나왔는데 그 사람은 누구예요? 그 사람은 누구예요? 진짜 호랑이 만나서 한번 죽을뻔 한 사람이예요.
그게 그런 지식을 하나님을 그렇게 높고 엄위하시고 자기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마치 주머니에다 이런 물건을 집어 넣은 것처럼 항구적으로 이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지식이 사라지기도 하고 증진되기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지식이 죽은 지식화 되어 버리기도 하고, 살아서 계속 역동하는 지식이 되기도 해요. 그거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느냐 이게 달려 있는거죠.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잘들어요. 한편으로는 이미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지식을 굳게 붙들고, 보존하는 삶이어야 하고 그 위에 또다시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알고 새롭게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그 지식의 증진속에서 살아가야할 이중적인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진보예요. 그래서 권찰이 집사되고 집사가 안수집사되고 그런게 신앙의 진보가 아니라 그런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래는 그게 있었어요.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게 있었어요. 그러 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거죠. 디블라임이 딸 고멜도 아마 한때는 이 호세아를 사랑했겠죠 그러나 그 여자의 뼈속까지,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뼈속까지 이 사랑이 사무쳤지만 이 여자의 사랑은 아침 안개와 같았고, 뼈속 깊이 부패하고 방탕한 기질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떠난거죠. 그리고 오늘 혹시 여기서 내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까 고대하며 이 집회에 찹석하는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을 비교할 때 하나님은 뼈속깊이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찾아다니셨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침 안개와 같았고, 뼈속깊이 배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내 즐거움을 따라 살고자 하는 하나님 없는 번영을 꿈꾸는 음탕한 마음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오늘 여기에서 이 설교를 듣는 것 아니겠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지식을 버린거예요.
B. 지식의 중심성
이 지식의 중심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다라고 하는 것은 대게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모르고 살 때에는 어디에도 하나님이 있는 증거가 보이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본건 태평양 바다를 보면서 한 숨을 쉬다가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아니예요.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굽이치는 알프스의 영봉들을 보면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그러고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죠. 태평양 한가운데 배타고 안가고, 그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남들이 못본 위대한 자연의 풍경을 못봤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경험이예요. 아주 더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틀림이 없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된거죠. 그래서 미끄러져서 방황할 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불쌍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때에는 용서하시는 사랑을 통해서 사죄의 은총을 힘입음으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시는 방법은 이렇게 매번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큰 사업의 위기를 만나거나 죽음의 막다른 골목까지 가서 야, 개판 치면서 사니까 하나님이 죽이시는구나 아, 역시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이렇게 큰 죄를 짓고 너무나 괴로워서 방황하다가 어느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감격적인 간증이 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니예요. 신앙의 초기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의 참스러운 맛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아들을 다루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위엄과 사랑의 깊이를 알려주심으로 그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셔요. 그러나 이제 성숙하고 나면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위엄과 그리고 쓰레기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경험이 세밀하게 들어있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알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는 사업이 절단나고 목숨이 왔다갔다해야지만 ‘오 주님’ 이렇게 불렀는데, 이제 제 정신이 돌아오고 나면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쭉 읽으면서,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깨닫는거예요. 일주일동안 세속에 묻혀서 지맘대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간곳이 없었는데 주일날 와서 설교를 듣고 또 바쁜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서 조용히 성경을 읽는 가운데 거기에서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아 그렇구나, 야,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었지. 맞아 아 그래.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확 밀려오는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셔 그 뛰어나신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지식의 인상이 맨 처음 회심할 때 지멋대로 살다 쌩고생 하던 때에 깨닫는 이 빛을 능가하는 거예요. 그렇게 신앙 생활을 안하려고 하니까 거기서 모든 문제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신앙이 진보하는게 아니라 시궁창에 갔다 빠졌다가는 케케거리다가 다시 끌어내 놓으면 또 기어들어가서 풍덩 빠져서 케케 거리고 또 꺼내놓고 또 들어가고 계속 그짓하다가 머리가 히끗히끗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 신앙의 연륜, 연륜 좋아하네, 똥통에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그게 무슨 연륜이예요. 그냥 쌩고생하면서 늙은 거지. 성화는 무슨 성화예요. 그게. 성화는 없어요. 그래서 그냥 계속 조잡하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높아져, 사람들이 그런걸 몰라요. 제가 요새 절실하게 느끼거든요. 제가 하여튼 좀 여러분들에게 하여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말씀을 먹이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해요. 그래서 이제 공부를 계속하는데 공부를 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은 물론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줄때도 있죠. 그렇게 책속에 붇혀 하나님을 알때에 느끼는 감동도 대단하지만 저 나무 그늘에 아래에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쭉 읽을때 그거를 묵상할 때, 확 들어오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은 어떤 학문의 책을 읽으면서도 받을 수 없는 빛이예요. 그래서 그때 무릎을 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결국은 우리가 책속에 묻혀서 하나님에 대해서 학문을 배운다고 까불어도 그 빛은 이 빛을 받아서 전달해 준거고 성경을 통해서 들어온 그 빛은 찬란하게 들어온 빛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에 잘 정리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이 진리의 빛이 성경을 통해서 잘 들어오기 때문에 그 지식도 무시하지 않는 거죠. 두개가 계속 순환관계에 있는거죠. 막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때에는 아침에 성경을 읽었는데 한 두달치 설교할게 나오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번밖에 안모이는데 주일날, 주일날이 일월일, 목일금,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된단 말이예요. 그렇잖아요. 그럼 성경에서 들어온 빛은 놀라운 거죠. 그래서 솔직히 얘기해서 세상에서 방황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얻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 당시에 하도 무지했으니까 완전 깜깜한데 있으니까 후레쉬 하나 비출 때에 와하고 빛 하고 벌렁 나가 자빠졌지. 아니 빛 가운데 살아봐요. 그럼 있지 후레쉬 하나 비춰봐도 아무도 그거는 주목 안해요. 워낙 그때 무지했기 때문에 그게 엄청난 것처럼 보이는 거지, 사실은 어떻게 이 성경이 이 진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의 빛과 그게 번쩍하고 들어오는 그것을 비교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세요. 그런 지식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고인 성경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어떻게 예수 믿고 예수 이용해서 한번 이 세상에서 한번 하나님없는 번영을 꿈꿔볼까 그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주일 내내 고단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하면 교회에 와서 위로나 받고 그리고 좋은 얘기나 듣고 갈 수 없을까,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더해주시지 않으면 난 오늘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라는 이런 불퇴전의 용기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마음 같은 것들이 있겠느냐 입니다. 인생의 참고라고 하는 것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예요. 진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나머지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것이예요. 그런 마음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C.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일단 진리의 빛에서 떠나게 되면 인간은 절박하게 사모하는 것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에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 교회 나올 때 부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그럴거 같죠? 절대 그렇게 안한다 얘기예요. 명예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됐으면 명예를 복구시켜 주십시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나는 결단을 하고 예배속에서 부자로 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여버리시든지 둘중의 하나 하겠나이다 그렇게 매달릴거 같죠. 그렇게 안된다는 거예요. 진리 이외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목숨걸게 못만든다 입니다. 그런다면 그건 인간의 쌩고집으로 그 짓을 하는거지 그게 신앙에서 출발한거냐는 것이죠. 마치 지 엄마한테 노트북 컴퓨터 사달라고 그러고 부엌칼들고 들어와서 자기 목에다 대는 녀석하고 똑같지, 그게 어떻게 진정한 부모를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 행동이냐는 거예요. 그게 안되는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믿는게 힘들고 고달프냐고 자꾸 이야기 하는데, 자꾸 딴데서 기쁨을 찾으니까 이게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변화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는 기쁨은 이것을 마귀가 가만 둘리가 없고, 우리 뼈속깊이 배인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음탕한 고멜과 같은 기질이 그런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살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는 삶을 위해서는 진리의 빛이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빛이지만, 부끄럽게 살려고 할 때에는 오히려 그 진리가 없는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참 편리하고 어두움이 그에게 유용하지 진리의 빛이 밝게 비치는 그곳에서 벌거벗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다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예요. 근데 이 이야기를 수없이 언어를 바꾸고 논리를 바꾸어서 설명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듣지 않는 거죠.
지금으로부터 약 8년전에 방배동에 있을 때에 제가 한 20주 가까이에 걸쳐서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릴 때’라는 시리즈를 설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거기에 들어가서 그 시리즈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한 일주일만이라도 여러분들이 매달리면 여러분 인생의 눈이 확 떠질거예요.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어때요? 예전에는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그래서 열린 하늘에 사진까지 내고 근사하게 간증까지 썼는데 지금은 내가 돌이켰습니다 하는 그 수렁에 다시 빠져서 그래서 그 구정물을 먹으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죠. 그게 결국 뭐야? 그때 그 하나님을 알게 하셨던 그 지식을 버린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삶,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만의 독특한 거룩성,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거죠. 그러면서 자신이 오래 교회 다니고,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다니는 이유가 달라지는 거죠. 예전에는 진리에 붙잡혀서 진리의 말씀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붙들고 진리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런 진리의 맛을 이미 잃어버렸어요. 이미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예요. 예전에는 지식이 그를 붙들었지만, 이제는 그가 지식을 버렸어요.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한때는 하나님을 만나고 펑펑울고 가슴을 찢으면서 통렬히 회개하던 그 자리에서 오늘은 배내놓고 졸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기대하는 삶속에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한 많은 자긍하는 마음과 자만심들이 가득차고 삶은 다시 개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무슨 신앙의 연륜을 이야기 하겠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주셨지만 스스로 정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 그 지식을 버렸어요. 남편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이방 남자에게 가서 몸을 팔고 그리고 거기에서 애를 낳아가지고 왔던 고멜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만약에 하나님이 호세아처럼 뼈속깊이 사무치는 그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벌써 멸망했을 텐데 그 사랑에 사로잡힌 남편 때문에 지금도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다시 손을 내미시는 것이죠.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고 물으시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될 때에 삶이 어떠해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는 것이예요.
III. 하나님 백성의 영광
자꾸 여러분을 15년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을 느끼는게 뭐냐면 신앙의 길을 쉽게 가는 길을 자꾸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신앙의 길을 쉽게 걸어가는 길이 있다고 가르쳤던 모든 가르침은 거짓으로 판명되었어요. 모두 거짓이예요. 참다운 길은 그런데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설교를 모두 못끝냈습니다만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첫사랑을 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첫사랑을 버렸을때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신 지식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이 아니예요. 주님이 택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주셔서 지금도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슴에 부여잡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고난과 시련의 길을 지나면서도 주님의 위로로 주님과 동행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같은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호세아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그래서 방탕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간 그런 음란한 여인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의 아내자리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곳에서 번영 많이 찾았지만 거기엔 참된 번영도 없고 행복도 없는 것이죠. 오늘 이렇게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성도의 참된 행복안에서 신 지식 안에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3.열정과 냉정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8-11).
I. 본문해설
5장까지 이스라엘의 죄를 격렬하게 책망하던 선지자는 드디어 6장에서부터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을 예고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7장에 와서 다시한번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급성을 다시한번 나열하고 있습니다.
II. 이스라엘의 영적성태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8절부터 11장까지 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직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들이 열방에 혼잡되었다는 것입니다.
A. 열방에 혼잡함
여기에서 에브라임은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에요. 그래서 이 명사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애정이 담긴 표현이에요. 그런 깊은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현실의 상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방에 혼잡된 상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혼잡되었다 라고하는 의미는 마치 술과 물을 섞거나 반죽에 누룩을 섞는 것처럼 이렇게 나뉘어지.. 원래는 다른 재료였는데 함께 섞여서 나눌 수 없게끔 함께 섞여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엔 나뉘어져있었지만 섞여서 그 둘을 구별해 내기 어려울정도로 하나가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그 반죽을 할 때에 여기 보면은 지금 빵 이야기가 앞뒤로 계속 나오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혼잡된다 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 반죽할 때에 쓰는 그 표현이라는 거죠. 그래서 빵을 할 때 밀가루에다가 우유도 좀 넣고 그리고 또 버터도 넣고 또 설탕도 좀 넣고 뭐 기름도 좀 넣고 그리고 인제 이렇게 물을 넣고 반죽을 하잖아요. 그니까 대여섯가지의 재료가 들어갔지만 일단 반죽이 되고나면 그거를 구분하는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 함께 그렇게 비벼져 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근데 이것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속에 심으신 것은 이 세상 백성들과 섞여서 한덩엉리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하나님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에게는 없는 신앙을 주시고 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주신 것은 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백성들과는 구별되는 존재가 되고 구별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남이 받은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셨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지 않는 사람들을 잘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세상의 있는 사람들을 닮아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은 사실 신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니고 심리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선 이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들과는 다를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를 바라보지? 자신들과 똑같을 것이라는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우리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아는 백성들을 심어 놓으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고 또 다른 가치를 따라서 다른 세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그들도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에요. 그들에게 없는 그무엇을 우리가 소유함으로말미암아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인생을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참다운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심리적으로도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교회에 가면 우리와 꼭 같은 인간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더면 우리는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거에요. 저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와는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을거야? 나와는 다른 신념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거야 이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발길을 들여놓게 했던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나는 이제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져야 되겠다 라고 마음먹었을때 사실은 개신교교회에서는 그냥 별로 폼이 나지 않는 것 같았어요. .
맨 2층교회 아니면 우리 어렸을 때보면 천막교회, 그러고 들어가고 우리가 사는 집하고 똑같은 교회 그 장소를 그 예배당이라그러고 모이고 이러는게좀 싫었어요. 이게 왜 그러면 뭔가 우리하고는 좀 틀린 큰 집에서, 들어가기만 해도 기가 죽을 것 같은 자기가 아주 왜소하게 보이는 그런 커다란 예배당이 있는 교회나 성당에서 세상에서는 전혀 못 느끼던 뭔가 좀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교회당을 찾았지 에너나 나나 다름이 없고 그저 똑같은데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찾은 것은 아니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앉은뱅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시간이 되어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더니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인제 곧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로 한 기도하러 가는 사람 양심이 가장 예민해질만한 시간과 장소에서 아주 서글픈 표정으로 두손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요청하는게 이 사람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나같이 비참한 사람을 도와주지도 않고 몇발자국 더가서 하나님 하고 부를텐데 그게 양심에 찔리지 않니? 이렇게 호소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죠.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은 옛날에는 주일에 그지들이 교회에 많이 와서그 앞을 죽 진을 치고 서있었습니다. 그러면 평소 지하철 역 앞에 같았으면은 흥하고 그냥 탔을텐데 들어가지마자 일주일 동안 잘못한 거 회개를 해야 될텐데 그래도 뭔가 이사람한테 한푼 보태주면 들어가서 기도할 때 좀 마음이라도 좀 훨씬 따뜻해지지않을까? 이런 심리를 노리고 거지들이 구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조상이 이미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서 이미 조상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그랬어요. 그러면서 뭔가를 이렇게 그 한줌 달라고 애걸을 하는데 이사람이 뭐좀 달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좀 뭐라고 그러길래 한번 고개를 들고 뭐좀 줄줄 알았더니 너무 실망스러운 얘기가 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래서 없으면 말이나 붙이나말지 힘들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일어나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람이 준 금액과는 비교도 안되는 많은 금액의 돈을 주어서 이사람에게 은과금은 교회에 많구나 일깨움으로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것이 아니라 은과금이 왜 없겠어요? 없으면 교인들이 낸건 어디다 갔다가 감췄어요. 은과 금은 있었지만 이사람에게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한 세상이 줄수없는 것을 보여주기위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어놓으신 이유에요.
사람들은 종종 그러거든요? 이 세상이 너무 어둡고 믿음으로 살기에는 너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이다. 그러는데 예수믿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에는 인류 역사상 없었어요. 언제나 예수 믿는 사람은 소수였고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둠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빛을 싫어했어요.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한 것을 보면 그 빛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알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일 필요는 없는 거죠. 여러분 제가 종종 드는 비유입니다만은 비행기가 밤하늘에 높이 떠서 밤새도록 날라가요 그리고 인제 어딘지도 모르는 캄캄한 산속을 지나서 평야를 지나가면은 저 멀리서 비행장이 나타나는데 주변에는 불 다꺼지고 그리고 들판에 등 몇 개 켜져있는데 그 등 몇 개를 보면서 그 어마어마한 비행기를 뜨고 내리지를않아요? 캄캄한 밤바다에 풍랑을 만나고 급히 피하는 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배가 그렇게 안전하게 피하기 위해 하늘에 수천개의 조명탄을 쏘아서 대낮처럼 밝혀야지만 배가 안전하게 피항을 하는 것은 아니죠.
등대 하나만 밝게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어도 그 불빛 하나를 의지하여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피하는 것이죠. 그래서 열방과 혼잡된 일만명의 예수믿는 사람이 할수 없는 그것을 또렷한 신앙을 가지고 신앙 올곧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닮아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한사람이 해낼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캄캄하고 어두운 시대에 항상 몇 개의 등불을 사용하셔서 한시대를 깨우고 많은 작은 횃불들이 들려 일어나게 만드셨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뿌려질 때에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추수철에는 어마어마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나라를 이세상에 오게 하신 것이죠. 언제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다수가 되려고 꿈꾸던 때에는 교회가 순수함을 잃어버렸어요.원래 다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자꾸 다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악은 선에 대해서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에 인간은 하나님과 친교하고 그 사랑의 빛 아래서 살도록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하나님을 끊임없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신의 판단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발견 할수 없을 때마다 다수가 되기를 원했던 거죠. 그래서 그런 심리는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건널목이 있거나 신호등이 켜졌을때 모든 사람이 칼같이 신호등을 지키며 빽빽하게 양쪽에 서있는데 용감하게 거길 뛰어가서 건널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두사람 슬금슬금 건너서 건너가는 사람이 대세이고 시간을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서너 사람밖에 안될 때에는 서있는 사람이 왠지 찔리고 그리고 바보짓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결국은 건너가는 거죠. 데모할때도 혼자 한번 그 횃불들고 화염병들고 한번 데모해보라그러면 못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수없이 들면은 다수가되는 그 속에서 힘을 얻어서 말하자면은 용기가 나와서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이 다수가 되기를원하는 인간의 부정적인 욕망이에요. 사실은 이러한 기운들이 교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교회의 세속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거죠.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르고 건강하게 되면은 비록 그 교회는 하나밖에 되지 않아도 그 빛을 많은 곳에 펼치고 실어 날라서 다른교회로 하여금 우리도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과 저 교회가 가고 있는 길이 많이 다르구나 하면서 복음안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가게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모르고 제마음대로 행동을 하다가 아주 뛰어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발견하게 되면, 수천마디의 설교를 들은거보다 더 충격적으로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게 신앙생활이 아니겠어요? 지금은 뭐 그런 이야기를 들읆 만한 상황이 안됬죠. 여러분들이 몇주째지금 주일 예배시간마다 바가지로 혼을 나고 있으니까 뭐 그런 얘기가 안되지 그런데 옛날에 안그럴때도 있었거든요. 옛날에 안그럴때에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교회 올때는 어쨌든 김목사의 책을 읽든지 뭐 방송을 듣든지 어쨌든 사전 지식을 가지고 왔단 말이에요. 왔는데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게 아니라 그냥 불쑥 온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와서 어차피 말씀을 들을수 있는 귀가 없으니까 그저 길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인상에 남는게 없는데 근데 숨길수 없는건 뭐냐하면은 지금이야 우리가 예배시간이 그저 뭐1시간 1시간반, 길면은 1시간반, 그렇지 않으면 1시간 15분인데 옛날에는 뭐 두시간도 하고 뭐 그저 뭐 그 그저 그냥 주님 인도하시는대로 그냥 그렇게 뭐 갔죠. 그런데 지금 요즘은 안인도하신다는 그런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래서 뭐그저 한 두시간이 기본이었는데, 도대체 견딜수가 없는거죠. 그래가지고 아 침묵이 흐르는 침삼키는 소리만 나고 성경 넘기는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예배의 분위기를 견디질 못해하다가 이 사람들은 도대체 예배를 어떻게 드리나 하고 돌아보니까 자기같이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더라 응. 그때서부터 이사람이 말씀은 속에서 안들어오지만은 도대체 저 성도들은 어떻게 된 인간들일까?왜 나는 5분도 못참는 예배를 왜 저사람들은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닦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거에요. 예배당에 덜렁들어오자 제일 먼저 눈에 뛰는게 교회 쭈욱 가운데 놓여있는 휴지통이었데요. 여기가 변소도 아니고 웬 휴지를 여기다가, 뭘 상식한 사람들이라고 그랬데요. 근데 사람들이 놀랍게 화장실 들어갈 때 가는 것처럼 보면서 두장씩 세장씩 뽑아서 가더래는거에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통이 비었데요.
그걸 어디다 쓰나 그랬더니 예배를 드리고 보니까 그렇게 하더라. 그 보세요. 수없이 예배를 들려도 자기가 잘못된 예배자라는 걸 몰랐는데 주위에 몇몇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만나는 광경을 보니까 자지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충격적으로 확하고 오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두신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이 기회고, 부패하고 썩은 것이 기가막힌 기회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 소긍은 부패하는 물건에 놓였을때에 진정으로 효과가 발휘되는 거죠. 혹 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놔두면은야 야 이거 기가막히게 소금을 뿌리니가 이게 기가막히게 안썩는구나 그러지. 아니 쇠덩어리에다가 소금을 뿌려서 놓은들, 그걸 안뿌린 새나 뿌린 새나 차이가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부패라고하는 사람 그자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훌륭한 기회죠. 캄캄해보세요. 그러면 작은 촛불하나가 얼마나 고맙습니다. 그 하나의 불빛을 따라서 온 가족이 이제 안전한게 그 물건들을 찾을 수 있게 됬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예수믿게 만들어주셨는데 그 인생들이 맨날 세상 썩었다고, 그러는 저는 더썩었지. 그러고 타령을 하고 앉아서 응?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으로 못사는 거를 정당하게 생각한다라고 하는 그 상상할 수 없는 거죠. 요새 이 테르툴리아누스 라고 하는 교부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참 충격을 받았는데 이사람은 정말 칼 같은 사람이었어요. 불꽃처럼 살다간 3세기의 교부였는데, 아주 엄격한 사람이었죠. 예수를 믿는다고 박해를 하면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오잖아요. 그때에 그 오래동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만한 엄청난 그 연설을 남겨요.
우리를 때리십시오. 우리를 두드려 눕히십시오. 우린 다시 일어날것입니다. 우리를 짓밟으십시오 우리는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해도 우리는 결코 여러분에게 그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으로 갚을 것입니다. 우리를 짓밟아 보십시오. 일어날것입니다. 때려 보십시오.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런 힘이 그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힘이에요. 그게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게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건데 열방에 혼잡되어 버렸어요.
B. 뒤집지 않은 전병
두 번째 상태에는 뭐냐하면 뒤집지 않은 전병의 상태에요. 여기서 나오는 전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뭐냐하면 뭐기름에 부쳐먹는 지지미같은걸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을 주식으로 삼았잖아요. 그래서 호떡같이 생긴 큰 빵을 화덕에 불을 피워서 굽는거에요. 그것이 주식이에요. 그 밋밋 나도 직접 거기 이스라엘에 가서 먹어보진 않았는데 얘길들으니까 그저 터키나 이런데서 먹는 것처럼 그렇게 달콤하고 그런 빵이 아니라 밋밋한빵있잖아요 저그거 참 좋아해요. 그거 뭐 그냥 소금만 약간 집어논 그 밋밋한 맛 있잖아요. 그거 참 좋아요. 그런 빵을 얘길하는거에요. 그런데 이 빵이라고 하는 거는 화덕에다 이렇게 집어넣으면은 이제 구운다음에는 어느정도 한쪽이 구워지면은 삽같은 거를 집어넣어서 이렇게 뒤집어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되잖아요? 안하고 내버려 둔거에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밑에는 불기가 올라와서 시커멓게 타고 위에는 설익지 않겠어요?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렇게 됬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열정과 냉정사이에서에요. 응? 열정과 열정과 냉정... 그렇게 그렇게 밑에는 시커멓게 타서 못먹고 그렇죠? 위에는 안익어서 못먹는거지. 밑에는 타서 못먹고 위에는 안 익어서 못먹으니까 결국은 전체적으로 아무 쓸모없는 빵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어버린 거죠. 그러면 그게 무슨 얘기냐하면은
III. 세속의 열정과 종교의 냉정
이게 결국은 세속의 열정으로 밑에는 타버렸고 종교의 냉정으로 위에는 안 익어버린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쓸모없게 되어버린거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저는 뭐 빵을 잘 구워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은 아마 그래도 빵이 오븐 속에서 구워질려면은 170도 내지 200도는 되야될걸요? 아마? 사우나가 100도 가까이 되니까 아마 200~250도 가까이 되야될거에요. 그런데 그 뜨거운 화덕을 그들의 마음에 비교한거에요. 마음이 이 세속적인 정욕으로 불타듯이 아주 펄펄 끓는 화덕이 된거죠. 집어만 넣으면 시커멓게 타는 거죠. 그게 바로 그들의 세속의 열정이에요. 얼마나 열정적인지 몰라요. 그렇게 사는거죠.
나는 어렸을때는 그 야구놀이하는거를 좋아해서 그저 야구장에도 다니고 스스로도 하고 그랬었는데 그래도 그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번에 뉴스보니까 무슨 부산에서 그 야구를 하는데 그 전날 보따리를 싸가져가서 사람들이 표 파는데 앞에서 텐트를 치고 자더라구요. 그러고는 표를 산다음에는 막 미친듯이 세수도 안했을거아니에요, 거기서 잤으니까 그러고 뛰어들어가는데 그게 왜그러나 그랬더니 좋은 자리 맡을려고 뛰어들어간거죠. 그 여러분 부흥회 한다고 부흥회 하는데 바로 못들어오고 전날 와서 텐트쳐야 된다 그러면 여러분 오겠어요? 그래서 여기다 돗자리 깔고 그리고 어등불키고 거기에 앉아서 거기 쭈그리고 앉아서 내일 빨리 예배당에 들어가야 되겠다라고 마음먹고 거기서 그러고 그러고있겠느냐 이거죠. 응? 이 오늘날의 이 사회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이 거대한 힘이 결국 뭐냐하면 자기 사랑의 열정이에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에너지가 되는거죠. 만약에 우리들이 굳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저 가서 옷 한 벌입고 평생을 살고 물은 물이요 돌은 돌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는 그런 불교신자같이 되어버린다면 아마 공장도 대부분 문을 닫아야 될거에요. 물론 이제 그런 그 그런 옷 입는 그런 옷은 많이 팔리겠죠 누구든지 입고 다닐테니까, 그렇지만은 하여튼 이 모든 사회를 움직이는 큰힘이 결국은 뜨거운 열정이나 힘이 그런거에요. 여러분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 텔레비전과 이런 것에서 막 들려오는 폭탄처럼 터지고 들려오는 수많은 광고들을 한번 귀기울여 보세요, 결국 뭐냐하면 니가 최고야, 니 행복 빼놓고 뭐가 있겠냐 니 좋은대로 살어 그게 최고야 딴거 아무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야 너 이런거 못먹어 봤지? 한번 먹어볼래? 이거 안먹고 사는 인생이 어떻게 인생이겠니? 너 이거한번입어봐라 너 이런거 한번 입어봤니 여태까지 입은거는 옷도 아니야 야 그거 이거 한번 입어봐 응? 그러고 야 세상에 그나이를 먹어서 왜 그 얼굴을 하고 사니 이거 한번 발라봐 그냥....
끊임없이 끊임없이 응? 뭐그정도가 아니지 응? 뭐 뭐 하여튼 뭐 형언할 한번 이런 기계 한번써봐 이런 기계도 못써봤지? 니가 구석기 사람이지 요즘 사람이냐 야 이거해봐 이거해봐 이거 먹어봐라 이거한번 먹어봐. 먹어봐, 발라봐, 봐, 눈으로 봐 ,그다음에 만져봐, 코로 냄새 맡아봐, 쏴악.... 모든 것이 전부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고상하게 하는 건 없어요. 그리고 오직 육체에 폭탄처럼 퍼부으면서 이렇게 한번 해보라구 하.. 굉장하잖아요. 굉장하잖아요. 그거 뭐 공정하게 하나씩 흉을 한번 볼까요?? 응. 남자들의 경우는, 정력에만 좋다그러면 모든지 먹죠. 그죠? 그리고 심각한 문제가 뭐냐하면 겨울이 되어서 잠자는 개구리들을 다 잡아먹어요. 여러분 요새 최근에 까마귀 보신 분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옛날에는 까치가 까마귀보다 훨씬 수가 적어서 까치가 나타나면 아 아침에 야 좋은 소식이 있을려나보다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요 까마귀 없어요. 거 왜 없어졌는지 아세요?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나가지고 서울 근교에 있는거 다잡아 먹었구요,
지금요 한 마리에 삼십만원이래 그것도 2년전얘기에요. 두 마리 한 세트해서 50만원씩받는데요. 아예 다 잡아먹어버렸어요.응? 그러고들 그러고들 살아요 응? 그 왜그렇게 살겠어요? 뱀이 산에다 돌아 다니는거지 그게 식품입니까? 그렇게 하면서 뭐 별사람이다있어. 어떤 사람은 와서 뱀집 사람이 막 전화를 하더니 사장님 빨리 오라그러더래 막 달려갔더니 이뱀 금방 잡은건데 그래서 보여주는데 말이지 하얀 뱀이더라는거야 이거 뭐 요만한 뱀이더래 그래서 이거는 진짜 몇십년에 하나 나올까말까한 뱀이래 얼마래 480만원이라그러더래 그니까 얼른 샀데요. 뱀집 주인이 하는 말이 신신 당부를해 끓여들일까요 끓여들일까요 그러더래. 그렇게 비싼 돈 주고 샀는데 그래사람들한테 보여줘야지 그래서 아이 내가 끓여먹을거라고 아 그 오래두면 절대 못쓰니까 오늘 꼭 끓여드시라고 꼭 끓여드시라고 그래가지고 집에 갔다가 놓고 났는데 이 사람이 그 너무 비싼걸 사니까 사람들에게 자랑도하고 싶고 또 바쁘니까 3일을 동안 못끓였데 그래가지고 집안 화원에다 이렇게 놔줬는데 그 하얗던 뱀이 다시 보통 뱀으로 바뀌더래 결국 거기에다 색칠을 해가지고 말이지 응? 그렇게 해가지고 막 기가막힌 뱀인것처럼 만들어가지고 그러고 파는 거에요 남자들은 힘에 좋다그러면 뭐든지 먹어요. 여자들도 마찬가진데, 그죠? 그거 뭐 그냥 원판 불변의 법칙인데 그거를 무슨 칼로째고 가르고 뜯어내고 그래봐야 별로 나아지는것도 없는데 그렇게 하면서 살잖아요. 여러분 교회에서 교회에서 이 교회에 중대한 어려움이있고 나라에 위기가 닥쳤으니까 우리 이틀만 일주일만 아침마다 금식합시다 그러면 안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뭐 목숨이 위태로울 때 까지도 기꺼이 굶잖아요. 그게 전부다 뭐냐하면 이게 뒤집지 않은 전병에서 밑에서 타는 세속의 열정이라 이거죠. 그에 비해서 어떻게 됬죠?
A. 영적 힘을 잃음
신앙적으로는 아주 냉정한 시대가 된거에요. 그러니까 전쟁도 없고 평화롭고 물질도 풍요하고 하니까 이제 아무 걱정없이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상황이 됬잖아요? 그런데 절대 그렇게 안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세속적으로는 펄펄 끓는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차가운 가슴을 가진 냉정한 사람들이 되어버린거죠. 이런 상황속에서 나타나는 네가지 특징을 오늘 본문이 제시하고 있어요. 그게 첫째는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하기를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그랬어요. 도대체 그 힘이 뭐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그 위대한 힘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는 최근 한 30여년동안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힘에 대한 인식이 매우 잘못 되있는거죠. 그 힘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세속적으로 변해서 다른종교를 가진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요즘 뭐라그러는지 아세요? 특히 불교계있는 사람들이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예수믿는 것들은 공산당과 같이 비슷해서 어딜가든지 모임을 만들고 모임을 만드는 이유는 다 지들끼리 해먹기 위해서 그러는 거다. 진짜 전세계에서 모임을 만드는데 최고의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히브리서에 보면은 마지막때가 가까울수록 그렇게 모이기에 힘쓰는자가 되라고 나오지만 그것은 모이기를 힘쓰라는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주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신령한 교통을 위해서 모이라는 거죠. 모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요. 모인 그 사람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움직이고 하는 그것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힘은 이 힘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진리의 힘이에요.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진리에 속한 힘을 의미하는 거죠.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는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시죠. 마음이 가난한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그리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신 다음에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것이요. 사실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명제거든요? 역사를 보면 온유한 사람이 땅 차지한적 아무도 없어요.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뭐가 좀 강당이 있고 오기가 있고 그리고 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되겠다는 야망이 있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했지, 온순하고 그저 이리 치면 절루 구르고 이리 구르면 절리 치이고 이러는 사람들이 늘 소작일이나 해먹었지 어떻게 땅을 가질수가 있겠어요?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제일 먼저 심혈을 기울여서 한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해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모두 땅을 돌려준거죠. 그게 지주계급을 뚜드려 엎은 거에요. 그래서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말하자면 강한 힘을 가지고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할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러니까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땅을 중심으로 해서 땅가진 사람들을 지배했잖아요 근데 그걸 나라에서 빼앗아서 땅주인은 필요없고 직접 땀을 흘리면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줘버리는거죠. 그러니까 그사람은 순식간에 수지맞은 거죠. 그대신 예전에 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한번에 잃어버린 것 아니에요? 모든 일들이 이렇게 다 아주 강력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땅들이 주인이 바뀌고 이렇게 된거라 이거죠. 여러분들이야 땅을 좀 많이 가지고 계시겠지만은 전 없거든요? 그래서 땅값이 올른다 그래도 좀 기분은 좀 좋지 교회가 땅이 있으니까? 근데 근데 뭐 그거 뭐 교회 어차피 땅값이 올라도 뭐교회를 뜯어가지고 공동으로 가겠수 어떻게 하겠수. 그런데 어쨌든 보면은 땅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 97%의 땅을 무슨 3%가 몇퍼센트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다그러잖아요? 에이그 사람들이 그렇게 흔들흔들하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어떠하리 그런 사람들은 땅을 넣을 손을 손에 넣을수도 없고 또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소유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선 온유한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한번도 그런 진리는 성취된적이 없거든요? 아니 우리처럼 온유한 사람이 어딨어요? 어디 땅이 있느냐는 말이에요. 어디 땅이 있냐? 그거 저 그 오히려 강팍한사람들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여러분 모두 강팍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땅도 많으면 헌금도 많이 할거아냐? 그게 아니거든요. 그 땅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얻는 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을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감화력을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 온유하셨잖아요. 그죠? 마지막에 무덤도 남한테 빌려서 시체 장사지내셨잖아요. 예수님 땅이 어디있었어요? 어딨어요? 그래지금 온땅이 그 주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그게 주님이 그렇게 땅을 점령해 가시는 거죠. 그럼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 진정한 감화력은 말이죠, 우리가 가지 않아도 그 땅을 정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 부산에서도 여러분의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수 있어요. 그 땅도 여러분들의 땅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하라고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시는거죠. 그 주시는 영적인 은혜만큼 그것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하고 은혜로 이 세상을 바꿔놓고 정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 아니에요? 자기 자식이지만 팬다고 말을 듣습니까? 얼른다고 말을 듣습니까? 돈주면 1시간동안은 말을 잘듣겠죠? 그러고 까불고 말안듣다가 예가 엄마가 만난 하나님 만나고 회심해봐요. 그러면은 예전에 회심하지 않았을때는 치 우리 엄마는 교회에만 미쳐서 말이지. 이러던 얘들이 세상에 존경할만한 분이 엄마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해요. 그러고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를 따라. 그게 뭐에요? 그게 아이들을 정복한거아니에요. 그런것들이 영적인 힘이에요. 영적인 권세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집안에서 이번 추석때 여러분들이 착한일 많이 했다 그러데요? 그래서 그 시골에 많이들 내려 가셨다고 그러더라구요. 덕분에 우리 그날은 좀 썰렁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만은 거? 거 뭐 기왕에 뭐 내려가서 거 또 뭐 그 시중들고 그러고 귀찮은데 아이고 주일이니까 에이고 주일날 어elf가 본교회를 지켜야지 간지럽죠? 네. 간지럽죠?
그런데 인제 갔단 말이에요. 그렇게 가서 희생을 하고 더많이 수고를 하고 더 물질로 더 많이 사용을 해서 예수 믿는 나 때문에 동기간들이 덕을 입고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고 그렇게 되면은 그러면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 되어서 그래서 사랑으로 그 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거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심으셨을 때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힘이에요. 돈 많이 벌어서 돈 못버는 형제들한테 거드름 떨고 발로 밟으라고 우리에게 그런걸 주신 것 아니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건 바로 그런 영적인 힘을 가지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데 열방에 혼잡이 되어버리니 그 세속의 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켜버려서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물러나게 된것이죠. 여러분 이제 이렇게 가을이 지나서 겨울이되면 우리 어렸을때는 김장을 많이 했어요. 저희들 식구 뭐 한 대여섯식구있었는데도 한200포기씩 그렇게 김장을 해서 그래서 뭐 그 반찬을 할 돈이 없으니까 그것만 한 5월달까지 계속 먹는거죠. 하나만 있으면 김치로 그냥 썰어노면 김치고, 그다음에 찌개를 끓이면, 김치찌개 볶으면 김치볶음, 물을 좀 더 부으면 김치국. 그렇게 해서그냥 그렇게 계속 김치만 괴롭히면서 살잖아요? 응?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옛날에 따뜻한 난방도 별로 없던 시대에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펌프에서 물을 길어 올려서 소금을 풀어야 되는데 잘풀립니까?안풀립니까? 잘 안풀려요. 그래서 집어넣고 빨래방망이 같은 걸 가지고 막 돌려도 잘 물이 소금물 잘 안타요. 소금물이 타져야지만 거기다인제 이게 그 무하고 배추하고집어넣어서 풍덩풍덩 담그잖아요. 그런데 참 놀라운건 말이죠. 염전에서 그 소금을 인제 만들잖아요. 한 27일정도 되면 소금이 돼서 나오는데, 그걸 긁어서 그 저기 이 가마니에다가 담아요. 담아가지고 부두에 나와서 배를 대고 배에다 싣잖아요. 그러다 이 후끄를 잘못해가지고 하나 풍덩 떨어뜨려요. 그러면 거기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그 소금 한 가마가 값이 얼마안되지만 그거를 맨발로 그거 거 맨발로 거 들어가가지고 그거를 그 그 긁으는데 그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뜨거운 뙤약볕에, 에 그거를 아까워서 불과 한1,2분만에 그 물속에서 다시 그 가마니를 꺼내면 거의 소금이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소금은 본래 바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바닷물을 만날 때 자기의 고향을 만나서 확 풀어지는거에요. 성도가 지금은 교회에 있지만 원래 고향이 세상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가면은 그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시시해 보이는 일에도 마음이 강력하게 끌려서 세속화되는 것이 그게 예수믿는 사람들의 정체다 라고 하는 것이죠. 늘 한쪽에서 정권을 잡다가 정권이 바뀌니까 사람들이 근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뭐라 그랬냐면은 야 그 저사람들이 이렇게 오랜만에 정권을 잡았으니 얼마나 많이 해먹을까 그랬죠. 그랬더니 두가지 학설이 나뉘는데 그것도 늘 해먹던 사람이 해먹는거지 거 해먹어 보지 못하던 사람들은 거 잘 못해먹는다. 또 한쪽에서 반론이 나오기를 해먹던 사람들은 늘 해먹어서 배가 불르기 때문에 조금밖에 안해먹지만 안해먹던 사람들은 쭉 안해먹어서 배가 고팠기 때문에 때만 만나면 막 해먹는다. 그런 이야기가 들리는 것도 결국은 신자에게 그대로 적용되는거죠. 그래서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오래동안 신앙안에 살면서 담타고 담싸고 살던 세상 몰랐었는데 신앙의 문을 제쳐두고 불신앙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서 유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유혹이 많았구나 라고 정신없이 빠지게 되어서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악에 빠지는 것보다 선하던 신자들이 악에 빠지는게 훨씬 쉽게 되는 거죠. 그렇게해서 결국은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이런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수가 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수가 되면은 결국은 그 다수들이 모두 어떤 생각을 갖겠어요? 서로 서로가 하나님의 뜻대로 안사는 일을 위해서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는거에요.
호주에 가면은 말이죠. 유나이팅 처치라는 교단이 있어요. 그 교단이 왜 유나이팅이 됬냐하면은 함께 연합을 하자 그런뜻으로 유나이팅이라는 교단이 됬는데 그 교단이 된 중요한 배경이 뭐냐하면 동성애 문제였어요. 그래서 무슨뜻이냐하면은 동성애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지만은 외국에는 훨씬 많구요, 95년도엔가 에는 거기에서 100만명의 동성애자들이 모였어요. 2회할때에 한 50만명이 모였는데 그때에 제가 거기 집회를 갔는데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올라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셨어요. 이나라가 어떻게 될려고 이 동성애자들이 50만명이 모이고 명세기 기독교 국가라는 곳에서 50만명의 관광수입을 노리고 그 큰 행사를 유치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게 기도의 요지였어요.
요즘엔 간단해요. 만약에 동성애에 빠진 사람이 나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그거를 허용해야한다. 그게 무슨뜻이냐? 그러면 온세상이 다 그 나쁜 사람들이다 정죄하면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느냐 또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 아닌사람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그들이 동조를 해주겠느냐 그러므로 동성애자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딱 좋은 사람은 동성애자인 목사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목회자도 동성애를 허락을 해야된다. 명백하게 말 안되죠? 말되요? 말 되요? 안되요? 근데 그 사람들은 그게 되는거에요. 호소력이 있게 된 거지. 그게 뭐에요? 판단력이 흐려져 버리는거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은 뭐라그러냐면은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지혜가 없어지는거죠.
B. 지혜 없음
그래서 세속의 열정에 들뜨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종교에 대해서 냉정해 지게 되면은 백발이 희끗희끗해서 얼룩얼룩해져도 철이 없이 사는거에요. 철이없이. 결국은 판단력이죠. 판단력. 사람을 성숙하고 깊게 만드는 것은 육체가아니에요. 사실은 육체는 젊었을 때 가장 한껏 완전하지,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나면은 신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완전함으로부터 멀어져서 자신도 거울을 보면서 이게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되죠. 나이든 사람들은 사진만 찍으면 불평하는거야. 잘못나왔다는거야. 잘못나왔다. 이뭐 내가 얼굴이 이런게 어딨냐 저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거든요? 사진을 찍었을 때 아이구 잘나왔네 이거는요 그저 30대 중반까지나 가능한 얘기지, 지금 찍으면은 항상 다른사람들은 항상 뭐 아유 실물보다 훨씬 낫네 그러면 더 속상한거에요. 그냥 빈말이라도 아이구 사진이 그 어떻게 이따구로 나왔지? 그러면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위로를 받는데 아이구 실물보다 100배는 낫네. 근데 자기는 동의가 안되는거에요. 그렇게 점점점점점점 멀어지는거에요, 근데 결국은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외모는 그렇게 사라지고 멀어지는것이고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에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 지금은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있죠. 뭐 어마어마한 생명의 은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만나고 싶은 따뜻한 사람들있죠? 미인이에요? 그런거 상관이 없죠. 그거에 끌리지 않고 어? 또 그때에 미인이었다고 하더라도 40년전 사람인데, 지금 만나면 짜증날거아니에요? 그니까 그게 아니고 그렇게 우리가 오랜세월이 지났는데도 잊혀지지않고 우리와 큰 인연이 없어도 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게 되고 그리고 감동을 받고 그 시절 그사람과 함께 있었던 장소,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정신과 영혼이고 마음이지 그 육체의 그런게 아니잖아요. 우리들이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명절이 되던지 하면은 그 돌아가신분들 이렇게 그리워하잖아요. 그죠?
저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돌아가셨으니까 할머니 생각을 금년에도 참 여러번 하면서 시름에 잠겼어요. 그게 그랬을 때, 아 그 우리 할머니가 무슨 절세의 가인이었겠어요? 아니면 미인이었겠어요? 그런거 상관없거든요 그죠? 에? 에. 그런거 상관없이 그저 치마 폭을 꺼내서 그저 코를 닦아주시던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뭐냐하면 결국은 인간의 마음이에요. 정신이고, 이런거란 말이죠. 그러면 사람이 지혜가 없어서 백발이 얼룩얼룩해져도 거기에 합당한 지혜를 갖지 못할 때에는 그 인간이 너무 불쌍한거에요. 여러분, 음. 같은 일을 해도 젊었을 때 그걸 하는 것과 나이 들어서 하는건 틀려요.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 사람들에게 웃기는 행동을 젊은얘들이 하면은 유머가 있다 그러는데 나이든 사람이 하면은 주책이 없다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리고 무엇인가 당치도 않은 것을 향해서 한번 해볼려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그걸 하면 도전인데, 나이든 사람이 하면 노망이에요. 응? 그러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참다운 지혜가 젊었을때는 좀 부족해도 그것이 패기요, 열정이요, 자기 주장처럼 보이지만은 나이가 들어서 이런것들이 없게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나이가 들수록 외모는 들어가고 나이가 들수록 외모는 들어가고 내면에 있는것들이 바깥으로 나와서 이렇게 인식됨으로써 그럼으로써 이 육체의 완전함이 점점 쇠퇴해져가는 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그런 그런 아름다움을 가져야 하는 것이 그게 신앙인 것 아니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아버지 우리엄마가 돈많고, 절세의 미인이라고 할지라도 늘 방황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 밑에서 산다면은 우리가 그분들을 존경할수 있겠어요? 비록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남다른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하셨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관이 분명하고,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에 원칙이 분명히 서있는 선이 굵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분이 고매한 학식이 없어도 우리는 그 아버지 존경할 수 있고 그 어머니 사랑할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타락한 상태가 되니까 이것이 이러한 신앙적인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진리를 기뻐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은 철이 없어요. 철이. 이야기를 해보면 나이가 많아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서 주위에선 할아버지 소리듣고 이제는 인생을 달관해서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의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철이 없어요. 그게 결국은 어디서 와요? 하나님을 아는 종교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세속의 열정에 들뜨게 되니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지혜의 빛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C. 하나님께 교만함
이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에는 뜨거운열정을 보이고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되었더니 이사람들은 하나님께 교만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만이 그 얼굴에까지 증거가되어서 나타났다그랬어요. 응? 나타났다그랬어요. 그게바로 세속의 열정에 들뜨고 신앙에 대해서 냉담한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마음이에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지식 때문에 교만하고, 물질이 있는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교만하고, 젊은 사람들은 젊음 때문에 교만하고, 인생을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경험 때문에 교만해져서 결국은 하나님께 이게 깊이 굴복하는 마음이 없는거에요.
하나님은, 잘들으세요. 하나님은 온 세상 해뜨는데부터 해지는데까지 온누리에서 영광 받으시기 전에 제일 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안에서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거에요. 그리고 그 마음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아세요? 그 마음은 하나님 앞에 비상한 헌신을 꿈꾸는 마음이나 어마어마한 작정헌금을 꿈꾸는 마음이나 감히 그렇게 해드리지도 못할 뻥으로 가득찬 비전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은 왜 큰 비전에 들뜨고 어마어마한 헌신을 꿈꾸고 그러는 마음안에서 보다도 당신을향한 온전한 절대 의존의 마음안에서 영광을 받으실까?
궁금하죠 그죠?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꿈 때문에 하나님을 찾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의존의 감정자체가 사랑의 감정이에요. 의존의 감정 그 자체가 자기 무하의 감정이야. 나는 없다라고 하는 감정이란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은 자기무하의 감정이고 그러니까 자기가 절대로 없다 그뜻이 아니라 가치에 있어서 자기를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을 어떤 가치가 있는 유 이렇게 생각을 안한다 이거지. 하나님을 떠나서 내인생에 의미있는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자기 무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거죠. 응? 지금도 참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교수시절에 제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됬는데 그때 한창 부흥을 경험하면서 마음이 진짜 뜨거웠을때죠. 그때 그 어느날 깊이 기도하는가운데 어떤 기도가 나오냐하면은 그런 기도가 나오더라구. 하나님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의 영광,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마음쓰실 시간이 있으시다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챙기십시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저에게도 행복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를 경험하게 됬어요. 근데 그때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해지고 드높아지는거 아무 의미가 없는거에요. 자기가 그 절대의존의 감정의 정체가 그런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감정은 뭘 내포하고 있냐하면은 완전한 순종을 내포하고 있는거에요.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자체는 그 마음자체는 일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꿈에 들뜬마음이나 용기있는 마음이나 도덕적인 도덕적으로 깨끗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그 심령안에서 먼저 영광을 받으시는 거에요. 교만은 그것의 정반대의 마음이에요. 정반대의 마음이에요.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독립할수 있다는 마음이며, 한걸음더 나아가서 하나님 보다는 내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에요. 질서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보다는 위 입니다라고하는 마음이란 말이죠.
D. 이 세상에 비굴함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죠. 결국 마지막에 그렇고 보니까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세상을 향해서는 비굴한 마음이 생기는 거죠. 나라가 위기에 만나면 그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하는데 애굽으로 앗수르로 돌아다니면서 도움을 얻고 구걸을 외교로 하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질때 이 세상을 향해서는 말할수 없이 비굴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그리고 상한 마음으로 살지 않을때 우리가 얼마나 뻣뻣하고 단호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웬만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꺾이지 않습니다. 웬만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꺾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꺾이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내가 꺾일때, 거기에는 깊은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 아픔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꺾이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꺾이지 않아요. 좋은 말씀들으면 이거는 우리 남편이 좀 듣고 변화되야되는데, 언제 한번 심방을 갔는데 말이에요. 심방 한시간 하는 내내 자기 남편 깨져야된다는 얘기만해. 내가 마지막에 하두 화가 나서 너나 잘하세요. 응? 아니 뭘? 자기나 잘하지 말이지. 자기는 무슨 높은 신앙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처럼 말이지, 남편 깨져야 된다고그러고 말이지 우리 교회 아무개 깨져야 된다구, 그게 결국은 뭐에요?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안꺽어지는 존재에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가서 자기 이익과 부딪힐때에는 얼마나 이 세상을 향해 고분고분하고 잘 꺽어워지는지 이루 말할 수도 없는거죠. 신앙의 지조같은 거는 어차피 없으니까 그저 미리 미리 알아서 충분히 꺽여주는 거죠. 그런다고해서 이 세상이 그들을 환영하느냐 하면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유혹을 받지만
우리의 정체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회심을 할때에 이세상을 배반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의 가슴에 칼을 꽂고 돌아온 사람이야, 우리가 신앙의 맛을 잃어버릴때에 다시 그 세상이 그 세상이려니 하고 가지만 세상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칼을 꽂고 배반한 사람이고 하는 것을똑같이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하여 세상의 품을 향해 달려가도 세상은 그때 세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확인 할 때 까지만 우리를 목메게 부르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다라는 생각이 확인이 되면 그다음에 야멸차게 이 세상은 우리를 밟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진정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신자가 고무신 거꾸로 신어서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해 졌다는 그런이야기를 들어본적이있어요?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거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 돌아온 진정한 회심자가 아니라 말이지, 응?, 아니라 이거죠. 그런데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신자들이 비굴해지는 거죠. 요 몇주동안 여러분들이 많이 혼났는데 여러분 생각해보시에요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꺽임이 없는 것, 깨뜨려짐이 없는 것에 대해서 통렬하게 탄핵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이시간에 하나님 앞에 꺾이지 않는것만큼 이세상에 가서는 비굴하도록 무릎을 꿇고 세상에게 복종하면서 일주일동안을 사는거라 이거죠. 환난과 시련이 오고 핍박과 고난이 오고 그리고 유혹이 오고 신앙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나에게 커다란 어려움이 올 그런 위기 속에서도 노래부를수 있어요?
(찬양)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메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독수리 날개 쳐 하늘을 오름같이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이런 기백은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자신이 꺾여지는 통렬한 참회의 영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깃드는 신앙의 정신이다 얘기에요.
(찬양)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라
이 세상이 나를 다 버려도 나는 두렵지 않네
하고 외칠 수 있느냐 이거에요! 예배시간에 와서 맨날 졸고, 에! 그리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얼굴에 똥발르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럴수 있느냐 이거에요. 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고 그분 앞에 꺽여질 줄 모르는 그런 막된 예배생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위기에 직면할 때 그렇게 용기있게 외치고, 성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을 죽지 두 번을 죽겠는가! 이렇게 외칠수 있냐 이거에요. 응? 나는 오늘 죽어도 주안에 있습니다. 이런 담대한 고백이 있을 수 있느냐 이거에요.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나도 주님 앞에 가기를 원합니다. 라고하는 그 고백이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있을수 있느냐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타협하지 아니한 사람. 세상에 가서 비굴하도록 무릎을 꿇고 그렇게 타협을 하는데 그게 결국은 이 세상 열방에 혼잡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뚜렷하게 구별되어서 마치 물속에 던져진 기름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야합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라고 우리를 어두운 때에 보냈더니 빛을 발하기는 커녕 우리가 그들과 한무리에 혼잡되어서 살아가는거에요. 그게 이 세상을 항해 비굴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세상의 소금이니라 만약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 밟힐 뿐이니라. 그 비유를 들으면서 매우 어려운 구절이에요 이 부분은. 왜냐하면 소금이 맛을 잃을 수가 없거든요. 소금 상하는 거 보셨어요? 쉬어서 소금 버린적 있어요? 소금 자체가 그런 성질이 아니거든요 근데 이 어려운 구절이에요. 그게 당시의 배경이 있는데 옛날의 예수님 시대때는 소금이 바닷가에서 이렇게 그 걷어들이는 천일염이 아니라 암염이었어요. 땅을 파면은 나오는 거. 근데 그게 광물질하고 섞여서 나아는거에요. 그런데 그걸 공기중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은 공기가 들어오면 소금이 녹기는 하는거 아시죠? 습기를 빨아드려서. 녹으면은 이게 줄줄줄줄 액체가 되어서 흘려내려버리는 거에요. 그럼 마지막에 소금모양이 남았는데 이거는 소금기는 빠져버리고 광물질만 남은거에요. 그거를 음식에다 넣어 본들 짠맛이 나올 리가 없고 썩지말라고 집어 넣어 본들 모래를 뿌린거 같으니까 그것을 무엇에다 쓰겠어요
그거 소금 다 빠져나간건데. 바깥으로 버리는 거죠. 사람들에게 밟혀서 흙으로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 의미에요. 에?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진리의 빛 아래서 살아갈 때에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그 진리의 빛에서 우리들이 돌이키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육체만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을 그렇게 뜨겁게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던 신자들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신앙의 길을 전혀 떠나는거에요. 그래서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이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고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뜨거웠던 그 심령은 세속의 열정으로는 뜨거워졌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냉정한 사람들이 되어서 결국은 이 세상에 비굴하고 하나님을 아주 과감하게 맞서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빛을 소유하고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제멋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해 주는것. 이 세상이 어둡고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면서 여전히 선은 있고 악도 존재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는 진리의 빛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계실 것이다라고하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여러분들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가 여러분들이 살지만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 세상이 전부다가 아니고 이미 아직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나게 해 줄 수있는 사람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똑같이 먹고 마시고 이 세상의 한 시대를 호흡하며 살고 있지만 진리를 소유한 여러분들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는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에요. 이 세상에 사람들은 물질과 그리고 권력과 그리고 이 세상의 규모와 사람들의 모임과 집단의 크기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런 이 세상에 있는 이 보여줄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경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보여줄수 없는 진리의 빛, 진실의 빛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태양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할수 있는 그 일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세속에서는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종교에 있어서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비참한 처지를 기억하고 우리는 돌이켜 서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뜨거운 열정을 품고 그리고 주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먹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노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 있고 그런 마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의 힘으로는 구별된 삶을 살수 없다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에 부적합한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 속에서는 참회가 있고 예배 속에서는 결단이 있고 예배 속에서는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꺽어진것 만큼 우리는 세상속에서 일어서게 될것이며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린 것처럼 우리는 이세상을 비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물러간 여러분들을 다시 부르셔서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4.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잊음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4-6).
I. 본문해설
이제 거의 호세아의 예언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14장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고 용서를 받아서 번영할 것을 예고하는 낙관적인 전망으로 호세아서는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은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난 다음에 나라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요. 그러므로1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장엄한 번영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상하고 있는 신약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국가와 왕들이 그리고 거짓 사상들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그리고 그 신앙을 멸절시키기 위해 광분 하였지만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파되고 전파되어 14장에서 예언하는 바와 같이 포도나무줄기와 같이 감람나무와 같이 백합화와 같이 그렇게 뻗어나가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역사 속에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낙관론으로 호세아 예언을 끝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형통 속에서 주님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II. 형통 속에서 주를 잊음
그래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므로 부터 나는 네 하나님이라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하던 때는 첫째 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로보암2세의 치하였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이 되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없을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국력과 세속적으로는 영명한 군주 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극에 달하였고 사치와 방탕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대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식적인 표인 자비와 긍휼 그리고 사랑과 은혜 이런 것들은 이미 모두 잊혀지고 살인과 폭행 그리고 싸움과 광분하는 이런 사회의 타락한 분위기가 온통 세상을 더럽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모든 끔직한 방탕과 부패함 가운데는 형통 속에서 주를 잊어버린 신앙의 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잊어버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였을 까요.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켜주실 때마다 한 가지 사건으로 항상 그들을 데리고 갑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건져 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당시 가장 번영한 지역에서 열방과 어깨를 겨루며 혹은 그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지고 위세를 떨치며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의 그런 땅 을 차지하고 살았던 이름난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비참한 종살이로 연명을 하던 백성들이였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들어간 이후 국무총리가 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일정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리고 4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요셉은 아득한 옛날의 역사가 되었고 그리고 요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왔습니다. 역사적으로 요셉이 있었던 그 왕조는 정통 이집트인들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이민족에 의해 잠시 지배를 받던 왕조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인들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고 왕국이 다시 계승되게 되자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야말로 찬밥 이였고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건져내었던 히브리 노예 중에 국무총리가 되었던 요셉의 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사람들 속에서 잊혀 져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기에서 받는 학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한 노역에 종사하며 그리고 아이를 낳아도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여 버려야 하는 그런 끔찍한 민족적인 박해를 받으면서 살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분명히 더러운 일에 종사하며 애굽 사람들의 국가에 번영을 위한 노예로서 일생을 살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때에 애굽의 권력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의 힘을 합하여도 모자랄 정도로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 노예를 그것도 300만 명이나 가까이 되는 그 엄청난 노예를 이 애굽 사람들이 놓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대한 능력으로 그들을 애굽의 치하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줄 때 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보다는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서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던 것 이였습니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백성들이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큰 능력으로 거기에서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A. 광야의 하나님
광야의 하나님을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가나안 복지가 아니라 끔찍한 위험과 고통 기근과 질병 전쟁이 기다리는 길고긴 광야의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에서 행하신 그 크고 위대한 능력을 광야에서 행하시되 애굽 있는 그 많은 종들에게 많은 인간들에게 심판과 그리고 권능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었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마치 사랑하는 목동이 어린 양떼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시기를 유모처럼 인도해 오셨던 것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모르고 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고 먹이고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는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이전에 모두 애굽에서 소망 없이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각기 육체와 그리고 정욕을 따라서 자기의 욕심대로 살며 본질상 하나님을 대적하던 진노의 자식들 이였고 우리의 왕 우리의 임금은 마귀였습니다. 일평생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살이 를 하고 비참하게 살면서 마지막 저녁에 그들에게 던져주었던 한 끼 식사에 배부르며 행복감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죽을 멍에를 짊어지고 죽음의 왕자에게 죽음의 종노릇 하며 살면서 이따금 맛보는 사라져 버릴 죄악에 즐거움 때문에 만족을 느끼며 살던 사람들이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꿈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원래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죄에 매여 노예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에 희망도 없이 죽어 영원한 심판에 던져질 인간들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큰 능력으로 우리를 그 죄악의 세상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아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선한 일을 행했기 때문도 아니요 가문과 형통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기 때문도 아니였습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은 하나님이 하필이면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찾아오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십자가의 사랑을 보게 하셨던 것 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과 같이 우리를 죄 가운데 건져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회심 때 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열정의 정체였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 하시고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우리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리를 깊은 참회와 눈물 속에서 십자가를 향해 돌이키게 하시더니 이번 에는 십자가를 붙들고 걸어갈 때에 우리와 함께 동행하심 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단한 인생길에서 주님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에는 세상이 우리의 고향 같았지만 주님을 알고 난 후에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음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나그네였고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길도 곱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배신자로 지목하고 유혹하거나 고통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길을 이탈 하도록 만들었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한 성품들은 이 모든 유혹과 속삭임에 굴복하기가 일 수였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쓰러지고 넘어졌던 과거의 모든 부끄러운 이력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도 한 번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우리를 인도 하셨습니다. 오류에 빠질 때 진리의 빛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의심에 가득 차 흔들릴 때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크신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이 흔들릴 때 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인 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믿음의 길에서 이탈 할 수 없도록 붙들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세속에 쏠려있고 하나님을 향해 냉정한 마음이니까 그렇지 구원받은 이후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우리는 입이 만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지 가운데 있을 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릇 행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실 만 한 데도 우리를 진리 빛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자녀의 참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인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세상에 눈멀고 하나님을 향해 토라진 마음으로 어미의 젖꼭지를 무는 새끼처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님의 교회에 상처를 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처럼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벌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주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을 수 있는 신앙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감사함과 말 할 수 없는 자비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이 형통 속에서 이 광야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처럼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B. 가나안의 하나님
뿐만 아닙니다. 이들이 광야의 길을 40년 가까이 방황하고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그 가나안은 심지 않은 포도나무와 열매 그리고 아름다운 농장과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이스라엘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 였습니다. 거기에는 오히려 원수와 같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장대한 기골과 발달한 무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듯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나안의 족속과 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는 그런 백성들이 아니 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가나안을 정복해 가는 이 과정에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앞 써 행하심으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 원수들을 차례로 무찔러 그 땅을 줌 하고 약속하신 하 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시거나 교리 속에 누워 계시거나 사람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잊혀진 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백성의 삶의 현장에 찾아와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가나안에서 정복의 역사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을 언제나 생각하여야 했던 것 이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종종 여러분들이 살아온 구원 받은 이후에 믿음의 길에 대해 간증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간증하는 그 모든 승리의 기억들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해 주셨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승리의 역사였지 여러분 홀로 이뤄온 길이 아니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며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믿음을 싸움을 싸우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주신 그 믿음의 길을 걸어온 사람마다 우리는 그날을 회고 할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시 상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믿음의 길속에서 함께하셔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회고하며 우리자신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바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세상속에 살면서 이 세상에 정신이 팔리고 세속적인 열심히 뜨거워진 나머지 성도의 당연한 의무인 이전에 하나님이 자기의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회고하는 일을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며 가슴이 뛰고 감사하며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고백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뤄 지지 않은 욕망을 보며 하나님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독립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뤄 보려고 하는 불신앙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 내 인생 살아오면서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붙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길에서 나와 함께하시고 이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나를 붙드셨던 하나님의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른 적이 언제였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요 이제껏 산 것이 주님의 은혜이니 이제는 나의 있는 모든 소유가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며 주님의 주되심을 우리가 인정한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마음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들이 배교에 가까운 몇 달동안의 예배의 생활은 바로 여러분들의 이러한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다 원망과 불평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투덜거리는 마음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해 토라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실 의무가 있습니까? 오히려 이제껏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도저히 그런 것을 받을 자격도 없는 저희들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그 큰 은혜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통 속에서 이러한 주님을 잊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에는 주님을 의지하고 결핍과 고통이 길을 걸을 때에는 하나님이 아침 마다 주시는 만나 하나로 뜨겁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번영을 누렸을 때에 결국은 그 형통 속에서 주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말 할 것입니다. 목사님 형통하긴 뭐 개 코가 형통합니까? 고달프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사업은 위기를 만나고 가정에서는 속상한 일이 생기고 마음은 갈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형통 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 이런 고민은 사치스런 고민 이예 요. 사치스런 고민 이예 요. 정말의 인생의 벼랑 끝에서 오늘저녁 눈을 감으면 내일 아침 또 쉽지 않은 그런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을 때 그때 우리들이 느꼈던 그 고통에 비하면 지금 얘기하는 고민들은 사실 고민도 아니 예 요 문제는 우리가 환경에 있는 거 아니죠 왜냐하면 여러분도 간증해 오셨고 그런 간증을 들으면서 신앙 생활해 왔지만 하나님의 큰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는 죄 짓 지은 사람들이 경험해 왔어 요 뭘 통해서 용서하시는 은총을 통해서 경험 했어요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남 모를 죄를 지어서 깊은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비상한 하나님의 은혜,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 아니 예 요 또 여러분이 사업의 위기를 만나서 깊은 고통 가운데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도 간증을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역경을 이긴 모든 사람들은 사업이 잘 되다가 하나님 만나서 더 잘됐더라 하는 사람은 없어 요 되게 간증에 나오는 사람은 꼭 몇 번씩 망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요 우연 같아 보여도 그것은 우연 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계획이 이뤄진 것 이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들이 사업이 그런 위기를 만나서 갈 길을 모르게 되었다고 한 다면 하나님이 이번 기회에 당신 앞에 전심을 매달리게 해서 무엇으로도 꺾어질 줄 모르고 주님 앞에 항복할 줄 모르던 여러분들의 그 못 된 성품과 기질을 단 번에 꺾어버려 새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주님도 만나고 하나님께서 다시 나의 사업에 복을 주셨다는 간증들은 지겨울 정도로 다른 사람들한테 들었 잖아요. 그러면 다른 인간들에게 일어난 일이 여러분들에게는 왜 일어나지 않겠어요. 그렇게 보면 그것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이거죠 또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칩시다. 그게 문제겠지요 자식이 속을 썩여서 문제를 자꾸 일으키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자식 때문에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하며 참된 믿음의 어머니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그 자식 때문에 여러분들의 신앙이 주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지 잖아요 그리고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는데 어미가 그렇게 통곡하며 얘비 가 그렇게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간구 한다면 하나님이 그 부모의 기도를 들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어주시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되는 것이고 요새 되고가 유행이래며 되잖아 그게 뭐 안될 일이 뭐가 있느냐 이거야 또 뭐가 있어요. 몸이 너무 아프다 그래 몸이 아파요 병이 난거죠 병이 나면 딱 두 가지 아니예요.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자연적인 질병일 수 있고 아니면 하나님이 이젠 그만 살고 넌 와라 그리고 데려가기 위한 질병일수 있잖아요. 어짜피 인간은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하지 않으면 이 죽음이라는 강을 넘어갈 수 없어요. 그러니까 사고건 질병이건 이건 나룻배야 그러니까 어떻게 죽었느냐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요. 그건 이쪽에서 보는 그림을 뿐이야 저쪽에는 쪽배를 타고 가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든지 아니면 군함을 타고 건너가든지 건너가는건 마잖가지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건너가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부르시는 거니까 그건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니까 우리들이 받아들일 것이고 아니 무슨 나쁜일이 일어날 것이 있겠어요. 그러면 결국 문제는 무엇이예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고 보면은 고통스런 일들이있고 괴로운 일들도 있고 하나님 원망할 일들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의 빛 아래서 보면은 사실 나쁜일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불러주시니 누가 그러데 제가 목이 다 쉬었 잖아요. 이게 십 몇 년동안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제가 한 달동안 계속 집회를 다녀야 하는데 큰일 났어요 모르셨죠 그랬더니 그래요 목사님이 야단쳐주시는 목사님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근데 온 교인이 그렇게 생각 하겠어요 일부가 그렇게 생각 하겠죠 아니 그래요 그렇게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내버려두셔서 대형사고 나게 않하시고 소형사고로 막아주시고 혼 내키시니까 그게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소리치는 것은 잘못했다고 여러분을 야단치는 것도 아니고 사고 난다고 소리지르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 대 얻어맞은거는 이제 하나님이 대형사고 못치게 막은거예요 얘가 칼에 손을 댈려고 하는데 손목을 한차례때린거예요 그러면 그것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잖아요 아파서 여러분들이 드러눕지않았으면 계속 무리해서 심근경색이나 심장마비나 뇌졸중갈때까지 달려갈텐데 하나님이 딴지를 탁거셔서 그래서 넘어뜨려서 가끔 응급실에 실려가고 가끔 링겔도 맞게 하셔서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신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아니예요 도대체 불평할게 뭐가 있느냐 이거죠 듣고 보면 과연 그렇죠 집에가도 과연 그러냐갸 문제지 아 누가그래요 목사님 설교는 학원강이 같다고 예배시간에는 다알겠는데 집에가면 생각이 안난다고 여기서만 그러면 안되고 집에가서 혼자 생각할 때도 스스로 거울을 보면서 야 인간아 뭐 문제가 있냐 니가 하나님 안 믿는거 빼놓고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구나 그렇게 말해야 옳은거아니냐 이거죠
III. 번영 속에서 잃는 것들
문제는 뭐예요 주님을 잊어버린거예요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안계신거 그리고 주님을 떠나서 우리의 힘으로 번영을 이루어 보고 성취해 보려고 하는 이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하는것이죠 그렇죠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 되었든지 당신께 돌아와서 당신과의 관계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요긴나게 사용하여서 하나님이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시는거 그게 바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로마서 8장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다. 이런 이야기 예요 이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제도 될 것도 없어요 언제나 사람이라는게 그렇때가 있잖아요 자기가 기분 나쁘면 발아래 놓인 깡통도 기분나빠 차잖아요 기분이 좋으면 모든게 좋고 근데 굉장히 힘든일이 있었어요 뭐라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서 너무 힘이들어서 울면서 기도를 하다가 에이 이러고 여기서 있으면 뭐하냐 기도원에나 가자 그러고 차를 타고 기도원에 가는데 한 참 가다가 그런 생각이 드는거예요 도대체 뭐가 문제냐 문제를 내스로 둘이서 대화를 나속에서 야 봐라 내가 이런 상황있지 않냐? 또다른 내가 대답을 하는거야 그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 아니 인생사는게 다 그렇지 아니 누구를 좀 봐라 그래도 너는 훨씬 낳지 않냐 이러고 한 30분 대화를 하니까 뭐 궂이 기도원까지 갈일이 별로 없어 다시 돌아서 왔어 그렇지 않아도 자주 집회를 가고 그러는데 아이고 뭐 이거를 가지고 기도원까지 가냐 가다가 은혜를 받고 돌아아 그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뭐가 문제야 문제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하나님 빼놓고 해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뭐가 문제야 주님을 잊어버리기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가슴에 이 그 따뜻하게 느끼시던 특별한 때가 있었어요 우리도 연예를 하고 결혼을하고 그러면 늘 사랑을 하고 또 안될 때 노력을 하고 그러지만 그러나 특별히 사랑을 하던 때도 있잖아 그래서 제가 결혼 주례를 설 때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씩 합니다. 얘들아 결혼하기 전에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결혼뒤는 해야 하니까 하는 사랑이다. 이게 뭐냐하면 이해하시죠 설명 안해도 사랑이 그렇게 될 때 그때 그게 진짜 좋은 사랑이란 말이예요 될 때 물론 하는 사랑도 나쁜 사랑은 아니지만 되는 사랑이 정말 좋은 사랑이예요 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그 친근하던 때가 둘이 있었는데 애굽에서 나와서 이제 그 초기 그리고 또 한 번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지고 잘살게 되는데 누가 주셨어요 그런 번영을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신것이죠 근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주셔도 사용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지는 않으셔요 자 우리가 태어날 때 여러분 처럼 가까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빼어난 미모를 주시는 분이 누구예요 찔려서 말을 못하시네 누가 주셔요 하나님이 주시죠 그러나 그렇게 빼어난 미모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유혹이 많잖아요 거기에서 예쁜얼굴로 태어난 다음에 그 모든 것을 지켜주시는 않으셔요 우리를 부자로 만드시는 분은 누구예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래 그렇게 많은 물질을 주신후에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책임져 주시는게 아니라 우리가 책임을 지고 하나님앞에 끊임없이 그렇게 살 때 그 물질을 가지고 섬길수 있게 되는거죠 지식도 마찮가지야 놀라운 지혜와 나라를 다스릴 슬기를 솔로몬에게 주신분은 누구예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그것을 사용해서 타락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솔로몬이잖아요 그래서 번영속에서 잃어버린게 있는데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모든 것이 잘되고 번영가운데 있으면 우리들이 잊어버린게 잊잖아요 그죠 그러면 우리가 번영속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다. 가난해지면 그런것들이 다시 되살아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러지 않아요 그때는 아름다운 신앙을 갖은 것은 가난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 준거지 가난한데도 은혜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주님을 꼭 붙들고 그렇게 예쁘게 신앙 생활을 한거예요 그래 지금은 마음이 부패해서 하나님앞에 고집스럽고 그리고 타락한 인생이 되었는데 부요한 것을 겉어버리고 가난하게 되면 더욱 더 비참하게 되겠죠 에 더욱 더 비참한 모습이 되지않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의 때를 누렸지만 그들이 잘못해서 잃어버린것이 있었어요 그 두가지가 있었는데
A. 하나님을 의지함
그것이 뭐냐하면 첫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였어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은 어~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 하는것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의 특징이였어요 그런데 그만 하나님이 주신 번영속에서 이모든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마음을 잃어버린것이였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어디냐 하면 기도 생활이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현저히 감퇴했기 때문이예요 신자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마음이 충만하게 되면 사실은 몇시부터 몇시까지라는 기도의 경계가 허물어 지고 그리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앞에 기도 할 수 있는 준비된 상태가 된거죠 죄와 은혜의 지배를 여러분들이 배우면서 죄가 우리의 기도를 무너뜨리는 4가지 단계를 배웠을 거예요 그중에 첫 번째 단계가 뭐냐 하며는 기도의 준비된 마음을 상실하게 된거죠 그래서 예전에는 기도해야할 상황이 벌어지며는 용수철에다가 물건을 던지면 튀어 오르듯이 즉각적으로 이 마음속에서 기도의 반응이 튀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거기가 길거리이든지 혹은 공부하는 학교이든지 직장이든지 상관 없이 주님을 부르는 거죠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되면 기도에 대하여 준비되었던 마음들이 이게 흐트러 버리는 거예요 문제가 생겨도 계속 기도해야할 내용이 뭐 상항이 벌어져도 이 속에서 계속 머릿속에서만 뱅글뱅글 돌지 가슴속에서 이 문제를 들고 주님앞에 나아가 매달려 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참된 도움이십니다 간절한 그런 사모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번영속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의존의 마음을 잊어버린거예요 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때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에 의해서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예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가득하게 성취될 때에 그것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지는 때예요 그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 진 상태속에서 인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은 그 마음 안에서 받으시는 영광을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속에 펼치시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이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인 것이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할 본(本)을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보여주시는거죠 그분은 낮아지고 겸비해지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도 없으실 뿐 아니라 죄도 없으시고 그리고 유한한 인간이 아닌 본질상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능력과 그리고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계셨교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활용하실수 있는 그러한 본체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 전심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당신 자신의 마음이 어떠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참 그분을 사랑하는 것인지를 미리 보여 주셨던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아버지의 하나님께 의지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생애는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는 많이 나와요 어느곳에서는 산에서 기도 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느곳에서는 들판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또 어느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신걸로 나와요 그렇게 많은 곳에서 기도 하시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받치는 십자가상에서까지 기도로 당신의 생애를 마치셨으니 이는 당신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완전한 사랑을 의지함으로 보여주신 것이죠 그분이 십자가에서 숨을거두시며 남긴 마지막 기도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옵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였어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예요 그래서 이세상에서는 좋은 것을 우리들이 많이 가지면 강해지죠 돈이 많은 사람은 왠지 자신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자신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가진 사람은 약합니다. 그런데 그 약함은 세상에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앞에 약함이 아니라 자기의 대주제이시고 자기의 그 모든 죄가운데 건져주신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그분 앞에서 약한거예요 그래서 제가 가슴아픈 것이 바로 그것이예요 예배시간에 약해지는 것 만큼 유혹이 가득차고 핍박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해집니다 그리고 예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강해지는 것 만큼 우리는 이세상에 약해져서 그래서 비굴한 길을 걷게되는 것이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소위 이야기하는 첫사랑의때 혹은 인생제2의 회심의 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였습니까? 의존의 마음 그것이 아니였습니까? 그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을 의존하는 길은 은혜안에서 사는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은혜는 나의 공로로 얻는게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 속에서 주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앞에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마음이 가난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 했습니다 심령에 연약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갈망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겹치고 시련이 올때는 그분의 손을 꼭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올수 있었습니다. 미력이나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이땅에 있는 영혼을 섬기면서 고통의 길을 지나고 시련의 강을 건너야 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이세상의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해도 주님은 아실것이라는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남이알지 못하는 많은 길을 지나 이제껏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우리의 입술에 늘 있었고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종이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기쁨이였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이 친밀함은 주님을 향한 전심의 의지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건너라면 도처히 건널수 없는 시련과 깊은 고통의 길도 주님과 함께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건너며 이겨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이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그러고 우리에게 많은 번영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그 주님께서 주신 번영을 주님 섬기고 주님 의지하는 기회로 삼기보다는 번영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은혜 없이도 넉넉히 살수도 있는 사람처럼 기도와 말씀 생활에 게을리 하면서도 형식적인 예배로 신자의 의무를 대신해 왔습니다. 그것이 오늘 여러분에 처해 있는 문제 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번영을 구가하며 행복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부러워 하는 많은 사람들과 여러분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런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여러분들은 그렇게 번영을 구가하며 복받은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여러분과 비교될수 없이 신앙의 정절과 그리고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속에서 신앙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들고 여러분과 비교하면서 여러분의 신앙의 가난함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런 사마리아 여인같이 벅차오르는 우리주 예수에 대하여 감격이 없는 것에 대하여서 고민해 보셨습니까? 성전에 올라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통회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온 그 세리를 부러워해 본적이있습니까? 믿음이 없다고 문제를 지적하니까 주님께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며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그 여인과 같은 신앙을 부러워해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특별히 환란과 시련을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합니다. 왜냐하면는 인생의 그 풍랑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인데도 그 번영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던 그 처음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고 번영속에서 이룬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성도가 가는 일생의 길을 주님이 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세상의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아도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짜릿한 행복속에서도 주님 등지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향한 성도의 사랑을 독차지 하시고 싶어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떠나서 성도가 그런 완전한 행복속에서 사는것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서 행복의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바람이 부는 거예요 그것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야! 왜냐하면 그렇게 못 깨닫는 인간들 예배에와서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주님의 말씀에 움직여도 그런 길을 가는데 그것 조차도 없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면 그게 어디 하나님 자식일 수 있겠어요? 야단을 치고 한 차례 후려 쳐서라도 사람을 만들어야지 그게 하나님 자식이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의지하며 살 기를 바랍니다. 조금 번영 되었다고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 버리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내게 주신거 감사하지만 이거는 사용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사랑하거나 의지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예요 그래서 가끔 여러분들이 마음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도 많아요.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나의 성화의 생활에 이바지 한다고 긍지를 느끼면 안되요. 근데 감사할 때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괴로운 일들이 없으면 그저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대접 받으면서 사는 이것에 취할까봐 하나님이 적절히 고통도 주시고 그리고 잠못이루는 밤도 주셔서 그래서 ”정말 죄많은 이세상은 내집아니네 내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문을 열고 나를 오라고 부르네 나는 이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래서 그나라를 그리워하게 하시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 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갈 세상에 비하면 여기는 너무 요동치고 불안하고가슴아픈일이 많은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가 잠시 번영하고 형통한 가운데 서도 주님을 의지 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라는 거 그래서 주님을 꼭 붙들고 그분의 손에 붙잡혀서 조금더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그래서 시련이 확 밀려오고 괴로울 때 살려고 그러지 말고 죽으려 할 때 놀라운 은혜의 샘이 터져요 아아 하나님 세상은 이런 것이군요 그러니 내 인생의 진정한 의지할 피난처가 당신밖에는 없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있는 그 나라를 내가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미운 사람도 사라지고 욕심도 자기 잘못한 것이 잘 생각이 나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주님의 손에 굳게 붙잡혀서 성공하는 길 화려한 길 박수 받는 길 아니여도 주님의 뜻을 따라 나의 인생의 길을 걷도 싶습니다. 고백하면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셔요. 보여주셔요. 빨리하라고 빨리 빨리 뻐대지 말고 빨리 아멘
B. 구원을 기뻐함
번영 속에서 이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은 두 번째로 뭐냐 하면 구원의 기쁨을 잊어버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생각해 보면 진짜 고난을 받고 괴롭고 막막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회상한 것은 뭐냐 하면 어제 장사해서 남은 거, 양이 새끼를 낳은 거, 화투해서 돈 딴거 이런거 생각 한 게 아니 예요 아주 옛날 일을 생각한거 예여 우리가 어떻게 애굽에서 노예살이에서 풀려 나올 수 있었던가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이 있었요. 이스라엘 백성 또한 홍해를 어떻게 건넌 나 홍해를 어떻게 건넜나 헤엄쳐 아니 배타고 아니 주 하나님 크신 능력으로 물을 가르고 건넜어요.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난관은 그때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 아니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그 물을 갈라 마른땅이 드러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뒤쫓아 가는 병사들을 그 물에 수장 시키셨어요. 그게 하나님이 행하셨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였던 말이죠 그 구원을 기뻐하는 것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당한 모든 시련과 이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 되는 거죠 그렇지요 우리가 만약에 죄를 지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까지 그 끔직한 죄를 짓고 추호의 참회도 없었을 때에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회개시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리스도예수의 안에 있는 그 속죄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어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아무리 크고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고 주님을 향해 완전히 죽은자 된 그 영혼을 살리시는 그 일보다도 어려운 일이겠어요 하니님 그 일을 하셨잖아요 신자가 하나님 없는 그 배교의 예배에 익숙해 질 때 그들의 마음은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 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없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의 핵심이 자기같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예수의 은혜예요 그게 감격으로 다가 온 다는 이야기는 항상 우리를 처음 받은 그 구원대한 감격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 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해석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사도가 그 위대한 승리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로마서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던 것처럼 또한 이렇게 외치게 되는 거죠.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도 하나님이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1-34)
이런 담대한 확신이 이 구원이 기쁨과 확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들이 맨 처음에 회심하면서 주님의 그 큰 구원을 경험 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는 것이 없었어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감격하면서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많은 것들을 주셨어요. 그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들이 아직 누리고 있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잠시 잊어버리게 만드신 것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기쁨이 이 안에 항상 있어서 교회당에 들어서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으면 어떻게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까? 무엇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날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 흘려 죽으셔서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당신의 친자녀로 삼으셨을까? 감동 할 수 없는 감격으로 확-악 밀려들여 그때 비로소 예배 들릴 수 있는 사람이 된거예요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백성들은 번영 속에서 이런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렸어요 여러분들은 이 구원의 기쁨을 꼭옥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구원의 기쁨도 다윗도 잃어버릴 뻔 했지요 그래서 내게 주신 성령을 거두지 마옵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 했지요 죄 이외에는 이 구원의 기쁨을 걷어갈 것이 없어요. 세상의 환란 속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의 기뻐하고 세상의 시련 속에서도 오히려 이 구원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고난의 길을 간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다시 회개하고 이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하나님 백성의 영광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 하나님을 자신의 삶속에 나타내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 줄 알고 그 분의 은혜아래 살며 그 분을 꼭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걷는 거 걸어가는 거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 주님이 없는 사람들은 넘어질 그 길에서 일어서고 주님이 없는 그 길에서 길을 잃을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주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좌절을 할 그 길에서 용기를 갖고 살아감으로 써 많은 사람들을 우리를 품에 기대게 하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삶이예요 물러간 상태에서는 이런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은 물러간 자를 부르셔서 당신 앞에 이런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런 삶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
5.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7-8).
I. 본문해설
이미 6장에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절실하고 간절한 음성으로 부르셨지만 11장에 와서 다시 한 번 뒤로 물러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여주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돌아오도록 간절히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가는 백성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그랬습니다.
II. 물러가는 백성들
여기서 ‘물러간다.’고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래에 있었던 좋은 상태나 그리고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돌이켜 나쁜 상황이나 상태로 떨어진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이들이 물러간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물러간 것이었습니다.
A. 물러간 내용 : 신앙
구체적으로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집약이 되는데
1. 사랑에 있어서
우선 첫째는 이 사람들이 사랑에 있어서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할 때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때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이런 첫사랑에서 물러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물러남은 곧 사랑의 물러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그리고 나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신앙의 대의에요. 그래서 사랑을 하나님께 둔 사람은 신앙처럼 쉬운 것이 없고, 사랑이 갈리거나 나뉘기 시작하면 신앙처럼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 사랑에서 갈리게 되면 인간은 깊은 혼란을 경험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 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에는 모든 근심과 염려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이 합치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시련이 오면 그 속에서 주님을 더 붙들고, 형통한 날이 오면 얽매임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니 그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요, 이 세상에 남겨두시면 두시는 동안에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며 믿음의 길을 가고 주께서 부르시면 영광 가운데 이 세상에 있는 고난의 전투복을 벗고 영광스러운 면류관과 세마포 옷을 입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사랑에 있어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은혜를 받고 싶어 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없이는 한발자국도 우리의 인생의 앞길을 갈 수가 없으니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은혜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은혜 이외의 어떤 것도 여러분들이 어떤 기적을 보고, 어떤 능력을 행하고, 어떤 커다란 신비한 경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가져다주지는 않아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은혜만이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만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져다주고 끊임없이 은혜 안에 있으면 이 사랑은 증진되고 온전해지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사랑했던 마음은 식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각종 변심하는 마음과 배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배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사랑에 있어서 물러났기 때문에 실패한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으뜸이 되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당신이 창조하신 그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향해 파동 치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파문에 속하게 되어서 자신을 그 사랑에 물결에 실어 주님이 당신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을 펼치시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참된 보람은 바로 그렇게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사랑의 물에 합류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당신 자신의 사랑의 뜻을 펼치시는 도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최고의 영광이며 행복인 것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때는 이런 뜨거운 사랑 속에 있었으나 이제 이 사랑에 물러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 모든 가족과 성전과 그리고 민족과 열방을 향한 모든 사랑의 진원지였습니다. 그 근원인 사랑이 마르자 그 모든 삶 속에는 사랑이 사라지게 되었고 인애와 공평 대신 사기와 불의, 그리고 피의 피를 잇대는 폭력과 유절들이 뒤를 잇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여러분들이 신앙을 시작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혼자 힘으로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을 찾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시는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을 만난 사람이 아니면 그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 계곡을 날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해온 모든 날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때 그 나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하신 은혜에 마음이 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한테 한번 꺾여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도 심지어는 우리의 부모도 내 남편, 내 아내도 나는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깊이 꺾이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지금은 은혜를 잃어버리고 여러분들이 강퍅하고 가시 돋은 심령으로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 목회자의 가슴에 못을 박지만 그러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회고해보면 여러분도 한 때는 착한 신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예배당에 올 때에는 천국을 가는 것 같은 기쁨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예배시간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들의 모습은 살아온 험난한 여정과는 비교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 주시기만하면 그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눈물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없었고, 흐느끼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고난과 시련이 많았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컸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낙심할 그 인생의 자리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섰으며, 쓰러질 그곳에서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다시 우뚝 섰습니다.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물러가게 되자 여러분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맛대가리 없는 만나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늘 주님을 만나던 예배는 주님이 외면하시는 것을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현장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찼을 때에는 진리대로 살라고 외치는 그 음성이 연인의 목소리처럼 따뜻하고 감미롭게 들렸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자 예배시간은 지겨웠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자 말할 수 없이 교만해지게 되었고 그 교만한 모습이 여러분들의 얼굴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 마음이 녹던 어린아이 같은 그 모습과 지금의 여러분들의 모습을 비교할 때 도저히 그 사람이 그 성도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동안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여기에 있는 이 목회자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교회에 있는 누가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그렇게 심각한 고통을 주어서 여러분들을 학대하였습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은 누구를 향해서 반감을 품고 있고 누구를 향해 미운감정을 갖고 있는 것입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예배시간마다 여러분들은 거의 3주 동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도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더 많이 야단맞아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묻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 그런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무서운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왜 어린아이 같은 뜨거운 눈물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교만하고 거만한 인간들이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설교자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지가 행한 더럽고 소문난 악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리고 티끌 같은 형제의 잘못과 그리고 단점을 보고 격한 감정이 되고 여러분들이 원래 누구였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예배당에 들어설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서 모든 사람들이 발로 밟으며 너 같은 죄인 필요 없다고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교만하고 그리고 오만 방자하고 혈기 방자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교회에 유치장이 없다고 목회자의 가슴에, 목회자의 허리에 큰 칼이 없다고 그렇게 교회를 짓밟고 예배를 유린하고 목회자에게 모욕을 주고 그래도 여러분들은 괜찮은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와서 예배시간마다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고 주일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기 깨어짐의 산제사를 드릴 때에도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바보같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감사할 줄을 모르고 오만방자하여 그렇게 교만하게 행하던 인간들이 한 구석에 늘 있었습니다. 단 하루도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노래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궁극적으로 단 하나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을 절실하게 붙들 마음도, 지체의 약함을 보고 그를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품어 안을 의지도, 목회자를 위해서 희생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각오도 없고, 불평과 불만과 그리고 분수를 모르는 그런 교만에 물들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을 더 가보고 싶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가십시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와 더러운 죄악의 덩어리와 그리고 망가진 여러분들의 인생 그리고 시련과 환란,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벼랑 끝에 서게 된 인생, 옛날에 서본 그 자리에 다시 서시는 거예요.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미 다 가본 그 길을 가야합니까?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 해 본적이 있습니까? 불평과 불만 말고, 의무로 하는 기도 말고, 중심으로 내 안에 예전에 그렇게 간절했던 우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서 식었습니다. 내게 돈보다, 집보다, 명예보다, 직장보다, 사업보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시고라도 나를 이 사랑에 있어서 회복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눈물을 쏟으며 기도해 본적이 언제입니까?
2. 지식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이렇게 물러가자 그 다음에는 지식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빠졌던 죄악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가는 것 없이는 어떠한 사랑도 깃들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 지식과 사랑의 관계는 연과 연을 붙들고 있는 줄과 같아요. 연이 바람을 받으면서 하늘로 높이 솟아오를 때 이쪽에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달리면, 달리면서 이것을 풀어주면 연이 계속해서 하늘로 치고 올라서 저 하늘에 하나의 점처럼 작게 보일 때까지 연이 높이 솟아요. 똑같아요. 여러분들이 한 때 주님을 만나고 울고불고 뒹굴고, 또 금방 은혜 쏟을 사람들이 또 받을 때에 요란은 다 떨잖아요?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의 줄이 없으면 그것은 하룻밤에 그냥 소란 떠는 것이에요.
오늘 신문을 보니까 주가가 1000포인트에서 2000포인트 올라가는데 18년이 걸렸는데 1년 만에 다 털어먹고 다시 지금 1000포인트 밑으로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대요. 내가 그것을 보면서 아이고 이거 어쩌면 우리 열린교회 교인들 신앙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올라갈 때는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요. 한번 쏟아버리고 나면 뚝 떨어져요. 여러분들이 이런 궁금한 생각이 안 드세요? 저도 목회하면서 궁금했거든요. 말씀을 계속 듣고 은혜를 받고 그렇게 성화의 길을 가면서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많이 성장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확 미끄러져서 이제 더 이상 교리도 배우지 않고, 말씀의 은혜도 받지 않고, 그냥 그렇게 질이 안 좋은 신자처럼 교회를 다니면 그 옛날에 배운 많은 지식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을 목회하면서 본 경험한 것에 의하면 그렇게 해서 미끄러져서 내동댕이 쳐버리고 나면 신기한 것이 그 많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거의 없어진 사람처럼 생활을 하더라는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우리가 아무리 이전에 많은 은혜를 받고 말씀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다고 하더라고 하나님과 관계가 딱 끊어지면 그 지식이 우리 안에 남아서 워낙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도 계속 혼자 역사하면서 우리를 좋은 신자로 살아가게 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은 호수와 같아서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해 주실 때에 이것이 끊어져버리면 우리가 받은 그 많은 은혜 이런 것들,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마치 전원이 끊긴 전깃불처럼 되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이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이에요. 가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해요. 누가 그래요. ‘목사님 열린교회에서는 머리나쁜사람은 신앙생활을 못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공부도 많고, 학교도 많고, 구역예배에 들어가면 공과 책이 무슨 논문 같아서 너무 어렵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됩니까?’ 그러기에 내가 그랬어요. ‘얼마나 했기에…….’ ‘얼마나 했기에…….’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는 끝이 없어요. 그 세계 중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바닷가에서 손바닥에 올려놓은 모래알 몇 알갱이 정도 되는 지식밖에는 안돼요. 그것도 또 열심히 했나? 그냥 책만 끼고 다니고 그랬지! 하긴 뭘 해요. 끊임없이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한다고 하는 그 자체는 사랑이 이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지식과 사랑은 순환의 관계가 있어요. 하나님을 알면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더 많이 하나님을 알고 싶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잘 들어보세요. 이 마음의 은혜가 살아있을 때에는 말씀을 세밀하게 가르쳐주면 말씀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르쳐줄 때마다 이 마음속에서 파동이 일면서 ‘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구나?’ 깨달음이 확확 오면서 기쁨이 와요.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말씀을 세밀하게 가르쳐주면 가르쳐줄수록 짜증이 나요. 이렇게 복잡한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안 복잡해요.
저는 민화투밖에 못 치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지금 잘 되려나 모르겠어요. 그런데 뭐 옛날에 보니까 화투가 별개 다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규칙이 그렇게 까다로운데도 그 화투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외워요. 그래도 전혀 짜증이 안 나니까 아주 신나게, 즐겁게 그것을 배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라고 하지만, 늘 말씀드리지만 받은 은혜가 빛나는 것은 지금 은혜를 받고 있을 때에 옛날에 받은 은혜가 빛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옛날에 받은 은혜를 얘기하니까 만날 간증하라고 하면 30년 전에 첫 회심 때에 그것……. 지겹지도 않아요? 그렇게 우려먹고……. 얼마나 하나님을 만난 기억이 없으면 30년 전 것을 계속 그것을 우려먹고 아스라이 이제 흑백사진처럼 남은 그 추억 한 장 붙들고……. 그것 갖고 되겠어요? 이 허무한 세상을……. 아이고, 참 답답해…….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해요.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복잡해서 짜증나지 않아요.
(예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남편이나 아내를 혹은 애인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이 사람은 정말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보게 해주는 것이에요.(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아! 이게 뭐 신앙만 좋은 줄 알았더니 문학도 좋아하고, 그래서 글줄 깨나 읽나? 그러고 봤더니 미술도 좋아하고, 미술을 좀 하나 그랬더니 또 철학도 좋아하고, 철학을 좋아하나 그랬더니 또 음악도 좋아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때마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신기한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는 음악을 몰라도 그 똑같은 음악하나 몰래 써가지고 들어보면서 ‘아 이게 우리아내 (혹은 우리 애인)가 좋아하는 음악인데…….’ 하면서 감탄하고, 미술이라고는 만화책밖에 못 보던 사람이 그렇게 수준 높은 사람과 연애를 하니까 딱 지나가면서 그림을 보면서 ‘아 이게 18세기의 누구의 그림이구나! 이게 그 사람이 너무 좋아하는 그림인데…….’ 그러면서 자기도 아는 척하고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 하나밖에는 없지만…….) 보면서 또 옆에 사람에게 설명을 해주고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데이트할 때 한번만 만나면 이 사람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아주 새로운 면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사람이 늘 말이 없고 공손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옳지 못한 일을 보더니 단호하게 ‘당신들 그러면 안 돼요!’ 그런 것을 보면서 참 멋있게 보이고……. 나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과분한 남자가 걸렸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감탄을 하는데 매일 매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하나 새롭게 깨달을 적마다 마음속에 기쁨이 솟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때가 있어요. ‘아이고 꼴값하네. 아이고, 또 별것 다하네!……. 아이고, 놀아요. 놀아…….아이고, 너나 잘하세요.’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새로운 것을 계속 보여줘도 이 사람 속에 사랑이 없어 그러니까 싫증이 났는데 (어차피 사랑하지 않는데 계속 새것을 보여줘 봐야 꼴값으로 보인다는 것이에요) 그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무미건조하게 읽는 것이고 예배시간에 정신 차리지 않고 예배시간에 말씀도 안 듣고 그렇게 시간 때우다가 가는 것(다리 꼬고. 제발 설교시간에 다리 좀 꼬지 마요. 그 다리 꼬는 것은 다리 긴 미국사람들이 꼬는 것이에요. 그 짜리몽땅한 다리를 어디에다가 올려놔요? 다리가 요만해가지고 동동 뜨는데……. 그것을 무엇 때문에 꽈요? 골반 망가져요. 제발……. 다리도 몽땅한 사람들이 다리 꼬면 배도 안 나온 사람들이 배 문지르는 것 같아요. 다 허위야 허위 하지 말아요.)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거예요. 아까 다 예를 들었잖아요. 딱 맞는 얘기잖아요. 그것이라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지식은 사랑이 있어서 놀라운 시금석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호기심이 아닌 진솔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가르쳐주었을 때 기뻐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신자가 되면 세 가지 질문에는 항상 대답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죠? 그게 뭐에요. 성경을 어디를 읽고 계십니까? 그때 ‘뭐 꼭 읽는 다기보다도…….’ 이것은 안돼요.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읽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꼭 1월 1일부터 10일까지만 인도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인도를 안 하시나요? 왜 주님의 인도는 왜 항상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레위기에서 끝나고 마태복음에서 실종돼요. 주님의 인도가……. (웃음이 나와요?) 웃는 여러분들이 참 대단하십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이 뭐에요?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그런데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안 된다고 내가 얘기했지요. 가끔 교인들을 볼 때에 책을 들고 다니는데 저 책은 절대 읽으면 안 되는 책인데 들고 다니거든요. 그것도 아주 좋은 것이라고 퍼먹어요. 그런 사람들이 예배시간에는 자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그 책에서 쏟아내는 음식 맛하고 열린교회에서 쏟아내는 이 설교의 음식 맛이 전혀 달라요. 거기서 뜨거운 감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절대 내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없어요. 둘 다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연구대상이거나 정신분석 대상이에요. 그것을 지도도 안 받고 그러고 들고 다녀요. 심지어는 그런 책을 목회자에게 선물까지 해요. 너나 잘하시지…….
세 번째는 무엇이에요?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꼭 제목이 있어서 기도한다기 보다도……. 물러갔지요? 인정할 것은 인정해요. 물러갔지요? 그 옛날에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경을 그냥 닳도록 읽고 감격하고 그리고는 그냥 무슨 이 신문하고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들을 읽고 그러면서 그렇게 감격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지식에 있어서 뒤로 훨씬 물러간 것이에요. 이 신앙에 있어서 물러가는 것이 지식에 있어서 물러가는 것이에요.
3. 의무에 있어서
세 번째는 의무에 있어서 물러가는 것이에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고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에는 항상 자기 자리가 있었어요. 자기의 사명의 자리, 그래서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았어요. 그래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무를 주시는 것을 사랑이 있으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이 없으면 짜증이 나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사랑이 있으면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죠. 옛날에 우리 초등하교 다닐 때에 요즘은 아마 애들을 시켜도 안 할 거예요. ‘얘야 남준아!’ ‘예’ ‘가서 걸레 좀 빨아오너라.’ 선생님이 그러시면 얘들이 다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어요. 그 추운겨울에……. 여러분 기억나지요? 그렇죠? 선생님이 날 시켰다……. 막 빨아 와요. 누가 옆에 있는 애가 같이 빨자고 그러면 ‘안 돼! 나한테만 시켰어!’ 그러면서 들고 가서 그 추운 날에 ……. 그게 뭐냐 하면 의무가 사실 놀라운 특권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설교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아우구스투누스가 고백록에서 그런 고백을 하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누구 길래 우리 보러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받지 않으시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시는 것처럼 우리 보러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사랑하지 않을라치면 커다란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우리를 위협하시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은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대도 ‘너는 나를 사랑하거라.’ 그 자체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초청이에요. ‘너희는 내 자녀답게 살아라.’ 이게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초청이에요. 나를 당신의 자녀로 알아주시고, 인쳐 주시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그 무엇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잖아요. 그게 얼마나 놀라워요?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런 의무에서 뒤로 물러갔어요. 여러분 오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가까이는 연초에 그리고 멀리는 여러분들이 회심할 때 그 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의 약속을 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세워주셨던 자리가 있지요? 그리고 가야되겠다고 하는 섬김의 길이 있지요. 거기에서 여러분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B. 물러간 방식 : 결심
예배를 그렇게 드리고 사명에 충실하게 변함없이 살아간다면 거짓말이고 혹시 그런 예가 있다면 처음에는 은혜로 그 일을 감당했는데 요즘에는 깡다구로 감당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반드시 사고를 쳐요. 은혜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지만 자기의 교만한 의지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성공하면 자기의 의를 쌓을 뿐이에요. 이렇게 의무에서 물러간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세워주셨던 그 의무로 돌아오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이 물러간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결심을 통해서 물러갔습니다.
1. 돌아갈 수 없는 길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묻고 싶으셨던 것이에요. ‘너희들이 내가 싫다하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던 마음을 팽개치고 뒤로 물러가는데 그리고 도망을 가는데 자 너희들이 가려는 길이 어디냐?’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고자하는 길은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에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에요.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참으로 창조목적에 부합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아주 목표가 뚜렷하고 복잡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게 ‘싫어요.’ 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그리고 기도도 안하고, 말씀도 안 듣고, 예배는 배교에 가깝게 드리고, 의무적으로 성전에 나오고 이러는 신앙의 태도를 보일 때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래 네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해서 하나님 버리고, 신앙을 버리고 가고 싶은 데가 어디인지 한번 말해보아라’ 그럴 때 누구도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그런 길에는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아니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만나야지! 그리고 정말 내가 죄인이야!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나에게 은혜를 주소서…….’ 이러고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예배의 목표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거에요. 그냥 나와서 몽땅한 다리를 꼬고 그리고 예배시간에 졸고, 그리고 영화관에도 안 늦는 사람들이 예배당에는 매주 늦어요. 그렇게 하면서 바보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말이지……. 그런데 그 사람에게 목표가 있어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목표가 무엇이에요. 목표가 없어요. 바라는 결과는 있지요. 빨리 끝나고 집에 가는 것……. 그런데 그게 어떻게 목표일 수가 있겠어요. 그러면 목표가 있는 그 길은 사람들이 안가고 목표도 없는 자기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것으로 마음이 끌리고 목표는 없지만 그냥 마음이 거기로 끌리고 그리고 그곳으로 마음이 미끄러지니까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에요? ‘너를 믿지 마라! 네 마음과 한패가 되지 말라! 네 마음과 짝하지 말라! 네 마음과 네 생각이 좋다는 데로 따라가지 마라! 그러면 큰일 난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이에요. 그러면 대화를 해야 되잖아요. 야! 도대체 네가 그렇게 배교에 가깝게 교회당에 나가서 그렇게 거지같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똥을 바르는 예배를 드리는데 너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냐? 대보라고 캐물어야 되요. 말해보라 이거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믿음의 길을 떠나서 네가 마지막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냐? 대보라! 대보라고 그래야 돼요. 끝까지 대답을 못하면 ‘너는 나쁜 놈이야.’ 그러면서 밟고 돌아서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회개라 이 얘기에요.
오늘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에요. ‘너네 그렇게 내가 싫다고 그러고 내 인도를 안 따랐는데 그럼 너네 애급으로 돌아가려고 그러냐?’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그랬겠어요? 애급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아니에요. 애급에서 조금 놀다오고 싶은 마음이죠. 놀다가……. 여러분 보고 하나님께서 칼을 내미시면서 ‘너 그따위로 믿으려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라. 너희 구원을 취소시켜줄게 그 대신 이번에는 일수불퇴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장을 찍으려고 종이를 내시면 도장을 팍 찧고 그대로 세상으로 가버리시겠어요? 아니죠! 만약에 그렇게 찍고 갈수 있으면 그 사람은 들어온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찍을 필요도 없어요. 그 중생한 신자는 그렇게 못해요. 못하게 되어 있다 이거에요.
그리고 가본들 세상이 그 맛인가? 아니에요. 여러분 이런 얘기를 한번 해봅시다. 여러분 중에도 신앙을 가진 다음에 타락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죠. 그렇지요. 뭘 또 그렇게 고개를 끄덕여요? 한번 타락해보니까 그 때 타락의 그 맛이 옛날의 하나님을 모르고 타락했을 때의 그 맛하고 똑 같습디까? 틀립디까? 이번에는 대답을 안 하네요. 틀려요. 이미 사람이 변했기 때문에 그게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옛날에 어디 어디 음식이 참 맛있었는데……. 그리고 어렸을 때, 배고플 때 맛있게 먹었던 집 한 이십년 만에 찾아가잖아요?’ 그러면 아! 이 맛이야. 그럴 때가 별로 없어요. 이게 이 맛이 아닌데 똑같이 맛을 못 내내……. 그게 아니라 자라면서 이게 전부 다 변해서 성향과 입맛이 바뀐 것이에요. 그래서 옛날의 그 맛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제가 음식을 엄청 짜게 먹었어요.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우리 집사람은 아주 싱겁게 해주는 것이에요. 무조건 소금부터 넣고 먹었어요. 그런데 한 7년 정도 산 다음에 집에 가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은 이제 못 먹겠어요. 너무 짜서. 그런 것이에요. 자기가 이미 변화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똑같이 타락해서 세상으로 돌아가도 그 때의 그 맛이 안나요. 그리고 세상도 그 사람을 손님처럼 취급하지 고향사람처럼 취급을 하느냐고요. 세상의 가슴에 못을 박고 도망을 갔는데 배반자가 왔는데 짓밟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까지만 야합을 해주지 결국은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길이에요. 돌아갈 수가 없는 길이에요. 그래서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은혜가 떨어지고 난 다음에 미친 녀석이지 그 녀석도……. 돌아다니면서 그랬어요.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예수 믿은 것’ 이라고 말이죠. 제가 그랬다고요……. 인격적인 승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이런 것도 모르면서 옛날에는 나 혼자하면 잘 되었었는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안 되게 하시는 것이죠. 나중에 어떤 때는 마음속에 이런 것이 치올라가지고 ‘도와주는 것은 기대도 안 할 테니까 방해나 놓지 마시라고…….’ 그렇게 기도한 적도 있다니까요. 자꾸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로 나의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것이에요. 이게 계속 막으시니까 마지막에는 목사가 되게 하셨잖아요. 열어놓으셨으면 제가 여기서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여러분하고 씨름하고 있겠어요? 어디론가 날아갔지!
보세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을 하라고요. 진짜 목회자로서 어떤 때는 역한 감정이 생기면 ‘한번 가보고 싶은 데가 있으면 한번 가보라고요.’ 내가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뻔해요. 인생들이 갈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애급은 못가요. 아니 왜 못 가는지 내가 밤새도록 증명해 볼까요. 하나만 증명할게요.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입구까지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과 기근과 그 다음에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수많은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러면 거기로 가려면 또 그 길을 걸어야 되요. 어떻게 가냐고요? 오던 길은 하나님이 동행해주셔서 그래도 전우의 시체를 묻으면서 왔어요. 그런데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에요. 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없다는 것이에요? 못가요! 그럼 어떻게 되요? 광야에서 가다가 엎드려져서 죽는 것이에요. 그러려면 가라고요.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에요. 그런데 자꾸 그 길을 가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붙드시고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발목을 붙드니까 붙들수록 가면 뭐 좋은 일이 생기니까 저렇게 못 가게 하는 것이겠지……. 하면서 마음속에서 더욱 격려를 받는 것이에요. (웃음이 나와요? 웃음이 나오는 나도 참 한심하지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지몽매한 이야기에요? 갈 필요 없어요. 이미 돌아온 길이에요. 또 간다고 칩시다. 홍해 앞까지는 갈꺼 아니에요. 천신만고 끝에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홍해는 누가 갈라줘요? 올 때는 하나님이 갈라주셨는데 갈 때는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갔는데 누가 그것을 갈라 주느냐는 말이에요. 못가 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더 양보해서 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또 벽돌 날라야 되요. 그게 그렇게 좋아요? 그러니까 하지 말아요. 하지 말고 그냥 여기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같이 삽시다. 아멘!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 이거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데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렇게 뒤로 물러나가서 결국은 하나님이 큰 벌을 내리시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 되었는데 왜 하나님은 그때까지 내버려두셨을까? 그 얘기가 꼭 똑같은 그 얘기에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손이라도 좀 쳐주시지……. 한차례 때려주시지……. 아니면 선악과를 보지 못하게 해주신 다든지……. 아니면 나무를 쑥 뽑아서 딴 데로 가져가버리시지…….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 이것이지요.
2. 은혜와 의지
여기서 은혜와 의지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굉장히 긴 이야기가 되어서 언젠가 제가 한번 꼭 한 일주일 시간을 내서 해 드릴게요. 그런데 오늘 요약만 하자면 이런 이야기에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신자의 의지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초월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물을 주면 그 사람들이 구제를 받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마음에 이것을 들어서 줄 의향이 없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와서 두 사람이 팔을 잡고 여기다가 끼어서 팔을 들어서 결국은 이 내 소유 금으로 된 것을 저 사람이 가져가게 해 주었다 이것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자기가 한 것이에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죠. 남이 한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마찬가지죠. 또 나는 이 사람을 때릴 의사도 없는데 이 사람의 손을 잡고 저 사람을 딱 쳐서 피가 나게 했다. 누가 벌을 받아야 해요? 이 손의 주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을 불가항력적으로 움직여서 때린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해요. 그 사람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남의 손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때려 피를 흘리게 했으니까 벌을 받아야돼요.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는 가기 싫은 사람의 손을 붙잡아서 가게하시고 죽이시던 사람의 손을 강제적으로 붙들어서 보물을 주게 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에요. 간증할 때 제일 뻥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뭐냐고 그러나하면 ‘불가항력적으로’, 아니면 ‘나는 전혀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어찌할 수 없이 강권적으로’ 그게 전부 다 뻥치는 것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의 강권적으로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의 의지와 반대되는 강권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역사하는 강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도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짐짝 떠밀 듯이 집어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안 행할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 안에서 우리를 강하게 감동을 주어서 결국은 우리가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은혜에요.
그래서 이 은혜는 결코 의지를 초월하지 않고 신자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자가 그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을 물러설 때가 되면 은혜가 고갈되기 때문에 물러나지만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미끄러지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행동으로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그 마음에 있는 은혜가 소진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죄의 형이상학적인 의미는 은혜의 결핍이에요. 은혜가 결핍되면 굳이 죄를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안 해도 마치 호수에 물을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듯이 은혜가 사라지면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죄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에요.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들에게는 모든 세속적인 번영이라든지 당시의 타락한 종교적인 형편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있어도 그것은 모두 도구에 불과하고 자신이 스스로 의지적인 결단을 하고 은혜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관계로 불러주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요? 그래서 그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렇죠? 그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뛰어나게 높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당신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언약의 당사자로 대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의무를 가지고 우리를 도우시고 인간도 다시 하나님을 향한 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려고 할 때 우리의 힘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의무에 대한 생각이 없고 의무를 이행하게 하려는 운동력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무를 심각하게 태만히 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언약관계 자체를 하나님 앞에서 무시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의무를 행하는 행위가 우리를 은혜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고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거저 주는 것이지만 그런 의지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들은 정 반대의 길을 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멀리 물러나게 된 거에요. 여러분들이 항상 은혜를 받고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는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자랑하던 사람들이 이제 은혜에서 물러나서 죄 가운데 빠져 그리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핑계를 바깥에서 찾는다는 것이에요.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는 정말 구역질나는 삶이라는 것이에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III. 부르시는 하나님
여러분들은 그러한 물러간 이러한 자리에서 반드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요.
A. 선지자를 통하여
이 부르실 때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시느냐하면 선지자를 통하여 부르시는 것이죠. 그래서 11장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급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분향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 분향하였느니라.’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에요.
1. 위에로 부르심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셨어요. 그리고 그 말씀은 위에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었다는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그럼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그것이에요. 아니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부어달라고 간구하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오늘날의 신앙의 생활과 영적인 상황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목회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보이게 전해주어도 영향을 안 받는 사람들이 혼자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의 절반이상은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맛은 항상 같아요. 고기 싫어하는 사람은 고기국도 싫고, 고기볶음도 싫고, 고기찌게도 싫고, 고기부침도 싫어요. 당연하잖아요. 매운 것이 싫은 사람은 매운 국도 싫고, 매운 반찬도 싫고 매운 간식도 싫고 싫어요. 어쨌든 싫다 이거에요.
2. 말씀으로 부르심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그 예배시간에 나와서 들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혼자 성경을 피고 심오한 하나님의 만남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요? 그렇게 유능하면 가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지 그래요? 교회는 자기 편의로 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함께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는 하나님의 경륜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이 모든 우주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과의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공동체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이 혼자 놀라운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얘기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데서나 은혜를 주실 수 있어요. 회심하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떠드는 동요소리를 듣다가 감동을 받아서 성경을 펼치고 회심을 했어요.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셨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갖고 지체들을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자기 자신을 복종하고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꺾어지고 변화되는 방법을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지어져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물러갔을 때에도 하나님이 공중에서 삐라를 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욕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얻어맞는 칼 한 자루 없고 총 한 자루 없는 선지자들을 보내었어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게 하는데 이 인간들이 안 들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뼈아픈 가정생활을 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까지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여러분들이 미끄러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을 때에 여러분 자신도 모르는 여러분들의 상태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곤고하면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올 생각을 해야 해요. 거기에 유일한 길이 있지 다른 곳에는 길이 없어요. 모여서 수다 떨고 수없이 떠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작당을 해도 거기에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 없다는 것이에요. 마음속에는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불평과 불만과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악들과 은혜가 고갈되어서 솟아오르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악한 경향성들을 토해놓으면 토해 놓을수록 나중에 회개할 것만 점점 많아지는 것이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와서 수술대에 누워서 ‘하나님 내 영혼이 어떤 상태입니까? 내가 주님 앞에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을 주셔요.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고 다시 그 깊은 수렁에서 다시 헤어 나와서 다시 살아가는 것이에요. 뭐 거기에 무슨 어마어마한 분량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예를 들자면 깊은 산속을 지나가다가 깊은 늪에 푹 빠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온몸이 점점 수렁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막 미끄러져 들어가요. 꿀꺽꿀꺽 늪으로 빠져가지고 막 발버둥치고 고개를 드는데 결국은 코까지 잠겨가요. 꼭 헬기가 날아와서 특전사용사가 와야지 구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누가 새끼줄 하나만 던져주면 그것 붙들고 나오면 그러면 간단해요.
존오웬 목사님의 아버지도 아주 충실한 목회자이셨거든요. 그렇게 철저한 청교도 가정에서 자랐는데 신앙이 없었어요. 확신이 없었어요. 경건하게 훈련은 받았는데 확신이 없었어요. 그 당시에 그 마을에 ‘캘러미’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그 유명한 장로교 목사님 설교를 들으러 가자고 갔어요. 갔더니 그 유명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부재중이에요. 그리고 누가 대신 올라왔는데 시골서 올라온 목회자 한 사람이 올라왔는데 친구는 ‘캘러미’ 목사님 설교를 들으러 왔는데 나는 다른 데나 갈래’ 그런데 존오웬은 ‘예배시간도 다 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예배를 드려야지!’ 굉장히 실망하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웬걸! 그 시골교회의 목사님이 성경구절 하나를 읽고 ‘네가 어찌하여 의심하느냐’하고 외칠 때에 이 사람은 여기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딱 새끼줄 같은 말씀을 하나를 딱 붙들고 거기서 나오는 것이에요. 나온 다음에 새끼줄만 있으면 안 되죠. 좀 더 많은 말씀을 붙들고 가야되지만, 여러분들의 인생의 위기에 빠졌을 때에 누가 조직신학을 가르쳐줘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잖아요? 교리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딱 하나 ‘확’하고 빛으로 들어온 말씀을 붙들고 나온 것이에요. 그 옛날에 우리교회 다니던 교인 하나는 그날이 비와 왔나, 뭐가 왔나 해서 어쨌든 빙글빙글 돌다가 예배시간에 지각을 많이 했어요. 설교시간을 1/3을 잘라먹었대요. 그런데 들어왔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그래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고통하고 괴로워하던 그 어두움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에요. 또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거봐요! 늦게 와도 되는 길이 있잖아요!’ 그러면 안 되지요. 그 사람은 아주 특이한 경우고……. 그러니까 그렇게 새끼줄 하나같은 말씀을 붙들고 수렁에서 확 빠져나오는 것이에요.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묘미가 있고 신앙의 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말씀 앞으로 돌아오는 길이 여러분들이 그 모든 고난과 혼란 속에서 헤어 나오는 유일한 길이에요. 거기서 물고 찢고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하고 머리가 터지게 싸우고 이사람 저사람 미워서 가슴에 칼을 품고 그리고 살아봐야 마지막에는 회개할 일만 늘어나는 것이에요. 그게 본질이 아니잖아요.
B. 불붙는 긍휼로써
그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느냐 하면 불붙는 긍휼의 마음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서 재미나는 말씀을 하세요.
1. 아드마와 스보임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여기서 아드마와 스보임은 마을 이름이에요. 그런데 어느 마을이냐 하면 그 하나님의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한 소돔지방에 있는 마을들의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유황의 불비를 내려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덩어리로 만드시잖아요. 거기서 모든 그 마을의 인구가 그냥 완전히 진멸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비참한 심판을 당한 마을이 아드마와 스보임이었어요. 그 아드마와 스보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그 전설에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받고 완전히 멸망해버린 그 마을이었다는 것이죠.
2. 버릴 수 없는 마음
우리로 말하자면 러시아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사고 난 그런데 같은 인상이 깊이 박혀있었는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그렇게 아드마와 같이 그리고 스보임과 같이 너희를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나는 그럴 수 없다.’ 이게 버릴 수 없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 부모를 버리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없었잖아요. 요즘은 안 그래요. 옛날에……. 요즘은 잘 버려요. 나쁜 부모들이에요. 버릴 수 없는 마음 그게 무슨 마음이에요? 자식이 부모를 향한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들을 향해 진노하시다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다시 너희를 향해 긍휼이 불붙는 것처럼 타오르니 내가 너희를 진노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에요.
3. 스스로 돌아서는 사랑
신앙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놀랍게도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알려져요. 그러한 하나님 마음속에 불붙는 긍휼의 마음-사랑의 마음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은 내 마음을 몰라주신다고 원망을 하지 주님의 이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이 알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래서 주님 앞에
(찬양)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고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자기 자신이 다 알려졌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알게 하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에 성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묶어질 때 그 때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도는 하나님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이 알려졌다는 것은 신자가 깊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없어요. 말로만 하나님 앞에서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살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주님 면전에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만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주님 면전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에요.
IV. 결론 : 하나님 백성의 행복
결국 마지막 이 사경회에서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뒤로 물러난 곳에서는 어떠한 행복이 없어요. 왜냐하면 물러난 거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의 욕심이 그 길이 좋고 편해서 그 길로 물러났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거듭난 본성도 물러난 그 길을 싫어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물러난 그 길을 싫어하셔요.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을 따라서 믿음의 길에서 이탈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잠시 좋고 편해서 가는 그 길이 마음에는 가시밭길이 되고 영혼에는 끝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그런 고난의 행군이 되는 것이죠. 왜 우리가 그런 길을 걸어야 되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구하면 얻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양심이 고통 받고 죄에 짐에 눌려있다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무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요. 순종하고자 하지만 순종할 능력이 없을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순종하기를 원하니 순종할 수 있도록 나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의 자원을 공급하셔서 은혜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셔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하나님 등진 길을 걸어가서 마지막에 시련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번민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성도의 참된 행복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나를 보내서 아드마와 스보임같이 버릴 수 없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품으로 돌아와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물러간 그곳에서 돌이켜 다시 은혜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목회자의 즐거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물러간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