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200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2 (2009/10/20)
1. 낙심한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요20:19-20)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2. 주님이 주시고 싶은 것(요14:27)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7
3. 하나님과 화목하라(욥22:21-22)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2
4. 불의를 버리는 자를 다시 세우심(욥22:23-25)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8
5.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라(욥22:26)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3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3 (2009/10/21)
1.낙심한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사건을 오늘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렸고 마리아가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러나 제자들은 그 여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에게 확 밀려오는 것은 혼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저 여자의 이야기는 그리 신뢰하기가 어려운데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어디다가 갖다 치웠을까?
그 앞에 나오는 기사 속에서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 믿었더라고 되어있지만 이것은 저의 판단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믿은 것이라고 봐야지 되지 않을까. 어째든 제자들은 전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그 내용이 사실은 도마만의 고백이 아니라 제자들도 공유하고 있던 고백이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추측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이 제자들은 더 큰 이중적인 두려움이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처형했으니 이제 모종의 박해가 가해질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과 사라진 시체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묻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종교지도자들 속에는 제자들이 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고 부활했다고 하는 소문을 낼지도 모른다고 하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 무덤에 인봉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그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제자들이 모였을 때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다. 그러니까 창문이든지 덧문이든지 모든 문을 다 닫아서 그래서 자신들이 여기에 숨어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혹시 또 누가 온다고 할지라도 문을 전부 닫아서 어떤 해를 면하고자 했던 극도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안, 초조, 혼돈, 두려움 이런 것이 바로 제자들이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을 두려웠던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것도 이 제자들에게는 매우 망설여지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에 그들은 마치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서로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장담을 했지만 정작 잡히시던 날밤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는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누가 더 높은가 하고 다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셨을 때는 제자들이 남김없이 모두가 도망가 버린 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그렇게 똑같이 두렵고 또 망설여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두 겹, 세 겹으로 불안과 초조, 혼도, 공포 이런 감정들이 밀려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모였지만 누구도 우리의 갈 길이 이 길이라고 지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누구도 이런 제자들의 상황에 대해서 타개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길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고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지 않습니까? 인생에 일어난 앞뒤의 연결이 안 되어 혼란과 끝없는 불안과 그리고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는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침체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두려움속의 문들을 걸어 닫았지만 만약에 유대인들이 병정들을 데리고 들이닥친다면 그까짓 것 문하나 부슬 수가 없겠습니까? 단지 닫힌 그 많은 문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문이 모두 닫혔기 때문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모두 닫힌 문, 그 방 그것도 제자들이 있는 한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이나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과 그리고 뼈를 가지신 그 몸으로 제자들 한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체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닫혀있던 건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었기 때문에 만지면 만져지는 살과 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물리적인 벽을 통과해서 그래서 제자들이 모인 한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4 (2009/10/22)
우리는 여기에서 불안과 혼돈,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방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계산으로는 문이 모두 닫혔고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벽을 통과해서 환상도 아닌 그분이 실제의 뼈와 살을 가진 몸으로 제자들 한가운데 나타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3년 넘도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온갖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상식에 묶여있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안과 절망과 혼란스러운 침체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의 신비한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방법,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찾아오셔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어제 주일 아침에 일찍 와서 그늘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주일 설교 묵상을 하고 있었는데 여전도사님이 교인 한분을 모시고 와서 인사를 시키십니다. 인사를 했는데 저기 엘지 패션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교회도 예쁘장하고 그러니까 한 십 년 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인데 오후 예배 한번 들어가 볼까? 하면서 들어왔다가 수로보니게 여인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회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의 인생 시간표에 있었겠습니까? 옷 사러 오는 것은 있었지만 주님을 만날 계획은 없었습니다.
몇 해 전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주일날 아침에 복사기가 망가져서 난리였는데 고치는 아저씨가 왔습니다. 직원이 잘 타일러서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 옛날에 젊었을 때 다니셨다면서 예배 시간이 되었으니 예배를 드리고 가십시오. 들어와서 듣다가 하필이면 거듭남으로 회심을 설교하던 시간이었는데 펑펑 울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얼마 전까지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게 우리의 인생의 시간표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오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물리적인 계산과 상식으로는 주님을 만날 것 같지 않은 때에도 사실은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에워싸인 벽, 닫힌 문과 같이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주님을 만날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님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원하시면 찾아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에 처음 등장하셔서 최초로 외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노라.”이었다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였고 그리고 그 기도를 예수님의 개인적인 기도로 본다면 사실 마지막 남긴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첫 번째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평강이 없느냐고 책망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왜 불안하고 그리고 초조해하는가 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시는 음성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평강을 당신이 이루어놓으신 평강을 제자들 위에 임하게 하는 축원의 형태를 가진 그런 표현입니다.
이 “평강”이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에이레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에이레네 휘니” 그랬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휘스토유” 그런 뜻입니다.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하는 기원문입니다. 에이레네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평강으로 많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이레네를 히브리어로 옮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샬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샬롬 투유” “너희들에게 샬롬이 있을지니라” 였습니다. 이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아주 풍부한 그림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샬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모든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화목하기 위해서 지내는 그 제사를 샬롬, 살렘 화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샬롬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평화는 평화인데 “안녕하십니까?” 할 때 “안녕” 이것이 이 샬롬에 상당히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엇인가 찌그러지거나 깨지지 않은 상태에 온전한 것을 가리켜서 샬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히브리에 가서 빵집 앞에 가서 텐립 나에게 주십십오, 그런 뜻입니다. 텐리 샬롬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빵을 통째로 주십시오. 그 뜻입니다. 커다란 빵을 구웠을 때 통째로 주는 빵은 샬롬이라고 그러고 그게 너무 많아서 반으로 가른 것은 “하찌”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텐립 샬롬 그러면 그 빵을 통째로 저를 주십시오. 그런 뜻이고 하찌 그러면 너무 많으니까 반쪽짜리를 주십시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고 그런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찌그러지거나 부족함이 없이 그것이 온전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샬롬이라고 우리들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샬롬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녕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묻지요. 이게 사연이 많은 인사말입니다. 왜냐하면 안녕할 리가 없었는데 그 뜻입니다. 수없는 전쟁, 당파싸움, 그 다음에 역모와 고발, 갈등 이런 것들이 수없이 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 물어 보는 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뭐가 험악한 일이 안 일어났습니까?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을 때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밤에 돈벼락을 맞았습니까? 아니면 지난밤에 정욕이 불끈 솟았습니까? 지난밤에 갑자기 큰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까?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 정신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모든 요소에 찌그러짐이나 깨짐이 없이 그렇게 온전히 펼쳐진 그런 좋은 상태였습니까?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꽃이 안녕한 것은 마음껏 확 발산하고 자기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게 안녕한 상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안녕한 상태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데 그것은 증권회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안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에 정신이나 영혼, 육체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이 세상의 자원이나 하늘자원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어떤 일 때문에 찌그러지거나 망가지거나 결핍을 느껴서 인간다운 온전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구원의 개념 속에는 영혼을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지옥에서 옮겨놓는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정신, 심지어 육체, 물질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 그것 자체가 전체적인 구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전인적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 현실로 나타나게 될 때 찌그러짐이 없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자기에게 주신 그런 인간으로서의 성품과 자기를 구현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그 상태가 바로 샬롬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샬롬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샬롬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로마의 평화라고 이야기한 팍스라고 한 무력으로 온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서 다스리고 통치함으로서 오는 로마중심적인 평화였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평화 때문에 우리 모든 인간들이 온전한 상태를 안녕하게 누리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에에네레 쉬미 라고 말씀하신 그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어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구약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이 샬롬 사상이 그것으로 꽉 찬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큰 부자가 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큰 힘을 얻어 보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우리의 복음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번영의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고 큰 부자가 되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심은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사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모든 고통은 관계에 있어서 사랑하고 평화를 누려야할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그리고 미움과 고통이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괴로움의 대부분의 이유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고 돌봐야 할 사람들끼리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더욱이 함께 사랑을 나누고 용서하고 그 다음에 구제하고 베풀어야 할 교회의 지체들이 미워하고 갈등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생채기 나게 하고 찢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하는 것, 한때는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 가지로 많은 현실적인 이유를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찰하자면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온전히 수립되지 못한 이 샬롬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트려지면 그것은 모든 인간들 사이에 찢어진 관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가 없이는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 안녕의 상태를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한 가지 예를 들고 이 설교를 접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최고의 고백을 하고 그리고 진짜 자기의 뼈로부터 만들어진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뒷장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고 남편이 아내를 간접적으로나마 원망하는 발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미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가시 중에 가시가 되어버린 남편을 향한 아내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둘이 서로 싸웠나요? 성경 이외의 전승되는 문헌에 의하면 심지어 이런 기록도 나옵니다. 하와가 그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아담이 보고 말렸는데도 먹자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아니니까. 헛소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것을 먹었으니 저 여자가 죽을 텐데 저 여자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꼬 하고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먹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둘 사이에는 어떤 다툼이 없었는데 각자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지고 나니까 부부사이에 안녕 상태가 여지없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등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하고 그러면 그 둘이 만나서 아무리 화해하고 그래도 그것이 한 방법은 되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안 됩니다. 각자가 주님과의 샬롬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애들아 나다, 하시면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거기에는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창에 허리 상하신 그 자국이 또렷이 남아있었습니다. 주님이 그런 고난을 당하실 때 제자들은 주님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당신이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또 환상이 아니라 실제의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절망과 두려움과 혼란 속에 갇혀 있던 제자들의 이 은신처는 순식간에 기쁨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에서 신앙을 버리고 주님 앞에 신발을 거꾸로 신었든지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동안은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신발을 거꾸로 신는 동안 여러분들은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고 주님을 버리고 주님을 배반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기쁨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기쁨이니 그 기쁨이 잠시 가시고 나면 그 기쁨 보다 더 커다란 고통과 허무가 밀려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은신처에 숨어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불안과 좌절 절망 속에서 떨고 있을지라도 아무 상황이 변하지 않았어도 예수님 만났더니 그 제자들은 금방 기쁨으로 가득 차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흥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여러분들의 삶도 기쁨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2 (2009/10/20)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3 (2009/10/2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4 (2009/10/22)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5 (2009/10/23)
2.주님이 주시고 싶은 것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이 되었을 때 주님은 이전보다 더 자주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셔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많이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긴 강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끼친다”고 하는 말은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두노니” 그런 정도의 뜻입니다. 즉 잠시 후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제자들 곁을 떠나실 텐데 그때 제자들이 홀로 있지 않고 주님이 남겨주는 평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평안”이라고 하는 단어가 어제 새벽에 설교해서 여러분들이 들었던 “평강”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평강” 또 한쪽에서는 “평안”이라고 이렇게 우리말로 다르게 번역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 마음에는 평안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평강을 내가 너희에게 남겨두노니 곧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번역을 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두시고 싶었던 이 평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자기 밖의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건도 겪고 또 사물도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건과 사물들과 접하고 또 그 세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좋은 일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를 낙심시키고 좌절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그런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좌절하고 낙심시키고 하는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할 때 우리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미래에 일의 염려로 인해서 현재의 평안을 위협받게 됩니다.
오늘 새벽에도 집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굉장히 추워졌습니다. 지금은 다들 잘살게 되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먹을 것 땔감 걱정을 안 하는데 우리 어렸을 때 이렇게 날이 부쩍 추워지면 서민들이 걱정을 많이 합니다. 일단 쌀 한 가마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쌀이라도 한 반 가마 들여놓고 연탄이라도 한 2-300장 쌓아놓으면 서민들의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추운 겨울이 다가와도 저녁때면 양손에 연탄을 하나씩 사서 새끼에 들고 오는 퇴근길에 서민들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모자라고 결핍이 있으면 미래가 염려되고 그러면 현재가 불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없는 결핍과 불안을 만나게 되는데 제자들에게 이제껏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그리고 스승이 되어주시던 예수님이 나는 이제 아버지 집으로 간다. 너희는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이런 말씀을 끊임없이 남기실 때 제자들은 많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물질이 없어서 혹은 여러 가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또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의 인생이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결핍하고 물질이 부족하고 어려운 때도 우리들이 평강을 누리며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감각이 우리에게 사라질 때 그때 우리는 불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나는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는 나의 육신을 다시 볼 수 없지만 평강은 너희에게 남기고 간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신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스승이 되어주시고 구원자가 되어주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큰 위로였는데 그 주님이 제자들이 다시 볼 수 없게끔 완전히 하늘로 사라지시면서도 제자들에게 평강을 남기고 가시는 그 방식이 어떤 것일까? 이것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평강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평강이 당신의 평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평강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혹은 끼친다. 말씀하신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진정으로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하였던 이 세상의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의 공로로 하나님의 평강을 자신들이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 마음이 하나님과의 평화의 의해서 그 마음이 지배되는 그런 종류의 내적인 평강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지금도 불순종과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끊임없이 대항하며 그분이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그 사랑의 음성을 완고하게 거절하고 도망가는 인간들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반역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미워하고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 모든 죄와 고통을 안겨주는 이 세상은 사랑하는 거꾸로 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바로 우리 주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비극적인 증거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도 아주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자연의 풍부한 증거는 오늘날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도전과 위협을 받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깨트려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지금 가장 커다란 문제도 우리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근심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이제 죽을 때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 평안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기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형벌을 받아 죽임당하셨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와 평화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순종과 거역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리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하신 일을 현저히 무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유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이 놀라운 평화가 당신이 가고 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전달될 것인데 그런 평화의 전달이 있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게실 때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그 일들을 그 평화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게 하셔서 당신은 가셨지만 제자들이 당신이 하신 일을 뒤이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시도록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문제가 되고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하나님과의 평화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실 것인데 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그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보혜사” 라는 이 말은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 희랍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이 말은 사전에 있는 단어가 아니라 성경을 번역할 때 이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한자씩 세 의미를 한 번에 모아버린 것입니다. ‘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다는 점에서 보이고, ‘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혜이고, 또 마지막에 나오는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요 우리를 위해 돕는 자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해 가르쳐주시는 분, 이것이 바로 성령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사람들 속에 오실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외 없이 그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 당신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평화를 가져다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지금과 같이 똑같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집에 들어가 문을 모두 닫고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역시 똑같이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천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락방에서 숨어서 기도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대로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만났을 때처럼, 다시 오셨을 때처럼 그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고 그리고 놀라운 평강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뿐만이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도 평화와 사랑이 주어졌습니다. 그 충만한 평강과 사랑뿐만이 아니라 연약한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이 도와주셨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제자들이 누리던 그런 똑같은 평강을 더 항구적인 형태로 제자들이 부여받게 되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그들 가운데 오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대할 때마다 예수님이 평소에 가지고 계시던 그 마음을 제자들에게 충분히 부어주셔서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을 뒤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다하시지 못한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평강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끊임없이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대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평화를 기초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누려지던 이 평화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분을 믿는 모든 우리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 평화를 전달하는 방식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복음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이룩됩니다.
여러분 모두 예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요,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분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 때문에 그분이 여러분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죽으셨다고 하는 그 복음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여러분들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을 때 주님 없이 여러분들이 살던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 대신 아버지 함께 하는 완전한 평화의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그 일들을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적용되게 하심으로 여러분들이 실제적인 평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여러분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땅에 예수님이 계실 때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제자들이 누렸던 그 평화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고 항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신자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원리적인 평화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를 기억하고 진실하게 참회하고 믿음을 가지면 원리적으로 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믿음의 상태, 그리고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불순종하는 현실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깨트려질 수 없는 화목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자면 파괴될 수 없는 화목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완전한 불화가 성립하려면 둘이 서로 미워해야지만 완전한 불화입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오해하거나 잘못해서 상대방을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그를 품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불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미 구원받은 여러분 사이에는 이런 종류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언약을 파기하고 불화한 관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여러분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지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셔서 여러분들과의 평화를 깨트리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원리적인 평화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돌아갈 희망이 되고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내가 이제껏 주님과의 평화를 깨트리고 산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불순종했고 나빴습니다. 이제는 내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고자 합니다. 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돌아갔는데 주님이 어제까지는 내가 너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네가 아무리 회개하고 나에게 돌아와도 내가 변했다. 그래서 이제는 네가 내 앞에 와도 나는 네가 싫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언제 다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한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근거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잊지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한번 우리를 구원하시고 선택하시고 우리와 평화를 이루신 후에는 그 평화를 깨트리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평화입니다. 궁금한 것 하나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기 전까지는 그 평화를 누리면서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평화의 방식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화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과 그 모든 자비가 변함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만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평화가 우리에게 충분히 성령 안에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성령을 근심시켜드리게 되면 이렇게 예전에 누리던 하나님과의 평화의 감각이 우리에게 사라지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낯설게 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느껴지고 적극적으로는 진노와 정죄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후로 안 사랑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내가 믿을 때부터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난날에 죄에 대한 뼈저린 회개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죄를 대속했네
주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지만 내가 그 사랑에 화합하고 순종과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랑이 실제로 내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이루신 이 평화를 원리적으로 누릴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커다란 행복이고 또 의무이고 이런 평화를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누릴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용, 자기에게 해를 끼친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 용서, 자신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더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희생과 배품, 하나님의 참 사랑을 멀리 떠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고통 받는 영혼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애정과 눈물,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타오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고 있을 때 영혼에 주어지는 덕스러운 특징들입니다. 그 많은 특징들은 오직 신자가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실제적으로 성령 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냉랭하게 살아갈 때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평화를 실제적으로 누리고 살아갈 때 그 모든 일들은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렇게 충만한 성령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록 감옥에 갇혔어도 자기는 모든 것을 주 안에서 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안에 있는 불결한 것들을 끊임없이 토로하며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그 평강을 매일매일 삶 속에서 충만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실제적인 주님과의 평화를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베푸셨던 그 많은 일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향해서까지 관용과 사랑을 베푸셨던 그 너그러움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주님과의 평강을 오늘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 안에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누리며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2 (2009/10/20)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3 (2009/10/2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4 (2009/10/22)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5 (2009/10/23)
3.하나님과 화목하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1-22).
이 욥기에 나오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비록 욥과 논쟁하는 가운데 욥을 오해하여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말 속에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만물들을 관계를 맺으시는 그 진리의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이 사람은 욥에 대해서 매우 폭 좁은 판단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연단하시는 이 욥을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욥을 향한 충고 속에는 적용은 잘못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일정한 진리의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충고가 욥에게보다는 오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 탁월한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욥기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 성경의 이 부분은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옮기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너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화목하라, 너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또는 평강을 누리거라. 그렇게 하면 그 선이 네게 도달하리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너는 하나님께 복종하라. “하스켄”이라는 단어인데 “너는 하나님께 복종하라. 너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켜라.” 그리고 샬롬이라는 평화롭다는 말에 명령이 나옵니다. 그래서 ‘평강을 누리거라. 혹은 평화로운 상태가 되어라. 혹은 평강한 상태가 되어라.’ 그러면 그 선 ‘토바, 토브의 여성형 명사인데 그 선이 너에게 미칠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봅시다. ’너는 하나님께 복종하여라. 너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라. 너 자신이 하나님께 항복하여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이방의 신들은 자기에게 제사를 드리면 그 뇌물로서 그 제사 드리는 그 모든 것들을 뇌물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이든지 사람이든지 뇌물개념의 물질을 탐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도덕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남에게 도움을 받고 신세를 지고 돈을 얻어가지고 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없이 남에게 자꾸 돈을 받고 그리고 더군다나 그 돈을 받은 어떤 대가를 그 사람에게 옳지 않은 방법으로 해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중동의 신들의 개념이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 늘 배고파서 이렇게 잿밥을 찾아다니는 그런 종류의 신이고 그게 제대로 안되면 심술을 부려서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주고 하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내면이 제사를 드리는 자기의 신들에게 평소에 얼마나 복종하고 사는가 하는 것들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하나님은 이방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도덕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일관성으로 나타나는데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이 도덕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거룩하심이 인간들의 도덕생활과 도덕감에 영향을 미칠 때는 바로 그렇게 고도의 정결한 윤리를 가진 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 앞에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먼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복종치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그저께 말씀드린 하나님의 중심성입니다. 언제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죄인들을 찾아 나서시는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와 같은 하나님을 그리고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것은 양상일 뿐이고 근본적으로는 찾아가도 결국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고 인간을 끊임없이 감화시켜서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그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불복종하고 불순종하던 삶을 돌이켜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종은 단순한 외적인 복종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그분께 굴복하는 온전하고 완전한 복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완전하고 영원한 항구적인 하나님을 향한 승복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마음속으로 나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싶어, 이러고 그분을 계속 맞서는 것이 내 소원이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 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고백이 나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 주님과 평화를 원하고 더욱이 주님과 평화 속에서 복 받은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를 꺾고 그분께 복종하고 그분께 승복하고자 하는 그 결단은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욥기에서는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 그리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라. 여기에서 이 평화는 결국 샬롬이라고 하는 그 명사의 동(?)입니다. 형태만 바뀌어서 쓰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평화만을 단선적으로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평화를 누려라. 동사 뒤에 목적어가 나오는데 “바휀”이라는 단어인데 “그들과 더불어”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많은 성경들이 바휀이 사람인가? 영어로 말하면 “뎀”인데 그러면 그게 사람인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래서 번역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사실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그렇게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해석을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과 평화를 누려라, 그래도 괜찮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라, 해도 괜찮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라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샬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 평강스러운 상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얻어질 수가 없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는 반드시 사람들과의 평화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가 사람들과의 평화를 내포하고 있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 속에서 사신 분이신데 왜 그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또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그들을 탄핵하셨습니까?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인본주의적인 평화와 신본주의적인 평화가 나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 세상 나라도 평화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도 평화를 원합니다. 이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없습니다. 모두 평화를 원하는데 문제는 그 평화를 성취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인본주의적인 평화는 사람들과의 일치를 이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희생하면서도 또 수립하려고 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신본주의적인 평화는 그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과 화목시킴으로서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 평강을 그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누리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평강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는 그런 종류의 평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종류의 평강을 찾으니까 그것은 결국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리고 그분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 평화보다 우선순위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전도를 한다고 하는데 결국 그 전도라고 하는 것도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결국 그 전도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과 하나님을 화목 시켜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하나님과 누리고 그 평화를 토대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한분 하나님을 중심축으로 하는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질서의 온전한 형태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 상태입니다. 그것은 외관상으로만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그 밖으로 나타나는 그 모든 질서 있는 평화의 상태가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그런 종류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달라도 한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한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복종시키고 그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평화를 자신의 내면속에서 질서로 소유하고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서 공동체적인 질서를 이루면서 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보여주어야 할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를 누리게 될 때 그때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복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좀 많이 망설여집니다. “토바”라고 하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 때 그 “토브”라는 단어의 여성형태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거기에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좋게 생각하는 정신과 그리고 물질의 모든 복들이 포함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그것에 세속적인 그런 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늘과 이 땅에 있는 모든 좋은 자원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차라리 이것보다는 “모든 좋은 것이 내게 임하리라.” 그렇게 번역을 했다면 좀 고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튼 의미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는 점에 있어서도 일치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점에서도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복종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각양 좋은 것을 주시는 방식은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피조물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기를 복종하고 자기를 복종한 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누린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의존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그런 평화의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은혜와 이 땅에 있는 것들, 우리의 육체에 필요한 지상의 자원들을 하나님께서 적절히 우리 인간에게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는 방법이고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를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그래서 그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는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기 번영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보면 “복이 임하리라.” 그랬는데 좋은 것이 네게 미칠 것이다. 결과로서 이것들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앞에 있는 두 가지 조건, 자기를 복종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 없이 (?뒷면) 이 세 번째 자기의 육신의 소욕에 좋은 것을 하나님께 취한다고 하는 이것만이 그에게 소유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본질적인 특성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종, 그리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선을 덕 입는 것, 이것을 통해서 이제 이 신자들은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이미 자신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서 이런 관계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히브리 성경에는 “토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청컨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율법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들을 너의 마음속에 두어라.” 나옵니다. “청컨대” 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제발” 그 뜻입니다. 제발 너는 그 입에서 율법을 받고 혹은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복종하고 그분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종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객관적인 가르침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근대주의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바뀐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인 말씀 속에서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잣대가 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개별적인 행위를 비추어보아서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순종하고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판단이 어떤 것인가를 할 때 점검할 때 사람들은 회개의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정작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렇게 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선수들이 넒이 뛰기룰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 이만큼 뛰어야지 너희가 예선을 통과할 수 있다고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기준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온 힘을 다해서 넒이뛰기를 해서 그렇게 그어놓은 줄을 넘어서서 예선을 통과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선수들의 운동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고 자기가 껑충 뛴 다음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 줄을 잡아당겨서 거기에 자기를 맞추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행위에 대해서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기준상으로 놓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이렇게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 상황, 현대의 정신 이런 것에 끊임없이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네가 어찌하여 이 선악과를 따먹었는가?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마음에 욕망이 생겨서 먹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뱀이 나를 꼬였기 때문에 나는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속에는 하나님, 사실은 나도 피해자입니다. 문제는 제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런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고나 할까요? 그 뜻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그의 입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그 율법이 판단의 주범이 되고, 두 번째로는 그 말씀들을 복수로 나옵니다. 그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났다는 것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그 기준대로 부합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욥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자신의 행위를 재어보는 것이고 그리고 주관적으로는 그 말씀을 마음 한가운데 품어서 그 말씀이 끊임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 자신의 말씀에 헌신함으로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꿈과 사람의 헛된 욕망도 마음을 품으면 아주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깊이 품을 때 그것은 이 말씀을 즐겨 사용하셔서 우리를 바꾸시는 성령님의 커다란 역사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복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그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바 그 명령을 모두 실행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복종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한다고 하는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하고 또 이미 한 것을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진정한 복종 없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을 누리는 것을 건너뛰고 자기 안목에 좋은 것을 누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번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의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과의 평화에도 분명한 질서와 그리고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행위를 정직하게 비추어보고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 깊이 하나님을 모시듯이 그 말씀을 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멀리 떠나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께로 이끌 것이며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바로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2 (2009/10/20)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3 (2009/10/2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4 (2009/10/22)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5 (2009/10/23)
4.불의를 버리는 자를 다시 세우심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욥 22:23-25).
이어서 욥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께로부터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 한복판에 두는 이런 내적인 작용이 필요하지만 즉 그와 함께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런 일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제 “불의”라는 이 말이 “사악함”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네 장막에서 사악함을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네가 다시 세워지리라. 그러니까 Will be built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세워지리라, 그랬는데 결국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구체적인 삶의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샤다이이라고 창세기에서 처음 나오는데 그 엘샤다이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이렇게 묘사가 되고 샤다이라고 하는 것은 “전능한, 전능하신 자” 그런 뜻입니다. 샤다이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학설들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게 여러 가지 많은 설들이 있는데 어째든 말을 하면 긴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샤다드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샤다드는 “부셔버리다. 부셔서 날려버리다.” 그런 뜻입니다. 어째든 하나님의 총 포괄적이고 큰 능력을 가지셔서 당신이 마음을 가지신대로 행할 수 있는 그 큰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여기서 우리가 “전능”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그렇게 전능자라고 바로 이 지점에서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두 가지를 내포한다고 믿어지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아주 크고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힘을 행하시되 당신의 질서를 따라서 행하십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당신의 큰 능력을 이 세계에 행사하시되 당신의 질서를 따라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서대로 사는 사람은 주님이 그런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이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서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커다란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서를 거스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법을 좀 더 강력하게 집행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그렇게 법을 집행할 때 자신이 일차적인 피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전능자라는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고 또 환경도 하나님이 바꾸셔서 그래서 우리를 얼마든지 변화시키실 수 있는 큰 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 히브리어 성경에는 “텐트”라고 나오는데 이동하면서 늘 유목민족들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늘 목축을 하니까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짐승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도 텐트 식으로 여기서 펼치고 저기서 또 접고 합니다. 어째든 네 집안에서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네 집안에서 사악함을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온 종교행위나 종교생활이 우리의 전 삶을 포괄하는 생활이 되어야지 교회에 나와서만 사람이 경건하고 거룩한 척 해보이고 그 다음에 교회에서 떠나고 난 다음에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이중적인 삶에서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자의 삶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바는 우리의 종교생활이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그런 총 포괄적인 종교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그래서 내적인 평안이 없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면 마치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자신의 영혼과 그리고 삶의 질서들이 부서져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부셔져버리면 그러면 그 삶과 모든 것에 있어서 질서가 깨트려지고 그것은 그의 삶 속에 그대로 구현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시련을 안겨줄 것입니다.
가끔 신문에도 자동차에 대한 불만들이 나오는데 난 참 걱정스럽게 지켜봅니다. 나는 직접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차를 타기 전에 있었던 차인데 전에 있던 차인데 다 우리나라에서 한다고 하는 메이커에서 만든 차인데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이게 몇 번 큰 사고를 당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 믿습니다. 차가 70키로 달리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서 차가그냥 굴러가는 것입니다. 요즘 차들은 좋아서 그렇게 전원이 나가면 브레이크가 듣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전에는 줄로 연결되어있는 브레이크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밟았는데 지금은 유압식이라서 전기가 통해야만 브레이크가 밟힙니다. 두 번을 또렷하게 경험하는데 그 중에 한번은 방배동 고개, 그 높은 고개를 넘어오면서 그랬습니다. 거기서 정말 속도를 적게 내고 갔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빨리 달렸으면 사거리에서 커다랗게 한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를 끌고 가서 그렇다고 하니까 공장에서 못 찾아내어서 그 다음부터는 그 차가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때 5년인가 타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바꿨는데 그게 지금도 계속됩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 강국이니 뭐니 그래도 아직 손볼 데가 많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끔찍한 것을 어떻게 하는지 그렇게 하면서 만약에 사고가 났다고 하면 그래서 사고가 났다는 것을 운전사가 입증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쾅 하고 받았을 때 충격에 의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굉장히 재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이 만약에 이런 영혼과 육체의 질서가 깨트려져서 삶이 충동대로 살아간다면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그렇게 합니다. 가정이 깨트려지고 부모가 올바르게 살지 않고 해서 자식들이 상처를 받는 것을 보면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집안에 태어난 죄밖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부모의 잘못된 행실로 아이들의 가슴에 물리적으로 폭행을 하고 그래서 결국은 한사람이 망가져서 그게 가정과 주위에 모든 것, 주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제 은혜가 떨어지고 미끄러지고 하면 그냥 조용히 집에만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막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너진 모든 것을 자기의 모든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마치 단정하게 교회에 나와서 이 사람 저 사람 무릎에 토해놓고 똥을 싸고 돌아다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더욱 많이 무너진 그런 시대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 어디서 어떻게 사람들을 손을 보고 고쳐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무너진 시대가 되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 어떻게 어디서부터 사람들을 고쳐야할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 중학교 다닐 때인가 고등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애들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는데 학기 초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내주면 부모가 누구고, 식구가 몇 명 살고, 냉장고가 있는지 없는지 왜 쓰는지 모르겠는데 냉장고 있고, 텔레비전 있고 줄을 쳐서 가고 어떤 애들은 하나도 없으면 동그라미를 쳐서 가고 그런 동그라미를 안 하면 선생님이 무시한다고 그랬는데 선생님이 애들아, 미국에 가면 가정환경조사서에 엄마, 아빠만 나온 것이 아니라 옆에 친엄마인가 가짜 엄마인가 이런 게 나온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애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중학교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하지요.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친엄마, 친아빠와 사는 사람은 옆에다 따로 쓰시오, 그런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혼이 보편화되고 이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게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교회에 온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 온 것이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고 또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보니까 교회의 수준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정말 어디서부터 다루어야할지가 끊임없는 고민입니다. 결론은 그렇게 자기가 무너진 삶을 살아갈 때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진지한 돌이킴이나 참회도 없이 그렇게 자기 위안이나 얻으면서 교회생활을 해나갈 때 그 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슴 아픈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욥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 실제적인 화목을 회복하고 그리고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고 그리고는 우리의 삶 자체에 분명한 결단이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랬습니다. 오빌은 금이 나는 유명한 산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하자면 개성인삼처럼 오빌의 금, 하면 아주 양질의 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금과 보배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감추어둔 것”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쓴 것인가 하면 내가 너희를 보배와 같이 또 하나님께서 너희를 감추시고 이렇게 할 때 아주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추어두는 것,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진토에 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린다고 했는데 그것은 던져버리는 개체와 그 다음에 그것과 만나는 장소가 동격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보배를 티끌에 버린다는 것은 보배롭게 생각했던 것들을 티끌처럼 여긴다는 것이고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 금에 대한 너의 마음을 돌을 향하는 너의 마음과 같이 바꾸라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의 문학적인 기교입니다. 굉장히 뛰어난 기법으로 시어체로 이것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보배를 진토에 버려서 그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배향하고 그리고 장막에서 불의를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대적하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면 탐욕입니다. 그것이모든 범죄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물질이나 아니면 보화나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욕심, 어떤 의미에서 신령한 욕망으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면서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유지되지만 하나님을 그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탐욕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불화를 만들어내고 인간의 욕망은 무엇을 주어도 채워지지 않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이 욥기에서는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려라.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하면 전능자가 내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면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그렇게 합니다. 그게 결국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이렇게 탐욕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이렇게 자기의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시고 그분과의 관계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잊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만족과 기쁨을 얻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미 영혼에 위험을 알리는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세상의 지위이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수갈채이든지 간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 대신 다른 것이 신자의 영혼에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쁨의 이유는 결국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잘 차려진 상이 예쁜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잘 차려진 밥상은 아름답지 않고 예쁜 옷을 입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쁜 옷이 그에게는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먹고 입는데 관심이 없지만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굶어도 초라한 옷을 입어도 수많은 사람의 박수소리가 들리는 데는 그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자기가 원하는 아름다움이 자신 앞에 나타날 때 그때 그 사람은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인데 이제 오늘 욥기서는 그렇게 얘기하는 것인데 바로 그 기쁨을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는 것처럼 이렇게, 이렇게 하면 결국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기쁨이 되고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 알게 될 것이고 네게 매우 귀한 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 있을 때는 항상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마음에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은 만족이 워낙 크기 때문에 무엇인가 더 필요하고 더 가져야할 것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배처럼 여기며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것 때문에 한없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우리 영혼 안에도, 우리 지체의 마음 안에도 심지어는 그 육체 안에도 뭐 어떤 사람이 남의 여자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는데 결국은 더듬어 올라가면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육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아름다움도 결국은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혼과 심지어는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이런 모든 자연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농축된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참답게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과 그리고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또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모두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2 (2009/10/20)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3 (2009/10/21)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4 (2009/10/22)
2009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 5 (2009/10/23)
5.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것이라”(욥 22:26).
구체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악을 내어버리라고 욥기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배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진토에 버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거둔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참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소중한 존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되시며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으심으로서 우리가 참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그렇게 하면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마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받고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어 불순종하던 삶에서 돌이켜 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다시 하나님의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기쁨은 하나님을 향한 화목과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 자신을 향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욥기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불의를 버리고 온전히 그분을 향하여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기쁨이 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의무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의무를 이행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충분히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 의무가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복종과 사랑으로 화합될 때 그때 주님 앞에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며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내면의 세계와 외면적인 삶이 모두 일치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내면적인 삶과 외면적인 삶 자체가 모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일치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기뻐하고 내가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그분이 내게 부여하신 의무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을 행하며 살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아무튼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인하여 우리들이 기뻐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을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행하는 가장 커다란 악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 두려움과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핵심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을 정당하게 두려워하고 또 그 하나님을 올바르게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경건의 요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이 욥기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와 불의를 버림으로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다시 기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일부가 되는 것만으로는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충분히 기쁨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두가 되실 때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화목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오늘 이 욥기는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다. 혹은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많은 죄는 하나님과 언약백성들 사이에 거리감을 갖게 하고 가로막아서 도저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되게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굴을 들 수 없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부끄러움만 아니라 영적인 무능, 혹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면서 사는 가장 핵심적인 표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사는 그 기쁨이 언약백성의 행복의 정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신앙의 정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면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물질의 축복을 받고 항상 건강한 상태에서 살고 그리고 세상에서 높고 그리고 훌륭한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다만 그 고난과 시련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유가 다를 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고 예전에는 시련과 고통은 무조건 내게 아프다는 이유 때문에 다 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순종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오늘 이제 이 욥기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나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내가 갚으리라. 범죄한 영혼,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어려운 점은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화목할 때는 이 기도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주님의 심정을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통로라면 기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충분히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또 순종하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기도생활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가장 올바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토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신자인 우리들에게 전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생활은 점점 더 말씀에 순종하도록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생활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욥기는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먼저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그것을 우리들이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거나 많이 손상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져갈 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그럴수록 우리의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지 않아도 기도가 될 때는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그것은 결코 기도가 아니고 자신의 마음을 울린 그 기도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올려진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사실은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가 잘 안되면 사람들이 하는 유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냥 엎드려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개선하는데 아무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알지 못하는 방언을 따따거리면서 무슨 기도 속에서 신비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제발 기도시간에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따따거리면 이게 무슨 기도입니까? 한 시간, 두 시간을 하고 가면 그 마음속에 무엇이 맺히겠습니까?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이 언어로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하심과 그리고 성령의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모든 간구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언어의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그 기도를 그렇게 드리고 나서 무엇을 마음속에서 깨닫고 그리고 무엇으로 그 마음을 쇄신하고 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 어리석음과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애통하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핵심은 그렇게 흐느끼는 기도든지, 통곡하는 기도든지, 탄식하는 기도든지, 목이 쉬도록 부르짖는 기도든지 핵심은 그 외관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데 그 우러나는 것이 울부짖지 않게 만들면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조건은 그럴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도가 안 될수록 두레박을 던져서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시골의 우물을 보면 항상 물이 가득차서 두레박을 던지면 풍덩! 하고 들어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날이 가물면 그렇게 던지면 탁!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 우물이 바닥에 드러나서 구석에 물이 좀 남고 탁! 하고 바가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납니다. 길어 올려봐야 빈 바가지만 올라옵니다. 천천히 바가지를 흔들어보면 물 고인 쪽으로 내려가 천천히 움직이면 바가지에 물이 가득 담겨져 그때 물을 천천히 물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물은 우물물과 달라서 기도의 언어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그 퍼낸 것만큼 다시 더 많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진실한 기도는 그러니까 그렇게 방언으로 따따 기도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돌아가면 그게 진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자기는 거기로부터 멀어졌어도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진실을 위한 노력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비록 자기가 죄를 짓고 불순종했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길어내면서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할 때 그때 자신의 기도의 언어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자기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그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고 뉘우치게 되고 그리고 죄를 고백하게 되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비로소 들으신다는 이런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불순종하게 될 때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차가운 거절감은 더 이상 기도할 마음의 소원을 빼앗아가고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기도생활이 완전히 끊어지게 되니까 우리 안에 죄의 영향력은 훨씬 더 가속화되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의를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우리는 다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실 것이고 하는 말씀을 오늘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의 서원한 것을 내가 갚으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배와 같이 여기는 것을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에 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불복을 하고 악을 행하면서까지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여기서 서원을 갚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불의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이것이 순종입니다. 불의를 간직한 채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그 선한 일의 가치를 손상시킵니다. 여전히 우리가 불의를 사랑하고 죄를 좋아하는 가운데 행하는 선한 일들, 선한 공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돌이키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은혜 충만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맺었던 수많은 약속, 그리고 주님 앞에 마땅히 해야 할 선하고 아름다운 의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주님을 향한 섬김이 꽃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당신과의 화목한 관계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간곡한 음성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서 그분께 기도하고 그 기도 속에서 충만한 교통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기꺼이 갚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