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0
목 차
들으시는 하나님(시 40:1) 1
건져주시는 하나님(시 40:1-2) 5
새 노래를 부를 때(시 40:3-4) 9
헤아릴 수 없는 주의 생각(시 40:5) 12
제사보다 귀한 것(시 40:6-8) 16
숨길 수 없는 진리(시 40:9-10) 20
긍휼과 인자를 구할 때(시 40:11) 24
마음이 사라질 때(시 40:12) 29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시 40:13-15) 33
주를 찾는 자의 기도(시 40:16) 38
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시 40:17) 43
시편56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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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들으시는 하나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본문해설
시편 39편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상황인데 40편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이어지는 전반부는 먼저 자기를 돌아보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와 감격이 나오고,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질병과 증상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의 침체와 어려움이 상당히 오래도록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가운데서 극복하고자 몸부림친 시간들이 꽤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그가 인내하고 또 인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당신에게로 돌이키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속히 그 일을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가 그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멀리 떠났을 때는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과 육체의 질병이 유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질병에 걸려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병적인 증상들이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 부딪쳐서 피부가 까져서 피가 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몸속에서 서서히 시작된 질병이 아닙니다. 하나의 외상입니다. 질병에 걸리는 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몸에서 쌓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났을 때 육체가 정상적인 사람과 상당히 다른 상태로 전이된 것입니다.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 몸에 질병이 있을 때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위에 염증이 심하고 식도에 염증이 있어서 소화가 안 되고 신물이 넘어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신물이 넘어오지 않게 약을 먹고 진통제를 먹고 소화제를 먹는 것은 완전한 치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치료는 밖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속에서부터 고쳐서 그 병의 뿌리를 걷어내야 진짜로 건강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알레르기 체질이 있어서 아토피에 걸렸거나, 조금만 공기가 안 좋은 데 가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다고 합시다. 연고를 사다가 피부에 돋아난 두드러기를 가라앉히는 것도 처방일 수 있지만 가장 좋은 처방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체질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서 다른 사람이 되게끔 만들 때 그것이 근원적인 치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미끄러지게 되면 거기에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불안, 초조, 평안을 잃어버리고 염려, 근심, 마음의 기쁨이 사라지는 등 많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육체의 현상보다 훨씬 더 많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영혼과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방면에서 그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것들을 응급처방 한다면,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오락을 해야 될 것이고, 미래에 대한 염려,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쾌락에 빠져야 할 것입니다. 정신에서부터 나오는 안 좋은 증상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들이 추천할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더럽혀서 이런한 문제가 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영혼이 침체에 빠지게 되면 정신과 마음이 산란하게 분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허둥지둥 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보람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구조 자체를 서서히 바꾸십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죄에 빠졌을 때 어느 한순간 가슴이 저미도록 울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도 한 번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영혼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막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때 죄인들은 낙심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애처롭게 부르짖는데 그 순간만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는 것 같을 뿐, 이제는 나를 용서해주시지는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문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날을 하나님을 떠나고 마음에서 주님을 버렸으면서 그 시간들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한순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주님이 자신을 즉시 건져주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서서히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마음의 틀과 생각의 구조, 이런 것들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는 방적산업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누에고치를 놔두면 이십여 일만에 완전히 고치가 되는데 더 놔두면 거기서 나방이 나옵니다. 나방이 되어서 머리부터 나오기 시작하고 꽁무니는 고치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꽁무니는 고치에 매단 채 날아가고 싶어서 몸부림을 칩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불쌍하다고 고치에서 빼주면 나방이 못 날고 결국 죽습니다. 꽁무니를 땅바닥에 끌고 다니다가 결국 쓰러져버립니다. 내버려두면 날갯짓을 하면서 하체가 강해집니다. 하나씩 하나씩 나오다가 어느 한 순간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날갯짓을 하는데 꽁무니가 고치에 매달려서 못나옵니다.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날개에 힘이 생기고 하체가 성숙하면서 공중을 날 수 있는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한 동안 죄 가운데 있었던 것이 고치의 상태라면, 고통이 심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렇게 머리를 내밀었을 때 하나님이 한 번에 확 건져주시면 좋겠는데 그러면 날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죄의 악습에 젖어 있는데 한 순간 눈물을 쏟고 회개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확 잡아당겨주시고 세상에서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이 때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리고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이전의 악습을 버리게 됩니다. 죄를 향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마음의 경향에 서서히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오랫동안 젖어있던 악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혼의 침체에서 건지시는 지혜입니다. 신실하심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매순간 나아가는 것이 침체에 빠진 사람들의 행하여야 할 길입니다.
건져주시는 하나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수렁에서 부르짖음
이 당시의 사람들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 웅덩이를 팠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발을 헛디뎌서 빠지면 나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웅덩이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훌륭한 재능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일단 웅덩이에 갇히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길 정도 되는 커다란 웅덩이에 빠졌다고 합시다. 똑바로 서서 한 키를 더 올라가야 지면에 닿을 수 있는데다 웅덩이 넓이가 꽤 넓어서 이쪽 벽과 저쪽 벽이 안 닿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기의 힘으로는 절대 올라올 수 없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기가 막힐 웅덩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이 들어가게 된 영혼과 환경의 깊은 침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고 나올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침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없는 환경의 깊음, 그 속에서의 고립, 무언의 상태가 된 지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수렁에서의 자신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거기에서 자기를 끌어올려 주신 것으로 고백합니다. 수렁이라는 것은 부드러운 흙으로 되어서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곳입니다. 다윗은 전쟁터를 많이 누비고 다녔던 사람이고, 목동도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지형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그도 수렁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수렁에 빠져갈 때 이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맹이나 지혜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깥에서 밧줄을 던져주어야 붙들고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깊은 웅덩이, 수렁,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환경과 영혼의 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 밖에는 도울 분이 없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사 자기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사 건져주시는 하나님
시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주님의 놀라운 은혜는 기도 응답의 경험 속에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경험을 통해 우리들은 그분이 인격적인 분이시며 자기와 같이 하찮은 인간을 긍휼이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면,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행하시고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가를 내면세계 속에서 경험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은혜의 수단입니다.
시인이 이런 깊은 웅덩이와 수렁과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본문에서 명백하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때와 같이 자기의 죄와 상관없이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지금 깊은 웅덩이와 수렁과 같은 상황에 있었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끌어 올려주셨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를 끌어 올려주셨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깊음 속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앙망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장시간 부르짖으며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쇄신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내려주셔서 깊음 속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침체나 환경의 어려움에 빠졌을 때 거기로부터 속히 벗어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지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고쳐 새 마음을 만드시고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성하게 만드십니다. 사실은 가장 아프고 괴로운 때에 자신을 가장 잘 돌아보게 되고, 가장 시련이 많고 고통이 가득할 때 거기서 오히려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 자신과 같은 인간을 돌아보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신앙입니다.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말하기를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밟으면 끊임없이 빠져 들어가는 수렁 같은 곳이나 아무리 튼튼한 발이 있어도 벗어나올 수 없는 웅덩이가 아니라 반석에 두시고 자신의 걸음을 견고케 하여서 어디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거기에서는 방향도 잡을 수 없고, 인생의 진척도 없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납니다. 그러나 시인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이 그 속에서 기다리게 하시고 부르짖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비해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한 것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중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나아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범죄 했을 때든지, 까닭 모를 고난을 만날 때든지, 혹은 아무 것도 없지만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빠져들 때든지, 어느 때든지 간에 인생의 참된 구원자는 하나님뿐이시고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뿐이라는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나쁘게 보이는 상황, 가장 고통스럽게 보이는 그 일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성실한 마음으로 주께 부르짖으며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새 노래를 부를 때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3-4)
새 노래를 부름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부르는 찬송이 있고, 마음으로부터 억제할 수 없는 정에 의해 쏟아져 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기도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기도하면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성령님이 기도하게 하시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찬송도 불러야 하기 때문에 부르는 찬송이 있고,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서 찬송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확 쏟아놓게 하시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이 바로 시인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라는 표현한 것입니다.
‘새 노래’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 부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찬송을 의미할 수도 있고, 예전에 부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동 속에서 부르는 찬송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 우리는 언어의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감동은 큰데 그 감동을 언어로 표현할 때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새 노래가 마음속에 가득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열심히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새 노래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올리시고 자기의 발을 반석위에 두셔서 견고하게 하신 은혜 때문에 가슴 속에는 하나님께 올릴 새 노래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영혼의 깊은 침체와 수렁 같은 어둠 가운데서 건져주시니까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감화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깊이 알았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침체에서 회복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을 비롯한 우리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어둠 속에서 은총을 보이시는 하나님
시인은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모든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은혜를 베푸셔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수렁에서 끌어 올려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가지만 거기에서 극복해 나오면 우리가 직면한 환경의 커다란 어려움, 영혼의 침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 위대한 사랑,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이 있기 때문이고 달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하늘 때문인 것처럼, 침체와 환경의 어려움은 찬란한 별빛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깊은 침체와 환경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거기서 벗어나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건지시는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교만한 자를 멀리하는 자의 복
시인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반성을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서 ‘돌아본다’라는 말은 그들과 의논하고 같은 생각을 나누고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짓에 치우치는 사람들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없이 여기거나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향한 자만심이 생겨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거짓에 치우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기준인 율법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말씀의 도를 벗어난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생활은 결국 자기가 좋아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생활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지혜를 나누고 공유하고 연합을 이루며 살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은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하나님의 건져주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하셔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순전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한 번의 과오와 죄 가운데서 건져내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그들에게 보여주신다고 하는 것을 시인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올곧게 한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회개하고 주님을 꼭 붙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깊은 웅덩이와 수렁 같은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 다른 행복한 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이기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헤아릴 수 없는 주의 생각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가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참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혼의 침체 속에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주님을 떠나게 되면 낯섦과 거리감, 이 두 가지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함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깊은 골이 있어서 건너기 힘든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향해 관심이나 갖으시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침체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로 취급하신다는 생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계에 이런 변화가 찾아오면 점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은 죄가 가져오는 효과가 고립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고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고립을 가져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교통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 자체가 이기심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이웃에게 악이 되어도 나는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행한다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내가 욕심을 가지고 행해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가 자신에게 가져오는 효과는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을 가져옵니다. 끊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을 가져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단절을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단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나 자신이 하나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것을 좋아하는 옛 성품이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깨어나게 되면 내 안에 악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가운데 계속 살게 되면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자아를 충분히 다스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늘 조급하고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은혜 가운데 충만히 있을 때 자신의 그런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극복하고 이긴다는 것입니다. 혈기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자신의 혈기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하나로 살아가다가 죄에 빠지면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고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해석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
그렇게 시인이 깊은 침체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이미 있는 노래들로는 자기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서 새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감격을 경험한 것입니다.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면서 주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전에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있었지만 자신의 영혼이 죄와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그것이 새롭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에 큰 일을 행하셔서 자신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경험 안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권능이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하더라도 그분의 능력이 자신의 가슴에 다가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 그런 위대한 사실들이 가슴속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과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탁월하고 놀라운 은혜는 영적인 축복이고,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들은 섭리적인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분을 위해 자신을 바치게 하시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는 일은 영적인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영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많이 있을 때 섭리적인 축복이 주어지면 마치 성경을 통해 특별 계시를 통해서 일반적인 계시를 설명하듯이, 영적인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다윗은 천제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사람이 구약시대의 다윗이고, 신약시대의 바울을 그의 모델로 삼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이 한번 만나주시면, 그렇게 만난 하나님을 통해 우주적인 지평으로까지 자기의 인식이 확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안 만나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분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흔적을 모든 창조세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의 지적대로 구약에서 이 사람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모든 사람들이 간 그 길을 똑같이 걸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깊은 영적 침체 속에 있다가 거기에서 헤어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저 ‘참 감사하다. 감격스럽다.’ 이것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우주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
자신 안에 일어난 영혼의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 온 땅과 하늘위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하나님 앞에 알립니다. 티끌만도 못한 연약하고 미미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존재이지만 모든 세계 앞에서는 엄연히 하나님의 큰 사랑의 계획안에 해야 할 일이 있는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윗의 사상은 결코 파괴적이고 염세적이고 도피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세계의 의미를 밝혀 나가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거룩한 뜻을 가슴에 새기면서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보여주는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사보다 귀한 것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6-8)
본문해설
본문은 회상하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깊은 침체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제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후에 자기의 심경을 노래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번제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신학자 가운데 아주 걸출한 칼빈주의자였던 워필드 박사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이것은 다윗이 범죄를 통해서 아주 깊고 심오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가 주전 10세기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때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라는 고백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가 왕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커다란 종교적인 논쟁에 휩싸였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영혼의 깊은 침체에 있는 동안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 하기 전까지 순전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범죄를 통해서 그의 영혼은 일찍이 들어가 본적 없는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제사에 익숙했던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제사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제물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 자기의 죄과를 씻어보려는 시도들을 했던 것 같고 거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한 신앙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차갑게 거절하시는 것을 시인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사가 있기 전부터 다윗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다고 하는 깊은 한계와 어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 드린 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토대가 되어서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 하신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40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깊은 웅덩이와 수렁, 51편에 나오는 참회의 동기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에서 비롯된 영적 침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사보다 귀한 것
그러면서 시인은 제사와 예물을 조금 더 구체화시키면서 고백하기를,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불로 전부 다 태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불로 태워서 드리지 않는 제사는 없지만, 번제는 특별히 하나님 앞의 헌신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속죄제는 죄로부터의 구속과 용서를 비는 제사입니다. 이 사람이 두 가지 제사에 몰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드리는 번제와 죄의 용서를 구하며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사 자체에 사람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의 정신에 부합하는 존재가 될 때 그는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맥락에서 보면, 제사와 제사 드리는 사람의 내적인 마음의 질이 일치할 때, 그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마음에 없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그 사람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고백과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이 일치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을 때 시인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 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임자인 사울이 내침을 당하면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들었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그 말을 선언함으로써 한 때 하나님께 선택받았던 사울이 왕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임자를 버리고 다윗을 후임으로 삼아 등극시키셨는데, 다윗도 사울과 같은 생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보다는 제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뜻을 행하는 것 보다는 번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통해서 영혼의 깊은 침체의 아픔을 통해서 시인은 이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끄는 믿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시편 51편에는 ‘참회하는 심령’이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번제와 속죄제를 대신해서 받으신다고 고백했을까요? 결국은 상한 심령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마음의 경향이 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 한다는 것은 잘못된 마음과 영혼의 경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안 믿었던 것을 될 것이라고 여기는 신념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믿음은 “주가가 오르는 것을 믿는다. 사놓은 부동산이 급등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은 영혼의 변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를 향하던 영혼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자기의 욕망에 굴복하던 것들을 하나님께 굴복하게 하는 영혼 자체의 경향성의 변화입니다. 영혼 자체를 움직여 놓는 아주 위대하고 놀라운 힘입니다.
결국 믿음은 사랑이고 믿음은 소망이고 믿음은 영혼이 움직이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참회는 똑같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참회는 한 번의 결정적인 변화이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들을 강화하는 부차적인 작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참회는 모두 영혼과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작용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욕망을 법처럼 여기면서 살던 사람이 “주의 법이 내 마음에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적인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깨닫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바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숨길 수 없는 진리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시 40:9-10)
본문해설
여기에서는 시인이 제사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다가 그것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의 마음속에 생겨난 간절한 심정은 내가 지금 깨달아 살고 있는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전파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진리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런 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게 됩니까?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 속에서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헤어날 수 없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큰 자비와 은혜, 용서를 통해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시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회복됩니다. 그렇게 회복된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결론을 내리고 나니까 시인의 마음속에 더욱 진리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이 주는 기쁨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인생에서 미끄러지고 시험에 빠지는 것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구원을 받고 건져내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에 빠지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만 깊이 명심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지금 고통스럽고 아파보여도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잊지 않고 굳게 붙들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구출을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진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회복될 때 자기를 살린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도 자신을 깊은 시련과 고통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마음속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가운데 고통을 당하다가 어느 순간 말씀을 깨닫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게 되었다면, 그 말씀만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말씀에 대한 이해력과 깨달음이 있고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게 될 때 자기가 알고 있던 많은 지식들 속에 또 다른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를 일으켜 세운 말씀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씀의 빛을 받고 깨닫게 된 많은 진리들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시험 속에서 구원받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은혜의 지식들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깨닫고 은혜 받은 말씀들을 자신의 지성 속에서 잘 정리해서 체계적으로 자기의 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깨우침을 얻게 되면 다른 말씀에 대한 지식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함
시인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진리가 귀한 줄 자신이 알아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지고, 진리가 소중한줄 알아야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고 싶은 법입니다. 그렇게 해야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입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과 일상의 삶속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사실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복음을 말로 전하지, 자신의 삶속에서 진리대로 살고 그것을 행하는 기쁨이 없는 사람이 쉬지 않고 입을 열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의무감에서 잠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 나와서 기쁨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자기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명쾌한 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난 삶이 저렇게 비참하구나. 그리고 이 진리 안에 사는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담대하고 강한 도전과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고백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시련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이고 우리의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이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그 진리의 말씀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행복하고 뜨거워지도록 날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고백이고 기쁨입니다.
긍휼과 인자를 구할 때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본문해설
본문의 내용은 지금 드리는 기도라기보다는 과거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안에서는 종종 시제가 섞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과거처럼 묘사되기도 하고,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인데 현재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시인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쓴 시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현재나 과거나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은 모두 하나의 평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릿속은 시간을 초월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일입니다. 같은 과거라도 어제에 일어난 일은 훨씬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 아닙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전에는 안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전부다 일단 하나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나 어제 일어난 일이나 지금 일어난 일이나 똑같이 하나의 평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일어난 기억은 회상을 하는데 1시간이 걸리고, 어제 일어난 일은 1초도 걸리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평면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평면을 오가면서 전개되기 때문에 시제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겨주소서˛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주의 긍휼을 내게서 그치지 마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장 간결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한 번만 드렸던 것이 아니라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회상하는 바였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긍휼’이라는 단어는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비참한 결과에 대해 슬픔어린 연민을 갖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사람이 똑같이 다쳤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을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있고, 장난치고 까불다가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그 둘은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다가 다친 것이고 하나는 일해야 할 시간에 일하지 않고 장난치다가 다치는 것입니다. 똑같이 고통 받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저 사람은 참 가치 있는 희생을 했다.’라고 생각하고, ‘저 인간은 저렇게 고생을 해도 싸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든지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상태에 대한 슬픔을 동반한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싸다 싸.” 이렇게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하면서 슬픔어린 연민을 동반하는 슬픔을 갖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의 문제입니다. 그 성향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긍휼을 갖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긍휼만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긍휼은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감정적인 표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정동적인 표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라는 성향이 자신 안에 없으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슬픔어린 연민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니 이는 시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라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11장 3-4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를 찾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분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그분의 뜻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머리로 찾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가지고 찾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지갑을 찾는다.”, 아니면 “돈을 찾는다.” 이런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을 찾음으로써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의미하는 찾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 밖에서 자신을 찾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써 살아 계시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을 믿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이 시인으로 하여금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향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되었든지 자신이 처한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인해 하나님이 긍휼이 여길 것이라는 믿음, 사람들의 판단은 달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긍휼이 여길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소서˛
시인은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특별히 ‘인자’와 ‘진리’, 이것은 ‘헤세드’(dseje)와 ‘에메트’(tm,a)인데, 이 두 가지는 특별히 다윗의 시에서 짝으로 여러 번 등장했던 표현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표현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러면 ‘인자’와 ‘진리’라는 것이 무슨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어떤 경우에 있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자’는 어떤 사람의 자격을 가지고 더 줄 자에게 더 주고, 덜 줄자에게 덜 주는, 사람됨이나 공로에 따라 나눠주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선하고 좋은 상태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같은 사랑의 성품 때문에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호의, 은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세드’라는 단어가 피동명사 ‘하시드’(dysij;)라는 말로 쓰이면 ‘성도’라고 번역되는 것입니다. 원래 ‘성도’는 ‘헤세드’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렇게 분에 넘치는 자비와 은총을 베푸실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으신 언약관계입니다. 이 언약관계 안에 내포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헤세드’, 곧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끝없는 은혜와 용서를 베푸시고 당신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것이 언약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굉장히 정치한 담론들이 이루어지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약관계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이 똑같이 우리를 대하시면 언약관계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수시로 언약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네가 그렇게 하면 나도 끊어버리겠다.”라고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끊으시면 “나는 영원히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성경 최대 언약은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딜레마가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다면 인간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죄짓고 악하게 사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결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용서와 긍휼, 은혜 베푸심과 사랑, 이런 것들이 약속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행하셔서 인간에 의해 일방적으로 언약관계가 파기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그것을 유지하시면서 인간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풍부한 생명과 은혜를 일시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곤고해지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당신을 버린 인간들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향 때문에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셔서 관계가 지속됩니다. 용서와 긍휼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지만 인간의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사랑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간을 인도하십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의존하면서 살수밖에 없는 백성들인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가 풍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사랑,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자비,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인자, 이런 것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가 막힌 수렁과 웅덩이에 있을 때 이것에 대한 사모함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사라질 때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
본문해설
이것도 회상하는 것입니다. 큰 재앙이 일어나서 시인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피할 수 없도록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둘러싸고 이런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 속에서 더 큰 어려움은 죄가 그에게 미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환란과 많은 환경적인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어려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것을 통해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일단,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자극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분의 은혜를 붙들게 만듭니다. 내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이런 것은 나중문제입니다. 환란이 닥쳐서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매달리는데 좋다 나쁘다는 나중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생명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라도 고통을 가하면 꿈틀거리고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피할 수 없도록 그를 에워쌀 때 죄가 자신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이 사라질 때
본문은 “나의 죄가 미치고”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죄가 자기에게 미치는 것은 환란이 되겠지만,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이 주어지는데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가 자신에게 미치니까 우러러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환란이나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이 아닌 누구한테 매달릴 수 있겠습니까? 시련과 어려움을 날 때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한테 매달려서 도움을 구하고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분에게 매달리고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악이 자신에게 미치게 되니까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러러 본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죄의 영향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김이 없고 그분을 온전히 앙망할 수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내 안에서 계속 솟아나는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소망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면 절망이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낙심하게 됩니다.
시인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 환란과 시련을 많이 만날 때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도들을 합니다. 만약에 환란과 시련이 닥치면 누구든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그 고통 속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거기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란과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을 고치고자 하실 때 결코 당신의 힘만으로 신속하게 벗어나게끔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환란과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기 전에 자기를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자기에게 죄악이 미치고, 많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가 머리털보다 많기 때문에 마음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라졌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약성경에서 마음, 히브리어로 ‘레브’(bl), 혹은 ‘레바브’(bb'l])라는 단어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 이것이 들어있는 인간의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없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생겨나게 된 극도의 혼란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질서를 세우시는 하나님
거룩한 사랑은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사랑과 지식, 이 두 개가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알게 되면 우리의 삶에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되고 나중에 해야 되는지,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사소한 일인지, 일생을 살면서도 무엇이 궁극적인 목표이고 어떤 것이 사소한 목표인지에 대한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충동에 빠지고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혼란 속에 있게 되면 순서들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하는 일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 삶의 질서는 결국 하나님 홀로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질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결국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 질서일 뿐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끊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예전에는 없던 많은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선, 담배를 비우게 되면 호주머니에 잔돈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사야 되는데 그게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지저분해집니다. 호주머니 어디를 뒤져봐도 담배가루가 나오고 몸에서는 담배냄새가 납니다. 이 사이에 니코틴이 끼기 시작하고 담도 나오기 시작하고 많은 변화들이 옵니다. 일단 그것이 인이 박히게 되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 욕구가 많은 무질서들을 이깁니다. 그것이 우선순위 1번이 되고 그 다음에 그것에 입각해서 나머지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지저분하다고 해도 나는 나대로 질서가 생겨서 지저분하고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해도 양치를 한번 더하면서라도 담배를 피워야한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대부분 잘 잡히면 잡힐수록 건강에 큰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담배를 피우더라도 냄새나는 것이 싫고, 이 사이의 색깔이 변하는 것도 싫고 기침하는 것이 싫고, 이 모든 것들이 견디기 힘들면, 다시 말해서 이 질서가 적응이 안 되면, 언젠가는 흡연을 끊게 되는데 죄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죄는 자기 나름대로 질서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회심을 하려고 하니까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소리를 칩니다. “정말 나를 버릴래? 네가 나 같은 죄의 즐거움을 버리고도 살 수 있을 거 같아?” 이러고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안에서 이미 질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취게 되면 이 질서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는 혼란입니다.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우리의 지성을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우리 안에서 모든 질서가 잡히게 되지만 거기에서 멀어지게 되면 우리가 올바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서 혼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고백한 곳이 이런 외적인 환경과 내적인 어려움의 상태였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욕망을 끊임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면서 질서로운 생각과 질서로운 마음을 가지고 일상을 대하며 하나님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자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시 40:13-15)
본문해설
이 부분도 역시 과거에 대한 회상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기도를 다시 한 번 회상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찾아서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 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혼을 멸하려 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영혼이라는 것은 ‘네페쉬’(vp,n<)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이것이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목숨이라는 말로 사용이 됩니다. ‘네페쉬’라는 단어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보면 ‘영혼’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네페쉬’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soul’이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는 말로 쓰이지 않습니까? 히브리어에서도 똑같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 것입니다. “There is not the single soul.” 그러면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본문에서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라고 할 때 ‘영혼’은 ‘목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목숨’을 ‘영혼’으로 번역한 경우가 시편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바로 잡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는 자들이 있다.”라는 것은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수많은 정치적인 대적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다윗을 노릴 때 뭐 영혼만을 노렸겠습니까? 원하는 것은 목숨일 것입니다. “육체는 펄펄 살아 있어도 네 영혼은 침체에 빠졌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원수들이 덤벼들었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목숨을 노렸던 것입니다. 사울의 치하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던 때는 사울이 정치적인 대적자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유감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사울이 다윗을 향해 경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적대의식을 갖게 되어서 그는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사울이 끊임없이 목숨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숨을 노린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기도
그렇게 고통 받는 가운데 “그들이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던 기도제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적대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그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올바로 행하다 보면 자기 욕망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거치는 돌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를 많이 미워하게 됩니다.
결국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지만 섭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입니다. 결국은 시간이 흐르고 살아봐야 내가 이렇게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어떤 뜻이 있는지 밝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마다 우리들이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고 할 때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치 여름날에 녹음이 무성할 때는 하루살이 식물인지 한해살이 식물인지 다년생 식물인지, 혹은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인지, 아니면 여름 한철 푸른 잎사귀를 갖는 나무인지 잘 드러나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 인생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 현저한 차이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피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은 평소에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을 향한 사랑과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갖는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는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사랑에도 어느 정도 의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한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까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존은 절대자에 대한 의존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경건, 주님의 섭리, 그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은 절대의존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존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도를 잘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존의 마음이 없고 독립의 마음이 충만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원수들을 위한 기도
원수들이 시인의 목숨을 노리고 그 안에서 깊이 고통을 받고 괴로워할 때 시인은 하나님 앞에 피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해하기 위해 승승장구할 때 그들은 스스로 영광을 한 몸에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교만입니다. 교만 속에서 수치와 낭패를 당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서 수치라는 이야기가 두 번씩 반복해서 나올까요? 원수에게 악재를 당하며 깊은 고통을 당할 때 시인이 받았던 가장 큰 고통을 원수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깊은 수치입니다.
종종 사람들이 시편을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도를 왜 이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는 자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왜 이렇게 빌지 못하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사랑의 계명이 아직 여기에는 그렇게 찬란하게 비취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계시의 점진성이 주는 한계입니다. 물론 보다 깊은 율법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원수에게 고통을 당하면서 계시의 점진성의 한계를 딛고 거기까지 깨닫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비판할 때 항상 지금의 문맥을 가지고 거꾸로 가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그 문맥에서 비판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모세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능력을 받으면 뭐 합니까? 장가를 몇 번씩 가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제를 좋아하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섭리 속에서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던 때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의 강퍅함과 인구에 대한 배려 등으로 하나님이 제한적으로 허락하시는 문맥을 놓고 그대로 비판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시편 같은 데서 계시의 점진성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원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악인들은 근본적으로 그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언약백성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이 무리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의 영적인 미성숙도 함께 포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을 적용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데 끊임없이 도전해서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영적인 대적들이라고 적용하면 됩니다. 그 속에서 수치를 당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여호와여 나를 속히 도우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의 큰 섭리를 생각하십시오. 어떤 사람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내가 지금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과 더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변화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그 기쁨을 통해 하나님이 원수들을 벌하셔서 모든 질서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려놓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주를 찾는 자의 기도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본문해설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다보니 하나님을 찾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온 앞의 기록들을 보면, 시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죄도 넘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안팎으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모습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어 신앙의 회복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도처에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떠오른 것입니다. 사람들 각각의 삶의 상황과 모양은 달라도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의 구원을 호소하고 부르짖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를 찾는 자의 행복
시인은 모든 사람들과 공동체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기쁨,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매우 집착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매우 집착해서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엄마와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가 서럽게 울고 어떤 때는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심하게 웁니다. 다른 때 같으면 과자를 준다든지, 장난감을 주면 좋아하는데 엄마를 찾아 아이가 불안에 떨 때는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을 줘봐야 다 팽개칩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오직 지금 자기 눈앞에 사라진 엄마 한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 하나님이 주시는 사회적인 지위,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만족을 해서 더 이상 그분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이 저리도록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만나 주시는 것, 그래서 참으로 그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시는 것 이상의 선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함
그러면서 한 가지를 더 빕니다. 그것은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주님을 찾는 자”는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와 짝을 이루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라는 내용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광대하다고 말하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생을 살면서 논리적인 해결의 길이 보이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넉넉히 해결할 수 있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았습니다. 속에는 근심과 걱정, 밖에는 수많은 원수로부터 협공을 받으면서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도저히 헤어 나올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자기를 모든 고통에서 건져내셨고, 그것은 자신이 예상하던 바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고 주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추측의 한계를 넘어서는 광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참 크고 위대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대게 두 가지 때문입니다. 나의 지성을 넘어서고 나의 의지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자각함으로써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안팎을 에워싼 원수들에 의해 어떠한 해결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를 건져주심으로 당신의 탁월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난 후에 그들의 평생을 걸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는 이야기 중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시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같이 우리를 건져주셨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개 새들은 새끼를 발가락으로 끌어안아서 솔개가 병아리를 채 가듯이 옮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날개 중에 안 움직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날개 위에 자기 새끼를 업어 나른다고 합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것을 아주 상세하게 해석했습니다. 솔개가 닭을 채가듯이 새끼를 발가락으로 붙들고 날아가면 사냥꾼이 새끼 새를 화살로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날개 위에 새끼를 얹어 나르기 때문에 어미를 맞추지 않고는 도저히 새끼를 맞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미 새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다른 원수들이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완전한 보호이고 인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회화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미 독수리를 맞추지 않고는 새끼 독수리를 날개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래에서는 어미의 날개에 가려져서 새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비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위기에서 믿음의 작용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 두 가지가 작용을 합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부실하면 인생의 어려움이 올 때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주 떠났을 경우, 어려움이 생겨도 그분에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특징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사람의 특징은 독립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으면서 어려움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 볼 요량으로 일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유아기적인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는 이유가 고통과 어려움 이상이 아닌 사람들은 유아기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하고 거기에 지속적으로 끌려서 그분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끌리게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진리입니다. 성경과 진리의 말씀만이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잡아 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할 때 위기가 오면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순간에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자체가 영혼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믿음을 사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것이 곧 믿음의 작용이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적인 믿음이 없으면 심령이 크게 요동을 치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고 그분께 붙어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는 견고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마치 금속에 가해지는 불꽃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밤중에 불꽃놀이 합니다. ‘팡’ 쏘면 하늘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 찬란하게 불꽃이 일어납니다. 그것들을 무엇으로 만드는지 아십니까? 금속가루로 만듭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양한 종류의 쇳가루를 그 속에 넣고 쏘아 올립니다. 쏘아 올리면 어느 지점까지 올라가서 팍 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그때 열이 가해지는데 금속 가루의 종류별로 어떤 것은 파란 빛, 어떤 것은 빨간 빛을 냅니다. 그것을 잘 배치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시련과 고난들은 우리 안의 쇳가루 같은 요소에 열을 가해서 찬란한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들은 불꽃 속에 있는 화약의 역할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팍’ 하고 터지면서 찬란한 불꽃이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자체하지 마소서”(시 40:17)
본문해설
마지막 드리는 탄원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드렸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회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라고 자신의 상태를 고백합니다. 이 시가 왕이 된 다음에 쓰여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왕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구체적으로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시편에서 즐겨 고백하는 바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 궁핍하다’라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쫓겨 다니면서 매우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난하고 궁핍하다’라는 말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왕이 된 뒤에도 그는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많이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다’라는 것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임금이 아무리 뜻을 잘 펼쳐도 사회 자체가 공정한 배급사회가 아니라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처지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 민주국가에서는 살다보면 경쟁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다 보면 거기에서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경쟁하는 법이 우선이 아니라 화합하고 함께 살아가는 타협과 공존하는 상생의 삶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속에서 살다보면 결국은 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져서 낙오자가 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근본정신으로 갖게 해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해서 사람들의 동정심에 기댈 수도 없을 때 나라에서 그들을 돌봐줘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영혼의 궁핍할 때 기도함
시인이 왕이 되기 전에도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생겨납니다. 빚지고 억울한 자, 도망친 자, 이런 사람들이 다윗이 왕권을 세우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한 결 같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지탱할 수 없어서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인은 깊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견딜 수 없을 때 자기가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환경과 삶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정신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우리에게 한모금의 물과 한 덩어리의 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평안하게 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을 해갈시키고 기근을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먹고 나면 다시 배고프고 마시고 나면 다시 허기집니다.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빌고 매달리면서 기도한 이유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제목이라는 것은 대부분 무엇 때문입니까?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영혼은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절실하게 필요한 자원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도움을 구하면서 매달리는 이유는 주님이 이것들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세상에서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덜 의지하며 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입바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은 인생이었고, 자기가 이제껏 겪었던 수많은 환란 속에서 멸망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수시로 건지시고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시인은 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결국은 내 인생은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자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고 의존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의존의 마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되고,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의지하며 그분 앞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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