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 (2011.02.02 수요예배)
목 차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2 (2011.02.16. 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3 (2011.03.09.수요예배)
1.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9) 2011.2.2 수요예배 1
2. 새 사람이 되는 길(엡4:23-29) 2011.2.16 수요예배 10
3. 영적인 변화와 새 사람(롬12:2) 2011.3.9 수요예배 19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4 (2011.3.16 수요예배)
4. 영광의 빛을 받음(고후4:6) 2011.3.16 수요예배 29
5. 예수의 생명이 역사함(고후4:10-11) 2011.3.30 수요예배 40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 (2011.02.02 수요예배)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2 (2011.02.16. 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3 (2011.03.09.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4 (2011.3.16 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5 (2011.03.30.수요예배)
1. 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9)
I. 본문해설
II. 새 사람이란 무엇인가?
A. 옛 사람과 새 사람
B. 예전에, 그리고 새로 지은바 된 사람
III. 새 사람이 되는 길
A.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
-성화의 은혜를 덧입음
-외적 생활의 일치로 나타남
B.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써
C. 심령으로부터 시작 됨
IV. 결 론
2.새 사람이 되는 길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I. 본문해설
II. 새 삶 없이 새 사람은 없음
A. 거짓을 버림
- 진리와 진실
- 오류와 허위
- 성공의 가치보다 큰 것
B. 진실을 말함
- 정직과 참 됨: 진리의 가치
- 참 됨의 가치
- 하나님을 드러냄
- 내면과 외면: 앎-마음-행위의 일치
C. 지체와의 관계에서 새 삶을 구현함
III. 결론
3.영적인 변화와 새 사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I. 본문해설
II. 새 사람의 특성
A.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B.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III. 새 사람이 되는 길
A. 영적인 변화를 받음
B. 마음을 새롭게 함
IV. 결론
4.영광의 빛을 받음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I. 본문해설
II.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시작
A. 복음의 빛을 비추심
-어둠에 있던 자들
-태초의 빛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빛
B. 복음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임
-구원계시의 중심: 성육신
-성육신: 영광의 감춤과 드러남
-육신 속에 감춤: 속성에 드러남
C. 마음에 비추심
-권세 있는 영적 빛임
-하나님 영광을 알게하는 빛
-가치, 질서, 정동의 빛임
III. 실천적 적용
-비중생자
-중생자
IV. 결론
5.예수의 생명이 역사함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I. 본문해설
II. 새 사람: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감
- 새 사람과 새사람으로 살아감
-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
- 생명: 담지자의 지성과 의지를 따름
- 은혜: 영혼과 마음성공의 가치보다 큰 것
III. 영적 생명력이 순종에 달림
- 새 사람의 삶의 원리: 영적 생명력
- 옛 사람을 짊어진 새 사람
- 하나님 의지하게 하심: 은혜 갈망케 하심
- 영적 생명력의 원인: univocal vs equvocal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 (2011.02.02 수요예배)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2 (2011.02.16. 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3 (2011.03.09.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4 (2011.3.16 수요예배)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5 (2011.03.30.수요예배)
1.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9)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에서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 그러한 교리의 빛 아래에서 성도가 어떤 사람이 되고 또 어떻게 살고 또 무엇을 향하여 살아야 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II. 새 사람이란 무엇인가?
A. 옛 사람과 새 사람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에서 새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곳만이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옛 사람이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이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는 불신자에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에게도 제시되지 않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는 오직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성도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만 제시되는 대조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한 사람 속에 두 사람이 있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옛 사람에게 속한 성품, 새 사람에게 속한 성품.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죽을 죄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는 네 가지 정도의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일 먼저 그 기본적인 구원의 동기는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동기적 원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지 않으셨다면 구원 얻을 수 없죠. 바로 공로적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의를 이루십니다. 셋째가 도구적 원인입니다.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신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때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그 마음의 작용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작용적 원인은 성령이셔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시고 그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두 가지 놀라운 일들을 하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난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 용서해 주신 것과 우리 안에 새로운 새 사람,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새 사람의 성품을 우리에게 넣어 주시는데 이것이 곧 성령의 내주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자 안에는 이 새 사람과 옛 사람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새 사람과 옛 사람은 은혜의 성품과 또 한편으로는 죄의 성품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품과 자기를 사랑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일평생 옛 사람을 숙명처럼 메고 다녀야 하는 것이니.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 생활을 잘 하면 새 사람이 우리 안에서 강해집니다. 죄를 많이 짓고 욕망대로 살면 새 사람은 줄이고 옛 사람이 강성해져서 그래서 자기도 이길 수 없는 옛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B. 예전에, 그리고 새로 지은바 된 사람
그렇다면 도대체 그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예전에 이미 지은 것이고 또 새로 지은바 된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맨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때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바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이 인간이 이러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뜻이 있는데 거기에 딱 알맞은 존재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가 외적인 행동에서나 마음의 움직임에 있어서나 영혼의 작용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실 때 계획했던 그 뜻에 꼭 맞은 올바름 안에서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 처음 아담을 지으셨을 때 하와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 사람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서 그러한 모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상태들이 산산이 다 깨뜨려져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망가졌느냐 하면 바다에 생선이 있는데 생선이 막 헤엄치던 생선이 탁 육지에 끌 채 같은 곳에 떠서 올라오면 푸덕푸덕 막 뛰잖아요. 그러한 생선의 상태가 하나님의 맨 처음 창조하신 상태라면 그 다음에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상태는 여름날의 생선이 그 궤짝에 눌려서 다 썩은 그런 정도의 상태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고난에 입각해서 그의 믿음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성령의 작용으로 그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중생입니다. 회심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다시 살리신 것이 그 살아있는 그 모습이 죽어있던 그 모습과는 연속성이 없어서 차라리 새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50대에 예수 믿고 거듭 난 사람보다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회심해도 중생해도 겉모습은 60대 아줌마, 아저씨 그 대로입니다. 이게 영혼의 출생입니다. 그게 바로 새 사람입니다.
III. 새 사람이 되는 길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 모든 성도들을 새 사람이 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새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일까. 이제 수요일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겠는데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새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 성경 본문은 최소한 세 가지 답을 주고 있습니다.
A.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됨
첫째가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노동을 하다가 아주 중요한 모임에 외출하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예전의 옷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그리고 새롭게 새로운 옷을 깨끗이 갈아입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입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 옷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어서 남들 보기에 옛 옷을 입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이 새 사람이 어떻게 밖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어떻게 옷을 입는 것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새 사람이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덧입히시는 이 그리스도의 의는 구원에 관한한 한 번에 충분히 우리에게 덧입혀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사람이 되게 하지만 성화의 관한한 그리스도의 의는 날마다 우리가 덕을 입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시고 덕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용서받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시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덕을 구원과 함께 입었지만 회개와 용서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덧입은 것을 성화의 삶 속에서 우리들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과 찌르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모두 버리고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나면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져도 주님은 나를 인정하시고 지켜주시고 용서해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의는 구원에 관련하여 이미 우리에게 덧입혀 졌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숨 쉬며 살아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들을 공급받는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통로로 해서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혜와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라가게 하심으로 구원받을 때나 구원받은 후에나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를 의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치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화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속에 부패한 옛 사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날마다 닮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탁월하게 성화를 위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어떤 것을 말할 때 하나의 뜻으로 말할 때가 있고 여러 개의 뜻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좋은 예가 생각이 났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커다란 수박, 먹고 싶다. 그죠. 커다란 수박을 탁 탁 가운데를 잘라서 넓적한 쟁반처럼 만들었습니다. 자 이제 머리에 떠오르시죠. 그리고 반을 딱 잘랐어요. 이것은 동생 꺼, 이것은 언니 꺼 줬어요. 둘이서 언니, 나하고 한번 합쳐 보자. 두 개를 딱 대니까 하나의 수박이 된 것입니다. 동생 꺼 절반, 언니 꺼 절반을 딱 합치니까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하나의 뜻으로 말한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공기하고 빛을 섞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뜻인지 알죠. 공기만 있는데 빛이 들어오게 해서 그래서 빛과 공기가 같이 있게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공간 안에 빛은 없고 공기만 있었는데 빛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볼 수 있는 그러한 빛을 가진 공기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빛이 들어온 만큼 공기를 빼 버려야 되겠죠. 고개를 끄덕거리시니까 참 걱정이 되네요. 불을 많이 켜 놓으면 공기가 다 나가겠죠. 밀려 나가겠죠.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공기가 있는 곳에 빛을 더 했는데도 이상하게 원래 있던 물체를 빼지 않고도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 뜻으로 말한다’, ‘다의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책임이고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절반, 우리의 힘 절반을 합쳐서 수박 두 쪽처럼 이루어져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빛이 섞이는 것처럼 모두 우리의 힘이 돼야 되는 것이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 이 기가 막힌 비유다. 처음 썼거든요. 그렇게 해서 성화는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됩니다. 무엇인가 성화가 되었을 때는 전적으로 주님이 하셨던 은혜 때문이요. 안 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새 사람이 되는 길을 마치 옷을 입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새 사람이 되는 길이 뭐냐 하면 매일 매일 내가 무엇을 자꾸 한다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이 새 사람이 되어요. 그러니까 새 사람이 되겠다고 여러분은 금년에도 했죠. 책상 앞에다가 큰 글씨로 금년에는 죽더라도 뭐는 하자. 뭐는 하자. 뭐는 하자. 결국에는 3월 쯤 되면 바람이 빠지죠. 아무리 그래도 그것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새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목표를 아무리 많이 세워도 주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은혜가 계속 그 사람에게 부어지면 자기는 이 은혜를 받아서 무엇에 쓸지를 몰라도 은혜를 받으면서 계속 생활하게 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마지막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새 사람이 증거가 그의 바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그가 새 사람이 된 증거가 그 사람 바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행실로 삶으로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으면서 성화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때 그 때 우리들이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B.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써
두 번째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써 새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말씀 드린바와 같이 의는 올곧음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냐 하면 왜 똑같은 물건인데 돈을 좀 더 주고 고급을 사면 재바르고 똘똘하고 그리고 어디에서 짝퉁을 사거나 잘못사면 속이는 회사에서 만든 제품들을 사면 온전하지 못하잖아요.
(예화)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잠깐 보니까 무슨 소비자 고발 같은 것을 하더라고요. 마트에 가서 믹스넛 있습니다. 믹스넛. 여러 가지 섞은 것 견과류 섞은 것. 그것을 보면 거기에 딱 쓰여 있습니다. 잣 몇 %, 뭐 몇 %, 캐시나 몇 %, 몇 %, 막 써 있는 것입니다. 기자가 그것을 여러 봉지 사가지고 뜯어 본 것입니다. 이상하게 중량은 맞는데 비싼 것은 안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호두 같은 것, 잣은 안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들어있다고 쓰여 있는데. 우연인지 알고 여러 봉지를 사서 다 뜯어 봤는데 다 똑같습니다. 특히 최악의 경우는 뭐냐 하면 믹스넛 말고 믹스넛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과자하고 섞인 것 있잖아요. 그것은 사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것은 진짜 견과는 안 들어 있고 견과 비슷하게 생긴 밀가루 과자만 잔뜩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조그만 중소기업 업체에서 이제 그 이렇게 조그만 회사라고 해서 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닌데 양심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겠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요. 만들었는데 보면 그러한 과자가 있고 또 하나는 중소기업에서 만들었어도 아주 양심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신 그 가격에 도저히 팔수가 없으니까 비싸게 받았어요. 두 개를 탁 터놓고 쏟았어요. 이것은 원래의 제조 방식대로 그대로 해서 좋은 견과류를 집어넣어서 진짜 그대로 먹음직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뭐야 별로 호두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질이 안 좋아. 다. 그런 것으로 만들었다 이거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더 좋은 것 아닙니다.
사람도 그럴 것 아닙니다. 누가 사람이 아니겠어요. 누가 사람이 아니겠냐고. 살아있는데. 누가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몇 이나 되겠어요. 왜, 사람이려면 사람됨으로 꽉 차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온 몸은 명품으로 휘감았는데 사람 자신이 짝퉁이야. 그렇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올곧음과 의로움으로 꽉 찬 상태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게 바로 망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게 여러분 여태껏 설교할 때의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아름다운 영혼이고, 선한 의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그게 진짜 사람이냐 그럴 때 우리는 무슨 예쁜 몸매 말하는 것 아니잖아요.
(예화) 제가 몇 년 전에 LA에서 4시간을 비행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말 지루하더라고요. 책을 읽어도 피곤하고 어디 드러누울 때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쭈그리고 앉았는데 할 일이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미국 영화에서 본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나 찾아봤어요. 잡지 같은 곳에 보면 미국 여자들 예쁜 여자들이 나오잖아요. 1m70cm에 48kg. 되는 그런 여자들 나오잖아요. 얼굴이 생긴 것은 불문에 붙이고 일단에 그런 사람을 찾아보자 했는데 두 시간 반 동안 딱 한 명 봤어요. 한 명. 그러니까 그 모든 잡지와 영화는 허구야. 허구. 현실성이 전혀 없는. 실제로 음식점에 들어가 보면 팔걸이의자에 몸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턱 걸터앉으면 양쪽 허리를 의자로 감싸고 옆으로 이렇게 늘어지는 그런 사람들. 일어날 때는 뒤뚱뒤뚱 하면서 그렇게 발목이 불안해 보이는 그러한 비만에 걸린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외보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모는 세월이 지나면 늘 변합니다. 그렇다면 뭐입니다. 그렇죠. 내면입니다. 내면. 그래서 뭐냐 하면 금방 죽을 몰골을 하고 있는 병자도 아주 새파랗게 살아있는 젊은이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올곧음과 의의 개념입니다. 그런 것과 진리의 거룩함을 통해서 우리들이 말하자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것은 뭘 가리키냐면 우리들이 끊임없이 이 진리를 접할 때 이 진리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러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정말 신년 사경회때도 말씀 드렸지만 새 사람이 되어야지만 새 인생이 기다리지, 옛 사람은 절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됨됨이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고 한 사람의 궤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그 성품이 그려낸 발자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는 그것이야 말고 새 사람이 되는 성경이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은 계속 다시 살아나는 이러한 놀라운 내적인 은혜의 부심이 없이는 누구도 새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화) 옛 말에 개꼬리 삼년을 묻어도 황모가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붓에 제일 좋은 것이 노루털이랍니다. 그런데 본질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질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 한데, 화투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투로 논밭도 다 날리고 집도 날리고 마지막에는 마누라까지 날렸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뭐 여자들을 돈 주고 팔고 할 정도였으니까 다 날렸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너무 원통하니까 놀음이 끝난 다음에 바깥으로 나가서 도끼를 집어 들더니 자기 왼손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놀음을 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고 여러 해 세월이 흘렀는데 갈고리를 끼고 다시 화투를 하고 있더랍니다. 한 쪽 갈고리를 끼고.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해 주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그 사람은 새로워 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과 우리 자신의 정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여행가서 풍경 한번만 봐도 우리의 마음 전체가 변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렇게 인간이 아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쉽게 말하면 물결 위에서만 계속 출렁 거리는 것이지, 물속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 사람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간에 시간이 없어서 이 진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하는지 여러분에게 다 설명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화) 우리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잖아요. 예를 들자면 고구마나 계란도 집어넣는데, 계란은 터지는 것 아시죠. 집어넣어요. 그렇다면 고구마나 계란을 껍데기부터 때우는 게 아니라 전자파가 뚫고 들어가요. 그래서 화상 중에서도 전자파의 화상을 입게 되면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은 멀쩡한데 속이 익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마 같은 것도 보면 속부터 익기 시작합니다. 전자파가 깊이 침투하면서 그렇다면서 전자파가 깊이 침투하면서 열을 올려서 그래서 그 속에서부터 익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진리의 힘이 그러한 진리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일 년이 지나가도록 설교에 은혜를 받은 적도 없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그게 자기 속에 깊이 들어와서 새 사람은 막 살아나게 만들어 주고 옛 사람은 그러한 진리의 빛을 받을 때 그러한 진리의 빛을 받을 때 새 사람은 막 기뻐하고 옛 사람은 막 아프고 괴로워합니다. 그게 뜨거운 기운이 들어간 거거든요. 그런데 아무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계속 흘러가요.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나에게 깊이 찔림을 받아서 자기가 아파 본 적도 없고 막 살아나서 기뻐 본 적도 없습니다. 경건서적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옛 사람은 자기 속에서 막 아파하고 쓰라려하고, 새 사람은 막 기뻐 뛰고 하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가 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열린교회 10년 가까이 다니면서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 나는 가끔 봤어요.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10년 되기 전에 가지만 끝까지 붙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별일이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단순히 교회에 오래 나오고 출석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세월이 무수히 흘러도 그것은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기대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일까요. 그 사람은 새 사람이 되기 싫은 것입니다. 왜, 새 사람이 되면 새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옛 사람으로 볼 때 새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짜증나는 것입니다.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우고 자기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의무는 좀 많습니다. 주일날 나와야지 주일 오후 예배 드려야지, 그 사이에는 구역예배 드려야지, 그리고 전도가야지 수요일 날은 섬김 기도 나와야지, 그리고 빨리 밥 먹고 나와서 수요예배 드려야지, 목요일은 병원전도 가야죠. 그리고 금요일 날은 금요 구역예배 드려야지. 심방하러 다녀야지 그런 게 새 사람의 삶이 새 사람이 볼 때에는 너무 보람 있고 기쁜 삶이지만, 그러나 옛 사람이 볼 때에는 짜증나고 힘든 삶입니다. 마치 새 사람이 옛 삶을 보는 것처럼 힘겨운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세상에 저런 데를 돈 주고 들어갈까. 저런 것을 왜 돈 주고 살까. 저런 것을 그 비싼 돈을 주고 먹을까. 그런 생각 많이 하잖아요. 그렇게 서로 대조적이다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주 더 강력하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고 새 사람이 될 기대가 없다면 교회는 왜 다닐까요.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더 선명하게 펼쳐지고 안 들으려고 하는 여러분의 귀를 열어서 들려주고 눈에다가 펼쳐서 여러분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줘서 여러분이 인식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괴로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서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진리의 거룩함이 아니고는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새 사람 되기 10개년 계획을 안 세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놀랍게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놀라운 삶의 지혜도 하나님이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C. 심령으로부터 시작 됨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모든 새 사람이 되는 길이 심령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랬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심령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으로 인해서 새롭게 변화될 때 이 심령은 우리의 마음과 모든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는 수동적이지만 인간 존재를 향해서는 능동적인 원인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영혼이 하나님께는 수동적이지만, 일단 변화를 받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 영혼이 우리의 마음과 심지어 우리의 몸에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죽어가고 괴롭고 그렇다면 이상하게 온 몸이 쑤시죠. 그러다가 너무 기쁜 소식이 들려와요. 막 펄쩍펄쩍 뛰고 웃고 나니까 잠깐 사이에 두통도 사라지고 온 몸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도 그렇게 영향을 주는데 영혼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겠어요. 그것을 쫙 끼치는 것입니다. 영혼의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날까요. 금식하면 제일 힘든 것이 뭐죠? 배고픈 것도 힘들지만 기운이 없잖아요. 기운이. 그런데 영혼은 똑같이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먹으면서 영혼은 활기와 원기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급을 안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떠한 새로운 삶이 있을 수 있겠어요. 계속 껍질의 삶입니다. 껍질 밖에 없는 삶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이 심령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이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변화될 때 이 심령이 변화된 심령이 우리에게 변화를 미치면서 그렇다면서 우리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생각도 달라지고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됩니다.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 말씀을 듣든, 예배를 드리든, 찬송을 드리든, 봉사를 하든. 그것이 영혼의 울림이 있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혼의 울림이 있도록. 그래서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서 살 때 그 때에 우리 안에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읽은 그 성경 뒤편을 보면, 다음 시간에 계속 보겠습니다만, 새 삶 없이는 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고 그렇게 해 놓고, 그런즉. 무슨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거짓을 버리고 그 다음에 참 된 것을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그렇다면서 쭉 나오는데 전부다 실제적인 삶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새 사람 되기를 꿈꾸지 말라. 이것은 안 된다 이야기입니다. 불순종은 끊임없이 우리들이 살면서 불순종 안 할 때가 없지만, 그러나 자기가 의지적으로 계속 해서 특정한 일에 계속 불순종 하게 될 때 그 루트 통로 자체가 우리에게 옛 사람을 계속 힘주는 말하자면 연료 공급 장치가 됩니다. 그 자체가. 그래서 아주 강하게 그 쪽으로 말하자면 에너지와 힘이 쏟아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불순종은 아주 놀라운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가끔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연료 공급이 되면 가끔 새 사람이 되고 싶어서 불끈하고 솟아오르는 결심이나 진실한 눈물, 진지함이 있어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합니다. 거기를 통해서 계속 공급이 되니까.
(예화) 우리 몸에 암 세포가 탁 자라게 되잖아요. 10만 개 까지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뭉쳐요. 뭉치면 암세포들이 그 다음에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생명력입니다. 생명력. 우리들이 먹는 모든 영양분 중 좋은 것들을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그렇게 해가지고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비실비실하게 피젖도 못 먹은 사람들이 암에 걸리면 나이 많이 드시고 금방 안 돌아가셔요. 그런데 옛날에 한번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가 있었는데 올림픽까지 나가서 동메달을 따고 아시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 그러한 선수였습니다. 스물 몇 살 밖에 안 되었습니다. 20대 초반 밖에 안 되었습니다. 몸이 너무 근사한 것입니다. 딱 판단이 났는데 암이라고 판정이 난 것입니다. 우습게 본 것입니다. 무슨 소리 입니까. 이 형제가 그 선수가 레슬링 선수였는데, 내가 수많은 선수를 꺾었는데 그것을 내가 못 이기겠냐고. 그런데 이제 운동선수의 생각이고 그러한 튼튼한 인자의 몸에서 암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왜, 몸의 기관이 건강하고 좋으니까 엄청난 양분을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강하게 말하자면 암세포가 커지는 것입니다.
IV. 결 론
그게 바로 우리의 불순종입니다. 계속 살아있는 한 절대로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 파이프를 먼저 잘라 버려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하나님 매달리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우리의 그 삶이 우리가 새 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연관성을 갖는 것일까.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2.새 사람이 되는 길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하나님께서 당신을 멀리 떠나서 죄를 짓고 타락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의 속에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렇게 구원과 중생과 회심에 이른 다음에는 주님이 교회에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끊임없이 성화되게 하시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가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예수 믿게 만드시고 또 예수 믿은 다음에는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변화시켜서 계속 새 사람이 되어 가도록 만드시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듣는 우리들은 목사님, 우리가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묻겠죠. 물론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 사람인데요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의 의도하셨던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정말 온전히 사랑하고 그래서 이 지성에 아주 밝은 빛 가운데서 진리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마음에는 그 지성과 의지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좋은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나쁜 것을 바라보고 아파하고 혐오할 수 있는 이런 마음을 갖추고 그런 마음의 자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으로 나와서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이 모든 태양계의 별들이 위성들이 돌 듯이 하나님 한분을 중심으로 모든 이 사람들이 인류가 서로를 사랑하며 가족처럼 사랑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는 면에서 아직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나 반대에서 보면 이미 사람이고 이미 사람이고 이미 사람이고 그러나 아직은 완전한 사람이 아닌, 그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라고 계속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야지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근거가 이루어지는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 사람이 된 것이지만, 아직은 새 사람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은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새 사람이 된 그것을 토대로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 안에 죄를 죽이고 부패성을 물리치면서 주님 앞에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성화가 됩니다. 성화가.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새 사람이 되는 길을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 합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우리를 성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외적인 생활의 일치를 나타냄으로써 우리들이 새 사람이 되어 가는데 이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써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새 사람이 되어 간다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시작이 심령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25절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지지난 시간의 뒤를 잇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랬습니다. 이게 계속해서 새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런 새 사람을 입어야 될 텐데 그렇게 하려면,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거짓을 버리라.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지체와의 관계에서 새 삶을 구현하라. 이렇게 25절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첫째, 거짓을 버려라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거짓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Ⅱ. 새 삶 없이 새 사람은 없음
A. 거짓을 버림
거짓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뭐죠? 거짓말. 그렇죠. 거짓. 거짓말이 가장 생각이 나죠. 사실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보다는 훨씬 더 아주 넓은 개념입니다. 넓은 개념. 그렇다면 거짓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거짓이 뭔지 설명하기 앞서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보면 거짓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훨씬 더 쉬운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인간의 생각과 모든 마음에 진리라고 하는 이 마음에 끊임없이 부합되어 있는 상태를 진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라틴어로 진리를 베리타스고 진실은 베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서 있고 그 다음에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있는데 진리는 진리대로 가고, 사람은 자기대로 살아요.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리를 인식을 합니다. 아, 저게 진리이구나. 그 진리의 빛을 비춰 보니까 그 다음에 내 삶을 보게 됩니다. 왜, 진리는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줍니다. 특히 이 그 진리는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삶을 가르쳐줍니다. 어떠한 이야기 입니까. 예를 들어보죠.
예전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는 것을 팍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서부터는 전에는 아무도 못 보던 인생을 살았는데 커다란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게 신정 의식입니다. 그렇잖아요. 전에는 무신론자였는데, 하나님은 살아있어. 그것일 뿐이야 그리고 살아가면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해서 진리가 있으면 그 진리는 언제나 빛을 비춰줍니다. 그 진리는 밝은 빛을 비춰주어서 우리에게 진리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에 자기가 진리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는 존재와 우리의 인식 사이에 걸쳐져 있는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을 합니다. 그 빛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자기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진리를 내가 알았으니까 이 진리에 대해 나의 삶과 마음이 가까이 가서 합치하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진리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진리로 말미암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이 진리에 끊임없이 부합되어 있는 상태, 부합하려고 하는 그 마음의 성향,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거짓은 무엇일까요. 거짓 그렇다면 참된 것을 감추는 것, 아니면 참된 것을 뭐 말하자면 그 감추거나 아니면 그것을 외곡해서 잘못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것 없이 사는 모든 삶은 거짓입니다. 진리가 없이 사는 모든 삶은 다 거짓입니다. 다 거짓입니다. 뼈 없는 동물을 연체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멸치도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잖아요. 왜 웃어요. 멸치도 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확실한 뼈대를 가질 수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고 성령이 내 마음 안에 살아계시고 내 마음 안에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그 진리의 빛의 비춤을 받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 분명한 뼈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내가 그것을 못 하도록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거라고 분명한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한 것입니다. 뼈대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깨달아 있는 것입니다. 딱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잘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도 너무 유혹 혹은 두려움 속에서 원칙을 꺾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진리가 살아있는 한 그 진리가 다시 빛을 비춰 주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진리가 아주 우렁차게 전합니다. 너는 잘못했다. 틀렸다. 진리가 이야기 합니다. 그 때는 뭐냐 하면 아무도 그가 발견한 사람이 없는데도 이 사람은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진리가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그 때는 내가 너무 두려워서 그랬는데 유혹을 받아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때는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죄가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께 감히 용서도 빌수가 없지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기준을 잠시 잊어버리고 행동했던 자신이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그러냐 하면 죄의 객관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워합니다. 왜 그러냐. 나쁜 놈이구나. 왜 그랬냐 그때는. 그리고 이제 자기에 대해서 고발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너는 믿을 수 없어. 그 때 그렇게 꾸지람 받는 자가 누구냐 하면 자아입니다. 자아. 말하자면 옛 사람에 속한 자아가 꾸지람을 받는 것입니다. 네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렇게 행동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진리의 빛을 다시 받고 보니까, 네가 틀렸다. 왜 나를 그렇게 했느냐. 이 속에서 내 안에는 내가 경계해야 할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잘못했다고 꺾어지고 다시 그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살려고 마음과 정신들이 그 쪽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이게 진실에 대한 정체성이라 이것입니다.
오늘날 잘들어 보십시오. 이게 굉장히 현실 세계를 푸는 아주 중요한 단추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신물을 열어보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욕을 먹잖아요. 그런데 나는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 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가 되면 전체적으로 번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신교 사상을 가지고 있고, 내가 믿는 이 종교가 아니고는 참된 진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그래서 그러한 속에서 강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카톨릭이나 불교처럼 뭐가 문제냐. 모든 것은 하나님을, 신을 찾아가는 문제이고, 그것은 방법의 문제일 뿐이지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다른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진리가 있고 그것은 결국엔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야기 하면 훨씬 더 충격이 줄어들고 개신교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면 양보할 수 없는 대목이거든요. 그게 밖의 이유고, 또 하나는 안쪽의 이유는 뭐냐 하면 이게 이 교인들이 이 진리가 신앙생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진리가 신앙생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이것이 관심사가 아닙니다. 나는 상처 받았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위로가 나에게 필요합니다. 아 그리고 내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교회는 교인보고 너희는 교회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 너희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 반대로 말하라 이것입니다. 교인인 우리에게 교회가 무엇을 할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이 무시당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 진리라는 기준이 없으면 막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막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진리라는 기준이 없으니까 결국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기준 자체가 무시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잘 들어 보십시오. 예배를 드리던지 설교를 듣든지 할 때 선명하게 진리는 이것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대부분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거든요.
(예화) 그런데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인인데 어느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설교 시간에,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교인들을 책망한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좀 똑바로 하라고 설교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대뜸 설교 끝나고 나오는데 교회 안 나온다고 합니다. 권사가, 그래서 목사님이 달랬죠. 왜 그러냐 하면서, 그랬더니 이민생활이 하도 고달파서 일주일 내내 시달려서 마음의 평안을 좀 얻어 보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왜 그렇게 우리를 야단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고달프게 사는 사람인데 교회 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더니 왜 그렇게 우리를 못 살게 굴고 말이지, 그렇게 교인들을 책망하고 그러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진리 자체가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거짓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할게요. 진리에 관심이 없이 생각하고 살아가고 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다 거짓입니다. 그것입니다. 진리의 기준이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거짓입니다. 그 거짓스러운 삶 속에서 어떤 사람이 더 많이 사기치고, 덜 사기 치고, 형벌을 더 크게 받을 죄를 저지르고 덜 저지르고 그것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것이 다 거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류와 허위 속에서 쌓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성공의 가치 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진실입니다. 진실. 정직은 그 진실 속의 일부분입니다. 진리가 있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 것은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게 허위가 아닌 진리 앞에 드러난 자신을 보고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잖아요.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진리가 딱 서 있을 때 그 때 뼈대가 있는 교인이 됩니다. 죽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옳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되었다. 옳지 않다. 불의하다. 이렇게 딱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고난이 오면 고난을 받고 실현이 오면 실현을 당하고 그렇다면서 살아가라고,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평소에 우리에게 먹고 입고 쓸 것, 낙심하면 위로해주시고 모르면 가르쳐주시고 하는 남들에게 안 주시는 은혜를 막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군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기본은 외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와 영토와 국민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고 그래서 평안하게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다. 국민들이 허리가 휘도록 세금을 내가지고 군인들을 평소에 솔직히 이야기 해서 평소에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누가 쳐들어오지도 않는데 하는 게 뭐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군인 가족들이 섭섭해 할지 모르죠. 그런데 물론 하는 게 있지. 전차병은 전차도 닦고 하겠지. 그렇지만 생명의 위협은 별로 없잖아요. 그냥 하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국민이 원하는 것은 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평소에는 골프 치러 나가도 괜찮다 이것입니다. 뭐 스포츠 카를 몰고 다니고 자기 월급 가지고 타고 다니는 것 안 말린다 이것입니다. 좋은 술을 먹고 뭐 비싼 양복을 입고 하는 것 아무 문제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합니다. 전쟁이 딱 나면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도망을 갈 때 자신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버리고 싸울 수 있는 그 지난번에 제가 감동적인 이야기 해 줬잖아요. 소말리아호 물리친 거기에서 구해낸 그 소령이야기 했잖아요. 군인이 된 이후로 나의 목숨은 언제나 조국과 민족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두주 동안 머리에서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의 목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가.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신문에 보니까 북한하고 갈라져서 서로 죽이고 막 그럴 때 하도 공비들이 내려와가지고 군인들을 목을 따고 죽이고 하니까 이 쪽에서도 가만히 안 내버려 둔다고 특공대가 세 명인가 일곱명인가 가가지고 몇 십명을 죽이고 내려왔다고 하잖아요.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래서 그 적지에 가가지고 무섭지 않았냐 그러니까 군인은 그런 것 묻는 것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 넷째도 임무. 그래서 갓난아기를 이렇게 쳐다보면서 내가 이번에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만약에 우리가 평소에 섞여서 살아갈 때에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안 믿는 사람이나 무슨 차이가 나요. 평안한 사회에서 같이 전철타고 휩쓸려 다니면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차 마시고 돈 내고 왔다 갔다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차이가 나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차이가 난다고 칩시다. 전철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칩시다. 그게 뭐 얼마나 감동을 주겠어요, 사람들에게. 전철에서 성경을 읽고 혼자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끄덕끄덕 존다고 치자 이야기입니다. 뭐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딱 이렇게 할 때 그 때에 사람들은 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구나,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교인들은 진리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낙지교인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접시면 딱 빈대떡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컵에다 놓으면 마치 뼈대 있는 짐승들처럼 딱 서는 것입니다. 동그란데 놓으면 완전히 포용주의자처럼 동그란 모습이 됩니다. 마음대로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 그렇게 유연성이 뛰어난 사람이 뭔가 자기 이익에 배치되는 상황 속에 떨어지게 되면,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의 춤추는 낙지처럼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양보하기 않기 위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니다고 말할 때, 아니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도 내가 옳지 않다고 확신하고 신앙의 그 신념이 있으면 그 신념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도 안 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시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해 주시고 이렇게 합니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가만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또 그렇게 나타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똑같은 선을 행하는데 진실했던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선입니다. 거짓되었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선을 탁 행하면 그것을 뭐라 그래요? 위선이라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진실한, 평소에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무릅쓰고 당연히 밖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용기와 떳떳함, 당당함 이러한 것들을 발휘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공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 어떠한 사람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기 아들 보고 야, 네가 고3인데 교회 나가면 되겠냐. 네가 열심히 교회 나가다가 대학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 가린다. 거기 까지는 어떻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가 그러니까 네가 만약에 열심히 공부 고3때 열심해 해서 교회도 안 나가고 열심히 해서 합격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너 때문에 교회에 나오겠냐. 거짓말이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친구가 좋은 대학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 청년들 보고 물어보십시오. 존재하지도 않는 이야기 허위입니다. 거짓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검은 것은 검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할 수 없는 강인함,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진리에 대한 신념을 꺾지 않기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평소의 진실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던 형제 하나인데 대학에서 이제 그 근무를 했습니다. 그 때 한참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데 그 대학에서 자기 연구실에서 자기를 회계를 시켰다고 합니다. 회계를 시켰는데, 자기가 졸병이니까 회계 하라고 확 맡겼는데 앞에서 하는 사람들 보니까 연구비를 보니까, 요새 연구비 횡령 이야기들 나오잖아요. 그 때도 있었던 것인데 사지도 않은 것을 샀다고 쓰고 500원 주고 산 것을 3천원 주고 샀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수증 쓴 것대로 돈을 타서 실제로 쓴 것을 일부는 지출하고 일부는 현금으로 이렇게 가지고 밥도 사먹고 그 다음에 영화도 보고 연구실에서 합니다. 관행이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 그러니까 얘가 한참 은혜를 받으면서 정직에 대한 설교 듣고 그러니까 어느 날 가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 못하냐. 네가 가장 졸병인데 왜 못하냐. 그랬더니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니, 5백원 짜리 사서 3천원 짜리 샀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 아니냐. 그게 왜 거짓말이냐. 그것을 해 가지고 우리 중 한 사람이 띵겨 먹으면 그것이 거짓말이지만, 그것을 해 가지고 돈을 모아서 공동으로 쓰는데 그게 왜 거짓말이냐.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게. 그런데 자기를 가장 신랄하게 정신이상자처럼 비난했던 사람이 거기에 말하자면 제일 선배인데 교회 다니는 선배들이랍니다. 대부분이 교회 다니는 선배들인데 이 후배를 완전하게 왕따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나를 왕따를 시켜도 나는 못한다. 신앙 양심상. 그러니까 나에게 정직하게 영수증을 쓰고 지출을 하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는 거짓말 하라고 하면 나는 못한다. 그래가지고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 그랬습니다. 너 때문에 그 친구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뭐 그 사회가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변하고 안 변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을 버리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분명하잖아요. 그러니까 일체의 거짓과 허위, 거짓을 통해서 이익을 받는 것, 이런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왜 나오냐 하면 너희가 심령으로부터 변화를 받아서 그리고 그 구습을 쫓아 살았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끊임없이 영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기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올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칠 때에 그 때에 내 마음도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변화를 경험한 삶이 되는 것이지, 어느 순간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어느날 신비한 경험 속에서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어 줘서 어제는 누워서 비디오나 보고 만화책이나 보고 타락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아프리카 선교의 순교지로 갈 사람이 되느냐, 그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삶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사람이 영적인 변화에도 이르고, 영적인 변화에 이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해야 할 모든 섬김보다 최고의 섬김은 여러분이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 진실을 통해서 사람들이 명백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람들은 직접 볼 수 없지만,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다면서 그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확신에 넘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은 진실한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빛,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인격을 보면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 보면 거짓을 버린다는 것과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사실은 구분이 없습니다. 동전의 한 면을 어디로 보느냐 합니다. 어디로 보는 것이냐. 이 속에서 쫙 진실이 베인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을 하면 금방 표가 나요. 다른 사람이 볼 때. 늘 거짓되게 살아온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최면속으로 쫙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사실과 진실을 잊어버리고 확 몰입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설교를 듣다가 영화배우들은 전부다 그런 사람이겠네요 하면 아닙니다. 안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자기 스스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자기 속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자기 속에 같은 감정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거짓에 진실해 지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거짓이 뼛속까지 배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것을 말할 때 그 참된 것을 말할 때, 이 참된 것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이 완전히 다른 차별을 느끼게 됩니다. 똑같이 참된 것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순간에 거짓말을 말할 때, 표정이 바뀌고 남들이 다 발각나요. 남들이 보면 다 압니다. 너무나 쉽게 압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본성이 진실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합니다.
B. 진실을 말함
진실을 말한다고 할 때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가 진리에 부합한 삶을 살고, 자기가 부합한 삶을 살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이렇게 자기가 말하고 있는 모든 바가 진리에 대해 판단 받을 바를 알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그것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편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대게 불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입니다.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아첨보다 한 사람이 통렬하게 찌르는 사람의 비난이 어떠한 사람의 인생을 많이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진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드러내게 되고 그리고 내면과 외면이 완전히 일치되어서 아는 것과 마음과 행위 사이에 일관된 일치가 이루어져서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저 속에까지 곧바로 다 생각해서 신뢰할 수 있는, 하나가 되는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는 것과 마음 먹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치를 가지고 말한 그것이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기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의 꾸지람을 받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리로부터 이탈되어서 진리에게 꾸지람을 받는 것이 더 커다란 고통이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꺼이 자기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도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뭘 보게 되느냐 하면 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가치의 기준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가치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가치의 기준이 무엇일까.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했으면 좋겠는데 대충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는 이것이 오늘 성경에 뭐라 그러냐 하면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지체들의 관계에서 새 삶을 제일 먼저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C. 지체와의 관계에서 새 삶을 구현함
지체들의 삶 속에서. 지체들의 삶 속에서 그 진실을 제일 먼저 구현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것은 안 태어나는 것이다. 왜, 이게 눈물의 바다이니까, 인생이. 안 태어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태어났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냐. 이미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번째 대책이 있는데 빨리 죽는 것이다. 빨리 죽는 것이다.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살아있으면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냐. 있다. 그게 세 번째 대안인데, 그것은 뭐냐 하면 법이 법대로 통용되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나라에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엄마, 아빠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그리고 형제와 모든 친구들이 참된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 고뇌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살아간다면 그게 세 번째,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하나의 대안이다. 그런데 어디 그러한 나라가 있느냐 입니다. 법이 법대로 통용되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으며 우리의 부모들 중에서 참 사람이 되기를 몸부림치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그러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내가 이야기 하는 게 할 말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사람은 인생 자체를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빚을 하나님 앞에서 지고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이 50을 하나님 위해서 살 때,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은 100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가치 기준이 없는 사람들 밑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다. 부모 자신이 흔들리면서 방황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무엇이 옳은지 모른 채 방황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다행히 주님의 복음을 만나서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그래서 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잖아요. 어디에서 그렇게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그러한 친구들을 어디에서 만나겠어요.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교회에서 법이 법대로 통용되는 그것을 보면서 살게 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이렇게 날선 검 같은 정확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성도들은 그렇게 못 살아도 성도들에게 그것을 보여줄 때, 성도들은 아 그렇구나 생각이 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그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 되는가를 보여주려고 목회자를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부모에게 받을 수 없었던 것들을 목회자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면서 자라고, 그 다음에 세상에서는 그러한 형제와 그 친구들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교회에서 은혜 받은 지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지체들 많이 있거든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친구가 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제에 들어가서 그런데 그 형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와 와가지고 지체들과 교제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여기에서 뜨거운 열망이 확 솟아난데요. 그게 뭐냐 하면 나도 저들처럼 진리를 알았으면. 그것입니다. 그게 촉진합니다. 이 속에서 계속 촉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정말 올바르게 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려고 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때에 이 세상이 도저히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들, 포기한 것들을 교회와 성도와 목양의 관계와 그리고 지체들과의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셔서 이렇게 엉망인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가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그 참 인간의 도리를 고민하면서 걸어갈 수 있는 다른 가치가 통용되는 그 사회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속에서. 그래서 일주일동안 그렇게 세상과 본받으면서 사는 것 같고 그렇다면서도 주일날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아 그렇지 않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그렇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결심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사람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됩니다. 절대로 낙지 같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뼈대 있는 교인이 되어서 똑바로 서있을 수는 있어도 아무리 컵을 갖다 놓아도 똑바로 서고, 동그란 접시에 갖다 놓아도 똑바로 서고, 뾰족한 곳에 세워 놓아도 똑바로 서고 그래서 자기중심을 찾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낙지 같은 교인이 되어서 그렇게 해서 살아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III. 결 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없이 부드럽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자비로우면서도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강인하게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믿고 진리에 합치하도록 살려고 하는 사람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온 세상에 확 흩어져서 살아갈 때, 그들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살아갈 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별을 보면서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항로가 어디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가난해도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높은 지위가 없어도 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별처럼 빛나는 존재를 통해서 사람들은 진리를 보게 됩니다.
3.영적인 변화와 새 사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새 사람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성경이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며 영적으로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행실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남자가 예수를 믿어 여자로 변하거나 여자가 예수로 변하거나 남자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과 자연적인 성품은 그대로 있었지만 주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변화 받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대의를 교리로서 설명한 후 그러므로 이제 그 앞에서 설명한 그 교리들을 실제의 삶에 적용하는 2부의 내용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사람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도달한 사람들일 수 있고 또 이 편지를 받는 가운데는 아직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도로부터 새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서 그는 말합니다. 영적 예배자가 되도록 1절에서 강조한 후 2절에서 그러한 영적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그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그 새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Ⅱ. 새 사람의 특성
A.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제일 먼저 새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내용들은 이 한 가지 명령형 동사인 분별하라에 걸립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특성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이 분별이라고 하는 정신의 작용은 옳고 그른 것, 더 가치 있는 것과 덜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이러한 것들을 도덕적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판별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지혜의 소산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하면서 시대가 악하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흘러가는 세월을 우리들이 아낄 수가 있을까요. 흘러가는 시간은 일정하니 우리가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보다 반 밖에 안 되는 인생을 살아도 자기보다 두 배나 긴 인생을 산 사람보다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의미적으로는 더 많은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심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분별력이 없었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가장 크게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몰랐지만 주님을 만나고 보니 이전에 내가 겪었던 수많은 상황과 환경들이 바로 주님이 나를 그 고난 속에서 부르시는 음성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분별력이 있어 깨닫게 되었지만 그 때는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 중국판 스캔들입니다. 그렇게 똑똑해서 고시에 합격하고 전도가 유망한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 분별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특성은 분별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하려거든 제일 먼저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길이를 짧아도 길게 살게 해주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지혜는 구원의 은혜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안에서 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사랑할 것이요, 나도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에게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복되게 고백했던 베드로를 향한 우리 예수님의 축복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잘못된 모든 삶이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새 사람의 뜻은, 이 새 사람의 특성은 하나님의 뜻을 명석하게 분별합니다.
(예화) 제가 아, 제가 미국에 한 2년 전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점심을 대접을 해서 거기에 있는 몇몇 교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 한 자매를 소개 했습니다. 이 자매가 지금 방금 예수를 믿기 시작한 자매입니다. 어, 그러냐고. 그러다가 책 이야기가 나왔어요. 무슨 책을 목사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무슨 책을 읽었냐고 하니까, 방금 예수 믿은 사람이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었다고 합니다. 오래 믿는 교인들도 안 읽은 사람들이 있는데 회개해야 해. 회개. 그래서 누가 이야기 했는데 꼬박 앉아서 읽으니까 8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것을 읽었다고 해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방금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 그렇게 힘든 책을 붙드냐 그랬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선물을 받았는데 하나는 죄와 은혜의 지배이고 또 하나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권을 다 읽고 나서 그 교회 사람들이 물어봤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냐 그랬더니 자기는 방금 예수를 믿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긍정의 힘은 아닌 것 같다고. 왜 그러냐 하니까 그 책에서 그리는 대로의 하나님이라면 그 분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이지,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냐.
오랜 동안 학습을 통해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들어오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놀라운 중요한 판단력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들은 그곳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계속 성숙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빌립보서 1장에서 간절히 빌었던 기도의 제목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그것이 사도바울이 은혜 많이 받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 일은 우리에게 고정적으로 계속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잊어 버렸겠지만 여러해 전에 사경회 때 은혜와 부패라는 주제를 가지고 사경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여러분이 빌려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빌려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것, 그 하나님의 은혜와 부패라고 하는 그 속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총명의 기능이거든요. 총명. 그 총명의 기능은 우리의 지혜를 좌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학식하고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식을 많이 가져도 총명하지 않을 수 있고 학식이 별로 없는 대도 총명할 수 있고 반대로 학식도 없고 총명도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학식이 상당히 있는 대도 여전히 총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상황이 제일 좋은 상황이고 뭐 전의 상황이 가장 나쁜 상황입니다. 그죠.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총명이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될 때, 그 때 이 총명의 빛은 아주 밝아요. 그러나 한 때 그렇게 밝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부패해서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그렇다면 이 총명은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주 총명하고 지혜롭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총명의 가변성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한번 분별력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항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은 불신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권면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사람의 특성을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뜻이 하나님의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사도가 삼중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결국은 새 사람의 특성은 하나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이 하나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나에게 이익이 되고 그리고 내가 기쁘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었지만 이제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은 가치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좋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인정해 주어도 하나님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시면 그렇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화) 우리나라에는 이미 출판이 끝난 책들을 복사를 해서 이렇게 책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은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불법이냐 하면 50년 이상 된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법으로 허락이 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50년 안 된 것은 그것은 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옛날 책을 사기 위해서 사람을 불렀는데 그래서 책을 몇을 샀는데 깜짝 놀랐어요. 한 질에 사려면 12권 되는 게 500-600만원 하는데, 150만원에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 이게 어떻게 그렇게 싸냐 그랬더니 복사한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교회 다니시는 장로님이시라는 분이 똑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한 불법인데 그 사람들이 피나게 학문을 연구해가지고 해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들여서 이것을 찍어서 그 사전을 제가 잘 알거든요. 서점에도 없습니다. 주문을 하면 회사에서 아예 만들어서 보냅니다. 주문 제작입니다. 그러는 책인데, 그것을 그렇게 그렇게 해서 파는 것은 그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님 주님 오시는 날에 모두 문제가 됩니다. 옳지 않습니다. 딱 잘라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나한테 올 때는 그것에 해당되는 것은 카달로그도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책 몇 질 팔아 줬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가 그래서 내가 좋아도 하나님이 기쁘지 않다고 하면 포기할 수 있고 내가 즐거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 사람의 특성입니다. 여러분, 그 중생하지 못한 자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꺾는 법이 없는 것, 그것이 비 중생자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꺾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프게 꺾는 것, 꺾는 게 무엇입니다. 꺾는다는 게 부러진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꺾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꺾었지만, 아프다 이것입니다. 뚝 하고 부러지는 것입니다. 이 꽃이 있고자 하는 분성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힘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꺾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 때문에 아파본 사람이 아니면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꺾게 만들죠? 하나님 중심, 내가 비록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마음속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 분명하고 말씀의 빛이 나의 마음을 비추고 은혜가 나의 의지를 꺾을 때 거기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게 새 사람의 특성입니다. 옛 사람의 특성은 완고함입니다. 무엇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 깨뜨려지지 않는 마음, 꺾이지 않는 의지, 분질러지지 않는 고집,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의 특성과 옛사람의 특성의 차입니다.
B.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음
두 번째 새 사람의 특성은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입니다. 본 받다는 말이 희랍어로 수스케마티조라는 단어인데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붕어빵의 풀 밀가루 가루 집어넣으면 붕어빵이 되잖아요. 누가 와서 집어넣어도 똑같이 붕어빵이 되잖아요. 그래서 꺼내 놓으면 어쩌면 그렇게 아침에 만든 것이든지 저녁에 만든 것이든지 똑같이 붕어빵이 똑같습니다. 그게 바로 본받는다는 이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생겨나면 그 사람을 세상이 꽉 눌러서 꽉 눌러서 똑같은 사람으로 찍어내고자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 세상이 무엇으로서 이 세상이 사람을 찍어내는데 결국은 그 틀지어서 찍어내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태어나서 이렇게 찍히는 것은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에 의해서 찍혀 나오든지 그리스도에 의해서 찍혀 나오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대신 세상에 의해서 찍혀 지는 것은 잘 들어 보십시오. 세상에 의해서 찍혀지는 것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세상이 있고 내 안에 세상이 있고 내 안에 세상이 있고 세상 속에 세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만날 때 내 안에 있는 세상과 내 밖에 있는 세상은 통합니다. 그렇다면서 이 세상의 정신이 나를 찍어내고 나 속에 있는 세상은 뻗어나가서 이 세상에 만나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예전에는 도를 닦기 위해서 속세와 이별하고 가족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산속으로 갑니다. 과연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자기 안에 세상이 있는데, 그 옛날 중세 시대 때에 수도원의 부패가 바로 그런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은 착각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의해서 내가 세상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내 안에 세상이 없으면 이 세상이 아무리 나를 에워싸고 있어도 나를 세상 사람처럼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입니다. 모두 사람들 속에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이 뭐냐 하면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결국은 끊임없이 자기를 세상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의 세상이 되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해도 구심점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이 모든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없이 혹은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수많은 자기가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자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고대 사회로 올라갈수록 법이 아주 간단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팔계조의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잖아요. 그러다 그것이 점점 늘어나요. 로마 시대는 법이 최고의 전성기를 부가했고 누구든지 법학을 공부하려면 로마의 법 체계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마가 조금도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이 그렇게 발달하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그만큼 통솔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사회가 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끊임없이 뻗어 나오는 악들을 문명 속에서 억제하고 그리고 사람들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아주 유명하고 그것이 주전 18세기에 그 법전을 읽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정교한 법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법과 함무라비 법전 사이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법이 그 주전 18세기경에 그렇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가 그만큼 악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토판을 공부할 때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이미 거의 18세기 19세기 20세기. 아브라함 살던 시대가 22세기, 주전 22세기이니까 근접해 갔는데 수많은 토판들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 상당수가 영수증입니다. 영수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받고도 안 받은 척, 안주고도 준 척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수증을 두 개씩 만들어서 보관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요. 그것도 진흙에다가 찍어가지고 불에다 구워서 보관을 합니다. 누구한테 돈 빌려줬다, 받았다. 그것을 보관을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그렇게 악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을 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서 강력한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하지만 평화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이 국제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을 보십시오. 어느 나라 지도자든 세계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이 실제로 들어가 보면 뭐 장난이 아니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낮에 기도원을 갔다가 오는데 오면서도 라디오 뉴스를 들으니까 그랍니다. 우리나라 발칵 뒤집혀 졌잖아요. 아 그 바보 같은 외교관들이 중국 여자 별로 그렇게 이쁘게 생기지도 않았더만, 우리 교회 자매들이 훨씬 이쁘구만. 못생긴 자매한테, 자매도 아니지. 그 아줌마한테 그냥 막 비밀을 넘겨준 게 아니냐 그랬더니 중국에서는 막 술렁술렁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저 여자를 꼬셔서 그래서 혹시 미남계를 쓴 것이 아니냐. 미남도 아니더구만. 그래서 아줌마, 아저씨들이 서로 만나서 그렇게 중국 정보를 빼간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 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평화가 평화를 너무 너무 그리워하고 간절히 원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평화가 수립될 수가 없습니다. 수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입니다.
그 세대의 정신을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은 이렇게 세 가지로 아주 영원히 세상의 특징을 세 가지로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것 이상으로 세상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묘사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이 세 가지로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뭐죠.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육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육신 이것은 죄 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던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그러한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 사상에서는 육체가 모두 악하다고 보았지만 기독교 사상에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죄의 물든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이 육신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적인 것, 신령한 것, 이런 것과 반대됩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물질의 차원으로 끓어 내려서 땅의 욕망에 파묻혀 살게 만들어서 우리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 속에 정육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욕은 무엇일까요. 정욕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넓은 의미로 사용이 되면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으로 살려는 모든 욕망을 포괄적으로 가리켜요. 그리고 그것을 더 좁은 의미에서 이야기 하면 이것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옳지 않은 성적인 욕망. 육신의 정욕, 여기에서는 대부분을 두 번째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정욕들이 아주 다양한 형태로 폭발하듯 나오는데 으뜸가는 것이 성적인 욕망이지만 그것 이외에도 일어나는 정욕들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주인삼은 삶을 살도록 우리 인간들을 끊임없이 설득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암시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해줍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전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그 세상의 본질이 바로 육신의 정욕대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이것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만 이것들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그대로 역사해서 그래서 가치를 버리게 만들고 괜찮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삶이 선하고 좋다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그것에서 설득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세상은 그러한 식으로 믿는 사람들조차도 찍어내려고 합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세상이라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 가운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그리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하는 이것 가운데 가장 형님 역할을 하는 기관이 눈입니다. 눈은 어떤 면에서 특이하냐 하면 눈으로 보고 그 눈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싶다는 마음, 냄새 맡고 싶다는 마음, 맛보고 싶다는 마음, 듣고 싶다는 마음, 이런 것들을 갖게 합니다. 물론 귀로 들을 때 보고 싶고 냄새 맡을 때 먹고 싶고 그럴 수 있겠지만 가장 풍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우리의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으뜸가는 기관이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이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호기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사람마다 예쁘고 좋은 것을 보고 싶어 합니까. 끔찍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까. 예쁘고 좋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공포 영화, 끔찍한 살인 장면이 나오는 폭력 영화 이런 것들은 만드는 즉시 망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흥행을 합니다. 그렇다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령 누가 능지처참을 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가마니에 덮혀 있다고 치자. 사람마다 다 아름답고 좋은 것이 추하고 더러운 것보다 더 보고 싶건만 그래도 그러한 끔찍한 시체를 보고 좋아할 이는 없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뭐냐 하면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에 대한 욕망을 우리들이 무조건적으로 칭찬하면 안 됩니다. 그 지식이 무엇인가 목표의식이 있는 분명한 지식일 때에 그것은 아주 좋은 욕망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없는 사람을 가르치는 그것과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교육의 격차를 만들어 내요.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잘 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좋아서 하는 사람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도 직접은 못 봤는데 군자의 말씀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거지만, 잘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못해도 그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길 수가 없고 열심히 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억지로 열심히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너무 잘합니다. 운동을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좋은 체격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저도 참 부러운데,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저것을 어떻게 힘들어서 하나. 그러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재미있어 하니까 그것을 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가 왜 교리를 배워야 되는지를 말하다가 다섯 번째에 가서 재미있으니까. 그것은 본인이나 그렇게 이야기하지,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 그게 바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보는 것과 관련된 사업은 어마어마하게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을 합니다. 지금 여러분, 텔레비전을 보잖아요. 옛날에 우리 흑백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 전에 올라가면 그 무슨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그 변사들이 나와서 그렇게 무성영화가 그저 어설프게 흑백으로 소리 없이 화면으로 돌아가면 방송실에서 목소리로 성우들처럼 연기를 해가지고 풀어냈어요. 지금 보면 무지 웃을 텐데, 그래도 그 영화를 보고 왜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지금 그 정도 가지고 안 돼죠. 제가 이번에 홍콩에 집회를 갔을 때, 아침에 그 헤럴드 트리뷴이라고 하는 영자 신문이 배달되었는데 1면에 한국이 머리기사로 났습니다. 뭔가 그러고 들여다봤더니 한국이 쓰다가 버린 인터넷을 세계는 쓴다. 이런 식으로 나왔어요. 그렇게 나왔는데 뭐냐 하면 지금 현재에 외국에서는 200메가도 다 안 깔려서 쩔쩔 매는데, 2012년 말까지 전국을 초당 1GB의 속도의 인터넷을 깔겠다고 계획을 세워서 지금 추진 중이랍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냐 그랬더니 영화 한편을 다운 받는데 뭐 4초인가, 3초랍니다. 5초에 다운을 받는 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러한 처리 속도가 필요한가 그랬더니 잘 읽어보니까 이것은 한국,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서 이제 어떻게 하냐 하면 컴퓨터를 툭 하고 켜서 3D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할 때 친구가 툭 튀어 나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보통 용량을 가지고 처리가 되겠어요?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합니다. 예고를 하나 하자면 앞으로 핸드폰은 만년필 같이 됩니다. 네모반듯해서. 그래서 컴퓨터는 다 사라지고 노트북 컴퓨터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트럭 몰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렇게 몰고 다니고 요만한 네모난 막대기 같은 곳에 꽂고 다니는 것입니다. 톡 치면 폴로그램처럼 화면이 뜨고 톡 치면 자판이 화면으로 떠서 화면위에 타이프를 치면 인터넷, 영화까지 다 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마 제가 보기에는 15년 안에 실현이 될 것입니다. 막대만한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때에는 저를 기억하세요.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산업이 전부다 보는 데에 쏠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엄청나게 잡아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끊임없는 안목의 정욕들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점점 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재화를 투자하면서 그렇다면서 사람들이 자기중심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 교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 세상의 빛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저는 이제껏 인생을 살았습니다만, 10대 이하도 보냈고, 10대도 보냈고 20대, 30대, 40대, 50대도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이렇게 미모에 미칠 듯이 외모에 집중하는 세대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외모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것을 우리 10대나 20대 때에는 좀 부끄럽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을 해도 그것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아주 경박한 것이라는 그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속으로만 아, 정말 예쁘구나.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예쁘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경박한 사람들처럼 보았어요.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그러니 뭐 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는 여자인데, 경찰청장 이런 사람한테 끊임없이 인터넷에 글을 올려서 살려주라고. 왜 그러냐 하니까 예쁘니까. 이런 일들이 막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 세상의 빛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물질, 육체로 집중이 됩니다. 어떤 아줌마는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허리하고 엉덩이가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전국의 스타가 되는 거야. 텔레비전에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면서 그 아줌마가 뭐 먹나. 그리고 어떻게 자나. 운동은 어떻게 하나. 이러면서 모든 것들이 다 전부다 집중되는 거야. 사람들이 미친 듯이 자기의 자기가 이 세상의 빛으로 볼 때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 모두가 다 그러한 속에 휩쓸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때가 되면 장가를 가려고 그러잖아요. 항상 설교 시간에 그러잖아요. 외모의 유효기간은 6개월이다. 그랬더니 어느 자매가 절 찾아와서 그랍니다. 목사님 저도 6개월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제가 경험을 해보니까 4박5일 이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러죠. 형제들 보고. 야, 고생 많이 하지 말고 신앙 좋고 성화된 자매들한테 장가를 가거라 그렇다면 예전에는 네, 밖에 가서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일단 그 앞에서 네, 하고 그랬거든요. 요즘에는 뭐라 그러는지 알아요? 아닙니다. 목사님. 제가 전도사하고 결혼합니까. 자매랑 결혼하죠. 저는요 신앙 좋은 자매 만나서 순탄한 삶을 살기 보다는 예쁜 자매 만나서 연단 받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정신에 의해서 계속 찍혀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찍혀 나오는데 이게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찍는 힘이 엄청나게 강해집니다. 어마어마하게 강해집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오늘부터 본받지 말아야지 그리고 스스로 자기하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그러한 것들이 필요 없다고 내게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이 확신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움직여 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거슬러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고 말씀의 힘이고 은혜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의 삶을 보십시오. 얼마나 이 세상을 잘 본받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을 잘 믿고 이 세상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빚어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찍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새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보여주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회심하고 중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옛사람이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은혜에서 멀어져 버렸기 때문에 새 사람의 특성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Ⅲ. 새 사람의 길
그렇다면 오늘 사도는 우리보고 어떻게 되어야지만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나요? 즉, 새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A. 영적인 변화를 받음
그는 제일 먼저 변화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변화를 받아야지만 하나님 중심이 되고 변화를 받아야지만 분별력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변화를 받아야지만 내가 좋은 것 말고 하나님이 좋은 것, 변화를 받아야지만 내가 기쁜 것 말고 하나님께 기쁜 것, 변화를 받아야지만 대충의 삶이 아니라 완전한 삶,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영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변화라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육적인 변화를 생각해 보시면 아주 쉽지 않겠어요. 여러분이 어떤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온 몸이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식물인간 같은 상태에 있었다고 쳐 봅시다. 그런데 의사들이 열심히 치료를 하고 가족들도 간호를 했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그러더니 며칠 있더니 눈을 떴어요. 눈을 뜨고 보니까 이제 희미하던 안력이 다시 회복이 되면서 수많은 만물들의 상들이 자기의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더니 이제 입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게도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집을 수 있게 되었고 다리가 힘을 얻어서 이제 굽히고 펼 수 있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변화입니다. 다른 변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이렇게 불구의 상태에 있어서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맛보아야 할 것들을 맛보지 못하고 만져야 할 것들을 만지지 못하고 가야 할 곳을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그것들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눈은 물질적인 것들을 봅니다. 영적인 눈은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변화를 받으면 변화 받지 못하였을 때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듣지 못하였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감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것뿐이었고 신속하게 자기의 마음과 연결이 되면서 저 물질, 저 명예, 저 신기한 것들을 내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까. 그것 밖에는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령한 지혜가 없어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고 영적인 변화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들을 너머에 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을까. 왜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을까. 왜 나를 어머니로, 아버지로, 혹은 한 가족의 딸로, 아들로 삼아 주셨을까. 왜 나를 군인으로 보내셨을까. 내게 주어진 의무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적인 변화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마음으로 기쁜 일들만 있어도 그것을 숨길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를 많이 받았다면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새 사람이 되려면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오는 변화입니다.
B. 마음을 새롭게 함
그렇다면 도대체 그런 영적인 변화를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영적인 변화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영적인 변화의 주체는 성령님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을 밝히시고 그 능력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새 힘을 주시고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실 때에 그 때에 우리는 새 사람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성령의 은혜는 언제나, 언제나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대부분의 경우에 주님께서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셔서 변화를 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보면 어떤 고백을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신 분도 성령님이시라는 고백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언제나 마음먹는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먹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변화의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영적인 변화를 받은 새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지의 작용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만약에 우리들이 새 사람이 된다면, 지리멸렬하던 우리의 인생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짝이 없던 우리의 신앙생활, 끝없이 진창에 빠진 것처럼 개선될 가망이 없이 흘러가던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자신의 마음으로 당신을 간절히 찾으며 자신의 현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지 여기에서부터 벗어나서 더 잘 하나님을 믿고 더 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해서 정해진 자신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4.영광의 빛을 받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인간이 새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구절을 선택했습니다. 이미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새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해서 새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계속해서 새 사람이 되어가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아직 주님을 못 만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어느 상태에 있으며 어떻게 자신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알다시피 고린도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야서로 불리울 정도로 이 사도가 고난을 많이 받은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첫 장부터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을 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역의 고달픈 나날들을 회고하면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노랬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사도는 자신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위해 고생을 하던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복음을 전파하고 때로는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아 짓밟힌 자가 되어도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하는 소망,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증거하고 전하는 이 복음 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견고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아직까지도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불특정의 불신자들을 화제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왜 구원받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속에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세상신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라고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 하였던 것입니다.
II.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시작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단순히 불신자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오늘 여기에서 복음의 본질과 관련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시작입니다.
A. 복음의 빛을 비추심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시작은 제일 먼저 우리의 지성에 복음의 빛을 비추심으로써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 보면 맨 처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순서를 그대로 밟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처음이 복음의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어두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식들이었습니다. 어두움은 밝은 낮에 하는 일을 계속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지만, 어두움은 어두움의 일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그러한 시간입니다.
(예화) 세월이 많이 지나갔는데 한 30년 전 이야기인데, 종로에 가면 우리 예배당처럼 기다린 다방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좁고 기다란데, 그 집주인이 얼마나 머리를 썼는지 앞에서부터 환하게 해 놓고 뒤로 갈수록 어둡게 조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은 계속 걸어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빛 가운데 있어서 좋은 사람들은 빛에 있고 그 어두움 속에 멀리 들어가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어두움은 어두움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고 빛은 빛의 일을 하기에 적합합니다.
일본에서 통계가 나왔는데 밤거리의 불빛을 50% 밝게 하면 범죄가 50% 줄어든 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거리가 환하게 우리나라 이렇게 전 세계에서 전기를 흥청망청 쓰는 나라는 없습니다. 정말이야. 세계 어디를 가도 없습니다. 이렇게 전기를 흥청망청 쓰는 바람에 그래도 밤에 범죄율은 낮은 편이랍니다. 어쨌든 우리에 대해서 성경은 어두움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두움은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그 캄캄한 영적인 어두움일 때에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행하기에 적합하고 또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식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진리를 들려주시고 사람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을 깨닫게 해 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바라바보다도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이 빛이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일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서 이 사도바울은 창세기의 어둠과 빛을 바로 주님을 모를 때 우리의 마음의 어둠과 빛의 관계로 대조시킵니다. 기가 막힌 대조입니다. 태초에 아직 빛이 창조되지 않았을 때 캄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빛이 있으라고 제일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무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그대로 그 빛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명령형이 아니라 빛이 있었으면 그런 뜻입니다. 빛이 있기를, 주님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시니까 즉시 그 빛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사도바울을 비롯하여 그 일행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마음이 태초처럼 캄캄한 어두움이었을 때에 주님께서 명하사 빛이 있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그 빛을 비추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캄캄한 어둠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얼굴빛이 어떻게 우리에게 광채가 될 수 있을까.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얼굴에 있는 하나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러거든요. 이것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특히 시편을 보면 시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 주의 얼굴빛을 항하여 드사, 그 주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 등등 얼굴과 얼굴빛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지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빛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이 재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의 갚음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에게는 그분이 얼굴빛을 비추시는 그 날이 신원의 날이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축복의 날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는 이 날이 똑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핍박과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큰 복을 받는 날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속성이 어느 한 면만을 보여주심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경건에 대해서 제가 정의를 내릴 때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떨림과 그렇다면서도 싫지 않게 이끌리는 사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비추신 그 얼굴빛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도 항상 좋은 소식이 아닌 것입니다. 왜 이 복음은 믿고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복이지만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절한 그 자체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 받은 다음에는 책임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복음도 역시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B. 복음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임
그런데 이 복음의 빛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라고 오늘 성경이 말하는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의 빛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 영광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영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요. 그래서 본체적인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누구도 볼 수가 없고 그리고 알 수도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영광이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어느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요. 예를 들자면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무를 태우지 않는 아주 특별한 불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장소를 구별하여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셨지만 어느 특정한 한 장소에 당신의 임재의 효과를 강력하게 나타내 보이시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직접 거기에 임재해 계신 효과를 나타내 계시는데 이것을 발산적인 영광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쳤을 때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이 항상 있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볼까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헌당을 하던 그날,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이 나타나서 거기에서 주님을 경배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석을 깐 땅에 엎드려지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을 통해서 무슨 엄청난 설교자가 솔로몬 성전 완공식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그 자리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발산적인 영광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하나의 영광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영광의 빛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로 말미암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송) 널 보는 이 마다 주를 생각하리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 그 다음에 행실, 그리고 신실한 생활, 그리고 지성, 이런 것들이 갖추어져서 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쉽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 영광을 돌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아주 탁월한 성도들이 있는 곳이면 적합하지 않겠죠. 나보다 다 믿음이 좋고 더 많이 성화가 되었는데 뭐 조금 해도 표가 나겠어요? 안 그래요? 경험을 못 해 보셨어요? 그렇겠죠. 그러나 만약에 세상이 형편없이 썩었다면 조금만 똑바르게 살아도 사람들에게 아주 돋보이겠죠. 그렇죠. 마치 서울에 좋은 학교에서 바닥에서 기던 애들이 저 시골 내려가서 1등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이 영광의 빛은 바로 이 두 번째와 세 번째를 합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고 또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아주 탁월한 빛을 드러내셨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었기 때문에 우리보다도 더 성령충만 했기 때문에 우리보다도 더 신실하게 사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비춘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러내 보여주실 수 있는 찬란한 영광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의 빛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또 말씀대로 사심으로써 하나님이 이 모든 인류를 향해 어떤 경륜을 가지고 계신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의 사역은 단순히 윤리적인 사역이 아니라 신학적인 사역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류에게 인류에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주린 자를 먹이시고,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돌보시고 교육을 시키시고 발을 씻기시기 까지 온갖 다양한 섬김을 다 하셨지만 그 많은 봉사와 섬김은 하나를 향해 모두 모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가난한 사람 한 사람, 병든 자 한 인간이 아니라 그것은 재료에 불과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한꺼번에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다루시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시려고 그 모든 것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류를 전체의 인류를 어떻게 다루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이 세상에 지은바 된 인간들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살수도 없었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행복할 수가 없었고 또 그들이 다스리는 이 세상은 모순과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끔찍한 일본의 지진사태를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편리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편의롭게 해 줍니까. 그러나 이렇게 편하고 편리함을 느끼는 대신 어마어마한 댓가를 치룰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발전이라든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런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더 편해지고 마음이 세상의 즐거운 것으로 가득채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을 밝혀주지는 못하고 창조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방황하는 인류의 발길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면서 멸망으로 치닫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참으로 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어떠한 의지 속에서 이들을 다루고 싶어 하시는지를 하나님이 면면히 보여 주셨어요. 맨 처음 범죄하고 난 직후에 범죄하고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그 위대한 계획을 보여 주셨어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들은 또 어느 정도 알았어도 그 앎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불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마음 가득히 하나님의 생각과 심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셨어요. 그것을 통해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그 능력이, 은혜가, 자비와 긍휼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은 정신과 믿음의 눈이 아니라 육신의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들리기만 하던 주님에 관한 소식을 이번에는 생생하게 보면서 만질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그 분이 어떻게 인간들을 눈물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셨는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 순간 눈이 열리며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이제까지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인류에게 베푸시고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베푸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고 부르시는지를 눈을 떠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사건이 이 세상 역사 전체에 흐르는 구원 계시의 정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복음의 빛이 바로 영광의 빛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요한 모든 감추어진 계시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쏟아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의 빛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 쏟아내어서 모든 사람들이 눈부시게 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촛불을 키고 횃불을 들고, 호롱불을 들고 구원의 길을 더듬었는데 이번에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림자 하나 없는 찬란한 빛으로 이 세상에 비추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중적 특성을 갖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성육신 안에서 감추어지고 또 하나님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태양의 폭발이 있을 거라고 뭐 그러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태양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특수한 필터가 달려있는 망원경을 가지고 태양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망원경을 가지고 보게 되면 눈에 별로 안 좋은 일이 생기든지 실명을 하든지 그렇게 되어있겠죠. 마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 분의 찬란한 영광을 초라한 종의 모습,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인간들이 그 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이 하나님의 그 찬란한 신성의 빛을 인성 밑에서 감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측면이 있냐 하면 그 분이 비록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병든 자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의 헌데를 씻겨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야 정말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사랑이 많은 것이구나 하는 정도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을 용서하고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버림받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생생한 장면은 눈으로 보지만 믿음의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면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감동을 받게 되는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찬란한 빛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요즘 주일날 죄인을 부르신 하나님에 대해서 쭉 설교를 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그렇게 끔찍하게 죄를 짓고 살아온 사람들을 주님이 친히 부르셔서 용서하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육신 쪽에서 보면 정말 우리도 저렇게 예수님처럼 살아야 되겠구나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더 깊이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그 사회에서 철저하게 지탄을 받고 거의 버려진 사람들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그들을 용납하시고 당신과의 교제 속에서 지내게 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용납 받는 죄인 한 사람과 2천 년전에 30세쯤 되신 그를 용서하고 대화를 나누시는 청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서 보이지 않는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됐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하는 것이 마음에 밀려오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라고 하는 다급하고 아주 안타까운 심령이 중심에서 불타게 됩니다. 이게 복음의 동기가 됩니다. 바로 그런 분으로써 이 곳에 오셨기 때문에 그 복음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다? 복음을 세 단어로 이야기 하면 예수 우리를 위해 죽었다.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게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대표로 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세 자를 한 단어로 줄이면 예수입니다. 예수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것이 복음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속성들이 그 안에서 묻어져서 쏟아져서 빛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티끌만큼도 지은 적도 없고 죄라고는 모르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필살로 다할 수 없는 그 큰 고난으로 욕을 보시고 저주받으신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죄를 지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삼자로 대신 그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 세 단어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이 그 속에 모두 다 빛처럼 쏟아져서 들어왔고 쏟아져서 밖으로 발산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일생동안 배운 사람도 그렇게 안 사는데 예수 만난 사람은 사랑합니다. 예수 만난 사람은 원수도 용서할 줄을 압니다. 예수 만난 사람은 불의하게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않습니다. 예수 만난 사람은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배웠으니까 알지 어떻게 알겠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한분에 대해서 빛을 받을 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 속에서 한 번에 그 빛이 확 들어오면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를 깊이 만나고 변화받았을 때에는 충분하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여러분처럼 이렇게 오래토록 교리를 배우고 탄탄하게 다져진 사람들에 비하면 미숙할 수 있겠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주님의 영광의 빛이 확 비춰서 새 사람이 되던 그 날에는 마음속에 몰라서 못 살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만 하면 그 뜻대로 살겠다 라고 하는 그 마음이 교리를 잘 알고 있는 여러분 보다는 더 충만한 것입니다. 더 충만한 것. 그게 바로 첫 번째 최심의 축복성입니다. 첫 번째 회심의 축복성. 그래서 첫 번째 회심은 회심 즉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찬란한 빛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복음의 빛이 영광의 빛입니다. 그 빛 아래서 인간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찬란하게 비춰질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하신 그 중심적인 질서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의 그물망 속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물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회심했는지를 정직하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이럴 수도 있습니다. 회심하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 즉시 진리의 빛이 별로 없는 아주 희미한 어두움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맨 처음에 회심과 함께 가졌던 이 질서를 아는 선명한 빛들이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른 시간 안에 그 빛이 흐려져서 그래서 온갖 잡스러운 생각과 사상으로 범벅이 되어서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은 그러한 영광의 복음의 빛이 비춰서 계속적인 지식의 빛으로 계속 뻗어나가서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그 질서의 그물망 안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것을 깨달을 수 없는 상황에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말 오늘도 제가 오늘 새벽에 기도원을 갔거든요. 거기에서 하루 종일 생각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할까. 이 세상은 너무 너무 혼란합니다. 요즘에 판도가 어떠한 판도냐 하면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바꿔 버려요. 옛날 그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으로 바꿔 버리고 목회자들은 옛날에 가던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은 옛날 그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꿍꿍이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삼자가 합력해서 악을 이루려 합니다. 여러분 제가 삼위일체 쓰면서 연구를 하면서 보니까 신학자 철학자들이 모여서 매일 모여서 궁리하는 게 옛날에 믿던 하나님은 우리한테 너무 불리해. 그 하나님을 다르게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해가지고 그 세계적인 석학들이 만들어내는 게, 조금 아까도 기도원에서 내려오는데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도 보니까 뭐 기억을 하고 그 다음에 작정을 하고 그 다음에 뭐 결심을 하고 이러한 것은 모두 시간 속에서 있던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어야지만 기억도 하고 사랑도 하고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고 분노도 하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럴 수가 없지 않냐. 그러니까 뭐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의 커다란 법칙처럼 하늘높이 인간들과는 상관없이 우주에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이 빛을 계속 비추는데, 자신도 그 빛을 비추는 것을 태양 마음대로 회수할 수 없듯이 하나님도 당신의 존재의 효과를 세상에 나타내시는데 태양처럼 그냥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각자 자신들이 알아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놓고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가는 길을 다른 길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성도들은 인생이 사는게 너무 곤고해서 어떻게 하면 제가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천부여 의지옵소서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 오면 성공한다며. 여기 오면 잘 되는 내가 된다며. 복 받는 내가 된다며. 그러니 셋이 다 합쳐서 각각 다른 하나님, 다른 길, 다른 마음을 가지고 각자 하나님을 더듬는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은 정말 참 하나님은 누구고, 그리고 그 분을 아는 빛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분의 성품과 속성이 어떤 것이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선명한 빛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음에 들어와서 그러한 것들이 어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설교를 성도들도 좋아하지 않고 목회자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뭐냐. 이제는 뭐 설교를 잘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왜, 문제가 될 이야기는 안 하기 때문에. 뭐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는데 무슨 문제야. 잘 삽시다. 복 받읍시다. 건강합시다. 기뻐합시다. 화요일도 복을 주시고, 금요일도 복을 주시고 예수 믿으면 신 납니다. 할렐루야. 아멘. 틀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맞는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신앙이 아무런 우리의 인생을 구속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이고, 은혜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입니다. 아까도 저기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일본에서 쓰나미를 막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콘크리트로 박스채로 만들어가지고 67킬로를 쌓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에서, 그것을 그것을 땅에다가 쌓은 것이 아니라 바다 속에다가 쌓았어요. 왜냐하면 쓰나미가 팡 하고 오면요.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속도가 빨리 가면 800킬로, 아주 빨리 가면 900킬로. 950킬로, 보통 천천히 가면 750킬로미터로 날아가거든요. 비행기가. 그런데 비행기 날아가는 속도로 물이 이동을 합니다. 보통 때는 아랫물은 가만히 있고 파도가 이렇게 치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밑의 물 전부다가 시속 700킬로의 속도로 확 이동을 합니다. 이게 올 때에 바다 밑 바닥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밀려오니까 위를 막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에 이게 그것을 막겠다고 세계에서 유래가 없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몇 십 미터가 될 정도로 쌓아올린 것입니다. 쓰나미가 확 밀고 오다가 멈추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세계적인 댐이라고 해놨는데, 못 막았어요. 마을이 다 쓸려 나갔어요.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돌멩이를 쌓는다고 할 때 둥글둥글한 돌멩이를 가지고 열 트럭 쯤 쏟아놓고 쌓아보라고 할 때 여러분 쌓을 수가 있겠어요? 돌무더기처럼 쌓아놓겠죠. 그러나 네모 반듯반듯한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것처럼 2.5톤 정도의 아주 정확한 사각형의 돌멩이를 갖다 준다면 아마 열 트럭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바닥만 평평하게 수평을 잡고 위에다 쌓으면 흔들리지 않고 계속 쌓아 올릴 수 있을 것 아닙니다. 그게 힘이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세속주의 쓰나미를 이기는 그러한 하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되겠어요? 왜, 여러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할 때 많고 해야 되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안 할 때 많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안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돼. 아무리 잘 알아도 그래서 뭐가 필요해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하루를 살아갈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이고, 두 번째는 은혜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 그 철저하게 사상의 힘을 쌓고 은혜의 힘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밀려오는 조수와 같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이길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빛은 가장 중요한 불씨이고 종자불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견고하게 쌓아올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헛되고 거짓된 사조에 의해서도 쇠뇌당하지 않고 그리고 그 간교한 괴계를 정확하게 지적해 낼 수 있는 그러한 회한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무엇으로 우리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왜 그렇잖아요. 맨날 말 안 듣고 까불고 장난만 치던 녀석이 어느날 엄마 아빠가 외출을 하고 들어왔는데 막 집안을 청소를 깨끗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해 지기 시작하죠. 무슨 일을 하고 감추려고 이렇게 청소까지 해 놨나. 불안해 지기 시작하잖아요. 그것을 새 행동이라고 한다면 새 행동은 헌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은.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은 뭐냐 하면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은 새 행동을 한두 개 가끔 한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새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새 사람은 사람이 변해서 새 행동을 하는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된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새 행동보다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서 새 사람이 되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나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아, 변하지 않는구나. 철학자들은 포기하죠. 인간의 본성은 변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확 비칠 때, 그 마음에 비춘 복음의 빛을 통해서 됩니다. 그런데 이 빛은 그냥 비치는 빛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살아가다가 보면 우리의 마음에도 종종 아주 강력하게 권세가 있는 빛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일까요? 뭐, 그런 것 아닙니다?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한 60kg, 56kg정도 되어 보이는 자매입니다. 뭐 그렇게 날씬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뚱뚱하다고는 말하기 그렇잖아요. 56kg쯤 되었으니까. 뚱뚱한가. 그래도. 안 뚱뚱하죠. 56kg, 그리고 키도 좀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 괜찮아요. 51kg정도면 더 좋겠지만. 56kg정도 이렇게 되었는데. 그런데 자기의 다이어트 체험기를 이야기 합니다. 135kg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이 찔 수 있냐 그랬더니 배가 터질 듯이 부르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합니다. 밤에 제일 땡기는 게 닭다리랍니다. 닭다리. 그래서 그것을 네 수 정도 때려야지만 겨우 잠이 오기 시작합니다. 네 수 정도면 한 마리잖아요. 닭다리가 네 개면 몸집으로 볼 때 한 마리잖아요. 그것을 매일 그렇게 먹는 것입니다. 어느 날 뚱땡이 재수 없어,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주위에 누가 있나 쳐다보니까 아무도 없더랍니다. 딱 보니까 쓱 돌아서서 가는데 침을 딱 뱉으면서 아 오늘 재수 없어. 저 뚱땡이 저것. 그 순간 이 여 학생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확 밀려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는데 그것까지 다 이야기 할 것 없이. 하여튼 오후 세시가 마지막 식사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매일 오후 세시가 그렇다면서 피나게 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들었을 때 아, 이 교회는 오래 다니면서 교리도 모르고 내가 이 한마디 했다고 해서 여러분 가가지고 교리책 펴놓고 밤새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맨날 하지. 안 그러거든. 안 그러거든요. 심지어는 자신보고도 그렇게 말을 하면서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은 어때요. 굉장한 어떤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확 밀려 들어와서 한 사람의 본성의 빛이 또 다른 본성의 빛을 눌러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많은 본성의 빛이 뭐예요. 그런 거겠죠. 먹으면 어때. 먹을 수도 있잖아. 아 삶의 질이 무슨 체중에 비례 한다고 하는데 뭐 내가 뭐 뚱뚱해서 보태 준 것 있어? 니들이 뭐라 그래도 나는 내 인생을 갈 꺼야.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옛날에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거기까지 갔겠죠. 그런데 한 순간에 확 들어오면서 나머지 모든 것을 확 눌러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반 은총 속에서도 이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살던 사람이 다 집어 던지고 속세를 버리고 절로 가고 어디로 가고 막 그러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외국에 보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데 다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지으면서 수천 억, 몇 조 씩 되는 돈 다 집어 던져 버리고 땅 파고 그리고 사는 사람이 있고, 우리나라에 보면 다 뭐 전기도 아예 안 들어오고 호롱불 키고 사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런 삶을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마음에 비추심
일반 은총 속에서도 그러한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음의 빛 그 자체가 영적인 빛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될 때, 이 빛은 우리에게 한번 비춰보는 그러한 빛이 아닙니다. 구원얻을 사람들에게 이 빛은 아주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그 동안의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 세상의 신에 의해서 미혹당하며 어지럽혀서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온갖 인간의 상식과 사람의 변명 이런 것들을 어느 한 순간에 확 하고 파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빛에 쫓겨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확하고 밀려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말씀의 은혜의 빛입니다. 영광의 빛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빛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근원이시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짜 놓으신 모든 이 아름다운 질서의 그물망 거기에 그 그물망 위에 이렇게 자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나 자신도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영혼과 육체와 마음과 우리의 삶, 이 모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만을 들여다 보아서는 자신이 무엇에 필요한 인간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모를 때의 우리의 인생은 목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목적이 있었어도 그것은 별로 그래야 할 가치가 없는 게 우리의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III. 실천적 적용
이것을 적용을 하자면 우선 비중생자들에게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그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죄를 죽일 수도 없고 나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흉내내며 살아도 그것은 쇼지, 결코 새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찬란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으로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좋은 예배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좋은 하나님의 무엇을 가르쳐 주시든지 간에 그것을 깨닫고자 하는 예배자가 됩니다.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사실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새 사람이 되면 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도 자꾸 감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보다 예수 믿은 내일의 삶이 더 행복하고 부요해지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서 회개하여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본 모습에 대한 정체성은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제외해 버리고 나면 예수님이 꼭 필요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놀랍게도 오늘날 이렇게 다원주의 사회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이 꼭 예수 한 길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통해서든지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는 그 길을 걸어가면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 중생자들은 자신이 이러한 영광의 빛을 안 적이 있었는지 정말 자신이 이 영광의 빛을 받아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똑바로 알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안 사람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의 날 동안에 구원의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두 가지도 필요 없고 세 가지도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 내 어두운 영혼에 복음의 빛을 달라고 그것 말고는 더 필요한 것이 없니 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라고 까지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광채로 내 영혼이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했는데 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번영이 무슨 소용이 있고, 오래토록 이 세상에 남겨져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생한 사람들에게 적용을 하겠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영광의 빛을 제가 옛날에 한번 받았죠.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번만 그 빛을 받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지 않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영광의 찬란한 빛 앞에서 보았던 질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영광의 흔적들을 지금도 마음에 간직하고 아주 기쁘게 그 질서를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단이 공격할 때 지정의 중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것이 어디인 것 같아요? 지성입니다. 지성. 하는 짓은 하게 내 버려둬도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겨냥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와에게 뱀이 유혹할 때 하와 팔뚝을 강제로 끌어다가 거기에다가 선악과를 따서 손에 쥐어 주지 않았어요. 손끝하나 뱀은 선악과도 건드리지도 않았고 하와의 몸에도 손대지 않았어요. 그는 그의 생각에 도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그랬습니다. 생각이 바뀌자 그 과일이 그렇게 탐스럽게 느껴집니다. 공격을 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고 그 십자가의 영광이 그 고난의 영광이 그 사랑의 영광이 그렇게 큰 것을 발견했다면 그렇다면 그 발견한 찬란한 복음의 광채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빛을 잃지 않고 머물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그 빛을 붙들어야 되겠죠. 그 빛을 계속 붙들어야 되겠죠. 아멘. 붙들어야 되겠죠.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아는 것이 적어도 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아는 것이 많아도 차가운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적어도 십자가 사랑에 불붙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 빛을 계속 간직하여 살아야죠.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헌신과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고 나의 성화 생활의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참 하고나면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그 복음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더 깊이 깨닫고 깨달을수록 그 십자가의 영광이 매순간 새롭게 새로운 빛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전에 이런 영광의 빛을 받았고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그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영광의 빛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광의 빛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 비추시는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열심히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그 진리에 여러분의 삶을 합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에게 비춘 이 영광의 빛 때문에 이렇게 감격하고 있는 사도처럼 여러분도 이 영광의 빛에 감격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시는 방법이고 새 사람 만든 사람이 다시 헌 사람 안 되고 새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게 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예수의 생명이 역사함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0-11)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두 번째 쓴 편지 속에서 자신들의 목회 사역이 선교 사역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토로하면서 그렇다면서 그렇게 섬기면서 사는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이 4장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비춰서 그 복음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간파하면서 그렇다면서 그러한 영광스러운 소망과 자신들의 끝없는 고난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아주 감동적인 언어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이제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살아가는 그 모든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이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새 사람이란,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새로운 능력이고,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똑같은 외형상 변함이 없는 옛날 사람인데도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I. 새 사람: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감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새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과거의 옛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것은 일회적이고 선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구속이 완성되는 그 날에 모든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실 것처럼 또한 우리를 미리 옛 사람에서 구원과 함게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 사람을 그 정도 선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의 또 다른 국면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은 새 삶을 영위해 가는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 사람, 새 삶. 이 두 개의 관련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즉각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니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새 사람이라고 하는 그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우리가 새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인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아주 생명적인 원리로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와 열매, 둘 사이의 생명의 관계가 있어서 필연적으로 둘이 원인과 결과로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배나무에 배가 달렸다고 해서 모두 배나무는 아닙니다. 나무에 배를 실로 묶어 놓을 수도 있고, 그리고 열매가 아님에도 열매 같은 것을 흉내 내서 매달아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를 그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할지라도 그 매달아 놓은 열매 때문에 그 나무가 배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원리는 나무와 열매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영위해 가는 새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생명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사람은 새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고, 새 사람의 사람됨과 새 사람의 새롭게 영위해 가는 새 삶 사이에 생명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 입증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배나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배가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배 밭 근처에서 열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서른 두 살까지 약 17년을 살아서 너무 잘 압니다. 거기에는 배가 가을이면 누렇게 익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쪼르르륵 배 농장이 있어도 붙어있는데 같은 농장 안에서도 저 언덕 넘어 있는 배는 맛이 없고, 저 언덕 아래에 있는 배는 맛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땅과 햇빛을 받는 일조량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배가 아주 실하고 좋은 배일 수도 있고, 조그마한 돌배일 수도 있습니다. 색깔이 진할 수도 있고, 흐릴 수도 있고 동그랄 수도 있고, 찌그러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름대로의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성향에 맞게끔 맺힌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완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또 좋은 신앙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받아도 우리의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연 본성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하여 은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다양성을 간직한 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배나무가 배라는 열매를 맺게 하듯이 새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입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힘입니다. 그래서 그 힘이 계속 솟아나서 자기를 유지하고 전달할 때에 우리들이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공급하는 그러한 종류의 생명체는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생명을 본 떴습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끊임없이 생명의 기운을 솟아나게 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탱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렇게 생명이 없는 컵은 여기에 올려 놓으면 천 년이 지나도 여기에 그대로 있지만, 생명이 있는 달팽이는 몇 분이 지나면 여기에서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명이 역사하는데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자존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끊임없이 어떠한 식으로든지 힘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생명이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자존하는 것 같아도 주님의 생명에 의해서 지탱되는 생명이고 주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지탱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두 생명 사이에 아주 고등한 생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이러한 영혼의 아주 하등한 생명력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그리고 그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 속에 주어지는 이 새 사람을 살게 하는 능력, 생명은 이러한 하등한 영혼의 능력이 아니라 아주 높은 차원의 새로운 영적인 힘이고,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러한 생명이 이제 이 영혼 위에 부어지게 될 때 영혼의 아주 고등한 기능이 막 살아서 역사하게 됩니다.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막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살아있으면 다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죠.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려서 뇌사 상태에 빠집니다. 호수로 입속 깊이 먹을 것을 넣어 주면 속에서 위장은 운동을 하면서 그렇다면서 소화를 시키고 변도 나와요. 그런데 본인은 아무 의식도 없고 스스로 의지 다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하등한 기능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회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놀랍게 기억이 되 살아오게 됩니다.
(예화) 이미 벌써 10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9살 먹은 아이가, 아이라고 하면 그런데, 19살의 청년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19살에 아이를 자매에게 아이를 갖게 하고 그리고 자신이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 여자 아이가 태어나가지고 19살이 되었는데, 38살에 깨어난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38살에 깨어난 것입니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자기 딸이 자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딱 19살에 머졌는데 19살짜리 딸이 옆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깨어날 때 이것은 이 속에서 엄청난 운동을 하면서 그렇다면서 그 영적인 생명을 담지한 사람이 아주 새로운 지성과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령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볼 수 없는 아주 무지한 사람이었는데, 그 때 주님께서 이 영혼에 생명을 다시 부여하심으로 말미암아 확 깨어나면서 영혼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 만져 지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이나 영광 같은 것이 자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영혼을 새로운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보이고 그리고 영혼의 큰 기쁨과 유익을 주는 취향들이 있어서, 그러한 것들을 알아 볼 수 있는 취향을 갖게 되어서 그래서 감격하고 아주 기뻐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너무 아름답고 그 아주 진귀한 세계를 보면서 그 안에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신의 작용들을 하나님이 한 번에 확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화) 정말 놀라운 게 말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까요. 정말 아이들이 회심하고 거듭나게 되잖아요.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 주면 이 아이들의 이 흡수력은 무한합니다.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배운 교육학이 통하지 않아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초등학교 4학년, 요즘 애들은 덩치도 크고 발육이 좋잖아요. 옛날에 조그만 아이들, 단 5분도 가만히 안 있으려고 하는 그 4학년, 5학년 이런 아이들, 걔네들을 앉혀놓고 4시간 성경공부를 연속해서 가르친다고 그렇다면 그 다음 주에 걔네들이 교회를 나오겠어요? 지긋지긋해서. 그것도 뭐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뭐 그 청년들 성경공부를 가지고 1,2,3,4권 차례대로 해 나가는데 나오겠어요? 그런데 안 그러더라고요. 제가 스물,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25살이었는데, 그 때였는데, 아이들이 정말 놀랍게 회심을 했습니다. 애들이 성경을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두 시 쯤 되면 이제 교회 일이 거의 다 끝나고 7시나 되어야지 저녁 예배를 드리니까 성가대 연습도 끝나고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나오라 그랬습니다. 나오라 그래서 앉혀놓고 선교단체에서 하는 교재를 가져다 놓고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번 모이면 3시간 반을 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너무 초롱초롱하고 너무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그 때는 뭐 애인도 없었을 때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애인이 없어도 참 좋아요. 사랑할 사람이 참 많습니다. 무슨 열심이야. 아침에 교회에서 애들 다 모이요. 해가지고 거기에서 성경 한 장 읽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걔네들 다 데리고 학교 앞에까지 가는 거야. 학교 앞에 집어넣고 나는 이제 전철타고 출근하는 거야. 퇴근하면 애들이 교회에 와서 기다려. 선생님 퇴근한다고, 그렇다면 만나서 또 기도하고 그 다음에 성경 읽고 하나씩 기도해 주고 그리고 들어가요. 사고, 내일 아침에 만나자. 사고. 사실은 연애할 시간도 없죠. 그렇게 해 가지고 살아가죠. 그러다가 우리 집사람을 만났더니 애들이 변심했다고 하더라고요. 보였나봐 그게. 참, 그러한 변화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러한 변화 뿐만 아니라 의지에 까지 영향을 미쳐서 정말 누가 교리를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야, 너는 소원이 뭐냐. 그렇다면 초등학교 애들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어디에서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때리고 소리 소리를 질러도 애들이 안 우는데 네가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니 그렇다면 애들이 눈물을 뚝뚝 흘려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은 뭐 차타고 가다가 대형사고 나가지고 뒤집히고 이래서 죽다가 살아나고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또렷하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워요.
(예화) 그래서 보면 제가 스물 그 때가 몇 살쯤 되었을까. 스물 한 살에 회심했으니까 스물 두 살, 스물 세 살 그 때쯤이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법에 한번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법에, 법학에. 그래서 이제 행정법, 그 다음에 민법, 그리고 상법은 잘 못 읽었는데, 그 다음에 헌법, 특히 행정법과 헌법이 저에게는 꼭 맞았어요. 얼마나 재미있었냐 말입니다. 그것을 쭉 읽는데, 그런데 그런 책들은 요즘은 안 그러는데 옛날에는 새카맣게 한자로 썼거든요. 저는 한자를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그렇게 좋아했거든요. 한자를 한자를 쓰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강의 시간에 한자를 쓰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어쨌든 그것을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그 때 나도 모르게 고백한 게 뭐냐 하면 야, 법은 참 예쁘구나. 참 예쁘구나. 그게 뭐가 예쁜 거냐 하면, 논리가 예쁜 것입니다. 논리가. 그것은 나의 일생에 살면서 나중에 설교자가 된 다음에 그런 경험들이 모두 나의 말씀 사역에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뭐 분명하게 얼마만큼 도움을 줬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을 많이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의 규칙들을 잘 만들잖아요. 뭐 하지 마라. 뭐 해라.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서. 그렇게 그러한 것들이 굉장히 좋아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속에 확 부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옳지 않은 것들과 옳은 것 사이를 구분하고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종합해 보여 주시고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해 보여 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논리의 진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 때에 참 그 논리가 아름답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 말을 했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교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그 한, 말씀의 주인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에 관해서 쭉 설명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정보들이 복잡한 것이 잘 정돈되어서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아주 예쁜 것입니다. 아주 너무 너무 너무 너무나 너무나 예쁜 것입니다. 너무나 예쁜 것입니다. 어디를 갔더니 이 벽을 거의 채울 정도의 엄청난 정교한 그림이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이것을 유화나 이런 것으로 한 줄로 알았어요. 가보니까 수십 가지의 곡식을 가지고 그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아,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게 정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보십시오. 아이돌 가수에게 어린 애들이 푹, 청소년들이 푹 빠지잖아요. 그렇다면 오빠 아무개에 대한 정보들이 수없이 많잖아요. 음식은 뭘 좋아하고 그 다음에 자기 가르쳐준 선생님은 누구이고, 그 다음에 좋아하는 친구는 누구이고, 그 다음에 연예계에 언제 데뷔했고, 막 이런 정보들이 어마어마한 양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걔네들은 그것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하고 볼 때마다 어머, 그 오빠가 동생이 둘이나 있어, 어머. 엄마도 둘이래, 어머.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정보들을 이렇게 막 그냥 어쩔 수 없이 눈에 스쳐 가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든. 그냥 영혼으로서 불쌍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흠모하거나 그렇지 않거든. 얘네들은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그런 정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사실은 어렵고 아주 정교한 하나님에 관한 묘사, 이런 것들이 지루하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예인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돌 가수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보가 너무 아름다워요.
어떤 때에는 성경이 너무 어려워서 해석을 할 수가 없어서 이해가 잘 안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마지막에 될 일들을 그 인봉한 두루마리 속에 담았다고 하고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누구도 이 인봉을 뗄 수 없다 그럴 때에 그렇게 계시를 알고 싶었던 요한이 그 백발의 노사도 요한이 통곡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영혼에 생명을 부어주실 때 그 때 우리의 지성 안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아주 건전하게 배워야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항상 그런 마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식어진 다음에는 콘크리트를 타설했을 때에는 쇠막대기 갔다가 꽂기만 하면 그냥 꽂혀요. 그러나 돌같이 굳어져 버린 다음에는 드릴로 뚫어도 뚫어지지 않아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렇게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찬란한 빛을 간직한 채 지혜 있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의지에도 영향을 주어서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날마다 버리면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따라갈 수 있는 그러한 선한 의지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면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용서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입은 상처와 고통은 생각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그러한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던 어찌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서 불쌍하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게 그런 선한 의지는 사실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생기고 접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바꿔 나가요. 영혼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이 그 마음 안에 바로 이게 인간의 마음이 영혼의 기능이고 그 기능 속에 지성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느끼는 것은 의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그게 우리의 마음에 감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우리가 새 사람이라는 증거가 마치 나무에 열매가 매달리듯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고 우리 안에서는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 때에 60먹은 아주머니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처녀 같은 그런 몸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신경통 걸려서 서금하던 할아버지가 은혜 받았다고 해서 무슨 뭐 청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은혜 받고 나니까 흰 머리도 없어지면서 검은 머리가 났다고 그러는데 그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은혜 받고 나서 콩을 많이 먹었든지 아니면 검은 깨를 많이 먹었든지. 그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죠.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자연적인 것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뻐집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되어요. 얼굴 안에 이백 몇 십 개가 되는 근육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특히 여성들이나 남성들도 마찬가지, 어떤 때에는 형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인상이 영 안 좋고 어떤 때는 인상이 편안하고 복스러워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서 근육이 다 긴장이 풀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그 호박이 수박이 될 수는 없지만, 물을 잘 주면 호박이 아주 윤기 흐르는 호박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햇빛을 잘 못 받으면 희멀건 그런 그 호박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오랫동안 가물면 쭈글쭈글 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 정도의 차이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잖아요. 정말 예뻐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래서 얼굴이 확 피면서 긴장이 사라지면서 평화를 누리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한 영혼의 생명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우리의 마음, 그 안에서 지성과 의지로 나타나요. 그렇다면 그것들이 은혜는 말입니다. 은혜 자체가 성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성향을 가지신 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음 이야기 한 게 아니라 이미 개혁파 정통 주의자들과 그 이전에 있었던 많은 신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은 성향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리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것도 모두 하나님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는 버리시지 않는 미쁘신 하나님이 되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성향으로서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확 우리의 변화된 영혼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이게 은혜로 작용을 하게 될 때, 이 은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한 성향을 갖도록 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칠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논리가 명쾌한 사람이 됩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리멍텅 하던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정말 그 이기적이던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진심으로 자신이 참된 행복을 고민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을 역사할 때, 그 사람은 그 신자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역사하는 사랑이라는 성향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새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죠. 그게 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직으로도 나타나죠.
(예화) 이번에 우리가 열린 공간하고 그 다음에 저기 어디야, 서점하고 묶어서 성도들이 무슨 생일 당하고 그렇다면 되지도 않는 선물 주고받고 그러는 것 보다 상품권을 발행을 해서 열린공간에 와서 커피도 마시고 그러다가 남는 것 있으면 서점에 가서 책도 사고 그러는 상품권을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그랍니다. 그래서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래서 상품권을 이제 샘플을 찍어가지고 왔어요. 찍어 주는 곳이 있어서. 그렇다면 이것 복사해서 칼라복사로 해서 막 쓰면 서점도 문 받아야 되니까 복사 안 되는 것으로 하자. 홀로그램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찍겠습니다, 그래서 아니다. 그것 아니다. 왜요? 내가 알기로는 세법상으로 이런 것을 발행하면 반드시 세금을 내게 되어 있다. 그 세금을 내야지만 이게 세법상으로 인정하는 정식적이고 합법적인 그런 상법상의 상품권이 되는 것이다. 우리끼리 쓰는데 그냥 찍어서 쓰죠. 내가 그랬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것 땅 살 때 3억씩은 정직하게 내고, 그것 표 딱지 하나에 얼마씩 하는 것은 안 붙이겠다고 거짓말을 치고 그렇다면 우리들의 희생이 너무 아깝지 않냐. 다시 알아봐라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 10만원 넘는 것은 하나에 600원짜리 인지를 붙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대까지 모두 내고 지금 이제 인쇄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여러분 앞으로는 그것을 선물을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친척들한테 선물할 때 상품권 여기 있다고 그리고 주는 것입니다. 무슨 상품권이냐 그렇다면 열린 교회 테이프 살 수 있고, 열린 공간에서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사과즙도 살 수 있는, 책도 살 수 있는, 액자도 살 수 있는 상품권이다. 부산이나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은 그렇겠지만,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는 너무 좋은 것입니다. 또 십 만원 짜리 사서 한 7만원어치 쓰면 현금도 거슬러 주거나 아니면 상품권으로 준다니까 그것으로 또 쓸 수 있고 너무 좋은 것입니다. 별로 좋아하는 표정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작은 일에도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뿐만 아닙니다. 예전에는 때려죽여도 자기 밖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면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구제도 하게 되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변화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이런 변화들, 이런 모든 것들이 생겨날 때에 그것이 뿌리를 어디에다가 내리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에 모두 뿌리가 모두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있게 됩니다. 왜, 은혜가 바로 사랑의 성향을 끊임없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에 만나면 표정과 이 마음과 모든 것에 사랑이 깊이 베인 성도들을 만날 때 있습니다. 학력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경력하고도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뭐냐. 신앙의 경력이 은혜 받은 연수가 아닙니다.
(예화) 여러분, 나 주위 아는 사람은 15년 째 무사고 운전인 사람이 있습니다. 장롱 면허. 허가 내준대서 보니까 15년 동안 한 번도 사고를 안 낸 거야. 운전을 해야지 사고를 내지 그 무슨 행정이 잘못된 것입니다. 15년 동안 운전을 잘 했으니까 면허증 올려 준다고 하는데, 운전을 안 했는데 그런 것을 하면 되겠어요?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안 해 본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면허를 딴지 15년 있어야 것하고 진짜 도로에서 운전을 잘 한다는 것과는 그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30년째 가지고 있어도 출발도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면허를 딴 것은 딴 것이지만, 얼마나 잘 하느냐는 얼마나 차를 몰고 다녔느냐 그것에 관련된 것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 신앙생활 경력이 30년이다. 30년이 전부다 은혜에 감화된 연수라면 그 사람이 10년 예수 믿은 사람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겠죠. 그런데 30년 예수 믿는 동안에 은혜의 물에 한 번도 풍성 빠져 담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장마철에 저리지 않은 배추처럼 어디가든지 기운이 퍼들퍼들 살아서 성질부리고 혈기 부리는 데 내다놓으면 항상 일등입니다. 회의 시간에도 이 사람이 일어나서 신경질을 팍 내고 짜증을 팍 부리고 거기에다가 큰 소리를 확 내면 사람들이 조용한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냥 참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해 수와 은혜 안에 잠긴 해 수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혜에 잠긴 그것만큼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성향이 형성이 됩니다. 형성이 됩니다. 그렇게 형성 될 때, 그것은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나무 자신이 힘이 강해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봄 되면 이제 나무에다가 링거를 놓잖아요. 영양 수액을. 그래서 일주일에 걸쳐서 천천히 들어가요. 그게 나무 자신을 튼튼하게 만들어서 아주 좋은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III. 영적 생명력이 순종에 달림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새 사람이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이것이 일회적인 것입니다? 아니면 끊임없이 반복적인 것입니다? 반복적인 것입니다. 일회적이지 않으면 반복이 성립할 수 없지만, 일회적으로 예수의 생명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생명이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런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게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생활을 우리가 뭐라고 불러요? 영적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생활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보이지 않도록 밑에 수면 아래 잠겨있는 부분입니다. 나무로 말하자며 뿌리이고, 사람으로 말하자면 영혼 깊은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생활입니다. 그 영적생활의 집적이 그 영적생활의 집적된 표현이 경건입니다. 경건. 그게 마음의 경건이고, 그게 삶 전체를 아우르며 하나의 체계를 갖게 만들어주는 삶의 전체적인 체계를 만들어 주는 그러한 총체적인 경건입니다. 그 속에서 영적인 생명이 영혼과 마음에 새 힘을, 은혜의 성향이 그의 성향을 바꾸고, 그래서 변화된 인격과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 새로운 방식의 생활,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분리되지 않고 일치를 이룬 우리의 존재와 인격을 보면서 그렇다면서 우리가 정말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합니다.
Ⅳ. 결론
새 사람이 새 삶을 삶으로써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에게 부어진 새 생명도 예수의 생명이고, 그렇게 부어진 생명으로 변화된 인격도 예수의 형상이고, 그 형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살아가셨을 그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이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니 우리의 영적생활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강하게 역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생활입니다. 그 은혜생활이 바로 은혜의 방편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삶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인과 방편에 교제를 갖고, 이렇게 살아가는 은혜의 방편에 끊임없이 믿음으로 참여하게 될 때,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충만히 주어서 그래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요,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예배 시간에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부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가까이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정말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