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1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목 차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2 (2012.10.16 2012가을말씀사경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3 (2012.10.17 가을사경회 저녁)
1.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날에(창28:10-15)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IV 4 (2012.10.18. 가을사경회 저녁집회)
2. 벼랑 끝에서 한 약속(창28:15-22) 2012.10.16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3
3. 고통 속에서 연단하실 때에(창31:41-49) 2012.10.17 가을말씀사경회(저녁) 23
4. 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창28:22-31) 2012.10.18 가을말씀사경회(저녁) 35
5. 회개한 그 강가에서 눈물로 화해함(창33:1-11) 2012.10.19 가을말씀사경회(저녁) 46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1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2 (2012.10.16 2012가을말씀사경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3 (2012.10.17 가을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IV 4 (2012.10.18. 가을사경회 저녁집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2012.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IV)
2012가을사경회 첫째 날 2012. 10. 15(월) 저녁집회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날에
I. 본문의 배경
-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은 야곱
- 아버지를 염소새끼의 가죽으로 속임(27:16)
- 자신이 염소의 피에 적신 옷에 속음(37:32)
- 일평생 사랑하던 부모와 고향을 떠남
II.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날에
- 하란으로 가는 멀고 험한 길
- 사랑하는 어머니 품을 떠남
- 간청; 안전, 기아와 헐벗음, 귀향
III. 인생의 벼랑 끝에 오신 하나님
A.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 ‘사닥다리’는 ‘סֻלָּם’(큰길)인 듯?
- 신적 명령을 출납하며 성취하는 천사들
B. 자기를 알리시는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언약
- 약속한 땅을 주실 것을 보이심
- 야곱과 자손에게 번성과 복을 주심
- 야곱의 믿음이 아닌 신실하심을 따르심
C.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심
- 보호, 인도, 귀향에 함께 하심
- 약속을 다 이루시기까지 떠나지 않으심
-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IV. 적용과 결론
- 기도와 행위가 아닌 약속을 따라 오심
- 가난한 마음이 될 때까지 기다리심
- 당신의 신실을 하심을 따라 찾아오심
- 우리를 순종하게 하셔서 무엇을 얻으실까?
-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부르심
-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2012가을사경회 둘째 날 2012. 10. 16(화) 저녁집회
인생의 벼랑 끝을 성전 삼으심
I. 본문해설
II. 버림받은 것 같은 때에 찾아오심
A. 야곱을 만나 주신 하나님
- 버림받은 것 같은 날에 오심
- 의지할 분이 누구인지를 보이심
- 낙심하던 곳에서 예배하게 하심
- 인생의 벼랑 끝을 성전 삼으신 하나님
- 하늘을 향하여 열린 문을 두심
B. 하나님의 만남을 기념한 야곱
-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름
- 루스땅을 벧엘이라고 부름
- 벧엘에 새겨진 신앙의 기억들
C.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서원
1. 세 가지 기도를 드림
- 여행길에서 지켜주심
- 양식과 의복을 공급해 주심
-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심
2. 세 가지를 약속함
-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심
-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임
-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임
III. 적용과 결론
- 절망하는 곳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 버림받은 곳으로 성전을 삼으시는 하나님
- 당신의 벧엘은 어떠한 상태인가?
-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을 잊었는가?
2012가을사경회 셋째 날 2012. 10. 17(수) 저녁집회
고통 속에서 연단하실 때에
I. 본문의 배경
- 라반에게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는 야곱
- 자기의 집을 세우고자 야곱에게 제안함
II. 고통 속에서 연단하실 때에
- 라반의 사악한 꾀로써 보응을 받음
A. 아비와 형을 속이더니
- 밧단아람에서 만난 외삼촌 라반
- “7년을 수일 같이 여기더라”(29:20)
- 맘에 없는 레아를 위해 바친 7년의 세월
B.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하더니
- 레아(르우벤,시므온,레위,유다,잇사갈,스불론)
- 라헬의 빌하(단,납달리)
- 라헬(요셉,베냐민35:18)
C. 수고 없이 유업을 구하더니
- 더위와 추위, 졸음, 가혹한 조건
- 6년 동안 열 번도 더 바뀐 품삯의 약속
III.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 야곱의 새로운 노동 계약(30장)
-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양과 염소
- 그것들을 모두 가려서 자기 아들들에게 줌
-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껍질을 벗겨 사용함
IV. 연단 속에서 거룩하게 하심
1.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함(42)
-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2.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기억함(42)
- “나의 고난과 수고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3.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함
- “외삼촌을 책망하신 하나님”
V. 대적자의 마음을 돌이키신 하나님
- 딸들과 그의 자녀들에게 혈육의 정을 갖게 하심
- 야곱에 대한 정의 표현은 없음(복수심을 막으심)
-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관념을 갖게 하심
- 함께 식사를 나눔(형제 됨의 맹약)
VI. 적용과 결론
- 고통으로 얼룩진 날들에 원망하지 말라
- 자신이 뿌린 열매를 거두는 것을 생각하라
- 고통 받는 날에 믿음으로 연단을 받으라
- 선하신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2012가을사경회 넷째 날 2012. 10. 18(목) 저녁집회
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
I. 본문의 배경
- 세일 땅 에돔 들판으로 사자들을 보냄
-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
- 사람들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눔
-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함(9)
- 은총과 신실하심을 감당할 수 없음(10)
- 두 아내와 여종들과 열한 아들을 보냄
II.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날 밤에
A.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던 밤
-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함
- 보호하고 인도하러 온 천사와 씨름함?
- 날이 새도록 씨름한 것은 믿음이 아님
- 자기 힘으로 살아보던 고집의 발휘임
B. 징계로써 환도를 쳐서 다치게 함
1. 환도를 쳐서 징계하심
- 야곱이 울며 하나님의 축복을 구함(26)
- 자신의 힘으로 천사를 이기지 못하게 하심
- 이것은 꾀나 고집이 아니라 회개의 탄원임
2. 이스라엘: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
-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 자기고집이 아니라 회개로써 인정을 받음
- 회개하는 자에게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변함이 아니라 성품을 경험하게 하심
3.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념함: “브니엘”
III. 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
- 형에게 은총을 입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임
- 그러나 형에게 희망을 걸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함
- 오직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함
-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를 막을 길이 없음
IV. 적용과 결론
-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라
- 인생의 벼랑 끝에서 회개로 승리하라
-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심
2012가을사경회 다섯째 날 2012. 10. 19(금) 저녁집회
회개한 그 강가에서 눈물로 화해함
I. 본문의 배경
- 아내들, 자녀들과 함께 강을 건넘
- 홀로 남아 천사와 씨름하며 다툼
- 징계를 받고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함
II. 얍복강가에서 흘린 눈물
A.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 야곱에게 복수하고자 오는 에서(400인을 거느림)
- 형 앞에 나아가서 일곱 번 절함으로 사죄를 표함
- 절한 후에 형에게 가까이 나아감
(절름발이 걸음으로)
- 에서가 달려와 목을 안고 먼저 울고 피차 울다
B. 회개한 그 강가에서 화해 함
- 우리의 맺힌 것을 풀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축복을 사람들 속에서 실현하심
-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
(창12:3-‘네 안에서’)
- 가족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함: 평화가 지속됨
C. 하나님의 축복을 관계에서 확인함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33:10)
- 야곱의 축복은 단지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닌 영적인 것
- 이삭 축복의 핵심: 하나님이 기업임+경륜의 주인공 됨
“저주하는 자 저주받고, 축복하는 자가 복 받음”(27:29)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자녀들을 축복의 통로 삼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신령한 복
-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음 + 이웃을 위한 복의 경륜의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음
- 진리와 은혜는 이 일을 위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 임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1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2 (2012.10.16 2012가을말씀사경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3 (2012.10.17 가을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IV 4 (2012.10.18. 가을사경회 저녁집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Ⅳ (2012.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홀로 버려진 것 같은 날에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0-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이번 사경회에는 구약의 족장 중 한 사람인 야곱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일생 중 일어난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구약의 인물 중 야곱만큼 재미있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보다 먼저 나오겠다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사람이었고, 태어난 후에는 형 에서가 아버지께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축복을 속임수로 빼앗았던 사람입니다. 형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까지 속여서 그래서 형에게 돌아갈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이 일에 어머니 리브가가 한몫 도왔고, 이 가정은 처음부터 편애로 얼룩진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들판을 휘돌아다니며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아오는 에서를 특별히 편애한 것 같고, 어머니 리브가는 늘 장막을 떠나지 않고 엄마 옆에 머물며 여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 야곱을 특별히 예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도 이 이삭을 통해서 주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큰 아들 에서가 아니라 작은 아들 야곱이 이 축복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래서 나이가 많아 앞을 잘 보지 못하게 된 이삭을 함께 속여서 이 작은 아들을 축복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태에 이 두 아이가 있을 때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고, 그를 복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아마 리브가가 이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속이고, 또 야곱이 이렇게 간사한 방법으로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당신이 약속하신 그 뜻을 반드시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적으로 아버지를 혹은 남편을 속여 축복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이 축복을 빼앗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속여야 했는데 어느 날 리브가가 들었더니 이삭이 에서를 부르며 이르기를 “야, 이젠 내가 아무래도 너를 마지막으로 축복해야겠다. 그러니까 너는 가서 사냥을 해서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그러면 먹고 내가 너를 한없이 축복해서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나에게 주신 이 복을 너도 상속받게 하마” 이런 뜻으로 아들에게 사냥을 해 오라고 그렇게 권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리브가가 야곱에게 달려가서 “이제 아버지의 축복을 네 형에게 물려주려고 하니 얼른 가서 양 두 마리를 잡아 오너라.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줄 터이니 너는 그거를 가지고 가서 에서라고 속이고 축복을 받거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눈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이었습니다. 털이 많다는 건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 거고, 털이 없다는 것은 여성 호르몬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이렇게 아기자기한 결혼을 하고 싶으면 털 없는 남자를 고르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염소새끼 가죽을 갖다가 팔에다 끼우고 목에다가도 매달아서 아버지가 이렇게 만져보면 털이 느껴져서 에서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속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일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27장에서 이렇게 아버지를 염소새끼 가죽으로 속였는데 37장에서 이번에는 자기가 염소 때문에 속아요. 눈에 넣어도 안 아팠던 아들 요셉이 있었는데 요셉을 애굽의 상인에게 팔아버리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이 요셉의 옷에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져와서 “아무래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이 짐승에게 찢어 먹힌 것 같습니다”라고 속였을 때 거기에 형들이 바른 피가 염소의 피 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슴 아픈걸 그대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제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형 에서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고, 아버지가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됐으니까 들여오는 이야기가 아버지가 죽기만 하면 이 동생을 죽여서 이 원한을 풀리라 이런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때 아마도 리브가가 남편에게 잘 이야기를 해서 이 아이들 중의 야곱을 멀리 보냅시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일평생 사랑하던 아이를 멀리 떠나보냅니다. 브엘세바에서 밧단 아람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그 길이 얼마나 머냐 하면 브엘세바에서 애굽의 나일 강까지 가서 그 건너편에 있는 땅하고 거리가 비슷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먼 거리이고요, 아마 장정의 걸음으로 걸어도 한 달 반이나 두 달은 가야될 그런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II.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날에
이 성경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 야곱이 마주치게 된 일생일대의 가장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일평생을 어머니 옆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그 치마폭에서 자랐고, 그리고 험한 남성다운 일을 좋아하기보다는 집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돕고 하는 일들을 훨씬 즐겼던 것 같습니다. 이랬던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던 어머니 곁을 떠나서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서 가보지도 못한 그 먼 밧단아람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를 향하여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누가 동행했다는 기사가 안 나옵니다. 혼자 갔을 수도 있고, 누가 동행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외로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이 야곱은 마치 홀로 자신이 버려진 것 같은 날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여행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 한 2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을 가는데 성지 순례 간다고 그러면 나는 남사스러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마라. 성지 여행이다.” 아니 비행기 타고 편하게 가서 덜컥 내려서 관광버스 타고 가가지고 사진 찍고 오는데 그게 무슨 순례예요. 원래 이 순례는 고행의 의미가 묻어있기 때문에 강도의 위협을 무릅쓰고, 때로는 배고프고, 춥고 길을 잃고 하는 그렇게 목숨을 건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자면 성지에 가서 주님을 뵙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순례였고, 가톨릭에서는 옛날에 그것이 속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걸고 가야했던 길이니까.
그 당시에 하란으로 가는 길은 아마 그런 거보다도 훨씬 더 멀고 험한 길이었을 것이고, 도중에 굶어죽는다든지, 물이 없어서 죽는다든지 아니면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다든지 하는 가능성들이 얼마든지 있는 그런 위험한 때에 가보지도 못한 타관 땅을 걸어 이렇게 하란까지 가야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편애하는 품속에서 자랐던 이 야곱으로는 그 길이 정말 무섭고 두려운 길이었을 것이고, 야곱을 특별히 총애하던 이 어머니도 아마 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놓고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야곱이 얼마나 이 여행길을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었는지를 뭘 보면 알 수 있느냐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거는 엄청난 은혜의 경험이고, 사실은 조상 적부터 말로만 들었지 자신은 거의 경험해 본적이 없는 신비한 신앙의 체험이었는데 우리 같았으면 아마 그 영광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주여 우리가, 내가 어찌하오리까.”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라고 말했냐 하면 “나를 아버지의 집으로 안전히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이 여행길에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이 세 가지를 그 하나님의 위대한 만남의 신비로운 순간에 이야기할 정도였으니까 한편으로는 이 사람의 신앙이 아주 어리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평생 사랑하는 엄마 품에서 있던 이 야곱이 이 떠나는 여행길에서 얼마나 두려워하고 무엇을 염려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사히 안전하게 밧단아람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가는 길에 내가 굶어죽지는 않을까? 헐벗지는 않을까? 과연 나는 이 먼 깃을 떠나는데 다시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짓누르면서 큰 불안 속에서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III. 인생의 벼랑 끝에 오신 하나님
A.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만날만한 마음이 되었을 때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비록 지금 원수에 의해서 에워 쌓이거나 이 야곱이 전쟁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까지 살아온 야곱의 경험으로 볼 때에는 생애 최초로 만난 인생의 벼랑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생의 벼랑 끝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매달렸다든지 혹은 열렬하게 기도를 했다든지, 뭐 하나님께 어떤 감동을 시켰다든지 하는 이야기 아무것도 안 나오고 그냥 근심과 염려 속에서 갈 길을 가다가 두려움 속에서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 되겠다고 아마도 들판에서 그렇게 돌베개를 취하여 잠을 자려고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꿈에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위에서 타고 내려오고 내려온 천사들이 올라가고 하는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닥다리라고 되어 있는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술람”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하도 궁금해서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논문을 읽으면서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다른 사람보다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 단어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딱 한번 밖에 안 나와요. 그러니까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를 사실은 잘 몰라요. 왜 여러 개 나와야지만 좀 비교를 해보면서 이게 무엇이 라고 규정을 하겠는데 잘 몰라요. 그리고 이 성경이 쓰일 때에 히브리어 문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학자들이 이 술람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설득력 있는 논문 한 권을 읽었는데 그 논문은 본문은 한 50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각주가 100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이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아주 복잡한 논증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당시에 이 히브리어 말고 주변에서 사용되던 언어들을 비교 어원학적으로 연구해서 단어를 모두 찾아서 연구를 한 결과 중간은 다 생략하고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사닥다리는 절대 아니다. 결론을 내리면. 좀 이상하잖아요. 천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좀 아닌 것 같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Highway, 고속도로예요. 하늘을 향해서 난 커다란 길, 왕 같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옛날에 왕의 대로라고 하는데 그런 왕이 행차하고 지나가는 대로가 땅에서 하늘까지 뻗어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길을 타고 이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길은 천사들 오르내리라고 만들어 놓은 도로가 아니라 사실은 왕이신 하나님이 하강하시고 그리고 상승하시는 그런 용도로 만든 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왕명을 출납하듯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들을 이 지상에 전달하고 그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출납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어요. 어쨌든 그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재밌잖아요. 사닥다리가 아니라 이상하잖아요. 사닥다리를 천사가 날개도 있는데 왜 그러고 갈까? 떨어지면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어쨌든 사닥다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하늘가는 길이 쫙 대로처럼 펼쳐져 있고 거기를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무얼 보여 주냐 하면 야곱이 신앙이 아직까지는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이 신앙은 단순한 신앙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붙잡아야지 복을 받는다는 정도의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도 사려고 했고, 아버지까지도 속여서 그걸 받으려고 했으니까 진짜 신앙이 깊은 사람이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하늘까지 닿은 이 길이 Highway가 난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뭐냐 하면 이 야곱이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이제 하나님이 야곱의 신앙을 연단하시면서 단련하여 마지막에는 위대한 족장들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도달했던 그 높은, 그보다도 훨씬 더 높은 신앙에까지 도달하게끔 만드시는데 그게 일평생 걸려서 연단을 받으며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솔직히 얘기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읽을 때에는 그렇게 큰 감동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브라함 가지고 작년에 사경회 했던 것 기억하세요? 그런데 하는데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 두 분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성품 자체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하고 별로 닮은 데가 없어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정말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하고 그리고 정말 온유하여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야곱을 보면 아주 친근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중에 아브라함처럼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미끄러졌을 때에는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이 미끄러졌을 때에는. 그런데 이제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본받은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야곱입니다. 이 야곱은 정말 뭐라고 그럴까? 그 신앙생활을 뺀질거리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깨어지기 싫어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깨뜨려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를 보여줘요. 그래서 오늘 집에 가서 잘 생각해보면 성경 전체에서 여러분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로 이 야곱에게 생전 본 적이 없던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늘 가는 그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야곱이 비록 열렬히 하나님 만나려고 기도하지 않았고, 신앙의 부흥을 위해서 간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아주 성결하고 훌륭한 그 사랑의 삶을 산 사람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사람을 향하여 하늘 가는 길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를 향하여 하나님과 이 야곱 사이에 직통 도로가 뚫린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이 야곱이 언약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신앙이 아직 없던 이 야곱의 어린이 같은 신앙의 마음에다가 하나님이 인 쳐주시는 것입니다.
B. 자기를 알리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두 번째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자기를 알리셨어요. 뭐라고 그러시냐 하면 “나는 여호와니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그러며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내가 서쪽, 동쪽, 북쪽, 남쪽으로 퍼져 갈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뭐 우리들의 공식에서는 대게 이 정도의 축복이 주어지려면 야곱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특별한 철야 기도를 했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울며 매달렸다든지 뭐 그래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냥 당신 자신이 스스로 이 야곱에게 베풀 많은 복들을 약속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보면 두 가지 약속의 전통이 흘러요. 이게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논증거리가 되는데 하나의 약속의 전통이 뭐냐 하면 율법이 들어오면서 이렇게, 이렇게 너희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들이니 나 하나님은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나를 섬기고, 이렇게, 이렇게 살기를 원한다. 만약에 너희들이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면 복을 너희에게 많이 줄 것이고, 불순종하고 너희들이 악하게 살면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징벌하리라 그러면서 축복과 심판하는 칼이 약속을 중심으로 함께 들어옵니다. 이게 인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애굽의 그 큰 기적을 다 보고 그리고 광야의 여행을 들어가기 직전 시내 산에서 모여서 한 동안 머물면서 애굽의 습속들을 떨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빽빽한 구름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며 율법을 받게 됩니다. 이때에 이런 전통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전통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런 조건이 없이 그냥 하나님이 불쑥 나타나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란다. 그리고 내가 너를 택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런데 복을 주겠다는 약속만 하시지 말 안 들으면 혼낸다든지 아니면 불순종하면 이 약속을 취소한다든지 이런 말씀은 안 들어와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던 사람들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택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복 주겠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중동에 있는 그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다신교였으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해도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이 안 생기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 아브라함에게 믿어지게 만드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짐승을 벌려 각을 떠서 벌려놓고 그리고 불로서 그 가운데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거는 사실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적인 사실은 해석을 가져올 수 있는 사건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에 고대 근동에서는 언약을 맺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언약을 함께 맺는데 대게 이 언약이 왕이 땅을 넓게 차지한 다음에 그 땅을 자기의 신임하는 신하에게 나누어 주면서, 떼어주면서 영주로 임명을 합니다. “여기에서 네가 나라를 다스려라 그래서 세금도 거두고 재판도 하고 왕처럼 네가 행세하라. 그 대신 너는 나에게 세금을 내야 되고. 전쟁이 일어나면 너는 군대를 동원해야 되고, 너는 나만 존경하고, 나한테만 복종하고, 그리고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나에게 순종해야 된다.” 이렇게 약속을 맺습니다. 그러면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어느 날 큰 땅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 찾아와서 이만큼 땅을 띠어주면서 “네가 이 성의 영주를 하거라.” 했을 때에는 이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한 다음에 그 맺은바 약속을 가지고 자기들이 신들이 보는 앞에서 소 같은 거를 각을 떠서 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가 어마어마하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사이를 약속을 맺은 당사자가 피를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천지신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이런 약속을 우리의 신 앞에 했는데 두 사람 중 누가 만약에 이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우리가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표시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노니 우리 중 약속을 어긴 사람을 향하여 신은 그런 저주를 내리시옵소서. 그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는 아주 심각한 언약체결 의식이었습니다. 이 흔적이 히브리어에도 남아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언약을 맺다’라는 말을 ‘언약을 자른다’라고 씁니다. ‘카라트베리트’라고. 그런데서 남은 전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레와 같이 많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이것을 확실하게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불로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여호와가 너에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저주할 수 있는 그 주체가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말을 잘 믿지 못하는 이 아브라함에게 확고하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은 아무것도 없고 그리고 모든 혜택을 받는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것은 조건은 아니에요.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복을 받게 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돈을 이렇게 줬는데 손을 내밀었다면 손 내민 공로 때문에 돈을 받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라. 그런데 이것도 안 떠나면 죽인다든지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복을 주려고 하는데 떠나서 내가 지정하는 장소로 가서 너는 이 복을 누려라”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전통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와 이스라엘이 성숙했을 때를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총을 주시는 것은 그 이후에는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총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놓고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이런 시대에는 아직 이스라엘이 유아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없이 은혜를 베풀고 그리고 그에게 어려운 조건보다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축복을 약속해 주심으로써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그 분과 함께 관계를 가지며 살고 싶다고 하는 소원을 갖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애굽에서 일찍이 조상들도 미처 보지 못했던 큰 광경을 보게 되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열 번의 대재앙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우주적인 재앙입니다. 전국적인 재앙입니다. 그러니까 나일 강을 비롯해서 모든 물이 피로 변한다든지 개구리가 올라온다든지 아니면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번개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상천하지에 가장 뛰어나고 높은 바로까지 벌벌 떨게 만들고 애굽 천하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죽이시는 그 재앙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충분히 목격한 후에도 모자라서 클라이막스가 홍해를 건널 때에 그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결국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출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내 산으로 들어가서 상당히 여러 달 동안 머무르면서 애굽의 습속을 떨어버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아기가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가진 하나의 주체로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면서 이 율법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고 하는 엄중한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오늘 이 야곱은 어린애 같은 신앙의 시기에서 주님이 다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면 일생 살면서 하나님이 기도를 경험적으로 잘 들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언제냐 하면 처음 예수 믿을 때, 저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처음 예수 믿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웬만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실은 우리 아이들도 보면 아주 어렸을 때 겨우 말 배웠을 때, 엄마 돈 그럴 때 얼마나 귀여워요. 그때만큼 잘 주는 어른들이 없지요. 그 돈이 뭔지도 모르고 가지고 막 놀고 그러면서 그렇게 돈을 주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처음 신앙을 가지고 입을 떼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경험적으로 아주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래 믿은 사람들은 절대 기도를 안 들어준다고 그렇게 낙심할 필요는 없고 조건이 많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참 그렇잖아요. 처음 예수 믿었을 때 회심하고 나면 어쩜 그렇게 기도도 잘 되요. 그죠? 그런데 한참 예수 믿고 은혜도 많이 받고 산전수전 겪고 보면 항상 기도만 하려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양심에 물으시죠. “나한테 뭘 달라고 기도할 만큼 그렇게 잘 살았냐?” 그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안 돼요. 가만히 돌아보면 살기를 기도에 어울리는 삶을 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해도 양심 속에는 “네 좋으려고 기도하는 거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냐.” 이런 항의가 우리 양심 속에서 빗발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하나님이 유아기와 같은 야곱의 신앙에서 찾아오셔서 자기를 알리셔요. 그러면서 “나는 네 하나님이다.” 그러면 야곱이 “웬 하나님, 웬 내 하나님” 할 테니까 이제 “나는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 분들과 함께 하셔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행한 것, 너희 아버지 이삭에게 행한 것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라. 너도 그 언약 안에 있단다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주실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리하던 백성들이었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영원히 기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땅이 아닙니다. 왜?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니까 타향살이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땅은 거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한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커다란 희망사항이었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는 땅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과 자손에게 번성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많은 자손을 주셔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펼쳐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결국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한 성품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무엇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가 어떤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의무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결단하고 항상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은 훌륭한 신앙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에 깊이 동의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마지막에 나를 구별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몸부림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라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에 영원 전부터 나를 선택하신 그 영원한 작정을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그때에 가장 내 가까이 계셔서 그래서 나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돌아가지 않겠으니까 주님이 시련이나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때리셔서라도 나를 깨우쳐 나를 의지하며 사는 인생이 잘못 되었고, 이건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게 하시기까지 나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게 보면 우리들이 끊임없이 몸부림쳤지만 사실은 그것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극을 주셔서 그렇게 살게끔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고, 결국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그리고 구원하시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마지막에 우리를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이 우리의 모든 인생길에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됩니다.
리들이 이렇게 보면 우리의 기도나 순종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기도를 하나님은 아무 의식도 없고 생각도 없으신데 열렬히 기도해서 잠자시는 분 깨워가지고 하도 귀에다가 대고 떠들고 도와 달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시고 우리를 도왔지,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기도는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지지 않았을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서 말씀의 조명을 받음으로 발견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뜻을 기도 속에서 나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이미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뜻에 나를 합치시켜서 그 뜻이 이루어지게, 다시 말해서 내 뜻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 작정하신 그 하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 간절히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욕심에 의해 가려진 하나님의 뜻, 사람의 욕망대로 살았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면서 그 분의 신실하심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도의 방편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이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 아비의 집까지 평안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야곱이 간청하지 않을 때에도 먼저 약속하셨고, 이것도 믿지 못하겠으니까 “내가 너에게 한 약속이 다 성취될 때까지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입니다. 이거는 이 야곱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할 때에 “너로 말미암아”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베카”인데 직역을 하면 “in you”입니다.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던 많은 족속들과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고 그래서 아브라함과 무엇인가 연합을 이루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서 복을 받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어떤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이 약속이 아브라함에게서만 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려오고 요셉에게도 내려갑니다.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는데 보디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셉은 그 집에 노예로 팔려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노예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보디발은 어마어마한 위엄 있는 가문이고, 큰 권력을 가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실력자였고, 이 요셉은 그 집에 팔려가서 그래서 빗자루 질이나 하고 장작이나 패는 보잘 것 없는 그런 천하디 천한 노예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 노예를 애굽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축으로 사용하셨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애굽의 바로도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너보다 더 높은 것은 이 왕관 밖에 없다, 왕위밖에 없다.” 그러면서 왕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전권을 이 요셉에게 주며 모든 신료와 백성들로 하여금 이 요셉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이렇게 결국은 하나님이 그 사람 요셉을 중심축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니까 그와 관계를 올바르게 맺는 모든 사람들의 집안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사명은 뭐냐 하면 모든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을 받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이 무엇인가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유무형의 많은 것들을 생각해서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복을 얻고 이익을 누리도록 하면서 자기는 자신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행복하게 되는 그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충실하게 살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안심하고 맡기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복을 흘러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적인 계획이다 이런 뜻입니다.
C.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심
그러면 이 야곱이 언제 이렇게 하늘까지 닿은 큰 길 그 위에서 내려오실 듯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리고 이제껏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그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알리신 이 놀라운 일들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두려움과 그리고 공포 속에서 언제 무슨 일을 만날지를 모르는 말할 수 없는 떨림과 두려움 속에서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이 여행길을 지나면서 지극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외로움에 처했을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모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임마누엘로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복을 많이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언제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본문을 눈 씻고 아무리 살펴봐도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는 이야기도 안 나와요. 기도나 인간의 선한 행위나 의로운 행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 가정에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따라서 약속의 당사자들이 그것을 기억하든지 기억하지 못하든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당신 자신의 약속을 따라서 당신의 신실함으로 이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기였을까요? 엄마 품에서 귀여움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리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에 찾아오셨더라면 그래서 이 아름다운 약속들을 모두 주셔서 믿음을 갖게 만드셨더라면 돌베개 베고 자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과 헐벗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움 때문에 떨고 두려워하는 밤은 지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왜 하나님은 새털같이 그 많은 날 가운데 하필이면 이 밤에 야곱 홀로 있는 이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그 날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그리고 어느 때든지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주님을 불러서 만났고,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정말 평안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의 환경과 형편 이런 것에 메이지 않고 언제나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거기 계셔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때에나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가난한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한번 이 얼마나 절묘한 시간에 하나님이 이 야곱을 찾아오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사랑하던 엄마의 품을 떠났고, 아버지 그리고 자기를 원수처럼 여기긴 하지만 정들었던 형도 떠나서 이제는 혈혈단신으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여행길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고 시간은 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야곱이 비록 신앙은 없었지만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싶은, 다시 말해서 이제껏 자기의 꾀를 믿고 일생을 살아와서 그래서 아버지도 갖고 놀고, 형도 갖고 놀면서 그러면서 자기 원하는 것은 그 집안에서 엄마를 움직여서 거의 모든 것을 다한 그러한 어떤 면에서 자기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자기의 잔꾀로도, 자기를 도울 어머니의 도움도 보호해줄 아버지도 자기와 함께 해 줄 형도 없는 완전히 버려진 것 같은 그런 외로운 날에 여기에 홀로 있게 된 바로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절묘하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백 번을 예배를 드리면 뭐합니까? 하나님 못 만나는데. 천 번을 기도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데.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고 종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런 저런 의무를 행하는데 주님을 못 만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마음에 가난함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같이 느껴져도 남이 벼랑 끝이라고 할 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가 벼랑 끝이라고 그래야지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왜? 남들 보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고 이제는 인생의 낭떠러지 밖에 안 보여, 그런데 여전히 마음이 부요해지고 심지어는 부요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토라진 마음을 갖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하는 그 마음은 아직 멀었습니다. 훨씬 더 많이 고생을 한 후에 그 후에 “아, 여기가 벼랑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나 당신의 그 약속을 따라서 행하실 때에 우리가 그 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될 때까지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한 번의 예배는 그런 갈망이 없이 수천 번을 드리는 예배보다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높구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가지고 올리는 더듬는 한 두 마디의 기도는 그런 사모하는 마음 없이 유창하게 쏟아내는 수천마디의 기도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는 가난한 마음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아주 넉넉하고 행복하셔서 주님의 도움은 원하지도 않고 누구 말대로 훼방만 안 놓으시면 충분합니다 라는 마음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간절히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 순종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서 주님이 무엇을 얻으실 수 있기에 그렇게 간절히 당신께 순종하며 살기를 바라실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커다란 시련이나 위기, 혹은 손해가 온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그 안에서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께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을 지키며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범죄 하지 않고 신실한 삶을 살고, 더 넓게는 이런 은혜를 주신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따라서 각자 우리에게 맡겨진 그 자리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우리 주님을 어디서든지 섬기면서 사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복 받는 삶을 살 때에 여러분과 관계를 맺는 많은 사람들이 그 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은혜에 붙잡혀 하나님 사랑에 눈물을 흘린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서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을 위하여 헌신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 가족이 어려움에 빠졌더라면 여러분은 자기를 희생해서 그 가족들을 도우려고 할 것이며, 그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 섬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안에서 여러분이 가장 커다란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은 마치 여러분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 당신에게 무슨 손해가 나는 것처럼 순종하라고, 돌아오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디를 지나가고 계십니까? 걱정할 것 없고, 염려할 것 없이 엄마 치마폭에서 세월을 보내던 야곱과 같이 평화로운 때를 지나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부를 마음이 아직 없으십니까?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여러분 자신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헐벗은 것과 그리고 가난한 것과 그리고 영적인 무지도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마음을 열고 우리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사실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 야곱은 자기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그 날에 뜻밖에 찾아오신 인생의 벼랑 끝에 오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예전의 야곱이 아닌 완전히 다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한방에 끝내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죄짓고 불순종하며 살았는데 오늘 한방에 기도해서 폭풍 같은 은혜를 받고 성자가 될 그런 꿈꾸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매 순간 그 분의 손에 이끌려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시면서 신실한 사랑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내가 오늘도 주님을 만나고 매순간 신실하게 살아서 하나님 의지하며 믿음생활하며 하늘나라 가기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내가 무엇을 하며 살든지 간에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도록 살아서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고 주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면 “나는 정말 행복 하겠습니다”라는 그런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이 신앙의 세계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야곱을 처음 만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찾아오셔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실만한 무슨 행동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나는 신실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믿었어도 수시로 주님을 버리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주님을 떠났지만 우리 주님은 내가 당신께 대한 것같이 나에게 대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성품으로 나를 붙드셔서 언제나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장 곤고한 그날이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날이고 하나님을 찾을 힘조차 없는 그 날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이 사경회 주간에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인생의 벼랑 끝에서 한 약속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하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15-22)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리시고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이제 그렇게 꿈을 꾸고 난 이 야곱이 잠에서 깨어난 후에 각성하게 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야곱에게 있어서 정들었던 고향집,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 먼 길을 떠나는 그 고달픈 여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Ⅱ. 버림받은 것 같은 때에 찾아오심
A. 야곱을 만나 주신 하나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이 여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홀로 이 먼 길을 떠나는 이 야곱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가난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는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버림받은 것 같은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조상으로부터만 들었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비록 꿈이지만 확실하게 경험하고 자기가 진정으로 의지해야할 분이 누구인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낙심하던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드셨고 그래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이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제껏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인생의 앞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큰 길을 열어두셨고 이 하찮은 지렁이 같은 야곱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천사들을 내려 보내셔서 당신의 왕명을 출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언제나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만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당신을 향한 갈망을 주셔서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의지할 분을 찾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으로 타이르십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 느낌 없이 드리는 예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허투루 듣고 흘려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는 화살같이 꽂혀 회개하게 하고 변화시키고 때로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누리며 새 인생을 살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8년 전인데 연세대학교에서 예수 믿는 학생들이 모였으니까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 왔습니다. 부탁하는 자매가 같은 교회에 다니던 대학부의 자매였는데 가겠노라고 하고 기도를 하는데 이상하게 그날 거기에 가서 꼭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그렇게 똑똑한 학생들이 모인 곳에 가서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누가 들을까? 그것도 공대건물에서 한다는데……. 그래도 기도를 해보니까 꼭 그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예수를 잘 믿는 학생들이 모이는 모임인줄 알았는데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예수 믿은 동아리의 학생들이 안 믿는 친구를 데려오는 친구초청의 날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상세하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보니까 하나씩 둘씩 데리고 모였는데 한 50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듣는 많은 학생들의 얼굴이 꼭 똥 씹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학생이 자꾸 가려고하니까 데리고 온 학생이 가지 말라고 자꾸 붙들고 얘는 뿌리치는데 예수를 안 믿는 학생이니까 예배시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서 그냥 걸어가는데 문이 하필이면 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정면으로 걸어와서 이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50분 넘게 설교를 했고 기도를 하고 내려왔는데 그야말로 죽을 쑤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이런 설교를 했을 때 수천 명의 사람이 회개를 하고 부흥이 왔다는데 왜 나는 설교를 했는데 이렇게 죽을 쑵니까?’ 그리고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그 자매가 열심히 따라오더니 그때는 목사 안수 받기 전이었고 교수생활을 하던 때니까 ‘전도사님 너무 감사해요.’ 그러더니 편지하고 선물을 줍니다. 그것을 받을 만큼 설교를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거절하다가 그냥 받아서 왔는데 차를 몰고 오면서 그렇게 마음이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주일날 교회에 갔는데 그 자매가 저기서부터 뛰어오면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부릅니다. ‘설교도 죽을 쑤었는데 저렇게 열심히 나를 부르나!’ 생각했는데 손을 모으고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사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났느냐고 그랬더니 그날 전도사님이 오셔서 설교하고 가셔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은혜를 못 받고 갔는데 그날 친구의 손에 이끌려온 두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기억이 납니다. 정 가운데 앉아서 똑바로 설교를 들어서 신앙심이 아주 돈독한 학생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친구에게 이끌려서 기독교 예배에 나온 두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그 다음날 자기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내가 예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와달라고 그러더랍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20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는데 그날 다 풀렸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리고는 그 주간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나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깊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 설교의 은혜를 끼쳤는지 못 끼쳤는지는 설교자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거구나!’ 나는 완전히 실패한 설교라고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두 사람의 청년이 인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가볍게 떠내려가는 것 같은 아무 중요성도 없는 말씀인데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그 말씀이 꽂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아마도 이 야곱이 지금보다도 훨씬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받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바로 이렇게 형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하여 가보지도 못한 그 땅을 향해 홀로 여행을 하고 있을 그때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우리 주님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을 기회가 있으면 있을수록 여러분은 그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지점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고 여기에서 이 야곱은 조상으로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던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갖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만남을 기념한 야곱
이 만남이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그는 자기가 베고 자던 돌베개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베개를 하려고 꺼냈던 돌멩이니까 사실은 그렇게 기념비로 세울만한 큰 사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이렇게 돌무더기를 쌓거나 혹은 기둥을 세우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들을 기념하는 이 사람들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베고 자던 돌베개로 세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은 것은 거기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일생동안 잊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 야곱의 바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루스라고 일컬어지던 그 땅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이 벧엘의 추억을 간직하며 살았고 인생의 커다란 위기가 왔을 때 이 벧엘을 생각하며 벧엘로 올라가자고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처럼 기념하였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야곱보다도 더 큰 주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감격하며 돌기둥을 세우고 여행길에 써야할 기름을 아낌없이 그 돌기둥 위에 부을 때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였고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감격적으로 만나주신 그 하나님을 잊지 않겠다는 신앙의 기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고작해야 꿈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난 주님은 꿈속에서 만난 주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야곱보다도 더 위대한 우리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했고 특별히 야곱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도록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 여행길에 홀로였지만 여러분이 주님을 그렇게 생애적으로 만난 후에 여러분을 야곱과 같은 광야의 여행길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교회에 접붙여 그리고 함께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의 섬김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목회자와 많은 지체들의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섬김을 받으면서 그 사랑 속에서 자라게 해주었습니다. 그따위로 어디에 가서 행동을 하면 사회에서는 따귀를 맞거나 누구한테 가서 말 한번 붙일 수 없는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교회의 많은 지체들은 사랑으로 참았고 그리고 많은 믿음의 식구들이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야곱은 혼자였지만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어주셨고 그는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여러분은 생시보다도 더 분명하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주님의 사랑을 안 성도라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일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주님과의 은밀한 만남의 비밀스러운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야곱이 돌기둥을 쌓고 하나님 앞에 기름을 부어 일평생 여기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바로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무릎을 꿇고 기름대신 여러분의 눈물을 쏟으며 주님이 나 같은 이런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 큰 사랑을 일평생 잊지 않겠다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바쳐본 적이 없는 순결한 사랑이 불타올랐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얼마만큼 이 세상에 살던지 주님께 두 가지 약속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으니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내가 무제한으로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그리고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나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다 드리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추호의 거짓이나 가식이 없이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복들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그런 기대 없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 교회에서 어제 세 명의 강도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이들에게 몇 마디를 해주면서 오래전에 제가 안수를 받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제가 가르친 제자들과 함께 강도사 고시를 볼 정도로 긴 시간 동안 6년이 넘는 세월 동안을 안수를 받지 않고 미루어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불러주신 것은 틀림없는데 이렇게밖에 안 되는 모습으로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너무 큰 누를 끼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기도 속에서 도저히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고 그때에 이제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날이 다가오자 제 마음은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나의 양심이 나에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목사가 될래?’ 선배 목사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목사만 안 되면 모든 것을 취소할 수 있는데 목사가 되면 죽어도 목사요, 죽은 다음에 묘비에 새겨도 목사고, 당신이 죽어서 뼛가루가 다 땅속에 흩어져도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이 목사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새벽마다 특별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정말 나는 그렇게 목사가 되겠다는 자신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을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에 지하실의 교회에서 성도들도 다 돌아가고 혼자 새벽기도를 늦게까지 드리는데 어제와 다름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니까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제 마음을 물같이 녹이시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쓰레기같이 방황하던 나를 만나주셨고 내가 그렇게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나를 위해 죽으셨는지가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동안을 그 새벽부터 아침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가 거의 끝나갈 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런 생각이 들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서 옷을 모두 벗기시고 채찍에 맞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내가 내 살가죽을 다 벗겨서 주님의 옷을 만들어서 그 벗으신 몸 위에 입혀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양손에 구멍이 뚫어지고 두발이 못 박히고 창에 허리를 상하시고 내 살점을 떼어서 그분의 상처를 메워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벗으신 주님의 발에는 내 검은 머리를 잘라 신발을 삼아 신겨드리고 그리고 내 몸과 내 핏줄 속에 흐르는 피 중 한 점의 살, 한 점의 피라도 주님을 위해 찢기고 흘리기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쏟아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날 아침에 예배당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목사 안수를 받으러 갔습니다. 한 30명이 목사 안수를 받는데 강단에 열 명씩 올라가서 안수를 받고 목사님이 안수를 해주셨는데 앞사람이 가서 안수를 받는데 앞에 있는 목사님들이 기도를 해줍니다. 그중의 연세 많으신 목사님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아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 그대들이 주님을 위해 죽으려고 목사가 되는 날이란다.’ 그러면서 등을 펑펑 때리면서 ‘울어라 울어 너희는 눈물도 나오지 않니?’ 하면서 등을 때리셨습니다. 그렇게 안수를 받는 그 순간이 정말 방황하던 나의 인생의 과거와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셔서 소설처럼 매순간 인도하여 여기에 안수를 받도록 무릎을 꿇는 그 순간까지 드라마처럼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어리석기 짝이 없고 충성스럽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그 목사님 이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기도하고 일어나는 나를 꽉 붙들더니 너무 흡족하셨는지 ‘좋은 목사가 되십시오.’ 그러셨습니다.
만약에 매일 매일 이 기억을 간직했더라면 하나님 앞에 더 충성스러운 목사가 되었을 것이고 여러분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돌보았을 것입니다. 각각 삶의 정황은 다르고 계기는 동일하지 않아도 여러분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신적이 있었을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교만을 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이렇게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무제한의 순종과 무한대의 헌신을 다짐하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거기를 여러분의 벧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금 그 벧엘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그때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념했던 그 기억을 간직하고 그때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섭섭하게 해주신 것만 기억하고 있지 여러분이 예수님의 몸과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남의 죄와 허물에는 미치도록 예민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뻔뻔하도록 둔감한 것이 여러분이 아닙니까?
C.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서원
1. 세 가지 기도를 드림
오늘 이렇게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운 이 야곱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여행길에서 자기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의복을 공급해주시고 평안히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사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다 해주신 것인데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간청을 드리면서 세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2. 세 가지를 약속함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세 가지를 약속했는데 첫째는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의미는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순종의 다짐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더라면 읽는 이의 가슴에 깊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살았던 인생의 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뱃속에서부터 인간의 방법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인간이었고 오늘 사랑하는 부모님과 작별하고 사랑을 나누어야했을 형에게 복수를 당할 위협을 느끼며 죽음과 같은 외로운 여행길을 떠나야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된 삶을 살지 않고 반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찾아온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꿈속에서나마 생애적으로 만난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다짐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적이 잇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한순간 하늘의 밝은 지혜의 빛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걸어온 길은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뒤돌아보니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으며 모든 나쁜 것들은 여러분이 불순종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 반항했기 때문에 찾아온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에 대해 뼈저리게 회개하고 다시는 마귀의 꼬임에 빠져 육신의 정욕을 따라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등 돌리며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은 여러분이 어떤 상태입니까? 정말 그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처럼 매일 매일 순종하며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도록 도와달라고 나의 힘으로는 그렇게 순종할 수 없으니 주님의 은혜로 나를 굴복시켜 내가 주님을 주인삼은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죽으셨으니 이제 내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평탄하게 걸어가는 불순종의 길보다는 거친 바다와 험한 산을 넘어야하는 순종의 길을 택하겠노라고 지금도 어린 아이처럼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십니까? 마음속에 수없이 돋아나는 정욕과 육체의 욕심들을 경계하면서 마음으로나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생각을 가끔 한 것을 가지고도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순종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 때에 우리 안에서 생명력 있게 역사하고 살아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자리에서 올리는 한마디의 진실한 기도는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자리에서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는 그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 앞에 이 사경회를 통해서 무슨 축복을 받아서 가고 문제 해결의 열쇠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갈까 하고 나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뀌어야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힘 있게 기도하고 싶으시면 먼저 회개하고 여러분이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있기를 원하시는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경배입니다. 이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설마 이 말이 교회를 짓겠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뭔가 신당을 짓고 자기의 신들을 경배하는 것처럼 아마 이 신앙이 미약한 야곱의 마음속에는 이 벧엘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할 것이라는 서약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야곱의 신앙의 수준이 어떠하든지 이 루스라는 평범한 땅이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은 바로 거기서 경험한 꿈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를 생애적으로 만나주신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에 경배로 응답하고 싶다는 야곱의 소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뒤덮을 때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무 희망이 없이 죽음을 기다릴 때 거기서 여러분을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두 번째 새 생명을 주셨을 때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여러분을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주시고 죄악의 길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여러분을 구원해주셨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박수갈채를 받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쾌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먹을 것이 없어서 가시나무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으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구원해주시고 쓰레기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산들 무슨 관계가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여러분은 주님을 높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여러분의 마음에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목회자들과 그리고 방황하고 있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내 친구들, 그리고 나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로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도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도록 그분을 위하여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수만있다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심령은 언제나 가난했고 늘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죄로 말미암는 애통하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자기같이 막돼먹은 인간조차도 당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악한 사람에게 아무리 오래참고 선하게 대해주어도 주님께 진 그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온유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두운 일이고 고통밖에는 돌아올 것이 없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었고 그렇게 매일 매일 복음으로 씻기는 이 회개의 눈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은 정결해져서 어디서든지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주신 것을 인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신이 주를 위해 받는 시련이나 어려움을 마치 사랑의 징표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런 경배의 마음이 그 처음 그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아직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만입이 있어도 주님을 찬송하고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내 모든 피를 잉크삼아 내 손톱을 붓으로 삼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을 다 기록하여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경배의 소원은 채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여러분 중 가장 나쁜 교인들조차도 언젠가는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으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 가장 나쁜 교인조차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오직 하나님 한분만 높이고 경배하며 그렇게 천국을 소망하며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못되게 신앙생활하고 교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적마다 저는 그렇게 여러분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아기처럼 기도하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미운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여러분이 가엾어지고 불쌍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꼭 다시 일으켜 그 착한 신앙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고이 품게 됩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있고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우리 인생의 중심축을 나를 사랑하는 자기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 가장 경배를 받으시도록 티끌 같고 파리 같은 목숨이지만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티끌만큼이라도 아름답게 빛나게 되어 주님이 이 세계를 바라보실 때에 내가 없었던 것보다는 아름다운 세계가 되게 하시려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시고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짐승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몸으로 접붙이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아버지 앞에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살면서 방황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할 지점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니 갈등을 느낄 때도 있고 고민할 때도 있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프고 쓰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경배하면서 아파하고, 섬기면서 괴로워하고, 주님을 높이면서 고통을 당하여야합니다. 그 경배의 자리에서 올리는 기도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이 녹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명분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어두운 마음이 없이 하나님 내가 이 자리에서 나는 약하지만 주님이 세워주신 이 자리에서 섬기기를 원하오니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빌어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여러분을 생애적으로 만나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었고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 약속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c. 헌신(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임)
마지막으로는 헌신입니다. 이 사람 야곱은 하나님이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았는데 나의 모든 소득의 열중의 하나를 당신께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약속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 십일조를 드리고 또 누가 이 십일조를 받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상세한 정보를 이 창세기 안에서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이렇게 헌신했고 또 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아주 분명하게 약속했습니다. 왜? 벼랑 끝에 서있는 인생의 날에 자기 같은 인간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기를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강요하는 사람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렇게 헌신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오직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을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만나주셨기 때문에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기쁨으로 헌신했습니다. 헌신한 것도 여러분이었고 변심한 것도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관데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해주셨습니까? 그 은혜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내 일평생동안 당신을 섬기는 보람으로 살겠습니다. 예전에는 당신을 섬기면 그 대가로 받을 이익 때문에 당신을 섬기려고 했지만 이제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공으로 당신을 섬길 것이며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내 마음에 기쁨입니다.’ 라는 고백을 어린아이처럼 참회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 같은 쓸모없는 사람을 써주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그때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 드린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까? 여기서 단지 나는 여러분에게 십일조를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계실 것입니다. 십의 일을 드린다는 이 고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이 열 가지 모두에 대한 대표성으로써 그 하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나머지 아홉이 모두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이것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그 하나의 정신으로 사용하겠다는 서약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이모저모로 주님과 만난 기억을 더듬어보십시오. 어찌할 수 없이 곤고한 영혼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계획 없이 회심하고 주님과의 첫사랑으로 들어가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그 사랑이 새로워져 하나님 앞에 새로 살고 싶어 하던 그 은혜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매일 주님의 교회당을 찾고 싶었고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일매일 부자연스러워했고 감격해했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중 어느 하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없이 매일 매일 늘 울어도 눈물로는 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헌신했습니다.
이 교회당을 여기에 이렇게 수리하고 들어올 때 정말 불가능한 일을 한 것입니다. 들어간 돈의 1/5정도밖에 헌금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 일을 했고 매순간 우리에게는 외나무다리를 걷는 것과 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때 여기에서 많은 일군들이 와서 예배당을 수리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그 사람도 밤늦게까지 피곤한 가운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연세 드신 성도 한분이 오더니 일하는 자기를 개의치 않고 이 의자도 없는 예배당에 와서 무릎을 꿇고는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시더랍니다. 자기는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저렇게 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봐서라도 잘 하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그렇게 헌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 하나 하나님 앞에 받지 않은 복이 없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마음이 틀어졌는지 티끌만큼도 헌신하지 않고 뺀질거리며 살아가는 교인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자기의 가진 소유를 드려 가나한 지체들을 섬기고 봉사하던 여러분의 착한 때를 기억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렇게 뺀질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여러분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저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뺀질거리고 사느라고 그 영혼이 얼마나 곤고할까? 마지막에 침대에 누워 벽을 바라보고 잠드는 밤 저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헌신의 약속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저 사람이 잠드는 그 밤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그리고 눈을 뜨는 아침은 하나님 없이 눈을 뜨는 아침일 텐데 얼마나 무섭고 허무할까?
(찬양)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Ⅲ. 적용과 결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한 강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예수님을 욕했지만 죽어가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적적으로 일평생 나쁜 짓만 하다가 그 십자가에서 죽어가기 직전 예수를 고백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그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셨지만 이제까지는 몰랐는데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이제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할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좋으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 기회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을 보면서 강도는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아직 살아있고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금년에는 팔다리가 성하여 움직이고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후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할 수 있고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있고 그리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는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고 뭐라도 안하려고 하면 늘 한숨을 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으면 다 썩을 살이다. 왜 그렇게 아끼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살려주신 것은 이렇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라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살아있어도 살아야할 이유를 갖지 않은 사람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사실은 그 영혼과 정신이 죽은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이 이렇게 그 옛날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께 굳게 한 이 헌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지켜 하나님 앞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영혼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고통 속에서 연단하실 때에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창31:41-4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도망치다가 추격해 온 라반의 일행에게 붙들려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제 어머니의 당부를, 아버지의 당부를 따라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고 고향집을 떠나 밧단아람에 이르렀고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14년은 장가를 들기 위해서 무보수로 노동을 하였고, 6년 동안 품삯을 위하여 일하다가 이제 여기 장면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결혼을 하고 밧단아람에 도달한지 14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에 이제 그는 자기의 집을 세우기를 원했고, 그래서 이제 이 삼촌을 떠나고자 하였는데 이 약은 라반은 바로 이때에 야곱에게 품삯을 제안하고 그리고 자기를 돕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6년의 세월을 더 라반의 집에서 머슴처럼 봉사하게 됩니다.
II. 고통 속에서 연단하실 때에
거기에 있었던 20년의 세월은 아마도 그런 20년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아마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얻은 축복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모두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밧단아람에서의 20년의 세월은 고통 속에 연단 받은 시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어리숙한 아버지, 단순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형, 그리고 그 모든 식구들보다도 자신이 가장 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라반의 집에 와서 20년을 살아보니 자기는 이 라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우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야곱의 그 피는 보다 더 진한 어머니의 피에서 흘렀고, 어머니의 몸에 흐르는 꽤 많은 그 피는 아마도 더 진하게 이 라반의 피에서 라반의 몸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본다면 원조는 라반이고 이 야곱은 말하자면 짝퉁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20년의 세월을 거기에서 치열하게 연단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셔서 이 교만하기 짝이 없고, 본성적으로는 사기꾼 같은 이 인간을 밧단아람에서 혹독하게 연단을 받게 함으로 하나님 믿는 신앙 넣어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깝게 본다면, 아주 가깝게 본다면 이 야곱의 이 큰 고통 속에서의 연단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가 한 그대로 하나님께 당하게 된 것입니다.
A. 아비와 형을 속이더니
나는 그것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비와 형을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래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아버지를 속여서 몰래 빼앗은 것입니다. 이 어리숙한 형, 그리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형과 아버지는 야곱의 이 꾀에 완벽히 속았고, 그리고 사실 이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완벽하게 이 형과 아버지를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거 보면 야곱에게 한수를 가르쳐 주는 이 리브가는 이 야곱이 누구 몸에서 나왔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쪽 어머니 쪽 집안 피가 그런 피가 줄줄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갔더니 외삼촌이 그야말로 기쁨으로 이 조카를 맞으면서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혈육 중 하나를 만나서 기뻤는지, 미래의 머슴하나를 만나서 기뻤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생을 하려고 했는지, 가서 머슴살이를 시작을 했잖아요. 머슴살이라기보다는 처음에는 그저 더부살이로 하니까 그저 밥 먹고 드러누울 수 없으니까 가서 이 일, 저 일 거들었겠죠. 그런데 사람이 고생을 하려니까 이 자매 하나한테 마음이 꽂힌 것입니다. 그게 라헬이라는 자매에게 꽂혔습니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얼마나 그 여행길에 외로웠겠으면 요즘같이 전화나 혹은 이메일 할 수 없는 때였으니 얼마나 두고 온 가족 소식이 그립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 한창 젊은 나이에 방긋방긋 웃으면서 앞에 왔다 갔다 하는 라헬 보니까 가슴에 확 꽂혔습니다. 그러니까 그 외사촌 말하자면 동기간이잖아요. 또 성경을 보면 라헬의 이미지가 아주 싹싹하고 그리고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너무너무 좋아한 거예요. 그랬더니 삼촌이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지으면서 “우리 집에서 7년을 머슴살이를 해라. 그러면 내 딸 라헬을 너에게 주마” 뭐 너무 마음에 드는데 70년인들 아니 70년까지는 안되겠습니다. 뭐 벌써 다 늙어버리니까. 7년이 아니라 몇 년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 그랬습니다. 이 마음이 삼촌이 변하면 사랑이 깨질 테니 아마 20년 세월 중에 이 7년을 가장 성심으로 봉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꿈같은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옆에 누워있는 인간이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하던 라헬이 아니고 그 언니 레아였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웠겠어요? 그래서 외삼촌에게 얼굴을 붉히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분명히 라헬을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잠자리에는 이 레아를 집어 넣으셨습니다.” 그 정도의 항의에 대해서 할 말을 준비하지 않고 이 사건을 꾸몄을 어리석은 라반이 아닙니다. 입술에 기름을 바른 듯 청산유수 같은 이유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단다. 진작 얘기하지. 진작 얘기하지. 진작 얘기를 하지. 그러면 진작 포기를 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렇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며 분노하는 이 야곱에게 “만약에 7년을 더하면 그때에 라헬을 주마”했으면 야곱이 레아도 버리고 장가고 머고 다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갔겠죠. “일주일만 기다려라. 외상으로 주마”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가 그렇게도 끔찍이 사랑하던 라헬을 넣어주었습니다. 졸지에 일주일 사이에 두 사람의 부인이 생겼는데 하나는 끼워 팔기로 억지로 딸려온 그런 상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가장 황금기 같은 그 시절을 마음에 없는 레아를 위해서 7년의 세월을 바쳤습니다. 아비와 형을 속이더니 이번에는 외삼촌 라반에게 더 큰 속임을 당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연단에, 연단에, 연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뭐, 반드시 그렇다고 규정을 하면 동의를 안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요. 여러분이 받는 연단의 대부분은 여러분의 성품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물질로 연단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아니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에요.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있다 이 뜻입니다. 물질로 연단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할만한 본성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자, 낭비가 아주 심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 남의 돈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남에게 무엇인가 채무 관계가 생기면 셈이 매우 흐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물질로 인해서 큰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속이기를 좋아하는 이 야곱은 결국은 그 응보를 따라서 자기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라반을 만나서 뼈저리게 고생을 했습니다. 14년이 되었을 때 이제 삼촌 곁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에 그때에 야곱의 심경이 어땠을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1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만났을 때와 꼭 같았겠지만 14년 지난 꽃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 꽃이겠습니까? 14년 뼈가 으스러지도록 삼촌의 집에서 봉사했지만 자기의 몫으로는 양 새끼 한 마리 없었고, 양쪽에 있는 두 아내 하나는 원하지 않고 억지로 딸려 와서 밥만 축내는 그 아내와 그리고 한때는 예뻤지만 14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시들어 가는 비교적 사랑스러운 아내 하나, 그게 20년 노동 끝에 손에 남은 전부라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아팠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아버지의 축복을 대신, 형의 축복을 대신 아버지를 속여 빼앗으면 누리게 된 영화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나 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대로 갚으셔서 치열한 연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B.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하더니
두 번째는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한 사람이었잖아요?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에서보다는 야곱을 극진히 사랑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조금도 불편해하거나 형에게 미안해하거나 혹은 형제의 화목을 위해서 어머니의 편애하는 마음을 형에게 돌리려고 노력하지 않고, 철저히 그 편애를 이용해서 아버지와 형을 속였고, 형을 따돌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하던 이 사람은 이제 많은 부인들의 사랑의 시샘 속에서 고통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시집올 때 각기 종을 딸려 보냈고, 그리고 그들은 빌하와 실바는 결국 첩이 되어서 야곱의 아들들을, 그리고 딸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이 부인들이 시샘을 하면서 서로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고 거래를 해서 오늘 남편을 내 방에 불러들이고, 저쪽 방에 건너가는 남편을 빼앗아서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이고 하는 이것이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면 황홀한 일일지 모르지만 매일 이런 일이 계속되는데 아마 사랑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대게 한번 결혼한 남자들은 말로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살고 싶어”라고 얘기해도 속으로는 다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한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하고만 결혼하고 싶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못할 바에야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바에야 나는 태어나지 않겠다.”까지 이야기를 하더래요. 그래서 곁에 있던 사람이 당신은 정말 우리 모든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그랬더니 “그거는 난 잘 모르겠는데 또 다른 사람에게 적응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하던 이 야곱은 결국 노예 살이를 하면서 얻어 들인 이 아내 그리고 아내와 함께 딸려온 첩들까지 끌어안고 그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교인들하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랬어요. “이슬람에서는 4명인가까지 부인을 얻을 수 있대.” 옆에 있는 어느 분이 “어우 참 좋겠네.” 옆에 있는 목사님 “좋긴 뭐가 좋아?” “왜?” 그러니까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넷이 얼마나 힘들겠어?”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하던 이 야곱은 이 가정생활 속에서도 평안할 날이 없는 깊은 고통 속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C. 수고 없이 유업을 구하더니
또 한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장자에게 축복을 해줄 때 그 진정한 신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앙으로 이 아버지의 축복을 구하기보다는 속임수로 형에게 돌아올 축복을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의 불신앙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아버지의 큰 축복을 받으면, 장자의 복을 받으면 수고 없이 유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는 기대 때문에 이러한 불신앙의 시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고백하듯이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고, 졸음을 견뎌야 했고, 가혹한 노동 조건을 따라서 그래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혹 삼촌의 가축들을 돌보다가 짐승에게 물려가거나 하면 자기가 모두 물어내야만 했습니다. 6년 동안 이 외삼촌 라반이 자기와 한 품삯의 약속은 오늘 이 야곱의 진술대로 10번이나 더 바뀌었으니 거의 일 년에 두 번 이상씩 품삯이 바뀌어 어쨌든 이 야곱의 노동력을 온전히 착취하고 마지막에는 껍데기를 벗겨서 고향으로 내쫓을 심산으로 하던 이런 못된 삼촌을 만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수고 없이 유업을 구하던 이 야곱은 치열하게 고통을 당하면서 결국은 빈손으로 쫓겨날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III.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야곱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 속에 연단을 받을 때에 만약에 내버려 두셨더라면 그는 알거지가 되어서 그 대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치듯이 나왔어야 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노동 계약이 30장에서 맺어지고, 이때 이미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모종의 암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조건을 내걸면서 새로운 근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그가 돌보고 있는 양과 염소들 가운데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양, 검은 염소를 모두 골라내서 멀리 떨어뜨려놓고 하얀 것들만 내버려 두고 삼촌에게 제안하기를 “내 품삯은 이들을 내가 칠 것인데 이들 중에서 아롱진 것들이 태어나면 그걸 내 것으로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삼촌의 집에서 더 노동을 하겠습니다.” 일평생 라반은 양과 염소를 치면서 살아왔던 사람이고, 조상 대대로 그 일을 위해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롱진 것, 점 있는 것은 검은 양이나 검은 염소, 또 함께 아롱지거나 점 있는 것들과 교배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이지 하얀 것끼리 교배를 해서 이것이 태어날 확률은 아주 희귀했기 때문에 이 라반은 그것이야말로 기가 막힌 근로조건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양, 검은 염소를 모두 치워 자기 아들에게 맡겨 삼일 길 이상 떨어뜨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암시를 받은 것같이 이 아롱진 것을 어디에서 몰래 찾아서 적을 붙여 이런 것들을 퍼뜨려 자기의 소유를 늘린 것이 아니라 이 라반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튼튼하고 좋은 가축이 와서 물을 먹을 때에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서 물에 꼽고 그 물을 먹게 하면 이상하게 그것이 잉태하여 새끼를 가질 때 아주 실하고 아름다운 이런 아롱진 것들을 생산해 내는 기적을 하나님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이 야곱의 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암시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양떼를 거두고 그 소식이 라반에게 알려졌을 때에 이렇게 서로 엄중하게 약속한 것은 기억하지도 않고 무엇인가 야곱이 사기를 쳐서 이 자기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 혐의와 불평이 가득하게 되었고, 이것은 현실적인 위협이 되어서 야곱에게 다가왔습니다. 야곱은 20년 세월을 라반과 그리고 라반의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들을 파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수의 때가 다가왔을 것이라고 믿고 언젠가는 이 라반과 아들들이 쳐들어 와서 자기 가족들을 죽이고 이 모든 소유를 빼앗아 버릴 때에 자신은 그 모든 공격에 항의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무력도 없었고, 또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는 자기의 고향이 아니라 라반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결심을 하고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시면서 만약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은 추격을 당하여 결국은 이 야곱이 커다란 복수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마음으로 야곱을 추격하는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선악간의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경고였는지 이 라반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딸과 그 혈육들에 대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 야곱에게는 아무 정이 없었지만 자기의 딸과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정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야곱을 순순히 놓아줄 마음으로 변화되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형제 됨에 맹약을 갖고 거기에 여갈사하두다라는 증거의 무덤을 쌓아두어서 이제 이 모든 약속의 징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야곱이 비록 하나님 앞에 약삭빠른 사람이었고, 자기의 방법대로 인생을 사는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치열한 연단 속에서 이 야곱을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20년의 이 치열한 연단을 받으면서 야곱이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야곱은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 경험은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고,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토대로 그는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 동안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IV. 연단 속에서 거룩하게 하심
우리는 근거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벧엘에서 돌멩이를 취하여 잠을 자려고 할 때에 이 야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당히 성숙해진 그리고 모든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을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연단을 치열하게 받으면서 20년의 불같은 시련을 겪으면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비록 온전한 신앙은 아니었어도 20년 동안 고통 속에서 연단 받은 후에 이 야곱의 마음속에는 바로 그렇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던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이 낯선 땅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믿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정든 집을 떠나 낯선 밧단아람으로 갔으나 정을 붙이고 다닐 좋은 교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늘 날처럼 여러분 같이 좋은 신앙의 동지가 옆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눈만 뜨면 마주쳐야 할 괴물 같은 사기꾼 삼촌이 있었고, 그리고 그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삼촌의 집을 위해서 머슴처럼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시련과 연단 속에서 이 야곱의 믿음을 조금씩, 조금씩 성숙시켰고 이제 이 삼촌에게 복수를 당하여 멸망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도 그는 자기가 이 밧단아람에서 거한 20년의 세월이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시간들이었다고 고백을 할 믿음까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껏 까지 혼자 힘으로 살아오셨다고 믿으시죠. 혹시 거기에서 지나쳐서 잘된 거는 다 내 능력이 훌륭하기 때문이고, 안된 거는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으셔서 잘못되었다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복음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잘 몰랐던 정말 자기의 꾀와 고집대로 살았던 이 야곱조차도 그 긴 고통의 연단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을 도우셨다는 사실을 믿었고, 굳이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야곱이 20년의 세월을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신앙생활하면서 오늘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약속을 받은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하늘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러한 시련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2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뭔 믿음이라고 산다는 것입니까? 내가 잘 될 것이라는 믿음, 그게 자기 암시지 어떻게 믿음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형통하여 잘될 것이라는 믿음, 그게 바람이지 어떻게 믿음일 수 있겠습니까? 이 믿음은 성경에서의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행위입니다. 주님이 어떤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은 약속을 우리에게 해주신 주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약속에 대한 믿음은 깊어지겠죠. 사람을 신뢰하면 그의 말은 무조건 믿어집니다. 그 사람 말이 너무 청산유수 같고 빈틈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믿을 수가 없으면 오히려 그렇게 청산유수 같고 이치에 맞기 때문에 그 속에 무슨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우리들이 야곱을 판단할 때에 우리가 보기에 야곱의 믿음을 하찮게 보았지만 아버지의 하나님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붙들고 산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20년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 정도는 이 야곱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실질적인 인격적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좋은 교회도 없고 잘 만들어진 성경책도 없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도 없었던 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들면서 살았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하나님 자녀 삼으셨고, 구약의 성도들이 더듬어 알던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은혜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주셨고, 목회자들의 돌봄을 받고 사랑하는 지체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수많은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게끔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셨고 이제껏 믿음으로 살게끔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을 돌보고 지키셨다면 여러분 얼마나 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증거보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의 말씀을 더 굳게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억하사 붙드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여러분 속에 충만하게 될 때에 연단 속에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20년의 고통스러운 세월동안 이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즉, 이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그렇게 박대를 당하고 그렇게 노동을 착취당할 때에 이 사람에게 있어서 위로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당하는 이 고난과 그리고 내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는 이 사실이 이 야곱의 마음속에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0년 세월동안 치열하게 연단을 받고, 14년 세월동안에는 자기의 소유 하나 없이 그렇게 살뜰히 고생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 것을 이 야곱은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 야곱은 이렇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적잖이 위로를 받았을 것이고, 고향 생각이 사무치게 나서 그리울 때에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 것을 야곱이 기억할 정도의 신앙이 되었으니 벧엘에 와서 돌베개를 취하기 전까지 이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야곱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가 식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신 증거들이 자기의 일생 중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홀로 벼랑 끝과 같은 인생의 처지에 버려두셨다는 기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변화를 받습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고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불순종과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불신앙에 대해서 뉘우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날들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의 눈이 열리고 자기는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셔서 자기가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이 자기 가장 가까이 계셔서 자기와 함께 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그때 놀랍게 일어난 그 좋은 일이 결국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이었구나. 그때 그 시련을 당한 것이 내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을 때려주신 것이었구나. 그때에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가 아주 망하지 않고 도움을 입도록 나를 도와 주셨구나.”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달은 겸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은혜의 조건, 감사의 조건, 은혜의 증거들을 그 사람들은 찾아냅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지만 어떤 때는 나쁜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원에 있으면서 제가 살았던 세월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난 자신 있게 야곱보다 쉬운 삶을 살았다고 그렇게까지, 그렇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도 이 사람 못지않게 정말 고생했습니다. 물론 7년을 누구한테 머슴살이하고 장가를 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정말 이 사람 못지않게 연단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항상 나 홀로 버려졌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그리고 나 홀로 외롭게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은 거짓이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못 봤기 때문이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옆에 계셔도 내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 줄 몰랐을 뿐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났을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거기 계셨어요. 고난을 많이 받을 때에는 바로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이 계셨고, 복을 받을 때에는 바로 그 복 주시는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늘 혹시 여러분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지 않습니까? 정말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밤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은 인생길을 지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원래 인생이 그런 거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변화 많은 세상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성취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마음이 언제나 요동치는 이 세상의 물결에 복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평정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평탄하고 잘 될 때에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것이 정말 예외적인 때이고,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파도의 높이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나 혹은 수고할 때나 혹은 억울한 일을 만나서 고통을 당할 때나 뼈저린 눈물을 흘려야 하는 모든 삶의 현장 속에서 여러분이 그 하나님을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셔서 그래서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나아오는 여러분에게 당신이 동행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수없이 많을지라도 하나가 없으면 사실은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도 불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라.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가라. 그 대신 난 안 간다. 내 사자를 보내줄 테니 내 사자가 너희들을 인도하여 너희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살거라.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 그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뭔 상관있어? 준다잖아. 데려 간다잖아.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약속대로 준다잖아. 사자를 붙여 준다잖아. 그러면 됐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던 못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단장품을 다 제거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들은 회막에 모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그렇게 간절히 많은 무리들이 모세와 함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는데도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다 라고 하셨을 때 사자 같은 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신앙에 눈을 뜬 사람들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꽤 길고 멀죠. 전에도 한번 퀴즈 냈는데 부산까지 제일 빨리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러고 물어봤더니 월요일 날 공부하던 인턴십에서 대답이 나와요. “KTX요. 비행기요. 새벽에 자가용 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어쩜 그렇게 답답하냐?” 답이 뭐라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거예요. 이제야 뭐 저 뒤에서 크게 웃어요. 삼천만이 다 아는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함께 가는 거예요. 왜? 사랑하는 사람하고 함께 가면 비행기를 타던, 버스를 타던, 걸어가면 어때? 그럼 오래 같이 있고 좋지. 그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길은 어떻게 걸어가야 되겠어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다. 이게 이 세상의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다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한분이 내가 아무리 고난을 당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비방을 당하고, 모함을 당해서 가슴 아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가 너를 아노라, 내가 너를 기억하노라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 주시는 신앙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벼랑 끝과 같은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시련을 당하게 하신 것은 오늘 여러분이 이제까지 이 가장 큰 축복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던 그 모든 삶에 대하여 깨닫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불러 회개시켜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서부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주님을 떠난 것이고 주님이 내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V. 대적자의 마음을 돌이키신 하나님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하였습니다. 자, 이제 외삼촌 라반이 마르모라 그 자식들이 함께 야곱을 추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야곱의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외삼촌은 자기의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으며 내가 너를 추격했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 이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제껏 보호하고 있다는 확신이 다시 한 번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담대하게 그것은 바로 어젯밤에 하나님이 외삼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담대하게 선언하며 하나님이 20년 동안 자기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또한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이 끔찍한 환란을 하나님의 손으로 자기를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연단 속에서 야곱은 이렇게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길, 자기는 능력이 없어서 멸망에 당하고 시련에 처하고 커다란 위기를 만날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V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의 강요가 아닌 야곱의 마음에서 그 간사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지존하심을 깨닫고 이 고백을 하기까지 그는 20년의 세월동안을 치열한 연단 속에서 고난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 끔찍한 연단을 통해 마지막 깨달은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깊은 자각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찌할 수 없는 시련 속에 있어서 마음이 어둡고 불평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약에 그동안 여러분이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일체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악한 자들이 여러분을 해하려 할 때에 그냥 여러분의 나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쁘게 행한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을 보호하지 않고 내팽개쳐 두셨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아마 악인의 이빨에 찢겼을 것이고 그 발에 짓밟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지 않고 태만할 때조차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고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알던 때든지 모르던 때던지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이제껏 살아오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당신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모르는 때조차도 그렇게 우리를 위해 헌신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셨을까요? 그리고 당신 자신이 또 하나님의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시고, 또 그들을 어루만지셔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도록 은택을 베풀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 충만하고 헌금 많이 하고 열렬히 봉사할 때에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내 이 증거를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하나만 보여주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사실은 은혜가 떨어지면 잘 안 믿거든요. 내가 확실하게 하나 증거를 들어볼게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질 때에 그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가까이 닮은 때에요. 그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요. 지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게 되고, 감정은 하나님의 느낌과 다르게 되고,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하고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감정을 가지고 그리고 다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아요. 그러면 매우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매번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경우 하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아주 많이 받았을 때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가족이든지 구역의 식구든지 아니면 친구든지 뭐 어쨌든 방황하는 영혼들, 예수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해 본적이 있죠. 그때에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면 오히려 신앙에서 미끄러진 사람 위에서 기도할 때 마음이 더 뜨겁고 간절해지고 또 구원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을 볼 때에 오히려 더 간절히 눈물이 나오고 아픕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는 저 사람이 내 인생에 얼마나 이용가치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이용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열렬히 기도가 되고, 돈도 없고 별로 도움도 안 되고 가까이 사랑한다고 팔을 벌려 봐야 와 가지고 돈이나 빌려 달랠 거 같은 사람은 기도도 안 나오고,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목회자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교회의 가장 큰 복입니다. 목회자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럼 눠 은혜를 못 받는 목회자도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만 좀 들 받는 때도 있고, 더 받는 때도 있잖아요.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절대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가 안 나오고 오히려 그렇게 까불고, 고집스럽고, 못 되게 구는 사람들 생각할 때 가슴이 에이는 것처럼 눈물이 나는 거예요. 왜? 왜냐면 정말 사랑하면 그게 사람으로 안 보이고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나쁜 짓을 하고 저렇게 교회를 아프게 하고, 저렇게 성도들을 그리고 자기의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할 때 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괴롭고 견딜 수 없으면 저렇게 하면서 살까 하는 생각이 들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희미하게 닮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을 바라보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감사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많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불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주님이 나를 벼랑 끝에 홀로 세우셨다고 하지만 그거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신 그 하나님이 안 느껴지는 거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이 회개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나 같은 인간을 향하여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그리고 마음 아파하셨는지 하는 것을 깨달으며 그걸 몰라주면서 살아왔던 날들에 대해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야곱은 20년의 세월동안 불같은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는 분이시고,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자기를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여러분을 고통에 두시고 연단하신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이 그 연단 속에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건과 사고, 사람들을 보면서 이희일비 하거나 요동치는 마음 갖지 않고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연단 속에서 여러분을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대적자들의 마음은 돌이키실 것이고 여러분의 시련과 난관은 물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얼룩진 연단의 길을 걸어가면서 죄 짓지 마십시오. 하나님 원망하지 마십시오. 더욱이 사람 미워하고 마음속에서 복수의 칼을 갈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주역이 아니라 엑스트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인생의 각본을 쓰신 분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련과 고통이 많아도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고통 속에 나를 연단하셔서 반드시 나를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오히려 쓰라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뿌린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겸비해 지십시다. 그래서 나는 악하고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 32:22-32)
녹취자: 박지성
I. 본문의 배경
드디어 야곱은 긴 여정을 끝낼 때가 왔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때에 세일 땅 에돔 들판으로 먼저 사자들을 보내었습니다.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고 밧단 아람에 있는 동안에 에서와 그 가족의 소식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야곱은 그 형 에서의 20년 전의 태도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서 자기를 따뜻하게 맞이해 줄 것이라고 하는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형이 자신에게 복수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먼저 척후병처럼 사자를 보내었더니 그 사자들로부터 온 소식이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종들을 잘 훈련시켜 무력으로 자신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것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내려오는 이 가정의 한 관습이었습니다.
에서가 400인이나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고 하니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가 제법 큰 집안을 일으켰다는 것과 이 400인으로써 야곱을 치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판단이 명민했던 야곱은 형이 틀림없이 자기에게 복수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기에 사람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만약 한 떼를 형이 치면 그것을 빼앗는 동안에 다른 한 떼를 거느리고 도망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님께서는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제가 밧단 아람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받은 그 하나님의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건넜는데 이제는 이렇게 많은 소유와 재산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맞아 강을 건너게 하였습니다. 야곱이 함께 건넜는지 아니면 야곱은 건너지 않고 남았는지 어쨌든 야곱이 이 가족들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기 위해서 인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안전하게 건너가는 것을 보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서 그 유명한 얍복 강가의 씨름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II.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날 밤에
아무튼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날 그 밤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경험하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 못지않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일생동안에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 통절하게 깨어지는 신앙의 체험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준 것이었다면 밧단 아람에서의 생활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만들었고 얍복 강가에서의 이 사건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던 밤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그날 밤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강 건너편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며 한밤을 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밤새도록 씨름하였고 그리고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자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러 천사들의 무리를 보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천사와 씨름을 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이 야곱은 날이 새도록 이 천사와 씨름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천사를 굴복시켜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천사는 떠나려고 했는지 아니면 이 천사가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러 왔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고 이 천사에게서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 더 큰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날이 새도록 매달린 필사적인 씨름이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렇게 천사를 붙들고 매달린 것이야말로 야곱의 큰 믿음이었다고 설교를 듣고 또 교회에서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찬송가에도 보면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라는 찬송가가 이러한 해석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어느 날 돌아가신 김희보 교수님이 이 구절을 새롭게 해석을 해주시는 것을 보고 제가 오랫동안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천사를 붙들고 매달리며 밤새도록 씨름한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하든지 이 천사에게 떼를 쓰고 매달려 축복을 받아서 자기의 인생에 절대적인 위기를 넘겨보고자 하는 이 야곱의 강력한 고집이었습니다. 이 태도만큼 야곱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보여주는 장면은 없습니다. 이제껏 자기의 힘과 꾀를 믿고 그리고 자신의 의지 하나를 가지고 살아보려고 했던 인간적인 고집의 발휘가 바로 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천사에게 만약 이 야곱을 축복할 권한이 있다면 그래도 그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가지고 온 귀한 존재인데 겸손히 부탁을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여 이 천사에게 명령을 해 달라고 하여야 할 일이지 영적인 존재인 이 천사와 더불어 육적인 씨름을 했다는 것은 도대체 그 방식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밤새도록 이 야곱이 씨름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들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입니다.
B. 징계로써 환도를 쳐서 다치게 함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천사를 붙들고 매달린 야곱의 몸부림이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징계로써 환도를 쳐서 다치게 한 사건이라고 성경이 이 씨름 사건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호세아서 12장 3절과 4절에서는 이 호세아 선지자가 이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26절에 보면 울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천사는 이 야곱의 허벅지 뼈를 쳐서 그 뼈가 어긋나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힘으로 천사를 이기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인체는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뼈가 기계처럼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뼈와 뼈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고 심한 경우에는 그 뼈가 각각 조각조각 떨어져 있기도 합니다. 나사 하나 없이 뼈가 배열되어 있는데 그 뼈 사이에 근육이 단단하게 붙어서 신경과 연결되어서 뼈가 떨어져 있어도 이것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한 일체를 이루면서 우리의 신경에 따라서 이 뼈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대로 누워서 썩은 시체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대로 누워서 썩으면 살과 이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뼈와 손톱 그리고 머리카락, 털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 같은 것을 보면 그대로 누가 흔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부패하고 썩을 때 살도 썩고 힘줄도 썩고 다 없어지고 뼈가 남는데 뼈는 마치 사람이 손으로 배열해 놓은 것처럼 정확하게 인체의 구조대로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뼈는 붙어있는 뼈가 아닙니다. 다 떨어져 있습니다. 그 뼈를 힘줄로 덧입혀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들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뼈를 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 천사를 통해서 야곱을 치니까 힘줄이 끊어진 것입니다. 힘줄이 끊어지니까 당연히 힘줄에 의해서 뼈와 뼈 사이가 지탱되며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힘줄이 끊어지니까 뼈가 틀어져서 위골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게 되자 허리를 연결하는 이 골반의 뼈가 어긋나게 되었고 그는 척추를 다친 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야곱에게 영적인 문제를 육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엄중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은 비로소 울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팔과 손의 모든 힘은 허리와 다리에서 나옵니다. 이미 허리가 망가지고 다리의 뼈가 위골되어서 절뚝거릴 수밖에 없도록 망가진 사람이 붙들고 있는 이 팔의 힘이 얼마나 클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은 천사가 한번만 매치면 패대기쳐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을 때 비로소 이 야곱은 울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로소 이제 이 야곱의 꾀나 인간의 아집이 아니라 이 축복을 나는 너무나 필요하고 이 축복이 만약에 없으면 결국은 형에게 보복을 당하고 사랑하는 모든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터인데 이제는 내 힘으로 이 천사를 붙들고 매달려 축복을 받아내야겠다는 그 인간적인 기대마저 좌절이 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꾀나 고집이 아니라 간절한 회개의 탄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주셨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 천사 앞에 간절히 매달리던 육적인 방식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면서 이제는 힘이 아니라 마음에 간절함으로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울면서 간구하며 매달렸습니다. 육신의 힘으로 자기를 이길 때에는 축복해주지 않던 이 천사가 야곱이 울며 자신에게 매어 달리자 이 천사는 이 하나님의 사람 야곱을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이 천사가 누구이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야곱과 씨름했고 무슨 천사가 시골에서 올라온 이 야곱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렇게 씨름에 질 정도로 그렇게 허약한 천사를 내려 보내셨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더 이상 우리에게 힌트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종을 들기 위해서 온 사람이 그까짓 사람과 씨름을 해서 맥을 쓰지 못하는 천사였을 리는 없고 아마도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제껏 자기가 살아온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도록 일정한 시간 동안 내버려두셨고 그래서 자신의 육적인 힘을 모두 소진하고 이 영적인 일을 육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이 한밤에 긴 시간 동안 씨름으로 힘을 모두 쏟게 하셨고 그리고 그를 징계하셔서 이 허벅지의 뼈를 어긋나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적인 일을 육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매달려도 더 이상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려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끔 하신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이것은 울며 매달리며 하나님 나를 축복해달라고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매달리는 이 간절한 탄원은 비록 그것이 구하는 것은 이 육적인 방식으로 천사에게 매달리는 것과 꼭 같은 것인지 모르지만 매달리는 이 방식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써 천사를 굴복시켜 축복을 받아내고자 하였으나 이제는 마음이 쏟아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사랑과 자비, 용서를 간절히 갈망하는 회개의 탄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큼 하나님께 모욕적인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이스라 엘”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만약에 이런 이름을 사람이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신성모독적인 이름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이 야곱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야콥”이라는 말은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뱃속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자신이 먼저 나가겠다고 몸부림치던 이 야곱의 인간적이고 자기 꾀에 호소하고 계산에 빠르고 자기 이익에 집착하고 영적인 문제들조차도 육신의 방식으로 해결하던 인간중심적인 사람 그 야곱을 가리킨다면, 간사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이었고 이 이스라엘은 두고두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백성의 이름이 되었고 나라의 이름이 되었고 왕국의 이름이 되었으며 북왕국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영적인 왕국 이스라엘의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이긴 사람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입니까? 씨름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면 힘센 운동선수는 모두 이스라엘1, 이스라엘2, 이스라엘3, 이스라엘4라고 불러야합니까? 어디 우리같이 허리도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명함이나 내놓겠습니까?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같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안 주셨을까요? 왜 이삭과 같이 온유하고 덕스러운 사람에게 이 이름을 안 주셨을까요? 요셉처럼 빛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고 순결한 인격의 사람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안 주시고 가장 인간적이고 어떻게 보면 야비하고 어떻게 보면 불신앙의 고집이 강하였던 우리 닮은 야곱.
사람들이 아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중 누가 좋은지 투표를 하면 아브라함의 표가 많이 나올 것이고 그 다음에는 요셉의 표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삭의 표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마 가장 적게 나오는 표가 야곱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네 사람 중에서 천국에 가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나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고두고 이 아브라함의 가정이 점점 왕성하여져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까지 심지어는 이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영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의 별명까지 하나님이 야곱에게 부여하신 이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무엇인가 가슴에 묵직하게 밀려오는 것이 없습니까? 이 이스라엘의 이름은 하나님을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이것은 육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꺾었다고 해석을 한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아무 여지가 없습니다. 천사가 씨름에 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졌다”고 붙여준 이름이라면 도대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덕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주겠습니까?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이것은 자신의 고집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와 자기 깨어짐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은 화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부족한 지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아콤모다치오’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accommodation’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눈높이로 당신을 낮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주시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변화된 화법을 아콤모다치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은 아콤모다치오의 대표적인 화법입니다. 즉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의 영적인 축복을 육신의 힘으로 해결하여 받고자하느냐 어림없다.” 그러시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허벅지 뼈가 위골되고 허리의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팔에도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천사를 붙들고 매달려 이길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에 이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었을 때 그런 은총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며 매달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졌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현명하게 알아들어야합니다.
(예화) 여러분, 집안에서 어린 자녀들이 권력이 셉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권력이 셉니까? 여러분이 세지요. 왜? 돈도 힘도 여러분이 강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엄마, 자전거 하나 사줘요”, “돈이 어디 있는데 자전거를 사냐.”고 한칼에 잘라버렸습니다. 아빠한테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엄마보고 사달라고 미뤄버립니다. 애가 자전거 좀 사달라고 그래도 “넌 자전거 아무리 얘기해봐야 네 입만 아프지 엄마가 절대로 안 사준다. 그리고 자전거타고 길거리에 다니면 차에 치이고 위험해.”합니다. 이것은 사주고 싶은 뜻이 없기 때문에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가 매일매일 조르고 “엄마, 엄마, 내가 만약에 학교에서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 사줄 거야? 아니면 아침마다 쓰레기 버릴게 자전거 사줄래?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내가 쓰레기 버릴게.” 하면서 막 그러다가 “엄마, 사줘. 엄마, 사줘.” 그러니까 엄마가 나중에 웃으면서 “그래 내가졌다. 내일 사주마.”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가 너한테 졌다고 하는 항복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엄마의 마음에 자식을 향한 사랑이 그것을 이기게 한 것이지 사랑이 엄마의 뜻을 꺾고 돈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아들이 저렇게 원하니까 반찬을 줄여먹더라도 우리 아들 자전거 사줘야 되겠구나.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내가 졌다.” 하고 사주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장로님들 굉장히 착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지요? 대답을 안 하시네요. 그렇지요? 두 번째 대답을 안 하시네요. 가끔은 굉장히 크게 고집을 쓰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내가 졌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원하는 대로 한번 해보지요.” 이것은 진짜 완력에 져서 굴복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참 지나서 생각을 해보고 기도를 하고나서 그렇게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기더라는 화자의 하나의 호의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뭘 보여 주냐면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속성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를 꺾으시는 것처럼 은총을 베푸시는 아콤모다치오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뜻을 알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르면 우리를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한 예표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모든 것을 묵상할 때 커다란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양)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징벌하셔야 마땅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이겨 당신의 공의로써는 파멸하여야 할 인간들을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사 우리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아마도 연단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 깨어짐이, 진실한 회개와 간절한 매달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여기에서처럼 뼈저리게 경험한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바뀌신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중심의 깨어짐을 바라보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체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마음이 상한 자’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깨뜨려 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샤바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수동태형으로 쓰이는데 도자기 같은 것이 탁하고 깨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지만 통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는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이 ‘통회하는’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다카(דַּכָּא)’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고기 있지 않습니까? 뼈가 들어간 고기를 짓이긴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방배동에서 교회를 할 때 건너편에 총신대입구역이 있고 거기에 사당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사당역 사거리에 튀김집이 길거리에 여러 집이 있습니다. 튀김집들이 정말 맛있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집이 제일 맛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학교 강의가 끝나고 가끔 들러서 먹었는데 사실은 지금은 아주 깨끗한 닭고기의 살을 잘 다져서 깨끗하게 야채와 섞어서 튀겨주는데 원래 사당시장의 튀김의 명물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사왔는지 닭을 잡아서 주둥이만 탁 쳐서 벼슬하고 다 날려버리고 그 목은 바짝 자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집어넣느냐면 오징어포를 만드는 기계에 넣고 막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다 으스러져서 넓적한 너비아니처럼 됩니다. 그러니까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서 완전히 뼈를 아작을 냅니다. 그렇게 놓고 그것을 튀김옷을 입혀서 튀겨줍니다. 그런데 튀김옷이 투명이면 거기에 목이 보이겠지만 튀김이 투명이 아니니까 대개 밤중에 먹는데 모여서 먹습니다.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중국 사람들이 오리목을 오리 껍질과 오리 목, 오리 발을 최고로 칩니다. 그래서 오리목만 파는 집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아주 애용식입니다. 나중에 여기 온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튀깁니다. 그것이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껍질하고 있으니 기름도 많고 두 개만 먹으면 든든하고 열량이 됩니다. 난 뭔지도 모르고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닭 목뼈를 오징어포를 돌리는 데다 여러 번 놓고 완전히 뼈가 아작이 나서 살과 하나가 된 이 상태가 다카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바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이 사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무슨 뜻이냐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의 행동이라는 생산품들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을 어떻게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100%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틀림없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게 아는 것입니다. 일 하나를 시켰을 때 칼로 자른 것처럼 정확하게 해내는 사람은 마음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데데하고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서 끝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잘 모르고 덜덜거리는 사람은 그 마음속도 정리가 덜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하나의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공산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보십시오. 반복된 생각은 마음을 형성하고 반복되는 마음의 작용들은 행동을 생산해내고 어떤 행동들을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신중한 삶이 되고 싶으면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써야지만 세월이 흐르면 신중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태생은 까칠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안하는데 마음속으로 내가 예수의 향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면 지어먹은 마음이라고 좋으니까. 어느 목사님이 그럽니다. 아부도 계속 반복하면 충성이 된다고 합니다. 아침마다 아부를 하기로 결심하면 그것도 충성이 된다고 합니다. 간밤에는 변했는데 간밤에는 왕도 잤으니까 아침에 와서 보면 다시 마음을 먹고 와서 아부를 하고 집에 가다가 변심을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또 아부를 하고 결국 하다보면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듯이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지어먹은 마음이라도 그렇게 하다가 보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까지 바꿔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룩한 인격 그리고 사랑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고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실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빚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빚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두들겨 깨야지만 부서지는 딱딱한 흙덩어리를 가지고 그것을 빚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통회하는 심령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짓이겨져서 주님의 손에 딱 붙들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빚어질 수 있는 그런 심령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 악한 것을 간직한 채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죽어있는 나무에다가 예쁜 사과를 하나 매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매단 것이 처음에는 예뻐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은 나무는 그냥 있는데 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썩어가는 사과가 매달려있는 것이 그것이 잠시 눈가림으로 속일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운 그 나무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바꾸시려는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매일 사경회하고 회개하고 은혜 달라고 기도하고 은혜주시면 뭐 할 것입니까? 어디 가서 누구한테 돈 받고 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바뀌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이 되어서 짓이겨져서 아주 부드러운 진흙과 같은 마음이 된 그 상태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상태겠습니까? 그런 상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써 그 흙과 같은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시고 그 농로를 돌리기 시작하면 옛 모습은 변하고 새로운 형태로 그렇게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찬양)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야곱이 비록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이정도의 깊은 복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이 물 같이 녹아내리면서 깨뜨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는 감격하면서 하나님께 고백을 하게 되었고 또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그곳 장소의 이름을 벧엘에 이어 브니엘이라고 지었으니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프네 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소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었으니 이제 거기서 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임재를 경험한 깊이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가장 큰 가치이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부모의 축복을 생사를 걸고 형에게서 빼앗았는데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축복을 받았을 때 이 야곱의 감격은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상상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걱정과 근심이 야곱의 마음을 휘감지 못했습니다.
III. 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날려버렸고 브니엘에서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한 후에도 형에게 은총을 입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나 그는 희망을 형에게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오직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종종 두려움이 밀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 앞에 어떤 삶이 전개될지 모르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잠 못 들게 만듭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 끝까지 그 근원을 캐물어야합니다. 이렇게 그 두려움의 근원을 캐물어 가면 마지막에 그 두려움의 원인은 사실 대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부실한 관계가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대적의 수가 적으면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있고 많으면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대적의 숫자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믿음의 사람들이 자기를 의지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힘입어 산다고 하면 하나님에게는 대적의 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셔서 대적을 물리쳐주시지 않으시려고 한다면 열의 대적이든지 하나의 대적이든지 우리의 힘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너무나 뻔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고 하나님이 내편에 계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그렇게만 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든 열이든 천이든 대적의 수가 우리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고 문제가 되겠지만 무한한 자원과 능력으로 싸우시는 하나님에게는 열이든지 천이든지 일만이든지 그것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란이나 시련이나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그분과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나는 정말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주 여호와는 내편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종종 두려움이나 염려가 밀려올 때 저는 가끔 자신과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자주 마음속으로 반복하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쓰레기 같이 무가치한 염려와 근심으로 내 마음을 악에 물들게 하지는 않겠노라.’ 염려와 근심을 많이 한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악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피해 볼까? 아니면 내가 먼저 손을 써서 내가 먼저 어떻게 방법을 해볼까? 아니면 내가 먼저 선수를 쳐볼까? 아니면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부분의 생각들은 요령이고 야곱이 옛날에 많이 하던 그런 일들입니다.
그렇게 염려와 근심, 두려움이 휩싸이고 나면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생각하다 보면 육신은 매우 피곤해지고 마음은 기도의 은혜에서 점점 멀어지고 마음속에서는 미워하는 사람, 원망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책망하고 싶은 사람, 심지어는 복수하고 싶은 사람까지도 수 없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 이 더러운 것들에 의해서 불결하게 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이 쓰레기같이 가치 없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을 악으로 물들이지 아니하겠노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렇게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에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합니다.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이 쓰레기 같은 염려와 근심으로 내 마음을 악에 물들이지 않겠노라’하고 가슴에 힘을 꽉 줍니다. 그러면 마치 힘을 쓰면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밀려오면 또 기도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마음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마음지킴은 쓸데없는 생각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마음은 어느 한 순간에 덤벼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깔때기를 타고 서서히 서서히 흘러들어옵니다. 그럴 때 단호하게 단칼에 물리치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여러분에게 어떤 죄 된 욕망들이 마음속에 떠오른다면 이런 기도가 적합할 것입니다. ‘이 쓰레기 같은 욕망으로 내 마음을 더럽히지 않겠노라.’하고 단칼에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또 떠오르면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시 외치는 것입니다. 해보십시오. 저의 경험에 미루어 보면 일주일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우시는 것입니다.
형에게 희망을 거는 대신 하나님께 간구했고 결국은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인간도 막을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벌주시기로 하신 사람, 하나님이 은혜주시기로 한 사람 이 두 사람은 누구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잔꾀와 불신앙의 수많은 요소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시련과 연단을 받으며 주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갔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철저히 깨뜨려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항복을 받아내시고 그렇게 야곱이 항복하자 하나님은 “내가 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며 “그래, 네가 이겼다.”라고 말하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야곱처럼 육체의 힘으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중요하게 결정하는 일이 있을 때 머릿속에 염려와 근심으로는 수십 시간을 보내고 기도로는 1, 2분을 보낸 후에 결단하는 그 결단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 속에 내린 결단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일 수 있습니까?
야곱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 모두 박살을 내고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들을 모두 잃어버릴 지경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적인 문제를 육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보고자 예전처럼 몸부림쳤고 거기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어린아이처럼 울며 매달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에게 승리를 주셨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기에 그 이튿날 아침 브니엘의 새벽은 찬란하게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밤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겠다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아직도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기 싫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이 벼랑 끝에서 속히 벗어나 노래 부르며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여러분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방법이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혹시라도 오늘 밤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야곱처럼 이 얍복 강가에서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깨뜨려지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에만 희망을 갖도록 도와달라고 여러분도 어찌할 수 없는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회개한 그 강가에서 눈물로 화해함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행33:1-11)
녹취자: 김인철
I. 본문의 배경
결국 이 야곱은 우여곡절 끝에 아내들과 종들과 자녀들과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형을 만나기 전날 밤 홀로 남아 천사와 싸름하면서 다투었는데 그것은 이제껏 야곱으로서 살아 온 방식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하고 또 하나님 앞에 간구함으로서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큰 복을 내리시고 이후에 지워지지 않을 거룩한 이름을 하늘로부터 내리셨으니 그 이름이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겼다고 하는 의미의 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에서 지셨다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통회하며 짓이겨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이 야곱의 깊은 자기 깨어짐 앞에서 주님이 그를 향해 솟아오르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이렇게 '내가 너에게 졌다.'라는 말로 표현 하셨다는 것입니다.
II. 얍복강가에서 흘린 눈물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자기 깨어짐, 자기 꺾음, 자기포기 같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대로 사는 것은 쉽지만 그 본성을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굴복하고 내적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역사는 우리의 본성의 경향을 거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은혜를 달콤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성이 깨뜨려지는 깊은 아픔을 함께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기 깨어짐을 아주 극단화하여 자기 자신이 완전히 깨어지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 완전히 상실되기까지 몰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시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남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성화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성과 그리고 개별적인 모든 특성들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이지 자신을 모두 상실하고 혹은 마치 얼음이 하나 녹아서 큰물에 합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부서진다고 하는 이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나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창조하셨지만 모든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각기 다른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일뿐이지 저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오히려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개별성이 아니라 거기에 스며들어 온 죄, 그 죄가 불러일으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완고한 자기중심적 고집,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우리의 개별적인 인간성이 아니라 그 속에 스며들어온 죄와 이기적인 욕망 그리고 완고한 고집 그리고 신령한 것이 아니 세속적인 것에 마음이 움직이는 그런 종류의 육적인 감각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의 욕망에 흐르는 성향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깨뜨려지고 파괴되고 부서지고 꺾이고 함으로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A.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이런 깊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능가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성품에 깊이 들어가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흘린 이 야곱의 눈물은 이 야곱을 벼랑 끝에서 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섭리 속에서 리브가의 태속에서 있을 적부터 선택하신 이 야곱을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 속에 펼쳐지면서 야곱의 깊은 자기 깨어짐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체험을 통해서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 얍복 강가에서 예전에 자기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허벅지의 뼈가 어긋나고 주저앉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이 되었고 울며 회개하며 간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언제 이 에서가 야곱을 따뜻하게 맞이하고자 결심했는지 성경이 우리에게 힌트라도 주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야곱이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몰고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그래도 그렇게 뻔뻔스러운 인간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하나는 굳이 자신이 두려웠으면 다른 곳으로 갔지 바보같이 똑바로 길을 걸어서 자기와 정면으로 만나러 오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진작부터 이 야곱을 용서할 마음을 오래전에 가졌더라면 장정 사백 명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그냥 홀로 나아가서 "사랑하는 동생아! 이제 오느냐! 내가 너를 기다렸다." 이렇게 말하고 맞이하는데 사백 명의 장정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쓸쓸하다면 서너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나아가서 맞이하면 되었을 텐데 사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은 나의 생각에는 야곱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야곱을 만났고 어쩌면 에서의 마음속에 아직 삭이지 못한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마지막순간까지도 야곱은 야곱이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깊이 깨뜨려졌지만 그러나 그의 독특한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계산을 했습니다. 소떼와 양떼는 먼저 갔고 어쨌든 형이 그것을 박살내지 않고 어쨌든 받아 들였습니다. 이제 가족만 남았습니다. 죽어도 괜찮을 사람을 순서대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허접한 여종들, 거기에서 난 소생들을 1소대로 세우고 두 번째는 사은품으로 할 수 없이 딸려 온 그래서 7년을 허송세월 했던 레아와 그 소생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사랑했던 라헬과 그 자식은 뒤에 두고 자신이 맨 앞에 나아가서 형에게 빌었던 것은 형이 자기를 죽이면 그 다음 가족을 칠 것이고 종들은 어차피 사은품도 못 되니까 가고 그 다음에 사은품 가고 그래도 진품, 명품은 도망 갈 시간이라도 주자고 계산을 정밀하게 하고 절을 했습니다. 이 야곱의 마음속에 레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아의 시각에서 성경을 보면 메시지가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사은품으로 딸려 온 신세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절을 시켰습니다. 오직 라헬하고만 같이 가서 함께 자식과 절을 했으니 이것은 이 사람만 나의 진정한 아내이고 가족입니다 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사은품이 명품을 보며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의 법도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만약에 형제 부부가 절을 해야 할 상황이 온다고 하면 우리들은 예법 상 맞절을 합니다. 형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서 20년 차이가 나도 형이 배를 내밀고 동생 부부의 절을 받고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은 형 앞에 나아가 그것도 틀림없이 땅 바닥에서 절을 했는데 일곱 번 절을 올렸습니다. 저는 그것이 근거가 있는지 모르는데 어떤 목사님은 이것이 당시의 신하가 왕에게 예의를 표하는 수준의 절이라고 합니다.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도대체 이 형이 무엇이기에 이 야곱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왕에게나 올릴 일곱 번의 절을 올렸고 이것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형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상전이라는 뜻입니다. 종이 부르는 혹은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이런 상전과 같이 높이는 호칭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얼마나 낮아 졌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절을 한 후에 형에게 가까이 나아갔는데 그 전날 밤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환도 뼈를 쳐서 척추와 골반 뼈가 어그러지면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절뚝거리며 가야 했습니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온 힘을 쏟아 부으면 소용도 없는 천사와의 씨름으로 정력을 낭비 했습니다. 그 먼 길을 여행을 왔고 오는 동안에 마음고생은 얼마나 많았고 이 형을 만나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은 그 초조함과 모든 것들은 얼굴에 묻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몰골은 아침에 동생을 만나러 나온 에서와는 비교 되지 않을 만큼 여행에 지치고 그런데다 다리를 질질 끌고 절름발이가 되어서 자기에게 나오는 이 야곱의 모습을 형인 에서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가 막힌 연출이었습니다. 그때 이 형 에서의 마음속에-에서는 예전의 전력을 보더라도 아주 감정적이고 단순한 사람입니다.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한순간에 울컥하면서 아버지를 속이고 나를 속여서 축복을 빼앗고 도망가더니 결국은 저것뿐이냐 하는 생각에 울컥하고 솟아오르면서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확 솟아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격정을 못 이겨서 야곱은 형에게 그냥 걸어서 나아갔는데 형 에서는 달려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며 먼저 에서가 울었고 그리고 이 냉철한 야곱은 분위기를 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연구대상입니다. 이번 사경회는 여기까지밖에 못하는데 형이 그 후에 보면 확 업 되어서 "우리 같이 가서 살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분명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제가 뒤 따라 가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랬더니 "왜 그러냐?" "너무 힘들게 이 가축들을 몰고 왔기 때문에 조금만 더 가면 이 가축들이 길거리에 쓰러집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며칠 있다가 형님 뒤를 따라 가겠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랬더니 형이 "그러면 내 일꾼들을 여기에 몇 명 남겨 두어서 너를 도와주라고 할게." 야곱이 그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형님 보호 필요 없습니다. 저희 스스로 알아서 빨리 따라 갈 테니 제발 형님 가십시오." 그리고 안 갑니다. 거기에 왜 가겠습니까? 갔더라면 이 단순하고 무식한 형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얍복 강가에 흘린 눈물을 싹 잊어버리고 울컥하는 복수심에 사로잡히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하다 야곱도 울면서 피차 울게 되었던 것입니다.
B. 회개한 그 강가에서 화해 함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랬다 보다 하지만 야곱은 마지막 순간 까지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를 위해서 역사 하시리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모사꾼, 라반과 더불어 20년을 살면서 터득한 그 모든 술수를 종합해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극적으로 해결하시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아마 야곱은 기껏해야 에서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고 빌면 "알았다! 내가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다. 물러가라!" 이정도만 되었어도 야곱은 감지덕지 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겠다고 칼을 갈고 그리고 에서를 만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가족들까지 죽어도 좋을 순서대로 배치했던 이 사람이 형 에서가 달려 나와서 먼저 끌어안고 통곡을 하며 울리라고는 그리고 뭐라고 불러 줍니까? "내 동생아! 내 동생아!" 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적이 회개하고 깨뜨려진 그 강가에서 화해하는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언제나 우리의 맺힌 것을 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원하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복을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사람에게 흘러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때는 소명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망가지고 깨뜨려지고 파괴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고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다가 하나님께 갈지 예언 할 능력은 없지만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될지는 압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를 사용해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자기를 내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서조차도 야곱을 통해 복 받게 하시고 싶었고 야곱과의 관계가 원한과 복수로 남은 상태에서는 이 야곱의 일생이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던 아브라함의 유업을, 약속을 계승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기가 충분히 깨뜨려 지는 경험을 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은총의 증거를 에서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맺힌 것을 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도록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인간의 성격은 운명입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 미움과 원한은 성격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람을 눈을 씻고 찾아보십시오. 불신자들 중에서 말입니다. 불가능입니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수하지 않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맺힌 것을 풀게 하십니다. 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맺힌 것이 없는 마음을 갖게 하심으로서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을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그 복의 통하는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마음에 맺힌 것을 풀지 못하고 미움과 복수심으로 불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원망을 품고 복수심에 불 탈 때 가장 커다란 피해자는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도 있지만 그 은혜는 복수심속에 소비되고 그리고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은혜를 받았던 마음이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심령에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축복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게 하시는 것이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셨는데 히브리말로 '베카' 입니다. 네 안에서, 즉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시는 복 때문에 모든 민중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 와서 말하자면 모종의 연결을 갖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은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그 은혜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랑의 빚이라고 믿고 이 은혜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열매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람을 받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결과적인 복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충분하다고 믿고 이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불리어진 찬송이지만 불신자도 좋아하고 텔레비전 광고에까지 나오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그리고는 하나님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면 볼륨이 스르륵 줄어들어 없어져 버립니다. 그것이 텔레비전 광고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노래를 좋아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지만 어느 유명한 여배우가 동맥을 끊고 자살할 때 마지막으로 만난 지인들에게 이 노래를 너무 좋아 한다고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은혜 받은 성도는 그 당신을 '나'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우리는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가 그렇게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았으니 이 세상의 더 많은 이웃들이, 가족들이, 나의 지체들이 이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나로부터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품고 이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일수록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나는 당신을 위해 섬기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 하여야 합니다. 더 신앙이 깊어지면 그 정도에 그치지 말고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이 교회를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처음 태어 난 이후에 나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두 번째 태어난 이후에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받은 후에 그 은혜를 유지하면 사는 것은 더욱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를 주신 그 계획과 목적을 따라서 살 때 가장 그 은혜가 잘 지속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많이 주셨으니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많은 복들 때문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이웃들, 사랑하는 가족들이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희생하고 섬겨서 좋은 것은 그들이 누리게 하고 나쁜 것은 내가 당하고 어쨌든 내가 있기 때문에 내 가까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시간마다 가끔 명언처럼 되풀이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책에서 읽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살아 오면서 오랜 사 유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언급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의 마음을 쏟아 부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를 따돌려도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받는 자 보다는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 그 혜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것 같지만 사랑하는 나는 이미 더 좋은 것을 먼저 받은 것입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는 여러분이 그 은혜를 엔조이하고 좋아하라고 하나님이 영적인 소비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받은 바 그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은 은혜 받은 성도로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 가 그들에게 복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화성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탐사선을 보내면서 오직 관심이 무엇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물의 흔적만 발견이 되면 감탄을 하면서 과학자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과학자들은 이미 결론을 냈습니다. 화성 지표면 아래에는 약 100킬로미터의 얼음이 얼어 있다고 합니다. 그 얼음과 물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얼음이 있고 물이 있다면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많고 현재 없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생명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축복 송을 설명할 때 성경은 꽤 길게 그 에덴동산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는 강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강은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허허벌판과 같은 사막이라도 일단 물이 흘러들어가게 된다면, 물만 계속 흘려보낸다면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속에서 수초가 생겨나고 그리고 땅위에 씨앗들이 뿌려져서 싹들이 나고 나무와 숲이 우거지고 물속에서는 고기들이 놀고 어디에서 왔는지 짐승들이 옮겨 와서 터전을 꾸리고 그리고 이렇게 먹을 것들이 풍부해지면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을 열고 이 신령한 은혜와 복, 이 땅을 복들을 부어 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지를 적신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땅속에 스며들어서 생명의 세계를 잉태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희 집안도 그랬지만 아마 여러분의 집안도 아마 한 사람이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복음화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그 결과는 얼마나 놀라운 축복으로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축복을 관계에서 확인함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못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도 못한 일을 그리고 그 온유했던 이삭도 못한 일을 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이 모든 인간의 결점을 이기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 보다 더 놀랍게 이 야곱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얍복강 가에서 자기를 징계하시면서도 축복해 주신 것을 야곱은 관계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 절을 한 후에 형을 주님이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 이다.’ 이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형님이 하나님 같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고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정말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 계심을 형님을 통해 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을 보니 하나님을 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에 대한 모든 개념은 너무 현세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념의 번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이고 그래서 사람을 바꾸어 놓고 변화시키는 아주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삭이 비록 속여서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야곱에게 이삭이 축복을 베풀어 주었을 때 그 핵심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님이 야곱의 기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야곱이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하는 축복 이 두 가지가 야곱에게 준 이삭의 마지막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질 때에는 심히 고통스럽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홀로 남아 육신의 힘으로 몸부림 칠 때에는 그는 지극히 고통스러웠고 형 에서가 사백 명을 이끌고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아마 그에게 이 밤은 고통의 밤 이었고 괴로움의 밤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생의 벼랑 끝, 이제는 더 이상 물러 설 때도 없는 그 벼랑 끝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깊이 깨어 졌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20년 동안 살아 왔던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하나님 한분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며 매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이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을 축복 해 주셨고 하나님의 이런 축복을 야곱이 받으니 누구도 이 야곱을 감당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 벼랑 끝 이었지만 거기에서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을 자기 깨어짐에서 발견했고 깊이 통회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이 모든 실패를 딛고 하나님 앞에 이기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며 하나님의 경륜에 주인공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렇게 하나님의 경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누릴 신령한 복을 언제나 하늘을 열고 넘치도록 부어주고 싶어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영광은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고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그리고 더 큰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흔드는 것을 세상에서는 영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많은 재산을 누리고 다른 사람보다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복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복은 그런 복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비록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지 않은 사람은 허무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며 살 것이냐 이 세상에 있는 자원과 복을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돈 많이 벌게 하시고 신용으로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되 이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이웃을 위한 복의 경륜의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는 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저는 종종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힘없이 쓰러질듯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 쳤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심을 오래도록 보존 시키셨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 가고 잘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자라 갑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면 비록 그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의 가정에도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까? 믿지 않던 부모님들 전도하고 형제들 하나씩 하나씩 예수 믿게 만들고 그때가지 그는 정말 수많은 시간들을 눈물로 기도하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고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늘 괴로운 길 만이 아닌 것은 기업이 되신 하나님이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그 사람 가까이 언제나 계셔서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은혜를, 큰 사랑을 언제나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은혜를 주신 사람들을 그냥 두실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사용하십니다. 그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고 전도된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말씀 안에서 자라고 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는 어느덧 쓰러질 듯이 상처 받은 죄인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문을 두드렸는데 이 사람이 어느덧 그리스도 교회의 큰 나무가 되어서 수많은 지체들을 깃들게 하는 보호자가 됩니다. 만약 인격적인 승복 없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자기 깨어짐이 없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의존하여 매달리는 간절한 간구가 없고 생애적인 결단이 없었으면 낙망과 시름, 번민과 방황 속에서 허접하게 살다가 쓰레기처럼 사라졌을 가엾은 인간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주시고 자기가 깨뜨려져 주님을 굳게 붙들며 사니까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로 그를 변화시켜 세상에 쓸모없는 오네시모와 같은 도망친 노예와 같은 사람을 바꾸어서 이제는 정말 유익한 사람으로 사용하여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순간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며 이제껏 시시때때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어떻게 사셔야 되겠습니다. 오늘 주님 굳게 붙들고 신앙으로 이기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 정말 복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우리 하나님께 매달립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나 지고 부담이나 주고 얹어서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인생의 길을 지나든지 하나님을 우리의 기업으로 삼고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경륜이 주인공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이 은혜와 진리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우리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이 일을 위하여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깨뜨려졌던 이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야곱을 건져 준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그래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도록 그리고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도록, 전날의 한숨이 변해 우리의 찬송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마음을 녹이는 기도가 되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Ⅳ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