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2016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6년 10월 23-12월 1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29일
목 차
1. 여호와의 생기가 불 때(겔 37:1-7) 2016.10.23 주일오전설교 1
2.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드실 때(겔 37:7-10) 2016.10.30 주일오전설교 9
3.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겔 37:11-13) 2016.11.06 주일오전설교 15
4. 내 영으로 살아나게 하리라(겔 37:14) 2016.11.13 주일오전설교 21
5. 고국 땅에 살게 하심(겔 37:14) 2016.11.27 주일오전설교 28
6. 부르짖는 자의 샘(삿 15:14-19) 2016.12.04 주일오전설교 35
7. 은혜로 살리실 때(눅 24:32-35) 2016.12.11 주일오전설교 43
8.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왕상 19:4-8) 2016.12.18 주일오전설교 50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1) 2016. 10. 23 주일오전예배
< 여호와의 생기가 불 때 >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겔 37:1-7)
I. 본문해설
- 바벨론 포로 시대 때 활동한 선지자
-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선지자의 소명을 받음
- 바벨론 포로 생활로 절망에 빠진 때
-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
II. 마른 뼈들의 골짜기
-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심
- 권능 임재+영의 이끌림+환상 제시
- 사방에 널려진 마른 뼈들을 보이심
-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임
-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줌
- “이 뼈들 능히 다시 살 수 있겠냐?”
- 인간의 상식으로 불가능함을 암시
- 침체 속에서 실패를 운명처럼 여김
- but,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심
III. 마른 뼈를 살리신 방법
A. 말씀을 대언할 때
- 선지자에게 명령하심 “대언하라”
-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 마른 뼈들에도 찾아오시는 하나님
- 그것들과 대화, 지성에 말을 건네심
- 마른 뼈도 생각할 수 있음(계2:5)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관계를 끊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4절)
- 말씀 theopneustie
- 이해 affection
- 말씀으로 생명과 영혼을 창조하심
- 이 교리의 적용:
B. 생기를 보내실 때
- “너희가 살아나리라”(5절)
- “내가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니”(5절)
- “생기” ruach‥영, 숨, 호흡, 바람
- 영적 호흡까지 멎은 상태를 보여줌
- 모든 영적 활동은 하나님을 의지함
- 영혼의 고상한 활동은 더욱 그러함
- 영혼의 생기와 인간의 삶의 관계성
-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 인간답게 살게 하는 영혼의 생명이 없음
- 이것은 세상과 사람의 자원이 아님
- 망가진 것에 익숙해져 가는 우리들
- 생명 없는 삶에 항거하지 않는 생활
- 성령의 충만한 은혜 곧 사랑과 생명
- 이 교리의 적용:
IV. 적용과 결론
- 인생의 모든 문제는 생명 없음이다
- 뼈다귀로 가득 찬 계곡에 생기를 보내심
-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생명의 바람이 분다
- 마른 뼈로 남의 인생처럼 살 것인가?
- 하늘 생명의 은혜를 구하자!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2) 2016. 10. 30 주일오전예배
<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드실 때 >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7-10)
I. 본문해설
- 마른 뼈가 살아나는 과정을 다시 묘사함
- 생기를 불어 넣기 전의 광경을 상세 히 묘사함
- 뼈가 맞춰지고 근육이 생기는 그 이상임
- 생기를 보내 살리심으로 우리를 교훈하심
II. 마른 뼈에 대언할 때
a. 뼈들이 서로 연결됨(7절)
b.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름(8절)
c. 살 위에 가죽이 덮임(8절)
- 순서적으로 질서 있게 일하신 주님
-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보여줌
- but,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음
III. 생기 향해 대언할 때
- 생기를 향해 대언하도록 명하심(9절)
A. 침체에 빠진 백성들
- “이 죽음을 당한 자” 영적 침체 가능
- “살아나게 하라” 영적 부흥의 필요성
- [영적 죽음vs영적 생명]
- 이 대언을 생기에게 명령하게 하심
- 죽은 영혼을 살릴 능력이 오직 주님께 있음
- 교회가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
B. 큰 군대가 된 백성들
- 사상의 뼈, 실천의 힘줄, 체험의 살
- but 아직 생기 없어 군대되지 못함
-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 소비적 영성
- 영적 회복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님
-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경건이 아님
- 참된 경건은 은혜와 지식에서 온다
- 경건은 삶의 초점을 자아⇒하나님으로 옮기는 것
- 단지 착한 양 떼를 넘어 강한 군대가 필요함
- 전면적인 영적 싸움의 때를 직시하라
IV. 적용과 결론
-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생명 없음임
- 마른 뼈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영적 회복은 자기만족과 소비가 아님
- 오히려 교회를 군대 만드시는 방법
- 사명으로 돌아가 부흥을 간구하라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3) 2016. 11. 6 주일오전예배
<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37:11-13)
I. 본문해설
-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킴
- 뼈들의 생각:
a. 말랐고 b. 소망 없음 c. 모두 멸절되었음⇒완벽한 절망
-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사뭇 다름
-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책임지심
II. 하나님의 일을 예언함
- “대언하라” 하나님의 판단을 보여줌
- 현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A. 무덤을 여심
- “무덤” 죽음의 상징어로서 희망 없음
- 이스라엘의 영적인 활기 없음을 암시
- 말씀+마음+은혜에 응답할 줄 모름
- 마른 뼈 가득한 무덤 속 음습한 것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러했음
-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를 살리는 하나님
B. 나오게 하심
- 무덤에서 나온 자에게는 새 삶이 기다림
- 무기력과 실패를 운명처럼 여겼음
- 문제는 생명이다! 이전과 다른 삶!
- 무덤과 같은 상태에서 걸어 나오라
- 운명처럼 여긴 모든 것에 항거하라
- 하나님께 생명을 구하라! 새 삶을!
C. 돌아가게 하심
- 이스라엘 바벨론 포로 귀환의 예고
- 거기서 Isr. 선택의 목적을 이루게 하심
- 하나님의 생기가 공동체를 다시 살림
- 영적 부흥은 사명으로 돌아가게 함
- 자기만족적이고 소비적인 영성이 아님
- 은혜의 회복은 사명으로 돌아가게 함
- 신자의 행복은 주께서 둔 자리에 사는 삶
- 주님이 세워 주셨던 자리로 돌아가자
III. 적용과 결론
-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의 절망
- but,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
- 무덤을 열고, 나오게, 돌아가게 하심
- 문제는 생명! 영적인 은혜를 구하자.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5) 2016. 11. 27 주일오전예배
< 고국 땅에 살게 하심 >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7:14)
I. 본문해설
-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주님의 약속
- Isra의 국지적 회복과 우주적 성취
a. 영을 두심 b. 살리심 c. 고토정착
- 바벨론포로 귀환을 통한 구원을 계시함
II. 고국 땅에 살게 하심
- 구속사와 관련한 특별한 의미가 있음
- “너희 살게 하고 너희 땅 위에 정착∼”
- al admatkem “너희들의 땅 위에서”
- 좁게: 포로귀환 + 넓게: 예수 안의 삶
A. 이스라엘 백성과 “땅”
- 인간의 창조와 그들에게 땅을 주심
- 첫 인간들의 범죄와 땅에서 추방됨
- 다스리고 복종시킬 땅의 나그네 됨
- Isr.의 선택과 가나안 땅을 약속함
-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서 땅이 좌우됨
B. 가나안 땅과 그리스도
- 가나안 땅을 주심과 그리스도의 구원
- 구약의 땅, 신약의 하나님나라 통치
- 이스라엘의 귀환을 영적인 의미로 봄
- 육적 Isr. 왕국 깨고 영적 나라 도래
- 생명이신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살게 하심
- 그 영의 충만한 내주가 예수를 통해서
- 예수 안에서만 쉼을 누릴 수 있게 함
- 그 분 안에서 접붙여 한 생명을 누림
C.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 신자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
- 영적 예수의 몸에 접붙임⇒사랑, 생명
-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영적 연합(영혼)+교회의 기능(육체)
- 그 땅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뤄감
-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면서 땅에 삶
- 그 땅 안에 있음에 감사하며 섬겨 삶
III. 적용과 결론
- 상실할 수 있는 땅과 그럴 수 없는 구원
- 그 땅 안에서 순종할 때 행복을 누렸음
- 우리는 더 크고 영원한 땅을 받았음
- 온전한 믿음과 순종과 경건의 추구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누림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6) 2016. 12. 4 주일오전예배
< 부르짖는 자의 샘 >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삿 15:14-19)
I. 본문해설
- 여호수아 때 가나안 완전정복 못함
- 요단강 중심으로 중앙 지역을 정복함
- 남동-모압, 동-암몬, 서-블레셋
- 사사를 세워 주변 민족의 압제에서 건지심
- 사사는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지는 않음
- 삼손은 신앙의 인물임(히11:32∼33)
히11:32-33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II.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
- 블레셋 인의 침공에 삼손을 넘기려 함
- “여호와의 영이∼갑자기 임하시매”(14절)
- 단단한 삼 줄로 만든 밧줄이 끊어짐
- 무장 없이 다닌 삼손의 믿음을 보여줌
-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천 명을 죽임
-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능력임
III. 침체에 빠졌을 때
- 그러나 역사를 끝내고 곧 침체에 빠짐
- 육체의 기진(목마름)+낙심케 됨
- 집중적 헌신과 영적 침체가 밀접함
- 충만한 신앙자랑×주가 붙들 때만
- 영적인 침체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 환경의 어려움과 영적침체 연결됨
- 그러나 침체의 경험을 통해 성숙하게 됨
IV. 샘을 터뜨리신 하나님
A. 샘물이 솟게 하심
- “하나님이∼우묵한 곳 터뜨리시니"
- 물을 솟아나오게 하신 하나님(19절)
- 삼손이 목마름을 통해 한계를 느끼게 됨
-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의존을 배움
- 영혼의 침체를 통해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됨
-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필요를 깨달음
B. 소생케 하신 하나님
-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19절)
- Heb. “마셨고 그의 영이 돌아왔다”
- 육체의 힘과 정신작용의 한계를 의미함
- 이상적 인간의 상태를 생각해보라
- 굳센 정신이 장악한 힘 있는 육체다
-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의 힘을 주시는 주
- 우리를 침체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C. 부르짖는 자의 샘
-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니”
- 삼손이 깊은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됨
- “엔학고레” - 그 부르짖는 자의 샘
- 육체와 영혼의 침체를 통해 깨달음
- 부르짖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 타고난 육체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
- 연약함을 깨닫고 주께 부르짖게 하심
- 당신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하심
- 지금도 부르짖는 자가 샘물을 누림
V. 적용과 결론
- 용사와 같았던 삼손도 겪은 탈진함
- 이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음
- 영혼의 침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
-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자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7) 2016. 12. 11 주일오전예배
< 은혜로 살리실 때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 24:32-35)
I. 본문해설
- 예수의 부활 후에 일어난 한 사건임
-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과 11제자
-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 제자들 중 2인: 예루살렘⇒엠마오
- 부활한 예수와 동행했으나 알아차리지 못함
- “이 모든 된 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 예수께서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심
II. 침체에 빠진 제자들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 낙심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는 제자들
- 더 큰 문제는 신학적 혼란임: 죽음+부활
- 범죄와 함께 무지가 침체의 원인임
- 침체에 빠진 자들을 찾아오신 예수
- 많은 얘기를 나누나 근심과 슬픔이 더함
-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그들을 살리심
III. 마음이 뜨거워질 때
- 예수가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심
- 함께 떡을 나누신 후 보이지 않으심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 부활의 소식과 은혜와 성령의 체험
A. 성경의 해석과 은혜
-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32절)
-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책망하심
-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심
-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라고 고백함
- 은혜는 성경의 해석을 통해서 임함
- 성령강림 후 예수 중심의 성경 해석
-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심
- 현실에 맞설 용기와 힘은 은혜를 통해
- 진정한 힘은 영혼에 부어진 은혜의 힘
- 팍팍한 현실일수록 말씀에 집중하라
B. 예수의 고난과 부활
- 성경 해석의 중심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
- 신학적 혼란: 십자가의 저주+부활함
- 예수님의 설명으로 십자가⇒소망을 발견함
- 다시 나타나 또 성경을 설명하심(36, 45절)
36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45절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단지 예수 사심을 기뻐함-신학적 이해
- 성령강림을 통해 이 신학을 체험적으로 이해함
-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45절)
- 신앙의 깊이는 결국 예수를 아는 깊이임
- 제자들이 깊어졌던 것처럼 깊어지라
C. 성도의 교제와 은혜
- 성도의 교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됨
- 예수를 못 만날 때 낙심과 침체를 나눔
- 더 깊은 침체와 낙심에 혼란을 느낌
- 예수를 만나자 서로 마음이 뜨거워짐
- 실망과 낙심 중 예수 중심의 교제가 필요함
IV. 적용과 결론
- 오랫동안 따라 다녔던 예수의 죽음 후
- 낙심과 침체 속에 삶의 목적을 잃음
- 예수를 만났는데도 그렇게 될 수 있음
-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함
- 다시 성경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함
-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나?
- 다시 현실을 맞설 용기를 회복하라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8) 2016. 12. 18 주일오전예배
<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 19:4-8)
I. 본문해설
- 아합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모음
- 엘리야의 제안, 바알 450명, 아세라 400명
- 영적인 싸움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둠
- 더욱 사악한 왕후 이세벨이 기다림
- 악한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죽임
- 3년 6개월 만에 기적의 비를 내리게 함
II. 침체 속에 낙심할 때
- 이세벨의 서슬 시퍼런 통보와 낙심
A. 두려움과 영혼의 침체
- 믿음이 사라지고 나니 두려움이 엄습함
- 육신의 탈진과 영혼의 침체로 두려움
- 담대했던 과거사와 뚜렷이 구별됨
- 브엘세바로 도망해 홀로 있기를 원함
B. 낙심 속에 죽기를 구함
- 사환과 헤어져 하룻길쯤 더 나아감
- 낙심할 때 홀로 있고자 함⇒생명력
- 주저앉아 낙심할 때 자존감이 사라짐
- 단절된 무력감 속의 영적 무장 해제
-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III.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 굶주린 선지자를 먹여 주신 하나님
-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잠을 청함
- 낙심한 자의 위로는 잠시 사망과 유사
- 살아갈 힘을 잃은 자들을 위로하심
- 살아갈 강함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심
- “어루만지심”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
- 육신에 필요한 공급은 인격적인 사랑의 표
- 물질이 아닌 관계를 확인하는 신앙이 필요함
- 낙심해 있을 때도 사랑하시는 주님
-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심
-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신뢰함
IV. 적용과 결론
- 인생을 살면서 항상 강한 사람은 없다음
- 매 순간 만물을 붙드심으로 세계가 존재함
- 침체와 낙심 속에서 자기의 약함을 배움
- 그때도 사랑으로써 어루만지심
- 현실의 상황에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보라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1 (2016.10.23 주일오전설교)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1 (2016.10.23 주일오전설교)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1 (2016.10.23 주일오전설교)
여호와의 생기가 불 때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겔 37: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 시대의 사건입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 가운데 에스겔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이름입니다.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소명을 받았고 그래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래를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적인 심판과 미래의 회복을 알려준 선지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본 환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환상 속에는 여러 가지 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었는데 이것을 이번과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마른 뼈들의 골짜기
에스겔이 본 환상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의 임재와 함께 그는 성령에 의해 이끌렸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목격하였습니다. 그것은 큰 골짜기의 환상이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당연히 푸른 숲과 나무가 가득하고 맑은 개울이 흘러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골짜기는 황폐한 골짜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언제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르는, 언제 군인들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뼈들이었습니다. 살은 다 썩고, 근육도 모두 소멸하여 다 티끌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썩어가고 있는 뼈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햇빛을 받아 바짝 마른 그런 뼈들이었고, 또 아무 살도 붙어있지 않은 그러한 뼈였습니다. 그런 뼈가 가득한 골짜기, 그것은 에스겔에게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봐라,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이름하고 온 땅과 만방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 마른 뼈와 같이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질기디 질긴 생명령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조상적부터 험한 인생을 살며 유목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 모질고 그 많은 풍파를 이겼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애굽 땅에서 그 긴 세월동안 종살이를 했고, 광야 40년의 세월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과 전쟁,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도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그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끈질기게 견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도 여전히 질기디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땅을 떠나 이방의 종살이를 하고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기디 질긴 육신의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죽음이었습니다.
만약에 오늘 여러분을 주님이 당신의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신다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들일까요? 반쯤 죽어있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오늘 이 에스겔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전히 죽어있는 사람들일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점점 하나님을 믿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현대인으로서의 삶에 어느 공허한 부분들을 부분적으로 메꿔줄 수 있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종교를 그나마 인정하고 존중할 뿐입니다. 삶에 이런 생각들은 삶의 모든 부조화와 모순을 만들어 냅니다. 머리로는 유일신론을 생각하지만 가슴으로는 다신론을 느끼고, 그리고 삶으로는 무신론의 삶을 영위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마른 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질기디 질긴 생명력으로 오늘날의 사회를 영위해 나가고 있고, 이 속에서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을 나름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모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그리고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동하고 재산을 모읍니다.
그러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다시 살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예, 그까짓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뼈들이 능히 다시 살아 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마른 뼈들과 같이 죽은지가 오래 되어서 이미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뼈들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역사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묘미는 바로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 인간의 뜻으로는 더 이상 이룰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제껏 나를 믿으며 살았던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없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떠올려도 실제 마음속에 우리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나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명이 없다는 확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그저 상식을 따라 살아가는 평범한 동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영혼의 침체가 아주 오래 계속 될 때 인간은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시고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주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라고 찬송하게 만드십니다.
III. 마른 뼈를 살리신 방법
A. 말씀을 대언할 때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신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마른 뼈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선지자에게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하게 제시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어느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절망으로 가득 찬 골짜기에서 그 마른 뼈들을 살려내셨을까요? 첫째로 말씀을 대언할 때입니다.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주신 명령은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마른 뼈다귀들과 하나님이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미 살과 힘줄이 모두 사라지고 마른 뼈만 남은 그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마른 뼈들조차도 인간을 창조할 때처럼 “살아날지어다” 해서 살리시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마른 뼈들에게 대화를 제의하시고, 여전히 죽어있는 그 마른 뼈들에게 지성을 향해 말을 건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들이 영적으로는 모든 살과 근육을 잃어버리고 마른 뼈가 되어서 골짜기에 누워있는 뼈 덩어리들이 되었지만 그 뼈 더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마른 뼈도, 죽어있는 자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계시록 2장 5절에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 심한, 그리스도께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는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시록 2장 5절에서 그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게 가서 그 촛대를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에게 예수님은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지성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을까? 그리고 지금 처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던 뜨거운 은혜를, 성결한 삶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하는 사람만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적으로 마른 뼈처럼 쌓여있는 골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대언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마른 뼈와 같이 되어버렸다 할지라도 도저히 그 관계를 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멀리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서 집회를 간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많은 부흥회를 했지만 대부분 불을 끄고 안수기도를 해주거나 아니면 은사집회를 하거나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별로 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경회 같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건네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입니다. 비록 불순종과 반역으로 그 긴 세월을 보내고 지금은 마른 뼈처럼 골짜기에 누워있는 뼈 무더기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요.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마른 뼈와 같이 죽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역을, 얼마나 많은 죄를, 얼마나 많은 불순종을 저질러 하나님을 배반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른 뼈들에게 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리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그러나 그림 같아서 우리에게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신 동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만물과는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드넓고 무한한 우주와 이 모든 땅과 만물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창조되었고, 그것은 단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티끌을 빚어 사람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흙으로 빚은 그 무엇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흙으로 빚은 사람이 살아있는 인간이 됩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어떤 동작이 있었습니다.
(찬양)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후’ 이렇게 하심으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그 사람에게 영혼을 부여하셨고, 그러자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써야할 지에 대한 생각이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그 인간의 손에서는 매우 훌륭한 문학적 창작물들이 생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인류 역사에서 사람이 지은 수많은 감화력이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경을 기록하는 인간의 마음에 특별한 작용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떼오 푸뉴스티에’(theopneustie)라는 작용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동, 혹은 영감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을 기록하는 인간의 마음에 ‘후’하는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그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 마지막 세 번째 그림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까? 아닙니다. 앞에, 뒤에, 바로 왼쪽에, 오른쪽에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순간에도 가운데 있는 나는 졸고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힘없는 백성인데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집안 사정과 네가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고 묻고 그리고 황제가 자신의 제국에 대해서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말할 때 꾸뻑거리고 침을 흘리며 졸고 있다면 여러분은 참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영화관처럼 생각하니까 예배 시간에 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민방위 교육 시간처럼 생각하니까 조는 것입니다. 나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뒤에 가서 서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초신자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으십니까? 졸음이 오지 않는 교회로 교회를 옮겨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하나님은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읽으며 깨달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지성으로 이해하던 우리에게 이 말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이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큰 감동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사랑의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영혼의 생명의 부흥을 누릴 수 없고, 만약에 이렇게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없이 누리는 어떠한 신비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할 때에 골짜기에 가득한 이 마른 뼈들을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른 뼈는 거기 그 골짜기 위에 그렇게 있어왔습니다. 많은 뼈들이 그 뼈들 위에 뼈를 보태고 역사는 흘러갔지만 그 뼈들은 거기에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도, 비가 올 때도, 낙엽이 질 때도, 눈이 내릴 때도 그냥 마른 뼈는 마른 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라깽이가 된 뼈다귀들 위에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외치게 하십니다. 마른 뼈와 같이 그렇게 말라깽이가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언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생기를 보내실 때
마지막 두 번째는 생기를 보내실 때였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기에 생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하흐’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영, 숨, 호흡, 혹은 바람이라고 번역되는 폭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더라” 할 때에 그 신이 ‘루하흐’의 번역입니다. 거기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것은 생기라고 번역되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숨을 들어가게 하리니 혹은 바람을, 혹은 호흡을 들어가게 하리니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즉, 영적인 호흡이 멎어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몸이 너무 위중할 때 자신의 힘으로 숨조차 쉴 기운이 없기 때문에 산소 호흡기,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중환자들을 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그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영적으로 호흡까지 완전히 멎어버려 식물인간, 그것을 지나서 마른 뼈다귀가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마른 뼈들과 같은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생기를 들어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하등한 활동과 고등한 활동이 있습니다. 하등한 활동은 먹고 그 다음에 배설하고, 마시고, 그런 것입니다. 목마르면 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배고프면 먹고 싶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변이 가득차면 배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 모두 영혼의 하위적인 활동입니다. 예쁜 사물을 볼 때 예쁘다고 느끼고 그리고 적절한 때에 성욕을 느끼는 것, 부적절한 때에 욕망을 갖게 되는 것, 그런 모든 것들이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하위의 활동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하위의 활동도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지 않으면 그런 하위의 활동도 영혼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좁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죽은 영혼으로도 할 수 있는 활동입니다. 중재자들도, 쓰레기 같은 인간도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정욕이 가득차면 성적인 그런 행위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고등한 활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우리들이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고상한 활동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 영혼에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시지 않는 한 진리를 사모하거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거나 혹은 신령한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일 같은 것들은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게 하는 영혼의 생명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대로 안 된다고 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렇게 인간 마음대로 안 된 그것을 딛고, 견디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참된 가치요, 보람입니다. 문제는 그런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가득찰 때에는 내 삶에 어떤 난관이 일어나면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이 어려움을 통해 당신의 어떤 놀라운 능력과 뜻을 내게 보여주실까? 견디고 함께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나타났을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면 그가 너무 가엾어 보이고 그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내어주고 싶은 그런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내게 맡겨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명이 나에게서 현저히 없어지고 사라질 때 나는 그런 관계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생명의 부족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힘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떼로 하여금 풍성히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련도 만나도 역경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보석과 같은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영혼의 생명입니다. 많은 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세상의 자원, 넘치는 물질, 이것들은 우리에게 그런 생명의 한 조각이라도 우리에게 나누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가진 것에 매우 익숙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일이었습니다. 학교 옆에 조그만 집에 한 500만 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주인이 사기를 치고 세입자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결국은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그리고 경매를 받은 사람들은 조폭같이 생긴 사람들이 밤마다 찾아와서 세입자들 괴롭히며 빨리 방을 빼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쫓겨나고 우리는 언덕위에 또 작은 집 하나를 사글세를 얻어 가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화장실이 저 바깥에 마루에서 나와서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야지만 화단 옆에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자다가 일어나서 파자마 바람으로 외투하나 걸치고 오줌 누러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날 보니까 변기가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일을 보고 난 다음에는 항상 수도를 틀어서 들통에 물을 한 가득 받아가지고 들어부어야지만 뒤처리가 끝났습니다. 몇 달 살다보니까 이제 완전히 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변을 보면서 수도꼭지를 탁 틀고 자기 내장의 상태에 따라서 이것을 얼마큼 틀면 끝날 때에 하나 가득 차는지에 대한 경험이 생겨났습니다. 상태가 좋을 때는 크게 틉니다. 쫙 하고 끝나고 붑니다. 안 좋으면 반쯤 틉니다. 쫄쫄쫄쫄 나와서 이게 끝나고 나면 물이 딱 차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불과 한 3~4개월 밖에 안 지났을 때입니다. 횟수는 아침, 저녁 수시로 일보러 가니까 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수련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갔습니다. 그게 제가 설교자로 데뷔하는 계기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가게 되었습니다. 한 80명, 100명 모이는 청년부 수련회였고 거기에 갔을 때 그 기도원이 자기네 기도원이었기 때문에 저를 방 두 개가 달린 좋은 강사실로 안내를 했습니다. 꼭 호텔 같았습니다. 거기에서 4박 5일 동안 수련회를 인도했는데 삼일 째쯤 지났을 때에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일을 보면서 또 물을 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에 변기 망가졌는데 내가 여기에서 왜 물을 붓고 3일을 지냈을까? 그리고 뒤에 있는 꼭지를 탁 누르니까 샥 하고 내려갔습니다. 그제서야 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망가진 것에 빨리 익숙해지는 존재입니다. ‘은혜는 무슨 은혜, 맨날 교회 가봤지만 새로운 게 뭐 있어. 말씀, 말씀 그러지만 말씀이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는데’ 이런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망가진 영혼으로 그리고 생명이 없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 그렇다, 나는 지금 생명이 결핍되어 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그 생명이 필요하다’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죄의 성공적인 역사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인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모든 얽매이기 쉬운 것과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과 나 자신 앞에 살고 싶다’라고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의 은혜가 충만했던 때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찼던 때에 자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이제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 내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생명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은혜에서 멀어진 여러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생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티끌인 인간에게 생기를 부어 넣어 산 사람을 만드셨던 것처럼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생기를 주시옵소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시옵소서.’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생의 모든 문제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마른 뼈로 가득 찬 계곡에 생기를 보내셔서 그것들을 군대로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생명의 바람이 붑니다. 여러분 마른 뼈로 남의 인생인 것처럼 일생을 살아다가 자기로 죽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인 것처럼 살다가 자신으로 죽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목마르게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2 (2016.10.30 주일오전설교)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드실 때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7-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른 뼈가 살아나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기 전 이 뼈들이 변화된 상태를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포로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뼈들을 살려내셔서 하나님의 큰 군대로 만드셨는데 거기에는 하나님다운 질서를 가지고 이 일을 수행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II. 마른 뼈에 대언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에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7절부터 8절까지 마른 뼈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대언을 하였습니다.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은 뼈와 뼈들이 서로 맞추어져 연결되기 시작했고, 뼈와 뼈를 붙어 있도록 힘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위에 살들이 올랐고 살이 모두 덮인 후에는 깨끗한 피부가 생겨났습니다. 가죽이 입혀져 이제 완전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나 위대합니까? 골짜기에 마른 뼈가 뒹굴고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계곡을 향해 불어가는 바람소리 밖에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자 굴러다니던 뼈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힘줄과 살이 생겼고, 가죽까지 덮여져 살 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죽은 시체와 같았습니다.
III. 생기 향해 대언할 때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제 마른 뼈에 대하여 예언을 그치고 또 다른 대상을 향해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 구절은 말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A. 침체에 빠진 백성들
이것은 제일 먼저 침체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죽음을 당한 자라고 묘사하셨습니다. 즉, 침체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이 죽음을 당한 자와 같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명을 향하여 살 기운이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된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셔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변하여 이렇게 살과 뼈와 피와 근육과 신경이 있는 인간의 육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육체의 생명이 영위 되려면 반드시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배고프면 양식을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육체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땅에서 취하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하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하고는 다릅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냥 육체가 숨이 멎고 박동이 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진대사가 멈추고 몸이 이제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썩기 시작합니다. 거기까지 육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뼈들을 서로 연결시키시고, 힘줄을 만드시고, 살을 입히시고, 가죽까지 덮이신 것까지가 바로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죽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 같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은 사람은 아무 행동도 못하지만 영혼이 죽은 사람들은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게 바로 거짓말, 술수, 미움, 그리고 수군수군하는 것,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것, 간음, 살인, 모함, 이런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일들이 현저하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그나마 생명이 상당히 있을 때에는 활발하지 않은데 생명이 거의 사라져 버려 죽음으로 가득 찰 때 영혼은 미친 기운이 깃들면서 날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많은 악한 행동들을 지어내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죽은 행실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영혼이 생산해 내는 행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잠잠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고요합니까?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그렇게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활발하게 그 육체로 악한 행실들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 아무 사랑도 남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만큼 세상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진리의 맛을 잃어버린 만큼 세상의 맛에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만큼 육체의 아름다움을 찾게 됩니다. 선한 것이 사라진 빈 공간을 악한 것이 메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죽음, 혹은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의 올바른 힘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이게 영혼의 죽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짜 사람이 아주 이렇게 무기력하고 특별히 악한 일도 안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것은 놀랍게 이런 생명과 죽음이 갈등을 하거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 한 쪽이 탁 기울어지고 나면 가만히 못 있습니다.
은혜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집니다.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질 때에는 그렇게 할 기도가 없었는데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구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안하면 안 될 것 같은 다급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생명이 역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피도 안 섞이고 살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생각하며 섬기게 만드는 것이 생명의 기운입니다. 생명과 죽음, 모두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영혼이 생명으로 충만해도 그를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만들고, 죽었어도 그 영혼이 강한 힘을 가지고 하나님 등진 채 하나님 대적하며 살게 만들어 줍니다.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해서 뼈와 뼈가 맞춰져서 사상의 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실천을 해서 힘줄을 삼았습니다. 이런 저런 체험도 해서 마른 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체험의 살도 입었습니다. 생각으로는 예수를 믿지만 행동을 아무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도 단정하게 해서 욕먹을게 없는 삶을 살면서 그럴 듯한 가죽도 붙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미인과 미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현저해 보이지만 1mm만 걷어내면 똑같은 사람이랍니다. 이 껍질 1mm를 다 걷어내서 이렇게 붉은 살이 되면 예쁜 사람과 미운 사람이 있겠느냐 물어보았습니다. 그러한 어떤 올바른 삶의 태도나 이런 것들로 깨끗이 포장이 됩니다.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이제 마른 뼈에게 대언하던 그 대언을 생기에게 명령하게 하십니다. 결국은 살리는 죽은 영혼을 살리는 위대한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 이런 표현을 쓰기 싫으니까 우리는 잠들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가장 훌륭한 모상은 잠입니다. 그렇게 죽은 영혼이 되어 있을 때 교회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미움과 갈등, 이기심, 자기만을 사랑하는 그런 이기적인 자애, 그리고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 이런 것들이 가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찬송, 기쁨과 희열, 환희와 기쁨, 섬김과 겸손, 그리고 순종과 자비, 복종, 긍휼 이런 것들은 죽은 영혼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침체에 빠진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B. 큰 군대가 된 백성들
그런 절망적인 마른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시체처럼 살과 뼈와 힘줄과 가죽을 입히신 후에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전혀 다른 기도인 것처럼, 말씀인 것처럼 이번에는 뼈가 아니라 생기를 향하여 사방에 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그랬습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즉시 살아나서 일어났고 서게 되었는데 큰 군대더라” 큰 군대가 된 백성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상의 뼈도 있었고 실천의 힘줄도 있었고, 체험의 삶, 외면적인 삶의 가죽도 있었지만 아직 생기는 없었습니다. 방금 죽은 시체처럼 쌓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경건은 삶의 초점을 자아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착하기만 할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양떼들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게 부여한 인생의 목적을 향해서는 강한 군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저께 고등부학생들하고 만났습니다. 한 30명 모였습니다. 선생님들도 좀 오시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독서 콘서트를 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거기 나오는 그레고르의 심정이 되어본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읽으셨죠? 왜 웃으세요? 어느 날 그레고르라는 사람이 커다란 벌레로 변합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커다란 방개 같은 것으로 변합니다. 이 사람은 열심히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어서 집안이 진 빚을 갚아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를 돕고 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가정이 어려웠지만 어떻게든지 돈을 벌어서 음악학교에 보내주고 싶어 했습니다. 벌레가 된 뒤에 알고 보니까 아빠는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사랑하고 기꺼이 헌신한 자신이 큰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너무 자기를 싫어한 나머지 사과를 던지고, 사과가 껍질을 깨고 살 깊이 박혀버려서 결국은 그 상처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나마 끝까지 자기한테 와서 자기를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며칠 안가서 끝나고, 그렇게 사랑했던 동생도 결국은 ‘저 벌레는 아마 오빠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오빠가 죽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죽고, 그 소설의 마지막은 그가 죽은 그 다음에 온 가족이 야유회를 떠나고 마지막에 어린 누이가 손을 위로 뻗치며 ‘아’하고 기지개를 켤 때에 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는 묘사로 소설이 끝납니다.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카프카는 인간의 완전한 외로움, 홀로 있음, 완전한 소외를 강조하고 타인을 향해 어떤 의미를 사전적으로 연결 짓는 것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니체에게서 물려받습니다. 니체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이고, 이 현실을 마주대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인데 하나는 이렇게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며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서 현실을 극복하는 ‘Übermensch’ 그러니까 극복인이 되는 비결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것에 순종하면서 그냥 노예처럼, 종처럼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그런 삶을 선택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후자를 선택하다가 죽습니다. 그 사람들을 ‘라스트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사람을 마지막 사람, 밑바닥 사람들, 혹은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없는 부끄러운 길을 선택한 사람, 그런 뜻일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드리냐 하면 큰 사명은 고사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고, 자신의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 10대 청소년들이 난 어디를 가도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거의 두 시간 이상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회중을 최근에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빛하고 사뭇 달랐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눈물을 닦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한 나라가 그냥 비굴하게 생존하려면 그런 결심을 안 해도 됩니다. 한 나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할 각오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지만 비굴한 나라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현실과 대면하는 이 삶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룰 수 있는, 그 대가를 치룰 수 있는 희생에 대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용기를 우리 안에 가득하게 채워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유사 생명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도 없고 아무 종교도 없는데 미친 듯이 나라를 자기 인생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유사 생명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국가와 나라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겪으며 기꺼이 죽어가고 희생을 치르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혹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유사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자식을 너무 너무 뼈저리게 사랑할 때 그 어머니는 때때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 사랑이 빗나갈 때에는 요즘 누구처럼 괴물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힘,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겠다고 하는 용기 있는 결기,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시대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일원으로 살아남고 이 세상에서 그의 뜻을 성취하겠다고 하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단지 착한 양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강한 군대와 같은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강한 용사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시는 생기를 통하여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여 바람만 부는 골짜기였습니다. 가끔 까마귀들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고요한 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골짜기에 군인들의 걷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창과 방패와 그리고 칼을 드는 소리가 철거덕거리며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벅저벅 저벅 대열을 맞추는, 오열을 맞추는 군대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대장의 명령이 내리면 진군하여 어떠한 적이라도 파죽지세로 밀어붙일 용기와 담력을 가진 군대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생명이 없이 근근이 우리의 삶을 이어갈 때 결과가 무엇입니까? 살았는데 내 인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의 인생도 아닙니다. 내가 살았는데 내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고 보람을 느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재미없는 것도 아니고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너무 힘이든 그런 인생을 그냥 꾸역꾸역 살면서 어느 한 순간에 죽었는데 나는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산자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생명을 앗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는 망했습니다. 그들이 대대적으로 회개했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십니다. 자기의 피로 건져낸 자기의 백성들이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마른 뼈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군대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단 하루를 살아도 한번 내 삶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내 인생을 장악하면서 그분과 동행 하며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가서 자기의 삶을 지문처럼 남겨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비록 금수저를 물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가장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의미를 발견하면서 내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 3 (2016.11.6 주일오전설교)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37:1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살리시는지 그리고 왜 살리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마른 뼈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뼈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스스로 말라버렸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렇게 말라버려 계곡에 던져진 자신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미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그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이심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II. 하나님의 일을 예언함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선지자에게 또 다시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너는 대언하라” ‘대언’, 나를 대신해서 마른 뼈들에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살려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 상태는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 꼭 같았습니다. 그들은 말랐고, 소망이 없고,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본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희망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를 가지고 재단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 보기에 힘이 없고 난관에 에워싸여 있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밖에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만약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좋은 환경을 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자기를 믿으려고 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입니다. 좋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A. 무덤을 여심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일을 예고하셨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는 이 놀라운 일들은 어떤 계획과 관련이 있을까요? 우선 첫째 하나님이 무덤을 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무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죽음을 상징하는 완벽한 절망어입니다. 그래서 생기가 없고, 어떤 살아갈 수 있는 기운도 없는 상태를 무덤으로 묘사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 앞에 모든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골짜기에 가득 찼던 마른 뼈는 바로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도 그 말씀에 반응할 수 없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의 생명과 교류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도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곡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바람소리, 가끔 공중을 휘돌고 지나가는 까마귀의 우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 상태는 곧 죽음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절망의 무덤 속에 갇힌 자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그렇게 완벽한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마른 뼈가 가득한 무덤 속과 같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무덤을 여는 것과 같은 능력으로 고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고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큰 도를 굴러 막아버렸고, 인봉을 한 후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끔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무덤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내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음이 우리 인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죽음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명으로 반응할 수 없고,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던 아름다운 활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덤을 여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은 영혼의 상태를 고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볼 때에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그렇게 오래도록 유지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언제나 죽은 자와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흥을 주셔서 그들을 살려내십니다.
신약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승천하시고 핍박에 두려워 떨며 모인 소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박멸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을 통하여 그 작은 무리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한 영의 사람들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후의 모든 교회의 역사도 꺼질 듯 꺼질 듯 사라질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교회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언약은 영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먼저 가슴에 새겨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현실로 우리의 현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현실로 판단하자면 그들은 말랐고 소망이 없고 완전히 죽어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무덤 속에 있는 시신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무덤을 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비록 오랫동안 영적인 침체 속에 무덤에 있는 자들과 같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무덤을 열고 여러분을 살리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나오게 하심
두 번째는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후에 그들을 무덤에 머물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덤은 죽은 자에게 적합한 장소이지 산 자에게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무덤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새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무기력과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나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찾아가셨던 예수님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 그 무덤 앞에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입니다. 나사로는 온 몸에 수의를 두른 채 걸어 나왔습니다.
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가장 놀라운 증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준 증거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무덤에 누운 것과 같이 마른 뼈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그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실패와 좌절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새로운 삶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영적인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무덤과 같은 자신의 삶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일평생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세리로 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지자 그들은 운명처럼 생각하고 살던 부끄러운 삶을 청산하고 그 어리석은 삶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창녀요, 기생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던 많은 여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듣고 그 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이제껏 도저히 걸어 나올 수 없었던 그들의 어두운 삶을 등지고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삶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어떻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예전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믿었던 그 한계들을 뛰어넘어서 그리고 이제까지 거듭되었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이 힘이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사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놀라운 새로운 씨앗,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좌절과 난관 속에서도 이것이 미래의 모든 실패를 확증하지 않는다고 하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가슴속에서 약동하고 우리의 심령에서 뛰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확실한 실제는 바로 이런 생명을 자신의 온 몸으로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좌절과 슬픔, 실망과 상처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 그리고 생명과 영적인 희열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우리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사뭇 다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자의 경우에는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암울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가엽게도 깊이 잠들어 있는 마른 뼈와 같은 나의 영혼에 속삭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다. 현실은 네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 패배는 오래전에 이미 정해졌다.’ 그러한 불신앙의 속삭임을 계속 따라갈 때 그 사람 마음속에는 예수 없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그리스도 십자가 그 분의 구원의 은혜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왔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 없이 충분히 살만한 사람들은 절대 예수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뜨거운 소망을 갖는 것 보신 적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전에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 절망과 두려움은 희망과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상황을 해석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움이 일어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대가 됩니다. ‘나의 일생동안 하나님은 나의 삶에 다양한 상황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들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을 배우게 하셨다. 이번에 내게 있는 이 어려움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실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과 난관이 와도 하나님 앞에 그분의 은총을 받으며 살고 있는 나의 삶의 밑바닥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기초는 불변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었고 며칠 지나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믿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과연 그는 걸어 나왔습니다.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운명처럼 나를 이기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항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뢰하면 그 분이 반드시 당신의 생명으로 나를 살려내실 것이다, 무덤처럼 갇혀있는 그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이끌어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돌아가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4절에 상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며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할 바벨론 포로 귀환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지 약 70년 되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완전한 해방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로 이미 둘러싸인 그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가게 하시고, 거기서 다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한 목적을 궁극적으로 이루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죽었던 공동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한 신앙을 다시 갖게 만들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일하게 살았던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의 삶의 기반을 청산하고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방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언약의 백성들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구합니다. 무덤과 같고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영적인 상황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랫동안 묶여있고 매여 있는 이런 모든 삶들에게 해방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만족적이고 소비적인 영성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교회로 하여금 자기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의 회복이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거기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련이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고 때로는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를 거기에 세우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오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지 않은 자리에 있으면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혜택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고 또 아무것을 갖지 않아도 그는 모든 것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내어 군대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 군대를 그냥 살려내셔서 당신이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군대로 살려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살려내어 하나님이 두신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 거기서 모든 열방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백성들이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이 예루살렘을 통하여 온 열방에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스라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원래 여러분을 어디에다가 두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더러 “나는 너를 구원하였고, 너에게 생명의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는 여기 서 있으라.” 지정하신 그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아직도 서 계십니까? 충성스럽게 마음을 다해서 비록 내게 산은 옮길만한 믿음, 원수의 철장을 파할 영적인 권능은 없으나 지극히 작은 종으로서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그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이니 주님이 세우셨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절망은 현실적인 사실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계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마지막 우리 모든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바로 죽음으로 가득한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기 위해서 바로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장을 허물고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우리 모든 교회에 폭포수처럼 부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생명의 충만한 은혜를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우리 개인에 부어주십니다. 자신의 상태를 말랐고 소망이 없고 모두 멸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감각적인 판단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말씀으로 온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지금도 무덤을 열고 그 절망의 자리에서 걸어 나오게 하시고 다시 그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을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생명의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4 (2016.11.13 주일오전설교)
내 영으로 살아나게 하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스겔 선지자는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을 살리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덤 같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고 다시 나오게 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실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는 새 언약에 대한 풍부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중보로 이루어졌고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루어졌고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에스겔서는 이러한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풍부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를 옛 언약과는 다른 경륜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 것을 보여주시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성령에 관한 풍부한 새 언약의 계시를 에스겔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고 있습니다.
II. 이스라엘을 회복시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런 새 언약의 위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주 복스러운 말씀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다시 살리기로 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당신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온 인류에게 어떻게 베푸실 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세 가지 요소를 14절에서 제시하는데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고, 감사절이 지난 그 다음에 세 번째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려고 합니다.
A. 하나님의 영을 두심
첫째는 하나님의 영을 두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내실 때에 어떻게 살려내실 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적인 부흥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고통 받는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전에도 물론 있었지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은 본격적인 구원의 계시를 인류에게 주시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고대 근동에 태어나서 수많은 다신들을 섬기는 사회 속에 살아온 평범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잡신들을 섬기며 살아가던 그 시대의 자식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격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 계시는 아주 적은 지식이었고, 아브라함은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잡다한 신들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죽을 때까지 계시해 주십니다. 그 지식은 자손들에게 물려지게 되고, 그 자손은 다시 후손에게 그 지식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 지식은 그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그것을 후손에게 풍성하게 물려주기도 하고 자신의 신앙이 매우 약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식이 계속해서 후손에게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매우 신앙이 나빠서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받는 영향을 능가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혼란스럽게 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은 아주 놀라운 부흥을 주셔서 그들에게 영적인 커다란 깨달음과 은혜를 받게 하셔서 원래 자신에게 주신 계시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룬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후 33장에서 경험한 이스라엘의 대각성과 부흥은 바로 그것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임금에 의해 이루어진 대대적인 종교 개혁도 바로 그런 영적인 부흥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가 그 치하에서 약 70년을 지낸 사람들이 안일한 타향살이를 접고 그리고 시련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성령의 감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1장에 나오는 이러한 감화도 역시 영적인 부흥이었고, 뿐만 아니라 에스라 10장에 나오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각성과 회개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른 뼈와 같은 영혼의 상태를 다시 살리시는 위대한 부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부흥은 두 개의 지평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 후에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성령의 큰 역사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렇게 감화를 받은 충만한 은혜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방 가운데 보여줄 것을 예고하는 첫 번째 지평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보다 우주적인 것인데 이것은 바로 첫 번째의 지평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던 그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실 위대한 계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성령의 역사의 경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는 각기 역사하시는 경륜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는 성령님이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을 때 대부분 일을 중심으로 보냄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려고 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남다른 지혜와 명철을 받게 하시고, 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셔서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하나님이 그 성령을 다시 거두십니다. 어떤 때는 그가 범죄하고 불순종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 영을 거두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어떤 경륜 때문에 그 일이 끝난 후 그 성령을 거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성령의 역사하시는 경륜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십니다. 그리고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당신이 하던 일을 새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 계속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 성령은 어떤 사람의 일을 위해 보내는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위해 보내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아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중심으로 역사하셨지만 새 언약 하에서 성령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주시고 그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함께 계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 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에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하나님과의 교통이 주어집니다. 그분께로부터 충만한 생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겨나가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고 극복할 수 없는 우리의 눈앞에 전개된 이 현실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는 영적인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의 백성들은 바로 이런 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다음에 갈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오시고 난 후 이루어지는 은혜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큰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누리게 되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축복은 세계 요한보다 더 큰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성령의 내주하시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생명으로 귀결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인데 우리가 그 현실 속에서 나라고 하는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갑니다. 내 인생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남의 인생은 더더욱 아닌 것도 같고 산 것도 같고 죽은 것도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고 나보면 덧없고 하나님 앞에 특별히 가슴 뛰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문제없는 현실이 어디에 있고 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나 다 그런 현실을 맞이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만들어낸 이 비극적인 현실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 때문에 이 생명이 막혔고 그래서 이 주어진 현실을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없는 불구가 된 불쌍한 우리의 영혼을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그 분은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당신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끔찍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 고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누구도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생명이 없어서 죄에 굴복하고 방황하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생명에 접붙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추구했던 돈과 명예와 쾌락과 종교적인 진리와 많은 것들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세상의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원의 결핍이 주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그 인간을 망가지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돈이나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하늘 생명의 결핍이었습니다. 하늘에 충만한 생명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없는 하늘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선행과 공로로 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보혈의 피로 자기를 깨끗이 씻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찢으신 그 육체를 가르고 흘리신 그 보혈로 우리를 씻어주십니다. 찢으신 옥체로 갈라놓은 휘장을 지나 자신의 의의 신발을 모두 벗어버리고 주께서 뿌리신 그 보혈의 핏길을 맨발로 걸어오는 모든 사람들, 일생동안 불순종과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 나아와 당신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그 핏길을 걸어서 걸레 같은 자신의 의의 신발을 모두 벗어버리고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길을 걸어오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세상 사랑을 내려놓고 아들을 보내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품에서 흐느껴 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힘입어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셨는데 그것도 영원히 주시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담장을 허무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명예, 영광이나 모든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 그 분 앞에 나아가 하늘의 생명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그리고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 분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당신의 품에 돌아가게 하시는 그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미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핏길을 걸어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그 분의 품에 안겨보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주는 하늘의 생명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 죄의 종노릇하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이 온 인류에게 부어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생의 문제를 아무리 많이 얘기해도 결국 마지막에 문제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데로 귀결이 됩니다. 선지자는 그때를 바라만 보며 즐거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이 실현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복음의 핏길을 걷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령 충만한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감당할 수 없는 이 현실을 노래하며 살게 하십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영을 충만히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이스라엘을 살리심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활기를 회복하고 난 이스라엘은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전에 영적으로 생명이 없는 상태가 무덤에 가득 찬 뼈와 같았다면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았다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을 때에 계곡에 가득한 군대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희망이 없이 마른 뼈와 같은 자라도 다시 살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심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당신의 영의 생기로서 하십니다. 앞부분에서 주님이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혹은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임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이렇게 주어지던 명령이 오늘 14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당신의 영을 우리 가운데 두셔서 우리를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살려내실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살리는 생명의 영이고, 누구든지 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지 않고는 참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는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심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물도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의 교회의 일원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 충만한 것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소멸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당신의 사랑과 영으로 충만한 세상을 꿈꾸셨고, 교회에게 먼저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신 천국을 (우리가) 지금 누리면서 사는 방법이고, 또 미래의 자신들이 누리게 될 완전한 하늘 복락을 지금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왜요?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 성령이 충만함이야 말로 생명의 충만함이고 생명이 충만한 것이야 말로 인생의 모든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며 살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요 예수께서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곤고한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인생에 잊혀지지 않도록 곤고했던 시기가 있어도 성령 충만했던 때에는 고통의 눈물과 함께 기쁨의 눈물이 함께 흘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때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때에는 그릇 행하며 살았는데 그 고난을 통해 내가 주님의 율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멘.’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우리가 간단한 말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해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세상의 자원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을 못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성령의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다시 살리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이 생명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불순종과 범죄로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이스라엘의 이름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영적인 부흥을 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신약의 시대에는 오히려 당신의 영을 우리 가운데 충만히 주셔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바로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답게 존귀하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 갈급한 자들이 되어서 주님의 이 은혜를 구합시다. 성령의 충만함,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해 주시도록 간구합시다.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을 능히 이기고 불꽃처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5(2016.11.27 주일오전설교)
고국 땅에 살게 하심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7: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분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당신의 영을 주실 것과 그들을 살게 하실 것과 마지막으로 그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지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그 세 번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토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토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기적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의 종교정책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의 조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통해서 당신의 왕권과 위엄을 드러내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는 그쳤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드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귀환은 바로 이렇게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를 의미하고, 이것은 곧 성전의 재건과 제사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한편 보다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게 될 그런 신약시대의 구원을 내다보는 것이었습니다.
II. 고국 땅에 살게 하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 있는 약속은 고국 땅에서 살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와 관련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살게 하고 너희 땅 위에 정착하게 하리라”고 한 이 말씀은 좁게는 바벨론의 포로귀환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신약의 언약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바라본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과 땅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A. 이스라엘 백성과 “땅”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 먼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육지를 가르시고, 하늘을 나는 것들로 땅을 짐승과 기는 것들과 과일 맺는, 열매를 맺는 과수들로 가득 채우시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자마자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복된 소산을 모두 누림으로 그것을 자원(으로) 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창조된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였을 때 땅은 인간과 화목하였고, 그리고 그 땅은 인간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언약을 파기했을 때 땅은 이제 친구가 아니라 함께 투쟁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장 18절에서 19절의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질 때 인간은 땅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이제 땅은 인간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고 순순히 인간의 정복과 그리고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다스리고 복종시켜야 할 그 땅에서 인간은 낯선 나그네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땅으로부터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 가나안 땅을 약속 받은 것은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에 그들은 땅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은 바로 가나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를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제 땅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묘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땅에서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B. 가나안 땅과 그리스도
이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가나안 땅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광야 생활 끝에 40년 가까이 된 후에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깊이 감격하며 짓지 않은 집과 그리고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실 것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구약에서의 땅은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짓고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제 이 모든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이 깨어지고 영적인 왕국인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에 우리 신약 백성들이 누리게 될 하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땅은 다가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고 땅의 많은 소산을 먹은 것은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가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그 모든 은혜의 결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왕국은 결국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무너졌지만 그 껍질이 깨지면서 영적인 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동할 수 없는 나라이고, 무너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굳게 붙들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그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땅으로 여기며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신약의 백성들을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생명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방황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들은 정착한 적이 없고, 더욱이 농사를 지어 풍부한 곡식을 거두어들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곡식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그 만나를 힘입어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살았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짓지 않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두며, 세우지 않은 포도즙 틀과 모든 기구들을 사용하며 그 수확을 저장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더 이상 하늘에서 내리는 그 만나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땅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말미암아 부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충만한 감격과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C.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는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왜 그렇게 곤고하고 가난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된 후에야 참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진정한 자원이 이 세상에서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자원을 이 세상의 명예와 부,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재산으로 말미암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인생답게 만드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그 자원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원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의 은혜를 경험한 후 우리는 영적인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모든 것이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짓지 않았는데 예수 안에는 우리가 거처할 집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열매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고쳐지지 않았던 우리의 삶이 예수 안에서 고쳐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난 날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이 세상의 명예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원, 내게 없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빼앗음으로 그것을 자원 삼으면서 살았던 삶은 이 세상에 메마른 땅에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밖에 있을 때에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의 인생을 참 인생답게 만드는 하늘의 자원이 예수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과 은혜, 그 분의 사랑과 그리고 위엄을 배워가는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은 예수 안에서 이미 있는 것들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그 모든 좋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원들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예수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여겼고,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 안에만 진정한 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귀환을 약속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고토로 돌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었고, 이것은 바로 예수 없이 방황하던 인류를 이제 누구든지 그 복음을 믿고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누리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과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고,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전에는 예수와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 지성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의 찬란한 빛이 비췹니다. 그 진리의 빛 때문에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그리고 예전에 없던 진리를 아는 지식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가슴이 저미도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을 얻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는가?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무지가 주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는 이제 우리는 그 진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적인 깊은 부르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를 깨닫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지만 혹시 은혜로 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할지라도 인간이 그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직면한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예수께 접붙여 하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을 예수를 통해서 공급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이 그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회에는 예수의 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과 혼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교회는 2,000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삶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의 혼은 바로 예수의 정신이고, 그 예수의 정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순수하고 진실한 복음을 소유함으로써 그렇게 예수의 정신이 온 교회 안에 깃들게 됩니다.
교회가 그렇게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 차 그분의 마음을 담지한 자가 되었을 때 그 교회는 바로 영적인 가나안 땅 안에서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 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을 때에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찾아왔고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땅은 축복과 그리고 놀라운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고, 때로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지만 그 땅에서 젖과 꿀의 소산을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언약 안에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하늘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것 같은 삶을 살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입된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처럼 예수 안에서 살게 해주셨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언약을 따라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온갖 아름다운 열매와 그리고 땅의 소산들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을 따라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 마음에 누리는 평강,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온함, 그리고 하늘의 권세에 참여하여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영적인 복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추호도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부족하고 높은 지위와 영광은 없으나 매일매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가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그 진리의 빛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미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감격이 있기 때문에 내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나를 불행하게 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덕을 베풉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신약 시대에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그 구원의 유업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녀로 여김을 받으며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을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도록 주어진 그 땅에서 결핍하고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 안에 모든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만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스르며 악을 행할 때 우리는 메마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님 없을 때에는 우리들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분께 접붙여져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그 은혜 아래서 그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나 흉년을 경험하고 전쟁을 겪어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과 순종의 삶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 안에 이미 주셨고, 우리가 그것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간 예루살렘과 조상들이 이미 얻은 가나안 땅은 잃어버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는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나 예루살렘이 상실할 수 있는 땅이었지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릴 수 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예수 안에 살 것이고 죽어도 예수 안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이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정도를 다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저 주어진 가나안 땅이었지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는 가나안 땅에 있었지만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큰 행복을 누리며, 그 땅에 있는 모든 소산으로 즐거워하며, 그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구상에 손톱만한 크기의 작은 땅을 유업으로 받았고 결국에는 그것도 이민족에게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더 크고 영원한 땅이신 예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좀 더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과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그리고 구원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예수 안에서 얻은 그 구원을 즐거워하며 행복해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바로 그때의 그 처음 은혜를 회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방황하다가 발달한 문명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서 그 모든 것들을 누리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보다도 더 크고 위대한 것,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더욱 더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예수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은혜 생활을 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의 인생의 필요한 모든 것,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이 성취되도록 우리는 주님께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눈을 들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현실입니다. 혼란에 빠진 이 나라의 사태로부터, 교회와 우리의 가정, 자녀들과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두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가 어떻게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도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들을 충만히 누리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 땅에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적인 가나안의 축복을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6(2016.12.04, 주일오전설교)
부르짖는 자의 샘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삿 15:14-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호수아 때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위에 있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아래에 있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요단강이 흐르고, 그리고 그 요단강을 중심으로 중앙지역을 넓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모압 족속이 여전히 있었고, 또 동쪽으로는 암몬 족속이, 그리고 서쪽 해안가로는 블레셋 족속이 긴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이 되는 블레셋과의 갈등, 이 블레셋은 원래 해양 민족이었는데 아마도 크레타 섬에서 이동하여 서쪽 해안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블레셋 족속은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이미 가나안 원주민을 꺾고 가나안 땅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민자 혹은 이주자로 불리우는 블레셋 족속은 매우 일찍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전국을 통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 블레셋 족속은 언제나 활동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사사시대 때에는 이제 이 블레셋이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는데 삼손이 바로 이때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인물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 왕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사시대가 이루어지는데 여호수아 사후로부터 사울왕의 등극 때까지 사사시대가 있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말로 ‘쇼패트’()인데 ‘재판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고, 또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끔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스라엘은 번영하고, 번영하면 교만해져 타락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다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과 33절에 보면 삼손은 아주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등장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삼손을 비롯한 이 입다 같은 사람들이 아주 위대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 이것은 사사들의 전 생애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믿음을 보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고난 받는 신약의 성도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삼손은 대단히 큰 육체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고 이 사람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줄거리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강성했고, 이스라엘을 협박했습니다. 삼손을 결박해서 우리한테 넘겨주지 않으면 공격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이 통첩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삼손을 삼줄로 꽁꽁 묶어서 블레셋 군인들에게 넘겨주고자 했습니다. 삼줄은 아마도 식물 가운데 가장 질긴 줄기를 가진 그러한 밧줄입니다. 그래서 아주 커다란 무게를 견뎌야 할 때에는 지금도 이 삼으로 만든 밧줄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아주 질기고 탄탄해서 웬만한 무게에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삼줄로 삼손을 풀어지지 않도록 꼭꼭 묶었습니다.
II.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이 단단한 삼줄은 마치 불에 탄 줄같이 끊어져 나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해서 이제 이스라엘이 위기에 놓였을 때 삼손은 아무 희망 없이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평생 비무장으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것이 바로 삼손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산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몸을 흔들자 그를 묶었던 삼줄이 후드득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생겨 삼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홀로 두실 때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도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해나갑니다. 운명인 줄 알고 살았던 우리를 얽어맸던 결박들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끊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속박들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으로 이런 큰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삼손은 물질적인 삼의 밧줄에 육체의 몸이 묶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육체를 얽어맸던 삼손의 밧줄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묶여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실패를 우리의 운명으로 알고 우리들이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은 그저 일평생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큰 능력이 삼손에게 주어지며 단단한 삼줄이 끊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III. 침체에 빠졌을 때
그리고 이제 이 삼손은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오는 수많은 군사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일천 명이 넘는 군사들이 밀려왔고, 그에게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마침 손을 뻗어보니 죽어 살은 모두 썩고 뼈만 남은 비교적 새로운 나귀 턱뼈가 보였습니다. 손을 뻗어서 그 단단한 뼈를 움켜쥐었고, 그것을 가지고 춤을 추듯이 무장을 한 블레셋의 군사 일천 명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산처럼 시체가 쌓였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자 그에게는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생겨났고, 용기와 함께 그 모든 병사들을 때려눕힐 수 있는 기술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일천 명의 병사를 때려죽이고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끝내고 그는 육체적으로 기진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저앉아서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이 이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은 결코 침체에 빠지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가 깊듯이 집중적으로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모두 바친 사람은 이렇게 이러한 깊은 침체를 경험합니다. 물론 이 침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과 태만, 혹은 우리의 죄, 혹은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침체에 빠지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능력 있게 살았던 모든 날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능력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살아온 것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만한 신앙을 자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주님을 잘 섬겼으면 그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삼손은 춤추듯이 일천 명을 때려죽일 때에는 용사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싸움을 끝낸 후 그는 육체적인 목마름으로 기진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는 탈진했습니다. 이제 저 멀리서 병사 한 명만 다가와서 자신에게 창을 겨누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침체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침체를 통해서 영적인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배우는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에 관해서 새롭게 배우는 것은 언제나 이런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그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 건져내는 과정을 통해서 평안할 때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찬란한 빛을 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이 침체의 경험을 통해서 성숙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IV. 샘을 터뜨리신 하나님
A. 샘물이 솟게 하심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깊은 침체에 빠졌던 삼손을 거기에서 건져내셨을까요? 오늘 성경은 바로 샘을 터트리신 하나님에 관해 우리에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트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샘물을 솟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물을 솟아나오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쉼 없이 당나귀 턱뼈를 휘두르며 일천 명의 블레셋 군사를 때려 죽였습니다. 육체적인 힘이 모두 기진하여 목마름으로 곧 쓰러질 것 같았고 그때에 그의 정신도 탈진하였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본래 장사와 같이 힘이 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한모금의 물이 없어 곧 쓰러져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칼에 죽을 것 같은 위기의식은 평소에 장사와 같은 힘을 가진 삼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뼛속깊이 이러한 한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싸움을 시작할 때만해도 의기양양하고 마음을 꽉 채웠던 패기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리고 자신은 매우 연약하고 초라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침체를 통해서 육체의 탈진을 통해서 그는 아주 소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누릴 때에는 우리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나면 자신을 매일매일 살도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들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당신의 생명물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샘의 물을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집어 던지고 탈진했으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게 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바로 그의 앞에서 우묵한 곳을 터쳐 샘이 솟아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샘에서 물을 마시며 해갈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기와 같은 사람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인하면서 그의 육체가 생수로 해갈했던 것처럼 탈진했던 그의 정신과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갈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메마른 땅을 지나는 것 같은 인간들이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샘물과 같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이시고 우리는 그 생명으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 안에 있는 이 충만한 생명을 여러분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그 생명이 모자라 기진하거나 쓰러지는 자가 없이 그 앞에서 샘을 터트려 주시는 그 생명물을 먹고 대면할 수 없는 현실을 대면하고,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기며 살아갈 힘을 우리 모두 누리면서 사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은혜의 샘을 터쳐 죽을 자를 살게 하시는 이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소생케 하신 하나님
두 번째는 소생케 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라고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마셨고 그의 영은 돌아왔다”라고 말입니다. 여기 정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루하흐’()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이것은 영, 바람 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건강한 사람은 영혼이 육체 안에 있어 그 영혼이 정신과 마음을 장악하고 그 장악한 마음과 정신에 의해 육체가 지배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깊은 탈진과 영혼의 침체에 빠졌습니다. 마음과 정신을 장악하던 영혼의 힘은 상실되었고, 육체의 힘까지 탈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을 마셨고 그가 마신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육체의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때에 우리는 그것 이상의 것을 받습니다. 곤궁할 때 기도하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보며 하나님이 나에게 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돈이 아니라 그 돈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런 인생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 모든 기력이 탈진하여 죽게 된 이 삼손이 상상치도 못했던 방법으로 그 앞에서 샘물을 터트려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단지 육체의 물을 먹고 해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시고 자기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육체의 물을 마시고 그는 육체의 갈증을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아 이제 아무도 없이 나는 여기서 죽는 구나” 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솟아나는 샘물을 통해서 “삼손아 봐라. 너 홀로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지금 너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네 옆에 있단다. 마셔라. 그리고 다시 살아나거라.” 이처럼 (삼손은) 영적인 회복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성경 장을 넘길 때마다 눈물 짓는 시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 영혼을 소생 시켜주시옵소서. 이 백성을 소생시켜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 말입니다. 왜 시인들이 깊은 신앙을 가진 경건한 시인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소생의 은혜를 간구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지를 깨달았기 때문이고,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모든 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런 저런 일들로 어려워하고 힘겨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겼습니다. 이 세상의 자원은 없었지만 생명이 끊어질 것 같은 한계 상황 속에서 언제나 은혜의 샘을 터트려 죽을 지경에 이른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나를 버렸으나 바로 그때에 주님이 내 앞에 은혜의 샘을 터트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는 주님의 소생케 하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복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우리는 무섭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는 동정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삼손처럼 살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당신의 충만한 생명을 우리 인간들이 온전히 누리면서 살게 하시려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과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어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그 죽음 때문에 우리는 소생케 하시는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에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오늘 아무도 없이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이 삼손을 보십시오. 여러분 중 아무도 삼손만큼은 탈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만큼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샘을 터트려 소생케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은혜의 샘물을 마시고 소생하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부르짖는 자의 샘
그 샘은 부르짖는 자의 샘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회복되어 소생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엔학고레’()는 히브리말입니다. ‘엔’은 ‘샘’이라는 뜻이고, ‘학’는 정관사이고 ‘코레’는 ‘부르짖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엔학고레는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샘물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 직전에도 샘물을 터트리지 않으셨습니다. 500명쯤 죽이고 목이 마르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이 샘을 터트려 물기둥이 솟게 하셨다면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힘들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샘을 터트리지 않았습니다. 삼손이 모든 힘을 잃어버렸고 이제는 도저히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추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육체는 목마름으로 기진하고 영혼은 탈진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내 힘으로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바로 그때에 샘을 터트리셔서 ‘엔학고레’로 이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충만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기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만 언제나 그 마지막에는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게 만드시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직까지 살 힘이 있고 기력이 남았다고 이미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힘을 다해 살게끔 놔두십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환경과 역경 때문이 아니라 아직은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부르짖지 않을까요?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눈물 흘리지 않을까요? 아직은 (사람들에게) 믿을 것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삶의 현실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 때문임을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없이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찬양)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염려와 근심, 시름과 번민으로 보내는 시간 중 단 절반만이라도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나는 죽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을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힘이 내게 모자랍니다. 주여 내 앞에 은혜의 샘을 터트려 나를 살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나이다.’ 삼손은 타고난 육체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삼손에 관한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마지막 임종할 때에 건물을 무너뜨리면 죽을 때 그 한번을 제외하고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육체의 힘을 믿고 살아왔던 장사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께 기도했습니다. 그냥, 그냥 찬찬히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주님께 외쳤습니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나라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누며 히브리서 11장에 삼손의 이름을 올리게 한 훌륭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충만히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자에게 이 은혜의 샘물을 터트려 소생된 영혼으로 살게 하시는 분이시니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결심을 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다 다짐 하십시오. 그것이 새벽이든지, 퇴근할 때 들르는 교회이든지 혹은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고 조용한 시간에 골방에 엎드린 기도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이는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V. 적용과 결론
용사와 같은 삼손도 깊은 탈진과 그리고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이때 삼손은 홀로 버려진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가장 가까이 계셔서 그가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당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 하나님은 삼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실 때 기다리셨다는 듯 삼손 앞에 샘을 터트리셨습니다. 그 맑은 물을 삼손에게 먹여 육체의 힘을 회복하게 하셨고, 잃어버렸던 영혼의 새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삼손처럼 이렇게 메마른 인생의 벌판 위에 주저앉아 낙심하고 기진한 채 쓰러져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삼손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연민과 곱씹는 인생의 모든 사연들은 우리를 살려내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샘물을 터뜨려 생명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믿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른 뼈 같은 자를 살리심7(2016.12.11 주일오전설교)
은혜로 살리실 때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 24:32-3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일어난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예루살렘에서 한 11km가량 떨어진 오늘날의 어떤 도읍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어떤 일들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낙심과 깊은 침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오늘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데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때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는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이 글로바가 거기에 나오는 글로바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어떤 주석가들은 또 이 글로바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형제일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제자라고 하는 이 표현은 꼭 예수님의 열한 제자 중 두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 때에 열두 제자뿐 아니라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제자로 불렸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은 아닙니다.
II. 침체에 빠진 제자들
아무튼 그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갈 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 처형에 관한 이야기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깊은 낙심과 침체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그 앞에서 침체에 빠진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낙심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깊은 침체와 마음의 낙심 상태에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침체와 낙심은 우리가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음으로써 겪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런 불순종과 죄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 때문에 이런 낙심과 침체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가 가져다 준 신학적인 혼란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목숨을 걸고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심문 받으신 후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 갔다 오고 난 다음에 전해주는 이야기는 이 사람들을 더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가 가보니 예수는 없고,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천사를 만났는데 그 천사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사도들 중 두 사람이 달려가 보았더니 진짜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천사도 못 만나고 돌아왔다더라.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 등등의 생각으로 그들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낙심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찾을 기운도 없었지만 이렇게 낙심과 침체에 빠진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을 열렬히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낙심하고 침체에 빠진 사람 가까이 오셔서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III. 마음이 뜨거워질 때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으나 그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들은 더욱 낙심하게 되었고, 많은 궁금증과 함께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들이 엠마오로 향하여 가고 있었지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예수를 믿지만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무지와 혼란 속에서 낙심과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낙심과 침체에 빠져 있는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셨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 ‘마음이 뜨겁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랑에 의한 감동을 가리킵니다. 낙심과 침체에 빠져있던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는 다시 뜨거운 사랑이 밀려왔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침체되어 있던 그들의 영혼과 심령에 영적인 부흥이 찾아와 다시 살려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언제였을까요? 제일 먼저 성경을 해석해 주셨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난 후 두 제자는 서로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입니다.
A. 성경의 해석과 은혜
예수님께서는 낙심과 침체 속에서 힘없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고히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시작해 선지자의 글과 다른 성경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해석하시면서 메시야가 오실 것과 그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과 그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풀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늘 익숙했던 성경이었지만 비로소 (혼란스러웠던 성경의 내용이) 풀려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에서 ‘풀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는데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그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할 때에 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한 끼의 식사,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곳을 한번 여행하는 것, 이런 것들도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힘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낙심으로 굳어지고 침체로 식어졌던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서 식어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불을 질러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예화) 1993년 10월경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신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고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목회에 매우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할 꿈같은 것들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부르셨으니까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쳐서 좋은 주의 종을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이미 여러 곳에 불려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런 순회 설교자의 삶을 병행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학교에서 많은 갈등을 겪고 난 후에는 그냥 한 100명에서 200명쯤 되는 작은 교회에서 나를 부르면 가서 말씀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나 개척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늦게 잠이 들었는데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앉아서 기도하다가 본격적으로 침대 아래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열렬히 눈물로 기도를 했고, 오래간만에 밤을 꼬박 새워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제게 생각난 말씀이 있었는데 마태복음 9장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병들고 망가진 수많은 영혼들의 흐느낌을 들었고,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한 후 새벽녘에 울면서 교회를 개척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잠깐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일이 어젯밤에 일어난 것일까? 더군다나 개척을 하게 해 달라니 주님이 조금 은혜를 주시니까 내가 오바를 했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접고 하루 종일 학교에서 일하다가 다시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역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잠자는 우리 집사람을 침대위에 두고 아래 내려와서 꼬박 밤을 새우며 이틀째 기도를 드렸습니다. 똑같은 일을 3일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을 불러서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시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기뻐하면서 이름은 이미 지어놨으니까 시작을 하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뭐냐 그랬더니 열린 교회랍니다. 9월에 자기가 기도를 하는데 교회를 세운다면 이 이름으로 하면 정말 좋겠다는 감동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열린”이라는 형용사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7명의 성도들과 함께 두 번 교회를 세웠다가 문을 닫고 망하고 간 그 자리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주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평균적으로 본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그 교회를 개척할 때 모였던 성도들보다는 사회적으로도 훨씬 안정되어 있고, 심성도 평균적으로 보면 그분들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어땠기에 그러느냐? 진짜 인생 벼랑 끝에까지 갔다 온 그런 험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성도들이 여러분들에 비해서 탁월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한없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때 한 23년 전에는 그냥 설교를 시작하면 고성으로 시작을 해서 고성으로 끝났고, 교인들을 원수 보듯이 하면서 설교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것도 매 주일마다 100분 정도 계속되는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전심으로 그 말씀을 경청했고, 우는 소리 때문에 예배를 방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 있는 그 서점이 원래 문서 선교부로 출발을 했는데 교회 세우고 나서 바로 문서 선교부를 만들어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테이프를 이제 1:5짜리 복사기에다 놓고 만들어서 팔았는데 교회 예산이 8000만원이던 시대에 테이프를 1억 원치씩 팔았습니다. 하나도 안 깎아주었습니다. 처음 나올 때부터 한 개당 1000원이었습니다. 그리고 1월 첫 주에만 할인하는 시간을 갖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와서 그 테이프를 쓸어 담아서 갔습니다. 또 좋은 책이라고 소개를 해서 책을 한보따리 쌓아놓으면 한 두주면 모두 다 팔려 나갔습니다. 아무튼 심방을 가면 한 사람 집에서 최소한 라면 박스 2개의 설교 테이프가 쏟아져 나왔고, 열린 교회 한 3년 다니면 책꽂이 하나 분량의 경건 서적들이 그 작은 방에 쌓였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새가족 성경 공부를 하면 1999년을 기준으로 새 가족 등록을 하고 새 가족 교육을 받기 위해서 사야 되는 교재가 46000원어치였습니다. 그 당시 17년 전에 46000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10원도 교회에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책을) 다 사서 새가족반에 들어오면 공부를 예습해서 새카맣게 답을 달아가지고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까지 한편을 듣고 와서 나눌 때에 사람들은 뜨거운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자라도 배우려고 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모두 좋은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모두 일치하는 것은 내 인생은 아무 희망이 없으니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 밖에 없고, 주님은 당신의 그 놀라운 은혜로 나를 변화시켜 주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차이가 납니다. 마치 배부른 애들이 밥 먹지 않겠다고 식사 시간마다 도망을 다니는 것 같은 그런 교인들을 교회에서 많이 만납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교인들은 지하실 교회 앞에 있는 서점 가판대에 많이 모여서 부지런히 책을 사갔습니다. 이제는 좋은 서점에 수천 권의 책이 진열되어 있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오늘의 현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용기, 시련을 극복하게 만드는 생명,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도구가 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여러분 건너편에 보면 도서관에 있습니다. 그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혀 그런 마음 없이 집어든 한권의 책이 그 사람을 회심시키고, 회개하게 하고, 변화 받게 만들어서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부어지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이) 낙심과 침체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 속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붙들고 은혜를 받아서 생명력 있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예수의 고난과 부활
두 번째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창세기 1장 1절부터 말라기 마지막 절까지 모두 해석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치명적인 주제를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선지자의 글과 다른 성경에 이르기까지 가르치고 있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야 됐는지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이 성경의 예언을 따른 것이었다는 것, 죄를 위해 죽고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실 것을 구약성경이 이미 예언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도 (부활 전과) 똑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5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그 모습을 보고 혹시 영이 아닐까 하고 관심을 가지고 신기해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그들이) 한 주제, 곧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깨닫게 하려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고 난 후 모든 예루살렘 교회는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때에 그들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셨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고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 내셔서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를 위해 죽으면 다시 살 것이라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이후에 경험할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머리에 드릴을 뚫어 하나님의 말씀을 부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고, 그들의 열린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증거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시련과 역경으로 가득 차 고난이 많았을 때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거기에 영적인 회복이 있었습니다. 침체와 낙심 속에 가야할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능력과 생명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저히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두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가 우리를 영혼의 깊은 침체와 낙심에서 우리를 건져주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살 힘을 잃어버렸다면, 오늘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면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에너지가 이미 고갈된 것입니다. 그것(인생을 살아갈 에너지는)은 이 세상에서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얻는 것들)은 모두 유사한 것들입니다. 진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언제나 마음 깊이 예수가 누구신지를 생각하고 그 분을 더 알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분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배우려고 애쓰십시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뜨거워질 때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이길 수 없는 이 현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C. 성도의 교제와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 이들의 교제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 깊은 낙심과 침체에 빠지게 하는 교제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소망은 점점 더 커졌고, 이런 현실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놀라운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 있는 성도와의 교제가 주는 유익입니다. 눈을 들어 여러분 주위에 있는 핍절한 지체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손을 뻗으십시오. 그들을 소망으로 초청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마음도 예수를 만나 뜨거워지도록 교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른 채 낙심과 침체 속에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 그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당신은 죽으시고 우리는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습니까? 생명이신 그 분이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신 이유는 당신은 죽고 우리는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삶의 현실이 팍팍하고 힘겨우면 힘겨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자신의 힘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의 힘을 흠뻑 받고, 그 사랑과 생명의 힘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에 진정한 주체가 되어 이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 19:4-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왕이 다스리던 때의 일입니다. 아합은 신앙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 자체는 아주 모질고 악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에 다시없을 나쁜 왕이 됩니다. 이세벨은 아마도 선교적인 사명을 띠고 해양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침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알을 위해서 헌신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할 목숨을 건 전사와 같은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이 커다란 죄를 짓게 되었으니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가장 탁월한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능력의 종들을 보내어 그 시대를 맞서게 하셨습니다. 아합에게 엘리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선지자는 ‘다 죽고 나만 남았는데 누가 섬기는 신이 참 신인지 한번 내기를 해보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계 850대 1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멜산 위에 나무를 쌓아놓고 그리고 물을 붓고, 부르짖어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백성들에게 보이자고 제안을 했고, 어리석은 아합은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종일 자신의 몸을 상하며 부르짖었으나 아무 기별이 없었고,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신임을 입증하였고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엘리야는 용기를 발휘하여 이 850명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기손 시냇가에서 그들의 피를 쏟으며 그들을 죽여 하나님의 공의를 갚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상 숭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의 땅에 그가 기도함으로 다시 비가 내리게 되었다고 야고보서 5장 17절은 말합니다.
II. 침체 속에 낙심할 때
A. 두려움과 영혼의 침체
참, 이런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선지자가 이루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침체 속에 낙심하는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아합이 이 끔찍한 소식을 이세벨에게 전했고, 이세벨은 이를 갈고 분노하며 말하기를 내일 이맘 때 안에 너를 반드시 쳐 죽일 것이라고 통보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맞서면서 강한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였는데 이세벨 한 여자의 이 통보를 받고는 순식간에 주저앉아 낙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니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육신은 오랫동안 먹지 못해 탈진해 졌고, 그러면서 영혼에는 깊은 침체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한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세벨로 말미암아 임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그는 두려움에 떨고 좌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보여주었던 그 담대했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힘이 없는 그저 한 연약한 성도가 되어서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자신을 따라 다니던 사환을 거기에 놔두고, 그는 홀로 더 깊은 광야에 들어갔으니 이는 낙심 속에 죽기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사환과 헤어져서 하룻길을 광야로 더 들어갔고, 그는 낙심한 가운데 홀로 있고자 하였습니다.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의 친구는 고독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도,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고립감 속에서 그는 홀로 있고자 하였고, 그 속에서 그는 위대한 선지자로 살았던 자신의 이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 숨을 쉴 기운조차 없는 연약한 자가 되어서 4절이 증언하듯이 죽기를 하나님 앞에 구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땅이 워낙 메말랐기 때문에 광야에는 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살아남는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로뎀나무입니다. 로뎀나무는 키가 8m 내지 9m 정도 되고, 이파리가 좌우로 넓게 펼쳐진 그러한 활엽수 나무가 아닙니다. 그냥 주먹만 한 것이 똑바로 올라와서 그저 큰 나무라 해도 한 2m나 될까한 그런 나무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뾰족뾰족한 이파리를 가졌고, 그래서 그 나무 아래 피한다고 하지만 그 나무 그늘이 엘리야 전체를 그늘로 가리웠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아래 기어 들어가면 겨우 얼굴 하나 햇빛에서 피하게 할 정도고, 과장을 좀 하면 나무에 바짝 붙어 니은(ㄴ)자로 앉으면 상반신 정도는 그늘에 들어가고, 하반신 다리는 뜨거운 태양 볕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그런 나무입니다. 게다가 그런 나무가 많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듬성듬성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볼 때에 선지자가 바람이 솔솔 부는 쾌적한 그늘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도 뜨거운 햇볕을 피할 데가 없으니까 그냥 양산만한 나무에 기어 들어가서 거기서 살 힘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죽기만을 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저앉아서 낙심했을 때 선지자는 자존감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살아가던 때는 사라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투옥되어 자신 홀로 선지자라고 사명을 주어서 남게 하셨는데, 이제는 도저히 이 사명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단절된 무력감 속에 영적인 모든 힘, 육체의 모든 힘을 함께 잃어버리고 침체 속에 빠져 낙심 가운데 있으며 죽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냥 조상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또 하나님 앞에 악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이었고, 또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충분하니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침체와 낙심 속에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 앞에 용사와 같이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패잔병같이 부끄러운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예전부터 늘 그렇게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쓰러지고 넘어져 낙심과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용사와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용사와 같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패잔병과 같이 연약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뢰하는 것이 결코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잘되면 교만해지고 자기를 신뢰합니다. 안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어떤 때는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을 만나게 하셔서 침체와 낙심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보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 앞에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850명의 악한 선지자들을 죽여 버린 용사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깊은 침체 속에 낙심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비는 아주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침체와 낙심에 빠질 때가 없습니까? 주님은 이런 침체와 낙심 속에서 우리보고 좌절하고 주저앉으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잘 나가던 때에 자신이 정말 자신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알게 하셔서 살든지 죽든지 나의 나 된 것이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B. 낙심 속에 죽기를 구함
오늘 이렇게 낙심과 침체 속에서 주저앉아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죽기를 구하는 이 선지자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보면 눈물 없이 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그는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잠은 죽음에 가까운 잠이고 낙심과 실망한 사람들이 즐겨 택하는 현실 도피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깊은 좌절과 낙심 속에서 탈진한 가운데 잠을 청했고, 그는 그 잠이 깨지 않기를 바라며 깊은 수면 속에 자신을 내어 맡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으며, 자기를 따라 다니는 사환조차 없이 하룻길 떨어져 나온 광야,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없는 철저히 고립된 곳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원망하면서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셔서 이 고난으로 가득 찬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실수였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잠에 깊이 빠졌지만 그것은 평강과 평안을 주는 잠이 아니라 삶을 포기한 자의 절망하는 선택으로서의 잠이었습니다. 모든 도움이 끊어졌고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대면하며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어쩌면 이 천사는 정말 천사가 아니라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임재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천사가 누워있는 선지자에게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깊은 애정의 표시였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을 때 어린 아이인 우리를 끌어안고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토닥거리는 것은 ‘바로 네 옆에 내가 있단다, 네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옆에 내가 있단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III.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제일 먼저 주님이 오셔서 죽기를 청할 정도로 낙심한 이 선지자에게 하신 일은 그를 말없이 어루만지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 선지자를 깨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먹으라’ 히브리어로 ‘쿰’()이라고 하는 이 ‘일어나라’는 명령형은 아주 독특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일어나라는 명령어와 함께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동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쓰러진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물리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도 ‘쿰’이지만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그 길을 버리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 그리고 주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결단, 이런 것을 의미하는 동작이 바로 ‘쿰’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다른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어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게 된 그때에 바로 결심한 것이 ‘일어나서’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침체와 낙심의 자리에서 이제는 떨치고 신앙적으로 바로 일어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누웠던 그를 먹이기 위해서는 그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육체의 동작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일어나 보니 숯불에 잘 구워진 떡과 그리고 한 병의 물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긴 여행길에 굶주렸고, 낙심과 좌절 속에서 음식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던 그에게 방금 구운 따끈따끈한 떡과 그리고 한 병의 깨끗한 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다시 누웠습니다. 워낙 침체와 낙심이 컸고 육신의 쇠약함이 엄습하였기 때문에 떡 한 덩어리와 물을 먹었지만 그는 다시 주저앉아 로뎀나무 그늘 아래 누웠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종종 낙심과 좌절 속에서 잠시 은혜를 받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 더 큰 하나님의 사랑, 더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힘없이 다시 누워있는 선지자를 다시 한 번 어루만지셨습니다. 이것은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었고,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나는 너 가까이 있노라’고 하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그를 일으켜 일어나 먹으라고 타이르시면서 왜 그렇게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다 가기 위해서는 이 떡과 이 물을 먹어야 하느니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 어루만지심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침체와 낙심 속에 있을 때 영원히 버려두시지를 않습니다.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이제는 살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 그때에, 자신도 포기해 버린 그때에 주님은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말없이 그렇게 잠들어 깊은 낙심 속에 빠져있는 우리들을 어루만지심으로 하나님이 그때에도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것,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나 그때에도 사실은 주님이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셔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과 함께 주님은 핍절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찾아 오셔서 어루만지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숯불에 구운 떡과 그리고 한 모금의 맑은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얼마 만에 먹는 식사다운 식사였을까요? 그 떡을 먹고, 그 물을 마시며 그가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 떡과 물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살 힘과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정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였더니 주님이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한 덩어리의 떡과 한 모금의 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원기를 주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선지자가 떡이나 물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육신에 필요한 것들, 곧 그에게 떡과 물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낙심과 침체 속에 주저 앉아있는 선지자를 보며 주님은 찾아오셔서 진노하시며 ‘선지자로 부름 받은 주제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선지자는 선지자냐,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고 말씀을 주었거늘 이 따위 밖에 못하느냐’ 하면서 선지자에게 삿대질을 하는 대신 조용히 예기치 못한 시간에 선지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으로 선지자의 온 몸을 어루만지셨습니다. 마치 우리를 사랑하는 엄마가 우리를 품에 안고 곤궁한 우리들을 어루만지며 ‘내 새끼’라고 가슴에 품는 것처럼 깊은 침체와 낙심에 빠진 바로 그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이 선지자를 어루만지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탁월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어루만지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향해 가지신 사랑의 마음 때문에 어루만지셨던 것입니다. 낙심하고 침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을 어루만지신 주님의 그 인격적인 어루만지심을 한번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너무 현실에 골몰하며 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광야와 같이 외로운 벌판에서 하나님 한분을 바랄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나아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주님을 대면하십시오. 그리고 온 천지는 변해도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 나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가장 연약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옛날처럼 강하게 살지 못한다고 나를 짓밟고 책망하시는 대신 당신을 품에 안으시고 온 몸을 어루만지시는 그 주님의 터치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성령 충만하고 봉사 많이 하고 충성할 때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주실 때만 주님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그때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두 가지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 그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어떤 침체 속에 있든지 찾아가셔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이 너무 곤고하고 핍절할 때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주심으로 여러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생을 살면서 항상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매순간 모든 만물을 붙드심으로 만물이 만물로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매순간 붙드심으로 우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실하심이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에 그 성실로 인하여 우리들이 진멸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주고 때로는 이 현실을 마주하며 살 용기와 힘이 없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 현실을 넘어서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출국을 하기 위해 공항을 갔는데 비가 억수로 퍼붓습니다. 그리고 대낮인데도 라이트를 켜지 않으면 서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햇빛이 가렸습니다. 그래서 과연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염려하며 공항에 나갔습니다. 다행히 폭우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불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는 떴습니다. 저는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했지만 깊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비행기가 드디어 발진을 시작했습니다. 떠오르면서 비행기는 마치 폭포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그 비를 지나고 칠흑같이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동안을 먹구름을 통과하더니 밝은 구름이 보였고, 그 밝은 구름을 통과하고 확 솟아오르자 비행기창 밖으로 저 아래의 구름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구름위에는 다른 아무 구름도 없었고, 눈부시도록 빛나는 태양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으로 깊이 감동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에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고통을 받고 그것 때문에 마른 뼈와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대기권 안에서 요동치는 구름의 장난과 같은 것이구나. 그것을 뚫고 위로 올라가 보면 무엇도 가릴 수 없는 찬란한 태양빛이 비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서 변함없이 계시는 분이구나”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과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신앙은 그렇게 때로는 폭풍이 불고 먹구름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폭설이 내려도 그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요,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항상 빛나시는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시거나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형통한 중에 깨달을 수 없는 당신의 성품을 알고 우리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침체 속에 낙심 속에 자기의 약함을 대면하게 하십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사랑으로 어루만지시는 분이시니 현실의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그 분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