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흥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녹취자: 김경애, 허혜숙
제가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에 아주 작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전세를 들었었는데 집 주인이 집을 두 번 세 번 저당을 잡혀먹고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경매가 들어와서 압류가 되니까 세 든 사람들을 모두 내 쫓았습니다. 저는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세상을 참 순진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되었습니다. 겨울부터 그 경락 자가 찾아와서 50만원을 줄 테니까 순순히 나갈 테냐 아니면 하나도 안 받고 쫓겨나겠느냐고 보챘습니다. 그 때 아들이 두 살쯤 되었을 때인데 우리 세 식구가 50만원을 들고 어디를 나가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때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결국은 100만원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다행히 봄에 쫓겨났는데 그 해 봄에 제가 대학원을 마치면서 대학에 선생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쫓겨나도 월수입이 있으니까 대책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월 세 방을 얻어서 갔는데 문제는 아주 낡은 빌라인데 1층 방을 하나 얻어서 방 하나와 마루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생활을 하는데 요즘은 거의 집 안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습니다만 그 집은 집 밖에 화단 있는 곳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아서 볼일을 보려면 꼭 신발을 신고 화단을 지나서 가려니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변기가 양변기였는데 문제는 볼일을 보고 밸브를 누르면 물이 쏟아져야 하는데 물이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망가진 것이었습니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다가 화장실의 일을 처리해서 쓰곤 했습니다. 4월에 이사를 갔는데 7월 4, 5, 6, 7일이라고 기억이 됩니다. 그 때 서울에 있는 어느 큰 교회에서 여러분같이 대학 청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집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집회를 나간 첫 번째였습니다. 가서 알게 되었는데 ‘아, 역시 강사들은 참 편하겠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수련회를 가면 한 방에서 혹은 교회당에서 몇 명이 끼어 자거나 발 냄새 나는데서 한데 뒹구는데 강사라서 그런지 아예 집을 한 채 주었습니다. 거기는 침실이 있고 응접실이 있고 욕실이 있는 그런 깨끗한 장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거기에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제가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화장실을 수리를 해서 깨끗하게 고쳐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볼일을 본 다음에 바가지에 물을 받아서 양 변기에 제가 물을 붓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당동에 있는 우리 집 변기가 망가졌는데 내가 왜 경기도 마석에 와서 물을 붓고 있을까?’ 그리고 뒤에 있는 밸브를 누르니까 아니나 다를까 물이 아주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청소를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제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낸 지 3일 후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 때 깊이 깨달은 것이 인간이 얼마나 망가진 것에 익숙하여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집 앞에 교회당이 하나 있었는데 장님이신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참 실로암선교회인가 어느 선교회에서 불우한 사람들 눈을 뜨게 해 준다 그랬습니다. 수술하려면 1억 가까이 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좀 싸졌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우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목회자들이 1순위 아닙니까? 눈을 떠야지 목회를 할 것 아닙니까? 교인의 얼굴이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기 부인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제가 가서 권했습니다. ‘가 봐라, 가서 눈을 떠라.’ 했더니 이 양반 하는 말이 자기는 그렇게 눈을 떠야 할 정도로 불편하지가 않다고 합니다. 수술해야 할 정도로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그럴 리가 있냐고 하니까 정말이랍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눈을 뜬 저는 극장을 못 갔는데 눈이 안 보인 이 양반이 부부동반해서 한 달에 한 번을 극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야한 영화만 골라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국산 영화는 안 보고 꼭 외화만 보러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냐? 영어 못하는 것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보느냐 그러니까 그냥 가서 앉아있으면 마음속에 영화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 그러고 그 날 내려오면서 눈을 한 번 감아봤습니다. 그리고 길거리를 걸어오다가 가로수에 부딪칠 뻔 했습니다. 야, 이렇게 불편한데 왜 눈을 뜨는데 그렇다고 할까? 그러면서 하나 깨달은 사실이 오랜 세월동안 뭔가 모자라는 속에서, 망가진 속에서 살아오면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과 꼭 같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부패한 것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망가진 것에 익숙할 수 있는 탁월한 적응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응력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유익하겠습니까? 해롭겠습니까? 엄청나게 해롭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말씀드리면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무엇인지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맛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부패한 성품이 남아있기 때문에 망가진 것들에 익숙해져서 살아갈 수 있는 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올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이고 심지어는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이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과 삶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실패가 되풀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고 실패를 자기의 삶에 숙명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무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참 감사하고 기쁘다’ 우리는 이런 정도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 이런 생각이 구원에 대한 커다란 개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체적인 오해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편에서 보면 완성이요 커다란 성취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430년 동안이나 애굽 땅에서 종노릇 하면서 살았습니다. 20년을 한 세대로 친다고 할 것 같으면 무려 22대까지 되는 긴 시대를 그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나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팡이를 들고 해방자로서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더군다나 한 나라를 건설하리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팔레스타인 땅들이 어디를 찾아봐도 비어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각 땅마다 나라가 서 있었고 민족이 서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각 민족의 땅을 통과할 때마다 갈등을 일으킨 문제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주인이 없는 땅을 방황한 것이 아니라 이미 팔레스타인의 모든 땅들은 분할과 통치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입주자들이 들어와서 각 나라가 점령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을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도 가나안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요새를 짓고 포도원을 짓고 산울을 두르고 모두 견고한 성을 쌓고 살아가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강력한 나라 강대국인 애굽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그리고 다시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날 모세가 나타나고 열 대의 재앙이라고 하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대한 일들을 행해서 애굽 온 땅에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인 것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참 여호와의 백성인 것을 드러내어서 결국은 바로가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서 애굽 땅을 떠날 때, 그리고 더 극적인 것은 떠나다가 홍해를 만나게 되죠? 그 홍해에서 잠시 방황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그 갈라진 물 사이를 건넜을 때, 더욱이 쫓아오던 애굽의 육백승의 병거가 합쳐진 물 위에서 가랑잎처럼 뛰놀고 그 건너편 언덕에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을 부를 때, 그 때 그것은 이제 뒤쪽에서 보면 애굽의 모든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던 노예로서 통치 받는 삶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뒤쪽에서 보면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고난의 세월이 종식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서 광야에서 유리하고 떠도는 백성들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가나안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에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감동적인 일화를 남기고 홍해를 건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겨우 시작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은혜로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너무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이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선행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었을 때에는 단지 우리가 불쌍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는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계획을 따라서 우리가 만약에 살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교회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도 기쁘시지 않고 이 온 세상도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이런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니까 행복해 졌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합니까? 일반적으로 아닌 것이 많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축복과 은혜의 약속들을 우리들이 성경에서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다 정직하게 읽고 나면 예수 믿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늘의 모든 권세와 하늘나라 자체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로는 예수 믿기 때문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격차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주일날 교회에 가 봐도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인 적이 없습니다. 놀러 갈 때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등산 간다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보따리 쌓아가지고 모였을 때 그 때 서로 만났을 때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울해 보입니까? 행복해 보입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설교할 때 내려다보면 사람들 얼굴이 어떤 줄 아십니까? 모두 골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 행복한 지 아십니까? 예배가 끝날 때, 식당으로 갈 때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독교 생활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이러한 성경의 약속과 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삶의 틈바구니를 비집으면서 고뇌하며 질문을 제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떠내려가는 그 수많은 다수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예수를 믿을 마음이 안 일어 날 것 같습니다. 왜? 조금도 예수 믿는 것이 예수 안 믿는 나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별로 도움을 못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거기에는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을 따라서 살 때에만 우리는 행복해 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나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고 교회도 불행하고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를 믿고도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계획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를 않고 그 계획과는 상관없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아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불행한 삶,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는 삶이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만 하던 젊은 시절에 그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는 통찰을 주고 이 무지로부터 벗어났다면 저는 인생을 엄청나게 많이 절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진지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했습니다. 선포하고 그 때는 예배가 별도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반은총의 영역과 특별은총의 영역이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산을 거닐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풀포기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오해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게 알 수가 있어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인간 마음속에 하나님이 두 가지 인식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신학이고 하나는 이성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인간의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게 되었습니다.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면 다른 눈도 실명하게 되듯이 신앙이 파괴되니까 이성도 온전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는데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해 달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신으로 받들고 달을 신으로 숭배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건들이 마치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볼 때 그야말로 이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모든 우주에 중심이 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태도와 방식들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뒤틀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을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마음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어디에서 오게 되는 것일까요? 무엇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지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앎을 통하지 않고는, 올바른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구원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알 때 그 때 진정한 구원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인 노릇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 노릇하고 또 자기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구 살아가다가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뭘 깨닫게 되냐면 믿지 못하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믿어지면서 나의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제 신앙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기독교적인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그 사람에게 믿음을 가져왔고 그 지식이 있는 믿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주셨던 수많은 수단들은 이제 부패한 인간의 이성과 신앙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 불가능해 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한 방법을 택하시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을 알릴 백성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선택이었고 이스라엘의 선택이었고 그것이 결국은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교회를 만드신 것, 그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아까 제기한 의문 가운데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그 구원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야지만 우리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고, 교회도 세상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수 있다, 그런 삶을 살지 않고는 우리는 불행할 뿐이다. 그랬는데 그 계획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삶, 우리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야할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택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까 찬송을 하다 보니까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많이 불렀는데 주의 나라가 임한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나라에는 누가 삽니까? 주님의 나라에는 주님의 백성들이 살고 그 나라에는 누가 임금입니까? 상징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행해지고 그 땅에서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타락하기 전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삶의 자원을 누리며 살아갈 때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거나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감으로서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구별은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말고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은 중대한 하나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도덕을 초월하는 어떤 삶의 자원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바로 앞에 가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내 백성을 놓아라’할 때 바로가 내가 뭘 믿고 여호와가 누군데 내 백성들을 놓겠느냐 불가능하다 했더니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모세만이 행했습니까? 아니면 애굽의 술사들도 행했습니까? 술사들도 행했습니다. 피, 개구리 이런 이적의 역사들을 베푸는데 모세만이 행했던 것이 아니라 애굽의 술사들도 몇 가지는 따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세상은 전혀 못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느냐? 그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리 운동을 열심히 행해야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 사이에서 그가 만약에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 유별난 사람이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쪽 뺨을 때리면 쇠망치로 이쪽을 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뺨에 손자국이 나있는데 때린 사람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야, 내 뺨이 딱딱해서 미안하다. 이쪽은 좀 말랑한데 때려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결국은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성한 사랑을 보면서 저 사람들 속에 다스리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넘치는 긍휼을 바라보면서 지금도 자신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과 더불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을 바라보면서 정의의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두 번째 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청년이든, 노인이든, 목회자이든 할 것 없이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정말 행복해 보이는 그리스도인 있으면 한 번 데려 와 보십시오. 누구입니까? 정말 그 사람처럼 나도 행복해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찬양은 뭐 사랑해요, 행복해요, 좋은 말 다 골라서 하는데 뒷받침이 되어야지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거룩한 계획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행복해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시편이 그림과 같이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그 시편이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얼굴빛을 받으면 주의 도가 열방, 만방 가운데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의미가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직시하실 때 딱 두 가지로 쓰이는데 하나는 진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목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대면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과 바르지 못한 관계에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징벌의 모티브가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특별히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고려할 때에 그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목하심으로 사랑과 인자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얼굴빛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인 축복이 그들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영적인 축복이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은 그러한 축복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감격적으로 찬양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삶이 정결하고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 그것을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의 이름에 존귀를 돌릴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멸시와 고난을 받아도 기꺼이 기쁨으로 그러한 부끄러움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거룩한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인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이 거룩한 마음,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얼굴빛을 비출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들이 생각해 오던 부흥은 참된 부흥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된 부흥과는 상관이 없고 부흥의 매우 뒤틀린 모습이고 타락한 부흥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허물어 버리고 부흥의 모습을 다시 쌓으면 됩니다. 영적인 각성은 무엇이냐면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던 중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이 지극히 잘못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돌이켜야 되겠다는 각오를 갖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이켜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겠다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 그러니까 지 정 의 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awakening’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지 속에 잠들어 있던 긴 기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히야’ 혹은 ‘하야’이고 이 말은 ‘확 살아나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것을 확 살아나게 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revival’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이러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의도하셨던 원래의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게 신앙생활 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심령으로 살아가는 그곳에서만 하나님이 높으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여기에서 이런 논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렇게 회복시켜 주게 되면 만방에 알려지는 것이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가 알려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큰 축복과 변화를 주셨는데 왜 이 열방에 알려지는 것은 여호와의 도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회복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주의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한 번 해 볼까요?
저 쪽에 계신 자매님, 질문을 하나 할 텐데 수요일 날 예배 참석하셨습니까? 안했습니까? 주일날 예배는 참석했습니까? 낮에 성경 본문의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해 보나 마나입니다. 모두 해보면 90%는 모릅니다. 한 10%가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설교 본문만 기억하고 있지 설교 속에서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이었으며 더군다나 일주일 동안 그 설교대로 살려고 몸부림 친 사람은 불과 몇 사람 안 됩니다. 뭘 가지고 불꽃처럼 살겠습니까? 이것이 청년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전주에 있는 신학대학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앞에 앉은 학생이 저를 부르더니 불꽃처럼 설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냐고 해서 지난주의 설교가 뭐였냐고 했더니 열 명이 전도사들이라고 하는데 두 명이 대답을 하는데 한 사람은 목사님이었는데 계시록에 말 타고 가는 것이었는데 어딘지 생각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기억을 했습니다. 본문을 기억한다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뭔가 엄청난 부분들이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2주 전의 설교제목을 물어본다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목회 경험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부흥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3년 4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씀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을 합니다.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하나님이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를 향해서나 커다란 변화를 주시는 여호와의 얼굴빛이 비치는 영적인 변화가 없이는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문화일 뿐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 삶이 여호와의 도를 전심으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이 나에게 이러한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는 어려움이 있어도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에 나와 있지만 우리 툭 털어놓고 말해봅시다. 예수 믿는 일반적인 아주 뛰어난 그리스도인 말고 오늘날 예수 믿고 들락거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통경찰이 사거리에 서 있을 때 교통순경을 무서워 할 것 같습니까? 십계명을 무서워 할 것 같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 이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빛이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함께 영혼에 파고 들어와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 속에서 어떤 갈망들이 일어나게 되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커다란 갈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땅에 살고 있으나 땅에 살고 있는 다른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 같은 땅에 살고 있으나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이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고 진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삶을 불의와 함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즐거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청교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따라 일평생을 산 사람의 얼굴은 손톱자국으로 가득하다. 진리를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악마가 그 발톱으로 수시로 그 사람의 면상을 긁어서 흉터가 가득하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전에 내가 유익한 모든 것들을 버렸으니 내가 이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노라” 변화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모든 명예와, 불의하게 얻은 재물과, 그리고 모든 권세는 다 배설물과 같은 것입니다 할 때에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이 좋은 명예, 이 신나는 돈, 이 인생을 안락하게 하는 재물이 똥과 같다고? 아, 나 그 똥통에 한 번 빠져봤으면 여한이 없겠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많은 지식을 넣어주고 훈련을 시키고 그 사람을 어떻게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꽃처럼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움은 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얼굴빛을 그 사람의 영혼에 개인적으로 비춰 주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영적인 축복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정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 구원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만약에 여러분들이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재미 보면서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마지막은 비참한 슬픔과 고통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일한 기업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어보면 아주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막 신나게 ‘돌격! 앞으로!’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 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만나’라고 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3백만 명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그만 두고 한 끼에 200원짜리 농심 라면 하나씩만 끓여줘도 한 끼에 6억입니다. 물은 또 어떻게 해결 할 것이며 양식은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3백만 명입니다. 그 때 만나가 하얗게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신기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해서 굽고 찌고 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생각납니까? 애굽에서 먹던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정력에 좋은 부추, 마늘 외에 그 다음에 고기 이런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갔습니까? 몇 명이나 탈출해서 원대 복귀했습니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전에 모든 입맛을 버리고 만나에 적응하면서 보다 완전한 행복의 나라를 향해서 용사와 같이 걸어 나가든지 아니면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광야에서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영적인 커다란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면 여호와의 얼굴빛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칠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우선 처음 일어난 감정은 커다란 두려움의 감정이었습니다. 그렇죠?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기도할 때에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시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간청하기를 ‘여호와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가 두려워 죽을 것 같사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와 함께 할 때에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경외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 오늘날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부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담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과 비교 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럼 지구의 하나님, 우리의 모든 생명과 이 모든 우주와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이 땅 위에 있는 왕을 두려워 하는 것만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이 임할 때 그 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심각하게 결핍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진정한 참회를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참회, 그 참회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포기되어 지지 아니하고 다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완전하고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으면서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그 언약에 대한 새로운 결단이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참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회를 우리들이 찾아볼 수 있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보배의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을 깨달아서 그 높으신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움 앞에서 여러분들의 죄를 어린아이와 같이 뉘우치며 깊이 회개해서 삶을 돌이킨 마지막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부흥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그 얼굴빛을 여호와의 도를 알리는 일에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말씀 그러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면전 앞에 뵈옵는 그런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인 변화와 축복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거니와 읽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TV 프로는 모두 외우는 사람들이 성경 구절은 거의 기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드라마의 줄거리는 기억을 하면서도 수요일에 있었던 설교의 내용들은 기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더욱이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피 흘리기까지 전투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확장되어 나아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의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들춰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세상과 구별된 삶, 그 삶 한 가운데 있는 성경에 대해서 세상의 주위와 주목을 끌 수 있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을 갑갑하게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곧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정한 의미의 부으심, 그러한 부흥이 잠자는 교회를 깨우고 잠들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거룩한 각성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변혁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문제에 봉착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영적인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과 여호와의 도를 만방에 알리는 것, 이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억을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관계가 없는 교회의 영성, 개인의 삶과 분리되거나 유리 된 영적인 체험, 이런 것들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믿음을, 또 영적인 생활과 실천하는 삶을 나누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의 삶이 정상적인 기독교적인 경험의 세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을 향해서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을 삶 속에서 부단히 고백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변화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심령을 바꾸어 놓으셔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아야겠다는 거룩한 결단과 마음의 감화를 주셨는데 도무지 그러한 감화들이 삶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5장을 읽으면서 이러한 성경구절을 읽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기억이 나십니까? 그러면 너희가 누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세상의 빛입니까? 아닙니까? 빛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이 캄캄합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양심은 주제에 무슨 빛이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직설법으로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라”라고 했습니다. “빛이 되라, 됩시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금방 여기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대체 이 괴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 것이냐? 자, 성경은 “빛이라” 했는데 “우리는 빛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부분부터 다시 보아야 합니다. 앞부분을 죽 살펴보면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까 많은 제자들이 나아왔고 제자들이 나아오니까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면서 죽 팔복이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가난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고, 이전에는 울 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강퍅하던 마음이 변화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본받아서 온유한 사람이 되고, 이전에는 자기만 배부르면 되었고, 쾌락과 이 세상의 안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목마르고 주렸던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있는 의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나면 그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미 팔복의 사람이 되었고, 그런 팔복의 사람이 되고 나니까 그는 빛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는 빛입니다. 서 있는 그 자체가 빛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미 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변화되고 달라진 경향과 내적인 성품 거듭난 특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신다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때에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던 그 거룩한 사모함과 열망으로 회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던 그 참다운 관계로 돌아가서 그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갈 각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영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변화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변화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얼굴을 비춰 주시는 것으로 상징화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구약에서 죽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때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전심으로 사모하면서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요하스 임금이라든지, 요시야 임금이라든지 혹은 히스기야 임금이라든지 아사 왕이라든지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송하고 그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는 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때가 특별히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주시던 때입니다. 그것을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끌어내면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1907년에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부흥입니다. 그 역사를 지금 다 말할 수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가운데 오순절과 방불 하는 성령의 임하심이 있고 사람들은 죄에 대한 커다란 각성과 그 거룩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축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날 유행하는 부흥이라고 하는 어떤 은사 집회라든지 그런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부흥이 일어날 때 죄에 대한 심오한 애통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부흥이라는 것은 영적인 각성과 함께 오는데 우리의 감았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보지 못하던 교회의 현실과 역사의 현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빗나간 관계를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제 인식했다고 해서 오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 그 삶의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확 느끼고 하나님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의 놀라운 사랑을 전면적으로 장엄하게 그 성품을 느끼게 될 때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심오한 애통이 있게 된 것입니다.
작년엔가 토론토에서 ‘catch the fire’ 라고 ‘빈야드 운동’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가짜였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표를 못 구해가지고 웨이팅에 올려놓고 열다섯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첫 날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고래고래 소리는 지르는데 죄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가짜였습니다.
그런 부흥의 때를 많이 경험하게 되었는데 평양에서 그 때 어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냐하면 그렇게 큰 부흥이 일어나고 나서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나서 오랫동안 떼어먹었던 빚을 갚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쌀집에서 이런 공고가 나붙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됫박을 속여먹었습니다.’ 쌀집의 주인이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고를 써 붙인 것입니다. ‘3년 동안 됫박을 속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쌀을 사간 사람들은 모두 오시면 변상해 드리겠습니다.’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서 남편에게 남편 모르게 부정한 일을 한 것을 고백을 하자 남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를 용서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일은 18세기에 미국에서 그런 부흥이 일어났는데 술꾼들이 술을 먹으러 갔는데 술집이 문이 닫혔습니다. 그 골목을 다 다녔는데 술집이 거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문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금일 폐업, 어젯밤 주인이 부흥회에서 회심하였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삶에 변혁이 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영적인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의미 있는 삶을 고쳐보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특한 삶을 살아서 그 독특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날 예배시간에 절대 안 나옵니다. 목회자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각 집집마다 부교역자들이 전화를 걸어서 오늘 늦게 나오면 잘릴 줄 알아라.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의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두 일찍 나오든가, 아니면 ‘어이구 자르려면 잘라라 나는 옆에 교회 간다.’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사람들이 모두 일찍 나왔다고 칩시다. 나오면 뭘 합니까? 나온 것은 예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참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모여 앉았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더 잘 드려진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풀어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꾸시고 그리스도인들을 변혁시키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영적인 회복주심이 없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든 아름다운 전통과 유산들은 말하자면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라는 것은 결국은 개인이 경험하는 충만한 하나님에 대한 성품의 체험,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거룩한 계획과 구속하신 목적을 따라 사는 것밖에는 삶의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것, 그런 것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앞서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또 하나 우리들에게 깊이 결핍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행복,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가야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이 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투자하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교회를 회복시켜주시지 아니하면 안 될 상황이 되면 그 교회 안에는 심각한 체험의 결핍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 체험되지 않고 관념 속에서만 맴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기쁨을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기쁨이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는 어젯밤에 아파트 당첨이 된 것이 훨씬 더 행복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아파트에 당첨될 수 있다면 하시라도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 정도는 잠시 유보하거나 양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적인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죄악 된 삶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붙이기보다는 종교생활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오지만 예배를 드리러 와서는 주보 한 장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쓰고 살던 가면을 벗어놓고 예배용 가면을 꺼내어 쓰고 들어와서 예배를 드린 다음에 나가면서는 다시 예배용 가면을 벗어놓고 세상살이용 가면을 쓰고 나가는 이런 삶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생활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거룩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없는 그러한 영적인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종교적인 삶은 모두 바람에 날리는 가화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거나 기도하는 일 자체를 정죄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제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는 근원적인 원동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일 때에는 진실한 신앙행위가 되지만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원동력이 없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그것이 위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을 촉진시키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영적인 삶을 더 고갈시키는 이상한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있는 가장 커다란 오해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인의 삶의 근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 근원은 매우 spiritual한 것이란 말입니다. 영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육신의 눈을 넘어서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깊고 은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영적인 영향을 받는 은밀한 영적인 삶이 토대가 되지 않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기형적인 기독교 신앙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이 체험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체험하지 않고는 기독교신앙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누구에 의해서 쓰였느냐 하면 모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그 인격을 맛본 사람들에 의해서 맛본 사람들끼리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읽으면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진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는 구원받고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성경이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대하소설 같은 것은 30권씩 읽어도 1권의 스토리가 생각나는데 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내가 그래도 머리가 좋지도 않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한 장을 읽고 뒷장에 넘어가면 앞장의 내용이 새카맣게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든 사람들도 다 그렇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성경을 보다가 어느 때에는 너무나 감격해서 성경을 읽다가 엎드려서 기도하고 기도하다가는 또 성경을 읽고 그것도 서너 절 밖에 안 되는 것을 읽고 시계를 보다가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기 시작한 것이 다 읽고 나서 그 묵상한 것을 메모까지 하고나니까 아침 8시였습니다. 왜? 그런 일들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체험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다할 수는 없지만 결국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체험이 중심이냐 지성이 중심이냐 하는 문제가 진자운동을 계속해왔습니다. 한쪽에서 또 한쪽 극단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중심을 잡아야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체는 무엇입니까? 계명 가운데 가장 커다란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답변을 못하는 것으로 제가 이해를 하겠습니다. 제가 어느 집회를 갔는데 어느 집회는 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계속 아멘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설교가 헷갈려서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멘 좀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몰아서 막판에 한 번에 하라고 그랬습니다. 또 어느 집회는 너무 아멘을 안 합니다. 그래서 왜 아멘을 안 하느냐고 그러니까 앞에 잇는 어느 형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너무 심각해서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그리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두 가지입니까? 하나입니까? 드디어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두 가지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타나고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란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이 세상에서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사랑의 감정 사이에는 동일한 점이 많겠습니까? 차이가 나는 것이 많겠습니까? 정서상으로 볼 때 말입니다. 동일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요합니까? 격렬합니까? 대개 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큰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늘 쫓아다니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사랑과 죽음입니다. 사랑이 성취되든지 성취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리든지 사람들은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정서입니다. 만약에 누군가를 정말 깊이 사랑한다고 할 때 그런데 그 사람하고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랑을 주면 될 것 아닙니까? 가능합니까? 대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왜 그렇게 얼굴도 못생기고 볼 것도 하나도 없는데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그런 것을 묻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왜 웃습니까? 지금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아니 눈치를 바야 합니다.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심각한 대목인데 왜 자꾸 실실 웃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무엇을 동반하느냐하면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지만 그러나 정서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정서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부를 때에 가슴이 미어져오는 감정 그런 사랑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에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부를 때 논리를 초월하여 불쌍히 여기는 감정, 만나고 싶은 감정으로 물밀듯이 그리움이 밀려오고 그것이 성취되지 못할 때에 가슴이 저미는 아픔이 밀려오는 관계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언제나 극단적인 단어들과 함께 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마른 슬픔이 우리의 피를 마시는구나!’ 무슨 뜻입니까? 너무나 사랑하는데 만나지 못하니까 슬픔이 되고 그 슬픔은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 속에 공통적으로 경험되는 사랑의 정서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서가 메마른 것은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금 정서가 회복되어야 된다고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모든 것들이 지적으로나 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모두 것들이 동반되어야겠지만 그러나 사랑은 역시 그 독특한 성격을 정서적인 성격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에는 격렬한 정서가 동반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막 즐거워하고 그리고 통곡하고 그리고 슬퍼하고 그리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그 다음에 싸우듯이 용감하게 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온 마음을 합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마음이 무너지는 것처럼 통곡하면서 기도해본 적이 언제 있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개인의 죄악 때문에, 공동체의 변화되지 못한 지체들을 위해서 이 땅에 회복되어야할 하나님의 왕권을 위해서, 기도해 본 적이 언제입니까? 정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서가 없는 사랑,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모든 사람이 몽상가가 됩니다. 그리고 생전 써보지도 못한 편지인데 열장 스무 장, 삼십 장, 사십 장, 막 나가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이 속에서 촉발되는 정서가 그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격렬한 단어와 함께 쓰입니다. 사랑, 피, 죽음, 불길, 불꽃, 이런 단어와 함께 쓰입니다. 왜? 그런 것들 말고는 이 가슴 속에서 폭발하고 있는 그런 사랑을 묘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서 한 번도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설교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최근의 몇 달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게 하시는데 사랑에 대해서 설교자가 목메면서 설교를 할 때 꼭 회중들 가운데는 몇 사람이 예배시간에 얼굴을 못들이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녹는 것과 같은 심령으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그렇게 흐느끼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찬양)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이 낮고 천한 지푸라기와 같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조주의 위대한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죄인의 옷을 입으시고 이 어두운 세상에 내려오신 그 하나님의 한없는 낮아지심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의 영광을 위해 수치를 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섬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이 감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보았거나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조국교회는 이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광신자처럼 취급을 받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랑의 정서가 우리들 가운데 없는 것은 바로 빗나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떠나서 죄악에 찌끼가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 만연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주관하고 그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고 있을 때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세상을 어떻게 미워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세상에 굴복하기만 하면 그 무릎을 베고 누워서 연락을 즐길 수 있는데 그것을 뿌리치면서 오히려 의로운 삶을 찾아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이러한 기독교도의 진정한 전투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때가 되면 이런 사랑의 힘은 폭풍과 같이 사람들에게 밀려옵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승복하면서 그 사랑에 붙잡혀서 사는 진정한 즐거움을 사람들이 안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장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입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예배가 이게 국민의례가 아닙니다. 광복절에 참석했어도 대통령의 축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 속에 있으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파하는 것은 잠깐이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리고 치유된 죄인들의 영혼 속에 임하는 거룩한 기쁨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물론 안 그런 교회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이 예배드리는 것이 민방위교육을 방불케 합니다. 자매들은 민방위교육을 못 가보았을 것입니다. 한번 가보십시오. 그냥 들어올 때부터 어디를 찾느냐하면 구석자리를 찾습니다. 왜? 잠자기 좋으니까 말입니다. 구석자리를 찾아서 강사가 연단에 등장하자마자 신문을 얼굴을 덮고 다리를 꼬고 모자를 눌러쓰고 그리고 잠자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한 시간에 오만 원을 받고 거기에 와서 연설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들을 생각도 없고 자기는 사람들이 들어주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드리는데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는 동네가 방배동인데 하루는 아크리스 백화점에 사람들이 미어집니다. 열 시 반에 문을 여는데 차를 타고 가다보니까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추운 겨울에 바글바글합니다. 뭐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보니까 개점 몇 주년인가 하는데 선착순 오백 명에게 머그컵을 주기로 했답니다. 거기에 와서 그 추운겨울에 30분전에 와서 줄을 서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그랜저를 타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한다면 30분전에 가서 대문 앞에서 박타지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15분전인데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10분전에 오고 5분전에 러시아워로 밀려오고 무엇을 하느라고 이제 왔는지 예배가 시작되어서 성가대에서 주악이 나가는데도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그 다음에는 더 가관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2층에서 내려다보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사람,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끄덕거리면서 조는 사람,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 주보가 무슨 주간지라도 되는지 그것을 뚫어지게 읽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꼴 보기 싫어서 우리 교회는 주보가 없습니다. 찬송하자고 하면 찬송하고 설교를 하면 듣고 축복기도를 받고 가면 되는 것이지 주보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신문은 만듭니다. 너무 편합니다. 그리고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지 쪽지를 적어서 보내는 사람, 하나님 보다 높은 데가 어디 있는지 호출이 오는 사람, 총천연색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것은 참을만합니다. 설교시간이 되면 이제는 사람들이 설교를 안 듣습니다. 멍하고 있거나 아니면 끝나고 가서 밥 먹을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끝나고 나서 청년회 모임을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차서 있습니다. 그러니 기가 막힌 것은 전국의 교회가 12시 10분에 같이 마치는 것입니다. 무슨 카르텔을 맺었습니까? 10분전에 끝내서 설교는 25분이나 30분밖에 안하는데 여러분 드라마 25분짜리 드라마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25분이나 20분이라는 시간은 한가지의 어떤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기도하다가도 성령의 감화가 있어서 기도가 쏟아져서 예배시간이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설교하려고 올라갔는데 성령이 사로잡으시면 30분을 설교하고 내려오려고 그랬는데 120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11시에 예배가 시작하는데 1시 반에 벌써 시간계획표를 잡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하실 리가 없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셔서 뭔가 괄목할만한 변화를 주실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설교를 할 때는 더 가관인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품하는 사람, 졸음을 쫒느라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 졸다가 성경책을 떨어뜨려서 수그리고 줍는 사람, 내 말이 이것이 보태는 것입니까?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드디어 성가대 주악이 마쳐지고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그리고 시간은 벽시계가 12시 10분입니다. 육중한 교회당의 문이 열리고 하얀 돌계단을 걸어서 그들이 걸어 내려갈 때 그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구슬을 토해내는 것 같이 수많은 인파가 걸어서 나갑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주일이 아니라 공휴일 오후의 태양이 내려쬐고 있습니다. 그리고 걸어 내려갈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어 내려갔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제껏 까지 이렇게 살았던 죄악 된 삶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이번 한주도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세상으로 나가도 세상이 바뀔지 말지인데 걸어 내려가면서 마음속에 오가는 공통적인 언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휴, 끝났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뭐 ‘주의 나라 임하게 하소서?’ 말로만 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야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충현 교회에 갔습니다. 잔뜩 모아놓고 나보고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그럽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사모하십니까?” “아멘!” 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갔겠습니까? 정말이냐고 그랬더니 반으로 줄었습니다. “아멘!” “진심입니까?” “아멘!” 그러면 하나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정말 갈망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의 삶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애통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말입니다. 지금 이루어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통함이 없으면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소망은 바라는 것이지 열망은 아닙니다. 바라는 것과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통일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통일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난간에서 어떤 할머니가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울며 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지금 아멘 하는 것은 바라는 것이고 그 휴전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우는 것은 열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그런 예배에 계시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나라에 계시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할 일이 없으셔서 그런 곳에 오시겠습니까? 자기의 이름을 구별되어 찬송하지 않는 그곳에 무엇 하러 오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오시는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표징이 나타납니다. 저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몇 분이 계신데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마주대하면 다른 사람하고 있는 것과 틀립니다. 감화가 있습니다. 괜히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경건한 사람이 내 앞에 서도 그런데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이 예배가운데 오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장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애통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며, 고난가운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은 위대한 기쁨과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받고 기뻐하는 무리들이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참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배 속에는 어떤 뭐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권세를 느낄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고 설교자를 붙들고 우리 회중가운데 당신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한결같이 그 예배로 만족하고 웃고 떠들면서 밥 먹으러 나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이 있어야합니다.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 속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허탈한 마음이 들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만족합니다. 거짓된 만족은 진정한 결핍의 감정보다도 더 나쁘고 악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한없이 경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부흥은 이러한 모든 형식적이고 성경의 약속과 실제에서 메워질 수 있는 모든 갭들이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시절에 공동체 하나를 섬겼습니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인데 집회를 했습니다. 제가 직접 집회를 인도했는데 뭐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습니다만 마지막 날 집회를 하는데 한 15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깊은 확신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나의 온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느낌이 느껴졌고 하나님이 오늘 이 저녁에 내 설교가 끝나고 나면 누구도 예축할 수 없었던 위대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러 올라가서 밖에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들어오게 하고 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45분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일곱 시 반에 시작했는데 새벽 1시 반에 안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자도 필요 없고 설교가 끝난 다음에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것들에 대해 눌렸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던 사람들이 빛을 발견하고 패역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노하시는 얼굴 앞에서 두려워서 떠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에 돌아왔는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9시에 예배가 시작인데 7시 반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쟁탈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놀랍게도 16, 17, 18살 먹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길었느냐하면 9시에 예배를 시작하면 9시 반까지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하러 올라가서 12반에 설교를 마쳤습니다. 180분이 매주 계속되는데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 같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말씀에 빨려드는데 마지막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아니 벌써 3시간이 흘러갔나?’ 3시간 동안을 설교하려면 원고지로 최소한도 200매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 설교를 거의 완벽하게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설교가 끝나면 사람들은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찬양)
어린 양 찬양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님
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영원하신 주 할렐루야
쭉 찬송하면서 찬송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함께 흐느낍니다. 그러니까 예배에는 언제나 눈물이 마르지 않고 눈물이 가시고 나면 자신들만이 아는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석구석 모이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이 일어났느냐하면 고등부를 가르치려면 선생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이 회개를 안 합니다. 게으릅니다. 무단으로 막 빠집니다. 구석에서 어린 학생들이 모여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데 지나가면서 들어보니까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우리 선생님을 변화시켜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러면서 진심으로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감흥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찬양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해주실 때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세례도 받고 주일도 잘 지키고 아주 모범생입니다. 그런데 와서 그럽니다. “전도사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셔요?” “하나님이 안 살아계시는데 뭐 하러 교회에 나왔니”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그렇게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지금 느낌이 어떠냐고 그러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내가 하나님의 품안에 있답니다. 이게 바로 개인적인 부흥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정서 없이 신앙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부흥의 가장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해져보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헬라어로 ‘프토코스’인데 그것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쫓겨 나보지 못해보셨습니까? 어느 날 눈보라치는 겨울저녁에 집달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온 가구에 노란딱지를 붙이고 그리고는 자루에다가 냄비하고 솥 몇 개와 숟가락 몇 개를 집어놓고는 온 식구들이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그때에 어디 의지할 데가 없을까? 하고 그렇게 목말라하는 마음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부요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이제 낯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천국이 없는 삶처럼 살아갑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위로와 기쁨이 있는 천국을 예비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주님, 천국은 원하지도 않습니다. 돈만 많이 주시고 병만 들지 않게 해주시면 이 세상에서도 제법 살만하옵나이다.’ 그것 아닙니까? 이러한 복음의 진리가 거의 느껴지지 못하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교회 안에서 유행되는 용어에다가 ‘진정한’ 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성경에 기록된 것과 현실 사이의 갭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기도인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뭐라고 그럽니까? 기도와 진정한 기도, 신자와 진정한 신자, 신앙과 진정한 신앙, 부흥과 진정한 부흥, 그런 식으로 이분화 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편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부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서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박식한 학자였던 존 오웬이라는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안타까워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병이 날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과연 성경의 진리가 보이겠는가?’ 그래서 성경을 펴보니까 진짜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 한 후에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너무나 그리워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다시 회복되기를 열망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어주신 성령을 거두어주시지 않기 위해서 안타까워했는데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습니다. 당아새와 같이 부엉이와 같이 외로운 신세가 되었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그리워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하였는가? 하나님의 은총이 이제는 그쳤는가? 밤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의 심령이 상하는 도다.’ 여기서 상한다는 것은 꽝 때려서 멍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성경에 쭉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어떻게 기도하셨는지에 대해서 히브리서 5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런 격렬한 말하자면 몸부림 속에서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부흥을 경험하고 나면 그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도 다시 전도해야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흐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깊은 부흥을 경험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깊이 있는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부흥이라는 것은 수적인 팽창이나 증가 혹은 교회가 융성하는 것, 교회의 운영조건이 호전되는 것,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부흥은 결과가 그러한 것들로 나타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부흥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무엇이냐고 그럴 때 저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가장 적합한 정의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흥이 무엇이냐 그것은 ‘교회가 신약성경에 약속되어있는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지극한 사랑과 경외심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냉담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목사님 그것은 어떤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하시지는 않았겠지만 신앙 생활한 과거를 돌아볼 때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만하면 언제나 그리워지는 첫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처음 사랑의 때 하나님과의 놀라운 관계를 누리면서 한없이 기뻐하던 첫사랑의 때에 어떤 특징들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정서적으로 풍성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늘 눈물이 있는 기도,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자리가 기뻐하는 그 말할 수 없는 신령한 즐거움, 그리고 어느 지체가 실족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슴 깊이 밀려오는 연민의 정,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나 세상 사람들을 바라볼 때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 안타까운 마음, 그런 것들이 첫사랑의 때의 특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눈물이 많고 그럴 때가 또 가만히 보면 기쁨이 제일 많았던 때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논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눈물은 기쁠 때도 흘리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슴 아플 때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가슴 아플 때에는 세상의 어떤 일도 기쁨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 정서가 아주 훌륭하게 정비례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은 감화의 눈물이 없던 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한 기쁨으로 내 가슴이 가득 차오는 그런 정서적인 충만함이 없는 때에는 눈물이 있는 기도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오늘날 잘 이해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은 성령의 물 붓듯 부어주시는 역사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시급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쓰레기와 찌꺼기들이 치워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성령이 부으실 때 순도 높은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잘못된 오해의 찌꺼기들을 남겨놓고 성령을 부으시면 성령 충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운수대통하면서 산다는 이상한 논리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힘입어서 우리가 교인들을 모으고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하고 이런 식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어떤 욕심의 프로그램들이 접목이 되면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우월한 요소는 느끼거나 체험하거나 헌신하거나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갑니까? 심각해도 대답은 하십시오. 하나님이 찾아오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전에 못 느끼던 하나님의 엄위로 우심과 두려움을 확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세가 호렙 산 가시떨기나무 사이에서 보는 것입니다. 타지 않는 불꽃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집단적으로는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굵직굵직한 부흥의 때가 있어서 그 한때가 모든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이 그런 신앙적인 깊은 감격 속에서 목메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늘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런 상황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다시 떠나십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남기고 가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훈입니다.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막 열광적으로 찬송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끝나는 것은 전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무엇을 붙들고 살기로 결심했습니까? 이런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깨달은 깨달음에 대해서 맹세를 하며 율법을 낭독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사랑합니까? 사랑을 안 합니까? 물론 성경책은 사랑합니다. 자꾸 금박 먹인 것을 사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진리에 대한 깊은 사모함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내가 지금 9시까지 시청 앞에 당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급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못 쓰는 글씨로 맞춤법도 틀리는데 시청 가는 길을 그려주었습니다.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땀이 나도록 놓지 않습니다. 왜? 거기에 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돈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갈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휴지보다도 더 귀찮은 것입니다. 휴지는 넣었다가 코라도 풀지만 이 딱딱한 종이는 무엇에 쓰겠습니까? 휴지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왜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면 주의 도가 만방에 알려진다고 말하느냐하면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맛보는 한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함이 충만하게 넘치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즉시 무엇을 고민하게 되느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거기로 말하자면 인생의 가치관이 대 선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사모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만을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깨닫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시편 119편 말씀의 영광의 장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시 119:72)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아니면 한걸음도 걸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대 의존적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말씀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전심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희생은 문제가 안 됩니다. 왜? 내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멘’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깊이 체험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순교의 역사를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순교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독특한 신앙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세신앙과 십자가 신앙입니다. 양대 신앙의 산맥이 뭐냐 하면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이고 그리고 내세는 반드시 있고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린다는 내세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니 나도 그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그런 것들이 바로 순교한 사람들의 신앙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순교한 사람들은 그러한 신앙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 지금 이 순간에라도 내가 주님 때문에 죽으면 즉시 주님 품에 안기리라고하는 불굴의 소망이 현재에 다가오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순교한 사람하고 우리하고는 좀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순교이야기까지 안하더라도 오늘날 순교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 신앙을 따라 살면 고난을 받고 믿음을 버리면 안락한 길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안락한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사랑과 자기를 향해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현재 느끼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말하자면 자기를 위한 안일한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는 길을 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누리는 영적인 하나 됨의 교제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완벽한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들, 지금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가사가 다 바뀌었는데 옛날의 그 찬송이 좋습니다.
(찬양)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Close to thee
그렇기 때문에 이 부흥은 경험하거나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어떤 것들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신 거룩한 목적에 온전히 부합해서 살기위한 유일한 대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한 도시를 바라보며 탄식하고 통곡하고 기뻐하고 진노합니다. 어느 도시였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유독 한 도성을 바라보면서 흐느끼고 통곡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좌절하고 분노했습니다. 어느 도성을 보면서 그랬습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왜 그럽니까? 거기에 성전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루살렘이 어떠한 영적인 상태를 누리고 있는가를 보면 선교의 미래를 알 수 있고 오늘 이어가고 있는 택한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분노하고 통곡하고 탄식하고 좌절하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이처럼 먼저 부흥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그루터기인 그리스도인들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어느 날 하나님이 깨닫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이 양변기에다가 물을 붓고 있는 것과 같은 삶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신들의 망가진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고뇌하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에 대한 몸부림치는 탄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대대적인 부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기차가 공중으로 갈수도 있고 바다를 지날 수도 있고 땅속을 지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레일만 있다면 이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흥은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일인데 일반적으로 이 부흥은 반드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집단적인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양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변혁시키고 역사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방법을 찾아다닐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찾아다니시겠습니까? 사람을 찾아다니십니다. 한 사람을 찾아다니십니다. 성경의 파도치는 위대한 역사는 모두 그 꼭짓점을 어디로 연결하고 있느냐 하면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해 계획하실 때에 한 사람 아브라함을 찾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모두 어두움 속에 잠들어서 이제는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더듬어서라도 알 수 없는 그런 캄캄한 지경에 갔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해방을 계획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모세를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깊이 타락해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신정국가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위기상황이 왔을 때 제사장조차 타락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는 백성들이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무율법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 한 사람 사무엘과 함께 민족의 대 각성과 부흥의 꿈을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입니다. 일일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사람들을 통해 굴려갔습니다. 저는 산보다 바다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책을 마지막으로 탈고할 때는 바다로 갑니다. 상념에 잠기면서 마지막 탈고를 하거나 거기서 서문을 쓰곤 합니다.
(찬양)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박국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해변을 이렇게 거닐면 파도가 쾅하고 시커먼 암벽에 부딪힙니다. 이렇게 보면 쾅하고 부딪힐 때 하얀 물거품이 엄청나게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다음 파도가 밀려오기 전에 모두 없어집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품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왕년에 주님을 위해서 한번 결심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젊음을 하나님 앞에 울면서 산 사람들은 지극히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을 위해서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 같은 그러한 물거품과 같은 다수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내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몰랐다면 모르겠거니와 좋으신 하나님을 알았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지고의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아들을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몸을 가르심으로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 나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내 인생이 파도에 부딪혀서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은 인생으로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내 이름을 내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삶으로는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의 배를 섬기다가 그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수많은 다수 중의 한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마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열망은 무엇이냐 하면 주의 도가 열방에 널리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왜?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주의 도가 열방에 알려져서 뭐하게 말입니까? 여러분 여호와의 도가 알려지는 일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구약의 공동체가 닫힌 공동체입니까? 열려진 공동체입니까? 가만히 있으면 본전치기는 할 것 같습니까? 열려진 공동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혈통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갈렙은 유다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뿌리를 캐 들어가면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의 후손이었습니다. 충성된 우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해서 멸망시켜야할 헷 족속의 후예였습니다. 그런 사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열려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조국을 버리고 혹은 배반하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의 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축복을 지닌 무리들인가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거나 민족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조국을 떠나는 두려움보다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도가 알려질 때 그 여호와의 도가 깊이 사람들에게 파고 들어가서 여기서 알려진다는 의미는 그냥 Thinking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도를 깊이 체험하고 알아서 거기에 승복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승복하는 일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왕 되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주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아무리 찬송을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해서 나의 심령 속에 여호와의 깃발이 왕국의 깃발이 꽂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총합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승복입니다. 그것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겠지!’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사람의 무릎을 쳐서 그래서 주저앉아서 무릎을 꿇게끔 만드시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승복하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내 안에서 나의 나라를 허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지는 것을 인해서 내 뜻이 짓밟혀지는 것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성취될 수 있다면 나의 원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기쁨의 박수를 돌릴 수 있는 삶, 이게 개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도가 알려지고 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타락 이전의 세상이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나라의 회복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그렇게 수많은 하나님을 몰랐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알고 무릎을 꿇게 되는 이 놀라운 역사가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 하고 물을 때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그 도에 굴복하는 열방의 항복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여호와의 도가 만방에 알려지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들이 이루어져서 온 땅과 이 지상의 만민들이 창조의 목적으로 회귀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몸부림치는 탄원으로 그 도가 열방을 향하여 전파되고 알려지기를 그렇게 갈망하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존재 자체를 이 세상에 장엄하게 드러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통용될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고 이 세상에게는 비밀로 가리어져 있는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독특한 영적인 삶의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비추셔서 특별한 영적인 축복을 베푸시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축복하시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을 부으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강의를 두 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듣고 나서 여러분들은 지금쯤엔 좀 무언가 상당히 허탈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예배도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기도도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찬송도 그것은 찬송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진정한 의미가 없다. 한 가지가 진정한 의미로 돌아가면 대부분의 것은 같이 돌아갑니다. 그러면 다 집어치우라는 이야기인가? 그럼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가? 자, 결론은 우선 제가 여러분에게 네 가지 책을 소개 해드릴 텐데 공통점은 모두 제 책입니다. 우선 이사람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닥이 헷갈릴 테니까 한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줄거리를 잡고 거기에 보면 여러 가지 자료들이 아래 명기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통해서 곁가지로 나가면서 계속해서 읽어나가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4권의 책이 있는데 우선 제일 먼저 3권은 두란노에서 나왔고 한권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오늘 나오지 않았으면 아마 다음 주 초에 나올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이런 책을 읽으십시오. ‘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 나가야한다.’ 두란노에서 나왔습니다. 그 책을 먼저 읽으십시오. 그러면 가슴에 아주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민족, 교회, 역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부흥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책인데 그것을 먼저 읽으십시오. 첫 번째로 읽어야할 것은 『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나가야 한다』두란노에서 나온 책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읽으셔야할 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한다』 그 책을 읽으십시오. 두란노에서 나온 두 번째 책입니다. 순서를 바꾸어 읽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읽어야할 책이 무엇이냐 하면 생명의 말씀사에서 오늘이나 아니면 내주 초에 나올 『십자가를 경험하라』 생명의 말씀사에 가셔서 찾으시면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읽어야할 책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 두란노에서 나온 책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설교자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설교자가 영적인 변화를 받고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나 하나님을 위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나 평범한 신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나 대동소이합니다. 그렇게 차례대로 읽은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책들을 읽어 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인가 보면 제가 쓴 책들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저자들 가운데 부정적으로 인용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저자들, 그 저자들을 찾아서 책을 읽으시면 거의 대부분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1권에는 깨알 같은 각주가 붙어있으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4번째 읽는 책에는 깨알 같은 각주가 많이 붙어있으니까 거기에는 수십 권의 책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책들을 찾아서 읽어나가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제가 오늘 내리고 싶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우리에게 당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보내시는데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면서 부딪치는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부흥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되겠는데 문제는 그 기도가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 가운데 오늘 강의를 통해서 그 부흥의 시급함과 절박함을 느끼면서 강렬히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생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것이 마지막으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내리는 결론입니다. 실천적인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부어주심을 기대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생각. 그래서 우선 여러분들의 지성이 하나님 앞에 승복되는 일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상당히 많은 양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했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들은 이야기를 테이프를 통해서나 혹은 테이프를 풀어도 좋고 어떤 식으로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게끔 만들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들어보든지 읽어보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해야합니다. 그리고는 그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내리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요약을 해서 말하자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그런 풍부하고 열렬한 용서를 동반한 그런 삶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내가 거의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신앙생활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 사람의 의견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이런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런 틈새를 비집으면서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혹은 책들을 통해서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은 의문을 가지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아주 풍성한 도움을 받을 것이고 이런 아무런 전제적인 의문이 없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커다란 도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도 복습보다 훨씬 유용한 것은 예습입니다. 무엇을 내가 모르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학업의 능률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도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답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가 영국에서 설교할 때 저녁예배 설교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인도하는 예배의 설교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그분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의문을 제기했다면 제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을 제기했다면 올바른 방식으로만 의문을 제기했으면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들의 인생과 신앙생활은 궤도를 달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질문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접어두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접어두고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물거품처럼 그런 인생을 살다가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음의 특권은 적은 편견 속에서 진실 앞에 쉽게 감동받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의 때가 일어나면 그 부흥의 때에 가장 먼저 추수되는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하면 항상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 편견에 적게 오염되었고 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진실 앞에 어른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쉽게 감동하기가 어려운데 젊은이들은 쉽게 그 진리들을 인정하고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 앞에 깊이 감동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향해서 회귀하게 된다면 이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핵폭발적인 위대한 힘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교회와 가정과 직장들을 변혁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나이 먹은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선언을 했습니다. 갖지도 않게 예수님을 믿는 형제한테 기독교 가문인 것만 보고 시집을 가려면 차라리 독신으로 살아라. 왜? 이게 교회 다닌다는 것 하나에 감격해서 찾아갔더니 형제하고 자매하고 수준이 안 맞는 것입니다. 막판에 가서는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가서 전도해서 길러서 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돌덩어리 같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살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젊다는 것 하나가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년에 안 젊어봤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대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슨 대단한 것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웃기는 것입니다. 그 젊음이 하나님 앞에 승복했을 때에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팔십을 산다고 그러는데 이런 문제 앞에 깊이 직면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답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십대 때에는 공부하느라고 미쳐서 그놈의 대학인지 뭔지 책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니느라고 부모님들이 교회도 제대로 못 가게 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니까 그 다음에는 이런 문제에 답하면서 인격적인 승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뭐합니까? 20대에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고 이제는 신앙은 안중에도 없고 교회는 건성으로 나오고 얼마나 신나는 시절입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노느라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나면 취직시험을 본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다가 취직을 하면 ‘이제 하나님을 섬기려나 보다.’ 웬걸, 밥 벌어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좀 나아지려나?’ 하면 장가가고 시집가고나면 그 즐거움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말하자면 그렇게 진지하게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대학부나 청년부가 정말 주목을 받는 교회들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빠르면 3년 늦으면 5년 뒤에는 그 의식 있는 대학생들 때문에 교회가 완전히 바뀌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자라온 대학부 때문에 교회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교회를 본적이 있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들이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회개하는 일들이, 돌아서는 일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제대로 할 만한가? 결혼에 기쁨이 좀 사라지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애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조국교회의 부흥을 주시옵소서!’ 아니면 ‘이 젊은 주님을 위해!’ 그러던 사람들이 이제 애 하나씩 끼고 젖병을 들고 와서 유아실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예배인지 내배인지 드리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또 어떻습니까? 애들이 크니까 밥 벌어 먹이고 살리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중장부를 쓰라면 쓰고 탈세를 하라면 하고 그러면서 변혁시켜야할 이 세상에서 현실적인 타협의 수행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저물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그 다음에 애들이 거의 커서 대학도 들어갈 나이가 되면 여자는 ‘내 인생은 무엇인가?’ 하면서 인생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아 이러다가 내가 쫓겨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불안증에 걸리면서 그러다가 50대가 넘어서 애들이 다 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뭡니까? 여행 다니느라고 바쁜 것입니다. 노세, 노세 더 늙기 전에 놀자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다닌다. 돌아다니면서 바쁜 시절을 다보내면서 놀고 그리고 정년퇴직을 하고나면 할 일이 없는데 그때 되면 손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주러 다니러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 손자들도 다 커서 한가한 나이가 되었는데 주님을 섬기려고 그러는데 힘이 없습니다. 그때가 돼서도 머리가 허예서도 하나님께 승복할까 내 마음대로 살아볼까 성경대로 살아볼까 내 뜻대로 살아볼까? 그리고 양다리를 걸치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됐네! 이 사람아 올라오게!’ 이게 바로 거품인생입니다. 웃으십니까?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가면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린 세상에서 방탕하게 놀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이미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사람들처럼 내 쾌락을 찾을 수 있다면 질펀할 정도로 방탕하게 놀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 늘 뒤에서 켕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니고 용기 있게 쾌락을 추구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인생이 바로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다가 우리를 위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내어버리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치료를 위해서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얼굴을 마주하고 설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날에 주를 위해서 올바른 사고와 거듭난 가치관을 갖고 눈물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날에 주님이 그 흐르는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입니다. 피 흘린 사람들은 주께서 그 피를 닦으실 것이고 모욕을 받았던 사람들은 명예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눈물을 씻김을 받고 피를 닦임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있을 때 일평생을 거품처럼 산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겠습니까? 지옥에 있거나 아니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유명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명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저마다 사연을 안고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 신실하신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이셨습니다. 인생의 행복했던 날들도 알고 보면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에 행복한 것이 있었다면 주님 때문이었고 즐거운 일이 있었다면 신앙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함께 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었고 가치 없는 죄인이라는 의식에 몸부림치며 자기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위기의 그 순간에 내게 찾아오셔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셨습니다. 죄악을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던 삶을 사는 인생에게 찾아오셔서 인생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가시면류관과 흐르는 피가 그분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보혈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났는지를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그런 위대한 부흥은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순간순간 상처받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싸매시고 그릇된 길로 걸어갔을 때에도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 사랑이 우리를 인도해왔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사랑의 밀어들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래도 거미줄과 같은 신앙을 붙들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며 살아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은 결핍가운데 있는 인생도 아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하는 광야를 흐느끼며 지나가는 인생도 아닙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그리고 가시밭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길을 걸어감으로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길은 선택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렇게 방황하면서 그렇게 무언가 가치를 찾아서 몸부림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인생을 향해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졌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들에게 인생을 인도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에는 충분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하고 우리를 통해 여호와의 도를 만방에 알리시고 ‘나의 살아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마음껏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찬송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송 부르고 같이 기도하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가사를 묵상하시면서 같이 찬송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