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3:19)
녹취자 : 김미현
골로새서는 우주적인 기독론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단지 기독교라고 하는 종파의 주님이 아니라 온 세계와 모든 우주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서 이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들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3장과 4장에서는 그런 우주적인 전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면서 오늘 이 18절과 19, 20, 21절 이 4절에서는 가정의 관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의 기본 단위는 아내와 남편인데 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면 질서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 질서와 사랑이 올바르게 유지될 때 거기에서 인간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 자녀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런 사회가 온전한 사회가 되어 갈 때에 그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드러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그 앞에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런 구절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것을 설교하려고 하느냐 어차피 시간이 짧아서 18, 19절을 두절을 다 설교를 할 수는 없고 오후 예배가 있으면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할 텐데 여러분이 한번밖에 예배를 안 드린다고 하니까 어차피 18, 19절 사이에서 골라야 하는데 그중에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것은 제 마음입니다.
여기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랑하라’라고 하는 이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그리스어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아가페테라고 나옵니다. 아가파오라고 하는 동사의 명령형이고 그 아가파오에서 아가페라는 명사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냥 사랑, 이렇게 표현하지만 희랍 사람들은 사랑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랑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낱말이 네 가지나 가지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사랑은 사랑인데 남녀 간의 이성적인 사랑, 필리아는 형제들끼리 나누는 사랑, 스톨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 아가페테, 아가페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당시 로마 사회에서 보면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명령이었고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로 돌아가 보면 로마 사회에서 아내의 위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당시 아내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에서 아내는 가정을 잘 돌보아서 살림살이를 하고 그 다음에 남편을 위해 봉사하고 자녀를 잘 낳고 그래서 그 자녀들을 잘 로마의 시민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간으로 애국적인 인간들을 길러내고 이런 것이 아내의 덕목이었고 아내가 집 울타리 바깥에 나가서 무엇인가 큰 소리를 내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남편의 굉장한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정을 중심으로 줄을 긋고 아내의 자리는 그 가정 속이지 바깥이 아닙니다. 밖에서 하는 모든 일은 남편이 움직이고 실질적인 경제권까지 남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옛날 유교시대 때의 여성의 모습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여성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 얼마 안 됩니다. 여성의 참정권을 미국이 허락한 것도 1920년대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19세기까지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미미한 존재였고 여러분이 르네상스 시대를 보면 피렌체를 중심으로 소위 얘기하는 지니어스 코퍼스라고 천재들이 확 쏟아져 나옵니다. 여성이 있습니까? 여성을 본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성에는 천재가 없었느냐 그것은 아니었고 자기의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로마시대 때에 주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평균 수명이 놀라지 마십시오. 25세입니다. 평균 수명이 25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경우 남자는 78세, 여자는 82세까지 올라갑니다. 로마의 제국 시민들의 평균 수명이 25세밖에 안된 이유 중 하나가 여성들이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는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조기사망률이 로마 전체 시민들의 평균 수명을 낮추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성들이라고 하는 것은 빨리빨리 자라서 빨리 빨리 시집가고 빨리 빨리 애기 낳고 그 다음에 빨리 빨리 죽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로마 사회를 떠받치는 피라미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밑변의 역할을 했던 보이지 않는 묻혀있는 자원들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러한 당시 로마 사회에서 아내는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남자들은 아내들을 얕잡아보고 ‘남편의 덕목은 완력과 힘으로 여자를 확 눌러서 자기 질서 속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남편으로서의 덕목이다.’ 이렇게 남성우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도가 오늘 남편들을 향해서 아가페테라고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너의 아내를 사랑하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로마 시대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제일 처음 이런 명령은 아주 충격적인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이 명령 자체가 아내를 이렇게 가부장적인 질서 하에서 남편에 의해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복종하고 한을 품고도 그 가정의 질서 속에서 복종하며 희생하고 인고의 삶을 살아야 할 존재로만 보지 말고,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렇게 아주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자로 생각하며 그를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은 그런 사랑으로 너희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이제 로마 사회에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당시의 사회에 대해서 아주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말하자면 인간관계를 예고합니다. 여러분, 선교지를 다녀보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직까지도 기독교를 아주 두려워합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슬람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불교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어 본적 있으십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칼과 총을 들고 일어선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을 일으켰지만 이런 가르침이 파고들게 되면 이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정치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이라크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를 만났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란에 지하에 교회가 있는데 어마어마한 흡입력을 가지고 특히 이슬람 여성들을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지금 이런 해석을 들으면서 여러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이슬람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조선시대에 구한말의 역사를 보면 사회를 변혁시킨 것은 기독교였습니다. 조혼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16살에 시집을 오셨다고 합니다. 신랑이 14살이었다고 합니다. 신랑이 맨날 바지 더럽혀 오는 아이입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성을 노동력으로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것을 종식시킨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축첩제도 많았습니다. 축첩제도 종식시킨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모이면 반장선거해서 지도자를 뽑는 것도 교회에서 배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너무 잘 쓰는 말이지만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이 싫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랑을 형이상학으로 정의하면 선한관계를 맺는 인간의 정신적인 경향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아가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너무 감정 위주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에서 얘기하는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총체적입니다. 유교에서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하고 이것을 사단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희로애락수오욕’ 이것을 칠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두 개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사단칠정론입니다. 단이라고 하는 것이 끄트머리라는 것입니다. ‘인’은 사랑입니다. ‘인의예지’는 이성의 기능에 속합니다. 그리고 ‘희로애락수오욕’은 감정의 기능에 속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사랑을 이성 쪽에 있다고 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의 사랑을 순수하게 감정이라고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의예지’라고 하는 탁월한 덕성을 ‘인간이 내 안에 가지고 있다.’ 동양철학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밥도 못 먹고 온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습니다. 딱 보더니 “왠 거지가 이렇게 누워있어. 재수 없어.” 이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가는데 어떤 사람은 “가엾어라. 이 추운 날에 먹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고 저렇게 어떻게 하지?”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확 생깁니다. 그 생각의 끝에서 불꽃이 튀어서 ‘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그냥 살아가다가 자기가 잘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한없이 수치스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어? 내가 그 정도 잘못했는데 주변에는 더 나쁜 놈도 많은데 내가 뭘?’ 이러고 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부끄러운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소위 얘기하는 수오지심이 발동합니다. 그것들이 한없이 팽창되어서 끝에서 탁하고 불꽃처럼 터지면 그럼으로 ‘의’를 이룹니다. 분에 넘치는 어떤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엇으로 보더라도 너희들이 그 정도는 나에게 봉사를 해야지.’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나같이 하찮은 사람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불편합니다. 나는 싫습니다.” 하면 사양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양지심이 저 끝에서 탁하고 불꽃처럼 터지면서 ‘예’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지’는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의식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이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하는 판단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맨 끝에서 작렬하듯이 탁 터지면서 ‘12지심’이 터지면서 거기서 ‘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정말 아름다운 인간, 훌륭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에서는 이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십이지심이 발달할 수 있는 상황이 수시로 임하게 될 때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최대한 발휘해서 불꽃처럼 그것이 터져서 마지막에 ‘인의예지’를 이루면서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있냐 이런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얼마나 훌륭한 인간인가?’하는 기준을 그렇게 놓고 본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사랑을 합니다. 둘이서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이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결혼하기 전에 사랑을 해야지만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의를 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감정일변도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이란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될 때에 마음이 동하면 사랑하고 안 되면 집어치운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식의 삶을 살 때 인간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사랑을 하는 것이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안 되면 벌써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다음에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수학, 물리학에서는 인간의 사랑은 도파민이라고 하는 물질에 의해서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도파민의 유효기간이 18개월입니다.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할 수는 없습니다. 임기 끝났으니까 가시고 다른 분 모시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되니까 사랑을 할 때도 있지만 안 되는 때도 사랑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사랑이 순간적인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매들을 보면 27, 28에 결혼을 해서 나이가 45세, 50세 가까이 되었는데도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저 놈 목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설레고 나오라고 그러면 가슴이 뛴다는 자매는 아주 가끔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자매들은 예외 없이 남편에게 커다란 실망을 한번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람을 핀다든지 그럽니다. 그런데 형제들 중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 20주년이 되었는데 아내의 전화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진다는 남자는 아직 한명도 못 만났습니다.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된다고 하는 것은 될 때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 자체가 의무감 하나로만은 될 수 없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이 사랑이 깃든 약속에 헌신하게 하는 일관성 있는 인간의 성품이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대부분 결혼하셨지만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은 결혼할 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나 그것만 보면 안 되고 신앙만 봐도 안 됩니다. 또 보아야 할 것이 성품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가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일관적인가?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언약에 대한 충성심, 이런 것들을 보면서 배우자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을 할 때 잘해야 합니다. 또 계속 고르다가 흰머리 날 때까지 계속 고를 수 없겠지만 깊이 생각하고 일수불퇴라고 생각하고 한번 구입하면 이것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혼인제도의 시작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리고 여자는 흙으로 안 만드십니다. 남자를 잠들게 한 다음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남자가 위에 있다. 왜입니까?’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재료를 취해서 만들었으니까 남자가 먼저이고 우위라고 생각하는데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왜냐하면 원재료를 보십시오. 남자는 흙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완성도가 높은 재료를 사용해서 여자를 만들었고 그래도 신제품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 평등주의자의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성의 불평등에 대한 그런 것들을 볼 때 분노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시간이 더 있으면 히브리어 성경 2장을 풀면서 남성 우위론적인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면 좋을 텐데 시간이 없으니까 넘어가면 그런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담이 고백을 하면서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창세기 2장은 결혼식에 쓰는 본문이다. 그리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 고백은 남녀 사이에만 있는 고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정의 기본단위로서의 남편과 아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초의 인류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담 말고 다른 모든 사람 중에 누구도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사람이 없습니다. 다 그 몸에서 살과 피를 받으면서 인간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고백은 온 인류가 서로를 향하여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사는 세상에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인을 낳았습니다. 타락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 아빠도 이 아이를 향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것이고 아이도 엄마아빠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동생을 낳습니다. 그런 흔적들이 타락했는데도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피붙이를 향한 사랑, 자기의 자녀, 부모를 향한 사랑이 남아있습니다. 온 인류를 하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회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성취되어서 모든 인류가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나라가 되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 형성된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신랑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붙어서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교회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러한 온 인류를 사랑으로 묶는 그런 성취적인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 또 가정을 통해서 그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에 가정은 하나의 교회 속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랑의 표준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무엇이라고 얘기했느냐하면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과 같이 하라.’ 여기서 누구도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는 깊은 좌절을 남편들은 느껴야 합니다. 또 앞에 보면 무엇이라고 나오느냐하면 ‘아내들아 너희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과 같이하라.’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이 성경구절을 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당신이 언제 나를 사랑해 본적이 있느냐. 여기 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복종해봐라. 그러면 사랑을 안 하나. 아내들은 어느 정도로 복종해야 하냐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아멘하고 복종하듯이 그렇게 복종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성경구절을 읽고 나면 항상 부부싸움으로 은혜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이 진리를 가르쳐주신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함 같이 하라.’ 그것은 그것을 보면서 아내를 깔보고 핍박하라고 주신 성경 구절이 아닙니다. 남편은 그 성경구절에 대해서 눈을 닫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내들이 읽는 성경구절입니다. 그 다음 절만 읽으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너희도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라.’ 그리고 자기가 가책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현실적으로 살아갈 때 그 때에 남편과 아내는 그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표준이 분명히 있는데 그 표준을 따라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예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내하고 사는데 너무 힘드니까 서점을 찾아갔습니다. 서점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책을 하나 찾으러 왔는데요. 아내가 너무 기가 세서 살 수가 없는데 아내를 길들이는 법 그런 책 있습니까?” 그랬더니 여직원이 하는 말이 “선생님, 공상과학 소설은 저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도저히 남자들이 안 되니까 여자들이 기가 엄청 새집니다. 결혼하고 나면 처녀 때는 목소리도 나긋나긋, 결혼하면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큽니까? 기차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조그만 소리로 해도 되는데 이만큼 큽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말을 안 들으니까 소리소리 지르니까 목청이 트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남자는 갱년기가 지나면서 남성호르몬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여성호르몬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성은 갱년기가 지나면서 여성호르몬이 떨어지고 남성호르몬이 나옵니다. 여성 안에도 남성호르몬 나오는 것 아시지요? 그리고 남성 속에서 여성 호르몬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50정도 지나가면 남편은 아내에게 고분 고분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고 아내는 30대 때 고분고분하다가 폭력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등살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이 아예 어느 한순간에 탁하고 줄을 놓아버립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해 버리고나니까 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간증하고 다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내가 이랬는데 내가 다 양보하고 죽었더니 가정에 평화가 왔다. 일찍이 이렇게 살아야 했다.”하는데 그것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내들이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합니까? 왜 그렇게 아내들이 남자들을 미워하게 됩니까? 젊은 시절에 이제 한 20대 후반쯤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처음부터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남편이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리고 상호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면 아내들이 안 그럽니다. 젊었을 때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죽어라고 쫓아다닙니다. 올인 하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골프공 같으니까 우선 꽉 잡고 봅니다. 꽉 잡아서 말뚝을 박고 혼인 신고를 하고 집안에 들여 앉혀놓습니다. 찜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데 못갑니다. 그 다음에는 남자들이 안정감을 토대로 가정에서 바깥으로 자기 자신을 펼칩니다. 여자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지 할 때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안으로 오그라듭니다. 한국사회 기준으로 얘기합니다. 뻗어나갑니다. 이 사람은 결혼과 함께 뻗어나가면서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위해 30대, 40대를 미친 듯이 삽니다. 50대까지 그렇습니다. 아내는 그 안에서 오그라들고 오그라들고 오그라들어서 자기도 처녀 때 남편보다 공부도 잘하고 어디서 사회 활동 하던 경력이 있는 사람인데 앉아서 밥이나 하고 애들하고 씨름하며 세월을 다 보냅니다. 그때는 남편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도 크고 하니까 아내가 꼼짝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올 때 마음속에서 아내와 남편 사이에 끈끈한 정신적 연합이 하나씩 하나씩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내가 겉으로 표현을 잘 안합니다. 그러다 50대쯤 됩니다. 직장에서 잘렸습니다. 남편이 생각해보니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아내가 정말 가엾은 마음이 생깁니다. 부지런히 가서 요리도 배우고 연금이 좀 나오니 아내에게 봉사하고 아내와 같이 손잡고 들판도 다니고 그러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여보.” 부릅니다. 그 전에는 보고 싶고 그랬는데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간 안보고 부모도 아이들에게 자기를 얼마간 안 보여주면 포기합니다. 엄마아빠 안보고 싶어 합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그 다음에는 어느 날 아내가 오더니 심각하게 얘기합니다. “여보, 내가 할 얘기가 있는데”, “무엇인데?” 이혼서류입니다. “아니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여보, 난 30년 전부터 문제가 있었어. 그냥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남편은 자기가 왜 이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젊은 시절부터 보험료를 안낸 것입니다.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야 하는데 안내니까 마지막에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한꺼번에 그 모든 부담을 다 져야 합니다. 그런 정신 차리는 것이 50대 넘어서입니다. 30대, 40대 때는 모릅니다.
(예화) 노인 병원에 50대, 60대, 70대, 80대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잔뜩 얻어터지고 병원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보았습니다. 50대에게 “당신은 왜 그렇습니까?” 알고 보니 모두 아내한테 얻어맞은 것입니다. 피가 납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아침 먹고 있는데 아내가 예쁘게 화장하고 고운 옷을 갈아입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보 어디가?” 그랬더니 때렸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맞을 짓을 했네. 어떻게 감히 아내에게 어디 가냐고 물어봅니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럼 왜 맞았느냐 하니까 자기는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딱 한마디밖에 안했는데, “여보, 나 배고파.” 했더니 어디서 아침을 달라고 하냐며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70대 노인이 “정말 맞을 짓을 했네. 어떻게 아침에 마누라 눈치를 봐야지 당당하게 그 나이에 아침을 차리라고 합니까?” 그러면 당신은 왜 그렇게 맞았느냐 했더니 나는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냥 아침에 눈만 떴는데 때리더랍니다. “이 이간이 간밤에도 안 죽었어?” 옆에 있던 마지막 80대 할아버지가 “맞을 짓을 했네. 아침에 눈은 아내 없을 때 뜨는 거야.” 그러더니 자기는 정말 잘못한 것이 없는데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아침에 눈도 못 뜨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아내가 오더니 자기 코에다 귀를 대더랍니다. 숨을 쉬니까 때리더랍니다.
영화에 조크와 가십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조크는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십은 웃기기는 웃기는데 이야기해 놓고는 가만히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을 가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웃었지만 웃음으로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한 다음 왠지 가슴 속에 싸한 외로움과 그 아픔 같은 것들이 스며들어옵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 뜨거운 사랑으로 그 십대 연애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은 그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은 영화에 나오는데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도 그런 사랑을 안 합니다.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랑을 자기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일평생 한 여자, 한 남자한테 일생동안 그런 사랑을 바칠 정도로 자기가 성인이 됩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두 가공입니다. 가공의 사건들을 보면서 사는 것이지 평범한 사랑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특히 젊은 자매들이 “목사님, 저는 남자가, 형제가 아무래도 좋습니다.”, “뭐가?”, “그렇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런 것 없어도 좋고 가난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평생 존경하며 살 수 있는 형제와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합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너보다 30년 연상의 남자를 찾아보던지, 아니면 위인전 전기나 읽으면서 혼자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남자가 있으면 자기 같은 후진 여자에게 장가를 오겠습니까? 더 훌륭한 사람에게 갑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아내의 성질에 죽어서 사는 행복을 간증하는 남편들도 잘못된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60년을 부부가 한 번도 안 싸우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너무너무 존경하는 것입니다. 두 부부를 초청 해다 부부들을 모아놓고 특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떻게 그렇게 60년이 넘는 세월을 부부싸움을 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셨습니까?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한 가지 딱 비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냐 했더니 결혼할 때부터 우리는 부부가 합의를 보았다고 합니다. “무슨 합의를 보셨습니까?” 했더니 너무나 싸우는 부부들을 많이 보니까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사소한 이 중요한 일은 남편이 결정하고 사소한 일은 다 아내가 결정하도록 그렇게 분업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싸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그렇게 의견이 서로 다른 적이 없습니까?” 했더니 “60년 사는 동안 내가 결정할 중요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
비록 가정의 질서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나오고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고’ 번역 성경 이렇게 보면 순종하라는 좀 가벼운 명령이고 복종하라는 센 명령이구나 느끼는데 남자가 번역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희랍어, 그리스어 성경으로 보면 ‘자녀들아 부모에게 복종하라.’ ‘아쿠오오’라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아쿠오오’는 ‘듣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어의 동치어가 ‘샤마’인데 마음에 깊은 복종심을 가지고 정신을 집중해서 순종할 의지를 가지고 복종할 의지를 가지고 듣는 것을 ‘아쿠오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복종하라 라고 하는 타소라고 하는 동사인데 질서적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 의논을 하면서 번역해야 하는데 남성들이 번역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쨌든지 성경이 그런 질서를 분명히 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남편이 폭력과 억압으로 아내를 짓밟아서 그 위치에 놓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 각자가 한 사람의 아내, 남편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서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은 나보다 나의 행복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신앙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내 인생에 대한 뜻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너는 네 자리를 찾아가라.’ 그것을 아내가 깊이 감동을 느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네 자리 여기이니까 여기로 안가? 안가면 사랑 안 해줄거야.’ 이런 식으로 아내를 짓밟아서 아내를 복종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리로 우리를 바꾸실 때에도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지성에 말씀하시고 우리를 감화시키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복종할 마음을 주셔서 진리가 가르치는 자들에게 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폭력은 실제로 주먹을 휘두르는 그런 폭력이 아니라 언어, 정신, 마음 이런 것에 대한 폭력이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가족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아무래도 살아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입니다.” 왜냐고 하니까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보고 목회를 하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절대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응답이다. 그런데 진실한 것이라면 네 아내를 통해서 응답을 하신다. 설마 가정을 깨고 네가 목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느냐? 생각을 해봐라. 만약에 그것이 주님의 뜻이면 네가 더 많이 기도하면 아내가 은혜를 받고 바뀌어서 ‘여보, 돈 많이 버는 직장 그만두고 가난한 시골 교회에 내려가서 목사가 되어야 해.’ 그렇게 말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아내가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 이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결혼할 때 저는 예전에는 연애를 오래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지금 생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연애를 너무 오래 하면 안 되겠지만 충분히 알고 결혼하라고 합니다. 요새야 살아 보고 나서 결혼을 생각해본다고 하지만 기독교 윤리적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교제하고 이해한 다음 결혼을 해라. 그런데 결혼을 하고보니까 이 여자가 이런 여자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무르고 싶습니다. 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만이 아닌 것이 무엇이냐면 사랑이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합니다. ‘아, 이 여자가 이렇게 망가진 부분이 있는 여자였구나. 야, 내가 잘못 골랐구나. 어떻게 하나?’ 그러면 불행해 집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 이 여자가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 약점을 내버려 두었으면 이 여자가 살면서 수많은 사람 괴롭히다 죽었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해주셨구나. 결국은 하나님이 나에게 네 아내가 이런 약점이 있으니 이것을 네가 보충해 주면서 이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이 여자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서 너도 온전한 사람이 되라.’ 이런 뜻이 있구나.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화) 어떤 아내가 어느 날 남편이 옷을 벗어놓고 어디를 잠깐 나갔는데 여자에게는 남편의 지갑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혹시 나 몰래 상당히 여기에 비자금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야? 사실 남자들이 그렇게 어리석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 열어봤는데 숨이 멎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늘 무뚝뚝하고 자기한테 친절하지도 않는데 지갑을 딱 여니까 정 가운데 활짝 웃는 자기 사진이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감동을 하고 그래서 도로 넣어놓고 남편이 오기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내 사진 가지고 다녀?”, “어, 가지고 다녀.”, “얼마나 되었어?”, “결혼하고 나서 한 2년 지난 다음부터 계속 가지고 다녔어.”, “그런데 왜 말 안했어?”, “뭐 그런 걸 말해?” 아내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이 남자가 정말 보통 남자가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내 사진 자주 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봐.”, “그래?” 가슴이 더 벅찹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이 결혼 한지 15년도 더 지났는데 펴서 일하다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주야로 묵상합니다. 그래서 “그럼 당신 내 사진 볼 때 느낌이 어때?”, “힘이 솟아.” 여러분 남편한테 그런 얘기 들어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사진 가지고 다닌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가슴이 너무 뛰는 것입니다. ‘이제 이 남자를 위해서 살아야겠다.’ 하고서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이 요구가 사실 실수였습니다. 거기서 끝났어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을 다니면서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 때마다 당신 사진을 본다.”, “어떻게 되는데?”, “이 여자도 데리고 살았는데 무엇을 못 견딜까? 이 세상의 어려운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 여자도 데리고 사는데 나는 할 수 있다.”
결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아내를 내게 주셨지만 그러나 이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아닌 것은 자신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내도 아마 사진은 안가지고 있지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 인간 생각하면서 ‘저 인간도 내가 데리고 사는데 내가 무슨 환란인들 극복할 수 없으랴.’하고 힘이 나면서 15년 이상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결혼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사랑이 한없이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살다가 보면 사랑의 고갈을 느끼고 ‘아 이제는 내가 이 이상은 할 수 없다.’라고 하는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지점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부모에게서도 자식에 대해서도 아내에 대해서도 남편에 대해서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디론가부터 이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랑하게 하는 힘을 어디로부터 공급받을 것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얘기합니다. 남편의 아름다움 때문에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끝날 때가 있습니다.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름다움이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도 끝납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그런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생겨나야 되는데 그것은 사실은 결혼 생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그 사랑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을 보면서 그 결점을 보충하기 위한 사명을 느끼는 것, 그런 것들이 결혼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결국은 아내와 남편이 항상 행복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저는 결혼하고 3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결혼하고 이렇게 집어던지고 싸운 적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년 전입니다. 지금은 언쟁은 안하느냐? 언쟁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늘 행복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이런 방법을 스스로 터득을 했습니다. 아내가 못되게 굽니다.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복수하느냐 하면 자기도 똑같이 못되게 굴어서 복수를 하면 가정에 불화가 오고 남편과 아내의 인격적인 결합이 파괴가 됩니다. 그럼 문제가 있으면 베드로서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나옵니다. 아내와의 관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하면 계속해서 핸드폰을 보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남편에게서 ‘여보 미안해.’ 올 줄 알았는데 안 옵니다. 아내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아침에는 내가 미안했어.’ 그런데 갑자기 짜증이 납니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데?’ 생각합니다. 자기가 정말 잘못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조금만 사과하면 자기가 더 크게 사과하겠는데 이것이 안보입니다. 그래서 그냥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전화를 걸까 말까 못 걸었습니다. 남편이 저녁이 되었는데도 안 들어옵니다. 한편 남편은 직장에서 뭐하나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그렇게 싸우고 오니까 그렇습니다. ‘여보 미안해.’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가 더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내를 길들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괴로워서 견딜 수 없고 미워 죽겠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안 들어가고 거리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백화점에 갔습니다. 선물을 사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미움의 감정이 막 끓어오르는데 그래도 그것을 누르면서 선물을 고릅니다. 선물은 피천득 씨의 인연에 보면 ‘평소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그래서 선물은 가끔 사치스러워도 괜찮다.’ 그래서 선물을 아내에게 할 때에는 이런 것으로 하면 안 됩니다. 하이타이, 고무장갑, 이런 것 사면 안 됩니다. 선물해주고 욕먹습니다. 아내가 절대로 자기 돈 주고 안살 것 같은 것, 제일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선물할 때 공책, 크레파스, 운동화, 내복 이런 것입니다. 가서 이제 고릅니다. 고르다보면 정신이 분산이 됩니다. 점원하고 깎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기분 전환이 됩니다. 좋은 상품을 하나 삽니다. 그리고 이제 들어갑니다. 꽃다발을 하나 사들고 들어갑니다. 아직까지도 안 풀립니다. ‘내가 진짜 이러고 살아야해? 이게 몇 번째인데.’ 그런가하면 또 한쪽에서는 ‘네가 참아라. 그래야 가정에 평화가 온다.’ 아내는 이제 밥을 차려놓고 전화도 못하고 막 기다립니다. 남편이 들어오니까 너무너무 안심이 되어서 아까 다툰 것은 잊어버리고 막 쪼르르 나가서 “여보 이제 왔어.” 그러고 문을 열어 주는데 남편을 보니까 생각납니다. ‘아침에 한바탕 퍼부었구나.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여보 정말 아침에는 미안했어.’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떨어집니다. 남편이 “아침에는 정말 내가 미안했어.” 내가 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도 놓고 봐도 자기가 나쁘게 군것인데 그렇게 얘기하니 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남편에게 퍼부었는데 남편이 자기를 용서해 줄뿐만 아니라 꽃다발까지 선물하고 또 다음 선물을 주는데 자기가 너무너무 받고 싶었던 목걸이와 반지 세트를 줍니다. ‘분명히 몇 달치 용돈을 모았을 텐데.’ 아내가 너무너무 미안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수입니다.
가슴에 상처와 원망과 원한을 남기는 그런 종류의 복수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이 갈등과 모든 고통들이 사실은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이 사랑의 강물에서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안 되는 이 인생을 살면서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그래서 부부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자녀들이 보면서 그 속에서 아내의 도리와 남편의 도리를 배워가게 할 때 그 자녀들에게 그것이 최고의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나가서 결국 아내를 만나고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는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온전하게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