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2021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1년 09월 12일 – 10월 31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1년 10월 31일
목 차
1. 외로울 때 만나라(창 13:14-18) 2021.09.12. 주일오전예배 16
2. 두려울 때 만나라(창 15:1-5) 2021.09.19. 주일오전예배 23
3. 믿어도 다시 구하다(창 15:6-17) 2021.09.26. 주일오전예배 31
4.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갈 때(창 16:1-3) 2021.10.03. 주일오전예배 39
5.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창 17:1-5) 2021.10.10. 주일오전예배 46
6. 신앙과 환대(창 19:1-3) 2021.10.17. 주일오전예배 55
7. 환대하는 자를 복 주심(창 18-1:8) 2021.10.24. 주일오전예배 65
8.. 시험에서 인정받을 때(창 22:1-19) 2021.10.31. 주일오전예배 73
<설교 프레임>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1 2021. 9. 12 주일 낮 예배
< 외로울 때 만나라 >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 이에 아브람이 …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4-18)
I. 본문해설
아브람(Abram)의 아버지는 데라였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아브람은 자녀(子女)가 없었고 나홀은 아들 롯을 낳았다.
조카 롯(Lot)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었다. 그때부터 아브람은 조카인 롯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약속(約束)의 땅으로 갈 때도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이때도 롯은 동행했으니 둘은 부자(父子)관계와 다름없었다.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거기서 기근(飢饉)을 만났다.
아브람은 식량을 얻기 위해 애굽(Egypt)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큰 수치(羞恥)를 당했다(창 12:11~19).
아브람은 큰 시험(試驗)을 만났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善)으로 바꾸셨다. 오히려 바로왕(王)으로부터 큰 재물(財物)을 얻게 하셨다(창 12:16).
II. 외로울 때 만나라
여기서 아브람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슬픈 사건(事件)이 발생했다. 그것은 아들처럼 사랑하며 함께 살았던 조카 롯과 이별(離別)하는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이유(理由)가 있었다. 아브람과 롯의 집안이 점점 번성하여 가축(家畜)들이 많아졌다. 도저히 그 좁은 땅에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牧者)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 게다가 가나안 원주민(原住民)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도 같은 지역에 거주했기에 목축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아브람(Abram)은 먼저 조카 롯에게 제안하였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일찍이 동생 하란이 죽고 아버지 데라까지 돌아가셨으니, 자식(子息)이 없는 아브람에게 롯은 믿음직한 큰 아들과 같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롯과의 이별(離別)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브람에게는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苦痛)이었을 것이다.
아브람(Abram)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고독(孤獨)을 느꼈을 것이다. 좋으신 하나님은 그 시험(試驗)을 통해 아브람을 깊이 만나주셨다.
A. 말씀하심
첫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롯과 헤어져 깊은 고통(苦痛)과 외로움 속에 있을 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창 13:14)
“후”()는 시간적으로 혹은 장소적으로, 어떤 특정한 것의 뒤에 있음을 가리킨다. 시간적(時間的)으로 하나님은 롯과 이별한 후 나타나셨다.
아브람은 롯을 사랑(love)했지만 그의 사랑의 상당 부분은 육정(肉情)에 매인 것이었다. 그것을 끊어 당신과의 깊은 교제(交際)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여기서 “이르시되”()는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아브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을 말씀하셨을 수도 있고 마음에 생각을 전달하신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큰 시험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혈육(血肉)의 덧없음과 이별(離別)의 쓸쓸함에 잠겼을 것이다.
아브람이 느꼈을 큰 외로움을 생각해보라. 그의 마음속에서는 날개 한 쪽이 뜯겨나가는 것과 같은 큰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픈 이별(離別)은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引導)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롯(Lot)과의 이별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
외로움(loneliness)은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집의 앞마당이다. 거기서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신 후에 만나주신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은 외로울 때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시련(試鍊)을 통해 마음을 녹이셔서 하나님만을 바라게 하신다.
그 깊은 고독(孤獨) 속에서 세상의 사람이나 물질을 의존(依存)하던 마음을 모두 버리게 하셨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게 하셨다.
우리도 이별(離別)의 아픔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는 인연(人緣)이 덧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때 믿음(faith)이 없으면 그 외로움의 벌판에서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게 된다.
자살(自殺)을 결심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 타인(他人)으로 느껴진다.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faith)을 가질 때 우리 영혼(靈魂)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된다. 가슴에 새길 교훈은 이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나 아무에게도 집착하지 말라”
외로움의 정서(情緖)는 중립적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감정(憾情)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이에 따라 유혹(誘惑)에 넘어지기도 하고 하나님(God)께로 나아가게도 된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예수 믿는 법이 없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 을 갈망(渴望)하는 법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브람(Abram)에게 왜 그런 이별의 고통(苦痛)의 아픔을 겪게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救援) 역사를 이루어갈 씨(seed)는 롯의 자손(子孫)에서 나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많이 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자손(子孫)은 아브람의 씨에서 나올 것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計劃)이었다. 그래서 롯과 헤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아브람을 새롭게 만나주셨다.
외로워하지 말라. 그리하여 육신(肉身)의 방황으로 신앙(信仰)에서 미끄러지지 말라. 더욱 깊고 깊은 영적인 어둠으로 떨어질 뿐이다.
외로움의 감정을 신앙(信仰)으로 다루라.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 당신이 하나님(God)을 새롭게 만날 때이기 때문이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B. 약속하심
둘째로, 하나님이 약속(約束)하셨다. 조카 롯과의 이별(離別)에 아브람(Abram)은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특별한 외로움의 때에도 신앙(信仰)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의 약속(約束)을 주셨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 13:15-16)
이것은 두 가지 내용(內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言約)의 구체적인 성취였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1. “주리니…”
하나님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約束)하셨다. 롯과 헤어진 후였다. 동서남북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아브람과 후손(後孫)에게 주기로 약속하셨다.
이 약속(約束)은 성취되었다. 국지적(局地的)으로는 이스라엘 왕국(王國)의 수립을 통해서, 또한 우주적(宇宙的)으로는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많은 영적 아브람의 후손이 생겨난 것이다.
2. “하리니…”
하나님은 자손의 번성(蕃盛)을 약속하였다. 이 약속(約束)은 아브람에게 너무나 큰 위로(慰勞)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아브람에게 많은 가축(家畜)과 종들이 있을 지라도 그에게는 땅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내 사라(Sarah)를 가나안 땅 막벨라 밭에 장사(葬事)지낼 때 주인에게 땅값을 지불해야 했다(창 23:9).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브람과 그 집안 사람들은 남의 땅에 우거해 살면서 늘 멸시받았다. 그 집안의 백성(百姓)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람의 자손(子孫)들은 땅에 티끌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후에 주어졌다.
하나님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간섭(干涉)하신다. 인생(人生)이 심하게 꼬이는 것 같은 순간에 일하신다. 당신도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faith)이다.
C. 경배드림
아브람은 경배(敬拜)를 드렸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다. 이로써 아브람은 극도의 외로움과 불안(不安)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브람은 확신(確信)을 가지고 장막(帳幕)을 옮길 수 있었다. 머물던 곳을 떠나 헤브론(Hebron)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정착했다.
아브람은 거기서 제일 먼저 여호와를 위해 제단(祭壇)을 쌓았다. 경배(敬拜)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떨쳐버릴 수 없이 남았던 롯에 대한 배신(背信)의 감정도 씻은 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아브람이 거기서 제단(祭壇)을 쌓은 것은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感謝)의 제사를 드리고, 또한 하나님께 기도(祈禱)하기 위함이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현실(現實)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은 때에 낙심(落心)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약속을 붙들라.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믿음(faith)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확신하는 것이다. 그 약속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라.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2 2021. 9. 19 주일 낮 예배
< 두려울 때 만나라 >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1-5)
I. 본문해설
사해(死海)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왕(王)이 주변 다른 왕들과 함께 세력을 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던 엘람왕 그돌라오멜(Gdolaomel)과 연합국을 대적(對敵)했다. 양측 사이에 전쟁(戰爭)이 일어났으나 소돔과 고모라는 패배했다.
이 전쟁 통에 아브람을 떠나 독립한 조카 롯이 포로로 끌려갔다. 아브람은 조카를 구하기 위해 개인 병력(兵力)을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부녀와 친척들을 다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나 아브람은 마음이 평안(平安)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이겼으나 큰 두려움 속에 지냈을 것이다.
자기보다 강력한 군대(軍隊)를 거느린 그들이 언제 복수하러 쳐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II. 두려울 때 만나라
이 말씀은 아브람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환상(幻像) 중에 그에게 제일 먼저 임한 말씀은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였다(창 15:1).
이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공격하고 롯을 구출한 아브람의 행동을 하나님이 인정(認定)해 주셨음을 암시한다.
아브람(Abram)의 마음은 순수했다. 엘람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어떤 대가(對價)나 전리품도 취하지 않았다.
참전(參戰)의 동기가 전리품이 아니라 롯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정직(正直)하게 행했으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위로(慰勞)가 될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말씀하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자기계시의 말씀이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였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방패와 상패다.
“…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A. 방패
하나님은 자신을 “방패”()로 계시하였다. 당시 전투에서 방패(防牌)는 가장 중요한 방어무기였다. 적(敵)의 화살들로 공격을 받거나 근접전에서 칼의 공격을 막는 데 쓰였다.
* 방패의 역사
이처럼 방패는 단지 방어무기만이 아니라 공격용 무기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방패”(防牌)라고 계시하신 의미는 이것이다.
앞으로 아브람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어떠한 공격에도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선언이었다. 또한 그들을 격퇴(擊退)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방패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브람을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공격 받을 때 물리쳐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언제나 당신의 성품(性品) 중 일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을 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評價)를 암시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아브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훌륭하게 믿음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조카 롯을 구해왔다. 그러나 온 식솔(食率)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조카 롯의 배은망덕을 생각해보라. 과연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구할 가치(價値)가 있었을까? 그러나 아브람은 사랑의 사람이었다.
롯은 자기를 떠났지만 그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그 사랑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롯을 구출(救出)하였다.
아마도 아브람은 하나님만 의지(依支)하는 가난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환상 중에 말씀으로 임하셨다.
이제 그의 신앙이 성숙(成熟)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교제(交際)할 정도까지 된 것이다.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창 15:1)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다”의 말씀은 두려워하고 있던 아브람에게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감화(感化)와 함께 전달되었다.
당신에게 두려운 일이 있는가? 마음에 놀랄만한 걱정거리가 있는가? 이럴 때 당신의 마음은 나뉘고 염려(念慮)하게 된다.
정신(情神)은 흩어지게 되고 생각은 눈에 보이는 사물(事物)에만 집중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보다 보이는 환경(環境)에 지배 받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의심과 두려움에 압도된다. 죄에 저항할 용기(勇氣)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힘이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人格的) 신뢰는 약해지고 경건(敬虔)은 모양만 남게 된다. 마음이 신앙(信仰)의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어찌 달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려운 때일수록 마음을 모으라. 방패(防牌)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 방패 뒤에 몸을 감추고 대신 싸워주실 주님을 붙들라.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Word)을 받아야 할 때다.
당신이 옳은 일을 했는데 두려워한다면 격려(激勵)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책망(責望)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야하지 않겠는가?
* 고난의 때에 주신 말씀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2~3)
B. 상급
이어진 말씀은 이것이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여기서 “상급”()이라는 말은 “고용, 삯, 보상, 상급, 보수”등을 뜻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그래서 상급(賞給)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받은 자기(自己)가 아니라 주신 하나님(God)을 찬송해야 한다.
상급조차도 은혜(恩惠)로 주어지는 것이다. 자기가 선한 일을 했어도 행한 것에 비해 넘치도록 크게 많이 주시는 것이 상급이다.
일반적으로 “상급”(賞給)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격(資格)이 있고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다.
1. 주 하나님을 누림
먼저, 하나님 자신(自身)을 누리게 하셨다. 은혜 받은 사람에게 가장 큰 상급(賞給)은 사랑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것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으로서 계시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가 즐거워하고 누릴 수 있는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성도들에게 가장 큰 선물(膳物)은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가장 큰 헌물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드린 후에 헌물(獻物)을 드리는 것이다(고후 8:5).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마음껏 당신을 누리도록 자신을 내어 주신다.
2. 많은 자손을 주심
많은 자손(子孫)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아브람이 그렇게 옳은 일을 하고도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백성(百姓)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인구(人口)의 숫자가 곧 국력(國力)의 크기였다. 그래서 백성이 많은 것은 곧 왕의 영광이었다(잠 14:28).
아브람과 그 자손들이 늘 떠돌며, 불안(不安)한 삶을 살았던 이유도 땅이 없고 백성들의 수효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원주민에게 강간(强姦)당했을 때, 끔찍하게 보복하고 돌아온 아들들에게 했던 야곱의 말을 기억해보라.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단지 육신의 자녀들이 번성하는 것들만 아니다. 영적(靈的)인 자손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구원(救援)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드는 것이다. 온 세상이 거룩한 백성으로 뒤덮이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가문(家門)에 사람 수가 적어 두려움에 떨던 아브람에게 이보다 빛나는 상급(賞給)은 없었다.
그의 자손이 별처럼 많게 되는 것은 꿈꾸지도 못했던 소원(所願)이었다.
III. 적용과 결론
지금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불안해하고 염려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특별히 만나야할 시간이다.
하나님께 책망(責望) 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큰 상급(賞給)을 주시고 싶은 사랑스러운 성도가 되라.
어떠한 처지에서도 현실(現實)을 받아들이라. 불평(不平)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 믿음으로 살라. 그래서 상급(賞給)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라.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3 2021. 9. 26 주일 낮 예배
< 믿어도 다시 구하다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6-17)
I. 본문해설
롯을 구출한 아브람(Abram)이 엘람왕과 연합군의 보복(報復)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말씀으로 임하셨다(창 15:1).
하나님은 당신을 방패(防牌)와 상급(賞給)으로 계시하셨다. 그 상급으로 자손이 번성할 것과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자손의 번성에 대한 확신(確信)을 주시기 위해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셨다. “…네 자손(子孫)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아브람은 이렇게 약속하시는 여호와를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信賴)함으로 그분의 약속(約束)을 믿은 것이다.
II. 믿어도 다시 구하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자기를 갈대아 우르(Ur)에서 이끌어 여기까지 인도(引導)하셨다. 아브람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다.
이때 아브람의 신앙은 초기 단계였다. 하나님은 그의 긴 여행의 과정을 통해 사랑(love)과 능력(能力)을 보여주셨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經驗)하며 점차 신앙(信仰)이 자랐다. 그분의 말씀을 믿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A. 표징을 구함
아브람은 표징(表徵)을 구했다. 하나님의 말씀(word)을 믿었으나 그는 약속(約束)을 받은 것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의 수준(水準)이었다.
그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보증(保證)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표징을 구했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하나님께서 말씀(word)으로 임하지 않으셨는가? 가장 두렵고 마음이 가난하던 때에 말씀해 주지 않으셨는가?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아브람(Abram)은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이 자기의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인가?
더 놀라운 것은 땅(earth)에 대한 약속이었다. 아브람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보증(保證)을 받고 싶었다.
그는 자손(子孫)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여주신 것 같이,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約束)에 대해서도 그렇게 특별한 표징(表徵)을 보여주시길 원했다.
이것이 당시 아브람의 신앙(信仰)이었다. 하나님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신앙(信仰)이 진보하기를 기다려주셨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믿음(faith)이 아니라, 이미 있는 믿음을 활용(活用)하라!
이후로 아브람의 신앙은 성숙(成熟)해져 갔다. 그리하여 표징(表徵)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보라(창 22).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그는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때 그는 어떤 표징(表徵)도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브람의 말씀 신앙(信仰)이 진보한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표징(表徵)을 구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지 않으셨다. 당시 아브람의 수준에서 더 잘 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셨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異邦神)들을 섬겼다. 신실한 신들이 아니었다. 약속을 어기는 것쯤은 다반사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브람은, 하나님(God)이 그들과 다른 신(神)임을 확신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의 마음을 가상히 보셨다. 그의 신앙(信仰)의 수준을 따라 응답(應答)해 주셨다.
신약(新約)에서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사람을 기억해보라. 그는 할 수 있으면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faith) 없는 것을 책망하시며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그러자 자신의 믿음(faith)이 부족했던 것을 깨달은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간구(懇求)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4)
여기서 믿고자 하는 자를 긍휼(矜恤)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믿음의 수준(水準)이 높지 않아도 좋다. 지금은 믿음이 적을지라도 더 큰 믿음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높은 믿음(faith)을 가지고 있어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매일 간절히 기도하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현실(現實)이 힘들어서 힘든 게 아니다. 이 세상에 쉬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믿음(faith)이 적어서 힘든 것이다.
더욱 큰 믿음 갖기를 구하라. 능히 현실(現實)을 이길 힘이 생길 것이다.
B. 약속의 징표
하나님은 약속(約束)의 징표를 보여주셨다. 그전에 먼저 아브람에게 제사(祭祀)를 명하셨고 제물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셨다.
그것은 삼 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의 새끼였다. 이는 제사를 통해 아브람을 특별히 만나주시려는 뜻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해가 질 때쯤 아브람은 깊은 잠에 떨어졌고, 그는 아주 깊은 잠 속에 있었는데도 아주 큰 두려움을 느꼈다.
이것은 자연적 수면(垂面)이 아니었다. 주님이 큰일을 행하실 조짐이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창 15:12)
아브람은 깊은 잠에 떨어졌으나, 흑암(黑暗)에 싸인 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환상(幻像)이나 꿈(dream)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3-16)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의 수준에 맞게 대해 주셨다. 그가 원하는 표징(表徵)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실(信實)함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아브람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져온 문화(文化)를 사용하셨다. 이는 눈높이 교육이었다.
순수하지만 아직 연약(軟弱)한 그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벌여놓은 제물(祭物)의 크기를 생각해 보라. 다 자란 암소를 비롯해서 세 마리의 짐승이 가운데가 쪼개진 채 벌여놓아졌다. 제단에는 엄청난 양의 피(血)가 낭자하게 흘렀을 것이다.
해는 졌고 온 땅은 어두워졌다.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로써 응답하셨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창 15:17-18)
“연기 나는 화로”는 환상이나 꿈의 도입부(導入部)이고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제물 사이로 지나가셨다.
*고대 근동의 언약 체결의식에 대한 설명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이 하신 약속(約束)을 어기면 제물처럼 죽음의 저주(咀呪)를 받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하나님을 정죄(定罪)하고 심판하겠는가?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불경(不敬)스러운 메시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껏 아브람의 마음에 배인 문화(文化)의 맥락을 존중하셨다. 오히려 징표(徵表)로 사용하셔서 그의 믿음을 강화하셨다. 아브람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내용(內容)은 이것이다.
“나 여호와는 신실하다. 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징표(徵表)는 아브람에게 그림 언어(picture language)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는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모든 것을 굳게 믿게 된 아브람에게 언약(言約)을 세우셨다. 징표(徵表)와 함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아예 지도를 그리셨다.
“…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구체적으로 지명(地名)까지 언급하시며 그 넓은 땅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땅들은 아브람(Abram)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이었으니, 그 땅은 바로 미래에 이스라엘이 세워질 가나안 땅이었다.
하나님은 믿음이 큰 자보다 더 잘 믿고자 하는 자를 더욱 기뻐하신다. 그들의 수준에 맞춰주신다.
그들을 위해 징표(徵表))까지 보여 주시면서 더욱 잘 믿도록 도와주신다. 더 큰 믿음 갖고 현실을 이기라.
III. 적용과 결론
이때는 아브람의 인생의 위기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바로 그때 다시 한번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그는 비록 적은 믿음이었으나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더 잘 믿기를 원했다. 은총(恩寵)의 표징을 주셨다. 어둠은 사라지고 다시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다.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4 2021. 10. 3 주일 낮 예배
<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갈 때 >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창 16:1-3)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표징(表徵)까지 보여주시며 약속하셨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그의 자손(子孫)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실 것이며, 넓은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창세기 15장과 16장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본문은 그가 가나안에 도착한지 10년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보도한다.
하나님(God)을 그토록 놀랍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Abram)은 또 다시 영혼의 침체(沈滯)에 빠졌다.
그는 신앙(信仰)이 약(弱)해져서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녀의 생산(生産)에 관한 결정을 통해 드러났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친히 임하셔서 그의 자손(子孫)에 관해 약속하셨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신뢰(信賴)했기에 그 약속(約束)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믿은 것을 의(義)로 여기셨다(창 15:6).
그랬던 아브람은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믿음이 약해졌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말씀(word)을 예전처럼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약속들은 시간(時間)이 지나면 꼭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 16:4, 16)
그는 아내인 사래의 불신앙적 제안(提案)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깊은 영혼의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II.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갈 때
아브람은 은혜(恩惠)에서 멀어졌다. 하나님 사랑에서 떠났다. 그러자 이제 그는 더 이상 특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당시 세상(世上)의 기준과 풍속(風俗)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신자(信者)의 마음은 신앙으로 타오르지 않으면 점차 꺼져가게 되어 있다.
A. 영혼의 침체
하나님과의 매우 특별한 만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점차 믿음(faith)이 연약해졌다. 영혼의 침체(沈滯)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믿음이 약(弱)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본문에서 아브람과 사래의 대화(對話)를 보라. 어디서 믿음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표징(表徵)을 구하기까지 매달리던 신앙은 엿볼 수가 없다.
1.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음
이 시기에, 아브람(Abram)은 성경에 기록될 만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은혜(恩惠)는 사라졌고 그의 믿음(faith)은 점차 약해져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의 본문 앞부분에는 아브람이 무슨 특별한 죄(罪)를 지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냥 평범한 일상(日常)이 계속 되었을 것이다. 무슨 특별(特別)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그냥 세월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신자(信者)가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은 꼭 특별한 죄(罪)를 짓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는 생활에서 멀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사래는 여전히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한 믿음이 흐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첩(妾)을 주어서 후손(後孫)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하나님(God)의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의 세상의 관습(慣習)을 따른 것이었다.
아내인 사래의 불신앙적 제안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反應)은 너무 간단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뜨거웠던 아브람의 신앙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니 당연히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親交)를 상실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말씀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2. 가정의 질서가 무너짐
이러한 영혼(靈魂)의 침체 속에서, 아브람은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권위(權威)를 잃어버렸다. 그에 따라 가정의 질서(秩序)도 무너져 버렸다.
사래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자녀(子女)를 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했고,남편을 첩(妾)에게 주어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
아브람은 사래의 이런 불신앙적 결정에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이미 아브람에게는 그럴 수 있는 영적 권위(權威)도 그렇게 할 마음도 없었다.
드디어 아이를 잉태했다. 여종 하갈은 분수를 모르고 사래를 멸시했고, 사래는 남편을 무시(無視)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하갈을 학대했다. 아브람은 이 모든 일에 수수방관하였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 16:6)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家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인간의 욕망(慾望)에 의한 극심한 무질서였다. 결국 여종 하갈은 도망을 갔다.
하갈은 도망간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만나서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예언(豫言)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자손이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손들과 대적하며 살게 되리라는 불행(不幸)한 예고였다(창 16:12).
B. 관계의 고통
은혜(恩惠)에서 멀어진 아브람의 불신앙은 관계(關係)의 고통을 가져왔다. 가족들 중 누가 행복했겠는가? 무엇이 행복(幸福)했겠는가?
아브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자 신앙으로 가정(家庭)을 지켜야 할 아브람의 권위는 사라졌고 하갈은 학대를 받아야 했다. 여기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가정(家庭)의 질서는 깨어졌다. 두 사람은 은혜에서 멀어졌으며, 사래는 하갈을 잔인(殘忍)하게 대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 또한 깨어졌다.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아브람의 불신앙(不信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가정의 평화(平和)는 사라졌고,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 사람의 신앙은 그 사람 자신의 인생(人生)만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은혜에서 멀어질 때 가족(家族)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고통(苦痛)을 가져다 준다.
아브람의 가정의 혼란(混亂)을 보라.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가족들 모두 고통(苦痛)을 당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는 가장인 그가 말씀의 은혜(恩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아야할 사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 인생(人生)이 힘든 것은 현실(現實)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감당할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구든지 확실한 사실은 이것이다. 누구든지 은혜(恩惠) 안에 산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며 은혜에서 멀어진다면 관계의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도 불행(不幸)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돌아보라. 당신의 영혼(靈魂)의 상태를 돌아보라.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장은 만족할지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지금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결국 행복하게 될 것이다. 은혜(恩惠) 안에 살라. 믿음으로 살라!
후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祖上)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결코 단번에 그런 믿음(faith)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적 성숙은 평생에 걸친 연단(鍊鍛)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熱心) 곧 은혜가 한 일이었다.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그를 믿음의 조상(祖上)으로 만들었다. 아브람은 그 열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다.
지금 침체(沈滯)에 빠진 아브람을 보라! 그의 믿음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을 그렇게 특별히 만났지만 다시 약해졌다. 그런 그가 굳센 거목(巨木)이 되기까지 그에게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브람이 넘어진 것은 그의 불신앙(不信仰) 때문이었고, 그때마다 넘어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였다.
그는 시련(試鍊) 속에서 회개(悔改)하며 깨닫고,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순종(順從)을 통해 적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나아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주셨는데도 지금은 은혜(恩惠)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은가?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狀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라. 지금 하나님의 은혜(恩惠)에서 미끄러진 채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아브람은 하나님을 특별히 만났던 사람이다. 그러나 은혜(恩惠)에서 멀어지자 이렇게 미련해졌다. 당신은 이 어두운 인생의 밤을 어떻게 지나려는가?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5 2021. 10. 10 주일 낮 예배
<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1-5)
I. 본문해설
아브람의 위기는 경제적인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인 것도 아니었다. 신앙적이고 영적(靈的)인 위기였다. 그는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죄(罪)에 빠졌다.
아브람은 불신앙으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표징(表徵)까지 보여주신 하나님과의 약속(約束)을 저버린 것이었다.
그 대가(代價)는 주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길고긴 영혼(靈魂)의 밤이었다.
86세의 노인으로서 첫 아들을 얻은 것이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끊어진 채 1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의 심령은 얼마나 곤고(困苦)하였을까?
이번에도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God)이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죄인(罪人)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보여준다.
II.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
일찍이 하나님은 큰 영광(榮光)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
쪼갠 제물 한가운데를 불로 지나가심으로 당신의 임재(臨在)로써 아브람과의 약속(約束)을 확증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그 크신 은혜를 불순종으로 되갚았다.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자랑하지 말라. 그것이 오늘의 신앙(信仰)을 지켜주지 못한다. 매일 은혜(恩惠)를 받아야 살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살 수 있다.
아브람의 영혼(靈魂)이 파리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졌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셨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A. 전능하신 하나님
오랜 침묵을 깨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첫 말씀은 이것이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제일 먼저 하나님은 당신이 전능(全能)하신 분이심을 아브람에게 상기(想起)시키셨다. 그것을 믿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根源)이었다.
이것이 아브람의 불순종(不順從)의 원인이었다. 그 큰 은혜의 언약을 받고도 불순종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믿음(faith)이 약해진 것이다. 아니 망각(忘却)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다”
신자가 현실(現實)을 무겁게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쉬운 현실(現實)이 어디에 있는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人生)의 무게가 아닌가? 어느 누가 가벼운 현실을 살아가는가?
신자(信者)가 현실의 무게에 눌리는 것은 현실이 무거워서가 아니다. 자기를 지탱할 믿음이 부족(不足)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신령한 자원(資源)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자는 세상 자원으로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써 살 수 있는가? 지금 아브람이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交際)가 끊어진 채 살아가게 된 것이 재물(財物)이 없어서였는가? 세상 명예가 없어서였는가? 아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늙은 아브람과 사래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가?
* 예화: “목사님, 너무 곤고해요”
곤고한 것은 결코 현실(現實)의 무게 때문이 아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처(傷處)를 준다.
인간은 꿈을 이루자마자 또 다른 욕망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현실은 우리의 꿈에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현실에 배신(背信)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인생의 고뇌는 계속된다.
그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 한, 현실(現實)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전개된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죽어가는 존재이면서도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탐욕(貪慾)을 부린다. 그래서 평안(平安)을 잃고 불행(不幸)으로 떨어지게 된다.
신앙의 유용성(有用性)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그런 욕망(慾望)을 모두 충족시켜 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God)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데 다른 것들로 어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모두 거짓된 신자의 환상(幻想)이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신 분이시다. 이 사실을 명심하라. 그만 의지하라
B. 완전하라
먼저 아브람에게 완전(完全)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이제까지 아브람의 신앙과 삶이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종의 완곡어법이었다. 진짜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는 그동안 나를 버린 채 불순종하며 살았다”
아브람은 믿음(faith)을 버렸다. 완전해지고자 하는 의지(依支)도 없이 살았으니 후일 자신의 인생(人生)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신앙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아브람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옛날에 하신 약속(約束)을 상기시켜주셨다. 그것은 자손의 번성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2,6)
세상에서 인간이 신(神)을 찾아가는 종교가 있고 신이 인간을 찾아와 주는 종교(宗敎)가 있다. 전자는 자신의 수도(修道)를 요구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의지한다.
인간에게는 죄(罪) 짓고 불순종(不順從)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떠날 능력은 있다. 이는 누가 그렇게 하게 해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와 부패성 때문에 스스로 타락(墮落)한 것이다.
죄인(罪人)은 하나님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할 수는 있다. 그것은 그의 책임(責任)이다.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겔 14:6)
하나님은 돌이키고자 하는 자에게 돌이킬 힘을 주시고 회개(悔改)하려는 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은혜(恩惠)를 통해 일하신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놀랍게 만나주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혼(靈魂)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가?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다. 믿음이 가벼워서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現實)에 짓눌리고 새파랗게 입술이 질린들 누가 당신의 현실을 대신 살아주겠는가?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딤후 1:7).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완전(完全)하겠는가?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고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가듯이 믿음(faith)을 가진 자는 완전한 삶을 살려고 한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한 삶을 살기로 힘쓰라. 그의 은혜를 간구하라!
C. 개명하라
하나님은 영적 침체 속에서 죄 짓고 불순종 했던 아브람에게 명령하신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
이전 이름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고, 새 이름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라를 만드실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하나님은 일찍이 만민에게 아브람이 복(福)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2).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약속(約束)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後孫)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을 갖게 하여 언약(言約)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로 개명해 주신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후로는 아브람이 자신에게 주신 새 이름 ‘아브라함’(Abraham)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통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을 하게 될까?
늘 현실에 지고 넘어지며 패배(敗北)하는 사람인가? 또한 끊임없이 낙심(落心)하고 좌절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民弊)나 끼치고 사는 사람인가?
현실에 대한 불평(不平)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책임감(責任感)도 없고, 현실을 개혁(改革)하려는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이름을 개명(改名)해야 할 때다. 당신은 이제껏 하나님의 큰 은혜(恩惠)를 입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침체 속에 있고 삶으로는 불순종(不順從)하며 죄를 지었다. 이제 그 이름을 버리라! 누구를 위해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려고 하는가?
다시 하나님을 만날 때다.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름을 고칠 때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불순종(不順從)했던 아브람을 다시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Abraham)이라고 고쳐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은혜(恩惠)를 구하는 당신을 왜 안 만나 주시겠는가? 어찌 실패한 당신의 이름을 고쳐 주지 않으시겠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거룩하게 구별한 성도(聖徒)이며,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子女)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아는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무리 세상(世上)이 변하고 현실(現實)이 무거워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당신은 성도(聖徒)다. 하나님의 자녀(子女)다. 이는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이름이다.
III. 적용과 결론
다시 그 옛날 세상 이름으로 돌아가지 말라. 아브람(Abram)처럼 부끄럽게 살지 말라. 당신의 새 이름은 성도(聖徒)다.
당신에게 주신 새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믿음(faith)으로 다시 그 이름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라!
인생의 위기(危機)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다. 속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 당신의 이름은 성도(聖徒)다.
그 영광스러운 그 이름으로 돌아오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현실을 이기는 성도가 되라!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6 2021. 10. 17 주일 낮 예배
< 신앙과 환대 >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창 19:1-3)
I. 본문해설
아브라함(Abraham)은 실로 오랜만에 하나님을 다시 뵈었다. 그는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게 되었다.
그는 부지(不知)중에 나그네를 영접하여 후대하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천사였고, 계시(啓示)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다. 거기에 사랑하는 조카 롯과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간절히 기도(祈禱)했다. 후일 소돔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생각하셨다. 롯과 가족을 구해주셨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 19:29)
II. 신앙과 환대
앞으로 닥칠 위기를 알지 못한 채, 롯과 그 가족은 소돔(Sodom)에 머물러 있었다. 소돔 지역이 멸망(滅亡) 당할 순간이 다가오는 때였다.
나그네로 보이는 두 천사(天使)가 소돔에 이르렀다. 때는 저녁시간이었다.
A. 영접함
롯은 그들을 보고 일어나서 땅에 엎드린 채 절하기까지 영접(迎接)하였다.
이때 롯은 그들이 천사(天使)인 줄 몰랐다. 그냥 나그네로 알고 성심으로 대접(待接)한 것이었다.
이는 평소 롯이 나그네를 환대(歡待)하던 어진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타락하고 이기적(利己的)인 소돔 사람들의 삶과 대조를 이룬다.
롯은 그들을 주(主)라고 부르며 “자기 집에 와서 씻고 먹고 자고 가길” 간청하였다. 그들은 사양했다. 그러나 롯은 거듭 요청하여 접대하였다.
롯과 가족은 사실상 소돔에서 정착(定着)하지 못했다. 거기는 타향(他鄕)이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롯은 기껏해야 잠시 머무는 낯선 길손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창 19:9)
이것이 바로 롯을 향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평가(評價)였다. 그들은 타락하고 음란(淫亂)했으니 롯은 진심으로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롯은 소돔에서 자기보다 더 낯선 사람들인 두 나그네의 노고와 위험을 생각하여 따뜻하게 영접하였다. 이것이 타락한 도시(都市)에 살던 롯의 경건(敬虔)이었다.
그는 한때 안목(眼目)의 정욕을 따라 아브라함과 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라함을 통해 배운 여호와 신앙(信仰)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은 나그네에 대한 환대(歡待)로 나타났다.
B. 환대함
롯은 나그네들을 환대(歡待)했다. 그것은 타락한 소돔에서 하나님의 구별(區別)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의 믿음(faith)의 열매였다.
1. 거처를 내어줌
그는 자기의 거처(居處)를 내어주기까지 영접하였다. 롯은 단지 그 나그네들에게 적선하듯이 동정(同情)한 것이 아니다.
롯은 진심으로 나그네들을 환대했다. 그는 나그네들이 집에 들어와 발을 씻고 자고 가길 간청했다. 그들을 위해 무교병을 굽기까지 정성껏 식탁(食卓)을 베풀었다.
자기의 고유한 거처(居處)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그것은 개인의 평온이 침해 당하는 희생(犠牲)이었다.
그러나 롯은 그것을 기꺼이 감내(堪耐)했으며 오히려 기쁨으로 여겼다.
2. 마음을 내어줌
그것은 나그네들을 가족(家族)과 같이 맞이한 환대였다. 환대는 상대방을 위해 그가 자기 마음에 들어올 자리(place)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은 마음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며, 미움(hatred)은 그를 마음에서 축출(逐出)하는 것이다.
비록 롯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멸망(滅亡)의 시기는 다가오고 있었다.
롯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 믿음은 나그네에 대한 환대(歡待)로 나타났다. 롯은 마음을 다해 그들을 돌보고 섬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천사(天使)였다. 롯은 부지중에 나그네를 환대(歡待)함으로 멸망하는 소돔성으로부터 구원 받을 기회를 얻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3. 이웃을 환대함
기독교의 구원(救援)은 자격 없는 죄인(罪人)들에 대한 하나님의 환대(歡待)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환대를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복음(福音)의 계명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대해 주신 것과 같이 이웃을 환대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용서(容恕)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환대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현실(現實)이 각박할수록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상황이 힘들수록 자기에게만 골몰(汨沒)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주위를 돌아보라. 우리보다 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련의 때에 자기(自己)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현실(現實) 극복의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할 곳 없는 이웃에게 환대를 베풀며 힘을 얻는다.
사랑을 받는 사람도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희망(希望)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救援)의 은혜를 기억하라. 이웃에 대한 환대(歡待)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love)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환대해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연약한 자이지만 너무나 소중(所重)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각박한 때에 시선을 불쌍한 이웃에게 돌려보라. 너무나 힘겹게 사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야말로 그들을 환대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性品)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아무에게도 환대 받을 희망(希望)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생명(生命)의 끈을 놓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의 상황을 이해(理解)하려고 노력하라.
이성(理性)으로써만이 아니라 심정(心情)으로써 알려고 애쓰라. 힘들 때일수록 자신의 문제(問題)에만 갇히지 말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恩惠)의 넓이를 생각하라.
이제껏 살아오면서 당신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환대(歡待)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과 교회(敎會)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 때문에 힘겨운 현실(現實)을 이기며 살 수 있지 않았는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라. 쓸데없는 원망과 불평(不平)으로 은혜를 소멸하고 인생을 낭비(浪費)하지 말라. 오히려 현실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으라.
그리고 자신이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환대에 빚진 사람임을 기억하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환대하라. 그러면 그들은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당신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환대에 감격하게 될 것이다.
감사(感謝)할 조건이 없는가? 그것은 인생을 보는 폭이 좁고 깊지 않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생을 보라.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 주위의 불행(不幸)한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정성껏 따뜻이 환대(歡待)해주라. 그것은 당신의 행복(幸福)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祈禱)하고 섬기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自己)만을 사랑하던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 사람을 환대하기 위해 마음을 비워줄 때 주님이 오신다.
* 아내와 사별한 장로님
인생의 위기(危機) 속에서 어둔 밤을 지나는 자들이 많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을 환대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우리는 세상(世上)에서 나그네였고, 교회(敎會)에 대해서도 외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대해 주셨다.
우리에게 그런 환대를 받을 자격(資格)이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교회의 지체(肢體)들이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그들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恩惠)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어려운 때일수록 생각이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게 하라. 결코 현실을 이길 힘을 얻지 못한다. 사랑(love)의 힘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당신보다 더 많이 어려운 이웃과 형제(兄弟)들을 돌아보라. 그들을 어떻게 환대(歡待)할 수 있을지 생각하라. 진심으로 섬기라.
그때 자신의 영혼(靈魂)의 무게가 깃털 같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비로소 낙심(落心)하던 마음은 감사와 찬송(讚頌)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7 2021. 10. 24 주일 낮 예배
< 환대하는 자를 복 주심 >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1-8)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깊은 침체 가운데 있던 아브람을 다시 만나주셨다. 그때는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였다.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주신 후에 할례(割禮)를 명하셨다.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선택된 백성으로 거룩히 구별하는 표였다.
그 후에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서 세 천사(天使)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셨다(창 18:1).
II. 환대하는 자를 복 주심
아브라함은 장막 문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천사인지 몰랐다. 길을 지나는 나그네인 줄 알았다.
A. 나그네를 환대함
아브라함은 서 있는 세 사람에게로 달려 나가서 영접(迎接)했다. 이는 평소 나그네를 환대하던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더욱이 이때는 다시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누리던 때가 아니었는가?
1. 영접함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영접하였다. 그는 달려 나가 “몸을 땅에 굽혀” 맞이하기 하였다. 이는 단지 동정심(同情心)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기를 그냥 지나쳐 가지 말고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음식을 먹고 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면서 말한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 18:5)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을 대접(待接)할 기회를 얻는 것이 자신이 그들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아브라함에게 이웃을 환대하는 것은 은총을 받은 백성들의 마땅한 삶이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2. 환대함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환대(歡待)하였다. 그는 아내 사라에게 그들을 위해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게 하였다.
그는 스스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였다.
그 요리를 요구르트, 우유와 함께 나그네에게 접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선 채로 그들을 모셨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하듯이 식사하는 나그네들을 섬겼으니 이는 최고의 환대(歡待)를 베푼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접대하면서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 지나가소서”(창 18:5).
환대는 단지 적선(積善)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 안에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우리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환대(歡待)를 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하나님의 환대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 사람들이 우리를 환대했을까? 먼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감동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환대와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나그네들을 환대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웃을 환대한다.
은혜(恩惠)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한다.
구원 받은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고 또 다른 무슨 삶이 있겠는가?
B. 복 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인 줄 알고 공경(恭敬)했으나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었다.
그가 나그네를 환대한 동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니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信仰)이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의 믿음을 귀히 보시고 복(福)을 주셨다.
1. 아들을 주심
늙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기업을 상속할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오래전에 이미 주어졌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 15:4)
그 약속을 보증하듯이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나가 무수히 많은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는가?(창 15:5).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속(約束)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할 때에 하나님은 그 약속이 실현되어 자녀가 태어날 시기(時期)까지 알려주셨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사라는 그 말을 장막 뒤에서 엿듣고 웃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이 “즐거움”은 성적(性的)인 즐거움이거나 아들을 얻게 되는 기쁨을 가리킬 것이다. 늙은 사라에게는 이미 둘 다 포기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환대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 자신에 대한 환대로 받아주셨다. 늙은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
그를 언약 백성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함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라. 하나님(God)은 우리가 모든 이웃들을 따뜻이 환대하기를 바라신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는 하나님을 환대해 드리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요즘 같은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곤고(困苦)하다. 그들은 대부분 무관심 속에 버려졌다. 누구의 마음에도 그들을 받아주는 자리가 없다.
또한 그들에겐 하늘 자원이 없어서 자기 영혼을 스스로 돌보지 못한다. 이때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물론 아무리 환대해줘도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환대(歡待)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 은혜의 힘으로 힘든 인생길에서 마음이 변화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자기 인생을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환대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2. 심판을 알리심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와 이루실 뜻을 공유하신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비전(vision)이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
원래 이렇게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은, 후대에 와서는 사랑하는 선지자에게나 베푸시는 은혜였다(암 3:7).
하나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을 사랑스러운 선지자(先知者)같이 여기시며 당신이 행하실 일을 미리 알려주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멸망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나누신 대화에 의하면, 죄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義人)이 없어서였다(창 18:3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대화 속에서 상정(想定)하시던 의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브라함이 생각한 의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으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민족들을 오른편과 왼편에 나누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이가 누군가?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 내가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4-35)
초대 교회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자를 환대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의 자격이기도 했다(딛 1:8).
또한 당시 교회의 목록에 올릴 경건한 과부의 명부에 올릴 여성의 필수적 자격이 있다. 그것은 나그네를 대접(待接)하는 것이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임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聖徒)들을 가까이 하신다.
III. 적용과 결론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간구하는 힘이 크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 롯이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救援)의 복을 받은 것을 보라.
이는 의인의 간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곤고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라. 마음으로 그들을 환대하라. 복을 주실 것이다.
위기 속에서 만나주신 하나님8(끝) 2021. 10. 31 주일 낮 예배
< 시험에서 인정받을 때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 22:1-19)
I. 본문해설
아브라함은 단번에 믿음의 조상(祖上)이 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갔다.
그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證人)들 중에서 뛰어난 믿음의 모본이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약 15명의 믿음의 위인이 나온다.
전장(全章) 40절 가운데 11절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칭찬이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 된 것은 연단과 은혜의 열매였다.
그는 많은 시험을 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답게 만드시는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이었다.
II. 시험에서 인정받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삭은 태어났다. 후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삭은 성장했으니, 여기서 번제물을 태울 수 있을 정도의 땔감을 짊어질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꽤 흐른 뒤였으니 이삭이 청년(靑年)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A.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히 11:17).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 현상과 본질에 대한 묘사
1. 하나님의 시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번제로 드리라”(창 22:2)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여호와의 종교(宗敎)에서 금지된 것이었다.
인신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후일 율법에서 명시된다(신 18:9-10).
몰렉을 섬기는 자들의 인신공양에 대해, 예레미아 선지자도 비판한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렘 7:31)
아브라함은 부당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그런 시험을 주셨을까?
시험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love)에서 온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시험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든지 빼앗으시든지 시험이 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신 이삭인데 왜 그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heart)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결단(決斷)의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삭에 대한 부당한 사랑에서 마음을 떼어 하나님께만 붙어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은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順從)하였다. 이삭은 원래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주신 아들이다. 그가 먼저 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독자를 왜 죽이라고 하시는지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진 하나의 믿음(faith)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Isaac)을 번제로 바치기 직전에 살려주실 줄 몰랐다. 번제로 바쳐지기 위해 이삭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은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어도 순종하게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따라 아들을 죽여도 주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시리라 굳게 믿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처지에서도 당신을 의지하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約束)을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존재다. 신앙(信仰)은 새로운 행복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이는 자신의 모든 행복(幸福)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번제에 쓸 제물(祭物)까지 미리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친히 예비하신다.
때로는 순종하는 것이 모험(冒險)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신다.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온전히 믿음으로 순종하라.
B.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順從)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이러한 순종을 기쁘게 받으셨다.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셨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를 시험하셨을까? 이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정화(淨化)시키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獨子)를 바침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자 하셨다. 질서 있는 사랑을 순수하게 하셨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랑은 순종의 실천으로 강화된다. 삶으로 믿음을 입증해 보이기를 기뻐하신다.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믿음이 좋아하는 풍취(風趣)가 있다. 진심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삶으로써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 순종의 경험과 믿음의 강화
하나님은 이 시험(試驗)을 통해 보여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도록 깨우쳐주신 것이다.
우리 가진 모든 것,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의 주인(主人)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를 청지기로 여겨 맡기신 것이다. 주님 뜻대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은혜(恩惠)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방해를 받아서 되겠는가?
* 오랜 기도와 응답의 기쁨
우리는 마음에 없는 예물(禮物)을 하나님께 드릴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든지 언제나 진심으로 주신다.
그 진심(眞心)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인정(認定)을 받았다. 다시 한 번 그가 복 받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의 보증을 받았다.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약속한 사람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생전에 거하는 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자처하였다(히 11:13).
그는 본향을 찾아가는 길손이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所望)하였다. 하늘의 본향으로 가는 인생길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불순종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는 것이고 순종은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를 인정해 주시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아브라함은 인생 최대의 시험을 만났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으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全能)하심을 굳게 믿었다.
시험을 당했으나 미끄러지는 대신 그 사랑에 붙들렸다.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독자(獨子)를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순종에 응답해 주셨다.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모든 복(福)을 주셨다. 이 믿음으로 살자.
1. 외로울 때 만나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4-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라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고, 나홀은 아들 롯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조카였던 것입니다. 조카 롯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습니다. 그래서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아들도 없으니 조카인 롯을 친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이때 롯도 동행하였으니, 둘은 부자 관계와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거기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브라함은 식량을 얻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로에게 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고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사연인즉슨 사래가 너무 예뻐서 아내라고 하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이라고 속였고, 바로가 그 여자를 자기의 침소로 들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에게 깨닫게 해주심으로 사래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수치였습니다. 아마 이 사건이 롯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서 삼촌에 대한 믿음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큰 시험을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바로 왕으로부터 큰 재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II. 외로울 때 만나라
오늘의 주제는 “외로울 때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슬픈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조카 롯과 이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집안이 점점 번성하여 가축들이 심히 많아졌습니다. 도저히 좁은 땅에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 집안의 목자들과 롯 집안의 목자들이 서로 자주 다투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거기에는 가나안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축의 어려움은 점점 더 가중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아브라함은 먼저 조카 롯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창 13:8) " ···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9) 일찍이 동생 하란이 죽고, 아버지 데라까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롯은 어쩌면 남은 마지막 혈족이었고, 또 믿음직한 큰아들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와 헤어지는 것은 정말 아브라함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때가 다가온 줄을 알게 되었고, 두 집안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더 이상은 같이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들같은 롯과의 이별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바로 그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을 깊이 만나주셨습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설교자를 보십시오. 예배 시간에는 설교자를 딱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게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설교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저의 설교를 들으시겠습니까? 50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설교하면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십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침실에 있다가 시간이 되니까 마지못해서 눈 비비고 나와서 앉아있는 모습이 뻔히 보입니다. 등 뒤에 쿠션 하나를 대고, 다리는 쭉 뻗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십니까? 그리고 차 한잔 마시면서 예배를 드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그리고 딩동하고 택배가 오면 가서 또 택배를 받습니다. 차 빼달라고 전화가 오면 또 옷을 갈아입고 뛰어 내려가서 차를 빼줘야 합니다. 그렇게 드리는 예배가 그게 예배입니까? 그리고 헌금은 그냥 은근슬쩍 안 해버리고 맙니다. 헛수고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예배드리지 마시고, 저녁때 교회에 오셔서 성수주일 못했으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십시오. 그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그 따위로 예배드리는 것을 애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 깔보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그렇게 텔레비전 켜 놓고 예배드리다가, 또 소변 마려우면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봅니다. 그리고 와서 물 마시고 싶으면 물을 마십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거기 하나님 안 계십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곳에 계십니까? 여러분 영화 구경하고, 넷플릭스 볼 때도 그렇게 안 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 보려고 한번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어차피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10시 예배 신청 한 번 두드려나 보셨습니까?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일입니다. 주일에 어느 교회가 아주 은혜로운 교회라고 해서 열심히 갔습니다. 예배당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예배당 안에 있는 숫자만큼 많은 사람이 교회 마당 여기저기 앉아서 스피커로 나오는 설교자의 음성을 들으며 조용히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핍박받는 곳에서 예배드리는 교인들만도 못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 주일 지킨 거로 기록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저 같으면 교회에 일찍 와서 예배드릴 것이고, 못 드리면 나 같으면 교회 현관에서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드려도 주님의 집에 나오겠습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를 받아줄 순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문제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예배드리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는지 제가 묻는 것입니다. 정장 입고, 정자세로 똑바로, 무릎까지는 못 꿇더라도 의자에 똑바로 앉아서, 소파는 무슨 소파입니까? 예배당에 소파가 있습니까? 예배당에 다리 올려놓을 수 있는지 티탁자가 있습니까? 그리고 비스듬히 기대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게, 그게 예배입니까? 어림없습니다. 집어 치우십시오. 그리고 차라리 주일을 못 지켰다고 회개를 하십시오. 다시 설교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일찍이 동생 하란이 죽고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롯과 헤어지는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깊이 만나주셨습니다.
A. 말씀하심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롯과 헤어져 깊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롯과 함께 했을 때 안 나타나시다가, 아브라함이 홀로 되자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그에게만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 후” 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혹은 장소적으로 어떤 특정한 것의 뒤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은 롯과 이별한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은 상당한 부분 하나님이 보실 때 육정(肉情)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 육적인 사랑을 끊어서 당신과의 더 깊은 영적 교제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르시되”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아마르(אָמַ֣ר)입니다. 이것은 음성을 발하여 목소리가 귀에 들리도록 하는 동작이기도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을 수도 있고,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생각을 전달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큰 시험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에 롯과 헤어지며 혈육의 덧없음과 이별의 쓸쓸함을 깊이 느끼며 괴로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느꼈을 그 큰 외로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마음 한 쪽에는 날개 한쪽이 뜯겨 나가는 것과 같은 큰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픈 이별은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롯과의 이별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외로움의 감정은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집의 앞마당과 같습니다. 거기서 홀로 있는 외로움을 깊이 겪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신 후에 비로소 만나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외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통해 마음이 녹아내리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에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이 마음에 하나님은 즐겁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깊은 고독 속에서 세상의 사람이나 물질을 의존하던 마음을 모두 버리게끔 아브라함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별의 아픔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는 인연이 덧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때 믿음이 없으면 그 외로움의 벌판에서 좌절하거나 쓰러져 죽어버리게 됩니다.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십니까? 마지막 자살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는 모든 사람, 심지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는 부모까지 절대적인 타자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타인으로 느껴지고, 이 우주공간에 오직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살기 싫어서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견해입니다. 자살하는 모든 사람도 너무너무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외롭게) 사는 것이 더 무섭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는 외로움이 엄습할 때 들판에 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영혼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가슴에 새길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나 아무에게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정서는 중립적입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하면 유혹에 넘어지게 되고, 허무감에 사로잡혀 삶의 희망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신앙에 의해 외로움의 감정이 다루어지면 전에 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믿음으로 나아가게도 됩니다.
외롭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 믿는 법은 없습니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왜 그런 큰 이별의 고통과 아픔을 겪게 하셨습니까? 가깝게 보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심으로 이제껏 관심이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넓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씨가 롯에게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아브라함은 많이 늙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자손은 즉, 메시아는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올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롯과 헤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새롭게 만나 주셔서 맨 처음 그에게 주셨던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외롭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외롭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성경적인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친구와 놀고 즐거운 잔치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일꾼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또, 엘리야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모습으로 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바로 거기서 아무도 없는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고독한 시기, 외로운 시기를 지났습니다. 외로울 때, 모든 외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에 처했을 때 육신의 방황으로 신앙에서 미끄러지지 마십시오. 그 끝은 더욱더 깊은 영적인 어두움뿐입니다. 외로운 감정을 신앙으로 다루십시오.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 당신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독해 보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도 이 어려운 때에 외로운 마음을 가지고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의지할 분이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분께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줄을 믿습니다.
B. 약속하심
두 번째, 약속하셨습니다. 조카 롯과의 이별에 아브라함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특별한 외로움의 때에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 (창 13:16) 이것은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구체적인 성취였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1. “주리니…”
제일 먼저 "···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롯과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땅이 모자랐기 때문에 헤어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땅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과 헤어지고 나니까 동서남북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대박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국지적으로는 이스라엘 왕국이 수립됨으로써 하나님의 이 언약은 실현되었습니다. 또, 우주적으로는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를 통해 많은 세상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이 언약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자기 때에는 이렇게 큰 땅을 누려보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하리니…”
두 번째는 하나님이 "··· 하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의 번성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6)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가축과 종들이 있었을지라도 어디 가든지 나그네 대접을 받았고,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에게 많은 백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외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오면 도망가야만 했을 정도로 연약한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도 가나안 땅 막벨라 밭에 장사를 지낼 때, 그 땅 주인에게 땅 값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땅도 없고 백성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럽게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땅에 티끌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들었을 때 가슴 벅차던 아브라함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자식이 많은 것을 재앙처럼 느끼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도 말하기를 "백성의 수가 많은 것이 왕의 영광이오 ···"(잠 14:28)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하나님은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이 약속도 롯을 떠나보낸 후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간섭하십니다. 인생이 심하게 꼬이는 것 같은 때인데도 하나님은 일하셔서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꿈꾸지도 못했던 약속을 이 시련 가운데, 외로움 가운데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함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경배드림
마지막, 경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같은 롯과 헤어진 외로움에서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면서 극도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확신을 가지고 장막을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롯과 함께 머물렀던 곳을 떠나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정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사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떨쳐버릴 수 없이 남아 있었던 사랑하는 조카 롯에 대한 배신의 감정도 함께 씻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제단을 쌓은 것은 거기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기도 속에서 영적으로 교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렇게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외로운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새롭게 만나고, 그분의 약속을 새롭게 받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여러분은 예배에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깔보는 예배를 드리거나, 하나님 무시하는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티끌만큼도 유익을 받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망령되이 행하는 버릇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일 먼저 이사 간 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희생 제물을 바쳐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이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꼬였던 인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은 때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바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 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세상 일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오늘도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데 죽어야 하고, 건강하고 싶은데 병들어야 하고, 잊고 싶은데 생각나야 하고, 함께 있고 싶은데 헤어져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낙심한다고 낙심할 일이 없어진다면 낙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염려한다고 염려가 사라지면 세상에는 염려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다 부질없이 인생을 태워버리는 쓸모없는 헛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거기에 나를 두신 이유를 생각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힘쓰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받기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상황을 변명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약속을 굳게 붙드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능히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인생이 꼬인 것 같을 때, 현실이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을 때, 그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헤쳐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려울 때 만나라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주변의 다른 왕들과 함께 세력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지배해 오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그와 협조하는 연합군을 대적했습니다. 양쪽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소돔과 고모라는 패배하였습니다. 이 전쟁통에 아브라함을 떠나 독립한 조카 롯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를 구하기 위해 자기가 개인적으로 길러온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갔습니다.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 그리고 부녀와 친척들을 모두 다 무사히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그들이 언제 복수하러 쳐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공격해 오면 아브라함은 가족들이 적으니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가난해졌습니다.
가난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복으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할 때 “가난하다”라는 말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간절히 도움을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을 베풀면 기쁘게 받아 들여서, 거기에서 삶의 희망을 찾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하여 가난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과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무서워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될 때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 무서움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매달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아브라함의 마음이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열린교회에 온 많은 교역자들과 성도들에게 가장 은혜받은 시리즈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부분이 자기가 교회 왔을 때 처음 들었던 설교 시리즈였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은 은혜를 못 받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오죽했으면 교회에 나왔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오랫동안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 남의 교회로 왔겠습니까? 가난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들었던 말씀이 가슴에 깊이깊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II. 두려울 때 만나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환상 중에 그에게 제일 먼저 임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공격하고 롯을 구출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하나님이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 주셨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순수했습니다. 그 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어떤 대가나 전리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참전의 동기가 전리품이나 포로 혹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롯을 구하기 위해 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약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한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이후에 보복이 매우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위로가 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하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자기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아브라함, 그러면서도 가난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면서 떨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였습니다. “···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창 15:1) 라고 하였습니다.
A. 방패
먼저 하나님은 자신을 방패로 제시하셨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방패는 가장 중요한 방어 무기였습니다. 멀리서 적이 빠른 화살로 공격할 때도 방패는 거의 유일하게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근접전에서는 칼의 공격을 막아주는 것도 방패였습니다. 방패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방패는 자기의 몸을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아주 큰 방패를 사용했던 그리스 군대로부터, 아주 작은 방패를 사용하여 기동력을 강화했던 로마의 군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모양의 방패가 사용되었습니다. 방패는 화살이 비 오듯 날아오면 많은 군인들은 함께 모여 큰 방패로 지붕을 만들어서 화살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의 방패는 적군이 기마병으로 무더기로 달려올 때 탄탄한 몸집을 가진 용사들이 그 작은 방패를 거북이 등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려오는 기병들의 공격을 역습했던 것입니다. 방패는 둥글거나 직사각형의 방패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둥근 삼각형 모양의 방패도 있었습니다. 방패는 방어를 할 뿐 아니라 근접전에서 적군을 일치고 방패의 뾰족한 아래 부분으로 쓰러지는 적을 공격하는 용도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패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지 방어용 무기만이 아니라 공격용 무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방패라고 계시하신 의미는 이것입니다. "앞으로 아브라함 너를 해치려는 누구의 공격에도 내가 보호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쳐 줄 것이다." 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언제나 당신의 성품 중 일부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말씀을 받는 대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암시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서 칭찬은 전혀 없고 책망만 받았던 두 교회 중 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말씀을 주시기 전 예수님이 자기가 누구이신지를 이렇게 계시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계 3:14) 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아멘으로 계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시는 분이었다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것을 계시하셨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불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멘” 이라고 예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성되셨다고 계시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불충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증인이시라고 자기를 계시하시는 것은 그들이 참되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 하시는 것은 바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방패로 계시해 주신 것은 결국 아브라함이 현재 처해 있는 상태, 그리고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면서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훌륭하게 믿음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이겼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고, 가족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한 온 식솔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조카 롯의 배은망덕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처럼 돌보아 주었건만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아브라함과 기꺼이 헤어지기를 원했고, 자기가 먼저 좋은 곳을 택한 아주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조카를 과연 그렇게까지 목숨을 무릅쓰고 구할 가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을 진심으로 부모처럼 사랑했습니다. 롯은 자기를 떠났지만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롯을 구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깊은 두려움을 느끼며 하나님만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가난할 대로 가난해진 마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환상은 또 다른 것을 전달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였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임하시는 그 말씀을 지성으로 깨달으며 하나님과 교제할 정도까지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창 15:1) 이 말씀은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위로와 응답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이 임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영혼 깊은 곳에 성령을 부으시고, 그를 능력으로 감화시키는 힘과 함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임하면서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떨고 무서워하던 그 사람의 마음이 담대해졌고 이에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더 어려운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에 놀랄 거리가 있습니까? 걱정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럴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말씀을 받지 않는다면 두려움 속에서 당신의 마음은 찢어지게 되고 염려로 바뀌게 됩니다. 정신은 찢어져 산산이 흩어지고, 생각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환경이라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요동치며 이렇게 저렇게 변모합니다.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고 파도치니, 그가 어떻게 능히 자신의 인생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의심과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죄에 저항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는 약해지고, 경건은 껍질만 남게 됩니다. 급기야 남았던 껍질도 벗어 버리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시험에서 지나 죄에 깊이 빠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신앙의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아무리 기관을 돌린들 어떻게 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운 때일수록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방패 뒤에 몸을 감추고 대신 싸워 주실 주님을 붙드십시오.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식어진 가슴에 불을 지르고, 냉랭한 가슴을 뜨겁게 하고, 갈 길을 잃어버린 여러분에게 갈 길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인생의 전환을 이루고, 우리의 삶이 나아가야 할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옳은 일을 했는데 두려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격려를 얻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잘못했다면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때에만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동안에도 우리의 인생 전체에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교회가 이곳으로 이사 오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많은 괴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목회 그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고, 편안할 날이 없지만, 그때는 특별한 고통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강단에 엎드려 오래 기도하고, 평소의 오랜 습관처럼 열린공간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읽어 온 순서를 따라서 성경을 펼쳤습니다. 한 구절이 제 마음을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두 시간을 기도해도 풀리지 않던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여러 날 동안, 아니 지금까지 그때 받았던 말씀이 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하나이다 (셀라)” (시 3:2)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이시니이다” (시 3:3) 이 말씀이 가슴을 깊이 울렸습니다. 내가 이제껏 나 혼자 내 힘으로 산줄 알았고, 이 고통도 나 혼자 당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오래 전에 나의 방패셨습니다. 방패가 되어 주셔서 나를 막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 마음을 가장 많이 울린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이시니이다” (시 3:3 下)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왕궁의 대전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입니다. 잘못한 한 신하가 왕 앞에 깊이 엎드려 있고,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 한 동안의 침묵은 그에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것 같은 긴 시간이었습니다. 이윽고 왕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머리를 들라.” 왠지 그 음성이 벌을 줄 것 같은 음성이 아니라 자비와 인자가 가득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은 비로소 왕을 향하여 머리를 듭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왕과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그는 다시 그 왕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이시니이다” (시 3:3) 얼마를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이제껏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으로 살았는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알지도 못하는 그때에 수많은 죄와 이 세상의 악과 위험으로부터 여러분을 막아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방패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상급
이어진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여기에서 “상급”은 히브리말로 샤카르(שְׂכָר)라는 이 단어는 고용, 삯, 보상, 상급, 보수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상급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자기가 아니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상급조차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선한 일을 했어도 행한 것에 비해 넘치도록 많이 주시는 것이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1. 주 하나님을 누림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이 상급이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무슨 상급을 주셨습니까? 먼저 하나님 자신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에게 가장 큰 상급은 자기가 사랑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사랑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라고 하였습니다. 농부가 한 해에 온 힘을 다하여 곡식을 가꾸고 풍년이 들었습니다. 누렇게 익은 밀을 추수하고 또 포도는 얼마나 열매가 실하게 맺었는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많은 수확을 하고 창고에 가득히 곡식과 포도를 수확한 농부의 마음은 너무나 행복하고 뿌듯합니다. 이것은 농경 사회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은 그것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말씀 한마디가 명품보다 더 값지고, 주님께 마음을 터놓고 올렸던 간절한 기도의 교제 시간이 명품 가방보다도 훨씬 더 고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 주신 후에 제일 먼저 주신 선물은 당신 자신을 즐거워하고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낯선 타향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설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는 그 복 때문에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시련의 가시밭길을 지나왔으나,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행복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1)
주님을 즐거워하는 것, 내가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 이것이 최고의 상급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그분께 가서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아뢸 수 있고, 주님께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주님께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중 원래 있었던 것들이 어디에 있으며, 없어지지 않을 것들이 어디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입니까?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헌물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8장 5절에서 성경은 자신을 먼저 드린 후에 헌금을 드렸던 마게도니아 교회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마음껏 자신을 누릴 수 있도록 내어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웠지만 무섭지는 않고, 두려웠지만 마음이 가난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할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 받은 상급을 즐거워하며 더욱 하나님께 붙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많은 자손을 주심
그리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옳은 일을 하고도, 왜 그렇게 두려워하였습니까? 마음이 가난해지기까지 떨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거느린 백성이 그 연합군의 백성들보다 한 열 배쯤 많았다면, 군대의 수가 스무 배쯤 많았다면 아브라함은 티끌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더욱 인구가 곧 국력의 크기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28절은 말하기를 백성이 많은 것은 곧 왕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자손이 늘 여기저기를 떠돌며 나그네가 되어서 불안한 삶을 살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땅은 없고 백성들의 수요가 적었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지 항상 그곳 주민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마음에 맺혔던 이 한을 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자손인 야곱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야곱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 디나가 원주민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끔찍하게 보복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가족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를 이룰 만큼 백성의 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 축복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공해도 없고 도시의 불빛도 없었을 터이니 캄캄한 대지 위에 별은 쏟아질듯이 하늘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가장 받고 싶었던 상급은 자식이었습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자신의 집에 충성해왔던 사랑하는 종 엘리에셀에게 모든 가문을 물려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는 상속자가 아니오 네 씨가 상속자가 되리라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캄캄한 하늘에 셀 수 없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별들이 쏟아질듯이 가득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우리는 이 말씀을 육신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더 옳은 것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자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낳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악인으로 가득하던 세상에 거룩한 백성들이 그 땅을 뒤덮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이 한미(寒微)한 가문을 번성한 이스라엘 나라로 세워 주셨고, 가나안의 가장 기름진 땅을 차지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왕국은 대를 잇게 만드셨고 거기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영적인 조상이 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적인 자손들을 낳음으로 핏줄로는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꿈도 꿀 수 없는 놀라운 상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받고 싶었던 상급을, 소원하고 있었던 상급을 수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의 성취를 따라 그의 영적인 자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면 그는 여러분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에게나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이 상을 주시고 싶은 사람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불안하고 염려합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을 특별히 만나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책망 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큰 상급을 주시고 싶은 자랑스러운 성도가 되십시오. 한 번 있다가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십시오. 그래서 상급을 충만이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방패이시고 상급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련의 때를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어도 다시 구하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6-1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롯을 구출한 아브라함이 엘람왕과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급으로 번성하는 자손과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손의 번성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이끌어 밖으로 데려가셨고, 밤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뭇별들을 셀 수 있나 알아보라.'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네 자손도 능히 헤아리라.' 말씀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약속하시는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의 약속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II. 믿어도 다시 구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까지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신앙은 초기 단계였습니다. 그의 긴 여행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보여 주셨고, 사랑과 자비, 그리고 능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조금씩 하나님을 경험해 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갔고,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인간의 모든 의로운 행동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전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A. 표징을 구함
아브라함은 표징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는 약속을 받은 것에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수준이 거기까지였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보증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표징을 구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 15:8)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지 않으셨습니까? 가장 두렵고 마음이 떨려 겁먹고 있을 그때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아브라함은 충성스러운 자기의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씨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입니까?
더 놀라운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땅이 없어서 한이 맺히고, 끊임없이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던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원했습니다. 그는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하나님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며 설명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무언가 더 확실한 가시적인 표로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징표를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당시 아브라함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연약한 믿음을 재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 진보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일체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말입니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믿음을 그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그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는 아브라함을 기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커다란 믿음으로 진보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은 믿음에서 시작을 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도 진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빠른 시일 내에 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그 믿음을 많이 잃어버리고 다시 적은 믿음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없다고 탄식하고, 혹은 믿음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입니다. 중요한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적은 믿음일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을 조금도 묻어 두지 않고 모두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적은 믿음이었고,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말씀해주시는데도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면 안심이 되지 않는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가진 믿음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 믿음에서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기쁘게 여기시고, 그의 수준에 맞게끔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세월이 흐를수록 성숙해져 같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러한 표징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창세기 22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원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표징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말씀 신앙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단계에서 아브라함이 표징을 구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수준에서는 있는 믿음을 모두 사용했고, 더 잘 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여호와라는 신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만난 적이 없는 신이였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갈대아 우르에서 만났던 많은 이방의 신들이 더 익숙한 신들이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집안도 많은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은 결코 신실한 신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 약속하고 그것을 어기는 것쯤은 다반사로 하는 신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여호와가 그들과는 다른 신임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주신 믿음을 모두 활용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마음을 가상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의 수준을 따라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브라함을 위한 눈높이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십시오.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데려갔으나 낫게 하지 못했기에 예수님께로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면 우리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며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그러자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깨달은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간구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4) 자, 그러면 정말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티끌만한 믿음도 없었습니까? 믿음이 없는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데려왔겠습니까? 믿음이 없었다면 왜 제자들이 못 고쳤을 때 그냥 돌아가지 않고 예수께 남아서 제발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겠습니까? 자신은 믿음이 없다고 고백을 했지만, 사실 이 사람 속에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책망하시면서 더 큰 믿음으로 이 사람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믿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믿음의 수준이 높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금은 믿음이 적을지라도, 더 큰 믿음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높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지금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높은 믿음이 아니라 낮은 믿음입니다. 이전에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으로 지금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으로 지금 하나님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적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자신이 얼마나 믿음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믿음 없이 살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마다, "예수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도 모두 힘들다고 말합니다. 현실이 그렇게 힘듭니다. 그러나 한번 묻고 싶습니다. 현실이 힘들지 않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현실이 힘들지 않았다면 예수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너무 인생이 가볍고 즐거워서 예수 믿으러 간 사람이 있으면 한번 말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현실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너무나 무거움을 짐을 지고, 도저히 홀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나아가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렸던 사람들입니다. 그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이제껏 내가 느꼈던 인생의 무게는 인생이 무거웠기 때문에 무거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의 무게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실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가 무거웠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무거웠던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현실이 힘들어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쉬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이 힘들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적어서 힘든 것입니다. 현실이 어렵고 힘겨울 때마다 생각하시오. '하나님 나의 믿음의 분량이 여기까지 옵나이다.' '예수여, 나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찬양)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현실이 너무 힘겨울 때마다 '내 믿음의 분량이 여기까지구나.'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고쳐집니까? 그렇게 만만합니까? 물론 우리는 노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내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현실에서 주저하지 않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면서, 동시에 바뀐 현실만으로는 내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신앙의 가장 기초 아닙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현실이 바뀌어서 행복한 것은 바뀐 그 현실 속에 하나님이 우리와 더욱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답입니다.
살다 살다가 너무 힘들면 혼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너무 힘들면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자기가 힘든 것을 꼭 얘기하십시오. 특히 목회자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힘든 사정을 이야기하고 영적인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런데 할 수 있으면 자기 자신이 그것을 소화해 내는 능력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나보다 훨씬 가벼운 현실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말을 안 하고 침묵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무게가 다 있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적은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신 속에서 녹여내며 신앙이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먼저 남에게 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현실이 이렇게 힘든 것이 나의 믿음의 분량이오니 현실을 내가 당장 바꿀 수 없으니,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내 믿음을 더 강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인생에 대해서 말하는 관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낮은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믿음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믿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현실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더 큰 믿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약속의 징표
하나님은 약속의 징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전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명하셨고, 제물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은 3년 된 암소, 그리고 3년 된 암염소, 그리고 3년 된 숫양, 그리고 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는 제사를 통해 아브라함을 특별히 만나 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해가 질 때쯤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아주 깊은 잠 속에 있는데도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수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그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창 15:12)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떨어졌으나 의식은 살아 있어서 흑암에 쌓인 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3-16)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에 맞게 대해주셨습니다. 그가 원하는 표징을 보여 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함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져 온 문화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릎을 꿇고 아브라함과 함께 눈을 맞추며 당신에 관해서 가르쳐 주시는 눈높이 교육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아직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구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연약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굳세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자, 벌려놓은 제물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삼 년 된 암소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바쳐질 제물이었으니 비쩍 마른 소, 병든 소를 바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장 실한 암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아마 500kg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 소를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절반으로 쪼개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여 놓은 것이 아니라 약간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 사이로 누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3년 된 암염소였습니다. 이 역시 머리부터 꼬리까지 절반으로 쪼개어져서 서로 마주 보고 놓였고, 이어 3년 된 숫양이 그렇게 놓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크기의 세 마리 짐승이 절반으로 쪼개져 양쪽을 마주 보고 있을 때, 엄청난 양의 피가 흥건하게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고, 그 모습은 어떤 진지함을 요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해는 졌고, 온 땅은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제물에 당신이 임재함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 (창 15:18) 연기 나는 화로는 환상이나 꿈의 도입부입니다. 그리고 횃불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쪼갠 짐승의 제물 사이를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 근동의 언약 체결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언약 체결의식 중에도 특별히 봉신 조약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 왕이 있습니다. 큰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는 왕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땅을 자기가 직접 모두 다스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을 떼어 주며 한 평범한 사람을 제후로 초청합니다. '내가 너를 제후로 지명하노라.' '너는 나의 명령을 받들고 나를 위해 충성할 것이니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 대신 여기에서 나는 모든 세금은 나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네가 가져라,' '여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법적인 분쟁들을 네가 친히 재판하여 정의를 세우거라.' 자, 이렇게 제후로 지명된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졸지에 귀족이 되고, 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가 된 것입니다. 가문의 영광이고, 백골난망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되면 엎드려서 그 왕께 절하며 왕의 지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 왕과 책봉되는 제후는 서로 문서를 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왕과 제후로 만났고, 이제 서로의 의무는 무엇이고, 서로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할 것이라는 약조를 하게 됩니다. 문서를 세 장을 씁니다. 그리고 그 전에 커다란 소를 절반으로 갈라놓고 피바다를 만든 다음, 그 쪼개진 짐승 사이로 왕과 제후로 지명된 사람이 그 피를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많은 제관들과 그리고 백성들, 심지어 신들이 보는 앞에서 핏길을 지나갑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우리가 엄숙하게 서로에게 약속을 하나니, 이 약속은 죽음에 이르는 맹세이며, 우리 중 누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이 우리를 쪼개진 짐승처럼 우리를 저주하셔도 좋다는 서약이었습니다. 그 세 부의 문서를 하나는 왕이 갖고, 하나는 제후가 갖고, 마지막 한 장은 신당에 보관하는 것으로 엄숙한 제후 책봉식이 끝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관습을 어려서부터 보며 자랐습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죽음, 엄숙함, 그리고 진지함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히 그 약속을 어길 엄두를 낼 수 없는 무서운 언약체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어기면 제물처럼 죽음의 저주를 받겠다고 하신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을 누가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높으신 누가 있길래, 하나님을 판단해서 정죄하고, 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 재미있는 것은 이 핏길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손잡고 걷지 않고 하나님 혼자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조건이 없습니다. 모세의 언약에는 조건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그에게 복 주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고, 그리고 땅을 주겠다는 일방적인 은총의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지나갈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맹세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혼자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걸고, 아브라함을 복 주고, 복 주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문화를 사용하여서 지금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경스러운 메세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껏 아브라함의 마음에 배인 문화의 맥락을 존중하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징표로 사용하셔서 연약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화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시고 싶은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아, 나 여호와는 진실하다." "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나를 걸고 보증 하마."라는 메세지입니다. 이 징표는 아브라함에게 그림 언어로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낮은 믿음의 단계에서 높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모든 것을 굳게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언약을 구체적으로 세우셨습니다. 징표와 함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아예 아브라함 마음속에 지도를 그려주셨습니다. “···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8) 구체적으로 지명까지 언급하며, 거기에 살고 있는 족속들까지 거명하시며, 그 넓은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들은 아브라함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땅은 바로 미래의 이스라엘이 세워질 가나안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이 크지만 그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사람보다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믿음을 사용하려는 사람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심으로써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징표까지 보여주시면서 더욱 잘 믿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현실이 쉬운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 현실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아니 죽을 것처럼 무거웠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 주님을 간절히 찾아 다시 회심을 반복해서 경험할 때도 역시 현실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온 것 아닙니까? 언제 우리의 현실이 우리에게 쉽고 녹녹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갔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현실을 이기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이 무거워서 우리의 인생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무거운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을 슬퍼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회개하며, '예수여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 주시옵소서.' '나의 적은 믿음을 가엾게 보시옵소서.' '예수여 내가 믿기를 원하는 아니다.' 이렇게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더 큰 믿음을 주셔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비웃으며 살 수 있게끔 용기와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 간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간증은 옛날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불꽃처럼 믿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라지는 불꽃이 되어서 안됩니다. 지금, 오늘, 우리에게 타오르라고 주시는 믿음의 불꽃입니다. 지금 그것을 찬란하게 태워 어두운 밤을 비추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쉬운 현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매일 현실에 대해서 불평하며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낭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일입니까? 우리는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무거워서 무거운 인생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분량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을 하나님 앞에 탄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와 더 잘 믿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돈이나 명예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여, 내가 당신을 더 믿기를 원하나이다.' 그렇게 하는 기도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입니까? 어느 날 놀고 있는데 믿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쑥 들어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방편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하고, 적은 믿음을 크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을 때 우리의 적은 믿음은 우리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믿음이 됩니다. 어제까지 슬퍼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하던 사람이 희망을 발견하고 현실을 능히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사와 같은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만 하면 우리는 이길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목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절망적인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은혜의 부흥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업도 잘되고, 직장도 편하고, 모든 것이 잘 나갈 때는 그렇게 믿음이 없던 사람들이, 이 위기 속에서 큰 믿음을 갖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열렬한 기도, 그리고 예배의 감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의 감격을 누리고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믿음을 아버지 앞에 간구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아버지 앞에 북돋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현실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은 넉넉히 현실을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이때는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로 이 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했고, 그는 떨고 있었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주셨습니다. 비록 적은 믿음이었으나 그 믿음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아직 낮은 신앙이었으나 더 잘 믿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믿지 못하고 표징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수준을 이해하시며 그에게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 주심으로 믿음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렇게 위기 속에서 만나자 어두움은 사라지고 다시 밝은 희망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입니다.
4.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갈 때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창 16:1-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표징을 보여 주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 넓은 가나안 땅을 그에게 유업으로 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과 16장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나안에 정착한지 10년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놀랍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약해졌고, 그래서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녀 생산에 관한 결정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친히 임하셨습니다. 그의 자손에 관해 약속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창 15:4)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믿은 것을 의로 여겼다고 15장 6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말씀을 예전처럼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들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절과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창 16:4)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였더라" (창 16:16) 그리고는 약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16장과 17장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고, 99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의 불신앙적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의 침체는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II.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갈 때
아브라함은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떠났습니다. 그러자 이제 더 이상 그는 특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당시 세상의 기준과 풍속을 따라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죄를 짓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신앙으로 타오르지 않기 때문에 불이 꺼져서 결국 세상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A. 영혼의 침체
제일 먼저 그는 영혼의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매우 특별한 만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영혼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믿음이 약해졌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대화를 들어 보십시오. 어디서 믿음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표징을 구하기까지 매달리던 신앙은 엿볼 수가 없습니다.
1.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음
우선 그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될 만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없습니다. 그러자 은혜는 사라졌고, 믿음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 모양이 된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 앞부분에는 아브라함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냥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그냥 세월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은 기억할만한 특별한 죄를 짓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조용히 말씀의 은혜 받는 생활에서 멀어지면 큰 죄를 짓지 않아도 그렇게 아브라함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여전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이 흐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는 자기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후손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당시에 세상의 관습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내인 사라의 불신앙적인 제안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下) 하나님을 만나고 뜨거웠던 이전 아브라함의 신앙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말씀이 주어졌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말씀에 귀를 기울일만한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청하고자 하는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2. 가정의 질서가 무너짐
그러자 그의 가정의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 속에서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가정에 질서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사라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했고, 남편을 첩에게 주어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연히 경건한 가장으로써 사래의 이런 불신앙적인 결정에 맞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들어간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그럴 수 있는 영적인 권위도, 또 그렇게 할 신앙의 마음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종 하갈은 분수를 모르고 사라를 멸시했습니다. 사라는 이 모든 것을 남편의 탓이라고 돌리며 남편을 무시하기 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는 수 없이, 당신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가정을 방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비인간적으로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모든 일에 수수방관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극심한 무질서였습니다.
결국 여종 하갈은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도망간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주인 사라에게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낳을 자손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손과 대적하여 살게 하리라는 불행한 예고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도대체 누가 아브라함처럼 생생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쪼갠 고기 사이로 불꽃으로 지나가시면서, 당신을 걸고 맹세하셨습니다. 땅을 줄 것을 맹세하셨고, 자손을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시간이 흐르자 아브라함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어제의 믿음은 그것으로 어제를 살았고, 내일의 믿음은 그것을 가지고 내일을 살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현재의 믿음입니다. 지금 영혼의 침체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이 나를 움직여,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매우 해로운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깊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거슬러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매주 기도하라고 당부하는 것도,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부탁드리는 것도, 바로 여러분이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살아갈 삶이 이처럼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침체에 빠지지 말고 은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관계의 고통
마지막 두 번째는 관계의 고통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아브라함의 불행은 관계의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가족들 중 누가 행복했겠습니까? 무엇이 행복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신앙으로 가정을 지켜야 할 권위는 사라졌고, 하갈은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때는 종이었지만 가족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학대를 받아야 했고, 당연히 여기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는 깨졌습니다. 부부는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잔인하게 대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 또한 깨졌습니다.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의 평화는 사라지고,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은 그 사람 자신의 인생만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가족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결국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그러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혼란을 보십시오.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가족들 모두 고통을 당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장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정에 고통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인생이 힘든 것은 현실이 무거워서가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 중 현실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행복해 보이고, 나보다는 훨씬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십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실이 무거워서 힘든 것이 아니라, 감당할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에 현실이 힘든 것입니다. 현실의 무게는 우리 마음대로 줄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현실의 무게를 우리가 마음대로 줄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했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셨겠습니까? 도대체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예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현실의 무게는 우리 마음대로 줄일 수 없습니다. 무게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제 가난했던 사람이 오는 부자가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제 잘못된 성격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오늘 아침에 그 성격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제까지 누군가와 고통스러운 관계를 가졌던 사람이 온전히 화해하고, 오늘 완전히 사랑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무게를 쉽게 줄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결국 우리의 현실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먹고 현실을 위해 헌신해도 과연 고쳐질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이기에 우리는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과 함께 더욱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거운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믿음의 분량을 키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험이 없습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죽고만 싶었는데, 하나님 앞에 울면서 간절히 며칠을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응답은 아직 없지만, 왜 그런지 마음에 불안한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현실이 바뀐 게 아니라 믿음의 크기가 달라졌기 때문에 현실을 감당할 수 있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은혜 안에 산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며, 은혜에서 멀어진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은 고통을 느끼고, 또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십시오.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장은 만족할지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지금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결국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십시오. 후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코 단번에 그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적 성숙은 평생에 걸친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 곧 은혜가 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믿음이 없어서 불신자와 똑같이 변하곤 하는 아브라함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런 평범한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렇게 일하셨고, 오늘은 여러분을 통해 그렇게 일하시고자, 오늘도 열심을 다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침체에 빠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도대체 어느 구석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구석이 있습니까? 도대체 뭘 보고 하나님은 이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의 믿음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사랑은 아침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 주셨건만 세상 사람과 똑같아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결국 그랬던 그가 굳센 거목이 되기까지, 그에게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넘어진 것은 그의 불신앙 때문이었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 회개하며 깨닫고,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순종을 통해서 적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모자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쓰러지고 넘어지는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 의롭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까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우리를 수시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은혜받은 모든 사람이 불굴의 삶을 살고, 순종의 삶을 살고,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살고 난 후에라도, 자신의 인생에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넘어진 자기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하여 연약한 자들을 즐겨 부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도 바로 그런 하나님 은총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시련을 만났지만 그 속에서 회개를 배웠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수한 과정을 통해서 불신앙으로 끊임없이 넘어지는 아브라함을 그때마다 은혜로 다시 세우셔서 과연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모든 사람의 믿음에 기준이 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기준은 결국 은혜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도 비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불행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인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데, 여러분이 무슨 권리로 자신의 인생의 줄을 놓으려고 합니까? 오히려 그렇게 줄을 내려놓을 마음을 세상을 향해 가지십시오. 세상 줄을 놓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내가 비록 티끌처럼 아무 가치가 없는 연약한 인간일지라도, "내가 예수를 붙들고 살리라",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의 죄 때문에 넘어진 그곳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여러분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이런저런 현실을 핑계로 믿음 생활을 게을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미끄러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많이 해보았습니다. 비관하고, 낙심하고, 심지어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도 모자라서 하나님 원망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티끌만큼도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정말 죽을 수 있었습니까? 정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었습니까? 정말 내 힘으로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결국 원망하는 마음은 메아리로 돌아와 내 영혼을 찌르는 칼이 되었습니다. 현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눈물 흘릴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원래 어려운 때를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롬 17:1下) 이 말씀은 믿음으로 살 수 없을만한 시기에 주어졌습니다. "···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요13:34下) 이 말씀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향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간곡한 당부는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행이나 헛된 수작으로 현실이 바뀔 것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이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거친 벌판이고, 내 힘으로 이 현실을 이겨낼 수 없으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을 우리가 만난 때는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꽃밭에서 모종을 심다가 주님을 만나는 적이 없습니다. 야유에 가서 하나님 만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고달픈 삶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인 일리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환경이 좋아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이 하나님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우리 앞의 현실은 엄중하고, 내가 넘을 수 없는 산 같이 내 앞에 버티고 있으나,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하나님이 불러 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의 껍데기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말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쏟아 놓는 기도였고,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피를 바르는 기도였습니다. 눈물이 있었고, 울부짖음이 있었고,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상황에 대해 귀 막고, 심지어 나에게 손가락질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품에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가장 불행해야 했을 그 현실 속에서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 같은 밤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잘못됐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흑암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 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티끌만큼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지옥 같은 가정에서 얼굴도 보기 싫은 아내와 그리고 보아도 괴로운 여종과 함께 살았으니 삶에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셨을 때 제자들이 근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믿음이 이 현실을 이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현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 현실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으로 있습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 주셨는데도 은혜에서 멀어진 채 관계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뜻을 세우십시오. 간절해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아 놓으십시오.
III. 적용과 결론
어떤 처지에 있는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은혜에서 미끄러진 채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특별히 만났었습니까?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자, 이렇게 미련하고, 이렇게 믿음이 없고, 이렇게 불행하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두운 인생의 밤을 어떻게 지나시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아브라함의 위기는 경제적인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인 위기였고, 영적인 위기였습니다.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불신앙으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86세의 노인으로 첫 아들을 얻은 것이 얼마나 기뻤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채 그는 어두운 영혼의 밤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의 심령이 얼마나 곤고했겠습니까? 이번에도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약속을 믿지 않아 불순종한 죄인을 찾아오심으로서 하나님이 은혜의 주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II.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
찾아오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큰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쪼갠 제물 한 가운데를 불길로 지나가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약속을 확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영혼은 다시 곤고해졌고, 그의 심령은 파리해졌습니다. 갈급해졌습니다. 적당한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A. 전능하신 하나님
오랜 침묵을 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제일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알려 주신 것은 당신 자신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오랜 불순종과 죄가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라는 사실을 믿지 않은 것이 아브라함의 모든 영적인 침체와 죄의 원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의 원인이었습니다. 다음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을 무겁게 느끼는 것은 현실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어 있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현실이 무겁지 않겠으며, 또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며 산들 어떻게 우리의 현실이 그것으로 가벼워질 수 있겠습니까? 현실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을 리가 없습니다. 신자가 현실이 무거운 것은 자기를 지탱할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 인생의 무게를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덜어보려고 합니다. 세상 자원으로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채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된 것이 재물이 없어서였습니까? 세상의 지위가 없어서였습니까? 명예가 없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현실이 무겁고, 사는 것이 고뇌로 가득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나면 현실보다 더 높은 것을 마음속에서 욕망하게 됩니다. 이 욕망과 현실의 격차가 고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은 끊임없는 번뇌를 만들고, 이 번뇌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뜻을 능히 이룰 수 있으니, 나는 그분을 의지하며 산다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헛된 욕망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단정히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에 힘이 모자라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온 나라가 대장동 사건 때문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런 혼란이 일어납니까? 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인간의 못된 탐욕 때문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탐욕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죄를 저지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그것에 모두 연루되어서 이렇게 나라를 혼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기가 평생 써도 쓰지 못할 엄청난 재물을 불법으로 탈취하고, 그렇게 불법으로 재산을 손에 넣은들 그들이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지 사실을 잊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 일을 잊게 되자 하나님과의 약속도 함께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사는 대신 세상의 풍속과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이런 욕망을 모두 만족시켜 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의 효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의 효과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무엇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환상일 뿐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찌하든지 나는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이라고 다짐하십시오. 그분의 뜻이 아니면 내가 아무리 좋아도 버릴 것이며, 그분의 뜻이면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분의 뜻을 따를 것이라는 다짐을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려고 애쓰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탐욕을 버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실패한 삶을 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삶의 현실이 아무리 엄중하고, 내 힘으로 도저히 넘을 것 같지 않은 무거운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실이 엄중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해서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기로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완전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下) 이 말씀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삶이 그동안 전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완곡어법이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는 그동안 나를 버린 채 불순종하며 살았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버렸습니다. 완전해지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옛날에 하신 그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자손이 번성하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 17:2)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 17:6)
세상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있고, 신이 인간을 찾아와 주는 종교가 있습니다. 전자는 수도(修道)를 요구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인간에게는 죄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날 능력은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좋아서 자기의 죄와 부패성을 따라 스스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은 없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먼저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해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에스겔 1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겔 14:6) 하나님은 돌이키고자 하는 자에게 돌이킬 힘을 주시고, 회개하려는 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힘과 능력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그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도대체 이전에 아브라함 말고 누가 이런 위대한 하나님을 기적 속에서 만났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완전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86세에 첫 아들을 얻었으니 첩에게서 났을지라도 잠시는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갔겠습니까? 하나님은 슬퍼하고 계시는데, 그 기쁨이 얼마나 갔겠습니까? 13년 동안 아브라함의 연대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았으나, 사는 것이 오죽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과연 만족이 있었겠습니까? 과연 행복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13년 동안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놀랍게 만나주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지금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실의 무게가 힘겹습니까? 도대체 살아 있는 사람 중 누가 현실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린 초등학생에게도 인생의 무게는 있고, 내일이면 숨을 거둘 사람에게도 인생의 무게는 있습니다. 이 무게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원망과 불평, 낙심과 부정적인 말을 끊임없이 쏟아 놓으면서, 그 말은 허공을 휘돌아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화살이 됩니다. 그럴수록 여러분의 영혼은 죽어가고, 마음은 파리해져 갑니다. 입술의 열매를 주님이 받으실만해야 합니다. 불평을 거두십시오. 원망하는 말을 삼가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거두십시오. 마음에 솟아나는 모든 더러운 생각들을 입으로 토해 놓는 것은 스스로 인생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삶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문제의 원인은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세상의 현실을 원망하고,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며 그렇게 살아가 보십시오. 여러분의 그 이야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누구도 여러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술의 열매를 간직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음을 의식하십시오.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그 입에 파수꾼을 세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 앞에 있는 현실이 아무리 엄중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나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 “주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든지 나는 기쁘게 그 주님을 따라 살리라.” 다짐 하십시오. 주님이 그 무한한 사랑으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고 다짐하십시오. 이 현실에 짓눌리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들 누가 당신의 현실을 대신 살아주겠습니까?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디모데후서 1장 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감히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흐르는 물에 죽은 물고기의 시체는 떠내려가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끊임없이 그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갑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할 지라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길을 진리의 등불로 말미암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태산을 넘어 험곡을 걸어가도 거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길입니다. 원망과 불평, 낙심과 부정적인 원망의 말이 여러분의 무거운 현실을 조금도 가볍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게 주시는 어려운 현실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해 보십시오. 이것보다 훨씬 더 힘겨운 인생의 고비도 주님 의지하며 넘겼으니, 지금도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노력해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현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 마음에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용기를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현실의 무거운 짐을 느낄 때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명심하십시오. 그 무거운 짐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광야와 같은 세상에 핍절하여 죽었을 것임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해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모두 쏟아 놓고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가까이 와 계신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현실은 무게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던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될 것입니다.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나는 비록 연약하고, 이 현실은 엄중하고 무거우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신앙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비록 연약하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려고 주님 앞에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라운 지혜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이 이 신앙으로 현실을 이기며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낙심하고, 원망하고, 주저앉는 그 지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코로나’라는 엄중한 신앙이 한번 교회를 강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알곡과 쭉정이를 키 위에 올려놓고 까부르시는 것처럼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으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처럼 현실에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고, 그러다가 아브라함처럼 미끄러져서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 팬데믹(pandemic)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찬송) 어두움에 밝음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신앙의 멋이 인생의 멋입니다. 모든 사람이 못 살겠다고 몸부림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탐욕과 질투로 삶을 얼룩지게 만들 그때 믿음의 사람들은 멋있습니다. 마치 그 현실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고고하게 믿음으로 삽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이 풍랑 속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아니하노라”라는 사랑의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세상에 마음 둘 곳이 없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품을 파고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엄마처럼 그 성도를 가슴에 꼭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치고 시험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없습니다. 성경의 빛나는 신앙의 인물들 중 고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이 없고, 만만한 현실을 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두움을 헤치고 진리의 빛에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기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삶의 무게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무게는 기도하는 것만큼 가벼워지고,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붙드는 것만큼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현실이 무겁고 인생이 힘겹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 내가 오늘 묻겠습니다. 여러분, 하루 24시간을 살면서 마음을 우리 주님 앞에 쏟아놓는 시간이 과연 있기는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으며, 나의 모든 염려와 근심, 시련과 고통에서 오는 아픔, 그리고 더 이상 이 생을 이어가기 힘겨운 모든 연약함들을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으며, 하나님 앞에 우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다면 나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힘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이 이런 놀라운 기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랬는데도 그는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아야 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며 슬퍼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향해 마음을 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번듯하고 특별히 큰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지 않는 껍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근심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마음은 도저히 떠먹을 수 없는 구정물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어떤 명료함이 있겠으며, 진리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살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 시간이 있습니까? 하루에 단 1분이라도 마음을 물같이 주님께 모두 쏟으며,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주가 아니면 나를 도울 이가 없나이다."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예배 속에서 그 마음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았든지 예배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신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온전하게 살지 못한 사람이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온전하라”는 음성을 듣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제일 처음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말씀입니다. “완전하라”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13년 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나열하지 않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下) 이게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여러분 인생의 무게는 더하여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세상 사람과 추호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힘쓰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개명하라
세 번째는 “개명하라”였습니다. 영혼의 침체 속에서 불순종했던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5) 이전 이름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고, 새 이름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들의 혹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라를 만드실 계획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 하나님은 일찍이 만민에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여 언약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이후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통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또, 다른 사람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를 때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늘 현실에 지고, 넘어지고, 패배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또한, 끊임없이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으며 주위 사람들의 살아갈 기운을 빼앗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민폐나 끼치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입니까?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자기의 현실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도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의 이름을 개명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껏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하지 않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기회 삼아서 여러분은 예배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줘도 결코 받지도 않을 것 같은 태도로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은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삶으로 불순종하며 죄를 짓고,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자신의 영광과 가족과 이웃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될 의무를 저버린 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끝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현 상황을 영적으로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 어려운 때이다.’ ‘코로나가 끝나봐라.’ ‘이제 교인들은 다 떠나간다.’ ‘코로나를 통해서 이미 많은 사람이 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더 이상은 교회를 찾지 않고, 핸드폰에 매달려서 예배를 드리는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때이지만,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지금은 희어져 추수하게 될 때입니다. 세상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합니다. 또, 욕먹을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이 신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곤고한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어서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미 있는 성도도 나오지 못하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등록을 합니다. 교회에 출석도 못하면서, 새가족반에 와서 공부도 못하면서, 예배당을 찾고, 끊임없이 상담을 하고, 신앙에 귀의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안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코로나라는 키질에 떠밀려서 쭉정이로 판별이 되어 영원히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롭게 주님을 만나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에 코를 박고 사느라고 남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시고, 그리고 나만 사는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너무 많은 사람이 곤고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부인하고 악하게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쩔 줄을 몰라서 도움의 손길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서 손을 내밀며 구조선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인생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엊그제 장로님 중 한 분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50대 직원이 직장도 안 나오고, 알코올 중독에 걸리고, 부인과 이혼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심방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면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했답니다. 이런 일들이 한두 사람에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 속에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예수의 사랑을 품고 따뜻하게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용히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섬기고, 사랑으로 대해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의 곡식들입니다. 성도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게 살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때입니다.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름을 고칠 때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불순종했던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왜 안 만나 주시겠습니까? 어찌 실패한 당신의 이름을 고쳐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성도이며,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전능하신 하나님을 깔보고 불순종하며 살고, 하나님 앞에 완전하기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타락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셨고, 하나님도 그를 징계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 속에서 돌이켜 사랑이 불타올랐습니다. 나를 멀리 떠나 저렇게 불순종하고 불행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녀가 얼마나 불쌍한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돌아오는 것만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살 길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현실이 무거워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도입니다. 성도답게 살면 행복할 것이고, 성도답게 살지 않으면 더욱 불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값싼 위로나 동정을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여러분을 진정으로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시련의 폭풍 속에서 바다에 빠진 여러분을 건지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엄중한 시대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이름은 성도다. 그 이름으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다시 그 옛날 세상 이름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부끄럽게 살지마십시오. 당신에게 주신 새 이름은 성도입니다. 그 이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다시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입니다. 속히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이 어두운 인생의 밤을 빛으로 사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기도합시다. 하나님, 그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아브라함은 다시 타락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지만 미끄러집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게 해주시옵소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한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한 번 더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곤고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놓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주 앞에 흘릴 눈물이 말랐고, 우리의 마음은 세상 근심에 찢어지기는 해도 하나님 앞에 은혜로 녹아지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곤고한 현실은 우리를 점점 더 영혼의 침체의 늪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이유고, 우리가 성도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오니, 오늘 이 시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한번 아브라함처럼 만나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6. 신앙과 환대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창 19:1-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아브라함이 실로 오랜만에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교통을 이루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였고, 알고 보니 그들은 천사였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랑하는 조카 롯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후일 소돔이 멸망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셔서 롯과 가족을 구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19:29)
II. 신앙과 환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은 신앙과 환대입니다. 앞으로 닥칠 위기를 알지 못한 채 롯과 가족은 소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제 소돔 지역이 멸망당할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나그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소돔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때는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A. 영접함
제일 먼저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롯은 그들을 보고 일어나 땅에 엎드려 절하기까지 영접했습니다. 당시 롯은 그들이 천사인줄 몰랐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로 알고 성심으로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평소 롯이 나그네를 환대하던 어진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이기적이던 소돔 사람들의 생활과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롯은 그 나그네들을 "주"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자기의 집에 와서 씻고, 먹고, 자고 가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길거리에서 유숙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거듭해서 요청하며 그들이 자신의 집에 머물러 대접을 받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의 형편은 어떠했겠습니까?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사실 그 도시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타향이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롯은 기껏해야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은 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 사람들과 약간의 분쟁이 있을 때 소돔 사람들은 롯을 향한 그들의 진심을 이렇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 (창 19:9) 그러니 아무리 재산이 좀 있고 그 땅에 거하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잠시 머물러 거류하는 사람으로 보였지 결코 롯은 소돔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롯을 향한 그 땅 사람들의 평가였습니다. 그들은 타락하고 음란했으니 롯은 결코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또한 롯을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과 8절에서 롯의 믿음을 칭송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7)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 2:8) 그러니 롯은 몸으로는 소돔 사람과 함께 거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들과 일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보면서 매일매일 롯의 경건한 심령은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윤리가 있었고, 다른 종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한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롯은 소돔에서 자기보다 더 낯선 사람인 두 나그네의 노고와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생각하며 따뜻하게 영접하였습니다. 어쩌면 소돔의 거류인이 된 롯의 입장에서는 이 낯선 나그네들과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도시에 살던, 이기적인 도시에 살던 롯의 경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한때 안목의 정욕을 따라 아브라함과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물이 넉넉하고, 가축을 키우기 좋은 줄 알고 그 땅을 선택해서 왔으니, 완전히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라함을 통해 배운 여호와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은 오늘 낯선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로 나타났습니다.
B. 환대함
롯은 나그네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소돔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표였습니다.
1. 거처를 내어줌
제일 먼저 그는 거처를 내어주었습니다. 롯은 단지 그들을 적선하듯이 동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위치에서 동정하듯이 베푸는 그런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롯은 진심으로 나그네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들이 집에 들어와 발을 씻고 자고 가기를 간청했습니다. 아마 자신이 사랑하는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 멀리 이 땅에 왔을 때 처음 받았던 그 낯선 배타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나그네들이 겪을 노고를 미리 배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무교병을 굽기까지 정성껏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이는 나그네를 위한 식탁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식탁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유한 거처의 일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개인의 영혼이 침해당하는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며 나그네의 노고와 외로움을 자신을 것으로 여기며 그들을 섬기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소돔 사람들 속에 살고 있으나 그들과는 다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인 것입니다.
2. 마음을 내어줌
그는 마음을 내어주었습니다. 나그네들을 손님이 아니라 가족과 같이 생각하며 맞이한 환대였습니다. 그 집에서 대접을 받고 떠나면 다시 만날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환대했습니다. 환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무관심은 마음에 그를 위한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은 있었던 그를 마음에서 축출하여 그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롯 자신은 아직 알고 있지 못했지만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는 멸망의 시기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롯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불법하고 무법한 행실로 인하여 매일매일 고통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나그네에 대한 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소돔 사람들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삶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그 나그네들을 돌보고 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도리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더욱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실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천사들이었습니다. 롯은 부지중에 나그네를 환대함으로써 멸망하는 소돔성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히 13:2上)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下) 이것은 명백하게 아브라함과 롯을 두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3. 이웃을 환대함
롯은 그 이웃을 환대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셔서 하나님 마음 안에 그 공간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의 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환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하였습니다. 6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삶이 너무나 곤고해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회심을 앞두고 찾은 교회에서의 첫 번째 수요예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전도한 이도 없는데 홀로 수요일 저녁 예배를 찾았습니다. 교회는 그저 이 삼십 명 보이는 작은 벌판에 서 있는 2층 교회였습니다. 난로에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벽 쪽 한구석에 숨어 있듯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는 삐거덕거리는 풍금 소리와 함께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어렸을 때 이미 알고 있는 찬송이라 따라 부르면서 조용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처음 교회를 찾은 그 느낌은 따뜻함이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집을 떠나 온 사람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어머니가 따뜻하게 화로를 피워놓고 밥상을 차려 주며 함께 마주앉아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감정을 지금 정리해보면 환대였습니다. 어디서도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 홀로 찾은 그 작은 2층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방석 위에 앉았을 때 하나님이 나를 환대해주고 계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환대해 주셨으니 또한 너희도 가서 모든 불쌍한 이웃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환대를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상황이 힘들수록 자신에게만 골몰합니다. 그리고 매스컴과 모든 사람들도 가르치기를 이럴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고 다소 이기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환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주인이기에 자신이 자기를 돌보지 않으면 버림받을 처지이기에 그러한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환대를 받은 사람들이고, 지금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을 하나님 마음 안에 가지고 있고, 그 분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주위를 돌아보고, 우리보다 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시련이 오고 있습니까? 그런 때에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현실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의지할 곳 없는 이웃에게 환대를 베풀 때 자신도 하나님의 환대를 받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환대할 때 자신도 하나님 앞에 환대받고 있다는 현재적인 경험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도 죽음을 생각합니다. 절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단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그를 살게 하는 환대하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바로 환대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셔서 당신의 품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환대해주시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가장 연약한 자이지만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도 자존감이 있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그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같이 각박한 때에 여러분의 시선을 불쌍한 주위의 사람들에게 돌려 보십시오. 아무도 돌아보아 주는 이 없어서 고독한 가운데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죽은 8명 중 1명은 65세 이상 노인들의 고독사였습니다. 그것도 그냥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고독하기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그러니 자신보다 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돔과 같은 이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 사랑 없는 세상에서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삶을 바라보며 매일매일 고통을 당하는 의로운 심령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불행을 당하고 나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가슴 아픈 마음이 있습니까? 눈물이 있습니까? 아니 거기까지는 없더라도 문득 문득 그들이 생각나고, 그들을 근심하게 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우리의 마음에 느끼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상태가 바로 나 자신의 상황인 것처럼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이미 하나님의 환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또 여러분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삶은 팍팍하고 힘겹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대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하나님 안에 형제를 제외하고 누가 거기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일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대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환대를 받고 나면 마음이 너무 즐겁고, 나를 환대해 준 사람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는 것은 나를 멸시한 사람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황금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게 내가 원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에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가슴에 새긴 사람은 결코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이웃에게 악을 당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속일 수 없으니, 자신도 이웃에게 속임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입증하는 황금률입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환대조차도 자신이 독점하고 이용하고, 그 환대를 이웃을 향한 환대로 환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목사님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수천명의 교인에게 봉투에 넣어서 나가는 모든 교인들에게 만원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교회에서 맡기는 달란트이니, 다음 1년 후 송구영신예배에 이 돈으로 많이 남겨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상당히 많은 사람은 아예 입 씻고 그냥 끝내 버렸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400만원을 봉투에 담아 가지고 왔는데, 그 만원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 불려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구원의 은혜는 달란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또한 장사하듯이 더 많은 사람을 환대하여 그들이 마음속에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환대를 더 많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환대는 나 혼자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주셔서 설교자로 삼으셨고, 내게 베풀어주신 그 환대 때문에 감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받아 또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환대를 통해서, 환대를 안 사람이, 환대를 전하면서, 그들이 결국은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시련을 겪고, 어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나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구설의 다툼으로 여러분을 욕할지라도,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비참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하나님이 주셨고, 그 품에서 편히 쉬는 것을 경험했으니, 그 사랑은 내 마음에도 이웃을 향한 공간을 내어 주어 그들을 환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롯은 소돔성에서 타락한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오히려 은혜를 더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더 큰 믿음의 성숙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런 낯선 나그네들과 고통 받는 이웃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자신이 환대받을 수 있는 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썽부리는 아이들은 엄마가 은혜 받을 때 야단을 덜 맞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오면 엄마의 마음에 공간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환대를 받습니다. "그랬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라." 아빠가 은혜를 받을 때는 아빠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못 받고 영적인 침체에 깊이 빠져서 헤매게 되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혈기를 부리면서 아이들 가슴에 대못을 박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환대받는 공간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많은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위한 공간은 거의 없고, 우리 같이 걸레 같은 죄인들을 위해 마련하신 공간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33년의 생애를 시련과 고통 속에 사셨습니까? 남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주시는 삶을 사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단 하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환대받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 화목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더 이상 환대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느낄 때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접히게 되고, 그들은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하러 사람들이 자살하는 장소로 종종 찾는 해변가에 있는 절벽 끝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을 기회를 엿보고 마지막에 유서라도 남기고 죽을 작정으로 벤치에 앉았는데, 어떤 여자 한 사람이 벼랑 끝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곧바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뛰어가보니까 벌써 그 여자는 한 점으로 사라져서 이미 떨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그 사람이 결국은 자살을 못하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결국 누구에게든지 절망의 순간은 있고, 삶에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죽음의 큰 두려움이 그를 붙들어 주든지 혹은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환대가 그에게 희망을 주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이런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성으로서만이 아니라 심정으로 알려고 힘쓰십시오. 힘든 때일수록 자신의 문제에만 갇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십시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모든 삶이 하나님의 환대를 받는 삶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 때문에 힘겨운 현실을 이기며 살아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게 모든 희망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쓸데없는 원망과 불평으로 은혜를 소비하면 결국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런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감사의 조건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신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환대하십시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당신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환대를 통해 그들이 감격하게 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해주십시오.
감사할 조건이 없습니까?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선이 폭이 너무 좁고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여러분을 너무나 강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생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인간은 단지 죽음을 향해 지나가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감사할 이유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주위의 불행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따뜻이 환대해 주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여러분은 아직 살만한 사람들이고, 하나님 안에 거처할 환대받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기만을 사랑하던 마음의 공간을 비워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환대하기 위해 마음을 비워줄 때 바로 멀리 계셨던 것 같은 주님이 여러분 가까이 오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없을 것 같았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임을 이웃을 환대하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한 분은 권사님이셨는데,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남편을 갑자기 먼저 떠나보내고 나니 아득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죽고 난 사람들의 첫 번째 심리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적절히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십중팔구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기 매우 쉽습니다. 더군다나 둘이 원수처럼 여기며 살던 사이라면 충격이 덜한데, 원앙처럼 아주 서로 사랑하던 사이라면 그 충격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노년에 이러한 이별은 씻을 수 없는 마음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권사님 아무데도 안 나가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집 안에서 몇 달 동안을 생활했습니다. 염려가 돼서 교인들이 찾아가도 문도 안 열어주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하고 가서, "권사님, 어차피 살아야 하는 인생인데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모시고 선교지 여행을 갔습니다. 선교지에 갈 때 선교할 마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집안에만 계셨으니 이제 좀 털어버릴 겸 해외여행 하는 마음으로 따라 가자고 하며 모시고 간 곳이 동남아의 빈민촌이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아이들이 너무 교육도 못 받고, 불결하고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빈민들을 구제하고 돕는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씻겨주고, 먹여주고, 함께 데리고 놀아 주면서 일주일을 계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한 아이들인가, 이렇게 와서 저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인생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환대를 나누어 주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생각하셨습니다. 이 권사님이 선교사는 아니지만 그 선교를 사명으로 알고 열심히, 열심히 봉사하면서 결국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제가 직접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장로님이 권사님과 함께 사시다가 똑같이 권사님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실의에 빠져서 우울증이 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분을 모시고 누군가가 중국 선교를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심심산골에서 봉사를 함께 하면서 이 장로님의 마음에 자신이 너무나 속 좁은 인생을 살았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이처럼 넓고, 이렇게 불쌍한 영혼들이 많은데 남은 인생이라도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고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결국 우리의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돈이나 이 세상의 자원만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자원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따뜻한 환대를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고, 비로소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그 마음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이제는 고인이 되셨는데,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여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그중에 시집 장가 간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생신 때 자녀들을 다 모아놓고,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한 가지를 명령하겠다." "그러니까 이것을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너희는 아버지의 이 말을 준수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70년대 정말 가난하던 때였으니까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끼니의 위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긴 풍습이 성미입니다. 밥할 때마다 한 줌씩 덜어 봉투에 넣어서 교회에 쏟아놓는 성미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복 받는 길이 가난한 목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 명에게 한 명의 목회자를 정해 주어서 목회자들을 기도로 섬기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자손들이 다 잘 되었고, 다 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이 한 계기가 되었다고 저에게 돌아가시기 전에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 상태만 되면 정말 춤추고 노래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 어두운 밤을 지내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을 환대하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눈물로 가엾이 여기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환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도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의 본을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완악한 사울의 마음에 예수의 가르침이 깊이 새겨졌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환대였습니다. 죄인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신을 하나님이 따뜻하게 그 마음에 공간을 마련해 주시고, 그의 마음에 자리로 불러 죄를 씻겨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그에게 강재력이 되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죽기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나그네였고, 교회에 대해서도 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롯처럼 우리를 소돔과 같은 땅에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셨고, 당신의 집 안에서 씻고, 먹고, 쉬고, 머물러 동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환대해 주셨고, 그 환대를 먼저 받은 지체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사랑으로 목양했습니다. 쓰러질 때마다 우리를 붙들어 주어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으니,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따뜻한 환대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게 될 것이고, 그래서 결국 불법한 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터인데, 그때 우리로 하여금 빛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하여 남이 알지 못하는 따뜻한 환대를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을 환대해주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환대의 감동을 주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아직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 때문에 깨닫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은 따뜻하다는 마음을 갖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소돔과 같은 성에서 구원하여 당신 마음의 자리에 우리를 쉬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쉼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깊은 밤 하나님 앞에 나와 마음을 쏟고 기도할 때 세상은 끊임없이 내 마음에 고통과 시련을 주고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을 남기지만,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때에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환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것이라
III. 적용과 결론
어려운 때 일수록 생각이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게 하십시오. 그까짓 것 어떻게 되든지 주님께 맡기고, 눈을 들어 한 번 가족부터 먼 친척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너무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보십시오.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들이 꼭 필요한 도움을 주어 보십시오. 더 많은 어려운 이웃과 형제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을 어떻게 환대해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섬겨보십시오. 그때 여러분 영혼의 무게는 깃털 같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밖에 보지 못할 때에는 천근만근 무겁던 영혼의 무게가 남을 따뜻하게 환대할 때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환대로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우리는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낙심하던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불평하던 마음은 찬송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니,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 마음 안에서 환대받고 있는 존귀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밤이 길어집니다. 자신보다 더 고통 받는 이웃을 생각해보십시오. 따뜻하게 손을 내미십시오.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과 함께 있어 주십시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여러분이 베풀 수 있는 만큼 그들에게 베풀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대해 주십시오. 여러분도 하나님께 환대받게 될 것입니다.
7. 환대하는 자를 복 주심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깊은 침체 가운데 있던 아브라함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99세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주신 후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는 거룩한 표였습니다. 그 후에 여호와께서 마무레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 세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II. 환대하는 자를 복 주심
아브라함은 장막 문 맞은편에서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천사인 줄을 몰랐습니다. 길을 가는 나그네인줄 알았습니다.
A. 나그네를 환대함
그 나그네를 환대하였습니다. 세 사람에게로 달려가 영접했고, 이는 평소 나그네를 환대하던 아브라함의 경건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때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 은혜를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1. 영접함
제일 먼저 아브라함은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달려 나가 몸을 땅에 굽혀 맞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나그네들이 가엾다는 동정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그 환대를 이웃에게 갚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기를 그냥 지나쳐 가지 말고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음식을 먹고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 18:5)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할 기회를 얻는 것이 그들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웃을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환대의 은총을 받은 백성들의 마땅한 삶이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2. 환대함
그는 나그네들을 환대했습니다. 아내에게 그들을 위해 떡을 만들도록 분부하고, 또 하인에게는 자기가 잡은 송아지로 요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요리를 요구르트 우유와 함께 나그네에게 대접하였고, 자신은 선 채로 그들을 모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하듯이 식사하는 나그네들을 섬겼으니, 이는 최고의 환대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접대하면서 원한 것은 "···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 (창 18:5)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접대하고 섬기면서 베푼 것은 단지 적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먼저 그런 놀라운 환대를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며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환대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남에게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많지만, 사랑이 없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들어올 마음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환대받기는 원하지만 남을 환대하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을 환대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대의 인생이었습니다. 삶의 골짜기 골짜기, 굽이굽이 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기적같이 하나님의 환대로 이어져 온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환대를 받은 인생 굽이굽이에는 하나님 환대의 도구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 사람들이 우리를 환대했습니까? 우리를 만나기 전에 먼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주님을 기억하며 그들은 우리를 환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감동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환대 속에서 가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환대와 분에 넘치는 은혜를 기억함으로서 나그네들을 환대했습니다. 나그네들에게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환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환대로 나타납니다. 이웃을 환대하지 않는 신앙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만들고,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는 모든 사람을 우리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환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또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는 환대의 삶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에게 무슨 삶이 또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빚지며 살아왔던 우리의 삶 전체를 돌아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자격 없는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주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이웃을 환대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복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들을 공경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나그네인줄 알고 공경했는데, 알고보니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그네들을 환대한 동기는 아브라함 자신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믿음, 그분이 자기를 일찍이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주셨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모든 자비를 베풀어 자신은 그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나그네들을 환대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귀히 보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1. 아들을 주심
제일 먼저 아들을 주셨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기업을 상속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미 오래전에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15장 4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 그 약속을 보증하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나가 무수히 많은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할 때 그 약속이 실현되어 자녀가 태어날 시기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사라는 그 말을 장막 뒤에서 엿듣고 웃었습니다. "···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12) 아마도 이 즐거움은 성적(性的)인 즐거움이거나, 아들을 얻게 되는 기쁨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사라에게는 이미 둘 다 포기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환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 자신에 대한 환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늙은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언약 백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어려운 때 우리가 힘들게 사는 이웃들을 따뜻이 환대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그들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던 길을 그냥 가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따뜻한 환대로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과 사랑의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표지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환대는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베푼 우리의 대접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자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요즘같이 각박하고 어려운 때에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며,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무엇인가 선행을 베풀어 그를 위로하고, 그를 보살펴 주면 하나님이 그 선행을 당신에게 꾸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탐욕에 가득 찬 사람들은 남에게 꾸임을 받고도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더욱이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꾸어 드린 그것을 주님이 기억하고 우리에게 갚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히 요즘 같은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욱 곤고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무관심 속에 살아갑니다. 누구의 마음에도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늘 자원이 없기 때문에 곤고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추스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관하고, 죽고, 자살하는 현대의 풍조를 보더라도 이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내어 주어 그들을 보살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물론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람들을 환대해줘도 우리가 대신 그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따뜻한 환대를 통해서 이 사람들이 아직도 이 세상이 살만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똑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은혜의 자원 때문에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기쁨에 가득 찬 우리의 삶을 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욱이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리고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환대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인생길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변화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살아 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어려운 때에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바쁘게 달려가던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그리고 욕심을 버려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 같으며,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곤고한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우리에게 거친 시험의 파도 속에서 몸부림치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망망대해에 혼자 던져진 것처럼 표류하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결국은 어떻게 그런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 내미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다시 찾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퍅한 마음을 돌이켜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까지는 누군가 그분의 환대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평화는 우리를 향한 따뜻한 환대로 드러났습니다.
내 자신도 내 마음에 자리 잡을 곳이 없는데 그런 사랑하는 지체들의 마음에는 우리가 깃들 곳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마음을 추스리며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할 우리의 본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환대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우리가 싫어서 하나님의 환대 대신 이 세상 사랑으로 나아갔던 것임을 깨닫지 아니하였습니까? 지금도 그때 우리들처럼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막막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무것도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 주저앉아 흐느낄 때, 세상 누구의 마음속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었겠습니까? 이런 때에 곤고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일은 얼마나 따뜻한 환대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하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이든지간에 주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따뜻히 자기를 버려 이웃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심판을 알리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원래 하나님이 행하실 비밀스러운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아모스서 3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선지자에게나 베푸시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이 아브라함을 사랑스러운 선지자 같이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행하실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나누신 대화에 의하면 그 두 도시는 죄인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었다고 18장 32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대화 속에서 상정(想定)하시던 의인은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릴 때 생각하고 있었던 의인은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쌍한 이웃을 환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민족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선택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 (마 25:34) "내가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5) 수많은 나그네들을 만났는데, 이 선택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사람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환대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 의지할 곳이 없는 자를 환대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격이었다고 디도서 1장 8절이 말합니다. 장로와 목사는 남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결코 올라서는 안 되는 직분입니다. 또한 당시 교회의 목록에 올릴 경건한 과부의 명부에 올라 갈 여성의 필수적인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과부가 되고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의 명부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가 그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야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실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딤전 5:10)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경건의 표징이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경건을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으로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우리 성도들을 향해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니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길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나은 나그네들이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 주셨고, 우리에게 걸어갈 본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낯선 땅에 살지만 우리는 매일 예배를 드리며,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매일 기도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날마다 우리의 영혼에 충만하게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흐느끼는 성도들, 목놓아 우는 교인들,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벅찹니다. 저렇게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것은 고통이겠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와 사랑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때로는 이 세상에서 무명한 자가 되어도, 때로는 이 세상의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혹은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아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지만 사실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진짜 나그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자기가 왔는지도 모르고,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이 세상에게 배신을 당하고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불쌍한 많은 사람들, 회심하기 전에 우리의 처지와 같이 불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었지만 미끄러져 침체에 빠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보다 육신의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왜 없겠습니까? 모두 우리의 따뜻한 환대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죽음을 생각해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한 것이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반드시 희망을 준다는 보증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 안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바쁘게 살던 자신의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두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흐느낌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여기저기서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가 나와 가깝더라면 더 빨리, 가깝지 않더라도 빨리 다가가서 그들에게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작은 것이라도 그들에게 나누어 보십시오.
며칠 전 저는 텔레비전에서 탈북자가 간증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 여섯 살, 일곱 살 때부터 꽃제비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사는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세 가지 각오를 매일매일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굶어 죽을 각오, 두 번째는 남의 물건을 많이 훔쳤으니 맞아 죽을 각오, 그리고 너무너무 추운 겨울이니 얼어 죽을 각오를 하면서 부모도 없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네 살 때 어느 마을에 가서 꽃제비 생활을 했습니다. 제법 꽤 긴 세월 동안 꽃제비 생활을 했으니까 스스로 생존하는 노하우를 어느 정도 터득했습니다. 거기 보니까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 하나가 신발도 못 신은 채 그 추운 겨울에 비닐로 발을 감싸고, 퉁퉁 부어서 진물이 줄줄 흐르는 채 장마당에 주저앉아 있는데 죽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거의 고난의 행군 때였으니까, 할 수 없이 너무 불쌍해서 그 아이를 데려다가 몇 달 동안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또 다른 도시로 떠나야 돼서 그 아이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 100원의 절반 50원을 나누어주고 떠났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후 다시 가보니까 그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 아이를 생각하며 자신의 불찰이었다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했습니다. 저런 환대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 어려운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갖겠습니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눈 감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흐느끼는 영혼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을 베푸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환대하셨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이 주님이 우리를 환대했듯이 누군가를 환대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환대를 베풀고, 한 영혼 한 영혼 그들이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 거기서 우리의 환대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살 결심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위한 하나님의 천사가 된 것입니다.
모두들 탐욕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말 자신의 마음을 깨끗게 하기 위하여, 주님을 더욱 순결하게 사랑하기 위해 고뇌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누군가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손잡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그들의 눈물을 뺨에서 닦아 줄 수 있는, 환대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고, 우리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입니다.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그들이 들어올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여러분이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나그네를 환대하고, 여러분을 향한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계시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간구하는 힘이 큽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심판하실 때 롯이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의 복을 받은 것을 보십시오. 이는 의인의 간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곤고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들을 위해 보냄을 받은 천사라고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에 그들이 들어와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착한 환대의 행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은혜의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8. 시험에서 인정받을 때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 22:1-19)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아브라함은 단번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구름같이 허다한 많은 증인들 중 뛰어난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약 열다섯 명의 믿음의 위인들이 등장합니다. 전장(全章) 40절인데, 40절중에 11절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모본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연단과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답게 만드시는 화룡점정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II. 시험에서 인정받을 때
그러나 그는 시험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삭은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후일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번제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방식 중 하나인데, 제물을 죽이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죽여서 불에 태워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이삭은 꽤 큰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번제물 하나를 모두 태울 수 있을 정도 양의 장작이었으니, 한아름 쯤 되는 장작이 아니라 지게로 말하자면 위까지 쌓아서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제물 하나를 다 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 무게의 땔감을 능히 짊어지고 산길을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 아마 지금으로 말하자면 열여섯, 열일곱 정도의 청년은 되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을 해보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시험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죽여서 하나님 앞에 불태워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야고보서 1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나오고, 야고보서에는 시험을 안 하신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시험하신 것인가? 안 하신 것인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인 사람을 기록자로 택하여 성경을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셨지만, 하나님이 읽으시려고 쓴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읽혀 깨닫게 하기 위해서 쓰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관점으로만 성경을 쓰면 안되고, 인간의 관점을 고려하면서 성경을 써야지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본질과 현상을 오가는 묘사들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고, 어떤 때는 사람의 관점에서 현상을 보여 주어서 하나님과 교감을 가질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서는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달려가서 서쪽 하늘로 넘어간다고 말하지만, 과학을 공부하고 나면 비로소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런 과학적 사실을 알면서도 아침에 뜬 해가 저녁때 서산으로 넘어갔다고 말을 해도 우리 모두 다 이해를 합니다. 이게 바로 현상의 관점과 본질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시험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시험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에게는 이것이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의 내용이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으니, 이 명령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당시 여호와의 종교에서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 인신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후일 신명기18장과 같은 율법에서도 명시됩니다. 몰렉이란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자녀들을 몰렉에게 불에 태워 바치는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렘 7:31)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신공양하는 이 제사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한 번쯤 부당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이 명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 그것도 자식을 불태워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언제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더욱이 그 자식은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셔서 약속을 따라 주신 자식이 아닙니까? 그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씨를 퍼트리게 될 자녀로 주신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어려움이 당해도 하나님 앞에 바득바득 대드는 오늘날 우리를 생각하면 특이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체 하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큰 시험을 주셨겠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그러나 이처럼 끔찍한 시험을 당한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최대의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창세기 12장, 13장, 14장, 그때 이런 시험을 내리셨더라면 아브라함은 기겁을 하고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과 시련을 많이 겪으며 연단의 연단을 거듭하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을 당해도 일체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일체의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시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든지 빼앗든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시험이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백세 노인의 때에 태어나게 하신 이삭인데, 왜 그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연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는 이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 "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브라함은 이 독자 이삭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식 사랑이 매우 큰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질투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그를 시험하심으로써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떠나 독자 이삭에게로 쏟아지는 사랑의 마음을 바로 잡으시고 질서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마음을 순전하게 정화시키셔서 과연 믿음의 조상이 받을 모든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단의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삭에 대한 부당한 사랑에서 마음을 떼어 하나님께만 붙어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시험에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뜻밖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꿈 같은 기적을 통해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왜 독자를 죽이라고 하시는지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진 하나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바쳐도 결국 하나님이 돌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히 11:17 上)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요점을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그 직전에 하나님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실지 몰랐습니다. 번제로 바치면 결국 이삭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이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셔서 자기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부끄러울 정도로 연약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하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에서 자라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성으로 모두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순종하게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을 죽여도 다시 살려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 마음속에 있었던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당신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며 전능하시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애쓰는 존재인 인간을 불쌍히 보십니다. 그리고 신앙을 주셔서 자기가 그렇게 스스로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스스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의지하며,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친히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죽일 것을 만류하실 때 제물을 예비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로는 순종하는 것이 모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온전히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끝은 언제나 슬픔과 비참과 죄요, 순종의 끝은 언제나 기쁨과 행복과 환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시면 우리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인정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매우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모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서 이제야 겨우 그의 마음을 알게 되셨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를 시험하셨겠습니까? 이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독자 이삭을 주셨을 때 아마 그의 마음은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깊이 찬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니, 내가 이런 큰 복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역시 아담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고, 주님 은혜의 손을 빠져나가면 그는 아담의 후손인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던 사람이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하나님 능력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결국 예전에 예수 믿지 않을 때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손에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아브라함에게도 여전히 아담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너무너무 사랑함으로써 그 마음 안에 있는 질서가 깨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리셨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종종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것들을 한번 흔들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아!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사랑했구나." 그리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질서가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된 질서가 아니라 내 육욕의 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모릅니다.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위기에 놓이게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이 거기에 붙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마음을 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배반하기까지 이삭을 사랑하리라고는 생각 안 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위험수위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기 위해서 바로 이 사건을 화룡점정처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 앞에 큰 인정을 받고 믿음의 거대한 봉우리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에 대한 찬양의 기사 중 4분의 1 이상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칭찬하는데 쓰였습니다. 이 사람이 구약에만 믿음의 위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뛰어 넘어서 신약의 하나님 사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시고, 연단하시고, 마지막에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시험을 주셔서 그의 믿음을 순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6대 독자였습니다. 그런데 중고등부 수련회에 교사로 따라가서 죽었습니다. 수영을 아주 잘했습니다. 양수리로 갔는데, 애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까 자기는 수영을 하면서 그 배를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배가 도착하고 나니까 없어졌습니다. 그럴리가 있나, 알고보니까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물에 가라앉았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배는 지나간 것입니다. 잠수부들을 동원해 가지고 그 부모가 3일 동안을 양수리 강바닥을 뒤졌습니다. 들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그때 그 사람들은 돈을 많이 받기 위해서 시체를 찾으면 철사로 묶어서 돌멩이로 물속에 가라 앉혀 놓고 계속 못 찾는다고 해서 인센티브를 계속 올렸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3일을 수색하고, 4일째 되는 날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교회를 아주 오래 다닌 장로님이었고, 권사님도 그 교회를 30년 이상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6대 독자의 장례를 지내고 나서 두 분이 모두 교회를 안 나오셨습니다. 그 후에 몇 년 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1년 정도 있다가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교회를 안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교회 다녔던 분들이 교회 안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때 불신자 시절이었는데도 충격이었습니다. '종교가 저렇게 사랑하는 아들 하나 잃어버리면 그냥 없어져 버릴 수도 있고, 마음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그까짓 것이 무슨 신앙일까'라는 마음이 무신론의 길을 걷고 있던 나에게도 느껴졌습니다. 저럴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안 믿는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 그 고통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나의 먹을 만큼 다 나이가 먹어서, 독자도 아니고 아들이 서너 명 되고 나이가 들어서 죽어도 그 부모의 가슴에 그 아이를 묻습니다. 그런데 어린 독자, 100세에 낳은 그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독자 이삭을 바치게 하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흔들리는 질서를 바로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마음에 신앙의 부흥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랑은 순종의 실천으로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우리 안에 뜨거워진 사랑은 순종할 때 더욱 더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갖는 것과 그 믿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력히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믿음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계속 커지기 위해서 믿음이 좋아하는 풍취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실천으로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덜 사랑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 이러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시면 이것이 우리에게 참 좋다는 마음과 함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이렇게 좋으니, 이것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좋으신 분이실까? 누구에게서 어떤 장점이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칭송할 것이 아니라, 저런 아름다움과 장점을 저 사람에게 주셔서 저 사람을 돋보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누구를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그 사랑이 나의 심령을 깊이 적셔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한 것입니다. 질투와 이기심은 불만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린아이 적에 엄마의 젖을 물립니다. 배가 고파서 칭얼거리다가 젖을 물리면 눈을 감은 채 막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리고 실컷 엄마의 젖을 빨아 먹습니다. 다 빨아 먹고 나서 그 다음에는 입을 벌리고 젖꼭지를 놓습니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그런 아이에게 더 먹으라고 아무리 젖꼭지를 물려도 아이는 더 이상 젖을 빨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아이가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분쟁 그리고 질투와 모함은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마다, 그 좋은 것들만 좋아하지 말고, 그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더욱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내가 받은 것은 비록 작은 선물 하나였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을 충분히 맡겨도 안심하시고 맡기십니다. 왜냐하면, 돈을 주고, 명예를 주고, 권력을 주어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쓸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대장동이니, 백현동이니 하면서 떠드는데,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사건의 전모는 나중에 파헤쳐 봐야 알겠지만, 저는 거기서 악취나는 인간의 탐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 천억씩, 이천억씩 돈을 벌어 간들 뭐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탐욕을 품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탐욕을 부려서 많은 재물을 소유한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여러분 무엇을 하겠습니까? 최소한 그 돈으로 죄는 지을 수 없을 것 아닙니까?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 자기를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그 분량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 쓸모없이 그렇게 탐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사랑하는 것들을 흔드십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물질, 자기가 애착하던 권력, 자기가 사랑하던 지위, 자기가 좋아하던 재물, 등등을 흔들리게 함으로써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청지기로 여겨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도록 맡겨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더 많은 복을 받을 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없는 헌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든지 언제나 우리에게 진심으로 주시는 것이며, 이 진심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배려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응답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일들을 아울러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클까 한번 적어 보십시오.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감사한 것을 한번 적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일만 가지를 주시고, 열 가지는 뜻이 있으셔서 안 주셨는데, 일만 가지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없고, 못 받은 것 열 가지에 대한 악한 마음이 우리에게 꿈틀거려 범사에 하나님 앞에 불평하며 살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그가 복을 받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의 보증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생전에 거하던 땅에서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자처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었고, 하나님의 많을 복을 이 세상에서 누렸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라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길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없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나라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목축을 하고, 부지런히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서 그 집안을 일구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의 뜻도 결국 자신과 자신의 모든 후손을 하늘 본향으로 인도하시고, 그 본향 나라의 모형을 이 땅에 세우시는데 쓰시려는 목적으로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늘 가는 이 본향 길에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했고, 그의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서 자신에게 불태워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삭이었으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리라
결국 모두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흩어지고 헤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쾌락이나 죄를 짓는 일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순종은 주님의 은혜로 행복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함이 우리의 신앙에 합당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이 삶으로 불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은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사면을 두루 살피며 하나님 앞에 올곧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세상에 눈길을 두지 않고 당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과 만나 주시고,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도와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 시련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만 하면 늘 마음에 걸리는 불순종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의 기도가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말씀 생활이 은혜와 감격에 불붙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처음 사랑의 때와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우리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반역하는 사람이, 한 편으로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불행으로 끝납니다. 순종은 주님의 은혜로 행복에 이르려 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 세상과 갈등을 일으키고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은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인정해 주실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만난 모든 사람은 그 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시험 속에서 "네가 옳도다"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처음 이 시험을 당했을 때는 네가 옳지 않았으나, 이 위기를 만났을 때는 네가 틀렸으나, 이제는 이 시련을 만나 네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순종하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이제는 네 마음이 옳도다 인정을 받을 때 시험은 끝나는 것입니다. 시험과 불순종은 우리를 에워싸고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합니다. 어떤 처지에 놓여있던지 분연히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할 수 있는 환경에서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순종할 이유가 얼마든지 많았고, 순종할 수 없는 사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그분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굳게 믿으며 순종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순종해서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아브라함은 인생 최대의 시험을 만났습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아이를 죽여도 하나님은 그 아이를 다시 살려 자기의 품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매달려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시험을 당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미끄러지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굳게 붙들렸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아마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 왔을 것이고, 커다란 통곡의 울음소리를 터트렸을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위대한 조상으로써 연단을 받는 거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순종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죽이신 후에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이지 않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고 싶었던 것은 죽임을 당해 불태워진 이삭의 육체가 아니라, 아브라함 마음에서 죽임을 당한 아들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모든 복을 주셔서 당신의 모든 뜻을 이루게 하셨고, 온 인류가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위기 속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시험을 일찍 끝내는 가장 뛰어난 방법인 것입니다.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