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살게 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거대한 이단에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서양 철학과 그리고 동양의 신지학 등 그들이 접근 가능했던 요소를 받아들이며 거대한 이단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이 이단은 비교적 지성인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고 침투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조건이 깊은 영의 지식에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오순절 사건이 있고 나서 기독교의 중심이 지성과 감성 사이에 균형을 잡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몬타누스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서 이제 체험과 감성 쪽으로 이동했다가 이번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을 보게 됩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은 몬타누스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초대교회를 괴롭혔던 대표적인 이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천지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주 체계적이고 그리고 사상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물질은 악한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죄악 된 물질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리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사도는 거짓 교리에 흔들리는 교리를 가르쳐 바로 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가 오직 진리 안에서 교제해야 하고 바로 그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한때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사도 요한이 이제는 지식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겸손한 말년의 원숙한 그의 신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A. 하나님이 사랑함
그러면서 그는 이곳저곳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혼란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랑함 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이시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거짓과 사랑 없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들이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돼서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속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거듭난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본능적으로 세상을 따르는 거짓의 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의 영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이신데 이 성령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서로를 사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 성도 자신에게서 자가발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고, 어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그 원인은 그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이제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제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진리이십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안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 세상에 지으실 때부터 당신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들어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도 또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인간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 사랑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새끼를 낳고도 그 자식이 자기의 핏줄이요, 분신이요,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고, 그 아이를 버리고, 자신의 생명과 같은 아이와 인연을 끊는 것을 무슨 동네 가게 단골 끊는 것만큼도 여기지 않는 무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죄가 들어온 본성, 죄 때문에 자기 밖에 모르는 본성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현상입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부모의 가슴에 끊임없이 못을 박고 그리고 심지어 폭행하고, 심지어 살해하고, 의절하는 일까지도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이 산산이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는 선도권을 행사하실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근원을 물어도 어디로부터 왔고,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를 향하여 살아야 할지를 그는 알지 못합니다.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알았다고 도달한 결론도 결국은 그 마지막 뿌리는 여전히 바닥에 닿아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공허함은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삶의 공허함과 의미 없음과 그리고 깊은 무지와 현저한 타락을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셔도 자신이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을 이 세상에서 얻고자 몸부림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사랑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독생자를 보내심
두 번째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랑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 것이 하나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영원한 하나님이신 그 분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영광스럽지는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덕 입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규명해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꼭 같은 영광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 때문에 잃어버렸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이 됨으로써 영광스러운 피조물로 인간의 영광을 가지게 되었는데 죄를 지어서 그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하나님 때문에 그 관계를 통하여 인간 속에 흘려들어오던 찬란한 생명과 영광의 빛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을 가지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그 영광을 향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그 영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을 이 세상 속에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통해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되고 그리고 모든 것을 호령하며 제국을 형성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자기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들, 족속들을 피로 물들여 죽이고 권좌를 차지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만한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부라도 쌓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그래서 많은 재물을 얻어 그것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폭력을 행하고 그리고 사회의 가치를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인간은 이렇게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허무한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에 그 영광에 이르기 바라기에 칼에 피를 묻히며 그 무자비한 살육과 침략,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여전히 그 영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락하고 그리고 쾌락주의에 빠지고 그리고 죄를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모든 하나님에 저항하는 불행과 타락의 몸부림은 결국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몸부림입니다. 인간은 자유하기 위해서 모든 속박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것 때문에 마지막 인간은 더욱 속박 받고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불행의 굴레는 인간은 벗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관적인 인류의 상태를 인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들, 왕들을 보내어 당신을 대신하여 통치하게 하고 구원의 여망을 제시하셨습니다마는 이제 때가 이르게 되자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독생하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분은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됐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사람의 슬픔과 비참을 하나님께 토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이 지는 짐인 죄를 제외한 모든 연약함을 우리와 똑같이 경험하시며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으로써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사 하나님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그 분이 말 구유간에 오셨고 누가 그 예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비천한 목수의 집안에서 그 아들로 태어나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울고, 웃고, 분노하시고,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찍이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갔지만 누구도 이렇게 하나님 자신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요. 그 하나님은 너희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가시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요.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너희의 구원에 인색한 분이 아니라 눈물로 너희들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와 처음 창조될 때의 영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참 사람의 모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다윗, 이러한 경건하고 탁월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참 인간이 무엇이어야 될 지에 대한 훌륭한 모본을 남겼기에 그들은 성스러운 열조들로서 그분을 칭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모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연약함은 짊어지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의 본분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에게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기 힘든 이웃들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되는지를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에게 완전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으셨을 것이고, 사람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셨을 그 분이 모든 인간들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나 멸시와 욕을 당했습니다. 당신이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창조하신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이 어떤 취급을 받았습니까?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남의 땅에 오신 것처럼 멸시와 욕을 당하며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과 환란 속에서 어떻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모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독생자가 오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그 대속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했고, 하나님은 죽을 수 없으니 그 분은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는 자신을 영원한 화목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목 제물은 서로 나빠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나빠진 관계를 모두 치료하는데 이 화목제물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잠깐 화목하게 하는 데는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물이 유효하였으나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목, 그리고 인간들과의 영원한 화목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효력을 발휘할만한 가치가 있는 제물이 바쳐져야 됐으니 우리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외에는 이 화목 제물이 될 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탄절은 우리 인간에서 보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기쁜 날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서 보면 이 날은 슬픈 날입니다. 죄 있는 우리를 위해 죄 없는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 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죽음을 겪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신 날입니다. 바로 그렇게 독생자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온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열어놓으셨고,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의 열매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맞이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사랑은 알 자가 없습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아보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탁월한 사랑과 그리고 빛나는 거룩함, 그 모든 평화는 그것을 보좌 앞에서 누리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을 요구합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로 데려가시기 위해 당신의 찢으신 몸으로 흘린 피를 가지고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내가 믿고 의지하던 나의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그 보좌의 핏길을 맨발로 걸어 나의 모든 공로를 부인하며 은총으로 아버지 하나님 보좌에까지 나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짐승처럼 살다가 가축처럼 야수처럼 죽어도 아무 불평할 것이 없어야 할 더러운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로 오셔서 당신의 흠 없는 보혈의 피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 앞에 나아갈 핏길을 깔아주셨습니다. 지금도 모든 의인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불러 휘장을 지나 보좌에 이르는 핏길로 그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C. 우리를 살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9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결국 우리의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어서, 먹고, 마시고, 쾌락하고, 죄 짓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의 원리에서 시작된 것이고, 행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고 있었고, 현재적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미 일찍이 이러한 인간의 깊은 불행의 근원이 없는 밑바닥을 직시하였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볼 수 있을지를 고뇌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대답을 찾아낼 수 없었고,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고민하며 행해왔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여줄 뿐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비참의 원인을 찾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피적인 현상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 오늘 성경에서 보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기 전에도 살아있고, 예수 오시기 전에도 살아있고, 하나님 몰랐을 때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산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식을 죽음으로 떠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죽는 것을 어려운 말로 참척이라고 합니다. 중국 주나라 시대에 한 사람은 자식을 잃고 너무 슬퍼서 소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자식을 잃는 것을 빛을 잃는 것이라고 해서 상명(喪明)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광명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역사에 보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네 살 난 자기 아들을 탕으로 만들어서 바친 간신도 있습니다. 이렇게 악한 인간인데도 자식이 죽으면 그렇게 처참할 정도로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고 눈이 멀 정도로 깊은 고통이 있다면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자기의 형상을 따라 당신 자신이 직접 창조한 인간들이 당신과 교제하며 인간의 그 탁월한 영광을 누리며 창조 세계를 당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 지은 목적대로 다스리며 영광스럽게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이 타락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그분의 심정은 어떠하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선지자들을 보내었고, 제사장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마지막에는 불붙는 것 같아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소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자기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기 원하신 것, 그거 하나였습니다.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갈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누구에게 종노릇하고 그리고 누구의 지배를 받아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한 사람에게 그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단에게 그 짓을 하고 살아가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자식으로 그 아이를 키워놨는데 그 아이가 조폭에 들어가서 헌신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몸을 팔면서 그 집이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자기를 낳아준 부모와 절연한 딸이 있다면 여러분들 마음은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의 무한한 연장이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살아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있다 사라질 허무한 것을 찾아서 욕망을 불태우고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독생자를 멸시하고 멀리하며 스스로 죽기로 작정된 길을 걸어가면서 거기에 삶의 기쁨이 있다고 믿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그 인간들을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영광스러운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받은 인간으로, 성령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향해 살며 교제하며 그 분의 기쁨을 누리며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자, 인간은 살아있는 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럴 능력이 없을 때 인간은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우리를 살게 할 생명이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사랑하는 세상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접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거칠어 보이고 우리의 본성에는 어울려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이 예수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이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행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스스로 불행의 길로 걸어갑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러한 불행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날을 한없이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우리에게 진정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임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