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은 끌 수 없어라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팥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6-7)
녹취자: 이재호
1. 도장에 대한 성경 시대의 관습을 살펴보고,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팥에 두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봅시다.
도장을 지니는 방법이 나오는데 첫 번째 보면 품에 넣고 다닙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행음할 때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장을 품에 넣고 다닌 것입니다. 손에 끼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오른손에 임장 반지라 할지라도 탕자의 비유에 보면 가락지를 끼워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도장으로 사용돼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이 도장이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고 재산을 행사하기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함부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결국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무엇이냐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동거이며 한 식구로 사는 것입니다. 인자를 행하고 공의를 행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체가 되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장이 인간의 몸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일체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2. 사도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던 것은 사랑의 어떤 힘을 보여줍니까?
특히 사도 바울이 이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혹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는데 사실 이 번역이 잘못됐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노예입니다. 종은 영어로 servant이고 노예는 slavery입니다. 이 servant는 출퇴근하는 종도 있었고 세습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성경이 쓰여진 문맥에서 보면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약하기는 하지만 계약 관계입니다. 그러나 종은 신분입니다. 사도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자기를 기꺼이 바쳐서 종으로 살게 하는 힘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만약에 사랑의 관계라면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면 결국은 서로 사랑하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A이고 이 사랑(사람)은 B인데 서로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은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어서 이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의 관계에서 이러하듯이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은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가진다는 말은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자기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그런 상태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자신도 기뻐하면서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더 놀라운 것은 “나도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증진이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같이 강한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랑은 이렇게 철저한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죽음이라는 표현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 한 이야기가 결국은 “주를 위해 흘리기 싫어하는 피가 있다면 출혈시켜 주시고 찢기기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도려내어 주시옵소서” 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그 사랑이 진실하면 그 사랑은 죽음과 같고 결국 이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4.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진노, 질투, 후회에 대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랑입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신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것을 인간적인 화법으로 질투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눈높이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아주 자주 경험하는 질투의 경험을 가지고 사람이 알아듣게끔 하나님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하나의 눈높이 교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진노한다는 것은 진노의 깊이만큼 결국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말하고 싶은 요점은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질투해서 너희를 죽이는 하나님이시다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질투할 정도면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느냐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우상숭배하는 사람을 진노하시니 그 진노의 크기만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안 드리고 세상에 바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투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벌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그 자신 안에서 우리를 향해 불붙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질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너무 아파하고 혹은 진노할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죽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진노하면 사랑의 관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상(사랑)은 언제나 삼가함을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물에 이행치 않고”라는 말씀이 심오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5.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을 줍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할 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결국은 그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한 사람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질 때 무관심하게 됩니다. 질투하면 아직까지 사랑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 인간의 시각에서 표현한 건데, 결국은 우리를 뉘우치게 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에서의 질투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질투와 똑같은 방식으로 유비는 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가 죄를 짓거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는 것은 결국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하면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이스라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행복하고 하나님께 복 받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의 의무와 신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와 자기의 행복이 충돌하는 것은 하나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이 건강하고 바르게 되면 사람은 너무 과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건강하면 너무 안 먹지도 않고 건강한 상태에 있다면 너무 풀떼기만 먹고도 못 살 것 같고 너무 기름덩어리만 먹고도 못 살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아주 샬롬한 상태로 들어가게 하시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진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줄어듭니다. 결국은 최고의 성화의 단계는 인간이 마땅히 행하며 살아야 할 그것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성화의 최고의 단계입니다. 결국은 우리로서 이것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는 순간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셔서 영화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투기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