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
녹취자 : 피노라, 허혜숙
안녕하십니까? 즐거운 구역공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박수! 코로나 사태로 여러분들이 구역예배를 정상적으로 하실 수가 없어서 라이브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지금 채팅 창에 여러분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ym엘븐 “구역공부 기대됩니다” 그리고 또 김현진 자매님 “육적 코로나보다 영적 코로나에 걸리기 직전인데 라이브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또 어떤 분은 “외부에서 참석 중인데 공과교재 없어도 되나요?” 물론 없어도 됩니다. 그냥 보시면 공과가 모두 나옵니다. 김지은님. “우왕 신기해요. 안녕하세요” 그거보다 신기한 게 우린 아주 많습니다. 많은 분의 댓글이 쭉쭉 올라오고 계십니다. 우리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2부 제6장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입니다. 모두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1부에 이어서 2부에서 본론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1번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러 모이셨으니 큰 소리로 같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Q1.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나누어서 생각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합리한 결과들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결국 편의적 신앙관을 갖게 됩니다. 이걸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큰 계명과 작은 계명으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계명이 되고 이것은 작은 계명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거는 중요하고 이거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큰 계명이 더 중요하고 작은 계명은 덜 중요하다는 것은 말이 됩니다. 즉 큰 계명을 어겼을 때는 대(大)죄가 되고 작은 계명을 어겼을 때는 소(小)죄가 됩니다. 소죄나 대죄나 모두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대죄는 극복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더 많은 악한 영향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사랑하게 되고, 모든 계명을 사랑의 크기만큼 적지 않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지나가면서 한 말인데도 마음에 꼭 붙들고 그렇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왼쪽의 그림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율법 안에는 수많은 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이 모두 다 사실은 한 덩어리가 되어있고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이 모든 계명은 이 사람의 마음속에 모두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여기에서 개혁신앙의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모든 성경으로서 ‘토타 스크립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풍부하게 다루는 곳도 있고 약간 엷게 다루는 곳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올바르게 하고 의로 우리를 교육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국은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할 때는 그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사랑이 식게 되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중간쯤 올 때는 자기 마음에 동의가 되고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입니다. 두 번째 문제를 넘어가 보겠습니다. 같이 한번 문제를 읽어볼까요. 시작.
Q2. 율법사의 모순된 질문에 예수님께서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니” 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첫째 되는 계명이니”라는 것을 어떤 나열식으로 첫째, 둘째, 셋째, 넷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왜 주님은 첫째와 둘째만 말씀하셨을까요? 그러면서 왜 두 번째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을 하시면서 둘째도 이와 같으니 라는 말을 첨부하셨을까요? 쉽게 말하면 이것은 종속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원리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계속 댓글이 들어옵니다. “이번 공과 너무 어려워요” 하며 눈물표시가 나오는데 곧 쉬워질 것입니다. “스웨터가 아주 화사하고 아주 보기 좋네요” 제가 오늘 좀 여러분들을 위해서 가꾸었습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율법의 원리가 있습니다. 율법을 성경에서는 항상 단수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토라’라고 말을 하고, 그리스어 헬라어에서는 ‘노머스’라고 이야기합니다. 항상 단수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에 녹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인지에 대한 법이 있는데 이것을 제사법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고 이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지를 다루는 민법 혹은 시민법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가리켜서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율법이 있다면 십계명, 제사법, 민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동일합니다. 제사법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드려서 제사를 완성하십니다. 영원히 단번에 제사를 드려서 이제 우리는 짐승을 죽이거나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사법은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종료가 된 것입니다. 이 법이 더 이상 우리를 규제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민법도 마찬가지로 임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의 계명에 보면 기르던 소가 사람을 들이받아서 상처를 입혔을 때 어떻게 손해를 배상해야 되는가. 등등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바로 신정국가 시대 때에 하나님이 백성들의 일반적인 삶을 규제하기 위해서 만드신 법이고, 모세는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나중에는 천부장부터 아랫사람들을 세워서 크고 작은 재판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이것도 더 이상 우리를 규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십계명인데 이 십계명은 모든 것들을 펼치게 만든 핵심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이 십계명에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개의 관계를 규율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를 규율함으로써 사실은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강의할 때 그 강의를 들었던 학생으로부터 긴 메일을 받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이 공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질문의 내용은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궁극적인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부끄럽고 괴로워서 나를 위해서 그 일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사랑하지 않은 사람의 도덕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유익을 주고 한계가 있습니까?”라고 질문 했습니다. 답을 해주려고 하는데 굉장히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논의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선을 일차적인 선과 이차적인 선으로 혹은 일차적인 아름다움과 이차적인 아름다움으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원래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모든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할 때 거기에서 선한 삶이 나오는데 그것을 일차적인 선으로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모든 오류와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정확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출발점이 자기이긴 한데 아주 좁은 자기, 내가 먹고 입고 호강하고 쾌락을 즐기고 이런 것으로 아주 좁은 범위를 가지고 있을 때는 악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나만 말고 나와 함께하는 동료, 나와 함께하는 가족, 우리 사회 우리 민족으로 펼쳐져 나아갈 때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사회동포주의입니다. 코스모폴리티즘이라고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덕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미 없게 보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안에 있어서 결국은 그렇게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뻗어나가서 덕을 넓힌 것과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해서 덕이 넓혀진 것 사이에는 어디선가는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그 충돌과 모순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과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긋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면 받아들여질수록 하나의 거대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더 깊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튼 공과로 다시 집중하면 이렇게 됩니다. 본문을 다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이 구절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방식이 함께 제시됩니다. 그 방식이 “마음을 다하라” 그리스어로 ‘카르디아’입니다. 결국은 마음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남녀가 사랑에 아주 깊이 빠졌을 때 그 상태, 마음을 다합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리셨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그 사람이 생각이 나고, 밥을 먹으면 ‘그는 밥을 먹을까?’ 하고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 그 사람도 여기에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상태가 깰 때부터 잠들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것이 마음을 다한 상태입니다. 무엇을 그가 바라던지 즉각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목숨을 다한다고 했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내놓기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 옷?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내놓기 싫어하는 것은 목숨입니다. 증명해볼까요? 배를 탔습니다. 여기에 가방을 들었습니다. 그 가방에 컴퓨터도 있고 촬영 기계도 있고 이쪽 가방에 돈이 들어있고 마지막에 허리에 단단히 맨 가방에는 수표와 여권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헤엄을 쳐야 합니다. 제일 먼저 모든 짐을 다 버리고, 그다음에 두꺼운 코트를 다 벗어야겠죠. 왜? 그것을 입고 헤엄칠 수 없으니까. 결국엔 무엇을 보여주는 거죠? 인간이 마지막까지 내놓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커다란 가치도 없으면서 불쑥불쑥 내놓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살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바라는 삶의 상황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것이 “뜻을 다하여”라고 했는데 뜻이 ‘디아노이아’라는 것인데 지성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을 유의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성입니다. 모든 지성을 다해서 지력을 다해서 지적인 정신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잡지를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어떤 아름다운 배우의 외모에 빠져서 좋아할 때는 이렇게 하나, 둘 세 가지씩 다 동반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다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둘째 계명이 하나처럼 똑같이 되는데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때문에 그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3번 들어가기 전에 계속 질문도 나오는데요. 김양 아이디 가진 분이 “성경에서는 지나친 자기애를 금지하는 건가요? 자기애 자체를 금지하는 건가요?” 했습니다. 이 질문은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기 사랑입니다. 그 자기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자기애가 성립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성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에 여기서 말하는 자기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제일 어려워했던 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무엇이라 규정할 것인가?’ 옛날 사람들이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그건 아니라고 실존주의자들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결국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도 없고 자기는 모든 것을 향해 열린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 규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사상은 다릅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나라는 인간의 의미는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기원,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천과 목적을 이해하게 되면 한 번의 우리의 인생의 좌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좌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좌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갈 길을 모르다가도 구글 지도를 펴면 위도와 경도가 나오고 딱 지점이 나옵니다. 자기 옆에 그다음 앞뒤에 뭐가 있는지 발견하게 될 때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듯이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안에 자기가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충분히 자신이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하나님 뜻 안에 있지 않은 자기는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허위의 자기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도덕적 결정에 있어서 후회되는 일을 하고 나서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아마 미쳤나봐 아휴 진짜 왜 내가 그런 일을 했지’ 할 때 엄밀하게 말하면 원래에 있어야 할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그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은 자기가 아닌 것들을 끊임없이 덜어내면서 참된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질문에 답을 해드렸습니다. 문제 3번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Q3. 하나님의 계명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의 크기를 말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을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 주제에 관한 질문이 다릅니다. 이런 것입니다. 술을 먹는 것이 죄입니까? 아니면 카바레에 가서 모르는 남녀가 춤을 추는 것이 죄입니까? 담배 피우는 것이 죄입니까? 너무 심심해서 친구들과 화투를 쳤는데 판돈을 어디까지 걸면 오락이고 어디까지 걸면 죄가 되나요? 실정법이 결정하는 기준이 될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거기까지는 모두 하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질문이 다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예가 없지만, 미국에서 1930-40년대 - 미국가정에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 당시에는 큰 집을 지으면 반드시 지하에 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6-70년대 이후로 들어와서 잘 사는 사람 집에 가보면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한쪽에 술을 준비할 수 있는 바가 있고 카운터가 있고 당연히 바텐더가 있고, 그리고 이쪽은 음향시설이 되어있고 춤을 출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즐거움은 날짜를 정하고 사람들을 초청해서 술을 먹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하는 그런 정도의 댄스가 아니라 신체접촉을 많이 하면서 추는 춤들이었습니다. 당연히 파트너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그 시대에 흐르고 있는 관습이었습니다.
R.A.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 이미 돌아가셨죠 - 그분이 기도와 관련하여 자유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인상 깊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로 기억됩니다. 그 성경 구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에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고 말씀에 나옵니다. 결국은 그분의 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만 준수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행하라는 실행 명령에만 그치지 않고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가 기준이 되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기쁨이 되어서 그 기쁨을 기준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계명의 크기를 논해서 이것은 진짜 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탁상공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상대방이 사소하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지나가면서 먹고 싶다고 하는 것, 입고 싶다고 하는 것, 가보고 싶다고 하는 것, 모든 것이 다 중요하게 생각이 됩니다. 사랑이 식으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결국은 그 계명의 본질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설명을 상세히 보겠습니다.
댓글들이 들어오는데 잘 못 알아듣겠다는 분은 신앙용어집을 참고하라는 충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들어와서 놓쳤는데 나중에 홈피에 올라오나요?” 네 물론 올라옵니다. 들어오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신학용어 해설집은 서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구글에서 검색하면 찾으실 수 있고, 앱스토어에 들어가서 김남준 서가 찍으면 어플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어플 안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랑은 계명의 크기를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의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되고 그가 아주 크게 기뻐하면 나에게 아주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놀람의 의외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죠. 사랑합니다. 남편과 아내를 사랑합니다. 또 더 실감나게 예를 들면 연애할 때 이 여성을 얻기 위해서 이 남성을 얻기 위해서 올인했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얼핏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물을 했습니다. 그보다 수십 배 값을 많이 지불하고 산 것 못지않게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의외성입니다. 결국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가볍게 듣지 않고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 사랑이 더 활짝 꽃피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대답해보십시오. 여태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아 본 가장 감동을 주는 선물이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돈의 크기에 비례하던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입시키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설명한 구절이 마태복음 22장 4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니라”(마22:40) 여기서 강령이라는 말이 재밌는데요 원래 강령은 이렇게 씁니다. ‘강’이라는 것은 기독교 강요할 때 강입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뒤에 ‘령’은 명령, 분부, 가르침 이런 정도의 뜻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뜻은 강령이 그리스어로 ‘크레마타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 무엇인가를 매달 수 있도록 박힌 못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요즘은 결혼을 할 때 양복장을 사가지고 옵니다. 집들이 점점 작아지니까 양복장을 큰 것을 가지고 오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 결혼하실 때 보면 아내가 양복장을 가지고 오는 집도 있지만 가난하면 횃댓보를 가지고 옵니다. 횃댓보는 벽 하나를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천입니다. 아름다운 자수가 놓여있습니다. 그 횃댓보를 걷고 나면 안에는 여러 개의 못이 차례대로 박힙니다. 못에다가 옷을 걸어두는 것입니다. 그때는 제대로 된 옷걸이도 없었습니다. 순서대로 아빠 옷, 엄마 옷, 한복, 그다음에 무슨 옷 걸어놓고 주렁주렁 있는 것이 보기 싫으니까 횃댓보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왔을 때 보면 약간 불퉁하게 나오긴 했지만 예쁜 자수가 놓여있는 천이 한쪽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 박혀있는 못이 있고 못에 옷이 한 벌, 두 벌, 세 벌 매달릴 수 있는 것처럼 결국 온 율법과 선지자. 즉 율법의 가르침과 모세오경, 오경의 가르침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둘을 예로 들까요? 율법과 선지자. 이것은 선지서로 보면 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개념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이렇게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을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15세기입니다. 주전 15세기. 선지서가 주어지는 것은 훨씬 그 이후의 일입니다. 선지자들이 생겨나면서부터 멀리 보면 사사들도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예언들이 7세기 8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쭉 주어집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모아놓은 것이 선지서입니다.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잘 보세요. 근데 고민은 이것입니다. 선지자들을 B라고 보고 율법을 기록한 사람을 A모세라고 보면,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모세에 대한 선지자들의 고민은 예수님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담배를 피워야 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예수님 시절 때는 담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재산권을 훔치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 예전엔 그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뿐이었겠습니까? 자동차도 없고 따라서 그런 물건들에 대한 책임이나 윤리 같은 것들은 당연히 정립이 안 되었겠죠. 그랬을 때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이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하듯이 똑같이 선지자들도 모세가 지금 시대에 살아있었더라면 그 율법을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라고 가르쳤을까? 이것을 해설해준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지자라고 하면은 말 자체가 선지잖습니까? 먼저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선지자라고 생각을 하면, 뭔가 미리 아는 점쟁이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지자의 개념은 그것이 아니라, 율법을 그 시대에 맞도록 설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매우 필요할 경우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부분적으로 미래에 대해서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극히 적은 부분이었고, 그것의 목적도 모세의 경전을 어떻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해서 그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는가에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른쪽에 그림을 보시면 못이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기 때문에 하는 수많은 행동이 나올 것입니다. 그다음에 윤리적인 결론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의 못에 모두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걸리지 않으면 땅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 댓글이 들어오는데요. “자주 해주세요. 방송만으로 열린교회를 접할 수 있는 시골에 사는 성도입니다. 우리 집 주변에는 개혁교회가 없어요”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당분간 해드릴게요. 그리고 “새벽기도 유투브에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오랜만에 공과공부하니 너무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이 코로나 사태가 어찌되든지 공과는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새 공과도 모두 배포가 되어서 그때까지 우리가 정상적으로 못 모이면 이런 식으로 계속됩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은 지난주 당회에서 결정했는데 이번 새로 나오는 공과 『염려에 관하여』를 온 교인에게 무료로 나눠드리기로 했습니다. 교회 오실 수 없는 성도들은 자택으로 구역회원 수만큼 운송해드리기로 했습니다. 이 정도면 박수칠만하지 않습니까?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공짜도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문제 4번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거죠. 자 우리 한번 같이 힘 있게 읽어볼까요.
Q4. 존 오웬은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관련하여 그 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지 회개와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존 오웬은 17세기에 걸출한 청교도였습니다. 제가 사실은 1988년도 3월에 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고 나서 청교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청교도 책을 아주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게 모은 책이 3천 권 넘어서 4천 권까지 됩니다. 그러다가 10년까지는 안 되고 한 4년 정도 있다가 청교도 책이 대부분 다 그저 그렇다고 너무 좋기는 하지만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제가 존 오웬이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여기 존 오웬의 얼굴이 나오면 좋을 텐데. 존 오웬이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청교도 크롬웰의 혁명 시대 때에 군목을 지냈고, 총장 없는 옥스퍼드에 총장을 지내신 분이고 대학자입니다. 교회 개척하고 1년쯤 되어서 제가 많이 지쳐있을 때 이분의 글을 원서로 읽으면서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탐독하면서 여러분들이 깊이 있는 설교를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오웬을 읽고 나서 모든 청교도가 시시해졌습니다. 저기 오웬의 사진이 나옵니다. 저분이 오웬 목사님입니다. 오웬의 글을 읽으면 오엔의 글은 대학생의 논문이고, 청교도들 중 대부분의 쓴 책들은 초중고생의 수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중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이라든지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라든지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라든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라든지 걸출한 청교도들은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웬과 함께 살아오게 되었고 제가 한참 빠져 있을 때는 ‘존 오웬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고 나는 부목사다’라고 생각하면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어쨌든 그분이 성화에 관한 책에서 이런 인상 깊은 말을 남깁니다.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이 글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 당시 읽었을 때 옆에 메모를 해두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더 강렬하죠. 우리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렸는데 하나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과연 인간이 행복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일을 너무 자주하면서 자신이 행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상황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참 좋지 않잖아요. 결국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을 가장 쉽게 사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을 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연애하실 때에 새로운 세계에 사는 것 같은 극락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같은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식어지게 되고, 나쁘게 말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버리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혹은 행동으로 아주 크게 혹은 작게. 그것은 모두 다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을 때 다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주십니다. 그게 뭐냐면 결국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죄를 이렇게 그렸습니다. 한자에서 진짜로 이렇게 유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뭐 같습니까? 벌레 같죠. 이게 제대로 쓰면 이렇게 됩니다. 죄죠. 죄. 이 죄는 분명히 크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큰 죄 그다음에 심지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본질로 들어가 본다면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익한 성찰을 줍니다.
이런 비유를 사실은 너무 생생하고 유쾌하지 않아서 이런 비유 좀 들지 말라고 우리 집사람이 몇 번씩 충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똥이라는 것이 더럽다는 것 자체가 편견입니다. 똥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들어가서 발효되고 남아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불결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독특한 냄새와 자기 몸에서 나왔다는 형체가 불쾌합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예쁘게 깎아놓은 과일, 아름답게 장식된 음식, 예쁘게 생긴 고기, 이런 것을 먹었는데 만약에 속에 변으로 나올 때 똑같은 모양으로 나온다면 다시 먹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 해 전에 서울대공원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똥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캐치프레이즈가 뭐였냐면 “똥이 더럽다는 너의 생각에 똥침을 박아주마” 하고 전 세계에서 모아 온 똥들을 진열해서 똥 전시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보진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똥들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싸 놓은 똥을 보면 너무 더럽게 보입니다. 옛날에는 한 달에 한 번이고 수세식 변소에서 쏟아 내린 똥들을 잔뜩 채워서 차가 와서 싣고 가는데, 항상 그 차는 새벽에 옵니다. 사람들이 방해가 될까봐 새벽에 오는데 항상 노래와 함께 옵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와 함께 따라라라라라, 베토벤이 그걸 보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엘리제입니까? 똥 눈 사람입니까? 아니면 똥 받을 사람입니까? 그걸 울리면서 옵니다. 잔뜩 싣고 지나가면 옆에 게이지가 유리로 되어있어서 출렁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제하고 정제하고 여러 번 정제해서 노란 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예쁜 유리병에 넣어서 빨간 카펫이 깔린 궁전처럼 아름다운 집 거실에서 공중을 향해 분사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럽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모두 정제된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옷에 묻으면 똥 냄새가 납니다. 크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잊혀지지 않은 일화가 있습니다. 온 집안사람들이 독감으로 큰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고 있었던 손녀딸이 먼저 걸렸습니다. 그땐 얼마 안 되어서 불과 2-3살 너무 예뻐서 끌어안고 물고 빨던 시절인데 나는 걔가 너무 예쁘니까 얘가 나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냥 볼을 가까이 볼을 부비고 했는데 제가 제일 먼저 걸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동안을 아주 고생하고 병원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때 면역력도 없을 때였습니다. 깨달은 사실이 무엇이냐면, 매개체의 아름다움은 매개되는 사물을 바꾸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죄가 다가와도, 그 아름다운 것을 통과하고 그것을 이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착각을 일으켜서 우리는 죄를 가볍게 보거나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아주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면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참사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순서가 어떻게 되나면 제일 먼저 죄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고 나면은 볼 수 있는 것 좋아할 수 있는 것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것들이 방해를 받습니다. 작용을 제대로 안 합니다. 죄인데 죄인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돋보기 같은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각성이 일어나고 죄 때문에 있었던 흐릿한 우리의 영혼의 정신 능력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정신은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는 거룩한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죄를 왜 짓게 되었나요? 결국 죄를 좋아해서 짓게 되었습니다. 죄는 눈물의 씨앗입니다. 사랑하면 죄를 선택하게 되고, 죄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안 그러지만 이게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할 때 결국은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죄가 나에게 주었던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죄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의 공의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예민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는 죄에 대해서 흐릿하던 마음이 아주 또렷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깊이는 회개의 깊이와 동일한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드리면 결국은 죄를 인식하게 되고 이것이 지성에 관여한다면 그다음에 죄를 슬퍼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서와 관련이 되고 마지막에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의지와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성, 정신, 의지 이 모든 작용이 영혼의 작용이고, 그다음에 그 영혼의 기능인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작용들입니다. 당연히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에 의해서 마음은 참 인간으로서 온전한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영혼이 그렇지 못하면 마음은 불결하게 되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고, 올바로 의지, 결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 속에는 질서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란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자주 하는 말이 ‘아, 모르겠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뒤죽박죽이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우리 인생 전체를 평화롭게 하는 질서가 있는데 자기 사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 5번 문제를 넘어가면서 S.H. CHOI라는 분이 존 오웬, 아우구스티누스, 우리 담임 목사님 덕분에 알게 된 귀한 분들입니다. 왜 이 두 분만 있겠습니까? 조나단 에즈워드가 섭섭해할 것입니다. 그렇죠? 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저의 아이가 똥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초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Backstage Lee님이 쓰셨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인데 목사님 말씀은 일반적인 코스를 걸어오신 것이 아니라, 더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은혜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말씀에 깊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시간 질문) 좋은 질문이 나왔는데 답변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죄를 인식하고 나면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기력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말씀과 기도를 드리라고 하는데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죄를 인식하고 죄책감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율법을 통해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지 말라, 하라, 혹은 하면 죽는다,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단서 조항까지 붙은 말을 통해서 자기가 죄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를 바로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 양심에 작용함으로써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두 군데에 새기셨는데,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새기셨고 또 하나는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이미 양심에 새겨진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행위에 선함과 악함을 깨닫게 되고 가책도 느끼고 보람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후천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큰 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모두 너그러울 때 이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의 기능은 현저하게 저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에 대해서 아주 관대한 나라에서는 성적인 죄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약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오늘날과 같이 주위에 거의 모든 업자가 마스크가 부정한 방법으로 대량 유통하여 폭리를 취한다면, 평소에 선하던 사람도 ‘남들도 다 하던데! 뭐’ 하고 평소의 양심보다 더 약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습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성경만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를 듣거나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는 말씀으로도 양심이 거듭나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죄를 지었는데 내가 그 죄를 싫어하게 되었으면 그래도 다행인데,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괴로운데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적인 교훈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추운 겨울에 들판에서 모닥불을 피울 때는 우리에게 필요한 불이 활활 타올라서 국도 끓이고 멧돼지도 토막 내어서 구울 수 있을 정도의 불을 원합니다. 그러나 당장 그런 불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뭇잎과 잔가지를 가져와서 성냥으로 불을 붙인 후에 큰 나무들을 점점 올려놓아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게끔 만들어 놓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작은 불부터 시작하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줄 수 있는 교훈은 먼저 생활을 정돈하십시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을 시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읽기 힘드시면 읽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이 잘 안 되면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가장 좋은 것이 경건 서적을 읽는 것입니다. 너무 논쟁적이고 어려운 것 말고 아주 편안하게 읽으면서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경건 서적을 읽으십시오. 혹은 위인들의 전기, 자기와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건전한 간증 같은 것, 괜찮습니다. 어떻든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는 책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정돈되고 따뜻해지면서 혼란스러운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어떤 깨달음이 오면 짧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점점 더 기도가 길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읽고 싶은 성경을 읽으십시오. 시편이 좋으면 시편을, 복음서가 좋으면 복음서를, 그 대신 하루에 한 장, 혹은 석 장씩이라도 꾸준하게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전해주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받으려고 노력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랍게 빨리 헤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운동도 하시고 기도 생활도 규칙적으로 하시고 공적 예배에 꼭 나오시면 몇십 년 되었던 침체가 아주 놀랍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홈피에 들어오시면 영적인 침체에 대한 말씀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활을 하신다면 아마 훨씬 더 회복이 빠르리라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문자가 들어옵니다. 그때는 제가 개혁신학을 몰라서 못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은 교회 때문에 찾고 찾다가 신천지를 만났습니다. 울음 표, 눈물 표시를 하셨는데요, 지금이라도 돌아오셨으니까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책이 있는데 닥터 홀의 ‘조선해상’, ‘인도해상’ 이런 선교적인 책이었어요. 네. 너무 좋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 강의해 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답변은 못 드리겠지만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다음 회개에 관해서 자스민 K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Q5. 오래 섬길수록 마음이 강퍅해지고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이기적이게 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1-142)
오래 섬겼다는 사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 충성스럽게 섬겼던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오래 믿은 것이 죄는 아닙니다. 방금 믿은 사람은 따끈따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한 교인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너무 은혜를 받고 가족들을 전도했습니다. 가족들이 교회에 오자마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가족들이 열렬하게 신앙생활 하는데 자기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교회로 전도했던 사람이 변질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믿은 것이 그냥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섬김-강퍅해짐,’ ‘오래 믿음-이기적임,’ 이 사이에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명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자, 교회 생활을 모여서 합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을 하는 동기가 그냥 외롭고 힘드니까 인간관계를 믿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인간관계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큰 복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종교적인 허영심, 즉 예수를 얼마 믿지 않고 잘못 신앙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저는 실제로 들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데 굳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이 헌금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 이번에 1억 헌금하기로 남편하고 합의를 봤다고, 그 이야기를 거기에서 왜 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허영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헌금이 아직도 안 들어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올바르지 않은 동기입니다. 올바른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해서 가르치고 그 말씀을 나누고 말씀대로 사는지를 돌보고 서로를 격려하고 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일만이 아니라 마틴 부처가라고 하는 종교개혁자가 이야기했듯이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할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동기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Q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른지 말해 봅시다.(146-149, 148-151)
개척교회 할 때 늘 교인들이 불평하던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너무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가져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이 교회의 결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꼭 그렇게 하라고 강조해서 가르친 것이 아닌데,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는 사람들과 말하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흩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그러면 안 된다, 온갖 사람들하고 인사해라’ 그렇게 가르치긴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런 불평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미 마음속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평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면 사람을 향한 사랑도 온전할 것이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온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또 사람을 사랑합니다. 당연히 이렇게 사랑하는 이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사람도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당연히 이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제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당연히 사랑하니까 일생을 걸고 아내로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는 물론 사랑도 순수한 사랑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랑이 때로는 지나쳐서 우리의 판단 기준을 흐립니다. 흐리지 않으면 사랑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적절하게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점이 점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점이 생기면 당연히 그것은 추한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랑보다는 미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어떤 사람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될 때 남편과 아내의 결점을 보더라도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만나서 이 사람을 온전케 하려고 사랑하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의 사랑은 완전해질 수 없고 영원할 수 없고 사랑하는 그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한 인격 안에 두 대상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사랑은 다른 하나의 사랑에 종속되기 마련입니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여기 보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에 저 두 사람의 사랑이 서로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반드시 충돌을 일으킵니다. 결국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될 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리가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사랑에 지배되지 않을 때에는 이 사람이 이 사람을 사랑할 때 사실 이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만족 때문에 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만족이 돌아오지 못할 때 사랑도 함께 식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서 인간에게로 끝나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성경은 이것으로써는 인간이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비교했지만, 마태복음 6장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재물을 사랑하는 것, 두 개를 대비시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종이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를 더 사랑하거나 저를 더 사랑하기 마련이다고 말합니다.
Q7. 차갑고 냉담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칙과 과정은 무엇입니까? (152-155, 154-155)
원칙과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표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차갑고 냉담한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나타나는 인격적인 표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목마름’입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목마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회개도 나오게 되고 정신적인 각성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회개는 의지적인 돌이킴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행하던 악한 길에서 선한 길로 돌아서게 되고, 그다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선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징표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가르침, 산상수훈의 엄청난 가르침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고 모세의 율법까지 집약시킨 가르침이 산상수훈인데 그 수훈의 시작을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로 가난하다는 말이 ‘푸토코스’입니다. 복수로 나오는데 ‘마카리호이 호이 푸토코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의미에서 복이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의 조건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한다면 가난하다면 교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남의 도움을 향해 마음을 열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도움이라도 받았을 때 너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의 특징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여기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고 똑같은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우리가 소화하기 어려운 감정이 따라오게 되는데 그것은 소외감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소외되었다는 감정입니다. 사람이 당장 나를 소외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게 되면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하나님 없이 극단적으로 느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입니다. 자유롭기는 한데 자신이 모든 자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을 사르트르는 어깨 위에 세계를 짊어진 무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은 뭔가 규정이 있어야지만 책임의 여부를 지는데 사람이 어디로부터 온 근거도 없고 어디로 가야된다는 목표도 없고 그냥 던져지듯이 태어난 인간인데 어떻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도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이야기해 줬습니다. 한 사람이 TV에서 강의하는데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면 들어보십시오. ‘차이나는 클래스’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독일 교육과 한국 교육을 비교하면서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독일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독일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육을 마친 사람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 세 가지 주제를 한국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내가 누구인가?’, 두 번째는 ‘세계가 무엇인가?’, 세 번째는 ‘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교육에서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으니까 뒤로 빼놓았지만 풀면 결국은 제가 설교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 질문은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무엇인가? 세계 안에는 인간관계도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마지막 내린 결론은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문제 속에 성에 관한 문제도 아주 중요한 주제로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교육이 안 되어있기 때문에 지식의 몰 지혜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았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에 대한 근거가 탄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명예를 얻게 되면 그 명예를 감당하지 못해서 몰락하고, 권력을 얻게 되면 그 권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파멸되는 일들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했던 미국의 가수 중 한 사람이 휘트니 휴스턴입니다. 그 사람이 불렀던 명곡이 보디가드의 주제곡이었는데 불행하게 자살로 인생을 끝냅니다. 그것을 보면 결국은 어마어마한 부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지만 결국 이런 질문에 확실한 토대의 대답을 갖지 못할 때 그 사람을 존재하는 자체가 어려워지도록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요인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정신과적인 치료 또는 상담이나 약물 복용이나 이런 도움뿐 아니라, 신앙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마음이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향하고 있었던 많은 사랑에 싫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싫증을 느끼게 되면서 싫증은 혐오로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그래프가 있는데 여기가 아름다움이고 여기가 추함이라면 이 중간에 있는 것이 싫증입니다. 아름다움에서 이동하면서 싫증을 지나게 되면 혐오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혐오에서 싫증을 느끼다가 아름다움으로 옮겨가게 되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폭에서 인간의 감정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이쪽에서 움직이고, 세상을 보고 세상이 얼마나 예쁘고 좋은 것인지 생각하고 감동 받는 사람은 이쪽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결국은 이것이 우리 영혼의 곤고함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느 한순간에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타락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똑같이 이렇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죄를 짓는 마음이 하나님 얼굴에 침을 뱉는 마음이라면 회개하는 마음은 자기를 사랑하던 마음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시간 질문1) 목사님 설교 중 산상수훈 강의나 설교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두 개가 있는데 나중에 한 것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몇 년도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모바일 홈피에 들어오셔서 설교 검색창에 산상수훈을 치면 죽 나와 있습니다. 팔복에 대한 강해를 꽤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013년 10월 27일 팔복의 사람이라는 설교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랬군요. 휘트니 휴스턴은 남편을 잘못 만나 마약을 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는데...그런데 남편을 잘 못 만났어도 주님을 만났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이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독실한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친오빠들이 마약을 선물로 주었데요. 그러니까 누구를 만나느냐도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휘트니 휴스턴이 그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가 신자였다는 사실을 기각시키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많은 복잡한 정신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이나 이런 것들로 그런 불행한 길을 걸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애도하는 바입니다. 팔복의 사람 설교가 스물두 개라고 합니다.
(실시간 질문2) ‘나는 신학 공부 이렇게 해왔다’ 볼륨 투가 언제 나오나요?
이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초고는 완성이 되었는데 그 초고를 정리해서 내야 하는데 제가 마음속에 빨리 해야겠다라는 마음은 있는데 계속 건강이 안 좋은 바람에 미뤄졌습니다. 재촉하시는 분보다 제가 제 마음이 더 급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시간 질문3)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라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니까 아버지도 이사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정신을 여기저기로 찢어놓는 생활을 먼저 정돈을 하십시오. 쉽게 말하면 직장을 나가게 되면 일어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고 가능하면 빨리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셔서 혼자 계십시오. 음악을 좋아하면 조용히 음악을 듣고 경건 서적 중에서 쉬운 것을 읽기 시작하고, 신앙적으로 격려가 될 수 있는 영화를 보는 것도 좋고 아니면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할 수 있는 신앙이 깊고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과 교제를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전기를 읽고 마음이 따뜻해지면 따뜻해진 만큼 순간순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염려되는 일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잘라버리십시오. 1년, 2년, 10년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너무 힘이 없으면 오늘 하루만 살자 그것도 안 되면 한 시간만 생각하자, 그것도 어려우면 5분만 생각하자, 하고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기도하시면 됩니다.
(실시간 질문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선 여기에서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네 몸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나는 나의 몸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거의 본성적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됩니다. 춥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따뜻한 곳에 있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가 나를 모욕합니다. 그러면 그 환경에서 계속 있고 싶지 않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프면 여러 사람과 의논하면서 내가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가서 먹습니다. 그것도 가장 먹고 싶은 것, 능력이 없으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먹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돌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말을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 자신의 제 2의 본성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본성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불행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하라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실시간 질문5)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저의 신앙생활의 동기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된다는 의무감 때문에 살 때가 많은데 이것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태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열등감 같은 것이 뭐냐 하면 극적인 회심의 동기, 탕자의 비유와 같은 극적인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타락을 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다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는 가 봐야 압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것은 타락의 깊이가 아니라 은혜의 깊이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오면서 의무감으로 많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분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의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회개의 제목들이 나오는지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때 진심으로 회개하게 될 것이고 많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나의) 타락이 그 타락보다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한 더 놀라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분에게 추천한다면 지금 우리가 공과 공부하고 있는 아가서 책을 면밀하게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또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영적 회복의 길’ 같은 시리즈들을 찾아서 차분하게 들으신다면 생각이 많이 바뀌고 또 갈 길을 찾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