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녹취자: 이 솔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벌써 2월이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져서 참 감사한 일인데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매일 기도 합니다. 방심하지 마시고 여러분 건강에 꼭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아사밤 공과공부를 시작하고 많은 분들이 와서 좋아하고 접속하는 것을 보니까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시고 또 우리 성경 공부를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형태의 구역 공부를 이제 2주째 맞이하는데 소감이 어떤지 여러분 댓글창에 올려주시면 저희가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아사밤 제2과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겠죠. 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어떻게 나를 사용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답이 나올 것이니까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들어가볼까요?
1번입니다.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그런 생각을 되었습니까? 우리 먼저 우리 성도들의 지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고 우리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체1] 저는 주일 학교에서 자살은 절대 안 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서른 살까지 살 자신이 없었죠. 어릴 적 부모님께서 많이 불화하셨는데 저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떻게 살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그냥 잘 사는 것 같았는데 저는 그 생각만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끝이 없는 것 같았고 죽지 않으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지체2] 자살 생각 아주 많이 자주 했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나와 관계 맺는 많은 것이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좋아했으면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넘기까지 내가 아닌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려고 했고 그들의 비율을 맞추고자 부단히 애썼습니다. 배알이 꼴리고 자존심은 이미 시궁창에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있다 여기며 생각 없는 동물처럼 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 그런 삶이 사랑이 아니라 매순간 경멸과 탐욕으로 일그러져 돈과 사랑의 노예가 되어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20대가 되어 돈을 벌면 30대가 되어 배우자를 얻으면 40대가 되어 자녀를 얻으면 달라질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죽고 싶은 마음만 더해 갔고 어떻게 하면 죽을까 고민만 구체화될 뿐이었습니다.
[지체3] 매일 다툼과 불화가 내가 태어난 가정의 모습이었고 그 속에서 자랐기에 그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속하는 1차적 환경인 가정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2차적인 사회로 나가기도 두려웠습니다. 그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스스로 벽을 치고 문을 닫고 돌아섰습니다. 가정과 학교 그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찾을 수 없던 나는 아침에 눈 뜨면 오늘도 살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고 이 침대가 날 집어삼켰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마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전혀 안 해본 사람도 있겠지만요. 자 그럼 이제 우리 한번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살이 뭐냐? 국어사전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고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WHO 세계 보건 기구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어요. 스스로 품은 의지를 통해 자기 생명을 해해서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자멸 행위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영어로 쑤사이드(suicide)라 그러죠. 수어할때 수위는 라틴어로 자신이라는 말이고 사이드는 죽인다는 말인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죠. 사람만 자살을 하는 줄 알았는데 자살하는 동물이 또 있습니다. 돌고래입니다. 대개 지능이 높은 동물에서 이런게 나타나는데 다른 종류도 있다고 하는데 일단 제가 조사한 바로는 돌고래가 가장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거나 너무 괴로우면 그냥 스스로 부딪히거나 이렇게 해서 목숨을 끊어 버린다고 합니다. 참 신기하죠. 그런거 보면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상태도 단순하지 않은 것 같아요.
리처드 도킨스 이번에도 그 옥스퍼드 대학에 명예 교수인데 현대에 무신론 유물론의 대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이제 이걸 자살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이기적인 유전자가 개체를 도태시키기 위한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종족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 자기 객체를 죽임으로써 종족 전체의 객체를 보존하는 그런 기능이 말하자면 자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마 긴 시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오늘 우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빈다. 그럼 이제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하지요?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이 자살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칼빈 같은 경우는 이 자살을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매우 심각한 불순종으로 보았습니다. 주권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현실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살 때 자기에게 일어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일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로 바뀔 수 있다. 그런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자로 생활할 때에는 당연히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법도 제정하고 해서 제네바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산을 몰수한다든지 이렇게 법을 만들어서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이 자살의 문제가 언제나 가장 급격하게 대두가 되는 것은 산업 혁명 이후입니다. 급속하게 도시화가 이루어 지고 산업 혁명이 이루어 지면서 예전과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잡한 사회가 되고 인간의 고립 현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면서 예전에는 시골에 모여서 살며는 어디가든지다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심지어 할아버지, 대부 그 다음에 조카 뭐 형제들 다 이렇게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도시에 오면서 소위 문명화가 이루어 지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여기서 고독의 문제라는 것이 아주 외로움에 문제 고독의 문제라는 것인데 심각하게 등장이 됩니다. 그 다음에 옆에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그래서 오늘날 고독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고독사 라는 명칭은 잘못됐고요 고립사입니다. 고립사. 고립된 채로 사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뭐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그런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인간의 심리가 훨씬 예전에 시대에 비해서 복잡해지고 하면서 정신적인 질병들도 많이 나오게 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일 궁금한 건 구원의 문제가 자살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런 것입니다. 확실히 해야 될 건 뭐냐면 자살은 참 큰 죄다. 그건 틀림없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체적으로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을 간다. 이런 것들이 표준적인 기독교의 교리는 아닙니다. 이제 현대 같은 경우 현대에는 정신병도 많이 생기고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평범하고 맑은 상태에서 자살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우울증이라는 터널을 지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겪기 때문에 자살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국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죄를 지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막 성화시켜서 하늘 나라에 데려가시기 때문에 자살이 하나님 앞에 큰 불순종이고 죄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자살이 그 행위가 우리를 구원을 취소시킨다든지 자살한 것 하나만 가지고 그게 구원 못 받은 증거라든지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참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지난 주에 한혜성 원장님에 정신과 전문의의 이야기도 들었지만 환자들이 자살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자기도 자살하는 게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엄청 무서운데 사실은 인간이 절망에 이르게 되면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훨씬 더 무서워요. 이렇게 덜 무서운 쪽으로 택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주위에 이런 자살의 징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아끼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다 나눠준다든지 다음에 그 갑자기 사람이 태도가 변하면서 죽음에 대해 친근한 말을 자주 한다든지 이렇게 될 때 그때 매우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도와야 됩니다.
그럼 우리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자살하고 싶은 그런 감정 그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할 순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있는 상태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 좋은 가정에 태어나서 좋은 부모 만나고 훌륭한 남편 아내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펼쳐줘도 그것을 능히 견뎌 나가고 인생의 무게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다음 문장에 대해 자신의 느낌을 나누어 봅시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 들었더니 경험이 살아났다. TS 엘리엇이라고 하는 시인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 따로 하기로 하고 일단 이제 이 질문에 대해서 지체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한번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체1] 그냥 산 지난 시간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삶의 의미를 깨닫자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없구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 성장통 같은 시간이었다라고 느꼈습니다.
[지체2] 논리적이고 외적인 경험을 했지만 영적이고 내적인 인생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파고들다 보니 물리적이고 외적인 경험들이 유의미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세상에 논리적이고 의미 있는 것들을 경험하면 할수록 목마름과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만 가는 것 같습니다. 생존, 성공, 명예, 돈 등 살아가면서 경험을 할 수밖에 없고 살아내야하는 힘겨운 것들이지만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의미를 알 때 무의미했던 세상의 경험들이 유의미하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체3] 경험이라는 것은 내가 겪은 일과 그 기억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서 겉으로 보여주는 사실은 아니더라도 그 내면에 있는 진실과 의미는 경험만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경험을 통해 어떤 일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본질을 찾아가다 보면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이전에 경험들도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되거나 새롭게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해됩니다.
토마스 시청스 엘리엇이에요. 미국 태생에 영국 시인이 미국 사람입니다. 194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황무지, 사중주 네 편, 재의 수요일 등등에 유명해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 사람하면 잊혀지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사월이 무슨 달이죠? 4월을 무슨 달이라고 불러요? 잔인한 4월이라고 부르잖아요. 그 표현이 이제 이 토마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음 다시 여기 보면 이제 사중주 네 편은 아주 굉장히 높이 평가를 받아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에 비유할 정도까지 높이 평가합니다. 여러분 혹시 뮤지컬 캣츠 봤습니까? 저 사람 작품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할머니 쥐가 들려주는 고양이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도 캣츠는 계속 공연이 되고 있지요. 조금 이제 변형했지만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어떤 의미가 있었거든 어떤 걸 경험했거든요. 어떤 걸 경험했는데 경험하면 항상 우리 뇌 속에 그 경험이 기억이 되죠. 그래서 아이들이 뜨거운 물에 디고 나면 그 다음에 뜨거운 물인지 찬물인지를 궁금해하고 주의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것은 경험했는데 경험은 분명히 했는데 의미를 잊어버려요. 망각해버립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죠. 경험이라는 것도 우리에게 항상 계속 머무르는 경험은 아주 일부입니다. 그리고 어느 학자는 그랬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신에게 감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잊어버렸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정말 죽을 것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에게 너무 너무 행복했던 경험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있는 것은 참 좋은 거겠지만 압도적으로 그런 경험보다는 압도적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경험들이 많습니다. 그게 만약에 모두 쌓여있어서 계속 그 경험이 늘어난다면 사람이 미치고 돌지 않겠어요? 그래서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거 보통 인간이 괴로우면 다행히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인생이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들은 잊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간직하고 살아야지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 이것도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에 이제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경험했으나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 다음에 방법이 뭐냐면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미를 탐구한다는 여기에 있어서는 이게 감정보다는 이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감정적으로 경험하고 이성에 의해서 그 의미가 파악됩니다. 이렇게 있었던 거죠. 그런데 결국 경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것도 잊어버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지식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다시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테두리는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는것을 찾아서 탐구하기 시작할 때 그때에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경험이 다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박지성 선수가 한때 국민들에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유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참 특이한 게 그 선수의 선수가 얼마나 축구를 좋아했는지를 이야기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쓴 일기장에 그 친구들하고 축구를 하고 와서 돌아와서는 친구들을 다 그림으로 그리고 공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다 일기장을 표시하면서 거기다가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했고 두번째 결과는 어땠고 그래서 반성을 적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렇게 그걸 수년 동안 계속 어렸을 때 계속 누가 시킨다고 쓰겠어요. 그걸 다 써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의미를 철저하게 따지고 드는 거죠. 그러면 망각이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걸 다 그렇게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기분 나쁜 일 좀 일어났다. 쉽게 잊어버려야지요. 그래 뭐. 이 세상에 별별 사람 다 있으니까 뭔 사람은 없겠느냐 그리고 꼬치꼬치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 정도로 가지고 내가 흔들리지는 않지. 그리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들은 찾아내야 됩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보겠습니다. 다시 그림을 보십시오. 성경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감정의 변화도 있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지성의 변화도 있을 것입니다. 지성의 변화도. 그런데 그것을 지식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경험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박수를 친다든지 아니면 뭐 자기를 열렬하게 어떤 정적인 활동에 자기를 몰아넣든지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조용히 이성을 가지고 자기가 배웠던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탐구합니다. 탐구하면 결국 의미를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탐구하면 지성의 헌신이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제 다시 경험이 살아나게 됩니다. 자 여러분 한번 저를 보세요. 그런 경험 있으시잖아요? 너무 곤고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해야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아니면 설교를 들어요. 그러면 사실은 그게 자기의 현실하고 얼마나 거리가 먼 일입니까? 지금 당장 이런저런 괴로운 일이 구체적으로 있어서 이 원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 괴로움이 안 끝나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책을 읽어요. 설교를 들어요. 그러면 잠시 자신의 삶을 상황을 내려놓고 내가 거기에 지식을 파고드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탐구를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결국은 경험이 다시 되살아나요. 그러면서 그 얘기 속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인생에 답은 없습니다. 어차피 늘 말씀드리지만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게 묘미입니다. 제가 제 원하는 대로 됐으면 여기서 여러분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요. 그리고 정말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신 하나님을 가슴 벅차도록 찬양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차피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내 맘대로 되게 하시면 최대 재앙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뭐냐면 말씀으로 돌아가라. 말씀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해라. 그리고 탐구하려고 해라. 그러면 다시 경험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순간이 온다.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3번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이름 모를 꽃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점을 이야기합시다. 당신은 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됩니까?
우리가 이미 읽었지만 우리 한번 티저 영상으로 다시 한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겠습니다.
인적 없는 산골. 드넓은 들판의 수많은 들꽃들 그림처럼 피어 있다. 초록색 도화지 속 수많은 색깔의 점들. 비취 빛 하늘은 푸른 벌판에 맞닿아 있고 깃털 같은 구름은 동양화 먹물이 남겨둔가 봬이다. 불꽃 내려앉은 들판 그래서 그토록 아름다운 걸까? 이름 모를 꽃들이라고 퉁쳐서 부르는 동안에는 어떤 꽃도 없다. 날 불러줘. 자기 손을 잡아 달란다. 절 안아 달란다. 내가 그 중 하나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 꽃 풀밭에서 뛰어 올라와 내 품에 안긴다. 그 꽃을 끌어 하는 건 나의 좋아함이고 그 품에 안 긴 건 그 꽃의 기억이다. 그래서 그 꽃이 시들어 사라져도 그의 이름을 들을 때 내 마음 속에서는 살아 있는 꽃이 된다. 나 어렸을 때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러하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가장 높으신 그 분이 말씀하신다. 지난 이름으로 너를 안 단다. 큰 감격과 희열로 가슴이 뛴다. 날 이름으로 불러줄 때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랑을 받음으로 내 인생은 의미 있게 됐다.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높으신 그 분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난 그저 일류였다. 헬겔에게는 세계의 일부였고 세계는 절대자의 자기 전개란다. 유물론자에게는 물질이었고 내 정신과 의식은 그것에 반영이란다. 그럼 난 어디 있었나? 사람으로 태어난 게 사랑을 받은 게 감격스럽다. 밤 하늘을 바라본다. 숲속을 지는 호숫가를 걷는다. 하늘 끝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면 한없이 걷고 싶다. 나를 있는 나로 사랑해준 유일하신 그 분께 다다를 때 까지 내가 떠난 지구가 깜빡이는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밤바람이 풀잎을 스치듯 호수에는 달그림자 길다.
어떻게 잘 보셨나요? 연구실에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잘 보셨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는 저 부분을 쓸때 원고를 쓸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러니까 뭐냐면 결국 제가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결국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무슨 쓸모있게 되고 싶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내가 누가 와서 칭찬해 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면 뭐 벌떡 살아 나서 삶의 이유를 발견할 것 같은 그렇지는 않았어요. 전 세계가 나에게 꽃다발을 던져 줘도 그럴 정도 용기가 날 것 같진 않았습니다. 모르죠.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참 많이 울었어요. 결국 뭐냐면 나는 이제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흙이 있겠습니까? 거기 한 줌 모래에 지나지 않는데 하나님 나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한번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면서 어떤 느낌이 많이 드셨는지 우리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체1] 언제 새벽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넓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는 진정 우리밖에 없나요? 그때 스쳤던 생각은 니가 그런 존재란다 였습니다.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신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와 하나님이 보시는 가치는 같지 않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이 넓은 우주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김을 받는 존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가치가 규정되어지는 존재 그것이 저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지체2] 사실 저에 존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를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말한 적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으며 나 자신이 소중하다고 저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반문하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의 연약함과 제 모습까지도 스스로 잘 알기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득 로마서 5장 8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되뇌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저는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지체3] 산맥의 꽃들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면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준다면 불러주면 그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에 이름으로 안다는 것은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의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도 아시고 사랑하시기에 무엇보다 가치있고 소중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자랄 때 사람들이 이렇게 인정해 주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요새 이제 또 이렇게 아사밤처럼 일반 대중들까지 끌어안는 책을 지금 이제 다시 쓰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책에서도 제가 이야기했는데 손가락이 되게 길어요. 그래서 가족들이 그러는 거예요. 왜 가족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손가락이 저렇게 기니 예가 얼마나 게으르겠냐 손바닥에 두께가 얇아요. 저러니 저게 얼마나 의지가 박약하겠느냐 그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거예요. 그게 놀라운 것은 그게 입력이 되더라고요. 나는 게으른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야. 중학교 1학년 때인가 교회에 갔는데 생전 처음이었어요. 그 피아노를 치시는 선생님이 오더니 내 손가락을 보더니 너 진짜 손가락 기가막히다. 쇼팽을 닮았구나. 피아노 전공인데 너 피아노 배우면 진짜 잘 치겠다. 그런데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놀라운 거는 그 분이 가족들이 한건 굉장히 여러번 이었고 이분은 딱 한번 이야기를 했는데 내 손가락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난 이게 게으른 게 아니라 진짜 피아노 치기에 좋은 손가락이야. 그동안 그리고나서 피아노를 배우거나 그럴 여유는 없었어요. 그러나 인제 그런 컴플렉스가 사라진거죠.
그런데 이제 그래서 자랄 때에 이렇게 많은 인정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도 가르쳐주는 게 중요해요. 근데 항상 맹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온갖 험담을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자란 사람들은 컴플렉스가 쌓여서 열등감으로 나타나고 그것 때문에 기가 눌려서 살기도 하지만 또 그런 자기가 느끼는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서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아주 거칠게 대한다든지 이런 게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사람마다 달라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깎아내리는 표현을 많이 해주면 기가 죽거나 반항적인 사람이 되고 칭찬을 많이 해주잖아요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가 있어요. 뭐냐하면 잘못된 우울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우리가 자꾸 칭찬해 주는 교육을 권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칭찬해 주려고 하더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고 깎아내리는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라도 해줘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어쨌든 인간 참 어려운 존재예요. 결국은 그것은 모두 상대적인 거예요. 그리고 사실 엄마가 자기 딸 예쁜이라고 안 그러는 엄마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딸 얘기 너무 재밌어요. 어려서부터 하도 예쁘다 넌 예쁘다 우리 예쁜 딸 그래서 자기가 진짜 예쁜 줄 알았데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등학교 1학년 되어서 깨달았어요. 너무 늦었어요. 엄마 아빠가 예쁘다고 하는 건 다른 의미지 미스코리아를 생각하면서 예쁘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은 자기 자신이 공정하게 보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것을 가장 우리의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공정하게 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해 주시는데 우리의 죄나 악한 것을 좋다고 칭찬해 주신 적 있어요? 절대 없어요. 그리고 정말 섭섭할 정도로 하나님이 이건 버려라. 집요하게 요구하시죠. 그 대신 우리가 예를 들으면 창의형이라서 창의적인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래서 결국은 논리가 좀 떨어지는데 너는 왜 논리성이 없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세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정확하게 보게 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비로써 이제 정말 소중한 존재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죠. 이해되시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마지막 인생의 의미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셔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고 나를 불러주심으로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마지막 4번 문제입니다. 우리가 읽어볼까요. 시작.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각자의 생각을 말해봅시다.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다.
[지체1]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제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은 배가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등대가 빛을 비춰주듯이 우리가 길을 잃 고 목적지를 잃었을 때 다시 그 방향을 잡고 오른 목적지로 도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지체2] 사춘기를 지나는 자녀를 보면 느꼈던 점이 있었는데요. 지금 올바로 살아가지 않으면 불행한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도 고집하며 살아가는 자녀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도 그러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자유롭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와 속박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참되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나 사이에서 과연 어떤게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체3]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 궁금하게 되고 그러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언약 백성임을 알게 되고 나를 위해 행하신 일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사랑하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에야 나는 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여 기쁨에 삶을 살게 되기에 그 명령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뭐 정확하게 답변해 주셨네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사실 우리가 필요해서 창조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는 거고 모자라시는 거고 필요 없는데도 창조하셨다고 하면 쓸데없는 일을 하신 거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은 불완전한 분이 되거든요. 그런데 인제 예술 작품처럼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그 완전성으로부터 창조 세계가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제가 아사밤을 썼잖아요. 요새 많이 사랑 받고 있는데 제가 뭐 아사밤이 없다고 해서 제가 뭐 못 살겠어요. 뭐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착각일지 모르지만 이 책 없으면 큰일 났을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누군가 읽고 변화되었다면 그렇지요. 그런데 결국 저는 저에게 있는 생각과 저에게 주신 은혜가 있어서 작품을 내놓게 된 거지 저걸 안내놓으면 내가 온전한 삶을 못살 것 같아서 내가 저걸 이용하기 위해서 내가 썼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계를 당신의 그 충만한 영광으로 창조하신 거죠.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사랑을 받으셔야 된다면 하나님을 외로운 존재로 보는 거고 사랑을 안 받으셔도 되는데 우리 보고 사랑하라 그랬다고 하면 그러면 당신 자신이 뭔가 쓸모없는 일을 하신 거죠. 이제 그게 아니라 정답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우리에게 질서를 만들어줘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부터 질서가 내려오는거죠.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하죠.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리 하지 않으면 제게 진노하고 커다란 비창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 아주 강렬한 단어들이 쓰였어요. 뭐 이게테스 미저리어스 같은 이런 단어들 아주 굉장히 강렬한 단어예요. 그 다음에 이라스 카리스 이런 단어들 이렇게 아주 강렬한 감정을 가진 언어들을 어거스틴이 동원해서 설명하라고 하려고 했을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행복하기를 얼마나 열렬히 바라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은지 오래 되신 분도 있고 얼마 안되신 분들도 있을텐데 돌아 보시면 결국은 하나님 사랑할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유사적인 사랑이예요.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행복하죠. 그리고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깝지 안고 그것이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지나친 사랑의 감정이 우리에게 속박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그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자연을 선하게 대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댓글을 올려 주시네요.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자살에 대해서는 그게 구원의 확신이 없는 거다 이렇게 그 말하는 사람도 있죠. 있는데 이런 샌더스 정신적으로 완전히 정신이 없어서 예를 들어서 정신 분열증 조현병이라든지 심한 우울증 같은 경우 뭔가 사람이 헛것을 본다든지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회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는데 교리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회심의 의미를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굉장히 좋은 거죠. 좀 더 극적으로 할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기뻤다. 감격했다. 그러나 미끄러졌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갈 길을 알 수 없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탐구했다. 경험이 다시 살아났다. 은혜를 받았다. 이런 거죠.
그 다음에 목사님은 고뇌하는 인간의 마음을 어찌 그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하시는지요. 그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오늘도 이제 가정 얘기를 하셨잖아요. 많이 칭찬해 주셔야 돼요.
더 하고 싶은데 벌써 45분이 지났어요. 조금 40분 안에 꼭 끝내고 싶었는데요 즐거운 명절 지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