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녹취자: 이새봄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봄의 기운이 완연한 때입니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가 5과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공과공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앞의 있다는 것하고 없다는 것하고 의미가 다릅니다. 앞의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게 있는 것, 만져지게 있는 것들이고 그리고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없는 것과 같지 않나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보겠습니다. 1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저자는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물을 참으로 있는 것과 참되지 않게 있는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있는 사물들은 무엇입니까?” 자, 우리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1)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때가 인생에 한번 정도는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살아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였고 저자인 목사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 불변의 존재는 보이는 사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불변하는 사물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선이자 참된 진리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또 하나의 영적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의 주인공인 나폴레옹일지라도 17년 후에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어느 선교사의 죽음은 그렇게 행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물질로서 소멸하는 순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새롭게 발견되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도2)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있는 사물들은 영혼과 하나님입니다. 저자는 영혼을 불멸하는 사물이라 하셨고 영혼만이 진짜 있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자는 가장 높으신 분과 영혼을 만난 후 그 둘 외에는 알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저도 하나님을 만난 후 세상적인 모든 만남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그런 만남을 모두 끊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더 배우고 싶었고 더 사랑하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무한 감사할 뿐입니다.”
네, 오늘 두 분 이야기만 들어보았습니다. 이제 사물을 보면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사물이 있는데 ‘무시무종’의 사물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종류의 사물입니다. 여기에는 해당되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니까 시작이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죠. 시작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이 있는 사물들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누는데 ‘유시유종’, 시작도 있고 끝이 있는 사물, 대부분의 사물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어떤가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육체도 없었잖아요? 신기하지 않아요? 없었는데 부모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없었는데 어떻게 생겨날까요? 그죠? 신기하죠? 그렇게 따지면 인간의 육체만 신기한 게 아니라 동물들도 없었는데 태어나는 거잖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사물들은 시작도 있고 시간이 흘러가면 늙고 소멸하거나 죽습니다.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집 앞에 들어가는데 항상 매일 보는데 바윗덩어리가 하나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랍니다. 얼마나 됐을까요? 아마 한 오천년 정도 세월이 흘렀을 거라고 봅니다. 여기 사람들이 굉장히 저기 어딥니까? 암사동에 가면 선사시대 유적지도 나오고 그러잖습니까? 이게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게 오천년 되었다고 그러는데 오천년 전에 내가 보질 못했으니까 모르지만 아직도 멀쩡합니다. 바위가. 엄청 큽니다. 이게 막, 내 생각에는 억만년이 지나도 거기 그냥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손만 대지 않으면. 그러면 한 오십년이나 백년 살다가 죽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영구한 사물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결국 끝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물들을 유시유종한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제 ‘유시무종’한 사물이 있습니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는 사물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신학자들은 천사들도 그 존재가 사라지는 때가 온다고 봅니다. 임무가 끝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이외에는 영원히 남는 사물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인간은 영혼이, 유시무종한 영혼이 유시유종한 육체와 만나서 살다가 헤어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이제 마지막 날에 부활될 때 그때 우리가 다시 육체와 만나지만 육체는 이제 지금 우리가 있는 이런 종류의 육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어요? 병들고 늙고 죽는 그런 육체가 아닌 새로운 종류의 육체겠죠.
자, 그러면 이정도로 하고 2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불신자 시절에 당신은 영혼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 우리 지체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봅시다.
(성도3) “인간 존재는 우주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세한 크기의 작은 우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고 사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이 바로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연단하고 수양하는 정도에 따라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도4) “저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할 때에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 때문이었는지 막연하게 영혼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게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가거나 다시 환생하거나 귀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많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어서 빨리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성도5) “불신자 시절 영혼존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이 세상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위해 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 당시 자꾸 세상의 그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 같아서 과연 이게 올바른 가치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죠. 물론 신앙을 가지면서 영혼 존재에 대한 가치도 알았고 삶의 방향성도 찾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 오늘 그 불신자 시절에, 불신자 시절을 돌아보면서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냐고 그러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이 세분 다 불신자 시절인데도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또렷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나마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보니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결국은 어떤 이야기냐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그 많은 문제들은 사실은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사는 내내, 그 시편에서도 나오잖습니까? 사는 내내 나쁜 짓만 하면서 살던 사람이 아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로 끔찍한 죄의식을 느끼고 가책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으로써 세상이 끝난다고 하면 너무 불공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칸트 같은 사람은 이러한 현실이 말하자면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현실에서 이런 도덕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애써 안 믿으려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사후에 영혼의 존재가 있고 인간은 육체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영혼은 인간 죽음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또 지금 선하고 바르게 살면 죽음 이후의 영혼의 행복과 불행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하는 말로 ‘죽어서도 벌 받는다’, 죽어서 어떻게 벌을 받습니까? 죽었는데. 그런데 ‘죽은 이후에도 결국은 영원히 고통 받는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보이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말을 하고 두개가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이 이 세상은 아주 선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악하고 뭔가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라는 그런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뿐만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신은 무슨 신이 있냐, 죽으면 그만이지 영혼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불의하게 떵떵거리게 살기보다는 의롭고 올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동의를 합니다. 그 동의하게 하는 힘이 뭡니까?
그래서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 턴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습니까? “도덕의 명제는 종교로부터 온다.” 그러니까 인간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남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거나 싸우는 것은 참 나쁜 것이다, 그런 결론에 경험을 통해서 도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먼저 알고 있다는,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그런 지식이 강화될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영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그러면 이제 결국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이 삶이 영원한 미래와 나의 죽음 이후의 세계와도 관계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어떤 도덕적인 결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초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시무종한 존재로서,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존재로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간은 아주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도 하고 3번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3번 문제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설명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자, 고려대 국어대사전, 굉장히 좋은 사전입니다. 그런데 세권으로 되어 있는 사전인데 거기에 4440페이지에, 세 권이 쪽수가 안 끊어지고 다 이어져서 4440페이지까지 가는데, ‘영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육체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 몸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이게 영혼에 대한 고유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제 좀 다른 의미에서 두 가지 정도 더 사용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저희 애니미즘이라고 하는 ‘물활론’, 모든 사물에는 혼이, 영혼이 깃들여있다 이렇게 보는데, 그럴 때에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생물, 무생물까지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 사물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이렇게 보고. 그 다음에 죽은 자의 넋, 망령, 망혼이라고도 부르는데 죽은 자의 영혼을 특별히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죽은 자의 넋을 영혼이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자, 그림을 보면 결국은 육체가 흙으로 창조됩니다. 그리고 영혼이 만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당연히 영혼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어느 부위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육체는 죽고 그 다음에 영혼은 육체와 분리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죽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하나님과 끊임없는 관계를 가지며 그러면서 이제 낙원에 머물다가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영혼이 육체 안에 있을 때에 사물을 보고 아는 것과 영혼만으로 사물을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에 대해서는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우리는 단순히 육체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죄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부정확한 상황 속에 있지만 그 때에는 우리가 그런 우리의 결함 없이 완전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높은 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하여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3번 문제 읽어볼까요? 시작. “자신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자, 한 번 우리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도6) “30년 전 쯤, 믿음이 없던 시절 어느 늦은 밤 교회 십자가를 멀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독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신을 믿지 않지만 언젠가는 당신 앞으로 돌아오겠다고. 몇 년 후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아무도 없는 산에서 야영을 하다가 의식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또 다른 내가 나를 흔들어 깨워 텐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텐트 밖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나를 밀어내던 이가 누구일까 내 영혼일까 생각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교회의 문을 열었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경을 읽던 중 마태복음 말씀에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즈음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도7) “사방으로 문제가 생겨 괴로웠던 때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만으로 마음이 평안해지고 제가 처한 상황이 달리 보인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마음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겪으며 그때 제 영혼이 실재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성도8)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오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믿어왔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도 딱히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히 느꼈던 시점은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여름 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고 영혼의 각성을 했을 때였습니다. 내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아마도 이때가 저 자신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시점으로 기억합니다.”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경험은 할 수 있지만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로 설명해서 그 사람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뭐라 그럴까요? 예를 들자면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물이 있고 아주 파란색이고 주위에 나무가 있고” 그렇게 말을 하면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간 그 장소를 보고 말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은 자기가 여태까지 봤던 기억 중에 물, 바닷가 물을 생각하고 나무를 생각해서 짜깁기를 하면서 그려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장소를 실사로 찍은 것과 그 다음에 거기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물과 나무 하늘 구름을 갖다가 이렇게 오려서 붙여가지고 합성을 해서 만든 것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영혼이 있음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느낀 것이 내 안에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말로 할 때에는 사실 자기가 본 그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잖습니까?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러니까 두 번 세 번 끊어지면서 사실은 전달이 안 되는 겁니다.
더군다나 듣는 사람이 이제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이라면 이성으로, 이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되는데 체스터 턴이 그랬습니다. “미친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만 있는 사람이다. 이성만 있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지식 그 자체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지식을 얻게 하는 두 수단을 두셨는데 하나는 ‘믿음’이라는 수단과 ‘이성’이라는 수단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가 사물을, 천상에 있는 사물부터 시작해서 지상에 있는 사물까지를 모두 이해하는 두 손입니다. 그런데 한 손을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들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그걸 이성으로 증명해 보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초월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경험하듯이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본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림을 보면 영혼과 마음에 대해서 이제 궁금할 텐데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영혼이 있고 육체가 있습니다. 이쪽에는 감각이 있습니다. 감각. 여기에 감각이 있으면, 여기는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고 냄새 맡고 하는 게 이렇게 있을 거 아닙니까? 다섯 가지잖습니까 이게. 외부세계와 접촉하면서 그러면서 정보들을 이 감각을 통해서 실어 나르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들은 이제 이것이 들어오면 이것이 들어오면,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구별하게 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무엇인가 발견하면서 느끼게 되고 그걸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지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제 영혼과 육체는 실체고, 실체가 있는 거고. 이거는 이 마음은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게 막 같다고 보면 됩니다. 막. 이렇게 막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막이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영혼과 육체가 마음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자기가 뭔가를 나쁜 일을 겪으면 마음이 굉장히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육체가 죄에 빠지거나 해서 악한 것을 계속 경험하면 이것이 결국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혼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되고 육체는 선을 행하게 됩니다. 이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겁니다. 이래서 영혼과 육체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만난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 다음 문제 4번을 마지막으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미라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해 봅시다.” 미이라겠죠.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이 그림인데 너무 선명합니다. 이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9) “유한한 세계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불나방처럼 쫓아가다 덧없이 생을 마감한 그 남자는 영원하신 하나님도 모르고 영혼의 존재도 모른 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없이 눈물이 흐르며 간절히 기도하고 싶었고 저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영혼은 잘 있느냐고 활기가 넘치냐고 사랑이 가득하냐고 오늘 너의 영혼을 데려가시면 어찌할 거냐고 저 자신에게 질문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밖에 못 살아서 주님께 너무 죄송했고 주님 사랑은 너무 큰데 너는 지금 무엇하고 있냐고 마음속으로 찬송가 405장을 불러봅니다. 저 미라가 살고 싶었던 오늘은 저는 살아가고 있으니 거룩한 부담감이 커집니다.”
(성도10)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끊는 일이 중요하면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봅니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없는 것들을 있는 것으로 여기며 눈앞에 펼쳐진 없는 것들에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주를 믿노라 고백하고 예배당에 앉아 말씀을 들어도 왜 이렇게 나는 그동안 없는 것에 천착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유리상자 안에 누워있는 남자는 5400년 후 자신의 볼품 없이 초라한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자신이 추구하던 삶의 희로애락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비참하고 처량한 신세였음을 알았더라면 그의 삶이 좀 나았을까요? 나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 앞에 일희일비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고. 나의 정체는 영혼이고 내 영혼을 주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어가자고 말입니다.”
(성도11) “미이라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원히 살 것 같지? 너도 언젠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직 젊고 건강하게 죽음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죠. 내가 만약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하루를 정말 의미 있고 가치있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의미 있는 삶이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라져 없어져버릴 그러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그 사랑 안에서 의미를 찾고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물으며 살아가는 삶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성도12) “책에 묘사된 미이라를 읽으면서 유한한 인간의 덧없음이 가장 많이 와닿았고요. 그러면서도 그 미라 역시 인간 실존의 무거움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냈을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많이 아려왔습니다. 만약 이것이 인간 정체성에 전부이고 그리고 끝이라면 인간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요?”
이제 여러분이 『아·사·밤』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깊어지셨고 너무 놀랍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친구가 된 것처럼 반갑습니다. 사진을 한 번 더 보여줄까요? 우리. 5400년 전이라 그랬는데 어떻게 저렇게 보존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참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건 지금 사진으로 봐서 그런데 제가 가서 실물로 봤을 때 위에 라이트가 비치면서 이제 쫙 보입니다. 아주 동해바다에서 잘 말려놓은 건어물 같았습니다. 상처 하나 없었고 썩은 곳이 없고.
그런데 이제 저 사진을 보면서 여러분도 저하고 거의 동일한 걸 느끼셨겠지만, 처음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게, 인간이라는 게 저렇게 하잘 것 없는 존재이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타살 당한 거라고 이제 학자들이 보는데 그러면 타살되기 전에 한 전날까지도 잘 살았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그 사람도 이제 그 당시에도 이제 먹고 입고 마시고 그 다음에 심지어 쾌락을 누리고 아니면 좀 더 좋게 생각하면 가족들 생각하고 이러면서 살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얼마나 덧없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주위에서 이런 경우 만나지 않습니까? 굉장히 멀쩡하시던 분인데 갑자기 치매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못 알아봅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기억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거의 다 필름이 끊어져서, 그래서 심지어, 우리 백건우 윤정희 씨 이야기도 나오지만은 자기 가족들한테도 “왜 여기 계세요?”라고 그렇게 얘기할 정도가 됐을 때, 그런 사람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남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우리 중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몇 달 후에 우리가 저렇게 완전히 필름이 끊어져서 가족조차 알아볼 수 없는 치매나 정신이상이 온다, 오지 않을 거라고 우리가 무슨 근거가 있어서 나한테는 절대 그런 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사실 그렇게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데 그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기분 나쁘고 불행하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개를 돌리는 것입니다. 아예 이제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일부러 생각을 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진실은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아주 건강관리를 잘해서, 그래서 60대가 되셨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까 뼈와 이 모든 신체 나이가 40대 후반밖에 안 됐답니다. 한 10년 내지 15년 이상 15년 정도 그렇게 젊게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기 건강관리에 대한 막 책도 쓰고 그러셨습니다. 졸지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중상을 입고 그 사지를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뭐 그분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했겠습니까?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겪기 전에는 우리와 별로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도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때가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게으름 속편』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이제 할머니들 보면 너무 딱하잖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밤에 컴컴한데 조그마한 리어카를 끌고 거기에 박스를 줍습니다. 거기에 구르마 하나 가득 싣고 가면 7800원 쳐준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분들은 지금 70대가 돼서 저렇게 박스를 줍고 있는데 저분들의 저런 가난은 40대쯤 아마 예고됐을 거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노년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한 분은 40대 50대까지 아주 잘 사신 겁니다.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자녀들 결혼시키느라고 퇴직금 타고 뭐 집 있는 것 좀 조금씩 팔아가지고 다. 그러고 나서 간신히 전셋방에 살고 있는데 남편이 덜컥하고 커다란 불치의 병에 걸린 겁니다. 전세를 빼서 남편의 치료비를 쓰고 그리고 자녀들이 도와줄 처지도 안 되고 등등등등 가정의 불화까지 겹치고 이러면서 결국은 남편 돌아가시고 독거노인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리어카를 끌어서 하루 저녁에 하루에 7800원이라도 벌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처지가 된 겁니다. 지금은 그래도 복지제도가 한 30년 전보다는 비교될 수 없이 좋아서 뭐 사실 굶어죽지는 않게끔 나라에서 어느 정도 도와주잖습니까? 그니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안 하냐 이겁니다. 얼마든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뭐 암이나 혹은 이렇게 커다란 질병에 걸려서 죽음과 사투하고 있는 우리 지체들을 많이 보잖습니까. 그게 누구 특정한 사람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아닙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러니까 그런 거를 생각하면은 결국은 인간의 그 뭐라 그럴까, 이 존재의 비참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블레즈 파스칼이 그랬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그걸 생각을 하면 인간이 미쳐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안 미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이미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치는 거라는 겁니다. 그거를 똑바로 생각하고 있으면 인간은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보면서 안 미치는 이유는 그걸 똑바로 못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미쳤다고 표현합니다.
또는 『팡세』에서 그 구절이 어떤 번개처럼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아 그렇구나, 인간이 우주를, 밤하늘의 우주를 바라보고 그다음에 모든 인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불행하고 고통 받는 상태를 공정하게 바라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우리 지금 여기에 다들 모여서 이쪽에서는 고스톱을 치고 있고 여기에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토요 명화 극장을 보고 있고 또 저쪽에서는 배달 음식이 막 도착해서 지금 신나게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앙 하면서 화재 경보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재 경보가 나오면. 영국에 한번 집회를 갔는데 화재 경보가 울리니까 다 내려오더라고요. 그게 평소에 어렸을 때부터 훈련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계가 오작동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계 자체를 아주 불신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한국 사람이 밥솥에 밥을 하다가 그 수증기가 올라가서 수양관 전체에 벨이 울린 겁니다. 그런데 일단 벨이 울리면 사람들은 그거를 위급하다고 믿고 바로 뛰어내려옵니다. 그렇게 훈련이 돼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불이 나는데 그러니 그러면 빨리 가서 어디서 그걸 어디서 벨이 울리나를 봐야 될 거 아닙니까? 경비하는 사람도 오작동이라고 확신을 하고 가서 이제 스위치부터 내리는 겁니다. 그 사이에 불은 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파스칼이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두 개를 공정하게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이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할 때 그때의 비참에서 극복할 수, 비참에서 벗어나야 할 길을 찾지 않을 수가,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인간이 진정한 행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 들어오셨습니다. ‘열린교회 유튜브 구독자 곧 만 명이 되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등등. pb라는 분이 올렸습니다. ‘친구가 아사밤을 잃고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하는군요.’ 예, 그런 사람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좀 더 보내주십시오. 여러 가지 사연이 들어왔는데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은혜롭게 잘 보내십시오. 다음 주 금요일 날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