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진실함 그리고 사랑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녹취자 : 김세나
저는 지난 주로 제 인생의 중요한 숙제 하나를 끝낸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30회에 걸쳐서 마쳤습니다. 아쉬운 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제가 13장을 통해서 발견한, 그래서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다. 소위 이야기 하는 ‘끼비따스 데이’, 하나님의 나라. 신의 도성은 다른 모든 다른 도성에 있는 사람들이 그 도성을 보면서 차이점을 발견하는데 그 차이점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진리냐, 사랑이냐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원래 이 모든 것은 인간 세계 속에 투영될 때 다르게 투영된 것이지,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입니다. 한 태양이 빛을 뿜어 어떠한 태양의 빛은 열로 변하여 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어떤 태양의 빛은 광선으로 작용하여 균들을 죽이고, 또 어떤 태양 빛은 작용하여 이 세상에 있는 식물들과 동물들의 신진대사의 도움을 주는 것처럼 심지어 인간의 몸에 햇빛이 비취게 되면 그것으로도 우리들에게 영양소가 형성이 되고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15분을 따뜻한 햇볕을 쬐면 불면증이 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태양 안에는 없습니다. 태양 안에는 무슨 영양소도 없고, 얼음을 녹이는 것도 없고, 따뜻한 바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이시며 진리이시며 아름다움이시며 탁월하심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물과 어떠한 관계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라져야 될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하나님을 비추어 보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정말 최고의 존재이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시고, 이 세상에 악하고 결함이 있는 것들을 비교하고 보면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선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온전하지 못한 것들과 비교하면 하나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오류와 관련지어 보면 하나님은 그에 비하면 참된 진리이시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진리와 사랑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는 지혜, 이것이 진리가 바로 이 지혜의 표현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계속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사랑 없이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러한 것 느껴 보신 적 없습니까. 흠 잡을 것 없는 설교인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을 때, 반박할 수 없는 논리인데 왜 그런지 내 마음에 호소되지 않을 때, 상대방이 나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서 논박을 할 수 없는데 내 생각은 바뀌지 않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똑같아서 하나님과 너무 닮아서 우리에게 참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함께 우리의 마음에 호소할 때 우리의 마음은 움직입니다. 오래된 신념도 무너지고 오래된 미움도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은 그 진리와 참 사랑이 언제나 하나여서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진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질서를 보여주고, 사랑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들을 조화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절대 나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사역 초창기에 아주 좋아하던 단어 중 하나가 파도스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입니다. 파도스인데 요즘은 거의 안쓰고 최근에 누가 추천서를 써달라고 해서 그 단어를 여러번 썼길래 제가 정중하게 충고를 했습니다. 나도 옛날에 좋아했는데 사용하지 말아라. 원래 이 파도스라고 하는 단어가 그냥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passion without reason입니다. 이성이 없는 열정입니다. 이성과는 상관이 없는 열정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기독교적 열정과는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열정은 passion with reason입니다. definitely with reason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분명히 우리 안에서 이성과 함께 작용하는 솟아오르는 열정일 때 이것이 진정한 열정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과 참된 것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도요한이 아주 오래살지 않았습니까. 90세 넘어서 100세 가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너무 기력이 없어서 설교단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간신히 단에 올려 놓으면 두 손을 높이 들고 말을 더듬으면서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한 마디를 하고 내려오면 온 회중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놀라운 감화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진리와 사랑이 한 인격 안에서 공존하고 있을 때, 그것이 강한 호소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허무하게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영혼으로부터 와서 시간속으로 들어오고 시간을 휘돌다가 다시 영혼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아가페의 사랑에 회귀적인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영원으로부터 와서 시간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그것을 우리는 영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됩니까. 자, 곤궁에 지체를 통해 나를 물질로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나를 도와준 지체의 탁월한 인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도구였을 뿐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켜서 나에게 도움을 주셔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럴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그 사랑은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시간속에서 구현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도움을 입었기 때문에 또 도움을 입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교를 돕자고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해도 그렇게 많이 돕지 않습니다. 왜 안 돕는지 아십니까.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다닐 때 그러한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도울 마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 신학교가 풍성하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뭐냐 하면 지금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그러한 도움을 받으면서 감사하게 느끼게 만들 때 그 사람들이 돌아가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식으로 회귀되는 것입ㄴ다. 그러한 사랑을 회귀시키지 않고 자기를 최종적인 소비처로 사용해서 거기에서 소멸하고 소비해버리는 것은 이것이 결국은 죄입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가장 인간이 고치기 힘든 병중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열등감입니다. 저는 사실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병인지 압니다. 지금도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금도 정상에 가깝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참 많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실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사실은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 열등감도, 그러니까 자기열등감과 자기우월감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자기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그 사랑이 영원속에서 시간속으로 들어왔고 그것이 계속 영혼을 향해 흘러가지 않고 자신 안에서 최종적인 소비처가 되어서 사용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자기 연민도 나쁘지만 자기 나르시즘에 빠지는 것들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거울로 보고 나는 왜 이렇게 예쁠까 하면서 감탄하는 것은 병입니다. 남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러한 열등감이나 이러한 것을 그러한 나르시즘으로 고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타오르는 불을 기름으로 풀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초월해서 그 사람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하나님이 그도 사랑하신다는 것. 어느 철학자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인데 죄인은 사랑하고 죄는 미워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 매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가 있고 자기가 있는데 자기 죄를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분리할 수 없을 때에는 죄까지 사랑하면서라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 적용해서 해 보려 하니까 어떻게 일이 가능하겠는가 묻는데 사실은 반성해 보면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때에도 이렇게 진리를 아는 지식과 사랑이 찢어져서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참으로 빛에 속한 사람과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윤리로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윤리는 진리와 하나된 윤리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 이야기 하는가 하면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행함은 실천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은 뭐냐 하면 이 진실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에 부합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향해서 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해서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베룸이라는 말 자체가 베리따스라는 객관적인 진리에 자기의 마음을 합치시킨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 진실은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주관적인 신자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해 보십시오. 참된 진리의 기준이 있고 거기에 나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해져가는 과정이지만 그러한 기준이 없이 자신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것은 미치광이의 자기의 충실인 것입니다. 광적인 정신세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다는 것. 그래서 참지마, 너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거야. 그렇게 확확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의 질서들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적 많지 않습니까. 확 하고 인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어떠한 분노나 욕망 같은 것들을 특히 미움이나 분노 이러한 것들을 표출 했을 때 쾌감은 정욕을 만족시켰을 때 그것 보다 더 놀랍습니다. 적극적인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억눌렸을 때 감정이 확 폭발하면서 그 안에서 카타르시즘을 느끼면서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한번 해 놓고 나면 뒷수습을 하는데 굉장히 많은 고생을 하게 되는데 신앙적인 단어로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연단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만약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안 사람들이라면 우리와 접촉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생각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 오웬이 이야기 한 신령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나 처지를 원망하기 보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뇌리에 크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셔서 우리도 모르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이러한 것이라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쳐가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프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로서는 아픈일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의 증거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결국 우리의 모든 굳셈이 나오는 것입니다. 선이 항상 악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면 되니까. 그런데 악인은 하나님 편에 서있지 않은 사람은 이겨도 불안합니다. 그러나 선은 져도 평안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자기의 책속에서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 굉장히 감명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패배하는 선을 발견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긴 승리한 악을 택하기 보다는 패배한 선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굳셈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님과 합치시키려고 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는데서 참다운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르게 사랑하려고 하는 데서 거기에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때문에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선대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내가 미움으로 되갚지 않고 사랑으로 되갚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내가 손해가 나는데도 이웃의 명예를 보존해주고 하나님 때문에 나에게 악을 행한 그 사람에게 선으로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이 나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박수 갈채보다 하나님이 하나님 한분이 그래 내가 옳다, 이렇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것 보다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배반이 일어나는 것이고,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우리의 명예는 세상이 언제나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지만, 진리는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것이 싫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붙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흔들 수 없는 평안,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그러한 고고한 확신, 그것이 진리와 함께하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받는 사람은 오히려 두려워할 수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다 버려도 진리가 자기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