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2팀실장수련회
2016
사랑의 방식과 효용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를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녹취자: 이경순
I. 본문 해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것이 핍박을 앞두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나왔냐면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이 권면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제 핍박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육체의 많은 욕심들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때를 우리가 소망가운데 지나야 되며 악한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가 행한 악에 따라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펼쳐졌던 이야기들을 다시 우리 안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에 거론하는 것이 두 가지 권면을 하고 있는데 ‘기도하라.’, ‘사랑하라.’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만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 만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경륜이 끝나는 그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로 ‘말세’라 표현하셨습니다. 말세는 우리가 어느 특정한 10년이나 20년의 시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도입되었고 마지막에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사실 모두를 말세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말세에 살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말세의 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은 ‘너희는 기도하고 사랑하라 마지막 때에 결국은 두 가지가 매우 어렵게 된다.’ 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는 기도하기가 어려운 때이고, 사람들이 잘 기도하지 않는 때가 온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를 강조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깨어 있는 사람들을 몇이나 보겠느냐 하고 한탄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의 핵심은 아니지만 그럼 왜 마지막 때에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울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 분산입니다. 하나님 한분에게 마음의 눈과 마음의 시선을 모을 수 없으리만치 정신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아주 복잡하게 돌아가고 빨리 돌아가고, 예전에는 갖거나 누리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욕심이 팽창하며 또 그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으면서 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될 것들의 폭이 너무 넓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재화를 얻기 위해서 많이 노동을 해야 되고 심지어 그 노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살아야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물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정신을 빼앗습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마지막 때에 전개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때에 정말 기도하는 사람을 얼마나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성경이 근신하며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사랑의 방식
그렇게 기도하기가 어려워지는 때가 바로 마지막 때인데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내용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의 방식’과 ‘사랑의 효용성’에 대해서 두 개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모를 것이 없지만 그 사랑의 방식이 뜨겁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킹제임스 버전의 성경을 보면 “And above all things have fervent charity among yourselves: for charity shall cover the multitude of sins.”게 되어 있는데 ‘열렬한 사랑’(fervent charity)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의 방식이 아주 뜨겁고 열렬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여러 가지 가르침에 대해서 자기의견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랑은 ‘열렬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뜨거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연합이 교회로 하여금 자기가 믿는 바에 일치를 이루게 하고, 사는 바에 일치를 이루게 하고, 교회를 세우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셨던 목표에 자기인생의 목표를 합치시키게 만듭니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 안에서 때로는 차이점들을 녹여내고, 때로는 차이점들을 인정하면서 교회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이 세상에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이유이고 또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정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감정과 이성 모두에 걸쳐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의 그 관계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열렬하게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열렬하게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제일 큰 원인이 무엇입니까? 결국 인간은 숨 쉬고 살아있는 한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은 사랑의 총량은 언제나 똑 같습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지 않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뜨겁게 사랑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전전인 이야기 이외에는 보탤 것이 없습니다. 누구도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한 자기를 사랑하도록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만 사람들은 사랑하게 되고 이것을 우리들이 ‘당을 짓는다’고 표현합니다. 조폭들도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뜨겁게 사랑합니다. 때로는 목숨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폭마누라 1’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장면이 나옵니다. 조폭 두목 신은경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똘마니가 하나 있었는데 ‘왜 너는 그렇게 충성하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면서 - 머리가 반은 쇳덩이었음- ‘내가 이렇게 맞아 병신이 되었을 때 형님이 나를 지켜주시지 않았으면 내가 죽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사랑 그 자체를 상대방에게 시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사품으로 내려주듯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장점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솔직히 우리 중에 변함없는 사랑을 사람들에게 받을 정도로 고매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껏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 당신 사랑으로 그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 받은 것이지 우리자신의 진면목을 모두 보여준다면 누가 우리를 사랑했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도 그 하나님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 앞에서 나의 사랑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신자의 일생은 결국은 이 싸움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랑 안에 늘 함께 계시고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사랑이 곧 그와 함께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하고 싶지만 넘어갑니다.
III. 사랑의 효용성
그 다음은 사랑의 효용성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것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녁을 빗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어떤 그 목표에서 벗어난 마음과 행동 정신 이런 모든 것들이 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하니까 ‘아, 사랑은 그냥 죄를 덮어주는 것이구나’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죄’라는 것은 일반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를 총칭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짓는 죄 혹은 허물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지은 죄는 당사자가 그 사람과 나, 딱 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피해를 본 나 자신이 당사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 사람이 서로 죄를 지은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둘이서 서로 싸워서 한 사람은 이빨이 부러지고 한사람은 눈알이 터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쌍방폭행이 됩니다. 어째든 자기가 피해를 본 그 한도 내에서 자신은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은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은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손해를 입었을 때에는 정당하게 배상을 받든지 복수를 하든지, 아니면 복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면 마음속에 그 사람을 간직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라도 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인간이 본성인데 성경은 그것을 다 버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었을 때 그 억울함과 원한을 어떻게 푸느냐는 반문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증거하기를 그렇게 용서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커다란 악을 행해서 큰 아픔을 준 사람들 중에 어느 순간에 마음깊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일생 살면서 이 잘못을 어떻게 갚을 수 있냐며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뼈저리게 회개하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살면서 일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와 고통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가해를 한 그 사람은 추호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꽤 만났습니다. 그건 쉽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경험 못했나요?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해서 뭔가 갚아줘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저 사람이 너무 잘못했다고 빌면 좀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경험 못했습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맞서야만 뭔가 터트리겠는데 납작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하는 경우 말입니다. 아니면 조건이 형성이 되어서 그에게 복수를 했다고 칩시다. 그게 정말 행복하겠습니까? 오늘도 신문을 보니까 가슴이 찡합니다. 학교 폭력으로 아들이 죽었습니다. 가해자는 의대 입학해서 잘 다니고 있고 인터넷에 ‘나는 살인의 경험도 있다’고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 사진을 들고 인터뷰를 하면서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백번 이해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사회의 정의는 그런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무릎을 꿇리고,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배상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그 아들이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잘못을 하고나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했다고 뼈저리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 뉘우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그립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활짝 웃으면서 용서해주어야지.’ 그런 기쁜 날은 평생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치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의 인생도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유연하게 살아야 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해줌에 있어서는 너의 뼈저린 회개나 진심어린 뉘우침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규칙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상은 어디서 받습니까? 사과가 없어도 마음속에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면 그 사람이 우리 앞에 사죄하며 용서를 빌 때에 경험하는 위로와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내려놓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덮는다’고 하는 말은 죄를 용납하든지 그것을 옳다고 여기라든지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덮는다’는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안 씁니다.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밥보자기를 많이 썼습니다. 밥을 차려서 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반찬이 많으면 그릇이 바깥으로 튀어나옵니다. 여기를 가리려면 이쪽이 튀어나오고 이쪽을 가리려면 저쪽이 튀어나옵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반찬이 너무 많거나 보자기가 너무 작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크기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보존해줘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재밌는 기사를 읽었는데 이 기사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둘이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여친이 가만히 보니까 멀쩡한 제 애인을 뺏긴 것 같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전 남친과 결혼을 한 여자에게) 카톡을 합니다. “야, 그래 그 나이 먹도록 혼자 있다가 마지막에 고른 게 그 자식이냐?” 그러면서 과거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야, 그 남자 얼마나 쪼잔한지 아니? 나하고 옛날에 놀러갔을 때 밥값도 안내고 도망갔어” 등등 욕을 해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 행동이 법에 저촉이 될까요? 안 될까요? 욕 같은거 안 해도 명백한 명예훼손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고지하면 법에 명예훼손으로 걸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허물이나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덮어주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가 망가지도록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제들을 덮어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개인이 불명예를 입거나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그리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 당구공 같은 사람이 있고 모래밭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수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와서 합니다. 그런데 자갈밭에 물을 확 뿌린 것처럼 그 사람에게서 딱 끝납니다. 옮기지를 않습니다. 죽 내려갑니다.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들어오면 톡톡 튀기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그것도 한 두가지를 더 덮입혀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왜 이 권고를 하고 있습니까? 어차피 사람들이 모인 교회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허물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그 안에서 생겨납니다. 그때 이 사랑은 그렇게 우리사이에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많은 허물들을 덮으면서 공동체를 흘러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을 할 때 정말 조심해야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좋게 평가하게 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같도록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덕 있는 삶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주시고 일평생 우리는 교회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지 교회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생활에 있는 예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고 큰마음을 가지세요. 누구에게 장점이나 그 삶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누군가의 결점이나 그런 점들이 나한테 들어와도 내가 최종적인 종착역이 될 수 있도록 그런 아량을 가지십시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캐고 들어가 보면 큰일도 아닌 아주 자잘한 일들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서로 마음속에 높은 담을 쌓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목회를 하거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그런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공동체의 모습을 자신의 삶속에서 먼저 구현해 가는 사람들이 될 때에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릎 꿇고 앉아 설교 듣는 교인들에게는 똑바로 하라고 소리나 지르고, 자기가 속한 가정이나 자기가 속한 모임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그래서 교인들이 자기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야 어떻게 정상적인 목회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것은 깊이 용납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허물은 덮어주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나아가는 공동체 속에 사랑과 기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