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지식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신앙과 지식(빌1:9-10上) 1999.10.18 1
2. 지식과 허물없는 삶(빌1:9-10) 1999.10.19 5
3. 사랑과 의의 열매(빌1:11上) 1999.10.20 9
1.신앙과 지식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빌1:9-10上)
어제는 사도가 사랑 위 지식과 총명을 더하게 해달라고 왜 기도했는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 사랑은 지식으로 잘 그 사랑이 온전해지지 않으면 그러면 좀 나쁘게 말하면 종교적인 충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랑이 충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총명이 우리에게 있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종교적인 충동으로 움직이는 그런 생활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면 그 지식이 사랑의 불을 끌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지식이 잘못되었든지, 사랑이 잘못 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움직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아는 지식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지식이 더해질수록 사랑이 더 불길처럼 타오른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국의 형편을 보면 참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종교개혁을 하고 난 20년 후에 1537년경에 마틴 루터가 자신의 종교개혁에 동조했던 지방의 교회들을 쭉욱 돌아보면서 얼마나 그들이 무지한 가운데서 신앙생활하고 있었는지 그는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이제 그 지방에서 교회생활하고 있는 교인들을 ‘사랑스런 돼지새끼’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순간 순간 다가오는 종교적인 충동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우리는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딱한 마음을 가졌던 똑같은 심정을 저는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결함들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가하면 우리들이 정말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 그리고 정직한 빛 아래서 사랑이 더 깊이 타오르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식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두 관건은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는 지식 이 두 기둥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매일 한번쯤은 펑펑 울 수 있는 신앙의 감격과 그리고 어그러진 시대 가운데서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지 헤아리는 참된 지식 없이는 우리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왜 사도가 그렇게 사랑은 지식과 총명으로 더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오늘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그랬어요. 제 희랍어 성경에는 뭐라고 그랬냐면 「그 다른 것들을 시험하여 입증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케 하여야 한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왜 여기에서 ‘그 다른 것들, 그 많은 것들을 너로 하여금 시험하게 하기 위하여’란 말을 ‘지극히 선한 것들’이라고 번역을 하였을까? 이 번역이 그렇게 나쁘게 번역된 것이 아니라고 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와중에는 겉보기에는 참 그럴 듯 해 보이지만은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은 사실은 아닌 것들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이 세상에는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조약돌이나 돌맹이를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깨어진 벽돌조각이나 굴러다니는 휴지를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각종 보석을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많아요.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은 그것이 매우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앙도 매우 귀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모조품이 수없이 존재하는 것이예요. 우리의 몸에 맞고 우리가 사용하기 편리한 우리가 익숙해진 모든 것이 우리의 몸에 맞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신체의 유익한 것도 아니예요. 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도 한 잔, 밤에 잘 때에도 한 잔, 낮에도 한 잔 먹어야 돼요. 여러분 커피 중에서도 원두커피는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만 인스턴트 커피는 아주 안좋아요. 그 커피를 동결해가지고 인스턴트로 축출해서 만들 때 엄청난 양의 산이 들어가요. 그래서 원두커피는 아무리 진하게 타서 수없이 마셔도 위벽을 상하지 않는데, 인스턴트 커피는 많이 마시면 위를 상해요. 그런데 우리 몸에 좋은 거예요. 몸에 좋기 보다고 몸에 좋지를 않은데 몸에 딱 맞는 거예요. 아침마다 그 커피 아니면 그 커피를 서너잔 안 마시면 안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거 보세요. 우리 눈에 보기 좋고 심지어는 우리 몸에 느끼기에 좋은 것들이 우리의 몸에는 해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저렇게 신앙생활하면 좋겠다하고 붙들고 가는데, 사실은 자기 생각과 마음에는 맞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마지막으로 쫒아가면 영혼의 파멸을 맞거나 아니면은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의 길에서 매우 멀어지게 돼 있는 그런 신앙의 도리들이 많다 그런거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오해와 잘못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하고자 하는 육체적인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참된 복음에 따라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을 너무나 무겁고 버겁게 생각하기 때문에, 손쉬운 신앙의 길을 택할 때가 있다는 거죠. 우리는 억지로 고난의 가득찬 길을 걸어가는 것도, 우리는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또 자기 의지대로 편한 길을 걸어가는 것도 신앙생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예수님도 사람들이 핍박하면 도망가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비난하면 변론하시고, 이 동리에서 박해하면 그냥 그 동네에서 맞아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동리로 피난 가신 거예요. 아기 예수 태어날 때도 헤롯이 죽이고자 하니까 애굽으로 피난 가셨잖아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들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쉬운 길을 걸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구요. 문제는 정확하게 주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신앙의 길을 따라서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 저는 오늘날 어느 정도로 심각하느냐 하면은 정말 이 교회당에 들어섰을 때에 참되고 진실한 기독교 신앙의 접근할 수 있을까? 그런 회의를 느낄 정도예요.
제가 있던 교회의 어느 형제는 매일 버스 안에서 전도하고 그러는데,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그때 제가 전도사예요. “전도사님, 제가 열심히 전도하는데, 제가 전도한 사람들이 교회 나갈 것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들을 정확하게 분별해 내기 위해서는 어때야 돼요? 이 지식이 뛰어나야 돼요. 여러분, 우리에게 여러 보석들을 가져다 놓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 놓으라고 하면, 우리는 거의 분별해 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이예요. 마찬가지예요. 올바른 복음과 올바르지 않은 복음은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있어 왔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 시대마다 그 시대와 야합하려는 오류들이 있어 왔어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분별해 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이 진실한 복음적인 삶이고 이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다라고 단언하면서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보석을 감정하는 사람들 이상으로 고도의 지식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이예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밥만 먹으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오늘 내가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 사람답지 않게 10년을 넘게 사는 것보다는 사람답게 하루를 살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원하노라는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예요. 그게 도를 좇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때도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는 이단들을 보았을 뿐 아니라 또 이단들이 굳이 아니드라 하더라도 신앙적인 미성숙, 영적인 미성숙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잿혀놓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빗나간 열심 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리는 교회 안의 많은 신자들을 보았어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바울이 지식과 총명을 구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숨질 때까지 두 가지 한편으로는 매일 깨뜨려지는 마음, 그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그걸 간직하고 또 한편으로는 숨질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게 해 달라는 이 기도가 실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깨달음에 대한 탐구과 그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숨지는 그 날까지 그래서 괴테가 마지막에 죽을 때에 ‘창문을 열어 더 많은 빛을 자기에게 비쳐달라’고 그렇게 유언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더 많이 하늘의 문을 열어 찬란한 지식의 빛을 주셔서 우리들이 그 빛 안에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강렬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했을 것이지만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나 깨닫게 되면서 깊은 평안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먼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을 것이예요. 도대체 신앙이 이것이라면 내가 이제껏 믿어 온 신앙은 무엇인가? 갈등을 일으킨 것만큼 우리들이 그를 믿으며 살아온 거예요. 제가 그렇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지식이, 총명이 쌓아 가면서 우리는 참되며 거짓 된 거, 그리고 같은 것 같지만 많이 다른 그런 것들을 분별해 지는 지식을 더 얻게 되는 것이예요. 저는 지식의 은사가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부러워해야할 사람들이 많이 재산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많이 존경을 받은 사람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아는 지식과 총명이 뛰어나서 나는 바른 것을 판단할 수 없는 그 때에 정확하게 바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의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이고 하나님의 만난 신앙의 경험이 동반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상이 된 사람, 그래서 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일관성 있게 된 사람, 그런 사람들을 깊이 그리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깊이 부러워하면서 내게도 그런 깊은 복음 진리의 지식, 그것이 우리의 머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관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말씀이 뼈 속 깊이 사상이 되어 사무치는 그런 변화를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지식과 허물없는 삶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1:9-10)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게 해 달라고 사도가 간절히 기도했던 첫 번째 이유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희랍어 본문에는 ‘그 바른 것들을 시험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 신앙의 길은 우리들이 모조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유치한 지식으로나 그것들을 쉽게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지식과 총명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아무거나 믿으면 되지? 뭘 그렇게 우리들이 많이 생각하고 무엇이 참된 신앙이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우리들이 면밀 주도하게 따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가 언제 한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지요. 제가 이렇게 목회사역을 하면서, 설교사역을 하면서 보니까 신앙이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논리적을 하나씩 둘씩 깨달아 가는 것이 굉장히 기뻐해요. 굉장히 기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차근차근 깨달아 알아가는 지식 없이 그냥 생긴대로 사는 것이 최고인지 알고 살았는데, 그 때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신앙이 깊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하면 ‘아! 무슨 신앙생활이 이렇게 어렵냐? 왜 자꾸 따지는게 많냐?’ 안 되는 것도 많고 해야될 것도 많고, 조심할 것도 많고 가짜도 많고 그래서 옛날에는 피곤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었는데, 이 사실이 그렇게 신앙생활 하니까 이 신앙생활의 지기(?)라는 것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왜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많이 더해서 그 다른 것들을 잘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하냐 하면 그런 올바른 지식과 분별이 있어야지만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기 때문이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겠지요. ‘그러면 뭐 지식이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합니까?’ 두 가지로 답변을 할 수 있어요.
첫째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옳게 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식이 있는데, 지식만 있을 뿐, 지식대로 도무지 움직이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 바르게 할 수 없어요. 그러나 두 번째로 대답할 수 있는 말은 그 지식이 정말 올바르게 획득되는 지식이라면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는 말이지요.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다음에 도로에 들어서고 나서 깜짝 놀란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의외로 이 도로에는 교통이 있든지, 없든지 지식이 지배하는 세상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걸어다닐 때에는 전혀 못 느끼는 거였는데, 차를 몰고 와 보니까 중앙선 넘어서는 차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자기 차선에 따라서 움직이는 거예요. 빨간불이 켜면 서고 파란불이 켜지면 가고 조금씩 일찍 출발하고 신호무시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아주 예외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생각을 잘 해보세요.
한 사람이 아주 착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참지를 못하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차를 몰고 나왔는데, 진심이면 통하겠지 나왔는데, 이 사람은 빨간불이 무슨 뜻인지, 화살표가 무슨 뜻인지, 중앙선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라요. 사람 하나만 좋아요. 그리고 신실해요. 잘 하고 싶어요.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싶고, 그게 가능하겠냐구요? 그게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충만한 사랑, 참되고 진정한 신앙의 지식 그런 것들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를 수 있다 이 얘기예요. 그런데 이 지식은 허물없이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를 다고 그랬는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야바위 치듯 거짓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생각해 보라구요. 그렇죠? 학생들은 정직에 관해선 배우고 거짓되게 다른 사람들의 시험지를 보고 쓰는 거에 관해서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학생들은 모든 것들을 배워요. 악은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주 쉽게 터득해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빛 아래서 끊임없이 어떤 것이 잘못되고 거짓된 것인지 배우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나쁜지 배우면서 그 마음속에 거짓된 것에 혐오감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지지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한거예요. 요즘에는 아이들의 교육을 보고 받다 보면은 가출하는 청소년도 많지만은 가출하는 엄마, 아빠들이 너무 많아요. 심각한 수준이예요. 뭐 빚에 몰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도망가는 사람도 있지만은 바람 펴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아무렇게나 사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 누구든지 굴러가게 마련이예요.
그러나 그런 모든 유혹에나 시험에도 적절하게 극복을 하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이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게 만들고 쓸데없이 쏟아나는 거짓된 허탄하게 살고, 그리고 거짓되게 살아서 좀더 우리의 인생을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것들을 그걸 찾아내서 잘못된 것들을 죽이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 누구든지관에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빛에 나오기까지는 내가 정말 일생동안 살아온 발걸음을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지식이 필요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분별하는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마지막으로 허물없이 살기 위해서다 이랬어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얼마나 의식할지 모르지만은 끊임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고 매일 예배당을 나섰을 때에 빰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흐르면서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하나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 자신의 인격이나 성품이 잘못 됐으면 그 칼로 깍아서라도 주님의 마음에 들고 싶습니다.’ 이런 진실한 마음을 예배당을 나설때마다 갖는 사람과 아무 의식없이 교회를 오가는 사람은 일년만 살아도 두사람의 차이는 사람과 짐승의 차이예요. 일년만 살아도요. 일년만 살아도 사람과 짐승의 차이라구.
그런데 그런 삶이 일평생 흔들리지 않고 흔들려도 다시 돌아오고 하면서, 일평생 그런 동일한 고민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을 여러분은 기억하죠? 마을의 인자하게 생긴 바위에 사람의 얼굴같은 형상이 나타났는데, 그 마을에 그 사람이 나오리란 것이예요. 정치가도 왔다가고 부자도 왔다가고 군인도 왔다갔는데, 다 세사에서 박수를 받는 열광하는 인물들이었지만은 사람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니야’ 그랬어요. 마지막에 하나가 평범하게 그 시골구석에서 촌부로 자라면서 모두 큰바위 얼굴을 쳐다보면서 언제나 저런 사람이 나올까? 정말 저런 풍모가 수려하고 뭔가 기품 있는 사람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그 마을에서 평범한 시골 아저씨로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리 세월이 지나 기다려도 그 큰바위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제 이 소년은 바위를 바라보다 일평생을 살다가 할아버지가 됐어요. 그때 어느 날, 밖에 앉아 있다 사람들이 보면서 ‘야, 이것봐. 이 할아버지가 큰바위 얼굴하고 너무 똑같이 생겼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요.
무엇을 바라보다 사느냐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느냐 말이예요. 일평생을 살면, 일평생도 필요없어요. 일 이년을 그렇게 살아도 전자와 후자의 사람은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고, 아마 일평생을 산다면 짐승과 사람의 차이예요. 한 사람을 임하여서는 하나님의 한없는 고통과 불명예를 입으셨지만 한사람을 통해서는 한없는 기쁨과 영광을 받으신 분이예요. 두사람의 질의 차이라는 것은 비교될 수 없는 삶의 질이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짐승처럼 살고 한 사람은 성도처럼 살면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의 기쁨과 행복, 방황과 고통은 비교할 수 가 없는 것이예요.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서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해서 비슷비슷한 거 따라서 적성을 따라서 골라잡아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탐구의 지식으로 어느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이런 생각하게 돼요. 어떻게 이렇게 신앙생활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편안 이야기를 하는 것이예요. 짐승들이 인간들의 삶을 보면서 태어나서 한 60년이나 70년 인생을 살기 위해서 24년이나 교육을 받아야 되는 인간을 보면서 짐승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동물들: 야,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인간 안되고 말아야지. 그래 자기들이 만든 인간세상에 한 0년 적응하며 살기 위해서 24년이나 교육을 받아야 된다. 야, 지긋지긋하다.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이야 이말입니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아무렇게나 살았는데 이제 아니예요. 우리가 주님의 손으로 지은 이 우주 최고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여전히 주님의 형상이 남아 있고,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우리 같은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중에 건져 내셔서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셨는데, 이제 금방 죽는다고 하더라도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죄악된 세상에서 짐승처럼 불현 듯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될 바를 알게 되었는데,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이예요.
그래서 시인이 지키며 살아야 될 말씀을 인해서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감사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그런 속에서 모든 시험과 유혹과 싸우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총명을 더해서 예전에는 몰랐던 것을 잘 분별해 내며,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충전을 받으면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결심하며 더 거짓을 버리고 진지하며 그리고 그 오류에 가득찬 생활을 버리고 흠없이 살아가고 애를 쓰고 살려고 하는 그 속에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행복을 향유하면서 살려고 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던 삶이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 자신과 싸우면서 어제보다 훨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한없는 특권이예요. 그리고 이것을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시시때때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서 우리들이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자식으로 살아가는 관계를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성도들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에 지식을 더하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3.사랑과 의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빌1:11上)
사랑위에 지식과 총명을 더해야 할 이유가 우선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많은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각각 분별해 내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그런 판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 위함이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닙니다. 장거리 마라톤과 같고 그리고 그 긴 인생의 길 동안에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웃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은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짧지만 어떻게 보면 참 깁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보면 ‘우리의 인생의 덧없고 너무 짧다’라는 사실을 느끼지만 우리들이 ‘무엇이 참된 진리인줄을 깨닫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올바르게 분별해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도록 애를 쓰면 우리의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기에는 너무도 긴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일 이년 동안에만 은혜를 지키고 화끈하게 살다가 죽어버린다면 우리도 한번 주만을 위해서 순수하게 사는 것이 가능할것같은 생각도 드는데 사실은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짧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막살기에는 너무 짧고 잘살기에는 너무도 긴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도중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세워진지 이제 오년이 좀 넘었습니다만 우리 교회를 통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자기판단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애적인 변화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셔서 자기의 갈곳으로 간 사람들도 있지만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신앙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전시회에 가서 성화를 보았는데 커다란 언덕 두 개가 서 있었습니다. 한쪽 언덕은 어두침침하고 그리고 우울합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언덕이 하나있는데 파란 풀밭이 있고 기쁨과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 양쪽 벼랑사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쪽 어두운 벼랑에 있는 사람들이 저 건너편 낙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쪽 아름다운 풀밭이 있는 낙원에서는 손을 높이 처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끌었던 것은 그 양쪽사이에 다리로 있었던 그 십자가입니다. 그 커다란 십자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에 엎드려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에서 추락하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에서 화투를 치면서 놀고있었습니다. 수많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그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 맞다.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벼랑과 같은 이쪽 끝에서 생명과 안식이 있는 저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인데 처음 출발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쏟으면서 내 일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가기 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 십자가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그 길로 걸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왕들이 나타나는데 정말 대부분의 왕들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는 육체로 마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함에서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니 정말 소망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이 ‘또 신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고...’ 그 날까지 우리들이 온전해질대 그 신앙이 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잘 참고 인내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의 이 신앙생활이 단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랫동안 견디리라’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보려는 성경구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하다라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되면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무엇이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심오한 표현입니다. 그 신약성경에서 수없이 많이 나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인하여’ 라는 뜻인데 굉장히 심오한 표현입니다.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고 그래서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 참된 것들을 분별해내고 그리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이 인내 속에서 우리의 생황을 지속해 나아갈 때 어떤 일들이 나타나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에 열매가 가득하고’라고 할 때에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하나의 형식적인 수식어구의 반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는 그 생명적인 연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적인 연합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가장 강조하신 핵심은 무엇이었냐 하면 ‘내말이 너희안에있으면...’ 이었던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안에 있고 너희가 내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 사도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런 표현은 모두 절대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영적인 실제적인 연합이 우리의 삶속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되어서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람과의 온전한 연합이 삶의 결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겠지!’ 그런 의미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단지 교리적이고 이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삶이 실제로써 우리들에게 나타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이 내안에 계셔서... 주님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런 표현을 많이 쓰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님이 내안에 계셔서 그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우리들이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능력이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적인 사랑만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위에 지극한 지식과 총명함이 보태어져서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요 도리인가하는 것을 깊이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하나님앞에 지극히 허물이 없는 온전한 삶. 다시 말하면 온전히 순종하는 삶. 그렇게 될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리의 삶가운데서 늘 재현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처절한 시련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인생의 어려운 고비고비들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참된 진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권고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렵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태평양과 같이 넓은 바다와 같은 신앙의 세계가운데서 바닷가에 가까이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바닷물을 한번 찍어 먹어 본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신앙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깊이 들어갈수록 이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의 세계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세계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지식에 허기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더 깊이 깨달아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동안에만 우리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바둑을 두다가 하나하나 둘 때 어떻게 하든 이기려고 바둑돌하나를 가지고 이십분 삼십분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가서는 아무렇게나 두가다가 확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신앙생황을 이어가는 것이 앞에 말한 것처럼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그러한 자세로 지속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하는 것이 의의 열매가 가득하다라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의로운 삶의 결과로 말미암아 맺히는 존재와 섬김의 열매입니다. 말씀을 따라 잘살면 우리의 인격이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따라 잘살면 우리의 섬김이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까? 이것이 넘치는 사랑 위에 보태어진 지식과 총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지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