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9
목 차
만민에게 들려줄 지혜(시 49:1-4) 57
지혜로 환란의 날을 이김(시 49:5-12) 62
구속하시는 하나님(시 49:13-15) 65
사라질 영광과 진정한 존귀(시 49:16-20) 69
시편65편 강해 1
시편49편 강해 1
시편49편 강해 1
시편49편 강해 1
시편49편 강해 1
만민에게 들려줄 지혜
“만민들아 이를 들어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시 49:1-4)
본문해설
이 본분은 찬송시라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교훈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모든 탁월한 지혜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는 단지 사물의 이치를 잘 깨닫고 파악하는 이성적인 지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는 시인은 자기와 신앙과 종교가 다를 뿐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참된 지혜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만민들아, 세상의 거민들아
본문은 ‘만민들’ 다음에 ‘세상의 거민들’을 부릅니다. 종교와 인종, 민족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공부를 많이 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있고, 또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서 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매일 결정해야 하는 모든 문제의 답이 결국 이러한 질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참된 진리에 기초한 삶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리를 알든 모르든 여러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생각과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에 대해 물어볼 때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교회를 지혜롭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고 교회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동하며 일관성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삶은 중요한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초로 해야 하는데 그런 지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살아가기 때문에 순간순간 자기에게 부딪치는 느낌에 따라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행동을 하고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에 기초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이것을 배우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전능하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지식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더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진리에 기초하지 못하고 언제나 불안하고 순간의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을 돌아보면 일관성이 없고 다른 이에게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일관된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계,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에 타당한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쳐준 참된 진리 중 일부를 빌려다 사상의 오류를 섞어 진술해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호텔에서 서랍을 뒤져보니 불경이 나왔습니다. 대게 그곳에는 성경이 있는데 그 호텔에는 성경과 불경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 호텔의 주인이 불교 신자였나 봅니다. 불경을 펼쳐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생활에 관한 교훈이 나오는 골로새서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원수가 친구보다 고마운데 그 이유는 친구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잘 보지 못하고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지만, 원수는 나에 대해서 미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장점보다는 약점을 잘 봅니다. 원수가 나를 혹독하게 비난할 때 그 속에 악한 의도가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본인,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원수가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불경에 그대로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한 이야기가 왜 여기에 써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원수는 친구보다 나을 때가 많으니 친구만 가까이 하지 말고 원수도 가까이 두라. 왜냐하면 그가 너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인데 이 진리는 세상 모든 피조물 속에도, 인간의 심성 속에도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줄 수 있을만한 충분한 지식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에는 너무나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게 하는 지식입니다. 이런 흩어진 지식들을 가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버무려 인간의 마음대로 만든 것이 세상의 종교와 사상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진리를 일부 가지고 있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비벼낸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주님을 믿으며 살아야 하는 지를 올바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성경입니다.
참된 신자의 신앙생활
이 땅에 있는 귀하고 천한 모든 인간들, 가난하고 부요한 모든 인간들, 피부색, 인종, 민족이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될 참된 인생의 지혜를 시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큼의 신앙생활을 하고 나면 이런 지혜가 마음에 생겨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혜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길을 가다가 너무 고달플 때 한번 씩 비상구를 열고 탈출하러 들어오는 곳이 신앙이라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참된 창조의 목적에 적합한 인간이 되어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참된 신앙은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력으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은혜를 힘입어 참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라는 중간적인 목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드시려고 했던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온 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될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삶 전체에 걸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간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 아는 지식이 기반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견고함과 지혜가 더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삶과 믿음의 지혜입니다.
지혜로 환란의 날을 이김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시 49:5-12)
믿을만한 것, 지혜
시인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물에 의지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사실 재물은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가 믿을만한 것입니다. 사람도 떠나고 권력도 떠나고 자기를 도와주고 의지할 수 있게 해주겠다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변하지만 자기 수중에 있는 재물은 자기를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재물은 자기가 살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재물은 의지할만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때 잘 나가던 젊은 연예인이 자살을 했습니다. 부부가 다 기독교인이고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됐는데 부인을 남기고 자살을 했습니다.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빚이 많으니까 괴로워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재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재물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고, 지혜 있는 자든 어리석은 자든 결국은 죽고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믿을만한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5절에서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라고 말합니다. 재물을 의지하면 환란을 피하고 죄악이 따라오는 시련의 날들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시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영적인 삶
지혜가 만일 등불이라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영적인 삶은 전원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지혜를 주셨어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있을 때에만 지혜가 빛이 나서 그의 일생의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밝혀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 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영적으로 교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지혜가 밝고 찬란하게 빛났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영혼의 어두움이 오자, 지혜는 그의 인생을 망쳤습니다.
지혜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삶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영적인 교통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지혜는 진가를 발휘합니다. 지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지혜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그렇게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거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끊임없이 경외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오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과 은혜가 지혜에서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통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본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믿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죄악이 자기를 둘러싸고 환란이 자기에게 미쳤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하나님이 자신이 가야할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도 잘 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 매 순간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래서 주님을 붙드는 사람, 주님 안에서만 소망을 품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구속하시는 하나님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니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시 49:13-15)
본문해설
본문에서 말하는 ‘저희의 이 행위’는 제물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번영하여 사람들에 의해 추켜세워지는 사람들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어긋난 길을 간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 맞서는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당시의 사람들 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도 그러한 사람들의 말을 칭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당대에도, 또 미래에도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원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과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다른 하나님의 시각
사실 교회는 늘 유혹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신령한 변화 없이 보편적으로 그런 신앙의 영향을 받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마주해서 영혼이 변화되는 일 없이도 신앙을 보편화해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교회 역사가운데서 단 한 번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 문을 넓게 열어서 세속주의가 들어오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부패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아무나 와도 좋다고 했던 때에 교회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들을 만들어 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문턱을 높여서 “이 정도로는 교회 회원이 될 수 없다.”라고 했던 때는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기독교 신앙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람이 근본이 바뀌지 않는데 단지 옷을 갈아입고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살인범에게 살인하고자 하는 본성 자체는 추호의 변화가 없음에도 색색의 옷만 갈아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러움을 사고 칭찬을 받는 사람일 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그들을 보신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직한 자와 악인을 구별하심
하나님께서는 늘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 대신 섬기면서 무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십니다. 잠시 악인이 번영한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사용해서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십니다. 본문은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라는 것은 밤에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어둠이 지나가고 필연적으로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 아침은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정직한 자가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이 땅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통치 권한을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한때 번성했던 사람들은 거처조차 없어지고 형체조차 사라질 정도로 소멸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특징은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스쳐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는 그 영광과 번영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악인의 번영을 벤 풀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잡초가 자라서 잔디에 섞여 올라와서 기계나 낫으로 베어버리고 나면 사람들은 굳이 그 풀을 모으지 않습니다. 지금은 지저분해도 한 나절만 지나면 뿌리가 잘린 잔디는 햇볕에 모두 말라서 검불이 되어 없는 것처럼 잔디 사이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번영하는 악인의 최후와 같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잠시 성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버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없는 것에서 만들어졌고 그 성질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거기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고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육체는 세상과 함께 사라질지라도 그 영혼은 영원을 향해서 살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종말의 소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에서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악인이 번영할 때는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보호가 사라진 것처럼 고난을 받기도 하고 홀로 버려진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의지하고 세상의 번영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영접하십니다. 진실로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사 간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꿈꾸는 번영과 욕망을 따라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뵙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생의 참된 행복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인 것과는 반대로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이자 고통이고 괴로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바라는 영혼을 잠시 어둠속에 두시는 것 같으시지만 언제나 악인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부패하고 변천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그를 영접하셔서 그 영혼을 음부와 같은 고통의 현실에서 구원하고 구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는 큰 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참된 행복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크게 번영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월이 흘러 우리 육체는 부패하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라질 영광과 진정한 존귀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6-20)
본문해설
영광이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지님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로 본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겠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떤 것을 소유하며 어떤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달리 보고 다른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한 통계 결과에 따르면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따라 다른 대접받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옷 하나만 다르게 걸쳐도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은 타인을 평가할 때에 외모의 영광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영광과 헛된 영광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세상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더해질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영광은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나기 때문에 신자는 항상 종말론적 빛 아래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삶을 삶으로만 비춰보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광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지만 그 삶을 죽음의 빛으로 비춰보면 비로소 어떤 것이 헛된 영광이고 어떤 것이 참된 영광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람이 많은 영광을 누렸더라도 죽으면 가져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렸던 많은 영광은 사람에게서 받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영광이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그 영광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살 때 사람들에게 많은 축하와 칭찬, 영광을 받으며 살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그렇게 살았던 자기 조상들이 간곳, 그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휘장을 지나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인정, 영광, 존귀함, 높임을 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들의 삶과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일단 죽음의 휘장을 지나고 나면 자기에게 박수치고 영광을 돌리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대신 하나님만이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은 죽음의 휘장을 지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의 시간이나 공간, 세상에서의 욕망, 헛된 영광 등에 가려 잘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온전히 뵈옵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본성적으로 자기 영혼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죽음의 휘장을 지나 맞닥뜨리게 될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 자체를 두려워는 것 보다 죽음 이후에 만나게 게 될 현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잠잘 때 마다 악몽을 꾼다면 잠드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잠드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잠든 후에 만나게 되는 꿈의 세계를 직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죽음 이후에 맞이할 현실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온 이후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존귀한 자의 생활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기 위하여 깊은 목마름으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거기에 소명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리처드 백스터라는 청교도는 “성도의 참 안식은 죽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여전히 죽음은 두려움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만나게 될 그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존귀에 처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존귀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높이 들리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쥐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에 싸여서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존귀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존귀는 하나님께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붙잡혀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바로 존귀한 자의 생활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존귀한 자의 삶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지위가 소중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런데도 이 땅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 이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팔기를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 것처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팔아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이 과연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그 순간 삶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죽음의 빛은 잠시 사라질 것과 영원히 남을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인생의 유한함을 노래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을 만나는 것을 통해 매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 신자인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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