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영원한 사랑이심 (요일4:8) 2005.10.24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애성을 주심 (요일4:8) 2005.10.25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0
3. 사적인 사랑(요일4:8) 2005.10.26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39
4. 악한 삶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일4:8) 2005.10.27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61
5. 사랑으로 선을 받아들임 (요일4:8) 2005.10.28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81
1. 영원한 사랑이심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이 편지는 요한 사도가 자기의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비교적 후대에 쓴 편지인데 이 편지 속에서 사도요한은 요한 일서 전체에서 성도의 교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의 중요성에대해서 계속해서 말하는 가운데 오늘 매우 중요한 선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라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교제에 대해서 강조를 하게 되었느냐면 당시에 그노시스주의라고 하는 아주 이단 사상 하나가 지역 전체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이 그노시스주의는 동양의 신비사상과 서양의 철학이 만나서 만든 괴물 같은 이단이었습니다. 이 이단의 내용이 오늘 소개하면서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습니다. 그런 핵심만 이야기 하자면 이 소위 그노시스주의 혹은 영주주의라고 하는 이단은 이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영적이고 매우 신비한 지식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주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매우 힘들고, 또 동시에 우리의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영혼은 매우 고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면서 육체가 죄를 지어도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선파 했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인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순전한 영이신 그분이 그렇게 더러운 물질의 육체를 입고 오셨을 리가 없다. 그래서 육체를 입으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이러면서 황당한 교리들을 전파해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요한 사도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믿는 사람들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환란과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오는 핍박들이 그들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 가장 무서운 위협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여러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런 이단에 흔들려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이단보다도 더 무서운 세상의 향락이 여러분들을 뒤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단보다도 더 무섭고 강력한 세상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그래서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하는 여러분들을 신앙의 길에서 이탈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도 역시 똑같이 이 시대에 사도 요한이 그런 이단 앞에서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 모든 것을 이기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그 무엇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앎의 중요성이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내용들을 이 시간에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니까 사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지식을 가지고 개념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그런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안다고 이야기 하지 않죠. 그 비근한 예로 지금도 히브리에 가서 이스라엘에 가서 어떤 여자가 남자를 향해서 “나 저 남자 잘 안다.” 라고 이야기 하면 혼사 길이 막힌답니다. 왜냐면 그것은 같이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안다 의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 아는 것이 지식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여서 그 지식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과 사랑은 항상 하나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참된 사랑일 수가 없고, 사랑이 없는 지식도 참된 지식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중에 설명이 되겠습니다. 만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는데 그 형상 속에 들어가 있는 핵심적인 두 요소가 뭐냐면 지성과 사랑입니다.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뭐냐면 인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사랑할 수 있고, 이렇게 인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피조물은 우리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동물들은 인식이라고 하지 않고, 지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덥고 차갑고, 그다음에 어둡고 환한 것을 아는 것, 이런 것들은 지각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지각을 뛰어넘어서 인식할 수 있는 지성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는 것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두 가지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매일, 매일,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과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자기의 마음속에 참된 지식으로 남아있도록 그것을 보존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오늘 한 5시간쯤 설교를 하고 싶은데 그러면 내일 아무도 안 나올 것 아닙니까. 제가 지난주에 말씀을 준비하러 가까운 기도원에를 갔는데 오래 못 있고, 딱 4일 있었습니다. 4일 동안 전부다 합쳐서 14시간 정도 잤습니다. 나머지 시간에 뭐했겠습니까? 놀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다하겠습니까.
그러면 요약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앎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비교하면 됩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이상하게 특별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신앙이 막 식을 때 있죠? 특별한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하겠는데 뭐 잘 한 것도 별로 없지만 특별히 뼈 부러지게 회개 해야 될 그런 것도 없고, 그냥 교회에 다녔는데 슬금슬금 미끄러져서 가보니까 바닥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러는데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옛날에 벌써 “은혜와 부패” 라든지, "올곧음“ 이라든지 이런 곳에서 많이 다뤘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 하나님을 앎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닥불을 들판에 피웠습니다. 피웠는데 불이 꺼졌어요. 불을 끄려고 막 물을 갖다 부어도 불이 꺼지지만 불을 피워놓고 어디 다른 곳에 갔다 오면 저절로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땔감이 없으니까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왜 그러느냐면 자디잔 죄들도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무엇 때문이냐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땔감들이 그 사랑의 불 속으로 계속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아, 나는 이제 됐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 내가 테이프를 1000개를 들었다고, 아직 멀었습니다. 2300개 입니다. 1000개를 들었다고 자랑하는데 2300개입니다. 1000개를 들었다고 자랑하는데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한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자기가 침체에 안 빠지면 나는 펄펄 날아야 되겠네요. 웃기는 것입니다. 어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그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곤고하면 가끔 테이프를 듣고 해답을 찾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테이프 들으면서 해답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벌써 여기 이 속에 있는 것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가끔씩 이렇게 4일 5일에 하루에 2-3시간밖에 안 잘 정도로 하나님이 무엇인가 전혀 깨닫지 못했던 말씀의 세계를 열어서 내 가슴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속에 던져주실 때 내가 새롭게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매일, 막장으로 석탄을 캐러 내려간다. 라고 하는 그 뜻이 바로 그 뜻입니다. 이 정도면 됐죠. 더 하고 싶은데 더하다가 막 끌고 가다가 혼도 내고 싶은데 그러면 못 나갑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이제 뭐냐면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 계속 주어야지만 이것이 계속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은혜를 받는 설교는 쉽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쉽습니다. 그러나 한 10년쯤 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예배 시간마다 새로운 연료가 불 속에 던져지는 것, 이것은 나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몇 달에 한번씩 내 영혼을 휩쓸고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불길을 계속 해서 보존하는 것을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두 번째 것을 먼저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다음에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면 이제 불이 꺼져버려요. 타오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집어넣으면 되는데 이것을 끝까지 안 집어넣어요. 그러면 연기만 내고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사님 옛날에 깨달은 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옛날에 깨달은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타다가 만 장작처럼 새카맣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장작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도끼로 쪼개면 딱 쪼개지면서 하얀 장작이 나오는데 겉은 다 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불을 피워보면 알지만 새 장작을 가지고 피우는 것이 쉬워요. 아니면 새카맣게 탄 것을 가지고 피우는 것이 쉬워요? 새 장작이 훨씬 더 잘 붙습니다. 회개하세요. 정말입니다.
쇠도 처음 불에 달구는 쇠는 금방 두들기면 금방 누글누글합니다. 한번 불에 달았다가 식은 쇠일수록 단단합니다. 무쇠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복하면 그것이 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들기면 찌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팍 하고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이 강퍅해지면 완전히 짐승같이 됩니다. 굉장히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하나님의 적절한 심판도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많이 깨닫게 하셨는데 너무 막 사니까 하나님이 그 지식을 주신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앎의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새롭게 깨닫지 않으면 언젠가 깨달음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사랑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나에게 요구하느냐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장작을 집어넣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왜? 그것을 이해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만 나에게 주십시오. 그러는데 그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꿈베르보”의 신앙입니다. “베르로”라는 말은 라틴어로 “말씀과 함께” 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항상 역사하시는데 말씀과 함께 역사해요. 오늘 여기 설교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말씀 제쳐놓고 어디에서 불 받는다고 돌아다니다가 형편없이 되어서 손들고 온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손들지는 마세요. 다 아는데 들면 뭐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계속해서 장작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타오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신자들이 계속 해야 할 의무입니다. 1000개 들은 것 가지고 너무 그렇게 재지 말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가지고 안 됩니다. 1만 개를 쏟아놓은 나도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하다 말았는데 그러면 그렇게 타다 만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불을 붙여야지. 그런데 불을 붙여야 되는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렵냐면 심리적으로 생각하면 지적인 호기심이 없습니다. 뭐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 처음에 알았을 때는 너무 신기하고 아,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이랬는데 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것을 가르쳐줘도 이 마음속에 그것을 받아들일 요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침체의 깊은 늪 속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채워지지 않아요. 그러면 어제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영혼의 깊은 곤고함이 오니까 굉장히 사람이 생각할 수도 없는 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내 안에 있을 때 그 지식은 사랑으로 불붙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이 지식이, 사랑으로 불붙고 있는 이 앎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호세아 선지자가 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냐면 “너희가 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은즉 나도 너를 버리리라.” 그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 목숨을 걸고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는 모든 것, 학문이나, 예술이나 기술이나 모든 것을 통해서 이 창조의 이치를 배워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는 그 위대한 교부가 무엇을 이야기 했느냐면 “베르스필로스오프스에스트아마또르데이” “진실한 지혜 자는 참된, 지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참으로 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없다. 왜?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영원부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극단으로 치우쳐서 이해를 하게 되면 이제 문제가 야기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말을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속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속성은 뭐냐면 단순한 일부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그것이 되지 않는 그 부분, 그것을 가리켜서 속성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미녀가 있다고 쳐요.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나온 영화 가운데 하나가 “얼굴 없는 미녀” 그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괴기 영화인데 사실은 그것이 말이 안 되죠. 이 미녀라고 하는 것이 얼굴이 핵심인데 그래서 얼굴에 바르는 로션하고 손에 바르는 로션이 다르잖아요. 전혀 느낌이 없으신 모양인데 얼굴에는 비싼 것 바르고, 손에는 싼 것 바르잖아요. 그 얼굴이 핵심인데 얼굴이 없다. 미녀의 속성은 얼굴입니다. 그처럼 그것을 빼면 하나님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자면 “완전성” 같은 것,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완전하시다. 그런데 그것만 싹 빼요. 하나님이 가끔 실수도 하시고 잊어버리시기도 하고,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시다. 그러나 능력은 무한하시다. 이러면 하나님이 안 되시는 것입니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이런 것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속성 속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의, 완전함, 거룩함, 뭐 여러 가지 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중에서 사랑 하나만 매우 특별하게 확 부각시켜서 사랑하나밖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인간들에게 그것이 굉장히 평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하나님은 전체가 사랑이신 것처럼 그렇게 묘사를 해서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면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도, 죄인들을 벌하시는 성품도 이런 것도 다 묻혀버리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과장을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우리들이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혼내시거든요. 나라도 징계하시고, 사라지게도 만드시고,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다는 것을 보여주셔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 많으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제멋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쇠창살에 갇히셔서 교리의 쇠창살에 갇히셔서 그래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시면서 “얘들아, 얘들아 그러면 안돼. 제발 날 생각해서 그러지 말라. 내가 오죽하겠니?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식으로 굉장히 많이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의 공정하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교회에 대해서 징벌하시는 거룩한 성품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회개의 목소리를 못들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다음은 뭐냐면 그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딱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성품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그렇게 다른 모든 속성들을 다른 여러 가지 많은 속성들이 있는데 그중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왜 그것을 균형을 잃었는지 설명을 5일 동안 계속 하게 될 것입니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면 균형 있는 태도는 무엇이냐?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은 공정하게 하나님 안에 하나님을 참 하나님 되게 하시는 속성입니다. 어느 속성이 어느 속성을 잠식해버린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안 됩니다. 아까 사랑이라는 창살에 갇혀서 하나님은 계속 인간들이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눈물만 흘리시면서 제발 나를 봐서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리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과대해서 나머지 속성들을 그 가정에 희생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려내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공정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공종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풀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사랑의 속성이 다른 모든 하나님의 속성과는 틀린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랑의 속성을 다 잠식해버리는 그런 의미의 속성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속성들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속성 속으로 쭉 베어있는 그런 종류의 속성입니다.
왜 그런지 이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오늘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God is love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이 이야기는 곧 뭐냐면 하나님과 사랑을 똑같이 놓고 이야기 할 정도로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매우 중요한 존재의 특성이 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면 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원래 하나님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신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에 갑자기 하나님이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죠. “하나님이 사랑이 되셨다.” 이렇게 얘기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는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것을 영원히 학대해도 변함없는 본질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라고 그 본질이어야만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이것이 유리다. 라고 하려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유리여야지 유리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만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이제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 혼자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에서도 하나님 안에 이미 있던 사랑입니다. 이 개념이 이제 사랑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개념이 되고, 이것에 의해서 하늘과 이 땅과 하나님의 세계가 전체가 통합이 되고 이 사랑이 스며들어서 이것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인데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신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어, 하나님 되게 이기적이시네 자기만 사랑하시고” 그런데 어떤 명제가 성립하느냐면 하나님의 이기적인 사랑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에게는 이타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만물을 사랑하시는 것이냐?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만을 사랑하시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됩니까? 원래 이 모든 천지만물과 인간이 아무것도 없고 무의 상태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최근까지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에 의하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르지만 이 우주의 나이를 146억년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거리는 150-960억 광년 정도 된다고 보고 지금도 팽창해서 1초에 2000킬로미터씩 우주고 커진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쯤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랬더니 과학자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이 우주 전체의 크기가 아주 작은 양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작은 핵 같은 거였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쾅하고 폭발을 일으키면서 이런 세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잡지 같은 데서 보면 블렉홀이라는 이야기 가끔 나오죠. 어느 과학자가 진단을 했습니다. 지구가 오래 후에 결국은 소멸될 터인데 그래서 빨려 들어가서 블렉홀로 들어가게 되면 지구 전체의 크기가 1.4미리 미터의 작은 물질로 변한데요. 물론 하나님은 그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창조하신데서 다시 창조하셨지만 어쨌든지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 헤아릴 수 없는 960억 광년쯤 된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가 먼지보다도 더 작은 핵이었다고 본다면 그 안에 지구도 있고, 그 안에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우리 인간에게는 먼저 창조되고 나중 창조되고 이런 것이 있지만 하나님은 현제 과거, 미래가 없잖아요. 한꺼번에 내려다보시잖아요. 그리고 그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조하기 전에는 그러면 어디에 있었을까? 창조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각안에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 세상과 창조될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그것입니다. 펑 하고 이것이 다 창조된 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그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로 감격이 안 되세요? 나는 감격스러워서 잠을 못 잤는데.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이런 중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이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죠.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어떻게 추론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성삼위간의 사랑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 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부터입니다. 창조 하고나서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시작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자체가 일관성이 없잖아요. 사랑이 아니시다가 어느 시점에서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언젠가는 또 사랑이 아니실 수가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성경의 진술과는 모순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적 본질과 존재는 변함이 없어야합니다. 똑 같아야합니다. 그래야지 그 하나님을 우리들이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잖아요. 변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 변합니다. 천사들이나, 인간이나, 하여튼 하나님 빼놓고는 모든 것들은 다 무에서 창조되었고, 무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다 변합니다. 인간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변합니다. 하나님만 불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전에도 사랑이셨고, 항상 사랑이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잖아요. 항상 사랑이셨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그러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셨나?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누구를 사랑 하셨느냐 천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천사들이 언제 창조되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부주의하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영원무궁 세계 안에서 천사들이 창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면 천사 선제설이 되겠네요.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영원이 시간이 없기 때문에 먼저, 나중 그런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머릿속에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언젠가는 영원 세계 속에서도 성부혼자 계시던 때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두 분이 되시고, 그다음에 세분이 되셨구나.” 이것은 뭐냐면 영원 속으로 시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들 이해가 안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아주 확실하게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백지가 한 장 펼쳐져 있어요. 거기에다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습니다.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미 그려진 그 위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릴 수 있습니까? 그릴 수는 있지만 누가 그것을 보고 두 개라고 합니까. 똑 같이 그 선위에 그렸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죠? 그것이 바로 이차원입니다. 이차원이니까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설명이 안 되느냐면 어떻게 하나가 이미 있는데 그 위에 어떻게 올라가느냐는 것입니다. 설명이 안 되죠. 그런데 삼차원에서는 설명이 됩니다. 성경이 여기 있는데 위에 이렇게 딱 놓이는 것입니다. 두 개가 같은 장소에 있을 수가 있죠. 그런데 이것은 뭐냐면 평면에서 그림으로 그릴 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올려놓으면 이것은 평면이 아니고 입체잖아요. 그것이 바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차원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차원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이 사람에게 삼차원을 죽어라고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세계의 밖에 존재해본 적이 없습니다. 성부였었는데 성부이면서 성자가 나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다. 그러는데 이것이 이렇게 나란히 서야지. 어떻게 영원히 같이 계시냐? 이분에서 나왔다며 그러면 이분 혼자 계시던 때가 있었잖아, 이것은 뭐냐면 시간을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뭐와 똑같으냐면 이차원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그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봐라 두 개가 안 되잖아. 그런데 아, 될 수가 있어 이렇게 된다니까. 이 차원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이 안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면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셨는데 성부 혼자 계신 적도 없고 성자 혼자 계신 적도 없는 것입니다. 항상 영원 전부터 같이 계신 것입니다. 왜? 영원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세계에서 천사를 창조했다. 그러면 순서가 다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천사들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이 영원인데 저쪽 영원이 아니라 사람창조 가까운 쪽으로 간 영혼이다. 대답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성경이 기록은 생략하고 있지만 첫째 날 창조되었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기 직전에는 하나님이 천사를 창조하셔서 천사들과 사랑을 나누셔요. 그러면 천사들을 사랑하시기 전에는 그러면 어떻게 했느냐? 천사들도 없어요. 그것은 영원 세계니까. 그 안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그 속에서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이 몇입니까? 여러분 한 400년 전에 태어났으면 전부 다 화형 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태워 죽은 이단들의 교리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세 인격을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이야기는 세분이 찰떡처럼 달라붙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몸은 달라붙고, 성부의 머리, 성자의 머리, 성령의 머리 이렇게 나온 찰떡처럼 달라붙은 마치 말하자면 삼 두의 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분입니다. 성부는 성부, 성자는 성자. 성령은 성령, 세분 이십니다. 세 인격이십니다. 그런데 일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삼위라고 하는 뜻은 원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중국집 많잖아요. 음식점, 그러면 제일 먼저 몇 명이냐면 물어봐요. “싼위” 그러면 우리 세 사람이야. 그러면 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 위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인격입니다. 세 인격이신데 몸이 하나다. 라고 하는 그 몸은 물리적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에 있어서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분 하나님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똑같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신적 본질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삼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세 분이라는 점에서는 일체 삼 두의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분 입니다. 세분이신데 우리들이 삼신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얘기하느냐면 인격 하나에 사람 하나입니다. 그렇잖아요. 한 사람에 인격이 두개가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정신병자입니다. 다중인 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인데 인격이 반 밖에 안 들어갔어요. 그런 것은 없잖아요. 죽기 전에 어떻게 인격이 사라지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약에 한 인격을 세분이 나누어 가지셨다. 그러면 하나님을 장애인 만드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인격과 인격을 가진 존재는 서로 교통할 수 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고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 안에서 서로 교통을 하는데 그 교통의 본질이 뭐냐면 사랑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모든 속성과 똑같기 때문에 하찮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이유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삼위 안에 아무것도 없고, 영원 세계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교통하며 사랑하셔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만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자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상 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공의, 그다음에 거짓말 하는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실,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만 계실 때에는 다른 속성들은 그 안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적어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는데 성령이 무슨 잘못을 하신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럼 잘못하시면 그 잘못하신 성령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든지 무엇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 의라는 성품이 확 드러나겠지만 그분 자신들이 한분, 한분이 완전하신 분이고 따라서 그분이 이루신 이 일체의 연합이 완전해요. 그러니까 이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의 그 모든 것이 있지만 실제로 밖으로 흘러 넘쳐서 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오늘 하나님의 성품이 많이 있는데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존재가 그런 분이었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품이 이제 아래로 계시가 되면서 그래서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 자신의 그것과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적용되면서 하나님의 성품이 마치 사랑이었던 프리즘을 통해서 확 빛이 분산되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나오듯이 이렇게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들이 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보랏빛처럼 비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하나, 하나를 우리들이 따라서 살아갈 때 그 때 우리가 하나님께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겠고, 그 하나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다는 사실이 이제 이런 식으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충만한 사랑 가운데서 삼위가 함께 교통하시면서 그 교통 안에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 안에서 있었던 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이 사랑을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이 삼위의 하나님이 세분이시지만 각자 따로 존재하지 아니하시고, 영원 전부터 교통하면서 존재하신 것입니다. 이 교통하시는 그 성삼위 하나님의 이 교통의 모상, 카피 본, 그림자, 혹은 카피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닮은 교통을 하나님이 이 창조 세계에 그대로 투사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천지와 인간의 창조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떤 식으로 이 교통이 투사되게 되었느냐? 라고 하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교통하십니다. 핵심이 둘인데 사랑과 교통입니다. 사랑은 조금 있다 설명하고 교통을 하셔요. 그래서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할 때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고백하죠. 그 때 그 교통의 의미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있었던 그런 교통을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교통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교통은 죄에 의해서 방해받고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어쨌든지 그런 종류의 교통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통은 이제 어떻게 설명되느냐 수직과 수평으로 다 설명이 됩니다.
먼저 이제 수직으로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면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하늘나라를 창조하셔요. 그래서 하늘나라를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이 땅에는 지상의 나라를 창조하셔요.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셔서 그래서 하늘에는 천사를 두어서 섬기게 하시고 땅에는 인간을 두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가꾸게 하심으로서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이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그런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먼저 하늘나라의 세계를 먼저 창조하셔요. 그것이 창조될 때 그 안에서 먼저 천사들도 함께 창조된 것이죠. 그렇게 해서 그 첫 날 이 세상이 창조되고, 창조된 가운데 이제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속에서 천사들을 다 창조하십니다. 그 천사들과 천사들 안에 하나님께서 성삼위 안에 있는 그 교통의 모상을 그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사들끼리 이루어진 모든 연결이 하늘 교회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천상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교회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이 영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된 가운데 그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천사들과 또 다른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의 찬란한 영광을 그 속에서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또 밑으로 내려오면 이제 이 지상의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셔요. 하나님이 각자의 피조물들을 다 창조하셔요. 이 피조물들 하나, 하나를 창조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이가지고 계신 탁월한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이 만물들을 창조하셔서 그것이 있어야 될 자리와 작용해야할 작용들을 하나, 하나에다 다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 그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나, 하나가 완전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그것이 다른 것과 어울리는데 있어서도 모두 다 완전하게끔 그렇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을 두셔서 그래서 인간들이 그 안에서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그 연결과 유사한 연결을 이 세상에 있는 미생물부터 시작해서 하늘에 있는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결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연결의 통로를 타고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거기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연결을 이루는 것이 무엇 때문에 이루어지느냐면 성령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 하셨느냐하면.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는데 이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영이 모든 곳에 스며들면서 신성의 영광에 충만하게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창조의 찬란한 빛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있는 이 모든 인간들의 연합이 이 교회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연합인 이 교회가 교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면 똑같이 성령 안에서 이들 각자가 똑같은 성삼위 안에서 있던 그 사랑의 모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에 의해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이 그 모든 피조세계 안에 있어서 그 성령 안에서 사랑을 가지고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 떨어지게 되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주 표독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통을 이제 이 지상에 있는 세계, 천상에 있는 세계, 천상과 지상에 있는 세계, 그다음에 천상과 지상에 있는 세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이 교통하는데 이 교통을 무엇을 통해서 교통하느냐면 동질의 사랑을 가지고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러면 이제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지순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순수해질 수 없는 사랑” 그것을 “지순의 사랑”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라틴어로는 “까리따스” 교부들 속에서 계속 정립된 용어입니다. “까리따스” 입니다. 그 까리따스의 사랑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향해 갖게 되는 사랑 있잖아요. “아, 나는 정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버려도 나에게는 우리 주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사랑이 있잖아요. 그 사랑이 원래 성삼위 안에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랑이 어떻게 해서 주어지게 되었느냐면 성삼위 하나님 안에 있던 교통의 모형을 창조세계에 그대로 하나님이 전수시키셔서 성부, 성자와 성령이 교통하시는 것처럼 인간들이 교통하고, 천사들이 교통하고, 또 천사와 인간들이 교통하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교통하도록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있던 이 지순한 사랑, 그런데 거기에는 지순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불결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냥 사랑입니다. 까리따스 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아가페입니다. 그런 아가페의 사랑이 성부, 성자, 성령 안에 있는 사랑이었는데 그것의 그림자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천사들 속에도 주시고,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인간들 사이에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차이는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성부, 성자, 성령 안에 있던 사랑과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창조된 인간 사이에 하나님이 맨 처음에 주셨던 아담과 하와 사이에 주셨던 그 사랑이 동질의 사랑입니다. 같은 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동질의 사랑인데, 그러나 동질의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틀립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 우리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기름집에 식용유를 사러 갑니다. 들기름하고, 참기름은 질이 틀린 것이죠. 용도부터 틀립니다. 김 구을 때에는 들기름으로, 그다음에 제가 김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김 구을 때에는 들기름으로 그다음에는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서 볶을 때에는 참기름으로 이 두개가 가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참기름인데 하나는 국산이고, 하나는 중국산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질은 똑같아요. 동질의 것입니다. 참기름이라는 면에서는 동질이잖아요. 그런데 똑같다고 말은 못하잖아요. 중국산 먹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 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닙니다. 똑같이 그런 것입니다 성삼위 안에서 나누었던 사랑이 국산 참기름이라면 우리 인간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은 참기름은 참기름인데 중국 변두리 산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지 참기름 사이의 질적인 동질성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의 핵심이 뭐냐면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은 의존적 사랑이고 성삼위 안에 있었던 사랑은 독립적 사랑입니다. 자, 무슨 뜻이냐면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의존적이 됩니다. 의존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증명 해보겠습니다. 어제 했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안 나겠지만 둘이 뜨겁게 사랑하던 부부가 있고, 둘이 매일 싸우는 부부가 있는데 같은 날 남편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두 명의 홀로된 여자가 생겼습니다. 누가 빨리 시집가는 여자가 누구겠습니까? 남편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여자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남편을 뜨겁게 사랑했으면서 어떻게 그러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의존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빨리 가야합니다. 왜냐면 혼자 있으면 우울증 걸려요. 그것을 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얻어맞으면서 산 그 여자는 원래 남편의 자리가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떠나가도 무슨 배 지나간 자리입니다. 갔나보다. 다시 못 온데. 그것 잘 되었네. 그것 참 다행이다. 그 인간 다시 나타날까봐 걱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얘기입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의존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에는 너무 의존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집을 못가면 어떻게 되느냐면 울화병에 걸리든지, 자살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의존적인 것을 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매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자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자녀 많이 사랑하면 자녀에게 실망을 많이 하죠. 왜냐? 의존을 했는데 자기 뜻대로 안 하니까 자꾸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들 막 예뻐하다가 장가간다. 그러면 막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이 색시 감을 데리고 오면 그때부터 골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심리입니다. 이렇게 인간 속에 있는 사랑은 서로 의존적입니다. 그런데 성삼위 안에 영원 전에 있었던 사랑은 의존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존적이라고 말하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면 성부, 성자, 성령, 각 위가 불완전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의존을 해야 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불완전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분이 같이 있으면 하나님이 되실 수 있지만 한분, 한분은 하나님이 되기에는 뭔가 좀 의존해서 도움을 받으셔야 되는 분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한분, 한분으로서 충분하고, 그러면서도 세분이 완전한 한 하나님이신 것이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분 안에 있는 사랑도 상대방에 대한 의존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사랑은 의존적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모형으로 찍어서 동질의 사랑을 의존적 성격을 하나님이 첨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그렇게 하나님이 의존적인 성격을 우리에게 첨가하셨을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존적인 성향을 첨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서로 기대면서 살라고, 이것의 증거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이런 의존적인 것을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 중에 교리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목사님, 옛날에 가르쳐준 것과 틀립니다.” “뭐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겠죠. “분명히 목사님이 교리를 가르쳐주실 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완전했으며 인간도 한점의 죄도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을 서로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사랑을 주실 때에 의존하는 성향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안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책 한권 주겠어요. 얼마나 열심히 들었으면 그것을 기억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가 완전한 것은 맞습니다. 그 인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였다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이제 거기에 문제가 있는데 뭐냐면 그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신 그 기준을 놓고 볼 때 완전한 것이죠. 그렇게 안 됐다. 그러면 “그대로 안 되니라.” 성경에 이렇게 기록해야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래도 되니라. 이것이 아니라. 그대로 안 되니라. 이렇게 되어야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교리적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되었는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 때에 당신하고 똑같이 만드실 생각은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신을 창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성부, 성자를 발출시키시듯이 그렇게 인간을 만드셔서 영원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영존하는 그런 존재를 만드시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면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한 인간의 기준으로 보고, 아직 죄가 없다는 기준으로 보면 완전하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 같은 완전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구나. 또 하나 그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이 만든 수준에서 죄가 없고 완전했지만 이 완전은 확고부동한 완전함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죄가 들어와서 뒤집힐 수 있는, 인간 의지에 의해서 뒤집힐 수 있는 그런 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는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면 불안전한 완전, 완전하기는 완전한데 안전하지를 않아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서로를 의존하는 성격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시는데 아담을 먼저 만들어 놓으셔요. 그러니까 한참 있다가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도 모르시고 만드셨다면 문제가 있죠, 하나님의 성품에 그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하여금 홀로 있는 것이 적적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를 보내야지만 야, 이것이 진짜 좋은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되지 혼자 있는 것 굉장히 좋은데 괜히 객식구가 하나 와서 옆에 계속 따라다니면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래서 독립심이 강한 남자들과 결혼하지 마세요. 그러면 평생 찬밥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아담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혼자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아요. 하나님이 비로소 깨달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충분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드시는 방법이 그림 같습니다. 그 여자를 남자는 흙으로 빚으셨으니까 뭐 저라면 양성 평등 주의자니까 흙으로 빚으면 되고, 또 남성 우월논자들은 남자는 흙으로 지었으니까 돌가루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뭐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아담을 재우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으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여자를 만드셔요. 그 갈비뼈가 왜 갈비뼈일까? 손목뼈를 부러뜨려서 만드신 다든지 손가락 하나, 맨 처음 6개 창조하셨다가 5손 6손 만들었다가 6손에서 창조하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갈비뼈를 뽑아서 만드셔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뼈에서 취하시지도 않고,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에서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깔고 앉도록 엉덩이뼈에서 취하지 않고, 그리고 남성의 보호를 받도록 이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그 여자를 빼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기가 막히게 이 인간 안에 주신 이 까리따스의 사랑에 의존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뽑아서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와가 나아오니까 아담이 반사적으로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살 중에는 없어도 되는 살이 많습니다. 뭐 또 배들을 만져요. 안 만져도 되요. 그것 뭐 배 나온 것이 죄겠습니까. 그렇지만 필요 없는 살은 많습니다. 굳은 살, 뱃살, 허리 살, 이런 것, 기름덩어리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그랬을 때 그 살은 배가 늘어진 속에 낀 기름 덩어리나 발뒤꿈치에 박힌 숯 돌로 긁어내야 되는 그 굳은 살.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뼈 중에 뼈, 살 중에 살, 이라는 말은 BEST입니다.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라고 하는 뜻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살도 엉덩이 살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얼굴 고칠 때도 여기 엉덩이 살 뜯어서 여기에 붙이고 그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도 심장의 살은 그렇게 뜯어내서 할 수가 없습니다. 뭐 손톱만큼만 떼어내도 사람이 죽어버립니다. 그런 종류의 치명적인 살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그 고백이 갖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이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 그런 이야기는 뭐냐면 그것이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일부가 너다. 그런 고백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고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변질되고 변질 되어서 요즘 “너 없이는 못살아” 이렇게 유치하게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너 없이는 내가 참 나일 수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둘의 사랑이 처음부터 아예 의존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서로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존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의 이 모형이 이것이 전 인류의 모형인데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잖아요. 마지막에 전 인류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의존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이 아담과 하와 속에 있었던 이 사랑의 이런 의존적 사랑을 하나님이 교회 안에 시범으로 만드셔서 이렇게 가꾸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속해서 성장시키셔서 세상을 이 사랑으로 전부 덮어서 그래서 서로를 의존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33편에 나와 있는 사상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둘이 같이 그냥 주민등록 같은 곳에 놓고 밥 끓여 먹으면서 죽어라고 싸우면서 사는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거가 아닙니다. 합숙이지. 여러분 가족도 합죽하는 가족들 있잖아요. 엄마, 아빠와 자식 몇 명하고 합숙하잖아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동거가 아닙니다. 동거의 기본 개념은 결혼 안 하고 사는 것이 동거가 아니라. 이 동거의 기본 개념은 사랑의 교통입니다. 의존적인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창조에 있었던 그 의존의 모형을 하나님이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구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그런 사람도 사이좋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런지 그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결론만 알고 있으세요.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만 그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가정과 교회 이 둘 보다도 중요한 단위가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 이런 사랑이 서로 의존적 이어야합니다. 남편 없이도 넉넉히 사는 씩씩한 여자. 그다음에 아무의 도움을 안 받아도 늘 스스로를 잘 챙기며 사는 걱정 없는 남편, 이것은 전부다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의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런 의존적인 사랑을 교회 안에서 확장해 가면서 그러면서 서로를 의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의존하고 의존하게 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이 더 순결하게 발전하고 발전해서 교회 안의 그런 사랑이 순도 높은 사랑이 꽉 채워진 그런 교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이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그 사랑이 그 사람 밖으로 펼쳐져 나가면서 그 사랑을 누리며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 사랑 속으로 들어와서 막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외국 근로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여러분들이라도 좀 따뜻하게 잘해 줘야합니다. 그렇게 한국에 넘어오고 싶어 하잖아요. 왜 그렇게 오고 싶어 합니까. 한국에는 뭐가 있어요. 와서는 항상 천대나 받고, 그러는데. 그런데도 왜 그렇게 오고 싶어 합니까. 오면 너무 유익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내가 조선족을 만났는데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에서 한 3년 정도만 벌어가지고 가면 여기에 올 때 들어갔던 비용 다 빼고도 거기 자기네 동네에 가서 빌딩을 하나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년 일하는데 한달에 한 200만원 정도씩만 번다면 말이죠. 남은 생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이 받아봤어요? 왜 그러느냐면 사랑이 여기에서 쫙 넘쳐서 교회 밖으로 흘러들어가요. 그 때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오면서 한국에 와서 취업한 근로자들보다 더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의 강물에 의해서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고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고치는 것은 폭력과 억압 설득과 교육.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으로 그 망가진 사람들이 고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인간 안에 이런 까리따스의 지순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셨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신자 이외에는 없습니다. 신자 안에만 그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뭐냐면 이 지순의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신자들 안에 이것이 항상 같은 정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시작하면서 이야기 했듯이 불이 펄펄 타오르고 거기에 계속해서 장작이 들어갈 때에는 그 사랑이 넘쳐요. 가득 차요. 진짜 자신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다 버려요. 그리고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의존하라고 내어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살 세상을 사랑해요. 기도 안하고, 그리고 말도 안 듣고, 그리고 부주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계속 그 불속에 장작을 넣을 생각도 안하고 태만하고 게으르게 살아요. 자기를 부인할 줄 몰라요. 자신의 욕망에 종노릇해요. 육신의 정욕을 쫓고, 안목의 정욕을 쫓고, 이생의 자랑을 쫓아서 살아요. 그런 속에서 까리따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무슨 물질을 소유했나. 어떤 높은 지위에 있나. 그런 것이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다고요?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 영혼이 그 사람의 존재를 빛나게 하고, 혹은 더럽게 하고, 이 영혼이 그 사람을 바른 길로 가게하고, 더러운 길로 가게 하니까. 이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은 이 사람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청년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다 영혼인데 아름다움의 정도가 다 틀려요. 그런데 오늘 이 순간에 한번 묵상해보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우리들이 모두 갔어요. 하나님이 한번에 우리 영혼을 모두 하늘로 올려 보내서 어두운 하늘에다 확 뿌려놓으셨어요. 별 같이 여러분들의 별은 빛나겠어요? 안 빛나겠어요? 어떤 상태입니까?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사랑을 전하라고 그 사랑을 통해서 성삼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여주라고, 너희의 조상들의 죄 때문에 다 망가진 이 세상을 내가 삼위 안에 있던 사랑을 너희에게 주어서 그 지순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고치려고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이 죄 많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아름다운 영혼으로 어떻게 그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 만은 매우 중요한 교리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미 벌써 여러분들이 사랑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잖아요. 그러면 지금 우리 안에 은혜와 함께 주어지는 사랑이 바로 그 수준에 있어서는 틀리지만 질에 있어서는 동질인 성삼위 안에 있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해요. 이 사랑이 나누어져요? 안 나누어져요? 안 나누어지지. 이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면 그 두 사랑이 서로 충돌할 수 없습니다. 왜? 두 사랑은 사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목표나 질서가 틀립니다. 예를 들자면 효도의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가 엄마, 아빠입니다. 그러면 효도의 사랑을 가지고 부모를 효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부모님을 효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부모님을 효도할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질서와 부모를 사랑하는 질서가 혼선이 안 생겨요. 부모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같은 사랑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따로 있고, 부모를 사라하는 또 다른 효도의 사랑이 있다고 하면 이 세계에서는 부모가 최고입니다. 저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한 사람 안에 두개의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이를 더 중히 여기든지, 저를 더 경희 여기든지 둘 중에 하나지 두개의 사랑의 질서가 인간 안에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이러한 사랑을 피조세계에 넘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간 이외에는 사랑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이렇게 질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생물들이 있고, 그냥 존재하는 것들. 두 번째는 살아있기만 한 것들입니다 식물들, 그다음에 뭐냐면 감각하는 것들입니다. 동물들입니다. 그 위에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 네 단계와 다섯 번째의 단계를 가진 것은 인간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은 성삼위 안에 있던 그 사랑을 자신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간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들이 자기를 의존하도록, 내가 그들에게 의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의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그 연장선상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있는 만물들을 사랑해야하지만 인간처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자기 사랑하는 똥개와 그다음에 어떤 못생긴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으면 똥개는 죽이고 그 사람을 살려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화분 하나가 물에 떠내려가고, 똥개 한 마리가 떠내려가면 화분은 떠내려가게 버려두고 그 똥개를 구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 속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아주 독특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같은 정신을 가지고 피조의 세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유추될 수 있느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잖아요. 사람도 사랑하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도 사랑하셨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돌이나, 풀, 악어나, 박쥐, 바퀴벌레나 풍뎅이를 인간하고 똑같이 사랑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 마음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자연을 대할 때 폭군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복하라고 다 주신 것이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다 때려 부수면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하지 않는 경우에는 모기도 죽이지 마세요. 왜 쓸데없이 왜 죽여요. 호주에 가면 법으로 못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기장 속에서 삽니다. 왜? 이것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드셨기 때문에 과다하게 급증한다든지 할 경우에는 정리를 좀 해야 되지만 모두 쓸어버리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질서가 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피해를 준다든지 문제를 일으키면 죽여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들을 보호하고 돌보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강아지 같은 것 막 사랑하고 재산까지 물려주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진짜 유산까지 물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 질환입니다. 이 의존적인 것들이 잘못 발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아지를 사랑해야 되는데 거기에 적합할 정도로만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강아지를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든지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러운 질서입니다. 인간을 가장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계속해서 펼쳐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그 안에 그런 사랑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핵심적으로 마지막으로 그러면 도대체 그 지순의 사랑이라는 것, 그 지순의 사랑이라는 것이 다음시간부터 계속해서 화두가 될 것인데 그러면 이 지순의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지순의 사랑인데 이 지순의 사랑이라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섞이지 않은 순결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이 교통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삼위 안에 있었던 이 사랑의 모형을 우리 인간에게 그런 동질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주신 것이냐면 첫 째는 교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냐면 교통의 사랑입니다 서로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제일먼저 누구와 교통하느냐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오늘날 많은 자신의 문제가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아니면 직장이 문제다. 가정의 문제다. 많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 좀더 정확하게 가보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집약되는데 그것을 한 번 더 집약시켜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고 하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둘이 싸우셨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서서 늘 말씀하시는 분이신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아, 제가 죄를 지었어요. 그것도 문제겠네요. 아, 제가 상황이 너무 어렵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닫혀 있어요. 그것도 문제가 되겠네요. 제가 미끄러졌거든요. 그래서 어디로 떨어졌는지 지금 다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것도 문제겠네요. 너무 아파요. 그것도 문제겠네요. 제가 너무 혼란스러워요. 그것도 문제겠네요.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집약하면 하나로 집약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지식이 조금 모자라고,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고, 그리고 어려운 일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있을 때에는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니까 왜? 하나님을 향한 이 지순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으면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통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과 함께 이루어진 교통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의 감정으로 우리를 예수와 연합되게 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해 주시는 그 분은 성령님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받는다. 그럴 때는 그 은혜는 성령님이 여러분들에게 끼치는 영향이기도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그것이 성령님이라고 아예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라. 그러면 성령 받으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은혜 충만하구나. 그 얘기는 바로 성령 충만하구나.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의 충만함이 내 안에 있을 때에는 동일한 특징이 뭐냐면 어떤 상황이든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순전한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이 원리적인 연합은 예수 믿으면 예수님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안 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충만한 생활을 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진리를 꼭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원리적인 연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연합이 있어서 예수님께 딱 접붙여진 상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계속해서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셔요. 그래서 장작이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가운데 살아가면 예수님의 마음이 수시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저 인간 인간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주님과 연합 속에서 사니까 그를 불쌍해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안 되지. 예수님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는데 내가 일생 주님께 신세를 졌는데 내가 주님 앞에 한 것이 뭐가 있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사랑해야지” 그러면서 깊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와 연합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연합을 통해서 연합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깊이 용서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넣어주십니다. 막 불어넣어주십니다. 우리도 보면 항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사랑하기 힘들 때가 있어요. 내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한 1200명 모이는 집회에 갔습니다. 너무 심령이 괴로워서 울다가 설교할 시간이 되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그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되겠는데 너무 힘듭니다. 정말 제가 이 지점까지는 제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망치로 치듯이 제 마음 속에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나도 그랬단다. 나도 네가 그랬단다. 나도 네가 사랑하기 힘들 때가 있었단다.” 많이 울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 참 힘들 때가 있었겠구나.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저녁에 가슴을 망치로 치는 것 같았습니다. 쾅, 하고 들어오는데 “얘야, 나도 너를 그랬단다.” 막 무너졌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해요. 그 교통 속에서 계속해서 환난, 고난, 아닙니다. 이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만 부어주시고, 주님의 신비한 생명만 우리에게 계속 부어지면 고난으로 얼룩진 피비린내 나는 벌판을 지나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랑 안에서 주님이 계속 불을 내리셔요. 그러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막 타올라요. 그래서 그 사랑을 가지고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도저히 사랑 할 수 없었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주님이 계속 베풀어주니까 결국 나같이 완전히 망가진 인간이 깨뜨려져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주님의 그 은덕을 아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이야기 하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날 밤도 내가 분명히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지 않고, “아이, 내가 지워버리자. 나도 화나면 무서운 사람인데 그래, 그러면 나도 한번 날려버린다. 나도 한번 칼 들고 한 칼에 다 날려버리겠다.” 그랬으면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씀 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정말 쓰레기와 같은 인간을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 그리고 죽기 위해서 태어난 짐승처럼 주님의 은혜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래 참으시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여기까지 인도해주시고,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내가 입었는데 “하나님 나의 한계입니다. 더 이상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얘야, 나도 네가 그렇게 힘들 때가 있었단다.”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아, 그랬구나.” 깊이 생각해보세요.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이긴 사람들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검불처럼 날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끝까지 붙들고 이긴 사람들만 주님과 함께 주님의 편에, 주님과 함께 진실의 강을 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마지막으로 이런 지순의 사랑을 타락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 이제 더 아주 깊이 합니다. 만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을 때 그 안에 처음사랑을 하나님이 그 안에 넣어주셔요. 이것을 “원 애”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원래적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원 애를 하나님께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원 애를 주셨으니까 아담과 하와는 맨 처음에 창조될 때 이 사랑으로 꽉 찬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꽉 차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당한 사랑으로 이 피조세계를 모두 돌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런 원 애의 사랑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원 애의 사랑은 성삼위 안에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 사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는 것, 이 둘 사이에 사랑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사랑, 이 사이에 어떠한 모순과 충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으로 만물을 사랑하면서 이러면서 그 사랑에 의해서 창조세계와,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통합을 이루면서 서로 교통하면서 살아가던 사랑입니다. 타락하게 되요. 타락하자마자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 뭐냐면 이 원 애입니다. 거의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떻게 나오느냐면 우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졌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죠? 아담과 하와 사이의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둘이 서로 부부싸움 한 것 아닙니다. 둘이 사이좋게 서로 범죄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자 하나님 앞에 범죄 했는데 범 죄 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처음에 주신 원 애의 까리따스 사랑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이 인간 꼴도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존재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이 여자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나는 먹었기 때문에 나는 피해자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을 가로막는 아주 더럽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 지금 만들어진 세상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을 만약에 내버려두셨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해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원 애를 다 잃어버린 우리에게 회심과 함께 다시 재생된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 까리따스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지순의 사랑을. 그러니까 그렇게 못된 인간인데도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희생해야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의 발을 씻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뭐냐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 지순의 사랑을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요. 왜냐면 하나님이 사랑스러우신데 무슨 문제 해결이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 지순의 사랑을 회복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애성을 주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지난 시간 설교 안 어려웠죠.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세계 속에 모상의 투영되었고, 그 교통이 세상 속에 투영되었고,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순의 사랑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주셨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거기에서 좀더 진전해서 애성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생전 처음 보는 단어 하나가 지금 나왔습니다. 제가 만든 단어입니다. 왜냐면 지금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는 포괄하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애성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애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과 짝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지성, 그러면 “아, 그 사람, 되게 지성적이야, 지성을 가지고 있어, 지성인이지.” 그렇게 얘기할 수 있죠. 그렇죠? 그러면 애성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직은 설명이 다 안 되었지만 아마 지성은 지식에 관계된 것이고, 애성은 사랑에 관계된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계속해서 설명을 집중해서 들으시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 자신이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겨우 사랑을 시작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되기 전 영원부터 하나님이 사랑이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그냥 인간을 창조해서 이 땅에 집어 던지신 것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 애성을 주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품을, 사랑의 성질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먼저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삼위의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고 했죠. 세분이시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우리” 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죠.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런데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중간의 과정까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면 오늘 밤을 새야 되니까 결론만 내면 형상과 모양은 성경 전체로 볼 때에 이것은 같은 뜻을 반복한 단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상”, 혹은 “모양”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닮은꼴이다.” 그런 뜻입니다. 닮은 꼴, 그런 닮은꼴로 그런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형상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시는데 이 형상보다도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그 모든 창조된 것 가운데 마지막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활용점점” 이라고 하죠. 용을 다 그려놓고 마지막에 눈동자를 딱 찍으니까 용이 날아갔다고 하더라. 황당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것이 “활용점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창조는 이 창조세계에 있어서 “활용점점”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신 다음에 맨 마지막에 모든 창조세계가 완성된 다음에 그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래서 그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서 만드셔요. 그러니까 살아있기만 한 생명 없는 물체와는 달리 생명을 가진 식물, 생명이 있을뿐 아니라. 그 위에 감각도 가지고 있는 동물, 그 위에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감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뭔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인식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이 능력은 인간 이외에 이 세상에는 어떤 피조물에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늘에는 천사들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사와 인간을 가리켜서 피조물은 피조물인데 이렇게 인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이성적 피조물이라고도 말을 하고 혹은 그 이성을 가지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 피조물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이 이성적인 피조물들은 각각 자기 자신의 어느 정도는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당신 혼자서 누구에 의해서도 억압을 받거나, 매이지 않고, 당신 자신이 판단하고 행동하시듯이 그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과 천사에게는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자유를 주셨으니까 당연히 뭐가 따르게 됩니까?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물은 이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사람 뒷 다리 깨물고 남의 집 물건 훔쳐 먹고 그래도 심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걸려서 맞아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이 뭐 피곤하게 그것들을 심판하시고, 그러는 것 없습니다. 요즘 멧돼지가 내려와서 사람들을 물고, 난리 친다고 하는데 물리면 저만 손해입니다. 하나님이 원수 안 갚아주십니다. 왜냐면 그것은 비이성적 피조물이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목사님 우리 개는 아주 똑똑한데 책임 없을까요? 그것도 책임 없습니다. 왜? 영혼이 없는 비이성적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영혼을 주셨는데 그 영혼 안에 있는 매우 특별한 영적 특질이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좁은 의미로 말을 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 말하기도합니다. 좁은 의미로 말할 때는 영혼보다도 더 좁은 영혼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창조될 때 하나님이 독특하게 부여하셨던 영적 특질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세 가지인데 지식과 의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중생해서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지식과 의의 거룩함에 이르도록 새로워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세 가지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점점 더 온전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의미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라고 할 때 이것은 이런 형상을 완전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은 단 두 사람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또 사람은 아니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인간들은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회복했는데 그것이 완전히 다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말씀으로 새로워지면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점차, 점차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회복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좁은 의미를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은 신자들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기도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영혼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아주 넓게 사용합니다. 영혼만 가지고 있으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동물처럼 감각만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고 인식하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도 모두 영혼 안에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 안에 있는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라고 하는 그 좁은 의미의 영적인 특질들은 타락했을 때 다 파괴되어 버렸지만 영혼 전체가 파괴되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영혼 전체가 파괴되었으면 존재할 수가 없죠. 왜냐면 인간이라는 것이 영혼과 육체가 만나야지 사람이 되니까. 그러니까 영혼이 그 아주 핵심적인 것은 잃어버렸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영혼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 속에 이렇게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고, 옳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판단할 줄 알고 하는 그런 기능들, 사랑하고 하는 그런 기능들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뭐 이렇게 무슨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을 뜯어 고치고, 뭐 좋은 옷을 입고, 그런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이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안 해줘요. 또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감추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는 그 아름다움의 정도가 다 각각 다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밝기가 각각 다른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그런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불신자들은 별은 보이는데 안 보이는 별입니다.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빛이 없어요.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나 허블 망원경 정도로 봐야지만 보이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다음에 은혜 떨어진 신자는 보였다. 말았다. 하는 별입니다. 껌벅 껌벅 바람 많이 불어도 잘 안 보입니다. 공기층이 두꺼워져서 잘 안보여요. 그런데 성화가 잘 되고 주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신자는 어두운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입니다. 빛 안 나는 별을 똥별이라고 합니다. 빛 안 나는 별, 별은, 별인데 똥별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간이 모두 존재해도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은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형상을 주셨는데 이 하나님의 이 좁은 의미의 형상,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불신자들은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회복되는 중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다른 기능들이 존재할 것 아닙니다.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없어도 생각하고, 먹고, 사랑하고, 판단하고 등등의 여러 가지 많은 기능이 있잖아요. 이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공통된 것을 하나님이 두 개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과 애성입니다. 이 지성과 애성은 이것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안에 속한 것이냐?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안에 속한 것이냐? 그렇게 물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뭐냐면 어디에 속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아주 고유한 인간에게 고유한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그런 특성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지성이고, 또 하나가 애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성과 애성으로 나뉘는데 이 지성은 뭐냐면 지적인 능력과 그다음에 지식 자체입니다. 보세요.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 모두가 지성적인 존재입니다. 왜냐면 지적인 능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못 받았어도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것은 일정한 지식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독특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요. 말하자면 모든 것을 배워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주신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이제 천둥과 번개가 막 칠때. 그것을 일생 살면서 아이에게 한번도 안 보여줬어요. 그런데 아이가 한 4살 정도 되었을 때 처음으로 천둥 번개 치는 것을 봤어요. 그래도 이 아이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런 것들을 순전히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정한 지식을 그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지적인 능력과 지식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지적인 훈련을 계속 받으면 둘 다 발전해요. 생각하는 능력도 계속해서 머리를 쓰면 발전해요. 머리를 안 쓰고 가만히 놔두면 멍해져요. 주부들에게 너무 죄송합니다. 만은 대학 다니고 그럴 때는 반짝 반짝 하던 그 처녀가 시집을 가고 나서 그냥 어리어리 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멍하고, 그렇게 되는 경우 있잖아요. 그것도 남편이라고 또 잘 만나서 이렇게 좀 사랑을 받고 같이 좀 지적 활동도 하고 그러면 괜찮은데 남편이 계속해서 솥뚜껑 운전만 시키는 것입니다. 단순 노동에 계속 봉사해요.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없고 그렇게 멍하게 살아요. 그런 사람들이 이제 열린 교회에 와서 교리 반에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 지적 능력이 다시 살아나요. 5000페이지를 읽어야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막 보니까 말이죠. 그때 막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지적 능력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하니까 지식 자체도 늘어나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지성이 깊어졌다. 혹은 지성적이 되어간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잖아요. 지성은 매일 먹고 뒹구는 사람보고는 우리들이 지성이 발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성은 지성이 지적 능력과 지식 자체라면 여러분 눈치 빠르니까 애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애적 능력과 그다음에 사랑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고, 지식을 활용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고, 애성에서는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을 찾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애적 능력이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두 자 밖에 안 되니까 쉽잖아요. 애적 능력과 그리고 사랑 자체를 합쳐서 우리들이 애성이라고 부른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주신 그 애성이 있는데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애성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는 사랑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애적인 능력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 이 얘기입니다. 먼저 사랑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이것은 뭐냐면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의 정도는 각각 다릅니다. 태어날 때도 이 능력이 차이가 사람마다 다소 난다라고 봐야 되고, 그러나 거의 없는 사람과, 사랑의 능력을 어마, 어마 하게 가지고 있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이 사랑의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신문에 보니까 걱정이 좀 되더라고요. 그 아이가 8살짜리인데 정확하게 7년 10개월인가 되었데요. 대학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합격증 흔들면서 활짝 웃는 것을 보았는데 남들이 12년에 마치는 과정을 1년 8개월에 마쳤다는군요. 입학을 초등학교 6학년에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달 만에 졸업을 했고, 그리고 그다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 대학교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해서 이번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다. 고해요. 그래서 이 아이의 엄마에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그랬더니 어렸을 때에 그 아이가 4살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책을 한번 주면 12시간 동안 안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부러워서 아니 우리 열린 교회 교인들은 2시간도 못 앉아있는데 어떻게 그 아이는 12시간 동안을 앉아있는데 그래서 수학책을 주었더니 1.2.3.4.1.2.3.4. 그러더니 4달 만에 미적분을 풀더래요. 질병이거든요. 하여튼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편입니다. 항상. 정말입니다. 그렇게 공부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애들은 여러분 동료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료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도 더하기를 가르치면 그것을 이해를 못해요. 야, 400+200은 얼마냐? 아, 모르겠는데요. 네가 400원이 있었는데 동생 것 200원을 네가 빼앗았어. 그러면 얼마냐? 600원 아이고 참, 하여튼 지적인 능력이 그렇게 차이가 나요. 그랬듯이 이 애적인 능력도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애적인 능력도 차이가 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모든 인간들에게 주셨습니다.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모든 인간에게 주셨는데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진짜 인간에게만 있을 것일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뭐냐면 동물들도 짐승을 지극히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때에 경험한 것인데 가슴에 아주 생생한데 우리 집에 태리라고 하는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초등학교 때는 왜 그렇게 개 이름을 미국 사람 이름으로 짓는지 모르겠어요. 태리. 매리. 쫑, 폼, 그랬습니다. 미국 사람이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빠 할 건데 저녁 때 되면 동네에서 온통 미국 사람 부르는 소리로 꽉 찼어요. 그러면 우리도 하여튼 미국 사람 이름 하나 따서 지었습니다. 이 개가 참 명물이라. 뭐냐면 다른 개들은 그야말로 개거든요. 이 개가 비가 오면 그 때 보도 불럭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온통 진창이거든요.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진짜 개들이 개 같이 뛰어다녀요. 흙탕물이 다 튀겨요. 그런데 우리 집 개 태리는 이렇게 다녀요. 마른 곳만 골라서 그러니까 우리 집 식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죠. 그런데 이 개가 어느 날 마루 밑에 들어가서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태리야 이리 나와라.” 그런데 막 눈에서 파란 불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얘가 왜 그럴까? 그랬더니 알고 보니까 이 개가 쥐약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개가 못 견디겠으니까 튀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속에서 녹아 들어가는데 어떠했겠습니까. 그 때 뭐 동물 병원이라도 있고, 그랬으면 그런데 그때 동물 병원이 있어도 데리고 갈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튀어나가요. 그러니까 이것이 녹아내리니까 막 미친 듯이 뛰어다녀요. 어, 그런데 이 개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돌아왔는데 강아지를 금방 낳거든요. 돌아와서 그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는 참는데 까지 계속 참다가 이제 더 못 참겠으니까 뛰어나가다가 마당에서 딱 쓰러져서 죽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참 많은 감동을 받았거든요. 아, 이 동물이구나.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고, 최근에 동물학자들에 의해서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뭐가 나왔느냐면 이제 K. F. C에서 닭을 잡는데 그런데 K. F. C에서만 닭을 잡겠습니까. 어쨌든지 햄버거 집에서 아무튼 닭을 무수히 죽이잖아요. 그래서 닭튀김을 만들어서 파니까 동물 보호사들이 닭의 최후를 개선하라고 계속 대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학자들이 이제 모여서 연구를 한 것입니다. 닭이 도살당할 때에 정말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겠는가? 그런데 결론은 아니다. 라고 나왔습니다.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못 느낄 것이다. 하나님이 아마 그렇게 해 주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어쨌든지 그것을 논증할 시간은 없고, 그렇게 해서 동물들이 그렇게 자식을 아끼는 것처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닭이 도살을 당하면서 두려움을 못 느끼듯이 이것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부여하신 본능이지 어떤 깊은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본능을 주시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의 세계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닭이 알을 낳아놓고, 자기는 놀러가 버리면 병아리가 생겨나겠습니까? 아니 뭐 따뜻해야지 알이 까지. 그럴 것 아닙니까. 인간이 양계장을 만들기 전부터 병아리는 뛰어다녔잖아요. 그렇죠? 모든 새끼들이 나잖아요.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를 보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뭐냐면 그 새끼 하나 나서 그 새끼를 그냥 보호하다가 마지막에 그 새끼에게 자기 몸을 뜯어먹도록 먹이로 주고 죽어요. 그중에 대표적인 거시 가시고기 같은 것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애들이 돈 달라고 할 때마다 가시고기라고 항상 그러는데 새끼를 낳잖아요. 엄마는 어디로 가버려요. 그것은 진짜 고기도 아니에요.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끼를 거기에 놓고 거기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약 2-3주 동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호하는데 다른 놈들이 들어와서 알을 못 먹게 하고, 그다음에 알이 잘 깨어나도록 계속 지느러미로 물을 쳐서 새 물을 보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이 지느러미가 너덜너덜 되요. 그렇게 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2-3주를 아무것도 안 먹고 거기에서 그 조그마한 고기가 이 지느러미를 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선한 산소가 공급된 물이 계속 돌면서 거기에서 알에서 부화를 해요. 애들이 부화해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이 아버지는 이 지느러미가 너덜너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완전히 먹지를 못해서 불어버려요. 그래서 온 표피가 아주 다 너덜너덜해져요. 그러면서 숨을 꼴딱꼴딱하면 얘들이 거기 와서 그 아빠를 뜯어먹어요. 그리고 며칠 더 살면서 튼튼해진 다음에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눈물겹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족 보존의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좀 배울 수는 있죠. 그런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이렇게 보는 것 말고, 그것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 꽃이네.” 이것은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좋다.” 이것이 인식하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 아세요. “하얗네.” 동물도 흑백밖에 못 보는 동물도 있고, 천연색 보는 동물들이 있겠지만 “이것 이렇네.” 그것 말고, 이것을 보고 그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특별히 사랑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던 그 사랑이 이 세상에 투영되었을 때 그 투영된 사랑을 가지고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사랑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인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두 번째는 사랑 자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애적 능력은 하나의 작동하는 기계로 본다면 사랑은 그 속에다 집어넣는 내용물입니다. 그래서 떡 방앗간에 가면 기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쌀을 빻아서 찌고 거기에 집어넣으면 우르르 기계가 돌아가면서 거기에 동그란 것을 집어넣으면 떡 볶기 떡이 계속 나오고 넙적한 것을 집어넣으면 절편이 나오고, 뭐 이렇게 뭘 집어넣으면 나오잖아요. 이 기계를 사랑할 수 있는 애적 능력이라고 말한다면 이 속에 집어넣는 그 찐 쌀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이제 무슨 문제냐면 이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이것은 중립적입니다.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중립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이 기계 속에 뭐가 들어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가 강냉이 가루를 빻아서 쪄서 집어넣으면 옥수수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쌀가루를 빻아서 집어넣으면 쌀떡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다 맵쌀을 집어넣으면 맵쌀 떡이 나오고 찹쌀을 빻아서 집어넣으면 찹쌀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이런 애적 능력을 주셨는데 이 애적 능력은 타락한 후에도 상당부분 건재합니다.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면 타락하기 전에는 이 기계 속에 들어갔던 사랑이 뭐냐면 지순의 사랑이에요. 하나님 밖에는 사랑한 것이 없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인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집어 넣어주시니까 이 능력이 막 활동하면서 그 사랑의 찐 쌀을 집어넣고 이 사랑이 막 작용하니까 이것들이 각양으로 쏟아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타락함으로서 이 애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타락과 애성의 파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타락과 애성의 파괴인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하게 되요.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니까 그다음에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이 애성이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애성이 있었는데 인간이 타락하게 되니까 이 애성이 다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파괴는 둘로 나타났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이제 처음에는 이것이 굉장히 큰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을. 그러니까 한번 보세요.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그 하아를 이끌어서 아담에게 데리고 오실 때 그 때에 아담이 했던 말이 있죠. 그것이 뭐냐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이 아담 안에 하와를 향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 불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죠. 언제 봤다고 그렇게 좋냐. 방금 봤는데 아니 사귀어 봐야지. 이제 막 선을 보고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저기에 오는 것을 보고, “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그 살도 뱃살이나. 발뒤꿈치의 굳은살이 아니라. 치명적인 장기의 살 같이 그렇게 매우 소중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아담이 너무 경솔하고 사람이 마음을 쉽게 주는 본성을 가졌구나.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커다란 사랑의 능력이 이 안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의 크기와 작동하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애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성도 명료했거든요. 그 명료한 지성 안에서 그 하와를 보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고,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에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었고, 주저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성이 올바르게 판단하니까 그때 비로소 이 애성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성은 맨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에는 이 지성이 철저하게 형입니다. 애성이 동생입니다. 그래서 지성이 판단해줘서 “야, 괜찮다. 괜찮아.” 그러면 이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다음에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자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자구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너, 그것 하지마라. 그런 짓 하는 것 사랑하지 마라. 너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쁜 것이니까 그것 좋아하지 마라.” 이렇게 지성이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이 동생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거꾸로 형을 밟고 일어선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함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와서 이렇게 뒤집힌 것입니다. 원래 이 죄가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죄의 활동하는 특성이 3가지가 있는데 무모함과, 맹렬함과 미친 기운입니다. 광기입니다. 이 3가지 특성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깊이 빠진 사람을 보면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오락가락 합니다. 사람이 죄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인격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안정되지를 않습니다. 이 때는 이말 하고 저 때는 저 말하고, 이제 그렇게 이 사랑의 능력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큰 사랑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사랑의 능력 위에 아주 지고지순의 사랑이 그 속에 꽉 채워진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존재의 위대함은 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거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지식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그것은 계속 해서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순결한 사랑이 꽉 찼으니까 그야말로 만물의 영장이 되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만물을 통치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넓은 세계를 다스리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런 정도의 능력을 주시지 않고는 이 세상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타락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게 되니까 이제 이 제일 먼저 까리따스의 사랑, 지순한 사랑이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도 안 남고 완전히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공허하게 되었습니까? 공허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은 완벽하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도 없이 일점도 안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 그 지순한 사랑이 있던 자리를 꽉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욕 정적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입니다. 꾸삐디다스 라고 얘기하는데 그런 욕정적 사랑이 육욕적 사랑, 즉 결국은 자기 사랑이 자기 사랑이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이 애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상당부분 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됩니까? 건재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순결한 사랑을 집어넣고 사랑의 능력인 애적 능력이 작용하니까 여기에서 그 사랑자체가 붕지고, 이 기계가 작동하니까 이 사랑과 동질의 수많은 사랑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인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기가 막힌 비유네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떡 방앗간에 가서 하얀 쌀을 빻아서 위에다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떡 하러 간 사람이 방앗간 주인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저씨 이것이 3말인데 3종류로 뽑아주세요.” “뭔데요.” 그러니까 “떡국 해 먹으려고 한말. 그다음에 절편 해 먹고 싶은데 그것 한말. 그다음에 애들이 떡 볶기 해 먹으려고 하니까 가느다란 떡 한말 이렇게 해주세요.” 그러면 방앗간 집 주인이 뭐라고 해요 “아, 그러세요. 그까짓 것 뭐 어려워요. 그래요.” 그래서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먼저 동그라미 큰 것을 끼워요. 그리고 부르릉 돌려요. 그러면 계속해서 떡국 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3분의 1쯤 들어가면 스위치 끄고 그다음에 그것을 빼낸 다음에 넙적한 것을 집어넣어요. 또 3분의 1을 부르르 돌려요. 그러면 거기에서 절편이 쭉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뺀 다음에 가느다란 것 3줄로 된 것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학교 앞에 떡 볶기 떡이 쭉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양은 다르게 나왔지만 결국은 맛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용도가 각각 틀리잖아요. 떡국 해 먹을 해 먹을 때는 그래도 거기에 절편 넣으면 안 되지. 굳혀서 썰어서 떡국으로 해서 그렇게 먹는 것이 좋고, 방금 손님이 와서 설탕이라고 찍어 먹으려면 그래도 점잖게 네모나게 드러누워 있는 것 하나씩 이렇게 먹어야지 맛있게. 애들이 학교 갔다 돌아와서 고추장이라도 발라서 해 먹으려면 누워있는 절편 갔다 해 먹어라. 그러면 애들이 썰렁하거든요. 그래서 가느다란 떡 볶기 해서 그래서 그냥 젓가락에 서 너 개씩 꿰서 돌아다니면서 방바닥에 다 흘리면서 이렇게 먹는 것이죠.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까리따스의 지순한 사랑이 들어가니까 사랑의 능력이 막 움직이면서 그 사랑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도 그 사랑이 또 나오고 아담과 하와가 사랑할 때도 그 사랑이 나오고, 동물들을 돌보고 이 자연의 세계를 돌볼 때도 그 사랑이 나와요. 적용되는 정도야 각각 다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사랑으로 다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지순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시 이 세계 속에서의 모든 인간들이 그 사랑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으로 전체적으로 통합이 되어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게 지순한 사랑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자기 사랑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기계가 망가져버렸으면 문제가 없을 것인데 이 기계가 손상은 입었지만 여전히 상당히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이 육욕적 사랑이 들어가서 사랑의 애적 능력이 막 작동해요. 그러면서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넙적한 떡, 긴 떡, 잘라진 떡, 똥 떡, 막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뭘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기 사랑의 육욕의 더러운 죄들이 그 속에서 다 개입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슨 희망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어요. 인간들이 왜 이렇게 외롭고 곤고하게 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뭐냐면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안 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죠. 잘 기억하세요.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분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는데 아무도 자기를 돌아봐주지 않아도 한 인간을 진실하게 사랑한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또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순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기회가 있으면 왜 그것이 지순한 사랑이 안 되는지를 다른 사경회 때 제가 입증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랑을 주셨는데 인간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나? 왜 이렇게 인간들이 쉽게 사랑하던 사람과 결별하고 그 사람과 원수 되고, 그리고 정말 사랑해야지 도덕적으로 마땅한데 사랑하기는커녕 죽이려고 덤벼들고, 아주 쉽게 원수 맺고, 그렇게 원수 맺고 안 풀고도 아주 넉넉하게 잘 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 죄를 거의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요. 그러면서 이 영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이 타락에 의해서 애성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랑 자체인 지순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고 자기 사랑으로 꽉 찬 사랑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을 좀더 학대해서 설명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애성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애성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면 먼저 이 애성의 적극성입니다. 이 애성의 적극성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이런 것 있죠. 사람에게는 식욕이 있죠. 무엇인가를 먹고자 하는 그런 욕망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가 이 입으로 들어가서 내장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허기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식욕은 한참동안 음식물이 안 들어오면 아, 배가 고프네. 음식물이 안 들어왔네. 내장이 텅 비었는데 그러고만 있으면 그 사람은 아주 심하게 병든 사람입니다. 그렇죠? 벌써 그런 정도가 되기 전에 건강한 사람이면 “아, 배가 고프네.” 그러면 그 생각하자마자. 그 생각 들기도 전에 찾아요. 뭐 먹을 것 좀 없나 하고, 냉장고도 뒤지고, 서랍도 뒤지고, 장롱도 뒤져보고, 하여튼 뭐라도 감추어 놓은 것이 있나. 그러면서 뒤져요. 저도 그렇습니다. 대게 아침을 잘 안 먹는데 아침에 이제 마당에서 성경 묵상하다가 시장기가 돌아요. 그러면 열린 공간에 가서 좌판대 한번 쳐다보는 것입니다. 오늘 뭐가 나왔나. 김밥은 새로 만들었나, 빵은 구웠나. 그것이 바로 먹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래 사랑은 어떻게 되느냐면 어떤 것이 주어지면 “아, 이제 사랑해야 되는구나.”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 같은 사랑이라도 인간이 해야지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 본성이 아직까지도 상당히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애적 능력이. 애적 본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을 사랑하면 너는 불행하게 된다. 인간으로 어떻게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느냐. 그것은 너를 파멸로 가는 길이다.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 이 사람을 사랑하지. 왜 이 사람만 사랑하느냐. 저 사람도 사랑하지. 이렇게 사랑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따라서 이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잘못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죽기직전에는 이 사랑의 욕망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사라지고 체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망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여력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그것이 절망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그러한 애성의 적극성을 우리들이 지금 우리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놀랍잖아요. 자 봅시다. 어떤 신자가 까리따스의 사랑, 지순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어요. 말씀에 은혜를 받고 펑펑 울고 나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요. 막 주님을 그렇게 사랑했어요. 언제 보니까 시험에 들었는지 뭐가 들었는지 주님을 안 사랑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사랑이 사라지고 텅 빈 가슴을 안고 산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입으로 괜히 하는 이야기 이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세상에 목 메인 사람들 있죠? 세상 끔찍하게 사랑하는 분들 있죠. 그렇죠? 내가 세상 사랑이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단순히 무슨 향락, 춤바람이나 나서 캬바레나 돌아다니고, 뭐 아니면 노름이나 하고 무슨 술이나 퍼먹고, 그러는 타락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얘기하는 세상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그 지순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의 모든 사랑은 세상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향한 것이든지, 남편을 향한 것이든지. 무엇을 향한 것이든 간에 결국은 세상 사랑입니다. 자기 일에 대한 사랑이건, 자기가 하는 예술에 관한 사랑이건, 다 세상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빈 진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들어왔느냐. 저것이 들어왔느냐의 문제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역설적으로 어떤 것이 성립되느냐면 요즘 하나님을 뜨겁게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사랑하면 어떻게 되요? 이 사랑의 능력이 제고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하면서 사랑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막 해요. 그 사람이 사랑하면 그 크기만큼 세상을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경건과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이지. 그러면 반대인데 신자인데 요즘 미끄러져서 정신 못 차리면서 세상에 달라붙어서 뭘 빨아 먹을 것이 있는지 하여튼 그 세상에 달라붙어서 정신없이 미친 듯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요.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능력은 건재한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이 미끄러진 불순종 가운데서 사라지고 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주님 조금 사랑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해요. 왜? 이 사랑이 너무 열렬해요. 무슨 듯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영혼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죄의 깊은 타락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죄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면 그 죄인들은 끝입니다. 누가 돌보겠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그 영혼들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도 그랬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건져주셔서 왔으니까. 그렇게 그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까.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인도 하시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애성은 적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됩니까?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져요.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가요. 미끄려져서 들어가게 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잠시는 열렬해요. 왜? 사랑의 기능도 상당히 건재하겠다. 거기에 꾸삐디다스의 사랑, 육욕적인 자기 사랑이 왕창 부어졌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사라지고, 그러니까 그 속에서 막 역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기에서 똥 떡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카만 떡들이 쏟아져 나와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여튼 죄가 개입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죄입니다.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자기 사랑입니다. 그것이 계속 역사해서 이 똥 떡이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이 자기를 사랑하는 죄악들이 거기에 모두 개입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주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거기에 그 죄가 개입됩니다. 모두 개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고지순한 사랑이 없이 자기의 육욕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늬는 그 똥 떡이나 아니면 쌀로 만든 떡이나 떡의 모양은 다 똑같습니다. 모양만 똑같을 뿐이지 먹을 수 없는 떡입니다. 하나님이 모실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늬가 똑같아도 이것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받아서는 안 되는 떡입니다.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을 굉장히 많이 섬겼는데 하나님은 진실한 의미에서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모른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진짜로 그 까리따스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 ? )만을 가지고 모두 통합된 가운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이 안에 있는 정신의 모든 작용들이 하나로 다 통합되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안 그렇습니다. 신자는 항상 죄를 자기가 좋아서 그 죄를 선택해도 죄를 좋아하는 방향으로 의지가 결합이 되어서 죄를 지어도 이 속에는 그것에 찬성하지 않는 또 다른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복합의지라고 합니다. 혹은 이중 의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계시록에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나오죠.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온다. 우상 숭배하는 자.” 거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왜 우리는 우상 숭배한 적이 없으니까 그다음에 무엇입니까? “거짓말 하는 자.” 여러분 중에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부풀리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말을 해야 될 증언의 자리에서 입을 다무는 것도 거짓말 입니다. 그런데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모두 지옥에서 만나 동창회나 해야 합니까. 아니잖아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과장이 아니라. 단일 의지로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의지로 그런데 우리 신자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이 안에서 찬동하지 않는 또 다른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이것은 무엇에 의해서 좌우가 되느냐면 이제 은혜 생활에 의해서 좌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꾀를 피우고 기도도 안 해요. 그리고 말씀도 어떻게 앞자리에 앉아서 뭐 좀 듣나. 그러더니 교회에 나왔다. 말았다. 그저 흔들흔들 하고 예배 시간에 벌떡 벌떡 일어나서 집에 가고 말이죠. 졸기나 하고 말이죠. 정신 못 차리고 살아요.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 되요. 그 얼마 안 되던 지순의 사랑이 슬슬 다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주 최악의 방탕한 삶을 살고, 심지어는 교회를 안 나와도 그 지순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데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데 동시에 내가 또 악을 행한다.” 그러니까 뭐냐면 악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두개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서 죄에게 많이 져서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서 이제는 죄를 상상하고, 죄를 쉽게 지을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 속에 들어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도 이 까리따스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마다 남아있는 크기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속에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남아있고, 그다음에 여기에 더러운 자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어넣고 사랑의 본성이 돌려요. 그러면 이 쪽에서 뭐가 나오는가 여러분들은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것은 결국 대답은 뭐냐면 똥 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 내가 이렇게 까리따스의 사랑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 사랑이 90%라고 치고 10%가 만약에 지순한 사랑이 들어있다면 그러면 여기에서 열 동강의 떡이 나오면 한 동강은 하얀 떡이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원리가 안 그렇습니다.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되는데 나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죠? 그러면 그 10%의 하얀 것은 어디 갔습니까. 그러면서 묻고 싶죠. 이제 답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이 신자 안에 있는 까리따스,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똑같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내일이나 모래쯤 나올 겁니다.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실제론 적 관점입니다. 진짜 조금이라도 있으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평가론 적 관점 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조금 있어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이야기 입니다. 신자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다음에 자기 사랑, 혹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어요? 없어요? 공존할 수 있습니다. 두 개가 공존할 수 있는데 성경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면 “너는 나를 버렸다.” 또 요한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 속에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너희 안에 나를 경외함이 없다. 그것이 너희의 고통이요, 악인 줄 알라.” 그런데 사실 없겠습니까. 그 사람들도 신자인데 그 사람도 언약의 백성인데 지금 얘기했잖아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완전히 까리따스가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성경이 평가론 적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뭐냐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기의 삶의 목표라고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이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그러면 몇 대 몇이 되어야지만 받아들여집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그것은 얘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평가론 적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너는 날 버렸다. 너의 안에는 나를 향한 사랑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야기 하셨는데도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그 사람이 신자라면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 있는데 결국은 그것이 그 하나님이 지순의 사랑을 주신 목적 자체는 뭐냐면 지순의 사랑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것이 바로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이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인지 아십니까? 천지 창조와 하나님의 목적, 그것 2번 테이프를 들어야합니다. 꼭 들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삼위의 모상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이렇게 교통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그래서 창조된 세계가 인간이 계속 가꾸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세상을 그렇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지금 나 먹고 살아야지 무슨 내가 지금 이 밤중에 여기 와서 천지창조. 내가 무슨 천지창조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당장 밥 먹어먹고 살고 내 새끼들 하고 내 마누라 하고 편안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그까짓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밥 먹여주느냐.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모두 다 날아가 버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목적 안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로 인간이 돌아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사람에게 기대하시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갈 때 그 사람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한 목적을 “아, 맞아 그게 내 목적이야” 하고 받아들이게 만들어주는 것이 뭐냐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에는 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꽉 차 있으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 밖에서 행복을 안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 날아버리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사랑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즐거워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 밖에서 즐거움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왜?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내 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나를 만족시켜주시면 내가 겨우 섬겨드리겠습니다. 그런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조금만 지순의 사랑이 있어가지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조금 남아있는데도 하나님의 이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는데 그 사랑이 도움이 안 되었으면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가 이것을 가리켜서 별명을 붙였는데 유산된 까리따스입니다. 있기는 있는데 유산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남아 있어요. 남아 있으니까 어때요.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고, 세상 사랑하고 자기밖에 모르면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다가 이것이 남아있으니까 남아 있는 것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오면 이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남아 있어서 “그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마음 한 구석에 가슴이 찌릿한 것입니다. “아 내가 주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드리는데” 그러면서 눈물이 조금 베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닦고 다시 집에 돌아가면 무슨 일이 별로 없습니다. 또 똑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산된 까리따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런 정도의 까리따스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이 전환된 삶을 살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죄인의 교묘함이 나오는데 이것이 실제적으로는 요만큼 밖에 없어요. 유산된 까리따스 입니다. 유산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까리따스의 목적은 까리따스가 내 안에 꽉 차서 내가 나 중심으로 살던 삶을 그 까리따스의 힘으로 돌이켜서 하나님 중심, 내 영광을 위해서 살던 삶을 그 까리따스 때문에 돌이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행복을 위해서 살던 그 삶을 까리따스가 돌이켜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도록 이렇게 살게 만들어 줄 때에 이 까리따스가 진짜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안에 자기 사랑이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이미 선택은 끝났어요. 내가 주님은 버릴 수 없지만 그러나 주님 때문에 세상도 버릴 수 없다. 하나님을 두 번째 목적으로 내가 섬겨드릴 수 있다. 나 다음에. 그러나 주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그분께 복종하면서 살 수는 없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실제론 적으로는 내 안에 까리따스가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왔는데 곤고하죠. 그러니까 이렇게 까리따스가 거의 희미하게 남아있는 사람들은 계속 곤고하게 살아요. 그리고 이것 자체가 복합의지가 되어서 죄를 지을 때도 항상 이 안에는 내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도 하고. 그런데 교회에 왔어요. 하나님 앞에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기도하는데 자기가 너무 처량해요. 눈물이 막 나요. 그리고 막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이 바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사랑이 느껴지면 사랑의 특성은 뭐냐면 느껴지면 그것 밖에는 자기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뭐 흑흑 흐느껴 울면서 “내 하나님 정말 주님 사랑하는데 제가 얼마나 주님을 따랐는지 아시죠.” 그러면서 막 울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때 무슨 착각을 하느냐면 이것이 진짜 사랑이 꽉 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느낀 것이 꽉 찬 것이지 진짜 사랑이 꽉 찬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 꽉 차면 그는 자기중심으로 살 수가 없죠. 그렇게 자아를 고집하면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돌아갑니다. 그래 눈물 거두고 집에 가면 원 위치죠. 그러니까 뭐냐면 자기는 수시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환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애성의 적극성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애성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 첫 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지난 죄를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자기의 마음이 꽉 차게 되어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넘치게 되면 그다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회개의 가장 첫 번째 특징은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회개를 깊이 하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예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니까 그다음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표현은 미워한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에게 주신 그 까리따스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꽉 찬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이 영생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합을 통해서 하늘의 자원들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형상을 부여하게 하고, 그것이 이제 그 사람의 영혼을 강건하게 해서 그래서 이 창조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할 수 있는 지성과 애성을 사용해서 이 창조세계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그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한없이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이 이제 타락해서 망가졌지만 중생을 통해서 다시 구원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주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에만 우리들이 행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까리따스를 신자의 마음에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은혜의 효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은혜를 구할 때에 그 결국은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그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은혜를 구하는 동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구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이러한 애성을 주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애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삼위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그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셨던 그 교통과 수준은 다르지만 동질의 것을 인간 안에 천사에게 먼저 주셔서 하늘나라 안에서 이것을 누리게 하시고, 그것을 또 인간들에게 주셔서 인간 안에서 그 삼위의 사랑의 모상, 교통의 모상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이 지정해놓으신 법칙에 의해서 계속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으니까 가슴에 새기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한방 치시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치시지 않으셔도 원리자체가 자동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멀쩡한 물체에 달려가서 쾅하고 받으면 예외 없이 찢어지고 피가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월요일은 박으면 저쪽으로 툭 튀어나가고, 화요일 날은 스펀지 같아지고, 수요일은 물 같아지고 그러는 것은 없습니다. 목요일 날은 한번 받으면 벽이 뚫어지고 그런 것 없습니다. 항상 변함없이 벽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할머니건, 할아버지건, 애들이건, 어른이건, 고려인이건 로마사람이건, 와서 맨 머리로 들이받으면 터지고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신자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이 공식을 갖다대면 어느 인간이 불행해질지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이런 창조의 모상을 주셨어요. 불신자들 속에서는 까리따스의 사랑은 없지만 까리따스의 사랑은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이 질서에 근접하게 살려고 하면 그래도 조금 집안이 편안합니다. 조금, 어차피 구원은 없지만 그래도 편안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이런 사랑의 교통이고 뭐고 생각 안 해요. 그냥 자기가 최고라고 그러면서 한 덩어리 합니다. 수틀리면 아버지도 들이받고, 엄마도 들이받고, 마누라도 쥐어박고 애들도 발길로 차고 폭언을 하고 말이지 다 때려 부수고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그렇게 살아서는 인간이 행복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비록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공식을 지키면 그 나름대로의 어느 정도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깨뜨리면 그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심판하시려고 개입하지 않으셔도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공식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 와서 그냥 들이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지는 것입니다. 신자만 터지는 것이 아니라. 다 터집니다. 그러니까 그 삼위 일체 안에 있었던 이런 사랑의 모상이 그대로 인간에게 투영되어서 그래서 인간을 이렇게, 이렇게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랑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제자리에 각각 자기 자리에 있으면서 사랑을 할 때에 이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자체가 뭐냐면 사랑 자체가 질서를 받아들이게 하는 동기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1번에 놓고 돈에 의해서 질서가 쭉 잡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있어도 돈이 위에 있는 사람은 신세 많이 진 동기간이 순서고, 이런 것이 아니라. 형이 위고 그것이 아니라. 내게 돈의 도움을 줄 수 있는 형제가 1번입니다. 그다음에 착하고 어쩌고, 그래도 내가 신세를 지고 그래도 돈 없으면 별 볼 일없어서 저 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동네사람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질서가 다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사랑의 질서를 세우니까 만약에 자신에게 자기 사랑이 가득 찼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런 질서대로 판이 짜 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아주 역설적인 명제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의 모상을 하나님이 이 속에 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잘 보세요. 하여튼 만난 것도 저만 처먹고, 좋은 옷 저만 처 입고, 좋은데 저 혼자 돌아다니고, 좋은 것 자기 혼자 다 갖고 그래도 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했던 사람들은 누구냐면 다른 사람들을 섬겼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기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원리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제 만물들을 사랑한다. 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가꾸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애성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그냥 뛰어다니면서 열매나 따 먹으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아파트, 길 도로, 다 닦아놓고 사람을 덜컥 내려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역사가 흘러오면서 문명을 이만큼 일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만한 문명을 일구면서 역사가 줄달음쳐 온 대에는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느냐면 결국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번 보십시오. 그것이 뭐냐면 기업 하나를 해서도 성공한 사람은 목숨보다도 자기 일을 더 사랑합니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 어떤 경지를 이룬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그 예술에 있어서 그 성과를 추구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바둑이라는 것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쪽에 19줄 또 19줄 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 목숨을 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보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것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상대방하고 바둑을 두다가 졌어요. 너무 원통해서 바둑판 위에 엎어져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웃지만 그 사람은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피를 토하고 죽은 바둑판에서 이 사람이 한점, 죽은 사람이 둔 한점이 어떻게 두어서 바둑판이 그렇게 정해져서 졌다. 라고 하는 그 기보가 아직도 내려옵니다. 추사 김정희 라고 있죠. 글씨 쓰는 사람인데 뭐 알아만 보면 되지 뭐 그렇게 잘 쓰면 뭘 해요. 뜻만 통하면 되지. 아니 내용이 중요하지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여태까지는 중국서 채를 받아서 썼는데 이 사람은 독자적인 기능서체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죽음의 고독을 느끼면서 이 서예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그렇습니까. 뭐든지 그렇습니다. 옛날에 요리가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 요리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거의 죽음과 씨름하면서 요리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대장금 에서도 봤잖아요. 뭐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죠. 하나, 하나 예를 들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 하나에 사람들이 생명을 걸어요. 그런 사랑에 의해서 사랑과 열정에 의해서 인류의 문화가 발전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런데 이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문명을 일구어내고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은 상당부분 남아있는데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미친 듯이 해서 결국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문화들을 만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미친 듯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열정이 필요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이 한 일이 있었죠. 그것이 뭐냐면 짐승들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 짐승들이 한 두 마리입니까. 나는 가끔 우리 교인들이 이름 하나 지어 달라. 그러면 몇 주 동안 고민하거든요. 우리 목사님 한분이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지어달라고 엄마한테 앉혔다가 아빠한테 앉혔다가 그냥 지어줬습니다. 그래도 이름은 괜찮습니다. 그렇게 이름 짓는 것이 힘든데 그것을 하나, 하나 다 지어요. 그 이름 하나를 붙이면서도 보람을 느끼고 야, 이것이 기린이 되었어. 기린이야. 모가지가 길어서 기린이라고 하니까 딱 맞잖아. 야, 정말 기가 막히다. 아, 이것은 코뿔소야. 왜? 코에 뿔이 나왔잖아. 이것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 있어. 이렇게 계속 느끼려니까 뭐가 있어야합니까. 사랑과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의 죽음의 경지를 드나들면서 학문을 발전시켜서 이렇게 이 사회가 이렇게 발전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 자체가 창조된 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계속 가꾸어서 하나님이 가꾸면 가꿀수록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영광은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의 원인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은 또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이 창조되었고,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이 가꾸어 나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벌거벗고 뛰어다니면서 과일이나 따 먹고 놀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창조를 내가 다 할 수는 없지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하면서 열린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 마세요. 창피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어도 길도 생겼고요. 집도 생겼고요. 수학도 발달하고요. 물리학도 발달하고 시도 발달하고요. 음악도 발달하고요. 모든 것들이 발달해서 찬란한 문명세계를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문명세계를 일구어 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무슨 거기에서 이발도 안 하고, 아이고 행복하겠네. 가세요.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애성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을 잘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직장 생활을 안 하려고 합니다. 엊그제도 어떤 형제가 와서 자기는 교회를 보면서 머리가 아프데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젊은이들이 은혜만 받으면 다 때려치우고 교회의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진짜 아니다. 교회 직원이 하찮아서 아닌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으면 거기에서 어떻게 하든지 고난을 받으면서 창조의 정신에 가까운 세상으로 바뀌어 가도록 애쓰고 노력을 해야지. 아니 그만 두고 목사가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소명이니까 몰라요. 그런데 잘 나가던 반도체에 나가던 사람이 집어치우고 교회의 직원으로 서점에 취직하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세상은 전부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주도해서 나갈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거기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열정이 막 생겨나요. 자신의 삶의 전 방면에서 열정이 생겨나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나니 공부도 뜨겁게 하고 싶은 열의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나니 교회 와서 주의 일도 그렇게 정말 헌신적으로 하고 싶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받고나니까 자식을 사랑해도 건성으로 사랑하지 말고 한번 불같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남편을 사랑해도 성령의충만한 은혜를 받으니까 저 인간을 내가 끝까지 사랑하고야 말리라. 그런 마음이 생겨나고,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니까 이 남편의 마음속에서 아내를 사랑하고야 말리라. 그 수많은 바가지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바가지를 모두 깨면서라도 내가 그 바가지 속에서 사랑하고야 말리라. 용돈을 줄여도 사랑해. 이런 열정이 생겨납니다. 내가 만약에 저 인간 하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서 무엇 하나 말이지. 하나님 내가 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든지 콱 죽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 순교의 정신으로 열렬하게 사랑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많이 봤습니다. 진짜 말씀에 변화되면 그런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열렬하게 사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렬하게 많이 안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 만난 사람들입니다. 제가 게으름에서도 그 얘기를 썼잖아요. 게으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못 만난 증거입니다.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인데 이것을 다 태워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아니 왜 그렇게 열정이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왜 그렇게 열정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똥을 퍼도 저 사람보다는 더 잘 푸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지 온 동네 똥을 자기가 퍼서 돈을 벌 것 아닙니까. 아니 왜 그렇습니까. 내가 대학원 다닐 때 학교 앞에 복사 집이 있었습니다. 거기 복사 집 사장님이 항상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전도사 때였는데 “전도사님” 그래서 “왜요.” 그러니까 “ 도사님은 복사를 해도 그렇게 열렬하게 해요.” “왜요.” 다른 사람은 맡기고 그냥 간데요. 그런데 나는 거기 서서 그것이 깨끗하게 나오나 이것이 마지막 과제물이니까. 깨끗하게 나오나 그리고 거기에서 제본해서 재단기에 집어넣어서 레포트 까지 절단해서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뭐든지 열렬하게 삽시다.” 죄 짓는 것 빼놓고 뭐든지 열렬하게 삽시다. 아니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그렇게 깊이 배인 무기력과 이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면 까리따스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까리따스가 있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니까 안 믿어요. “아이고, 관둬라. 네가 안 믿으면 네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아이고, 지옥의 아랫목이나 가라.” 그리고 돌아가요. 어떤 사람은 전도하는 방법을 만원이면 전도를 한데요. 그래서 어떻게 전도를 하느냐. 그랬더니 찜질 방에 가서 돌로 만든 찜질 방에 들어 간데요. 불신 친구하고 그리고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한 30분쯤 지나면 친구가 아, 나는 나갈래. 그러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것도 못 참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거기는 더 뜨거워.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 너는 아랫목이나 가라.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 그렇게 얘기하는데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막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것이 뭐냐면 자기 안에 있는 까리따스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만물을 가꾸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으면 교회에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다르게 일그러진 부분들을 보면서 한 구석이라도 펴다가 죽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 앞에 상급 받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십니다. 그 속에서 정말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세상을 하나님 앞에 고쳐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그렇게 헌신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눈물 흘릴 수 없는 현장이 없는 사람이 오래도록 눈물 흘리는 골방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현장에서 그렇게 살다가 돌아와서 하나님 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는 더 많은 까리따스가 필요합니다. 더 많은 지순의 사랑과 더 큰 능력 성령의 놀라운 은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충만한 진리로 그것을 받아서 다시 돌아가서 다시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고, 다시 한번 하고, 결국 누가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보면 망가져서 고통 하는 가정 속에서 핍박을 받는 아내들 있죠. 또 핍박을 받는 남편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낙심하지 마세요. 결국은 사랑이 이깁니다. 주님 앞에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이를 악 물고 견디면서 그 망가진 이 창조의 질서를 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면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비록 먼 곳에 나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온 세계의 주름을 펼 수는 없지만 내 가정, 그리고 내 동기간들, 그리고 내 직장에서 이 주름을 펴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는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충만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내 안에 꽉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일채의 욕심이 없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 애성을 주신 마지막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타락한 후에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첫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이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까리따스를 한번 맛본 사람들은 이제는 이 맛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가끔 실족한 신자들에게 “너 그따위로 살면 하나님이 단칼에 요절을 내신다. 큰일 난다. 너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신다.”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면 “아니. 될 대로 되라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런 진노를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네가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때에 아버지께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천에 하나 만에 한 사람을 택해서 너에게 이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너의 앞길을 이제까지의 길을 인도하셔서 예수 믿게 만드신 분이 주님이신데 지금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그 사랑이 난 지금 내 마음에 느껴지는데 넌 안 느껴지니?” 그러면 눈물이 쭉 흐르는 것입니다. 왜? 비록 유산된 사랑이지만 이 안에 까리따스의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는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돌아가리라.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 주님의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내가 충만히 느끼고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자가 되어도 나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황제가 되기보다는 주님의 품에서 정말 살아가는 그런 주님의 집에 있는 문지기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고백이 생겨납니다. 나의 행복은 정말 주님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마음을 못 정하고 여러분이 이 둘 사이에 끼여서 왔다. 갔다. 하면 세상도 택하지 못하고 하나님도 택하지 못하는 불쌍한 불들 있죠. 여러분들 참회하세요. 버리세요.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을 절대로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좋은 곳으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세요. 그리고 버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마음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의심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많은 날 동안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죄를 지으면서 살았거든요. 누구에게도 말은 못하지만 내가 살아온 발자취는 정말 주님을 향한 반역과 방탕한 삶 밖에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사랑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정말 여러분들을 애성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어두운 세상을 잘 살다가 행복하게 주님의 품에 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사적인 사랑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지는 시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 안에 있는 영적인 특질이라고 말씀드렸고, 그러한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두 개의 중요한 성품, 즉 지성과 애성을 주셔서 그것으로서 이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까리따스’ 로 가득 찬 삶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주께서 맡기신 만물을 돌보는 사명을 완수해 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지성과 사랑이 두고두고 성경에서 화두가 됩니다. 지성과 애성이죠, 지성은 지식과 관련 되었고, 그리고 애성과 사랑과 관련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지식과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관계가 되느냐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 그런 표현이 구약에 제일 많이 나오죠.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 편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의인과 악인이 나누어집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위로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경외,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사상의 핵심이 뭐냐면 이 지식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고, 두 번째로는 애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하는데 이 지성이 항상 자기가 마땅히 찾아가야 할 것만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것들과 호기심 같은 것들이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 쳐내면서 내가 참으로 알아야 될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이 구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면 죄 가운데 사는 인간들이 결국은 불행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이 지식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성을 주셨는데 그 지성으로 참된 지식을 찾지 않고, 쓸데없는 지식, 허무하고 허탄한 지식만을 찾으면서 살아요. 하나님이 애성을 주셨는데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찾는 대신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치달아요. 그래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봤더니 어떤 분이었다고 했느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 독생자의 영광은. 영광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죠.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이 비췄어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영광 안에 있는 것이 뭐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지식과 관계되는 것이고, 은혜는 은혜의 효과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얘기는 꼭 뭐와 같으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 저 지체가 요즘 은혜 충만하네. 그런데 사랑은 없어서 좀 표독스러워” 그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충만해 그 얘기는 뭐냐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니까 옆에 있는 친구들도 그 덕에 좀 먹고 사는 것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반 죽였을 것을 워낙 은혜가 충만하니까 인상 조금 쓰고 참는 것ㅅ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또 지식과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열린 교회 교인들이잖아요. 오늘 아침에 묵상하는데 어느 자매님이 오더니 왜 예배시간에 열린 교회 식구들, 그리고 유아 실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만 위해서 기도하느냐고, 자기는 늘 인터넷으로 듣는데 왜 기도 안 해주느냐고, 그러는데 또 너무 많이 기도해주면 안 나오고 인터넷만 붙들고 있을까봐 오늘도 기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열린 교회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공부하는 것이 목자와 양을 공부하잖아요. 그리고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뭐 많이 예를 들 수 있는데 그냥 결론만 얘기하겠습니다. “목자와 양”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목자와 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가 되려면 먼저 교인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 먼저 누구를 만나야 된다고요? 그리스도를 만나서 먼저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지식과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와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지식과 사랑을 배워서 그다음에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전하고 싶다. 아니, 뭐 은혜가 무슨 포도 한 송이입니까. 아니면 사이다 한 병입니까. 어떻게 전해요. 그러니까 뭐가 필요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 하나, 진리를 가르쳐 줄때 거기에 성령이 역사해서 거기에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신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영혼들이 회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세요. 또 하나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예배 속에 치명적인 두 요소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과 진리 안에서 영은 성령이고, 그다음에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이 속되지 말고, 신령하게,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그 뜻이라고 생각하면 틀린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 성령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은혜의 효과는 사랑의 효과라고 했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뭐냐면 성령과 진리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성령을 통해서 진리로 말미암아 사랑이 주어집니다. 그 예배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결국 예배 끝나고 가면 어떻게 되느냐면 처음에 올 때는 차가운 가슴으로 안개 낀 머리로 왔다가 그 때 예배를 드리고 나면 머리가 환하게 맑아지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이고 자신은 사랑에 불이 타는 것입니다. “아, 맞다. 이 세상은 정말 쓸모없는 것이구나.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진리의 말씀에 비춰볼 때 정말 부끄러운 것이구나.” 그러면서 “아, 내가 그렇게 무지하고 어둠 속에서 내가 지식이 없어서 그렇게 살았구나.” “아,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구나. 아, 우리가 그런 존재였구나. 아, 정말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구나.” 그것을 강력하게 도전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또 무어입니까? 지식과 사랑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따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로 붙어서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떠난 사랑의 경험,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다는 것을 며칠이 안 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아서 너무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진리를 깨닫는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사랑, 사랑은 애성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죠. 물론 주님이 오셔도 사랑하지만 세상하고 입 맞추고 끌어안고 바보짓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넣어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안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인격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머리통을 뚫어서 깔때기를 올려서 거기에다가 진리의 기름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진짜 통탄한 노릇이 뭐냐면 진짜 왜 교회에 오는지 이해가 안 가요.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곧바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서 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지식이 어떻게 얻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책가방 들고 학교에 가서 매일 학교에 가서 도시락 먹고 와 보세요. 3년을 다녀도 더하기 빼기 못합니다. 아니 무엇을 설교하는지를 들어봐야지. 아니 오늘 여기에 이렇게 곤고해서 나왔지만 여러분 중에는 회개하시오. 가슴에 손을 얹고. 100분짜리 설교 끝까지 한 번도 안 들은 사람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 앉아서 있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반은 졸고 3분의 1은 딴 생각하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의 깊음”입니다. 똑같은 물을 떠도 친구가 달라고 하면 “야, 네가 떠먹어.” 그래요. 동생이 달라고 하면 떠서 턱 가져다 놓습니다. 선생님이 달라고 하면 그까짓 것 손에다 안 바치면 어때요. 컵까지 이렇게 해서 어차피 이것 마실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주의 깊음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면 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백 날 다녀봐야 뭐합니까. 개꼬리 3년을 묵어야 황모가 되나보세요. 소용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는데 태도를 바꾸든지 교회를 바꾸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그것 지겹지 않습니까. 100분 동안을 주일날 설교를 들어야합니다. 90분 아니면 길면 100분 115분까지 갔습니다. 120몇 분까지 간 것도 있습니다. 수련회 가서는 270분까지 가잖아요. 왜 와요. 어차피 안 들은 것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백날을 다녀도 절대로 회개 안하고 여기에 계속 앉아있으면 계속 죄만 계속 더 짓습니다. 왜 죄를 짓는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을 해야지만 내가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들었어요. 들었다고요.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진리를 많이들은 것이 자기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것입니다. 심판입니다. 다 들었어요. 하나님이 듣게끔 허락해주셨어요. 그러면 무서운 것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을 향한 반항입니다. 나는 그렇게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셔요.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진리를 깨닫지 않으려고 했던 그 안일함과 태만함, 그리고 진리를 깨닫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진리를 깨닫고 아, 목사님 말씀이 이 말씀이었구나. 아 그렇구나. 그리고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지식이 생겨야지만 그 사람이 목양이 되지. 목양이 안 됩니다. 성공하면 사육입니다. 그 사람이 그래도 인간성이 괜찮아서 “교회에 나오시오.” 그러면 “네. 목사님이 말씀하시니 나와야죠.” 그런데 “가시오.” “네” “십일조 내시오.” “네” 이러면 사육이라도 됩니다. 그것도 안 해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저한테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나중에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안 깨달으면 마지막 심판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흘려보낸 수많은 날들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지나갑니다. 그러면 이제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면 예수님이 가신 다음에 그다음에 사도들이 교회를 세워요. 무엇을 가지고 교회를 세웠어요?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지식과 사랑으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니까 무지목매 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죄인이었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 성령이 역사하니까 예전에는 이방신들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던 사람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아가서 열렬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 자체가 지식과 사랑을 전파하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무엇이 되느냐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아나니” 둘이 서로 압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주민등록 번호 외우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때요. 지식과 떨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저녁 때 남편을 너무 사랑해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요. 그래서 이제 마중을 나갔죠. 골목 앞까지 그런데 눈물이 막 난 것입니다. 아, 헤어 진지 8시간 그래서 남편이 오면 뜨겁게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충만했어요. 여보, 진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진짜 남편 밖에 보이지를 않아요. 아, 그런데 저기에서 거무스름하게 누가 오는 것입니다. 여보, 그러면서 딱 안았습니다. 그런데 뒷집 아저씨였어요. 잘났죠. 그다음에는 어떤 인간이 있느냐면 교회에서도 그랬어.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중요하다고, 남편. 나, 남편을 사랑해. 남편, 내가 내 마음속에 남편을 향해서 뭐 뜨거운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 지식이 중요한 거야. 그리고 남편이 오는 것입니다. 아, 오네. 오는구나. 막 골목 올라오다 쾅 하고 넘어져서 굴러서 남편이 쓰러졌어요. 아, 남편이 누웠구나.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는 지식입니다. 둘 다 다 거짓입니다. 참된 지식도 아니고, 참된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이것이 대충 믿는 것은 굉장히 쉽습니다. 사영리 듣고 할렐루야, 아멘 주님 영접한 다음에 가방 들고 교회에 덜렁덜렁 따라가고,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고, 그렇게 사세요. 모두 지옥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사영리 읽어서 아멘 했다고 천당 간다고 누가 그래요. 진실한 영혼의 변화가 있어야지 거기에 도장 찍었다고 천당 갈 것 같으면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자, 오늘 배울 것은 자, 우리가 지난 2시간 동안은 까리따스의 사랑, 지순의 사랑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적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적인 사랑이란 개인적인 사랑이거든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배웠어요. 아니 그러면 까리따스 사랑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상태,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 혹은 지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목사님 그것의 반대말은 뭡니까? 그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지 저 밖에 모르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든지. 아니면 그냥 자기밖에 모르든지 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만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보면 참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습니다. 왜냐면 자기는 정말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그러면서 가족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바치는 사람, 요즘은 뭐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와도 사람들이 안 보지만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종종 라디오 연속극 같은데서 등장했던 드라마가 뭐냐면 시골에서 누나가 올라왔어요. 그래서 동생 둘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온갖 식모살이와, 그다음에 온갖 막일을 하고, 그리고 온갖 말하자면 노동을 다 해서 그래서 영화에서 보면 꼭 빈혈로 한번 쓰러지죠. 그렇게 해서 동생들을 키웠더니 동생들이 뭐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다더라. 요즘 들으면 웃긴 아이죠. 어느 누나가 동생한테 그렇게 해요. 그런 것이 말하자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고, 방향이 좀 틀려서 그러지 있습니다. 보면 막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자나 깨나 나라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또 뭐 자나 깨나 나라밖에는 모르지는 않는데 야, 이것 어떻게 하나, 소나무가 다 죽어 가는데 그러면서 밤잠을 못 자면서 눈물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 큰일 났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저렇게 고래를 많이 잡아먹다니. 고래를 보호해야지 그 불쌍한 고래를 창으로 찔러서 잡아서 회쳐먹고, 삶아먹고 무쳐먹고, 이래서 되겠느냐.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뭐 늪지 없애지 말라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평생 축구 하나에 목숨 걸고 사는 사람도 있고, 동네 축구. 세계 축구도 아니고 동네 축구에 목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 다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 사랑과는 좀 다르지 않느냐? 또 고상한 것은 뭐에요. 아, 저는 좀 가난해도. 좋습니다. 저는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습니다. 그러면서 캬바레 다니는 사람들, 이런 사랑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느냐.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아,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으면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는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사랑도 있다는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제 사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적인 사랑을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가리켜서 사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사적인 사랑이라고 말하느냐면 사랑을 하려면 자기가 좋아해야지 사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싫은데 난 너무 싫거든, 그런데 지금 사랑하고 있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너무 싫은데도 그것을 의무적으로 행하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대상에 대해서 매우 싫은데도 매우 사랑하는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그러면 그것을 사랑하려면 그것이 좋다. 혹은 아름답다. 라고 내가 느껴야지만 내가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왜 사적인 사랑이라고 하느냐면 그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기준은 나중에 공보하면 알지만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입니다. 그 기준을 안 따르려고 하는데서 모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고,
그러면 이것은 참 좋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 참 아름답다. 라고 생각이 되어야지만 사랑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따를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는데 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무시하고 자기가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좋으면 선한 것이고, 자기 눈에 보기 좋으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기준을 개인적으로 자기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러니까 그것을 사적으로 선하다. 아름답다. 라고 하는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사적인 사랑이라.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러면 이 사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면 정의를 내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창조 목적을 이탈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지은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사적인 사랑의 본질이 뭐냐 이것이 확장된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 이 확장된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사실 그것은 자기 사랑을 확장시킨 결과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출발점 문제가 나오는데 그래서 이 사적인 사랑의 출발점은 이기입니다. 이기라는 것은 뭐냐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출발점 자체가 그래서 이것은 뭐와 똑같으냐면 컴퍼스를 중심축에 놓고, 고정시키고 원을 돌리잖아요. 이것을 길게 쭉 뻗으면 큰 원이 그려지는 것이고, 그렇죠. 이것을 좁게 뻗으면 작은 원이 그려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그리는 동그라미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사랑하는 범위가 아주 넓어지는 것이죠. 인류에 관한 사상가운데 사회동포주의 “코스모 폴리타니즘” 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제가 젊어서 어렸을 때 그 사상에 한참 심취했었는데 그것은 뭐냐면 사회동포주의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나라의 소속, 민족의 소속, 얼굴 색깔의 종류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 지구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 사랑하자. 라는 주의입니다. 한 가족처럼 여기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원을 그릴 수 있는데 까지 한없이 그리는 것이죠. 지구상에서는 끝이니까 인간에까지는 다 그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뭐 더 그려보고 싶다고 해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화성에 있는 외계인도 나는 사랑하고 싶다. 그러면서 원을 그리게 되면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뭐냐면 이 원이 커지면 그렇게 되는데 이 원이 아주 작아요. 그러면 이것이 자꾸 줄어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러분 마음속에도 일본을 좀 미워하는 마음 있죠.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래가지고 무슨 선교를 하겠습니까. 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사랑해야 돼요. 썰렁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원이 조금 줄어들면 우리나라. 우리나라 사랑, 일본은 나쁜 놈 중국 놈 욕심쟁이. 이러면서 우리나라. 이럽니다. 이것이 좀 줄어들어요. 경기도, 경기도 담배를 사도 경기도 것을 사자. 왜 세금이 떨어지니까. 경기도 나의 사랑 경기도 그러면서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녀요. 이것이 또 줄어들어요. 관양동, 우리 동네 최고, 아, 조금만 나가면 백운 호수도 있고, 먹자골목도 많고 맛은 없지만 그러면서 관양동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줄어들어요. 3통 8반 우리 반 그러다가 이제 더 줄어들어서 우리 빌라. 더 줄어들어서 우리 엄마 아빠. 더 줄어들면 우리 엄마와 아빠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시집가면 그만인데. 맛있는 것 나나 먹어야지 그러면서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줄어들수록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났네. 큰 다라니 하나가 있어요. 거기에다 오물을 한 컵 찍 뿌렸거든요. 그렇게 휘 저으면 먹을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걸레는 빨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끓여서 졸여요. 그래서 물을 다 증발시켜요. 그래서 한 컵이 남았어요. 그러면 이것은 진국이죠. 오물의 진국입니다. 이 오물의 함량은 이것이나 큰 다라니에 있는 것이나 똑같아도 사람들이 오물의 함량이 똑같기 때문에 그물이 그물이다. 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걸레라도 빨고 발이라도 씻는데 이것은 안 돼요. 갖다 버리고 이 그릇 채 버려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아주 너무, 너무 줄어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악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강도 두 명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람을 찔러죽이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 나쁜 놈들 아닙니까. 그것을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것은 나쁜 짓이다. 악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죠. 있습니다. 두 사람, 그 범인들 말입니다. 논리가 맞든지 안 맞든지 자기는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좋다. 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훨씬 좋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이 자기의 “자유의지 론” 이라는 유명한 논문 속에서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악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넓은 공통의 선에서 좁은 공통의 선으로 이행하는 것이 악이다.” 그랬습니다.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 했다고 해도 자기에게는 그것이 선이잖아요.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무엇이 선인지를 자기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보면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정할 수 있는 권한.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정해놓으실 수 있는 권한.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제 이번 시간과 다름 시간에 걸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나서 은혜를 받으면 아마 한동안 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빠지지 마세요. 오늘은 빠졌어도 내일은 꼭 빠지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이 결국은 악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면 더럽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고상한 것도 있습니다. 뭐냐면 예를 들자면 자기는 정말 누리는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면서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열렬하게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 한 때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뭐 대학교에서 한번 해 봤지만 뭐 그렇게 사실 사치스럽게 대학교에서 그런 것 말고, 저 시골에 내려가서 그래서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그냥 일평생을 살다가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어느 시골 교사의 수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2학년 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는데 정말 마음속으로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도 안 믿었을 때였는데 그런데 그 스토리에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면 이 부부가 낙도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시골 근무를 자원합니다. 분교로 가서 그런데 부부가 교사가 아니라. 남편이 교사에요. 아내는 교사도 아니고 결국은 거기에서 그 아이들을 다 가르치고, 다 그래봐야 전교생 6명이었습니다. 아무리 공부 못한 애들도 6등 안에 다 드는 것이죠. 그래서 공부를 가르쳤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졸업식 날 애들이 졸업 하는 애들마다 우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중학교 갈 수 있는 돈이 없는 것입니다. 육지로 나와야 되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 여자가 만삭된 몸을 안고 봉투를 붙여서 팔아서 이 아이들을 육지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요. 결국 자기는 만삭이 되어서 난산을 해서 난산 끝에 육지로 나오다가 배에서 죽어요. 죽으면서 남편 손에다가 마지막 죽으면서 통장을 쥐어준 것입니다. 봉투 붙여서 번 돈 중에 남은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당신이 이 섬에 남아있으면서 저 아이들이 희망이 되어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정말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글을 읽다가 그렇게 오랫동안 감동에 남아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회를 하면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야,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늘 날 우리들도 만약에 그런 정신으로 시골에서 목회를 한다면 정말 존경을 받겠다. 벌써 여러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맺히잖아요. 뭐 그렇게 숨길필요 없습니다. 뭐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것을 악하다. 추하다. 더럽다. 그렇게 얘기할 때 누가 공감하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이게 자기를 직접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확장되어 나아가면 이렇게 약간의 아름다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세상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성을 주셔서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실 때에 주님이 보여주게 하시고 싶으셨던 사랑은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그러면 진짜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렇죠. 소수잖아요. 그러면 지금 설교의 논리대로라면 자기사랑에 다 붙잡혀서 축소된 자기 사랑이든지, 확장된 자기 사랑이든지 간에 자기 사랑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만 있으면 그러면 치고받고 싸우고 세상이 개판이 되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물론 그렇게 썩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뭐가 좀 질서가 있는 것 같이 움직이잖아요. 이 비밀이 뭐냐면 세상도 평화를 원해요. 그래서 이제 이 두 가지 사랑에 의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도 각각 다른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나라입니다. 부족한 사람도 있고, 더 부족한 사람도 있고, 덜 부족한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지 지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아름답다. 더럽다고 할 때에도 이것은 뭐 미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아름답다. 더럽다 이렇게 할 때도 하나님이 판단해주신 그 기준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주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창조할 때에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야지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 속에 다 받아들인 사람, 가끔은 불순종 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받아들인 사람, 그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순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이 가득차기를 원하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총 사령관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 한 나라는 뭐냐면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뭉쳐진 나라입니다. 자기사랑의 종류와 방향도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입니다. 거기의 우두머리가 사단입니다. 하늘의 천사도 지금은 다 나눠졌지만 이제 어떻게 되느냐면 타락하면서 일단의 천사의 무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그대로 간직해요. 그런데 일단의 무리들은 반역하면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질서를 반역해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육욕적인 사랑, 육욕적인 자기사랑, 꾸삐디따스의 사랑으로 뭉쳐집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이 더러운 나라가 이 땅에 있는 나라와 연결되고 이 땅에 있는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가 이 천상에 있는 아름다운 천사들의 무리와 연결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보세요.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다. 회심한다. 그러잖아요. 회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지난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을 가리켜서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 회심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사람에 따라서 아주 더러운 인간이어서 자기밖에는 컴퍼스를 못 그리는 인간이 있고, 그 사람이 넓어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이 땅에 관양동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 그리는 폭은 다르지만 중심은 항상 안 움직이게 하나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중심축에서 이것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딱 고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컴퍼스가 사람마다 지성과 애성의 크기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박혀 있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선교를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그런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기독교가 많이 융성했는데 다 예수 믿는 사람들 천지니까. 그래도 그들이 선교에 대해서 몰랐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지성과 애성의 크기에 따라서 그 원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은 원을 그려도 이것은 하나님 사랑에 박힌 것이고, 여기에는 아무리 큰 원을 그려도 중심축이 자기사랑입니다. 회심은 뭐냐면 이 중심축이 이쪽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그려도 이 축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축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 이 사랑의 축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안 옮겨지면 어떻게 하나요? 예수 믿었는데 안 옮겨졌거든요. 그것은 구원 못 받은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을 펼쳐서 이것을 펼치다, 펼치다 교회까지 들어갔어요. 그래도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구원의 무제가지고 여러분들 중에 오락가락 하는 분들 있죠. 가슴에 손을 얹고 내 사랑의 중심축이 어디에 있나 생각해보세요. 이 쪽이라고 믿으면 회개하고 복음을 들으세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죄 죽임의 교리 같은 것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 두 축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평화가 오느냐면 이런 세상 나라도 이런 세상 나라도 평화를 원해요. 평화는 세상 나라도 평화를 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 동성애 지지하는 사람, 동성애 반대하는 사람, 별 인간들이 다 섞여 살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모두 합치된 것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념과 생각이 다 다른 나라들이 국제연맹도 만들고 U. N도 만들고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한번 잘해 보자.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무슨 문제냐면 평화가 안 와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왜 평화가 안 오느냐면 중심축이 달라요. 이 만물의 쉼. 내지는 평정이라고 하는 것은 “뜨링삘리따스” 라고 하는 이 만물의 평정, 만물의 편안한 쉼 이것은 어디에서 오느냐면 만물이 작자 자기의 위치에 있을 때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쉼이 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그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다 창조하시니까 하늘의 해와 달, 별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다 있게 되었잖아요. 인간도 자기 위치에 있고, 그랬을 때에 만물에 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기상 이변들이 자꾸 많이 일어나잖아요.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이렇게 있어서 밤낮의 구분이 이렇게 가잖아요. 지금으로부터 4억 년 전에 밤낮의 길이와 지금 밤낮의 길이는 다릅니다. 물론 이제 밤낮의 길이는 봄하고 여름하고 다르지만 평균을 내면 다릅니다. 몇 시간 차이가 나고. 과학자들에 의하면 73억 년 후에는 밤인 지역은 계속 밤이 되고, 낮인 지역은 낮만 계속 된데요. 멈춘다는 얘기죠.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그것은 이제 지구 밖에 있는 여러 가지 별들과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지구 주위를 달이 도는데 달이 가까이 오고 멀리 가는 것에 따라서 물 떼가 달라지잖아요. 바닷물이 확 불어나고 그렇다고 바닷물이 더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인데 육지 쪽으로 밀려오고 빨려나가고, 물 떼가 형성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체가 저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다른 모든 존재들과 연관을 이룬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연관을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그 자리에 그 존재가 가만히 있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자기도 쉼이 있고, 다른 모든 자기 질서를 지키고 있는 모든 물체들도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이탈해서 툭 튀어나와서 이놈 저놈을 두들겨요. 탕. 탕. 탕 치고 지나가면 그러면 결국은 쉼이 다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러분 지금 다 타락한 세상인데도 증명이 됩니다. 자, 형제가 8명입니다. 부모님은 아버지 한분 어머니 한분 형제가 8명 있습니다. 8명이 시집 장가갔으니까 곱하지 2하면 16 아닙니까. 16인데 애들을 둘씩만 낳았다고 하면 32명 아닙니까. 그런데 잘 보세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은 혼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 32명 중에서 누가 굶는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들이 다 평안이 깨집니다. 비슷하잖아요. 이것이 이렇게 만물들의 질서도 그런 인간사는 이치와 똑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순은 뭐냐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를 다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안 있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바로 밑이다. 웃기네. 싫어요.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1번으로 올라가겠다. 그러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 뛰어나다. 나는 싫다. 난 사람 보다 개가 더 좋다. 또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훨씬 좋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존중해야 된다. 나는 싫다. 저놈이 내 돈을 빼앗아 갔으니까 나는 저 놈을 죽여야 되겠다. 그러면서 사람 위에 물질을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질서를 다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그런 잘못된 질서를 자기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하나님도 수단으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을 믿는데 고도의 종교적인 아첨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그분이 이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최고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뭐냐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랑살랑해서 인생의 위기나 좀 넘겨볼까 아니면 뭐 돈이나 좀 주시지 않을까. 이렇게 실눈 뜨고 말이죠. 주면 도망가려고 말이죠. 그러면서 또 미리 선수 치죠. 제가 주셔도 안 도망가거든요. 아예 십일조까지 먼저 내요. 이만큼 주실 줄 알고 십일조부터 먼저 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한통속인줄 아세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바뀐 질서를 가지고는 쉼이 없는 것입니다. 쉼이 없으니까 결국 그 속에서 그렇게 평화를 원하는데 평화가 성취가 안 됩니다 이것이 결국은 무엇으로 이어지냐면 이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선은 결함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 이것이 선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 그래도 목사님 보편적인 것이 있잖아요.” 그것이 뭔데요. “아, 우리나라에서 애국하면 다 좋아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애국하면 우리나라의 반대에 있는 나라에는 매국이 되는 것이죠. 어쨌든지 간에 인위적인 선은 결국은 결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를 하자면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돌 맹이 하나를 들고 던져요. 풍덩 그러면서 빠졌어요. 빠지는 즉시 원을. 파문을 그리면서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번져 가잖아요. 그런데 저쪽에서 풍덩하고 던져요. 그래서 또 파문이 일어요. 같이 만나요. 안 만나요.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 지순의 사랑으로 중심축을 삼은 사람들은 이것이 다 일치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순의 사랑을 중심축으로 하는 사람들은 다 일치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치 하나 되자고 말하는데 그 하나 되는 방법이 그냥 모여서 족구하고 개 삶아먹고 그런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의 진정한 하나 됨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마지막 드린 기도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저희를 진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하나 되어서 진리를 갖게 하옵소서. 가 아니라.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 진리에 사로잡히게 되면 굳이 하나 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정말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꼭 술 먹은 사람처럼 할 말이 많아져요. 뭔가 이렇게 자기가 받은 은혜를 막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왔는데 누가 와서 어깨를 툭툭 쳐요. “너 여기 다녀. 그래서 쳐다보니까 아, 3년 전에 동네에서 전기세 때문에 머리를 잡고 대판거리 싸우고 헤어진 그 (용서하고 들으세요.) 여편네야. 진짜 너 다시 보나 그랬는데 하필이면 교회 앞뜰이에요.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흥. 그러면서 갔을 건데 그것도 새 가족 위원이라고 달았으니 그럴 수가 있나. 새로 왔다는데 그래서 똥 씹은 얼굴을 해서 ”아이고 오시지 마시지.” 제가 이렇게 오셨으니까 닫힌 공간으로 인도하겠다고 그러면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껄끄러워요.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 사람 아시죠. 저 여자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나겠죠. 하나님 보내 주시옵소서.” 그랬는데 아. 이 여자가 안 가네. 몇 주 나와요. 아이고. 잘 됐다. 마음속으로는 “목사님 설교를 길게 하세요. 예화도 하지 마시고요. 그래 왜? 지겨워서 가겠지 나도 몇 달 동안 지겨워서 떠날까 말까 망설였는데 가겠지. 그런데 사상 최대의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버린 것입니다. 아, 은혜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첫 주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흥, 그렇지 뭐. 자기가 그 따위로 살았으니까 회개할 것이 많을 것도 당연하지. 그래 회개해라. 괜히 서러워서 우는 것이지 목사님도 늘 교리 말씀하실 때 가짜 회개가 많다고 했어.” 아, 그런데 이게 갈수록 분리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에도 앞자리에 앉아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세 째 날도 회개를 하고 넷째 날도 회개를 하고, 그러더니 이제 드디어 일어나지 말기를 절대로 바라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뭐냐면 자기를 자기 집에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개집 옆에서 밥을 먹지 그 집에 가기 싫었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내키지도 않는데 갔어요. 그런데 비빔밥을 했다고 하면서 바가지에 비벼서 말이죠. 콩나물까지 떨어뜨리면서 먹어보라고. 말이죠. 조금 먹고, 아. 이제 차나 마시고 가야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거든요. “그런데 열린 교회에 어떻게 왔어?” 물었더니 갑자기 조용히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아, 막 우는 것입니다. 쭉 이야기를 하는데 아니 이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똑같이 만난 것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이 쭉 녹는 것입니다. 왜냐면 들으면서 건성으로 물어보고 갈려고 했는데 맞아, 맞아, 그거야. 그래 나도 그랬어. 그래 맞아 너도 깨달았구나. 그러다가 점점 가까이 가서 두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사랑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진리로 말미암아서 그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제대로 은혜를 못 받으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도 모여서 축이 수 백 개 되는 것처럼 저마다 싸우다 축끼리 충돌해서 진짜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물고 뜯는 것입니다. 하나님 더 사랑하려면 네가 죽어야 된다. 그러면서 이게 전부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데 제대로 되면 그렇게 딱 일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안 그렇습니다. 왜냐면 이 축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몇입니까? 하나님은 한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 하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도대체 몇 개입니까. 수십억입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축이라고 하는데 저마다 다 독립해서 자기 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끼리 돌아가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렇게 치열하게 막 사람들이 공부를 하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지 출세해 보려고 눈이 빨개서 애를 쓰고,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권력을 얻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무슨 권력, 너도 사랑의 축 가지고 있어, 나도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포기하시지. 자꾸 부딪히지 말고 포기하시지 그런데 포기시키려면 내가 뭐가 많아야합니까. 자기 중심축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회사를 큰 것을 운영해요. 돈이 많아요. 그러면 한 번에 잘라서 해고시킬 수도 있고, 말 잘 들으면 승진시킬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축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사장이 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자원이 많으면 돈 많은 사람은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간들이 누구였습니까?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중국 같은데 가보면 역사를 보면서 딱 느낀 것이 뭐냐면 오직 이 천하의 모든 만민은 한 인간을 위해서 존재했구나.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말 안 들으면 단번에 날려버렸으니까. 그래서 서 태우 가 그랬다면서요. “어느 인간들이 나를 잠시 불편하게 하면 나는 그 인간을 평생 불편하게 만들어주겠다.” 무서운 여자죠. 그러면 뭐해요. 그도 죽었는데 그러니 이것이 평화가 옵니까. 안 오죠. 그러니까 어때요. 여러분도 그런 자기 사랑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옮겼습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옮겼는데 이것이 완전히 지순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을 때는 이 축에 순종해요. 이 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딪힐 일이 없죠. 여기에 부딪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디 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줘요. 지금은 뭐 이렇게 해결이 안 되는 것 같고, 모순이 많은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차차 정리를 해주십니다. 왜? 하나님을 계속 거치니까. 축으로 돌아갔는데 하나님을 거치니까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요. 그런데 뭡니까. 이것이 수시로 자기 사랑이 불쑥불쑥 올라와요. 분명히 중심축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쪽이 축이 있는 것처럼 이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떨어질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 떨어지면 모두 다 혼란스러워요. 은혜 떨어진 사람에게 물어보면 항상 모른다는 대답입니다. “왜 그렇게 시험에 들었어?” “몰라” “이렇게 살면 안 되잖아?” “몰라” “너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닌데” “몰라” “너 이렇게 살다가 나중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니?” “몰라” 아무것도 몰라요. 왜? 이 두 축이 엉키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면 이러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선은 이러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결함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판단.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다음에 자기가 선하다. 아름답다. 라고 생각하는 기준을 따라서 그냥 살아버리면 그다음에 자신은 아무리 평화를 원해도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삶입니다. 다른 것이 악한 삶이 아니라.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기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뭐냐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계는 완전한 세계였는데 그 완전한 세계는 고정된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이제 인간에 의해서 계속 가꾸어지면 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그런 여지를 가진 세계입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여러분 예수님 믿기 전에 다 그런 고민했잖아요. 그것이 바로 뭐냐면 자기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지점이 바로 이교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길을 잃어버린 지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인간인 나의 위치는 어디인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지혜 자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아멘하고 믿어야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자기가 다 직접 경험하고 왔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모여서, 오늘도 그런 이야기 했죠. “야, 미국에 이번에 태풍이 불어서 큰일 났데. 집이 떠내려가고 1000명이 죽어서 생난리가 났데. 야,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나도 기부금을 좀 낼까. 생각중이야. 야, 그것 참 안됐다. 그렇게 얘기할 때 누가 ”아이고, 뻥 까고 앉았네. 지가 가봤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직접 경험할 수 없으니까 신뢰할만한 사람이 갔다 왔다고 이야기를 하면 신뢰가 안 되면 “에이. 잘못 봤겠지.” 라고 말하지만 신뢰할만하면 “아, 그렇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이치 아닙니까. 더군다나 우리들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의 경우에는 누가 갔다 와서 보고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인간도 창조되었는지 자기가 흙으로 창조되었는지, 돌 맹이로 창조되었는지 떡으로 창조되었는지 자기가 봤습니까. 자기가 피조물인데 누가 봤어요. 죽으면 천국가고, 지옥 간다고 하는데 누가 갔다 와서 얘기해주는 사람 있습니까? 가끔씩 나는 갔다. 왔다. 그러는데 믿을 수가 없죠.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결국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를 이미 논리적으로는 증명이 안 되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멘” 하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가장 이성적인 행동입니다. 일단 믿고, 그다음에 믿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폭풍이 왔는지 뭐가 왔는지 자기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었어요. 그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래서 계좌로 돈을 붙였어요. 그랬더니 몇 달 있다가 감사 편지가 영어로 써서 왔어요. 그러면 맞는 거잖아요. 자기가 직접 가서 폭풍 일어날 때 다 지켜보지 않았어도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자기가 그런가보다. 믿고, 돈을 보내고 편지를 주고받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편지를 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런 행동을 하게 했던 그 기초가 나중에는 이후의 행동을 통해서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내가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느냐? 그러는데 믿지 마세요. 그러면 안 믿는 것도 비이성적이지. 50대 50 아닙니까. 그러면 안 믿는다. 그러면 안 믿는 것도 자기가 안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못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50대 50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믿으면서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면서 주님을 믿고 어떤 사람들은 안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면서 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복된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위적인 선은 결국은 결함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면 우리들이 뭔가 사물을 보게 되요. 그런데 보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면 보면서 이것이 선이다. 악이다. 라고 판단하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그 사람도 자기 사랑의 중심축을 세운 사람들은 자기가 선한 것이다. 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인 것 아닙니까. 판단하기 전에 뭐가 있느냐면 인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고 파란 색이다. 빨강 색이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은 인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각하는 것입니다. “어, 움직이네.” 이런 것은 지각입니다. 그러면 뭐냐면 이 파란 것이 의미가 뭔가? 이 하얀 것의 의미가 뭔가? 뭐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을 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지각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런데 이 인식이 이렇게 뭔가를 인식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그것은 좋은 거야. 그것은 내가 좋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아까 강도 둘이 택시기사를 죽이고 돈을 5만원을 빼앗아서 도망을 갔는데 왜 그랬느냐면 카드빚에 몰려서 그러다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얘기냐면 카드를 보면서 이 빚 독촉장이 계속 날아오는구나. 아, 그러면 이것은 갚는 것이 잘하는 것이구나. 그런데 돈이 없다. 어떻게 하느냐. 택시 운전수를 죽이고라도 돈을 빼앗자. 그러면 은행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고, 한탕 털어서 은행 빚 갚고 나면 은행에서 독촉장이 안 날아올 것인데 그것은 좋은 것이다. 이 모두다 사물을 보면서 인식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왜 발생하느냐면 인식을 하는데 객관적으로 그대로 인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있는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각각 이것을 볼 때에 인식되는 것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줌마다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내밀면서 “이게 나사가 떨어졌는데 고쳐주세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허어. 이것 나사가 없는데 며칠 있다가 오셔야 되는데.” “아, 저기 떨어진 것으로 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계속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허어, 나사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 내일 오셔야 되겠네요.” 그러니까 “거기 있는 것으로 해 주세요.” “나사가 없는데” 계속 헛바퀴가 도는 것입니다. 이 아줌마가 화를 벌컥 내는 것입니다. “거기 나사가 떨어졌는데 그것으로 해 달라고 하는데 왜 안 해주느냐고” 그러니까 “아줌마 그것은 빵 부스러기에요.” 안경을 벗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면 안경을 빨리 고쳐 쓰고 가야 되겠다. 라는 생각하나에 빵 부스러기인데도 잘 분별하면 분별할 수 있을 것을 나사, 나사, 나사, 나사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빵 부스러기가 나사로 보인 것입니다. 지금에야 그런 사람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 전도사 시절 때는 청년들을 지도할 때 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그 청년들이 아서 “전도사님” 하고 불러야 되잖아요. 별일이 다 있습니다. 과장님, 부장님. 교장 선생님. 원장님. 원장님 부르는 걔는 유치원 선생이고, 과장님, 부장님 그러면 이제 말단으로 들어간 남자 직원이고, 심지어 점장님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지점에 들어가서 근무하는 그런 친구들이고, 결국은 뭐냐면 뻔히 전도사가 서 있는데 이 생각 속에 회사 생각이 꽉 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들어가서 원장님. 점장님.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간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눈도 정확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 속에 어떤 사랑이 차 있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설명 안 하겠습니다. 각각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이 육욕적인 자기 사랑이 꽉 차 있게 되면 모든 것을 해석할 때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 중심으로 해석할 때에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 결국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 15-16절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라고 말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성적인 욕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찾아간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아, 저것이 참 아름답다. 아, 저것이 참 좋겠다.” 이렇게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좋은 것이 아닌데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곧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사랑입니다. 세상이자기 무대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 사랑이 꽉 차 있으니까 사물을 볼 때 육신의 정욕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어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두신 그 자리가 어디인가? 그리고 이것은 어느 위치에 있고. 그리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객관적인 판단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꽉 차 있을 때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 육욕적인 사랑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그 육욕적인 사랑이 차 있으니까 그 세상 사랑으로 꽉 차서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선하지 않은데 선하게 보는 것입니다. 왜? 자기에게 유익을 주니까 선하게 보는 것입니다. 아까 그 택시 강도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나쁜 것입니다. 자기도 전에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분명히 그런 짓 안했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해서 돈을 빼앗았다. 그러면 그랬을 것입니다. “나쁜 놈들. 못된 놈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이익과 관련이 되니까 이것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게끔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호기심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것은 “안목의 정욕과” 이것은 뭐냐면 이 안목의 정욕은 호기심입니다. 나름대로는 진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막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공정한 인식의 기능이 전부다 흐려져 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배가 고프면 다 먹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죠. 뭐든지 먹을 것을 찾아요. 저것도 맛있겠다. “배추꼬랑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런데 배가 부르면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죠.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배가 고프면 음식을 객관적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먹고 싶다. 맛있겠다. 이런 생각만 드는 것이지 저것이 칼로리가 얼마인가? 저것을 먹으면 뱃살을 어떻게 감당할까? 이것을 다 퍼먹으면 내가 5000칼로리는 먹는 것인데 몇 바퀴를 운동장을 뛰어야 되나? 그런 생각, 또 목사님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 내가 또 배를 만져야 되겠구나. 그런 생각 안 합니다. 배가 고프니까. 그런데 이렇게 해서 막 찾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 마지막에 뭐냐면 “이생의 자랑이니” 그랬는데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야망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으로 번지냐면 교만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의 원래의 존재론을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이 미친 듯이 돈을 벌고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많은 자원을 가지고 사람들을 짓눌러서 그래서 그 사랑의 질서를 복종시켜서 이것을 넓게, 넓게, 넓게 펼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인간의 권력욕입니다. 물질에 의한 권력이든지, 뭐든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이런 모든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해서 결국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이것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흐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을 흐려놓는데 그 판단에 입각해서 이것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자기가 질서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대로 살기로 한 것이죠. 그런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뭐냐? 해결책은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는 것입니다. 지순으로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그러면 육욕의 사랑으로 꽉 차는 것과는 차이가 생겨납니다. 육욕의 사랑이 꽉 차면 이 지성에 안개가 낍니다. 그다음에 애성에 오류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잘 보세요. 지성에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쓸데없는 잘못된 사랑이 꽉 차니까 그것 때문에 사물을 올바로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애성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어제 지난시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그 위에 사랑을 주셨다고 했죠. 그래서 떡 기계에 하얀 쌀 쪄서 집어넣는 이야기 했잖아요. 그렇게 해서 주셨을 때에 이 사랑의 기능이 막 작동하면서 여러 종류의 대상을 향해서 사랑이 나오는데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복속된 사랑입니다. 예술을 사랑해도, 학문을 사랑해도, 학문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학문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찢어내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하나 된 가운데 가족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결한 사랑이 사라지고 아주 육욕적이고 아주 더러운 사랑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 기계는 아직 생생합니다. 그래서 막 돌아가요. 여기에서 똥 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어떻게 하느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퇴출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아주 쉽게 예를 들어주겠습니다. 어떤 여자 하나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성격이 좀 이상해요. 가정에 상처도 많아요. 인생을 살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자살을 몇 번 시도했는데 못 죽었어요. 그래서 이제 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있으면 죽을 궁리나 하던 여자인데 그 처녀에게 또 그런 정신병자 같은 처녀가 좋다는 남자가 나타났어요. 둘이 사랑에 빠졌어요.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이 여자가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제일 먼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어요. 그 귀신 산발한 것 같은 머리를 다 정리하고 추리닝이나 하나 끼고, 그리고 러닝셔츠나 하나 입고, 돌아다니더니 이제는 옷을 샀어요. 전에는 인생의 낙이 없는 사람이 배만 나오거든요. 왜냐면 영적 침체에 걸린 사람들 배 나온 사람들 많습니다. 왜냐면 사는 것이 하도 귀찮으니까 먹는 것은 별로 안 먹는데 조금 먹고 그냥 드러누워서 잠만 자는 것입니다. 그 운동을 안 하니까 이 배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배가 나오는 것만큼 이 영혼을 계속 다이어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똑바로 섰는데 발끝이 잘 안 보여요. 내가 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데 이러면 안 돼지. 하면서 헬스클럽에 갔어요. 그런데 대게 재미있는 것입니다. 헬스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남자를 만나는데 아, 뭐 이 사람이 이쪽에다 대고 독일 말 하고 이쪽에는 불란서 말 하고,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영어라도 몇 줄 해야지 어디 가서 비행기 표라도 사겠구나. 그러면서 가서 카세트를 끼고 다니면서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자. 그러다보니까. 전에는 이 여자가 사랑하는 것이 쥐뿔도 없었는데 이제 사랑하는 것이 꽤 많아졌어요. 자기 외모도 사랑하게 되었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가 매일 마다 하나씩 같다주고 인형 정리하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또 건강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랬어요.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사랑해서 자기고 있던 사랑 중에서 몇 개씩 떼어내서 이 남자는 80만 주고 20 떼어내서 헬스클럽에 2 인형 정리하는데 1 화초 가꾸는데 3 외모에 4 이런 식으로 배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날 이 남자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헤어지자. 그러면 그것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던 이 여자의 사랑도 한꺼번에 다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남자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가 그 남자 때문에 좋아하게 된 헬스에 대한 사랑, 몸매에 대한 사랑, 뭐 건강에 대한 사랑, 외모에 대한 사랑, 뭐 머리에 대한 사랑, 이런 것이 교회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이것이 성경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묻고 싶겠죠. “목사님 아니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면 그러면 여기 지금 은혜 떨어진 사람이 태반인데 이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가족도 사랑하고,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애들도 사랑하고, 또 뭐 직장도 사랑하고, 또 광양동도 사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져서 까리따스가 거의 없다고 자기들에 고백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사랑하고 살아가니까 모든 것이 다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회사를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관양동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에 도움이 안 돼요. 왜? 수요예배 안 나오고 반상회 가버리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하는 것이 도움이 안 돼요. 왜?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을 위해서 얼마든지 신앙을 양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전부다 거대한 사랑인데 이 사랑의 질서가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된 질서가 아니라.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이탈해서 제멋대로 세운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질서를 그냥 가지고 있으면 이 질서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괜찮아요. 그냥 남편밖에 모르고, 그냥 자기 자식밖에 모르고 너무 희생적인 엄마에요. 직장에서는 뭐 그냥 다른 사람은 다 해고시켜도 너는 절대로 안 된다. 나와함께 죽고 같이 살자. 사장이 절대로 안 놔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정을 받아요. 관양동에서도 절대로 호계동으로 이사 가지 말라고 통장이 보따리 싸가지고 와서 잡아요. 그러면 뭘 합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귀하지 않은데 이것이 바로 사적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렇게 육욕적인 사랑이 전부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려졌던 이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 지식에 의해서 거짓된 안개가 죄는 속이거든요. 속임의 안개들이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의 일입니다. 근처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3일 동안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 밤에 그 교회 전도사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이 밤에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그 때는 교수였는데 “교수님이 설교하고 간 다음에 아주 놀라운 일이 있어서 전화했다고”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어제 일어난 일인데 자매 하나가 굉장히 착실해요. 그리고 교회에 잘 다니고 진짜 교회에서 모든 청년들이 그 자매만 같기를 바라는 자매였는데 그 때 제가 뭘 설교했느냐면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을 설교했어요. 그런데 그 자매가 가서 밤늦었는데 전도사에게 전화를 했더래요. 그래서 왜 전화했느냐. 그랬더니 전도사님 제가 잘 수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너무 더러워서 온 몸이 수많은 남자들에게 더럽혀진 여자처럼 자기 자신이 너무 불결하고 더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것이 회개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안개가 걷히고 나니까 이것이 있을 때에는 인식이 흐려져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와 자기 깨어짐으로 가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래 항상 깊이 회개했을 때에는 항상 새로 본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막 눈물을 흘리고 펑펑 울고 회개해요. 그래서 왜 그렇게 회개 하냐. 그러면 아니 몰라. 분위기가 나를 울려. 어찌 하오리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 있을 때 그 때 이 지성이 순수해지게 되고, 이 애성에는 순결한 사랑이 들어가서 이 하얀 떡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신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합니다. 밝은 지식, 지식의 빛, 뜨겁고 순수한 사랑의 열. 이 두 개를 가지고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이 사적인 선의 문제를 고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다 저마다 각기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너 거기 있어." 저 사람은 ”웃기네. 내가 왜 거기 있어 네가 거기 있어“ 그러니까 ”거기 있어“ 그런데 이 사람이 워낙 권력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 있어“ 그러면 ”네“ 그러면서 기가 죽는 그러면 행복하겠습니까. 회사 들어가서 자기 축 다 반납하고 사랑축으로 들어갔는데 행복하겠느냐고요. 그 사장 축으로 돌아간 것도 자기 축입니다.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면 이런 사적인 선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정하고 나면 결국은 독단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각기 세워놓은 질서와 충돌해요. 다른 사람들이 세워놓은 질서와 충돌하는 것은 상관없어요. 왜? 그 사람들은 어차피 다 개인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것이니까. 그런데 신자의 불행은 뭐냐면 자기가 세워놓은 이 질서, 하나님은 여기, 나는 여기, 너는 여기, 목사님은 저기, 진리를 설교할 때는 저어기. 우리 맘에 맞게 할 때는 요기. 이런 식으로 자리매김을 자기 멋대로 하고 그다음에는 돈, 제일 중요해, 신앙, 저 밑에 의리. 저쪽으로. 그다음에 인정, 저기 멀리 쓰레기통 옆에. 이런 식으로 자기가 막 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이야기로 존재론적 질서, 가치론 적인 질서. 그래서 이렇게 배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치하는데 이것이 더 중요하다. 혹은 이것이 더 아름답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기준이 순전히 사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적인 것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내가 보여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이해집단에 따라서 이 기준이 다 변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잘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들어보세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싫어하는 한 테러국가가 있어요. 너무 너무 싫어하는데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일치하게 그 나라 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테러국가입니다. 돈도 별로 없으면서 항상 폭탄이나 가지고 여기저기 던지면서 세계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하는 아주 불량국가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스파이가 둘이 들어온 것입니다. 거기에 정탐하러. 들어와서 막 활약하면서 수많은 정보들을 캐냈습니다. 그런데 들통이 났어요. 그래서 전국에 지명수배령이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도망을 가다. 산골 저 시골 어지까지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막 동네에 나가도 다 포스터가 붙어서 얼굴이 다 팔려서 어디 가서 밥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무 지치고 기운이 없어서 할 수 없어서 산 속에 들어가서 어디 한 집 외딴 집에를 들어갔습니다. 안 되면 사람을 처치하고라도 밥이라도 빼앗아 먹으려고 들어갔는데 이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아요. 그래서 뉘시오. 그런데 우리 모릅니까. 매스컴에 많이 나왔는데 그러니까 잘 몰라요. 그래서 앉아서 배가 고프다고 하니까 어, 그러느냐고 그런데 생김새가 좀 비슷해요. 그래서 당신 무슨 족속이요. 아, 나, 아무개 족속이라고 그러니까 아, 우리 조상도 그 족속인데 그러면서 막 악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밥을 차려 먹이면서 가만히 보니까 아, 진짜 어디에서 봤네. 당신들 혹시 간첩 아니요. 그러니까 화들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을 꺼내면서 그래 간첩이다. 그러니까 아, 걱정하지 마라. 아, 나는 이 나라 굉장히 싫다. 이 나라 엉터리 같은 나라다. 아, 자기가 몇 대조 할아버지가 어디 살았고, 그러면서 보니까 고향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까지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래서 그 집에서 위기의 순간을 넘치면서 한 며칠을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돌아서는데 이 사람들이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동족이라는데 자기들을 숨겨준 것이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보니까 하여튼 지질이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방을 다 뒤져보니까 공작금이 상당히 남았어요. 그래도 사실 이 돈이 있어야지만 어디를 가서 피신도하고 뇌물도 주고 살 것인데 그래도 이 사람이 안 숨겨줬더라면 우리는 죽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힘들더라도 이 사람에게 돈을 주고 가자. 그러면서 거기에서 거액을 떼어서 이 돈만 가지면 이 사람이 평생을 잘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떼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후에 경찰이 쳐들어 왔어요. 혹시 너희 집에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아니요. 쥐새끼 몇 마리 왔다 갔을 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완벽하게 거짓말을 해서 따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자, 이제 스토리 기억하죠. 그러면 이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간첩을 숨겨준, 그 시골 아저씨의 행동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 똑똑한 사람은 이렇게 물어야합니다. 목사님 누구의 관점에서 대답을 해 드릴까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죠. 자, 이제 풀어보겠습니다. 이 도망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골 아저씨는 선합니다. 또 그 시골 아저씨 입장에서 봐도 그 도망간 간첩들이 선합니다. 왜? 돈 줬잖아요. 선하지 그런데 그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간첩을 도망시켜준 이 사람이 선합니까? 악합니까? 이것은 능지처참해야합니다. 민족을 배반한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세계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시골 아저씨가 선해요? 악해요? 뭐가 맞는 것입니까. 이것이 지금 세계전체와 한 나라 그랬으니까 이것이 지금 답이 어느 정도 나오지 이것이 반반씩 다 갈라졌다. 그러면 뭡니까. 선입니까? 악입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여러분들이 매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것 해야 돼. 왜? 좋잖아. 아니 누구입장에서 좋은데 그냥 내가 좋으니까 좋은 것이지. 그것이 죄입니다.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그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그리고 하나님도 그 판단을 안 받아들이면 나 교회 안 나간다고 버팅거리는 그 머저리 같은 배짱. 이것이 전부다 바보 천치 멍텅구리 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왜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보배 피를 흘리니 이 죄인 받으소서. 그 기도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제 이 짓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다 죽고 하나님이 옳다고 내리시는 이 질서를 다 받아들이면서 살겠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지만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내 위치가 주어지고, 내 위치가 주어지는 그 속에서만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고, 쉼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해가 안 가는 것 있죠.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예수 믿고 쉼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쉬는 것입니까. 12년 동안 개척해서 여태까지 계속 고생하며 살았는데 내가 항상 얘기하죠. 소박한 소원이 있습니다. 3일만 좀 실컷 자는 것입니다. 바람 잘 부는 언덕에서 창문 큰 집에서 러닝셔츠 입고 하얀 이불 덮고, 실컷 자는 것입니다. 쉼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 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리적인 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왜 수고했습니까? 짐 졌습니까? 자기 위치를 이탈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뜻은 무슨 뜻이냐면 “얘들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 위치를 몰라서 여기저기 이탈해서 고통 받고 쉼이 없었던 너희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리라.” 그 뜻입니다. 그것이 쉼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잠도 못자고.”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심파 조로 쳐다볼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 믿기 전에는 쉼이 없었지만 지금은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것이 쉼이죠. 그래서 전부다 바보입니다. 미친 짓입니다. 오늘 날 우리나라도 보면 뭐 공산주의 자유주의 뭐 그냥 예수 믿는 사람도 핏대를 올리고 싸우고 그러잖아요. 30년만 지나가보세요. 싸운 사람들이 다 쑥스러워 질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이 굽이치는 인간의 사상 중에서 어느 것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선을 따르는 것이고, 어느 것이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는 것인지 그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이것이 믿는 사람이 해안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이것이 시간에 따라서도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느냐면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선이라고 하다가. 그다음에 그것을 악이라고 그래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변해요.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그런 것을 결정하는 것이 사랑이 자기이거든요. 그런데 이 자기사랑이라는 것이 불변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만 불변이지 자기 사랑은 변하는 것입니다. 항상 가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것을 사랑했다. 하다가 저런 상황이 되니까. 이것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왔다. 갔다. 이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춤을 추면서 살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 신뢰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죠. 자기는 굉장히 선한 일을 위해서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사가 흘러가고 나니까 아주 나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수없이 변천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모든 속에서 모든 것들이 변천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일정하지 않는 가치에 의해서 요동치면서 살아가게 되느냐. 결국은 기준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깊이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면 그러면 왜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까? 밝은 지식과 뜨거운 사랑으로 그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창조하신 목적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은혜로 받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자기가 스스로 판단해서 이것은 나에게 좋으니까 좋은 것, 이것은 내가 가져야 되니까 가져야지. 정 안 되면 하나님께 떼를 쓰고 졸라대서 하나님을 확 꺾어서라도 세게 기도해서 밀어붙여서 내 욕망을 이루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막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뭐냐면 아첨입니다. 아부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거시리며 살기를 원하면서 아부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욕적인 마음을 가지면서 그 하나님의 품에 와서 안기는 것입니다. 칼을 품고 와서 안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사랑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 결국은 이런 식으로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계속해서 같은 식으로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 은혜를 안 주셨습니까. 여러분들 언제 은혜를 안 받았어요. 여러분 중에 대다수나. 반 이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심축이 자기중심인데 하나님도 단칼에 날려 버리는데 하나님의 계명도 내 이익에 따라서 단칼에 날려버리고 인간의 위치도 자기 마음대로 바꿔버리고 하나님의 위치도 장기판의 장기 알 옮기듯이 이리저리 옮겨 놓고 자기 마음대로 판을 짜는데 그렇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 속에 쉼이 있을 수 있겠으면 어떻게 그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은혜 주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린다. 라고 하면서 뭔가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뇌물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선한 행동은 아첨이고, 그가 바친 헌신은 뇌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의미도 모르는 채 짐승들을 끌고 와서 때려죽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혐오하셨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지겹다. 그런 식으로 제사 드리지 마라. 이제 이해가 가셨습니까. 왜 제가 그렇게 자기 깨어짐을 강조하는지. 이렇게 옮겨진 사랑의 중심축을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도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기 육욕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 파괴되고, 희고 순결한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자기가 가득 채워져서 그래서 그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목적을 모두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그 순결한 사랑도 결국은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3일을 눈물 안 흘리고도 계속해서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무엇으로 만든 인간입니까. 더군다나 영혼을 돌본다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그렇게 강퍅하고, 회개할 줄을 모르고 참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손에서 어떻게 영혼들이 돌보아질 수 있겠는지 나는 맡겨진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요. 우리 모두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저는 완전한 사람이겠습니까.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 제가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 하고 목회를 하고, 이렇게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수시로 여러분들이 나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한 것을 인해서 여러분 감사하세요.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나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목회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기술도 아니고 단체를 이끌어가는 지도력도 아닙니다. 기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갔으면 좋을 길을 먼저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 어떤 마음이 드느냐면 교회에 큰 성공도 필요 없고, 이 세상에서 높은 명예도 필요 없고, 진실하게 정망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고, 그리고 구속의 계획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해지기 원하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걸어가요. 그런데 완전하지 않잖아요. 쓰러져요. 넘어지기도 하고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고 왜? 우리 모두 그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한 가지는 틀려야죠.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인도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끔 와서 농담 비슷하게 목사님 외로우시겠어요. 그러는데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누가 있습니까? 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래요. 우리는 곤고하면 목사님 찾아오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하시냐고, 걱정하지 마세요. 가요. 오직 희망이 뭐냐면 하나님이 이렇게 진리의 세계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구도의 기본이 뭐냐면 가족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이 정신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소용없이 오직 진리를 내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래 목회자는 진리를 연애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참다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 보다는 진리를 훨씬 더 사랑합니다. 그 진리는 주님이시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계획을 따라서 내가 참 사람이 되고자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칠 때 하나님이 그 때마다 위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데 진리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한 없이 기뻐하고, 위로를 얻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받는 멸시나 천대. 이런 것들 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와 함께 한없이 기뻐하고 깨달아요. 삶이 변해요. 그렇게 걸어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것 자체가 목회입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고백입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 이 밑에서 보는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진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뭔가 그것을 봅니다.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말 연약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쭉 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어느 지체가 설교를 듣다가 와서 목사님 도대체 경험을 못해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내가 다 해보았다. 당신 나하고 살아온 생활환경이 다르니까 내가 못 경험할 수도 있지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내가 다 지나온 길이다. 여러분은 내가 다 지나온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 보다 낫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험하고 지나간 길입니다. 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이중에 하나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길을 열고 개척하고 지나가면 그 속에서 내가 많은 것들을 깨달아요. 그러면 후에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줘요. 그러면서 사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때요. 진리를 찾아서 한 사람이 계속 가고, 그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또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 ?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진리를 함께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여요. 조직도 짜야 되요. 헌금도 해야 되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요. 교회당도 지어야 되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요. 조직도 짜야 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와요. 그러면 직원도 써야 됩니다.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좋은 것이겠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중요한 핵심은 아까 이야기 한 것, 그것이 핵심입니다. 큰 교회가 되는 것도 비전이 아니고, 뭐가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저 끝에 72미터나 돼서 저 뒤에서 졸고 있는지 자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 뭐가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이라도 정말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덜 사랑해서도 아니고 그리고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있는 부목사님들이 정말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각기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면 나는 150명 데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많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현실적으로 여러분들이 안 가고 일이 안 이루어지니까 그렇지 그러면 여기 남아있으면 그러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계속 자라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깨달은바 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성화의 진전도 없이 진천으로 벌여진 잔치 상 앞에서 발 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처럼 우리가 왜 그런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진리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은혜의 떡을 먹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고,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특별히 불러서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자기 사랑으로 계속 뭉개다가 너무 괴로우면 와서 한번 살려달라고 해서 은혜 받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다시 눈물 씻고 다시 또 자기 사랑하면서 살고 자기 편리한대로 살고, 세상이 옛날 세상이 아니니 현실을 모르느니 하면서 그런 식으로 야합하면서 살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가운데서 교리적인 지식이 늘어가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그러나 나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주님이 베푸신 최고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용서의 은혜입니다. 모두 와서 내가 이전에 어둠 가운데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아서 자만했지만 더 넓은 지식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영적인 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다른 것에 대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예전에 받았던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추루하고,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나는 묻고 싶어요. 환경과 여건, 여러 가지 많은 불평과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지만 그러나 정작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했습니까. 깊이 참회하면 하나님이 다시 용서해주셔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와 강퍅함을 모두 아, 그렇습니다. 마치 진창에 빠진 자동차 바퀴 굴러가듯이 마친 듯이 몸부림 쳤지만 결국은 이 수렁에 빠져서 계속 지식이 있어도 성화의 진전이 없는 이런 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이 모든 사랑의 질서를 깨고 내 마음대로 사물의 중요한 여부를 내 마음대로 정하고 가치 있는 것을 내 마음대로 정하고 하나님을 그 보좌위에서 감금시키고 내가 그 위에 올라가고. 이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찌꺼기 사랑을 드리면서 결국은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이것을 내가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고 뉘우쳤던 그 바로 그 죄였습니다. 회개해야합니다. 난 자신 있게 여러분들이 가고 있는 모든 길을 먼저 걸어온 사람으로서 말씀에 입각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이 오늘 이 설교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수없이 설교를 듣고 내가 하늘의 위대한 비밀을 보고 와서 여러분들에게 풀어서 여러분들을 설교 듣는 동안 천국에 올려 보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성화에 진전 없습니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없는 것을 열애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들이 새로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한 여러분들이 길이 아닌 것으로 가는 것을 보며 그렇게 아파하셨습니다. 지식이 많으니까 그 위에 교만해졌죠. 어두움 위에 교만이 덮쳐졌으니 누가 말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부르셔요. 모두 버리세요.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기도하겠습니다.
4. 악한 삶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지난 시간에 사도가 설교가 어려우신 분들에게는 좀 어려우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핵심은 뭐냐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사람이 참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을까? 또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로 구원해주셨는데 왜 구원해주셨을까?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그렇게 우리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해가고, 또 망가진 이 세상도 고치면서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주님이 정해놓으신 질서를 따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은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요. 그 때에 비록 그 사람이 자기만을 위한 더러운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학문 예술, 심지어는 나라, 민족 등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그 사랑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인간은 사적인 사랑을 아무리 범위를 넓힌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선한 것이냐? 과연 그것이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 사랑을 하면 사랑받는 사물들 가운데 지정된 자리로 그것이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본 결과 이것은 너무나 가변적이기 때문에 수시로 그 기준이 변천한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결국 그것도 알고 보면 자기 사랑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와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축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옮겨져 가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그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그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방향을 다르게 잡는다고 할지라도 중심축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사랑을 벗어날 수가 없고 자기 사랑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의 질서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여러분 같은 신자들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도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은 중생을 했는데 이 두 사랑이 내 마음 속에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중심축이 되어서 그래서 움직이는 가운데에도 나를 향한 사랑이 남아있는 적이 있고, 또 혹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좀 남아있는데도 사랑의 중심축 자체가 이미 자기 중심으로 옮아가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신자도 그럴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신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무신 거꾸로 신은 신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불신자와의 차이가 뭐냐면 불신자에게는 추호의 ‘까리따스’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한 톨도 없습니다. 밤톨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그 신자가 아무리 나쁜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없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에 충분할 정도로 ‘까리따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가시죠? 다시한번 하겠습니다. 어떤 나쁜 신자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 지순한 사랑이 없을 수 없지만 언제나 있지만 모든 신자가 하나님 사랑을 중심축으로 그리면서 살아가기에 충분할 정도의 ‘까리따스를’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 사랑이 더 많아서 자기를 중심축으로 살아요. 그런 신자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묻겠죠. 그것을 저는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유산된 ‘까리따스’ 있기는 있는데 삶 자체를 움직일 수 없는 유산된 ‘까리따스’입니다. 그러면 반대도 됩니다. 신자가 반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자에게도 자기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있어서 늘 나를 괴롭히고, 가끔은 나를 넘어지게 하고 약하게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은 뒤바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까리따스’ 안에서 유산된 자기 사랑입니다. 이런 것은 있어도 우리들이 매일 극복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삶의 흔들림이 없이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뭐 아주 굉장히 많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그런데 넘어가겠습니다. 거기까지가 어제 장부책이고,
오늘은 이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내일 아쉽지만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해야 할 이야기는 뭐냐면 그러면 이제 불신자이든지, 신자이든지 죄를 지으면서 악한 삶을 살잖아요. 자기 사랑 때문에 그런데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 악한 삶이 가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이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거죠. 그러면 우리들이 불신자는 불신자이기 때문에 단일한 의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어떠한 의지도 그 사람 속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나쁜 상태에서도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극단적인 죄 가운데서도 남아 있습니다. 그 크기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크기는 ‘까리따스’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지만 하나님이 일렬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순서대로 이중에서도 꼴찌가 있습니다. 맨 꼴찌에 서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서로 판단할 필요도 없고 하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모두 줄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쁜 신자 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있고, 또 지순한 사랑을 가진 사람 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거역하고자 하는 이악함이 있어서 성령 충만한 신자도 때로는 악한 행동을 하고, 또 은혜가 많이 떨어진 신자도 악한 행동을 많이 하고, 그것은 악하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고, 심지어는 신자들 가운데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그 사람이 도저히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방탕하고, 그리고 끔찍한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 끝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뭐냐면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악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 악이 있습니다. 악이 왜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악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나쁜 것, 이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뭐라고 했습니까? 선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더니 하나님이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빛을 그리고 짐승들을, 나무들을, 물고기들을, 공중에 나는 새를. 하나, 하나, 창조하실 때에는 좋았더라. 그랬는데 마지막에 다 창조하신 다음에는 매우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셨다. 보라. 그랬더니 그것이 매우 좋았더라.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 하나가 완전할 때에 하나님이 좋으셨지만 완전한 것이 모두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매우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매우 좋은 상태 안에서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됨으로 아주 매우 좋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상태 안에서 인간이 그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이 아름다운 질서를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거기에서 인간이 열심히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로 꽉 찬 가운데 이 세상에서 노동을 한 것입니다.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도 길도 생겼을 것이고, 뭐 이렇게 집도 지었을 것이고, 이럴 것 아닙니까. 이렇게 발전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세계에 더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 아름다운 빛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다 지어졌지만 사람이 딱 창조됨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더 찬란해진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이 만물을 가꾸고 돌봄으로 이미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더 흘러넘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고, 그런 질서 안에서 인간과 모든 만물들은 안식과 쉼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그 창조의 목적은 결국은 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된 것이 타락을 통해서 다 파괴되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고친 피조물이 인감입니다. 처음에는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창조하셨는데 세상을 고치실 때는 인간을 제일 먼저 제창조하시고, 나머지들을 고쳐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그렇게 고쳐요. 그래서 고쳐진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회심과 함께 충만해지게 되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세상을 보니까 너무 많이 망가진 것입니다. 망가진 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 안에는 이미 진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 하나 알아갈수록 아, 하나님의 세계가 이래야 하는구나.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내가 하나님이 진짜 만드실 때는 이런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것이 아닌데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가운데서 ‘까리따스’의 사랑 대신 자기 사랑으로 충만해서 사니까 이 세상에 이 꼴이 되었구나. 그래서 그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이 세상에 살려두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데 이중적인 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안 변하는데 이 세상 고치려고 막 가봤더니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은혜 받고 아, 이제야 왜 불신 가정에 혼자서 시집을 왔는지. 혼자 예수 믿게 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다고, 어, 그러느냐고, 내가 죽기까지 감당해내야 되겠다고 그러면서 갑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잘 감당해요. 시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남편도 공경하고 그러다 은혜가 떨어져요. 그러면 그 성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쭉 솟아납니다. 그래서 대판거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년공부 다 물러간 것입니다. 한번 몇 년 동안 잘했는데 안 믿는 식구들에게는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다 반감이 있거든요. 어느 한 순간에 막 약 올리다가 확 쏟아져 나오면 그것 봐라. 너도 똥 떡이고 나도 똥 떡이다. 그러니까 이중의 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 깨어짐이 강조되는 것이 뭐냐면 그렇게 돌격 앞으로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끊임없이 자기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래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이기면서 그 망가진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그것이 결국은 자기가 망가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망가진 세상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망가진 것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망가진 세상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은혜 떨어지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런 의미에서 선이 있고, 그러면 이제 우리가 선이 있으면 “섬 함” 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 선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 쪽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것, 예를 들자면 내가 오늘도 혈기 충만해요. 아니 그럴 때 있잖아요. 다 때려 부셔. 이랬는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요. 막 하나님 앞에 회개해요.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도 사랑하셨는데 나는 왜 이렇게 혈기 충만할까. 충만 하라는 성령 충만은 안 되고 왜 혈기 충만해질까. 그리고 막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선함을 가진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선함을 가진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선함은 선으로 향하여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그렇게 혈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면 결국은 이 사람이 은혜가 회복될 것이고 은혜가 회복되면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할 것 아닙니까. 회개에는 어떤 특성이 있느냐면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것이죠. 또 누가 회개를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너무 죄를 지었고, 자기는 정말 혈기 충만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할 때 옆에서 자꾸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 너 혈기 충만한 것 이제 알았어. 어제 목사님 설교 들었지 개꼬리 삼년이면 황모가 안 된다 그랬는데 너 개 꼬리이거든. 뭐 그래 적당히 먹고 마시면서 살지. 뭐 네가 무슨 목사가 될 것이냐? 신부가 될 것이냐?” 그러면 이 사람의 행동은 이 사람이 선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을 자꾸 방해하죠. 그러면 악함을 가진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악함을 가진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저 사람이 잘 모르고 회심을 안 해서 그러는데 나도 옛날에 그랬거든 너보다 더 혈기 충만했는데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많이 깨뜨려지니까 그 때는 너무 괴로웠지만 그러나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평안을 주시더라. 그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진리를 깨닫게 되더라.” 그러면서 결려해요. 그러면 그가 그 쪽으로 가는 것을 돕고 있잖아요. 그것이 선함을 가진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함을 가진 행동을 도덕적으로 딱 판단해서 좋은가? 나쁜가? 판단했을 때 이것을 미 덕스럽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아, 미 덕스럽다. 그러면 아까 그것은 악 덕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지향하는 것은 악함, 악함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는 악 덕스러움, 그것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더러움, 추함입니다. 그래서 미는 선을 향해 가는 것은 선함, 그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미 덕스러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아름답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며칠 째 계속하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달렸다고요? 영혼에 달렸습니다. 다른데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얘기했죠. 하나님을 향해서 선을 향하여 가는 영혼이 아니면 죽여도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 영혼이 아름답지 않으면 그러면 그 사람 존재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지위가 어느 정도 높은 지위에 있느냐? 젊으냐? 늙느냐.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나이고 돈이 많으냐. 적으냐. 그것은 세상에서 보는 견해이고, 성경은 사람을 그렇게 평가합니다. 그것이 이제 선, 선함, 미덕, 아름다움, 이런 이야기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지 창조의 목적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창조의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통해서 주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안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안식과 행복과,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상태이고, 모든 선한 것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도움이 되면 선하다. 도움이 안 되면 악하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그러면 만약에 그렇다면 선이라고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면 그러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악은 무엇이냐? 그러면 창조의 목적은 아닌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 반대 되는 것이니까 .그러면 그것이 뭐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악함이 마지막으로 가고자 하는 목표는 뭐냐? 신자. 불신자. 양자. 다 어쨌든지 이런 선을 안 받아들이고, 그것과 반대되는 삶을 막 사는 것입니다. 뭐 술 취하고, 도둑질 하고, 거짓말 막 하고, 그리고 혈기 부리고 분노하고, 싸우고, 훼방하고, 편 가르고, 이렇게 하면서 뭐 육체의 정욕을 가지고 간음하고, 탐심하고, 이러면서 막 마음과 그리고 온 삶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죄를 지어요. 정도는 다르고 크기는 다르지만 이렇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악한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아직 삶으로 안 나타났을 경우에는 악한 마음이라고 이야기 하죠. 그러면 이것이 인간을 데리고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느냐? 그 답이 뭐나면 가고 싶어 하는 데가 없습니다. 목표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이 많은 논란이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악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를 들자면 인간이 이렇게 선을 향해 간다. 선이 여기다. 창조 목적을 향해서 가는데 그것이 여기다. 정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길을 쭉 가요. 그런데 나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싶지를 않아요. 그러면 가는 길이 여기에는 선이고, 악은 여기에 모이는 지점이 있느냐면 이런 것이 악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창조의 목적대로 안 가고 아무데나 가면 다 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지점이 하나입니다. 어디에 인간들이 존재하든지 모두 이 한 지점을 향해서 와야 합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멸망을 향해서 가는 길은 여기가 아니고 이쪽이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습니다. 그냥 미친 듯이 달려가면 여기를 빗나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냥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만약에 선이 창조의 목적, 혹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가는 모든 영혼과 인간 마음의 움직이라고 한다면 그런 악은 이렇게 정의가 내려져야 되지 않습니까. 창조의 목적이 아닌 곳을 향하여 가고자 하는 인간 마음과 영혼의 모든 움직임. 그래서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뭐냐면 창조 목적이 아닌데 거기가 어디냐?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려갔는데 악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선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보다 더 바빠요. 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물론 열심을 내지만 이렇게 천천히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게 죄에 사로잡혀서 악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냥 사정을 안 보고 질풍과 같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목적지가 없이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느냐? 합의가 안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악함을 가지고 제멋대로 죄를 짓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보고 “너 마지막에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그렇게 물어보세요. 어디로 가고 싶어서 그러냐. 신자에게 물어보면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마음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수 있게끔 살아라.” 집사님 그렇게 남편에게 핍박 받으면서 왜 그렇게 교회를 계속 나가요?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 분명히 있죠. 아니 경기도 안 좋은데 뭐 그렇게 교회에다 돈을 열심히 갖다 내면서 그렇게 애써서 봉사를 해?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이, 목사님 아니 목회도 굉장히 고달프신데 뭐 그냥 3.4년 하시다가 그만 두시지 뭐 그렇게 오래 하느냐고, 교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힘들게 그리세요.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죠. 모두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가는 곳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열심을 내는데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그러면 악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면 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주 간단히 이야기 하면 악은 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이렇게 생각하겠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선한 마음이 됩니다. 선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마음이 작용과 영혼의 움직임, 그 사람이 좋아하는 풍취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이것이 풍취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충만해지면 막 맛있는 것 먹고, 관심 없습니다. 은혜가 충만해지면 뭐 새로 나온 화장품 사서 찍어 바르고, 그다음에 뭐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얼굴에 포장지만 바꾼다고 해서 무슨 개똥참외가 매 론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들이 다 의미가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은혜로 충만해지게 되면 자기 사랑이 현저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니까. 마음이 선한 마음이 됩니다.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꽉 찬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저 사람 내가 미워해도 세상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안 그럴 것인데 그런데 미운 마음이 안 들어요. 왜? 주님의 ‘까리따스’의 사랑이 꽉 차니까 나를 밉다고 그런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무고히 해하려고 하는데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배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아주 선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때는 바로 그 신자가 그렇게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악한 것이 들어와서 악하게 되었다. 라기 보다는 어떻게 된 것이냐면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사라지니까 그 사라진 것만큼 악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제가 그런 말씀 드렸죠. 여기가 너무 밝다. 여기를 어둡게 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만들어 내는 기계를 사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기계는 없습니다. 뭐 영원히 만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기를 이용해서 어두움을 만든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두움을 만들기 위해서 또 다른 기계를 만들 필요는 없고 불을 끄면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악은 선이 사라진 자리는 악이고 마음에 선함이 상실되면 그만큼 악함으로 가득 차게 되는데 이악함이 가득 찬 자리만큼 ‘까리따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너무 쉽게 이해되시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2장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면 “네 속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지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의 핵심이 뭐냐면 지식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지식, 그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개가 합쳐져서 이것이 경외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다음에 악함이 꽉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도 정확하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도대체 악이라는 것은 없다. 목표인 선과 대조가 되는 그 악이라고 하는 실제는 없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얘기냐면 죄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곧 자기 사랑이거든요. 그런 죄에 대한 사랑, 즉 부당한 자기 사랑이라는 것은 성격적으로 없는 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에 대한 열애입니다. 사실 있지 않은데 그것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너무나 비참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비참한지를 이 시간에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없는 것에 대한 열애, 아주 뜨겁고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인간에게는 엄청난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성을 주신 것입니다. ‘원 애’ 원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 ‘까리따스’의 하얀 사랑을 충만하게 받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애 적 능력을 발휘해서 그래서 그것으로 수많은 떡처럼 사랑을 뽑아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만물을 살아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빛나게 할 수 있는 무형의 가치, 예술이나 학문 등등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을 섬겨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있는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창조의 목적도 있고, 그 선도 있고, 그 선을 우리에게 제시하시 하나님도 살아계셔요. 그것이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것이 지순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악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없는 것에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렬한 사랑을 갖게 될 때 인간이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이것이 결국은 자기 사랑이거든요. 자기 사랑인데 이 없는 것을 향해 가는데 결국 인간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래서 이 지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설명을 들으면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 김치 안 먹죠. 저도 음식점 가면 이것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 어떤 때는 너무 먹고 싶은데 젓가락이 가다가 돌아오는데 뭐냐면 다른 것은 괜찮은데 기생충 알 생각이 계속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다가 손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식당마다 김치를 정직하게 담아서 한 500원씩 팔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도 몰랐으면 괜찮은데 우연히 그 텔레비전에서 중국김치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주더군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무가 별로 없고 고춧가루 색깔이 약간 검은빛이 난데나. 그런데 가는 식당마다 무가 없어요. 아니 무가 몇 개만 있어도 내가 먹을 것인데 억지로라도 믿고 싶거든요. 왜? 김치가 먹고 싶으니까 이것은 괜찮을 거야. 그래서 주인보고 “아줌마 이것 중국 김치요. 한국 김치요. 직접 담았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것이 다행히 그 식당에서 한국에서 담은 것이면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고마워하겠어요. 큰 소리로 다 들으라고 얘기할거에요. “아, 그 중국김치를 어떻게 먹어요. 우리가 담았죠. 저기 보시오. 무 절여놓은 것.” 이렇게 얘기할 건데 만약에 이것이 중국 김치면 그 아주머니를 거짓말로 유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를 죄 짓게 하잖아요. 그래서 그래도 무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먹으려고 몇 번을 뒤져봤는데 무가 없어요. 이상하게 기생충 알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딱 생각이 나는 거예요.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그 김치에 회충 요충, 편충 막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그것을 어떻게 먹어요. 지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일단 잘 가르쳐주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요. 절대로 그런데 옛날의 희랍 철학자들은 똑바로만 잘 가르쳐주면 모든 것이 잘 해결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당부분은 해결됩니다. 아마 오래도록 못 먹을 것 같아요. 정말 보통 신뢰를 주기 전에는 못 먹을 것 같아요. 더 못 먹게 만든 정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배추 한 통에 3000원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이제 더 못 먹겠구나. 왜냐면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서 식당에서 담았을 리가 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00원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그래서 생각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몰라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악하게 사느냐. 그러면 너 그렇게 멋대로 하면 마지막에 너 가조가 하는 곳이 어디냐? 이렇게 계속해서 집요하게 물어보면 물론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싫어해요. 왜 싫어한지 제가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하면 싸웁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르쳐주면 그러면 이러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 해요. 그리고 그냥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자기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자기 혼자 자기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살다가 저 혼자 지옥 가면 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는 해로울 것 없잖아요. 저 무인도 가서 혼자 살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자기만 사랑해요. 물고기 잡아서 자기만 먹고, 빗물 받아서 저만 마시고, 나뭇잎 따라가 저만 드러눕고 하라고 해요.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자기만 하면 되잖아요. 거기에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불평하고 하라고 해요. 자기 혼자 그렇게 무인도에서 아무도 못 발견하고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뭐냐면 같이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나는 나를 끔찍하게 사랑해요. 그래서 사물들의 질서를 다 매겨놨어요. 그래서 너는 꼴찌. 엄마는 그 바로 위에. 아빠는 그 위에 형제들은 저 밑에 돈은 최고위에 이렇게 놨거든요. 그런데 이 사회에 돈이 딱 한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만 이것을 일동으로 놨나. 그랬더니 저 사람도, 일등, 이 사람도 일등, 다 일등으로 놓은 것입니다. 갖겠다는 사람은 1억 원을 갖고 싶은데 실제 돈은 100만원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요. 피 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축이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 통합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 중심축이 수도 없습니다. 60억의 인구가 있으면 60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각기 휘돌아요. 그러니까 부딪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이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충돌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닙니까. 무슨 얘기냐면 나는 저 사람을 내가 저 사람 보다 훨씬 높이 있다고 질서를 잡고, 너는 저 아래이기 때문에 기어오를 수 없다. 그리고 저 밑에 놨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자꾸 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도 그 사람 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계속 올라오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나는 이런 질서가 싫다는 것입니다. 네가 옛날에 우리 집에서 빌어먹다 시피 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보다 더 사업을 크게 해서 내 사업에 위협을 가하고 좌지우지 할 정도가 될 수 있느냐 나는 싫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밑에다 누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밑에 두고 싶어 하는데 그런 질서를 동의해 주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힘을 키워야 되요. 그래서 돈으로 힘을 키우든지, 아니면 지위로 힘을 키우든지, 그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주먹이라도 힘을 키워서 가서 5분밖에는 질서를 못 잡지만 한번 가서 아귀 통을 날려서 턱 뼈 몇 개 날려서 무릎을 꿇고 형님 하게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3분 후에는 유치장에 가더라도 일단 3분 동안 만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질서가 잡힌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미친 짓이죠. 그러면서 어떻게 하느냐면 무던하게 자기 사랑을 하는데 욕망이 충돌을 일으켜요. 그러면서 서로에게 자기 질서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기느냐면 힘 있는 놈이 이기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그 아래서 꼼짝도 못하는 것입니다. 다 짓눌려서 그래서 그 아래서 그 질서를 복종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될 때 그가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요. 그런데 이제 인간들이 그렇게 자원을 많이 가지고 질서를 많이 강요해요. 그래서 자기가 정한 그 질서대로 자기만 행동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고 이 질서가 넓혀질 수록 이 인간이 느끼는 만족감은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예배하는 곳에도 하나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계시죠. 그런데 교회에 와서 한 사람이 예배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예배할 때 의심할 여지없이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한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천 명은 노가리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러면 차라리 한 명이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으시지 똑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고 할 때에 한 명이 예배를 드리는 것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을 인정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때는 언제냐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질서가 완벽하게 통영 되는 때 그러면 교회는 사람마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각각 달라서 밤하늘의 별의 비유 말씀드렸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십자가 걸고 간판 건다고 해서 그 교회가 모두 다 똑같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교인이 몇 만 명이 나온다더라. 재벌과 재벌 이세가 우리 교회에 출석한다더라. 우리 교회는 달란트가 많이 나온다. 뭐 우리 교회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고 십일조가 많이 들어온다. 죄근에 우리 교회는 몇 층 빌딩을 지었다. 이런 것에 교회의 아름다움이 달리지 않은 것은 인간의 지위나 소유에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달린 것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아름다움은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면 교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달린 것입니까. 그 지체들의 영혼에 달린 것입니다. 일만 명이 모이고, 예배당이 엄청나게 크게 짓고, 신문에 매일 나서 교회 이름이 전국적인 교회가 되고 세계적인 교회가 되어도 영혼들이 전일성이 없이 부패한 영혼들을 가진 병든 신자들이 꽉 차 있으면 그것은 크기는 하지만 하늘에 떠 있어도 빛을 내지 않는 별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매우 적은 영광 밖에는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나는 정말입니다. 저의 진심을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나 알지 모르는데 나는 교회가 커지는 것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인위적으로 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말씀을 정말 사모하는 사람들만 이 교회의 시설이 감당하고 목회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남았으면 좋겠어요. 꿈같은 이야기죠. 안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합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거의 없으면서도 그 죽어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슨 동기가 그들을 못 떠나게 하는지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쩌면 매 주일 이 꽃과 함께 저를 보는 즐거움으로 여기에 나올지도 몰라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그래요. 여러분들은 오해하지 마세요. 김 목사는 큰 교회를 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 앞에다 우리 교회는 말씀에 사무친 마음을 가진 사람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시험에 보시고, 합격되신 분들만 등록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속질하게 한 달도 안 됩니다. 한 1년쯤 그렇게 실험해서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교회가 그러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핍박 받으실 이유가 없었죠. 거기에 안 가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안 들을 놈들인데 거기에 왜 가세요. 목말라 하는 사람만 살짝, 살짝 찾아가시면 어디가든지 환영받다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진리의 말씀을 늘 깨닫고 이렇게 사경회 하는 재미로 살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이런 식으로 자기 사랑의 질서를 강요하면서 살면 이 영혼의 아름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아주 추루하고 더러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자신은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죠.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향해서 치달아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을 성경이 아주 명료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그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나간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돈은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돈이 지나갔어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겨줘요. 내가 늘 이야기 했잖아요. 부자였던 사람, 왕년에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 그런 사람들만 계속 등록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도와줘야 되는 사람, 지나간 것은 곧 뭐냐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도 정욕도 굉장해 보입니다. 왜 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보여요. 그런데 다 지나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악한 삶의 끝입니다. 욕망을 따라 자기 사랑에 굴복하며 산 사람의 끝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가고자 하는 자체가 없어요. 갔으니까 그것역시 다 지나가버리고 아무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경험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 하다가 시험에 들었던 적 있죠. 그래서 결국은 세상 사랑에 빠져서 교회도 안 나오고 교회에 나와도 말씀 하나도 안 들어오고 제 멋대로 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양심에 현저하게 죄를 지은 적도 있죠. 그런데 그것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 한번 돌아보세요. 그 때는 굉장했습니다. 그 즐거움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것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안 지났는데 지금 무엇을 남겨주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어야 할 그 고유한 아름다움은 다 상실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이성 없이 태어나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삶의 모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불신자가 이렇게 사는 것은 거의 숙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신자가 이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이렇게 살면 그 비참함은 원래 불신자가 그렇게 사는 것보다도 배나 더 비참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한 30년 전의 일인데 40억을 빚은 진 사람이 빚에 쪼들려서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이 사람의 재산을 정리해보니까 60억 이더래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웃잖아요. 우스울 것 아닙니까. 그것은 왜 그래요. 아니 다 정리해서 다 갚아버리고 20억 가지고 살면 되지. 그러니까 여러분과 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난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람은 뭐냐면 60억의 재산을 가지고 산 사람이 20억 밖에 안 되는 재산을 가지고 산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그 자존감과 이런 것들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안타깝기는 하지만 현대의 정몽원 회장이 투신자살해서 죽었잖아요. 굉장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다 정리해도 집 살 돈이 없겠어요. 쌀 살 돈이 없겠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우리는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니 먹고 살면 되지. 그 이상 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자 자신은 원래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한번 발했던 사람이고, 그 아름다운 상태에서의 주님과 나눈 교제의 기쁨,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찼을 때 그 사랑과 은혜의 행복, 이런 것들을 알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려요. 그리고 나면 신자는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더 비참해지고, 자기도 더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원래 이름도 없고, 다리 밑에서 태어난 애가 동냥을 하는 것과, 굉장히 부잣집 아이가 엄마 아빠가 모두 망해서 동냥을 하는 것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많은 동정을 불러일으키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뭐냐면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불신자도 마찬가지지만 조금만 이치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아, 그것은 없는 것이구나. 이것이 악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끝까지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곳이 없는 것이구나. 그것을 알게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은 결국 목표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불쑥불쑥 일어나는 자기 사랑의 충동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동 자체가 비이성적 충동입니다. 그 충동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 하냐? 끝까지 훌륭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불쑥불쑥 일어나는 욕망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도록 그에게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서 사는데 가고자 하는 목적은 없지만 불끈불끈 일어나는 자기 사랑의 충동에 복종할 때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죄의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것이 뭐냐면 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죄가 두 가지를 가지고 역사하는데 속임과, 광기의 역사입니다. 속임이라는 것이 뭐냐면 그 사실인데 사실을 감추거나, 사실이 아닌데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굉장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이 사람에게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서 그래서 좋은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눈을 계속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자체 안에는 이렇게 속이는 역사가 있습니다. 속임과 강압을 가지고 역사하는데 속이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에서 이탈하여서 썩은 자기 사랑이 점점 그 사랑을 파먹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에 신자의 영혼에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했을 때에는 총명하게 판단하던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서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인데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중요한 것인데 하찮게 생각하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데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치와 질서가 전부다 뒤엉킨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죄가 들어와서 결국은 그 죄의 정체 자체가 자기 사랑이잖아요. 자기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그러면 영혼의 어두움이 들어와서 자꾸 올바른 것을 판단하지 못하고,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그러면 치료책이 뭐겠습니까? 어두움이 물러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빛이 들어오면 되잖아요. 이것을 내적 광명이라고 합니다. 그런 내적 광명이 들어오면 되는데 문제는 뭐냐면 이 내적 광명을 싫어해요.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 하시냐면 “정되는 이것이니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어두움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을 믿지 아니하였다. 빛을 거절하였다.”
한번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열린 교회가 맨 처음에 개척할 때 어디로 갈까를 막 고민하는데 저기 오산동 병원 옆에 지하실이 하나 나왔데요. 그래서 갔는데 값도 싸고 교통도 뭐 그렇게 나쁘지 않고, 그런데 지하실이 컴컴하고 그래서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뭐 거기다 하면 괜찮겠다.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하실에를 내려갔는데 지하실에서 마주 보이는데 앞에 가게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여기 얻으시려고요.” “아, 그렇다고 우리 지금 여기 얻으려고 그런다.” 그랬더니 “아, 너무 잘되었네요. 오세요. 여기 굉장히 좋아요. 넓고요. 사람도 많이 다니고요.” 그래서 뭐하는 곳인가 봤더니 퇴폐 이발소에요. 우리가 다방이라도 하려고 오는 줄 알았나 봐요. 그러더니 “뭐 하시려고요.” 그래서 “우리 교회 하려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안색이 싹 변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느냐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되고 안 되고는 건물 주인이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이 뭔데 되고 안 되고 하느냐고, 그러니까 아니 그런 이야기까지 자기가 할 필요는 없는데 주인에게 못 주게 우리가 연락할 거예요. 그래요. 그래서 마음이 비비 꼬이더라고요. 그래서 뭐 그거야 주인이 결정하지 당신이 왜. 그랬더니 뭐라고 하느냐면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으면서 투덜거리는데 뭐라고 하느냐면 “교회 빌려준다. 그러면 우리가 나가지 뭐” 그런데 왜 그렇게 친절하던 사람들이 그게 어두움입니다. 여기에 술집 들어온다. 그랬으면 아마 너무 좋아했을 것입니다. 술 한잔 먹고 퇴폐 이발관 들어가는 이것이 같은 끼리끼리잖아요. 이게 순결하게 살아라. 고 외칠 교회가 여기에 들어오고 퇴폐 이발소 오는 사람들이 교회 십자가 보면서 얼마나 그것이 세상 말로 쪽팔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오겠습니까. 안 오지 그래서 결국 우리도 안 가고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셨는데 그런 것입니다. 싫어해요. 그래서 이게 결국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자기 은혜가 떨어지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지고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영혼의 어두움이 들어와서 계속 속거든요. 속으니까 어떻게 되요. 원인은 빛이 없어서 어두컴컴한 거리에 안대 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빛이 컴컴한 거리는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자기의 무지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안대는 자기가 죄가 좋아서 어두움이 온 것입니다. 객관 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이 겹쳤습니다. 그러니까 날이 환하고 안대를 해도 안 보일 건데 날도 침침한데 거기에다 안대까지 했어요. 그리고 눈 가리 게를 하고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능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꾸삐디다스의 육욕적인 사랑이 들어갔고, 그 애적 능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달리기는 미친 듯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시로 부닥치면서 터지고 깨지고 그러면서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빛이 싫다는 것입니다. 광명이라는 것이 뭐냐? 이것이 뭐냐면 우리 안에 있는 사물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이치를 생각하는 이성이 내적인 광명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이 혼자서 저절로 광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진리에 굴복할 때 비로소 광명을 가진 이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막 죄를 행하고 그러는 사람들을 유다서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서 멸망하기로 작정된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정말 이성이 없습니까.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이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도 이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성은 있는데 그 이성이 진리에 굴복한 이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성이 있기는 있는데 빛이 없어요. 그러니까 기껏 이성이 한다는 것이 뭐냐면 이렇게 저렇게 죄를 지으면 이런 기쁨이 오겠구나. 이런 식의 추론, 혹은 저 사람에게 30만원을 더 빼앗으면 오늘 내가 50만원 빼앗는 것이구나. 이 술집에 내가 오늘 가면 5번째지. 이것도 이성의 기능입니다. 이런 정도로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기능인데 인간의 이성이 우리 속을 환하게 비춰주는 이 빛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영혼이 진리에 승복해야합니다. 영혼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그 진리를 사랑할 때 그 진리의 영향을 받는 이성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진리는 이성을 원초적인 광명이라고 부릅니다. 더군다나 신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이 성령님이 진리와 떨어질 수 없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진리를 깊이 붙들면 성령님은 그 이성에 빛을 비추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성을 통해서 빛을 환하게 비춰요. 이것을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계명을 통해서 인간은 그런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렇게 달려가면 저 마지막에 너무나 비참하게 된다. 그것을 보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아무리 얘기해도 이 사람은 빛이 싫어요. 그런 얘기를 안 들으려고 해요. 그리고 그 어둠 속을 달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은 굳어져요. 그러면서 지를 향해서 치닫는 것이죠. 너무 불쌍하죠. 그러니까 그런 빛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보고 너무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고, 그리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가지고 저 사람이 못 보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늘 제가 이야기하기를 빛 된 현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그 빛을 받고 비로소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혼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하는 사람이 어둠속에 있다. 그러면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르치려고 한다. 그것은 심판 받을 일이 많은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을 따라다닌다. 그것은 양떼들의 불행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죄의 속이는 역사와 그다음에 이성도 빛을 잃고, 진리를 붙잡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어두움이 내릴 대 그 속임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가 광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광기가 어떤 광기냐면 무모한 광기입니다. 무모하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무모하다는 뜻은 나의 어떤 행동에 뒤따를 위험한 결과가 있는데도 그것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이 될 대로 되라고 자기를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모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야기는 불신자에게서는 일반적으로 마음에 꽉 차도록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신자에게는 이런 일들이 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 속임과 그다음에 광기가 발동해서 역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일이 있느냐면 광기라고 하는 자체가 뭐냐면 이성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기를 가지고 역사하니까 행동과 행동이 서로 모순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신자의 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자기생각에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해서 몸부림치면서 애를 써요. 그런데 그 행위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버리고, 그다음에 진리의 영향 받는 것도 싫어하고, 그리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쏟아내면서 악하고 더럽게 토해내면서 이렇게 살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힘으로 굴복하고 힘으로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굴복하면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강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계속해서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아주 악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계속해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황폐한 사람으로 망가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 그 사람이 완벽하게 파괴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없는 것을 열애하는 신자 안에 있는 죄의 맹렬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그렇게 살아요. 말도 안 듣고 진리의 영향을 받으려고도 안 해요. 그리고 자기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불끈불끈 일어나는 충동에 복종하면서 그러면서 미친 듯이 목표도 없는 그 악을 향해서 치달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현저해 거시리는 삶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 두시냐면 절대로 가만히 놔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식으로 행해지냐면 간접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간접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그를 때리지 않으셔도 하나님이 두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이미 존재하는 원리 때문에 그 사람이 망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서 그래서 하나님께 잘 순종해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리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자기가 가진 재능과 학문도 발견했어요.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활동해요.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사회의 법칙상으로 잘 살 수 있는 사람의 자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죠.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매일 술이나 퍼 먹고 그리고 토요일이면 낚시나 가고 그래서 주일 날 밤에나 돌아오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다 끊어지고, 그렇게 하면서 살고, 돈 몇 푼 버는 것 가지고 매일 교제한답시고, 뇌물 갖다 바치고 그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고, 그렇게 나쁜 짓 하고 그렇게 방탕하게 살았어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개입 안 하시고 그냥 놔두면 망해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뭡니까. 가정이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 토요일 날 보따리 싸서 주일날 밤에나 오는데 그것도 한 두 달이지 몇 년 씨 그렇게 하는데 애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신뢰하겠습니까. 그리고 매일 술 먹고 밤에 늦게 들어오고 집에 들어와서 폭력이나 휘두르고 그러면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 다 그를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임하지 않으셔도 저절로 심판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하고 강요하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떠나서 막 살면, 미친 듯이 달려가면 누가 좋아하는지 한번 묻고 싶어요. 우선 하나님은 확실히 싫어하시겠죠. 그다음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의 존재가 거치는 존재가 되겠죠. 그 사람들도 끊어져요.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세상에서 여러분처럼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은 좋아하느냐. 아닙니다. 왜냐면 그 사람은 나름대로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게 만나기만 하면 몇 푼 안 되는 돈, 권력으로 억압해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강요하려고 하면 그 사람도 싫어하는 거죠. 그러면 외톨이가 되는 것이죠. 기회가 닿아서 이 사람이 돈이라도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고, 권력이라도 있으면 괴로워서라도 그 질서에 복종해주는데 이것이 다 떨어져요. 그러면 그냥 밟아버리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심판하시죠. 반대도 생각할 수 있죠. 그랬는데 깊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요. 술 끊고, 담배를 끊어요. 그러면서 살다보니까 이 씀씀이가 절약 되요. 그 돈을 가지고 가정에 갖다 줘요. 식구들이 행복해요. 아이들이 술도 안 먹으니까 집에 일찍 들어가요. 가족들의 관계가 좋아져요. 이러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요. 이렇게 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도 한동안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를 한 갑반 씩 피우니까 주머니에 돈 남을 날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담배를 사요. 굉장히 빨리 담배가 떨어집니다. 하루에 어떤 때는 한 갑. 어떤 때는 두 갑씩 사고 그러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변화된 것이 뭐냐면 주머니에 항상 돈이 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몇 천원. 담배를 안사니까. 계속 있습니다. 기껏해야. 껌 사는데 껌이야 담배보다는 싸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랬더니 이 돈을 가지고 헌금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돈들이 절약 되어서 술 먹으러 안 가니까 더군다나 그 때는 큰돈이 절약되잖아요.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술 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그랬으니까 돈을 꽤 모았을 건데 어디로 갔나. 그랬더니 교회로 갔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때요. 교회로 들어가서 창조 목적에 기여하잖아요. 이것이 물 흘러가듯이 도는 것입니다.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심판하십니다. 직접적인 심판은 두 가지로 행해지는데 첫 째는 현세에서의 심판이고, 두 번째는 내세에서의 심판입니다. 현세에서의 심판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곤고하게 하셔요. 그래서 현저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은 하나님이 돈 푼 꽤나 가지고 있게끔 놔두실 수 있습니다. 어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에서 하나님이 아직은 그를 돈 좀 가지고 있게 놔두실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지위도 유지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게 되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그 영혼을 때리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냐면 영혼을 곤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에 뭐라고 했느냐면 “저희의 구하는 것은 저희에게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잖아요. 아, 고기도 못 먹고, 땅을 치면서 꺼이꺼이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마음이 아프셔서 먹어라. 그래서 고기를 막 먹고 고기가 잇 사이에 있는데 야, 진짜 여기 와서 오랜만에 고기 먹어본다. 그런데 그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기는 주셨지만 그 영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 때 있잖아요. 하도 아이들이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조르면 끝까지 안 되면 너 마음대로 해, 가지고 가든지 맘대로 해, 학원가든지 말든지 너 마음대로 해. 그러잖아요. 그러면 이 아이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물론 자유를 얻었죠.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마음대로 하겠죠. 그렇지만 엄마는 이 아이를 더 싫어하게 되죠.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영혼의 그런 어두움이 확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정하셔요. 하나님이 굉장히 공정하세요. 여러분들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뭐 위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해주시고, 용납해주셔요. 무한히 용서해주신다니까요. 죄인인데 도요. 물론이죠. 많이 지었는데 도요. 물론이죠.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는데요. 막 이렇게 주님을 거시리는데요. 용납하시죠. 죄인중의 괴수와 같이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고 사는데 도요. 용납하십니다. 한번이 아니고 십 수 년 동안 그렇게 사는데 도요. 용납하시죠. 그런데 지금도 계속 하고 있으면 용납 안 하십니다. 죄인들은 용납하시지만 그 사람들은 예전에 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주님이 용납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서 없는 것을 열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훼방하고 그랬어도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용납 안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버리면. 버리고 회개하면 물론 하나님이 용납해주시죠.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혼의 곤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있지도 않은 악을 향해서 미친 듯이 충동에 의해서 달려가게 될 때에 자기의 영혼이 계속 파괴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이 점점 추악한 더러움으로 일그러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을 향해서 계속 치닫는 것입니다. 어떤 악의 즐거움을 잠시 느낄 수는 있지만 영원히 느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지나갑니다. 결국은 죄를 신자가 끝까지 버리지 않아도 당연히 세월이 흘러가면 죄가 그를 버려요. 죄도 때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그런 것 있잖아요. 사람들 위에 높아지려고 하는 지위와 명예에 대한 탐심을 가지고 있잖아요. 은퇴할 나이가 되면 그 죄도 그 사람을 버려요. 아무도 그 사람을 찾는 데가 없습니다. 또 성적으로 방탕해서 막 바람을 피우고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면 젊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늙으면 그런 능력도 없어요. 그것은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청교도적 설교 가에 의하면 그가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지을 능력이 없어서, 욕구는 있는데 죄가 상대해주지를 않고 버리는 것이죠. 그런 상황으로 가게 되는 것이죠. 그것입니다 그것이 이 현세에서 받는 심판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심판아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목적을 거시려서 살았어요. 명백한 자기 사랑인데도 이런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정면 적으로 배치된 삶을 살았어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중심으로밖에 살아가지 않는 사람인데도 이따금 가슴 속에 아침 구름처럼 남아있는 유산된 까리따스에 자기는 그래도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고, 원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환경에 의해서 매우 연약해서 지금 이럴 뿐이라고 사실 진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그러한 변론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습니까? 인정해주셨으면 여러분들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워도 영혼에는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환경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의 육체만 멸할 뿐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은 너희의 육체만 어떻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핍박해서 신자의 목을 잘라도 그들은 영혼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환경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더러워졌거나.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아주 불결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없는 것을 열애하면서 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현제 적으로 그의 영혼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거야 저는 열애죠. 왜냐면 저는 신자니까요. 그런데 진짜 신자인지 아닌지는 가봐야 압니다. 왜냐면 신자같이 매우 유사해 보인 사람도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아마 이런 종류의 메시지가 주어질 때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저런 경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소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미끄러지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마지막 날에 주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신령한 소심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 더 불행하게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많은 진리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 들을 들었지만 본질적으로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까리따스도 그 속에 없었던 사람,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떠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사랑에 취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빌미삼아서 자기의 사랑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 사람들이 마지막에 받을 심판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살아가는 이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공정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고 막 살아가는 사람도 형통하고 마지막에 평안하게 죽는가 하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마지막에 순교의 칼을 맞고 죽어 가기도합니다. 일평생 예수를 위해서 살았는데도 그렇게 고생만 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고난을 받다가 죽어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의 이성은 도덕적인 모순을 이 세상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도덕적인 모순을 그것만 보면서 모순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왜? 최후의 결산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최후의 결산은 마지막에 주님이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이 세상을 모두 심판 하실 때 그 때 최종적인 결단서가 나오는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면서 일관된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 신앙의 모습은 있었으나. 그러나 진실로 회심하여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일생 전체를 하나님 사랑을 빌미 삼아서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범죄하며 창조된 세계를 파괴하며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며 살았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큰 심판을 내리셔요. 그들을 심판하실 때 더욱더 두려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가슴 아파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던 여러분들의 가족도 여러분들의 영혼을 심판해서 지옥에 던질 때 주님께 모두 가편 투표를 할 것이며 여러분들을 늘 눈물을 흘리던 목회자와 수많은 경건한 성도들도 이제 여러분들의 파멸되는 영혼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찬송을 부를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은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찬양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통합된 모든 세계. 이 땅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성도들과 예수 안에 죽은 성도들과 그리고 하늘 위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천사들, 이 모든 무리들이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 살던 사람들을 심판하는 그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고, 그 성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심판이 행해질 때 성도들이 모두 천사와 함께 기뻐하게 되는데 이때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고소해서 기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정직한 공의와 의로움,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이 온 땅에 가득 드러나고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것들을 주목하며 하나님은 거룩하고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여호와이시며 그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과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주인이시로다. 경배 받으소서. 삼위의 하나님이시여. 라고 하는 그 온 땅에 충만하고 가득한 그 삼위의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울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숙고하세요.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토록 있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는가가 영원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쓰레기 같은 신자들은 확실하지도 않은 구원 하나. 나는 아마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구원 받았을 거야. 그 바보 같은 확신을 하나를 믿고 계속해서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 살면서도 진실하게 참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때가 오면 하나님이 나를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돌이키지 못하고 간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 날에는 오늘에 울려 퍼진 이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변명해야합니다 왜 내가 내 종을 통해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마지막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린 삶의 마지막 결국이 무엇인지를 너희에게 알려주었는데 왜 돌이키지 않았느냐고 물을 때에 여러분들은 말씀을 들은 것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변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질 수가 있을까요?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사세요. 누구를 위해서 악하게 삽니까. 마지막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사라져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은 부요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마음속에 사라진 사람이 그 인생의 결국을 어디로 데려갈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고 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가는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으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깊이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을 버리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을 정말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그 자기 사랑과 결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모든 질서를 뒤엎는 그것이 뭐냐면 교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보다 더 낫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사랑의 질서를 세우고 나는 살겠다. 이 자기 중심적인 교만이 결국은 범죄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서를 계속 뒤집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자기가 깨뜨려져서 자기가 참회하게 되면 이 질서가 회복됩니다. 이 두 질서라는 것이 뭐냐면 존재의 질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가치의 질서, 누가 먼저 인가 하는 존재의 질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가 하는 가치의 질서가 다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시 회개한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들이 생각해보는 것이 뭐냐면 그러면 진리를 버린 영혼들은 어떤 것인가? 허위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오늘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신자들이 행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자기의 욕망이 덜 채워졌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삐졌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잘 믿어본 적도 없지만 잘 믿으면 자기를 좀 밀어주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을 안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끔 이래야지 복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번 일어나도 한번 나도 해 봐야지. 그러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동반한 사랑이 있는 진정한 경외가 아니라. 아첨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아첨하는 것입니다. 뇌물로서 교회도 다니고 십일조도 하고, 뇌물로서 교회 봉사하는데 얼굴도 내밀고 이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보실 때 착각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나온 예물이 사람 앞에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사람은 그 사람을 높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예물을 보고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면서 그 예물의 수준을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황소를 가지고 내게 나왔어도 너는 더러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야. 그 영혼으로 이 예물을 만졌는데 이미 여기에 더러움이 베었어. 나는 싫다. 나는 차라리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바친 한 마리의 산비둘기를 받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면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그다음에 어떤 지위에 오르고, 심지어 하나님을 사용해서 자기가 정한 사랑의 질서에 만족을 주고 이렇게 함으로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안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신자들은 결국 행복해지는 비결이 뭐냐면 베룸 진실한 존재가 됨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진실한 존재가 됨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데 그 진실한 존재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차서 순결하게 되어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신자들 중에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열린 교회에서 인생의 비전이 뭡니까? 그러면 중고등부 애들도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남들이 다 하니까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신자인데 여러분들 중에 누가 나는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내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주님의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거듭난 신자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저 속에 은혜가 떨어지면 아무 묻혀있기는 하지만 저 마음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면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에서 지정된 자리로 가고. 그 속에서 안식을 얻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존재가 되고 싶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희망과 열망은 다릅니다. 그것은 희망일 뿐이고, 뜨겁게 사랑하며 달려가기는 없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결국은 신자의 허위입니다. 거짓 삶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자의 영혼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자기모순을 영혼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내면의 세계 한 쪽에서는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고 그 진실을 찾아가기를 원해요. 그런데 영혼이 그렇게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진리를 붙들어야 되거든요. 진리에 영혼이 굴복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굴복하지 않아요. 그리고 거기를 거시려요. 그러니까 이 속에서 두 개의 모순이 생겨나죠. 이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는 그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그 진실한 신자가 될 때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첫 사랑을 통해서 또 맛을 보았어요. 거듭난 사람일 경우.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영혼이 진리에 굴복을 안 해요.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굴복한 진리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을 동떨어진 영혼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겠습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영혼의 아름다움은 자기가 굴복한 진리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영혼이 굴복하고 있는 진리의 아름다움이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그 영혼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 존재가 하나님 앞에 빛나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찾아가고 싶다. 그다음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서는 그가 아름다운 영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진리를 향해 굴복하고 복종하고, 진리를 깊이 사랑하는 영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아요. 결국은 진리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랍어에서 소유하다. 라는 단어가 에코 라는 단어인데 자기의 몸에 일부처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이 진리를 가지고 이 진리 때문에 사랑의 질서가 세워진 것입니다. 살아가요. 내 사랑은 버렸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것을 안 좋아해요. 이 사람, 저사람, 부딪히고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요. 이것을 버리는 것은 이것은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순간이 올 때에 이 진리가 나의 모든 생명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진리가 가르쳐주는 사랑의 질서대로 계속 살아가요. 그런데 세상이 그것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막 부딪혀요. 그래서 핍박이 오고, 고난이 와요. 그 때에 자신의 생명보다도 이 진리를 붙들며 살아가는 이 삶의 가치를 더 뛰어나게 생각하면서 사는 그것을 가리켜서 진짜 진리에 굴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붙들고 살아가요. 그러면 환난을 많이 당하죠. 이런 것이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누가 원수가 있고 적이 있겠습니까. 또 원수와 적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있는 것이지 뭐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이 진리의 힘에 의해서 충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의 삶과 존재 전체가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리 향해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라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돈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영혼을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면 목사님 말씀처럼 그렇게 고난이 많다고 하는데 당신이나 걸어가서 걸어가는 길이 이런 길이라고 보여주면 되지 우리가 목사도 아닌데 어떻게 다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렇게 진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리를 꽉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고난도 많고 시련도 많이 있는데 이것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에게만 허락해주신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과 기쁨은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를 맺어야만 이 세상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죠. 예수 안에 있는 기쁨도 있지만 그 밖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악을 향해 치닫게 하고 죄의 맹렬한 광기로 역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즐거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영혼이 파괴 되요. 그런데 이 진리를 붙들고 사는 이 즐거움은 이것 때문에 진리를 많이 깨달으면 자기가 얼마나 더러워 보일까? 사실이죠. 진리를 많이 깨달으면 자기가 얼마나 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까? 맞죠. 그런데 진리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늘 자기가 자기인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찬송해요.
이 모습 이 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찔리고 아프죠. 그런데 기뻐요. 여러분들이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게 찔리고 아플 때만 기뻤어요. 다른 때는 기쁘지 않았어요. 그것이 바로 진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좋은 옷 입는 것, 큰 집에서 사는 것. 수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듦을 당하면서 유명세를 타는 것. 또 무슨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받는 것,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허무한 것들입니다. 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오직 계속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뭐냐면 진리, 그 진리를 붙들고 사는 기쁨, 그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와 함께 영혼이 깨어나고, 그 진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고, 그 진리를 통해서 진리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것. 하늘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사모할 자가 내게 누가 있으리요. 그분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분께 계속 합일되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결국은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그런 삶을 찾아나가요. 그 충만한 까리따스 안에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 사람들을 많이 사랑해서 그 사랑 때문에 교통하게 하고 그들을 위해서 섬기고 사랑하게 하고, 만물들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나 때문에 하나님의 까리따스의 사랑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차서 힘닿는 대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날 동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모든 만물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마지막 가장 커다란 행복입니다. 이 밖에서 누리는 모든 행복은 아무 의미가 없는 행복입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 허위와 거짓의 삶, 그리고 명목적인 신자의 모든 기만적인 삶들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바로 이렇게 마음으로는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진리를 붙들지 않고 사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다른 곳에서 얻고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 속에서 그의 영혼은 날마다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고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자기가 그렇게 가끔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거역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숙명적인 삶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은 자기도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게 되면 신자가 불신자보다도 훨씬 불행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가슴에 깊이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붙들고 있는 자기사랑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두 버리고 그분께 받은 그 영혼을 그렇게 더럽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그렇게 더러운 존재가 되면서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세요. 깊이 생각하세요. 버리세요. 이제는 놓아주세요. 이제는 가라고 하세요. “세상에 네가 나를 버려도 이제 나도 너를 버린다.” 나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우리 하나님께만 있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사랑으로 선을 받아들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 이심이라.(요일4:8)
언제나 사경회는 짧아요. 한 열흘은 해야 되는데 닷새밖에 안 하니까. 그래서 일단 덜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이제 나중에 책으로 읽기로 하고, 그리고 이번 주일날 사경회 설교한 전체가 이만한 책으로 나옵니다. 설교의 요약이 나오니까 그것을 가지고 테이프를 들으면서 쭉 보시면 이제 다시 이해가 될 것입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렇게 들으셔서 쭉 소화하시면 그러면 이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자기를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악에 대해서 그 지난 시간에는 사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 지난 시간에는 사랑의 본성에 대해서는 그 지난 시간에는 창조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차례대로 배워왔습니다. 결국 여기저기 흩어져 진 곳에서 쭉 이야기를 했지만 요점은 뭐냐면 하나님이 주신 까리따스 지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득 차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목적. 그것이 선인데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것을 따라서 살 수 있다는 결론에 저희들이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이제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지순의 사랑으로 성도가 어떤 방식을 거쳐서 그 자기 사랑을 버리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이것을 오늘 시간 되는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번 설교가 매우 여태까지 들었던 사경회 설교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시는 분들이 별로 없다고 해요. 그래서 설교 본론을 들어가기 전에 짤막하게 간단하게 얘기 하나 하고 들어가면 그러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여러분들의 교리 지식을 제가 한번 테스트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믿음, 믿음이 더 높은 위치에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따라서 이성을 통해서 깨닫게 된 지식이 그 위에 있을까요? 지식, 믿음과 지식 중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야, 드디어 목사님이 이제 이단의 길로 들어서셨구나. 온 교회에 가도 믿음이 아니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는 믿음은 저 아래고 지식이 저 위라고 하니 야, 드디어 목사님이 이제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제 지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설교만이 아니라. 모든 설교를 듣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불신앙 가운데서 이성적으로 논리를 세워서 도달하게 된 그런 지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나, 하나,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구나. 이런 결론에 도달해서 얻게 되는 지식, 그것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과 지식이라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지식이 없는 믿음도 참다운 믿음일 수가 없고, 또 믿음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지식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치에 맞게끔 설명해주셔서 너는 이러니까 너는 나를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가르쳐 주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 인생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안 돼요. 나이가 아직 어리다든가,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정신이 멍해서 못 알아듣고 또 정신이 멍하지는 않는데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말이 통하지가 않아요. 그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너는 나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그때에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시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분의 살아계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나는 증명하실 수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보여주셨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일생동안 고기 잡던 사람인데 그 시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면 고기가 안 잡혀요. 그런데 왠지 말씀하시는 그분이 선지자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말씀에 의지해서 제가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런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이 참 많으면 좋겠네요. 아, 물론이죠. 성경을 볼 때마다 아멘, 아멘. 하고 믿으면 지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 믿어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 이유 없이 굳센 믿음이 생겼어요.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지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뭐냐면 “고난이 와도 나를 끝까지 사랑해라” 아멘. 또 지식이 생겼어요. 이렇게 지식이 생겨요. 그런데 이제문제는 뭐냐면 그 지식을 갖게 된 상태에서 그냥 끝나는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이 있는데 일단은 자기가 잘 모르니까 믿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맞아 내가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아들까지 보내셨어. 허튼 소리 하실 분이 아니야. 나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요구를 하실 분이 아니야. 아멘. 나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본분입니다. 믿었어요. 거기까지는 똑같은데 앞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서 끝났어요. 그리고 계속 할렐루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그다음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내가 받아들였는데 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리고 연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그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고 증명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가지고 증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딱 도달하니까 아, 그것이구나. 그리고 다 이성적으로 다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믿을 필요가 없게 되기 위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멘하지 못할 때 너무 감사해요. 여러분들의 이 머리에 새로운 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 고 말씀하시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게 되게 하시기 위해서 믿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 알고 나면 믿을 필요가 없죠. 여러분 오늘로서 사경회가 끝난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을 왜 믿어, 할 일 되게 없네. 다 아는 것을 왜 믿어요. 끝나고 나서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믿을 필요가 없죠. 그러나 이럴 수는 있죠. 5년 뒤 사경회에도 김 목사님과 함께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믿을 필요가 있죠. 왜? 이성적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는 표정인데 하나의 비유로 한방에 여러분들의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을 싹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학교를 다니셨으니까. 수학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면 “정리.” 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것을 초등학교 때는 공식이라는 것이죠. 수학에 공식이 나옵니다. 이것, 이것은 이거다. 그리고 정리가 나옵니다. 문제를 풀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의해서 아니면 이 정리 뭐, 뭐 뭐에 의해서 이것은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된다. 그러면서 문제를 풀어요.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정리, 그 공식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안 가르쳐줘요. 가르쳐 줄 수 없는 이유가 뭐냐면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에 나오는 공식인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알고 있는 수준의 수학을 가지고는 이것이 증명이 안 돼요. 대학교에 가서 가르치는 복잡한 수학에 의해서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일단 교과서에 나오니까 그냥 믿어야지. 그런데 대학에 가면 더 복잡한 수학을 배워요. 그래서 이것이 다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느냐면 아직까지도 지적인 수준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믿으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믿음이 없어, 그러니까 이것이 중간, 중간에 하나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거의 없어요. 그러면 이성이 추론을 해도, 건더기가 없습니다. 사다리가 있어야지만 좀 붙들고 올라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여기 이 사실을 믿고, 증명은 안 돼지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사실을 믿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꼭 이기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래요. 그 사이사이에 있는 것들은 계속해서 추론하면서 밟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이 없으면 지식이 없기 때문에 붙잡고 올라갈 사다리가 없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고 이성적으로 추론만해요.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런데 믿고 이성적으로 추론해 나가면 이제 믿었던 것을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신앙생활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너무 가슴이 아픈 것이 뭐냐면 머리를 텅 비어놓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담 같은 설교 좋아하고, 지성적으로 아무 활동할 필요도 없이 사우나에 가서 누워있듯이 휴게실에서 기대있듯이 철퍼덕하고 앉아있으면 그냥 들리는 그런 설교, 웃고 떠들고 돌아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설교, 100% 모두 다 이해되는 설교, 그렇게 하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많이 듣고 배운다고 하는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할 때에 그 마음이 히랍 어로 카르디아 입니다. 카르디아의 작용 중에 8-90%이상이 지성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지성과 애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바보 같이 어떤 사람들 하는 것 같이 ‘네가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 신학생이 되려고 그러느냐’ 그런 소리나 들으면서 같이 히히 덕 거리고 그러면 성화고 뭐고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제 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선을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란 이야기입니다. 첫 째는 지순의 사랑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인간에게 하나님이 제일 먼저 “원 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과 애성을 주셨다고 했죠. 그런데 그 애성이라고 하는 것은 애 적 능력과 사랑 자체입니다. 애 적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뭘 사랑하느냐? 무슨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냐? 이런 것은 따질 필요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애 적 능력입니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는 바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에게 원 애 로서 까리따스의 순결한 사랑을 가득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안 될까봐 애 적 능력은 방앗간에서 흰 떡을 뽑는 기계고, 그리고 하나님의 까리따스는 그 기계 속에 집어넣은 찐 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찐 쌀이 까리따스의 쌀이면 그 애 적 능력으로 그것을 휘돌려서 거기에서 굵은 떡, 넓적한 떡, 긴 떡, 가르다란 떡, 나오는데 이것은 각각 인간에 대한 사랑, 그다음에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물에 대한 사랑, 예술과 이런 도덕과 같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사랑, 많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타나나는 것이 모두 까리따스 사랑을 원천으로 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통합되어 있고, 복종되어있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말하자면 방해받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애 적 능력과 까리따스의 충만한 사랑, 두 개가 합쳐져서 애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성은 똑같이 지적인 능력과 지식 자체를 주심으로 그것이 지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 성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이 애 적 능력이 최대한 작동해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모든 만물과 사물위에 계속 해서 교통하는 사랑이 될 때에 그것이 진짜 삼위 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교통하는 사랑의 모상을 우리에게 이룬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발현을 통해서 이 창조된 세계가 고쳐나가고,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애 적 능력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까리따스의 사랑 자체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점점 더 성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를 이야기를 하려면 1시간이 다 지나가야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을 가지세요. 왜. 김 목사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아멘 하고 믿으세요. 그리고 나중에 책으로 다 보세요. 죄가 들어오지 않고 타락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까리따스의 충만한 사랑을 주셨지만 그것은 충만이 더 이상 도달할 수 있는 꼭대기의 충만이 아니라. 무한이 그것이 증가하는 그런 종류의 충만 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사랑이 더 부어질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고, 애 적 능력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 애 적 능력이 상승할 수 있는 그런 여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애성 이었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해서 이것들이 모두 상실되게 되었습니다. 상실되고 결국은 사랑의 기능, 사랑하게 하는 능력은 상당부분 건제하고 있지만 사랑 자체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한 톨도 안 남고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시커먼 자기 사랑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있고, 사랑을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문제가 좀 덜 될 건데 이것은 아직까지도 왕성하게 살아있어요. 그리고 이것들을 힘차게 돌리니까 그다음에 떡이 나오는데 새카만 똥 떡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든, 학문을 사랑하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든, 인류를 사랑하든,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해도 자기 사랑의 새카만 똥 떡이 그 속에 묻어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그런 존재와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러한 숙명적인 사랑의 모순을 극복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시는데 이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죄로부터의 구속이지만 결국 알고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비 비뚤어진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첫 시작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회심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놀랍게 이 새카만 떡들을 집어치워버리고, 하얀 떡들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를 가득 채우시고, 그리고 이 애적인 능력을 깨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이제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문제는 뭐냐면 아무리 좋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과, 어느 정도의 자기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나중에 나옵니다. 만은 그런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끊임없이 하나님이 그 지순의 사랑을 성화의 과정 속에서 그에게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예전에는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선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사랑을 통한 목표의 합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해서 가족사랑, 친구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 민족사랑, 세계동포 사랑, 등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여전히 중심축은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목표에 있어서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죠. 왜냐면 하나의 단일한 의지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이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정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좋음을 기준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요. 그러니까 그런 삶이 정말 더러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악하게 사는 것이 결국은 마지막에 허무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우리 어제 여러분들이 많이 깨달았을 것인데. 악한 삶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목표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습니다. 데려가고자 하는 목표가 없습니다.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로서의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어두움이 실제가 아닌 것처럼 그 악은 가고가 하는 목표지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태어났느냐면 그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영혼이 거듭나고,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아야지만 겨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는지를 가르쳐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그냥 아무렇게 살도록 버려두면 저절로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면서 살아요. 결국은 뭐냐면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없으니까 어디로 가야돼요. 아무데로나 가라. 아무데나 가는데 아무데나 가는 길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까. 어느 찻집에 갔더니 메뉴판을 가지고 왔는데 차 종류 커피, 홍차, 뭐 등등, 나오고 녹차 허브티 맨 마지막에 딱 하나가 나오는데 뭐냐면 아무거나 차.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이것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그러면 그것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거나 라고 하지 않으면 그래서 아무거나 가지고 왔더니 왜 이것을 가지고 왔냐. 이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 아무거나 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 이러더라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차, 5000원 이렇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 가계는 아무거나 차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달라 그러면 아무거나 줄 수가 없습니다. 주방에서 아무거나를 가지고 와야지. 그래서 아무거나를 시키면 아무거나 가지고 올 수가 없고, 주방에서 항상 그 아무거나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래서 먹고 왜 돈이 이렇게 나왔소, 그러면 그냥 아무거나 시키지 않았느냐고, 그 마지막 11번째가 ‘아무거나’ 거기 적혀 있잖아요. 거기 5000원 아, 정말 머리 좋아요. 그래서 그 ‘아무거나’가 뭐냐고 했더니 현미 녹차래요. 그냥 놔주면 아무렇게나 살아요. 어떻게 하면 창조의 목적을 거시길까 수고스럽게 가르쳐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그러면 막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망가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러다가 회개를 해요. 그래서 주님을 믿어요. 그랬더니 세상 사랑이 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조금씩 자기 사랑이 있지만 그 까짓것 문제가 안 되고 주님의 사랑이 꽉 찼어요.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 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진짜 안 무너져요. 다 필요 없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들은 부럽지 않네.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져요.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살살 이 세상 입맛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쩐지 그렇게 꿀 송이 같이 달던 하나님의 말씀이 퍼석퍼석 한 것입니다. 그래서 투덜대기를 아, 요즘 말씀이 목사님이 영력이 떨어졌는지 말씀이 퍼석퍼석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자기가 진짜 성도면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않고, 자기가 목사가 된 것처럼 마음 아프게 기도를 해야죠. 그것이 성도지, 그것이 사실이라고 쳐요. 그러면 목사님은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지겠습니까. 은혜가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지겠습니까. 이제 그러면서 돌아다녀요. 그러면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일단 신자 안에서 세상 사랑이 상당히 기세를 잡게 되면 그다음에는 이 은혜는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꾸삐디다스, 육욕적 자기 사랑이 일단 맨 처음에 비집고 들어오기가 힘들지 일단 들어와서 어디에서 꽈리를 틀고 뱀처럼 딱 앉잖아요. 그러면 이제 까리따스의 사랑은 공격을 받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배를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죄와 은혜의 지배” 그 책 한 권입니다. 그것도 다 못 섰지만 그렇게 펼쳐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면 야금야금 지순의 사랑이 사라져가고, 그다음에 꾸삐디다스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되느냐면 이제 창조의 목적을 선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아주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자니 자기 사랑이 상당부분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안 받아들이자니 이게 안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알겠는데도 못하는 것 많잖아요. 술 먹는 사람이 술이 좋다고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러면서 먹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식탁에 앉아서 계속 뱃살 만지면서도 그만 먹어야 되는데 그러면서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세 숟가락 그렇게 먹다가 보니까 두 사발, 세 사발 비우게 되잖아요. 그리고 계속해서 배는 나오고 진짜 결국은 복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하라고 했더니 복부 충만해져서 말이죠. 그렇게 되듯이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이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목표의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대부분의 신자가 이 지점에 있다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하는 것이지.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영혼에 고통스러운 상황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꼭 뭐하고 똑같으냐면 하여튼 뭔가 이렇게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 이 안에 일어나는 것이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머릿속으로도 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죄가 물론 속이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못 속이는 상황이 있을 수 있잖아요. 상당부분 살아있고, 이 속에 뭐냐면 단일 의지가 아니라 복합의지입니다. 신자는 항상 죄를 지을 때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의지가 있어서 그 중의 하나의 의지가 죄를 짓는데 신자가 가장 타락한 때에도 신자 안에는 불신자와는 다르게 그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는 의지가 존재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도 또 분리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자기가 교회를 다니는데 이것이 잘 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가 안 돼요.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오고 그다음에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영혼에 생기가 사라져요. 그리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복잡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표의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때에 이제 총명하고 말씀의 정리가 잘 된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은혜로 빨리 돌아오려고 하는데 이제 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죄의 밥이죠. 멍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계속해서 갈수도 없는 그 악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동질을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면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진리는 계속 짓밟으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인간성의 균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의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신자가 그렇게 망가졌을 때 그러면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자를 어떻게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며 살게 하십니까? 회개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시키실 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면서 살 수 밖에 없게 했던 자기 사랑에 대해서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인간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진다는 이야기를 우리들이 자주 하잖아요. “아이고 저 인간을 좀 깨뜨려져야 돼. 아 정말 깨뜨려져야 돼” 그것은 결국 무슨 이야기냐면 회개해야 된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깨어짐 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 안에 있는 경험으로서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경향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이냐? 두 가지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인데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사랑했었는데 참회하고 깨뜨려지면 그 죄가 이제 싫은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하는데도 억지로 안 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번에는 이제 마음의 경향 자체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난 하나님을 꽤 섬긴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다. 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의든, 자기 의에 대한 신뢰이든, 죄에 대한 사랑이든, 이 모든 것들을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사랑에 대한 깨뜨려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딱 하고 깨뜨려졌을 때 결국 뭐가 깨지냐면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과정들을 거치게 되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이 뭐냐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 자기가 누구냐면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입니다. 묵은 사람입니다. 옛 성품입니다. 타락한 본성, 그것을 따라서 상당히 살았는데 어느 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딱 보니까 이것 때문에 내가 불행해져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내 자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욕망이 끊임없이 일죠. 야, 야, 그것 집어치우고 이 길로 와. 여기로 가면 만족이고, 기쁨이 있단 말이야. 그 때 나는 네가 싫어. 이제 나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겠어. 나는 이제 내 안에 있는 욕망 네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살다보니까 지금 와서 보니까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지 않았느냐. 나는 너를 신뢰할 수 없다. 말하지 말라. 나는 싫다. 그러면서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가리켜서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 와이프 말고, “자기 부인” 자기를 부인하고 할 때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붙들겠습니까? 주님을 붙들고 진리를 붙들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 결국은 그대로 내버려두시면 도저히 구원만 받았을 뿐이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못 사니까 그러면 결국은 중대한 결과가 오게 되죠. 어떻게 되나요. 우선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불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이웃에게 수많은 고통이 되고, 세 번째는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비참하고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회개를 시키십니다. 그래서 회개가 뭔지 모르고 살다가 죽은 그리스도인은 ·100% 구원 받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절대로 구원 받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회개하고 상당한 죄 가운데 있는데도 결코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저는 목회자로서 판단하건데. 영적 침체라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침체가 아니라. 침체에 든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의 곤고함이 아니라. 마음속에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진리의 빛이 계속 비치기 때문에 고민하는 그런 종류의 갈등입니다. 어쨌든지 합치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깨뜨려지면 그다음에 이제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계속 죄를 죽이는 삶을 살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다시 충만해집니다. 그 꾸삐디다스가 거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콸콸 넘쳤는데 그것을 막 억누르면서 살았거든요. 터질듯이 그런데 양심과 이런 여러 가지고 억누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뭐냐면 없습니다.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이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뭐가 느껴지냐면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느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순의 사랑이 다시 회복될 때 신자가 하나님의 그 선을 다시 자기의 존재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감격적으로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순명의 삶입니다. 순명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계명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것 한건 순종하면 한건 대박이 터질 것이라고 하는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그런 축복 관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순명의 삶입니다. 그 순명의 삶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명의 삶으로 들어가면 다시 그 삶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또 하나의 넓은 벌판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명의 삶을 살면서 이제 신자는 모든 것이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표가 선이고, 자기 안에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꽉 차니까 하나님의 목표를 받아들이는 선함으로 자신이 꽉 차게 되요. 그 선함을 가지고 그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요. 자기가 걸어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니까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코드가 전부 다 내 밖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 그 창조의 목적 안에 있는 선, 그것을 찾아가는 나, 내 안에 있는 영혼, 그리고 그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지성과 애성의 일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현되는 나의 모든 삶과 관심, 영혼의 풍취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다 일직선으로 배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한 것이죠. 그러니까 가지런하고 정돈이 쫙 되어 있으니까 진리가 딱 들어오면 그 가지런한 선을 따라서 진리가 아닌 것은 거부되고, 진리는 그 정돈된 속에서 총명을 타고 이 지성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명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밤새도록 성경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순명의 삶을 사는 사람이 가끔 와서 목사님 말씀 한 두 마디 듣는 것을 가지고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순명의 삶을 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면요?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언젠가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쉬워서 들을 것이 없다고 할 때가 오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렇게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뭐냐면 다시 목회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사님 바보스러운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나 꼭 질문하고 싶습니다. 뭐요. 물어보시오. 그러면 결론적으로 신자가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였다. 집어치웠다. 받아들였다. 집어치웠다.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작년에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던 사람이 올해는 집어치우고 짐승처럼 살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묻겠죠. 교회에 나오는데도 그럴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바보 같지만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집사도 되고 장로가 되어도 마찬가지일까요? 하나 더. 목사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이해시켜드리게 위해서 제가 비유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들어보세요. 두 여자가 있었는데 각각 아들 하나씩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결혼하지 얼마 안 되는 그저 어차피 지어낸 것이니까 답이 없지만 그저 아이들 예쁠 때 네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아빠가 동시에 양쪽 집다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아이 하나 만을 데리고 있는 그런 표현을 안 좋지만 미망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사나 그리고 봤더니 한 여자는 한 1년 견디더니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이 아이를 친정에 보내려고 하는데 이미 친정도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셨어요. 동기간도 별로 없고 시집에 보내려고 하니까 시집도 다 뿔뿔이 흩어져서 보낼 때가 없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시집가 버렸습니다. 또 한 여자는 그냥 그렇게 젊은 나이에 혼자되었는데 그리고 얼굴도 아까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쁘게 생겨서 시집오라는 유혹도 굉장히 많았는데 왜 그랬는지 하여튼 그 아이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애는 고아원에서 커서 그냥 자랐고, 이 아이는 엄마 슬하에서 큰 것입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이 아이가 아주 착하게 그 아버지 없는 그늘 없이 그 엄마의 사랑 안에서 잘 크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이 여자는 특별하게 배운 기술도 없고 하니까 파출부다. 시장에 나가서 배추 장사를 한다. 뭐부터 시작해서 온갖 험한 일을 하다가 겨우 빵 집 하나 차려서 이제 이 아이를 중학교 고등하교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노심초사 하면서 했더니 이 아이가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이 여자의 마음이 너무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있더니 그 학교에서 아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그래서 그 졸업식 날 가서 학사모를 쓰고 나오는 아들을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행복해 했어요. 일구월심으로 오직 이 여자의 모든 관심은 이 아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결국은 그렇게 공부를 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진짜 동네에 나가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고, 실제로 동네방네 다니면서 우리 아들이 그렇게 좋고 어려운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번쯤은 속을 석일만 한데 그 엄마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잘 자라더니 그러더니 결혼할 때가 되니까 그 얼마나 요즘 싹 수 없는 처녀들이 많은데 정말 제대로 된 자매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 열린 교회에서 데리고 왔다고 해요. 아니 이렇게라도 해야지만 이 방송을 타고 우리 교회 노처녀들이 팔리지. 그런데 그렇게 데리고 왔는데 너무 아름다워요. 그러면서 셋이서 너무 행복하게 사는데 조금 있더니 아들을 하나 낳고, 딸을 하나 낳고, 그 아이와 함께 사랑하고 그 손 주들을 보면서 곱게 늙어갔어요. 죽었어요. 끝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두 스토리인데 그러면 도대체 왜 똑같이 같은 날 미망인이 되어서 그래서 두 아이를 가진 홀로된 여자가 되었는데 왜 이 여자는 결국은 일평생을 그 아이를 위해서 살았는데 그래서 구김살 없이 그 아이를 키웠는데 왜 그 여자는 애를 고아원에 집어 던져버리고 시집을 가 버렸느냐? 이 얘기입니다.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본인들이야 하겠죠. 그런데 답은 하나입니다. 뭐냐면 고아원에 보낸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자기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아이의 행복에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합치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여자는 자기도 사랑했지만 아이를 워낙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목표를 자기가 사랑하는 그 아이의 행복에 합치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 그렇게 기뻐했고, 그 아이가 뼈 빠지게 번 돈을 가지고 대학을 졸업 했을 때 자기는 폭삭 늙었는데 그렇게 행복해 했고, 고단하게 그 손 주들을 봐 주면서도 그렇게 행복해 하면서 결국은 그 아들의 행복을 보면서 자신은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 아들의 행복을 보면서 결국은 남자에게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일생을 홀로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똑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리 데려다 놓고, 쇠뇌를 시키고 교육을 시키고, 무슨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고 아니면 감투를 준다고 구슬리고 그래도 그 사람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해야만 자신의 존재의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나름대로 정한 존재의 이유와 목표를 버리고 자기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자기를 그 죄의 구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하나님이 자기를 구속하시고 창조하신 그 목표를 자기 존재의 이유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내가 충분히 기뻐하며 일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자는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집 못가는 것도 아니고 장가 못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입니다. 아까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여자가 희생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순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외에 신앙의 세계 안에서 진짜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최고의 의무, 인간의 이 최고의 의무가 뭐냐면 마태복음에 보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것은 예수님이 독자적으로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 때로부터 약 1500년 전에 했던 그 이야기를 예수님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리바이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모세만 못해서 리바이벌 하신 것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 된 길을 예수님이 와서 비로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 가르침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화 하고, 진짜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존재의 모습 속에서 보여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지식들을, 그 사랑을 자기에게 적용하기에 분명하도록 만들어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맨 처음에 나온 것이 마음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 가장 어려운 것인 동시에 그것이 바쳐져야지만 나머지 것들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여기에 이 “마음” 이라고 하는 것이 히랍어로 “카르디아라”입니다. 그래서 영어에도 지금 아직까지도 그대로인데. “카르디알라지” 그러면 심장학입니다. 심장과 관련된 것은 모두 “카드리”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심장과 관련된 것입니다. 라틴어의 “꼬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런데 이 심장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히랍어에서 “마음” 이라고 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까르디아” 마음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결국은 요약하자면 지성과 애성의 결집체입니다. 지성과 애성이 머무는 본거지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냐에 대해서 오늘 날 현대의 많은 심리학자들과 이 생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현대 학자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한 일이다. 그러니까 지성이 하는 그 일이, 두뇌가 그 일이 바로 인간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영혼이나 육체와 같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뻥션 입니다. 기능입니다. 그 기능으로서 존재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마음 안에 여러 가지 경향성들이 생겨나고 이 마음의 틀들이라고 하는 것이 형성되는데 그 틀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명의 삶을 살기도 하고, 그 틀을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르는 틀이 형성됩니다. 오래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면,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거역하고, 주님께 대들면서 사는 이 불효막심한 삶을 잘 살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바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작용이 이 “카르디아” 라고 하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중 거의 8-90% 이상이 지성입니다. 그리고 애성입니다. 그리고 이 지성과 애성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 이것이 하나가 되는지는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지성과 애성은 하나로 작동합니다. 논증하면 아주 은혜가 됩니다. 너무너무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지성과 애성이 하나인데 그것이 활동하는 본거지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정념적 사랑이 아닙니다. 정념적 사랑이 뭐냐면 정념이라고 하는 것이 불끈하고 확 솟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여기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의 참된 개념이 아닙니다. 원래 이것이 희랍어 단어에서 “파도스”라고 하는데 이것이 영어에서 “파토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열정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은 정념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원래의 희랍 사람들이 볼 때에 이 파도스라고 하는 것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정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까리따스의 사랑에는 분명히 정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이런 것,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모두 정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교에서 이야기 하는 이 정념과,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 안에 깃들여 있는 이 열정의 차이는 뭐냐면 하나는 비이성적이고, 하나는 이성적인 것입니다. 비이성적이라고 까지는 이야기 못해도 이성적이기를 강요하지 않는 정념. 그러나 이 카르디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에는 반드시 그 안에 이성적인 정념. 이성적 감정, 이성적인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원이 여러분들과 똑같은 고백이잖아요.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고백이고, 어쨌든지 은퇴하는 마지막 날, 제가 딱 두 가지를 마음에 간절히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고별 설교를 해야 될 때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 것 못하고 하나님이 데려가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올 것 아닙니까. 그 때 제가 마음에 기대하는 것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우선 여러분들을 향해서는 설교를 하려고 본문을 펴고 올라갔는데 30년을 설교를 들었는데도 아직까지도 무슨 설교가 나올지 모르는 설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바램이고, 또 하나는 이제 이 고별설교를 마치고 은퇴하는 그날이 살아온 날 들 중에서는 가장 성화된 날이고 살아야할 날 중에서는 가장 성화되지 않는 날이기를 나는 바랩니다. 나는 지금 생각했는데 말이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은퇴하는 그날이 살아온 모든 날 중에서는 가장 성화된 날이고, 살아야 할 날 중에서는 가장 성화되지 않는 그런 날이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제가 정말 살고 싶은, 되고 싶은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지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꿈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주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여러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빌어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랑이라는 말도 썩 그렇게 안 내켜요. "열애" 하나님과의 열애에 빠진 지성이고 싶습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뭐 목사님이 뭐 그렇게 책을 많이 사느냐고 피곤하게. 그러는데 그러면 열애에 빠진 멍텅구리가 될까요? 원하면 아멘 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가운데 약간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물어보고 싶겠죠. 그러면 목사님 공부만 많이 하고, 하나님과의 갈등에 빠진 지성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나쁘지. 똑같이 나쁘지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멍텅구리나 빠질 가능성도 없습니다. 한번 얘기해보세요. 멍텅구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세요. 그거나 있을 수도 없지만 극단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이 며칠 가겠습니까. 그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하나님을 배반한 지성, 다 미친 짓이죠. 원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과의 열애에 빠진 지성이 되고 싶습니다. 정말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러면서 일생 사는 동안에 지성으로 하나님을 정말 영화롭게 하고, 그 지성 때문에 사랑이 더 깊어지고, 사랑할수록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온 영혼이 깨어나고, 그렇게 하면서 일생 살다가 그 영광의 빛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살아온 모든 날 중에 가장 순결하게 된 영혼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품 안에 있는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그 이상의 어떤 행복이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두 가지를 위해서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 까리따스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과, 세상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질문은 먼저 이것입니다. 신자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느냐? 그러면 공존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이것도 처음에는 헛갈려요. 없는 것도 같고, 있는 것도 같고 성경에 이렇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하니까 헛갈립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갑시다. 신자 안에 세상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랑은 누구 사랑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사랑입니다. 세상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사랑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한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도 세상 사랑입니다. 꾸삐디다스입니다. 그러면 꾸삐디다스의 사랑과 까리따스의 사랑이 신자 안에 공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많은 혼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가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저 자신도 혼란을 겪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니까 이미 알던 것이지만 아주 명료해졌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것은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신자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그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또 꾸삐디다스도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육욕적 자기 사랑도 내 안에 있어요. 그러면 두 개다 다 공존한다고 했는데 궁금한 것은 뭐냐면 자기도 자기를 잘 몰라요. 내가 지금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선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모릅니다. 이번에도 벌써 닷 세 째 들어가는데 몇 사람이 와서 그래요. 자기는 한 번도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고 의심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설교를 듣고 보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자기는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많은 것들이 결국은 자기 사랑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 뭐냐면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가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영원히 자기편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 통속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또 만약에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이 공존하는데도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반대로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이 공존하는데도 창조의 목적을 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도대체 이것이 몇 대 몇이면 이쪽으로 기울고 저쪽으로 기우느냐? 50대 50에서 1%만 넘어가도 기우는 것이냐?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신자 안에 있는 까리따스를 지순의 사랑을 바라보시는 성경의 세 관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신자 안에 까리따스가 있다. 없다. 라고 이야기 할 때 세 가지 관점에서 신자 안에 까리따스가 있다. 없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두 관점을 거절하고 어느 한 관점만 받아들여서 그것을 표준으로 있다.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이렇게 복잡하게 이 세 가지 관점이나 가지고 이야기를 할까? 이렇게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설명해야지만 인간 안에 있는 까리따스, 있으나 창조 목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리따스, 별로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경험되거나 많이 있는데도 별로 경험되지 않는 까리따스의 문제를 일률적으로 모두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이 세 개의 입각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면 실제론 적 관점입니다. 실제라고 하는 것은 진짜 있느냐? 없느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실제론 적 관점에서는 성경적으로 볼 때 신자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한 바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성경에 대표적으로 두 군데만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사도바울이 죄에게 져서 깊이 패배하고 있는 가운데 탄식하면서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두 개의 복합 의지가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악을 행하려고 하는 내가 악이 함께 있다. 라고 할 때 이 악은 악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악함의 작용에는 반드시 의지의 작용이 동반된 것입니다. 의지의 작용이 동반되지 않았으면 책망 받을 이유가 없죠. 그런데 그런 악한 의지가 있는 동시에 이것은 꾸삐디다스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육욕적 자기 사랑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한 육욕적 사랑이 기승을 부리는 때에도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의지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흔적입니다. 또 하나는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뭐라고 했느냐면 “너희의 인애는” 그 인애가 히브리 말로 헷세드 인데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으니” 그랬습니다. 이, 아침 구름은 안개가 아닙니다. 아침 구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제가 새벽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 나타납니다. 안개는 경계가 불분명하게 넓게 퍼져있는 것이 안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면 그것이 아니라. 구름입니다. 아주 분명한 구름의 형태인데 작습니다. 그리고 매우 낮아서 야산에도 걸릴 정도의 그런 구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붕보다 약간 높은 곳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구름입니다. 그런데 크기가 매우 작고, 특징이 뭐냐면 햇살이 퍼지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여튼 그 구름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그런 실제론 적 관점에서 성경이 신자의 까리따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모두는 크기는 틀리지만 모두 하나님을 향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지순의 사랑을 여러분 안에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 가운데 남이 알지 못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지금 경찰 당국에 의해서 추격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도 이 까리따스는 실제론 적 관점에서 보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평가론 적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이 평가론 적 관점에서는 있는데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주 딱 잘라서 있고, 없고,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평가론 적인 관점에서 너희 안에는 까리따스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실제론 적으로는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요한 일서를 기록한 요한 사도가 2징 15. 16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죠.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그럴 때 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게네 티브스 아쿠싸티브스 라고 해서 소유격으로 써졌지만 사실은 목적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조국의 사랑이 저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게 했다. 그것은 조국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전쟁터로 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갔다는 그런 뜻입니다. 어법 이해하겠죠.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안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까리따스가 없는 것이니” 그 얘기입니다. 없다는 것입니다. 있고, 없고, 있으려다 말고, 반쯤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서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선지 서에 많이 타나납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으니” 아주 딱 잘라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들 속에 경외함이 없는가요? 있지요. 조금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런데 그런 것은 실제론 적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고, 평가론 적은 딱 잘라서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있다.’ ‘없다.’를 정하는 그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시는 것인데 없다. 이렇게 판단하시는데 하나님이 없다. 그러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있다.' '없다.'를 판단하시나. 그런데 그 기준이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존재의 목적을 그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정위시키고 그길로 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느냐. 아니냐.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경험론 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있느냐? 없느냐? 의 이런 문제가 아니라.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경험론 적인 관점에서는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어떤 때는 덜 느끼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있다. 없다.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감정이 있으면 사랑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험론 적인 관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합쳐서 여러분들이 아주 깔끔하게 이해가 되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아기를 그 불쌍한 아이를 고아원으로 줘 버리고, 팔자 고쳐보겠다고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행복을 아이의 행복에 합치시킬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자기를 사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집을 갔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볼 때 “아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네.” 결론을 딱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관점 입니까? 평가론 적인 관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엄마의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이 속에 아이를 향한 사랑이 없었겠습니까. 실제로. 그러니까 시집가는 날 눈물을 흘렸지.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면 실제론 적으로는 아이를 향한 사랑이 상당부분 지울 수 없을 만큼 이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그래서 결국은 자기의 행복을 향한 사랑이 이겨서 이놈을 고아원에 버리고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시집갔는데 남편이 정말 잘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히 덕 거리면서 아이를 새카맣게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오더니 막 구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집도 갔다 온 것이 말이지’ 이러면서 말이죠. 그 집에 들어와서 밤에 혼자 누워있는데 막 자기가 너무 서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밤 따라서 유난히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도 되는 것입니다. “아, 그냥 살아봐야 별것 아닌데 그냥 그 아이를 데리고 살 것을 그러면 이렇게 속상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면서 그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밤새도록 베개에 엎드려서 울면서 눈이 퉁퉁 부어지도록 밤새도록 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어요.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그것입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흐느끼며 아이를 생각하면서 울 때에 그 여자의 느낌에 자기 속에는 오직 아이만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그렇게 느껴져요. 안 느껴져요. 그것이 경험적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다시 평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아이를 향한 사랑이 진짜로 이 속에 자기 인생을 바꿀 정도로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 더 아이와 함께 살기로 이 여자가 결심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아이를 그냥 속 편하게 고아원에 보내버리고 과거와 단절하고 새살림 차린 여자의 삶에 고난이 더 많겠습니까? 그 놈을 붙들고 그 젊은 나이에 파출부하고 시장에서 배추장사까지 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이 아이와 함께 풀칠을 하면서 이 아이를 바르게 길러보려고 몸부림 친 그 여자의 일생에 고난이 더 많았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죠.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를 기르는 보람으로 사는데 같은 집에 새를 들고 있는데 신혼부부가 들어온 것입니다. 너무 금술 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밤에 드러누웠는데 아이는 공부한다고 건넌방에서 불 켜고 공부하는데 적막이 조용해요. 그런데 감자기 외로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 사진 꺼내서 몇 번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러면서 잠이 들어요. 그래서 밤새도록 그 남편에 대한 생각 때문에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얼마 지났는데 뜬금없이 마음속에서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젊은 여자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정욕이 막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자의 품이 너무나 그리운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온 세월을 보니까 너무나 서러워요. 그리고 저까짓 것 자식하나 끼워서 뭐하나 라는 느낌까지도 일시적으로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정욕에 꽉 차서 괴로워하면서 자기 설움에 겨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웠어요. 그 때는 이 속에 거의 아이를 향한 사랑은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남자를 향한 그 애틋한 정말 꽉 찬 것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정리하고 그 아이 깨워서 씻겨서 도시락 싸서 보내주면서 “아참, 누가 낳는지 아들 하나는 참 잘 났구나.” 그리고 보내고 자기는 다시 시장으로 물건 사러 갔어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제가 하고 싶으냐면 이것이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묘한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배울 가장 큰 교훈이 뭐냐면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신자들이 자꾸 평가론 적 관점에서 자기 안에 까리따스가 있나. 없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경험론 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기간 동안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자기 사랑에 붙잡힌 채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살다보니까 그것도 피곤한 것입니다. 그 목적을 거시리려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피곤하고 이리 치고, 저리 치이고, 하여튼 괴로움을 당하다가 어느 날 교회에 나왔는데 너무 서러운 나머지 눈물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울면서 기도하다 보니까 자기는 너무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과 같이 있고, 싶고, 옛날의 첫 사랑도 자기가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인데 내가 왜 이렇게 살까 하는 서러운 같은 것들이 느껴지면서 기도하는데 아니 주님이 마음 가득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멍텅구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이것이 자기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는 원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상당히 꽉 차 있는데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밀고 들어오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죄에게 자기 자신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8-90% 이상입니다. 그리고 와서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데 본인은 그것이 회개인줄 알아도 그것이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흐르는 자기 연민입니다. 하나님 앞에 상달 안 됩니다. 증거를 대라면 제가 30분 동안 댈 수 있습니다. 왜 그것이 아닌지. 이것이 모두 다 참된 은혜, 신령한 은혜에서 온 종교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자체 안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들이 그렇게 속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무슨 생각에 빠지느냐면 자기도 자기가 지은 죄의 피해자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뭐라고 합니까? 참회할 때에 무엇을 받아들이느냐면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 의롭다 하리이다. 주는 완전하시며 공평하십니다.” 고백입니다.
그런데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그것을 짓밟으면서 그렇게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거의 막힌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굉장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과의 사랑은 숙명적이라고까지 이야기 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을 고치기 전에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사도요한이 자기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사람들이 누구였느냐면 그냥 예수님 잘 믿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향한 사랑, 까리따스가 없다.” 그랬으니까 여러분보다 훨씬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을 향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가론 적 관점에서 여러분 자신에 제어보세요. 진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또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선한 사람이 되고, 그 선을 쫓으며 사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그런 열망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아멘 하기 전에 그렇게 아멘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선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영광, 그리고 그분의 기쁨 안에서 내 행복을 찾기 위해서 걸어간다고 하는 소원이 진실하다면 한 가지를 입증해야합니다. 그 소원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고 아파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진짜 그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짜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내 기쁨이라면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분노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이 그것을 향해서 재편 되어 있어야합니다.
이 성경에서 또 하나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면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나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 우리의 마음에서 보좌를 차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지 둘이 동시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사랑의 불가분성입니다. 나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랑 그 밑에 복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나뉠 수는 없습니다. 자, 그래서 비유를 또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어떤 착한 연애도 한번 해보지 못한 아주 착한 처녀가 있었어요. 얼굴도 그렇게 뛰어난 미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접근하는 젊은이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좋은 청년 하나를 만났어요. 그래서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너무 잘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주의력이 깊고 재는 것이 많아서 소심해서 누구에게 이렇게 마음을 주는 처녀가 아닌데 이 남자가 꾸준히 잘하는 것입니다. 그냥 만났는데 선물도 사주고 따뜻하게 이야기도 하고, 밤이면 잘 자라. 아침이면 아침 먹었냐. 점심 먹었냐. 만난 지 100일 되는 날에는 무슨 커플링도 해다 주고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처녀가 여러 가지 하는 것이 많아서 몸이 너무 허약해서 쓰러졌어요. 그 때에 침대에 누웠을 때에 이 사람만을 사랑해야 되겠다. 라고 결심했어요. 뭐냐면 어떻게 하다가 집에서 절도를 했는데 깨보니까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옆에서 그 총각이 자기의 피를 빼서 그 처녀에게 넣어주고 있는 광경이었어요. 이 처녀가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피곤하게 잠들어 있는 그 젊은이의 얼굴을 보면서 저 남자가 한 달밖에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만약에 저 남자와 함께 결혼해보지 못한다면 영원히 후회하리라. 그리고 이제는 내 모든 것을 저 남자에게만 주리라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자기처럼 똑같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어요. 초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묻고 싶어요. 그런데 이 남자는 한 여자를 덜 사랑하고, 한 여자를 더 사랑할 수 있지만 이 남자보고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둘 다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진심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도 총각 때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요. 계속 고민해서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 구식도 좋고, 신식도 좋다는 것입니다. 옛날 애인도 너무 좋고, 지금 애인도 너무 좋은데 옛날 애인이면 끝났어야 되는데 지금도 계속 연결되고 있는 옛날 애인이에요. 둘 다 너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야, 500년 전에 안 태어난 것이 미안하다. 500전에 태어나서 퍼스트 세컨드 이러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나만 선택해 하나만“ 그래서 기도해봐야 되겠대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남자에게 물어봤더니 내 모든 사랑을 그 여자에게 좋다. 배기지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두 여자에게 가서 물어봤어요. “저 사람이 100을 다 쏟아 부어서 두 분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애인 여, 얼마나 받았어요? 받은 것 없다. 1도 안 받았다.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얼마나 받았소. 그러니까 나는 1도 받은 것이 없이 나는 오히려 빼앗겼다. 내 사랑을 빼앗겼다. 말도 붙이지 마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남자는 온 마음을 다해서 100이라는 사랑을 보내주었는데 그러면 중간에 누가 가지고 간 것입니까. 아니 수학적으로100을 보냈는데 저기 둘을 합쳤는데 0이라고 하니까 이것이 어디론가 갔을 것 아입니까? 어디로 간 것입니까? 간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점이 틀려서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경험론 적인 간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두 사람은 이 남자와 결혼하느냐? 안 하느냐 할 때에는 그 평가론 적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면 정말 있는 것 아니야. 비록 다른 여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럴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남자는 실제론 적 관점과 경험론 적 관점에서 자기가 보내준 사랑이 100이라고 본 것이고, 두 여자는 평가론 적 사랑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안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수 없는 것이죠. 이제 피할 수 없죠.
여러분, 죄 가운데 있는 신자일수록 애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 속에서 엉기덩기 그냥 묻어서 사니까. 이제 여러분 스스로 평가를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평가해보세요. 실제론 적으로 있어요. 경험론 적으로 있겠죠. 있으니까 눈물 흘리시잖아요. 그런데 평가론 적으로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중요하느냐면 결국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까리따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까리따스를 주셨는데 세상 사랑에 파묻혀서 흐지부지 없어지게 하기 위해서 까리따스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까리따스를 주신 것은 세상으로 치닫다가도 까리따스 때문에 갈등이나 느끼라고 이 까리따리의 사랑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까리따스의 사랑을 주신 목적은 그 사랑으로 은혜가운데 충만해져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까리따스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까리따스가 상당히 있기는 있는데 창조의 목적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목표로 정해놓고 헛된 삶을 살아요. 그러면 여러분 안에 있는 까리따스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죠. 그것을 내가 유산된 까리따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산된 까리따스입니다. 아이가 되지 못한 까리따스입니다.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속에서 죽었어요. 있어요. 그런데 생명이 없어요.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현재의 영적 생활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고, 거시리는 사람인데 가끔 와서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면 그 은혜를 받아서 뭐하게요. 가던 길 계속 가려고요. 그것이 유산된 까리따스 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름을 붙이고 나서 나 스스로 무릎을 쳤습니다. 야, 이것 기가 막힌 것이다. ‘아봇디드 까리따스’ 유산된 까리따스 속에서 사산 된 것입니다. 아이가 이 속에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죽은 채로 있는 것입니다. 유산된 까리따스입니다. 반대도 성립합니다. 순전하게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살아요. 그런데 수시로 세상 사랑이 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힘을 못 써요. 그날 밤에는 남자 생각에 정욕에 흔들렸지만 아침이면 다시 아이의 도시락을 싸서 보내면서 참 우리 아들놈 잘났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비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신자 안에 있는 세상 사랑인데 유산된 꾸삐디다스. 유산된 세상 사랑입니다. 날마다 은혜 속에서 이런 것들을 유산시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끄덕 없습니다. 절대로 이 속에서 두 개의 쌍둥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까리따스의 태아, 그다음에 동시에 허무한 악을 쫓아가면서 충동을 쫓아가면서 충동을 따라 사는 자기 사랑. 이 두 개가 한꺼번에 태어나지 않고 반드시 둘 중에 하나는 죽습니다. 이것이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늘 요동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가끔 와서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도 이것이 전혀 내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이유가 있었구나. 결국은 뭐냐면 유산된 까리따스.
그러면서 우리들이 사랑의 배타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어느 앙 케이트에서 조사를 했는데 연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말 중에서 제일 많이 쓰는 것이 뭐냐 그랬더니 첫 째는 “우리 둘이만” 2위는 너한테만 이것이 연인들이 제일 많이 쓰는 언어로 조사되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둘이 있어야지만 함께 있는 것이지 옆에 엄마가 함께 있으면 100시간을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온갖 머리를 굴리죠. 엄마 고단할 텐데 가서 주부시죠. 아니 나는 텔레비전 더 볼란다. 그러면 텔레비전을 저 방으로 옮겨드릴까요. 아마 그러고 싶겠죠. 엄마 우리 둘이 저 뒷방에 가서 잘게. 아니 얘, 거기 쥐도 가끔 나오고 벌레도 가끔 나오는데. 그러면 아니 괜찮아 그냥 깨끗이 치우고 자면 돼. 아니 여기에서 셋이 같이 있자. 싫어요. 그런 것입니다. 해 봤으니까 다 알잖아요.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질투가 나옵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그런데 이 질투라는 것이 뭐냐면 사랑에는 항상 배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정복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혼자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까리따스의 사랑이 꽉 차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랑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경향이 생겨납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까리따스도 동질의 까리따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까리따스를 베풀어주실 때는 우리에게만 사랑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니까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늘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또 하나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죠.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만 사랑하라면 우리 아내도 사랑하지 말고, 나라도 사랑하지 말고 교회도 사랑하지 말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위고, 그다음에 이제 사람,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래 있는 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위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에 기여해야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이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통합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질투하실 이유가 없죠. 그래서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해요. 그런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 기여하면서 교회를 사랑해요. 지체들을 사랑해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도움이 되요. 왜? 하나님이 지체들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시니까. 아내를 사랑해요. 하나님이 기뻐하셔요. 왜냐면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시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존재의 질서들이 이렇게, 이렇게 있을 때 밑에 있는 것들이 각각 위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에 기여하는 사랑이 되면 그러면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얘기하느냐면 이런 사랑, 그러니까 궁극적인 하나님께 대한 까리따스의 사랑, 그 궁극적인 까리따스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하여 밑에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것들의 사랑은 기여하는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과 동질의 까리따스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회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방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교회가 워낙 엉뚱한 방향으로 갈 때 거기에 동참하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죠. 판단력 있게 사랑해야죠. 그렇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이 사랑이 하나로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바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투입니다. 이렇게 하지를 않아요. 아내를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복종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갈 사랑을 뜯어가지고 온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하나님이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복종된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복종된 사랑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 보여드렸죠. 그래서 “이제야 내가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제 사랑으로 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떤 것이냐? 첫 째 뒤집힌 질서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전도된 질서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질서가 뒤집혔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실제로 질서는 뒤집히지 않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대로 있는데 자기가 그것을 뒤집혔다고 놓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위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셔서 하나, 하나는 그 위에 것에 기여해서 마지막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목표이고, 그것을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되는데 이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자기가 막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 신자에게 은혜를 주시면 이 신자가 이 바꿔진 질서대로 살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 신자가 그러면 오랫동안 그것이 좋았고, 우선 첫 째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겨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뒤바꾸면서 살았거든요. 그랬더니 결국은 수많은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서 자기는 고통 받는 상태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자기가 바꾸어 놓은 질서, 이것이 옳다고 믿었던 질서를 아니다. 라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느냐? 그것이 뭐냐면 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지성은 지적 능력과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지적인 능력은 다시 둘로 나눠집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사물의 논리와 이치를 추론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 이 어려운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 중에 하나가 총명입니다. 옛날 철학에서 오성이라고 부른 것인데. 이 오성,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생각으로 하여금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는 판단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좀 못했어도 총명이 뛰어난 사람들은 훨씬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요. 공부를 많이 해도 총명이 모자라는 사람은 늘 멍청한 삶을 살아요. 돈은 조금 더 벌고 사회적인 대우는 받을지 모르지만 늘 인생을 저 고랑에 쳐 박는 일을 자주 저지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총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판단력인데 이 자체가 영혼 안에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이 총명이 가변적입니다. 총명이 아주 밝아질 수도 있고, 아주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들판에 못 나갔고, 그제 나갔거든요. 그제 밤늦게 나가서 아무도 없는 호수가 둑을 걸으면서 밤하늘을 이렇게 쳐다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늘 그렇게 밝게 빛나서 좋아하던 별이 아주 현저하게 밝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그러고 보니까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공기층이 바람의 기류 때문에 두터워지게 되면 투명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통해서 보는 별빛의 밝기가 떨어지는 것이죠. 어느 날 바람이 불지 않는 날 가서 보면 아주 찬란하게 빛나요. 어떤 날은 그 자리에는 있는데 밝기가 영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총명도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으로 꽉 차게 디면 이 총명이 샛별처럼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반짝반짝 빛나는 그 총명으로 받아들여야 되나?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나? 하는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세상 사랑으로 영혼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총명이 빛을 잃어서 그래서 총명에 빛이 비쳐도 안개가 잔뜩 끼어있기 때문에 그 빛이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를 못해서 그러니까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랑은 광기를 가지고 충동질 하는 것입니다. 저것을 사랑해. 왜? 저것을 사랑할 때 기분이 좋잖아. 그러면서 일등으로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이것을 사랑해. 왜? 이것을 할 때 기분이 좋잖아. 그러면서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없는 거야. 있는데 왜 없다고 해. 필요 없잖아. 막 아무렇게나 미친 듯이 조작해서 들이미는 것입니다. 비쳐오는 그 물채의 표상에 그 실제가 무엇인지를 보는 눈들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이제 육욕적인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시 꽉 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모든 질서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요. 그러면 이제 총명이 다시 반짝반짝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정도의 생각은 고대의 철학자들도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 신자 안에 있는 이 내적인 광명, 이것이 결국은 이성인데 이 이성이 그것들을 작용해서 보게 하는 것인데 그 이성을 정말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정말 역사하는 것이 뭐냐면 신자 안에 있는 성령님입니다. 이 성령님이 신자 안에서 하시는 일은 병을 고치고 부자 되게 하시고, 뭐 꿈을 꾸게 하시고, 그래서 개를 보게 하시고, 이런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성령님을 빛을 발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지성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그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계명하는 등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신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죄 가운데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져요. 은혜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이 사라지신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완전히 가시지는 않지만 성령님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네가 은혜 받았냐. 하는 이야기는 성령님이 너의 안에 계시니. 라고 묻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뭐라고 불리냐면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신자의 마음에 등불이 되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역할이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회복하면 성령님이 환하게 비추시면서 그러면서 참된 것이 무엇이고 거짓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렇구나. 내가 여태까지 속았구나. 너 날 속였지. 그러면서 자기의 옛 성품, 옛 자아를 향해서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널 신뢰할 수 없어. 이제 보니 아주 나쁜 놈이구나. 난 너를 믿을 수가 없어. 이제 나는 네가 하는 이야기면 뭐든지 안 믿겠어. 네가 무엇을 하라고 나에게 시키든지 나는 도저히 그것을 따를 수가 없어. 그러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밝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총명이 회복되니까 이 모든 질서들을 뒤집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였는데 아니야. 그것은 내가 속은 거야. 그러면서 자기를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먼저야.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잘못 사랑하던 것들을 다 내려서 하나, 하나의 사랑이 그 위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에 복종되도록 이렇게, 이렇게 마지막으로는 결국은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으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이야기는 뭐냐면 사랑을 두 가지로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 첫 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그런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똑같은 방식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수평이 아니고 수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총명이 되살아나면서 두 가지 질서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존재론 적인 질서,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질서가 다시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떨어지고 나면 그냥 먹고사는데 정신이 없어서 기도도 안 합니다. 매일 다른 소리합니다. “요즘 기도 좀 하십니까?” 그러면 "아, 요즘 너무 바빠서요.” 누가 바쁜 것을 물어봤어요. 기도하는가 물어봤지. “요즘 은혜생활을 좀 하십니까?” 그러면 엉뚱하게 “아, 요즘 애가 계속 속을 썩여서요.” 어떻게 하라고요. “요즘 순종하시면서 살아가십니까?” 그러면 “아이고, 올 초에 구조조정이 한창 이라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동문서답이에요. 그러면서도 얼굴하나 빨개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목양이 되겠습니까. 바른 태도를 가져야지만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돌보아지지 그런 식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데 뭘 하겠습니까.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까리따스가 막 들어오게 되면 이런 총명들이 되살아나면서 이런 질서들을 다시 다 잡는 것입니다. 이때에 마지막으로 사랑의 특성이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특성이 뭐냐면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이게 까리따스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생겨나는데 그 지순한 사랑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이 때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 특성이 뭐냐면 기뻐함과 소중히 여김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이제 자신 안에 회개를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시 충만해지게 될 때 그 때 회개하기 전에는 주님께 돌아가는 이런 것, 이런 것, 즐거움을 잃어버릴 텐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그런 것을 다 없어지더라고요. 그런 것만 없어지는 줄 알았더니 그 때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놀라운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 때문에 그런 즐거움들을 잃어버린 것들을 희생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소중이 여기는 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떨어지고 까리따스에서 멀어졌을 때에는 그냥 소중한 것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뭐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고, 그러면 자기 아파하시든지 말든지. 난 나도 아픈데 그러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막 대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면서 그러면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이 너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소중해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나를 행복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이 마음쓰지 마십시오. 나는 주님이 행복하시면 저도 행복합니다. 그런 창조의 질서에 부합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던 삶 전체가 강한 사랑의 힘으로 말하자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던 삶의 자리에서 창조의 목적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이 자리메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그냥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함께 역사하시는 이 강력한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이런 전환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대국적인 전지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살아가더라도 삶의 방향이 이렇게 되지를 않고 주님을 거시리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을 뻔 했을 사람들입니다. 그 시간으로만 보면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슬퍼요. 고통스러워요. 그러면 이옷들도 너무 괴로워요. 망가진 이 세상의 피조물도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있지도 않은 악을 쫓아가며 그 죄악된 충동에 의해서 자극을 받으면서 죄의 광기와 속임에 놀아나면서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그 육욕에 가득 찬 사람의 삶 속에서 거듭난 그 영혼은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고, 영혼의 고귀한 기관들은 여지없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도 전혀 행복하지 않는 비참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중생과 함께 주신이 주신 그 영혼의 탁월한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 세상 속에서 아주 더럽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만물을 호령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만물을 다스리고 만물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할 하나님의 대리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제는 만물 중에서 가장 못한 길거리에 구르는 돌들을 부러워하고 풀섶에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더 부러워해야하는 아주 불안하고 그리고 처절한 그리고 추루하기 짝이 없는 아주 지저분한 영혼이 되어서 흉측하게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존재하면서 목숨을 연명하면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모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옷 한 벌이라도 더 입으려고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 칼부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창조된 세계의 아름다움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날 동안은 그의 영혼으로 그 고통을 겪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고 살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볼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참으시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 동안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의 작용과 삶이 이 우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은 곳을 향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육신의 모양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고난을 받으시고 가난과 비천에 복종하시는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왜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사랑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죽어도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 도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둔한 우리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으시며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털 깍는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고난을 한 몸으로 다 당하셨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그 자리의 뼈를 부수고 살을 찢는 그 피저린 그 고난이 바로 그동안 수많은 인류가 앞으로 수많은 선택된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시려 살며 지은, 지을, 짓고 있는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배신을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거시리고 주님의 품을 떠나 지은 모든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우리가 진짜 그 사랑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에 침 뱉은 이 세상의 입술과 어떻게 입을 맞출수가 있겠으며 주님을 때리고 핍박한 피 묻은 이 세상의 손과 어떻게 악수 할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증오심으로 가득찼던 주님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던 이 세상의 품에 어떻게 창녀처럼 우리의 몸을 던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것이 있는 것이며,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합일로 나아가는 것, 끊임없이 만물의 근원이신 그분 안에 자신의 존재가 있음을 의존적인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도 있고, 아픔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께 합일되기를 원해서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불변하시는 주님을 따라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향한 까리따스로 가득 차서 자신의 온 존재가 그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향해 불타기를 원하고 자신을의 모든 존재가 그분을 위해 아낌없이 드려지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진리를 깨닫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가슴으로 자기가 합일되기를 원하는 그 진리를 열애하고, 그 뜨거운 사랑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주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그래서 자기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뜻들을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고, 이런 진리를 열애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로 가득 찬 신자의 구도의 삶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 은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걸어서 저 별빛 끝까지 주님이 계신 그 하늘까지, 죽기까지 이 걸음으로 매일, 매일 진실을 찾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견디며,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참으며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