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가는 용서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1. 남의 죄로 악을 당할 때(마6:12) 2010.1.11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용서하지 않는 마음(엡4:32) 2010.1.12 새해말씀사경회(새벽) 7
3. 허물을 덮는 사랑(벧전4:8) 2010.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3
사랑으로 가는 용서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4.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살전5:15) 2010.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9
5. 지체에게 분노할 때 (엡4:26-27) 2010.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4
1.남의 죄로 악을 당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의 여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은혜의 수단이 있다면 기도생활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를 잘 재어볼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우리의 마음의 어떠함을 잘 보여주지만 우리가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방해받는 것은 기도하는데 있어서 방해를 받는 것보다 더 원인이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늘 그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피곤하다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장소가 자기가 늘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시간이 자기가 본래 기도하는 시간과 다른 것에 그렇게 많이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생활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외부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게 되지요.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있어도 육체가 너무 피곤하면 말씀을 듣다가 졸수도 있고 또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가 전하는 말씀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러한 노이즈라는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내 안에 있는 것인지 내 밖에 있는 것인지를 잘 판단해서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제해버리지 아니하면 우리가 마음이 하나님께로 흘러들어가는 그런 기도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상당히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강력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주 자주 걸려서 넘어지는 지점이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흐르지 못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가르쳐주신 기도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든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이든지 처음 하나님을 부르는 명칭부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우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여기서 주님이 ‘우리’ 라고 가르쳐주신 것은 기도 그 자체가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의 행위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데 그 개인적인 기도를 할 때조차도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 속에 우리의 기도가 수렴되고 또 우리 한사람 개개인의 기도가 공동체의 유익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극히 개인적인 것에 대해서 기도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의 간청의 제목들이 되어서는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공동체 전체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과 소명을 생각하면서 그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개인의 지평으로 스며들어서 그게 나의 개인적인 간절한 소원이 되도록 그렇게 빌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기도가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실제로 힘든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사랑이 없이는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그런 기도가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자녀 자신은 그 제목이 간절한 기도제목이 아닌데 자녀가 아닌 다른 사람인 여러분들에게는 그 기도가 자녀 자신보다도 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지요? 그런 원리를 확장해서 생각하면 바로 공동체 전체의 기도가 공동체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의 제목들이 나의 개인기도의 지평 속으로 스며들어서 나의 간절한 탄원이 될 때 이것은 개인의 기도 그 자체가 공동체 전체의 기도를 이루는 아름다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도록 ‘우리’ 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결핍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우리는 항상 이 점에 있어서 나보다 더 결핍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개인의 기도의 지평이 공동체의 기도의 지평 속으로 스며들고 공동체의 기도가 개인의 지평 속으로 스며드는 그런 순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기도 속에서 교회와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의 작용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주님께서 의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말합니다. 원래 희랍어 원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성격을 채무로 보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남에게 빚을 내어서 쓴다는 것은 일단 그 사람의 재산을 축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다른 사람의 재산을 축냈으면 그는 그 재산을 사용하면서 그 사람에게 빌린바 이 채무를 청산하여야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 빚을 청산하여야하는데 우리의 진 죄가 하나님을 향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4 (201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요?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갚는 방법이었어요. 똑같이 우리가 어떤 다른 사람에게 악을 당할 때에 그것은 마치 그 사람이 우리에게 빚을 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 그 빚을 갚아야할 채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에는 그가 무슨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되면 우리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이 사람이 강탈하는 범죄를 했다고 쳐요. 우리는 빼앗겼어요. 때로는 다른 사람 때문에 우리의 명예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우리가 신체의 고통을 받기도 하고 더 가능성이 있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을 당하기도해요. 이러한 모든 것들은 채무를 발생시켜요. 그 사람이 우리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빚진 것을 당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했다고 빌 대상도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향해서는 우리의 죄를 빌거나 용서를 받아야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사람을 회개시키고 당신을 믿게 만들어서 교회의 공동체 속으로 불러들이실 때에 그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실 그 때에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악을 당하는 일도 허락하시고 고통을 당하는 일도 허락하시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실제로 자신도 용서해봄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이고 주님이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하신 희생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고 자신이 그 용서를 통해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연합인 이 교회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이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악을 행해서 우리가 부당한 손해를 입거나 아니면 고통을 받을 때 그때 우리가 감사해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커다란 권세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에게 죄를 지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나를 고통 받게 만들었어요.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 묶여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의 영혼을 진심으로 용서해주면 하나님이 그 묶여있는 것을 풀어주셔요. 그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었을 때인데 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시려고 해요. 그런데 죽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껄떡껄떡 쉬면서 죽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 숨을 거두기 힘든 것일까 하면서 목사님이 가족들에게 물었어요. 그랬더니 큰 아들과 일평생을 불화하며 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을 빨리 찾아서 불러오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찾아 불러와서 화해를 시키니까 그 아들 손을 붙들고 눈을 감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잖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장소가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면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할 때도 똑같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항상 잘못만해서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하고 어떤 사람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선해서 항상 피해만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권세만 실행해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악을 당해서 그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또 다음날에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해서 그의 용서를 받아야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주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용서해줄 기회는 많고 받을 기회는 적을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누구나 다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세요. 하나님의 이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커다란 회귀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안에서 계속 흐르며 돌아서 당신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이 우주적인 보편교회 속에서 흐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이 쭉 흘러들어오다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 사랑이 나에게서 멈추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았는데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을 모두 버리고 단지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흘러들어온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주님의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사랑의 통로가 될 때에 우리는 그렇게 흐르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커다란 악을 행한 적이 없어도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몸의 한 지체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가 옳고 그름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가 막힘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타투고 싸워봐야 그게 뼈 속 깊이 사무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늘 저녁에 투덕거리고 다투어도 내일이면 같이 아침을 먹으면서 풀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잖아요. 그런데도 기도가 막혀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아내를 사랑하면서 잘 지내라고 하잖아요. 왜냐하면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히지 아내는 남편을 아무렇게나 대해서 기도의 막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공경하는 것은 일반화되어있지만 당시의 여자는 사람의 숫자에도 치지 않았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이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성들을 존중히 여기라고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의 지위가 이만큼(이만큼이 아니라 지금은 남자들을 능가해서 남자들이 불평등하다고 그러지요.) 된 것에는 사실 기독교의 공헌이 커요.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할 때 왜 주님께서 이렇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느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기도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할 테니까 어떤 것이 맞는지 답해보세요. 마음속으로는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떤 좋은 일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쉬워요? 아니면 내가 악을 행하고 죄를 지어서 큰 손해를 입힌 그 사람을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이 내 마음속에서 풀어주는 것, 용서해주는 것이 쉬어요? 전자가 쉬어요? 후자가 쉬워요? 전자가 쉬워요! 그래서 전자는 우리들이 위선이라고 그렇잖아요. 우리가 거짓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기에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한 사람을 그렇게 집요하도록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악을 행했어요. 우리는 고통을 받았잖아요? 그때에 우리의 위로는 뭐냐 하면 그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복수는 금지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그것을 자신이 너무 잘 알잖아요.
여러분 죄에 대한 교리를 배울 때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았어요? 상상 속에 짓는 죄는 왜 그럴까? 그것은 자기 안에 품은 죄의 욕망을 밖으로 실현할 때 방해물들이 있어서 그것을 못할 때에 그 죄에 대한 상상을 계속 한다고 가르쳐 드렸어요. 그러면 똑같이 그런 미움이 우리 속에서 계속되는 것의 정체는 살인입니다. 살인. 살인의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는데 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는데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이 밖에 있는 행동과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연장선상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는 여기서 나타나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위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용서해주는 이것은 우리의 커다란 위로를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큰 죄를 짓고 악을 행했을 때에 그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미워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살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아 가버렸을 때에 그로부터 손해를 입고 고통을 받은 자신은 위로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한번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그 미움의 힘은 사랑의 힘보다 훨씬 집요해요. 사랑하던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미워하는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말에도 이런 것이 있잖아요. 사람이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힘으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줄 때에 우리들이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내게 달라고 간절히 빌면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용서하시기 위해서 지불하신 그 고난의 크기와 넓이 그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느끼시는 그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 막 고통을 받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영적생명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번도 응답이 안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용서하기 위해서 내게 은혜를 달라는 기도. 그것은 한 번도 응답되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누군가를 마음에 미워하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은혜를 절실하게 구하면서 그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선택을 안 하는 것이 문제지요.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도 곰곰이 돌아보면서 먼저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려고 하는데 그 날개에 수많은 줄이 달려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 사람들과 묶여있는 상태로는 하늘을 향해서 우리의 영혼이 날아오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깊이 용서하면 그 용서는 사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한 베풂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끊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용서하면 하나님이 은혜의 문을 열어주셔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경회의 첫날 첫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묶여있는 줄들을 모두 끊고 어차피 우리는 사람을 보고 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 한분을 보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할 때에 우리 마음의 티끌만큼이라도 묶인 것이 있다면 오늘 마음에 깊이 그를 용서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흐르는 통로가 되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헌신한 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큰 은혜를 받을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4 (201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2.용서하지 않는 마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품고 계신 우주적인 재창조의 원대한 계획을 1장에서 4장 사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4장부터 마지막6장까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흠이 있는, 아직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한 교회의 흠이 있는 지체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이 교회는 마지막 날에 하늘과 땅에 있는 두 나라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전한 통합을 이루고 그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고 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될 그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미리 맛보고 또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비밀은 이 교회와 관계를 맺으시고 이 교회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펼치면 이 세상과 교회가 나오지만 그런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면 이 세상이 마지막 날에 어떻게 재창조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교회라고 하는 종자 씨가 자라면서 결국은 꽃이 활짝 피고 열매를 맺으면서 그 아름답게 발아하게 되는데 그 교회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고 죽고 활짝 발아한 것이 재창조된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결국은 모두 완성될 때에 사실은 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세상은 지금처럼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고 끊어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그런 종류의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이 세상의 재창조의 전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고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새롭게 거듭나도록 만들어주셨고 또 그렇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간구하면 수시로 진리와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그 사람들 안에는 지워지지 않은 죄의 오점과 그리고 불결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추루한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아래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억눌려지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것들이 발산해서 사람들 속에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갈등이 되고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고 그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이루어질 영원한 하늘나라의 전망을 바라보면서 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적절히 멸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진리와 은혜의 영향아래 있을 때에는 영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계신 곳이 바로 그 영원한 나라이고 그 영원한 나라에서는 이 시간과 그리고 한정된 공간의 나라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주님을 향한 온전하지 못한 사랑을 벗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이 갈등이 많은 세상 이후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서로가 갈등하고 미워하는 일들이 적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은 영원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영원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의 인생을 보되 이 자기가 이 세상에 오기 전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완성되어질 영원한 세계에까지 거기에 한 점 구름처럼 떠가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때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되는 그런 마음의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오히려 나에게 개인적인 기도가 되는 것처럼 이렇게 그 다른 사람의 기도가 나의 마음속에서 공동체의 지평을 타고 나의 마음속에 나를 위한 절실한 기도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이기심이 상당부분 분쇄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이 분쟁하고 다투는 모든 이유가 내가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보는 것에 대한 이해관계의 득실에 대해서 그렇게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저 사람이 높은 것 같고 내가 낮은 것 같고 그것이 부당한 것처럼 느껴질 때에 자존감이 상하고 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심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이것들이 어느 정도 분쇄가 되요. 그래서 갈등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분쇄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있게 되면 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이 불완전한 교회의 교인들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준 것같이(이것은 과거로 나와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것은 현재로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렇게 용서하는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 우리는 더 많은 잘못들을 용서받게 되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이렇게 함께 마지막에 인간과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사랑의 교통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게 되는 이런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 영광스러운 나라의 상태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삶의 질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이 다 없어졌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는 엿장수가 오면 동네 애들이 좋다고 뛰어나갑니다. 그래서 애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으면 이 아저씨가 일장 연설을 해요. ‘떨어진 고무신, 신문지, 못 쓰는 양은그릇을 가져오면 엿을 많이 줄게.’ 그러면 애들이 많이 따라와요. 그리고 엿을 깨뜨려서 요만큼씩 입에다가 넣어줘요. 그것을 맛보면 애들이 미치는 것입니다. 엿장수가 한번 왔다 가면 동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욕이 나오고 얻어맞는 소리가 나요. 낮잠 자는 할머니의 고무신, 개 밥그릇, 씻으려고 밖에 잠깐 내놓은 냄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엿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가서 바꿔먹어요. 이 엿장수들은 오랫동안 장사경험을 통해서 이 아이들에게 엿 한 조각을 넣어주면 고물을 안 가져오고는 못 배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형이 보는 책까지 다 갖다가 엿을 바꾸어 먹어요. 그렇게 맛있게 먹고 저녁때 좀 되게 두들겨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그 날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 맛보기로 그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삶의 질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먹고 마시며 살게 될 그 아름다운 나라의 삶의 질을 사모하면서 그러면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를 구성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미리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맛보기가 뭐냐 하면 바로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자기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용서하는 것이 있습니까? 정말 용서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잘하다가도 한번만 잘못하면 죽어라 하고 벌떼처럼 일어나서 비난을 퍼붓고 한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뜸한데 지난 2, 3년 사이에 연예인들이 줄을 지어서 자살했잖아요. 무엇이죠? 무엇 하나를 잘못하면 인터넷에 비방의 글을 올려요. 악의적으로 파고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그 사람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지겹도록 미워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마음에 오래 품으면서 늘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현저하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르면서 늘 마음이 편하지 않게 간직되는 몇 안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 이게 참 나는 내 마음속에 ‘내가 미워하는 것인가? 지들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무슨 자기들을 잘못되게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도로 만족했는데 말씀을 준비하다보니까 그런 마음도 썩 좋은 마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 덧붙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주님, 잘못했습니다.’ ‘아이 됐다.’ ‘잘못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정말 잘못했어요.’ ‘쯧, 알았다니까! 그만하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꼭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됐어.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니까. 괜찮아 내가 복수하지 않을 테니까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잘못했다고 진실하게 빌면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진심으로 용서하시고 그리고 사실 그 용서를 받고나면 용서받지 못했을 그 옛날보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더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경험함으로써 주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 무관심은 가장 커다란 복수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가까이 지내다가도 무엇인가 갈등이 생겨서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이 다가가서 칼로 찌르거나 따귀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친했던 사람인데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대하잖아요. 일종의 복수란 말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실 때에 먼저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용서해주셔서 사랑을 입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찢어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의 일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의하면 서로를 용서하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서로 용서하기를…….’ 이게 돈은 많은 사람이 계속 없는 사람에게 꾸어주지만 이 용서는 그렇지 않고 오늘은 내가 저 사람에게 용서를 받는데 내일은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는 그런 잘못에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서로 용서하라.’ 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가 그렇게 좋은 것인데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그렇게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풀어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여기에 두 가지로 나오는데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이렇게 나와요. 이 단어가 참 특이한 단어입니다. ‘인자하게 하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자주 잘 용서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은 갈등과 문제가 생겨났을 때 아주 쉽게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하다는 말이 사랑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크레스토이’ 라는 희랍어단어인데 이것은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크라우마이’ 라는 단어에서 나오는데 ‘크라우마이’라는 단어는 이용하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늘 활용하고 나의 신세를 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런 경우가 있잖아요. 뭐가 부족하면 가서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내가 고통을 받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사람한테는 절대로 도움을 받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그 자체,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나를 높이 평가해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네. 김남준 목사입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 아무개 목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잘 지내세요?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목사님! 목사님이 이번에 쓰신 이번 책 있지요? (그게 자기 깨어짐인 것 같았어요.)’ ‘네 있습니다. 그것 30권만 보내주실래요?’ ‘책을 사시려면 서점으로 전화하셔야하는데…….’ ‘아 살게 아니라 그냥 30권만 보내주세요.’ 아니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서점에서 사야하는데……. ‘왜요?’(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저 다음 주에 우리 교회에서 우리 동창들이 모이거든요.’ ‘그러세요.’ ‘그때 목사님 책을 한권씩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아니 내가 내 동창도 아니고 자기 동창한테 왜 한권에 만원씩인 책을 내가 거저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나도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데……. 저도 경우하면 한 경우 하거든요. 그래서 말이 목까지 딱 올라오는데 그런데 목사님!(말은 부드럽게 하려고 했어요.)제가 왜 목사님 동창에서 책을 30권씩 나누어주어야 하지요? 그런데 속에서 은혜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참아라. 그분이 너를 그래도 좋아해서 전화했는데 그러면 되겠느냐? 주님의 응답이라고 믿고 ‘아유 목사님! 그럼요. 제가 보내드려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30권이면 되요? 혹시 더 오시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30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더니 미안했던지 ‘목사님 택배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됐거든요.’ 책이 도착되어 받으셨을 때 아 이것은 김 목사가 나에게 보내주었다. 이렇게 말씀하실 텐데 택배비는 내가 냈다.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다 마음속으로 하는 이야기에요.) 책을 보내면서 마음을 바꾸니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보기에 내가 무르게 보였나보다.’ 아까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자존심이 상해서 ‘제가 왜 목사님 동창한테 책 30권을 보내야지요?’ 그 말이 목까지 왔었는데 생각을 바꾸니 저 사람에게 내가 이 정도는 부탁해도 아주 기쁘게 들어줄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으로 비추었구나. 그리고 이 목사님이 정말 자기 동창들에게 내 이름을 소개하기 위해서 이 책을 교회에 가서 많이 팔아달라고 그렇게 스스로 내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하면서 이렇게 해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니까 그분의 전화를 한 번 더 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소위 얘기하는 ‘크레스토이’ 라는 단어도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할 때 그 때에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목사님이 이 책 30권을 쌓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대요. ‘이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이 책을 쓰고 이분을 내가 잘 안다고…….’ 그 다음에 어디에선가 그분을 만났더니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요. 아 고맙다. 그때 내가 만약 까칠하게 내동창도 아닌데 내가 왜 주죠? 그랬으면 두 팔 벌리고 오지 않았겠지요? 가끔 가다가 그래 다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 좋아요. 그래서 언제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이다. 그 강물이 흙에 빼앗기니까 그 흙에서 싹이 돋고 잎이 돋고 풀이 나오고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그늘 아래 곤충들이 모이고 새들이 모이고 들짐승들이 모여서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고는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가정이든지 은혜롭게 잘 번성하는 데는 누군가가 많이 빼앗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용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가끔 경우 없고 힘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잖아요. 교회생활에서도 만나고 그때마다 이용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은 예수님이야말로 끝까지 우리에게 이용당하신분 아니에요? 그랬더니 결국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그래서 하늘 뜻을 이루시잖아요? 아멘.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으로 나오는데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에요. 뭐냐 하면 ‘불쌍히 여기고 ’그랬는데 그 단어가 ‘유스프랑크노이’ 라는 단어에요. 여기에서 ‘유’라는 단어는 좋다는 뜻이고요 그 다음에 ‘스프랑크노이’는 창자에까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할 때 바로 그 단어하고 같은 단어에요. 거기에 ‘유’라는 것이 붙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이 배 즉 창자에 있다고 믿었어요. 그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는 상태인데 그 창자가 흔들리는 경우는 두 경우이잖아요. 크게 세 가지정도 아니겠어요? 욕망에 흔들릴 때 이 창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욕망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미워할 때도 창자가 흔들리고 악을 행할 때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며 라는 단어는 ‘유스프랑크노이’는 좋은 방향으로 창자가 움직이기까지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오늘 우리 성경에서 ‘불쌍히 여기며’ 영어성경에서 Tender heart 라고 그랬어요.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소에 충분히 자기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욕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싸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절에서 스님들이 입장료니 뭐니 해서 각목을 휘두르고 피가 터지고 거기도 무섭더라고요. 교회만 무서운 줄 알았더니 거기도 무섭더라고요. 피가 흐르는데 그때에 어느 분이 유명한 스님입니다. 전철을 탔는데 자기를 못 알아보고 사람들이 신문을 딱 펼치면서 ‘에이 더러운 중새끼들!’ 그러면서 거침없이 욕을 퍼붓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이 세상은 헛되고 영원한 것을 찾아간다는 사람들이 그 입장료 수입 때문에 각목을 휘두르고 피가 터져서 철철 흐르는 그런 것들이 절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대문짝만한 사진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무슨 종교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번에 그렇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 나오니까 자기가 불자인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그래요. 그게 어떻게 남의 종교에서만 있는 일이겠어요. 또 마찬가지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 Tender heart 부드러운 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인데 우리의 마음을 딱딱하게 하는 것은 죄이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어떤 유치부에 다니는 아이가 엄마가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니까 어느 날 그러더래요. ‘엄마, 엄마가 지금 왜 그러는지 알아? 마음이 딱딱해져서 그런 거야!’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이 그렇게 연약해! 내가 손해를 보지!’ 이런 마음이 들지만 은혜에서 멀어지면 미움과 원망이 솟구치기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독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이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고 주님의 은혜밖에 없는 것이니 은혜를 받아서 그것들을 죽이고 없앨 때 그 때에 주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데서는 정죄 받고 비난받을 사람이 교회에서는 용납되고 긍휼히 여기고 세움을 받고 하면서 자기 같은 죄인을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그 마지막 날에 완성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다른 무리들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4 (201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3.허물을 덮는 사랑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4장 8절입니다. 7절부터 읽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멘.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해 주셔서 이 말씀을 통하여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베드로 전서는 흩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글머리에서 말하기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시아와 비두나에 흩어진 나그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 편지를 썼다.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바로 앞에 보면 본문 바로 앞에 보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것을 생각을 하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그대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제는 그렇게 방탕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훨씬 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근신하면서 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이제 이들에게 이미 시작되고 또 임박한 환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으로 말미암은 핍박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변절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서신 속에서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토대로 소망을 굳게 하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지속되는 삶에 의하여 끝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힘 주어 강조하면서 이제 우리가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가 오고 시련과 환란이 오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큰 사랑을 덕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내적인 이 유혹에 직면할 때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열심히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신앙의 박해와 핍박을 당할 때에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그러한 핍박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사랑은 그렇게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실은 사람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도의 교제를 통로로 자신들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에, 우리의 경험을 되새겨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넓은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랑을 알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반드시 사람을 통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를 돌봐주는 영혼의 목자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거듭남과 성장을 자기의 영혼의 문제인 것처럼 간절히 기도해 주던 지체들, 그리고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의 육체의 문제들까지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자 물질과 시간과 그리고 재능을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만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이는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렇게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체들을 통해서 알게 될 때, 결국은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사랑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열심히 사랑할찌니. 라고 사도가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이 신앙의 모든 힘을 나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모든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홀로 소유하고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 쓰기 위함이 아니라,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교회의 지체들이 그 성령의 은혜 안에 있게 될 때, 무엇이든지 활발하게 흐릅니다. 물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나누고자 하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무지한 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그리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 때문에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각각 다르게 주시는 것들이 서로에게 통용됨으로써 서로서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재능은 있으나 물질이 없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엔 뛰어나지만 다른 재능이 부족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각각 차별이 날 때,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그 각자는 말씀이 없는 사람이 말씀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생각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로 섬김을 받으면서 나는 약해도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 그래서 열심히 사랑하게 되어서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부유함을 누리면서 그 모든 것들을 자연으로 지체들을 온전케 함으로, 주님의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열심히 사랑할찌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매우 가난하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의 능력을 부어 주시자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이 오히려 그 모든 자원들을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섬기며 한마음으로 주님의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아주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 전도의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에 위치에 있으면서 돈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 부족했더니, 그들은 인색한 교회가 되었고, 오히려 많은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가난했던 마게도니아 교회는 형제들의 교회인 예루살렘을 돕는데 자신의 힘에 지나도록 헌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요체는 둘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고 우리의 지체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신앙의 요체이고,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주님을 향한 경외와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우리와 관계없는 이웃들,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요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랬어요. 죄를 무조건 덮어주면 안 되지 않겠어요? 죄는 적절하게 드러내어지고, 그래서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서고 이래야지만 교회가 흠도 티도 없이 주님 앞에 올바로 되지 않겠어요? 여기서 나오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할 때에 이 죄는 그런 의미에서의 죄라기보다는 각자 각자에게 범한 잘못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죄를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을 하고 우상 숭배를 하고, 이런 사람들을 우리 마음대로 용서해 줄 수 없죠. 왜냐하면 그거는 우리의 소관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지은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과 관련되 죄가 있습니다. 응?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우리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우리의 소유를 뭐 빼앗아 간다든지 아니면, 뭐 빌려가고 갚지 않는다든지.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지은 죄잖아요. 그죠? 이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뭐라 그랬냐 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랬어요. 그게 이제 저는 밤에 잘 때 겨울에는 저 이렇게 두툼하고 묵직한 이불이 이불 푹 덮고 자는 거를 좋아합니다. 근데, 어쩌다가 이제 기도원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해서 어쨌든, 뭐 드물긴 하지만 어쨌든 내 몸의 크기에 맞지 않는 이불을 덮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리를 쭉 뻗을 수가 없고 그래서 이불 속으로 자기를 맞춰야 돼요. 이리로 잡아당기면 발이 나오고 저리로 잡아당기면 가슴이 나오고 이리로 잡아채면 팔이 나오고 허리가 나와요. 똑같이 주님, 우리가 형제를 향한 충분한 사랑을 갖고 있을 때, 더 많은 사람의 허물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했을 때,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내게 악을 행하거나, 잘못했을 때, 그것을 자기가 넓고 큰 사랑으로 덮으면 덮어져요. 그런데 그렇게 덮지를 못 하고 그것을 상한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거나, 혹은 그에게 복수를 하게 되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잘못이 있을 때 내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잘못이 내게 와서 멈춰. 그리고 여기서 용해돼요. 끝나. 그런데 내가 그것을 용납하고 이해하지를 못 하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불편한 것과 독한 것을 흘려보내게 될 때 그러면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다른 지체들에게 전달하고 교통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 미움이 내 마음 속에서 나를 흩어놓고 이것이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악을 갚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사랑과 주님의 복을 흘려보내야 할 통로인 내가 나를 통해서 악한 말이 흘러져 가고,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인상과 평판을 심어 주어서 그들도 그를 경계하거나 미워하게 하고, 그러면서 그것이 꼬리를 물고 계속 흘러가면서 처음에는 그 사람과 나만의 문제였는데 이게 공동체 전체에 문제가 되도록 휘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교회에서 보면 시험이 되는 것이 결국은 말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뒤로 넘어가면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꼬리를 물면서 문제를 일으키잖아요. 사랑은 이것을 덮을 수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아직 모두 완전한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에서는 그런 걸 용납해 주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이 용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교회에요. 그래서 부족한 사람들은 그 주님 사랑으로 지체들에게 용납을 받으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잘못된 죄, 나를 향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밀려오지만, 내가 그것을 용납하고 그리고 그것을 깊이 끌어안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예수님의 교훈에 어떻게 나오냐 하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커다란 잘못을 지었다. 그럴 때에는 동네방네 저 사람이 지은 죄를 소문을 내서 그래서 인민재판 하듯이 처벌을 하는 것이 교회의 원리가 아니에요. 그것을 예수님께서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일대일로 상대해서 ‘네가 이러이러한 죄가 있지 않느냐.’그것은 이제 자기 개인의 죄도 해당이 되겠지만, 그러나 공적인 잘못이죠. 그죠? ‘네가 이러이러한 죄를 짓지 않았느냐.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직접 봤다, 근데 사실이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근데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됐다면 그 충분한 것입니다. 말을 안 들어. 그러면 두 세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증인으로 삼아서 그에게 ‘이렇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렇게 하도록 하라.’근데 그것 또 안 들어. 근데 거기서 들어요.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근데 또 안 들어. 안 들으면 그 다음에는 이제 교회에 알려서 그래서 그를 치리할 수 있는 사람 전체가 그 잘못을 알게 해서 그래서 다시 심문하는 것입니다. 근데 거기에서 듣지 않아. 그러면 내어 쫓는 것입니다. 근데 거기서 들어. 그러면 거기에서 어 말하자면 처결을 받고, 돌이키면 그러면 다시 그를 형제로 받아주는 것이 이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형제 교정의 원리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관대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게 아니라, 죄를 정리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이것은 마치 우리 몸에 있는 어떤 잘못된 부위들을 다루는 것과 같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몸에 암세포가 있다든지, 문제가 있으면 그것들을 떼어 내어서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치료의 목적이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치료할 때는 사실은 몸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몸이 다치지 않도록 그것을 떼어내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무좀 때문에 10년 20년 고생을 하는 사람을 보면 ‘아이, 뭐 발 없다고 죽냐? 발목을 도끼로 찍어버리고 목발 짚고 다니지, 그거 어떻게 20년씩 무좀을 앓고 그렇게 사냐’ 그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은 사랑이 없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자기도 만약에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죠. 그래서 저도 무좀이 있어서 한 25년 이상 고생을 했는데, 어떤 성도가 설교 시간에 그 얘기를 듣고 약을 하나 사다 줬는데 뭐 그렇게 비싸 보이는 약 같진 않아요. 근데 그게 별로 잘 없더라고요. 근데, 어 진짜 그걸 서너 번 발랐는데 다 나았어요. 올 여름에 정말 좋게 지냈어요. 그래서 전 사시사철 면양말만 신습니다. 다른 양말 전혀 안 신고, 못 신어요. 근데 없어지더라고요. 25년 동안 그렇게 고생하고 진물이 나오고 어떤 때는 발가락 사이에다가 솜을 꽂고 자도 한 번도 그 잘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불편해도 달고 살아야지 그걸 잘라 버리면, 물론 이제 장애인이 되어서 연보가 주차도 마음대로 하고 혜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혜택 받자고 그럴 순 없죠. 똑같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충분한 사랑이 있으면 거기에서 그 모든 것들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다른 사람이 너에게 나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악하게 하고 너를 고통주어도, 네가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란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흘러 들어오고 여기에서 딱 멈추게 될 때 여기에서 다시 그 사랑이 흘러가게 될 때, 그 때 그 사랑이 휘돌아서 마치 물을 정화하듯이 그렇게 교회를 순결하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삶이잖아요. 근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이 죄된 인간의 본성에는 어울리는 일이겠어요, 안 어울리는 일이겠어요? 안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 한 번 잡지에 보니까,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화가 날 때 폭발하는 사람들은 그게 건강에 좋대요. 화가 났을 때, 폭발하는 사람들은 병이 별로 없는데,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그리고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이 이제 몸에 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앙 안에서 성화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면 암으로 죽든지, 예? 아니면 심근경색에 걸리든지 심장마비로 죽든지, 뭐 아니면 그렇게 디스크로 고생하든지, 그럴게 아니에요? 신비합니다. 이게요? 허리가 안 아프고 멀쩡하다가 속상한 일 생기면 직방 아퍼. 그 왜 그런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지만 이 모든 것들이 편한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근데 그렇지 않아요.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으로 고생을 해도 그 고생이 그 고생을 해도 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있어서 이것을 치료하고 고치는 그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있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적절하게 그 무엇인가 어려운 게 있을 때, 그 때에 이제 그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교인이 하는 한의원에 갔는데, 허리가 아프다고 그러니까, 침도 놔 주고 뭐 이렇게 이렇게 한 다음에 그 다음에 엎어놓고 온 몸 구석구석에다가 테이프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그 테잎에 무슨 그 특수 테잎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무슨 테잎이요. 특수 테잎이요?”그러니까 “여기 무슨 약이 흘러서 몸으로 들어가냐 ”그랬더니, 그거 아니고 그냥 보통 테잎이래요. 그래서 보통 테잎 같은데, 그래서 “그럼 이거 왜 붙이냐 ”그랬더니 난 무슨 테잎 요법 어쩌구 저쩌구 그런 거 있잖아요. 나 그런 거 잘 안 믿거든요. 제가 신앙적인 믿음 잘 믿으려고 그래도 그런 거 별로 잘 안 믿습니다. 근데 신기하게 안 아퍼요. 한 이틀 동안. 그래서 원리가 뭔가 그랬더니, 이 테잎을 이렇게 붙이잖아요. 그럼 우리의 몸이 이게 뭔가 해로운 것이 자기를 침투하고 있다 생각된대요. 붙어 있으니까. 그리고 뭔가 물질을 내보내고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아플 텐데 건강해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오히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면 하나님 하나님 그런 찔림과 고통이 없었더라면 안 생겼을 또 다른 은혜의 반응이 일어나서, 그래서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에도 영향을 믿어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가시 같은 지체들 옆에서 만나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 은혜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어려움을 안 당했더라면 못 받을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시잖아요. 말로는 쉽지. 근데 그럴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죠? 땅에 똥 썩은 거, 오줌 썩힌 거, 그 다음에 뭐 오물 이런 거, 뭐 야채 썩은 거, 이런 거 땅에다가 집어넣으면 그러면 땅의 지력이 좋아지잖아요. 근데 이게 너무 많아서 땅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오히려 땅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제 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정화의 능력에 달린 거란 말입니다. 그런 능력을 어떻게 공급받는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기도하라. 이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거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를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기도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은혜를 받을 때,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기쁘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거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의 힘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허다한 죄를 덮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 있는 이 교회 속에서 나쁜 것들은 내게서 멈추고 좋은 것들은 나를 통해 다른 지체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교회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순결한 충만을 가득 채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그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날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온 마음을 다해 우리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 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함께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크고 그 넓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주님의 그 뜻을 모르고 아버지 앞에 아무렇게나 행할 때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을 드려 주를 따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 용서해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 오늘도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들은 약하고 아버지 하나님 부족하오니 하나님 아버지 굽어 살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은혜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 우리를 불러 주시고, 택하여 주셨사오니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전능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크신 은혜로 새롭게 해 주셔서 저희들이 지체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고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흘려 보낼 수 있는 공동체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고아와 같이 저희들을 버려두지 마옵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연약한 지체들 하나하나 주님이 그들을 품에 품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그 분을 품어 주 앞에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하오니,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4 (201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4.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 5:15).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제5장 15절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5절 다시 보겠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어김없이 새날을 주시고 이 날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이처럼 경배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예배 드리는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가득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도바울이 쓴 모든 편지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살아가야 될 삶을 가르쳐 줄 때에는 반드시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 며칠 동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마지막 때가 다가올 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 모든 우주의 우주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계획하고 계신 것들이 드러나게 될 텐데 그 때까지 교회는 이제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속에서 아주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굳게 붙어 있고, 성령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배우고, 사랑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사귐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신자의 마지막 때의 소명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김없이 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편지 글 끝에 이제 사도바울은 교인들에게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주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요동하고 그리고 오히려 임박한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게 신앙의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는 어느 날 누구도 알 수 없이 덫 같이 임하게 될 거다.그러나 우리는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 가운데 있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도적과 같이 그 날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그 날과 시는 모르지만, 매우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근신하고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소망을 갖는 가운데 좋은 믿음을 가지고 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사람들이 되자.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남에게 악을 당할 때, 어떻게 사는 것이 다시 머리되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몸의 첫 열매로 접붙여진 신자답게 사는 길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을 염두에 둔 것은 아마도 제일 먼저는 박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복음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할 때, 그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그렇게 큰 고통과 박해를 당하게 될 때에, 그 고통과 박해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인내하다가도 그렇게 자신들을 악의적으로 박해하고, 삶의 평안을 빼앗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리고 그에 합당한 악으로 갚으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를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겠어요?
또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거는 다시 또 둘로 나뉘어지겠죠? 교회 안에 있는 사실상 불신자들, 그래서 신앙이 변절한 사람들, 또 변절하기까지는 아니하였지만 이제 교회 안에 있지만 실상은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영혼과 마음 속에 중생한 사람으로서의 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관된 방식으로 악을 행하는 가운데, 그렇게 신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의미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는 거듭났지만,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지거나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혈기나 이런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많은 악을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거나 교회 안에 있는 사실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나 말씀에 대한 복종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악이 쏟아져 나오기를 마치 뱀이 무엇을 물면 저절로 독이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은혜 상태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지 간에 그런 악을 우리들이 당하게 될 때, 우리는 굉장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악을 당할 때 그 악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악을 당할 때에, 우리가 자연적으로 생각한다면, 악을 행할 때 그 받은 악 만큼 악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게 하라. 그러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악이든 선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고 교통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가 어떤 악한 일을 당하였을 때,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당한 악을 인하여서 누군가를 비난하게 되면 둘 중에 하나지 않겠어요? 그렇게 악을 당해서 억울하고 고통스럽다는 사람에게 동의를 하여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한 사람과 함께 연대를 이루어서 미워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악을 당했다고 고통을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동의를 하지 아니함으로 오히려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한 사람의 편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악을 당했을 때, 그 악을 악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내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용도에 따라 좀 다르겠죠. 악을 이야기해도 우리에게 경계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런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혹은 그런 악을 행한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좀 다른 경우겠죠. 그러나 악을 악으로 받아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많은 이야기를 보태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향한 더 큰 미움과 반감들을 갖게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악을 악으로 갚을 때, 그 악은 아주 놀랍게 전파가 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 의식에 대해서 통계가 나왔어요. 뭐냐면 직장 다니면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 그럴 때, 물론 이제 돈을 많이 주고 그럴 때 기분이 나쁘지가 전혀 없겠지만 그것보다도 상사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 그 때가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물어봤어요. 칭찬을 받을 때 어떤 식으로 칭찬을 받을 때가 제일 좋으냐 그랬더니,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사람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을 때 가장 좋아할 거 같죠? 근데 그렇지가 않고 왜냐하면 그러면 미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요.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아주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때가 기분이 제일 좋답니다. 어?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는 거짓으로 짐짓 계획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자기 없는 데서 이야기를 했는데, 극구 칭찬을 했다면 그것은 상사가 자기를 향해서 정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인정해 준다고 하는 증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뻐하게 된다. 그런 이야깁니다. 꼭 같이 이러한 선은 자꾸 흘러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다가도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흔들리게 됩니다. 그것이 반복될 때, 그런 생각이 바뀌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끊임없는 전파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 전체를 갈등과 미움으로 가득 차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둘 사이에 관계든지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관계이든지 간에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선을 좇으라. 그래야지만 악이 악을 전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제, 그게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움이기도 하지만, 또 긍정적인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인간의 양심 속에는 우리의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이라는 율법이 있어서, 자신의 행위를 달아볼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행위까지 달아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 내게 이런 일을 행하게 될 때, 저 사람은 이러한 죄에 해당한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정확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기적으로 작용을 하죠.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달리오의 법칙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법의 형태를 보면, 법의 형태를 보면 맨 처음에 그 인간에 대해서 행위를 규율하는 법들이 나와요. 뭐 고조선 시대에 그 팔조법금이라든지, 로마시대 이전에 있었던 그 12표법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와요. 거기에 보면 그 원리가 이집트에 있는 법이든지 누가 짜고 한 것도 아닌데 똑같은 법칙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보복의 법칙입니다. 몸을 상하게 한 자는 그의 몸도 상하게 할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자도 죽일찌니라. 이렇게.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서 이집트의 그 법도 유명하잖아요? 누가 누구를 때려서 눈을 상하게 하면 그 사람의 눈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주먹으로 쳐서 이빨이 두 대가 부러졌다 그러면 정화하게 두 대를 깨뜨려서 옥수수를 부러뜨리는거라 이것입니다. 네? 그리고 이제 실수로 했을 때에는 곡식으로 배상하고 이런 식으로 이제 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인간 속에 그런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캄캄한 시대에 그리스도를 통해 펼쳐진 경륜 안에 교회가 나타나고 교회가 펼쳐지는 경륜 안에 우리 모두 한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께 다시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언약 백성들로써 이 세상에서 다르게 나타나야 할 이유라 이 얘기에요. 그래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고 살아가는 것은 교회를 통해 펼쳐진 삶이지만, 그 삶이 세상에 있는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이제 이렇게 될 때, 그래서 이제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읽은 바로 뒷부분에 우리가 아는 유명한 바울의 세 가지 권면이 나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나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만약에 아무리 많이 기뻐하려고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하고 감사하려고 노력을 해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누군가가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마음이 접혀 있고, 그를 마음 속으로 악으로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다는 거죠, 항상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갈라지지 않은 일치한 마음이어야지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덕스러운 행동들입니다. 기뻐하는 것도 마음 깊은 곳 영혼으로부터 우러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도 나뉘어지지 않은 진실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도 일치하게 하나로 묶어진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빛내면서 사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생활의 지침이라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우리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악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쩌면 그 악은 우리의 실수나 잘못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양보해서, 혹시 우리가 애매하게 이웃이나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은혜에서 물러간 사람들에게 그런 악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 악을 가슴에 품고 또 다른 악을 꿈꾸게 되면 기뻐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그것은 곧 성령 안에 있는 사랑의 교통 속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용서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악을 행한다면 악을 행함을 당한 그 사람보다 더 해로운 것이 그렇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생겨난 것입니다” 그랬어요. 이것을 가리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포에나’ 죄벌이라고 이름을 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려고 마음을 품을 때, 이 마음의 굽음이 생겨나서 이후로도 자기 자신의 마음에 묶인 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악의 경향성이 마음속에 강화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선의 혜택을 받은 그 사람보다 더 먼저 더 좋은 것이 선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생긴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은혜의 성향입니다. 은혜의 성향. 그것이 마음 안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감동적이지 않아요 그죠? 우리가 누구에게 악을 행할 때, 악을 당한 그 사람보다 더 나쁜 것이 악을 행하려는 우리 안에 이미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예수 죽은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의 큰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25년 전의 일인데요, 어느 교회에서 권사님들이 모여서 철야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권사님들 연세 많이 드신 권사님들이 교회에서 지내시는 분들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그냥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그러는데, 칼을 든 강도 하나가 들어왔어요. 하도 먹고 살 수가 없고 배가 고프고 힘드니까 교회에 칼을 들고 들어온 거야. 그러면서 이제 돈을 내 놓으라고 그런 것입니다. 뭐 밤중에 기도하러 온 노인네들이 그 가난하던 시절에 무슨 돈이 있겠어요. 칼을 겨누면 벌벌 떨 줄 알았더니, 태연자약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 참 이상하다. 그러니까 뭐 자기를 해치려고 그러지 않으니까 뭐 위협을 할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권사님들이 우리는 교회의 권사들이고 나이든 노인들이 와서 기도하는데, 무슨 돈이 있겠냐. 그러면서 이제 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모아서 그 뭐 몇 푼 안 되겠지만, 밥이라도 사 먹고 어디서 잠이라도 자라고 그렇게 이제 그 강도의 손에 들려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뭐 복면을 하고 들어와서 이제 그 기도실에서 그 난리를 치는데, 복면 뭐 복면을 하고 있냐. 우리가 신고 안 할 테니까 그저 좀 쉬다가 가라. 날도 추운데 좀 쉬다 가라. 이제 강도도 아무리 봐도 이 사람들이 자길 해칠 것 같질 않거든. 그러니까 날도 춥고 하니까 거기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때 이제 권사님들이 죽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그 강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됐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선한 행동들은 악인의 마음을 녹입니다. 망치와 불이 녹이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한 행동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방법은 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양심은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 양심에 스스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하고 악을 악으로 갚을 때에는 돌이킬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을 보면서 오히려 주님께 돌이킬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도 흘러가고 사랑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그 사랑의 원리를 좇는 삶이 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 주셔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오늘 말씀을 붙들며 하나님 우리의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악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선대할 수 있도록 특별히 교회에서 가까이 있는 이웃들에게 내가 더 많이 희생하고 그들의 악을 선으로 갚아 다시 머리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함께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그 큰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새롭게 해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힘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힘 주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갚으며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도구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힘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날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힘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사랑으로 가는 용서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4 (201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사랑으로 가는 용서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집회)
5.지체에게 분노할 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제4장 26절과 7절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다시 한 번.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아멘.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하며 새벽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도바울이 이제 1장부터 3장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 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론의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경회 기간 중 말씀 드린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펼침이고 교회는 또 이 세상의 펼침이 되어서,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이 모든 세계에 대한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4장에 들어와서는 그 모든 사유의 초점을 교회에 맞추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바와 같이 주님께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와 이렇게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신 것이 성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가르쳐 주고 난 다음에, 이제 그 몸의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 14절 5절 이후로부터 죽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잘 믿게 한 다음에 어느 한 가지를 유별나게 잘 하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학원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양태와 본질을 잘 구분한 후에, 우리가 그 양태는 자유롭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본질을 바꾸어 놓음으로 삶의 방향이 고쳐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물론 이제 신앙을 갖게 되면 자기의 직업이나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런 직업들을 버리고 또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술장사를 하고 살던 사람이 깊이 회심한 후에 그 사업을 포기하게 되거나, 옳지 않은 사업에 종사했던 사람이 신앙을 갖고 난 후에 그 사업에 회의를 느끼고 이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되는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해서 사업 하던 사람이 월급 받는 근로자가 되거나, 월급 받는 근로자가 뭐 또 다른 직업을 갖거나 교사가 무슨 사업자가 되거나, 사업하던 사람이 선생이 되거나 그러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삶의 한 양태이고,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그러한 삶의 양태가 아닌, 본질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고 고치는 것이 기독교의 임무이고 그리고 사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모든 삶의 방면에 있어서 참된 것을 행하며 즉, 진리에 부합하는 생활을 해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이르도록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게 성장한 성도들이 다른 온 몸의 다른 마디와 통하여 도움을 입고 연락하고 상합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 결국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몸의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는 그렇게 살지 못 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즉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향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물 붇듯 쏟아 부어질 때 교회가 주님을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본질은 결국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받는 사랑이 그것이 총합을 이루어서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신부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앞에 교회가 순전한 신부가 된다고 칩시다. 각 사람의 믿음과 삶이 아주 순전해지는 것, 그것이 총합을 이루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순전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각 사람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공고한 연합을 이루고 그런 연합 속에서 각 사람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삶의 목표로 하여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할 때, 우리 안에 남아있는 잔존하는 죄는 그리스도를 닮지 말고 네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그 하나님의 질서보다는 네 마음에 있는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살라고 우리에게 우리를 유혹하고,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모든 교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 전체 안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죄의 요소가 있고, 심지어는 나 개인 안에도 그런 요소가 있고, 또 이 세상은 그런 죄와 유혹들이 가득해서 거기에 굴복하게 하는 요소들이 더 많고 이러한 이 세상의 유혹과 죄는 하늘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회를 집중적으로 사격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될 때, 결국 이것은 절대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기왕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이제 이 재창조될 세계의 머리가 되시기 위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면 순전하고 완전한 교회를 만들어 버리면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교회 나와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자마자 아주 찬란한 삶을 살고 심지어는 그의 육신적인 형태도 아주 아름답게 변한다면 모두 그렇게 주님께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경륜이 있으셔서 미래에 완성될 교회는 흠 없는 교회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흠 있는 교회로 남겨 두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 땅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사랑할 때에는 그 죄와 상관없이 순전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또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가지만 거기로부터 멀어질 때, 아주 부패한 교회가 되고 썩은 신자가 되는 것을 발견하면서 만약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매순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그 몸에 접붙여져 있는 한 마디인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을 거룩하신 은혜로 진리의 빛으로 붙들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채로 교회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풍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리고 나의 행동과 신앙에는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자만하여 생각할 때, 주님을 깊이 주님께 깊이 매달리는 적이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그러하든지 못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가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히 매달릴 그 때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주님과 영적인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이 영적인 교회 전체가 그렇게 주님 앞에 절실히 매달리면서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이러한 그 의존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죄의 요소들이 교회에 남아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요소들이 우리 속에 잔존해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마음에 있는 질서를 성경의 정신과는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질서는 거룩한 질서이기 때문에 혹시 누군가가 그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간직한 가운데 그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볼 때에는 그 사람을 꾸짖고 책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영혼의 어두움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그 사람 마음에 더 크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가 자의적으로 생각한 질서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강요될 때, 교회에 있는 수많은 다툼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오늘 여기에서 사도는 그런 교회의 온전한 모습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분노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분노는 여기에서는 정당한 분노냐 정당하지 않은 분노냐 하는 것은 여기서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당한 분노이든 정당하지 분노이든지 간에 분을 내게 되면 그것이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분노하게 되면 그 분노 속에는 자신이 분노하는 사람을 향한 미움으로 그것이 발전하게 되고, 그리고 미움으로 발전하게 되면 마음 속에서 그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깊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시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고 나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데, 이렇게 한 몸을 이루면서 그 몸의 요소인 한 지체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는 생각을 품게 되면 그것은 곧 몸 전체이신 그리스도에게 대한 원망이고 불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는 일이 연약한 인간이니까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너의 마음 속에서 사람을 향한 미움으로 발전하여 죄를 짓지 못 하게 하라.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대한 미움으로 진전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한 번 화를 어 결코 화를 내는 적이 거의 없지만 그러나 한 번 화를 내고는 화해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여러 번 화를 내고 금새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분을 내는 일이 없을 수 없더라도 해가 지기까지 그것을 품지 말라는 것은 그 분노가 마음 속에서 지체들을 향한 미움, 하나님을 향한 원망, 자기의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까지 발전하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해가 지기 전에 그 분을 떨어 버리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마음에 오래도록 분노를 품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늘 감사하고 기뻐하고 작은 일에도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끊임없이 희망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소망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정신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파고들면서 그 좌절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한 번 받은 상처를 오랜 세월동안 씻지 않고 가슴에 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이런 일들이 생겨나고, 이런 작용들의 상당한 부분이 마귀들의 역사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밝은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고 불행하고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결국은 내가 믿음으로 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 반응을 하면 하나님은 정말 아름다운 그런 섭리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 때, 우리들이 어 마귀가 틈타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그 더러운 것들은 더러운 장소를 찾아요. 그래서 이 더러운 벌레나 균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 서식하기 좋은 장소를 찾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집 안에 벌레나 이런 것들이 있을 때에 온 집안을 벌레가 못 들어오게 그 저기 쇠로 만든 모기장 같은 것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깨끗하게 해 놓으면 벌레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우리 학교 다닐 때 보면 파리 잡아 오라고 그러고, 우리 학교에선 안 그랬는데 다른 학교에서는 쥐 잡아 오라고 그랬대. 쥐를 잡아서 꼬리를 잘라 가지고 그것을 파리를 잡아다가, 그 성냥각에다가 뭐 두 개씩 잡아오라고 그러면 그거를 마당에다 쌓아 놓으면 정말 그 한 반이 쌓아놔도 그 반자루는 밀가루 자루 반자루는 돼. 어디가든지 숙제할 수 있는 파리가 많아. 숙제 내 주면 저희 할머니가 파리채 들고 하루만 방에서 두드리면 수없는 파리가 나와요. 지금 파리 없죠. 여기에 맨 처음에 교회 여기 왔을 때,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다 풀밭이었거든요. 그냥. 공장 부서진 풀밭, 그리고 여기 벤처다임 있는데 6000평 이런 게 전부 다 풀밭이었어. 뭐 모기떼가 이 모기가 11월이 되도 안 없어지는 것입니다. 요새 모기 보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전부 다 없어져 버리고 건물들이 들어서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 들어오지 못 하게 해 달라고 간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응?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겠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렇게 교회가 이렇게 미래에 이렇게 놀랍게 펼쳐질 것들에 대해서 마귀가 다 알진 못 하죠. 다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리가 없죠. 잘 모릅니다. 천사보다도 그리고 마귀보다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성경을 믿는 우리 신자들이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눈 이런 이야기를 마귀는 잘 믿지 못 해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그러면서 나아가는데 그러니까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그 모든 계획을 완전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한 거 하나는 이렇게 진리와 사랑 안에서 연합을 이루는 이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인 것은 알고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나라에 반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양산된다는 것은 너무나 알아요.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사실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물 붇듯 쏟아 부어지는 애정의 대상이 되지만, 마귀에는 혐오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의 영적 전쟁은 영적 전쟁의 전선은 옛날같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든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교회의 그 경계를 중심으로 강한 말하자면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성도들이 이 세상과 맞닥뜨릴 때 우린 거기에서 피나는 영적인 전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 불신가정에서 그냥 똑같이 불신자로 살아갈 때에는 몰랐는데, 진실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그 가정이 영적인 전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곳에서도. 지금도 마귀는 끊임없이 교회를 간헐적으로 공격해서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주고 거짓을 말하게 하고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망가뜨리기 위해서 강력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아마 교회는 오래 전에 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악한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교회를 위해서 쓰시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몸을 온전케 하시는 기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주님 앞에 매일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죄가 남아 있고 지체들 안에도 남아 있고 교회 안에도 그런 불완전한 죄의 요소들이 남아 있는데, 어디에 간들 우리에게 갈등이 없겠습니까? 더욱이 지체들이 나에게 악을 행하여 나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어떻게 보면 그 분노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무엇으로 말미암았든지간에 그 분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데로 발전하고 그리고 마귀에게 교회의 일치와 사랑을 깨뜨릴 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기에게 악을 행한 지체를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용서하고 주님이 나에게 일어나는 이 괴로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꾸시려고 하는지 그리고 내가 평안했더라면 보지 못 했을 그 무엇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시간들을 주시는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분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 내지 아니하였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을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죄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의존하고 자기가 오히려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 때문에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그 시련은 내버려 두시더라도 내 안에 있는 이런 죄와 잘못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렇게 교회가 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는 상태에요. 이것이 마귀에게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수없이 자신이 문제를 던져도 그것이 끊임없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눈이 오는데, 이제 걸어서 이렇게 교회를 오는데 싸이렌 소리가 나면서 왠 차가 막 달려가. 뭔가 그랬더니 염화칼슘 뿌리는 차예요. 그 차가 염화칼슘을 뿌리고 지나가니까 눈이 펑펑 내리는데, 그 차가 지나간 길에는 내리자마자 눈이 모두 녹아 버려요.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게 될 때, 마귀가 수없는 괴계를 눈처럼 뿌려도 그것은 그 사랑 안에서 모두 녹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모두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래 참게 됩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울 적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매일매일 살아갈 때, 주님의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전체가 결국은 주님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고, 오히려 자기가 큰 일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상이 없으실지도 몰라요.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주님의 교회가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죠. 기도하겠습니다.
같이 이 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로 주님 앞에 더 온전해지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분을 내지 않게 하시고, 또 죄를 짓지 말게 하시고, 또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온전한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으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옵나이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오늘도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하옵나이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도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저희들이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의지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매일매일 베풀어 주시는 그 주님의 은혜 때문에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아버지 앞에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 주시옵소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은혜로 하나님이 붙드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워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어루만져 아버지 앞에 세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부양하여 주옵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알아서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그 사랑과 은혜를 알아서 우리로 주를 따르게 해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아버지, 오늘도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안의 뼈 박은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우리의 죄악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거스리는 삶의 모든 성향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새롭게 해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붙들어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으로 가는 용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