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2018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8년 1월 22일-2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2월 7일
목 차
1. 사랑과 생명(요일 3:13-15 ) 2018.1.2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2. 사랑과 희생(요일 3:16 ) 2018.1.2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3
3.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요일 3:17-18 ) 2018.1.2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6
4. 진실한 사랑과 유익(요일 3:19-20 ) 2018.1.2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8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1 2018. 1. 22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저녁)
< 사랑과 생명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3:13-15)
I. 본문해설
- 사도 요한의 말년에 에베소에서 썼을 것으로 추측
-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또 삶으로 오심을 증거함
- 구원은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제하게 함
- 세상과 육체의 정욕은 참 사랑과 배치됨
- 하나님의 구원하신 사랑을 회상하고 사랑하게 함
II. 구원의 표는 무엇인가?
-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음
a. 영혼의 변화 : 죄를 버리고 주님을 사랑함
b. 마음의 변화 : 거룩함․영광․죄․용서․사랑의 감각 생김
- 여기서는 그 모든 표징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님
-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구원의 표징에 집중함
- 그것이 바로 "형제에 대한 사랑"임
- 하나님을 사랑함 : 하나님 자신+신적 사랑의 대상 포함
- 하나님에겐 자신+세상 사랑이 하나임
- 하나님 사랑은 우주적 포괄성을 가진 사랑임
- 그 사랑은 인간 사랑+피조물에 대한 선의
III. 영적 생명과 사랑
A. 생명과 형제 사랑
1. 생명으로 들어감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창조된 생명+창조되지 않은 생명
- 자연적 생명+영적 생명
-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는 원리, 힘
- 사랑처럼 생명도 하나임, 하나님
- 하나님은 곧 생명이며 사랑이심
- 자신이 지탱할 원리, 힘, 외부에 의존하지 않음
- 영혼적 존재에 영적 생명이 필요함
- 구원은 영적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
2. 형제를 사랑함
- 참 생명은 하나님을 본 뜨며 살아가게 함
-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게 함
- 왜 최초의 인간은 한 사람이었을까?
-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여기는 사회
- 인간의 범죄로써 그 사랑의 연합이 깨어짐
- 한 사람, 가정, 민족을 선택하사 구원의 길을 보임
- 언약과 함께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심
- 율법이 무엇인가? 사랑 충만하면 사랑의 규칙
- 예수를 통해 구원의 완성과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심
- 사랑할 수 있는 힘, 곧 영적 생명을 주심
- 율법은 그 이상을 이룸 : "911 신고"
- 은혜는 바로 생명의 경험 ⇒ 사랑하게 함
- 영적 생명 주심 : 하나님 사랑+사랑의 사회
B. 사망과 형제 미움
1. 사망이란 무엇인가?
- 육적+영적 생명 vs 육적+영적 사망
- 영혼의 죽음의 독특성을 생각함
a. 영혼의 생명의 독특성을 숙고함
b. 소멸, 멸절 아님 : 영혼 불멸성
c. 힘의 부족, 올바른 기능의 상실
d. 죽음은 관계 맺을 힘의 상실임
- 죽은 영혼은 하나님 향해 죽은 것
- 자기 욕망 향해서는 활발히 살아 있음
2. 형제를 미워함
- 미움은 궁극적으로 곧 살인이다
- 미움의 정체 : 비존재를 갈망함
- 이것을 심각하게 다루심 : 제단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 이는 인류 사회에서 만든 신적 의도와 배치됨
- 이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파괴하는 것
- 인류를 사랑의 사회로 만들려는 계획을 고려함
- 정의의 관념이 대두됨 → 사적 사랑 vs 교통적 사랑
- 참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서 정의를 포괄함
IV. 적용과 결론
- 인류 사회를 사랑의 사회로 만드시고 전하신다
- 구원 받은 신자의 표는 사랑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함은 하나다
- 영적 생명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
-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대항함
- 얼마나 많은 은혜를 미움 속에서 잃어버렸나?
- 힘을 얻자.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함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2 2018. 1. 23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저녁)
< 사랑과 희생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I. 본문해설
- 신자는 하나님 생명 속으로 들어간 사람
-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것임
- 생명은 주체성을 가지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임
- 미워하는 자는 생명의 결핍을 보여줌
- 우리가 서로 사랑할 이유를 제시함
II. 사랑의 원천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1. 삼위 하나님의 사랑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사랑
- 그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식 불가능
- 인간의 모든 사랑을 닮아 주어진 것임
- 그 사랑은 인간에게 어떻게 경험되나?
2. 예수 십자가의 사랑
- 성육신 하신 예수 십자가로 나타나심
- 초월적인 하나님 사랑이 예수에게서 나타남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 하나님의 사랑을 밤하늘 작렬하는 불꽃처럼 보게하심
-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역사 속에서 예고됨
a. 타락 직후부터 계시된 사랑
b. 언약을 통한 관계로써 인간에게 알게 하심
-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심
-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하나님 사랑의 경험
III. 사랑과 희생
A. 사랑을 배우며 삶
- “이로써”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 기독교가 예수의 종교인 이유가 여기 있음
- 사색과 철학에서 하나님 사랑을 배우지 못함
- 오직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십자가에서 발견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0)
- 구원과 함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음
- but 모두 알았다고 할 수가 있나?
- 신자의 삶은 그 사랑 끝없이 배워감
- 사랑은 물건과 지식처럼 저장 되는게 아님
- 은혜라는 전기로 작동되는 전열기
- 우리가 매인 그 사랑 앞에 그릇된 자기 사랑을 버림
-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함
B. 목숨 버리는 희생
-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목숨”은 인간 사랑의 마지막 대상
-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 자기 사랑임
- 모든 이기적 자기 사랑을 버릴 것이 요구됨
- 그리함으로써 신자는 우주적 사랑의 통로가 됨
- 자아에 대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의 원인
- 이기심의 짝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다
- 삭개오의 회심 : 예수사랑으로 이기심 버림(눅19:2-8)
-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속여 빼앗은…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 우리는 미움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
- but 미움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음 : 생명의 결핍
- 신자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상실하게 함
- 오늘날 깨어진 관계를 봄 : 모든 사람의 고통들
- 부부관계․가족관계․형제관계
-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용서와 사랑
-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랑을 가져옴
IV. 적용과 결론
-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옴
- 어떤 사랑은 자기에게서 나서 자신에게로 돌아감
-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와서 모든 이웃을 감싸고
그분께로 회귀함
- 긍휼의 마음에서 희생이 우러나옴
-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3 2018. 1. 24 (새해말씀사경회 셋째날 저녁)
<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7-18)
I. 본문해설
- 인간의 모든 행복은 관계의 행복임
- 아직 발달한 문명이 없던 때도 행복한 때 있었음
-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 그 사랑에 멀어진 자를 십자가로 부르심
- 예수 생애와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
- 여기서 ‘사랑’은 죽기까지의 예수 사랑에 감화된 사랑임
II. 참으로 사랑하는 것
A. 말과 혀로써가 아님
- 생명에서 멀어진 신자들의 생활을 생각함
- 사랑의 교훈은 남고 살아갈 힘은 없음
- 형제를 미워함은 생명의 결핍
- 말과 혀의 사랑은 생명이 쇠약하기 때문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행하지 않으심
- 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희생을 동반함(17)
- 당시 극상 부유층과 극빈자들이 공존함(약2장)
- 부자와 지위가 높은 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를 홀대함
- 그것은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것임
-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은 희생이 요구됨
- but, 참 사랑은 기꺼이 희생을 치르게 함
- 이는 그 형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
- 궁핍한 자를 섬김으로써 사랑이 실현됨
B. 행함과 진실함으로써
- ergo kai aledeia “일과 진심”
- 말과 혀로써만 하는 사랑을 많이 보았음
- 참 사랑의 여부는 “수고의 일과 진정성”으로 입증됨
- 사랑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임
- 이 사랑은 인정을 구하거나 실망하지 않음
-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동기가 되시기 때문임
- 자기를 배신할 제자까지 사랑하심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 하나님 사랑으로 자기를 버림으로 만족함
-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생각하라
- 망가진 관계를 고치도록 신자에게 은혜를 주심
- 그러나 생명 결핍으로 관계를 깨뜨림
- 피 묻은 칼을 품거나 무관심하게 방관함
- 사랑 없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막아 핍절하게 됨
- 행함과 진실함이 있던 첫사랑을 기억하라!
III. 적용과 결론
- 깨어진 관계를 고치도록 우리를 구원하심
-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도구로 부르심
- 다시 첫 사랑의 감격으로 돌아가자!
-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나아가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4 2018. 1. 25 (새해말씀사경회 넷째날 저녁)
< 진실한 사랑과 유익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3:19-20)
I. 본문해설
-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 속에 연합되는 것
- 생명은 주체성을 가지고 사랑하게 함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감화됨
-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인 신자의 삶
-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이 요청됨
- 이어서 사도는 참 사랑의 유익을 말함
II. 진실한 사랑의 유익
A. 진리에 속한 확신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 여기서 “…알고”는 전존재적 경험
- 확고한 삶 : 확실한 지식+살아갈 힘
- 단지 지식이 쌓임으로써가 아님
- 자신을 드려 사랑의 삶으로써 진리를 입증함
- 진리 가치 이해+진리에 속한 것을 경험함
-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거기서 나옴
- 객관적 말씀이 주관적으로 경험됨
- 신앙의 힘은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실천에서 옴
- 지금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라
B. 마음을 굳세게 함
-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 poisomen ten kardia hemon
- “…에 대해+우리의 마음을 설득하며”
- 형제를 사랑할 때 얻게 되는 유익들
1. 양심의 송사를 막음
-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a. 신자의 불완전한 삶 때문에
b. 양심의 잘못된 작용 때문에
- 양심의 기능 : 송사(기억)+정죄(율법)
-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면 회개로 나아감
- 그렇지 않을 때 우리를 서지 못하게 함
- 참 사랑은 양심의 질병적 송사에서 막아줌
- “지금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제일 큰 확신
- 이 사랑으로 양심 송사를 이기고 주 앞에 나아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2. 용서를 통한 평화
-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 그런 양심의 작용으로 때때로 요동치는 마음
- 참 사랑으로써 용서 받았음을 마음이 설득함
- 과거 죄 용서의 확신이 현재적 사랑으로 경험됨
- 기억이 있어 양심이 작용하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김
- 주께 피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의지함
- 죄의 기억이 있으나 현재의 사랑으로 이김
- 이는 인간을 향한 뻔뻔함으로 나가는 것이 아님
-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께 매달리며 사랑함
- 이로 인해 어린 아이처럼 주를 의지함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에게는 확고한 지식이 필요함
- 부지런히 성경과 교리를 배워야함
- 끊임없는 시련과 양심의 송사가 있음
-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함
- 참된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 받은 은혜만큼 사랑하라!
사랑과 생명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2018.01.2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1)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3-15)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요한 1서는 사도 요한이 형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빠르면 주 후 70년쯤 늦으면 90년 약간 안 되었을 때 쓰여 졌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이 편지가 기록될 때 사도 요한은 에베소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의 많은 도시들 중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약 오만 명의 시민이 살았다고 했으니 엄청나게 큰 대도시였고 지금도 에베소에 가면 그 당시의 도시가 얼마나 번영한 도시였는지를 흔적들이 웅장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영지주의는 동양의 신비학과 그리스 철학 기독교의 일부 내용이 합쳐져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토대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 깊은 영혼 속에 지식이 있고 하나님이 그 빛을 일깨워 지식을 온전하게 하심으로 친히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지적 우위주의에 지성주의에 신비주의에 빠진 거대한 이단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확실하게 확증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당시 사도 요한은 교회 안에 있던 형제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상황 속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2장 19절에서 우리는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었던 많은 형제들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는 요한 1서를 통하여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구원 받은 사람의 진정한 표가 무엇인지를 논증합니다. 요한 1서는 여러분이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정교한 학문적인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번뜩 빛나는 아주 놀라운 통찰들이 토막토막 제시되고 있고 그 전체가 하나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II. 구원의 표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이 생각하는 구원의 표는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과 세상이 다른 사회임을 아주 분명히 제시하고 있고 너희들은 하나님께 속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몸이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과 너희는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고 먼저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의 표를 이야기 합니다.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한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영혼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던 영혼인데 성령의 중생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중생한 영혼은 회심을 의식 속에서 경험하게 되고 회심한 사람은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겪습니다.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놀라운 감각이 생겨납니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자기가 열심히 추구했던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들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순결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이제껏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인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던 원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전에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절대자로부터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중생과 회심의 경험 속에서 근본적으로 뿌리를 이루는 것은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했지만 자신이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후회하는 마음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구원 받은 사람의 표를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 자체가 교회 안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형제들의 분열,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이 함께 교재하며 하나님 안에 아름다운 사랑의 사회를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표징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즉, 우리가 사망에 있다가 영적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라면 우리에게 표가 있을 터인데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것이 요한의 논리입니다. 정확하게 이것을 뒤집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적인 미움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확실한 표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분명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순간 그가 누구든지 그 구원이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서로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사랑하시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사회를 이룬 것처럼 똑같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들이 서로서로를 사랑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면서 인류가 증식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회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사랑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그대로 본받아 사랑의 사회가 형성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가장 중요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랑합니다. 인간의 행복도 사랑에서 오고 인간의 불행과 고통도 사랑에서 옵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른 질서대로 사랑하는 데서 인간은 행복해지게 되고 그것을 벗어나서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와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십니다.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랑의 대상은 반드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거나 그리스도이거나 사람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코코는 어떻습니까?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선의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표현할 때는 사랑해 라고 표현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좋아해, 영어로 말하면 I like you. 내가 널 좋아해. 사랑은 영혼을 가진 사물들끼리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대상은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전달되어서 인간만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오고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그 사랑을 배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사랑이 온 우주와 인류를 휘돌아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사랑의 우주적인 구조입니다.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은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만족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저 사람이 얼굴이 예쁘니까 마음이 가고 사랑이 돼, 아니면 저 사람은, 누가 그럽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인가 두바인가 가서 거기 가면 도포 자락 같은 것을 걸치면서 차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자매가 그럽니다. 저 사람들 정말 멋있어. 옆에 있는 자매가 뭐가 멋있냐? 도포 자락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털은 개복숭아처럼 났는데, 그랬더니 저 사람들이 돈이 얼마나 많은 줄 알면 너도 사랑하게 될 거야. 그럽니다. 이런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서 그 사랑을 받고 온 사랑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이탈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그것을 내 통장에 집어넣듯이 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 사랑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게 사랑을 받은 사람도 똑같이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고 온 인류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고 온 인류가 모두 이런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 인류가 일체 되어서 하나의 사랑 안에 사회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딱 한 사람만 당신이 직접 지으시고 나머지는 그 몸에서 직접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물론 하와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신체의 한 부분을 취해서 여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 고백을 모든 인류가 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죄 때문에 깨어집니다. 미움이 들어오고 살인이 들어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사랑 자체가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한 사랑에서 찢어지면서 자기의 육욕적인 사랑으로 변하면서 그 채워지지 않는 사랑만큼 미움으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온 인류의 사랑과 미움의 총합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사랑의 총합과 일치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도 얼마나 치열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우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회가 죄 때문에 깨어집니다. 하나가 되기는커녕 산지사방으로 찢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대로 뭉치면서 사회는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도 또 서로 분쟁하고 미워하고 하면서 사회가 끊임없이 분열이 됩니다. 그런 세상이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천당을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우선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후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만드시고 싶었던 그 사회를 이루면서 살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평생 보여주신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 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 예수님이 일평생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마치 물밀 듯이 들어오게 하셨는데 그것은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렇게 모든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될 것인데 그때까지 하나님이 그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주셨는데 그 사회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실 사랑의 사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회가 교회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일까? 또 무슨 힘을 가지고 저렇게 살아갈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표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에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반성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재판장 앞에 서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는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기독교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참된 신앙이 무엇일까? 어디서 우리는 미끄러졌고 교회는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면서 참 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 앞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랑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샘플로서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의 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표입니다.
III. 영적 생명과 사랑
사도 요한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영적 생명과 사랑을 연결 지어서 설명을 합니다. 영적으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 쉽게 얘기해서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 영적으로 사망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A. 생명과 형제 사랑
1. 생명으로 들어감
그는 먼저 생명과 형제사랑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앞 절에서 구원이란 사망에서 옮겨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구도 생명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누리는 생명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계속 가면 마지막에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런 대답이 성립을 안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스스로 계시게 해 주는 것이 생명입니다.
신학자들은 생명을 둘로 나누는데 창조된 생명과 창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나눕니다. 창조되지 않은 생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생명입니다. 나머지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런 나무가 잘려서 물에 꽂혀 있어도 계속 물을 주면 잎이 피고 꽃이 계속 맺힙니다. 물 관리를 잘해주면 잘라 놓은 나무 가지에 뿌리가 납니다. 물을 계속 빨아들이고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잎이 나오고 꽃이 피는 작용을 계속 합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생명은 자신을 살아 있도록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은 이 생명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쯤 되면 생명이 사라지고 죽어 버립니다. 우리는 왜 죽는지 원인은 찾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생명과 죽음 사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합니다. 어느 날 생명의 기운이 다합니다. 생명이 서서히 감퇴하면서 볼 수 있는 시력, 말할 수 있는 혀 놀림, 이런 것들이 사라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생명의 작용이 끊어지면 호흡이 멈추면서 우리 몸은 사늘하게 식어가고 몇 시간 후부터는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비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왔을까? 어떻게 떠날까? 그것이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마치 살아 있도록 지탱해 주는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그렇게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모든 생명을 창조된 모든 생명은 창조되지 않고 원래 있는 생명이신 하나님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힘입어서 기동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런 것인데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육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그것으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든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결정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할 때 그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속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슬프고 기쁘고 가슴 아프고 눈물 나도록 슬픈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해석해 내고 오늘 일어난 작은 일 하나 때문에 마치 인생 전체가 활짝 편 것처럼 낙관하거나 혹은 일어난 가슴 아픈 일 하나 때문에 인생이 끝난 것처럼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필요한 것이 영혼의 생명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왜 죽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육체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육체의 죽음은 물질이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지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이 죽음입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하나님이 불멸하도록 지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영혼의 시작은 있지만 하나님이 한번 창조된 영혼은 영원히 멸절되지 않도록 지정하셨습니다.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처럼 죽는 것은 영혼에게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왜 성경은 죽은 영혼, 죽었던 영혼, 죽은 영혼의 행실, 이런 표현을 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영혼의 살아 있는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육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보고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먹고 마시고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를 알고 교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나의 육체는 영혼에 의해서 통제가 되고 다스려지고 인도될 때 그때에 인간의 육체는 짐승의 몸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동물들의 사랑을 예로 들고 하는데 물론 동물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새끼를 끔찍이 여기는 것입니다. 낳고 바로 잡아 먹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한 동물이 자기 새끼를 위해서 아주 놀랍게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의미를 모릅니다. 그 본성을 가지고 행동을 할 뿐입니다. 엄마도 그랬고 그 엄마의 엄마도 그랬습니다. 의미를 모릅니다. 우리 코코를 봐도 마음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얘는 엄마도 모르고 아빠도 모르고 자기 형제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자기 존재의 근원을 묻는 우울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뻐해 주니까 온 세상이 자기 것인 줄 알고 불독한테도 대듭니다. 쫓아냅니다. 자존감이 충만합니다. 과잉 자존감 때문입니다. 개들은 그 의미를 모릅니다. 인간은 그런 의미를 찾아가야 되는데 찾아가기 위해서는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영적인 생명을 공급 받아서 영혼이 활기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힘을 얻을 때 영혼은 올바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이 영혼의 요구와 상반 되는 것을 원할 때 그것을 이 영혼이 통제해 주는 것입니다. 너는 그것을 원하지만 그렇게 할 때 다가 올 결과를 생각해보라. 이런 결과가 오고 이것은 결국 너에게 커다란 고통이 올 것이다. 하지 마라. 그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하면 너는 기쁘고 좋겠지만 다른 사람 생각해보라. 네가 좋은 만큼 다른 사람은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데 사람으로 할 짓인가? 이렇게 해서 살아 있는 영혼이 우리의 육체의 욕망을 마음속에서 수시로 솟아나는 이런 것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2. 형제를 사랑함
참 생명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놀랍게 유사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뜨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서로를 더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 그 생명으로서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어떤 관계인가 하면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혹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힘 그 생명의 영향력이 사랑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딱 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온 인류가 하나의 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지체로 삼으신 것도 구원 받을 모든 인류를 당신에게로 이끌어 들여 하나의 몸을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가정 민족을 택하셔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람들에게 언약과 함께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면 이루어질 사회의 모습이 율법을 통해 제시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6-39절 사이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율법 중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율법 안에는 하라, 하지 마라는 수많은 계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큰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니라. 고 하십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 보면 이 두 계명 위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걸려 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벽에 못이 박혀 있는데 거기에 걸어야지만 매달려 있지 못이 없으면 아무리 벽에 옷을 걸려 해도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때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이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계명,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못처럼 박혀 있는데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그 못에 걸려 있는 옷과 같다. 아주 명료합니다.
율법에 나오는 많은 규정들을 왜 사람들은 지키지 못했습니까? 사랑이 모자라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물 붓듯이 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당신을 의지하고 은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사랑과 생명을 통해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요새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사건들 중 하나가 있는데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자꾸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에 마지막 보루가 부모의 사랑이라고 봤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의 사랑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미 안 믿습니다. 그 사람들이 훨씬 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면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것이 911입니다. 엄마가 큰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거나 폭력을 행사할 때에는 이것을 누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보장할 수 없는 엄마 아빠의 사랑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것보다는 오히려 의심하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안전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13세 미만의 아이를 집안에 홀로 두고 외출하면 현행범으로 잡혀갑니다. 이웃집에 맡기든지 어른이 와서 있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산에 갔다가 저렇게 잘 묻습니다. 구김도 없이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린 치를 떱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한 인간이 단순히 나쁘기 때문에 쳐 죽여야 한다. 형벌을 가해서 죽여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보복적인 논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정말 생명이 없구나.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힘이 없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특히 타락한 다음부터는 더더욱 더 인간은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을 주셨지만 그 생명과 사랑은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존재이고 스스로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육체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힘,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사랑하게 살 수 있게끔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B. 사망과 형제 미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고 사랑을 이미 받았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기적인 마음도 있고 그 이기심은 형제들 간에 이익에 충돌을 일으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순간순간 형제에 대한 섭섭하고 미운 마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의 가장 확실한 표입니다. 사망과 형제의 미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1. 사망이란 무엇인가?
영혼의 독특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영혼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과는 다릅니다. 힘이 부족하거나 올바른 영혼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상태가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모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탐닉하고 살았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관계를 맺을 힘을 상실한 상태가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죽은 영혼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살지 못하는 상태가 죽은 영혼의 상태입니다. 이익을 위해서 자기 욕망을 향해서는 아주 활발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죄짓고 악을 행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서 폭력과 그 많은 범죄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형제를 미워함
사도 요한은 다소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미워하는 것마다 살인이라면 우리는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살인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는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과 동일한 크기의 죄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실제 사람을 죽인 죄는 그 사람을 미워한 죄보다 훨씬 큽니다.
왜 사도는 극단적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움의 정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미움의 정체는 비존재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너무 미워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극도에 달해서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때 능력이 되면 최종적으로 행하는 것이 살인입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도저히 그와 함께 이 세상에 살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죽어 버립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미움의 궁극적인 확장이 비존재에 갈망이고 결국 살인하는 동기와 통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미워하면 사람을 칼로 찔러서 현장에서 죽이는 것과 똑같은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죄가 결코 작은 죄가 아니고 이렇게 살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매우 큰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강력한 표현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움뿐만 아니라 미움에서 오늘 불화, 불화는 결국 미움에서 옵니다. 이것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마태복음 25장 23-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들었을 때 일반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그 자체에 아주 놀라운 효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직설적으로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무조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제사가 저절로 하나님과 샬롬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려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에 의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만능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지자들이 아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성대한 제사가 너희의 죄를 없이하거나 하나님의 샬롬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받쳐지는 제물과 헌제자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이 죽고 받쳐진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받쳐져서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물이 일치를 이룰 때 그 제사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 된다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의 가르침과 연결 선상에서 참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와의 관계가 깨진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진 사람들이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 앞에 그런 회복을 원해서 제물을 드린다면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놓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뒤에 제물과 제사 드리는 너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진 다음에 제물을 드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제물을 받고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고 하는 충격적인 가르침을 당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집요하게 미움의 문제를 논증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미움은 하나님이 인간과 인류를 마드셨을 때 그들을 사랑의 사회가 되게 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 적으로 배치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워하게 하고 그 미움을 불붙게 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깨트리고 서로를 파괴하는 것은 사단의 일로 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신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사회와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은 무슨 이단이었는지 어떠한 동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형제들이 잘려져 나가는 많은 형제들이 교회에서 잘려져 나가는 아마도 이단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목격하는 상황 속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아마 그렇게 갈려져 나간 사람들은 아주 지독하게 교회를 공격하고 예전에 겉으로라도 형제였던 사람들을 지극히 미워하는 그런 많은 행동들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망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했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지독한 미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너희는 그것을 본받음으로 너희도 또한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임을 입증 하지 말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신자에게 아주 뚜렷한 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어지는 것인데 이 영적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형제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안 되고 곤고할 때마다 자신은 쏙 빼놓고 환경의 핑계를 댑니다. 사업이 안 돼서 경제가 어려워서 집에서 애들이 힘들게 해서 등등 그렇게 돌려 버립니다. 모든 것들을 환경 탓으로 돌리고 나면 마지막 그 책임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붙여 주셨을까? 다른 사람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도움도 받는데 나하고 함께 얽힌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빨아 먹는 사람들이니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하는 원망 속에서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말씀의 문도 막히고 은혜의 열기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살인하고 커다란 죄를 지은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뚜렷하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보복의 관념이 내포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나한테 한 것 보면 나는 양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마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같이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 하는 사람들도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인내하시고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셔서 승복시키셔서 우리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빛의 자녀로 부르셨는데도 어두움을 지났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우리는 영혼의 깊은 침체와 영적인 단절 속에서도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물론 은혜를 받았고 말씀의 빛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채 위에 부은 물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미움의 죄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머물지 못하고 쏟아져 내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주시고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참 바람직한 인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여 주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마음속에 때로는 악을 품고 복수를 꿈꾸고 때로는 그들의 불행을 기대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흩어졌고 우리의 섬김은 육체를 피곤하게 할 뿐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지 못했고 우리의 마음에도 즐거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시다.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 갈피갈피에 묻어 있는 이러한 미움들을 온전히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회이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됨을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됨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2018.01.2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2)
사랑과 희생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생명은 곧 신자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생명이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말하지 말고 만약에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생명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생명을 최소한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성을 가지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신자는 끊임없이 변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립니다. 살아있으나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 생명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도 나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바지하는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으셨을 때 맺게 하고 싶었던 관계가 무엇일까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통용되어야 할 윤리가 있고 부부 사이에도 있고 그 다음에 정부와 백성 사이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의 기초가 사랑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류사회를 창조하셨다고 어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요약을 하면, 생명은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생명을 충만히 받으면 신자는 인간은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있음으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문맥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의 설명에 따른다면 형제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이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II. 사랑의 원천
그게 사랑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원래 이 모든 사랑은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인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대상이 당신밖에 없어도 당신 자신이 사랑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안에서 세 위격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그 본질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직접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영혼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사랑이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이어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어떻게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일까?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새해말씀 사경회에 참여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나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하며 내가 사랑이 없었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 사랑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되어졌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 속에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과 보호,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가올 더 큰 사랑의 그림자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분이셨으며 사람들과 어떤 태도로 관계를 맺으셨는지를 배우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배우는 방법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오직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찬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도록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명백하게 증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확실하게 증명했으면 사람들이 왜 그 증명하신 바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선물 중 가장 고귀한 선물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열다섯 살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 떠날 때까지 절대로 마음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가르침도 없었지만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 일이 나와 관계가 있다고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복음의 중요한 사실에 천착하지 않았으니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지독한 방황 끝에 스물한 살에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믿어진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나를 위해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어졌습니다. 어떤 믿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이나 탐구 때문이 아니고 심지어는 그런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복음적인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내가 당신을 멀리 떠나 방황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로 나를 다시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하늘 높이 폭죽을 쏘아 올리면 처음에는 가느다란 빛 줄기를 혹은 연기줄기를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가장 높은 곳에서 ‘팡’하고 터지면서 어마어마한 불꽃을 그려냅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장렬하듯이 폭발하는 그 찬란한 불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요한은 아주 성격이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장 절절하게 말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앞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 버리고 돌아갔지만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온 사람도 이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의 사랑의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그때는 그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그러나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절절하게 체험한 것은 성령강림사건 후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성령강림사건 전까지 그들은 친히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자고 생활하고 심지어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은 가장 어린 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기대어 그의 심장의 고동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갗을 직접 만져본 요한조차도 오늘날 여러분들이 그렇게 절절하게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의 깊이까지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성령 강림사건이 있었을 때 그때에 성령을 깊이 체험하면서 사랑이고 생명이신 성령님이 그 사람들 마음속에 오심으로 그러면서 우리들이 아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하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뼈저린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것으로 이 노년의 사도가 우리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라고 말합니다. '이로써'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을까요? 예수님 당시로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시고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복음 전도를 받고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여 위대한 기독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죽으셨을 때 도대체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그 긴 세월 동안 애지중지하며 키우신 제자들 그 녀석들마저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벳새다 광야에서 보리떡을 먹고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통 털어 보면 예수님 십자가 고난 당시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몇 명 안 됩니다. 골고다언덕까지 따라갔던 가슴을 치며 슬피 울던 여인들 그리고 그 이외에 몇몇 사람들뿐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그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태어나서 당신에게 반역하고 나처럼 교회를 떠나 그렇게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곁길로 가고 무신론을 칭송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대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한 3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저는 한 대목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벌하실까봐 걱정하시며 저들이 무지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온 인류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는 대도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을 그 악랄한 죄인들을 걱정하시며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은 '이로써'라고 말합니다. "다른 데서 사랑의 근원을 찾지 마라. 다른데 있는 모든 반짝이는 사랑은 하나의 빛인 예수 사랑에서 온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기독교가 왜 그렇게 예수라는 한 사람을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는지 그래서 왜 기독교인이라는 말 대신 예수쟁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그러한 질문 속에는 아주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었고,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하셨을 리도 없고, 부활하셨을 리 없다면 우리도 다시 살아날 소망이 없고 성령도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높이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역사 속에서 예고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타락한 후 먼저 말을 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두려움을 가지고 들어야 할 진노가 섞인 음성처럼 들리지만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아주 친근한 그런 애정 어린 언어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의 사랑은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원의 계시가 밝히 드러난 것과 같은 정도로 충만하게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나타나기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언약관계를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고 그를 따른다는 무리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을 만든 종자씨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듭니다. 눈사람 만들 때 먼저 눈을 불립니다. 손으로 꽝꽝 뭉쳐서 종자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슬슬 굴립니다. 그럼 눈이 약간 습기를 머금은 눈일 경우에는 아주 잘 묻어서 이게 커지면 굴러가면서 아예 땅바닥을 드러내면서 눈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가운데 들어있는 핵심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하게 지금 자기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부인할 수 없이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면 죽지 말아야 했고, 왜 그렇습니까? 죽은 것은 하나님이 저주해서 죽으신 것이니까 하나님이 살리지 않고는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살아났으면 하나님이 살리신 것일 텐데 살리실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었으면 죽이지 마셔야 됐고, 그리고 죽이셔야 했을 정도로 나쁜 사람이었다면 살리시면 안 되는데, 죽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살아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혼란이 찾아오다가 한줄기 빛이 확 들어온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이지요. 무얼까요? 예수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로 죽으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 죽으신 이유는 예수를 살리셔야 할 훌륭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 한 순간 그의 사상과 철학, 유대교에 대한 지식, 구약에 관한 지식과 자신의 인생의 경험, 모든 것의 한 가운데를 꿰뚫는 천지개벽하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온 땅과 하늘 위에 그리스도가 높이 계시고 그 그리스도의 손으로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고 부활하게 하셔서 이루실 새로운 인류사회가 탄생한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사회, 옛날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지만 결국은 사랑의 사회가 되지 못한 그 사회를 폐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새로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삼아서 그들을 사랑의 사회로 이루게 하실 놀라운 계획을 보면서 이 세상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그리고 온 세계의 창조목적과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잘못됐던 유대교의 편견들이 모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찬란한 불꽃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역시 그렇게 변화를 받고 난 다음에는 가슴이 저미도록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그분의 사랑이 그의 전체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고 자신을 움직인 그 모든 삶의 원동력이 그 사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수많은 이방민족과 관계를 맺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III. 사랑과 희생
A. 사랑을 배우며 삶
이것이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그 원천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 삶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에서 비롯되는 희생의 삶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자녀가 된 다음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배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로써 그것은 곧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의 종교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배워가는 삶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불순종과 죄를 통해서도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징계와 하나님의 엄한 그러한 하나님의 징책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배우는 것은 화풀이하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결국은 그것은 그런 하나님의 쏟아지는 분노와 하나님의 격한 언사조차도 그것은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짙은 사랑을, 핏빛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왜 태어났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사색과 철학, 문학 속에서 이 이치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 많은 사색과 철학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찬란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버려두고 태양 때문에 반짝이는 빛들을 보며 그것이 햇빛인줄을 알고 현혹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 어떤 사람이 살 의욕이 없습니다. 젊은 처자인데 살 의욕이 없습니다. 딱히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미장원에도 다니기 시작하고 얼굴도 시커멓게 햇빛을 받아가지고 외국인 이주노동자처럼 하고 다니던 자매가 그루무도 바르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살결물도 바르기 시작합니다. 북한말로 스킨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안경도 바꾸기 시작하고 옷도 바꾸기 시작하고 그렇습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힘이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사랑 아닙니다. 그런데 힘이 납니다. 생명이 없었던 사람이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주체성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모든 삶의 의미를 그 사람과의 사랑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생기 없이 죽어가던 사람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유사생명입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도 그렇게 자기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많이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는 내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말 한 줄 정도 안 써본 사람은 사람도 아니지요.
그러면 사람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그런 생명을 준다고 생각해 보면 원래 그 사랑이 어떤 어마어마한 힘과 생명을 줄지를 어느 정도 증명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애인을 무한대로 합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습니다. 승복 안 하십니까? 얼마나 놀라운 애인을 가졌기에 아멘을 안 하십니까? 무한대로 합해도 안 됩니다. 그 무한대 분의 일 같은 좁쌀만 한 사람을 만났는데도 그렇게 놀라운 생명이 부어진다면 원래 생명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는지 보십시오.
여기 집회에 나오기 전까지 한 해가 새로 시작됐지만 솔직히 여러분들 마음까지 새로워진 사람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달력만 넘어갔지 작년에 진 빚 올해도 계속되고, 작년에 바가지 긁던 마누라 올해도 계속 바라지 긁고 개띠니까 더 긁겠지요, 작년에 돈 못 벌던 남편 달력 넘어갔다고 막 벌어옵니까? 작년까지 그렇게 공부 못하던 애가 달력 바뀌었다고 1월1일부터 작심하고 팝니까? 뭘 팝니까? 작년에 좋아하던 게임 오늘도 계속 하는데. 우리는 항상 자신이 곤고하게 찾는 이유를 그런 식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가족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이렇게 곤고하게 사는 것이 이 인간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인간들도 곤고합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곤고한 이유가 그 엄마, 말하는 사람이 엄마라면 엄마, 말하는 사람이 아빠라면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백 번 양보해서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고 여러분들이 피해자라고 칩시다. 그래도 현실은 바뀌는 게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희 회장도 모든 것을 바꿀 때 마누라를 빼놓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바꾸겠습니까? 마누라가 임기제면 다음에 안 뽑으면 되는데 그런데 평생 데리고 살아야 됩니다. 자식은 도로 들어가라고 할 수 없고 죽을 때까지 결국은 그 관계를 못 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옳다고 해도 변한 게 뭐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인정해 주냐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정할 리 없고 진짜 인정해주실 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지 않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안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때 하나님 찾아서 뭐하겠습니까?
결국은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나은 사람 없습니다. 제가 한번 그 얘기 해 드렸습니다. 오래 전에. 강남에 부인들이 모였는데 한 여자가 자기 남편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설명하니까 점점 그 사람들이 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나는 우리 남편이 모든 걸 다 해 주는데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그러면서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니까 나도 사실은, 나도 사실은 그러면서 눈물바다가 되더랍니다. 우리가 바보가 아닌데 남한테 그렇게 자기 힘든 이야기를 하고 자기 인생에 결점이나 이런 것들을 다 노출하면서 다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가 봐도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어리석게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세월이 흐르면 여러분들이 정말로 행복해 할 환경이 되겠습니까? 백 번 양보해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하나님이 망치로 한방씩 가족들을 쳐서 진짜 놀라운 남편 그리고 놀라운 아이들로 변했다고 칩시다. 말도 안 되지만. 그러면 여러분 완벽하게 행복해질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깥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안에만 있는 거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도 조금 억지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죽을 것 같은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아무 상관이 없고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최고의 믿음이겠지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들이 적절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놀랍게 변화되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환경만 가지고 인간은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신이 변하지 않았는데 행복하겠느냐? 또 그럴 수 있다 쳐도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한번 행복하게 하셨어도 그 사람 때문에 계속 힘들어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말 안 듣는 자식 때문에 저놈의 새끼 때문에, 저 계집애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고 그러지만 걔네들은 학교 가서 우리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고 합니다. "저걸 내가 왜 났을까?" 그런데 걔네들은 "우리 엄마 왜 나를 낳았을까? 다음에 태어날 때는 다른 사람한테서 태어날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까? “아, 결국은 사랑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 사랑,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솔직하게 한번 얘기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솔직하게. 하나님의 성경을 놓고 만약에 생각을 한다면 결국은 이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이 문제가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놓고 본다면 여러분들을 거기에 두신 것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렇게 깨진 관계들을 고치고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불신자라면 아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문제가 있는 가정 속에 여러분들을 두시고 문제가 있는 지체들과 함께 살게 하시고 문제가 있는 사회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가족관계 같은 피할 수 없는 관계 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직장이면 때려치우거나 전업을 하거나 이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족은 이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게 사실이라면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망가진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라고 그 가족들에게는 다 안 주신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 여기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지만 가족들은 지금도 방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을 거기에 세우신 것 아닙니까? 그게 우리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소명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데서 다른 핑계를 대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 없는 삶, 사랑 없는 삶, 심지어는 형제를 미워하고 가족을 미워하는 삶을 정당화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는 일평생 배워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내 마음 속에 얼마나 어두움이 많은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B. 목숨 버리는 희생
결국 사도는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당장 가서 죽자” 그 얘기가 아닙니다. 여기의 목숨은 인간의 사랑의 마지막 대상입니다. 자, 좋으면 ‘네’라고 대답해 보십시오. 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금년에 돈을 많이 주신다면 좋겠습니까? 그 다음에 높은 지위를 갖는다면 좋겠습니까? 셋집을 전전하던 사람들이 한 32평쯤 그것도 압구정동에 아파트가 생긴다면 괜찮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단 그 모든 것을 주되 사흘 만에 여러분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아멘’할 사람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살아 있어야지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죽는데 그게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제가 우체국장 할 때 어느 날 상부에서 몇 달까지 보험을 얼마큼 모집하라고 족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우체국에 온 분들한테 이 생명보험이 얼마나 좋은 건지 막 설명을 하고 그런데 죽으셔야 나온다고 그랬습니다. 그 시골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명쾌하게, “나 죽은 다음에 돈이 뭐가 필요하느냐?”, “그래도 자녀들이라도...”, “그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시오.” 아주 현실적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는 기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을, 목숨이 달려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목숨이 사라져버리면 그러면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형제를 위해 죽으러 가자 그 이야기가 아니라, 목숨 이상은 인간이 더 내놓을 게 없습니다. 그러면 그 목숨을 버리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러니까 사실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돈에 대한 욕심, 뭐 뭐에 대한 모든 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목숨의 기초 위에서 그 모든 것들이 누려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바는 지금 당장 형제를 죽으러 가자 그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흐르지 못하게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많이 사랑한 다음에 "내가 널 어떻게 사랑했는데"라고 말하면 그 사랑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그 사랑이 자식을 향한 사랑일 수도 있고 혹은 자기 가족들을 향한 사랑일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언젠가는 실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은 그 사람이 한없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그를 사랑하고도 목숨을 버려 희생한 자기 자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갔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깊이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자식을 향한 실망입니다.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본성적으로 자기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기새끼가 죽어가서 만약에 엄마의 심장이 필요하다면 그걸 안 줄 엄마는 어미도 아닙니다. 자기 간을 떼어주면 자식이 살 수 있다고 그러는데 그 길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그러면 애비도 아닙니다. 기꺼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꽤 많이 받은 사람들도 자기새끼를 향한 사랑 중에 얼마큼이 자기 본성에서 오는 것인지, 자아에게서 물 길어낸 사랑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인지 구별 못합니다. 그 정도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사람들은 없지는 않겠지만 정말 소수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언제 깨닫느냐 하면 자식이 자꾸 실망을 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을 하더니 엄마 생각도 안 하고 이러면서 이제 젊은 사람들 말로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열을 받아가지고. 머리에서 너무 열이 나니까 이것을 여는 것입니다. 찐빵 이렇게 열듯이. 막 폭발할 것같이 김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저를 길렀는데 이렇게 몇 번하다가 기도를 해 보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야, 그 새끼가 네 새끼냐? 내 새끼지. 너에게 위탁한 것이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맡기듯이.” 그것을 깨달으면서 자기 속에, 자식을 향한 절절한 헌신 속에 그러한 자아가 너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다 그것을 이제 끊어낼 수 있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를 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게 한 인간이 성숙해 갈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게 몇 살쯤 되겠습니까? 빨라도 50대, 보통 따지면 50대 중반 후반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때까지 아직 사람이 안 된 것이지요. 그러니 그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끊임없이 배워가는 사랑인데, 사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꽃길을 걸으면서 배우는 게 아니라 대부분 정말 돼지우리 같은 그런 곳을 질척이며 걷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시밭길을 걸으며 걷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시련이나 환난 그리고 어떠한 많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그래서 환경이 너무 나빠서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모자라서 그런 시련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그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게 하고,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이 온 인류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고 그 사랑이 모든 사람을 휘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우주적이고 회귀적인 사랑 안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게 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왜 그럴까요? 그 사랑이 만약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면 왜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래, 네가 있으니까 내가 가난해 지는 것도 좋고 병드는 것도 좋고 일찍 죽은 것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그가 죽는 것은 무서울 것 아닙니까? 최소한. 그렇지요? 그가 죽은 것은 두려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정도로 사랑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두려움은 자아에 대한 사랑, 하나님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원인입니다.
결국 그런 사랑을 모두 버리고 나면 오늘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하는 이 고백을 무엇인가 끊임없이 희생하고 바치고, 바치고 바쳐야지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높은 경지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다고 하는 아주 평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빼놓고 갖고 싶은 것이 없고, 그리고 자기에 대한 사랑도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죽음이라고 해봐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겨우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두려울 것이 없고 오히려 기대가 되는 것이지요. 이 육체 때문에 끊임없이 얽매었던 사랑, 끊어졌던 사랑, 그리고 닫혔던 사랑, 끊임없이 막혔던 사랑, 이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지고 완벽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한 사랑이 되는데 그것이 그에게 간절한 바람이지 어찌 두려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러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심을 갖게 되고 이 이기심 때문에 가족 속에서나 지체들 속에서나 끊임없는 분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이기심의 짝은 결국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게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자기 안에 들러붙은 그 육욕과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내려놓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영원이 없기를 바라고 시간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의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더듬어 가보면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의 세계가 막히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그 많은 침체의 궁극적인 뿌리가 결국은 미움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습니다. 막힌 하나님과의 교제는 생명을 끊어놓고 그러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맛없고 지루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에 붙어있는 사람,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달콤함 샘물입니다.
오늘날 저는 여러분들의 깨어진 관계를 봅니다. 형제들 간에,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그리고 친척 간에, 자매간에 깨어진 관계들을 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참지를 않습니다. 본인들은 문제가 있어도 어떻게 부부간에 대화를 하며 좀 살아 보려고 하는데 부모들이 나서서 휘저으면서 그 자식하고 당장 이혼하라, 그 여자하고 당장 찢어져라 그리고 부모들이 더 분노를 하는 세상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들은 이제 그까짓 사람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많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이기적이고 비성경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부부건 자식이건 부모건 단칼에 끊어낼 수 있도록 교육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까닭일까요? 그렇게 결국은 가족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가족들을 받아들일까 버릴까 결정해야 하는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혹은 앞으로 어느 때인가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을 받아달라고 해야 되는 때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나에게는 절대 그렇게 개념 없는 상황은 도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우리가 누가 알겠습니까? 어차피 자신이 불완전하듯이 모든 인간들은 불완전하게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형제들도 때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데 하나님 모르는 가족들이,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맺힌 것을 풀지 않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한두 번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하나님이 그런 환경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어떻게 보면 밤하늘입니다. 그런 밤하늘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불꽃처럼 산화해서 찬란히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렇게 찬란히 빛나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그 문제 많은 삶의 현장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또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힘들어요." 힘듭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그 힘든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육십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힘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 때문에 불완전하고 깨졌고, 부분적으로 우리는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이 되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아직까지도 깨어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온전한 사랑을 하려고 하니까 힘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한번만 눈물로 자기를 꺾고 가족들이나 지체들을 뜨겁게 사랑해주면 그 다음에 와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생각을 했느냐고 여러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립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죽을 때까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여러분을 욕하며 다니는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왜?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찬양)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그러면 마지막으로 결론은 우리보고 희생하라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희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여유가 필요합니다.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보려고 악악거리면서 "이것도 주세요. 저것도 주세요." 기도할 때에는 그렇게 응답이 안 되던 기도가 "하나님, 제가 순종하려고 하거든요. 힘이 없어요." 하고 눈물을 흘리면 놀랍게 순종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제가 순종할 테니까 나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얼마까지 공급해 주실까요? 무한히. 또 그렇게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관계를 깨뜨린 사람이 어느 한 일방인 경우는 아주 극히 드뭅니다. 처음에 시작은 다른 사람이 했을지 모르지만 말의 폭력, 마음의 살인이 오가면서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가족이나 형제들이나 혹은 부부나 그래서 결국은 그냥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상처를 받게 했던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가 그 사람에게 가서 당장 용서를 빌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며, "하나님 그때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내게 힘이 없었습니다. 생명이 없었습니다. 이제 나에게 그 힘을 주십시오. 정말 순종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 이 세상에 살아가실 때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결국 그분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그렇게 깃들 곳 없이 일생을 사시고 자신의 몸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당신의 목숨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곧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보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끊임없는 분노와 원망, 미움이 솟구쳐 오르고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사람에게 항거할 수많은 언어의 폭탄들이 터집니다. 밤새도록 잠 안자고 사람 원망하면 장편 소설을 씁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지친 몸과 파리해진 영혼 이외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고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분이 가치 없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끝까지 끌어안으며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로 기도하셨는지를 하나님 앞에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사랑 자기를 깨뜨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허물을 많이 이야기하고 그것을 간식거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가족들이나 남편 혹은 아내를 끊임없이 헐뜯으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가시나무에 찔리면서 백합화는 더욱 찬란한 향기를 냅니다. 위급한 때에 울부짖는 새들의 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리로 들립니다. 꽃이 내는 그 향기 그윽한 향기는 결국은 해충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발산하는 자기보호제입니다. 보십시오. 모든 세상의 사물들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가족이, 내 형제가 이렇게 나에게 많은 고통을 준 가해자인데 내가 그걸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고 그리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무엇입니까? 그냥 당신입니다. 바로 그곳에 그 자리에서 당신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고 그 무한한 생명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숨은 그냥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사라져 가도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여 용서하고 희생하면서 우리를 통해 흘러가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심으로 막지 않고 세상 욕심으로 단절하지 않고 흘려보냈을 때 우리는 잊혀도 수많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그 상태가 여러분의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런 사랑을 누렸던 영혼의 봄날을 기억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이 큰 사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2018.01.2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3)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결국 인간의 모든 행복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그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 것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직 지금처럼 발달한 문명이 없었던 때에도 인간들은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늘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다복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인들 죄와 악이 없었겠으며 어느 시대인들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그러나 이 사람들의 정신이 물질에 치우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많은 것을 누려도 덜 행복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감격 때문에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뜻입니다. 처음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이렇게 살아갈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고 스스로 그 아름다운 사랑을 등지고 허허 벌판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충만해지는 대신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부른 사람들을 사랑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갈등과 미움이 생겨나게 되고 미움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면 그것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독한 말을 퍼붓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 생각이 없이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미움과 원망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충분히 부패시키고 난 후에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취가 바로 그런 독한 말과 그리고 상처,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언어의 폭력과 상처가 다른 사람들에 상처를 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이 이미 그런 상처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그런 모든 관계가 깨진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러지 않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혹은 올바른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에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어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부름 받은 교회에서조차도 사람들이 미워하고 갈등하고 심지어는 원수 맺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이런저런 이유가 많이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속에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하늘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관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보면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누구나 행복해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행복해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도전은 이세상에 있는 것을 많이 누리자는 그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질병에 들고 고통을 겪고 가족들간에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이런 많은 시련과 풍파를 겪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신음이 되었을 상황이 하나님 앞에 찬송으로 변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죽으신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었으니 또한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결국 죽기까지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된 그런 사랑입니다.
Ⅱ. 참으로 사랑하는 것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실제적인 삶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어떤 것은 아니고 어떤 것으로써 우리는 참 사랑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A 말과 혀로써가 아님
첫째는 그 사랑은 말과 혀로써 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은 예전에 주님을 믿었던 모든 신앙의 고백과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배교하고 주님을 떠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르쳐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허탄한 것들이라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들은 생명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원래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 배교의 기회가 오면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신앙이 남아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그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입술로 한 신앙의 고백을 여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말과 혀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대신 사랑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이 없다고 지적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판단하는 사람이 됩니다. 말로는 그리고 혀로써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삶으로써 그것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고갈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입술에 침을 바르면 할 수 있지만 그것대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렇게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매일매일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몹쓸 고통이나 그리고 기억하기도 싫은 힘든 고통이 아닙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에는 심지어 너무 통증이 심하면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욕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온몸에 땀을 흘리고 아이를 낳은 다음 눈을 떠서 아이가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출산의 수고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병원을 나오면서 ‘다시 애를 낳는가 보라.’ 하지만 2년도 안되어 또 낳고, 또 2년도 안되어서 또 낳습니다. 그런 착한 부부들이 우리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칭찬해 주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주는 고통의 망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힘이 없으면 못합니다. 천만인이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너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를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지적 질을 해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어서 일어설수 없는 사람에게 100m를 달려보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못합니다. 그래서 배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힘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말과 혀로써만 사랑을 합니다. 말과 혀로써만 사랑하는 사람은 유난히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비판적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상처를 줍니다.
제가 전도사 할 때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동의회를 하면 교인들이 모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지루할 정도로 길게 하고 어느 날 하루는 교인 중 한 사람이 부목사의 월급을 올려달라고 해서 결국은 마지막에 투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겠습니까? 목사님이 회의를 다 끝나고 오셔서 하는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 공동의회 때 교회 돈을 쓰는 것을 가지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목사님이 너무 열을 받으시니까 교인들이 손을 드니까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들은 손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말로써 혀로써 사랑하는 것은 그저 입술에 침을 바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것은 힘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그의 눈에는 그렇게 말과 혀로써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때로는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기도 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하고 그것이 업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신자의 삶이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람이 반듯해지고, 인간의 사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신 역할입니다. 이 사도 요한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할 힘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찢어서 밖으로 튀어나가 이단에 빠지고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말과 혀로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올 때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면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있든지 내 발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서 멀어지고 부자가 가지고 있던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이런 차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이 참 믿음이 아니라고 아주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교인들이 모이는 숫자나 혹은 예배의 순서나 혹은 설교의 화려함이나 심지어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도 교회의 수준을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어떻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 다양한 만남 속에서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고 용납할 수 없는 형제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그리고 그들을 품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그런 삶을 교회 속에서 살아갈 때 흩어집니다. 흩어져서 깨어지고 망가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봅니다. 사회 속에서 부서지고 깨져버린 관계들을 봅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정이 사회 속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 속에서 희생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서로 위로하고, 함께 사랑으로 하나 되로록 연합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에 따라서 이미 그들이 돌아가서 사는 가정 속에서의 삶의 수준, 사회 속에서의 삶의 수준, 그 모든 것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이 있고 교회에 오면 장로, 집사, 권사 등 호칭이 있습니다. 결국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하면 겉모습으로 볼 때에 결국은 우리들이 교회 밖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보여준 수준을 밑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의 모습이 그렇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형제를 우습게 여기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로 무례함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은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여 이제 창조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었고 그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솔선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과는 반대로 부부간에 한번 상처를 받았다고 이를 악물고 결코 화해하지 않고 이혼을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교회의 앞자리에 나와서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부흥찬송을 불러도 그의 마음은 싸늘한 아궁이입니다. 기도는 허공에 흩어질 것이고 말씀은 강단에서 쏟아지다가 그 사람 앞에서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자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께 깨닫게 된 그 진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삶으로 힘을 다해 구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깨달은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말씀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기도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누추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려고 애썼지만 그러나 자신의 삶이 정말 때묻은 빨래감처럼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깨끗하지 않은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정결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자신의 불결과 추함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자신이 행한 것 중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사랑 없음과 잘못을 거론하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양심에 찌르는 것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깊이입니다.
오늘 사도는 말과 혀로써 하는 사랑의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에 궁핍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고아와 과부의 문제까지 모든 수많은 사람들이 빈궁에 노출되어버리고 실제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사랑을 말한다고 치자 그런데 형제들이 궁핍해서 고통을 받는데 자신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와줄 마음이 생기는 것을 자기 스스로 닫아버린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겠느냐? 그리고 말과 혀로써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겠으며 과연 그렇게 어려운 형제들을 보고 양심은 도와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닫아버립니다. 왜입니까?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그 희생이 싫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들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하는 것은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은 이 사랑을 하면서 겪는 아픔과 고통까지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바쳐지는 헌신의 기회로 생각하며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길러보았으니까 알겠지만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희생할 때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아이의 과외비를 대기 위해서 마트에서 점원 노릇을 하고, 알바를 하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부모들의 삶이 즐겁겠습니까? 아마 부모를 위해서 하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어도 그 사랑으로 자녀가 유익을 얻었을 때 그것은 부모에게 최고의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몇 번이나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새롭게 말하자면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도 우울증으로 죽을 수 있지만 오늘도 자살한 연예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팬들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눈을 흘리며 조문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입증합니까? 그렇게 수많은 사랑을 받아도 인간의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유럽에는 국민외로움 담당장관이 있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에 한 부처가 있어서 온 국민의 외로움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도 그런데 에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되면 뭐합니까? 수출을 1년에 수천 조씩 하면 뭐합니까? 아니 그것도 다 먹고 살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인데 세계에서 자살률이 거의 최상위권에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그렇게 고독사 하는 사람들의 핸드폰을 열어보면 그 전날까지 수없이 카톡 하고 사람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꺼져있는 것입니다. 몇 통 들어오지만 답장을 안 합니다. 조용히 이승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서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지막에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내가 삶에서 죽음으로 미끄러져갈 때 마지막 손끝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애달픈 사람이 나에게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것입니다.
B. 행함과 진실함으로써
그러면서 사도는 사랑이 말과 혀로써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행함과 진실함으로써’라는 것이 ‘에르고 카이 알레데이아’라고 되어있는데 ‘에르고’는 희랍어로 일인데 여기서 ‘에너지’가 나왔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알레데이아’는 ‘진리’라고도 번역되고 ‘진정성’이라고도 번역됩니다. 그러면 “일과 진정성으로써 사랑하자. 일과 진심으로써 사랑하자.” 진정성이라는 것은 겉과 속이 모두 똑 같은 것을 말합니다.
겨울에도 나오지만 여름에 딸기를 삽니다. 팩에 들어있습니다. 너무 먹음직스럽습니다. 위를 먹고 나면 아래는 작은 것들이 익지도 않은 것들이 쭉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진정성이 없는 포장입니다. 솔직하게 큰 것 작은 것 섞어서 나란히 놓고 아무리 속으로 들어가도 똑같아야 합니다. 사과를 사도 똑같습니다. 위에 큼직하고 너무 먹음직스럽습니다. 한판을 다 먹고 다음 판에는 크기도 작고 흉터 있는 것들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말과 혀로써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들어가보면 그 속에 자신의 ‘일’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행동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성이 그 속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랑으로써가 아니라 수고하는 일과 그리고 진정성으로써 입증되는 사랑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되고 그 감동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반드시 ‘일’ 그리고’ 행함’ 일의 수고와 진정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래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조금 주고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들 모임에 갔더니 목사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이 중에는 부주 때문에 교회를 못 떠나는 교인이 있답니다. 온 가족이 가도 할머니는 계속 나온답니다. 왜? 20년 동안 한 부조가 얼마인데 그것을 탈 때를 교회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항상 자기가 뿌린 부조의 1/3가 들어온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고 자신은 덜 받았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우리의 근처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가 인간관계 속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랑과 그 사랑이 보이도록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감화되고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치르시는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깊이 감동을 받아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대를 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걸지 자기 개인을 위한 기대를 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랑은 무한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으며 자기가 그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쓸모 없는 인간이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이 흘러갈 뿐입니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뿐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어렵고 궁핍한 때에 나를 도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 들어와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곤고한 가운데서 살려내고 궁핍한 가운데서 윤택하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온 인류를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휘돌아서 온 인류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그 사랑을 서로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려 보내는 사회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받지 못해도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랑은 종종 사람들로부터 받은 많은 상처를 녹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많은 고통을 녹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어줍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는 연세 많으신 여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50이 훨씬 넘어서 소명을 받고 그 나이에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사명이 대학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도해서 불러다가 자기집에서 밥을 해 먹이고, 잘 데 없는 아이들을 재워주고, 그리고 가슴 아픈 일로 고통 하는 아이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한 100여명씩 200여명씩 모였습니다. 그것이 공안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공안에서 문제가 된 것은 지역에서 잘 이야기하면 되는데 중앙에서 내려와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도 못 막는답니다. 중앙에서 내려와서 딱 걸린 것입니다. 조사할 때는 이 사람들이 몇 년 동안 조사를 해서 모든 증거를 다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너 그랬지?’ 선교사인데도 무서워서 ‘안 그랬는데요.’ 서류와 사진을 내밀면서 ‘너 선교사가 왜 거짓말하느냐?’ 그래서 딱 포기하고 있는 대로 이야기했답니다. 그러니까 ‘너 이것도 죄고 이것도 죄다.’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너무 서러워서 이 할머니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었답니다. ‘그래 내가 다 그랬다. 다 그렇게 한 것 다 사실이다. 내일이라도 잡아넣으려면 잡아넣고 출국시키려면 출국시켜라 당하라면 당해야지 무슨 힘이 있느냐?’ 막 펑펑 울면서 이야기했답니다. ‘너네 지난해만 요 앞에 기숙사 한 동에서만 4명이 투신자살해서 죽었는데 이는 다 창창한 20대 너희 아들 딸들이다.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시골에서 부모들이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공부하라고 보냈는데 그 아이들이 20층에서, 15층에서, 30층에서 뛰어내려서 그 해 죽은 애들만 4명이다. 그것도 약 먹고 죽은 애들 말고 그냥 밤중에 투신자살해서 뭉개져서 죽은 애들이 4명이다. 당신도 알지 않느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내가 그 아이들을 불러다가 아무도 그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을 이야기 들어주고, 울어주고, 배고프다고 해서 밥해 먹이고, 갈 데 없고 무섭다고 해서 데리고 잤는데 그것이 그렇게 잘못한 것이냐?’ 고 펑펑 울면서 하소연을 했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감화를 준 것입니다. 그 공안이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정보원사람들입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쉬더니 자기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젊은이들 너무 불쌍하다고 하면서 수없이 젊은이들이 그 시골에서 힘들게 대학에 와서 자살해서 죽는 것입니다 왜? 삶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찾아집니까? 그 아이들이 당장 장차관이 못되고 사업가가 못돼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그런 시련과 고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도 그것을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네가 진짜 중국아이들을 사랑하고 좋을 일을 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한다.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자. 그런데 이것, 이것은 네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잘못했다.’ ‘그러면 이것만 가볍게 벌을 받자.’ ‘그러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까?’ ‘가지 말고 여기서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서 일해달라. 그대신 더 많이 잘못하지 말고 살살해라.’ 정말 너무 너무 비참한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뿐이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런 사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바로 그렇게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함께 사회를 이루며 말과 혀로서 그렇게 까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있고 그리고 진정성이 있는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선 자신들에게 보여주고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의 교제를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주고 거기서 충만한 사랑의 힘을 말씀과 교제를 통해 얻은 사람들이 그 사랑의 힘을 가지고 살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지 사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 때문에 실망하거나 자기가 사랑한 것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거나 혹은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동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서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실망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만큼 많은 실망을 겪은 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분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고 미천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멸시와 욕을 받으셨습니다. 진리를 말하셨지만 그 진리 때문에 미움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그분이야말로 정말 일과 진정성, 수고의 희생과 진정성이 있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했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 모자라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떤 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접은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고 자기를 배신할 제자까지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끝이 어디입니까?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한 완전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 때문에 외롭지 않은 거인이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지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배신하고 당신을 버릴 줄 알면서도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을 미리 용서하시고 그 후에 일어날 일까지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예수의 마음에 넘쳤기 때문에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살고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일생을 사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은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를 쓰시는 것처럼 일생을 사실 수 있었던 이유도 사람으로부터 받는 박수갈채나 환영 그리고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예수를 높이는 그런 칭찬의 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간절히 원하는 바는 당신이 알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당신이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이 친밀하고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모든 자기의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것, 온 인류가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분신처럼 모든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오래 참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꿈꾸시면서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어가신 역설적인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시고 그냥 조용히 목수의 집안에서 가구나 만들며 따뜻한 방에서 배불리 먹고 살다가 죽으셨다면 누구도 그분을 미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다 버려 마지막으로 남은 당신의 몸까지 십자가에서 찢어 떡으로 우리의 입에 먹여주시고 그 흘리신 보혈을 우리의 입으로 마시게 하사 우리의 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참 사랑 속에 들어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죽기까지 형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원망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그리스도 예수 자신에게 내려진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는 바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죽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령의 충만함을 사람들이 받았을 때 이렇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곧 사랑의 충만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전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은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의 있는 소유를 나누어주며 아무도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탁월한 사랑으로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과 종과 자유인의 무한한 차이점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좁힐 수 없는 사회적인 격차를 뛰어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름다운 한 가족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다음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열렬히 전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참 인간이 사는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증거했고 자기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사랑의 힘으로 그렇게 말과 혀로써 만의 사랑이 아니라 수고하는 행함과 희생이 있는 일과 진정성이 있는 진실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위대함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망가진 관계를 고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생명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를 깨뜨리고 그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피 묻은 칼을 마음에 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형제자매들을 방관합니다. 그래서 피한방울 살 한 점 섞이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긴 육신의 피와 살을 나눈 형제들도 의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정도야 왜 못하겠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힘이 모자랍니다. 그런 삶을 산출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위로처럼 그 사랑은 우리의 입술과 혀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그러한 사랑을 산출해낼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되었고 그래서 가진 것 나누어주고 싶었고, 아는 것이 없었으나 가르쳐주고 싶었고, 섬길 힘이 없었으나 봉사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럴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첫사랑의 때였습니다. 비록 직분이 없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 수 있는 직분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의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여러분들이 눈물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아무 보상도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이미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입니까? 아무도 몰래 조용히 주님을 섬겼을 때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형제를 섬겼을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형제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만큼 우리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나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물질의 도움, 섬김의 도움을 받은 사람보다도 섬기고 주고 베풀었고 희생했던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지만 그런 은혜의 힘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때로는 침체에 빠지고 때로는 회복의 길을 걸으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이런 삶을 너무 너무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힘이 없습니다. 사랑할 힘, 그 사랑이 우리를 살아있게 할 생명의 힘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고치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은 가정 속에서 힘겹게 예수를 믿으며 생활하시는 분들은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더 어렵기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은 의롭다고 믿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고서도 그 사랑한 것을 자랑할 수 없음은 우리의 힘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힘 때문에 한 것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많은 것을 베풀고 난 다음에 느끼는 바는 나는 그저 물을 흘려 보내는 관이었고 하나님이 그 관속에 물을 쏟아 나를 통해 흘러가게 하셨을 뿐이라는 겸손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 중에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없고 우리가 베푼 것 중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신 힘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본인들도 행복할 수 없고 여러분들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신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힘이 없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욕하고 미워하고 피 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더 나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자신의 허물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위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은혜의 힘 생명의 힘을 공급받아서 그래서 그것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관통하여 흘러갈 때 여러분들은 그 안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지구상 한 모퉁이에 살고 있지만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빛을 보았다고,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인생의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천국에서 만날 기쁨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일생 동안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삶을 한 순간에 바꾸어놓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여 이렇게 교회와 가정과 이웃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합니다. 다시 은혜를 받고 이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진실한 사랑과 유익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9-20)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한 인간으로 주체성을 갖게 만들어주고 또 의미를 따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들은 짐승과 다름 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불신자들에게 조차 유사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살아갈 힘을 얻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때문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고난과 시련이 많지만 자식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그 사랑은 완전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완전한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과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익과 상관없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한 번 마음속에 자기의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하나님은 수십억의 인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얻게 된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 사랑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배운 사람들은 모두 또 다른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웁니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합니다. 70억 명 모두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은 교회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류가 서로를 사랑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고백을 하는 사회를 그려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완성하시려는 인간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그 위대한 사랑을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항상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흐릿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가 우리를 위해 함께 살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가를 아주 뚜렷이 알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불꽃 놀이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작렬하며 아름다운 빛을 뿜으며 폭발하는 불꽃 놀이의 그 절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여기저기에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을 받음으로써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많은 사랑으로 희생하지만 사람들과 이 세상은 알아주지 않고 그 사랑에 대해 되갚지 않는다는 섭섭한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고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으나 그분은 그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은 사랑이 너무 큰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우리가 손해 봤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도록 십자가 사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도는 말과 혀로써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마음에 남았고 그것을 배반할 정도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생명이 모자랍니다. 아이를 낳을 때 마지막으로 힘을 콱 주어야 아이의 어깨가 빠지면서 나오는데 마지막으로 산모가 아이를 산출할 수 있는 모든 힘이 상실되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마음에 있고 그 계명은 양심을 찌르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사랑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능력이 모자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렇게 말과 혀로써만 하는 사랑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하자, 충분히 그 사랑을 산출하면서 살자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진실한 사랑의 유익
A. 진리에 속한 확신
이어서 사도는 그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무엇으로써입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니” 라고 말합니다. 우선 첫째로는 진실한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속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인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고” 는 전 존재적인 경험입니다. 즉,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정신, 우리의 몸, 우리의 인격 전체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 나는 진리에 속했구나!’, ‘우리는 진리의 빛 가운데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경험을 통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고한 삶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누구에게 기죽거나 혹은 위축되지 않고, 그러나 누구에게 거칠게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확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확실한 지식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매일매일 먹고 살기에 바쁘고 매일매일 일상 속에 우리 자신을 매몰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소년기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청소년기에 이런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훌륭한 스승과 부모와 좋은 친구들, 무엇보다도 법이 법대로 시행되는 훌륭한 국가를 만나서 그 속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한 답을 얻지 못해도 그렇게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세계는 무엇이고 우리 인간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모든 질문은 그 아래 또 다른 많은 질문을 낳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나니 저는 이 모든 질문이 풀렸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고민과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커다란 문제들의 답은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얼마나 확고하게 만들어주는지 아십니까? 확실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런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대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타협하거나 야합하거나 혹은 변질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생각하고 설정하는 올바른 삶의 좌표에 따라 생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확고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나보다 배우지 못하고 나보다 언변이 뛰어나지 않지만 아주 적은 지식인데도 확고하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거목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많은 지식은 포장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믿음을 통해서 이런 우리 인생의 많은 질문에 대한 초월적 대답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것을 확고한 지식으로 삼아 성경과 학문과 지식을 습득하면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체화해 나가고 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를 통해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놀라운 힘입니다. 자기를 살아가게 만들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살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단지 지식을 쌓음으로써 확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드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삶으로써 확고한 삶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유하게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마지막에 죽을 때도 어떤 사람은 관도 없이 수의에 싸여 묻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수천만 원짜리 관에 누워 어마어마한 꽃다발에 에워싸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며 묻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복은 그가 얼마나 확고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련도 있고 고난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과는 확신이 달라서 부딪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애하며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가치를 이해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진리가 진리를 훼손하고자 할 때 논쟁을 합니다. 때로는 투쟁을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고 순교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진리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행복을 헤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떠나서 얻는 행복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바로 진리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진리에 속한 사랑을 경험하는 데서 말씀으로 살아갈 힘이 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봐도 ‘나를 저 자리에 놓으면 내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놀랍게 그는 그 속에서 수많은 간증을 눈물로 고백하며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찾아오는 사람 없이 너무 외로워도 매일매일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진리를 알게 하시고 매일매일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그 상황을 이기며 살아갈 힘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생활에 아무 변화가 없이 그냥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 긴 세월을 지지궁상으로 살아도 그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넘칩니다. 마치 성막의 겉은 물돼지 가죽으로 칙칙했으나 그 속에는 청색, 홍색, 자색 실로 가득하고 아름다운 금 기명들이 있어서 그 불빛에 찬란하게 빛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부럽다고 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그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우리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혹은 사경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때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예배가 끝난 후 오래도록 어두운 예배당에 남아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깊은 회개와 깨달음을 가지고 이제 이 교회당을 나갑니다. 마음이 상한 지체들을 만나고 찢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들을 봅니다. 너덜너덜해진 인간관계들을 봅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져 진리 대신 어두움에 미혹되며 흑암 속에서 곤고한 사람들로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그렇게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어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율하듯이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사랑이고 사랑은 우리의 인생을 위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 모순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명하시는 것을 내게 주십시오.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옵소서.” 무슨 뜻이겠습니까? “당신이 나에게 누구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 후에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것을 명령하십시오. 그리하여야 제가 비로소 순종할 수 있겠나이다.” 이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도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나고 가족들의 관계가 찢어지고 형제들이 버려서 고독 속에 자살을 하고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 방황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면 우리는 행하여야 합니다. 맺힌 사람을 찾아가 손을 잡고 용서를 빌며 맺힌 것을 풀고 돌보지 않았던 가엾은 지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깨어진 가족들의 관계를 어떻게 사랑의 관계로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무엇인가 거기에 이바지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랑할 때 우리에게는 아주 확고한 삶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아! 내가 진리에 속해 있구나! 내가 비록 그 모든 진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완벽하게 살아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빛의 자녀이구나!” 자신이 행한 행실 때문에 감탄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은혜를 주시고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진지하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진리에 속해 있다. 고난을 받고 있으나 너는 진리에 속해 있고 나 하나님은 너의 편에 서 있다.” 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두려운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사랑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 사람에게는 빼앗아 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빼앗아 갈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빼앗길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좋은 것들은 아무리 빼앗아가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환란이 옵니까? 시련이 옵니까? 때로는 우리가 온 몸을 벗기고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까? 위험한 일이 생깁니까? 우리 목에 칼이 들어옵니까? 악한 마귀가 대적합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 때문에 무서워합니까?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확신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고 여전히 죄인이지만 나는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라는 확신,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유익입니다.
사경회 말씀을 준비하던 어느 날 조용히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목사로 태어나서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떠오르면 유쾌하지 않은 사람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일평생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생각날 때마다 축복하겠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도록.” 그들이 나에게 행한 대로 갚지 마시고 쓰러지고 넘어질 때 나도 붙드시고 악할 때도 나에게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도록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약하고 불완전하지만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니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마음을 굳세게 함
두 번째는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니” 여기서 ‘굳세게 한다’는 희랍어 단어는 ‘페이소멘’입니다. 이것은 원래 ‘설득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 무엇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설득해서’ 이런 뜻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얻는 유익이 바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주 앞에서 설득된다,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서 설득한다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에 대해서 설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얻게 되는 유익 중에 두 번째가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합니다.
1. 양심의 송사를 막음
첫째는 양심의 송사를 막습니다. 그 다음 절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목숨까지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양심의 작용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의식 속에 붙어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혹은 행동의 올바르지 않은 것을 판단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 양심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영어로 ‘conscience’라고 하는데 ‘con’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science’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옵니다. ‘지식’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과거에 지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인간의 의식에 붙어있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으면 기억 속에 붙어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 있으면, 이 양심은 조금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온 죄는 이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기능을 망가뜨립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 양심의 기능이 대체로 완벽하게 파괴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인류 사회는 아비규환의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소식을 보면서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 너무나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매듭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와서 용서를 빌고, 사과도 합니다. 그리고 기금도 모읍니다.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사회의 눈치도 보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양심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점이 너무 부럽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월남전 참사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알만 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것이고, 한국에서도 사실 많은 문제가 되었고, 법정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그런 잔인한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신문, 혹은 인터넷을 열면 여기저기 모임이 있는데 저희가 약 45년 전, 월남 참전 때에 행했던 그 많은 일들을 속죄하며, 용서를 비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는 한 개인의 양심의 기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너무나 많은 지도자들이 불법하게 돈을 모으고 정권과 결탁하고 치부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피해를 당하면서 여기에 익숙하게 수십 년을 살아 오니까 사람들에게 정의에 대한 관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의 기능이 가지고 있는 유익과 한계를 동시에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을 너무 신뢰해도 안 되고 너무 불신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들이 최초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을 찌름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종 싸이코패스 처럼 그런 양심의 작용이 완전히 파괴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처벌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 그냥 내버려둘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들 자신의 의지로 그 모든 죄를 짓는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사회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내버려둔 가족과 사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 책임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다음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양심의 송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신자의 불완전한 삶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일생을 살아왔는데 어느 한 순간 유혹을 받고 혹은 욕망을 느껴서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거나 그릇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게 유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실행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욕망으로 인한 범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그 중에 일부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신문지상에 나올 만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많은 불완전한 죄들이 있기 때문에 양심은 그것을 붙들고 우리에게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양심의 거친 송사를 듣습니다. 잘못한 것이 있는 피고가 논리정연하고 카랑카랑하고 아주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준엄한 논고를 들으면서 좌절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송사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양심의 잘못된 작용 때문에 마음이 송사를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직전에 집회를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그 중에 심각한 형제가 있다고, 귀신들린 것 같다고 하며 데리고 와서 저에게 상담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실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 형제를 앉혀놓고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스물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인데 검은 안경을 쓰고 범상치 않게 보였습니다. 내 눈을 절대로 마주치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느냐?” 했는데 쳐다 보지를 못합니다. “쳐다봐라. 괜찮다.”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말해봐라.” 했습니다. 얼마나 행동이 이상했으면 귀신 들린 것 같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자위행위를 한 것에 가책이 느껴져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형제가 그때까지 그 행위를 하며 살고 있었느냐,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한 그 행동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가책이 밀려오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고 자기는 너무 불결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회적인 관계들이 다 망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을 기뻐하실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사회적인 관계도 맺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정도의 중죄로 다스리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정신이 올바르지 못하니까 양심이 뒤틀려서 오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연약한 형제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실어 나르며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검사의 논고를 매일매일 읽어주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파리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길게 상담을 하며 그 형제를 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게 아니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마음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진리에 속한 자로 살아가도 우리는 종종 그런 양심의 송사를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면 회개로 나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우리로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들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용서를 빌게 하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집요하게 이간질 해서 “너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 같은 인간은 버리셨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없이 살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신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양심의 기능을 사실은 좋게 묘사한 것보다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런 양심의 기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할 숙제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해서 그런 양심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기 때문에 죽거나 커다란 모욕을 당하거나 재산 상에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신 확신을 갖습니다. 그리고 양심의 송사로부터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단점은 그것이 죄에 대한 완벽한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에 그런 양심의 송사가 있을 때마다 그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나를 정케 하소서.”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배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삭게오를 보십시오. 주님 앞에 인정을 받으니까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내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고, 내가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하도 많은 사람들의 등을 쳐 먹었기 때문에 누구 누구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나 그런 게 있다면, “있다면” 이라는 말은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온다면 4배나 배상하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태도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사랑은 양심의 송사에서 막아주는 방패의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믿음과 함께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그러한 죄를 지었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양심이 나에게 송사하지만 주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나를 깨끗이 씻어 주셨으니 이제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라는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의 송사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이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매일매일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며 이기심을 버리고 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보다 더 훌륭한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약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런 양심의 송사를 모두 이기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 때문입니다. 자기 의의 신발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찢어진 휘장 사이로 뿌리신 핏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발에 닿는 질척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밟으며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흘리신 보혈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려 주신 보혈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모두 확신합니다.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는 속죄의 보혈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담대함을 동심에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봐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송사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2. 용서를 통한 평화
두 번째는 용서를 통한 평화입니다. 의미를 알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면서 20절을 맺습니다.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어디에 걸리는 것입니까? “굳세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러 이러 하시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양심의 작용 때문에 때로는 요동치는 마음이 있고 그 송사의 화살이 우리의 마음에 박히면 모든 것을 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할 수 없도록 온 몸의 힘이 빠집니다. 참 사랑으로써 용서받았음에도 그런 확신은 흐려지고 양심의 송사는 또렷해집니다. 그때 오늘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끊어진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설득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그 모든 죄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주셔서 마음을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은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으나 용서받았다는 그 경험이 현재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왕성하게 일어나야만 이런 쓸데없는 양심의 송사를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못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작용합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목숨을 버리기까지 그들을 희생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그런 신앙생활이 그런 모든 양심의 송사하는 작용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양심과 더불어 싸우고 변론하는 대신 우리는 주님께 피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의지합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양심의 송사를 받게 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 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주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죄의 기억이 있으나 현재의 사랑으로 그 양심의 송사를 이깁니다. 이것은 자신이 고통을 준 인간에 대한 뻔뻔함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굳게 믿고 그러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공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송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전에 이런 죄를 지었고 사랑이 없음으로 형제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회개했고 주님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지금은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오, 주여.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신자로 하여금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한 시도 그분의 손을 놓지 않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하게 살고 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거룩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자신의 거룩함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덮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찬양)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갑니다
이것은 용서를 통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늘 형제를 사랑하며 자신의 삶이 그 사랑의 온전한 실현이 되도록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굳셈을 줍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모든 양심의 송사 앞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용서에 확신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에게는 확고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과 교리를 배우고 세상의 학문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그리고 양심의 송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거나 비겁하게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통해 나타내셨듯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이지 않는 그 사랑의 감격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 보여드리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가정에서 깨어지고 망가진 이 고통스러운 인간관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그런 관계가 다 깨어지고 결속력을 잃어버리고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분쟁하고 분열하고 진리에 속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며 그렇게 싸웁니다. 과연 이 현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누군가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에게 베푸신 그 참된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 때문에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고 가족들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 사랑을 부어 주셨고 어둠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지식의 빛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드려서, 부족하지만 우리의 온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을 모두 주신 것처럼 또한 우리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형제들에게 가족들에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은 자를 살리고 살아갈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놀라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인생을 설계하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