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1
목 차
나를 용서하소서(시 51:1) 1
나를 씻기소서(시 51:2-3) 5
주를 인정함(시 51:4) 9
죄 중에 깨닫게 된 것(시 51:5-6) 12
죄 중에 드린 기도(시 51:7-8) 16
주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시 51:9) 19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24
두 가지 염려(시 51:11) 27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시 51:12) 31
주의 도를 가르칠 수 있게 됨(시 51:13) 35
구원의 하나님(시 51:14) 40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51:15) 46
범죄를 은혜의 기회로 만드심(시 51:15) 5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시 51:16-17) 58
멸시치 아니하시는 마음(시 51:17) 62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시 51:18) 66
주께서 번제를 받으실 때에(시 51:19) 70
시편56편 강해 1
시편51편 강해 1
시편51편 강해 1
시편51편 강해 1
시편51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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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51편 강해 1
나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시 51:1)
본문해설
다윗의 시 중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는 시들을 함께 모두 묶어서 우리들이 ‘참회시’라고 부릅니다. 참회시의 특징은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빌고,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기능
인간이란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음에 양심이 있어서 죄 지은 것을 우리 마음에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자각의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심의 기능도 온전히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양심의 기능도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고, 주변 환경에 따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기능이 현저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사회가 깨끗할 때는 잘못된 일을 하면 양심이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하지만, 사회가 전체적으로 부패되어 있을 때는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양심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 붙어서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은 홀로 역사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역사합니다. 어떤 일을 했다는 의식이 살아 있을 때 그 의식 안에서 잘못했다는 인식이 살아있는 것이지 그게 없다면 기억 자체가 사라졌는데 양심의 가책이 남아 있겠습니까?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를 빌고 참회할 때 몇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하나님께로부터 비추이는 말씀의 참된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 지은 큰 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는 것을 양심의 작용을 통해 말씀의 빛으로 자각하게 됩니다.
그 후에 시인이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 늘 하던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은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인자를 좇아’, ‘자비를 좇아’라고 되어있습니다.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자를 좇아’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랑, 인자를 말합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나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성품을 근거로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죄과를 도말하소서˛
병행구로 반복이 되는데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기보다는 병행을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탄원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여기에서 ‘죄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은 마음과 영혼의 흔적이고, 벌을 받기에 적합한 오류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주십시오.”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는 범하게 된 어떤 잘못 자체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 때문에 생겨난 결과들을 죄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다 허비해버린 자식을 용서해주었습니다. 과음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해서 위가 망가지고, 불결한 생활로 인해서 몸에 질병들이 생겼다면, 그것까지도 낫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살해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영혼에 큰 상처를 입고 영혼이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살인죄를 저지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살인을 한 다윗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든지 죽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그러한 죄과를 지니게 되었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을 해서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제일 먼저 그렇게 죄를 지은 것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깊은 동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죄를 품고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아주 깊은 상처를 남기고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영혼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기능들을 파괴하고 깨뜨리는 잘못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나면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대부분 죄는 짓지만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크기가 무한하고 크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죄에 대한 갚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값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갚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살인했다 합시다. 그 대가로 이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해도 죽은 사람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보복적인 개념에서 똑같이 징벌을 당한 것뿐이지 그것이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죄의 결과는 사실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한 것에 대해 재물이나 다른 방법으로 충분하게 갚았다 할지라도 그 죄를 지음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큰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죄의 모든 결과를 도말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마음속에 생겨나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별 생각 없이 토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라는 성품입니다. ‘자비’라는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다 들어가는 것인데, 죄인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아파하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고 그 결과로 커다란 불행을 안고 비참하게 되었을 때 그가 악을 행한 것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먼저 생각하면 그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죄인의 악보다는 그가 현재 처하고 있는 비참한 상태를 주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자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신자가 죄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이 탁월할 때 그는 유리한 점을 갖습니다. 죄를 짓고 행한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성품에 호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그 죄과에서 깨끗함을 얻는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요 인생입니다.
나를 씻기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본문해설
다시 한 번 시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씻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눈 여겨 보면,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는 두 개의 동사가 반복됩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처럼 느껴지지만 앞에 있는 “나의 죄를 씻으소서”라고 할 때의 ‘나의 죄’는 이미 이루어진 죄를 말합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형벌이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자기를 씻어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는 “나의 죄를 제하소서”라는 기도는 지금 현재 이루어진 죄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도록 강한 힘을 가지고 역사하는 죄의 경향성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죄과를 씻으소서˛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회개했지만 자기가 행한 일은 엄청나게 큰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것들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이렇게 행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실 징벌이 어떤 것일지, 그는 깊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죄를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옷에 얼룩이 묻고 점들이 생기면 더러워져서 입을 수 없는 의복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어달라고 씻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세탁되어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가면, 더러운 것이 묻었던 흔적조차 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중적인 어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하나는 과거에 이미 행한 자신의 죄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의 고통과 지금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는 또 다른 죄의 힘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지만 과거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 자기 마음 안에서 이것들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결국 신자가 죄를 범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난날에 일어난 자신의 죄과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 속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와 집착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환경을 허용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절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절망의 정체는 욥기에 나와 있는 것같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일 경우에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회개로 가는 길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끊임없는 후회는 우리로 하여금 정당한 회개로 데려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절망으로 데려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죄를 지음으로 자기 안에 형성된 잘못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행할 수 있는 세 가지 삶입니다.
˚내 마음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과를 씻어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또 한 가지를 빕니다.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해주시옵소서” 지난날에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마음 아파하고 뉘우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향 때문에 또 다시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안에서 강하게 솟구치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소원을 깊이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앞에 항상 죄가 있나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빌고 그분 앞에 나아가면서도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한편으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그 죄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빌면서도 또 한편으로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며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모순된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맛보는 기쁨
바이올린을 생각해보십시오. 줄로 연주를 하는데 그 줄이 풀어져서 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하게 연주를 해도 그 바이올린이 불협화음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삶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정성을 들이고 바르게 하려고 매번 애를 쓴다 할지라도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조율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면 불협화음을 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영혼의 조율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조화를 깨뜨리고 내면의 세계를 망가트릴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자신을 일깨우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 마음이 깊이 상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게 된다든지,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아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바르게 한다든지,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격려를 받는다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흐트러졌던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줄들을 올바르게 조율하는 것입니다. 현들이 조율되어 있을 때 정성을 들인 연주가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질서들이 바르게 조율되어 있을 때 그 질서 안에서 바른 삶이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받아들여지고, 나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에워싸여 있고 죄를 좋아하는 성품들을 타고 났기 때문에 일단 그 죄의 즐거움과 맛을 알고 나면, 신자는 죄의 유혹과 강한 흡입력, 매력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식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행합니다. 불량식품이 안 좋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일단 거기에 맛을 들이고 나면 끌려서 먹게 됩니다. 그렇게 똑같은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매순간 결심하는 것도 훌륭한 것이지만 더 좋은 것은 영혼의 참된 즐거움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일단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영혼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서 끊임없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거의 없을 때 그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창고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인정함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하나님을 향한 범죄
죄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고 그것은 이웃을 향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 주께만 범죄 했다고 하는데 피해자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아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함으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다윗이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 자체가 어떤 죄가 가지고 있는 신적인 연관과 인간적인 연관을 함께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께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 “율법 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러한 밀접한 연관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 앞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이웃이 자기를 인하여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현상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잘못된 삶이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요 반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지만 모든 일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었다면 그렇게 행했을 리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죄가 생겨나도록 애쓰지 않아도 악한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일들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많은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도전한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회개
시인은 마음에 깊은 가책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롭고 올바르시며 나는 항상 잘못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불신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판단보다는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릇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지적인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지성에 대한 부인 없이 욕망을 따르게 되면 악을 행하고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하게 되는 큰 어려움 앞에서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신뢰하는 것에 대해 뉘우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회개의 과정에서 자기를 신뢰하는 감정을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자기부인이 가장 잘 되는 때는 회개하고 난 직후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믿었다가 쓰라린 패배를 당한 직후이기 때문에 자기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 여러분에게 사기를 치고 커다란 손해를 입힌 후에는 그 사람의 숨소리도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주를 인정함
그러면서 “주님이 판단하실 때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재판장이 죄수를 심판하는 것 같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편견을 가지고 자기를 대하신다거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단이 자기에게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가끔 보면 차량이 줄지어서 신호를 위반했는데 마지막 차 하나를 붙잡아서 딱지를 뗍니다. 그러면 운전사가 순순히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왜 나만 잡습니까? 저 앞에 차들이 다 어겼는데.” 그러면 경찰은 “내가 어떻게 그것을 다 잡습니까?” 하면서 딱지를 뗍니다. 승복이 잘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은 다릅니다. 똑같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즉시 징벌하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목숨을 거두어서 데려가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오랫동안 내버려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러한 섭리의 지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자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가 되면 그러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과 하나님만 독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계명 앞에서 자신이 잘못한 것을 생각하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든지 너그러이 대해주시든지 당장 목숨을 거두시든지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시든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잘못, 나의 죄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옳다고 그 일을 해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옳지 않은 것이면 그것에 대한 자신의 죄가 면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느끼고 회개하는 것이 주님께 돌아오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 작용입니다.
죄 중에 깨닫게 된 것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5-6)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을 발견함
인간이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힘든 것입니다. 다윗은 한 생애 동안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범죄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를 통해서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있는 죄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고, 이것이 자기의 선택에 의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끔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악한 본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초월하는 곳에 있는 본성입니다.
성경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죄를 짓게 것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었지만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의 뿌리는 자신의 의지나 의식을 초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생애를 살면서 이것을 처음으로 깊이 느꼈습니다.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부분을 해석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범죄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끔찍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범죄를 허락하하시고 인간 안에 깃들여 있는 뿌리 깊은 죄성을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의지하여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필연성이 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구슬을 굴리면 바닥으로 내려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자연적 필연성’이라고 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적 필연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도덕적 필연성’의 힘이 ‘자연적 필연성’보다 훨씬 강한 것입니다. 거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친이 죄악 중에 자기를 잉태하고 뼛속 깊이 사무쳐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필연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한 순간에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그것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의 죄, 은혜로부터 벗어남
왜 이러한 끔찍한 일이 이 시점에서 발생하고 과거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죄는 은혜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붙들려던 매임을 스스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본성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다윗이 경험한 사건입니다.
신자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지만, 죄를 지은 후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그 죄를 통해 이전에는 없었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 살아야 할 초라하고 비천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죄를 사랑하고 죄를 범하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고 죄를 버리고 회개할 때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죄와 은혜의 문제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심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경륜을 엿보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죄 중에 출생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자기의 출생의 근원이 되는 부모의 결혼, 결합을 죄악되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그러한 해석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죄를 발견하고 거기에서부터 추적해 간 것이 아니라,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기 안에 있는 죄들이 발현이 되면서 그 근원을 끊임없이 살핀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나 같은 인간에게 운명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운명적인데 어떻게 그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변함없이 살아올 수 있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도 마음을 지키고 범죄 하지 않으면서 주께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육지 위에 살다가 물속에 다이빙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물속에서도 물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즉시 호흡곤란을 느끼게 됩니다. 잠시 헤엄을 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속에서 깨닫는 것은 ‘공기 중에 사는 것이 얼마나 요긴하고 행복한 것인가?’ 입니다. 이것을 느끼면서 다시 물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그러면서 시인이 깨닫게 된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이 죄악 중에 있는 자신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사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많은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보려고 했지만 그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될 리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깨닫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안이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내면의 은밀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감추어져 있고,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게 없다면 반성하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반성하는 삶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놀라게 되는데, 자신도 자기에게 얼마나 속기 좋은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덮어둔 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비는 의례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그것에 대해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해지고 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직하고 무지해서 잘 모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서 진실해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당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끔찍한 죄가 없을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원수들의 공격과 모함, 배신, 이러한 것들은 일반섭리 속에서 자신의 삶이 불안정하게 흔드는 요소들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해도 큰 환란을 만나서 괴롭고 힘이 들면, 눈물을 흘리며 열렬히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훌륭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깊이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절실하게 그분을 부르게 되면 모종의 신앙의 간증들을 갖게 하십니다. 환경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사건 이후에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아파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죄를 짓자마자 나라가 쪼개지고 적군이 쳐들어오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도 필요 없습니다. 높은 명예나 지위도 필요 없고 그 때 필요한 복은 무엇입니까? 집을 주셔도 편하지 않고 땅을 주셔도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결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계시를 남겨주십니다. 여러분도 기도할 때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 중에 드린 기도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7-8)
˚나를 정결케 하소서˛
시인은 죄 가운데서 자기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탄원을 드립니다. ‘우슬초’라는 것은 무엇을 씻어내는 데 사용하던 풀이었다고 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죄를 지은 후에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 무엇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남아있음을 말합니다. 죄책감, 죄에 대한 자각이 마음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죄를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할 때는 이러한 불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다면 시인도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죄를 짓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더럽혀졌다는 것을 느끼고, 죄를 짓기 전에는 그러한 불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죄를 지어서 그 죄가 우리를 더럽히고 불결하게 하기 전에 모든 죄는 먼저 마음에 품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음에 품지 않고 그것을 범하게 된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먼저 마음에 품고 그것을 자기의 마음 안에서 소원하고 자기 안에서 자라게 하는 일이 먼저 있고 나서 그 후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에 이미 마음 안에서는 죄에 대한 친화적인 성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친화적인 성향이 생겨나고 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나 이러한 것들은 공정하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더럽다는 것도 미리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를 공정하게 보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가시면 그제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싫어하게 되면 옳고 좋은 것이 있어도 싫어하는 감정이 덮어 쓰여서 그 사람을 안 좋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자기의 글 속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비난할 때 그것이 진실인 줄 알자. 그것이 하나님의 목소리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시인이 자기가 불결하고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하고 자기가 더러워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죄에 대해서 깨닫고 불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후에도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과 불결하게 여기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시인은 죄를 범했고 그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습니다. 이것이 더럽고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두 가지가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거기에는 결단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씻어달라고, 내가 눈보다 더 희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기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러면서 간절히 비는 소원은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죄인에게 즐겁고 기쁜 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뼈를 꺾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몸살이나 몸에 이상이 오면 어디에서부터 통증이 느껴집니까? 관절부터 통증이 느껴집니다. 제일 약한 부분이 관절 같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바이러스가 그곳으로 확 몰리는 것입니다. 균들이 고루 퍼지지 않고 한 군데 몰려서 그것을 뜯어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통증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안 좋을 때는 바이러스가 거기에 통증을 일으켜서 깊은 고통을 주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는 그 속에서 양심의 가책과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 이런 것들이 함께 뒤엉키면서 큰 고통을 줍니다. 결국 그것들이 통증과 견디기 힘든 아픔을 주는 것을 ‘주께서 꺾으신 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명예나 재물이나 기쁨이나 영광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나에게 달라고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 한 것은 큰 잘못일지 모르겠지만 이 범죄를 통해서 시인은 보다 깊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처절하게 용서를 빌며 매달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자기의 인생과 모든 인간의 처지에 대한 복음적 인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더 없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9)
죄를 지었을 때의 양심의 작용
시인이 죄를 짓고 나서 피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엄중함을 의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나타납니다.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의식 속에 붙어있는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하나는 자기가 지은 죄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비추어봄으로써 작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이러저러한 행동을 했는데 법을 보니 그 법이 자신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 처벌이 아직 시행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겁이 날 것입니다. 양심이 그러한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과 같이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양심의 정죄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이미 법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선악에 대해 무엇을 충분히 배우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부모의 눈치를 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첫 번째 기능은 정죄의 기능입니다.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지 않고 기본적인 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죄의 기능이 있기 위해서는 송사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법정에서 “너는 징역 일 년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려면 누군가가 소송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누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다.”라는 고발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고발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자신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마음 안에서 시끄러운 일들이 번잡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고발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변호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고발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변명을 하는 일들이 자기 안에서 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신이 혼란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단정함이 없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결국 죄는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까지 무질서를 가져옵니다. 안정되고 안온한 삶이 불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인에게는 평안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끊임없는 혼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별 생각 없이 넘어가지만, 우리 자신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한 주먹밖에 안 되는 장소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영혼의 작용이라는 것이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천사들도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복잡합니다. 불완전하면서도 복잡하기는 하나님을 거의 빼 닮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시인도 그러한 것을 경험을 한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향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악인에게 당신의 심판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일평생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죄로 말미암아 시인은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자체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주의 종이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뚜렷한 징표가 성령이었는데 그 성신을 거두실 것 같은 크고 두려운 위협을 느낄 정도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동일하게 자신이 범죄 할 때 하나님의 엄위를 누구보다 현저하고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켜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한 죄인이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를 향하여 누그러뜨려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사와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뜨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참회하여 자신의 신념이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것이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켜 주십시오. 주님이 나의 죄를 바라보시고 그 죄에 합당하도록 나를 징벌하시려는 의도를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죄는 많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는 항상 고통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면 수많은 고통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에 대해 적절한 처방을 내리려고 많은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은 한 가지 뿌리,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환경으로 막으실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거두셔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방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막으실 수도 있지만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를 깊이 느끼고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리적인 방법으로 죄를 막으시고 죄의 문제를 다루실 때 인간은 거기서 느끼는 고통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빛 아래서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그 문제를 하나둘씩 해결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 정신, 심령의 문제로부터 이러한 죄가 나왔고,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특별히 복음에 의한 치유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유일한 희망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라고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소극적으로는 지은 죄에 대해 징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만,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될 때 하나님과의 사랑은 복구되고 죄를 애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회개하고 있는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지입니다.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이어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도말한다’는 것은 없애버리는 것, 쓸어버리는 것, 또는 닦아버리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룩 같은 것을 씻어 없애는 것, 있는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도말’입니다. “그러한 나의 모든 죄악을 도말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죄악을 도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극적인 면에서 본다면 시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양심의 가책,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 두려운 송사와 같은 공의의 표지들을 깨끗이 치워달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통절히 회개하면서도 이미 시인 안에 들어온 죄는 도덕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그 사람을 계속 죄로 이끌었습니다. 육체가 한번 달콤한 정욕에 의해 얼마나 즐거워질 수 있는지를 깨닫고 나면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관계를 일회성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지속했습니다. 이런 즐거움을 깨닫고 나면 필연성에 이끌려서 그것이 자신의 성품 속에 인이 박히게 됩니다. 그러면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몸은 다시 그 죄 가운데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죄인의 입장에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술에 인이 박힌 사람은 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에 끌리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처절하게 끊어버리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도 그것에 이끌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죄의 강력한 힘입니다. 죄는 결국 인간의 마음 안에서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죄가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죄악이라는 것은 범죄의 기억이나 죄를 지었다는 죄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사람 안에서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입니다. 시인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죄에 강력하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정결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고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착되면 진실한 회개, 하나님과의 평화, 친밀한 기도생활,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신령한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기를 때도 늘 유의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 그릇된 버릇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것들을 넓고 깊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그러한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생명의 기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주님 안에 사는 행복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얼굴 앞에서 쫓겨남으로 그분의 빛 아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자기 밖에 있는 죄악을 도말해달라는 기도에서 자기 안으로 향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한 마음’은 문자 그대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시인은 죄를 범하고 자신의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워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불결하고 더러운 마음이 될 때 그 속에서는 수많은 혼란이 생겨났습니다. 양심은 꾸짖고 성령은 떠나실 것 같고 구원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욕과 말할 수 없는 혼란이 가득 차는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밝고 맑은 마음으로 사는 기쁨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범죄하고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당신에게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범죄는 시인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서 이 사람을 범죄 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내 힘으로 기도하고, 내 힘으로 성경을 읽고, 내 힘으로 선을 행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결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난 후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신앙을 버릴 때는 죄가 우리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죄를 발견하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는 오히려 죄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섭리 속에서 죄들을 사용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인이 비는 또 다른 기도는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정직한 영’이라고 하는 것은 든든히 서있는 영, 견고하게 서있는 영입니다. 비유를 하면, 건축물이 곧게 서서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서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몸은 뼈가 지탱하고 있고, 거기에 살들이 붙고 모든 기관에 피가 흘러 몸을 구성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온 몸에 뼈가 없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저앉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굳건히 서서 그것이 뼈와 같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탱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감각의 온전한 작용이 이루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강하고 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주저앉게 되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이 허물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저앉자, 그의 모든 삶에는 혼란과 어두움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범죄함으로써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이 온전하고 정결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 자신의 영이 강건한 가운데 정신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붙들고 지켜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범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소중함, 영혼을 강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작은 죄악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셔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철수하시는지를 깨닫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과 죄로 인해 영혼과 마음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깊이 돌이켜 주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께로부터 오고, 우리는 그 분의 은덕을 입으며 사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범죄 가운데서도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염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본문해설
이것은 범죄 중에 시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기도에 드러납니다.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소서˛
먼저 시인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라고 간구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님의 얼굴 앞에서’라고 나옵니다. 신자의 삶에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의 면전에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주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면서 살았던 영적인 생활이 죄와 함께 급격히 단절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가 잘 되고,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오면,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것인지 잃어버리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질 수 없고, 기도가 기도답게 올려질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모든 것들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범죄 하기 전까지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에 있어서 아마 구약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함께 이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은혜를 주권적으로 거두어 가심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죄를 지으면 죄가 들어와서 은혜를 허물어뜨리고 은혜가 죄에 의해 소멸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묘사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죄가 은혜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은혜를 받고 깊이 변화되면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선한 인격과 진실하고 올바른 삶은 죄를 이기는 은혜의 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죄 자체 안에 은혜를 허물고 파괴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신자가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행위로 불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신자 안에 있었던 은혜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단번에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불순종과 범죄의 정도, 크기에 따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권적으로 거두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때만 영적 생활의 생명이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하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활기와 생명력을 거두셔서 당신 자신에게 돌리심으로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처분의 주권이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것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성경에 객관적으로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경중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객관적으로도 제시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주관적으로 각각 다르게 보십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삶을 사는데도 죄가 우세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충성을 안 하는데도 죄를 덜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무게와 중량을 사람으로서는 판단이 안 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히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죄에 대한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불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이 올바르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 많이 올바르게 산 것이 아닐 수 있고, 불리한 점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은 조금 의롭게 사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많이 노력하는 사람으로 비췰 수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기말고사가 끝나면 항상 칭찬을 하고 상을 주셨습니다. 1등한 사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등수가 많이 점프한 사람, 그러니까 2등한 아이가 1등한 것보다는 35등한 아이가 23등 한 것이 노력을 훨씬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은혜에서 물러날 때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거두어들이신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살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교통, 혜택들을 누렸는데 어느 한 순간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캄캄한 어두움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드리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범죄 후에 경험했던 자신의 영적 형편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깊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여 그분을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 있을 때 그분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극복하고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어두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모든 불행은 그 행복보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써 얻는 행복이 클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
두 번째로 시인은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적인 친밀함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신,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늘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강력한 성령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적인 능력도 현저하게 증대시켜 주십니다.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재판을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는데, 이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탁월한 증진을 주셔서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적인 은혜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탁월한 교제 속에서 주님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여러분은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누리고, 그 안에서 신자의 기쁨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들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주님의 큰 주권과 놀라운 통치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종종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언약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서 우리로 언약관계 속에서 충실하게 살도록 이끄시고 돌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본문해설
시인이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경험하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면전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다윗이 경험한 구원의 즐거움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원의 즐거움의 차이
먼저,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구원의 행복과 즐거움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구원의 즐거움은 구약시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영적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 충만하게 오셔서 임마누엘을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은혜의 누림에 대해 비교하시면서 “여자가 난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갈 천국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리게 될 진정한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에 속합니다. 물론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지만 성령이 임하셔서 그와 함께 하시는 정도가 선지자들마다 조금씩 달랐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무시할 수 없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었고, ‘피터 판 마스틴트’라는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에 의하면 세례 요한 같은 경우는 어머니의 태에서 중생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 정도의 성령의 특별한 임하심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사역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가 빈들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게 임하였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구약시대에 선지자에게 임하시는 독특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도 구약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고,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탁월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누리는 것을 능가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약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구원에 대한 영적인 경험의 질이 훨씬 탁월하고 높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하나님이 죄에서 자기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는 사상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기는 믿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희미한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경우에는 성령의 역할 자체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 오셔서 가장 중요하게 하시는 당신의 일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신자였다가 신자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령의 첫 경험은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위한 구원의 사건을 받아들일 때 명료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자가 성령의 임재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느끼는 경험의 질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섭리적인 사건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 섭리에는 비상섭리도 들어가고 일반섭리도 들어갑니다. 비상섭리라는 것은 기적 아닙니까? 기적이든 섭리든 이러한 것들을 통해, 그리고 육적으로 구원해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자신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셔서 영원한 죄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을 믿는 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내주하시는 성령이 인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증거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이 와도 성령의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이 이중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육적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적으로 성령의 임재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인데 다윗의 경우에는 둘 다 풍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끊임없는 감화를 받아, 밤중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인치는 경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섭리적인 면에서는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자기와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구원의 즐거움을 이중적으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성령님은 믿는 자 안에 오시고 그 안에 언제나 내주하심으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오셔서 어떤 사람에게 직임을 주시고 그 일을 끝내시면 떠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오셔서 신자 안에 특별히 머무시는 중에서도 하나님을 근심시켜드리고 슬프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일정 부분 철수시키셨습니다. 그를 버리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두시고, 그렇지 않을 때는 현저하게 은혜의 역사들을 철수시키십니다. 다윗은 후자를 경험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했을 때 누가 생각났겠습니까? 전임자 사울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셨을 때 사울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비참한 말로를 똑바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임재가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이고 하나님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일단 그것을 거두시고 나면 그것을 받지 못했던 사람보다 더 비참하게 되는 것을 다윗은 아주 선명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깊은 현실적인 두려움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현실적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 같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으니 이는 구약의 성도들이 느끼던 구원 경험의 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올바른 경험의 질과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랑의 감정과 표현이 후퇴해 있을 때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면전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것으로 돌아가기까지 견디지 못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올바르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진리 안에서의 경험이 있으면,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더 많이 만난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당신을 추구하고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12절에서 우리들이 경험한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해달라는 간절한 탄원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신자가 범죄 하거나 마음으로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은혜를 거두십니다. 거두시고 나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즐거움이 현저히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용서를 통해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그 사랑의 경험의 핵심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깊은 고통 속에서 자기를 용서하시는 은총을 경험하고 시편 130편에서 노래합니다. 용서에 대한 깊은 경험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더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도를 가르칠 수 있게 됨
“그러하면 내가 주의 도를 범죄자에게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21:13)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계시의 빛을 받았음에도 시인이 범죄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범죄한 가운데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어주신 성신이 떠나갈 것 같은 위협과 두려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어두움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알고, 빛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을 때는 자신의 힘으로 살고 기동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은혜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은 자신이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이어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공기 중에 늘 있는 사람이 공기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듯이, 은혜 안에 늘 있는 사람들은 그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은혜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모릅니다.
시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살 때도 고난과 시련은 있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올 때마다 애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 그것은 어두움이 아니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오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가운데 그의 영혼의 끊임없는 쇄신을 경험했습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연단을 받으며 한 나라를 주님의 뜻을 받들어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경험,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과의 아름다운 교제와 위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긍휼, 이런 것들을 아주 풍부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 밖에서 시작된 악을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기는 경험이었지, 자기 안에서 시작된 악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간음의 사건은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죄를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 없이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때 더욱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이 이러한 악에 빠져 영혼이 깊은 침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자력으로는 그 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함
구약에서 복음을 가장 풍부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모세를 능가합니다. 다른 선지자들이 누렸던 복음의 의미는 파편적이었지만 다윗이 누렸던 복음은 훨씬 총체적이었습니다.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가졌던 모세를 능가하고, 또 한쪽으로는 공동체 안에 백성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발견하였던 호세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쯤 되었을 때, 지금부터 14년 전쯤입니다. 우연히 다른 교회 집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인도한 다음에 기도를 하고 성경을 폈는데 시편 23편을 읽을 차례였습니다. 23편을 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막 쏟아졌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 한 절에 세 시간씩 열여덟 시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이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가 주전 10세기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천 년 전에 이미 복음의 상당 부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종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천년 후에 이미 계시된 빛 아래 사는 내가 그 사람보다 복음을 더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복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큰 경험들을 타락의 경험 속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구약시대였고 율법에 익숙해 있던 시대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입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 좁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흠 없는 계시입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인 언약의 당사자로서 의무에 묶는 조항들입니다. 그런데 이 넓은 의미의 율법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강력한 쇄신의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을 세세하게 나누는 신학적인 안목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효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글들은 대부분 다윗 이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주로 접하였던 것은 모세오경과 역사책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그 안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고 고치시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근간을 이루었던 좁은 의미의 율법들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치료할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시인이 이러한 율법을 통해서 그렇게 복음의 의미에 깊이 접근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알 수 있는 비밀을 터득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죄의 힘과 위대한 능력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를 결박한 죄의 사슬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무엇으로도 죄의 속박과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해 스스로 결박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지은 죄에서는 그것이 자기를 결박하고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강제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데 받는 정도가 각각 다릅니다. 가볍게 받을 수도 있고 주님을 깊이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은혜를 받으면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하는 힘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묶여 버리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은혜가 주는 힘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신적인 강제력이고, 죄에 사로잡게 하는 것은 죄의 결박하는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느끼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시고 말씀을 보내셔서 자기를 그 결박에서 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용서의 경험은 이전에 다른 것들을 통해서 보았던 하나님의 성품의 빛과 비교될 수 없는 지식과 실제적인 경험의 세계를 다윗의 마음속에 도입하게 했습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의 앨라바바라는 곳에 갔는데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헬렌켈러가 살던 집이 백년가까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이었는데 돈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큰 저택이었고 소설 속에서 본 그림과 똑같았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앞도 못보고 귀도 먹은 그 소녀에게 교육을 어떻게 시키겠습니까? 헬렌켈러의 자서전을 보면 “설리번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수돗가로 갔습니다. 그 펌프를 선생님이 부어주셨습니다. 시원한 것이 내 손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 손바닥에 ‘water’라고 써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것입니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면 설명을 할 텐데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살 때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강물처럼 밀려온 것입니다. 궁창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를 경험함으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 알아갔습니다.
˚죄인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들에게 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의 도를 범죄자에게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아버지 앞에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죄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 그 죄를 미워하고 부르짖으며 깊은데서 돌아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택은 다윗이 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삶이 필요합니다. 수없이 미끄러졌던 날들의 경험 가운데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은혜가 우리 안에 지식으로 살아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4)
하나님의 구원
시인이 살아온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나라를 맡기시기 위한 주도면밀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가시적으로 이런 일들이 나타나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사울에게 끊임없이 도망치는 처지에서 매순간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능력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전쟁터에서 만큼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나라를 경영해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구원을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구원의 개념은 사실은 구출의 개념과 훨씬 가깝습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구원은 속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구속의 은혜로 건져주시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는 신약에서의 구원개념보다 약합니다. 구약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언약백성들을 곤란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시는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구출의 개념과 맞닿아있습니다. 구약에서 물리적이고 육적이고 환경적인 구출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반대로 신약에서는 우리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죄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심으로 그 의미를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신약시대에는 본질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각기 다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이런 개념에 익숙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을 건지소서˛
놀랍게도 외적으로는 다윗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시면서 불행을 선택하도록 하심으로 재앙을 내리신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범죄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폭풍 같은 시련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나라는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것이 평안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아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범죄 하자마자 시련과 끊임없는 환란들이 나라와 가정에 즉시 일어났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고통이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영적인 고통인지, 세상의 시련과 환란 때문에 오는 마음의 고통인지 혼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탄한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영혼이 깊은 고통을 받고, 무엇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가게 하셔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영혼을 이런 깊은 심연에서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중에서 일반섭리를 통해 오는 복보다 영혼에 임하시는 복을 통해서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환경적이고 섭리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보다 무엇으로 치료될 수 없는 영혼의 곤고함으로 인해 주님께 매달릴 때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주님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인은 물리적이고 하나님이 일반섭리적인 환경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인생에 핵심이 되고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시는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함
이어서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고백합니다. 구체적인 자신의 죄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와의 관계는 결국 우리아를 죽이는 데까지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죽도록 꾸몄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마음이 생기자, 그 둘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피를 흘렸습니다. 언약백성의 피를 제가 흘렸습니다. 더욱이 당신 앞에서 나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사람을 죽였습니다.”
죄는 항상 발전하는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우리 삶 전체를 죄의 지배 속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맑은 정신일 때는 죄를 짓게 되면 마지막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토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커다란 은총가운데 하나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진리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 중 하나가 자신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토설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관계에 변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죄와 잘못에 대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성찰이 없는 죄인이라는 포괄적인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례적인 인사요 의례적인 고백에 불과한 것입니다.
찬양할 수 있도록 간구함
세 번째로 시인은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의’가 아니라 ‘혀’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찬양의 사람이었고 노래의 사람이었습니다. 80여 편의 시를 쓴 시인이었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의 몸 전체가 하나님 앞에 울려 퍼지는 악기였는데 어느 순간 화연의 줄은 끊어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린아이처럼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몸의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늘 하나님을 노래하던 그의 혀가 천장에 붙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입술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다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을 것 같은 속박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유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마음이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삶과 정신의 활동이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치 꾸며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할 수 없도록 영혼이 속박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의 입술을 열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술을 열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열린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게끔 묶여있는 자신의 영혼을 풀어 달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입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혀와 입술의 관계가 마치 영혼과 자신의 육체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혀가 움직여서 노래하고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인데, 이것들이 모두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높이리이다˛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는 것은 다윗의 저작의 관점에서 보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과 관련해서입니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의’의 성경 신앙적인 개념이 율법과 관련된 법정적 개념입니다. ‘의’라는 것은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면 그것이 법정적인 판단에서 볼 때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 자신에게 이익이 없습니다. 의는 결국 주님이 가지신 의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내가 이렇게 범죄해서 율법으로부터 심하게 이탈되어 정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르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하신 법을 떠나실 리가 없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복음과 관련한 ‘의’가 시인에게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완전함으로 나를 구하시고 주의 의로 나를 살리셨습니다.”라는 고백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의로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구약에도 의의 전가의 개념들이 충분이 제시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자연스러운 계시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이다”의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이 당신 자신의 율법에서 어긋나지 않는 의로운 아름다움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죄는 우리 자신이 지었더라도 계속 곤고하면 하나님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너무 심한 것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야 해?’ 하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게 될 때는 “하나님은 옳으시고 나는 틀렸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주께서 판단하실 때 의롭다 하리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한 승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내가 그 의를 덧입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주님이 나를 건져주시면 주님이 나를 징벌 상태에 두셔도 주님은 의로우신 것이며, 나를 건져주셔서 용서해주셔도 의로우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전자는 하나님의 율법적인 의고, 후자는 하나님의 복음적인 의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예전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본문해설
14절의 기도가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소극적인 기도라고 할 것 같으면, 15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시인은 먼저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죄가 마음에 끼치는 영향
이것은 우리에게 죄와 관련된 성도의 영혼과 실제 삶에 대한 몇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죄가 우리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입니다. 시인은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일평생 그는 가인(歌人)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가인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노래와 시를 즐기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자, 하나님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었던 마음에 커다란 속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부른 노래는 여러 범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노래,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백성과 나라에 대한 노래, 성전에 대한 노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들을 주신 것에 대한 노래,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대한 노래, 자기 자신을 헤아리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탄원의 기도, 이렇게 7가지 정도의 범주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을 노래한 대상의 외연이 자연과 우주에까지 확장됩니다. 멀리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까지 확장되고, 깊이로는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율법에까지 확장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세계 안에 창조주이신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드러내신 아름다움이 창조세계에 묻어있습니다. 어디에나 그런 것들이 묻어있지만 창조세계에는 흐리게 묻어있고, 가운데로 들어올수록 아름다움의 농도가 짙어지게 되는데 그 정점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핵심으로 해서 자연의 세계로 펼쳐질 때 하나님이 세계 속에 드러내신 아름다움의 농도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 농도가 낮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이 심으신 아름다움이 한편으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안에 부패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주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은 원래 똑같습니다. 자연을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알라고 주신 것이고, 성경을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을 지으신 이유와 신자를 삼으신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신자를 삼으신 이유와 같고, 다르게 보면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교회를 지으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하는 철학을 주신 목적과 신학을 주신 목적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여 신자로 삼으시고 성화의 길을 가게 하시는 이유는 참으로 그를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하셨던 그 나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이 원래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지식을 갖게 하기 한 것입니다. 신학을 탐구하는 지식은 하나님이 철학을 주신 목적과 동일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두 가지를 통해 원래 하나님이 주신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똑바로 살아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보고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성경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홀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충분히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면 신학이 필요 없을 것이고, 인간이 모이는 사회가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교회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솔로몬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탁월한 지혜와 총명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놀라운 은혜를 시인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부터 저 끝에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세계까지 희미하게 묻어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까지도 찾아내어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가인입니까? 그런데 그런 가인의 삶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노래는 시인의 개인적인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영혼의 자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 영혼의 자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의 마음의 고통
두 번째는 본래의 하나님 앞에 찬양하던 시인의 찬양이 그쳤을 때 그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도 하나님과의 교통의 방식이었습니다. 시편에는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노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인용된 것도 있지만은 그렇게 이야기 하는 학자는 많이 못 봤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직접화법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따옴표를 쳐야할 것 같은 하나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시인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음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그의 시대에도 이후의 시대에도 다윗의 정체성은 선지자였습니다. 왕이면서도 동시에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시의 형태로 전했습니다. 오경을 해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전해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정확하게 모세의 사역을 승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선지자의 비조(鼻祖)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의 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찬송하던 그 입술이 닫혔습니다. 그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시인은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짝을 이루면서 자신의 입술을 열어 달라는 간절한 몸부림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며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는 세 번째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혼의 묶인 것을 풀어 자유케 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다른 곳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고 영혼의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인정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은 위대하고 높으시니까 나는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되겠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통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을 건져주시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은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할 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죄 가운데서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음을 깨달음
이 기도를 통해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범죄하여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 중에 있을 때는 자기가 춤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율법을 읽으면서 깨닫는다고 생각했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노래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지성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그렇게 자만하게 고백하지는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무의식 속에 그런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빠져서 야경이 깊기 전에 시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아홉 번 연단한 은보다 더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던 지성에 어두움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 범죄한 자신에게 다시 하늘을 열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타락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타락할 때는 이런 것을 배워야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범죄한 다윗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범죄한 기회를 통해 아름다운 것을 시인에게 가르쳐 주시고 일으키신 하나님은 찬송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이 일을 위해 다윗은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고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한 일에 아무것도 도와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것은 시인이었지만 시인의 범죄를 사용해서 오히려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을 심오한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범죄를 통해서 시인은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알 수 없었던 찬란한 은혜의 빛의 고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두움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빛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부모를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가정의 참된 행복과 가치를 아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섭리 속에 그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철저한 불행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셨는데, 왜 다윗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범죄와 타락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고 영혼의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범죄를 은혜의 기회로 만드심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범죄를 은혜의 기회로 만드심
다윗의 범죄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은 은혜의 세계를 아는데 이바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범죄는 단지 죄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은혜생활을 하다가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에는 어떻게 죄가 주님과 은혜의 세계를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된 것일까요? 이런 경험이 다윗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종종 나타납니다. 어떻게 다윗의 경우에 죄가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는 비결이 된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들을 끌어낼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알기 위해 죄를 지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해서 죄를 그렇게 짓게 될 때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범하여야 하겠느냐”라고 했던 사도의 반문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철하게 보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사도 바울의 경우, 그가 지은 죄가 은혜의 세계를 터득하는데 이바지했던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가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는 것과 또 하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1: 하나님의 주권
우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인간이 범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사용하셔서 당신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요긴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신 분일 수는 없지만 인간이 지은 죄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옳게 사용하시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인간과 마찬가지가 되고 끊임없는 대립 상태가 될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시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징벌하심으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죄를 커다란 주권 속에서 사용하셔서 당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할 때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이고, 다윗이 이런 죄를 지었을 때 동기 자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윗의 범죄를 통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영광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죄를 사용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전에 가보지 못한 깊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면서 잠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당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불이 강렬하게 탈 때 불길을 방해하는 물질을 집어넣으면 불은 더욱 강력한 빛을 내면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가 무한히 크시기 때문에 인간의 범죄가 그것을 가로막으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이것을 태우면서 불의 능력을 찬란한 방식으로 드러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죄를 관용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경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우리가 죄를 범하자. 우리의 범죄는 주님의 더 큰 은혜를 드러낼 것이다.”라는 것은 사도가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인간이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경고했던 바로 사안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런 마음으로 범죄 하였다면 그 죄는 모르고 지은 사람의 죄보다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율법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죄를 일부러 계획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용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 2: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
두 번째는 인간의 범죄를 은혜의 도구로 삼으시는 데서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혜에 기초하고 지혜의 발산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가지신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지혜를 배우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위로는 하늘, 옆으로는 땅과 바다, 그 사이에 서있는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성으로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의 응집체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을 배회해도 거기에서 주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발견하는 일이 쉽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혜에 기초합니다.
다윗은 어느 한 순간 불현듯이 죄의 습격을 받아서 악에 빠지게 되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는 다윗의 범죄가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책임질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는 인간의 연약함과 다윗의 악함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왕국이 위협을 받고 무너지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다윗이 죄에서 돌이킨 후에 보다 깊은 은혜의 세계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나 죄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해 선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권과 지혜와 선하심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관점 1: 회개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끔찍한 범죄가 어떻게 은혜의 심오한 세계를 아는 비결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마음속에서 버리는 회개가 있을 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죄는 그의 영혼과 영혼의 기능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를 범할 때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죄를 사랑하고 죄를 범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지성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과의 교통도 끊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도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동일하게 다윗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술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던 것입니다. 죄를 품고 사랑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와 멀어졌을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성품들은 더 깊게, 알지 못했던 성품은 새롭게 깨닫는 방식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곤고할 뿐이지만 죄를 버리고 회개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사랑,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의 연약함이 떠오르게 됩니다.
인간의 관점 2: 믿음
두 번째는 믿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 받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여러 번 시도해본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충족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하나님이 거두실 것 같고 구원의 기쁨을 모두 앗아가실 것 같은 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시인이 굳게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언약백성을 버리실 수 없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 자신은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굳센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신앙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언약이 성취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밝히 보여도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 사람은 언약의 그림자를 보면서 자신이 죄를 지을 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신앙을 굳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놀라운 변화는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 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는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절박하고 가장 하나님께 집중된 신앙을 가졌던 시기가 이 때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마친 임금들이 많이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이나 아사 왕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일생을 신앙으로 살았는데 마지막은 결국 육체로 마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에게 나라를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대신 너의 시대에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라는 말씀 한마디에 미래의 조국이 망하게 되었는데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아사도 일평생 주님과 동행하다가 마지막에 악을 행하고 병이 나게 되지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의원에게 구하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에 비하면 다윗은 훌륭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죄 가운데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에서 이 사람을 건져주셨습니다. 다윗의 편에서 보면 죄를 놀라운 은혜의 도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접근한 영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을 때 이것을 최종적인 수단으로 여겼더라면 그는 아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 제사는 허위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심오한 결단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영적인 방식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죄를 은혜의 기회로 활용하셨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죄를 은혜로 바꾸는 것은 죄인의 마음속에 있는 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언약백성은 영원한 언약백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더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범죄를 사용하셔서 은혜의 기회로 바꾸십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서 무릎을 꿇어 주님을 섬기게 하심으로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잘못이 있다면 다윗처럼 회개와 믿음의 영적인 방식으로 주님 앞에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와 선하심에 의해서 우리의 범죄가 은혜의 기회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시인이 고백한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능적인 제사가 죄의 문제가 모두 해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의 신들과 같이 뇌물과 같은 제사를 받으셔서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상정하고 있는 하나님은 아주 도덕적이고 고매한 가치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면 자신이 처해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제사를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짓고도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씩씩하게 살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상한 마음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된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제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새롭게 발견한 사실을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여기서 ‘상했다’라 말은 히브리어로 심하게 맞아서 살의 조직이 파괴된 것입니다. 쾅하고 부딪히고 나면 멍이 들고, 그 부분에 손만 대도 자지러질듯이 아프게 예민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이라는 것은 아주 예민하게 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 때는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느껴지게 만드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범죄를 하면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원래는 부드럽고 하나님과 그분의 위엄, 자비,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해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집니다. 상한 마음은 그러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과정입니다.
통회하는 마음
그 다음에 구절에 보면 ‘상한 심령’, 그 뒤에는 ‘통회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이 두 마음은 조금 다릅니다. 상한 마음은 실컷 두들겨 맞아서 예민해진 마음이라면, 통회하는 마음은 밟아서 으깨어진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생각들이 마음을 형성하기도 하고, 마음이 이러한 것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합니다. 마음이 슬픈 사람은 모든 것을 슬프게 인식합니다. 마음에 원한이 맺혀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들을 복수와 원한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람도 무엇인가에 의해 계속해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밖에 일어난 일들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의 마음은 밖의 일에 영향을 줍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교류하면서 마음에 의해서 삶이 형성되고, 삶에 의해서 마음이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순환관계입니다.
시인은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하여 이제껏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깊은 단절을 경험하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수없이 제사를 드리면서 관계의 회복을 구했지만 그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영적인 분이신가?’ 여호와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령한 특성들을 깨달아 갔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통해 경험했던 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상황과 모순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속에서 구원을 받고 도움을 받게 된 것이 제사 자체에 있는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범죄를 통해 마음은 굳어지고 영혼에 어려움이 오게 되자, 제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통해 그는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마음,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만약에 시인이 범죄하고 마음이 굳어지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범죄 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깊이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그것을 사용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르쳐준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죄들이 일어나서 큰 힘을 행사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죄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르고 있는 은혜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공교롭게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죄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셔서 통회하는 시인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은혜의 깊이를 경험하기 위해 죄를 짓자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통해 하나님은 죄의 깊이와 우리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어그러진 길로 갔던 사람들이 상한 심령이 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어서 주님을 기뻐하시는 길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은혜의 회복으로 나아오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멸시치 아니하시는 마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범죄한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지혜
시인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제사가 짐승을 죽여서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커다란 영적 발견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의문이 듭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이고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예전에 다윗이 드린 모든 제사가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려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전에 드려진 제사는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열납 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당신 앞에 드렸던 많은 제사를 받으셨고 중심에 깊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어도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 되었습니다. 한 예로 솔로몬을 보십시오. 일천 번의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아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아주 큰 상급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왜 하나님이 제물과 중심의 통회하는 마음이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이것은 받으시고 저것을 거절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을 다루시는 놀라운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범죄와 악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죄와 악이 실제 행위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줄때 비로소 죄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나타나기 전에 그 마음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에 있어서도 양심의 자유에 속한 것입니다. 문제는 행동으로 드러난 모든 것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와 좋은 열매의 근원이 뿌리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악이나 선을 행하게 될 때는 그러한 악과 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필연성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필연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죄와 악들은 형태를 바꾸고 시간을 달리해서 계속 나타나게 됩니다.
바뀌지 않는 인간의 본성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체중을 줄이고 운동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워낙 먹기를 좋아하면 어떤 식으로든 계속 먹습니다. 먹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것을 좋아하고 그 습성이 깊이 밴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기회가 오면 잠자기는 습성을 행합니다.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그 속에 있는 본성이 발휘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게 마련입니다. 근원을 고치지 않고는 죄와 악을 금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사람의 본성을 다루십니다. 고대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본성을 곧 숙명이라고 생각했고, 이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천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아무개는 인덕이 있다.”라고 합니다. 인덕이라는 것은 좋은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을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만나서 도움을 받게 되는 복을 말합니다. 인덕이 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지, 인심이 사납고 성질이 거칠어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인덕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본성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의 항로를 결정한다고 할 때, 어떤 본성은 그 사람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만 어떤 본성은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기 어려운 본성도 있습니다. 본성이라는 것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같은 행동을 결정하고 되풀이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 하나의 경향이 생겨난 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환경에 의해서도 생겨납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고통을 많이 겪고, 바르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보면서 살아오거나 부당한 대접을 받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굽은 성품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가정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만 그렇겠습니까? 인간의 삶 자체가 본성이 발휘되고 획득되고, 획득된 본성을 유지하고, 혹은 이미 있는 본성에 항거하며 몸부림치는 인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즐겁고 좋은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할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 가는 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많이 성화될수록 이 의무가 그 사람에게도 즐거운 것이 되고 기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향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본성을 바꾸시는 하나님
숙명과 같은 본성은 인간 자신에 의해서는 거의 바뀌지 않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능력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꾸어 놓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생과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필연적으로 자기밖에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영혼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갖도록 만들고, 자기사랑을 버리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성화의 삶은 이러한 것의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다윗은 한때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순전한 사람이었지만 미끄러져서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이 그에게 고통이 되었고, 씻을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며 밤을 지새웠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가 지은 일회적인 죄보다 그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성향, 이전부터 그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뜻을 따라 살려는 성향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중심 깊은 곳에서부터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이 본성은 그에게 계속 역사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지혜로운 방법이 회개라는 방법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름다운 정원에 잡초가 돋아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그릇 행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과 죄성이 존재합니다. 크고 작은 죄를 끊임없이 회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터툴리안 같은 사람은 회개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회개하게 하시는 방법은 중심의 깊은 통회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근원을 깨달은 후에 그러한 죄를 지은 자신을 정죄하고 미워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중심으로 통회하는 것입니다. 중심의 진실한 통회가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친절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중심에 깊은 통회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고치시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죄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기도가 단절되는 것을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중심의 깊은 통회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인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죄와 악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마음 중심으로 통회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 51:18)
본문해설
중심의 통회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갑자기 엉뚱해 보이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이 기도는 다윗에게 있어서 두 가지 주요한 관심사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시온’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찌온’(@/Yxi)이라고 하는데 원래 말의 뜻은 ‘요새, 메마른 땅’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별 뜻이 없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쌓고 있는 지역의 산지를 가리키는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종교의 중심지로서 교회를 상징합니다. 뒤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종교와 일치를 이루는 왕권이 행사되는 중심지를 가리킵니다. ‘시온’과 ‘예루살렘’, 이 둘은 결국은 다윗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인 성전과 나라, 이 두 가지를 제유법적으로 보여줍니다.
˚시온에 선을 베푸소서˛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와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였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왕인 동시에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시온과 예루살렘과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종교의 영역과 일치를 이루는 나라의 통치권자로서 예루살렘과 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게 될 때는 비상하리만치 자신의 유익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왕의 직무가 얼마나 굉장합니까? 왕 한사람이 올바르게 나라를 통치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슬하에 있는 수백만, 수천만의 백성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왕가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숨은 간곳이 없고, 살아남았다고 한들 치욕의 생애는 죽음과 방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라를 돌보지 않고 허탄한 일에 빠지면 비상하리만치 자신의 이기심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은 비록 왕이었고 선지자였지만 범죄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온도 간곳이 없고, 예루살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고 나니까 비로소 시온의 운명과 예루살렘의 미래가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어떤 신자가 자기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번영에 마음을 쏟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매일 매일 회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심성과 정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사랑으로 비상하게 이루어졌던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을 향해 통회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견지에서 질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죄가 시온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거나 악을 행하면 우리 혼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시온의 선을 베풀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지경에 빠지고 보니까 자신이 포함된 시온에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시온이 가지고 있는 의에 근거한 선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택을 구했던 것입니다. 은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가치 없는 죄인에게 덧입히시는 하나님의 호의로서의 선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다윗의 시대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특권과 영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로 깨끗이 씻어주사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주님의 특별한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베푸시는 특별한 위로와 넘치는 선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택이라고 여기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을 쌓아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 당시 한 나라의 강성함은 성의 높이와 크기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 큰 성 니느웨’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성을 단단히 쌓기만 하면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무기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의미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하늘에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목표물을 폭격할 수 있습니다. 성을 쌓고 튼튼한 집을 짓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현대 전술무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아프카니스탄의 경우, 바위산에 굴을 뚫고 60미터쯤 들어가서 거기에 탈레반이 우거하는 데를 정확하게 맞춥니다. 바위산을 뚫고 굴을 만들어서 숨어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탐지기로 찾아내서 구멍에 폭탄을 집어넣으면 시간을 두고 터지는데, 확 트인 공간에서는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지만 바위산에서 터지면 폭탄 파편이 날아가기 전에 압력으로 사람들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요새를 든든히 쌓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당시에는 성만 튼튼하고 높이 쌓으면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보면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입구에 입구가 달려있는 성곽들이 있고 성과 성을 잇는 성벽들이 있습니다. 20미터 이상 되는 성벽을 어떻게 점령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언약공동체의 나라를 강성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다윗은 정신을 차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을 걱정하는 참된 선지자와 왕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참된 행복은 시온을 위해서 마음을 졸이고 예루살렘을 위해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죽는 것 같으나 사는 것이요 괴롭고 쓰라린 것 같으나 괴로움과 쓰라림 속에 자신의 영혼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없는 기쁨과 특권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께서 번제를 받으실 때에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9)
본문해설
51편 시편의 결론 부분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면서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본문에서 주의 단에 제사를 드리는 주체가 복수로 등장을 하는데, 이것은 13절에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는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서 자신을 돌이켜 주시면, 하나님께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죄에서 건져주신 경험을 토대로 알게 된 신앙과 은혜의 세계를 가르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처럼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가르칠 것인데, 그러면 죄에 묶여 있던 죄인들이 자기를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정확히 사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눠지지 않는 세 가지 지식
다윗이 후기에 쓴 작품이라고 판단되는 시편들을 보면 아주 깊은 세계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헤치는 심오한 시편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계를 아는 지식, 사람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을 아는 지식에는 자기를 아는 지식과 사람 일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나눠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빛을 통해서 세계를 아는 정확한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세계와 하나님을 인식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결국 이 세 가지 지식은 나눠질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 일반에 대해 아는 것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감에 따라 자신도 그 안에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세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간 일반이 누구인지를 유추해 들어가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인간만을 깊이 탐구한다면 그것을 통해 도달하는 인간에 대한 지식에는 많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참된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은 인간이 누구인지에 관해 상당 부분 파헤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의 영역을 개척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파헤쳐서 인간에 대해 상당부분 알게 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인간에 대한 지식은 감추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례하게 되고, 자연세계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비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과 자연을 주신목적, 인간을 주신 목적과 신자로 만드신 목적, 세상을 주신 목적과 교회를 주신 목적, 교회를 주신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목적이 거의 같습니다. 결국 자연과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이 두 가지는 일치를 이루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죄가 들어온 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이 두 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연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보면서 거기에서 성경과 배치되는 수많은 증거를 찾아내고, 성경을 이해하면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를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신 목적과 교회를 주신 목적이 불일치하는데 이것을 올바로 읽어낼 수 있는 이성의 힘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공동체적 회복
이러한 사람들이 주께 돌아올 때 이것은 공동체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지식의 빛 아래 사는 사람들은 범죄한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의 비밀들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신 안의 심연과 같은 악의 뿌리를 발견하고 난 뒤, 매순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몸부림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다윗의 말년을 하나님 앞에 더욱 거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개인의 문제를 통해 공동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죄에 빠지고 나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며 미끄러져 하나님의 도에서 멀어진 공동체 백성들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끔직한 죄악을 발견하고 자신이 여기에서 돌이키면 인간을 고치고 치료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 있는 자들이 모두 주께 돌아와서 중심으로 통회하고 다시 하나님께 용납되는 공동체적인 헌신의 때를 바라보면서 시편 51편을 마무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성도의 범죄나 선한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성내전적으로 연합되어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칼빈 선생이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면서 공동체적인 봉헌, 성내전적인 봉헌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시편의 경험이 참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범죄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은혜의 심오한 세계를 보여주셔서 징계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죄 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려는 죄인들에게 이런 일들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너무나 커서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범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살인의 욕구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치료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그 사람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자의적인 힘으로 자기 안에 있는 패역한 충동을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 이 세상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처럼 여겨지는 숙명도 바꾸셔서 당신을 향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군가 그렇게 외로운 시절에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1960년대에 고재봉이라는 사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이었습니다. 당시에 도끼로 여섯 명 정도의 일가족을 모두 때려 죽였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까 죽여야 될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이사를 가고 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전도를 받고 깊이 회심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사형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했는지 거기에 있는 모든 교도관들이 감화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총살을 당합니다. 자기를 향해 총을 겨누고 “마지막 할 말이 없냐?”라고 했더니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이 세상을 더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가면서도 자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선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탁하기를 ”내가 활짝 웃는 그 순간에 총을 쏘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은 기쁨 속에서 주님께로 가게 됩니다.
인간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절망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입니다. 환경은 우리가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기와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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